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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익부 빈익빈이 나타나고 있다. 밤을 새워서라도 토론하자.” 변형윤 서울대 명예교수(92)는 1967년 2월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대한 교수단 평가회’에서 계획의 부작용을 이렇게 지적했다. 박정희 대통령과 각 부처 장관도 참석한 자리에서 칭찬 일변도의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은 것. 당시 변 교수가 손에 들고 있던 지시봉으로 박 대통령을 가리켰다고 오해한 한 장관은 변 교수를 “미친 사람”이라고 했다. 박 대통령은 이 상황을 말없이 지켜봤다고 한다. 31일 발간된 ‘변형윤 회고록―학현일지(學峴逸志)’(현대경영사)의 한 대목이다. 변 교수는 주류 경제학 안에서 소득 재분배와 균형적 경제발전을 주장한 원로 진보 경제학자다. 우리 학계에 계량경제학을 처음 제대로 도입해 가르친 인물이기도 하다. 회고록에는 황해도 황주의 선비 집안에서 태어난 그가 학자로서 살아 낸 우리 현대사의 장면들이 담겼다. 1960년 4·19혁명 당시 피 흘리는 학생 시위대의 모습을 보고 분노한 그는 4월 25일 교수단 시위에 참여했고, “학자로서 말과 글로 사회운동에 참여해야겠다”고 결심이 섰다고 했다. 이후 변 교수는 군사정권의 경제개발계획에 찬성하면서도, 여론을 수렴하지 않고, 성과가 독점되는 부작용을 지적했다. 1971년에도 박 대통령이 참석한 교수단 평가회에서 “실업률이 공식 통계보다 훨씬 심각하다”고 지적했다. 그는 “다른 참석자들은 거의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다”면서 “한국 경제의 현실과 민심의 동향이 박 대통령에게 제대로 보고되지 않고 있었던 것”이라고 회고했다. 서울대 교수협의회장으로 1980년 ‘서울의 봄’을 맞은 그는 민주화 성명 발표를 주도하면서 4년 동안 해직교수 생활을 했다. 그가 해직교수 시절 창립한 ‘학현연구실’은 오늘날 ‘서울사회경제연구소’로 발전했다. 이 연구실 출신 교수들이 ‘학현학파’로 불리지만 변 교수는 “동질적인 철학이나 이론으로 분류되지 않기에 학파라고 부르기는 어렵다”고 했다. 이른바 ‘학현학파’가 이론적 배경을 제공한 ‘소득주도성장’에 대한 직접 언급은 책에 없다. 변 교수는 “시장은 결함이 있기에 정부가 개입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필요하다”며 “경제학은 인간 중심의 학문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라고 책을 맺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훈민정음 해례본’ 등 국보 12건을 비롯해 간송미술관 소장 문화재 4000여 점을 보관하는 새 수장고의 밑그림이 드러났다. 문화재청 문화재위원회는 17일 회의를 통해 간송미술문화재단의 ‘훈민정음 보호각’ 건립 설계안을 가결했다. 보호각은 서울 성북구 간송미술관 정문 앞쪽 2146m²에 지상 1층, 지하 2층(연면적 1218m²)으로 2021년 6월 들어설 예정이다. 훈민정음 해례본을 포함한 국보·보물 32건, 시도지정문화재 4건, 비지정문화재 4000여 건 등을 보관할 예정이다. 비지정문화재(전적·典籍 2500건, 회화 949건 등)에도 보물급이 수두룩하다는 평가다. 우리나라 최초의 사립미술관인 간송미술관은 ‘민족 문화유산의 수호자’라는 칭송을 받는 간송 전형필(1906∼1962)이 수집하고 후손이 지켜온 문화재를 다수 소장하고 있다. 현재 미술관 건물은 간송이 1938년 ‘보화각’이라는 이름으로 지은 것이다. 시설 노후화로 현대식 수장고 마련이 시급하다는 의견이 나온 지 오래다. 현재 간송미술관 소장 문화재의 대부분은 2014년부터 기획전이 열리고 있는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에 임시로 보관돼 있다. ‘훈민정음 보호각’은 사립미술관 수장고임에도 이례적으로 국비와 지방비를 합쳐 44억여 원을 건립에 투입한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사찰 등 문화재 다량 소장처의 보존 관리 환경을 개선하는 사업의 일환으로 이 보호각 건립비를 지원한다”고 설명했다. 간송미술문화재단은 현재 미술관 건물은 옛 ‘보화각’ 모습을 살려 전시장 겸 교육관으로 사용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미술관은 2014년 간송미술문화재단을 출범했고 박물관법에 따른 정식 박물관 등록도 추진하고 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단일 저서에 지급되는 상금으로는 국내 최고 수준인 3000만 원 상금의 ‘한국학 저술상’(가칭)이 제정된다. 상은 ‘고서점계의 전설’ 고(故) 산기 이겸노 씨(1909∼2006·사진)의 유지를 이은 산기재단(이사장 이동악)이 후원해 만들어진다. 이 씨는 국내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서점이자 국학 자료의 보급기지 역할을 했던 서울 종로구 인사동 ‘통문관’의 창업주다. ‘월인석보’ ‘월인천강지곡’을 비롯해 국보급 보물급 고서와 고문헌을 찾아내 국립중앙도서관에 기증했고 직지심경과 계미자 갑인자 등 옛 활자를 판별한 연구가이기도 했다. ‘청구영언’ ‘훈민정음’ ‘동국정운’의 영인본을 발간했다. 산기재단은 이번 상에 상금과 수상 도서 구입비, 심사 운영비 등 5000만 원을 후원한다. 재단 측은 “평생 우리나라 고문헌의 보존과 연구 조력에 애쓰며 전통문화의 보전 및 확산에 노력한 선생의 뜻을 잇고자 상을 제정한다”고 밝혔다. 재단은 기존에도 고문서와 고서적에 관한 각종 연구를 지원하고 장학사업을 벌여 왔다. 광복 이후 우리말로 출판된 우수 한국학 관련 학술도서 1종을 시상하며 고문서와 전적류를 다룬 학술서를 우대할 방침이다. 심사위원 9명이 올해 말까지 심사해 2020년 1월에 첫 시상을 할 예정이다. 심사와 시상은 한국학중앙연구원(원장 안병욱)이 주관한다. 안 원장은 “지식문화의 핵심인 우수 학술도서를 시상해 한국학 연구자들의 출판 활동을 독려하고 학문 발전과 연구 분위기 조성에 기여하기 바란다”고 밝혔다. 산기재단과 한국학중앙연구원은 상 제정과 재단 보유 고문헌 관리, 연구 협력에 관한 협약식을 31일 연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죽음을 각오한 길이었다. 1909년 8월 30일 호머 헐버트 박사(1863∼1949)는 기차를 타고 압록강을 건넜다. 품속에 베를린에서 산 호신용 리볼버 권총이 있었지만 그 무게도 불안함을 덜어주지는 못했다. 미국의 아내에게는 이미 자신의 유고 시 재산 정리와 아이들의 양육을 당부하는 유서도 남겼다. ‘서울에 가서 남겨둔 집안일도, 책도 정리해야 한다….’ 무엇보다 박사는 서울이 그리웠다. 일제는 2년 전 ‘헤이그 특사’ 사건의 주모자로 박사를 지목했다. 박사는 고종의 밀명을 받고 특사증과 각국 원수에게 보내는 황제의 친서를 소지한 채 한국을 떠났다. 당시 박사의 일거수일투족은 서울의 통감부, 일본 외무성 등의 집중 감시 대상이었다. 미국에 가서는 일제의 침략을 알리는 여론전을 폈다. 스티븐스 저격 사건으로 반한 여론이 상당한 가운데 박사는 뉴욕타임스(NYT) 등을 통해 외롭게 한국을 옹호했다. 황후를 살해하고, 황제를 폐위한 일본이었다. 박사가 미국인이라고 해도 이번에 한국에 돌아오면 신변의 안전을 장담할 수 없었다. 