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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 언론들이 아시아 금융시장 기사를 쓸 때 흔히 한국과 비교하는 국가가 인도네시아다. 한국을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5000달러가량인 나라와 견주는 게 맞지 않아 보이지만, 글로벌 시각에서는 그럴 법도 하다. 한국과 인도네시아는 1997년 아시아 외환위기 때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을 받은 ‘환란 동기’다. 세계 금융시장을 강타하는 악재가 터지면 약체였던 두 국가가 얼마나 타격을 받았는지 주목받는다. 요즘 말로 ‘긁히는 이야기’를 하자면 2022년 블룸버그통신은 한국 원화를 필리핀 페소화, 태국 밧화와 함께 가장 취약한 통화로 꼽았다. 인도네시아 루피아화는 언급되지도 않았다. 한국과 인도네시아는 이번에 또 엮였다. 2일 아시아 증시가 ‘워시 발작’에 뒤흔들렸을 때다. 케빈 워시 전 미 연방준비제도(Fed·연준) 이사가 의장 후보자로 지명된 뒤 그의 매파 성향(통화 긴축 선호) 우려로 달러화 강세 전망이 짙어졌다. 투자자들이 달러를 사들이려 금, 은을 판 데 이어 아시아 주식도 던지려는 심리가 퍼졌다. 한국과 인도네시아 증시가 얼마나 휘청였는지가 관심사가 됐다. 코스피는 전 거래일 대비 5.26% 떨어져 하락 폭이 인도네시아 주가 하락률(4.88%)보다 컸다. 한국이 경쟁국으로 삼는 대만과 일본 증시는 1%대, 중국과 홍콩 증시는 2%대 빠진 정도였다. 한국 증시는 개인투자자 비중이 60∼70%대로 높은 편이다. 이들은 단기 투자 성향이 강해 증시가 더 출렁인다. 최근 유동성이 불어나고 증시 성적이 좋아지자, 투자자 예탁금은 100조 원을 돌파했다. 단타 성향이 강한 투자자들이 넣고 빼는 돈뭉치가 커진 셈이니 시장도 더 널뛰기 쉽다. 문제는 최근 고환율이 심각해지면서 한국 증시 변동성이 더 심해지고 있다는 점이다. 원화 가치가 떨어지면 투자자들은 환차손을 우려해 한국 주식을 팔아 원화를 달러화로 바꿔 두려고 한다. 원-달러 환율이 유독 출렁일수록 코스피와 코스닥의 변동성도 더 커질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다. 일부 개인투자자들은 급락장을 저가 매수 기회로 보기도 한다. 하지만 변동성이 너무 강하면 대외적으로 신뢰를 얻기 힘들다. 한국 증시 시가총액이 독일을 제치고 세계 10위에 진입했지만, 한국 증시 기초 체력을 세계 10위권으로 보는 시각은 많지 않다. 증시가 대외 악재에 크게 흔들리지 않는 체력을 키우려면 ‘반도체 투톱’인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시가총액이 40%에 육박한 쏠림 구조를 고칠 필요가 있다. 지금 이런 구조로는 인공지능(AI) 거품이 현실이 될 경우 증시가 단숨에 무너질 수도 있다. 다양한 기초 산업이 성장할 수 있게끔 혁신 기업을 발굴해 지원하는 노력이 더욱 절실하다. 개인투자자의 장기 분산 투자를 유도할 수 있는 세금 감면 혜택을 마련하는 등 정부가 개발해야 할 정책도 많다. 국민연금 같은 한국 주식시장의 ‘큰손’ 기관투자가를 키울 필요도 있다. 전문적인 운용 방침에 따라 장기로 분산 투자하는 기금이 커지면 시장이 출렁일 때 최소의 안전판이 될 수 있다. 이제 한국 증시의 몸집에 걸맞게 증시의 체질을 개선할 때다.조은아 경제부 차장 achim@donga.com}

‘은행이 왜 음식 배달 사업을 하지?’ 신한은행이 2022년 1월 배달의 민족, 쿠팡이츠 등이 치열한 경쟁을 벌이는 모바일 배달 애플리케이션(앱) 시장에 공공 배달 앱 ‘땡겨요’를 선보이며 뛰어들자 의아해하는 사람이 많았다. 은행을 예·적금 관리와 대출 업무를 수행하는 곳으로만 인식해 온 대중에게, 은행의 배달 시장 진출은 생소한 행보였기 때문이다. 은행이 고유 업무가 아닌 영역에 진출하지 않도록 규제하는 금융당국은 신한은행의 배달 앱은 허용해 줬다. 민간 배달 앱 수수료율(7.8%)에 비해 2%의 낮은 수수료율을 제공해 자영업자와 상생한다는 취지나 음식점 주문 데이터 등으로 자영업자 신용을 평가해 대출하는 혁신성을 의미 있게 본 것이다. 배달 앱은 지난해 11월 배달 앱 시장 점유율 7.7%까지 성장했지만, 신한은행은 고민이 많다. 앱의 사업 규모가 커져 분사해서 사업을 더 키우고 싶어도 그럴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사업을 분사시키려면 은행법에 따라 은행은 지분의 15%까지만 가질 수 있다. 신한은행 관계자는 “거대 민간 자본이 지분 대부분을 가져가면 배달 앱의 공공성이 희석되기 쉽다”며 “우리 앱처럼 공공성이 있는 플랫폼은 분사할 때 은행 지분을 높일 수 있게 규제를 풀어주면 좋겠다”고 말했다. 시대에 맞지 않는 규제가 혁신 금융 성장의 발목을 붙잡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정부가 금융권 자금을 과열된 부동산과 손쉬운 대출에서 혁신 산업을 지원하는 방향으로 틀기 위해 ‘생산적 금융’을 강조하고 있지만, 금융회사들은 획기적인 규제 완화를 요구하고 있다. 이들은 “해외에서 시도되는 다양한 혁신 금융을 벤치마킹하고 싶어도, 규제 탓에 못 하고 있다”고 호소한다. ● 금융지주 출자 규제 완화안, 9개월째 제자리금융위원회는 지난해 4월 핀테크에 대한 금융지주회사의 출자 제한을 5%에서 15%로 완화하기로 했다. 금융지주가 혁신 서비스를 운영하는 핀테크에 투자할 수 있도록 금융지주회사법 등 개정안을 입법 예고한 것이다. 하지만 금융그룹들은 출자 제한 비중과 범위를 대폭 확대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단순히 출자 제한을 10%포인트 늘린다고 재무적(FI) 투자자가 하는 수준 이상으로 협업을 확대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한 금융그룹 관계자는 “출자 제한 범위를 핀테크 산업에 한정하는 것은 인공지능(AI), 양자컴퓨팅, 웹3.0 시대의 흐름과 맞지 않는다”고 말했다. 금융지주 출자 범위를 핀테크 외 다른 분야로 넓혀야 한다는 뜻이다. 게다가 해당 개정안은 9개월이 지나도록 국회에 제출조차 되지 못하고 있다. 당장 올해부터 5대 금융이 생산적 금융에 441조 원을 투입하기로 한 가운데 ‘생산적 금융’ 분야로 분류되는 74.7%(331조 원)를 차지하는 대출에 대한 세부 지침이 필요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예컨대 데이터센터를 짓는 사람에게 돈을 빌려주면 생산적 금융 대출로 볼 수 있을지 모호하다. 이 사람이 데이터센터를 지은 뒤 센터에서 임대업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부동산 대출이 아닌 혁신 산업에 대출하자는 생산적 금융의 취지를 고려하면 이런 경우는 생산적 금융으로 분류할지 애매하다. 한 금융그룹 관계자는 “금융사가 자의적으로 판단했다가 나중에 생산적 금융 여신이 아니라고 판단되면 문제가 생길 수 있다”면서 “금융 당국에서 큰 틀에서의 지침을 제공해야 속도와 실행력이 제고될 것”이라고 말했다. 생산적 금융 투입 자금 중 50조 원이 배당된 정책 펀드(국민성장펀드)가 잘 굴러가도록 주식의 위험가중자산(RWA) 산정 기준을 더 완화해 달라는 의견도 있다. 은행의 건전성 지표인 RWA를 산정할 때 기업 대출, 주식 등 비교적 모험적인 투자에는 가계대출보다 높은 위험 가중치가 적용된다. 이 때문에 은행들은 건전성을 양호하게 관리하기 위해 모험 투자를 꺼리는 편이다. 은행들이 정책 펀드 투자를 꺼리지 않게끔 건전성 기준을 낮춰 달라는 의미다. ● 보험사들 “건전성 규제 부담 덜어줘야” 보험사들은 비상장 주식에 해당하는 정책 펀드에 투자할 때 요구 자본을 계산할 경우 충격 수준 또는 위험계수를 완화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요구 자본은 보험금 지급에 대비해 반드시 적립해야 하는 최소한의 자본을 말한다. 지금 규제에 따르면 비상장 주식 충격 수준은 49% 정도인데, 유럽 등 선진시장의 상장 주식이나 장기 보유 주식(25∼35%)에 비해 높다는 얘기다. 당국이 요구하는 충격 수준이나 위험계수가 높으면 보험사들은 자본을 많이 쌓아둬야 해 부담이 크다. 보험업계 관계자는 “충격 수준이 높으면 펀드 투자에 대한 장부가액이 하락해 자본과 순자산이 떨어지기 때문에 결국 요구 자본 증가로 이어진다”며 “당국이 충격 수준을 완화하면 건전성 규제를 맞추는 부담을 덜어 투자가 쉬워질 것”이라고 말했다. 여신금융업계에서는 신기술금융사가 투자 목적회사(SPC)를 설립할 수 있도록 하고, 외부 자금 차입을 허용할 수 있도록 규제를 개선해 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현재는 신기술금융사가 신기술 투자조합을 만들어 벤처기업 등에 투자하는 형태다. 그런데 재원이 한정돼 투자 규모 확대에 한계가 있다는 설명이다. 정부 차원에서 생산적 금융의 실행을 위한 고환율 등 복합적인 거시 위험을 적극적으로 관리해 달라는 요구도 나온다. 한 금융사 관계자는 “환율 변동성 확대는 해외·투자은행(IB) 부문의 헤지 비용과 이익 변동성을 키우고, 재정 확대·기업 조달 비용 증가로 시장금리가 떨어지지 않는 상황에서는 기업금융·인프라 금융의 조달 비용 부담이 높아질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돈 안 되는 초기 단계, 정부가 총대 메야” 마중물 전략 강조中 빅펀드, 금융지원 추가 확보 기여테마섹 모델, 국가 전략산업 육성성공한국판 생산적 금융이 성공하려면 정부는 정책 금융으로 연구개발(R&D)과 초기 사업단계 자금 지원에 집중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높은 수익이 보장되지 않아 민간 금융이 투자하기 어려운 단계에선 정부의 자금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금융위원회 생산적 금융 태스크포스(TF) 회의에서 발표된 한국개발연구원(KDI)의 ‘초혁신경제 선도를 위한 한국 금융의 생산적 지원 역할 강화 전략’ 자료에 따르면 정책 금융은 혁신 산업 생태계 기반 조성을 목표로 하고 초기 리스크를 감수할 필요가 있다. 첨단 제조와 신산업의 경우, 민간 금융으로선 지출하는 투자 비용이 많이 들고 투자금 회수 기간이 긴 데다 시장 불확실성이 커서 단독으로 진입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는 중국이 눈에 띄는 사례로 꼽힌다. 우리금융경영연구소에 따르면, 중국은 2015년 발표한 산업정책 ‘중국제조 2025’를 추진하기 위해 생산적 금융 정책을 내놨다. 첨단·신흥산업으로 장기 자금이 집중될 수 있도록 국영은행을 중심으로 저리 대출을 지원했다. 정부 자금이 투입된 사모펀드(GGF)는 적극적인 대내외 투자에 나섰다. 국가 반도체 산업투자 펀드(빅펀드)는 상징적인 사례로 꼽힌다. 중국 정부가 국가 재정을 투입해 2014년 1기, 2019년 2기, 2024년 3기 빅펀드를 출범시켰다. 3개 국영 펀드의 자본금 규모 합계는 6868억5000만 위안(약 145조3031억 원)에 이른다. 우리금융경영연구소는 “빅펀드 투자는 대상 기업이 은행 대출 등 여타 금융 지원까지 추가 확보하는 데 기여했다”며 “빅펀드가 투자한 기업은 금융회사에 정책 정합성, 투자 적격성 신호로 인식되고 대외 신용도도 높아져 중장기 설비 대출·회사채 발행이 용이해지는 효과가 있었다”고 분석했다. 싱가포르 국부펀드 테마섹도 국가 전략산업을 장기적으로 육성하는 데 성공한 모델로 꼽힌다. KDI는 “항공·통신·금융 등 기간산업 기반 구축에서 시작해 인공지능(AI)·바이오·첨단 제조까지 전략기술 투자로 국가 경쟁력을 강화했다”고 짚었다. 민간 금융은 글로벌 확장을 목표로 대규모 양산, 해외 확장 단계에서 자금을 지원할 필요가 있다고 KDI는 설명했다. 예컨대 동영상 플랫폼 틱톡의 모회사인 중국 바이트댄스는 세쿼이아 캐피털, GGV 캐피털의 투자를 받아 미국·유럽 진출에 필요한 마케팅·인프라 비용을 지원받았다. 중국 최대 전자상거래 기업 알리바바도 소프트뱅크와 야후의 투자를 받아 글로벌 플랫폼으로 성장했다.특별취재팀▽팀장 조은아 경제부 차장 achim@donga.com▽싱가포르=강우석, 스톡홀름=김수현 기자실리콘밸리=신진우, 보스턴=임우선, 런던=유근형 특파원서울=전주영 신무경 주현우 최미송 기자}

