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진홍의 책꽂이]묵상하는 삶/일상속에 숨은 성스러움

  • 입력 2000년 3월 10일 19시 21분


□묵상하는 삶

켄 가이어/ 두란노

법정의 ‘오두막 편지’, 원성의 ‘풍경’, 현각의 ‘만행’ 그리고 지허스님의 ‘선방일기’ 등 스님들의 책이 서점가를 점령했다 싶을 정도로 맹위를 떨치고 있다. 여기에 더해 도올 김용옥의 ‘노자와 21세기’ 를 필두로 ‘화두, 혜능과 셰익스피어’ ‘금강경 강해’ 등도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

디지털, 인터넷, 벤처열풍 등 빠르게 속도만을 강조하며 질주하는 세상의 변화 앞에서 독자들은 역설적으로 느림과 여유 그리고 성찰과 묵상을 원하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디지털과 속도의 시대에 오히려 ‘선(禪)’과 ‘비움(虛)’이 이야기되는 것이리라. ‘선’과 ‘비움’은 불교와 노장의 사상이다. 그러나 기독교적 관점에서 이런 흐름에 접근한 책들도 적지 않다. 크리스천 작가 켄 가이어의 책은 그 중 하나이다.

가이어는 헌 책방에서도 ‘삶의 성스러움’이 자신에게 찾아왔다고 고백한다. 그는 어니스트 톰슨 시튼이 쓴 ‘인디언의 복음’이란 책에 나오는 예화로부터 이야기를 끌어낸다.

‘포타라모’라는 인디언 노인은 모두 스무줄의 양파를 팔고 있었다. 한 백인이 그 스무줄 전부를 모두 사면 얼마냐고 물었다. 인디언 노인은 스무줄 전부는 팔 수 없다고 했다. 왜냐하면 다 팔고 나면 그것으로 내 하루는 끝이기에, 내가 즐기고 사랑할 삶을 잃어버리는 것이 되기에 모두 한꺼번에 팔 수 없다는 것이었다. 무엇이든 한 쾌에 끝장내 버리려는 광기어린 속도의 시대에 인디언 노인의 모습은 결코 어울릴 수 없는 일처럼 보인다. 그러나 가이어는 말한다. “성스러움이란 다분히 우리 일상의 평범한 순간 속에 숨어있다. 일상의 순간 속에서 그것을 보려면 걸음을 늦추어야 한다”라고.

켄 가이어는 어린 시절 ‘설탕빵을 받는 일’을 매일의 성찬의식이라 불렀다. 마가린을 얇게 바른 뒤 설탕을 뿌린 빵 한 조각. 놀기 바쁜 아이였을 때도 그 빵의 힘으로 하루를 지냈다. 그 빵에는 맨발소년의 놀다 허기진 배보다 더 깊은 굶주림을 채워주는 것이 있었다. 빵을 건네주며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과 미소에 묻어온 사랑이 그것이다. 일하기 바쁜 성인이 된 지금도 어쩌면 우리는 그 빵의 힘으로 산다. 다만 지금은 설탕빵이 아니라 그 빵에 대한 추억이다. 누군가 나를 정성스레 돌봐주고 사랑해준 사람이 있었다는 추억말이다.

켄 가이어의 책은 작다. 그러나 큰 느낌이 있다. 켄 가이어의 책은 얇다. 그러나 깊은 울림이 있다. 설탕빵의 추억을 간직한 채 삶의 시장에서 하루하루를 살아내는 사람들에게 읽기를 권한다. 윤종석 옮김.

정진홍(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커뮤니케이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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