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사 명품전'여는 간송미술관 최완수 실장 인터뷰

  • 입력 2002년 10월 22일 18시 03분


“오늘 할 공부 제대로 했나 그 생각만 했지, 내일 일은 걱정해 보지 않았다”는 가헌 최완수. 그의 30여년 외길인생에는 자신감으로 가득한 ‘삶의 고집’이 숨어 있었다./이종승기자
“오늘 할 공부 제대로 했나 그 생각만 했지, 내일 일은 걱정해 보지 않았다”는 가헌 최완수. 그의 30여년 외길인생에는 자신감으로 가득한 ‘삶의 고집’이 숨어 있었다./이종승기자
《서울 성북동 간송미술관이 20일부터 11월3일까지 추사명품전을 연다. 마침 지난 3일은 이 미술관 최완수학예연구실장의 회갑이기도 했다. 30여년간 간송미술관과 함께 하면서 외길을 걸어 온 최실장을 만났다.》

가헌 최완수(嘉軒 崔完秀) 학예연구실장은 얼마 전 (지난 3일) 환갑을 지냈다 했는데 그의 얼굴은 놀랄 만큼 동안(童顔)이었다.

-40대라고 하셔도 믿겠습니다.

“평생 좋은 사람만 만나고 하고 싶은 일만 해서 안 늙나 봐요. 허허.”

-제자들이 많으신데….

“스님들 이야기가 상좌(上座) 하나는 지옥이라고 해요. 겉보기엔 제자가 스승 맞춰 주는 것 같아도 사실은 그렇지 않아요. 제자 많이 기른 옛 스승들 보면 진짜 존경스럽다니까요.”

-혼자 (연구) 해도 될 텐데요.

“물론 혼자 하다 간 사람들이 많지요. 그런데 추사는 앉은 자리면 어디서나, 유배지에서도 제자를 길렀어요. 농부나 선비나 다 씨 뿌리는 사람이에요. 거 왜, 소승불교는 자기 혼자 깨달으면 그만이지만 대승불교에서는 깨달음을 미루더라도 중생과 함께 간다고 하잖아요.”

-61년 대학 들어가실 땐 사회가 시끄러웠을 텐데, 역사학도로서 현실에 대해서는 관심은 없으셨나요.

“이미 그런 일에 뛰어 든 사람들의 이율배반이나 허구를 간파했다고나 할까요.”

-마르크시즘에 대한 관심은 없으셨나요.

“그것도 일찍이 허구를 간파했죠. 아홉 살 때 6.25를 만났어요. 우리 집이 지주 계열이었는데 아버지께서 인심을 잃지 않아 1차 숙청 대상은 아니었어요. 3개월 동안 밤낮으로 세상이 바뀌는 데 양쪽 사람들이 다 우리 집으로 피난을 오더라구요. 어린 나이였는데도 왜 친한 사람들이 생각이 다르다고 해서 죽고 죽이나 이런 생각을 했죠. 그러면서 사람들은 겉으로 표방하는 것과 실제 행동이 다르구나, 그런 걸 깨달았지요. 역사하는 사람들은 항상 이면을 봐야해요.”

-역사란 어차피, 승자의 기록이 아닌가요.

“역사는 누가 만들고 안 만들고 이전에 이미 실존해 있는 겁니다. 어떻게 보느냐의 문제지요. 일제 식민 사관도 기록을 날조만 한 게 아니에요. 그들은 우리 기록을 철저히 뒤졌습니다. 그러나, 기록은 항상 윤색의 가능성을 전제로 하는 겁니다. 기록한테 속으면 안되지요. 좋은 시대일수록 사회가 역동적이고 건강하기 때문에 비판의식이 강하고 기록도 많이 남겨요. 조선은 당쟁이라는 상호견제와 감시가 있어 500년 이상 버틴 거에요. 역사상 이런 오랜 왕조가 없었습니다·. 당쟁이 치열할 때는 상대방 헐뜯는 이야기며 당쟁 자체를 비난하는 이야기들이 당연히 기록에 남겠지요. 일제가 ‘조선이 당쟁 때문에 망했다’고 하는 근거가 생긴 거지요.”

-결국 관점의 문제란 말씀이네요.

“실상을 바로 보는 데 기록만으론 가지고는 한계가 있다 이겁니다.”

-대학졸업 하시고 국립중앙박물관 1년 일하신 것을 빼면 한 장소(간송)에서 30여년이 다 되어 갑니다. 도망치고 싶은 생각은 없으셨나요?

“그럴 생각을 할 틈이 없었어요. 오늘 공부 제대로 했나 그 생각만 했지, 지금까지 내일을 생각해 본 적이 없었으니까요. 책 속에 파묻히면 세속을 잊기 마련이고요.”

인터뷰를 마치며 그는 “난 참 복이 많은 사람이야”라고 말했다. 이어 “세상 사람들이 누리는 복은 하나도 못 누리면서 말이야”라는 한 마디를 덧붙이고 너털웃음을 지었다.

허문명기자 angel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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