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혜곡 한옥…시민이 살렸습니다

  • 입력 2003년 1월 9일 16시 0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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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곡 최순우 선생 한옥의 본채 내부. 서재로 들어가는 문 위에 단원 김홍도의 글씨로 새긴 현판 ‘매죽수선재’가 걸려 있다./신석교기자
혜곡 최순우 선생 한옥의 본채 내부. 서재로 들어가는 문 위에 단원 김홍도의 글씨로 새긴 현판 ‘매죽수선재’가 걸려 있다./신석교기자
서울 성북동 부동산업자 윤씨가 그날 김 교수를 만나지 않았다면 한국 미술사학계의 거두로 평가받는 학자의 옛 집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을 것이다.

다행히 윤씨는 지난해 8월 초 삼복 더위를 뚫고 김홍남 이화여대 교수(미술사학과)를 찾았다. 김 교수는 시민단체에서 한옥 보존과 관련된 일을 하고 있었고 윤씨와는 한옥을 매입하는 일로 알고 지내는 사이였다.

“교수님, 예쁜 한옥이 한 채 나온 게 있습니다. 계약이 거의 성사된 단계라던데 팔리면 바로 빌라가 들어설 거래요.”

김 교수는 “당장 가보자”며 윤씨를 앞세워 집을 나섰다. 그리고 윤씨가 안내한 ‘매물’ 앞에 이르러서는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서울 성북구 성북2동 126의 20, 바로 혜곡(兮谷) 최순우(1916∼1984) 선생의 한옥이었다. 혜곡이라면 국립중앙박물관장을 지낸 한국 전통미술의 전도사다. 베스트셀러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의 저자이기도 하다.

김 교수는 혜곡의 손때 묻은 한옥이 헐리도록 내버려둘 수 없었다. 자신이 몸담고 있는 사단법인 내셔널트러스트운동(NT)의 긴급 이사회를 소집해 한옥 보존을 공식 안건으로 상정했다. NT는 훼손 위기에 놓인 문화와 자연 유산을 시민 모금과 기증 등을 통해 보존하는 시민 운동단체. NT는 서둘러 일반 시민들을 대상으로 모금 운동을 시작했다.

그로부터 4개월여인 12월 초. NT는 잔금을 치른 뒤 혜곡의 한옥을 ‘시민문화재 1호’로 지정 선포했다. 올 6월 복원 공사가 마무리되면 이 한옥은 혜곡의 기념관이자 전시관으로 활용된다.

● 혜곡의 한옥이 살아남기까지

혜곡은 단아한 이 한옥을 1976년 사들여 작고할 때까지 살았다. 그 후에는 혜곡의 외동딸이 20년 가까이 살다 지난해 여름 내놓았다. 그녀는 한옥을 지켜줄 사람에게 팔고 싶어 했지만 주변에는 기존 주택을 허물어 다가구 주택을 짓는 붐이 일고 있었다.

일반인들이 보탠 소액의 풀뿌리 기금을 포함해 NT는 4개월 만에 매입자금 8억원을 모아 10월4일 중도금을 내고 12월4일 잔금을 치렀다. NT 회원들은 한옥 매입 성공에 스스로도 매우 놀라워하고 있다. 후에 이 소식을 전해들은 지건길 국립중앙박물관장은 “선생의 집이 지난 여름 부동산 전문 TV에 매물로 나온 것을 보고 안타까워 했지만 아무것도 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며 “기금을 내준 분들에게 고맙고도 부끄럽다”고 털어놓았다. NT는 한옥의 복원공사 기금까지 모두 3억원을 추가로 모을 계획이다.

내셔널 트러스트운동 공동대표인 김상원 변호사는 “문화와 자연유산을 기부하거나 이를 사들여 관리하는 시민단체에는 세제상 혜택을 주어야 한다”고 제안했다./신석교기자

● 고택이 살아남은 몇 가지 이유들

탁월한 심미안을 가진 미술사학자의 삶과 이의 가치를 알아보는 사회적 여유가 혜곡의 한옥을 살렸다.

혜곡이 아파트나 양옥에 살았다면 그 집을 살리기 위해 이렇게들 목돈을 내놓지는 않았을 것이다. 1920년대에 지어진 혜곡의 한옥은 ‘ㄱ’자형 본채와 ‘ㄴ’자형 행랑채에 대문까지 합쳐 ‘ㅁ’자형을 그리며 120평 대지에 맞춤하게 들어서 있다.

‘매심사(梅心舍)’ ‘매죽수선재(梅竹水仙齋)’ 등 추사 김정희와 단원 김홍도의 글씨로 새긴 현판에서는 선비의 멋과 절개가 묻어난다. 뒤뜰이 내다보이는 방에는 단원의 글씨로 ‘오수당(午睡堂·낮잠 자는 곳)’이라는 당호가 붙어 있어 웃음을 자아낸다. 안뜰에는 소나무와 대나무가 곧게 서 있고 작은 우물이 있으며 뒤뜰에는 산수유나무와 모과나무가 심어져 있다. 내부의 서까래와 대들보 등은 바니시 칠 한번 하지 않고 콩기름을 발라 윤을 낸 귀한 것들이다.

혜곡과 함께 이 집을 사러 다녔던 정양모 경기대 석좌교수(전 국립중앙박물관장)는 ‘무량수전…’ 서문에서 이렇게 회고한다.

“누구나 그분 댁 대문을 들어서면 벌써 마음이 정갈해지고… 이것이 바로 우리 생활 미술의 진수로구나 하고 흥겨우면서 눈맛이 그리도 시원할 수가 없었다. 문갑이며 탁자며 수반 등이 엮어내는 형언하기 어려운 드높은 분위기에 젖어 하나가 돼 어느덧 자신의 존재를 잊곤 했다….”

정 교수는 “사모님은 한옥이 불편하다며 양옥으로 옮기시기를 원하셨다. 하지만 선생은 한옥을 가꾸고 살면서 한국 생활미의 전형을 생생히 보여주셨다”고 했다.

뒤뜰에 놓아 기를 애완동물로 ‘두꺼비’를 택할 정도로 혜곡은 전통을 고집했다.

문화계 인사들은 혜곡과 함께했던 추억을 떠올리며 지갑을 열었다. 전통 미술의 대중화를 위한 혜곡의 노력에 필남필부들도 작지만 귀한 성금을 기탁했다. 혜곡이 아니고서는 한국 최고의 건축물로 꼽히는 부석사 무량수전을 비롯해 한국 전통 예술품들의 가치를 모르고 살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혜곡을 통해 ‘부석사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 사무치는 고마움으로 이 아름다움의 뜻을 몇 번이고 자문자답’했고 경회루의 화강석 돌기둥의 우람한 주열을 보고 ‘잔재주를 부릴 줄 모르는 한국인의 성정’을 느꼈다. ‘고요와 사색에 사무친 고려청자의 아득하고도 깊은 빛깔’을 알아보았고 조선시대 백자 항아리의 순박함을 보며 ‘잘생긴 며느리’를 떠올렸다.

혜곡의 한옥 살리기에 공이 큰 김 교수는 말했다.

“한 시대를 살고 간 크고 작은 영웅들의 혼이 배어있는 공간은 도시의 품격을 높여주고 역사의 켜를 한 겹씩 벗길 수 있는 길잡이 역할을 한다. 이것이 없다면 미래 세대가 어떻게 역사를 기억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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