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동아신춘문예/시부문]당선·입선소감 및 심사평

  • 입력 1996년 12월 31일 18시 15분


▼ 당선소감/배용제 ▼ 아주 한참을 책상 앞에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그저 무언가 텅 비어버린 듯한 느낌으로 내가 읽어왔던 책들을 응시하면서. 짧은 생각들이 스쳐 지나간다. 언제였던가. 유년 시절. 국어책 밖의 작품집들을 읽으며, 글짓기가 아닌 문학이라는 것에 대해 궁금증을 갖기 시작했던 때가. 아마 중학생 시절이 아니었나 싶다. 벌써 20여년, 나는 놀란다. 그러나 여전히 나는 문학이라는 것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미숙아다. 언제쯤일까?… 잠시나마 그 깊은 의미에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 날은. 몇해 동안 한 줄의 글도 쓰지 못하던 때도 있었다. 고통스러웠다. 지금의 순간을 얼마나 기다려왔는데…. 왜 이렇게 착잡한 건지, 거리는 왜 저리 썰렁한 건지. 지나온 그 많은 불면의 밤들. 다가올 수많은 불면과 가슴을 헤집어야 할 날들 (높은 곳에서 나를 내려다보실 하나님께 두 손을 모읍니다. 조금은 안도의 숨을 쉬실 부모님이 떠오릅니다. 오랫동안 나를 채찍질해주신 김명인 선생님께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곁에서 나를 지켜봐 주고 많은 힘이 되어준 희철에게 고맙고, 같이 글을 읽어준 주일이와 여러 친구들, 무강 누님에게 고마움을 전합니다. 또한 기뻐해줄 많은 분들에게도. 그리고 부족한 작품을 선정해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이제는 내가 기뻐해야 할 차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도대체 이러한 일련의 과정이 문학의 삶에 왜 필요한 건지 모르겠다. 책임져야 할 세월과 짓누를 무게속에서 내 안의 어떤 것들이 문학의 모습으로 드러날 때, 과연 이것이 무슨 역할을 할 수 있는지 알 수 없다. 그렇다면 나는, 문학이라는 이름표를 달고 갈 내 길이 어떻게 달라질 건지 두 눈 똑바로 뜨고 지켜볼 것이다. △63년 전북 정읍 출생 △서강대 신방과 및 서울예술신학대 기독문학과 수학 △현재 인테리어 디자이너로 활동중 ▼ 입선소감/이경임 ▼ 며칠 전 내린 눈이 햇살에 녹아 땅은 질퍽하다. 그 질퍽한 땅 위에 비닐 한 장을 깔고 할머니 한 분이 앉아 계신다. 양은 함지박에 늙은 호박 한 덩이가 담겨 있다. 올 겨울 할머니한테서 나는 늙은 호박을 네개나 샀다. 호박죽이나 호박 고물 박힌 떡이 딱히 먹고 싶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왠지 사지 않을 수가 없었다. 며칠 밤을 새워 가며 혼자 늙은 호박들을 손질했다. 단단한 호박 껍질을 벗기고 호박 속을 토막내고 채를 썰면서…. 새벽녘, 얼얼해진 손을 비비며 나는 자신에게 속삭이곤 했다. 『그래도 그 할머니한테서 호박들을 산 건 잘한 일이야』 어쩌면 나는 그 할머니의 모습에서 남루한 삶의 한 모습을, 할머니가 팔고 있는 호박들에서 시의 체취 같은 것을 어렴풋하게 느끼고 있는 지도 모른다. 요즘 들어 부쩍 부끄러움이 깊어진다. 80년대를 대학 도서관에 처박혀 보낸 것도 그렇고, 시집을 사 가지고 오는 길에 전에 나병을 앓았었다는 달걀 장수 아줌마를 만날 때도 그렇다. 아줌마의 넉넉한 미소만큼의 무게도 되지 못하는 얄팍한 시집과 나의 사소한 절망들이 부끄럽다. 길고 지루한 시쓰기의 고행에 지금 막 첫걸음을 뗄 수 있는 것도 온전히 이 부끄러움 때문이리라. 부족한 글을 굳이 선하여 주신 두 분 심사위원 선생님의 뜻을 격려의 채찍질로 새기며 깊은 감사를 드린다. 나의 작은 기쁨이 지난 1년 동안 함께 시를 써 온 「시통」 문우들과 아직도 이 시대에 시에의 꿈을 저버리지 못한 미지의 아름다운 벗들에게 따뜻한 위로가 될 수 있었으면 싶다. △63년 서울 출생 △87년 서강대 영문과 졸 △97년 전남대 대학원 영문과 입학예정 ▼ 심사평/정진규 정과리 ▼ 시가 다시 부활을 꿈꾸는가. 좋은 작품들이 많았다. 그러나 모든 시를 당선작으로 낼 수 없는 일이다. 할 수 없이 송판호의 「구두가 웃는다」, 오채운의 「꼬리뼈 그 자리에서」, 유창석의 「종이꽃을 태우며」, 이경임의 「부드러운 감옥」, 배용제의 「나는 날마다 전송된다」를 우선 추려낸 다음 배용제와 이경임의 시를 마지막 저울에 올려 놓았다. 이경임의 시는 무심코 읽으면 시의 전언을 자칫 놓쳐버릴 수도 있을 정도로 적요하다. 그 어투가 감옥의 풍경을 고스란히 전달한다. 그 침묵의 공간 속에서 시인은 거위로 변한 오빠들을 위해 베를 짜는 소녀처럼 언어의 직물을 한뜸 한뜸 수놓아간다. 그 직물에 성긴 데가 없다는 것은 시의 장점이지만 때때로 좀더 리듬감있게 벼려질 수도 있었을 구절들이 산문적으로 늘어나버린 것은 시의 흠이다. 그에 비해 배용제의 시는 선명하다. 텔레포트라는 가상현실을 제재로 하여 미래의 대한 환상, 거듭 꺾이는 희망들, 헛된 희망의 반복 속에 갇혀 버린 자아의 「견고한 공포」를 썩 화려하게 합성하고 있다. 그 화려함이 지옥같은 의식의 고뇌를 선명하게 부각시키는 장점을 가지고 있는 반면 그 지옥 속의 투쟁을 좀더 치열하게 밀고 나갔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이번 동아신춘문예 시부문응모작 가운데는 워낙 우수작이 많아 주최측의 양해아래 가작 한편을 더 고를 수 있었다. 배용제의 시를 당선작으로, 이경임의 시를 가작으로 밀면서 선에서 제외된 다른 분들, 즉 송판호 오채운 유창석씨에게는 각각 상상력의 넓이, 유머의 깊이, 감상성의 한계와 더 끈질기게 싸우기를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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