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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가에서 태어났으나 서얼 출신. 그러나 능력으로 극복하고 대한제국 정1품 대신에 올랐다. 한일강제병합 뒤에는 비밀결사조직을 이끌었고, 중국으로 망명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활동했다. 아들은 아버지를 도와 백범 김구의 비서로 일했으며, 며느리는 임시정부의 안살림을 도맡아 독립운동을 도왔다. 일제강점기에 나라 잃은 슬픔에 대처하는 사람들의 자세는 각양각색이었다. 하지만 가족 모두가 비탄에 그치지 않고 조국을 되찾으려 싸운 경우는 흔치 않다. 서울역사박물관에서 13일 개막한 8·15 광복절 특별전 ‘조국으로 가는 길-한 가족의 독립운동 이야기’는 아버지와 아들, 며느리가 모두 독립운동에 투신했던 동농 김가진(東農 金嘉鎭·1846∼1922) 일가의 숭고하고도 치열했던 삶을 조명했다. 6부로 구성된 전시회는 특히 김가진과 며느리 수당 정정화(修堂 鄭靖和·1900∼1991)의 생애에 초점을 맞췄다. 일제가 남작 직위를 내렸으나 거부하고 칩거했던 동농은 1919년 결성된 항일단체 조선민족대동단 초대 총재로 활동했다. 대동단은 고종의 다섯째 아들인 의친왕을 중국으로 망명시켜 해외독립운동을 고취하려다 실패했다. 김가진은 상하이에서 임시정부 고문으로 활동하며 무장투쟁을 준비하다 1922년 사망했다. 정정화는 시아버지와 남편인 성엄 김의한(省俺 金毅漢·1900∼1964)이 망명한 이듬해인 1920년 무작정 상하이로 찾아가 자신의 가족은 물론이고 김구 이동녕 윤봉길과 같은 임정 요인들을 뒷바라지했다. ‘임정의 잔 다르크’로 불렸던 수당은 목숨을 걸고 압록강을 넘나들며 국내에서 독립자금을 마련해 임정 살림을 꾸리기도 했다. 이번 특별전은 동농 일가의 유물과 관련 자료를 전시하는 데 그치지 않고, 연극 연출 기법을 동원해 관객들과 소통하는 방식으로 꾸몄다. 망명길에 몸을 실었던 열차나 압록강을 건너던 나룻배를 세트로 만들고 성우가 주인공처럼 이야기를 들려준다. 상하이에 거처로 마련했던 살림집도 꾸미고, 일제의 폭격을 피해 숨었던 방공호도 재현했다. 정명아 전시과장은 “독립운동사나 정치활동 같은 거시적 담론보다는 망명의 일상생활을 구체적으로 보여줌으로써 관객들이 고달팠던 한 시대와 공감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고 설명했다. 10월 13일까지. 무료. 02-724-0154 정양환 기자 ray@donga.com}

태정태세 문단세, 예성연중 인명선…. 학창 시절 국사시간에 으레 배우는 조선 국왕의 이름. 27대 왕들을 외우다 보니 왕 이름은 무조건 ○조 ○종으로만 기억한다. 하지만 이는 왕이 승하한 뒤 종묘에 신위를 모실 때 지어 올리는 묘호(廟號)다. 당사자인 왕은 살았을 때 이런 호칭을 들어본 적도 없다. 정종수 전 국립고궁박물관장(58)이 최근 국립중앙박물관 ‘동원학술논문집’ 제14집에 게재한 ‘조선시대 국왕의 호칭과 묘호’에 따르면 조선 왕의 이름은 수십 개에 이른다. 태어날 때 불리는 호칭부터 세상을 떠난 뒤 불리는 시호(諡號)까지 상황과 시점마다 각양각색이었다.○ 아기씨(阿只氏)의 이름(諱)은 외자로 조선시대 왕의 자녀는 태어나면 일단 ‘아기씨’라고 불렀다. 아기(阿只)에 존칭인 씨(氏)를 붙인 것이다. 원자(元子)면 원자아기씨, 세손은 세손아기씨였다. 웃어른들은 원자나 원량(元良), 충자(沖子·어린아이)라 불렀다. 영조는 세손이던 정조를 20세가 되도록 충자라 부르기도 했다. 하지만 왕도 따로 이름이 있었다. 2011년 SBS 드라마 ‘뿌리 깊은 나무’에서 정기준이 세종대왕에게 일갈하던 “이도(李L)”. 이는 왕의 본명인 휘(諱·생전 이름)를 부른 것이다. 그런데 조선 왕들은 세종처럼 대체로 이름이 외자였다. 27명 역대 왕 가운데 두 자로 된 이름은 태조 정종 태종 단종 선조 인조 철종 고종뿐이다. 그러나 이들도 단종과 태종을 제외하면 모두 이후에 외자로 개명했다. 고려의 신하였던 태조나 평민처럼 살았던 철종은 왕이 될 줄 몰라 이름을 두 자로 썼다가 후에 바꿨다. 외자를 선호한 것은 ‘기휘제도(忌諱制度)’ 때문이다. 유교문화권은 왕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못하거니와 글자로 쓰는 것도 금기시했다. 이러니 한 자라도 줄여주는 게 신하와 백성을 돕는 길이었다. 왕의 이름은 육조 참판과 당상관 이상이 모여 지었는데, 최대한 잘 쓰지 않는 글자를 선택했다. 심지어 자전에 없는 글자를 집자(集字)하기도 했다. 후대로 갈수록 기휘제도는 더욱 엄격해졌다. 왕 이름과 음만 같아도 쓰기를 꺼렸을 정도였단다. 이에 영조는 이 제도의 폭넓은 적용을 금하라는 명까지 내렸다. 왕의 이름에 쓰인 부수는 모두 13종류인데, 일(日·7번)과 왕(王·4번)을 가장 많이 썼다. 귀하고 좋은 글자를 넣으려는 신하들의 충심이었다.○ 종(宗)보다는 조(祖)가 낫다?…각하(閣下)는 장관급 호칭 실학자 이수광(1563∼1628)의 ‘지봉유설(芝峯類說)’에 보면 왕은 살았을 때 흔히 전하(殿下)라고 불렸다. 이는 중국 황제의 폐하(陛下)보다 한 단계 낮은 호칭이다. 폐하는 궁전 뜰 저편 섬돌(陛) 아래서, 전하는 계단(殿) 아래서 부른다는 의미다. 높을수록 멀리 떨어져서 아뢴다는 뜻이 담겼다. 왕세자는 더 낮춰 ‘저하(邸下)’라고 했다. 각하(閣下)는 대신, 즉 장관급을 부르던 호칭이었다. ‘대통령 각하’란 말은 무지의 소치였다. 우리에게 익숙한 묘호는 이래저래 말도 탈도 많았다. 사실 조종(祖宗)을 먼저 쓴 중국은 건국시조만 조를 붙이고, 이후 왕에게는 종을 썼다. 조선도 문종 때까지는 이를 지켰는데, 세조부터 원칙이 깨지기 시작했다. 아들인 예종이 “대행대왕(大行大王)께서는 나라를 새로이 세운 공덕이 크다”며 조를 쓸 것을 고집했다. 계유정란을 일으켜 단종을 폐위한 그늘을 애써 지우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이후 조종을 둘러싼 논쟁은 여러 차례 벌어졌다. 인종은 아버지 중종이 연산군을 몰아낸 공로가 크다 하여 조를 쓰려 했으나, 신하들의 반대로 무산됐다. 선조와 인조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극복했다 하여 조를 썼으나 당시 상당한 논란거리였다. 영조와 정조는 첫 묘호는 영종과 정종이었는데, 고종이 재위 26년과 36년에 조로 바꿨다. 정 전 관장은 “조선 왕들은 종보다 조가 우위에 있다고 여기는 경향이 있었다”고 설명했다. 생전에 자신이 원하던 묘호를 얻은 왕들도 있다. 예종(睿宗)은 스스로 묘호를 짓고 “죽어서 이를 얻으면 만족하겠다”고 수시로 말했다. 생전에 각각 ‘명(明)’과 ‘영(英)’을 은근히 기대했던 명종과 영조도 뜻한 바를 이뤘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

