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평등-공정성 국민의식 조사]"5년전보다 가난해졌다"37%

  • 입력 2001년 4월 4일 18시 47분


최근 들어 ‘사회적 신분’의 상승이 외환위기 이전에 비해 힘들어진 것으로 나타났다. 또 국민의 상당수는 자신이 예전보다 훨씬 가난해졌으며 돈도 불평등하게 분배된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동아일보가 창간 81주년을 맞아 후원하고 한국사회과학연구협의회 특별연구팀(연구책임자 석현호·石賢浩 성균관대 사회학과 교수)이 작성한 ‘불평등과 공정성 전국표본조사 연구보고’에 따르면 국민의 36.5%가 5년 전보다 가난해졌다고 응답했다. 나아졌다고 답한 비율은 그보다 5.8%포인트 적은 30.7%에 그쳤다. 또 돈이 불평등하게 분배된다고 느끼는 비율도 4% 가량 증가했다.

이 보고서는 90, 95년에 이어 연구팀이 2000년말 현재 취업자가 있는 전국(제주도 제외)의 가구 중에서 뽑은 2000여가구의 취업자를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를 바탕으로 작성됐다.

▽“개천에서 용 나기 어려워졌다”〓 아버지가 농민일 경우 자식이 정신근로자(전문직, 관리직, 사무직 등)가 된 비율은 95년 39.6%였던 데 비해 2000년에는 8.8%포인트 줄어든 30.8%에 그쳤다. 반대로 농민 아버지를 둔 자녀가 육체근로자가 된 비율은 95년 32.1%에서 2000년 41.5%로 늘었다. 농촌 출신이 정신근로자로 진출하는 것이 점점 어려워지면서 이들이 육체근로자가 되는 비율이 점차 높아지고 있는 것.

반면 자녀가 아버지를 따라 정신근로자가 된 비율은 95년의 70.0%에서 2000년 72.5%로 늘어 우리 사회에서도 ‘계층의 세습’이 본격화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와 관련해 석현호교수는 “이번 조사가 신분의 변화를 완벽하게 설명해줄 수는 없지만 부의 양극화가 가속화되면서 ‘사회적 신분 이동’이 점점 어려워지고 있음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이전보다 가난하다”〓 소득 불평등을 가리키는 ‘지니계수’(0∼1, 값이 클수록 불평등)는 95년의 0.30에서 2000년에는 0.32로, 재산 불평등은 0.54에서 0.56으로 악화됐다.

특히 ‘5년 전보다 못살고 있다’고 답한 비율이 36.5%나 되는 것과 관련, 연구에 참여한 경북대 이정우(李廷雨·국제통상학)교수는 “일시적 경기후퇴 때문이라기보다 IMF사태 이후 경제적으로 양극화된 구도가 되돌려놓기 힘든 수준으로 굳어져가고 있는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응답자 중 59.2%가 ‘5년 뒤에는 상황이 나아질 것’이라고 답해 절반 이상은 아직 미래에 대해 낙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일단 직장에 붙어 있자”〓

근로자들은 회사측의 불공정한 대우에 대해 5년 전보다 소극적인 반응을 보여 최근 경제난에 따른 취업난을 짐작케 했다.

실제 회사측의 불공정한 대우에 대해 ‘참고 지내겠다’는 비율(복수 응답)이 95년의 80.1%에 비해 2000년에는 4.4%포인트 늘어난 84.5%를 기록했다. 이에 반해 ‘노조에 고발하겠다’는 비율은 3.7%포인트 줄어든 18.6%에 그쳤고, 항의의 표시로 결근하겠다는 비율도 4.3%포인트 적은 11.6%에 머물렀다.

대신 몇 년 뒤 전직을 고려하겠다는 비율은 17.4%포인트나 늘어난 65.1%를 기록했다. 이는 현재 근무하는 회사에 대한 거부라기보다 직업환경이 다양해지면서 보다 나은 조건의 회사로의 전직을 희망하는 것으로 풀이된다.

▽“갈수록 외풍(外風)에 휘둘리는 정부 정책”〓 응답자들은 정부가 정책결정 과정에서 5년 전에 비해 보다 풍부한 정보와 외부 의견을 접하는 것으로 평가했지만, 외부 압력과 특정집단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과정에서 불공정한 정책을 내놓는 경우가 더 많아졌다고 봤다.

특히 특정집단의 이익을 우선시했다는 대목에서는 95년보다 11.2%포인트가 증가한 85.7%가 ‘그렇다’고 답했다. 서울대 김명언(金明彦·심리학)교수는 “철저한 사전 검증 없이 밀어붙인 의약분업이나 각종 인기영합 정책들이 이런 결과를 낳은 것으로 보인다”고 지적했다.