박사의 한국 입국 뒤 NYT는 “박사가 암살 표적이 됐다”는 전언을 보도했다. 신간 ‘헐버트의 꿈 조선은 피어나리!’(김동진 지음·참좋은친구)를 통해 들여다본 박사의 삶 가운데 한 장면이다. 저자가 ‘파란 눈의 한국혼 헐버트’(2010년) 이후 10년 가까이 자료를 추적해 보완한 박사의 삶이 촘촘하게 담겼다. 유서도 박사의 외손녀로부터 입수한 것이다. “한국인은 세계에서 가장 빼어난 민족 중 하나다(Koreans are among the world’s most remarkable people).” 저자가 찾아낸 1949년 7월 미국 ‘스프링필드유니언’지에 실린 헐버트 박사의 인터뷰다. 찢어지게 가난한 작은 신생 독립국 국민을 평가하는 표현이었으니 ‘황당한 소리’ 정도로 받아들여졌을 수도 있다. 그러나 박사는 확신했다. “한국인은 가장 완벽한 문자인 한글을 발명했고, 임진왜란 때 거북선으로 일본군을 격파해 세계 해군사를 빛냈으며, (조선왕조실록같이) 철저한 기록 문화를 지니고 있다”며 사례를 거론했다. 무엇보다도 “3·1운동으로 보여준 한민족의 충성심(fealty)과 비폭력 만세 항쟁은 세계사에서 가장 아름다운 애국심의 본보기”라고 강조했다. 박사가 1905년 고종의 특사로 미국에 파견돼 을사늑약의 무효를 주장할 당시 고종과 박사가 눈물 어린 전보를 주고받았다고 보도한 NYT 1905년 12월 기사도 새로 찾아냈다. 고종은 “나 대한제국 황제는 … 조약이 무효임을 선언하노라. … 최상의 방책으로 미국과 이 조약의 종결을 이끌어내길 바라오. …”라는 전보를 박사에게 보냈다. 저자는 “황제가 늑약이 무효라고 선언한 실체적 증거가 이 전보”라고 했다. 부인 메이 헐버트가 일제의 침략을 고발한 인터뷰 기사도 책을 통해 공개했다. 메이 헐버트는 뉴욕트리뷴 1910년 5월 기사에서 “한국의 상류층은 일본 상류층에게 굴욕을 당하고, 한국 노동자들은 일본 노동자에게 좌우로 두들겨 맞으며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고 있다”고 증언했다. ‘헐버트의 꿈…’에는 목숨을 걸고 한국을 사랑한 박사의 삶이 드러난다. 독립운동가이자 외교관, 한글 전용의 선구자, 한국어학자, 역사학자, 언론인, 민권운동가 등 박사의 다양한 면모를 각종 기고문과 편지, 저서, 회고록을 통해 재조명했다. 박사가 출간한 최초의 한글 교과서 ‘사민필지’의 출간 시기가 1891년 1월이라고 확인하기도 했다. ▼김동진 헐버트박사기념사업회장 “헐버트의 삶은 한국사이자 한민족 자산”▼“호머 헐버트 박사의 삶은 한국사의 일부이고, 한민족의 자산입니다. ‘외국인의 부차적인 도움’ 정도로 치부할 대상이 아니에요.” ‘헐버트의 꿈 조선은 피어나리!’의 저자인 김동진 헐버트박사기념사업회장(69)은 25일 이렇게 강조했다. 기자가 “이름을 듣고 헐버트 박사의 업적을 떠올릴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지…”라고 말을 흐리자 나온 답이었다. JP모건체이스은행 한국회장을 지낸 김 회장은 대학 시절 헐버트 박사의 ‘대한제국의 종말’을 읽고 감동받아 그를 연구해 왔다. 지금도 박사의 자료를 찾으러 미국을 수시로 드나든다. 김 회장은 “고종의 밀사는 일제에 목숨을 내놓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며 “헐버트 박사는 나중에 일제에 의해 추방돼 미국으로 돌아간 뒤에도 전역을 돌며 수천 회 강연하고 언론에 기고하며 한국의 독립을 위해 싸우는 데 평생을 바친 분”이라고 강조했다. 친한파가 적었던 미국 지성사회에서 박사가 얼마나 외롭게 투쟁했는지, 김 회장도 최근에야 알게 됐다고 했다. 헐버트 박사는 별세 뒤인 1950년 건국훈장 태극장을 받았고, 태극장은 상훈체계가 바뀌면서 나중에 독립장으로 변경됐다. 독립장은 5등급의 건국훈장 가운데 대한민국장과 대통령장에 이어 세 번째다. 한국에 대한 박사의 공을 생각하면 서훈 등급을 올려야 한다는 게 김 회장의 의견이다. “1950년 서훈 당시 공적 조사를 못했을 겁니다. ‘일사부재리’라는 형식에 얽매일 것이 아니라 지금이라도 심사를 제대로 해야 해요.” 김 회장은 여전히 ‘사라진 고종의 비자금’을 추적하고 있다. “1908년 일본이 독일 은행에서 찾은 돈을 총리대신 이완용에게 주라고 부통감이 지시했다는 기록은 있는데, 실제 줬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이완용에게 줬다면 고종이 과연 몰랐을까요?” 실제 고종은 1909년 내탕금(임금의 개인 재산)을 찾아달라는 부탁과 함께 관련 서류를 헐버트 박사에게 줬다. 박사는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 이 서류들을 1948년 우리 정부에 전달했다. 김 회장은 “내탕금을 찾는 건 박사의 한을 푸는 일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박사를 두고 ‘지덕체를 갖춘 전인격의 표상’이라고 평가한 한 교육학자의 표현에 동의합니다. 박사는 삶의 폭이 참으로 넓고 깊어서 오히려 조명이 잘 안된 면이 있다고 봐요. 이번 책은 영어와 일본어로 번역 출판해 박사와 한국사의 진짜 모습을 해외에도 알릴 생각입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아침 하늘 환하기 전에 깨어나니/…/모든 사랑은 살아 있으라”(시 ‘아침에 부쳐’에서) 올해 노벨문학상 수상자의 2007년 발간 시집. 작가가 1960∼1986년 쓴 것들 가운데서 골라 배치했다. 저자는 언어극 ‘관객모독’(1966년) ‘카스파’(1967년)에서 했던 전위적 실험을 시에서 이어갔다. 시인은 일상을 다른 눈으로 새롭게 보는 방식을 제안한다. “잠들 때 내가 깨어난다:/내가 대상을 보는 게 아니라 대상이 나를 본다;/…/내가 말을 하는 게 아니라 말이 나를 발음한다;/창문으로 가면 내가 열린다”(시 ‘전도된 세계’에서) 역자는 “언어를 분해하고 관찰하며 실험하는 동안 현실세계 전체에 의문부호를 붙이는 전위시의 면모가 드러난다”고 설명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일본의 현행 중학 역사교과서가 한국에 대한 식민지배 피해 배상이 종료된 것처럼 서술했다는 연구가 나왔다. 한국의 경제 발전이 일본의 원조 덕분이라고 오해될 만한 구절도 존재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최보영 동국대 역사교과서연구소 연구원은 최근 일본 중학 역사교과서 2종을 분석한 결과를 26일 전국역사학대회에서 발표할 예정이다. 이에 따르면 학교 채택률이 절반을 넘는 ‘도쿄서적’ 교과서는 일제가 침략한 동남아시아 국가들에 대한 배상 문제를 언급하면서 “1950년대 말까지 대부분 해결됐다”고 한 뒤 “한국과는 1965년에 한일 기본조약을 맺고 한국 정부를 조선반도의 유일한 정부로 승인했다”고 서술했다. 최 연구원은 “서술의 맥락상 한국에 대한 배상이 모두 끝난 것처럼 쓰여 있다”고 밝혔다. 우익 성향으로 분류되는 이쿠호샤(育鵬社) 교과서는 ‘우리나라는 동남아시아 여러 나라와 국교를 맺고 중국, 한국을 포함한 아시아 여러 나라에 다액의 경제원조(ODA)를 실시했다. 그 후 한국이나 싱가포르 등은 신흥공업국(NIES)으로 발전했다’고 기술했다. 최 연구원은 “배상 문제에 대한 내용은 찾아볼 수 없고, 마치 일본의 경제 원조를 통해 한국이 발전한 것처럼 서술하고 있다”고 지적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한성백제의 왕실 묘역인 서울 석촌동 고분군에서 화장(火葬)을 한 사람 뼈 4.3kg이 수습됐다. 