“영국이 아닌 다른 유럽 나라에 있었다면 우리의 아이디어는 아직 머릿속에서만 존재했을지 모른다.” 영국 친환경 냉동운송 시스템 스타트업인 선스왑의 공동 창업자 앤드루 스시스 최고경영책임자(COO)는 지난해 12월 15일 영국 수도 런던 인근 서리의 연구개발(R&D)센터를 아시아 언론 최초로 동아일보에 공개하며 이같이 말했다. 선스왑이 2020년 창업 후 5년 만에 트럭 냉동운송계의 ‘게임 체인저’로 성장한 비결은 영국의 기후테크 전문 벤처캐피털(VC)에 있다는 얘기다. 그는 “기후테크 VC들은 아이디어의 싹을 틔우는 인큐베이팅 역할을 시작으로 실제 사업성을 갖춰 주는 액셀러레이팅까지 한다”고 말했다. ● 탈탄소 냉동 트럭으로 운송비 81% 감소 선스왑은 디젤 기반 냉동 시스템이 30년 이상 독주하던 트레일러 업계에서 ‘신성’으로 평가받는다. 전기와 태양광으로만 운영되는 ‘탈탄소 냉동 시스템’을 개발해 급성장하고 있다. 트레일러 상부와 측면에 고효율 태양광 패널과 배터리를 설치하면 운행 중에도 자체적으로 충전을 할 수 있다. 이를 통해 트럭 1대당 이산화탄소 배출을 연간 12t 줄일 수 있다. 냉동 트레일러 운영 비용도 디젤 차량 대비 최대 81%까지 줄었다. 선스왑은 앤드루 등 공동 창업자 3명이 시작한 작은 회사였다. 사업이 아이디어 단계에 불과했던 2020년 기후테크 전문 VC ‘서스테이너블 벤처스’가 전격적으로 15만 파운드(약 3억 원)를 투자하면서 연구개발의 기반이 마련됐다. 서스테이너블 벤처스는 단순 자금 투자뿐 아니라 사무공간을 제공했다. 1년간 재무, 마케팅, 영업, 웹사이트 디자인 등 실무를 돕고, 다양한 교육을 지원했다. 축적된 기후테크 컨설팅 노하우를 살려 비즈니스 모델을 제시하고 유통망을 갖출 수 있도록 지원했다. ● 기후테크 VC의 전문성, 성공의 밑거름 사업이 물꼬를 트자 추가 투자가 이어졌다. 영국 유력 바클리 은행, 정부 기후펀드 ‘클린 그로스 펀드’, ‘브리티시 그로스 펀드’ 등이 투자를 결정했다. 셸벤처스의 투자는 선스왑이 유럽 전역의 물류 네트워크를 확보하는 데 큰 도움을 줬다. 투자는 ‘기술 혁신’으로 이어졌다. 투자로 규모의 경제가 실현되고, 자체적인 시험 데이터가 쌓이면서 ‘데이터 기반 배터리 관리 소프트웨어 기술’까지 갖추게 됐다. 인공지능(AI) 데이터 기술을 도입해 시간이 지나면서 배터리 기능을 최적화시키는 시스템까지 마련했다. 선스왑 관계자는 “기존 디젤 기반 냉동 운송 체계는 성능이 떨어지고 고장이 나도 왜 그런지 알기 어려웠지만, 이제는 배터리와 냉동 수준을 실시간 확인할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3명이 창업을 꿈꿨던 회사는 현재 직원 100명인 중견 기업으로 성장 중이다. 사무실 규모도 6배로 확장했다. VC가 스타트업을 직접 인수하며 기술 혁신이 가속화된 사례도 있다. 영국 노팅엄에 본사를 둔 풍력발전기 예측 정비기업 오닉스는 2024년 세계적인 금융그룹 맥쿼리가 지분을 100% 확보하며 기술 혁신이 속도를 냈다.오닉스는 사전에 고장 가능성을 예측하기 힘들고, 한 번 고장 나면 천문학적인 비용이 투입되는 풍력발전 터빈을 실시간 점검하는 회사다. 기존에는 풍력발전의 고장 탐지와 진단에 집중했다. 그러다가 맥쿼리의 인수 뒤 감속 운전 여부, 수리 시점, 자원 투입 계획까지 AI로 운영되는 솔루션으로 진화했다. 단순 경보 시스템을 넘어 풍력발전소의 총운영비까지 줄이는 시스템으로 발전한 것이다. 알렉시스 그레논 오닉스 최고경영자(CEO)는 “맥쿼리의 투자로 자원이 안정적으로 공급되고 인재들이 합류하면서 개발 역량이 급속도로 커졌다”고 설명했다.● VC의 투자 손실 지원하는 영국 정부유럽 지역에서 영국의 스타트업 생태계가 상대적으로 탄탄하다는 평가를 받는 이유는 혁신 금융 시스템이 안정적으로 기능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나온다.초기 스타트업 투자를 촉진하기 위한 SEIS 제도가 대표적이다. 영국 정부는 SEIS를 통해 개인투자자가 소규모 기업에 투자하면 최대 50%까지 소득세를 공제해 준다. 투자 주식을 3년 이상 보유하면 양도소득세를 면제해 주고, 투자에 실패해도 손실을 부분적으로 보전해 투자 리스크를 낮춰 준다. 스타트업 컨설팅 전문 기업 도헤 글로벌의 율리아나 이사는 “유럽의 다른 나라에 비해 영국의 스타트업 투자가 활발한 건 리스크가 낮기 때문”이라며 “아이디어 단계에서도 민간 VC들이 망설임 없이 투자할 수 있게 해준다”고 설명했다. 스타트업을 키우는 제도들도 영국 스타트업 생태계의 강점으로 평가된다. 영국 정부의 연구개발 보조금 지원 제도인 ‘이노베이트 UK’는 초기 개발 단계에 필요한 자금을 제공하지만, 지분을 취득하지 않는다. ‘지원하되 간섭하지 않는다’는 철학을 실제 투자에 적용하는 셈이다. 영국 정부가 기후 정책의 일관성을 유지하고 있는 점도 안정적 투자 환경을 조성하는 비결이다. 오닉스 관계자는 “미국은 정권에 따라 기후 정책이 달라지는데, 영국은 5년 단위 탄소 감축 예산이 법으로 이미 규정돼 있어 정책의 일관성이 유지되고 있다”고 소개했다.기후 스타트업 160여 개 품은 英 벤처캐피털창업가 500여 명 자유롭게 드나들어고액 투자자들의 방 별도로 마련“회사 맞아? 카페 아닌가?” 지난해 12월 16일(현지 시간) 영국 런던의 명물 런던아이 인근. 100년 넘은 바로크풍 흰색 벽돌 건물 5층에 들어선 기후테크 전문 벤처캐피털 ‘서스테이너블 벤처스’ 사옥의 첫인상은 이랬다. 회사 외부는 영국 소설 해리포터 시리즈의 호그와트를 연상케 했지만, 실내로 들어서자 파티룸에 들어선 느낌이 들었다. 입구 바로 앞 카페에선 직원들이 다양한 종류의 음료와 디저트를 30% 할인가로 즐기며 자유로운 토론을 진행했다. 크리스마스 장식으로 꾸며진 1인용 방에 누워 생각에 빠진 이들도 있었다. 회사 사무실이라곤 믿기지 않는 풍경이었다. 이 건물은 1900년대 초부터 런던의 행정기관으로 사용되다 최근 37년간 제대로 된 쓰임새를 찾지 못하고 방치돼 왔다. 서스테이너블 벤처스는 3년 전 런던 중심부의 건물을 ‘기후 테크의 허브’로 만들겠다는 프로젝트를 가동했다. 공간의 벽과 바닥은 100년 넘은 기존 자재를 그대로 유지해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살렸다. 다만 가구, 파티션 등 사무실 인테리어는 모두 재활용 소재를 사용했다. “공간이 사고를 지배한다”는 생각으로 최대한 혁신적이고 지속 가능한 공간을 추구한 것이다. 앤드루 워즈워스 서스테이너블 벤처스 최고경영자(CEO)는 “아이디어 단계에서부터 혁신적이고 지속 가능한 영감을 키울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이곳은 160여 개의 기후 테크 스타트업이 입주해 미래를 준비하고 있었다. 하루 평균 500여 명이 출퇴근 시간에 상관없이 자유롭게 드나들었다. 이색적인 건 이 공간에 고액 자산가 투자자들의 방이 별도로 마련돼 있다는 점이다. 이들은 같은 공간에서 스타트업 창업자들과 초기 단계부터 교류하며 투자할 회사들을 모색한다. 서스테이너블 벤처스는 투자하고 수익을 거두는 전형적인 VC를 넘어 유망한 기업을 아이디어 단계부터 발굴해 사업 모델을 함께 성장시켜 나가 ‘기후테크 생태계’를 키우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워즈워스 CEO는 “우리는 투자자가 아니라 가상의 공동 창업자에 가깝다”며 “기후테크 기업들의 어려움을 초기 단계부터 맞춤형으로 해결할 수 있게 돕고 있다”고 말했다.특별취재팀▽팀장 조은아 경제부 차장 achim@donga.com▽싱가포르=강우석, 스톡홀름=김수현 기자실리콘밸리=신진우, 보스턴=임우선, 런던=유근형 특파원서울=전주영 신무경 주현우 최미송 기자}