솔직히 제목만 봤을 땐 시큰둥했다. 요즘 관계니 신뢰니 설득 같은, 인간관계 함양에 대한 책이 너무 쏟아진다. 타인을 대할 때면 진심이 제일 중요한 것 아닌가. 사람 마음 얻는데도 권모술수를 써야 하나 싶어 영 내키질 않았다. 하지만 이 책은 조금 달랐다. 일단 저자가 독일 정보부 비밀요원으로 10년 동안 일했다지 않은가. 온갖 범죄조직 내에 ‘파우만(정보원 혹은 끄나풀)’을 발굴해 고급정보를 얻어내는 게 주 업무였단다. 적이었던 인물을 자칫하면 목숨도 잃을 일을 돕게 만드는 동지로 만드는 노하우를 들려준다니 관심이 쏠릴 수밖에. 일단 책은 흥미진진하다. 러시아 마피아에서 꽤 높은 지위에 있는 티코프라는 인물을 어떻게 저자가 둘도 없는 핵심 파우만으로 만드는지 과정을 세세하게 보여준다. 우연을 가장해 비행기 옆자리에 앉아 안면을 트기 시작해, 나중엔 병을 앓는 아들의 치료까지 도와주며 인간적 유대까지 쌓는 과정이 한 편의 영화처럼 펼쳐진다. 실제로 책 말미에 보면 저자가 비밀요원을 그만둔 뒤 우연히 거리에서 티코프를 마주치는데, 이젠 각자의 길을 가지만 서로의 눈빛에서 묘한 신뢰를 발견하는 대목도 나온다. 저자는 상대를 내 편으로 만드는 기술은 크게 3가지가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첫째, 타깃에 대해 얻을 수 있는 사전정보는 뭐든지 긁어모아 세밀하게 분석해야 한다. 준비하고 덤비는 놈은 당할 수가 없다. 둘째, 서둘지 말고 시간을 들여 천천히 진심을 다해 관계를 형성해야 한다. 셋째, 확실한 보상과 인간적 대우로 마음을 열되 맺고 끊음을 확실하게 해 신뢰를 쌓는다. 사실 이렇게만 말하면 여느 인간관계 비법과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다. 하지만 이 책은 저자가 이런 위험천만한 상황을 직접 겪으며 쌓은 공력이 담겨 있다. 현장 체험이 물씬하다는 소리다. 그러니 어찌 귀 기울이지 않겠는가. 다만 비밀업무에 종사했던 탓에 이름은 가명을 쓴다는데, 얼굴 사진은 버젓이 띠지에 실려 있다. 흠, 살짝 어설퍼야 상대의 마음도 열리는 걸까.정양환 기자 ray@donga.com}

앨 고어 전 미국 부통령의 수석 연설문 담당자로 일했던 저자는 최근 미국에서 미래학자로 주목받는 인물. 21세기 비즈니스 환경을 예측했던 전작 ‘새로운 미래가 온다’ ‘드라이브’의 연장선에서 비즈니스의 본질인 뭔가를 파는 행위, 즉 ‘세일즈’에 대해 탐구했다. 저자는 디지털 세상이건 아니건 파는 대상이 물건이건 생각이건, 세일즈는 도처에서 이뤄진다고 봤다. 그리고 그 판매에 성공하려면 ABC, 공감을 이끄는 동조(attunement)와 굴하지 않는 회복력(buoyancy), 문제를 발견하는 명확성(clarity)을 키우라고 조언한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

논란이 컸던 국보 제83호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사진)의 미국 뉴욕 메트로폴리탄박물관(메트) 전시가 성사됐다. 지난달 해외 반출 불허를 결정했던 문화재청이 11일 만에 기존 입장을 철회했기 때문이다. 문화체육관광부(장관 유진룡)는 9일 “문화재청이 국립중앙박물관과 메트가 공동으로 추진하는 국외 전시를 위해 반가사유상의 국외 반출을 추가로 허가했다”고 밝혔다. 문체부는 또 “두 박물관이 포장 운송 과정에서 전시품 안전을 최우선적으로 고려한다는 조건으로 간곡히 재요청해 문체부가 적극 중재했다”며 “문화재청은 문화재 보존관리가 가장 중요하나 특별전이 문화유산을 알리는 좋은 기회임을 감안해 대승적 차원에서 받아들였다”고 설명했다. 변영섭 문화재청장은 10월 29일부터 메트에서 열릴 예정인 특별전 ‘황금의 나라, 신라’에 반가사유상이 포함된 것에 대해 지속적으로 반대의 뜻을 표명해왔다. 지금까지 여덟 차례에 걸쳐 약 3000일을 해외로 나가 전시된 바 있어 훼손 우려가 크다는 이유였다. 앞서 문화재청 자문기관인 문화재위원회가 4월 서류 보완 등을 조건부로 가결했으나 문화재청은 이를 청장이 목록을 조정할 수 있다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결국 지난달 29일 반가사유상 등 국보 3점의 해외 반출을 불허하는 최종 결정을 내렸다. 그러자 문화재계에서는 문화재위원회 결정을 문화재청이 처음으로 뒤집었다는 비판이 나왔다. 여기에 토머스 캠벨 메트 관장이 박근혜 대통령에게 서한을 보내고 공식 성명까지 발표한 사실이 뒤늦게 알려지며 분위기가 급변했다. 메트 관장은 최종 결정 이전에 전시 허용을 부탁하는 편지를 보냈다. 이에 청와대와 문체부가 재고를 요청했으나 문화재청은 기존 입장을 고수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캠벨 장관은 1일(현지 시간) “매우 실망스럽다. 전시를 진행할지 재검토하겠다”는 성명을 발표하기도 했다. 여파가 거세지자 문화재청은 두 박물관의 재요청을 수용한다는 모양새로 한 발짝 물러선 것이다. 국립중앙박물관 측은 이번 결정을 환영했다. 박물관 관계자는 “2008년부터 기획 준비해왔던 특별전의 ‘얼굴’이었던 반가사유상을 전시할 수 있게 돼 다행”이라며 “모든 문화재의 안전에 총력을 기울일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문화재청이 반가사유상과 함께 전시 목록에서 제외됐던 국보 제91호 도기 기마인물형 명기와 제195호 토우장식장경호는 기존 결정대로 반출하지 않기로 했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

