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제의 책]섹스의 역사 "문화의 숨결이 담긴 性으로"

  • 입력 2000년 6월 9일 19시 03분


□섹스의 역사(Making Sex)

토머스 라커 지음/황금가지

▽성적 쾌락〓한 소녀가 죽었다. 그의 부모는 젊은 수사에게 밤새 그의 시체를 지켜달라고 했다. 이 수사는 소녀의 아름다움에 반해 자제력을 잃고는 그를 범하고 도망쳤다. 매장할 시간이 되자 죽은 줄 알았던 소녀가 혼수상태에서 깨어났지만 알고 보니 그는 임신을 했다. 부모는 당황한 나머지 아이를 낳자마자 딸을 수도원에 보내버렸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안 수사는 돌아와 이 소녀와 결혼했다.

해석1:성적인 희열은 매우 강렬한 것이고 그 소녀는 조금이라도 몸을 떨었을 것이다. 따라서 그녀가 살아있었다는 것을 모른채 그녀를 범했다는 것은 거짓이다.

해석2:그 소녀가 정말로 죽은 것으로 알았음은 나위가 없다. 여자들은 성교를 하는 데 즐거움을 느끼지 못함은 물론, 심지어 의식이 있을 필요도 없다.

미국 UC 버클리의 역사학과 교수인 저자에 따르면 ‘해석1’은 18세기 이전의 것이다. 여자에게도 강렬한 성적 쾌락이 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는 것이 당시의 생각이었다. 이 쾌락은 죽음에 가까운 혼수상태마저 뒤흔들어 깨울 만큼 강렬한 것이라고 생각됐다. 그러나 19세기에 오면 해석은 전혀 달라져 ‘해석2’가 받아들여진다. 여자는 성적 쾌감을 느낄 수 없다는 것이다.

▽정자와 난자〓한 번의 사정에 5천만∼1억의 정자가 난자에게 달려가 가장 건강한 하나의 정자가 난자와 만나 수정된다.

해석1:한 여자를 향해 1억 명의 남자가 달려간다. 가장 빠르고 강한 자만이 이 여자를 차지할 수 있다. 여자는 자신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이 남자를 맞이한다. 여자는 이런 남자를 만나 우수한 아이를 가질 수 있음을 행운으로 받아들인다.

해석2:한 여자가 서 있다. 1억 명의 남자가 그를 향해 구애를 하며 달려간다. 이 여자는 그들 중 가장 우수한 남자를 골라 자신의 짝으로 맞이한다. 그는 자신이 원하는 남자를 만나 건강한 아이를 가질 수 있음에 만족한다.

두 해석 중 어느것이 맞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눈에 거의 보이지도 않을 만큼 작은 정자가 경쟁을 거쳐 자신보다 훨씬 커다란 난자를 ‘차지’한다는 ‘해석1’ 식의 발상이 우리의 사고를 지배하고 있다. 저자에 따르면 이런 해석은 남성 중심의 문화를 반영한 것에 불과하다.

▽섹스와 문화〓20세기에 들어 사회가 변하면서 섹스에 대한 해석도 달라졌다. 섹스는 프랑스 혁명의 주요한 주제이기도 했다. 여성은 시민으로서의 자유뿐 아니라 개인적 자유를 획득할 수 있고 가족과 도덕과 개인적 관계가 모두 새롭게 만들어질 수 있다는 프랑스 혁명의 약속에 따라 그에 걸맞은 성별 경계를 형성했다.

저자는 과학의 이름으로 객관성을 위장한 섹스로부터 인간의 문화가 반영된 남자와 여자의 관계를 읽어낸다. “사회적으로 결정되는 담론의 장으로부터 섹스를 분리시키려 하는 것은 현대 인류학자가 인간성의 본질만 남겨놓기 위해 문화를 걸러내려고 하는 것과 같이 반드시 실패할 수밖에 없다.” 이현정 옮김 477쪽 1만8000원

<김형찬기자·철학박사> khc@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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