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권말 곳곳 누수현상]일손 놓은 공직 "6개월후면 바뀔텐데"

  • 입력 2002년 8월 11일 18시 36분


"장관순시"방송해도 3분의1이 자리비어

8일 오후 4시경 정보통신부 민원 관련 부서 사무실. 30명 정도 근무하는 사무실이지만 외근 부서도 아닌데 반 정도의 자리가 비어 있었다. 남아 있던 직원들도 서너명씩 모여 이야기를 나누는 등 여유로운 모습이었다.

이때 “장관님 순시가 있습니다”라는 안내방송이 나오자 사무실이 갑자기 분주해졌다. 누군가가 자리에 없는 직원들을 찾아오라고 지시했다. 일부 직원은 전화기를 붙잡고 번호를 눌러댔고 일부는 사무실 밖에 있던 직원들을 불러들였다.

10여분 뒤 장관이 도착했지만 여전히 3분의 1 정도의 자리는 비어 있었다. 한 직원은 “일부 휴가를 간 직원도 있긴 하지만 정권 말기라 이전과 달리 요즘 직원들의 근무 태도가 다소 해이해진 건 사실”이라고 말했다.

김대중(金大中) 정권이 말기에 이르면서 공직사회의 기강이 갈수록 느슨해지고 있다.

정권 출범 초기에 강력한 사정을 추진하며 공직사회의 기강을 확립해가던 때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가 나타나고 있다. 임기 말 레임덕 현상이 심해지면서 기강 해이가 더욱 두드러지고 있는 것이다.

▽‘담당 공무원 만나기 힘들어요’〓8일 오후 2시경 기획예산처의 한 사무실. 점심시간이 훨씬 지났지만 8개 자리 중 3분의 2 이상이 비어 있었다.

사무실에는 예산 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방문한 지방자치단체 공무원들과 공기업 직원들이 담당 공무원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들은 대부분 1시간, 길게는 2시간을 기다린 뒤에야 일을 볼 수 있었다.

점심시간 지나도 낮잠, 1~2시간 지나야 업무

한 방문자는 “담당 공무원이 낮잠을 자고 있는 걸 알고 있었지만 혹시라도 불이익을 받을까 봐 깨우지도 못하고 기다려야 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기획예산처 변재진(卞在進) 공보관은 “6월 초부터 진행 중인 예산편성작업 때문에 밤늦게까지 야근하는 직원도 많고 방문자들과의 면담이 길어져 뒤늦게 점심식사를 하러 나가는 직원도 많아 빚어진 일”이라고 해명했다.

▽‘새 사업은 나중에’〓정권 말기가 되면 빠지지 않고 논의되는 조직 개편에 대비해 해당 부처 직원들은 긴장하고 있다. 새로운 사업은 아예 시작할 엄두도 못 내고 현안 사업은 겨우 명목만 유지하고 있다.

정보통신부와 산업자원부 등 통합 논의가 있었던 부처의 직원들은 틈만 나면 자신의 부처가 살아 남아야 한다는 명분을 외부에 알리는 데 주력한다.

기존사업 질질 끌기, 조직개편 대비 로비

상황이 이렇다 보니 업무에 대한 직원들의 열의도 식기 마련. 건설교통부의 한 직원은 “솔직히 새 정책을 추진하기보다는 기존 사업을 질질 끌고 있는 형편”이라고 털어놓았다.

▽원인과 대책〓최낙정(崔洛正) 해양수산부 기획관리실장은 “공직사회의 기강 해이는 공무원들이 국민보다는 권력을 의식하기 때문”이라며 “공무원은 사기와 자긍심을 먹고 사는 조직인 만큼 자발적으로 일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줘야 한다”고 말했다.

서울대 행정대학원 이달곤(李達坤) 교수는 “5년마다 정권이 바뀌기 때문에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안에 대해 주저하기 마련이지만 그렇다고 본업무까지 제쳐두는 것은 문제”라며 “보다 엄격한 공직기강 감찰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황진영기자 buddy@donga.com

민동용기자 mind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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