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철학의 고향을 찾아서(9)]서학-천주교 발상지 천진암

  • 입력 2002년 6월 16일 21시 13분


초라한 천주교발상지 '강학회 터'
초라한 천주교발상지 '강학회 터'
천진암 오르는 언덕길에 보이는 것은 오직 하나의 십자가뿐이다. 거대한 십자가가 그 일대를 압도한다. 그리고 십자가에 다다르면 그 뒤에 펼쳐지는 수만 평의 대성당 부지.

한국천주교회 창립 300주년을 맞는 2079년까지 100년 계획으로 건설중인 ‘천진암대성당’이 그곳에 들어서면 정말 장관일 것이다. 5만여 평의 땅에 세워지는 총 1만3000여 평의 건물, 8만여 명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란다.

그러나 한국천주교의 발상지인 이곳 경기 광주의 천진암(天眞菴) 자리에 ‘천진암’은 흔적도 없다. 대성당 부지 바로 뒤편에 있는 천진암을 찾아간 그날도 많은 천주교인들이 성지순례를 위해 모여들었다. 단체로 온 사람들, 온 가족이 함께 온 사람들, 조용히 손을 꼬옥 잡고 산길을 오르는 노부부도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볼 수 있는 것은 한국천주교를 일으킨 선조들의 묘역 아래 막막하게 펼쳐진 대성당 부지에서 상상할 수 있는 한국천주교의 화려한 ‘미래’뿐이었다. 이곳이 한국천주교의 성지가 되게 한 ‘과거’는 보이지 않는다. ‘천진암 강학회 터’란 푯말은 우거진 수풀 사이에 가려진 채 초라하게 꽂혀 있다.

1779년 일군의 조선 유학자들은 불교의 사찰인 이 암자에 모여 중국을 통해 들어온 새로운 학문인 ‘서학(西學·천주교)’을 공부하는 모임을 만들었다. 연장자로 이 모임을 이끌었던 권철신(權哲身)과 일신(日身) 형제를 비롯해, 가장 신앙이 깊었다는 이벽(李檗), 조선인 최초로 영세를 받게 되는 이승훈(李承薰), 실학자 정약용의 셋째형인 정약종(丁若鍾) 등 이 모임의 참석자들은 어렸을 때부터 정통 성리학을 공부한 선비들이었다.

“서양 서적은 선조 말년에 이미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이름 난 고관이나 큰 학자들 가운데 보지 않은 이가 없었다. 그들은 그것을 제자백가나 도교 또는 불교의 서적과 같이 여기고 서재에 비치해 두고서 읽었다.”(안정복의 ‘천학고(天學考)’ 중에서)

서학 관련 책은 당시 지식인 사회에 유행이었지만, 그것은 대부분 새로운 문물과 학문에 대한 호기심의 수준이었다. 그런데 천진암 강학회의 참석자들은 서학을 공부하면서 차츰 이것이 단지 학문적 이론이 아니라 일종의 종교임을 알게 됐고 이를 제대로 공부하기 위해서는 종교적 제의(祭儀)를 병행해야 함도 깨닫게 됐다. 천진암 모임에 관한 소문이 번지며 이들을 우려하고 비판하는 목소리도 높아 갔다. 서학을 믿는 사람들인 신서파(信西派)와 이를 비판하는 공서파(攻西派)의 논쟁은 이렇게 시작됐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이 천진암 강학회의 신서파는 물론 공서파의 대표적 논객이었던 신후담(愼後聃) 안정복 등도 모두 성호 이익(星湖 李瀷·1681∼1763)의 제자들이었다는 사실이다. 이익은 유형원(柳馨遠) 박세당(朴世堂)의 뒤를 잇는 조선후기 실학의 선구자로 전통적인 유학 경전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천문 역법 의학 등 서구에서 들어온 자연과학에도 폭넓은 관심을 가진 개방적 성향의 지식인이었다. 이 때문인지 그의 제자들도 다양하고 새로운 문물에 대해 열린 태도로 관심을 기울였다.

