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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김승련 논설위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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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1-05~2025-12-05
칼럼100%
  • [김승련 칼럼]노만석의 6시간, 한덕수의 1시간

    열흘 전 사직한 노만석 전 검찰총장 대행은 땅을 치고 후회했을 것이다. 이럴 줄 알았더라면 대장동 사건을 항소한 뒤 징계를 받든 어떻든 정면승부 할 걸 그랬다고 생각하겠지만, 이미 늦었다. 노 전 대행은 문제의 금요일 오후 5시 30분 아직 항소하지 못했다는 걸 알게 됐다. 이후 6시간 남짓 세 가지 선택지를 놓고 면밀하게 후과(後果)를 따져봤을 것이다. 항소 재가를 받도록 정성호 법무장관을 설득할 것인지, 장관 뜻을 거슬러 항소장을 접수시킬 것인지, 아니면 장관 메시지처럼 “신중하게 검토”한 뒤 항소를 포기할 것인지 등이다. 그는 대검찰청 검사장들, 서울중앙지검장과도 상의했다. 스스로를 무사요 칼잡이라 부르는 이들의 집단적 선택은 놀랍게도 가장 손쉽고, 그래서 비겁한 세 번째 ‘항소 포기’ 시나리오였다. 항소를 밀어붙였다면 어땠을까. 노 전 대행은 권력 앞에 고개 숙인 검찰 굴욕사의 주인공으로 기억되는 작금의 상황을 모면하는 것은 물론이고 대행 자리를 지켰을 수도 있다. 그날 밤 11시 기류를 파악한 언론이 첫 보도를 하기 전에 항소장을 법원에 제출했다면 장관이 법무차관을 통해 의견을 전달한 전모는 비밀에 부쳐졌을 수 있다. “나는 경영자” “용산 법무부 관계를 고려”라고 실토해 망신을 살 일도 없었을 것이다. 법무장관으로선 특별한 지휘를 한 것이 없다는 입장이니 문책받을 일도 없다. 한덕수 전 국무총리도 12·3 계엄의 밤에 비슷한 압박을 받았다. 밤 8시 대통령에게서 임박한 계엄 선포 계획을 들었지만, ‘골든타임’인 첫 1시간 동안 만류하지 못했다. 본인은 반대했다고 주장하는데, 공개된 CCTV 영상이나 여타 장관들 진술을 보면 그는 그날 밤 계엄에 순응한 것에 가까웠다. 짧은 순간 세 가지 선택지를 떠올렸을 것이다. 계엄 찬동이냐, 반대 표시 후 소극적 수용이냐, 결연히 반대 후 사직(辭職)할 것이냐…. 특검은 찬동했다고 보고 있고, 한 전 총리는 ‘소극적 수용일 뿐’이라며 법정서 다투고 있다. 한 전 총리는 항의의 뜻으로 사의를 밝히고, 그런 뒤 몇몇 장관들과 함께 국무회의장을 박차고 나섰다면 계엄은 불발됐을까. 아닐 것이다. 윤석열 전 대통령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상태였고, 특전사 등 계엄 병력은 출동 채비를 다 갖춘 때였다. 계엄 선포를 막았더라도 기획 사실이 드러날 수밖에 없었고, 어마어마한 정치적 파장을 피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하지만 용산 대통령실에서 몸을 던졌다면 한 전 총리는 윤 정부의 2인자였다는 정치적 책임과는 별개로 지금 같은 수모와 사법적 고초는 피할 수 있었다. 한덕수 노만석 두 공직자는 운명적인 오판을 했다. 머리로 꾀를 내지 않고 마음으로 큰 판을 읽었더라면 용기 있는 참공직자로 박수 받았을 일이다. 결기를 보인 뒤 크고 작은 불이익을 받을 수도 있지만, 대의를 따랐다는 명분을 쥐고 있으니 공직의 마지막을 망치지 않았을 것이다. 장삼이사(張三李四)에겐 뻔히 보이는 쉬운 답 대신 자충수를 둔 이유가 궁금할 뿐이다. 짐작 가는 첫째 이유는 이들의 상상력 부족이다. 계엄 이후, 항소 포기 후 한국 사회가 어떻게 반응할지를 시각적으로 그려보는 데 실패했다. 1시간과 6시간이 짧아 보이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각각 경제관료와 검사로 수십 년 동안 산전수전 겪은 두 사람은 앞으로 정국이 어떻게 흘러갈지를 손에 잡히듯 그려낼 수 있는 시간이었다. 그런데도 이런 대명천지에 계엄이 성공해 국회를 멈춰 세울 수 있다는 쪽에 의탁했다는 것이 어이없다. 또 대장동 사건 1심 판결문에 대해 보고받았을 텐데, 김만배 일당의 형사적 금전적 이익에 민심이 얼마나 부글거릴지 짐작 못 했다는 말인가. 또 하나 이유는 공직 DNA다. 주위 평가를 들어보면 둘 다 강단 있는 승부사보다는 기질적으로 순응형 노력파에 가깝다. 공직 사다리를 올라오는 동안 소수 의견을 관철한 경우보다 대세를 모범적으로 따르는 쪽이었다고 한다. 결국 두 사람은 어두운 기운이 닥쳤을 때 옳고 그름보다는 유불리를 따졌고, 책임의식보다는 정치적 후각을 예민하게 가동시켰던 것 아닌지 짐작할 뿐이다. 공직사회는 두 사람의 비극적 추락을 지나가는 일로 여겨선 안 된다. 공직자라면 상부로부터의 압박에 따라 원칙을 훼손하는 결정을 하도록 몰릴 때가 있다. 두 사람의 추락은 얼핏 보면 한순간에 벌어진 일 같지만, 오랜 공직생활에서 체화된 무언가가 발현된 것으로 봐야 하지 않을까. 그래서 답할 수 있어야 한다. 나라면 박차고 일어났을 수 있나. 나라면 ‘항소장 접수시키세요. 책임지겠습니다’라고 지시할 수 있을까.김승련 논설실장 srkim@donga.com}

    • 2025-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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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승련 칼럼]3대 특검이 쓰는 징비록… “비밀은 배신한다”

    최고 권력자 주변엔 비밀이 넘칠 수밖에 없다. 조선조 국왕과 왕비가 머무는 곳을 지극히 비밀스럽다고 해 지밀(至密)이라 불렀다. 대통령 곁엔 명함에 비(祕)자를 쓰는 참모들이 30명은 족히 넘는다. 권력 핵심부의 정치적 논의, 인사 검증 등의 과정은 하나하나가 기밀인데, 잘 지켜지던 보안은 레임덕 징후와 함께 구멍이 생기곤 한다. 비상계엄과 탄핵 이후 생생히 목격하는 대로다. 윤석열 전 대통령의 채 상병 사건 당시 격노를 전 안보실 1차장 등이 인정했고, 대통령의 당 공천 개입을 친윤 핵심 의원이 확인했다. 그토록 감추려 했건만 맥없이 드러나고 있다. 충성파라던 전 경호처 차장도 태도를 바꿔 대통령의 비화폰 기록 삭제 지시를 시인했다. 전 특전사령관은 “총으로 쏴 죽이겠다고 그러시지 않았느냐”고 발언해 윤 전 대통령을 당황케 했다. 김건희 여사도 예외는 아니다. 믿었던 건진법사나 건설사 오너 등이 명품 제공 사실을 털어놓았다. 명태균 씨 폭로도 빠질 수 없다. 돌이켜 보면 김 여사는 느슨한 ‘거래적 의리’에 의탁해 겁 없이 비밀을 공유했던 것이다. 용산에 머무는 동안 누구도 어쩌지 못할 것이란 믿음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어느 동영상 속 김 여사는 비밀 유지가 불가능한 인간사를 정확히 아는 듯했다. “비밀은 없어요. 잠깐은 속일 수 있어도, 결국 비밀은 다 나와요.” 전 국민의힘 대표의 배우자가 보냈다는 프랑스 명품백도 그렇다. 3년 가까이 지난 시점에 이런 방식으로 드러날 걸 상상이나 했을까. 비밀은 발이 달린 듯 사방에서 걸어 나왔다. 이처럼 3대 특검 수사는 비밀의 비밀이 깨지는 과정이다. 수사와 브리핑, 영장과 공소장, 재판 중계를 통해 특검은 한국 사회에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임진왜란 후 나온 징비록이 한 역할대로다. 과거의 어떤 잘못을 징(懲)하고, 후대에 무엇을 전달해 비(毖)하도록 할지가 차곡차곡 기록되고 있다. 2025년판 징비록의 실천적 교훈이 있다면 그중 하나는 자기 위험은 본인이 알아서 챙겨야 한다는 점이다. 누구도 내 비밀을 지켜준다고 장담할 수 없다. 문자건 전화 통화건 캡처되고 녹음될 것이고, 부적절한 일이 있었다면 몇 년 뒤라도 망신을 살 각오를 해야 한다. 올바라야 한다는 윤리를 따지기 이전에, 나의 안녕을 위해 삼갈 수밖에 없다. 300쪽이 넘는 한 정치인의 1심 판결문을 읽어본 적이 있다. 수사기관이 달려들면 포렌식 수사가 얼마나 정교하게 내 삶을 재구성할지에 생각이 미치면 정신이 번쩍 들 수밖에 없다. 이런 교훈이 새로울 것도 없다. 과거에도 녹음 파일은 공개됐고, 불법 행위를 담은 업무 수첩도 여럿 압수되곤 했다. 문제는 우리가 과거에서 교훈을 얻지 못한다는 점이다. 개개인은 물론 검찰 같은 권력기관은 자신들의 과거에서 반면교사를 더 못 찾은 듯하다. 그 결과 김건희 봐주기를 거쳐 검찰청 폐쇄라는 운명을 맞았고, 전 검찰총장이 수사받고 있다. 놀라운 일은 이재명 정부의 검찰도 대장동 사건 항소 포기로 새로운 파문을 낳고 있다는 점이다. 이틀 사이에 중앙지검장은 사표를 냈고, 검찰총장 대행은 “검찰이 주도하여 한 일”이라며 선을 그었다. 이 사안은 당사자들의 부인과는 별개로 대통령실, 법무부가 의사 결정 과정을 잘 알았다고 보는 것이 상식에 부합한다. 과연 비밀이 없는 지금 세상에서 서울중앙지검장은 진실을 끝까지 안고 갈 수 있을까. 항소 포기 결정은 경주 정상외교가 끝나자마자 민주당이 재판중지법 입법을 추진하려던 것을 용산이 나서서 제동을 건 때와 비슷한 시기에 진행됐다. 우연인지, 누군가 조율한 것인지 의문이 따를 수밖에 없다. 검찰 업무를 총괄 보좌하는 대통령민정수석은 수년 전 검찰 간부회의 때 ‘뉴스페이퍼 스탠더드’라는 말을 남긴 적이 있다. “(수사라는 칼을 휘두르는 검찰은) 어떤 행동을 할지 고민될 때 내가 하는 행동이 내일 아침 조간신문 1면에 났을 때 납득될 수 있는지 살피라”는 취지였다. 권력기관 구성원의 처신에 이만한 기준이 있을까. 윤 전 대통령 부부, 계엄에 가담한 군 장성들, 봐주기 수사를 한 과거 검찰은 물론 지금의 검찰과 법무부, 용산은 이 기준에 자신을 비춰 보길 바란다. 비밀이 없는 세상에 우리 앞엔 두 가지 선택이 놓이게 된다. 오늘의 내 행보가 어떻게든 공개될 수 있다는 두려움을 마음에 둘 것인지, 아니면 그렇기 때문에 더 입 무거운 충성파와 ‘우리 사람끼리’를 강화할 것인지. 양자택일할 일이 아니니 둘 사이 어딘가겠지만, 어느 쪽에 더 가까울 때 공공선과 나의 안위가 더 보장될지는 자기만의 답을 제각각 갖고 있을 것이다. 김승련 논설실장 srkim@donga.com}

    • 2025-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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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승련 칼럼]유튜브 숏폼에 의존하는 ‘어글리’ 정치