지난해 12월 11일(현지 시간) 미국 매사추세츠주(州) 서머빌시. ‘미국 바이오산업의 실리콘 밸리’, ‘지구에서 가장 혁신적인 1제곱 마일’이란 별명을 갖고 있는 케임브리지시 켄들 스퀘어와 함께 바이오산업 혁신 벨트를 형성하고 있는 이곳에 ‘아프리오리 바이오(Apriori Bio·이하 아프리오리)’사가 있었다. 아프리오리는 인공지능(AI), 머신러닝으로 바이러스의 미래 변이를 예측하고, 그에 맞는 효과적 백신을 개발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바이오 벤처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백신을 개발한 ‘모더나’를 탄생시켜 글로벌 바이오 업계에서 유명한 벤처캐피털(VC) ‘플래그십 파이어니어링(Flagship Pioneering·이하 플래그십)’이 창업을 이끌었다.이날 찾은 아프리오리 입주 건물에서는 뜻밖에도 아프리오리 외에 플래그십이 창업시킨 바이오 벤처 회사 5곳을 한 층에서 볼 수 있었다. 이곳은 플래그십이 유망한 신생 기업들을 모아 무럭무럭 키우는 거대한 인큐베이터인 셈이었다. 첨단 스타트업에 적극 투자하는 ‘혁신 금융’ 플래그십은 씨앗 기업들을 집적해 창업 시너지를 배가시키고 있었다.● 대형 VC가 마련한 바이오 창업 단지기업들은 넓은 한 층 공간을 각각 구역을 나눠 쓰고 있었다. 가벽 하나 세워져 있지 않은 개방된 공간이라 겉보기에는 마치 한 회사의 거대한 연구실처럼 보였다.연구실에서 만난 아프리오리 관계자는 “우리 회사는 직원이 20여 명이라 딱 스타트업 규모지만 우리가 누리는 자원은 일반 스타트업은 누릴 수 없는 수준”이라고 말했다. 이어 “플래그십이 투자한 여러 분야 바이오 벤처가 한 공간에서 협업하고 자원을 공유하기 때문에 AI 전문가부터 계산 생물학, 데이터 분석, 실험 연구자 등 전문 인재가 풍부하고 수십억 달러 규모의 첨단 장비를 쓸 수 있어 큰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이날 돌아본 플래그십 창업 벤처 연구 공간에는 세포 배양과 분석부터 차세대 유전자를 읽는 기술 딥 시퀀싱에 이르기까지 직원 수십 명이 수일, 수십 일 동안 해도 해내지 못할 연구를 하루나 몇 시간 만에 처리하는 첨단 장비가 가득했다. 바이러스 시료 수십 종을 자동판매기처럼 자동으로 보관하고 출고해 주는 장비도 있었다. 아프리오리 관계자는 “이런 투자와 장비 덕분에 우리는 그 시간에 더 좋은 논문을 읽고 더 지적인 질문들을 할 수 있다”며 “플래그십 안에서 이뤄지는 투자, 협업을 통해 우리는 과학 기술 최전선에서 최대한 혁신적으로 일할 수 있다”고 말했다. ● VC가 투자뿐 아니라 창업 과정에 참여연구 현장에서 만난 플래그십 출신 크레이그 윌리엄스 아프리오리 최고경영자(CEO)는 “이 모든 건 플래그십만의 독특한 벤처 투자 프로세스가 있기에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플래그십은 단순히 유망 벤처에 투자하고 이익을 얻는 일반 VC들과 달리 고유한 ‘창업(origination)’ 프로세스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플래그십은 매년 사내 전담 조직을 통해 100여 개의 ‘만약 ∼라면(What if?)’이라는 질문을 도출한다. 그런 뒤 사내 200여 명의 과학자들이 가능성 없는 질문을 제거해 나간다. 이때 중요한 것은 ‘기술 하나에서 여러 방향의 혁신 기회가 나올 수 있는가’이다. 이 과정을 통해 플래그십이 정말 투자를 통해 회사로 만들 만한 가치가 있는 3∼4개의 최종 질문을 찾아낸다. 윌리엄스 CEO는 “플래그십은 아무도 모르는, 그래서 진짜 혁신이 나올 수 있는 ‘불확실성(uncertainty)의 영역’에 투자하길 원한다”며 “하지만 리스크는 줄여야 하므로 끝까지 살아남은, 검증된 아이디어에 대해 투자를 진행하는 이런 방식이 엄청난 도움이 된다”고 설명했다.플래그십이 투자를 결정했다고 바로 회사가 되는 건 아니다. 처음엔 회사 이름 없이 프로젝트 숫자만 부여된다. 윌리엄스 CEO는 “아프리오리도 처음엔 그저 ‘FL(Flagship Lab) 77’이었다”며 “질문에 대한 플랫폼이 실제로 작동한다는 게 입증되기 전에는 회사라는 생각에 너무 매달리지 말고 자유롭게 새로운 영역을 탐색하자는 취지”라고 말했다.덕분에 플래그십이 투자하고 창업을 이끈 바이오 회사는 각 전문 분야에서 빠르고 혁신적으로 움직일 수 있다. 윌리엄스 CEO는 “플래그십은 화이자, 노보 노디스크, GSK와 같은 글로벌 제약사와의 파트너십을 통해 일종의 빅파마(대형 제약사) 연구개발(R&D) 엔진 역할을 하고 있다”며 “투자자로서는 이 같은 혁신 ‘원천’에 가까워질수록 훨씬 더 큰 수익을 누릴 수 있기 때문에 플래그십 투자 열기가 뜨거울 수밖에 없다”고 평가했다.● 플래그십, 25년간 118곳 창업 지원플래그십은 3년마다 글로벌 펀드를 조성해 바이오 벤처 투자를 진행한다. 가장 최근 펀드 규모는 36억 달러(약 5조2000억 원), 그 전 펀드는 33억 달러 규모였다. 모더나부터 아프리오리까지 이런 방식으로 플래그십이 창업을 이끈 기업은 25년간 118개에 달한다. 플래그십 아시아·태평양 지역 전략 고문인 안드레 안도니안 아태 지역 의장은 “플래그십은 VC가 아니라 기업 창조자(company creater)”라고 강조했다. 그는 “우리는 스스로 아이디어를 만들고, 창업가를 키우고, 자금을 대고, 회사를 운영하고 확장하는 모든 것을 한 지붕 아래에서 한다”며 “켄들 스퀘어 연구실 면적의 25%가 플래그십과 관련돼 있고 이를 통해 1만 명의 고용을 창출해 냈다”고 의미를 부여했다.안도니안 의장은 “혁신 측면에서 VC와 스타트업은 아주 큰 역할을 한다”며 “우리가 ‘파일럿’이 아니라 미지의 영역으로 갈 ‘우주 비행사’에게 투자하길 원하는 이유”라고 말했다.““반도체보다 큰 1000조 시장… 韓 스타트업, 큰 시장에 나와야”빅5 병원 데이터-우수 인력 강점보스턴 큰손 플래그십도 韓 개척“반도체가 400조 원 규모라고 하면 신약시장은 1000조 원이 넘습니다. 연간 성장률도 12%에 달하니 바이오에 베팅을 안 할 수가 없죠.”(이성환 SV인베스트먼트 이사)미국 바이오 산업 메카인 보스턴과 케임브리지에서 만난 한국 벤처캐피털(VC)들은 입을 모아 더 많은 한국의 VC와 바이오 기업이 이 시장에 뛰어들고 해외로 진출해야 한다고 말했다.2014년 보스턴에 진출해 올해로 현지 바이오 벤처 투자 13년 차를 맞는 솔라스타벤처스 윤동민 대표는 “바이오 투자야말로 현지에 나와 실시간으로 동향을 느끼고 중요 기업인과 네트워킹하며 독점 개발 정보를 파악하는 게 중요하다”며 “글로벌 빅파마 연구개발(R&D) 헤드와 바이오 벤처 수백 개가 모인 이곳은 벤치마킹할 수 있는 데이터들이 굉장히 많다는 게 가장 큰 장점”이라고 말했다.이 이사는 “한국에서는 바이오벤처가 초기 투자를 받은 뒤 상장하지 않으면 중간에 가치를 인정받을 길이 없다는 게 가장 큰 문제”라며 “미국에서는 중간에 빅파마와 손을 잡거나 라이선스를 팔거나, 인수합병(M&A) 등을 통해 엑시트할 다양한 기회가 있고, 많은 경우 한국보다 4∼5배 높은 가치 평가를 받는다”고 강조했다.한국 VC 가운데 보스턴 현지에 사무실을 내고 본격 진출한 곳은 다섯손가락에 꼽을 정도로 적다. 이 이사는 “한국에서 나오는 정책자금만 운용하거나 코스닥에만 상장시켜도 VC들이 먹고사는 데 전혀 문제가 없기 때문”이라며 “한국 VC와 기업이 자꾸 더 큰 시장에 나오고 한미 산업의 가교 역할을 하며 성공 케이스를 만들어야 바이오산업의 발전을 이끌 수 있다”고 역설했다.한편 이들은 “2, 3년 전부터 보스턴 VC 사이에서 한국 바이오 시장에 대한 관심이 커지는 추세”라며 “한국의 우수한 인력, 세계 어디서도 찾기 힘든 빅5 병원 환자 규모와 데이터, 시장 자금력 등 여러 면에서 한국 바이오산업에 큰 매력을 느끼고 있다”고 진단했다.실제로 미국 대표 바이오 VC인 플래그십 파이어니어링도 2년 전 싱가포르에 지사를 내 한국과 일본 등 3개국 시장을 개척 중이다. 안드레 안도니안 플래그십 아태지역 의장은 “아시아는 혁신 원천이자 가장 큰 시장”이라며 “기회가 너무 많아 어디에 시간과 노력의 우선순위를 둘지가 가장 큰 고민일 정도”라고 말했다.특별취재팀▽팀장 조은아 경제부 차장 achim@donga.com▽싱가포르=강우석, 스톡홀름=김수현 기자실리콘밸리=신진우, 보스턴=임우선, 런던=유근형 특파원서울=전주영 신무경 주현우 최미송 기자}

“3, 2, 1! 자, 배가 물 위로 올라갑니다! 배 뒤에 생기던 파도가 사라졌어요.” 지난해 12월 17일(현지 시간) 스웨덴 수도 스톡홀름 동부 항구지역인 프리함넨 인근 해역. 전기 수중익(水中翼·선체 밑에 설치된 날개) 선박을 운항하는 ‘칸델라’ 직원 토드 링엔홀 씨가 이같이 외쳤다. 2014년 설립한 스웨덴 스타트업 칸델라는 세계 최초로 전기 수중익 선박을 개발하고 상용화한 기업이다. 기자가 칸델라가 개발한 2세대 전기 수중익 선박 ‘C-8’의 데모 버전에서 ‘수중익’ 기어를 위로 올리자 선체 앞부분부터 서서히 수면 위로 떠올랐다. 선체 뒤로 10m가량 길게 퍼지던 파도는 수중익 모드로 전환한 지 10초도 안 돼 잠잠해졌다. 스톡홀름에서는 2024년 칸델라가 개발한 세계 최초의 전기 수중익 여객선 ‘P-12 노바(Nova)’ 운항을 시작했다. 100% 전기로 움직여 ‘조선업의 테슬라’라고 불린다. 노바의 최대 장점은 속도다. 노바는 파도를 만들지 않아 기존 선박보다 약 2배로 빠른 시속 46km로 달린다. 노바 이용객이기도 한 링엔홀 씨는 “50분 이상 걸리던 출퇴근이 30분 가까이로 줄었다”며 웃었다. 혁신 기업이 시민의 출퇴근 시간을 줄이면서 환경 오염도 방지하고 있는 셈이다. 칸델라의 전기 수중익선은 올해 사우디아라비아, 인도, 호주 등으로 수출을 앞두고 있다.● 인구 감소한 스웨덴, 수출 키워줄 ‘혁신 산업’ 키운다스웨덴은 시민들 삶의 질을 높여 주는 혁신 기업을 성장시켜 수출 엔진을 키우고 있다. 한국에 앞서 저출산과 고령화에 따른 인구 감소 문제를 절감하며 사업 초기부터 내수가 아닌 해외 시장을 겨냥한 수출 강소기업이 늘어야 경제가 성장할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스톡홀름의 무인(無人) 전기 운반 트럭 ‘엔라이드’도 세계 시장을 겨냥하고 있다. 이 무인 전기 트럭은 레이저로 주변 장애물을 감지하고 위험 정도를 판단해 대응할 수 있다. 엔라이드는 세계 시장 진출에 속도를 내고 있다. 지난해 5월 미국 아이온큐와 자율주행·물류 최적화 영역에서 3년간 협력 계약을 체결했다. 양자컴퓨팅 상용화를 시도한 세계 최초 사례다. 지난해 엔라이드가 아이온큐를 포함해 국내외 투자자로부터 유치한 투자금은 약 1억 달러(약 1452억 원)에 달한다.이들 기업 창업자는 모두 스웨덴의 민간 벤처캐피털(VC)이 성장하는 힘이 됐다고 입을 모은다. 구스타브 하셀스코그 칸델라 대표는 “(칸델라와 같은) 하드웨어 기업은 창업 이후 제품을 실제 판매하기까지 ‘죽음의 계곡’ 시간이 치명적”이라며 “이큐티(EQT) 벤처와 같은 스웨덴 대형 민간 VC가 우리에 대한 투자를 약속하자 이를 신뢰의 증표로 본 다른 자본들도 유치됐다”고 설명했다. 로베르트 팔크 엔라이드 대표도 “스웨덴 VC 시장은 추후 글로벌 자본까지 이어지는 일종의 허브”라며 “글로벌 자본을 향한 개방성이 성공을 이끌었다”고 전했다.● 창업 선배가 VC로 활약하는 ‘인재 선순환’스웨덴의 스타트업 생태계 핵심은 민간 주도 혁신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따르면 2024년 기준 스웨덴 국내총생산(GDP) 대비 VC 투자 비율은 0.11%로 추정된다. 유럽연합(EU) 회원국 평균(0.05%)보다 두 배 이상으로 높다. 1인당 VC 투자액은 2020∼2024년 누적액 기준 EU 회원국 중 1위다. 인구 100만 명당 2400유로로 추정된다.스웨덴 내 스타트업 VC 관계자들은 혁신의 키워드로 ‘선순환’을 꼽았다. 과거 스타트업의 성공을 이끌었던 창업자가 기술력은 있지만 자금이 부족한 초기 스타트업의 에인절 투자자로 변신하는 것이다. 전환의 핵심에는 민간 VC가 있다. 성공 경험이 있는 창업자를 VC 내부 파트너로 영입하거나 미래 세대 스타트업 이사회 핵심 멤버로 연결하는 플랫폼 기능을 한다. 스웨덴 스타트업의 신화로 꼽히는 스포티파이와 유럽 최대 사모펀드 EQT가 대표적인 사례다. 2018년 스포티파이 기업공개(IPO) 이후 초기 임원진 다수가 에인절 투자자 또는 VC 파트너로 영입됐다. 이들은 이후 엔라이드, 클라르나 등 자국 스타트업의 초기 투자자로 활동했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는 “스포티파이가 스톡홀름 테크 생태계에 ‘재능·자본 재활용 기계’로 변모했다”고 평가했다. 정부도 스웨덴 스타트업 생태계에서 파일럿 소비자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스웨덴 내 혁신조달 제도를 통해 정부나 지자체가 파일럿 사업의 형태로 스타트업의 고객이 된다.● AI가 ‘숨은 챔피언’을 찾아낸다 벤처 투자자들은 성장 잠재력이 높은 미래의 혁신 기업을 찾아내는 데 인공지능(AI)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초기 기업에 투자하는 EQT 벤처는 AI에 기반한 마더브레인 시스템을 통해 지난 10년간 투자처를 발굴했다. 마더브레인은 창업 초기 단계에서부터 잠재력이 높은 창업자와 스타트업을 식별한다. 매출, 영업이익 같은 재무적 지표가 아니라 기업의 채용 속도, 기술 활동, 창업 생태계 내 참여도, 초기 고객 수요, 창업자의 위기 대응 능력 등 맨파워를 따져 투자 가치가 높은 기업을 선별한다. 빅토르 엥레손 EQT 파트너 겸 초기 단계 기술 부문 총괄은 “투자처를 선정할 때 핵심은 창업자의 야망과 문제에 대한 통찰력 및 위기 회복력”이라고 설명했다. 韓 은행들 혁신기업 찾는 ‘AI 헤드헌터’ 도입… “기술력은 갈 길 멀어”국내 은행, 올해 AI로 우량기업 선별AI가 은행의 대출 심사 기간 줄여줄 듯“AI의 기업대출 기능, 아직은 보조적”인공지능(AI)으로 혁신 기업을 선별해 자원을 집중하려는 시도는 한국에서도 이어지고 있다. 시중은행들은 혁신 기업을 발굴해 내기 위해 AI를 기업대출 심사에 활용하는 방안을 고심하고 있다. 올해부터 AI가 적극 개입할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5일 금융권에 따르면 KB국민은행은 연내 소규모 사업장을 대상으로 한 예측모델을 AI 기반 기업대출 자동심사 시스템 ‘빅스(Bics)’에 반영할 계획이다. 빅스는 AI가 각종 정보를 분석해 상대적으로 신용 위험이 낮은 대출에 대한 판정 결과를 기업대출 심사 담당자에게 제공한다. 신속한 심사를 도울 뿐 아니라 우량기업으로 성장할 것으로 예상되는 기업을 선별할 수 있다. AI가 심사관뿐 아니라 일종의 헤드헌터 역할도 맡게 되는 것이다. 신한은행 역시 심사 업무를 돕는 자체 AI 시스템을 개발하고 있다. 해당 시스템은 심사의견서 작성에 필요한 재무 분석, 사업 역량, 기술 경쟁력, 업종 분석 등을 포함한 참고 자료를 제공한다. 이르면 3월 도입될 예정이다. 하나은행 역시 이달부터 AI가 기업대출 심사보고서 초안을 자동으로 생성해주는 시스템을 도입한다. 자동심사 지원 시스템을 통해 우량기업을 선별하고, 재무 정보와 산업 전망 등을 종합해 보고서를 작성한다. 우리은행도 기업대출 업무에 AI 에이전트를 도입하는 방안을 마련하고 있다. 심사 지원, 서류 진위 및 정보 검수, 대출 사후 관리 등 기업대출 과정 전반에 AI 기능을 적용할 계획이다. 통상 소득과 신용도를 중심으로 판단하는 가계대출과 달리 기업대출은 기업 재무제표와 사업 역량, 업황 등 검토 요소가 많아 심사가 더 오래 걸린다. AI가 먼저 종합적으로 판단하고 참고 자료를 제공하면 은행 담당자가 심사 시간을 대폭 단축할 수 있을 것으로 업계는 기대하고 있다. 하지만 AI가 주도적으로 기업대출 심사와 혁신 기업 선별을 맡기에는 기술력에선 여전히 갈 길이 멀다는 지적도 나온다. 은행권 관계자는 “잘못된 판단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는 AI에 심사를 맡기기에는 리스크가 있다”며 “우선 심사를 지원하는 방향으로 고도화하는 게 바람직해 보인다”고 했다.특별취재팀▽팀장 조은아 경제부 차장 achim@donga.com▽싱가포르=강우석, 스톡홀름=김수현 기자실리콘밸리=신진우, 보스턴=임우선, 런던=유근형 특파원서울=전주영 신무경 주현우 최미송 기자}

