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자비]종교인 칼럼<1>오강남 종교학과 교수

  • 입력 2003년 1월 10일 19시 1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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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미년 새해 차 향기처럼 은은하게 가슴속에 스며드는 종교인들의 말씀을 ‘사랑과 자비’를 통해 매주 토요일 배달합니다. 머리는 맑게, 가슴은 따뜻하게 만들어줄 이들의 말씀은 각박한 세상을 사는 현대인들의 삶에 한 줄기 빛의 역할을 할 것입니다. 필진은 캐나다 리자이나대 종교학과 오강남 교수, 이해인 수녀, 현진 스님 등입니다.》

종교는 믿는 것이지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심지어는 ‘덮어놓고’ 믿어야지 생각하고 따지고 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얼른 보아 일리 있는 말 같기도 하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게 ‘덮어놓고’ 믿고 싶지만 우선 ‘덮어놓고’ 믿는 것이 뭔지라도 알아야 그렇게 할 수 있지 않겠는가.

함석헌 선생님은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고 했다. 소크라테스도 “검토되지 않은 삶은 살 가치가 없다”고 했다. 미국의 저명한 신학자 존 캅도 최근 ‘생각하는 그리스도인 되기’라는 제목의 책을 냈는데 스스로 생각하는 그리스도인이어야 살아날 수 있고 또 이렇게 독립적으로 사고하는 평신도가 많아야 그리스도교도 산다고 했다. 이경호 목사가 ‘생각하는 그리스도인이라야 산다’는 제목으로 번역했는데 책 내용에 맞게 잘 옮긴 제목이라 생각된다.

그리스도인들뿐만 아니라 어느 종교인이든 각성도 없고 검토도 없는 믿음을 ‘덮어놓고’ 받아들일 경우 그것은 헛된 믿음일 수도 있다. 또 많은 경우 우리의 짧은 삶을 낭비하게 하는 극히 위험한 믿음일 수도 있다.

보라. 우리 주위에 횡행하면서 사람들을 죽음과 패망으로 몰아넣은 저 많은 사교(邪敎) 집단들을. 비록 신흥 사교 집단은 아니라 하더라도 일부 잘못된 지도자에 의해 변질돼 신도들을 속박하고 질식시키고 있는 저 많은 기성 종교 집단들을. 이렇게 파리 끈끈이 같은데 가까이 가거나 수렁 같은데 잘못 발을 들여놓았다가 패가망신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최근세까지 어느 사회나 인구의 절대 다수가 문맹이었다. 그 시대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어쩔 수 없이 ‘덮어놓고’ 믿을 수밖에 없었다. 예를 들어 중세 시대 어려운 신학적 문제는 오로지 성직자들 사이에서 라틴어로만 논의되고 일반인들은 이들이 그려 준 그림을 보고 그대로 믿고 따르는 ‘그림책 신학’에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제 시대가 바뀌었다. 존 캅은 ‘일반 평신도들은 모두 신학자들’로서 스스로 생각하고 책임지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한다고 선언했다. 오늘날 같이 일반인들의 지식이나 의식 수준이 높은 시대에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만민 신학자직’을 주장해야 할 것이다.

신앙은 ‘이성을 넘어서는 것(supra ratio)’이지 ‘이성을 거스르는 것(contra ratio)’이 아니다. 사리를 분별하고 판단하는 일은 건전한 종교적 삶을 위해 필요한 전제 조건이다.무조건이니 덮어놓고니 하는 말은 사실 인간에게 천부적으로 주어진 독립적 사고력이나 분별력을 포기하는 일이다.

종교인이라고 생각 없이 덮어놓고 믿는 것이 아니라 종교인일수록 오히려 더욱 깊이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나서 자기 생각에 한계가 있음을 깨닫고 그 한계를 넘어서는 것이 참된 믿음이 지향해야할 경지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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