    현장 정치부 기자 시절, 안도현 시인의 글을 읽고 정치인이라면 시작(詩作)에서 배울 점이 많다고 생각했다. 안도현은 시인을 ‘말로 세상을 바꾸는 존재’로 여겼다. 그는 시를 쓰는 태도에 대해 “허리를 낮추거나 무릎을 구부려 (길가의 들풀을) 관찰할 줄 알아야 한다” “양심을 속이거나 거짓됨이 없어야 한다”고 썼다. 유권자 앞에 더 낮아지고, 삿됨 없이 정직한 언어로 세상을 마주하는 정치인들이 더 나올 수 있겠다 기대했다.당시 생각이 부질없었음을 인정한다. 모두가 고개를 젓는 작금의 정치는 시적(詩的)이기는커녕 추문(醜文)이 너무 많아졌다. 국정 사유화, 계엄, 탄핵, 정권교체에 이어 거대 여당이 이끄는 국회를 지켜보며 이런 생각을 갖는 이들이 더 늘었을 것이다. 요즘 법사위에서의 고성, 반말과 삿대질, 방미통위에서 벌어진 언어폭력을 통해 바닥에 떨어진 정치를 봤다. 유튜브 알고리즘이 만든 현상이라지만, 정치인들은 문제를 바로잡기는커녕 한술 더 떠 이 흐름에 올라타 강성 지지층만 바라보고 있다.정치인의 저질 발언이 뭐가 새삼스럽냐고 반문할 수 있다. 2008년 11월 동아일보가 보도한 여야 대변인의 1년 치 논평 1000건 분석 기사를 보면 답을 찾을 수 있다. 놀라운 건 상대 정당에 대한 공격성과 적대감에서 가장 부정적 점수를 받은 논평 2가지다. “(그들은) 시대착오적인 극우 형제” “정권교체 저지를 위한 마지막 발악이 (민주당) 곳곳에서…”. 지금은 매일같이 듣는 이런 논평이 최악으로 평가되던 시절이었다.2008년 기사를 보면 저격수 역할은 여야 부대변인들이 도맡았다. 당 지도부나 현역 의원이던 대변인들은 모진 비판거리가 있을 땐 당내 입지가 약한 부대변인들에게 넘겼다. 중진들이 한발 뺀 것이지만, 그렇게 만든 공간에서 타협과 절충이 이뤄졌다. 하지만 여운과 함축의 맛을 담은 정치 논평이 박수받던 그 시절은 이제 가고 없다.말의 품격이 떨어진 정치는 그 공격성만이 문제는 아니다. 사막 같은 정치 언어는 생각의 빈곤, 콘텐츠 부재를 가리는 외피가 돼 버렸다. “첫째, 둘째, 셋째”를 말하며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옛 정치인들이 그리울 정도다. 올망졸망하게 키 작은 정치인들만 넘쳐난다. 선수(選數)는 쌓았으되, 지도자다움을 키우지 못한 결과다. 대통령감, 당 대표감으로 여겨지는 거물이 점점 줄고 있다. 전체적으로 국회의원들 언어가 옛 부대변인과 비슷해졌다.내실 없음은 숏폼 정치로 때우고 있다. 숏폼 속 정치인들은 연예인과 다를 게 없을 때가 많다. 한 세대 전 미국 워싱턴 정가에서 유행하던 말(“Politics is show business for ugly people”)이 한국에도 상륙한 것이다. 의역하자면 “정치인과 연예인은 똑같은 기질을 지녔다. 인물이 빼어나면 연예인을 하고, 그 반대는 정치를 할 뿐이지”라는 뜻이다. 이런 정치의 큰 해악은 국가 현안을 다뤄야 할 신문지면과 방송뉴스 시간을 뺏는다는 거다. 이번 주 경주에서 동북아 질서의 30년을 가늠할 한미, 미중 정상회담이 잇따라 열리고, 정부 어디선가는 AI 시대와 민생 복지 정책에 대한 논의가 진행 중이다. 하지만 정치인 싸우는 영상에 빠져든 대중은 무거운 주제에 눈길을 주지 않는다.“우리가 너무 심했다”는 자성은 없다. 당 원로나 어른들도 뒷짐만 지고 있다. “의원들이 상임위에서 싸울 때 보좌관들이 휴대전화로 영상 찍으러 따라다니는 게 정상이냐”는 지적이 안 들린다. 200년 전 나왔던 ‘독일 국민에게 고(告)함’ 강연 시리즈처럼 국회의장, 당 대표를 지냈던 이들이라면 피를 토하듯 촉구해야 하지 않나.좋은 정치에 목마른 유권자들은 작은 일에도 감동할 준비가 돼 있다. 정치가 먼저 허리 낮추고, 무릎 구부리는 걸 보고 싶어 한다. 욕심 덜어내고, 관조하고, 손 먼저 내밀며 자연과 하나가 되려는 시인들의 태도가 우리 정치에서 발붙일 곳이 없다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정당들이 스스로 변할 여지도 크지 않다. 여전히 “악수는 사람과만 한다”거나 “여당과 잘 싸우는 게 먼저”라며 버티고 있다. 상대 당이 변해야 한다고 목청 높일 뿐 자당이 먼저 달라지겠다는 의식도 없다. 그럼에도 여의도에서 반말과 악쓰기를 멈추겠다는 다짐을 먼저 내놓는 정당이 나오길 바란다. 그럴 경우 그들은 굴복한 게 아니라, ‘지는 게 이기는’ 게임을 하는 것이다. 유권자는 언제나 그렇듯 정확하게 기억할 것이다.김승련 논설실장 srkim@donga.com}

    • 2025-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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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승련 칼럼]‘남한산성’에 갇혀버린 70년 동맹

    트럼프 정부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어떤 사업인지도 모르는 미국 내 사업에 나랏돈 3500억 달러를 100% 현금으로 투자를 하라는 것이다. 국난이 눈앞에 닥친 셈이다. 거칠게 빗대자면, 남한산성에 갇힌 채 청(淸)의 홍타이지에게 무조건 항복을 요구받던 병자호란 때와 크게 다를 게 없다. 야만적 힘이 정의던 400년 전 우리는 추위와 굶주림 속에 59일 만에 투항했다. 청과 싸우자는 척화파와 화친하자는 주화파가 맞선 것은 사실이지만, 역사학자 한명기에 따르면 조정에선 95 대 5 비율로 싸우자는 쪽이 압도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조선의 선택은 5% 소수파가 제시한 길이었는데, 굴욕적일지언정 피해는 최소화하려던 선택이었다. 당시엔 우리가 오랑캐라 배척하던 세력이 남한산성을 에워쌌는데, 지금은 미국이 70년 동맹을 ‘남한산성’에 몰아넣었다. 한국인에게 처음으로 배고픔을 딛고 서게 했던 미국이 국난을 가져온 것이다. 이런 역설이 어리둥절할 뿐이다. 이달 29일 트럼프 대통령이 경주에 올 예정이다. 8월에 이어 2차 한미 정상회담을 준비하는 지금 3가지를 묻게 된다. ①트럼프는 왜 유독 한국에 모질게 나오나 ②대미 투자 총액을 줄이는 등 우리 부담을 덜 길은 없나 ③투자협상 타결 이후 한미동맹은 온전할 수 있나. ①에 대한 답은 상대국을 대미 충성도에 따라 차등 대우하겠다는 트럼프 캠프의 생각에서 찾을 수 있다. 고율 관세를 부과하고 약(弱)달러를 추구한다는 정책이 정리된 이른바 ‘스티븐 마이런 보고서’를 보자. 그곳에선 트럼프의 경제·안보 정책에 얼마나 잘 따르느냐에 따라 나라별로 관세를 차등해서(graduated tariffs) 부과하겠다는 대목이 등장한다. 우리 눈에 일본은 맹목적으로 미국을 추종한다. 한국 정권교체기마다 등장하는 중국 경사(傾斜)론도 일본엔 없다. 트럼프 사람들이 한국에 더 가혹해 보이는 이유다. 이재명 정부는 ②와 관련해 투자 총액도 줄이고, 지분투자 비중을 최대한 낮추는 양 갈래 협상을 진행 중이다. 미국은 한국이 자신들 요구를 100% 이행할 여력이 없다는 걸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조건을 누그러뜨릴 기미는 안 보인다. 트럼프식 협상 전략일 수도 있고, 이재명 정부의 혼을 쏙 빼놓아 보려는 의도일 수도 있다. 대미 수출품에는 대체로 25% 고율 관세가 붙고 있다. 그렇다고 시간이 미국 편만인 것은 아니다. 전 세계는 한미 협상의 결론은 물론 과정까지 주시하고 있다. 동맹의 모범국 한국이 굴복당한다면 어떤 나라가 미국의 동맹 리더십을 흔쾌히 따를까. 이럴 때일수록 아쉬운 것이 한국 보수의 역할이다. 한미 간 가치동맹을 주도해 온 그들이라면 국익의 이름으로 협상을 도울 기회다. 하지만 움직임이 보이지 않는다. 현 여권에 대한 정치적 정서적 반감 탓일 텐데, 하책(下策)으로 기억될 것이다. 이번 협상이 타결된 이후 한미동맹은 전혀 다른 길을 걷게 될 가능성이 크다. 그런 점에서 질문 ③에 대한 답을 미리미리 준비해야 한다. 김용범 대통령정책실장의 “한국을 밟는다고 밟아지는지 한번 보라. 밟는 (미국의) 발도 뚫릴 거다라고 미국에 말했다”는 설명은 놀랍다. 오죽하면 그랬을까 싶지만, 이건 동맹끼리의 언어가 아니다. 우리가 미국 없이 중국과 일본을 맞상대할 방법은 없지 않나. 하지만 지금처럼 밀린 월세 받아 가듯 동맹의 혜택을 받아내겠다는 건 머리론 이해해도 가슴으로 승복하기 어렵다. 결국 가치동맹이 훼손된 자리에는 계약동맹이 들어설 것이고, 피를 나눈 혈맹이 아닌 필요할 때 주고받는 사이가 될 수 있다. 잘 작동되는 듯하더라도 ‘결정적 순간’에 미국이 한국을 위한 안보개입을 이행할지 의구심이 생길 수밖에 없다. 나토동맹은 즉각 개입이지만, 한미동맹은 ‘각자의 헌법적 절차를 거친다’는 지체 요인이 있다. 협상 타결은 미국이 요구를 양보해야 가능하다. 그 대신 우리는 뭘 줄 수 있나. 결국 전략적 유연성이든, 중국 문제든 ‘동맹 현대화’로 이름 붙인 미국의 동맹구상을 수용하는 어딘가에 길이 놓여 있을 것이다. 트럼프와의 대좌가 다가올수록 이 대통령은 외롭다고 느끼는 시간이 늘어날 것 같다. 엊그제 퇴임을 앞둔 이시바 일본 총리가 2차 대전 패전 80년을 맞아 왜 일본의 군국주의를 정치가 막지 못했는지에 대해 글을 남겼다. 내용 자체보다 그런 글을 마무리하기까지 늦은 밤 홀로 생각에 잠겼을 모습이 어른거린다. 이 대통령에게 필요한 것은 그런 절대 고독의 시간이다. 동맹을 남한산성에서 꺼내는 일은 미국도 할 수 있지만, 이 대통령도 할 수 있다. 김승련 논설실장 srkim@donga.com}

    • 2025-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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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승련 칼럼]대법원장 겨냥 폭로가 일깨운 미디어 환경