“경기 파주시 광탄면에 있는 수길원(綏吉園)은 한여름에도 쓸쓸함이 묻어나요. 영조의 후궁이던 정빈 이씨의 묘인데요. 묘 앞 전각도 터만 남고, 주위 땅은 푹푹 꺼져 있습니다. 열 살 때 숨진 친아들 효장세자(사도세자의 이복형)는 정조의 양아버지가 되는 바람에 진종(眞宗)에 추존됐지만, 친할머니는 아니라서 그럴까요. 왕의 할머니로 위패는 칠궁(七宮)에 모셔졌건만, 정작 묘는 허름하기 짝이 없습니다.” 한번 얘기를 꺼내기가 무섭게 홍미숙 수필가(54)는 입이 마를 새가 없었다. 최근 출간된 ‘왕 곁에 잠들지 못한 왕의 여인들’(문예춘추사)은 조선 왕비의 무덤인 능(陵)과 왕을 낳은 후궁의 무덤인 원(園), 다른 후궁들의 무덤인 묘(墓) 등 도합 49곳에 얽힌 흥미진진한 사연을 소개했다. 1995년 수필 ‘어머니의 손’으로 등단해 수필집 6권을 내놓은 중견 수필가가 이 책에서 처음으로 역사유적답사기에 도전했다. “2011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문학창작기금 2000만 원을 받았습니다. 과분한 일이었죠. 그런데 당시에 그간 수필로 독자들에게 위안은 줬지만, 정보를 주진 않았다는 고민이 컸어요. 그때 머리나 식힐 겸 서오릉에 갔는데 숙종의 계비인 인현왕후와 후궁인 희빈 장씨의 묘가 함께 있잖아요. 왠지 모를 처연함이 느껴져 자료를 뒤지다가 제대로 공부해보자 싶어 뛰어들었죠.” 막상 시작은 했지만 작업은 쉽지 않았다. 여성작가로서 왕비와 후궁에게 초점을 맞춘 것까진 좋았는데, 글을 써내려 갈수록 깊이 있는 분석이나 적확한 감상을 짚어내는 일이 녹록지 않았다. 그럴 때면 무조건 다시 능을 찾았다. 서오릉은 10번 이상 찾았다고 한다. 그러다 올해 봄 경기 구리시 동구릉(東九陵)에 갔을 때였다. 지난해 겨울에는 단종의 어머니 현덕왕후(顯德王后) 무덤이 그리도 애잔해 보이더니, 별꽃 봄맞이꽃 제비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참으로 아름다웠다. 홍 작가는 “자연도 능도 그대로인데 조석으로 바뀌는 건 내 눈과 마음이란 걸 깨달았다”며 “큰 욕심 내지 말고 머리나 식히려던 초심 그대로 편안한 ‘길 안내서’를 내기로 했다”고 했다. 요즘 홍 작가는 기분이 상쾌하다. 힘든 경험이었지만 수필을 쓸 땐 몰랐던 충만감이 가득하다. 다음 책도 조선 왕비를 다룰 예정이란다. 왜 유독 왕비에게 꽂힌 걸까. “TV드라마 때문인가 봐요. 농담이 아니라 워낙 사극에서 왕실을 많이 다루잖습니까. 친숙하고 흥미 가는 것부터 찾아보는 게 진짜 공부 아닐까요. 역사를 열심히 공부하면 수필도 더 풍성해지리라 확신합니다. 그 속엔 사람 사는 얘기가 무궁무진하니까요.”정양환 기자 ray@donga.com}

서울 성북동 간송미술관이 소장한 ‘삼청첩(三淸帖)’은 탄은 이정(灘隱 李霆·1554∼1626)이 1594년 불혹(40세)의 나이에 엮은 시화첩이다. 세종대왕의 현손(玄孫·고손)인 이정은 감각적이면서도 절제된 서화를 그려 서예와 회화가 적절히 어우러진 조선 묵죽화의 전형을 세웠다고 평가받는다. 조선 중기 4대 문장가 중 한 명으로 꼽히는 월사 이정구(月沙 李廷龜·1564∼1635)는 “소동파의 신기와 문동의 사실성을 갖췄다”고 극찬했다. 이렇게 삼청첩이 조선 중기의 걸작으로 대접받는 데 비해 그간 이 서첩에 얽힌 역사적 뒷이야기들은 그다지 알려지지 않았다. ‘세 가지 맑음을 담은 책’이란 단아한 이름과 달리 삼청첩은 수차례 국란에 휘말리며 자칫 후대에 전해지지 못할 뻔했다. 최근 백인산 동국대 강사(44)는 국립문화재연구소의 학술지 ‘문화재’에 실은 논문 ‘간송미술관 소장 삼청첩의 역사성에 대한 고찰’에서 이런 상황에 주목하고 서첩의 제작 배경과 전래 과정을 소개했다. 삼청첩은 제작연도에서 보듯 임진왜란(1592∼1598년)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얄궂게도 왜란이 서첩의 탄생에 결정적 계기를 제공했다고 볼 수 있다. 사실 탄은은 전쟁 발발 직후 왜군에게 칼을 맞아 오른팔을 크게 다쳤다. 자칫 목숨을 잃거나 작품 활동을 접어야 할 치명적인 부상이었다. 왕족으로서 한양 사람이던 그가 이후 충남 공주로 내려가 평생 머문 것도 이때 입은 상처의 영향으로 알려졌다. 백 강사는 “삼청첩은 탄은이 그런 개인적 국가적 시련을 극복하고 심기일전해 내놓은 필생의 역작”이라고 평했다. 이 때문에 삼청첩에는 자신의 건재함을 알리려는 탄은의 심정이 오롯하다. 그림에서 풍기는 청량하고 엄정한 미감은 어려움에 굴하지 않는 조선 문인의 결기와 기상이 배어난다. 제작 기법도 전란으로 물자가 부족했을 시기임에도 엄청난 고가인 ‘흑견금니(黑絹金泥·검은 비단에 금을 물들여 그리는 방식)’ 화법을 사용했다. 그가 들인 정성을 짐작하게 한다. 탄은이 세상을 떠난 뒤 삼청첩은 선조의 부마인 무하당 홍주원(無何堂 洪柱元·1606∼1672)에게 넘겨진다. 탄은 집안의 가세가 기울었던 까닭인데, 경제력이 탄탄했던 홍주원은 탄은을 높이 샀던 이정구의 외손이기도 했다. 홍주원은 이 서첩을 끔찍이 여겼지만 곧바로 화마에 휩쓸려 소실될 위기를 겪는다. 바로 병자호란(1636∼1637년)이었다. 정혜옹주의 남편인 윤신지(尹新之·1582∼1657)가 서첩에 남긴 글에 따르면 당시 홍주원은 어가를 따라 피신했는데, 청나라에 함락돼 가재가 모두 불탔다. 모든 게 잿더미로 변해 남은 게 없었지만 천우신조로 단 하나 건진 게 삼청첩이었다. 실제로 남아있는 서첩을 보면 곳곳에서 불에 그슬린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이후 어렵사리 살아남은 삼청첩은 홍주원 후손의 가보로 전해졌으나, 구한말 일본인의 손에 넘어가기도 했다. 정확한 과정은 파악하기 어렵지만 임오군란(1882년)을 틈타 인천에 상륙한 일본 순양함 닛신(日進)함의 쓰보이 고조(坪井航三) 함장 손에 떨어진 것. 서책 한쪽에도 쓰보이가 구입했노라 직접 쓴 글이 적혀 있다. 그러나 이를 간송 전형필(1906∼1962)이 다시 사들여 겨우 국내에 남았다. 백 강사는 “삼청첩은 조선시대 대표적 환란을 두루 겪으며 그 사료적 가치가 드높아진 독특한 문화재”라고 말했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

