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제의 책]시인 고형렬 산문집 '은빛 물고기'

  • 입력 1999년 10월 22일 19시 15분


시냇물을 하얀 서늘함으로 메우며 번득이는 연어떼. 강렬한 모천회귀의 본능으로 숱한 시인 소설가들에게 창조의 영감을 가져다 준 영물(靈物).

시인 고형렬(45)에게 특히 연어는 남다른 소재다. 해남에서 태어나 양양에서 자라난 그는 연어가 남대천 물살을 거슬러 오르며 일으키는 흰 포말을 또렷한 원형질의 기억으로 간직하고 있다.

그가 연어의 성장과 대양에서의 삶, 모천에서 일생을 마치기까지의 일생을 장편산문 ‘은빛 물고기’(한울)로 엮어냈다.

“연어의 삶은 장엄하고 허무하다. 저 눈물겨운 종생(終生)에 바칠 무엇이 이지상에 있을 것인가? 다만 은빛 물고기처럼 아름다운 문장에 바다같은 내 생각을 실어보내고 싶었다.”

이름모를 산골짝 바위틈에서의 산란, 이제는 양양내수면(內水面)연구소에서의 대량산란으로 변해버린, 그러나 여전히 찬란한그 제의(祭儀), 오호츠크해의 심연을 무대로 펼쳐지는 성년기,이윽고 고향의 부름을 온 몸으로 느끼며,물살을 거슬러와 일생일대의 사랑을 나누고 새생명을 잉태시킨 뒤 자기를 소진시키는 과정….

10년의 세월동안 공들인 문장은 파닥이는 비늘처럼 빛난다. 시인은 특유의 투명한 감성과 다큐멘터리를 연상시키는 정밀함으로 연어의 짧디 긴 삶을 서술해 나간다.

그 유장함은 때로 선(禪)적인 목소리를 갖고 생명권 전체의 비밀스런 뜻을 꿰뚫고 있다. 떠나온 삶이란, 우리에게도 얼마만큼은 공통된 운명이 아니던가.

“내게도 분명 언젠가 저 치어들과 같은 시절이 있었던 것 같다. 어쩌면 나는 벌써 다른 작은 생명으로 태어나 차가운 물 속에서 이리저리 밖을 내다보면서, 앞에 흐르는 세찬 여울의 유속을 피하면서, 뱃바닥 밑의 검은 풀등을 내려라보며 영원의 잔 미소가 해살짓는 물가로 돌면서, 땅의 봄 흙내를 맡으면서, 들판 가까이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들으면서 눈이 박힌 단단한 머리를 두리번거리고 있을지 모른다….”

〈유윤종기자〉gustav@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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