    더불어민주당 소속 서영교, 부승찬 의원이 꺼내든 조희대 대법원장 비밀회동설은 여러 이유에서 충격적이었다. 회동설 폭로와 함께 사법부 수장의 중도 사퇴를 요구할 정도였는데, 많은 게 허술했다. 30년 전 박계동 의원은 비자금 의혹을 제기하면서 은행 자료라도 흔들었지만, 이번엔 AI 변조 가능성까지 거론된 음성파일이 사실상 전부였다. 당 내부에서도 대놓고 말은 못 해도 외면하는 기류가 형성됐다고 한다.부 의원은 폭로 며칠 뒤 지상파 라디오에 출연해 같은 주장을 폈다. 국회에서 한 일방적 폭로가 아니라 방송사 앵커를 마주한 자리였다. 부 의원은 확실한 근거가 있는지 묻는 질문을 3, 4개 받았다. 앵커는 “제보의 신뢰도가 떨어지는 것 아니냐”고까지 물었다. 대법원장이 ‘이재명 사건은 대법원에서 알아서 처리한다’고 말했다는 문제의 그 오찬 모임 참석자 4명의 면면을 볼 때 뭔가 어색하다는 지적이었다. ‘폭로 전에 이런 상식적 의문을 따져 보지 않았느냐’는 질책처럼 들렸다.세상이 뒤숭숭할 때는 말이 먼저 흔들린다고 했는데, 우리 공론장과 미디어 지형에 딱 들어맞는 말이다. 언제부턴가 우리 정치인들은 전통적 언론을 피하고 있다. 언론학자들이 쓰는 ‘언론 회피(바이패싱·Bypassing) 저널리즘’ 현상이다. 부 의원도 지금쯤 이런 생각을 갖게 됐을지 모르겠다. 정치인들은 우호적 유튜브를 더 찾는다. 12·3 계엄 직후 국민의힘 윤상현 의원이 주적(朱赤)이 동색인 같은 편 유튜브를 방문해 탄핵 반대 여론전을 시작했다. 그는 “유권자들이 1년 후에는 다 찍어준다”고 했다. 여론의 호된 비판을 받았는데, ‘같은 편’인 유튜버는 그 문제적 발언을 들으면서 경고음을 느끼지 못한 듯했다. 끼리끼리 같은 편의 집단사고가 특징인 유튜브에선 생각의 힘이 작동할 공간이 좁다.TV건 유튜브 매체건 진행자 역량이 더없이 중요해졌다. 지난해 총선을 앞두고 조국혁신당 조국 당시 대표는 여러 유튜브에 출연했다. 조 대표는 당시 “입시 문제로 잘못했으니 처벌받을 것이다. 하지만 권력형 비리는 1건도 없었다”는 취지로 말했다. 필자가 직접 본 영상 3, 4건에서 비슷한 논지를 폈다.채널 진행자들은 수긍한다는 뜻인지, 다음 질문으로 넘어갔다. 그 주장은 사실일까. 그는 민정수석 시절 유재수 금융위 국장의 비리 정황을 포착하고도 정치인들 부탁을 받고 눈감아줬다가 유죄 판결을 받았다. 여러 번 보도된 대로다. 진행자들은 “그럼 유재수 건은 권력형 아닌가요”라고 질문했어야 했다. 당시 진행자들이 정파적 동질감 때문에 반박하지 않은 것인지, 단순히 타이밍을 놓쳤던 것인지 알 길은 없다. 시청자들은 ‘조국이 억울했겠다…’는 인상을 받았을 개연성이 있다. 방송의 공공책무와 무관한 유튜브라지만, 공론의 장에서 빼놓을 수 없는 한 축을 차지하게 된 지금 나 몰라라 할 수는 없는 일이다.취재기자도 그렇지만 미디어 진행자는 권력자에겐 부담스러운 존재일 때 토론 문화는 활기를 띤다. 정치인들은 자신만의 통계와 사례를 앞세워 일방적 주장을 펴기 마련이다. 그럴 때마다 “그런 숫자나 사례를 어디서 듣고 알게 된 건가요” “당신 주장이 사실이라는 근거가 어떤 건가요”를 물어야 한다. 좋은 앵커와 그렇지 않은 앵커는 위 두 질문을 하느냐, 아니면 다음 질문으로 넘어가느냐로 구분된다. 이런 질문에 대한 답변까지 들을 때 시청자들은 정치적 판단을 더 분명하게 할 수 있다.한국의 공론장은 사실 5000만 국민의 상수원 같은 존재다. 우리는 까다로운 기준을 만들어 생활하수가 스며들지 못하게 상수원 수질을 관리한다. 같은 이유로 정치인들이 팩트를 비틀거나, 사실과 의견을 뒤섞어 말할 때 공론장 참여자들은 수질 감시인처럼 나서야 한다.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까지가 의견인지 생선 살에서 가시를 발라내듯 가려내야 한다. 언론과 유튜버의 구분이 모호해진 마당에 이런 책무는 기자든, 평론가든, 개그맨이든 진행자라면 느껴야 한다.정치 공론장 참여자는 정치인, 매체 진행자, 뉴스 수용자 3축이다. 지금은 정치인의 변화 촉구를 기대하기 힘든 시기다. 앵커의 분발만으로도 부족하다. 결국 시청자들이 앵커를 냉정하게 평가할 때가 됐다. 정치인이 납득하기 어려운 주장을 펴는데, 왜 반박성 질문이 안 나오는지를 따져야 한다. 앵커가 꼭 필요한 질문으로 공론을 풀어갈수록 이를 지켜본 시청자들은 좋은 정치와 언어에 대해 더 높은 기준을 세우게 될 것이다. 시청자들의 높은 공론 기대치는 결국 정치인들이 반응하도록 하는 유인이다. 3축이 함께 움직이는 그때가 오면, 난공불락 같던 공론장에도 진짜 변화가 시작될 것이다. 김승련 논설실장 srkim@donga.com}

    • 2025-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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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승련 칼럼]‘공벽노’ 품어야 트럼프 넘는다

    우리가 미국에 투자하기로 합의한 3500억 달러는 액수도 크지만, 미국의 합의 압박이 어마어마할 것이다. 여기에 일본이 열흘 전 갑자기 ‘백기 투항’하는 바람에 일이 더 복잡해졌다. 일본 정부는 트럼프 대통령이 지정하는 사업에, 5500억 달러를 전액 현금으로, 트럼프 임기 내에 입금하겠다고 서명했다. ‘투자 원금 회수 이후’로는 투자 이익을 미국과 일본이 90 대 10으로 나누기로 했다. 이런 불평등한 투자 합의에 왜 동의했는지 선뜻 이해하기 힘들다. 트럼프 정부는 이재명 정부가 비슷한 수준에서 합의해 주길 바란다고 한다. 일본은 자국에 중요한 자동차 수출 관세를 낮추기 위한 통 큰 양보였다고 설명하지만, 그것만으론 설명되지 않는다. 굴기한 중국을 상대하기 위해 손해를 무릅쓰고 미국에 줄을 다시 선 것이다. 일본은 중국과 손잡은 역사도 없고, 손잡을 미래를 상상할 수도 없는 만큼 미국은 생존의 동아줄이다. 같은 이유로 일본은 1985년 플라자 협정에 합의했다. 그때도 미국은 ‘대미 무역흑자가 너무 크다’며 일본을 찍어 눌렀다. 한국은 이러기가 어렵다. 미국의 절대적 안전보장 속에 국방비를 크게 절약해 산업 성장의 디딤돌로 삼았던 것은 일본과 똑같지만, 미국 중심의 세계질서에 대한 평가가 좌우 정부가 바뀔 때마다 번번이 달랐다. 미국이 장기적으로 이익의 90%를 갖겠다는 건 투자의 ABC도 못 지킨 부당한 요구다. 트럼프 특유의 욕심이 작용한 것이지만, 근본적으론 트럼프 지지 백인 노동자 그룹의 ‘외국적인 무언가’에 대한 거부감을 떼어놓고는 생각할 수 없다. 이민자의 나라 미국은 늘 정체성을 묻는다. 현재까지도 뜨거운 질문은 두 가지다. 질문①은 ‘어떤 기업이 더 미국에 도움 되나(Who is us?)’라는 1990년 논문에서 시작됐다. 당시 미일 양국의 거대 정보기술(IT) 기업인 IBM의 일본법인과 후지쓰(富士通)의 북미법인을 예로 들어보자. 클린턴 정부의 노동장관이었던 로버트 라이시는 “기업의 국적은 부차적인 문제다. 미국 땅에서 고용하고 훈련시키고 세금 내는 회사(후지쓰USA)가 (IBM저팬보다) 미국에 더 기여한다”는 주장을 폈다. 국제주의 시각을 지닌 고학력 엘리트층의 생각이었다. 바이든 전 대통령의 삼성 SK 등을 향한 투자유치 보조금은 이런 시각에서 가능했다. 질문②는 정반대 생각을 담고 있다. ‘우리 미국인은 도대체 누구란 말이냐(Who are we?)’는 것으로, 새뮤얼 헌팅턴은 2004년 이 질문을 제목으로 달아 책을 썼다. 미국은 250년 전 건국 때부터 앵글로색슨 기독교인의 나라였고, 앞으로도 그래야 한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라틴계 아시아계 이민자가 늘어나면서 백인 국가의 정체성을 잃어갔다는 이들의 주장을 정연하게 정리했다. 트럼프식 반이민 정서의 출발점이다. 저학력 백인 노동자의 눈에는 한국인이 소유·경영하고, 이익을 챙겨가는 미국 내 투자회사는 아무리 잘 봐줘도 한국 회사다. 이런 회사가 미국에 좋은 것이라는 ①번식 생각은 딴 세상 사람들 이야기로 치부한다. 바이든이 약속한 보조금을 백지화하겠다는 약속 파기가 그래서 나왔다. 조지아주 사태처럼 미국 노동자를 쓰지 않은 채 한국서 기술자를 데려다가 공장을 지었으니 이해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②번 관점에 따라 노동자 계층은 자신들을 세계화의 피해자로 여긴다. 외국 기업과 노동자가 두렵고(恐·공), 방어적으로 국경에 장벽(壁·벽)을 쌓고, 외국인은 물론 미국 내부의 다른 정치적 의견에 대한 화(怒·노)를 내고 있다. 대통령실은 길고 어려운 협상이 기다리고 있다고 말한다. 우리 기업은 자동차 관세 25%는 물론이고 모든 대미 수출품에 25% 상호관세를 지금처럼 계속 내야 한다. 15%를 적용받는 일본이나 유럽연합과 더 힘든 경쟁을 해야 한다는 뜻이다. 시간이 결코 우리 편이 아니다. 투자 총액이나 투자 방식에서 우리 경제력에 걸맞은 절충을 이끌어내는 성과를 기대한다. 그러자면 정부는 트럼프 정부 협상 대표를 상대하는 것 못지않게 ②번 믿음을 갖는 백인 노동자 집단의 마음을 얻는 노력이 필요하다. 미국을 더 강하게 만들어 줄 미국 조선산업 부흥은 한국 기업과 미국 노동자가 함께 만드는 것이고, 수십 년 전 미국이 한국인 의사, 엔지니어를 하나하나 교육시켰던 것처럼 한국도 미국인 블루칼라 노동자의 경쟁력과 삶의 질 회복에 핵심 파트너가 기꺼이 될 것이란 점을 설명해야 한다. ①번식 사고가 영 틀린 게 아니란 걸 설득해야 한다. 우리가 관심 두지 않던 미 러스트벨트 지역을 향한 공공외교가 어느 때보다 중요해졌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들의 공벽노(恐壁怒)를 품어야 길이 보일 것이다.김승련 논설실장 srkim@donga.com}

    • 2025-0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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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승련 칼럼]‘월 1000원’ 당원이 나라를 흔들어서야

    올 8월 여야가 정청래와 장동혁을 새 당 대표로 선출하는 과정에서 눈에 띈 것은 공격적 성향의 당원들이었다. 계엄과 탄핵을 거치며 사회 분열을 걱정했는데, 더 나쁜 양상으로 번지는 듯하다. 상식과 순리에 기반한 발언일지라도 귀에 거슬린다는 이유로 가차없는 응징이 진행됐다. 대표적 장면이 있다. 더불어민주당 박찬대 후보는 “(국민의힘과의) 협치를 포기하지 않겠다”고 말했다가 ‘개딸 당원들’에게 뭇매를 맞았다. 국민의힘 김문수 후보는 “내년 지방선거 때 전한길과 한동훈 중 누구를 공천하겠느냐”는 질문에 ‘한동훈’이라고 답했다가 뭉텅이 표가 날아갔다. 측근의 말로는 “그날 내게 온 항의 문자만 500개”라고 했다. 양쪽 모두 지도자라면 응당 했어야 할 말이었다. 양대 정당에서는 당비를 1년에 3∼6개월 동안 월 1000원을 납부하면 권리당원(민주당)과 책임당원(국민의힘) 지위와 투표권이 주어진다. 8월 선거 때 실제 투표한 이들은 각각 63만 명과 35만 명이었다. 두 당의 전체 당원은 각각 512만 명, 444만 명으로, 당원의 10% 안팎인 규모다. 전한길 씨가 자신의 유튜브 가입자 10만 명을 당원으로 가입시켜 ‘당을 접수하겠다’고 한 말이 실행 여부와 관계 없이 그냥 나온 말이 아니다. 두 정당의 실력자들은 강성 당원의 표심 영향력을 야금야금 더 키워주고 있다. 그 결과 이들 ‘열심당원’ 눈 밖에 나선 당내 선거에서 이길 수 없다. 민주당에서 전체 유효득표 가운데 이들 비중이 3년 동안 40%에서 55%로 커졌다. 국민의힘에선 이명박-박근혜 경선 때 대략 30% 선이던 것이 이번에 80%로 높아졌다. 야당과 악수도 안 하겠다는 정청래 대표, “계엄에도 하나님의 계획이 있다”는 장동혁 대표는 이런 환경에서 태어났다. 당원 정치의 시대가 자연스럽게 온 듯하지만, 만들어진 것에 가깝다. 팬덤 정치의 힘을 간파한 정치인들이 ‘당원=당의 주인’이라는 논리를 반복 주입하고, 당권을 쥔 쪽이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당헌당규를 꾸준히 고쳐왔다. 국민의힘에서 홍준표 전 대구시장이 꺼낸 ‘신천지 신도 10만 명 입당설’이나, 특검 수사 때 나왔다고 보도된 ‘3개월 당비를 낸 통일교도 1만 명 입당’ 관련 문자는 뼈아프다. 사실이라면 기획성 표 몰아주기 행위다. 놀랍게도 국민의힘 내부에서 개탄하거나 사실 규명을 통해 재발을 막자는 공개 주장이 안 들렸다. 문제의식이 없다기보다는두려움의 결과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당의 주인이 당원이란 대전제는 진실인가. 그럴듯해 보이지만, 함정이 있다. 이들이 낸 당비의 총합은 거대 정당에선 연 수백억 원에 이르지만, 정부로부터 받는 국고보조금은 훨씬 더 많다. 경상보조금, 선거 때 받는 선거보조금에 15% 이상 득표했을 때 받는 선거비용 보전금까지 있다. 당 운영에 돈을 댄 것은 당원이 아니라 전체 납세자라는 게 더 정확하다. 정당이 국회를 지배하면서 입법과 예산 분배를 통해 내 삶을 좌우한다. 바꿔 말하면 당비 1000원을 내는 수십만 명이 수천만 유권자의 삶에 개입하고 있다. 정청래, 장동혁의 정치는 앞으로도 호전적일까. 사람마다 짐작이 다르겠지만, 정 대표는 여전히 공격적 정치를 펼 가능성이 커 보인다. 정 대표가 내년 여름 당 대표직에 다시 도전할 것이고, 큰 뒤탈만 없다면 4년 뒤 대선 후보 도전에 나설 공산이 크다. 그러자면 팬덤이 필요하고, 성공적으로 대표에 이른 기억을 잊기 어려울 것이다. 정치인은 팬덤을 이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오히려 끌려다니는 측면은 중히 여기지 않을 듯하다. 장 대표 역시 강성 당원들의 지지라는 유혹을 벗어나기 힘들고, 그동안 해 놓은 말빚 때문에 운신의 폭은 좁다. 하지만 내년 6월 지방선거 참패 땐 자신의 정치적 운명이 급전직하할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당선을 위해선 아스팔트 우파에 올라탔지만, 앞으론 민심에 기댄 정치와의 사이에서 고민이 커질 것이다. 한 달에 5도씩 몸을 틀면서 변신을 시도할 가능성도 배제하지 못한다. 지금 정치권에선 소리 없는 지각 변동이 진행 중이다. ‘우리가 주인’이라는 당원들이 힘을 키워가고 있다. 이들은 정청래, 장동혁이 아니더라도 제2의 정청래, 제3의 장동혁을 찾을 수 있다. 서둘러 흐름을 차단해야 한다. ‘월 1000원’ 표심의 비중을 낮추는 정치운동이 생기길 바란다. 당원이건 아니건 손쉽게 정당선거에 투표할 방법을 찾는다면 미국식 프라이머리에 가깝게 갈 수 있다. 대선 후보 경선, 당 대표 선거에 민주당이건 국민의힘이건 500만 명이 투표할 수 있다면, 민주당의 63만, 국민의힘의 35만 명이 과다대표되는 걸 막을 수 있다.김승련 논설실장 srkim@donga.com}