강원 지역에 뿌리내린 신라시대 역사를 살펴보는 특별전 ‘흙에서 깨어난 강원의 신라 문화’가 13일부터 개최된다. 국립춘천박물관(관장 최선주)은 2018년 평창 겨울올림픽 개최를 앞두고 강원 고대 문화를 조명하는 특별전을 마련했다. 모두 6부로 구성한 이번 특별전은 신라가 강원 지역에 진출하기 시작한 5세기 후반을 조명하는 1부 ‘흙에서 황금으로’를 필두로 신라의 불교문화와 매장 풍습, 발굴 현황을 다각도로 조명한다. 특히 이번 전시에서는 강원도에서 처음 발견된 토성(土城) 유적인 강릉시 강문동 토성의 토기와 금제품이 처음으로 전시된다. 지난해 발굴된 강문동 토성은 5∼6세기에 축성된 것으로 추정되며, 일각에서는 우산국(于山國·울릉도와 독도)을 복속한 이사부(異斯夫) 장군이 세웠다는 주장이 나와 화제를 모았다. 또한 한반도에서 출토된 신라시대 인골(人骨)로는 최대 규모인 57개체가 한꺼번에 발굴된 동해시 추암동 유적 사람 뼈도 첫선을 보인다. 1970년대부터 지속적으로 발굴되고 있는 강릉시 초당동 고분군 유물도 만날 수 있다. 초당동 고분군은 100여 개의 무덤이 함께 모여 있어 강릉 지역 최대이자 최고의 신라 유적지로 손꼽힌다. 고분에서 출토된 대표 토기 50점과 금제관식(金製冠飾)이 전시된다. 신라 고위 관리가 썼던 관모에 달려 있던 금제관식은 0.5mm의 가는 다각형 금동실로 엮어 당시의 수준 높은 제작기술을 엿볼 수 있다. 10월 6일까지. 무료. 033-260-1500정양환 기자 ray@donga.com}
경복궁 등 조선궁궐과 종묘, 왕릉의 무료 입장이 12일부터 만 24세 이하로 확대된다. 문화재청(청장 변영섭)은 5일 “만 18세 이하 또는 만 65세 이상 국민에게 무료로 개방되던 4대 궁·종묘와 조선 왕릉의 무료 개방 연령을 만 24세 이하로 확대한다”고 밝혔다. 무료 입장을 희망하는 이들은 매표소에서 신분증을 제시하면 무료 관람권을 받을 수 있다. 이는 일반 관람만 해당하며, 창덕궁 후원 관람이나 경복궁·창경궁 야간개방 같은 특별 관람은 제외된다. 문화재청은 이와 함께 급증하는 청소년 관람객의 질서 유지를 위해 ‘청소년 단체 사전예약제’와 ‘인솔자 인원 할당제’도 실시하기로 했다. 35명 이상 청소년이 단체 관람을 원할 때는 해당 궁·능 홈페이지를 통해 사전에 예약하고, 35명당 1명씩 지도교사가 꼭 있어야 한다. 무료로 배포되던 안내 리플릿은 12일부터 한 부당 500원씩 받는다. 문화재청은 “여기저기 버려지며 관람 환경을 해쳐 불가피하게 선택했다”고 설명했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

문화재청이 제83호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 등 국보 3점의 국외 전시를 불허한 뒤 미국 뉴욕 메트로폴리탄박물관(메트)에서 열릴 예정인 한국특별전 ‘황금의 나라, 신라’가 무산될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게 됐다. 토머스 캠벨 메트 관장(사진)은 1일(현지 시간) 성명을 발표해 “핵심 유물의 갑작스러운 제외로 대단히 실망스럽다”며 “전시 진행 자체를 재검토하겠다”고 밝힌 것으로 뒤늦게 확인됐다. 캠벨 관장은 성명에서 “(특별전은) 지난 40여 년간 메트에서 열린 가장 중요한 한국 전시가 되리라 기대했다”며 “신라 미술을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예술적 업적과 동등한 반열에 올리고 해외에 한국문화에 대한 이해를 높일 기회였다”고 아쉬워했다. 이어 캠벨 관장은 문화재청의 결정 재고를 희망하면서 “2008년부터 문화재위 위원들과 사전에 긴밀하게 협의하는 등 최선을 다해 준비했는데 가장 기대했던 유물들이 제외돼 안타깝다”며 “박물관은 현재 3점의 유물이 빠진 채로 전시를 진행할 수 있는지 없는지를 검토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앞서 캠벨 관장은 문화재청의 불허 결정이 나기 전 박근혜 대통령에게 핵심 유물의 전시를 허용해줄 것을 요청하는 서한을 보냈던 것으로 밝혀졌다. 서한을 접수한 청와대와 문화체육관광부가 문화재청과 협의에 나섰으나 문화재청은 메트 측의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에 청와대와 문체부 내부에서는 상당히 당혹스럽다는 반응을 보인 것으로 알려졌다. 일각에서는 특별전이 무산될 경우 자문기관인 문화재위원회의 결정을 자의적으로 해석했다는 지적을 받아왔던 문화재청이 그 책임 부담까지 떠안을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얘기가 나온다. 문체부 측도 문화재청에 재고를 제안했던 사실을 인정했다. 문체부 고위 관계자는 “유진룡 장관이 최근 청와대 요청으로 변영섭 문화재청장과 구두 협의를 했다”며 “순수하게 검토를 부탁한 것으로 (결론이 난 만큼) 주무 기관의 결정을 존중하겠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문화재청은 “이미 문체부와 협의를 마쳤고 더이상 논의할 계획이 없다”고 밝혔다. 메트 측은 캠벨 관장이 박 대통령에게 서한을 보냈음에도 불허 결정이 내려진 데 대해 매우 실망스러워하고 있다. 메트 관계자는 5일 기자와의 통화에서 “캠벨 관장은 박 대통령을 취임 이전에 몇 차례 만나며 높은 문화적 식견에 탄복해왔다”며 “직접 편지까지 쓴 것은 그만큼 이번 특별전을 메트가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특별전 ‘황금의 나라, 신라’는 5년 전부터 기획돼 10월 29일부터 메트의 1층 메인 홀에서 열릴 예정이었다. 메트는 한 해 관람객이 600만 명이 넘으며 1998년 한국관을 설치해 운영하고 있다. 이번 전시는 문화재위원회가 4월 반출을 서류 보완 등 조건부 가결을 했으나 문화재청이 이를 조정 가능하다는 뜻으로 유권 해석해 반가사유상과 도기기마인물형명기(국보 제91호), 토우장식장경호(제195호)를 전시 목록에서 제외했다. 문화재청이 위원회의 결정을 뒤집은 것은 처음이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