금융당국 기관장, 주요 금융사 수장들이 새해 내놓은 신년사에 공통된 문구가 있다. ‘생산적 금융’이다. 이재명 대통령이 취임 직후부터 생산적 금융을 강하게 독려했고, 은행을 비롯한 금융사들이 경쟁적으로 생산적 금융에 나서고 있다. 그런데 일반인에게 생산적 금융이라는 말은 은행 약관 용어만큼 낯설고 어렵다. 무엇을 어떻게 하겠다는 방법론도 보이지 않는다. 금융권에서조차 생산적 금융 개념을 잘 모르는 실정이다. 최근 만난 증권사 대표는 “생산적 금융을 어떻게 준비하는가”란 기자의 질문에 “일단 직원들에게 어느 범위까지를 생산적 금융으로 정의할 수 있을지 연구해 보라고 지시했다”고 답했다. 금융위원회 보도자료에 생산적 금융은 ‘기존 금융권이 집중한 부동산 금융이 아닌 인공지능(AI) 등 첨단산업과 벤처기업 등 생산적 분야에 투자되는 금융’이라고 돼 있다. 눈앞의 수익을 따지기보다 성장 잠재력과 혁신성이 높으면 적극 투자한다는 의미다. 달리 말하면 ‘혁신 금융’이다. 하지만 금융회사들은 당장 어느 기업에 투자할지부터 고민이 크다. 지난해 말 만난 국내 한 금융지주사 회장은 “생산적 금융을 하고 싶어도 막상 지원할 곳을 찾기가 어렵다”고 털어놨다. 애써 투자할 만한 기업을 찾으면 이들은 대부분 해외에서 사업을 하려고 한다. 국내 금융사가 지원한 기업이 해외로 나가 버리면 결과적으로 국내에 돈이 도는 효과가 미미하다. 생산적 금융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생산성이 높지 않다는 뜻이다. 리스크를 짊어지길 꺼리는 금융회사들은 정부 지침에 의존하려고 한다. 정부가 세운 가이드라인에 따라 투자하는 게 뒤탈이 없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생산적 금융은 무늬만 혁신 금융이지, 사실상 관치 금융 확장판이 될 수 있다. 생산적 금융은 민간이 주도하고 리스크를 짊어져야 맞다. 다만 관치에 익숙한 한국 금융 현실에서 하루아침에 자생적으로 선진국 수준의 생산적 금융이 이뤄지긴 어렵다. 그렇다면 정부부터 혁신적인 생산적 금융을 설계해야 한다. 그래야 민간 금융회사도 자율적이고 창의적으로 생산적 금융을 발굴하고 키울 수 있다. 당국이 금융사 관계자를 불러 수시로 여는 ‘생산적 금융으로의 대전환을 위한 회의’부터 바뀌어야 한다. 이 회의에서 금융사들은 정부에 생산적 금융 추진 계획을 제출하고 있다. 용어는 조금씩 다르지만, 결국 정부가 중시하는 AI, 반도체 등 지원으로 요약된다. 물론 이런 분야에 자금 지원은 필요하다. 다만 민간의 창의성에 기반을 두지 않고 정부가 시켜서 하는 관치 생산성 금융에 다양성과 혁신성을 기대하기 힘들다. 정부가 자칫 금융사들의 생산적 금융 집행 실적이나 수혜 기업 수에 집착하면 자금이 엉뚱한 기업들로 흐를 수 있다는 점도 유념해야 한다. 이러면 금융사는 실적 채우기에 급급해 쉽고 빨리 성과를 낼 기업을 찾느라 골몰하게 된다. 미국 실리콘밸리의 한 벤처투자자는 본보 취재팀에 “한국은 정부 지원 자금이 많아 좋은 면이 있지만, 가치가 부풀려진 기업으로 돈이 흐를 우려가 있다”고 지적한다. 생산적 금융마저 관치가 되면 안 된다.조은아 경제부 차장 achim@donga.com}

코스피가 사상 최고치를 경신한 가운데 개인 간 온라인투자연계금융(P2P) 대출이 4년 3개월 만에 가장 많이 늘어난 것으로 나타났다. 이 가운데 증권계좌담보대출 등 잔액은 12개월 연속, 신용대출 잔액은 8개월 연속 증가세하고 있다. 주요 시중은행에서도 마이너스통장(마통) 잔액이 3년 만에 최대치를 찍었다. 카드론도 두 달째 증가하고 있어 ‘빚투’(빚내서 투자) 열풍이 상당한 것으로 보인다.7일 P2P센터에 따르면 지난해 12월 말 전체 대출잔액은 증권계좌담보, 신용 등 대출 증가에 힘입어 1조6072억 원이었다. 전월 말 대비 6.3%(1314억 원) 늘어났다. 전월 대비 증가액으로 봤을 때 2021년 9월(2600억 원) 이후 4년 3개월 만에 가장 많이 늘었다.지난해 12월 말 기타 대출(증권계좌담보대출 등) 잔액은 6204억 원으로 전월 말 대비 497억 원 늘었다. 10월 증가분은 637억 원으로 월 증가분 기준 가장 높은 숫자를 기록했고, 11월 230억 원 증가한 데 이어, 이달에도 500억 원 가까이 늘어난 것이다.신용대출 잔액도 증가세다. 지난해 12월 말 신용대출 잔액은 전월 말 대비 29.6%(312억 원) 증가한 1366억 원이었다.업계 관계자는 “코스피 상승에 힘입어 증권게좌담보대출과 신용대출 잔액이 많이 늘어나고 있다”면서 “신용대출의 경우 저축은행 기관 투자가 가능해지면서 증가한 요인도 있다”고 말했다.이 같은 분위기는 은행권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올해 1월 6일 현재 5대 은행(KB국민, 신한, 하나, 우리, NH농협 등)의 마통 잔액은 40조1190억 원으로 전월 말(39조9275억 억 원) 대비 1915억 원 가량 불어났다. 이 통계는 실제 사용된 마통 대출의 잔액으로, 2023년 1월 말(40조5395억 원) 이후 최대치다.카드론도 증가세다. 여신금융협회에 따르면 9개 카드사(롯데, BC, 삼성, 신한, 우리, 하나, 현대, KB국민, NH농협카드)의 지난해 11월 말 카드론 잔액은 42조5529억 원으로, 전월 말(42조751억 원) 대비 1.14% 증가했다. 전월 대비 증가율은 2024년 10월(1.28%) 이후 1년여 만에 가장 높다.전문가들은 빚투의 위험성을 사전에 충분히 인지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한다. 김대종 세종대 경영학과 교수는 “주가가 하루에 30% 오를수도 있지만 떨어질 수도 있어 하락 시 빚내서 투자한 사람들은 일반 투자자보다 감내하기가 더 어렵다”며 “본인이 감당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투자가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조은아 기자 achim@donga.com}