    • 2025-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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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승련 칼럼]2년 새 사라진 후쿠시마 ‘오염수’ 논쟁

    지난주 고이즈미 신지로 일본 농림수산상이 방한했다. 고이즈미 농림수산상은 조현 외교부 장관을 만나 2011년 원전 사고가 났던 후쿠시마 인근 8개 현(縣)에서 잡은 해산물 수입금지를 풀어달라고 요청했다. 우리 외교부는 두 장관의 면담 자체를 공개하지 않았는데, 고이즈미 농림수산상이 일본 언론에 설명하면서 알려졌다.이처럼 ‘후쿠시마’는 여전히 뜨거운 감자이고, 이재명 정부로선 드러내고 싶지 않은 무엇이다. 공론장에선 빠르게 잊혀지고 있다. 일본은 2년 전 8월 이맘때 후쿠시마 원전 옆 초대형 탱크에 담아뒀던 오염수 방류를 시작했다. 3중수소를 제외한 대부분 방사성 물질을 걸러냈고, 국제사회의 검증을 마쳤다. 일본은 ‘처리수’로 명명했고, 우리는 ‘오염수’로 불렀다.방류가 시작될 즈음 한국의 더불어민주당은 “핵 테러다” “왜 윤석열 정부가 (안전하다는) 일본 정부 논리를 설명하느냐”라며 한일 양국 정부를 비판했다. 놀라운 점은 2023년 홍역을 치른 뒤에도 방류가 계속됐는데도, 작년과 올해 이 사안을 입에 올리는 민주당 인사가 사라졌다는 점이다. 국민 건강권을 위협한다며 전국의 횟집에서 손님이 급감했는데, 이젠 망각해도 괜찮은 일이 돼 버렸다. 영원불변한 과학적 진리라곤 누구도 말 못 하지만, 지금 기준으론 2년 전 비판이 사실과 동떨어졌다는 걸 자인하는 것 아닌가. 이런 무책임이 없다.국민의힘은 ‘일본 옹호 세력’으로 매도된 피해자였다. 그런데 올여름 들어 북한의 방사성 폐기물이 우리 바다를 오염시킨다는 주장을 꺼내든 의원들이 생겼다. 황해북도 평산의 우라늄 정련공장에서 핵 폐수 방류 우려가 있다며 “예성강을 통해 한강 하구로 흘러들어 왔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근거는 미국 인공위성이 찍은 공장 주변의 물 색깔이 검게 변한 사진이었다. 방사성 물질이 위성 사진에 찍히는 것인지 의문이지만, 2019년 첫 문제 제기 이후 정부의 서해 해역 조사 결과, 문제가 없었다. 국민의힘 일각의 이런 문제 제기는 2년 전 민주당의 무리한 주장에 대한 되갚기 같은 인상을 준다. 충분한 근거 없이 비슷한 주장을 펴는 데 여야가 없다는 인상을 심어줬다.두 사례는 낡은 정치 공방이 우리를 휘감고 있음을 확인해 준다. 조직이 망가지려면 말이 먼저 망가진다고 했다. 여의도에 정치적 비판이야 필요한 것이지만, 비판을 위한 비판이 너무 많다는 게 문제다. 정치적 비판은 옳고 그름이 칼로 무 자르듯 구분되는 게 아니다. 비판이 며칠 지속되다 보면 ‘뭔가 잘못한 거 같다’는 인상을 남기는데, 이게 남는 장사로 보는 구조다. 스스로 생각하는 것보다 남의 말을 믿고 싶어 하는 심리를 정치인들이 이용하는 것 아닌가. 취재 현장에서 황당한 주장에 관여한 여야 당직자들에게서 “야당 정치 원래 이렇게 하는 거다”라는 말을 듣고 기가 찼던 기억이 생생하다.우리 정치는 왜 한 발짝도 나아지지 않는 걸까. 지금 정치 지형에선 경선, 여론조사, 댓글 등에서 영향력이 큰 열성 지지층이 주도하고 있다. 이들은 올바른 언어로 사리와 이치에 맞는 정치 못지않게 자신들이 싫어하는 정치인을 몰아세우는 걸 기대하고 있는 걸 직감한다. 그래만 준다면 시쳇말로 억까(억지 비판)도 용납하는 기류가 있다. 유권자 책임도 빼놓을 수 없다.이런 무논리 정치가 끼치는 해악은 다대하다. 정치 저질화를 부르고, 기대치를 더 낮춘다. 썩 괜찮은 이들이 정치에 참여하겠다는 생각 자체를 차단해 버린다. 공공선을 향하는 미래 리더의 싹을 자르는 행위다. 이런 현상은 지난 10년 동안 트럼프-바이든-트럼프 당선을 지켜본 미국에서도 비슷하게 감지된다. 미 언론의 칼럼에선 “우리 미국이 어쩌다가…”라는 한탄의 글이 종종 등장한다. “최고의 인재가 더 이상 워싱턴으로 오지 않는다”는 통찰을 힐러리 클린턴이 외신기자들 앞에서 내놓은 적이 있다.결국 잘 기록하고 기억해야 한다. 선행은 물로 기록하고, 악행은 청동에 새긴다고 했다. 본래 좋은 일은 쉽게 잊힌다는 뜻의 말이지만, 우리가 목도하는 수준 낮은 비과학적 주장을 누가 언제 왜 폈는지 정확히 기록하고, 시시때때로 되새겨 공론화해야 한다. 이런 기억의 되새김질이 움직이지 않는 룰이 된다면 ‘알면서도 하는 황당 정치적 주장’은 줄어들 수 있다. 후쿠시마 수산물 첫 금수 이후 14년이 흘렀다. 일본과 우리 관계에 비춰 수입 재개가 쉬운 결정은 아니다. 하지만 영원히 갈 수는 없지 않나. 그때는 2023년 여름 몰과학적 주장을 편 정치인들은 2선으로 물러난 때여서 정확히 책임을 묻기 어려울 수도 있다. 그래도 기록하고 기억할 도리밖에 없다.김승련 논설실장 srkim@donga.com}

    • 2025-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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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승련 칼럼]한미동맹, 공동의 적이 모호해진다

    1953년 체결된 뒤 우리 안보와 경제 발전에 버팀목이었던 한미동맹이 기로에 섰다. 미국은 “동맹의 현대화”를 추진하겠다고 했다. 모호한 외교적 수사인데, 한국에 선물같이 찾아왔던 한미동맹을 달라진 세상에 맞게, 정확히는 미국의 뜻대로 바꾸겠다는 것이 본질이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한미동맹을 통해 한국이 무임승차했다고 믿고 있다. 이재명 대통령은 8월 첫 한미 정상회담 때 이 문제를 핵심 의제로 다룰 전망이다. 트럼프의 미국은 우리가 알던 미국이 아니다. 미국은 지난 1000년간 패권국 가운데 글로벌 공공재를 고안하고, 자기 돈 들여 유지한 유일한 나라다. 그런 미국이지만 이젠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떠안았던 글로벌 질서 유지 책무를 벗어던지고 있다. 나토 탈퇴를 거론하고 있고, 자신이 만든 국제무역 질서인 WTO 체제를 깼고, 유엔의 존재를 성가시게 여기고 있다. 미국은 이런 글로벌 공공재를 만든 뒤 반대급부를 챙긴 것도 사실이다. 자국 기업 이익을 챙겼고, 달러 발권국의 지위를 누렸다. 그럼에도 패권국이 굳이 모두를 위한 제도를 만든 것은 ‘우리는 인권 자유 민주주의 시장경제의 수호자인 특별한 나라’라는 독특한 믿음이 작용했다는 걸 부인하긴 어렵다. 역대 미 대통령들은 이런 질서 유지 책무를 운명처럼 받아들였다. 하지만 모든 걸 손익(損益)으로 치환하는 트럼프는 반대편 길을 걷고 있다. 징벌적 관세 부과로 자유무역 흐름에 제동을 걸었고, 기후변화협약과 유네스코 등에서 탈퇴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확인된 것처럼 ‘미국은 더 이상 유일 패권국이 아니다’라는 자각도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이런 트럼프가 한미동맹을 ‘돈 먹는 하마’로 보는 건 이상할 게 없다. 올봄 공개된 미 국방부 내부에서 회람된 지침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 가정이 가능하다. 트럼프는 김정은과 3차례 만남을 통해 ①북핵 위협은 핵우산을 한국에 제공하면 통제 가능하고 ②북한의 탄도미사일 등 재래식 군사 위협은 한국과 일본이 손잡으면 막을 수 있다고 믿게 됐을 수 있다. 결국 트럼프 대통령은 주한미군 2만8500명은 엉뚱한 곳에서 힘을 쓰고 있다는 결론에 도달했고 ③대만처럼 더 민감한 방어에 투입한다는 정책 제안을 받았을 때 솔깃했을 수 있다. 국방부가 9월 이후 공식 발표할 ‘국방전략 잠정지침’의 초기 구상에는 한반도와 밀접한 ①②③ 구상이 담겨 있었다. 정신이 번쩍 들 수밖에 없다. ①은 당연한 일이지만, ②는 한반도 방위공약 약화로 해석될 여지가 있다. 1950년 초 미국은 남한을 뺀 채 애치슨 라인을 긋는 바람에 북한의 오판을 재촉했다. 트럼프식 애치슨 라인이 2개 그어지는 것으로 비유하자면, 핵 애치슨 라인에는 한국이 포함되지만 재래식 애치슨 라인에는 한국이 포함되는지 불분명한 것 아닌가. 트럼프 요구처럼 ①은 주한미군 분담금 늘리고 ②는 우리 국방비를 국내총생산 대비 5%까지 늘리는 방식 등으로 풀어갈 수 있다. 동맹은 친구끼리가 아니라, 공동의 적을 가진 나라가 맺는 것이다. 극적인 사례가 나치 독일과 싸운 루스벨트의 미국과 스탈린의 소련이다. 상극 관계인 두 나라는 ‘연합국’의 이름으로 느슨한 동맹이 됐다가 종전 후 곧바로 적으로 돌아섰다. 북한을 상대로 강고했던 한미동맹은 안보 환경 변화로 느슨해질 여지가 생겼다. 우리 정부에 북한을 적으로 부르길 꺼리는 기류가 분명히 생겼고, 트럼프 역시 김정은과의 우정을 자랑하고 있다. 중국도 그렇다. 트럼프 행정부는 중국을 ‘전략적 경쟁자’로 불렀고, 바이든 행정부는 적국(foreign adversary)으로 묘사했다. 하지만 한국은 중국을 적으로 여기기 어렵다. 좌건 우건 마찬가지다. 이재명 대통령도 ‘셰셰’나 ‘외계인 침공’ 발언에서 알 수 있듯이 공개 발언은 매우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한미동맹이 흔들린다면 미국이 달라진 탓도 크지만 공동의 적이 모호해진 것이 더 본질적일 수 있다. 알려진 대로 ③은 한국엔 큰 리스크 요인이다. 한미 외교장관 회담 후 “동맹의 생각이 다 같을 순 없다”는 설명은 ③에 대한 설명일 것이다. 미국은 일본과 호주에 했듯이 우리에게도 “대만서 미중 충돌 때 한국은 뭘 할 거냐”를 물었을 수 있는데, 선뜻 답을 내놓기 어렵다. 미국은 중국과 관세 협상을 매듭짓지 못하고 11월까지 3개월 유예했다. 미국의 압박에 중국이 호락호락하지 않았다는 방증이고, 이런 기류라면 미 국방부가 9월쯤 국방전략(NDS) 보고서를 발표할 때 대만과 관련한 군사적 대응을 대놓고 거론하기 쉽지 않을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어쩌면 관세 타결과 미 정부의 의견 일치가 먼저 이뤄져야 하는 만큼 이재명 정부는 시간을 조금 더 벌게 될 수 있다.김승련 논설실장 srkim@donga.com}