백제 고분에서 화장한 인골(人骨)이 다량 발견된 건 이번이 처음으로, 한성백제 왕실의 장례 문화를 보여줘 주목된다. 한성백제박물관은 “고분군 남쪽 1호분 주변 발굴 결과 새로 발견된 적석묘(積石墓·돌무지무덤)의 매장의례부(시신을 묻고 장례를 치른 시설) 3곳에서 인골이 출토됐다”며 “한 지점에서만 인체의 같은 부위 뼈가 2개 이상 발견돼 여러 사람의 뼈로 보인다”고 23일 밝혔다. 인골은 토기를 비롯한 제사 유물과 함께 고운 점토로 덮여 있었으며 화장 뒤 잘게 분골한 것으로 분석됐다. 마치 뿌려지듯 흩어진 상태로 출토됐다. 특히 1호분과 북쪽 2호분 사이에서 남북방향 약 100m, 동서 약 40m 공간에 네모 모양의 적석묘 16기가 사방으로 빈틈없이 붙어있는 초대형 ‘연접식 적석총’이 백제 고분에서는 처음 발견됐다. 적석묘의 가장자리 한 축에 잇대어 바로 돌을 덧붙여 쌓아나가며 무덤이 확장되는 형태로 1호분과 이어져 있다. 박물관은 “1호분이 단독 무덤이 아니라 연접식 적석총의 일부일 가능성이 있다”고 밝혔다. 금귀걸이, 유리구슬, 중국제 청자, 토기, 기와 등 총 5000여 점의 유물도 함께 출토됐다. 박물관 부설 백제학연구소의 최진석 학예연구사는 “4세기 후반경 여러 대에 걸쳐 무덤을 축조한 것으로 보인다”며 “추가 발굴에 따라 연접한 적석묘가 계속 드러날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연접식 적석총은 중국 지안시의 일부 고구려 적석총에서 길게 이어진 형태로 확인되기도 한다. 석촌동 고분군은 1970년대부터 본격 발굴조사가 이뤄진 백제의 왕릉급 고분군으로 현재 적석총 5기와 흙무덤 1기 등 총 6기가 복원돼 있다. 3호분은 한 변의 길이가 50m에 이르는 대형으로 백제의 전성기를 이룬 근초고왕릉으로 보기도 한다. 1917년도에 제작된 고분분포도에 따르면 석촌동과 송파동, 방이동 일대에 300여 기의 대형 고분이 있었지만 전쟁과 개발로 대부분 훼손, 멸실됐다. 그러나 아직 지하에 무덤 일부가 남아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박물관은 설명했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구글 창에 ‘민족’을 넣으면 약 4110만 개의 각종 자료가 검색된다. 그러나 한국인들이 이 낱말을 널리 사용한 건 100년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1919년 3·1운동이 ‘민족’이라는 단어를 대중에 전파했고, 사회 각계각층의 근대적 단체 결성을 촉발했다는 연구가 나왔다. 박찬승 한양대 사학과 교수는 ‘지체된 근대로의 전환, 1919년’이라는 논문에서 “‘민족’이라는 낱말이 확산한 건 3·1독립선언서와 이후 발간한 한국어 신문 등 매체를 통해서였다”고 밝혔다. 박 교수의 논문에 따르면 한국에서 ‘民族(민족)’이 처음 사용된 건 1900년 황성신문이고, 1904년경부터 지금과 같은 의미로 사용됐다. 그러나 민족은 비교적 낯선 말이었고, 대신 ‘동포’가 많이 쓰였다. 1907년 국채보상운동 당시 ‘국채보상기성회취지서’도 “우리 동포에게 포고한다”(대한매일신보)고 했다. 국권 피탈 이후 ‘민족’ 개념의 확산에 일대 전기가 된 건 3·1운동이었다. 3·1독립선언서에서 ‘민족’은 14회 등장해 가장 많이 사용한 명사다. 33인은 ‘민족대표’를 자임했다. 각종 지하신문과 전단에서도 ‘민족’은 빈번히 등장한다. 1920년 동아일보, 조선일보와 잡지 ‘개벽’ 등이 창간한 것도 ‘민족’이라는 용어의 확산에 크게 기여했다고 박 교수는 밝혔다. 동아일보는 지령 100호부터 3대 사시(社是) 가운데 하나로 ‘조선 민족의 의사를 표현함’을 내세웠다. 1920년 4월 6일 사설은 “민족은 역사적 산물”이며, “생명을 가진 실체”라고 설명했다. 박 교수는 “대중은 독립선언서에 나오는 ‘민족’, ‘민족 자결’의 개념에 입각해 만세를 부르며 스스로 조선민족의 일원이라고 인식하게 됐다”면서 “민족의식은 민족 내부의 평등을 전제로 한 것이기에 근대적 성격을 갖게 됐다”고 밝혔다. 3·1운동은 ‘단체’의 확산도 불렀다. 1905년 을사늑약 뒤 여러 정치단체와 교육계몽단체가 등장했지만, 국권 피탈 이후 강제 해산돼 비밀결사로 이어졌다. 3·1운동 이후 전국 각지에서 수많은 단체가 만들어졌다. 1922년 ‘조선치안상황’ 자료에 따르면 청년, 종교, 산업, 교육, 노동 단체와 소작인회 등 각종 사회단체 수가 1920년 579개에서 1922년 1525개로 늘었다. 동아일보가 각종 단체, 특히 청년회 조직을 독려한 것도 효과를 냈다. 박 교수는 “대중 계몽이나 공공 이익을 목표로 한 단체들은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근대적 성격을 띠었다”고 밝혔다. 박 교수는 이 논문을 역사학계 최대 연례행사인 제62회 전국역사학대회 ‘현대의 탄생’에서 발표할 예정이다. 이 대회는 25, 26일 서울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과 성북구 고려대에서 열린다. 박종린 대회 조직위원장(한남대 교수)은 “민족주의, 반제국주의, 민주주의, 공화정의 확산을 비롯해 ‘현대’의 역사적 의미를 고찰하는 대회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피할 수 없다면 누군가에게 대신하게 하라.’ 껄끄러움, 민망함, 미안함, 귀찮음…. 이 같은 감정을 ‘스킵(Skip)’할 수는 없을까. 불편한 감정을 감내하는 대신에 돈을 지불하고 이를 타인에게 맡기는 이들이 늘고 있다. 감정 대행을 주문받은 업체들은 퇴사 등 전문 절차부터 이별, 사과, 역할 대행 등 업무를 세분하며 생활 깊숙이 파고들고 있다. 대면 접촉과 감정 소모에 피로감을 느끼는 세태가 반영됐다는 분석이 나온다.○ 퇴사 대행 평균 10만∼20만 원에 해결 “껄끄러운 퇴사, 다 맡기세요” “쓰던 노트북 퀵으로 보내요.” 한 중소기업에 근무하는 김모 씨(40)는 최근 택배 한 건을 전달받았다. 퇴사한 후배 A 씨가 보낸 노트북과 사무기기였다. “직장 분위기가 맞지 않는다”던 A 씨는 사직서 발송부터 퇴직금, 실업급여 정산 등을 대행업체를 통해 진행하고 있다. 김 씨는 “처음엔 사무실이 술렁일 정도로 모두 당황했지만 나름의 고민이 많았을 A 씨 심정도 이해가 간다”고 했다. 최근 늘고 있는 퇴사 대행 절차는 대략 이렇다. 희망퇴직일을 정하면 퇴사플래너와의 상담을 거쳐 사직서 등 문서를 작성한다. 대행업체는 고객 대신 사직 의사를 전달하고 사직서와 반납할 물품을 발송한다. 사직서가 수리되면 퇴직금 정산, 근로소득원천징수영수증 등 서류를 전달받는다. 추가 요청에 따라 사무실 짐을 대신 빼는 경우도 있다. 한 퇴사 대행 서비스 이용자는 “상사의 폭언과 과도한 업무 지시로 사직서를 냈지만 수리조차 안 됐다. 서비스를 이용해 회사를 찾거나 인사팀과 얼굴을 맞대지 않아도 잘 조율됐다”고 했다. 다른 이용자는 “회사 입장만 강요해 퇴사일도 정하기 어려웠다. 서비스 이용 후 번거로운 일이 사라져 이직에만 전념할 수 있었다”고 털어놨다. 가격은 보통 10만∼20만 원 선이다. 회사 관계자와의 대면 접촉 같은 추가 대행 업무가 필요하면 50만 원까지 오르기도 한다. 한 퇴사플래너는 “회사 규모, 긴급성, 근로 형태에 따라 비용 차이가 나며 2030세대와 여성 직장인 이용비율이 높다”고 설명했다. 흰 봉투에 사직서를 넣어 직접 전달하는 기존 사표 제출 공식도 변화하고 있다. 사직서 발송만을 대행하는 ‘립(Leave) 서비스’ ‘출근길 사직서’ 같은 애플리케이션(앱)에서는 양식에 맞게 부서, 이름, 사유만 기입하면 PDF파일 사직서가 e메일로 발송된다. 제출 예정일도 설정할 수 있다. ‘깔끔하고 아름다운 마무리’를 표방하며 ‘입사와 동시에 사표를 작성한다’는 그 나름의 규칙도 적혀 있다.