지난해 12월 16일(현지 시간) 미국 캘리포니아주 실리콘밸리 마운틴뷰에 있는 로봇 스타트업 ‘더스티 로보틱스’. 이곳에서는 청소기처럼 생긴 작은 로봇이 흰 바닥 위를 분주히 누비고 있었다. 로봇이 지나간 자리 바닥에는 건물의 외형, 배관 위치 등이 담긴 설계도가 그려졌고 그 위로 영어, 스페인어, 한국어 등 다양한 언어로 된 시공 안내문이 새겨졌다. 다양한 국적의 현장 작업자들은 언어 장벽과 상관없이 일을 할 수 있었다. 이 로봇은 미국의 대형 건설사, 데이터센터, 아파트 등에서 쓰인다. 건설 인력난을 해결하기 위해 탄생한 이 기술은 사람이 직접 설계도를 그리던 기존 방식보다 업무 효율을 수 배 높였다. 잭 라이스 데이비스 수석 디렉터는 “로봇이 설계도를 정확히 그려주면 사람들은 시공에 집중할 수 있다”고 말했다. 건설 로봇 기술이 빛을 발하기까지는 실리콘밸리 특유의 ‘혁신 금융’이 든든한 연료가 됐다. 이곳 창업자들은 “투자자들은 창업 초기 2, 3년간은 수익을 안 따지고 밀어준다”고 입을 모았다. 실리콘밸리 금융 생태계에는 ‘홈런 한 번을 위해 99번의 실패를 포용한다’는 문화가 진작에 뿌리내렸다. 혁신 금융의 토양에서 성장한 구글, 애플 등 빅테크 기업은 미국 증시를 떠받치는 기둥이 됐다. 최근 미 증시가 3년 연속 20%대 상승을 이어가며 견고하게 성장하는 비결 역시 혁신 금융이 키워낸 혁신 기업의 활약에서 찾을 수 있다. 반면 혁신 금융 기반이 약한 국내에서는 한계를 느낀 창업가는 물론이고 투자처를 찾으려는 금융사들까지 실리콘밸리로 발길을 돌리고 있다.[이제는 혁신금융 전쟁] 〈2〉 실패해도 투자하는 실리콘밸리기술 결함 겪었던 美 로봇 스타트업실패에도 재도약 할 수 있던 비결로 벤처캐피털 꾸준한 투자 기반 꼽아유행 테마산업에 쏠리는 韓과 달리 실리콘밸리선 기업 잠재력 우선시“B급 사업도 A급 맨파워면 선택”“첫 투자자는 우리와 커피를 몇 번 마신 뒤 투자를 결정했어요.”미국 실리콘밸리 로봇 스타트업 ‘더스티 로보틱스’의 테사 라우 최고경영자(CEO)는 지난해 12월 16일(현지 시간) 첫 투자 유치 순간을 이렇게 회고했다. 2018년 창업한 라우 CEO는 창업 초기 첫 투자자와 한 달에 한 번씩 만나 커피를 마시며 건설 산업에 대해 새로 배운 점과 사업 아이디어를 소개했다. 그는 “투자자들은 시간이 가면서 우리가 점점 발전한 점을 높게 평가했다”고 말했다. 당시 더스티 로보틱스는 신생 기업이라서 뚜렷한 성과는 없었지만 투자자들은 전진하고 있는 점에 주목했다. 수익성 있는 기업으로 클 수 있겠다고 본 것이다. 라우 CEO는 과거 창업에 실패했던 쓰라린 경험이 있다. 실패해도 투자 기회를 주는 ‘혁신 금융’의 힘이 더스티 로보틱스를 키운 셈이다. 덕분에 이 기업은 7년간 약 7000만 달러(약 1011억 원) 투자를 모을 수 있었다. 미국 경제전문지 ‘패스트컴퍼니’가 2024년 선정한 ‘가장 혁신적인 기업’에도 꼽혔다. 실리콘밸리 기업가들은 혁신 금융가들이 스타트업 실패를 이해해주고 실패를 통한 학습을 가치 있게 여긴다고 소개했다.● “여러 실패가 기업을 성장시켜” 라우 CEO는 이미 한 번 사업을 접고 더스티 로보틱스를 창업했지만 또 다른 위기를 맞았다. 초창기에 샌프란시스코의 한 건설사가 아파트 건설 현장에서 로봇을 쓰다가 반품시켰다. 작동 오류로 바닥에 설계도를 직선이 아닌 곡선으로 그렸기 때문이다. 곧바로 문제점을 찾기 시작했다. 로봇을 실시간으로 제어할 때 와이파이 무선 인터넷이 적합하지 않다는 문제를 발견했다. 이후 제품을 재설계했다. 기술이 개선됐고 당시 로봇을 퇴출시켰던 아파트 건설사를 다시 고객으로 돌렸다. 라우 CEO는 “우리의 역사는 많은 실패로 가득 차 있고 그 실패가 우리를 성장시켰다”고 회고했다. 더스티 로보틱스가 실패에도 버텨내고 도약할 수 있었던 것은 실리콘밸리 벤처캐피털(VC) 생태계 역할이 컸다. 투자자들은 단기적 사업 완성도나 손익보다, 이 기술이 실패를 거쳐 얼마나 빠르게 진화하고 구조적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지를 본다. 99번 실패하더라도 1번의 성공을 기다려준다는 뜻이다. 이 회사의 잭 라이스 데이비스 수석 마케팅 디렉터는 “투자자들은 늘 ‘이 산업을 어떻게 바꿀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회사들을 찾는다”고 말했다. 미국 대형 벤처캐피털들은 투자 초기 2, 3년간 수익화 여부를 묻지 않는다. 안준영 롯데벤처스 미국 지사장은 “벤처 펀딩은 육아와 비슷해서 4, 5년 만에 크길 바라는 건 큰 욕심”이라고 말했다.● “맨파워, B급 사업도 A+급으로 키운다” 데이터 분석업체 ‘디맨드세이지’에 따르면 지난해 2분기(4∼6월) 미국 전역엔 114만8000개 이상의 스타트업이 운영되고 있다. 이 중 상당수가 실리콘밸리에 있다. 실리콘밸리에서 기업 가치 10억 달러(약 1조4455억 원) 이상인 유니콘 기업은 105개다. 반면 대한상공회의소에 따르면 지난해 10월 한국 전체 유니콘 기업은 13개였다. 실리콘밸리 지역 유니콘 기업이 한국 전체의 8배다. 실리콘밸리가 유니콘 기업을 활발하게 배출할 수 있는 비결은 ‘혁신 금융’의 투자 공식이다. 혁신 투자자는 사업 자체의 우수성보다 창업 멤버 역량을 본다. 세계적인 벤처캐피털 세쿼이아는 한번 검증한 창업가를 ‘세쿼이아 패밀리’로 본다. 세쿼이아 투자를 받은 유전자 치료제 개발 기업 ‘진에딧’ 박효민 대표는 “세쿼이아는 사업보다는 사람을 검증하고, (검증된 사람들인) ‘세쿼이아 패밀리’를 굉장히 중요하게 여긴다”며 “우리에게 ‘망하더라도 다음 창업 때 우리에게 제일 먼저 오라’고 말한다”고 했다. 일리야 스트레불라예프 미 스탠퍼드대 경영대학원 교수는 “전설적인 한 벤처캐피털 투자자는 ‘나는 A급 아이디어를 실행하는 B급 팀보다, B급 아이디어를 추구하는 A급 팀에 투자하겠다. 왜냐하면 A급 팀은 B급 아이디어의 한계를 빠르게 파악하고, 방향을 바꿔 A+급 아이디어로 발전시킬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고 소개했다. 반면 한국 금융권은 사람의 역량이나 기업의 가능성 대신 그때그때 유행하는 테마에 집중하는 경향이 크다. 이기대 스타트업얼라이언스 센터장은 “인공지능(AI) 등 테마 분야가 아닌 플랫폼에 대한 투자는 얼어붙었다”면서 “특히 내수 산업을 하는 스타트업은 투자를 받기 어려워졌다”고 말했다.“수익에 ‘0’ 하나 더 붙어” 실리콘밸리에 韓벤처 지원 조직 러시‘IBK창공’, 韓 스타트업 美진출 지원HD현대-중기부도 현지 거점 마련“장기적 안목으로 투자 방식 바꿔야”국내서도 창업 생태계 강화 목소리“미국에서 창업에 성공하면 한국보다 수익 뒷자리에 ‘0’이 하나 더 붙습니다.”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 실리콘밸리에서 한국 스타트업의 미국 진출을 돕는 ‘IBK창공’ 관계자는 실리콘밸리에 진출한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이 기관은 IBK기업은행 창업 육성 조직이다. 미국에서 창업에 성공하면 한국에서보다 더 큰 투자를 유치하고 수익을 높일 수 있다는 얘기다. 기업은행 관계자는 “실리콘밸리에선 한 번 투자 기회가 올 때 규모가 크다”며 “이곳에서 조금이라도 투자를 받으면 실패하더라도 좋은 경력으로 남는다. 이를 기반으로 다른 국가에서 재창업하기 유리하다”고 설명했다. 한국 스타트업은 물론이고 한국 은행과 대기업도 실리콘밸리에 스타트업 지원 조직을 마련하고 있다. 이들이 실리콘밸리로 향하는 이유는 혁신 자금이 풍부하고, 해외 판로를 개척할 기회가 더 다양하기 때문이다. 한국산업은행은 2021년 KDB실리콘밸리를 설립했다. 창업가가 자연스럽게 투자자를 만날 수 있는 투자 네트워킹 행사 ‘넥스트라운드’를 매년 실리콘밸리에서 연다. HD현대 공익재단인 아산나눔재단은 지난해 11월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머테이오에 스타트업 지원 공간 ‘마루SF’를 열었다. 미국 시장에 진출한 지 얼마 안 된 창업가들에게 주거와 커뮤니티 공간을 제공한다. 중소벤처기업부는 이달 개소를 목표로 실리콘밸리 멘로파크에 스타트업·벤처캠퍼스(SVC)를 조성하고 있다. SVC는 2013년부터 운영되고 있던 중기부 산하 한국벤처투자(KVIC) 실리콘밸리 사무소를 확장해 마련한다. 정부와 기업, 은행이 한국 스타트업의 미국 진출을 돕는 건 장려할 일이다. 하지만 국내에서도 혁신 금융을 키워 국내 창업 생태계를 강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이를 위해 기업과 은행들이 스타트업에 투자하는 관점을 바꿔야 한다는 지적이 많다. 투자한 스타트업이 빨리 성과를 내지 못해도 장기적인 안목으로 투자해야 한다는 얘기다. 벤처업계 관계자는 “단기적 성과가 중요한 국내 금융권에서 오랜 시간을 투입해야 수익을 거둘 수 있는 벤처 투자는 외면받기 쉽다”고 말했다.특별취재팀▽팀장 조은아 경제부 차장 achim@donga.com▽싱가포르=강우석, 스톡홀름=김수현 기자▽실리콘밸리=신진우, 보스턴=임우선,▽런던=유근형 특파원▽서울=전주영, 신무경, 주현우, 최미송 기자조은아 경제부 차장 achim@donga.com싱가포르=강우석 기자 wskang@donga.com스톡홀름=김수현 기자 newsoo@donga.com실리콘밸리=신진우 특파원 niceshin@donga.com보스턴=임우선 특파원 imsun@donga.com런던=유근형 특파원 noel@donga.com서울=전주영 기자 aimhigh@donga.com서울=신무경 기자 yes@donga.com서울=주현우 기자 woojoo@donga.com서울=최미송 기자 cms@donga.com}

“보통 광섬유 랜을 설치하려면 1년이 걸리지만, 이 장치를 쓰면 2∼3시간 만에 통신이 연결됩니다.” 지난해 12월 15일(현지 시간) 싱가포르 창이공항에서 차로 15분 거리에 위치한 게일랑 지역에 들어선 스타트업 ‘트랜스셀레스티얼’을 찾았다. 이 회사의 모하마드 다네시 최고기술책임자(CTO)는 신속하고 저렴하게 통신을 연결할 수 있는 장비를 설치하고 있었다. 다네시 CTO는 “광섬유 랜을 설치하려면 인허가, 땅 매립 등 복잡하고 어려운 절차를 거쳐야 하지만 이 장비로 하면 레이저를 사용한 무선이라 간편하다”고 소개했다. 이 스타트업의 통신 기술은 싱가포르뿐 아니라 일본, 인도, 호주 등 세계 곳곳에서 러브콜을 받고 있다. 첨단 기술 하나만으로 세계 자금을 싱가포르로 끌어들인 것이다. 싱가포르가 스타트업 기술의 수혜를 누리고 세계의 투자금을 끌어모은 건 혁신 금융 덕분이었다.● “벤처투자사 밀집한 싱가포르에서 사업해 성공”트랜스셀레스티얼은 ‘디지털 격차를 줄이고 싶다’는 청사진을 품고 있다. 유엔 산하 국제전기통신연합(ITU)은 지난해 인터넷을 사용하지 못하는 인구를 22억 명 정도로 추산했다.다네시 CTO는 “레이저 통신 기술로 세계 누구든 인터넷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게 하고 싶다”고 밝혔다. 2016년 설립된 이 회사는 싱가포르로 글로벌 자금을 끌어모았다. 인도, 일본, 말레이시아, 필리핀, 호주 등 여러 국가의 통신사들과 협업 중이다. 지난해 11월엔 일본 최대 통신 회사 NTT로부터 투자를 받았다. 일본은 지진, 지진해일(쓰나미), 태풍이 잦아 통신망을 빠르게 복구하는 기술이 필요하다. 이 스타트업에 투자한 엠파워파트너스의 캐시 마쓰이 파트너는 “지진과 태풍으로 인해 통신 네트워크가 끊겨도 이 회사의 제품을 이용하면 불과 몇 시간 만에 복구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 스타트업을 창업한 다네시 CTO는 이란 국적이지만 싱가포르에 회사를 세웠다. 싱가포르에 혁신 산업을 수혈해 주는 ‘혁신 금융’이 풍부하기 때문이다. 그는 “(우리 사업은) 수백 곳의 벤처캐피털이 밀집한 싱가포르에서 사업했으니 가능했던 일”이라고 자평했다.싱가포르에서 스마트팜 사업에 뛰어든 ‘아치센’도 성장 잠재력을 인정받고 세계 곳곳과 협업하고 있다. 지난해 7월 말레이시아 디지털 농식품 기업 ‘팜바이트’와 조인트 벤처를 세웠다. 이를 통해 말레이시아 국경 부근의 조호르-싱가포르 경제특구(JS-SEZ)에 스마트팜도 지었다. ‘제2의 딥시크’인 중국 인공지능(AI) 기업 마누스는 지난해 싱가포르로 본사를 옮긴 뒤, 페이스북·인스타그램 운영사 메타에 2조 원 이상의 가치를 인정받고 인수됐다.● 세제 혜택, ‘혁신금융’ 유입 촉진싱가포르가 아시아 스타트업 요람으로 정착한 가장 큰 이유는 ‘혁신금융’이 강하기 때문이다. 싱가포르 정부에 따르면 2023년 동남아시아국가연합(ASEAN·아세안) 주요국 6곳(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필리핀, 싱가포르, 태국, 베트남)의 전체 벤처캐피털 투자 금액 중 싱가포르 점유율은 73.3%이다. 한국에서 직장 생활을 하다가 싱가포르에서 창업한 엄모 씨(48)는 “다양한 투자 회사들이 있어 운영 자금을 마련할 기회가 많다”고 설명했다. 싱가포르에 상속·증여세, 양도·배당소득세가 없는 점도 수많은 혁신 금융이 유입되는 배경으로 보인다. 인도네시아 소재 한 벤처캐피털의 대표는 “투자 환경이 자유로운 데다 세대 간 자산 이전도 용이해 북미권, 유럽 투자사, 기관이 싱가포르를 아시아 진출 교두보로 삼고 있다”고 말했다.● 전통 은행들 일찍이 ‘체질 변신’ 싱가포르의 강점으로 꼽히는 ‘전통 은행의 체질 변신’은 한국 금융권이 배워야 할 과제로 꼽힌다. 싱가포르 은행인 DBS, UOB, OCBC는 가계대출 영업에서 벗어나 스타트업들이 차별화된 아이디어만으로 사업에 도전할 수 있도록 다양한 지원책을 내놨다. 싱가포르 최대 은행 DBS는 아시아권 스타트업에 대출해 주는 프로그램을 도입했다. OCBC는 창업 후 6개월∼2년가량 된 초기 스타트업에 최대 10만 싱가포르달러(약 1억1225만 원)를 빌려주는 ‘비즈니스 퍼스트 론’을 도입했다. UOB는 스타트업 해외 확장과 기술을 지원하는 ‘핀랩(Finlab)’을 별도로 만들어 운영 중이다. 싱가포르 국부펀드 테마섹 자회사 버텍스홀딩스의 추아 키 록 대표이사는 “싱가포르 정부는 은행이 스타트업 투자로 본 손실의 일부를 보전해주는 파격적인 정책을 시행했다. 은행들이 그 과정에서 투자 노하우를 익혔다”고 말했다.특별취재팀▽팀장 조은아 경제부 차장 achim@donga.com▽싱가포르=강우석, 스톡홀름=김수현 기자실리콘밸리=신진우, 보스턴=임우선, 런던=유근형 특파원서울=전주영 신무경 주현우 최미송 기자}