    • 2025-0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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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승련 칼럼]외계인에게 침공당한 국민의힘

    지난 1개월 남짓 동안 국민의힘 혁신위원회가 내놓은 주문은 탈윤석열 부부, 탈계파, 영남색 약화로 요약된다. 이렇게 하면 반석에 오른다고는 장담 못해도, 이 정도도 못하고는 위기탈출은 어렵다는 점에 동의한다. 아무리 좋게 생각하려 해도 앞줄에 리드하던 친윤 중진들과 뒤에 숨은 ‘언더(under) 찐윤’이 보여준 혁신 저항은 상궤를 벗어난다. 대통령과 술 마신 걸 자랑했고, 여사에게 받은 문자를 훈장처럼 여기던 이들이다. 이들이 떠받들던 대통령 부부는 표를 준 1639만 유권자 중 상당수를 부끄럽게 만들었다. 이쯤 되면 내려놓는 게 상식이고 순리지만, 이들 생각은 다르다. 소설 ‘이방인’의 한 대목처럼 ‘대통령이 파면되고 구속된 거 빼면 오늘도 평범한 하루가 지나갔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부조리극 같은 인사청문회 장면은 지금대로는 안 된다는 걸 보여줬다. 친윤 의원들은 총리의 돈 문제, 다른 장관 후보자들의 보좌관 갑질, 논문 표절을 질타했다. 이들 상당수는 ‘계엄 해제’ 표결 때 뒤로 빠졌고, 대통령 체포 저지엔 적극적이었다. 헌법과 법률의 작동을 가로막으려 했던 이들이 스폰서 의혹, 학문 윤리 훼손, 쓰레기 갑질을 놓고 질타했다. 후보자의 명백한 잘못이고 지적도 맞는 말이었지만, 왠지 울림이 작았다. 이런 일은 다음 총선까지 3년간 반복될 수 있다. 이재명 대통령은 ‘문제 장관 후보자’ 1명에 대해서만 지명을 철회했다. 2명 모두 낙마하지 않은 것은 민심이 등돌린 친윤 야당의 전망 없음을 빼고는 설명이 안 된다. 차떼기 사태 때 2004년 한나라당 의원 37명은 불출마를 선언했다고 한다. 그들이 주판알 못 튀겨서 그만뒀다고 보지 않는다. 그쯤은 하는 게 당과 자신을 위한 일이라고 여겼을 것이다. 또 “자기 정치 한다”고 친윤이 꼬집는 윤희숙 혁신위원장은 아버지 부동산 거래로 의심을 받기 싫다며 3년 남은 의원직을 내던졌던 인물이다. 국민의힘은 외계인에게 침공당한 것과 다를 게 없다. 이 대통령이 후보 시절 미국 잡지 인터뷰에서 썼던 이 표현은 ‘절대 벌어지지 않을 일’을 가리킨다. 보수 정치의 산 역사인 이 정당이 윤석열의 늪에 빨려 들어가고 있는데, 구조 요청도 자구 노력도 변변히 하지 않고 있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홍준표 전 대구시장의 말처럼 대란(大亂)엔 대치(大治)로 풀어갈 필요가 있다. 큰 위기엔 상상 못했던 수를 찾아야 길을 만들 수 있다. 윤희숙 혁신위가 제안한 윤석열 부부 전횡 반성의 당헌당규 삽입, 수도권 정치인의 최고위원 선출 확대, 국회의원 당원 소환제를 포함하는 1∼4호 혁신안이란 것도 ‘대치’의 한 방편이다. 친윤의 문제는 친윤이 풀 수밖에 없다. 친윤 밖 혁신위가 아무리 요구해야 당권을 쥔 친윤 진영은 겉으론 마이동풍이고, 속으론 더 움츠러든다. 그러자면 선두에 섰던 친윤 중진이 나서야 한다. 억울하다고 느끼겠지만, 숙명이라면 숙명이다. 자신을 포함해 영남과 강원의 언더 찐윤 의원들을 설득해 내야 한다. 올가을까지 현역 30명이 의원직을 동반 사퇴하는 것도 상상할 수 있어야 한다. 이 경우 내년 6월 지방선거 때 재선거를 위한 미니 총선이 열리게 된다. 인지도 높으나 신뢰를 잃은 친윤 중진과 역할이 미미하던 언더 찐윤이 물러난 지역구에 수도권 정치를 이해하는 5년, 10년 뒤 대통령감, 당 대표감을 발굴해 공천할 수 있다. 새로운 피는 당이 활력을 되찾아 건강한 야당으로 거듭나게 할 것이다. 더불어민주당이 일방 독주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긴장감을 불어넣을 수 있다. 국정은 국정대로 견제와 균형을 더 찾아갈 수 있다. 그럴 수만 있다면 윤석열 정치의 수혜자였던 친윤 중진들에겐 속죄와 자기희생의 기회가 될 것이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그럴 확률은 1%도 안 된다는 걸 안다. 외계인 침공 확률만큼 작을 것이다. 3년이나 남은 의원직을 누가 버리려 하겠나. 하지만 버틸수록 당은 수렁에 빠질 것이고, 지탄이 빗발칠 것이 자명하다. 지역 유권자들은 앞에서 입을 닫을 뿐이지, 누가 어떻게 국민의힘 정치를 망가뜨렸는지 잘 안다. 누가 앞줄 친윤인지 뒷줄 언더인지도 안다. 이런 찜찜한 정치로 3년 임기를 마저 채울 것인가. 3선, 4선으로 선수(選數)를 쌓는 게 직업적으로 성공인 것은 틀림없다. 하지만 이들의 정치를 마음에서 존경하는 이들은 줄어들고 있다. 백범 선생이 배웠다는 옛 가르침에 그른 말이 하나도 없다. 나뭇가지 잡고 올라가는 것은 별로 대단하달 게 없다. 하지만 절벽에 매달려 있을 때 손을 놓을 수 있는 것은 용기로, 이 시대 리더에게 꼭 필요한 가치다. 친윤 중진과 언더 찐윤의 좌장들은 용기를 낼 수 있을까.김승련 논설실장 srkim@donga.com}

    • 2025-0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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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승련 칼럼]국민의힘 혁신, ‘언더 찐윤’과의 싸움이다

    야당이 된 국민의힘에 ‘언더(under) 찐윤’이라는 수면 아래 실세 그룹이 존재한다는 주장을 지난달 처음 들었다. 국민의힘에서 더불어민주당으로 당적을 바꾼 김상욱 의원이 몇 군데 라디오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언더 찐윤은) 본인들 이름이 뉴스에 거론되는 것도 반기지 않는다. 똘똘 뭉쳐 있고, 지역구 행사 열심히 다닌다. 대인 관계가 참 좋다. 20∼30명쯤 된다. 대구·경북, 부산·경남, 울산, 강원에 있다. (계엄과 탄핵 이후에도) 무너지지 않았다. 오히려 자기 지역구에서 김문수 후보가 이재명 후보를 크게 이겼으니까.”갈등을 겪다 탈당한 의원의 말이니, 감정과 과장이 섞였을 수 있다고 여겼다. 그런데 며칠 뒤 원내대표를 지낸 김성태 전 의원이 “김상욱 의원 말이 맞다”고 동의하고 나섰길래 이들의 실체가 궁금해졌다. 김 전 의원에게 따로 물어보니 “윤 대통령의 술친구 하던 의원도 여기에 중요한 역할이 있다. 그들 협조 없이는 원내대표 같은 핵심 당직을 맡는 게 어려운 게 현실”이라고 했다.대단한 결사체를 말하는 게 아니다. 권성동 이철규 윤상현 나경원 등 전면에 서는 친윤 의원 말고, 늘 말없이 무리를 이루던 의원들을 가리킨 것이다. 알려진 것과 달리 수동적 존재가 아니라 자기들끼리 똘똘 뭉쳐 변화를 거부하고 이익을 챙긴다는 점을 강조한 말이다.두 사람의 공개 발언 이후 당에서 언더 찐윤을 거론하는 의원을 발견하지 못했다. 당내 인사에게서 “당내에선 이들과 내놓고 싸우는 게 부담스러워 입을 안 여는 것”이라고 설명을 들었다. 다른 의원은 “이들 찐윤은 두려움 때문에 더 뭉치고 있다. 제대로 된 리더가 등장하는 걸 막고 싶을 거다”고 현재 상황을 설명했다. 당에는 묘한 침묵의 카르텔이 형성돼 있다.국민의힘이 건강함을 잃은 것은 소장파 정치의 실종과 궤를 같이한다. 1990년대 홍준표 김문수, 2000년대 오세훈 원희룡 남경필처럼 때때로 당에 반기를 든 초재선 그룹들이 있었지만, 언제부턴가 사라졌다. 윤석열 체제에서도 초재선의 집단행동이 있었지만, 목표는 친윤 이익 챙기기였다. 비상계엄 이후로 좁혀 보면 더 선명하다. 계엄 해제 표결에 집단 불참했고, 탄핵에 찬성했다며 한동훈을 내몰았고, 한덕수 대선 후보 옹립을 위해 연판장 돌렸고, 김용태의 ‘탄핵 반대 당론의 백지화’를 흐지부지시켰다.이제 국민의힘이 버틸 곳은 민심밖에 없다. 그 민심은 신뢰할 만한 스피커를 앞세우고, 똑떨어지는 논리로 정부와 여당을 비판할 때 힘을 얻는다. 민주당이 대통령실 특활비를 여당이 됐다면서 전액 살려낸 것은 논란의 여지가 없는 안면몰수 행위였다. 국민의힘은 비판하긴 했는데, 민주당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용산 정무수석만 나서 잘못을 인정했을 뿐이다. 놀라운 점은 국민 여론이 국민의힘의 비판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야당이 투명인간 취급 받는다는 말이 나와도 할 말이 없게 됐다.국민의힘에는 안철수 혁신위가 출범했다. 계엄과 대통령을 감싸고돈 것을 자기 언어로 반성하는 것이 제1 과제일 것이다. 지금은 사과하고 대선 백서를 낸다고 해서 큰 감동을 기대하기는 어려운 단계다. 결국 친윤 핵심에 대한 인적 청산만이 국민들에게 변화의 간절함을 전달할 방법이다. 다른 어떤 혁신 방법이 떠오르지 않는다. 사람 청산의 방식으론 책임자 2선 후퇴에서 3년 뒤 총선 불출마, 당장 의원직 사퇴까지 여러 선택이 있다. 인위적 청산이건, 당사자의 자기희생이건 그건 나중 문제다. “종양과 고름을 짜내겠다”던 안 위원장 말은 이런 걸 가리켰을 것이다.윤핵관이나 친윤 영남 중진의 퇴장만 떠올릴 일이 아니다. 김상욱, 김성태 두 사람이 수면 위로 끄집어 올린 ‘똘똘 뭉친 무명의 국회의원 결사체’를 주도했던 이들도 예외일 수 없다. 문제는 안철수의 혁신카드를 ‘언더 찐윤’과 유대가 깊고, 이들의 후원 속에 당선된 송언석 원내대표가 받아들이겠느냐는 점이다. 안 위원장의 혁신 싸움이 어려운 이유다.당 내부에선 ‘바깥의 힘’에 기대를 거는 눈치다. 특검 수사, 특히 16개 사건을 다루는 김건희 특검 수사를 말한다. 수사 과정에서 대통령 부부에 선을 댔던 ‘언더 인물’들이 등장한다면 철옹성 같던 찐윤 연대가 흔들릴 수 있다는 주장이다.하지만 이런 경우라면 보수 본당인 국민의힘으로선 서글픈 상황이다. 잘못을 스스로 바로잡을 능력을 잃은 정당은 존재 이유가 있나. 또 “독재 정치”라며 비판하던 3개 특검법이 자당 환부를 도려내주길 기대하는 정치는 또 뭔가. 국민의힘은 넘어져 있다. 일어서는 과정을 국민들이 지켜보고 있다. 진통이 커지더라도 할 일은 해야 한다. 그 핵심에서 언더 찐윤과의 싸움이 빠질 수 없다. 김승련 논설실장 srkim@donga.com}

    • 2025-0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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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승련 칼럼]‘셰셰발언’ 벗어날 100일 보낸 뒤 트럼프 만나라

