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서평]함정임/교코 모리의 '시즈코의 딸'

  • 입력 2000년 7월 14일 18시 34분


《교코 모리의 ‘시즈코의 딸’이 국내에서 번역 출간됐다. 일본인작가가 1993년 미국에서 발표해 큰 상업적 성공을 거둔 화제작. 열 두살 소녀가 질끈 눈 감고 엄마의 부재를 이겨내가는

과정을 담담하게 그린 자전소설.애이불비(哀而不悲)라는 동양적 인고의정서가 서양인에게 큰 울림을 준 듯. 인터넷서점 서평란에는 별표만점을 준 독자 서평이 가득하다.》

제목에 이끌려 가볍게 소설을 펼쳤다. 한없이 받기만 하던 딸의 자리에서 주기만 해야 하는 엄마의 자리로 무게 중심이 바뀌어버린 내 고단한 삶의 방향을 슬쩍 뒤로 돌리고 싶었던 것일까? 황금빛 유년 시절로, 단내 나는 엄마 품 속에 펼쳐지던 달콤한 유토피아로 돌아가고 싶었던 것일까?

착각이었다. 내 신산스런 상처를 치유하고자 파고들었던 소설이 오히려 깨진 사금파리 조각처럼 날카로운 아픔을 되쏘고 있는데에 아연 가슴에 손을 얹고 말았다. 나는 열두 살 딸 아이를 두고 세상을 저버릴 수 있는 모성을 상상할 수 없었고, 상상만으로도 그 아이의 피멍든 영혼이 나에게 덮씌우기라도 하듯 이내 가슴은 극한 지옥이었다. 어서 책을 덮고 싶었고, 잊어버리고 싶었다.

일곱 살 아이를 둔 나로서는 엄마 시즈코를 결코 용서할 수 없었다. 남편에게 사랑의 배신을 죽음으로 복수했을지언정 어린 딸의 입을 틀어막고 그 아이의 인생을 봉인해버린 잔인한 여자였다. ‘넌 강해!’라는 주술을 자신의 면죄부라도 되는 듯이 딸의 목에 옭아매놓고 떠나버린 행위를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진저리를 치면서도 나는 소설 속으로 급격히 끌려들어가고 있었다.

주인공 유키, 남겨진 시즈코의 딸 때문이었다. 읽긴 읽되 파우스트적인 충동에 사로잡혀 자꾸 유키를 간섭하고 조종했다. 유키에게 엄마를 저주하라고, 배반해버리라고, 잊어버리라고 쏘삭였다. ‘넌 강한 사람이야’라는 무책임한 말 따윈 흘려버리라고. 더욱이 나약하게 삶을 포기하면서 얹어준 ‘멋진 여성이 되라’는 말에 침을 뱉으라고.

그러나 유키는 메피스토펠레스 목소리로 가장한 악마적인 유혹에도 아랑곳 않고 달리기만 할 뿐이었다. 위험을 무릅쓰며 속도를 내고, 제 숨소리를 듣지 못할 정도로 달리고 달려서는 숨이 끊어지던 순간의 엄마의 고통에 도달하려고 안간힘을 쓸 뿐이었다.

유키의 처절한 달리기 앞에서 어설픈 파우스트극은 그만 두어야 했다. 1000미터 달리기의 신기록을 깨면서 그동안 가슴을 짓눌렀던 슬픔의 검붉은 바위를 깨나가는 유키를 어느새 응원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 실컷 달려라. 들여다보고 기억해. 그것 말고 너를 구원할 방도는 없어.

아픔 없는 사랑은 사랑도 아니라고 믿던 시절이 있었다. 사랑을 소유했다가 고스란히 잃어본 사람은 안다.

사랑은, 분명 슬픔을 남기지만, 또한 그 슬픔을 정화시키는 힘도 배양한다는 것을. 그래서 사랑은 배반도 상실도 새로 자라난 사랑으로 극복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물은 물끼리, 기름은 기름 끼리 서로 섞이고 씻기우듯이.

어느새 다가와 환하게 웃는 유키의 미소 속에 여름밤 새는 줄도 몰랐다.

함정임<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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