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그리운 흔적/금지된 본능, 그때를 향한 그리움

  • 입력 2000년 9월 8일 18시 25분


작가 이윤기
작가 이윤기
이윤기의 장편소설 ‘그리운 흔적’(문학사상사)은 얼핏 보면 불행한 사랑의 운명을 다룬 연애소설로 읽힌다. 성격과 성장 환경이 뚜렷하게 다른 두 여자 사이에서 갈등을 겪는 한 남성의 삶을 펼쳐보이는 소설의 구도는 자칫 진부해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작품을 그렇게 감상한다면 수박의 겉만 어루만진 것이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세 사람은 제각기 우리 삶을 구성하는 중요한 상징으로서의 역할을 한다. 그렇기에 인물들의 모습이 대조적일 수밖에 없다.

이 작품의 첫부분에는 처녀와 노루와 사냥꾼의 우화가 소개되고 있다. 그 이야기도 삼각관계를 구성하고 있다. 사냥꾼의 화살을 맞고 도망온 노루와 노루를 숨겨준 처녀, 그리고 숨겨준 보답으로 처녀와 사냥꾼의 사랑을 이루어주고 스스로 희생당하는 노루의 이야기가 구성하는 삼각형의 상징은 삶의 현실과 금지된 본능 사이의 비극적인 관계를 암시해주고 있다.

화살 맞은 노루는 이 작품에서 열정적인 삶의 본능을 감출수 없어 상처 입는 한 여성의 불행한 삶으로 표현되어 있다. 사냥꾼은 우리의 제도적인 현실을 뜻하며 이 작품에서 그것은 현실적인 사랑을 꿈꾸는 한 여성의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그렇다면 노루를 숨겨주었다가 결국에는 그 노루의 희생을 방조하는 처녀는 세속적인 사랑과 삶의 운명에 순응해버린 남자 주인공으로 그려져 있을 것이다.

작가는 이러한 사랑의 비극적인 구도를 통하여 삶의 건강한 가치를 외면하고 살아가는 현대인의 소극적인 인생행로를 자각하게 만든다. 그런 점에서 이 작품은 내면의 성숙과 깨달음을 다룬 성장소설로 읽힘이 마땅해 보인다. 성숙한 주인공의 시선으로 소년시절과 청춘시절을 회상하는 서술기법도 그러한 성장소설의 마땅한 요소이다.

남자 주인공의 정신적 성장과정은 금지된 본능의 세계를 상징하는 여성과의 만남과 갈등, 그리고 화해를 통해 이룩된다. 전형적인 교양소설의 구도이다. 그 여성이 보여주는 삶의 세계는 제도적인 현실 속에서는 불온하고 금기시되어 있다. 그 세계는 ‘그림자’의 세계이다. 일찍이 심리학자 융이 인간의 감추어진 무의식, 동물적 본능의 속성으로 규정한 ‘그림자’의 세계는 너무 억압하거나 과도하게 추구해서는 삶의 균형을 상실하는 그런 속성을 간직하고 있다.

이 작품에서 정신적으로 미성숙한 단계의 남자 주인공은 ‘그림자’의 세계와 마주치는 것을 두려워한다. 그것이 제도적으로, 또는 규범적으로 금기시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림자’는 ‘터부’인 것이다. 그러나 “그림자가 없으면 인간이 아니지”라는 말의 의미를 깨달을 만큼 성숙해졌을 때, ‘그림자’는 그리움의 세계로 다가온다. 남자 주인공이 성숙해진 나이에 ‘그림자’를 상징하는 여성을 찾아나선 뜻도 거기에 있다. ‘그림자’를 외면하고는 진정한 사랑과 인생의 가치를 추구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 작품의 원래 제목이 ‘그리운 터부’였던 뜻도 그점에 있다.

작가는 ‘작가후기’에서 “이 소설의 화자 같이는 살지 마세요”라고 말한다. 그 말 또한 ‘그림자’의 세계와 마주치고 그것을 삶의 중요한 일부로 받아들이라고 권하는 게 아닐까?

이경호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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