    이재명 대통령이 트럼프 미국 대통령을 만날 2번의 기회가 사라졌다. 아무리 생각해도 백악관의 대통령 당선 축하 메시지에 “중국의 간섭을 우려한다”는 대목이 찜찜하다. 동맹국에 대한 명백한 결례이지만, 새 정부에게서 느낀 중국 우호 기류를 견제하는 것 같아서다. “(윤석열 당시 대통령이) 북-중-러를 적대시하고 일본 중심의 기이한 외교를 했다”는 ‘기이한’ 표현을 민주당이 탄핵소추문에 써 넣은 일이 있었다. 워싱턴에서 일으킨 파장이 백악관 생각에 큰 영향을 줬을 것이다. 이 대통령이 취임 후 한미일 협력을 강조하고, 한미동맹파를 일부 기용한 것은 긍정 평가받을 일이지만, 비중이 클 수는 없다. 이 대통령이 취임한 지금은 한국이 최대 수혜자였던 탈냉전 30년 자유무역의 시대가 저물고 있다. 적어도 트럼프 정부하에선 동맹이라는 이유로 미국이 한국을 편들어 주는 시기도 아니다. 그렇기에 어느 때보다 대통령의 구상이 중요한데, 이 대통령은 진지한 언론에 체계적인 질문을 던질 기회를 대선 때 주지 않았다. 이 대통령은 문재인 전 대통령보다 덜 이념적이다. 이 대통령이 1년 전 “중국에도 대만에도 셰셰(謝謝·고맙다) 하면 된다”고 말한 것은 실용적 사고에서 나온 진심이라고 믿는다. 굳이 중국과 척질 필요 없고, 경제 교류 늘리면 좋다고 여겼을 것이다. 문제는 타이밍이고, 대통령의 정세 판단 오류 가능성이다. 요새 국제정치학자들은 “(국제 규범을 강조하는) 화려한 위선의 시대는 가고, (강대국이 자기 이익만 챙기는) 정직한 야만의 시대가 왔다”는 말을 종종 한다. 미국의 향후 30년 주적은 중국이다. 중국이 패권 지위를 넘보는 걸 막기로 한 것이다. 트럼프건 바이든이건 똑같다. 미국은 이를 위해 대만과 주변 서(西)태평양 해역에서 중국 압박에 올인했다. 지난 30년처럼 중국에 첨단 제품 팔고, 러시아에서 값싼 원재자를 사는 게 더 어려워졌다는 뜻이다. 이건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다. 트럼프는 국제법보다 주먹이 더 가까운 ‘19세기형 강대국 외교’를 불러왔다. 미국이 이란에 벙커버스터를 떨어뜨려 항복을 받아내고, 멀쩡한 파나마 운하와 그린란드의 영유권을 ‘근외(近外·near abroad)’ 정책의 이름으로 탐내는 세상이 왔다. 이 대통령은 한미동맹도 강화하고, 중국과 관계도 개선하려 한다. 결론부터 말하면 자주파와 동맹파가 함께하는 이런 ‘양손잡이 외교’는 쉽지 않다. 중국과 교류가 확대되고, 정부 간 접촉은 늘 수 있다. 하지만 그것도 행사와 의전을 넘어서서 중국의 본질적 이익에 기여할 때는 미국에 된서리 맞는 상황도 대비해야 한다. 미 국방장관이 “안보는 미국과 하면서 중국과 손잡고 돈 버는 시대는 갔다”고 압박하는 게 그냥 나온 말이 아니다. 이재명 정부는 안보정책을 원점에서 실용의 이름으로 재검토할 기회를 맞았다. 강을 건넜으니 타고 온 뗏목은 버려도 된다는 경구는 경제 정책에만 해당하는 게 아니다. 조각(組閣) 등을 이유로 나토 참석을 미룬 것이 나쁘다고만 할 수 없다. 취임 100일 동안 과거 발언도 지우고, 백지 상태에서 새 그림을 짜야 한다. 대통령은 대중국 전략을 한미동맹파 외교관들에게 맡겼는데, 미국의 비판적 중국관을 고려한 결정으로 보인다. 반면 대북한 정책은 정동영 이종석 등 자주파에게 맡겼고, 취임 첫 주부터 대북 확성기 방송과 전단 살포를 중단시켰다. 김정은이 남북을 ‘적대적 두 국가’로 상정한 뒤 문을 닫은 지금 북한이 관계 개선 필요성을 느끼도록 해야 할 과제가 이들에게 주어졌다. 대통령실은 머잖아 한미 정상회담이 열릴 때 트럼프가 이런 질문을 던질 수 있다고 가정한 뒤 준비해야 한다. 첫째, 미국은 대만 유사시에 주한미군을 급파할 텐데, 그때 한국은 어떤 역할을 할 것인가. 둘째, 미국은 북핵 폐기는 장기 과제로 돌리는 가운데 미국을 핵공격 할 수 있는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을 없애는 대가로 대북 제재를 푸는 협상을 북한과 벌일 수도 있는데, 한국은 수용할 수 있나. 이재명 정부가 전자에 동의하면 중국이, 후자에 동의하면 국내 여론이 뒤집어질 일이다. 새 정부는 두 질문에 예스-노 답변이 아니라, 우리가 새로운 틀을 짜고 해법을 제시하는 방식으로 대응해야 한다. 한미 간에 당장은 관세 및 투자협상 등 먹사니즘(먹고 사는 문제)이 현안이지만, 향후 1, 2년 내에 죽사니즘(죽고 사는 문제)이 기다리고 있다. 주한미군 주둔 분담금을 더 내라는 미국의 요구가 상대적으로 더 쉬워 보일 정도다. 첫 100일 가운데 벌써 20일이 지났다.김승련 논설위원 srkim@donga.com}

    • 2025-0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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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김승련]트럼프, 초강력 폭탄 ‘벙커버스터’ 투하할까

    “무조건 항복하라.” “당신의 위치를 파악하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17일 이란 최고지도자 하메네이를 겨냥해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올린 글이다. 이란은 13일 시작된 이스라엘의 탄도미사일과 드론 공격 때문에 군 참모총장을 잃었고, 핵 시설과 미사일 기지가 파괴됐다. 이런 국면에 트럼프 대통령마저 무시무시한 메시지를 던지고 나섰다. 지금까지는 해외 군사 개입을 극히 꺼려 왔던 트럼프 대통령이다. ▷이스라엘이 군사작전에 나선 것은 미국과 이란의 핵 협상이 겉돈 것이 결정적이었다고 한다. 이란은 무기급에 가까운 60% 농축우라늄을 비밀리에 비축했고, 유엔은 그 규모가 408kg에 이를 것으로 봤다. “이스라엘을 지도에서 지워 버리겠다”고 공언하는 이란이 몇 개월 내로 핵무기를 확보할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이스라엘은 몇몇 핵 시설은 파괴됐지만, 수도 테헤란 남쪽 산악지대의 포르도 핵 기지는 손대지 못했다. 수천 개의 원심분리기가 지하 80∼100m에 숨겨진 곳이다. 미국의 벙커버스터(GBU-57)가 주목을 받는 이유다.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는 올 2월, 4월 2차례 워싱턴으로 날아갔다. 4월엔 포르도 기지 사진까지 제시하며 지하 목표물을 파괴하는 벙커버스터 사용을 적극 설득했다. 탄두 중량만 13t으로, 미 공군 B-2 스텔스 폭격기로만 실어 나를 수 있는 초대형 폭탄이다. 지상군 투입 없이도 이란 지하 핵시설을 직접 때릴 수 있다. 미 공군은 단발이 아니라 여러 발을 조율된 타이밍에 동시 투하하는 훈련을 지난 2년간 해 왔다. 당시 회담 때 트럼프는 네타냐후의 요청을 거절했다. ▷벙커버스터를 쓴다는 것은 미국의 정식 참전을 뜻한다. 트럼프의 대외 분쟁 불개입 철학과 상충해 쉽게 내릴 결정이 아니다. 방사능 유출에 따른 비난을 받을 수도 있고, 이란이 중동 내 미군기지를 공격할 땐 확전 가능성까지 염두에 둬야 한다. 트럼프 참모들은 “대통령의 신념을 관철시키자”는 쪽과 “어느 대통령도 못 한 이란 핵 제거를 트럼프가 해내야 한다”는 쪽이 맞서고 있다고 한다. 트럼프는 집권 1기 동안 미국이 시작한 전쟁이 하나도 없다는 점을 자랑처럼 말해 왔다. ▷안팎으로 꽉 막힌 미국의 사정은, 트럼프 대통령 입장에선 벙커버스터 사용 옵션을 솔깃하게 만드는 요인이다. 그는 “내가 취임하면 모든 전쟁을 다 멈춰 세우겠다”고 호언장담했지만 우크라이나 등에서 휴전 협상은 지지부진하다. 상호관세 협상이나 불법 이민자 추방 정책도 논란이 크다. 트럼프에겐 벙커버스터와 관련해 두 가지 선택지가 있다. 이란의 핵 프로그램을 군사적으로 파괴하거나, 사용할 것처럼 구두 압박 수위를 높여간 뒤 이란이 핵 포기 문서에 서명하도록 만드는 방법이다. 평소라면 후자의 가능성이 더 높아 보이지만, 전면전이 시작된 지금은 예측하기 힘들어졌다.김승련 논설위원 srkim@donga.com}

    • 2025-0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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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김승련]“배은망덕” “미쳤다”… 파국 맞은 트럼프-머스크 브로맨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일론 머스크 테슬라 최고경영자(CEO)가 맺은 아슬아슬한 정치 동맹이 5일 파탄을 맞았다. 불과 1주일 전 트럼프는 정부효율부(DOGE)를 떠나는 머스크를 위해 백악관 집무실에서 퇴임식을 열어 황금 열쇠를 선물했다. 둘 사이 감정의 골은 이런 식의 ‘해피엔딩 연출’로 덮을 수 없었던 것 같다. 머스크가 1년 전 개인 돈 3700억 원을 기부하면서 대선 승리를 돕고, 트럼프는 우주와 방산 계약을 테슬라에 몰아주는 관계를 맺었다. 결별은 막장 드라마와 같았다. ▷누가 먼저 방아쇠를 당겼느냐는 무의미하지만, 그날만큼은 트럼프가 먼저 시작했다. 그는 독일 총리를 옆에 앉혀놓은 자리에서 “실망스럽다. 쓸데없는 전기차 보조금에 수조 원을 퍼부어야 한다”며 머스크를 비판했다. 트럼프가 “크고 아름다운 법안(Big, Beautiful Bill)”이라 부르는 감세법안을 두고 머스크가 이틀 전 “역겨운 흉물”이라고 부른 걸 참을 수 없었던 듯하다. TV 생중계를 봤을 머스크는 실시간으로 자기 소유 X(옛 트위터)에 “나 없었더라면 대선에 졌을 텐데. 배은망덕하다”고 썼다. ▷트럼프는 미독 정상회담 직후 하버드대에 했던 것처럼 테슬라와 맺은 정부 계약 중단 가능성을 꺼내들었다. 감정싸움이 그렇듯 수위는 계속 올라갔다. 머스크는 잠시 후 “트럼프 탄핵에 찬성한다”는 글을 SNS에 링크했다. 트럼프가 “머스크는 미쳤다”고 글을 쓰자, 머스크는 폭탄을 터뜨렸다. “엡스타인 명단에 트럼프가 포함됐고, 이게 정부가 명단 공개를 늦추는 이유”라고 썼다. 엡스타인은 미성년자 성매매 혐의로 옥살이하던 중 사망한 금융계 거물이다. ▷부동산 사업에 성공한 뒤 TV 명사가 된 트럼프나, 기행을 일삼으면서도 천재적 발상으로 전기차 및 우주산업 왕국을 만든 머스크에겐 공통점이 있다. 자기중심적이고, 2등을 용납 못 할 만큼 자존심(ego)이 세고, 때론 치기 어리다는 점이다. 이런 둘이 한 팀을 이뤄 백악관에 머물며 협력한다는 게 처음부터 불가능했는지 모른다. 주고받은 어린아이 말다툼 같은 싸움이 그걸 잘 보여준다. ▷둘의 결별은 서로를 파괴했다. 테슬라 주가가 하루 동안 14% 폭락해 시총 206조 원이 날아갔다. ‘누구도 도전할 수 없다’는 트럼프 신화도 금이 갔다. 머스크는 “트럼프는 3.5년 남았지만, 나는 40년 더 간다”고도 했다. 동맹국과 경쟁국을 가리지 않고 트럼프식 세계 질서를 심으려는 트럼프에겐 치명적인 장면이다. 글로벌 뉴스미디어는 이날 사건을 흥미롭게 다뤘는데, 트럼프가 자존심 회복을 위해 돌출 행동에 나설지 모른다는 불안한 변수가 새로 추가됐다. 새 정부 출범 뒤 미국과 안보 및 경제 협력 관계를 맺어야 할 우리로선 더욱 조심스러운 대목이다.김승련 논설위원 srkim@donga.com}