○ 내밀한 영역까지 침투, 이별·사과·질투심 유발도 대행 “택배 보내듯 감정도 대신 전달” 이별, 사과, 질투심 유발 등을 대행하는 서비스도 인기 있다. 이 업무만을 전문적으로 수행하는 업체는 따로 없으나, 주로 역할 대행 업체들이 맡는다. 과거 애인·하객 대행 등을 주로 수행했다면 최근 이별, 사과 통보 등 좀 더 감정적인 영역의 일을 대행하는 게 특징이다. 의뢰인 대신 유선으로 이별을 통보하기도 하지만 업체 직원들이 상대를 만나 부모, 친인척 역할을 하며 정중히 의사를 전달하는 경우가 많다. 연인의 과도한 집착, 안전한 이별, 집안 반대 등이 주된 서비스 이용 사유다. 가격은 보통 10만∼30만 원대. 요구 사항에 따라 수백만 원까지 높아지기도 한다. 역할대행119 대표는 “대학생, 여성 이용객이 많다. 시기적으로 크리스마스, 밸런타인데이, 화이트데이를 앞두고 깔끔한 이별을 원하는 일이 많은데, 대면 접촉을 꺼리고 이별 과정에서 상대 반응이 두려운 이들이 저희를 찾는다”고 했다. 사과 대행의 경우 과실 때문에 ‘진상’ 손님을 상대하기 힘들어 서비스를 이용하는 고객이 많다. 또 돈을 제때 갚지 못할 때 공손하고 정중하게 갚지 못하는 불가피한 이유와 사과를 전해 달라고 의뢰하는 경우도 있다. 역할극을 통해 연인 사이에서 질투심을 유발해 달라는 요청도 꽤 들어온다. 전문가들은 대면 접촉이 점점 사라지는 사회에서 대행 서비스가 늘어날 것으로 내다봤다. 서이종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는 “인간관계를 맺고 끊는 능력이 떨어진 현대인이 정신적 압박감, 상처로부터 탈피하고픈 심리가 반영된 현상이다. 서비스는 향후 확대될 가능성이 높다”고 봤다. 이명진 고려대 사회학과 교수는 “누군가와 마주하는 것 자체를 불편해하고 감정 전달에 서툰 사회다. 어렸을 때부터 부모가 정해주는 과외, 학원에 맞춰 살아온 젊은층은 앞으로도 대리인을 내세운 서비스를 쉽게 이용할 것”이라고 했다.김기윤 pep@donga.com·조종엽 기자}

‘피할 수 없다면 누군가에게 대신하게 하라.’ 껄끄러움, 민망함, 미안함, 귀찮음…. 이 같은 감정을 ‘스킵’(Skip) 할 수는 없을까. 불편한 감정을 감내하는 대신 돈을 지불하고 이를 타인에게 맡기는 이들이 늘고 있다. 감정 대행을 주문받은 업체들은 퇴사 등 전문절차부터 이별, 사과, 역할대행 등 업무를 세분화하며 생활 깊숙이 파고들고 있다. 대면 접촉과 감정소모에 피로감을 느끼는 세태가 반영됐다는 분석이 나온다.●퇴사 대행 평균 10~20만 원에 해결 “껄끄러운 퇴사, 다 맡기세요.” “쓰던 노트북 퀵으로 보내요.” 한 중소기업에 근무하는 김모(40) 씨는 최근 택배 한 건을 전달받았다. 퇴사한 후배 A 씨가 보낸 노트북과 사무기기였다. “직장 분위기가 맞지 않는다”던 A 씨는 사직서 발송부터 퇴직금, 실업급여 정산 등을 대행업체를 통해 진행 중이다. 황 씨는 “처음엔 사무실이 술렁일 정도로 모두 당황했지만 나름 고민이 많았을 A 씨 심정도 이해가 간다”고 했다. 최근 늘고 있는 퇴사대행의 절차는 대략 이렇다. 희망퇴직일을 정하면 퇴사플래너와 상담을 거쳐 사직서 등 문서를 작성한다. 대행업체는 고객 대신 사직의사를 전달하고 사직서와 반납할 물품을 발송한다. 사직서가 수리되면 퇴직금 정산, 근로소득원천징수 등 서류를 전달 받는다. 추가요청에 따라 사무실 짐을 대신 빼는 경우도 있다. 한 퇴사대행 서비스 이용자는 “상사 폭언과 과도한 업무지시로 사직서를 냈지만 수리조차 안됐다. 서비스를 이용해 회사를 찾거나 인사팀과 얼굴을 맞대지 않아도 잘 조율됐다”고 했다. 다른 이용자는 “회사 입장만을 강요해 퇴사일도 정하기 어려웠다. 서비스 이용 후 번거로운 일이 사라져 이직에만 전념할 수 있었다”고 털어놨다. 가격은 보통 10만~20만 원선이다. 회사 관계자와의 대면접촉 같은 추가 대행 업무가 필요하면 50만 원까지 오르기도 한다. 한 퇴사플래너는 “회사규모, 긴급성, 근로형태에 따라 비용 차이가 나며, 2030세대와 여성 직장인 이용비율이 높다”고 설명했다. 흰 봉투에 사직서를 넣어 직접 전달하는 기존 사표 제출공식도 변화 중이다. 사직서 발송만을 대행하는 ‘립(Leave) 서비스’ ‘출근길 사직서’ 같은 애플리케이션(앱)에서는 양식에 맞게 부서, 이름, 사유만 기입하면 PDF파일 사직서가 e메일로 발송된다. 제출 예정일도 설정할 수 있다. “깔끔하고 아름다운 마무리”를 표방하며 “입사와 동시에 사표를 작성한다”는 나름의 규칙도 적혀있다. ● 내밀한 영역까지 침투, 이별·사과·질투심 유발도 대행 “택배 보내듯 감정도 대신 전달” 이별, 사과, 질투심 유발 등을 대행하는 서비스도 인기다. 이 업무만을 전문 수행하는 업체는 따로 없으나, 주로 역할대행 업체들이 맡는다. 과거 애인·하객 대행 등을 주로 수행했다면 최근 이별, 사과 통보 등 보다 감정적 영역의 일을 대행하는 게 특징이다. 의뢰인 대신 유선상으로 이별을 통보하기도 하지만 업체 직원들이 상대를 만나 부모, 친인척 역할을 하며 정중히 의사를 전달하는 경우가 많다. 연인의 과도한 집착, 안전한 이별, 집안 반대 등이 주된 서비스 이용 사유다. 가격은 보통 10만~30만 원대. 요구사항에 따라 수백만 원까지 높아지기도 한다. 역할대행119 대표는 “대학생, 여성 이용객이 많다. 시기적으로 크리스마스, 발렌타인데이, 화이트데이를 앞두고 깔끔한 이별을 원하는 일이 많은데, 대면접촉을 꺼리고 이별과정에서 상대 반응이 두려운 이들이 저희를 찾는다”고 했다. 사과대행의 경우 과실 때문에 ‘진상’ 손님을 상대하기 힘들어 느껴 서비스를 이용하는 고객이 많다. 또 돈을 제때 갚지 못할 때 공손하고 정중하게 갚지 못하는 불가피한 이유와 사과를 전해달라고 의뢰하는 경우도 있다. 역할극을 통해 연인 사이에서 질투심을 유발해달라는 요청도 꽤 들어온다. 전문가들은 대면접촉이 점점 사라지고 있는 사회에서 대행 서비스가 늘어날 것으로 내다봤다. 서이종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는 “인간관계를 맺고 끊는 능력이 떨어진 현대인이 정신적 압박감, 상처로부터 탈피하고픈 심리가 반영된 현상이다. 서비스는 향후 확대될 가능성이 높다”고 봤다. 이명진 고려대 사회학과 교수는 “누군가와 마주하는 것 자체를 불편해하고 감정전달에 서툰 사회다. 어렸을 때부터 부모가 정해주는 과외, 학원에 맞춰 살아온 젊은층은 앞으로도 대리인을 내세운 서비스를 쉽게 이용할 것”이라고 했다. 김기윤 기자 pep@donga.com조종엽 기자 jjj@donga.com}

말레이반도 서북부의 작은 섬인 말레이시아 페낭은 ‘동양의 진주’로 불렸다. 페낭은 말라카 해협 북부의 중심으로 1786년 영국에 점령당한 뒤 동서 바닷길 교역의 거점이 됐다. 아편 무역은 동남아시아에서 영국의 핵심 사업이었고, 페낭은 그 길목에 있었다. 깡통에 쓰이는 주석과 타이어의 재료인 고무의 수요가 증가하면서 페낭은 또다시 격변한다. 책은 18세기 후반부터 1930년대까지 페낭의 중국계 이민자 사회를 살폈다. 지역사회의 주역인 중국계 이민자들은 ‘현지에서 태어난 자’라는 뜻인 ‘페라나칸’으로 불린다. 중국미술사를 전공한 저자가 페라나칸의 다층적 면모를 역사적으로 조명했다. 부제 ‘동남아의 근대와 페낭 화교사회’.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이러한 유의 비평이라는 것이 우리나라의 문학에 과연 어느 정도로 유용할 것인가.”(강신재 소설가·1924∼2001) 1959년 5월 26, 27일 동아일보 지면을 통해 한 소설가가 비평을 향해 직격탄을 날렸다. 사수(射手)는 등단 10년이 된 여성 소설가 강신재 씨. 앞서 백철 평론가(1908∼1985)가 자신의 신작 ‘절벽’을 혹평하자 이를 하나하나 반박한 것이다. 