● “자기 기만이라는 질병은 모든 인류 집단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며, 어느 누구도 이 병에 면역성을 지니고 있지 않다. 하지만…” 애인이 있는데 잠깐 다른 남정네나 여인네에게 마음이 혹했다 치자. 그런데 달콤한 연인께서 재까닥 눈치 채고선 심문에 돌입했다. 자, 이 순간 순순히 털어놓고 용서를 구한다면 이야기는 아름다운 풍속의 전형이 될 터. 하나 우리 인생사가 어디 그런가. 뭔 소리냐, 날 그렇게 못 믿나, 오해다 착각이다…. 회유와 설득, 하소연과 강요가 난무한다. 목표는 상대방에게 속내를 들키지 않는 것. 하나의 ‘기만(欺瞞) 행위’가 시작된 셈이다. 이 기만의 핵심은 얼마나 완벽하게 애인을 속여 넘기느냐는 것. 뻔히 표정에서 티가 나고, 목소리가 갈라지는 어설픈 거짓말은 안 하느니만 못하다. 그러려면 자신부터 속여야 한다. 난 한눈판 적 없다, 그 사람은 친한 동료일 뿐이다. 그렇게 스스로 세뇌시키다 보면 어느 순간 ‘진짜로’ 그런 일은 없었다고 믿게 된다. 확신이 섰나. 그럼 이제 다시 재판관 앞에 서 보라. 오직 진실만을 대변하는 당신의 눈과 입. 축하한다. 당신은 드디어 ‘자기기만(self-deception)’의 무대에 올랐다. ‘우리는 왜…’는 미국 럿거스대의 인류학·생명과학 교수인 저자(70)가 이러한 ‘기만과 자기기만’의 메커니즘을 진화생물학으로 풀어 낸 책이다. 솔직히 책 겉장에 있는 소개처럼 이 양반이 ‘살아있는 최고의 진화생물학자’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이런저런 자료를 뒤져 보니 ‘이기적 유전자’(리처드 도킨스 지음)를 비롯한 여러 진화생물학 연구에 이론적 토대를 제공한 인물이란다. 그렇게 대단한 학자의 책이 국내에 처음 소개된다는 게 더 놀랍다. 어쨌건 도킨스가 “여태껏 그가 내놓은 개념 가운데 가장 도발적이면서 흥미로운 주제”라고 평가한 이 책은 속고 속이는 행위가 바이러스부터 사람까지 모든 생물 영역에 산재해 있는 자연선택의 산물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그리고 상대방을 속여야 이득을 얻고 그 속임수를 간파해야 살아남을 수 있는 진화의 정글에서, 자기기만도 아울러 ‘기만에 봉사하도록, 즉 남을 더 잘 속이기 위해’ 발전했다. 저자에 따르면 자기기만은 이런 진화 시스템에서 효율성을 배가시켜 주는 매력적인 기제다. 자신마저 속임으로써 그 행위를 할 때 스스로 가질 수도 있는 내부적 모순(혹은 부담)을 덜어주고, 또 속임수가 들통 났을 때 비난에 대처하는 손쉬운 방어 수단을 제공한다. ‘난 모르고 한 거예요’라고 하면 그만이니까. 게다가 이 시스템은 좀 더 나가서 ‘강요된(imposed) 자기기만’까지 만들어 냈다. 부모가 자식에게 ‘너 잘되라고 이런다’며 강요하는 일을 자식도 어느 순간 ‘나 잘되려고’ 하는 것으로 인식한다는 것처럼. 사실 생태계에서 기만 행위는 익숙한 풍경이다. 포식자가 먹이를 얻기 위해, 피식자가 살아남으려고 속임수를 쓰는 건 흔하다. 그런데 우리가 깨닫지 못했을 뿐이지, 자기기만도 그만큼 비일비재하다. 위기에 처한 고양이가 온몸을 곧추세우고 몸집을 부풀리는 것도 자기 스스로 더 크고 세질 수 있다는 확신을 가져야 상대에게 먹히지 않는 자기기만이다. 이런 사례도 있다. 농어목 검정우럭과의 민물고기인 블루길 중에는 번식을 위해 암컷과 똑같은 모양새를 가진 수컷이 존재한다. 같은 수컷이었다면 힘센 수컷에게 쫓겨났을 영역에서 암컷인 척 머물다가 몰래 진짜 암컷과 수정하는 것이다. 재밌는 것은 암컷은 둘 다 수컷이란 걸 알면서도 ‘다다익선’이니 모르는 척 눈감아 준다. 기만과 자기기만이 뒤섞인 ‘웰 메이드 막장 드라마’다. 인간 사회도 비슷하다. 한 장(章)을 할애해 설명하는 대표적 자기기만은 ‘거짓 역사 서사’다. 자국 역사를 찬미하고 정당화하려는 집단적 자기최면을 말한다. 거짓 역사 서사는 어느 시대 어느 국가에나 존재하지만, 저자가 꼭 집어 낸 일본은 그 도를 넘어섰다. “지난 10년 사이에 일본이 자신의 과거를 대하는 방식에서 아주 흥미로운 퇴행 현상이 나타났다. 이전에는 이따금 인정하고는 했던 중요한 역사적 사건들을 이제는 부정하고 있다. 산더미 같은 증거들을 외면한 채 말이다. 정반대의 증거가 폭로될 때마다 부정하는 자들은 꼬리를 좀 내리지만, 역사적 범죄에 공식적으로 연루됐다는 평가를 최소화하려는 의도를 늘 드러내고 있다.” 이 책은 과학책인데도 어느 순간 인문서를 읽는 듯한 묘한 착각을 안겨 준다. 저자가 8장부터 책의 반가량을 인류의 기만과 자기기만을 보여주는 데 할애했기 때문이다. 때론 본말이 전도된 게 아닌가 싶을 정도다. 하지만 마지막 14장 ‘우리 자신의 삶에서 자기기만과 싸우기’에 당도하면 왜 이리도 인류에 천착했는지 그 해답을 들을 수 있다. “기만과 자기기만이라는 질병은 모든 인류 집단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며, 어느 누구도 이 병에 면역성을 지니고 있지 않다. 하지만 자신이 알아차린 편향을 스스로 의식적으로 교정하는 것은 가능하다. 과신과 무의식을 피하려고 노력하라. 둘 다 저마다 위험하다. 그리고 둘이 결합되면 치명적일 수 있다.” 도킨스의 말처럼 이 책은 참 도발적이다. 과학자가 기만과 자기기만을 진화의 산물로 설명해 놓고 또 이를 극복해야 할 과제로 상정한다. 물론 저자는 이를 완전히 없앨 수도 없고, 잘만 통제하면 순기능도 상당하다는 전제를 깔긴 했다. 하지만 이 모순적 테제를 어찌 받아들여야 할까. 잠깐, 혹시 이것도 일종의 기만과 자기기만 아닐까. 내용이 어려워 덮은 과학책은 많으나 겨우 다 읽었는데 머리를 싸맨 경우는 처음이다. 아, ‘바보들의 바보짓(책의 원제·The Folly of Fools)’은 기자를 두고 한 말인가.정양환 기자 ray@donga.com}

안평대군(安平大君·1418∼1453)과 자암 김구(自庵 金絿·1488∼1534), 봉래 양사언(蓬萊 楊士彦·1517∼1584), 석봉 한호(石峯 韓濩·1543∼1605). 유교사회였던 조선에서 서예는 ‘시서화금(詩書畵琴)’이라 하여 그림이나 음악보다 찾는 이가 많았다. ‘조선 전기 4대 명필’로 꼽히는 이들도 당시에 최고의 예술가로 대접받았다. 특히 비석 글씨는 후대까지 남긴다는 상징성이 커 여러모로 주목받았다. 한신대 박물관이 2일부터 서울 예술의전당 서울서예박물관에서 개최하는 특별전 ‘조선이 사랑한 글씨-조선 오백년 명필 명비’는 4대 명필의 작품을 비롯해 조선 최고의 글씨 탁본을 총망라해 볼 수 있는 기회다. 모두 200여 점의 작품이 전시된다. 원나라 조맹부 서풍인 송설체(松雪體)의 대가로 꼽히는 안평대군이 세종대왕의 명을 받들어 외할아버지 심온(沈溫)을 위해 쓴 묘비 글씨는 필치가 굳세면서도 애잔함이 묻어난다. 한석봉이 임진왜란 때 행주산성에서 거둔 승리를 기념해 썼다는 ‘행주대첩비’(1845년)는 당당하고 호기롭다. 이 밖에 ‘양송체(兩宋體)’라고 불렸던 송시열(宋時烈·1607∼1689)과 송준길(宋浚吉·1606∼1672), 정조가 아꼈다는 조윤형(曺允亨·1725∼1799), ‘곡운체(谷雲體)’라는 특유의 예서체를 창안한 김수증(金壽增·1624∼1701)의 글씨도 전시된다. 당연히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1786∼1856)와 그의 제자 격인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1820∼1898)의 작품도 만날 수 있다. 16일까지. 3000∼5000원. 031-379-0195정양환 기자 ray@donga.com[바로잡습니다]◇2일자 21면 ‘조선이 사랑한 글씨 대가의 탁본 한눈에’ 기사에서 한석봉이 쓴 행주대첩비는 1602년 처음 건립됐고, 초건비의 풍화로 1845년 중건됐기에 바로잡습니다.}

