[이슈&아이템]ONG 박상돈 사장의 옹골찬 인생

  • 입력 2003년 1월 16일 17시 1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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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단사 출신인 박상돈 사장은 80년대에 이미 앞뒤판이 다른 청바지를 만들어 입고 다녔다. “변화의 물결을 타지 못하면 의류업계에서는 살아남을 수 없다”며 직원들에게 늘 ‘새로운 시도’를 강조한다.사진제공 금강기획
재단사 출신인 박상돈 사장은 80년대에 이미 앞뒤판이 다른 청바지를 만들어 입고 다녔다. “변화의 물결을 타지 못하면 의류업계에서는 살아남을 수 없다”며 직원들에게 늘 ‘새로운 시도’를 강조한다.사진제공 금강기획
청바지는 박상돈 사장(46)의 꿈이었다. 1970년 첫 월급 5500원을 받아 그가 제일 먼저 한 일은 동대문시장에서 “빨아도 물이 나지 않는” 미제 청바지 한 벌을 사 입은 것이었다. 내친 김에 구두 한 켤레 사 신고 라면 한 그릇 비우고 나니 주머니에 남은 것은 달랑 500원. 쌀 한 가마니가 5000원 하던 시절이었다. 그래도 날아오를 것 같았다. 그의 나이 열세살, 평화시장 봉제공장의 ‘시다’였다.

2002년말 박상돈 사장이 경영하는 ㈜예신퍼슨스 등 4개 법인의 7개 의류브랜드들이 올린 매출 총액은 3000억원을 넘었다. 그 중 청바지 전문브랜드인 ‘ONG’(구 ‘옹골진’) 한 곳에서 2002년 한해 판매한 청바지만 38만여장이었다.

● 시장이 나의 학교

박상돈 사장은 대학, 대학원 나온 디자이너들과 “맨날 싸운다”고 했다.

“어째 현장에 나가서도 니 눈엔 그런 게 안 보여? 눈 한 짝 가지고 보냐?”

“3000만원짜리 방 한칸 얻는다고 하자. 복덕방이랑 방 나온 집이랑 몇 번씩이나 왔다갔다 하겄냐. 그런데 한해 10억원씩을 쓰면서 가만히 앉아서…”

“시장과 책은 다르다. 모르면 발로 뛰어야 한다”는 것이 박 사장의 단골 대사다. 의류업 30여년에 박 사장이 뼈에 새긴 철학은 ‘동물적인 감각이 없으면 이 바닥에서 살아남지 못한다’는 것. 현장이 너무나 빠르게 변하기 때문이다.

“디자이너들도 시장 조사라는 걸 하지만 대개 문서화된 데이터에 의존합니다. 사장님의 시장조사는 달라요. 거의 매주 일요일마다 서울 명동의 직매장에 나가 2∼3시간씩 계산대 앞에 서서 옷을 사 가는 손님들을 맞습니다. 뭘 많이 사가는지, 어떤 점을 좋아하는지를 직접 보면서 변화의 흐름을 잡아내시는 거죠.”(브랜드 ‘마루’ 장소영 디자인실장)

박 사장은 매일 길을 걷다가도 ‘이거다’ 싶은 것이나 ‘왜 저것을 놓쳤을까’ 하는 아이템을 발견하면 “찌릿하게 전류가 흐르는 것 같다”고 말한다.

2002년 여름 내내 박 사장은 대표 브랜드인 ‘마루’의 디자이너들에게 “변화”를 강조했다. 디자이너들은 이른바 ‘이지 캐주얼’ 업계 1,2위를 다투는 브랜드의 고정 컨셉트를 바꿀 이유가 없다고 주저했다. 그러나 박 사장은 “이미 3,4년간 소비자들이 베이직 캐주얼을 입었다. 이제 싫증을 낼 때다”라는 자신의 주장을 꺾지 않았다.

가을 시장에 ‘마루’ 디자이너들은 목선에 샤링이 잡히고 화려한 프린트에 구슬까지 달린 티셔츠 등을 내놓았다. 모험이었다. 그러나 박 사장의 고집은 시장을 제대로 간파한 것이었다. 2001년말 1200억원이었던 ‘마루’의 매출은 2002년말 1700억원으로 늘었고 동종업계 매출 1위의 자리를 굳혔다.

그에게 성공을 가져다준 최초의 아이템은 청바지였다. 80년대 후반 이른바 ‘시장 청바지’로 멋을 냈던 여성들이라면 서울의 이화여대 앞과 압구정동, 부산 광복동, 광주 충장로, 대구 동성로 등의 소매점에서 팔던 ‘유겐트’라는 상표의 스노진, 빈티지진을 기억할지 모른다.

“하루에 이대 앞 청바지 가게 한 곳에서 우리집 청바지 300∼400장을 거뜬히 팔았죠. 그 바지 디자인요? 텔레비전 보다가 외국 여가수가 입고 나온 걸 보고 스케치해둔 거였어요.”