강 씨는 “나는 (백)씨의 두뇌 구조나 센스에 대해서 생각해 볼 뿐”이라는 신랄한 표현과 함께 ‘평론가의 예술적 감각―백철 씨의 평을 박(駁)한다’는 글을 2회에 걸쳐 실었다. 백 평론가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백철은 평론 경력이 30년에 가까웠고, 당시 문단의 몇 안 되는 전업 평론가이기도 했다. 나이도 강 씨보다 열여섯 살이 많았다. 백 평론가는 ‘문장과 이미지의 간격―강신재 씨에게 답함’이라는 재반박 글을 2회에 걸쳐 기고하면서 “아직 습작기도 넘어서지 못한 젊은 작가들이 함부로 할 수 있는 망언이 아닌 것 같다”고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연남경 이화여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는 최근 이 논쟁에 주목했다. 연 교수는 26일 발표 예정인 글 ‘현대비평의 수립, 혹은 통설의 탄생’에서 “거의 기억되지 않은 이 짧은 논쟁은 현대비평이 수립되고 현대문학의 밑그림을 그리는 과정에서 핵심적인 문제제기가 잠시 이뤄진 순간”이라고 봤다. “신인 여성 작가가 기성 남자 비평가의 위력에 항변하며 현대문학의 수립 방향에 이견을 냈다”는 것이다. 백 평론가는 ‘절벽’이 여인의 신변 이야기이기에 작품의 질이 빈약하며, 문장의 수사가 혼란스럽다고 비평했다. 연 교수에 따르면 이런 관점은 당대 문단이 여성 신인을 바라보는 통상의 시선이었다. 1950년대 비평뿐 아니라 1960년대 문단을 휘어잡은 ‘4·19세대’의 비평도 마찬가지였다. ‘현실 참여’라는 주류 지식인 남성들의 이념을 공유하지 않았던 강 씨의 소설은 ‘지성의 결여’로 치부됐다. 연 교수는 “엘리트 남성이 주도한 비평 담론은 여성 작가의 작품을 ‘산문정신의 실패’나 ‘현실인식의 부족’으로 규정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강 씨는 자신의 글에서 “소설에는 그 소설 자체의 분위기와 흐름이 있다. … 이것은 소설이 지닌 이념, 혹은 사회성이라는 것과 동등하게 중요한 것”이라고 반박했다. 작품과 무관하게 이념이나 사회성을 엉뚱하게 요구하는 데 반기를 든 것이다. 강 씨는 화제를 불러일으킨 1962년 작품 ‘젊은 느티나무’를 비롯해 수많은 소설을 오래도록 썼다. 1990년대 들어서는 “남성 작가들의 비현실적 서정성과 다른, 현실에 더욱 민감하게 반응하기 위한 서사적 서정성”을 갖고 있다는 평가를 받았다.연 교수의 발표문은 이화여대 한국문화연구원이 개원 60주년을 기념해 26일 서울 서대문구 이화여대에서 여는 ‘한국 근현대 학문의 성립과 통설의 탄생’ 학술대회에서 공개한다. 학술대회에서는 이 밖에도 ‘한국 근현대 역사학의 방법론적 기원’(도면회 대전대 교수) 등 4편을 발표한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말을 탄 주인공이 개로 보이는 동물을 데리고 어디론가 가고 있다. 활을 든 이들은 사슴 등 여러 동물을 향해 시위를 당기려 한다. 또 다른 인물들은 춤을 추는 듯 기마행렬을 따른다. 1500년 전 무덤 주인공의 생전 활동 모습을 그린 것일까, 저승에서의 영화(榮華)를 기원한 그림일까. 경북 경주시 황오동 쪽샘지구 44호 무덤에서 이런 행렬도를 새긴 5세기 장경호(長頸壺·목이 긴 토기 항아리)가 출토됐다. 이종훈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장은 “행렬이라는 큰 주제를 바탕으로 기마, 무용, 수렵하는 이들이 복합적으로 그려진 토기가 발견된 건 처음”이라며 “내용의 구성이 풍부하고 회화성이 우수한 귀중 자료”라고 16일 밝혔다. 행렬도가 새겨진 토기는 무덤 둘레의 호석(護石) 북쪽 자갈을 깐 층에서 깨진 상태로 일부 조각이 나왔다. 문양은 크게 4단으로 위쪽 1, 2단과 제일 밑단에는 기하학적 문양을 반복했고 3단에 인물과 사슴 멧돼지 말 개 등 동물을 표현했다. 문양과 그림은 빗처럼 생긴 도구로 쓸듯이 새겼다. 제사용 토기로 보이며 원래 높이는 약 40cm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행렬도의 주제가 무용총 수렵도와 무용도, 안악 3호분 행렬도를 비롯한 고구려 고분벽화와 유사해 주목된다. 말의 머리 부분 갈기를 묶어 뿔처럼 묘사한 점은 안악 3호분 행렬도와 유사하다. 인물들이 팔을 나란히 든 모습은 무용도와 닮은 점이 있다. 이 연장선상에서 행렬의 주인공과 함께 있는 개는 고구려 벽화처럼 무덤을 지키는 역할을 맡은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이번 토기는 신라가 5세기 초 관계가 밀접했던 고구려의 문화적 영향을 받은 증거로 해석된다. 5세기 전 시대에 풍경화에 가까운 행렬도가 그려진 신라 토기는 없었다. 전호태 울산대 역사문화학과 교수는 “그러나 고구려와 중국의 장례 관련 그림에서는 사냥과 행렬이 흔한 테마”라며 “토기에 드러난 회화적 요소는 서기 400년 이후 신라가 고구려 전성기의 문화로부터 압도적인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쪽샘지구 44호 무덤에서는 말 문양이 그려진 발형기대(鉢形器臺·굽다리접시를 확대한 모양의 그릇 받침대) 조각도 출토됐다. 말갈기, 발굽, 관절 등 말 2마리의 모습이 묘사됐다. 몸통의 격자무늬는 말 갑옷을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이 밖에 호석 주변에서 대호(大壺·큰항아리) 9점을 비롯한 제사 유물 110여 점이 출토됐다. 대호는 호석을 따라 일정 간격으로 배치됐고, 그 안팎에서 굽다리접시(高杯·고배), 뚜껑 접시(蓋杯·개배), 흙 방울(土鈴·토령) 등 소형 토기들을 발견했다. 쪽샘지구 44호 무덤은 지름 약 30m의 중간 크기 적석목곽묘(積石木槨墓·돌무지덧널무덤)다. 2014년 발굴을 시작했다. 연구소는 내년까지 돌을 쌓아놓은 적석부를 건축적, 구조공학적 관점에서 정밀 조사하고 시신과 부장품을 두는 매장 주체부를 발굴할 방침이다. 쪽샘지구에는 4∼6세기 신라 왕족과 귀족의 무덤 1100여 기가 몰려 있다.경주=조종엽 기자 jjj@donga.com}

2009년 서울 은평구 진관사 칠성각에서 발견된 ‘진관사 태극기’가 등록문화재 지정 이후 처음 전시된다. 동국대 박물관(관장 최응천)은 3·1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기념해 근대 불교계 인사들의 유물 98점을 선보이는 특별전 ‘근대 불교의 수호자들’을 15일부터 12월 13일까지 서울 중구 박물관에서 개최한다. 진관사 태극기는 1919년 진관사 승려이자 독립운동가인 백초월 선생(1878∼1944)이 사용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건물을 수리하기 위해 벽체를 뜯다가 불단과 기둥 사이에서 3·1운동 당시 항일 지하신문과 함께 발견됐다. 안중근 의사 유묵 ‘一日不讀書 口中生荊棘(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입안에 가시가 돋친다)’와 만해 한용운의 친필, 염주도 공개한다. 이 밖에도 민족대표이자 한용운의 사형인 백용성 관련 유물, 임정에서 활동했던 프랑스 유학승 김법린의 유품 등을 선보인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有約江湖晩(유약강호만) 강호에서 만나기로 약속한 지 오래되지만/紅塵已十年(홍진이십년) 어지러운 세상에서 지낸 것이 벌써 10년이네/白鷗如有意(백구여유의) 갈매기는 그 뜻을 잊지 않은 듯/故故近樓前(고고근루전) 기웃기웃 누각 앞으로 다가오는구나” 임진왜란 발발 13년이 지난 1605년. 