경복궁을 거닐다 보면 국보 제224호인 경회루(慶會樓) 주위에 왠지 낯선 정자 하나가 눈에 띈다. 경회루를 둘러싼 연못가 서북쪽에 세워진 이 육각정의 명칭은 하향정(荷香亭). ‘연꽃 향기’라는 아름다운 뜻이 담긴 소담한 건물이다. 하지만 이 향기는 정확히 말하자면 ‘조선의 향취’는 아니다. 경복궁을 태조 4년(1395년) 처음 건립했던 때에도, 고종 4년(1867년) 흥선대원군이 중건했던 시기에도 궁궐 내에 하향정이란 정자는 존재하지 않았다. 하향정은 1949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뒤에 새로 지은 정자다. 조선을 대표하는 궁궐에 이런 정자가 왜 만들어진 것일까. 최근 한 시민단체가 이 정자의 철거를 주장하고 나서면서 일반인에게는 존재 자체도 생소했던 하향정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지난달 문화재제자리찾기(대표 혜문 스님)는 문화재청을 상대로 “경복궁의 원형을 보존 복원하기 위해 하향정을 철거해야 한다”는 요지의 행정소송을 제기했다. 문화재제자리찾기에 따르면 이 하향정은 당시 이승만 초대 대통령의 지시로 세워진 건물이다. 당시 이 대통령이 낚시를 하며 휴식을 취할 목적으로 정자를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세간에는 1950년 6·25전쟁이 터진 날 오전에도 여기서 낚시를 즐기다 북한의 남침에 대한 첫 보고를 받았다고 알려져 있다. 혜문 스님은 “대통령이 사사롭게 자신의 취미생활을 위해 지은 건물을 경복궁 내에 그대로 유지하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말했다. 학계에서도 이런 주장이 나름의 근거가 있다고 보고 있다. 문화재청의 건축문화재분과 문화재전문위원인 김왕직 명지대 건축학과 교수(52)는 “원론적으로만 따진다면 철거하는 게 이치에 맞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공식적으로 문화재청은 경복궁을 복원 유지하는 기준 시점을 ‘고종 중건’ 때로 잡고 있다. 그렇다면 건립 의도의 좋고 나쁨을 떠나서라도 기준에 적합하지도 않은 건물을 고수할 이유는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꼭 철거해야 하는가에 대해 고개를 갸우뚱하는 이들이 많다. 김 교수는 “모든 사안에 엄중한 잣대를 들이대는 것은 지양해야 한다”며 “하향정이 세워진 것도 결국 좋건 싫건 우리의 역사인데 무조건 없애는 게 능사는 아니다”고 말했다. 사적분과 문화재전문위원인 황평우 육의전박물관장(52)도 “교육적 측면에서 하향정을 존치하고 그에 얽힌 역사를 정확하게 가르치는 방법도 있다”고 말했다. 문화재청은 다양한 의견이 공존하는 만큼 앞으로 여러 전문가의 의견을 더 많이 청취하겠다는 입장이다. 일각에서는 굳이 논란을 야기하는 경복궁에 둘 것이 아니라 충남 부여군에 있는 한국전통문화대학교로 옮겨 보존하는 방법도 고려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박영근 문화재청 문화재활용국장은 “유지와 철거 한쪽으로 단정 지을 게 아니라 제3의 대안까지 폭넓게 논의하겠다”고 말했다. 정양환 기자 ray@donga.com}

1970년대 우리네 부모님들은 어떤 삶을 살았을까. 대한민국 근·현대 생활문화 물품을 수집 연구하는 한국근대문화연구협회(공동대표 장동훈 송교승)가 1970년대 유물과 자료 2만여 점을 전시하는 특별전 ‘톡톡 1970!’을 서울 강북구 번동 북서울꿈의숲 아트센터에서 열고 있다. 문화체육관광부와 서울시가 후원한다. 전시장에는 그 시절 서민들의 생활공간인 평범한 동네 골목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세트들이 마련됐다. 문방구부터 만물상, 전파상, 양품점, 만화방까지 다양한 가게를 재현하고 그에 어울리는 물품을 배치했다. 예를 들어 ‘가정집’ 거실에는 괘종시계와 손으로 채널을 돌리는 로터리 TV 등으로 운치를 살렸고, ‘담배 가게’에는 당시 팔던 담배들이 허름한 미닫이 유리창에 빼곡히 전시됐다. 1970년대가 생소한 젊은층은 신기한 체험의 기회를 가질 수 있고, 동시대를 살았던 이들은 아스라한 옛 시절 추억에 빠져볼 수 있다. 특히 근대문화연구협회는 지난달 새마을운동 기록물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것을 기념해 ‘새마을회관’ 재현에 공을 쏟았다. 새마을운동 때 쓰던 문건과 음반 등 희귀자료 수백 점을 전시하고 새마을운동 모습을 점토인형으로 만들어 이해를 도왔다. 협회 측은 “현재의 번영을 이룩하는 데 주춧돌이 됐던 1970년대는 보통 사람들의 애환이 추억처럼 배어 있다”며 “특히 당시를 경험해보지 못한 청소년들에게 교육 효과가 클 것으로 기대한다”고 설명했다. 10월 6일까지. 월요일 휴무. 1500∼4000원. 02-737-1970정양환 기자 ray@donga.com}
앞으로 경복궁은 영어로 ‘Gyeongbokgung Palace’라고 써주세요. 문화재청(청장 변영섭)은 그간 여러 표기가 뒤섞여 혼선을 빚었던 문화재 영문 표기의 기준을 마련한 ‘문화재 명칭 영문표기 기준 규칙’을 제정했다. 이번 규칙은 2010년부터 세미나와 공청회를 통해 관계기관과 일반인의 의견을 수렴한 것을 토대로 최종 결정했다. 이 규칙에 따르면 경복궁처럼 건물유적 및 명승문화재는 궁(gung)과 ‘palace’가 의미가 겹치더라도 고유명사를 살리기로 했다. 이에 따라 숭례문은 ‘Sungnyemun Gate’, 한라산은 ‘Hallasan Mountain’으로 쓴다. 서적이나 회화, 무형문화재는 삼국유사(Samguk yusa)처럼 국문 명칭대로 표기하되 필요한 경우 괄호 안에 의미를 병기하도록 했다. 예를 들어 삼국유사는 ‘Memorabilia of Three Kingdoms(세 왕국의 수집기록)’라고 넣을 수 있다. 문화재청은 다음 달 1일부터 이 규칙을 시행하기로 결정하고 앞으로 인터넷 홈페이지와 문화재 안내판, 인쇄홍보물에도 점차로 기준을 적용할 방침이다. 정양환 기자 ray@donga.com[바로잡습니다]◇7월 31일자 A21면 ‘문화재청, 영문표기 규칙 제정’ 기사에서 숭례문의 영문표기는 ‘Sungyemun Gate’가 아니라 ‘Sungnyemun Gate’이기에 바로잡습니다.}