    • 2025-0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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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김승련]“타코”에 격분한 트럼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고약한 별명을 붙인 뒤 반복 사용하면서 정치적 상대방을 조롱하곤 했다. 조 바이든 대통령을 ‘슬리피 조(Sleepy Joe·졸린 바이든)’라 불렀고, 공화당 경선 상대자에겐 ‘낮은 스태미나(low stamina·활기가 없다)’라면서 손가락질했다. 최근엔 연준 의장을 향해 ‘미스터 투 레이트(Mr. Too Late·결정이 늦은 남자)’라는 별명을 붙였다. 그런 트럼프에게도 달갑잖은 별칭이 생겼다. 이랬다저랬다 하는 그의 관세 정책을 금융시장이 ‘타코(TACO)’라고 부르고 있다. ▷타코는 ‘트럼프는 늘 꽁무니 뺀다(Trump Always Chickens Out)’는 문장의 머리글자를 딴 것인데, 영국 기자가 몇 번 썼더니 미 증권가 리포트에 등장했다. 급기야 28일 취재기자가 백악관 집무실에서 “월가에서 ‘타코 거래’라는 말을 쓴다.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타코 거래란 트럼프의 변덕 정책에 익숙해진 금융시장이 이제 급등락하지 않게 된 현상을 가리킨다. ▷트럼프 2기 4개월 동안 글로벌 금융시장은 좌불안석이었다. 중국 캐나다 멕시코 등을 상대로 엄청난 고율 관세를 때린다고 발표했다가 곧바로 유예하는 일이 일상처럼 돼 버렸다. 미 워싱턴포스트가 세어 보니 관세 부과와 취소 또는 유예가 50번이 넘었다고 한다. 그때마다 주식, 채권, 외환시장은 폭락했다가 한발 뺀 뒤 비로소 회복했다. 그러다 보니 ‘양치기 소년’ 우화처럼 주식시장이 무덤덤해졌다. 실제로 트럼프는 지난주 유럽연합(EU)에 50% 관세를 매겼다가 이틀 만에 “1개월 반쯤 미루겠다”고 발표했다. 미 증시는 50% 관세라는 대형 악재에도 크게 흔들리지 않았다. ▷트럼프는 “(타코라는 말을) 처음 듣는다”며 “다시는 그런 식으로 묻지 말아라. 고약한(nasty) 질문이다”라고 반응했다. 표정 변화는 크지 않았지만, 불쾌감을 대놓고 드러냈다. 트럼프는 “말도 안 되는 높은 숫자를 제시한 뒤 살짝 낮춰주는 걸 협상이라 부른다”는 말로 자신을 방어하려 했다. 자신의 책 제목처럼 ‘거래의 기술’로 포장한 것이다. 하지만 그의 타코식 오락가락 정책은 관세뿐만이 아니다. ▷ 트럼프는 우크라이나 전쟁을 두고도 침략국 러시아의 편을 들면서 지구촌을 경악시켰는데, 최근엔 “푸틴은 완전히 미쳤다”며 돌아서는 듯하다. 집권 1기 땐 “하나의 중국 정책이 꼭 필요하냐”는 미중관계를 뒤흔드는 발언을 꺼냈다가 “존중하겠다”며 물러선 적도 있다. 트럼프를 겪어온 미국인들은 트럼프의 즉흥성이 문제의 중심이란 걸 간파하게 됐다. 또 그의 관세 정책이 생각만큼 지속가능하지 않다는 인상을 받고 있다. 트럼프가 신조어 ‘타코’에 언짢아 했지만, 진짜 그를 불편하게 만든 것은 자신과 자신의 정책에 대한 신뢰가 낮아지고 있다는 점일지 모른다.김승련 논설위원 srkim@donga.com}

    • 2025-0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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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승련 칼럼]‘완벽한 이력서’ 정치 엘리트가 던진 질문

    한덕수 전 대통령 권한대행이 공개 활동을 중단했다. 26일 비공개 소환조사를 받았고, 출국금지됐다는 정도만 보도됐다. 그가 카메라에 포착된 것은 일주일 전 하버드대 한국 동창회에 참석한 일이다. 한때 몸담았던 뜨거운 대선 국면에 비춰볼 때 한가한 일정이었다. 한 전 대행은 5월 초 사퇴 담화문에서 “고뇌 끝에, 이 길밖에 없다면 가겠다”며 결기를 보였다. 정치와 국정을 바꾸겠다는 선언이었는데, 단일화 소동 끝에 후보가 안 됐다면서 뒤로 빠졌다. 완벽한 이력서를 자랑하는 그의 50년 공직은 이해 못 할 선택들로 마지막 장이 채워지고 있다. 한 전 대행뿐만 아니라 국민의힘을 이끌던 비대위원장, 원내대표, 다선 중진, ‘윤핵관’들도 경력으로 치면 부러워할 게 많다. 거의 예외 없이 최고의 대학을 나오고, 고시에 붙거나 미국에서 박사 학위를 땄다. 계엄의 밤 이후 모든 게 달라졌다. 이들은 “계엄은 잘못”이라는 쉬운 답을 못 찾았고, 부적격 대통령 탄핵에 반대했고, 새벽 3시의 후보 바꿔치기를 두고 “이건 아니다”란 한마디가 없었다. 유권자들은 고위직이 주는 무게감을 믿었고, 필요할 때 제 몫을 해 줄 것을 기대했다. 평소엔 가려진 것들이 위기의 순간에 문득 드러나곤 한다. 경력에 걸맞은 실력을 논하기에 앞서, 보통 사람들의 상식과 동떨어져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더불어민주당이라고 다를 게 없다. 요새 민주당에는 전통적으로 국민의힘이 추구하는 ‘스펙 인재’가 늘어났지만 본주류는 운동권과 시민단체 출신이다. 이들은 선후배 인연을 바탕으로 당의 중심을 차지했다. 자폭한 보수 정치에 반사이익을 얻어 선수(選數)를 쌓았지만 국회를 운영하는 모습에서 우리를 미래로 이끌 것인지에 대한 회의감이 크다. 이들의 이력서는 세속적 눈으론 화려하지 않을 수 있지만 운동가의 관점에선 모자람이 없는 이들이 많다. 소리(小利)를 버리고 학생운동과 시민사회로 나섰으니 정의감을 기대하는 건 자연스럽다. 그럼에도 지난 몇 년간은 정의와 양심보다는 충성심이 더 부각된 시기였다. 지난 1개월만 봐도 그렇다. 민주당은 대법원장 탄핵, 특검, 청문회를 거론했다. 4심제를 도모했고, 대법관 수를 30명, 100명으로 늘리겠다고 나섰다. 사법부를 이렇게 거칠게 다룬 정당은 1987년 체제에선 없었다. 대중의 뇌리에서 잊혀졌지만 민주당은 당헌도 맞춤형으로 고쳤다. 대선 1년 전에 당 대표는 사퇴해야 한다는 조항도, 기소되면 당직을 맡을 수 없다는 조항도 지워 버렸다. 1인자의 대선 가도를 위한 조치였다. ‘양심세력’이 많다는 정당에서 “이건 아니다”란 반론이 거의 들리지 않았다. 어디서부터 잘못됐던 걸까. 국회의원이나 정부 고위직에 오른 이들에게서, 거창하게 표현하자면 역사적 책임을 진다는 의식이 약해진 탓일까. 뭐가 맞는지 한마디로 정의하긴 어렵다. 다만 편협한 공천이 남긴 악영향은 짚고 넘어가야 한다. 2002년 민주당 대선 경선이 흥행을 거둔 뒤 2007년 이후 불붙은 경선 전쟁과 궤를 같이하는 일이다. 경선 확대는 정당 민주화의 한 형태였지만, 그 바람에 국회의원 공천은 공천권을 쥔 1인자가 ‘내 사람’을 찾는 과정처럼 돼 버렸다. 당심과 민심을 얻어 대선 후보가 되려면 현역 의원 몇 명의 지지를 얻느냐가 중요해졌다. 결국 큰 정치를 하겠다며 당돌하게 덤벼드는 미래의 당 대표감, 대선 후보감이 공천받는 일이 거대 정당일수록 크게 줄었다. 그 대신 우수하지만 무난하고 충직한 인재들이 공천을 받아 계파원이 되는 경우가 늘었다. 오른쪽 정당은 모범생을 찾았고, 왼쪽 정당은 운동권 경력이 강조됐다. 그 결과, 소장파 모임이 실종됐다. 과거엔 당 주류에게 반론을 펴는 초·재선 ‘당내 야당’이 있었다. 요즘엔 국민의힘 상당수 초선들은 대통령 뜻을 따라 연판장을 돌리는 행동대가 됐다. 민주당 초선 중 개딸 집단의 뭇매를 감당하겠다는 이들은 찾기 어렵다. 당내 민주화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면서 이견을 용납 않는 ‘한목소리’가 강화된 것이다. 이러니 당 지도부가 긴장감이 떨어진 가운데 엉뚱한 선택, 황당한 행동에 별 부담 없이 나서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답을 찾아야 할 질문이 남아 있다. 누가 정치를 해야 하는가. 그 인재를 어떻게 찾아낼 것인가. 리더가 건강한 선택을 내릴 당내 문화는 어떻게 만들어 낼 것인가. 계엄과 탄핵, 무너지는 당내 민주주의로 지금의 정치가 흔들리는 것은 맞다. 하지만 그 밑바탕에는 사람의 빈곤, 특히 핵심 리더의 부재가 존재한다.김승련 논설위원 srkim@donga.com}

    • 2025-0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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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김승련]“선물 많이 받아 쌀 안 사봤다” 염장 질러 퇴출된 日 장관

    “집에 (선물)받은 쌀이 많다”는 황당 발언을 한 에토 다쿠 일본 농림수산상이 결국 21일 사실상 경질됐다. 에토 전 장관이 18일 자민당 모금행사 때 “저는 쌀을 산 적이 없다. 지원자분들이 쌀을 많이 주신다. 집에 팔 정도로 있다”고 말해 파문을 일으킨 지 사흘 만이다. 일본은 1년 새 쌀값이 2배로 뛰었다. 식당 덮밥, 편의점 삼각김밥, 일본술까지 줄줄이 가격이 올라 소비자들이 부담을 느끼고 있다. 쌀 생산은 줄지 않았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유통량이 늘지 않은 것이 이유라고 한다. ▷일 정부가 비축미까지 풀었지만 5kg에 4만∼5만 원 정도로 한국보다 2배 높게 형성된 쌀값은 요지부동이다. 이런 상황에서 쌀값 안정을 책임진 주무 장관이 그런 발언을 했으니 민심이 폭발했다. 미국이 “일본은 쌀값에 관세를 700%나 붙인다”고 할 정도로 일본에서 쌀은 단순 농산물이 아니다. 8선 의원인 에토 전 장관은 이른바 ‘농림족’ 정치인으로, 농림수산상만 2번째 맡았다. 그런 그가 쌀을 소재로 무신경한 발언을 내놓았다는 사실이 놀랍다. ▷궁금한 것은 ‘민심이 두렵다’는 정치인들이 어떻게 이렇게 발언할 수 있느냐는 점이다. 에토 전 장관의 배경에 답이 있을지 모른다. 에토는 세습 정치인이다. 그의 아버지 역시 같은 규슈섬 남쪽 미야자키현 농촌 지역을 낀 지역구에서 10선 의원을 지냈다. 1969년 이후 미야자키 선거는 이들 부자의 독무대나 다름없었다. 별다른 경쟁 없이 반복 당선되다 보니 긴장감이 떨어졌고, 결국 “집에 쌀이 넘쳐난다”고 태연하게 말할 수 있지 않았을까. ▷7월 참의원(상원) 선거를 앞둔 탓이겠지만, 그래도 일본에선 물의를 빚은 장관을 경질했다. 하지만 한국 정치에선 말실수 정도로 장관을 교체하는 일은 언제부턴가 사라졌다. 박상우 국토교통부 장관은 전세사기 피해가 급증했던 지난해 “젊은이들이 (집을) 덜렁덜렁 계약했다”고 해 분노를 자아냈다. 그러나 사과만 했을 뿐이다. 윤석열 전 대통령의 충암고 후배인 이상민 전 행정안전부 장관은 이태원 참사 직후 “경찰을 미리 배치해 해결할 문제가 아니었다”고 말해 공분을 자아냈다. 안전 담당 장관인 그를 문책하는 것이 순리라고 대다수가 여겼지만, 그는 자리를 지켰다. ▷문재인 정부라고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정옥 여성가족부 장관이 박원순 시장 추문 사건 때 “온 국민이 성인지 (감수)성을 집단 학습할 기회가 됐다”고 했다가 당시 여당 내에서도 비판을 받았다. 하지만 즉각 교체는 없었다. 여야 정치싸움이 거세지면서 권력 핵심부에선 “야당에 밀리면 안 된다”는 논리가 압도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시바 시게루 일본 총리가 에토를 경질하면서 당연한 해야 할 발언을 내놓았는데, 그것이 신선하게 느껴질 정도다. 그는 “모두 임명권자인 저의 책임”이라고 했다.김승련 논설위원 srkim@donga.com}

