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일보 방북기④]원시림에 묻혀버린 北-中국경

  • 입력 1998년 9월 11일 20시 01분


백두산 답사 나흘째인 9월1일. 해발 1천50m인 곤장(棍杖)덕의 마루턱에 오르니 남쪽으로 가림천에 둘러싸인 보천보 거리가 한눈에 보인다.

이 곤장덕 언덕으로 말하자면 민간에 전승해오는 이야기 한 토막이 있다. 1712년 숙종조 때. 감계사(監界使) 박권과 함경도 관찰사 이선부가 중국관리들과 함께 양국 국경선을 정하는 정계비를 세우려고 이 곳에 당도했는 데 두 벼슬아치가 산 마루까지 오르지 않고 도중에 주저앉아 술자리를 벌이는 바람에

중국쪽 뜻대로 경계가 정해졌다고 한다.

뒤늦게 이를 알게 된 인근의 백성들이 두 벼슬아치에게 곤장을 쳐야 한다는 뜻에서 이 마루턱을 곤장덕이라고 이름 붙였다는 것이다.

우리 일행은 곤장덕 마루턱에 올라 압록강이 내려다 보이는 깎아지른 듯한 절벽위에서 국경 너머 중국 땅을 건너다 보았다. 고원지대에 펼쳐진 끝없는 원시림의 수해(樹海). 저곳도 본래 우리 땅인데, 누구랄 것 없이 안타까움의 소리가 입에서 새어나왔다.

국경 바로 건너편엔 여염집 한 채가 달랑 보였다. 중국쪽 국경을 지키는 관리가 살고 있는 집이란다. 이곳이 국경이라고, 도무지 실감이 안난다.

허위허위 뻗어간 산야가 그냥 그렇게 이어져 있을뿐, 어디에도 인위적인 국경같은 것은 찾아볼 수 없었다. 다시 마루턱으로 올라오니 마침 점심때여서 그곳에 차려진 식사를 백두산 들쭉술을 한잔 곁들여 너스레를 떨며 먹었다. 사루기라는 민물고기 죽이 천하일품이었다.

보천보는 뜻밖에도 큰 마을이었다. 1937년6월4일 항일유격군의 습격으로 보천보전투가 벌어졌던 당시에는 농가 여남은 채 띄엄띄엄 흩어져 있는 마을에 주재소(파출소) 하나 달랑 있었겠거니 하고 짐작했던 것과 달리, 일본인 26가구(56명) 조선인 2백84가구(1천3백24명)에 중국인도 2가구(3명)가 살았다는 게 안내원의 설명이었다. 산림 벌채의 근거지였기 때문이란다.

보천보 전투현장은 당시의 총탄자국이 고스란히 보존돼 있는 일본 경찰 주재소 건물과 일본 경찰의 포대(砲臺), 불타 없어진 우체국도 완벽하게 복원돼 있었다. 주재소안에는 유치장과 무기고는 물론 천장에 도배지 대신 붙인 일본신문까지 그대로 남아있다.

바로 옆의 기념관으로 들어서자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이 당시 보천보 전투상황을 보도한 동아일보의 6월5일자 호외였다. ‘함남 보천보를 습격, 우편소 면소에 충화(방화)’ ‘작야(어젯밤) 2백여명 내습, 김일성 일파로 판명’ 등의 제목이 당시 치열했던 전투상황을 짐작케 했다.

6월9일자 양일천(梁一泉)특파원의 현지르포기사도 전시돼 있었다. 군복 차림의 해설원 여성은 당시 신문기사들을 하나하나 짚어가며 동아일보의 ‘용기있는 태도’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실제로 당시 동아일보는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 우승한 손기정(孫基禎)선수의 사진에서 일장기를 말소한 사건 때문에 폐간됐다가 6월2일 1년만에 복간된 직후였다.

우리 일행은 보천보 전적지를 돌아보는 동안 보천보 인민학교 1학년 어린이 1백여명이 행렬을 지어 견학을 와 선생님의 설명을 귀담아 듣는 모습을 목격했다.

붉은 수건을 목에 두르고 마치 북한 군인들이 행진을 하듯 팔을 좌우로 흔들며 걷던 어린이들은 우리 일행에게 고사리같은 손을 흔들며 반가움을 표시했다. 한반도 북쪽끝에서 마주친 손자같은 꼬마들의 손짓에 가슴 한구석이 뭉클하며 정이 솟구쳤다.

이호철(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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