“문화에 대한 통찰력은 유전적으로 얻어지는 게 아닙니다. 한국인이 한국미술을 가장 잘 이해한다는 고정관념은 버려야 해요. 오히려 타성에 젖은 익숙함이 판단을 흐리게 만들 수 있습니다. 애정을 갖되 다양한 상호작용을 두루 살펴 맥락을 짚어내는 게 중요합니다.” 차분한 말투였지만 메시지는 결코 녹록지 않았다. 26일 서울 국립고궁박물관에서 만난 독일 출신의 부르글린트 융만 미국 로스앤젤레스 캘리포니아대(UCLA) 교수(58)는 주로 한국말로 대화하다가도 좀 더 정확한 의사를 밝히고 싶을 때는 영어로 설명을 덧붙였다. 올 하반기 10년간 공들인 영문판 ‘한국미술사’(가제) 출간을 앞두고 기대와 걱정이 뒤섞인 느낌이랄까. 그도 그럴 것이 한국학자가 쓴 한국미술사가 해외에 번역된 사례는 있지만 외국인이 한국미술 통사 책을 내는 것은 처음이다. “단순히 한국미술을 연대기적으로 나열하는 방식의 텍스트는 지양했습니다. 한국은 지정학적으로 중국, 일본과의 교류가 문화적 자양분으로 크게 작용했어요. 이런 ‘관계’에 대한 고찰이 중요합니다. 이탈리아 르네상스 미술을 얘기하면서 프랑스나 네덜란드와 주고받은 영향을 살피지 않을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예요.” 융만 교수는 아울러 ‘동시대 미술’의 관계도 주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예를 들어 16세기 조선에선 양반사회를 중심으로 문인화가 성행했다. 하지만 동시에 불교 회화도 상당한 성취를 이뤘다. 그런데 같은 시대, 같은 땅에서 꽃을 피운 미술이 분야가 다르다고 서로 주고받은 영향이 없었을까. 융만 교수는 “한국 학계의 성과를 폄하할 의도는 없지만 그간 다소 획일적인 시각에 치우쳤던 게 아닌가 하는 고민이 담겨 있다”고 말했다. 사실 융만 교수의 이런 비평에는 한국미술에 대한 애정이 짙게 배어 있다. 1973, 74년 연세대 어학당에서 한글을 배운 뒤 ‘전생에 한국인이 아니었을까’ 싶을 정도로 한국문화에 푹 빠졌다. 하이델베르크대에서 쓴 박사학위 논문 2편 ‘중국 절파 화풍이 조선 회화에 미친 영향’(1988년)과 ‘조선통신사를 통해 살펴본 조선과 일본의 미술 교류’(1996년)가 모두 한국미술사를 다뤘다. 관계를 중시하는 그의 시각은 이미 박사학위 논문을 쓸 때부터 형성된 셈이다. 그의 애정과 노력은 1999년 UCLA 미술사학과에 부임하며 꽃을 피웠다. 외국 대학이 한국미술 전담교수를 채용한 것은 처음이었다. 당시 융만 교수는 학문적 성과를 인정받아 베를린대 동아시아미술사학과에서도 교수직을 제안받았다. 그는 “선택을 전혀 망설이지 않았다”면서 “사랑하는 한국미술에만 전념할 수 있기에 UCLA를 택하며 매우 기뻤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그가 생각하는 한국미술의 매력은 무엇일까. 융만 교수는 “기자들은 왜 그런 걸 궁금해하냐”며 “한국미술은 단정 짓기 어렵다”고 응수했다. “고려시대 미술은 우아하고 고급스럽습니다. 이에 비해 조선은 매우 엄중하면서도 담백하죠. 하지만 이 역시 전체적으로 그런 문화적 분위기가 존재했다는 것이지 획일화할 수는 없습니다. 다양한 아름다움이 한국미술에는 공존하고 있어요. 그런데 한국미는 무엇이라고 정의해버리면 한계를 그어버리게 됩니다. 흔히 일본은 화려하고 중국은 웅장하다고 하는데, 한국도 그런 멋이 존재하거든요. 알면 알수록 매력이 넘치는 게 한국미술입니다.” 융만 교수는 31일 일본으로 간다. 일본에 산재한 조선 회화작품을 보기 위해서란다. 그는 “요즘 신사임당의 미술을 성(性)문화 담론으로 풀어보는 연구를 하고 있다”며 “최근 한류에서 나타나듯 한국에 대한 관심이 폭발적으로 높아졌는데 이럴 때일수록 열심히 공부해서 한국문화를 더 많이 알리고 싶다”고 다짐했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 차정윤 인턴기자 이화여대 한국음악과 4년}

10월 미국 뉴욕 메트로폴리탄박물관에서 열리는 한국특별전 ‘황금의 나라, 신라’에서 국보 제83호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은 볼 수 없게 됐다. 문화재청은 논란이 됐던 반가사유상의 국외 전시를 결국 불허하기로 30일 국립중앙박물관에 최종 통보했다. 문화재청은 이날 “국립중앙박물관이 신청했던 문화재 가운데 3건을 제외한 18건 23점의 해외 반출을 허가했다”고 밝혔다. 목록에서 빠진 문화재는 반가사유상과 국보 제91호 ‘도기 기마인물형 명기(明器·무덤에 함께 매장하는 기물)’, 제195호 ‘토우장식 장경호(長頸壺·목항아리)’다. 최근 문화재계는 반가사유상의 미국 전시를 놓고 뜨거운 논란을 벌였다. 세계 최고로 인정받는 박물관 메인홀에서 열리는 전시인 만큼 수용하자는 의견과 국보의 외유가 잦으면 훼손 우려가 커진다는 의견이 팽팽히 맞섰다. 허가를 심의하는 문화재위원회도 격론과 보류 끝에 4월 반출을 ‘조건부 가결’했다. 하지만 3월 취임한 변영섭 문화재청장은 “반가사유상은 안 된다”고 여러 차례 밝혀 왔고, 최종적으로 반출에서 제외했다. 조건부 가결을 최종 결정권자인 청장이 목록을 조정할 수 있다는 뜻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그러나 당시 심의에 참여했던 문화재위원은 “조건부 가결은 일단 이 건은 통과시키고 향후 반출을 자제하자는 권고를 담은 것”이라고 설명했다. 문화재청의 자문기관이긴 하지만 문화재위원회의 결정이 번복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한 전문가는 “좋은 의도였건 아니건 이런 선례를 남기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우려했다. 반가사유상과 함께 추가로 반출이 제외된 2개 문화재도 신라의 대표급 유물. 메트로폴리탄박물관 관계자는 이처럼 핵심 전시품이 빠진 데 대해 “굳이 이렇게까지 해서 전시를 꼭 해야 할지 회의감이 팽배해 있다”고 현지 분위기를 전했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

