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양환

정양환 부장

동아일보 문화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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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정양환 기자입니다.

ray@donga.com

취재분야

2025-11-07~2025-1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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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새싹 모양의 春, 힘들다는 뜻도 숨어있다는데…

    옛날 얘기 하나. 한 아이가 서당에서 천자문을 배웠다. 첫 글자 하늘 천(天)이 나오자 질문을 쏟아냈다. 하늘은 왜 파란지, 왜 태양은 뜨고 지는지…. 끊임없이 묻고 훈장은 대답했더니 10년이 지났다. 드디어 배우게 된 땅 지(地). 아, 청소년이 돼도 습벽은 바뀌질 않았다. 또 한번 강산이 바뀌었다. 스승은 걱정이 컸다. “천자문을 언제 다 배우누?” 이미 청년으로 장성한 제자는 웃었다. “하늘과 땅을 깨쳤는데 뭐가 걱정입니까.” 전래동화의 한 자락이지만 교훈은 깊다. 글을 배운다는 건 세상의 이치를 찾아가는 과정이다. 하물며 한문은 한 자 한 자가 그 자체로 의미를 지녔다. 실제로 화담 서경덕(1489∼1546)은 벽에 글자를 붙이고 골똘히 사색한 뒤 다음 글자로 넘어갔단다. 요즘 시절이라면 요령이 부족하다며 질타 받을 일이겠다. 허나 글을 대하는 마음가짐은 진지하다 못해 경이롭다. 한학자 청명 임창순(1914∼1999)이 개창한 태동고전연구소(지곡서당)의 연구원인 저자는 이런 자세가 맘에 들었나 보다. ‘봄 춘(春)’부터 ‘풀이할 역(譯)’까지 한자 22개를 키워드로 이야기를 풀어냈다. 때로는 그 한자의 생김새와 연원을, 때로는 글자에 얽힌 역사와 문화 혹은 신변잡기를 능수능란하게 이어간다. 그런 의미에서 책 제목은 ‘한자의 모험’보다 ‘한자의 유랑’이 더 어울릴 수도 있겠다. 저자의 뒤춤을 졸래졸래 따라나서 보자. 알다시피 한문은 원래 바탕이 상형문자다. 글자에 사물의 모양새가 담겼다는 얘기다. 예를 들어, 春도 고자(古字)를 보면 새싹이 돋아나는 모습과 닮았다. 그런데 그 속엔 둔 또는 준으로 읽히는 屯이 들어있다. 이 글자는 준비한다거나 어렵다는 뜻도 있다. 봄을 맞는다는 건 새로운 출발을 대비하는 일이며, 뭔가를 시작하는 건 힘들다는 속내가 배어 있다. 글자 풀이도 재미있지만, 문자에 담긴 역사성도 흥미롭다. 임금 제(帝)가 그렇다. 황제란 칭호를 처음 사용한 사람은 진시황이다. 왕과 제는 천양지차다. “왕이 현실적 권력관계의 정점에 서 있는 인간을 가리키는 반면, 제는 하늘의 신이라는 초월적 존재를 지칭하는 말이었다.” 중국을 통일한 그는 인간이 범접할 수 없는 영역에 올라 권력을 누리려 했다. 그런 시황은 중앙권력 강화를 도모하며 ‘한문의 통일’도 주도했다. 당시 한자는 지역마다 중구난방으로 달랐다. 하지만 일사불란한 정부 시스템을 갖추려면 명령을 전달하는 용어가 일관돼야 한다. 결국 진 제국이 글자의 표준화를 도입함으로써 한자는 “사물과 이어지던 탯줄을 잘리고” 언어의 추상성을 획득하게 됐다. ‘서성(書聖)’이라 불리는 왕희지(307∼365)의 이름 중간에서 따온 ‘복희씨 희(羲)’자로 풀어낸 한중일 한자 삼국지도 눈여겨볼 만하다. 왕희지는 종이에 붓으로 글을 쓰는 후한 시대 글씨를 예술로 승화시킨 핵심 인물이다. 중국에서도 서예는 왕희지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고 한다. 왕희지의 기풍은 한국에선 석봉 한호(1543∼1605), 일본의 오노노 도후(小野道風·894∼966)로 이어져 꽃을 피웠다. 복희는 고대 중국의 시조 중 하나이니, 중국의 한자가 동아시아로 퍼져 각자 고유한 문화를 형성하는 씨앗이 됐음을 보여주는 게 아닌가. 참고로 오노노는 빗속에서 개구리의 몸부림을 보고 깨달음을 얻은 인물. 화투의 비광이다. ‘한자의 모험’은 참 색다른 책이다. 그저 보아 넘기던 글자 하나를 두고 역사의 씨줄과 날줄을 엮어 다양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저자는 “겨우 10년 한자 공부 했을 뿐”이라지만, 그 공력이 여간 아니다. 다만 배움이 얕아서인지 쉽게 쓴 것 같은데 뭔 소린지 멍해질 때가 종종 있었다. 저자는 다 아는 얘기겠지만 살짝 눈높이를 낮춰줬더라면 어땠을까. 이제 보니 왜 유랑이 아니라 모험인지 알겠다. 이 행군, 녹록지 않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