    • 2025-0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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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김승련]“한국은 중국 앞 항공모함”

    제2차 세계대전 때 항공모함(aircraft carrier)의 등장과 함께 해전은 바다 위 항공전 성격이 강해졌다. 하지만 항공모함 역시 잠수함이나 대함미사일에는 빈틈이 있다. 군사 전략가들은 가라앉지 않는 ‘불침(不沈·unsinkable) 항모’를 꿈꿨고, 전투기의 근접 이륙이 가능하면서도 침몰하지 않는 섬의 가치에 주목했다. 중국 턱밑의 대만, 미국령 괌이나 일본령 오키나와가 불침 항모로 불렸다. 중국은 남중국해 암초에 콘크리트를 퍼부어 중국식 불침 항모를 만들었다. ▷제이비어 브런슨 주한미군사령관이 15일 한국을 불침 항모처럼 묘사했다. 한 심포지엄에서 “한국은 일본과 중국 본토 사이에 떠 있는 섬 또는 고정된(fixed) 항공모함과 같다”고 했다. 중국 코앞에 있는 평택, 군산의 미군기지를 떠올리게 한다. 미 핵심 당국자가 한국을 이렇게 불렀던 적이 있나 싶을 정도로 드문 발언인데, 대중 억제를 위한 전략적 가치를 인정한 발언이다. 1983년 나카소네 야스히로 당시 일본 총리가 “일본은 미국에 있어서 (소련에 함께 저항하는) 불침 항모”라고 스스로를 낮춰 부른 적은 있다. ▷브런슨 사령관은 주한미군의 성격을 재정의하겠다는 뜻을 밝혔다고 봐야 한다. 내용도 피터 헤그세스 미 국방장관이 올 3월 비공개 회람한 ‘국방전략 잠정 지침’과 맥을 같이 한다. 그 지침에 따르면 미국은 한국에 핵우산을 제공한다. 하지만 북의 재래식 군사 위협은 미군이 아닌 한국과 일본이 함께 막도록 하겠다고 돼 있다. 미국은 중국 견제 후 남은 힘으로 한국을 돕는다는 구상이다. 주한미군은 1953년 동맹 이후 유지해 온 북한 억제가 아닌 중국 대응으로 성격이 달라진다. ▷트럼프라도 동맹을 쉽게 버릴 순 없다. 미국의 최강대국 지위는 나토 같은 집단안보나, 한미, 미일 등 양자동맹을 잘 맺어 이룬 것이다. 주한미군을 돈의 가치로 따지려 드는 트럼프지만 필요성은 명확히 알고 있다. 그는 집권 1기 때 “왜 비싼 돈 들여 주한미군을 운용하느냐”며 제임스 매티스 당시 국방장관에게 물은 적이 있다. 그때 나온 답이 “북한이 워싱턴을 향해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을 쐈을 때 알래스카 미군은 15분 뒤에 파악하지만, 주한미군은 7초 만에 알 수 있다”는 것이었다. 트럼프는 그 이후론 같은 질문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6·3 대선 후 새 정부가 들어서면 미국은 통상 및 관세 못지않게 70년 넘게 주둔한 주한미군의 혜택을 돈으로 보상해 달라고 나올 가능성이 크다. 미국이 한반도라는 위치가 지닌 가치를 인정한 것은 그나마 다행이다. 그러나 미국이 한국이란 항모에서 전투기를 대만으로 출격시키겠다며 미중 갈등에 우리를 끌어들일 개연성을 높였다는 점은 부담이 아닐 수 없다. 우리의 안보 운명을 가를 동맹 간 험난한 대화와 협상의 때가 소리 없이 다가오고 있다.김승련 논설위원 srkim@donga.com}

    • 2025-0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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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승련 칼럼]대통령 최측근들의 집단적 ‘불고지죄’

    국가보안법 10조에 불고지죄(不告知罪)라는 게 있다. 주위 사람이 반국가단체에 가입했거나, 북한 인사를 몰래 만난 사실 등을 알면서도 당국에 신고(고지)하지 않았을 때 처벌한다는 내용이다. 양심의 자유를 해친다는 문제를 지닌 탓에 오래전부터 사문화됐다. 대통령들의 거듭된 실패를 지켜보면서 이 조항을 대통령의 최측근에게는 적용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에 이르렀다. 후보 잘못에 입 다물었다고 법적 처벌을 할 수는 없지만, 정치적 책임은 묻자는 뜻이다. 대선 후보가 지닌 자질 부족과 내적 허점을 뻔히 알면서 그런 게 없는 것처럼 이미지를 만든 죄, 대통령 측근으로 권세를 누리면서 바로 그런 문제가 촉발한 국정 일탈에 침묵한 죄가 해당한다. 국민 앞에 이실직고야 할 수 없더라도, 내부적으론 개선책을 찾아내 바로잡아야 하는 것 아닌가. 이젠 비밀도 아니지만, 윤석열 전 대통령은 역정(逆情)과 배우자 국정개입으로 무너지고 있었다. 버럭은 정확한 보고를 어렵게 만들었고, 오판이 종종 발생했다. 가령, 윤 전 대통령은 트럼프 승리에 깜짝 놀랐다고 한다. “지난해 여름 바이든 후보 교체설이 나온 즈음 트럼프 당선 가능성이 보고됐다. 그때 대통령은 ‘말이 되느냐’며 역정을 냈다.” 그는 91개 혐의를 받는 형사피고인 트럼프의 당선 가능성을 상상하기도 싫었는지 모르겠다. 이후론 ‘해리스 우세’ 보고만 받게 됐다고 하니, 기가 찰 노릇이다. 2030년 엑스포 경쟁에서 사우디아라비아에 참패하는 순간까지도 윤 전 대통령은 ‘부산 승리’를 확신했다고 한다. 어떤 보고를 받았길래 그럴까 궁금했는데, 이젠 짐작이 간다. 김건희 여사의 국정개입은 그 자체로도 문제지만, 참모들에게서 생각의 자유를 빼앗아갔다. 용산 대통령실에는 요즘 신문에 등장하는 건진법사 전성배 씨의 조카가 심어놓은 행정관 A 씨 같은 인물들이 곳곳에 포진했다고 한다. 정무와 홍보 라인 실무자들은 대통령의 성공을 위해서는 꼭 개선해야 하지만, 여사가 불편해할 주제는 논의하지 못했다고 한다. “발언이 여사에게 보고된다고 믿었다. 오해 살 만한 생각은 꺼내지 않았다”는 내부자의 말이 뼈아프다. 지금까지 만난 역대 대통령실 참모들은 대통령이 성공해야 나라도 잘되고, 종국엔 자신의 장래도 잘 풀린다고 믿는 이들이다. 좌우를 가릴 것 없이 비슷했다. 그러자면 대통령을 정말 존경하고 좋아해야 하는데, 이런 근본적 문제점을 안고 있으니 용산은 활발한 국정의 중심이 되지 못했다. 윤 전 대통령 시절이 더 심각했을 뿐 사정은 과거 정부라고 크게 다르지 않았다. 박근혜의 대면보고 기피로 상징되는 불통이나, 문재인의 소득주도성장이나 탈원전 같은 외골수 경제정책은 국정에 난맥을 낳았다. 최측근들은 미래의 대통령이 갖고 있던 소통의지 부족이나, 이념 경도를 알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선거 국면에서 국민 앞에 ‘불고지’했다. 유권자는 더 정확하게 알고 투표할 권리를 잃어버렸던 것이다. 이준석 개혁신당 의원은 3년 전 양두구육(羊頭狗肉)이란 말을 썼다. 양의 머리를 좌판에 올려놓고 팔았지만, 실제론 개고기였다는 뜻이다. 국민의힘이 대선 때 정직하지 못했다는 자기 고백으로 들린다. 대선 당시 이 의원은 윤 후보의 버럭 기질과 부인의 사사건건 개입을 알고 있었을까. 실상을 더 속속들이 알았던 것은 윤핵관들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윤 후보를 ‘공정과 상식’의 아이콘으로 만들었다. 그랬던 윤핵관들은 탄핵과 파면을 거치며 구두 사과만 했을 뿐 여전히 정치의 전면에 서 있다. 또 진보 정부가 5년 만에 보수로 넘어갔다는 점에서 심판을 받았던 문 정부 시절의 최측근들도 비슷하다. 국정 오류를 인정한 적도 없다.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후보의 약진 탓에 위축됐을 뿐 여전히 재기를 노리고 있다. 대선이 한 달 남짓 남은 지금, 비슷한 일은 없을까. 이 후보의 최측근들은 열성 민주당원들도 알 수 없는 이 후보의 실제 생각과 기질을 잘 알 것이다. 지금 내놓은 이 후보의 중도 보수 전략은 실체가 있는 것인지, 선거에 맞춰 내놓은 것인지 외부에선 알 도리가 없다. 여타 후보들도 마찬가지다. 국민의힘 한동훈 후보가 전자기타를 치는 등 일상 영상을 공개했다. 민주당 3선 의원 출신은 “회계로 치면 분식회계다. 얼굴에 분칠을 했다”고 평가했다. 이처럼 여러 후보의 이미지 전략에 유권자들이 정신 바짝 차려야 하는 이유다. 그동안 유권자들은 번번이 후보의 기획된 모습을 믿었다가 절망하곤 했다. 측근들은 문제가 생길 때마다 “제왕적 대통령제가 문제”라며 빠져나간다. 아무도 묻고 따지지도 않으니, 측근 정치인들은 거리낌 없이 후보를 포장해 선거를 치르고 있다.김승련 논설위원 srkim@donga.com}

    • 2025-0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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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김승련]10→20→54→104→125→145%→“中에 잘해 줄 것”

    ‘10%→20%→54%→104%→125%→145%.’ 올 1월 취임한 미국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중국에 매긴 관세율은 가파르게 올랐다. 보편관세, 상호관세, 보복관세라는 이름이 붙었다. 4월 초 한국(25%), 일본(24%) 등 60여 나라에 부과하기로 한 상호관세는 시행 3시간 만에 90일 유예가 발표됐다. 이런 식의 관세 정책은 전략적 로드맵 없이 트럼프가 그때그때 만난 참모가 누구냐에 따라 결정됐다는 보도도 있다. 주먹구구 정책으로 물러난 이는 없었으니, 책임이 트럼프에게 있다는 의미다. ▷백악관은 거침없었다. 피터 나바로 백악관 고문은 “90일 동안 90개국과 무역협정을 맺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취임 100일을 앞둔 24일 현재 실제 체결된 나라는 한 곳도 없다. 미국은 이번 주 한국 일본 태국 인도와 협상을 벌이고 있다. ‘동맹국과 우방국 먼저’라는 미국의 제안에 따른 것인데, 관세 외에도 안보와 투자까지 패키지 딜로 다룰 수 있어서 단기간에 결론짓기 어렵다는 전망이 많다. ▷궁지에 몰리다 보니 트럼프로선 체면 불고하고 생각을 뒤집는 일이 잦아졌다. 그는 22일 145% 대중국 관세에 대해 “그렇게 높게 유지될 수 없다. 중국을 매우 잘 대해줄 거다”라고 말했다. “중국 하기에 달렸다”는 단서를 달았지만, 선제적인 유화 제스처였다. 금리 인하를 요구하면서 교체 가능성을 흘렸던 제롬 파월 연준(FRB) 의장에 대해서도 “교체할 뜻이 없다”고 돌아섰다. 145%라는 상식 밖 관세를 매기거나, “언제 그를 해고(termination)하더라도 빠른 게 아니다”라고 할 때의 호기로움은 안 보였다. ▷트럼프의 변덕은 미국과 자신의 힘을 과대평가한 결과다. 그는 “참 아름다운(beautiful) 단어가 관세인데, 관세를 매겨 다시 부자가 되자”며 관세 전쟁의 승리를 당연시했다. 안보 이슈에서도 “내가 취임하면 우크라이나와 가자지구 전쟁은 몇 주 내로 끝난다”고 호언했다. 하지만 현실 세계는 트럼프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백악관은 충성파로 채워져 있다. 이들은 트럼프가 세운 불가능한 목표를 두고 “이건 어렵다” “달리 접근해 보자”는 의견을 내지 못했다는 게 미 언론의 평가다. ▷트럼프를 실제로 멈칫하게 만든 것은 시장의 힘이다. 트럼프가 관세를 발표할 때마다 주식시장과 채권시장은 약세를 면치 못했다. 개인투자자, 연금가입자의 자산이 줄어드는데 버틸 정치인은 없다. “중국 제품이 안 들어오면 2주 뒤엔 매대가 텅 빌 수 있다”는 대형 유통사 사장들의 경고에 트럼프는 위축됐다. 트럼프의 오락가락은 국제질서에 예상보다 더 큰 리스크를 안겼다. 그렇다면 시장의 힘을 절감한 트럼프가 속도 조절에 나설까. 그럴 수만 있다면 지금까지 혼란이 큰 약이 된 셈이다.김승련 논설위원 srkim@donga.com}

    • 2025-0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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