승병장으로 활약한 사명대사(법명 유정·惟政·1544∼1610)가 강화와 포로 송환 협상을 위해 종전 뒤 일본에 갔을 때 남긴 한시다. 일본의 사찰이 보관하던 사명대사의 유묵 5점이 약 400년 만에 한국에서 처음으로 공개된다. 국립중앙박물관은 BTN불교TV와 공동 기획해 ‘일본 교토 고쇼지(興聖寺) 소장 사명대사 유묵’을 15일부터 11월 17일까지 서울 용산구 박물관 상설전시실에서 특별 공개한다. 불교TV가 지난해 사명대사 다큐멘터리 촬영차 일본 취재 중에 그 존재를 파악한 유묵들이다. 사명대사는 전란 뒤 조일 양국의 평화를 이끌어내기 위해 노력한 외교가였다. 1604년 선조의 명을 받고 일본으로 건너간 그는 이듬해 교토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담판을 지어 강화를 맺고, 조선인 포로 3000여 명을 데리고 귀국했다. 그가 도술로 일본인의 기세를 꺾었다는 야담이 다수 전해지지만 이번 유묵은 실제 활동 흔적으로 주목된다. 사명대사는 초서에 빼어난 서예가이기도 했다. 유묵 ‘有約江湖晩(유약강호만)…’에서도 그런 면모가 뚜렷이 드러난다. 사진으로 이 유묵을 본 서예가 김병기 전북대 교수는 “필법 면에서도 그 어떤 서예가 못지않고, 서품의 격조 면에서도 고도의 문인정신이 드러나는 작품”이라고 말했다. 한시에는 전란 속에서도 구도자(求道者)로서의 본분을 잊지 않은 그의 내면이 드러난다. 사명대사는 선조가 승려의 신분을 버리고 퇴속(退俗)할 것을 권했지만 거절했다. 유새롬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사는 “옛 글에서 갈매기는 은둔을 비유하는 표현으로 종종 쓰였다”며 “일본에서의 임무를 잘 마무리한 뒤 속세를 정리하고 선승(禪僧)의 본분으로 돌아가겠다는 의지가 드러난다”고 설명했다. “畵角聲中朝暮浪(화각성중조모랑) 나팔 소리 들리고 아침저녁으로 물결 일렁이는데/靑山影裏古今人(청산영리고금인) 청산의 그림자 속을 지나간 이 예나 지금 몇이나 될까” 신라 말 문장가 최치원(857∼?)의 시 ‘윤주 자화사 상방에 올라’ 가운데 두 구절을 적은 사명대사의 유묵 내용이다. 고쇼지의 분위기가 탈속적이라는 뜻을 담아 시구를 남긴 것으로 보인다. 이 밖에도 사명대사가 고쇼지를 창건한 엔니 료젠(円耳了然·1559∼1619)에게 ‘虛應(허응)’이라는 도호(道號)를 지어 주며 써준 글씨와 편지, 고쇼지에 소장된 중국 남송의 승려 대혜종고(大慧宗杲)·1089∼1163)의 전서(篆書)를 보고 감상을 적은 글이 사명대사의 진영(동국대 박물관 소장)과 함께 전시된다. 엔니가 선종의 기본 개념과 임제종의 가르침에 대한 이해를 10개의 질문과 답변으로 정리한 글 ‘자순불법록(諮詢佛法錄)’도 있다. 엔니는 자신이 이해한 내용이 옳은지 사명대사에게 이 글을 보이고 가르침을 받았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인촌 김성수(仁村 金性洙) 선생의 유지를 기리기 위해 제정된 제33회 인촌상 시상식이 11일 서울 중구 롯데호텔 크리스털볼룸에서 열렸다. 이 상은 암울한 일제강점기에 동아일보를 창간하고 경성방직과 고려대를 설립한 민족 지도자 인촌 선생의 뜻을 잇기 위해 1987년 제정됐다. 재단법인 인촌기념회(이사장 이용훈)와 동아일보사는 매년 인촌 선생의 탄생일(10월 11일)에 맞춰 시상식을 열고 있다. 이날 수상자인 △이돈희 서울대 명예교수(교육) △한강 소설가(언론·문화) △김호동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인문·사회) △박병욱 서울대 통계학과 교수(과학·기술)는 각각 상장과 기념메달, 상금 1억 원을 받았다. ▶수상자 공적은 9월 5일자 A8면 참조 이용훈 이사장은 인사말에서 “‘3·1운동의 책원지’였던 중앙학교의 교주 인촌 선생은 동료들에게 ‘성실, 정려, 근면’을 당부했다”며 “어려움을 무릅쓰고 남다른 열정과 신념으로 업적을 쌓으며 사회에 보탬이 된 수상자 네 분이 더욱 역량을 발휘하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한민구 한국과학기술한림원 원장은 축사에서 “수상자들은 인촌 선생이 평생을 추구한 애국애족 정신과 민족자강에 부합하는 존경받는 분들”이라며 “국제적으로도 큰 업적을 남기기를 기원한다”고 말했다. 안병영 인촌상운영위원회 위원장이 수상자 선정 경위를 보고했다. 앞서 인촌상운영위는 외부 심사위원 15명을 위촉하고, 7월부터 회의를 열어 최종 후보를 선정한 뒤 수상자를 확정했다. 국내 대표적 교육철학자이자 현장까지 아우른 학자로 꼽히는 이돈희 서울대 명예교수(82)는 “민족의 역량을 키우고자 여러 학교를 세운 인촌 선생의 위업을 기리는 상을 받을 만한지 스스로 돌이켜보니 마음이 편치 않다”며 “적지 않은 나이지만 오늘 수상을 계기로 교육철학 공부를 더 열심히 하겠다”고 밝혔다. 작품을 통해 역사와 폭력성을 비롯한 인간 근원의 문제를 성찰해 온 한강 소설가는 최근 ‘책을 계속 써 달라’는 독자 편지를 받았다고 했다. 한 소설가는 “자전거를 배울 때 균형을 잡고 달리는 것만 알게 되면 방향은 자연스럽게 틀 수 있었던 경험이 떠올랐다”며 “자전거처럼 마음이 기우는 대로 삶이 흘러가기를 바라며 10년 이상, 허락된다면 그보다 더 오래 글을 쓸 수 있다면 좋겠다”고 말했다. 국내 중앙유라시아사 연구의 선구자이자 몽골제국사 연구로 세계적 주목을 받은 김호동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64)는 “은사인 고 민두기 교수께서는 추상같은 엄격함으로 제자들을 이끌어주셨고, 아내는 아름다운 청춘의 나날을 저를 위해 희생했다. 이처럼 큰 상을 받기까지 많은 도움을 주신 모든 분들에게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한국의 대표적 통계학자 가운데 한 명인 박병욱 서울대 통계학과 교수(58)는 “데이터과학 시대는 통계학이 또 다른 차원으로 성장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며 “오늘 수상은 통계학을 한층 발전시키라는 격려의 뜻이라고 생각하며, 학자로서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이날 시상식에는 각계 인사 약 300명이 참석했으며, 올해와 지난해 동아뮤지컬콩쿠르 수상자인 장민제 이현지 씨가 축하 공연을 펼쳤다.○ 주요 참석자 명단 ▽정·관·법조계=고건 전 국무총리, 김종훈 변호사, 송상현 유니세프한국위원회장, 이광범 법무법인 엘케이비앤파트너스 대표, 이용만 전 재무부 장관, 이진강 전 대한변호사협회장, 이희범 전 산업자원부 장관, 정성진 전 법무부 장관, 조완규 전 교육부 장관, 최시중 전 방송통신위원장, 현인택 전 통일부 장관 ▽학계·교육계=강정애 숙명여대 총장, 국양 대구경북과학기술원 총장, 공정식 고려대 관리처장, 권순달 수원대 교수, 권재일 서울대 명예교수, 김경동 서울대 명예교수, 김규태 고려대 디지털정보처장, 김도연 전 포스텍 총장, 김동기 대한민국학술원 회장, 김병준 강남대 교수, 김병철 전 고려대 총장, 김상호 고려대 입학홍보처장, 김성훈 동국대 교수, 김승환 포스텍 교수, 김영 고려대 세종부총장, 김용학 연세대 총장, 김우철 서울대 명예교수, 김정배 전 고려대 총장, 김정호 고려대 국제처장, 김종필 중앙고 교장, 김진성 고려사이버대 총장, 김학주 서울대 명예교수, 김흔 전 중앙고 행정실장, 나홍석 고려사이버대 기획홍보처장, 박규택 한국과학기술한림원 이사, 박대하 고려사이버대 총무처장, 박영국 경희대 총장 직무대행, 박지향 서울대 명예교수, 