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세 '나무들'/마로니에 숲속에서 자연의 설교를 듣는다

  • 입력 2000년 4월 7일 20시 03분


헤르만 헤세 지음/민음사

‘나무는 영원한 생명의 이미지’라고 말한 사람이 화가 마그리트였던가. ‘한 그루 볼품없는 나무일지라도/어떤 위대한 사람보다 낫다’고 말한 이는 시인 박용하였다.

우리들 누구에게라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른 봄 산길 가에 고개를 내민 푸른 새순을 보았을 때나 한여름 소나기가 지나간 뒤 소나무숲에서 풍기는 향내에 휩싸일 때, 우리 모두의 가슴속에는 어쩌면 쓰여지지 않을 시가 한 편씩은 움트기 마련이다.

‘데미안’을 쓴 독일 작가 헤르만 헤세(1877∼1962)의 산문집 ‘나무들’이 출간됐다. 그 누구보다 나무와 숲과 새와 자연에 친숙했던 작가의 자연일기이며, 산문과 시와 30여장의 컬러 사진으로 수놓아진 작은 숲이기도 하다. 마로니에와 복숭아나무의, 보리수꽃과 뻐꾸기와 푄 바람과 안개의 온갖 자태, 소리, 향훈으로 가득찬 책을 헤치고 나온 뒤 읽은 이는 혹 두 볼이 발그레해지고, 숨결도 옛날의 어느 날처럼 풋풋해질 지도 모른다.

추억들. 작가는 마로니에 나무를 보며 젊은 나날 한 여관에서 보낸 여름 향기와 모기들의 윙윙거림을 떠올리며, 지나간 날들의 달콤한 축복을 떠올린다. 보리수꽃의 꿀처럼 달콤한 향내는 젊은이들의 자유로운 유랑에 대한 매혹으로 작가를 몰아간다.

“다시 한번 젊고 대담하고 호기심에 차서 세상을 돌아다녀 봤으면! 길가에 앉아 버찌로 주린 배를 채우고, 갈림길에 이르러서는 오른쪽, 왼쪽 길을 웃옷 단추를 세어 정해 봤으면!”

현재들. 변덕스런 날씨는 복숭아나무와 같은 연약한 수목들을 곧잘 넘어뜨린다. 나무의 자취가 있던 구덩이 앞에서 작가는 ‘파란 하늘과 잿빛 하늘을 배경으로 분홍빛 봄 왕관을 뽐내던’ 나무의 자태를 아쉬워하지만 궂은 날씨는 오래 가지 않는다.

곧 숲에는 벌이 위윙거리고, 뻐꾸기는 낮은 소리로 구애의 노래를 읊조리며, 작가는 ‘가끔은 숲에서 그림을 그리고 가끔은 잠을 자든지 책을 읽는다’. 은방울 꽃 아래서 그가 읽는 프루스트며 카프카 등 당대 작가들의 작품 감상기는 독자에 대한 보너스다. 바람 때문에 한쪽 방향으로만 성장한 나무나, 격렬하고도 터무니 없게 일찍 자란 나무에 대한 언급은 인생의 조금함을 경계하는 잠언처럼 귓전을 맴돈다.

“나무는 추억과 연결시켜 주는 표상이고, 죽음과 환생, 또한 성장하고 발아하는 모든 자연의 생명, 무사함과 풍요로움의 상징이다”라는 말로 책은 끝난다. 송지연 옮김 7500원.

<유윤종기자> gustav@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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