싱가포르 등 아시아 금융 강국과 미국 실리콘밸리 등에서는 금융회사들이 혁신 기업들의 자금줄이 되고 있지만, 한국 금융권은 여전히 부동산 대출 중심 영업 관행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정부는 ‘담보 없이도 기술력만 있으면 자금을 받을 수 있게 하겠다’며 나서고 있지만, 국내 은행권 대출에서 주택담보대출이 차지하는 비중은 지난해 6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다. 정부와 기업이 아무리 인공지능(AI) 등 첨단 산업 육성에 나선다고 해도, 금융사들이 자금의 물꼬를 혁신 산업으로 돌리지 않으면 혁신 산업 육성은 물론 1%대 저성장을 벗어나기도 어렵다.● 30년째 안 바뀌는 ‘손 쉬운 영업’1일 금융감독원 금융통계정보시스템 자료(분기별)에 따르면 2025년 9월 말 국내 은행권(시중·지방·인터넷전문·특수은행)의 주담대는 767조786억 원으로 전체 원화대출금(2466조1660억 원)의 31.1%를 차지했다. 9월 말 기준으로 2019년(31.3%) 이후 가장 높다. 국내 은행들이 이처럼 부동산 대출에 치중하는 이유는 기업 대출에 비해 개별 대출 규모가 작아 손실을 피하기 쉽기 때문이다. 또 한국 부동산 특성상 담보가 확실해 은행이 돈을 떼일 가능성이 매우 낮다. 그만큼 은행 수익률은 높아진다. 돈을 빌린 사람이 빚을 갚지 못하면 은행은 담보로 잡은 부동산을 경매에 부쳐 손실을 곧바로 메울 수 있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대기업 연쇄 부도에 이은 금융권 줄도산 이후 국내 은행들은 개인 부동산 담보 대출 영업에 주력해 왔다. 이런 영업 관행이 약 30년간 좀처럼 바뀌지 않고 있다. 은행 자금의 부동산 쏠림 현상은 한국 경제에 다양한 부작용을 낳고 있다. 스타트업 등 부가가치가 높은 부문으로 자금이 좀처럼 향하지 않다 보니 국가 전체 성장 동력이 떨어지고 있다. 부동산 담보대출은 당장은 안전해 보이지만, 경제 위기로 부동산 가격이 하락하면 금융 시스템 전반에 위기가 된다. 담보가치 하락으로 돈을 빌린 사람들이 빚을 못 갚고, 금융기관 건전성이 악화될 수 있다. 추명삼 한국은행 금융시장연구팀 차장은 “(부동산 가격 하락기에) 은행 대출 여력이 줄면 전체 신용 공급이 줄어 가계와 기업의 소비와 투자가 위축된다”고 말했다. ● 벤처 집중 투자하는 VC마저 자금 회수한 건축 플랫폼 스타트업은 사업 악화로 2024년 1월 법원으로부터 회생 개시 결정을 받았다. 그러자 투자사는 ‘회생절차가 시작되면 투자자가 이해관계인(대표)에게 주식매수를 청구할 수 있다’는 계약서를 근거로 풋옵션(특정 가격에 주식을 팔 권리)을 행사했다. 스타트업은 “조금만 기다려 주면 이자라도 갚겠다”고 하소연했다. 하지만 2025년 7월 법원은 투자사의 손을 들어줬다. 이 사건 이후 스타트업 업계는 얼어붙었다. 창업자가 사업에 삐끗하면 언제라도 개인 자산을 날릴 수 있는 선례가 됐기 때문이다. 벤처캐피털(VC)들은 업황이 어려워지면서 투자한 스타트업으로부터 돈을 회수하는 분위기다. 기업공개(IPO)나 인수합병(M&A) 등 회수 시장이 막히면서 투자 실적이 없는 이른바 ‘깡통 VC’도 등장하고 있다. 벤처투자회사 전자공시에 따르면 2025년 1∼11월 투자 실적이 ‘0원’인 VC는 36곳에 달한다. 전체 등록 벤처투자사(384개)의 약 9.4%가 소위 깡통 투자사인 셈이다. 2020년에는 깡통 투자사가 11곳(전체의 5.6%)에 불과했는데, 5년 새 분위기가 바뀌었다. 대형 은행은 가계 대출 중심의 영업 관행을 바꾸지 않고, VC마저 자금줄이 막히면서 스타트업 업계에서는 “한국에서 토스, 배달의민족 같은 유니콘 기업(기업가치 1조 원 이상 기업)이 안 나온 지 오래됐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이효석 자본시장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VC와 사모펀드(PE), 금융회사가 각각 역할별로 창업 생애주기 전체에서 초기 스케일업부터 인수합병까지 적극적으로 참여해 회수가 용이한 자본시장 기반을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부동산에 치중된 자금 물꼬를 혁신 산업으로 돌려야 한국 경제의 고질적인 부동산 문제도 해결할 수 있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이준서 동국대 경영대 교수는 “은행권이 그동안 부동산 담보 대출로 돈을 많이 벌었으니, 이제는 그 돈을 기업의 가치를 높이고 경제 성장을 높일 수 있는 생산적 금융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말했다.특별취재팀▽팀장 조은아 경제부 차장 achim@donga.com▽싱가포르=강우석, 스톡홀름=김수현 기자실리콘밸리=신진우, 보스턴=임우선, 런던=유근형 특파원서울=전주영 신무경 주현우 최미송 기자}

지난해 12월 16일 싱가포르 서부 주롱 지역. 금융 중심지인 ‘래플스 플레이스’에서 차로 30분가량 떨어진 이곳에 7층짜리 회색 건물이 서 있다. 물류 창고, 자동차 부품 센터 등이 에워싸고 있는 스마트팩토리 건물에 들어서니 벽면을 따라 5m 높이 거치대에 촘촘하게 심어진 푸른 채소들이 자라고 있었다. 벽을 따라 조성된 ‘수직 스마트팜’이다. 상추, 케일, 근대 등 9개 종 식물이 밭이 아닌 인공 시설에서 자란다. 이곳 담당 직원 에릭 치아 씨는 “로봇이 농작물 방제, 운반, 점검 등을 모두 진행한다”고 소개했다. 빌딩 안 수직 농장은 2015년 싱가포르에서 창업한 스마트팜 기업 ‘아치센’이 관리한다. 식물 영양분과 산성 농도를 자동으로 확인하고 조절하는 기술도 개발했다. 빈센트 웨이 아치센 대표는 “싱가포르 국토에서 경작지 비중은 고작 1%”라며 “식량 자급률을 높이는 게 목표”라고 설명했다. 아치센은 도시 국가 특성상 식량 자급자족이 어려운 싱가포르 경제 모델의 한계에 도전하고 있다. 싱가포르 국토에서 나는 채소는 이 나라 전체 채소 소비량의 4%에 불과하다. 2020년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위기 때는 수입이 안 돼 가격이 치솟았다. 1인당 국내총생산(GDP) 9만 달러 부국(富國)의 약한 고리가 드러났다. 아치센이 무모해 보이는 도전에 나설 수 있었던 배경에는 신산업을 전폭적으로 지원하는 ‘혁신 금융’이 있다. 스마트팜 사업은 설비투자, 전기료 등 비용 부담이 커서 수익성을 장담하기 어렵다. 하지만 혁신성을 일찌감치 알아본 싱가포르는 물론 한국 벤처캐피털(VC)과 말레이시아 식품 기업 등이 800만 달러(약 116억 원)를 투자했다.세계 최대 창업 강국인 미국 등 주요 선진국들은 혁신 산업을 키우는 ‘혁신 금융’을 놓고 전쟁에 버금가는 치열한 경쟁 중이다. 싱가포르 벤처투자 시장의 외국인 투자 비중은 84%에 달한다. 반면 한국의 금융은 여전히 주택담보대출이 큰 비중을 차지하며 옛 방식에 머무르고 있다. 글로벌 혁신 금융 전쟁에서 뒤처진 한국이 지금이라도 더 과감히 나서야 혁신 산업을 일으키고 저성장 터널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김대종 세종대 경영학부 교수는 “은행이 혁신 기업을 적극 발굴해 자금을 지원하면 유망 기업에 투자할 투자자들이 해외에서 몰려올 것”이라며 “정부와 금융권이 부동산에서 혁신 기업으로 돈의 물꼬를 틀어야 한다”고 말했다.특별취재팀▽팀장 조은아 경제부 차장 achim@donga.com▽싱가포르=강우석, 스톡홀름=김수현 기자실리콘밸리=신진우, 보스턴=임우선, 런던=유근형 특파원서울=전주영 신무경 주현우 최미송 기자}
금융당국은 부동산에 쏠린 자금을 스타트업, 중소기업 등의 성장을 돕는 ‘혁신 금융’으로 돌리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금융권에서는 혁신 금융이 활성화되려면 금융권의 기업 대출 규제와 지주회사의 벤처 투자 규제가 완화돼야 한다고 지적한다. 1일 금융당국에 따르면 금융위원회는 지난해 9월 ‘생산적 금융을 위한 자본규제 합리화 방안’을 발표하며 주택담보대출 위험가중치(RWA)를 15%에서 20%로 높이기로 했다. 이렇게 하면 은행이 주담대로 같은 금액을 빌려줘도 더 많은 자본을 쌓아야 해 부담이 커진다. 주담대 대신 기업 대출, 투자로 은행 자금 물꼬를 돌리게 하려는 조치다. 하지만 금융권에서는 은행들이 혁신 기업을 주도적으로 발굴하고 투자하게 하려면, 단순히 주담대에 족쇄를 씌우는 차원을 넘어 기업 대출 규제를 풀어줘야 한다고 주장한다. 금융당국이 제시하는 현행 기준으로는 은행이 기업 대출을 했을 때 이에 대한 부실 위험이 주담대 대비 최대 7.5배 높게 책정된다. 은행 입장에서는 자본을 추가로 확충하지 않는 한 기업대출을 늘리기 어려운 구조다. 대형 금융지주 고위 관계자는 “대형 금융사마다 조 단위 자금이 국민성장펀드 등 정책 펀드로 투입될 예정이기 때문에 정부가 작년 9월 발표한 규제 완화가 은행의 실질적 투자 여력을 얼마나 늘릴지 미지수”라며 “신산업, 혁신 기업에 대한 대출 규제를 완화하는 추가 대책이 뒷받침돼야 정책 효율성이 높아질 것”이라고 지적했다. 지주회사의 벤처 투자 문턱이 좀 더 낮아져야 한다는 의견도 나온다. 정부가 지난해 12월 ‘첨단산업 특례 규정 신설 계획’을 밝히면서 대규모 자금이 필요한 반도체, 인공지능(AI) 관련 기업들은 별도 기업을 설립해 자금을 모을 수 있게 됐다. 하지만 지주사가 직접 운영하는 벤처투자회사(CVC)와 관련된 규제는 제외됐다. 김현열 한국금융연구원 연구위원은 “CVC는 모기업이 필요로 하는 기술과 사업모델을 보유한 스타트업을 발굴해 투자할 수 있다”며 “한국 벤처캐피털 자금 회수가 대부분 기업공개(IPO)를 통해 이뤄지고 있는데, CVC가 활성화되면 스타트업이 인수합병(M&A)되는 사례도 늘어날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특별취재팀▽팀장 조은아 경제부 차장 achim@donga.com▽싱가포르=강우석, 스톡홀름=김수현 기자실리콘밸리=신진우, 보스턴=임우선, 런던=유근형 특파원서울=전주영 신무경 주현우 최미송 기자}
싱가포르뿐 아니라 대만, 일본, 홍콩 등 아시아 금융 강국들은 세계에서 투자금을 유치하고 스타트업을 육성하기 위해 발 빠르게 나서고 있다. ‘아시아의 실리콘밸리’ 자리를 두고 총성 없는 전쟁이 펼쳐지고 있다. 1일 금융권에 따르면 대만 경제부는 지난해 8월 현지 스타트업에 투자하는 개인들에 대한 소득공제 개정안을 발표했다. 초기 기업에 개인 주주로 참여하는 엔젤투자자의 자격 요건을 완화하고 개인 소득공제 한도를 상향한 것이 핵심이다. 이에 따라 스타트업 엔젤투자 요건은 100만 대만달러(약 4616만 원)에서 50만 대만달러로 낮아졌다. 또 대만 경제가 지정한 핵심 산업 분야 스타트업에 투자한 개인투자자의 공제 한도는 300만 대만달러에서 500만 대만달러로 인상됐다. 공제 한도가 높아지면 세금을 더 많이 돌려받을 수 있다. 대만은 2024년 벤처캐피털(VC)의 활발한 설립을 유도하기 위해 VC 최소 자본금 요건을 3억 대만달러에서 1억5000만 대만달러로 낮췄다. 레이먼드 창 딜로이트 대만 파트너는 “스타트업 자본 유입을 늘리고 혁신을 도모하기 위한 대만 정부의 정책”이라고 말했다. 홍콩은 VC 생태계를 민간 중심으로 빠르게 재편하고 있다. 존 리 홍콩 행정장관은 2024년 20억 홍콩달러 규모로 조성된 ‘혁신·기술벤처 기금(ITVF)’의 운영 방식을 VC 중심으로 개편한다고 밝혔다. 정부가 주도한 스타트업 투자의 한계를 인지하고, 투자 경험이 풍부한 VC들의 전문성을 극대화하려는 조치다. 홍콩은 또 가상자산 사업자들의 시장 진입을 유인하기 위해 가상자산 투자로 발생한 수익에 대한 세금 면제 방안도 추진 중이다. 스타트업 상당수가 가상자산과 연계된 사업을 구상한다는 점을 고려한 행보다. 일본은 스타트업을 키우기 위해 국가 차원에서 움직이고 있다. 일본 정부는 2022년 일본 경제의 구조를 개혁하기 위한 ‘스타트업 육성 5개년 계획’을 내놨다. 2027년까지 10조 엔을 투입해 10만 개의 스타트업과 100개의 유니콘(1조 원 이상의 기업가치를 인정받은 기업)을 육성하겠다는 구체적인 목표도 세웠다.특별취재팀▽팀장 조은아 경제부 차장 achim@donga.com▽싱가포르=강우석, 스톡홀름=김수현 기자실리콘밸리=신진우, 보스턴=임우선, 런던=유근형 특파원서울=전주영 신무경 주현우 최미송 기자}