박찬욱 전 서울대 총장직무대리, 박희등 고려대 기획예산처장, 반웅렬 고대부중 교감, 백순근 서울대 교수, 백승필 고려대 세종산학협력단장, 백완기 고려대 명예교수, 서문경애 고려대 간호대학장, 석영중 고려대 도서관장, 송창범 고대부중 교장, 신동렬 성균관대 총장, 신수정 서울대 명예교수, 안동준 고려대 그린스쿨대학원장, 안효질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장, 양재룡 우송대 교수, 우용재 서울대 교수, 유재봉 성균관대 교수, 유준상 한국정보기술연구원 원장, 유진희 고려대 교무부총장, 윤석준 고려대 보건대학원장, 윤영철 연세대 미래캠퍼스 부총장, 이기수 전 고려대 총장, 이기열 고려대 연구교학처장, 이기형 고려대 의무부총장, 이남진 고대부고 교감, 이성균 울산대 교수, 이용균 중앙고 교감, 이윤미 홍익대 교수, 이윤정 고려대 연구처장, 이의길 고려사이버대 연구개발처장, 이재창 고려대 명예교수, 이종태 고려대 보건과학대학장, 이진한 고려대 연구부총장, 이필상 전 고려대 총장, 이홍식 고려대 의과대학장, 이홍우 상명대 특임교수, 임현나 가천대 교수, 장승문 중앙중 교장, 전종우 서울대 명예교수, 전치혁 포스텍 특임교수, 정구종 동서대 석좌교수, 정순영 고려대 연구기획본부장, 정진택 고려대 총장, 조경진 고려사이버대 미래교육원장, 조대엽 고려대 노동대학원장, 진덕규 이화여대 명예교수, 최용석 중앙중 교감, 최형재 고려대 교수, 허도영 고대부고 교장, 허준 고려대 산학협력단장, 홍성대 상산학원 이사장, 황호택 서울시립대 교수 ▽경제계=김병윤 미래에셋대우 혁신추진단 대표, 김병휘 삼양염업사 회장, 김선휘 삼양염업사 고문, 김준 경방 회장, 김한 전 JB금융지주 회장, 안병모 유창건축사무소 사장, 오세정 금융투자교육원장, 윤재엽 삼양홀딩스 사장, 이병연 세화애드컴 대표 ▽언론·출판·문화·체육계=강지희 문학평론가, 고승철 문학사상 사장, 김건형 문학평론가, 김광희 전 대한언론인회 부회장, 김기경 한국오리엔티어링연맹 명예회장, 김달수 울산김씨대종회 회장, 김병건 동아꿈나무재단 이사장, 김복수 전 동아일보 관리국 부국장, 김상준 울산김씨대종회 부회장, 김소영 문학동네 대표이사, 김은 인촌기념회 이사, 김정일 전 동아애드넷 대표, 김종규 문화유산국민신탁 이사장, 김종기 푸른나무 청예단 명예이사장, 김종태 평화의마을 대표, 김태곤 동아꿈나무재단 상임이사, 김태선 동우회 명예회장, 김헌곤 호암재단 상무, 김형영 시인, 노한성 전 동아일보 이사대우 광고국장, 박문두 전 동아일보 사진부장, 박진오 동아일보 감사, 배인준 전 동아일보 주필, 성낙오 전 영남일보 사장, 신근철 동우회 이사, 심규선 전 동아일보 상무, 안평선 한국방송인회 회장, 양철화 전 동아일보 총무국장, 여해룡 시인, 염현숙 문학동네 대표이사, 오명 전 동아일보 회장, 이대훈 전 동아일보 이사, 이두환 전 동아일보 출판영업국장, 이병대 대한언론인회 회장, 이연택 전 대한체육회 회장, 이종세 전 한국체육언론인회장, 이현자 문학동네 국장, 인아영 문학평론가, 전만길 전 서울신문 사장, 전용호 한국어문언론인협회 부회장, 조강환 동우회 회장, 천진환 화정평화재단 이사, 최동욱 전 한국방송디스크자키협회장, 최명우 동우회 이사, 최맹호 전 동아일보 부사장, 한승원 소설가, 한종우 성곡언론문화재단 이사장, 한태숙 극단 물리 대표, 허승호 한국신문협회 사무총장, 홍공선 동우회 이사, 홍민규 동우회 이사, 홍성훈 전 동아꿈나무재단 이사, 홍인근 전 동아일보 편집국장, 홍찬식 전 동아일보 수석논설위원(가나다순) 조종엽 jjj@donga.com·김정은 기자}

재개발이 진행 중인 을지로는 서울 구도심인 사대문 안 지역을 동서로 관통하는 4개의 큰 길 가운데 하나다. 그러나 조선시대의 흔적은 거의 없고 19세기 말부터 오늘날까지의 건물과 길, 도시 공간이 확인된다는 점에서 영등포 강남 등 사대문 바깥 서울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저자는 “이렇게 복잡하게 뒤엉킨 모습이야말로 서울다운 모습”이라고 했다. 답사기인데 고궁은 안 나오고 재개발 예정지의 ‘불량 주택’과 오래된 건물의 머릿돌, 일제강점기 전봇대 같은 것들이 주인공이다. 조선 양반 문화가 아닌 근현대 서민 문화를 중심에 뒀기 때문이다. 전작 ‘서울 선언’(2018년)에 이어 서울에 인접한 경기도까지 범위를 넓혔다. 저자가 살핀 ‘대서울’(정치 경제 문화적으로 서울의 영향력 안에 있는 서울과 주변 권역)은 제목처럼 갈등으로 가득하다. 하다못해 화장실 낙서에도 같은 도시의 다른 구에 사는 이들에게 “××거지들 ○○로 넘어 오지 마”라며 배제하고 차별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서울의 역사가 배제와 추방의 역사인 탓이다. 서울의 역사는 “서울이 발전하는 데 방해가 되고 서울 시민이 보기에 좋지 않다고 간주되는 수많은 시설과 사람들을 경기도로 밀어낸 역사”라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빈민과 한센인, 혐오시설과 군사시설뿐 아니라 서민들이 삶의 터전을 잡고 살아온 문화와 역사까지 지워졌다. 저자는 이를 두고 ‘기억과 계급의 전쟁’이라고 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한국의 서원(書院)’은 조선시대 지성의 요람이자 성리학 발전의 중심지였을 뿐 아니라 각 지역의 교육과 문화, 여론의 구심점이었다. 우리 서원이 올 7월 열린 제43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에서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건 이 같은 가치를 세계가 인정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서원은 16세기 중반부터 17세기까지 조선시대 지방 지식인들이 건립한 사립 성리학 학교다. 무심히 보면 전통 건축의 하나일 뿐이지만, 우리나라가 선진문화국가의 전통과 품격을 면면히 이어오고 있다는 증거다. 특히 한국의 교육 전통을 상징하는 민족 정신문화의 대표적 자산 가운데 하나라는 평가가 나온다. ‘존현양사’(尊賢養士·어진 이를 높여 선비를 기른다). 서원의 기능을 함축적으로 드러내는 말이다. 조선은 16세기부터 고유의 성리학 학맥이 형성되고, 이들 학파를 중심으로 성리학 연구가 심화 발전했다. 훌륭한 스승이 세상을 떠나면 제자들은 자발적으로 성리학 사립 교육기관인 서원을 건립해 스승을 위해 제향(祭享)을 올렸다. 지역의 대표적 성리학자를 제향하면서 학파의 결집을 도모하기도 했다. 제향은 후속 세대에게 ‘롤 모델’을 제시하는 의미가 있었다. 스승이 추구했던 훌륭한 성리학적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강학을 하는 건 서원의 기본이었다. 유학자들은 서원에서 강학을 통해 성리학적 가치관을 공유하며 세계를 이해했고, 학문을 계승함으로써 학맥을 형성하기도 했다. 지역사회 공론 형성은 서원의 또 다른 중요 기능이다. 선비들은 교류를 통해 성리학에 부합한 향촌 교화활동을 주도했다. 이 같은 실천을 통해 서원은 조선의 성리학 교육과 사회적 확산을 주도했던 교육기관이자 성리학적 이상을 구현하기 위한 장소로 발전했다. 서원은 교육 시스템이자 물리적 시설이었고, 성리학자들은 서원을 사회 교화와 정치 활동 등 각종 활동의 근거지로 활용했다. 서원은 지식인들이 자발적으로 건립한 학교라는 점에서 국가 차원에서 건립한 성균관이나 향교와는 차이가 있었다. 서원은 정착하는 과정에서 건축적으로도 정형을 뚜렷하게 완성했다. 