중요무형문화제 제17호 봉산탈춤에 나오는 ‘말뚝이(말 끄는 하인)’ 탈은 가만히 들여다보면 묘한 위화감이 든다. 눈가는 분명 화를 내는데, 입은 환하게 웃고 있다. 미국 심리학자 폴 에크먼은 “사람의 얼굴에는 26개의 근육이 있는데 감정에 따라 쓰는 근육이 각기 다르다”고 말했다. 즉, 말뚝이처럼 위는 분노하고 아래는 기쁜 얼굴은 인간이 지을 수 없는 표정이다. 그렇다면 말뚝이 탈은 왜 이렇게 ‘비현실적인’ 모습으로 만들어졌을까. 이현경 홍익대 미술학 박사(36)가 최근 국립민속박물관 학술지 ‘민속학 연구’에 게재한 논문 ‘탈의 얼굴에 나타난 비(非)해부학적 구조 고찰’에 따르면 이는 신령한 무(巫)와 세속적 속(俗)이 융합된 한국 탈의 독특한 결과물이다. 한마디로 신과 인간의 영역이 중첩되다 보니, 인간이되 인간이 아닌 얼굴이 나온 것이다. 물론 중국이나 일본 탈에도 토속신앙이 짙게 배어 있다. 하지만 중국희곡학회가 정리한 탈을 보면 인간 형상과 유사한 것과 아예 상상 속에 존재하는 탈은 확연히 구분된다. 괴물이나 신령 탈조차도 얼굴 근육 표현은 해부학에 부합한다. 7세기부터 계승된 일본의 전통악극 노(能)의 가면도 주로 원혼(원魂)을 표현했지만 표정은 인간적이다. 이에 비해 한국 탈은 말뚝이처럼 ‘이중 근육’을 쓰는 비해부학적 표정을 지녔다. 송파산대놀이의 ‘왜장녀(덩치 크고 부끄럼 없는 여성)’ 탈은 눈은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릴 듯 슬픈데 살짝 올라간 입 꼬리는 미소를 머금었다. 송파산대 ‘옴중(옴이 오른 파계승)’ 탈은 말뚝이처럼 상부는 화가 났고 하부는 신이 났다. 양주별산대의 ‘애사당(왜장녀 딸)’이나 서울 애오개 등지에서 계승된 본산대의 ‘먹중(장삼 입은 승려)’ 탈은 눈은 슬픔을, 입은 놀람을 나타낸다. 이 박사는 “조선 탈놀이는 서민계층에서 성행했던 만큼 정교한 사실성이나 숭고한 종교성에 딱히 구애받지 않았다”며 “인간의 얼굴 속에 신이 깃든 형상을 표현함으로써 무속적 영향을 자연스레 받아들였다”고 설명했다. 한국 탈의 비해부학적 특성은 탈에 반영된 계급의식에서도 찾을 수 있다. 모든 탈놀이에서 빠지지 않는 ‘양반탈’을 보면 하나같이 코가 기형적으로 작다. 민초를 대표하는 말뚝이는 코가 얼굴의 절반을 넘게 차지할 만큼 비대하다. 남성성을 상징하는 코의 크기로 지배계급을 야유한 결과다. 양반탈의 수난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양주별산대의 ‘샌님’은 눈코입이 온통 삐뚤어졌고, 통영오광대의 ‘손님양반’은 표범 무늬처럼 점으로 뒤덮였다. 통영오광대 ‘홍백양반’은 아예 피부가 반으로 갈라져 희고 빨갛다. 이 박사는 “홍백양반은 양반의 이중성을 극단적으로 표현한 사례”라며 “이런 자유분방한 표현력은 들끓는 에너지가 가득한 디오니소스적 집단의식이 해부학적 논리에 얽매이지 않고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

1940년대 초, 이 땅의 아이들에게 비행기는 ‘아이돌 스타’였다. 학교에서는 모형 글라이더를 나눠주며 꿈과 낭만을 부추겼고, 언론은 소년 비행병을 영웅으로 찬미했다. 답답한 현실을 벗어나 창공을 나는 새가 된다면 얼마나 신날까. 물론 이는 일제가 가미카제(神風) 자살공격에 조선 젊은이를 끌어들이려는 프로파간다(선전선동)였다. 하지만 그때는 몰랐다. 그 비행기가 조국 한반도를 자욱한 포연 속에 핏빛으로 물들일 줄은. 10년도 채 되질 않아서. 정전 60주년. 올해는 유독 6·25전쟁 관련 서적이 쏟아진다. 식상한 책도 많아 옥석 가리기가 쉽지 않다. ‘폭격’은 단연 옥에 속한다.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HK(인문한국)연구교수인 저자는 미국 공군의 공중폭격이란 독특한 소재를 통해 전쟁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시했다. 일단 ‘폭격’의 배를 갈라 보자. 책의 핵심은 전쟁 당시 미국의 폭격이 한반도 민초들에게 얼마나 많은 피해를 끼쳤는지를 명확히 보여주는 데 있다. 이렇게 말하면 마치 한국의 우방이었던 미국을 비난하는 것처럼 들리지만 저자의 목표는 더 심층적이다. 1950년대 ‘최첨단 과학기술의 총화’로 여겨졌던 비행기 전투가 실은 얼마나 허술했는지, 그리고 이를 둘러싼 역사적 메커니즘이 어떻게 인류의 생명을 덧없이 앗아갔는지를 꼼꼼히 짚어낸다. 사실 비행기는 일제강점기 소년들의 동경과 달리 애초부터 ‘마(魔)’가 낀 창조물이었다. 1903년 라이트 형제가 최초로 동력비행에 성공한 뒤, 강산이 한 번 바뀌기도 전인 1911년 이탈리아가 리비아 공중폭격을 감행했다. 이후 제1, 2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급속도로 이뤄진 비행기 발전의 역사는 전쟁과 폭격의 역사였노라 불러도 무방할 정도다. 6·25전쟁은 그런 의미에서 미군의 폭격 능력을 제대로 과시한 무대였다. 전쟁 발발 직후인 29일에 미 극동공군 산하 제3폭격전대가 곧장 평양비행장을 폭격한 것을 시작으로 북한 땅 요소요소에 폭탄을 쏟아 부었다. 당시 김일성은 적잖이 당황했었다. 7월 7일이면 한창 승승장구할 때인데도 미군의 예상보다 빠른 개입과 후방 폭격에 놀란 것이다. 당시 테렌티 시티코프 북한 주재 소련대사는 스탈린에게 “김일성이 그리 화를 내고 허둥대는 모습을 처음 보았다”고 보고했다. 문제는 폭격의 가공할 만한 잔인함이다. 물론 전쟁 초기 미군은 무차별 폭격을 퍼부었다는 북한 주장과 달리 군사산업시설만 타깃으로 하는 ‘정밀폭격’에 나섰다. 하지만 당시 최고로 평가받던 미 공군이었지만 레이더 수준이나 폭격의 정밀도는 지금과 비교가 안 됐다. 그러니 군 정유공장을 폭격하면 주위 민간시설이나 인가도 변을 당했다. 게다가 초기 일본에서 출격한 전투기는 비행지속능력이 떨어져 한반도에 머무는 시간이 짧아서 정확한 목표 설정이 거의 불가능했다. 마찬가지 이유로 싣고 갔던 폭탄을 모두 투하해야 회항이 가능했다. 말은 정밀폭격인데 융단폭격이나 다름없었다. 게다가 북한군이 폭격 대비책으로 낮에는 참호로 피신하는 게릴라 전법을 가동하면서 미군은 어이없는 전술을 택한다. 적이 숨었을 거라 추정되는 민가나 피란민 행렬을 공격한 것이다. 물론 공산당이 위장 잠입한 사례도 적지 않다. 하지만 ‘흰옷 입은 사람들(people in white)’은 무조건 폭격하는 게 가당키나 한가. 게다가 중공군이 참전한 뒤로는 초토화 정책으로 전략이 바뀌면서 민간인 피해는 상상을 초월했다. 원래 서울대 국사학과 박사학위논문인 ‘폭격’은 10년 넘게 공을 들였다는 학문적 탐구에 절로 고개가 숙여지는 역작이다. 2000년 즈음부터 미국 국립문서보관소와 미공군역사연구실을 통해 공개되기 시작한 6·25전쟁기 미 공군문서 10만 장을 수집, 분석했다. 특히 가공되지 않은 실제 전폭기 조종사의 하급 임무보고서를 통해 무차별 폭격이 이뤄졌음을 보여준 점이 유효했다. 학술서적답지 않게 읽는 맛도 만만치 않다. 문제는 묘하게 풍기는 이질감이다. 전체적으로 균형 감각이 탁월한 편이나 왠지 북한을 단순히 ‘피해자’로 한정하는 분위기가 기저에 깔려 있다. 분명 폭격이란 범주에서 북한은 당하는 입장이었고, 미군의 비인도적 처사는 지탄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6·25전쟁의 원흉은 북한이다. 학술적 결론만 도출하는 논문이 아니라 일반 대중을 고려한 책이라면 좀 더 포괄적이고 유연한 자세가 필요하지 않을까.정양환 기자 ra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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