한때 론스타 사건이 연말 정치권의 ‘시한폭탄’이 될 것이란 말이 많았다. 정부는 2022년 외국계 사모펀드 론스타와의 외환은행 매각 관련 국제투자분쟁(ISDS) 중재 판정에 따라 약 3200억 원을 배상할 뻔했다. 정부가 이에 불복해 제기한 취소 신청에서 지난달 다행히도 승소했지만 그렇지 않았다면 상당한 국민 혈세를 뱉어낼 상황이었다. 과실이 누구에게 있는지 따지는 정치권 공방으로 시끄러울 게 뻔했다. 2022년 판정 전 금융 당국에선 ‘정치권에선 국정조사, 감사원 조사, 검찰 수사 등 별별 수사 얘기가 나올 거다’란 말이 나왔다. 론스타 사안에 조금이라도 엮인 당국자들은 ‘나는 모른다’며 함구하기 바빴다. 정부가 그랬던 분위기를 뒤집고 우리가 승소하자 김민석 국무총리가 나서 “중대한 성과”라고 발표하고 취소 신청 당시 법무부 장관이던 한동훈 전 국민의힘 대표는 더불어민주당을 향해 “숟가락 얹으려 하지 말라”고 하니 참 어색하기만 하다. 한국 정부가 지난한 법적 다툼에서 이긴 건 분명 노고를 인정받아야 할 일이다. 하지만 22년간이나 끌어온 분쟁의 교훈을 잊어서는 안 된다. 언제든 제2의 론스타가 한국 정부를 뒤흔들 수 있다. 정부도 또 다른 ISDS에 승소할 준비가 됐는지에 자신 있게 답할 수 없을 것이다. 론스타가 ‘먹튀’ 했다는 지적은 여전히 뼈아프다. 론스타는 2003년 8월 외환은행 지분 51%를 1조3834억 원에 사들여 최대 주주가 됐다. 2012년 1월 외환은행을 약 4조 원에 하나금융지주에 팔아넘겨 상당한 차익을 남기고 한국 시장을 떠났다. 물론 이후 이를 방지하는 여러 규제가 생겨났다. 연기금 등 전문기관 투자자들이 사모펀드(PEF) 투자자로 참여해 감시하는 체계가 마련됐다. 정부의 대주주 적격성 심사도 강화됐다. 하지만 여전히 갈 길이 멀다는 지적이 나온다. 국회에선 PEF가 취득한 지분을 더 긴 기간 의무적으로 보유하도록 하거나 PEF의 차입인수(LBO) 한도를 더 줄이도록 규정한 법안이 발의되고 있다. 사모펀드가 기업 가치를 높이는 순기능도 있는 만큼 ‘약탈 자본’이란 프레임은 경계해야겠지만 안전한 장치를 더 논의할 필요가 있다. 정부가 22년 전 론스타의 외환은행 인수를 심사할 때 론스타가 ‘산업자본’에 해당하는지를 엄정하게 살폈다면 애초 론스타와의 ‘잘못된 만남’은 시작되지 않았을 것이란 아쉬움도 있다. 당시 은행법은 비금융 부문의 자산 규모가 2조 원 이상인 산업자본이 은행 주식을 10%(의결권 있는 주식은 4%) 이상 보유할 수 없도록 규정했다. 론스타는 일본에 골프장, 예식장 등을 운영하는 회사를 보유하고 있었다. 당국은 워낙 외환은행 부실이 심해질 상황이라 은행법 시행령의 예외 사유를 인정해 론스타의 인수를 승인했지만 론스타의 산업자본 논란은 끊이지 않았다. 론스타 사건의 상흔이 진하게 남은 이유는 사건 자체가 길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정부가 외환은행을 론스타에 넘기는 과정에서 시장과의 소통이 부족했던 영향이 커 보인다. 당국이 불필요한 오해를 낳지 않게 결정 과정을 자세히 밝혔다면 국민들의 불안이 덜했을 것이다. 한국의 금융기업들도 지난 22년을 되짚어 볼 필요가 있다. 론스타의 먹잇감이 된 외환은행의 수준은 면했더라도 아직까지 ‘대출 중심 사업에서 벗어나라’라는 비판이 도돌이표처럼 반복된다.조은아 경제부 차장 achim@donga.com}

주식 시장이 출렁이는 날도 있지만 투자 열풍은 식지 않는 분위기다. 코스피가 하락할 때도 주식을 대량으로 던지고 떠나는 외국인과 달리 ‘개미’들은 저가 매수를 시도하며 코스피를 떠받쳤다. 그래서인지 요즘 유독 ‘오전 9시 무렵에 회사 화장실이 붐빈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 국내 증시가 개장하자마자 화장실 칸마다 문 닫고 들어가 스마트폰 주식 창을 여는 직장인이 많다는 얘기다. ‘오전 9시엔 빈자리가 없으니 더 일찍 가야 한다’고 귀띔하는 이도 있었다. 주식 시장이 성장하는 건 일반 투자자들은 물론이고 한국 경제를 위해서도 바람직하다. 국내 증시는 금융당국에 오래도록 ‘아픈 손가락’이었다. 당국자들은 한국 경제 규모만큼 성장하지 못한 증시 육성에 책임을 느끼고 있었기에 증시 얘기만 나오면 목에 힘을 주질 못했다. 기업들은 실적을 내도 증시는 ‘박스피’를 벗어나지 못하니 부잣집의 성적 부진한 아이 공부시키듯 여러 부양책을 냈다. 그래도 분위기를 반전시키긴 쉽지 않았는데 요즘 보지 못한 지수를 보니 다행스럽고 반갑다. 사회생활을 갓 시작한 세대를 중심으로 개인 투자자들도 투자 재미가 쏠쏠하다. 이들은 천정부지로 오른 부동산에 대한 ‘포모(FOMO·소외 공포)’를 주식 투자로 달랜다. 하지만 직장인들이 오전 업무를 잠시 제쳐두고 화장실로 달려가며 어떤 마음일지 생각해 보면 씁쓸해진다. ‘이제는 주식 투자 외에는 돈 벌 기회가 없다’고 여기지 않을까. 실제 이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는 환경이 됐다. 물가는 계속 오르는데 ‘오르지 않는 건 내 임금뿐’이란 말이 많다. 임금도 오르긴 하지만 물가 상승률을 따라가지 못한다. 10년 전만 해도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0.7%였지만 올해는 거의 매달 2%를 넘긴다. 반면 국가데이터처에 따르면 이달 4일 기준으로 올해 월평균 급여는 전년 대비 2.7% 올랐다. 10년 전 임금 상승률 3.1%에 비해 둔화했다. 임금 상승 속도가 물가를 따라가지 못하니 일의 가치가 더 외면받는 풍조가 퍼지는 분위기다. 최근에 만난 한 기업의 40대 팀장은 “아침마다 주식 창을 열 생각도 못 한 채 열심히 일만 생각하고 고민했던 나만 바보가 됐다”고 털어놨다. MZ세대를 중심으로 ‘임원보다 건물주’라는 말이 공감을 얻는다. ‘열심히 일하느니 투자에 공들이는 게 낫다’는 정서가 강해지면 일터로 향하는 이들의 정신 건강에도 안 좋을 뿐 아니라 결국 기업의 생산성도 영향을 받을 수 있다. 주식 창을 볼 때만큼이나 월급통장 보는 설렘이 크려면 성장 기업이 많아져야 할 것이다. 반도체 산업에 집중된 온기를 다른 업종으로 퍼지게 꾸준히 노력해야 한다. 사실 임금을 단시일에 끌어올리기엔 대내외적인 상황이 만만치 않다. 상황이 이러하니 기업들은 성장을 위한 노력과 함께 임금 체계도 계속 바꿀 필요가 있다. 직무 가치와 성과를 기반으로 임금과 보상 체계가 정착되도록 신경을 써야 한다. 정부는 자본소득에 대한 세금이 근로소득에 비해 낮다는 지적도 기억할 필요가 있다. 투자 열풍 속에 배당소득 분리과세에 대한 반발이 심했던 만큼 당장 많은 걸 바꾸긴 힘들지만, 자본소득과 근로소득의 과세 불균형은 장기적으로 해결될 필요가 있다. 조은아 경제부 차장 achim@donga.com}

요즘 한국 수출이 연일 최대 실적을 경신하고 있다. 한국 수출의 화려한 성적은 슈퍼사이클(초호황기)을 맞은 반도체가 이끌었다. 지난달 전체 수출액에서 반도체가 차지하는 비중은 26.4%였다. 한국 수출에서 반도체의 기여도가 4분의 1을 넘긴 것이다. 10년 전 같은 시기엔 지금의 절반도 안 되는 11.5%였음을 고려하면 성장세가 놀랍다. 어려운 경제 여건 속에 반도체의 활약이 다행스럽지만 수출 희소식이 마냥 달갑지만은 않다. 최대 수출 수치에 가려진 뿌리 제조기업들의 부진 때문이다. 전체 수출은 불어났지만 자동차 및 자동차부품, 철강 등 일부 품목의 수출은 1년 전에 비해 10∼20%씩 감소했다. 제조업 위기는 올 하반기 구조조정이 본격화된 석유화학이나 철강만의 문제가 아니다. 이달 수출이 1년 전에 비해 18.9%나 급감한 자동차 부품산업도 소리 없이 곪고 있다. 최근 만난 한 국내 자동차 부품 제조사 대표는 중국산 저가 공세에 주변 부품사들이 도산하고 있다고 털어놨다. 점점 기업들이 국산 대신 저렴한 중국산 부품을 채워 자동차를 생산하고 있기 때문이다. 겉으론 한국 브랜드를 달았지만 속은 중국산이 가득한 ‘깡통 메이드인 코리아’가 조용히 확산되는 셈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한국 부품사들은 저가 중국산 부품에 밀려 일감을 줄인다. 정부와 중소기업들이 중국산 저가 공세에 서둘러 대비하지 못한 점이 아쉽다. 국내 중소기업 제품의 원가경쟁력을 높이는 노력을 부단히 기울였어야 했다. 대미 관세 공격을 받고 보니 그간 수출 시장을 다변화하지 못한 점도 뼈아프다. 최근 대미 수출 감소를 동남아시아와 유럽에서 잘 만회했다는 평가가 나오지만 얼마나 지속될지 의문이다. 산업 현장에선 기업들이 대미 수출의 구멍을 임시방편으로 서둘러 메워놨을 뿐이라고 말한다. 한국 경제의 근간인 제조기업들의 쇠락은 고용 가뭄을 예고한다. 산업단지에선 중국산에 밀려 수주를 받지 못한 기업들이 문을 닫고 근무 일수를 줄이고 있다. 인공지능(AI)으로 인해 ‘고용 없는 성장’이 미국부터 가시화되고 있어 그나마 고용을 창출하던 제조업의 위기가 더욱 걱정이다. 제조업이 쓰러지면 지방 경제도 무너지기 쉽다. 제조업 생산기지가 뿌리내린 지방에선 중소기업들이 자금난에 처해 연체율이 급증하고 있다. 올 3분기(7∼9월) 5대 지방은행의 연체율은 4대 시중은행의 2배가 넘었다. 신규 투자는커녕 대출 이자조차 못 갚고 있는 기업들이 많다는 의미다. 지방에 돈이 안 돌고 고용이 줄면 인구가 더 유출돼 경기가 악화하는 악순환이 심해질 것이다. 뿌리 제조기업들을 살리려면 저가 경쟁력을 넘어서는 기술력을 키워야 한다. 중소기업 기술 개발을 위해 정부의 연구개발 자금 지원이 절실하다는 지적이 많다. 정부가 미국과 중국의 보호정책 탓에 우리 기업들이 불리해진 부분을 점검하고 개선할 필요도 있다. 그렇지 않으면 한국이 반도체 외엔 내세울 것 없는 중국산 부품의 조립기지로 전락할 수 있다는 위기의식이 절실한 때다. 제조 생태계가 무너지면 반도체의 미래마저 담보할 수 없다.조은아 경제부 차장 achim@donga.com}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환율 전쟁’이 사실상 7년간이나 이어졌다.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는 2008년 12월 경제난에 대한 극약처방으로 ‘제로 금리’ 시대를 열며 경쟁국들의 금리 인하 경쟁을 촉발했다. 2015년 12월 연준이 금리를 올리기까지 중국 일본 등 세계 주요국들은 경기 침체를 벗어나기 위해 금리를 내리고 돈을 풀며 자국 통화 가치를 치열하게 끌어내렸다. 수출품의 외국환 표시 가격을 낮춰 수출을 늘리려 했다. 환율 전쟁이 얼마나 심각했는지 주요 20개국(G20)은 15년 전 이맘때 경북 경주에서 재무장관·중앙은행 총재 회의를 열었다. 각국이 환율을 너무 조정하지 않도록 “경상수지 흑자까지 조정하자”며 경상수지 목표제까지 제시할 정도였다. 최근 들어 환율 전쟁이 재개될 조짐이 보인다는 말이 나온다. 미 연준은 지난달 약 9개월 만에 금리 인하를 단행한 데 이어 추가 인하를 시사하고 있다. 중국은 지금은 금리를 동결하고 있지만 연말에 내릴 수 있다는 관측이 제기된다. 디플레이션 압력이 만만치 않고 미국과의 무역 갈등이 심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경제가 어려워질수록 각국은 다른 정책 수단 대신 금리 인하를 택하는 유혹에 쉽게 빠질 수 있다. 환율 전쟁이 다시 발발하면 한국은 참전할 여력이 있을까. 이미 원화 가치는 추락해 버렸다. 환율을 끌어올리려 애썼던 2010년 평균 환율은 1150원대였지만 올해 22일까지 평균 환율이 1410원대다. 이런 추세가 이어지면 올해 평균 환율이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직후인 1998년 평균 환율(1394.97원)을 추월한다. 그런데 주요 6개 통화 대비 달러의 가치를 나타내는 달러인덱스는 연초 대비 9%가량 하락했다. ‘약달러’가 뚜렷한데도 원화 가치가 고꾸라지니 원화가 얼마나 외면받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원화 가치의 급락은 수출에 호재이긴 하다. 실제 IMF 외환위기 이후 한국은 가격 경쟁력을 앞세워 수출을 늘리고 이를 토대로 재기에 성공할 수 있었다. 하지만 기업들은 ‘원화 약세 호재’를 마냥 반기기 어렵다. 주요 수출국들이 관세 장벽을 높이고 있기 때문이다. 인플레이션도 문제다. 환율이 오르면 수입 물가가 올라 국내 기업들의 원자재 지출 부담이 커진다. 수입 물가 상승은 시차를 두고 소비자 물가도 끌어올린다. 통화 가치가 떨어지면 실물인 부동산으로 돈이 몰리기 쉽다. 결국 앞으로 환율 전쟁이 불거져도 한국으로선 참전 위험이 크다. 원화 가치가 어쩌다 이렇게까지 추락했을까. 흔히 미국 기준금리 추가 인하에 대한 기대감과 한미 관세협상에 대한 우려가 원인으로 거론된다. 국내 요인으로는 작년 12월 계엄 사태로 불안감이 고조된 문제가 컸다. 한국은행도 과거 금리 인상기에 민첩하게 움직였는지 되짚어 볼 필요가 있다. 제로 금리 시대가 끝나고 세계적으로 금리 인상이 한창일 때 한은은 금리 인상 실기론에 시달렸다. 정치적 부담에 금리를 못 올렸다는 해석이 나왔다. 당시 적극적으로 대응했다면 상황이 달랐을 수 있다. 경제는 어려운데 재정은 팍팍해 돈 풀기에도 한계가 있어 통화정책의 역할이 중요해졌다. ‘중앙은행에 독립성을 기대하기 힘들다’는 말을 무게 있게 받아들일 때다. 조은아 경제부 차장 achim@donga.com}

