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신간]'누군가를 위하여' '김광규 깊이 읽기'

  • 입력 2001년 1월 19일 18시 41분


◇누군가를 위하여

김광규 지음

148쪽 5000원 문학과지성사

‘4·19가 나던 해 세밑/우리는 오후 다섯시에 만나/반갑게 악수를 나누고/불도 없이 차가운 방에 앉아/하얀 입김을 뿜으며/열띤 토론을 벌였다’로 시작하는 김광규의 시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이 시는 ‘오랜 방황 끝에 되돌아온 곳/우리의 옛사랑이 피흘린 곳에/낯선 건물들 수상하게 들어섰고/…/부끄럽지 않은가/바람의 속삭임 귓전으로 흘리며/우리는 짐짓 중년기의 건강을 이야기했고/또 한발짝 깊숙히 늪으로 발을 옮겼다’로 끝난다. 1970년대말에 쓰여졌지만 지금도 여전히 감동적인, 슬프도록 아름다운 시.

시인 김광규(한양대 독문과 교수)의 시는 단정하고 담백하며 따스하고 진실하다. 결코 현란하거나 난해하지 않다. 1975년 등단 이후 7권의 시집과 3권의 시선집을 낸 김광규. 그는 시류에 영합하지 않고, 늘 깨어있는 정신으로 투명한 시를 써 온 보기 드문 시인이다.

그의 시를 다시 한번 음미해볼 수 있는 책 두 권이 나왔다. 시선집 ‘누군가를 위하여’와 ‘김광규 깊이읽기’. ‘누군가를 위하여’엔 1980년 중반 이후의 대표시 70편이 담겼다. ‘김광규 깊이 읽기’엔 그의 시세계를 분석한 평론과 동료 문인들의 에세이, 대담, 그리고 시인의 자전적 에세이가 실려 있다.

김광규는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을 노래한 ‘일상시’의 영역을 개척한 시인이다. 일상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은 따스하다. ‘겨울밤/노천 역에서/전동차를 기다리며 우리는/서로의 집이 되고 싶었다/…/눈이 내려도/바람이 불어도/날이 밝을 때까지 우리는/서로의 바깥이 되고 싶었다’(밤 눈 중)

그의 시의 가장 큰 매력은 관념적이지 않다는 점. 그리고 언제나 삶의 한복판에 있고 언제나 비판 정신을 늦추지 않는다는 점. 한 문학평론가가 “아침 나절에 맑은 정신으로 또박또박 써내려간 것이 바로 김광규의 시편들”이라고 말한 것도 이런 까닭에서다.

1987년 4·13 호헌조치가 내려지던 날, 그는 ‘마침 중간시험이 시작되던 월요일/…/교단에선 나 자신이/부끄럽고/창피해서/커닝하는 학생들을/잡아낼 수가 없었다/…/누가 정말로 부정행위를 하고 있는지’(‘부끄러운 월요일―1987.4.13’ 중)라고 속죄했던 시인이다.

김광규는 1990년대 들어 기존의 틀을 유지하면서 좀더 철학적인 시세계로 나아간다.

‘언젠가 왔던 길을 누가/물보다 잘 기억하겠나/…/여보게 억지로 막으려 하지 말게/제 가는대로 꾸불꾸불 넓고 깊게/물길 터주면/고인 곳마다 시원하고/흐를 때는 아름다운 것을/물과 함께 아니라면 어떻게/먼 길을 갈 수 있겠나’(‘물길’ 중)

철학적이지만 여전히 쉽고 명징하다. 혼탁한 시대, 이 두 권의 책을 읽다보면 시의 진정한 정신이 무엇인지 고뇌하게 만든다.

<이광표기자>kp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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