천진암 입구
천진암 오르는 길에는 그 일대를 압도하는 거대한 십자가가 서 있고 그 뒤에는 100년 계획으로 건설중인 천진암 대성당 부지가 펼쳐진다.

이익이 사망한 뒤 성호학파의 맏형 노릇을 하던 신후담과 안정복은 신서파 후배들의 서학 모임이 정적(政敵)들에게 정치적 공격의 빌미를 주지 않을까 걱정하며 권철신 등을 타일렀지만 그들의 학문적 종교적 신념을 꺾을 수는 없었다. 이들은 이벽의 ‘성교요지(聖敎要旨)’, 정약종의 ‘주교요지(主敎要旨)’ 등 천주교를 일반에게 쉽게 이해시키기 위한 저술에 힘썼고 이승훈은 베이징에서 영세를 받고 돌아와 1784년 국내에 천주교회를 세웠다.

한국천주교의 기원은 천주교 선교사상 유례가 없는 독특한 것이었다. 서방에서 목숨을 걸고 파견된 선교사에 의한 이식이 아니라 외부의 도움 없이 현지인들의 자발적인 수용에 의한 것이었다. 당시 조선의 지식인들은 국가 이데올로기였던 성리학이 더 이상 시대의 변화를 선도하기에 부족하다는 한계를 절감하며 새로운 철학사상을 모색하고 있었다. 천진암에 모여든 일군의 지식인 역시 국가의 장래를 걱정하며 사상적 대안을 찾던 인재들이었다. 처음에는 서학도 이들이 모색하던 여러 이론들 중 하나일 뿐이었다. 이들은 만민 평등의 인간관, 탈중국중심적 세계관, 천지창조와 영혼불멸을 설하는 우주관, 인간중심적 자연관 등 새로운 사상을 담은 서학에 점점 더 매력을 느꼈고 그것이 유교와 상충되는 면이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를 받아들이게 됐다.

정치와 종교와 학문이 분리되지 않았던 당시 사회에서 유교에 대한 도전은 종교적 박해와 정치적 탄압을 각오해야 하는 것이었지만, 신서파는 오랫동안 이단(異端)과 싸워 온 성리학과 목숨을 건 논쟁을 벌이며 서학의 토착화에 기여하게 된다.

그러나 1799년 남인을 지켜주던 재상 채제공(蔡濟恭)이 사망하고 이어 이듬해 정조가 49세의 나이로 승하한 후 11세의 순조가 즉위하자 노론벽파와 소론시파의 연합정권은 서학을 빌미로 채제공을 따르던 남인시파와 성호좌파(신서파)에 대한 본격적 탄압을 시작했다. 1801년에는 이른바 ‘신유교난(辛酉敎難)’에 권철신 이승훈 정약종이 참수당하는 등 처참한 탄압이 이어지며 이른바 ‘세도정치기’로 접어든다.

그 후 조선은 과학기술을 포함한 서구문화 전반에 대해 문을 굳게 닫아걸었고 서학은 철저한 탄압 끝에 학문적 접근이 거의 차단된 채 지하의 종교로 전파됐다. 곧 다가올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시대에 미리 준비할 기회를 놓친 조선은 19세기 후반 서구 열강이 거센 물리력을 앞세우고 밀려들어 올 때 부끄러운 강제 개항을 해야 했다.

서학은 이렇게 우리의 필요에 의해 우리가 가져왔고 험난한 역사 속에서 한국인의 삶과 사유 속으로 들어왔다. 천진암이란 ‘불교’의 터전에서 당시의 시대현실을 치열하게 고민했던 ‘유학자’들이 없었더라면 한국천주교는 그만큼 역사가 짧아졌을 뿐만 아니라 그 깊이도 훨씬 얕아졌을 것이다. 그럼에도 신의 종교를 따르기 위해 인간의 역사를 소홀히 하는 것이 합리화될 수 있을까?

발길을 돌리며, 이 땅에 천주교가 싹트게 한 풍부한 문화적 토양과 당시 지식인들의 치열했던 역사 인식도 후세에 함께 전할 수 있기를 기원했다.

김형찬기자·철학박사 khc@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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