9년 전 대만을 찾았을 때 ‘귀신의 섬(鬼島)’이란 으스스한 말을 여러 번 들었다. 대만 청년들이 자국을 비판하며 부르는 별명이었다. 마치 당시 한국 청년들이 ‘헬조선’이라며 현실을 비판했던 모습과 흡사했다. 대만의 현실을 보면 그럴 법도 했다. 대만 경제성장률은 전년도에 이미 1%대로 저성장의 위기감이 높아지고 있었다. 실업률은 한국과 비슷한 3%대였다. 게다가 중국과 대치하며 정치적 불안도 한국의 북한 리스크처럼 커졌다. 경제, 정치적 여건이 한국과 여러모로 닮은꼴이었다.한국과 닮아 보였던 대만은 최근 한국과 다른 길을 가고 있다. 정치적 리스크는 커졌을지 모르지만 경제는 무섭게 성장하고 있다. 올해 대만의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3만8066달러(약 5367만 원)로, 한국(3만7430달러)을 추월할 것으로 예상됐다. 지난해 대만 증시의 시가총액은 2조3320억 달러로 한국(1조5230억 달러)의 153%에 달한다.대만 경제의 핵심 동력은 반도체 산업이다. 대만 수출에서 반도체가 40%가량을 차지한다. 반도체 산업은 중국에 위협받는 대만의 안보까지 담보할 분위기다. 카멀라 해리스 전 미국 부통령의 국가안보보좌관이었던 필립 고든 브루킹스연구소 연구원은 22일 미국 외교전문지 포린어페어스 기고에서 “대만 최고 기업들이 생산하는 최첨단 칩을 대체할 곳은 세계 아무 곳도 없다”며 “미국은 앞으로도 오랫동안 대만 안보에 지속적인 관심을 가질 것”이라고 내다봤다.글로벌 파운드리 시장을 장악한 대만의 눈부신 반도체 도약은 우수한 공대에서 나온다는 분석이 많다. 과거에는 미국 공대를 나온 유학파가 귀국해 산업을 이끌었다. ‘매사추세츠공대(MIT)가 메이드인타이완(Made In Taiwan)’이란 우스갯소리가 나올 정도였다.하지만 최근 10여 년 동안 대만은 자국 공대를 집중적으로 육성하며 인재 양성 시스템 확대에 나섰다. 4년 전부터는 향후 공대 인력이 부족해질 것에 대비해 장기 전략까지 내놨다. 2021년 ‘국가 중점 분야의 산학협력 및 인재 양성 혁신법’을 제정한 것이다. 이 법에 따라 대학 9곳이 반도체 전문연구소를 신설했다. 반도체, 인공지능(AI) 등 핵심 분야 학부 과정은 10%, 대학원 과정은 15% 늘었다. 과거 유학만 보내기 바빴던 공대들은 정부의 지원을 받아 적극적으로 외국 인재를 유치한다. 한때 ‘귀신의 섬’으로 불렸던 곳이 ‘기회의 섬’으로 탈바꿈하고 있는 셈이다.공대 교육의 체질도 변하고 있다. 대만의 공대는 일찍이 창업기지로 바뀌고 있다. 대만의 명문대로 꼽히는 국립대만대는 10년 전 ‘대만판 실리콘밸리’를 목표로 D스쿨(디자인스쿨)을 설립했다. 공대생들이 주축이 된 이곳에선 창업을 훈련한다. 교수들도 창업 기업의 대표를 겸직하는 경우가 많다. 공대의 창업 인재들은 반도체 대기업으로도 진출하지만 강소기업을 키워 저성장 공포에 허덕이던 대만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었다는 평가를 받는다.한국에서도 공대와 기업이 연계된 계약학과가 늘고 ‘AI’ 간판을 내건 교육과정이 유행처럼 번진다. 하지만 내실은 부족하다는 말이 들린다. 대만처럼 산학협력을 더 강화하고 정부는 장기적인 로드맵을 갖고 예산을 지원할 필요가 있다. 공대 교육을 시대에 맞게 바꾸고 인재들이 창업할 길을 잘 터주면 의대 편중에 따른 다른 사회 문제들도 더 쉽게 해결될지도 모른다.조은아 경제부 차장 achim@donga.com}

해외 특파원 임기를 마치고 최근 3년 만에 귀국하니 갑자기 가난해져 버린 느낌이다. 물가가 지나치게 올라 버렸다. 회사 주변에서 점심을 해결하려면 대개 1인당 1만 원이 넘게 든다. 3년 전엔 6000∼7000원으로 한 끼를 해결하기 어렵지 않았다. 즐겨 먹던 달걀 15구짜리 가격은 7500원에서 9500원으로 뛰었다. 우유 2병 세트도 6300원에서 7100원으로 역시 앞자리가 달라졌다. ‘물가가 너무 많이 올라 놀랐다’는 필자 얘기에 주변 사람들은 오히려 더 놀랐다. 물가 상승세를 필자만큼 체감하지 못하고 있었다. 실제 통계를 확인해 보니 그럴 법하다. 지난달 소비자물가지수는 3년 전에 비해 7.2%가 올랐다. 하지만 연간 상승률은 시간이 지나며 둔화했다. 소비자물가의 연간 상승률은 3년 전엔 무려 6.3%였다. 올해 들어선 월별로 2% 안팎에서 머물고 있다. 필자도 한국에 계속 있었다면 이런 변화를 크게 알아차리지 못했을 것이다. 물가 상승이 항상 나쁘진 않다. 물가가 오르면 돈을 갚는 사람은 실질 부담이 줄고, 기업들이 돈을 빌려 실물에 투자하기 쉬워져 성장에 긍정적일 수 있다. 이를 ‘먼델-토빈 효과’라고 부른다. 하지만 지금 같은 ‘제로 성장’ 시대에 고물가는 치명적이다. 정부가 22일 올해 경제성장률 전망치를 0.9%로 제시하며 저성장이 고착화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임금은 많이 안 오르는데 물가만 유독 뛰면 우린 가난해질 수밖에 없다. 저소득층일수록 인플레이션에 더 취약하다는 연구 결과가 많다. 문제는 고물가가 뉴노멀이 될 분위기란 점이다. 주요국들이 성장을 유도하려고 저금리 정책을 예고하고 있는 데다 높아진 관세는 수입 물가를 올릴 것이다. 폭염과 폭우에 작황이 나빠져 농수산물 공급마저 줄어 물가가 유독 뛰고 있다. 이런 현상은 기후변화가 심각해지며 일상화될 듯하다. 이제 저렴하게 소비하던 시대는 다시 오지 않을 것 같다. 정부는 물가로 비판을 받을 때마다 ‘고물가는 세계적인 현상이다’ ‘원인이 복합적이라 해결하기 힘들다’고 말하곤 한다. 맞는 말이긴 하다. 물가는 뾰족한 대책을 찾기 힘들다. 그렇다면 적어도 고물가를 자극하는 대책은 자제해야 한다. 돈 풀기 정책이 유독 우려스러운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정부는 내수 진작을 위해 ‘민생회복 소비쿠폰’ 발행에 12조2000억 원의 국비를 투입한다. 내년 예산안은 사상 처음 700조 원을 넘겨 730조 원에 육박할 것으로 전망된다. 재정을 씨앗처럼 뿌려 경제를 키우겠다는 취지다. 재정을 에너지 시설이나 주택 건설 등 공급 능력을 확충하는 데 집중적으로 뿌리면 괜찮다. 하지만 일회성 현금 지원에 많이 쓰면 물가 상승을 촉진한다. 게다가 정부 부채까지 늘고 있어 물가가 더 걱정이다. 한국재정학회는 올 6월 ‘정부 부채가 1% 늘면 소비자물가가 최대 0.15% 상승한다’는 연구 결과를 내놨다. 정부는 수확까지 오래 걸리더라도 성장의 기반이 될 신사업 등에 ‘재정 씨앗’을 뿌리는 데 주력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물가 상승으로 서민은 더 가난해지고, 소비 위축으로 성장은 더 더뎌질 수 있다. 재정 씨앗은 성장의 마중물이 아니라 더 큰 위기를 부르는 불씨가 될 수 있다. 조은아 경제부 차장 achim@donga.com}

프랑스 파리 샹젤리제 거리에 있는 명품 화장품 매장에선 머리 희끗한 고령의 여성 영업직원들을 쉽게 만날 수 있다. 20, 30대 인플루언서들이 모여드는 이곳에 나이가 지긋한 직원들이 화장품을 파는 모습이 신기했다. 유행에 빠른 젊은 여성 직원만 가득하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백발인 한 직원을 유심히 보고 있던 필자에게 이곳에서 일하던 지인은 “저분이 단골들을 꽉 잡고 있다”고 귀띔했다. 몇십 년 근무하며 함께 나이 든 손님들의 향수 취향이나 피부 특성을 속속들이 알고 있기 때문이다. 고령 여성이 ‘올드 머니’를 잡는 매장의 핵심 인력이었다. 서울 강남의 명품 매장에선 백발의 영업직원을 찾아보기조차 힘든 게 사실이다. 국내 고령층의 척박한 고용 환경은 통계로도 확인된다. 통계청이 6일 발표한 ‘2025년 경제활동 인구조사 고령층 부가조사’에서 올 5월 기준 고령층(55∼79세) 경제활동인구는 1001만 명이었다. 취업자와 실업자 등 일하려는 의지가 있는 고령층이 1000만 명을 돌파한 셈이다. 그런데 고령층 취업자 가운데 단순노무직(22.6%) 비율이 유독 높았다. 비교적 처우가 좋고 안정적인 사무 종사자(8.3%)나 관리자(2.1%) 비율은 훨씬 낮았다. 이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노인 빈곤율 1위’인 한국의 미래에 우려를 더한다. 저임금에 불안정한 일자리를 전전하는 노인이 늘면 빈곤 문제가 커질 수밖에 없다. 아직은 법정 정년이 60세인데 국민연금은 퇴직 직후 나오질 않아 당분간 소득 공백기도 불가피하다. 베이비부머(1955∼1963년생)의 대량 퇴직으로 빈곤 노인들도 대량 양산되는 건 아닐지 모르겠다. 더구나 한 분야에서 잔뼈가 굵은 ‘베테랑’들이 일찍 일터를 떠나고 있어 더 안타깝다. 이번 조사에서 고령층이 ‘가장 오래 근무한 일자리를 그만둔 연령’은 평균 52.9세였다. 고학력자가 많은 관리자나 전문가의 경우 평균 53.4세였다. 초고령사회에 맞게 개혁되지 못한 노동시장의 헐거운 틈 사이로 숙련 인력들이 빠져나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50대 초반은 노동시장에서 시니어 베테랑으로 남느냐, 빈곤 노인으로 전락하느냐의 갈림길에 서는 시기라고 볼 수 있다. 숙련된 인력을 재교육하고 재배치하면 노련함이 빛나는 베테랑이 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단기 일자리나 자영업의 열악한 일자리로 버티다 빈곤 노인이 되기 쉽다. 기업들도 오래 일한 시니어들을 다시 봐야 할 때다. 최근 기업분석연구소 리더스인덱스가 기업 124곳의 직원 연령을 분석한 결과 지난해 ‘50대 이상’의 비중이 ‘30대 미만’의 비중을 처음으로 역전했다. 젊은 인구가 줄고 있는 만큼 50대 이상의 생산력을 배가할 방법을 찾아야 기업도 이익일 것이다. 기업들은 인건비가 많이 드는 중년층을 계속 고용하기엔 비용 부담이 크다고 호소할 수 있다. 달라진 인력 구성에 맞게 시니어 인력의 노동시간이나 강도는 낮추면서 다양한 형태의 일자리를 만들어 낼 필요가 있다. 정부도 고령층 일자리 지원 대책을 내놓곤 있지만 체감하기 어렵다는 지적이 많다. 중장년 직원의 재교육과 경력 전환, 재고용에 적극적인 기업들을 발굴해 세제 혜택 등 인센티브를 더욱 늘려야 한다.조은아 경제부 차장 achi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