또 정부의 불공정한 대우에 대해 ‘불법행동’(27.8%→31.1%)이나 ‘이민’(27.8%→45.3%)을 고려하겠다는 극단적 반응이 ‘관련기관에 시정 요구’(32.2%→34.0%) 등 상대적으로 온건한 반응에 비해 크게 늘었다. 연구팀은 “최근 급증하는 캐나다나 뉴질랜드행 이민도 이와 비슷한 현상”이라며 “정부나 정치권에 대한 불신이 때때로 ‘포기’로 번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지역 갈등은 계속된다”〓 88올핌픽 전후의 여론조사 때보다 2000년 현재 지연, 혈연, 학연 등 ‘연줄’이 사회생활에 도움을 준다고 답한 비율이 더 높았다. 특히 8.2%포인트 증가한 53.7%(복수응답)가 지역감정이 사회생활에 영향을 미친다고 답했다.

또 경상도 사람들은 김영삼 정권이나 현재의 김대중 정권이 경상도 지역의 발전에 별다른 영향을 주지 않았다(각각 57.6%, 59.8%)고 평가한 반면 전라도 사람들은 대체로 김영삼 정권은 전라도 발전에 좋지 않은 영향(53.4%)을 줬고 김대중 정권은 좋은 영향을 줬다(49.3%)고 여긴 것으로 조사됐다. 경기도, 충청도 등 나머지 지역민들은 두 정권 모두 별다른 영향을 주지 않았다는 비율이 압도적(72.3%)이었다.

한편 지역감정을 조장하는 주요 요인은 과거 정부의 경제발전정책, 지역주민간의 편견, 정치인의 선거운동 순이었으나 2000년 조사에서는 정치인의 선거운동이 15.4%포인트 증가한 38.2%를 기록해 가장 큰 지역감정 요인으로 떠올랐다. 방송 등 일부 언론의 편향된 선거방송도 지역감정을 자극하는 주요 요인(6.7%→10.0%)으로 떠올랐다.

서강대 나은영(羅恩暎·신문방송학)교수는 “지금까지 지역갈등은 대체로 누군가의 ‘필요’에 의해 조장되는 측면이 컸다고 추정할 수 있다”며 “따라서 대다수의 국민은 오히려 지역갈등 구도의 피해자라고 봐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반병희·이승헌기자>bbhe424@donga.com

▼조사팀장 석현호 성대교수▼

이번 조사의 연구책임자인 성균관대 석현호 교수는 “IMF 이후 일각에서 우려하던 ‘2분화된 사회’가 점차 현실로 다가오고 있는 느낌”이라고 소감을 밝혔다.

석교수는 “빈부 격차가 심화되는 것은 차치하더라도 스스로를 ‘중류층 이하’라고 말하는 비율이 증가하는 것은 사회가 그만큼 ‘시한폭탄’을 안고 작동된다는 의미”라며 “이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기회의 평등’이 필수적”이라고 말했다.

석교수는 또 이번 조사를 통해 “실업자 증가 등 불황의 타격이 주로 저소득층에 집중된 반면 고소득층은 고금리를 이용한 자산증식 등으로 별 영향을 입지 않은 점이 부분적으로 드러났다”며 “정부는 사회를 두 갈래로 찢어놓을 수 있는 이 격차를 해소하기 위한 정책을 만들고 이를 투명하게 집행해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승헌기자>ddr@donga.com

▼직업 평가순위 변화 추이▼

이번 조사에서 국민들의 직업에 대한 ‘사회적 평가’ 순위는 10년전과 거의 같았지만 그 동안 낮은 평가를 받던 직업에 대한 인식이 눈에 띄게 높아진 점이 흥미를 끈다.

연구팀에 따르면 판사→대학교수→관공서 국장→…→행상→파출부→막노동자로 이어지는 순위에는 거의 변화가 없었으나 음식점 주인 이하 순위의 직업(표 참조)에 대한 사회적 인식은 급격히 높아진 것.

특히 목수, 공장 직공 등에 대한 ‘평가 점수’는 90년에 비해 20점 가량 상승했다.

서울대 김명언교수는 “IMF 이후 취직난이 지속되면서 그동안 상대적으로 ‘하위’라고 여겨지던 직업군에 대한 인식이 상대적으로 향상된 것”이라고 분석했다.

그러나 스스로를 ‘중산층 이하’라고 답한 비율이 95년의 88.4%에서 2000년 92.1%로 늘어난 데에서 알 수 있듯이 이같은 직업 평가의 변화가 국민의 경제력 수준이 전반적으로 낮아진 데서 비롯된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

<이승헌기자>dd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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