85년 미싱사인 아내를 포함해 직원 6명의 공장을 차려 독립했다. 87년 동대문 통일상가에 그렇게도 소망하던 두칸짜리 ‘내 가게’를 열었다. 통일상가는 노동운동가 전태일이 분신한 곳. 그가 평화시장 내 태화피복에 취직한 70년은 전태일이 분신한 해이기도 하다.

박 사장은 노조에 가입한 일이 없다. 오히려 어린 ‘시다’ 시절에도 노조에 가입하자는 친구들에게 “기술은 언제 배울 것이냐”고 눈을 부릅뜨곤 했다.

“내 인생은 오로지 내가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 가진 사람은 “투자”에 돈을 써야

다림질, 단추구멍 만들기 등의 잡일부터 시작했던 박 사장은 입사 4년 만에 재단사가 됐다. 그는 월급 5500원 중 3000원을 주고 다른 공장 재단사의 집에 찾아가 새벽과외를 받았다. 동대문시장 내 신평화복장학원에도 다녔다. 박 사장이 존경하는 동시에 경쟁해온 ‘잠뱅이’의 김종석 사장도 이 학원에서 만났다. 박 사장보다 여섯살 연상의 미싱사였던 김 사장은 몇 년 후 독립해 박 사장을 공장장으로 스카우트했다.

“사람이 무슨 일을 이루려면 ‘저 사람처럼 되고 싶다’하는 자기 모델, 즉 경쟁자를 잘 정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에게는 단계마다 좋은 경쟁자들이 있었습니다.”

87년 첫 가게를 열 때 박 사장은 5년 안에 10억원을 벌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그러나 이 목표는 불과 1년8개월 만에 이뤄졌다. 돈을 벌어 박 사장 자신에게 한 투자는 ‘바깥 세상을 보는 것’이었다. 영어공부 한 번 해 본 적 없는 그는 아직 ‘가내수공업 사장’에 불과하던 88년 일본으로 첫 해외시장조사를 나갔다. 이후 출장지는 미국, 유럽으로 점차 넓혀져 갔다. 한번 다녀올 때마다 그에게는 “나도 저런 옷을 만들고야 말겠다”는 꿈을 갖게 하는 새로운 경쟁상대가 생겼다. ‘바나나 리퍼블릭’ ‘클럽 모나코’ ‘애버크롬비’….

프레타포르테가 어떤지, 뉴욕 컬렉션의 경향이 무엇인지 박 사장은 이론적으로 설명하지 못한다. 그러나 “뉴욕 맨해튼 거리에 풀어놓고 다음 시즌에 제일 잘 팔릴 아이템 30가지를 구해오라고 하면 디자이너, 마케팅 담당자 다 제치고 누구보다도 정확하게 짚어내는 사람”(박인호 P&L 인터내셔널 대표)이다. 박 사장은 자신은 물론 직원들의 해외출장비도 아까워 하지 않는다. “많이 보고 오라”고 직원들의 등을 떠민다.

박 사장의 최종학력은 고향인 충남 예산군 신안면 동신초등학교 5학년 중퇴. 그러나 세계 어디든 ‘사람들이 옷을 사고 파는 시장’이 그에게는 학교다.

박 사장은 2월 여덟 번째 브랜드인 ‘스멕스’를 런칭한다. 대형 할인점 두 개도 짓는다. 시장상황을 낙관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87년 구제금융 위기 때 이상으로 소비가 얼어붙었다”고 걱정한다. 그러나 어려울 때 투자를 하는 것이 ‘돈을 가진 사람의 몫’이라고 생각한다.

“솔직히 말해서 없는 사람이 없는 사람 돕지, 있다고 해서 더 돕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가진 사람들이 돈을 써야 할 곳이 따로 있습니다. 투자도 해야 하고 실패하더라도 실험도 해봐야 합니다. 브랜드 하나 새로 런칭하는 데 줄잡아 50억원이 듭니다. 저만 해도 지난해 만든 옷의 60% 가까이를 못 판 브랜드가 있습니다. 그래도 실험은 계속해야 합니다.”

박 사장은 패션 한 가지 사업만으로 삼성그룹만큼 돈을 벌어들이는 회사를 만드는 것이 꿈이다. 한국의 의류산업이 더 기술적인 발전을 이루지 못하고 중국 동남아 등에 생산공장 대다수를 넘기게 된 상황이 “동대문 출신으로서 부끄럽다”고도 했다.

새해 들어 박 사장은 직원들에게 첫 브랜드인 ‘옹골진’이 시작된 해가 1997년이라는 것을 자주 강조한다.

“외환위기 때 시작했어도 우리는 해냈다. 올 한 해 어렵겠지만 그래도 해 나갈 수 있다”고….

정은령기자 ryu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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