이번에 세계유산에 등재된 서원은 한국 최초의 서원인 경북 영주 소수서원(1543년 건립)을 포함해 경남 함양 남계서원(1552년), 경북 경주 옥산서원(1573년), 경북 안동 도산서원(1574년), 전남 장성 필암서원(1590년), 대구 달성 도동서원(1605년), 경북 안동 병산서원(1613년), 전북 정읍 무성서원(1615년), 충남 논산 돈암서원(1634년) 등 9곳이다. 이들 서원은 각자 개성을 지니면서도 서원이 건축적 정형성을 확립하는 과정을 드러낸다. 서원은 제향 인물의 연고가 있는 지역에 자리를 잡았고, 성리학자의 전인적 교육에 적합한 환경을 선택했다. 서원 내 제향과 강학, 회합 등 각각의 영역은 지형과 경관을 적극적으로 이용해 뚜렷한 하나의 서원 건축 전형을 완성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강당, 사당인 사우(祠宇), 누마루의 건축물을 중심으로 구성한 각각의 영역이 지형, 외부 공간, 기단, 담장, 대문 등을 이용해 유기적으로 결합했다는 점에서도 탁월하고 특출한 가치를 지닌다. 이처럼 문화전통을 건축적으로 구현했다는 점이 세계유산 등재 과정에서도 높이 평가됐다. 주변 경관, 자연과 조화를 이룬 건축으로서도 가치가 높다. 중국의 서원이 보통 마을 중심지에 있는 데 비해, 대체로 한국의 서원은 심신을 수양하도록 산수가 좋은 곳에 자리를 잡았다. 세계유산 등재 전 유네스코에서 실사를 나온 전문가들이 서원을 보고 감동을 유난히 많이 표현했다는 후문도 전해진다. 우리 서원은 성리학이 동아시아 전역에 확산돼 지역적인 특색을 가지면서 꽃피웠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한국적으로 진화한 유학 교육시설의 특징을 보여준다는 뜻이다. 서원은 민간에서, 지역에서 미래를 향해 교육의 힘을 펼쳤다는 점에서 전통 유산인 동시에 인재 양성의 나침반이라는 의견도 나온다. 바른 인성을 키워내고, 따듯한 공동체 사회를 지향하는 서원의 교육 이념과 자연과 인간의 조화를 추구하는 철학이 현대에도 울림을 준다는 것이다. 이배용 한국의서원통합보존관리단 이사장(72)은 “서원에는 제일 중요한 건 사람이라는 철학이 담겨 있다”면서 “서원처럼 심성의 인재를 키워내 사회에 선한 실천을 하도록 만드는 게 필요하다”고 말했다. 서원이 현대의 가치관 혼란을 극복할 수 있는 교육 공간이나 고품격 전통문화 학습장 등 오늘날에도 새롭게 살아 움직이는 공간이 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배경의 옥색 비단과 어울린 먹빛이 장중하다. 당대 손꼽히는 문장가가 글을 짓고, 명필이 글씨를 썼으며, 최고 수준의 장인들이 돌에 새기고 먹을 바른 뒤 비단으로 표구한 조선 왕실 탑본(탑本·석비와 목판을 먹으로 찍어내거나 글씨를 베껴 쓴 것)들의 모습이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은 8일부터 12월 21일까지 경기 성남시 연구원 장서각에서 조선 왕실문화의 정수 가운데 하나인 ‘조선왕실의 비석과 지석(誌石) 탑본’ 특별전을 개최한다. 전시품은 조선 광해군 대부터 대한제국 시기까지 약 300년 동안 제작된 왕실 탑본 556점 가운데 아름답고 중요한 45점을 고른 것이다. 봉모당(奉謨堂·1776년 정조가 설치한 규장각의 시설)에 봉안됐다가 연구원이 소장 중인 이들 탑본 실물이 대거 관객을 만나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왕릉의 비석과 지석은 제작 당시 왕실 주도로 탑본을 만들어 보관했기에 탑본을 통해 원형을 알 수 있다. 왕릉을 만들 때는 무덤의 주인을 알려주는 비석을 세우고 망자의 생애를 기록한 지석을 땅에 묻는다. 지석은 발굴하지 않는 이상 볼 수 없고, 비석도 시간이 흐르면서 마모된다. 전시품 가운데 가장 큰 것은 태종 헌릉 신도비(神道碑) 뒷면 탑본으로 가로 약 1.5m, 세로 약 4m다. 1424년 세운 신도비를 기초로 숙종 때인 1695년 다시 새긴 비석을 탑본한 것이다. 비문의 앞면은 태종과 원경왕후의 공덕, 자손에 관한 글이 담겼고, 뒷면에는 건립 내역을 비롯해 개국공신 등 여러 공신의 명단을 기록했다. 영조가 후궁의 묘비를 만들기 위해 손수 쓴 표격지(標格紙)도 볼 수 있다. 표격지는 묘비를 만들기 전 글씨를 한 자씩 네모 칸에 나란히 배치한 종이다. 비문의 주인공은 딸 둘과 장남 효장세자를 낳은 정빈 이씨다. 8세 때 궁에 들어온 동갑내기 ‘솔 메이트’의 죽음을 안타까워한 영조가 글을 짓고, 글씨를 썼다. 판석(板石)이 아니라 청화백자로 구운 현종 때 지석 시제품 3점도 이번에 처음 공개한다. 지석으로 썼던 판석은 보통 가로세로 1.5m 크기로, 만들고 옮기는 데 백성들의 어려움이 적지 않았다. 현종이 효종의 영릉(寧陵)을 여주로 옮기면서 지석을 시범적으로 도자기로 만들어 판석과 함께 묻었다. 평안도 선천과 경북 경주 등의 백토(白土)를 가지고 시제품 3개를 만들었는데, 기록과 특징이 일치해 이번 전시하는 지석이 현종이 어람(御覽)했던 시제품으로 보인다. 이후 지석으로는 판석을 계속 썼지만 왕실은 시제품을 계속 보관했고, 나중에 이를 본 영조가 정성왕후 승하 시부터 당분간 청화백자로 지석을 만들었다. 오늘날에는 실물을 자유로이 확인할 수 없는 북한 지역 조선 왕실 기적비(紀蹟碑) 탑본도 전시에 나온다. 기적비는 숙종 이후 왕실 중심의 역사를 강조하며 조선의 창업과 관련된 장소에 세운 것으로 대부분 황해도 개성이나 함경도 지역에 있다. 독서당(讀書堂) 구기(舊基)비 탑본은 태조 이성계가 책을 읽던 함흥 동쪽 귀주(歸州) 설봉산(雪峰山)의 초당 자리에 1797년 다시 세운 비석의 탑본이다. 글도 글씨도 정조의 것이다. 전통 최고급 장황의 진짜 모습도 알 수 있다. 장황은 서화에 비단이나 두꺼운 종이를 발라 족자 병풍 두루마리 책첩 등의 형태로 꾸미는 것이다. 박용만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왕실문헌연구실장은 “장황에 사용된 비단, 비단 문양, 가로세로 비율 등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잃어버렸던 전통 장황의 원형을 확인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니은, 리을, 미음, 비읍, 이응…. 한글 자음 명칭은 ‘자음+ㅣ’를 첫 자로, ‘으+자음’을 다음 자로 쓴다. 기본 모음인 ‘ㅣ, ㅡ’를 활용해 첫소리 자음과 끝소리 자음을 동시에 드러내는 방식으로 이름을 붙인 것이다. 그런데 왜 ‘ㄱ, ㄷ, ㅅ’만 ‘기윽, 디K, 시읏’이 아니라 ‘기역, 디귿, 시옷’일까. 이는 자음의 이름을 한자로 적을 때 대응되는 한자가 없었기에 생겨났다. ‘윽, K, 읏’을 한자의 소리를 빌리거나, 이두식으로 뜻을 빌려 ‘其役(기역)’ ‘池末(지말·‘지’의 발음은 디였고, ‘말’은 ‘끝’이라는 뜻을 빌림)’ ‘時衣(시의·‘의’는 ‘옷’이라는 뜻을 빌림)라고 적었던 것이다. 저자는 “이런 한자식 표기에 따라 예외적 명칭이 생겨났지만 이는 과학적인 한글 정신에 위배된다”며 “‘기윽’ ‘디K’ ‘시읏’으로 명칭을 하루빨리 바로잡아야 한다”고 밝혔다. 40여 년간 한글운동에 헌신해 온 한글학자가 한글에 관한 교양이 되는 지식을 정리했다. 한글은 누가 창제했을까. 세종대왕과 집현전 학사들이 함께 지었다는 게 통설이고, 최근에는 숨은 주역이 있다는 내용의 영화가 나오기도 했다. 그러나 저자는 세종이 단독으로 창제하고 집현전 학사들을 비롯한 인재들이 간접으로 도왔다고 단언한다. 한글은 정말 과학적인가, 맞춤법에는 어떤 원리가 담겼나, 일제강점기 우리 말글을 어떻게 지켰나를 비롯해 14가지 물음과 답을 담았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