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있는 장인정신 獨步]문인전문 사진작가 김일주씨

  • 입력 2002년 4월 24일 18시 13분


'문인전문사진가' 김일주씨가 1996년 사진전을 열었던 일민미술관에서 포즈를 취했다.
'문인전문사진가' 김일주씨가 1996년 사진전을 열었던
일민미술관에서 포즈를 취했다.
큰 불멸과 작은 불멸이 있다. 작은 불멸은 평소에 알던 사람에게 잊혀지지 않는다는 의미에서의 불멸, 큰 불멸은 그를 모르던 사람에게까지 잊혀지지 않는다는 뜻에서의 불멸이다. 밀란 쿤데라의 장편 ‘불멸’에 나오는 말이다. 쿤데라 자신이 문인이듯, 문인들은 글로 잊혀지지 않는 ‘불멸’을 꿈꾸는 존재들이다. 김일주씨(60)는 그들의 불멸을 완성시키고자 하는 사람이다. 30여년 동안 문인이 모이는 자리면 어디든 쫓아다니며 카메라 셔터를 눌러댔기 때문.

그는 자기가 찍은 사진이 200년후든 300년후든 남아 문인들의 존재를 언제까지나 생생하게 전해주기를 바란다.

“어릴때부터 글쓰기와 사진찍기를 좋아했어요. 중3때 처음 카메라를 만졌지요. 문인 사진을 찍고 있으니 어릴 때의 동경을 둘 다 좆고 있는 셈입니다.”

대학 국문과를 졸업하고 1966년 ‘현대문학’에 소설 ‘산령제’가 추천돼 작가의 꿈을 이뤘다. 그즈음 지방신문 문화부 기자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1968년 조지훈 시인의 타계는 그의 인생을 바꿔놓았다.

“큰 시인이 가셨는데 쓸만한 사진을 찾을 수 없었어요. 기사만 덜렁 나갔죠. 나중에 중앙지를 살펴봐도 사진이 나간 게 몇군데 없더라구요. 안되겠구나, 나라도 나서서 문인들의 자취를 남겨야겠구나 생각했죠.”

이듬해 창간된 ‘독서신문’ 기자가 됐다. 문인의 기벽을 다룬 ‘벽(癖)’이라는 연재를 시작했다. 작가 오영수는 마당의 잡초를 뽑아야 작품 구상이 나오고, 황순원은 초고를 깨알같은 글씨로 대학노트에 정리하고…. 기사를 취재하며 사진도 찍었다. 1972년 ‘문학사상’이 창간되면서 자리를 옮겼다. 작가의 서재를 탐방하는 ‘작가의 밀실’이라는 코너를 담당했다.

차차 ‘문인들 쫓아다니는 사진쟁이’로 알려지게 된 것도 이때쯤. 문인들이 모여드는 곳이면 가리지 않고 쫓아가 셔터를 눌러댔다. 좋은 일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김지하가 오랜 옥고를 치르고 출감했을 때의 일. 어느 시상식장 뒤풀이에 갔다가 김지하를 발견했다. 사진 두어장을 찍었을 때 시인의 후배 두 셋이 에워싸더니 필름을 내놓으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기관원으로 오해했던 것. 필름을 뽑아 엉뚱한 필름과 바꿔치기해 내주었다. “그때 김지하가 얼굴을 한사코 가리는 사진을 아직도 가지고 있죠.”

1982년 출판문화회관 전시실에서 처음 문인 사진전을 가졌지만 돈벌이가 되지는 않았다. 1990년 ‘인물계’ 편집장을 그만둔 뒤에는 수입도 없이 사진에만 매달렸다.

“출판사에서 작가총서 등을 내면서 내 사진을 이용하겠다고 하는 때가 많아요. 선선히 그러시죠 하지. 사례비를 보내는 경우도 있지만 대개는 그렇게 안하죠. 그건 상관없는데, 사진작가 이름을 명기하지 않을 때는 영 섭섭해요.”

1996년 ‘문학의 해’는 ‘그의 해’ 였다. 동아일보 광화문 구사옥의 일민문화회관에서 대산문화재단 주최로 문인 사진전을 열었다. 현대 문인 200여명의 사진을 선보이고 ‘한국현대문학의 얼굴’(민음사)이라는 사진집도 냈다. 그 뒤로 카메라를 들고 문인들을 스토킹하듯 좇아다니는 그에게 싫은 소리를 하는 사람은 거의 없어졌다.

그가 현재 갖고 있는 꿈은 ‘문학박물관’을 여는 것. ‘문학사상’ 재직시절부터 문인들에게 틈틈이 받아둔 육필원고만 1t 트럭을 가득 채우고도 남는다. 라면박스에 넣어 집에 쌓아두고 있지만 날마다 색이 바래고 좀이 스는 때문에 걱정이 태산이다. 필름과 인화지에 담긴 사진도 자꾸 색이 바랜다.

“종이가 상하는 것은 차라리 걱정의 일부입니다. 언젠가는 문인들의 체취를 모은 번듯한 문학박물관이 세워져야 할텐데, 지금부터라도 자료의 소재를 파악하는 작업을 시작해야 귀중한 자료들이 버려지는 일이 없지 않겠어요? 건물이나 하드웨어는 나중에 생긴다 하더라도, ‘국립문학박물관 준비위’같은 기구의 발족이 시급하다고 생각합니다.”

유윤종 기자 gustav@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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