    • 2013-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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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주 용강동 고분 誌石, 발굴 22년만에 공개

    1971년 백제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이래 국내에서 두 번째로 발굴된 지석(誌石·무덤 주인의 인적사항을 기록한 돌)이 일반에 공개된다. 국립경주박물관(관장 이영훈)은 내년 1월 26일까지 ‘7세기 신라 귀족무덤-경주 용강동 6호 돌방무덤(석실묘)’ 부장품 40여 점을 전시한다. 1991년 발굴된 이 무덤은 불교의 영향으로 이전 시대 무덤보다 규모도 작고 부장품도 화려하지 않다. 하지만 한강 유역을 확보하며 중앙집권화와 통일의 기틀을 마련한 신라의 7세기 초 문화를 엿볼 수 있다. 특히 무덤 속 인골의 머리맡에 놓여 있던 지석은 놓치기 아깝다. 글자가 대부분 소멸돼 판독이 어렵지만 신라 무덤에서는 처음 나온 희귀한 사료다. 이전까지 유일했던 무령왕릉 지석은 국보 제163호로 지정돼 있다. 바둑돌로 추정되는 자갈돌 무더기도 눈길을 끈다. 신라는 효성왕 2년(738년) 바둑을 뒀다는 기록이 처음 등장한다. 윤온식 학예연구사는 “이 무덤의 바둑돌이 나오며 신라의 바둑 도입 시점이 1세기 이상 앞당겨졌다”고 설명했다. 이 밖에 중국과의 활발한 교류를 짐작하게 하는 유약을 입힌 녹갈색 귀항아리나 비파형 허리띠 연결걸쇠도 인상적이다. 무료. 054-740-7500정양환 기자 ray@donga.com}

    • 2013-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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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역사논쟁 판가름하는 건 결국 정치권의 조정능력”

    1992년 미국의 전국역사교육연구소(NCHS)가 만든 ‘역사표준서’는 당시 교육계를 넘어 정치·사회적 분란을 촉발했다. 표준서는 정부 차원에서 역사교육의 방향을 제시하려는 일종의 가이드라인이었는데, 너무 편향됐다는 지적이 잇따랐다. 일례로 매카시즘과 쿠클럭스클랜(KKK)은 17∼19차례 거론해 비판하면서도 토머스 에디슨이나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조지 워싱턴이 초대 대통령이란 설명도 뺐다. 많은 정치가와 학자들은 “소수자 시각에 치중한 나머지 자유민주주의라는 건국 가치를 소홀히 했다”며 비난했다. 개관 1주년을 앞두고 13일 대한민국역사박물관(관장 김왕식)이 개최하는 국제학술대회 ‘세계 각국의 역사논쟁-갈등과 조정’은 여러모로 많은 시사점을 던진다. 박물관은 “올해는 다큐멘터리 ‘백년전쟁’ 논란과 교과서 파동으로 유독 역사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며 “해외 역사논쟁 과정을 통해 공론을 모으고 해결하는 과정을 배우려는 취지”라고 설명했다. 정경희 아산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이 발표하는 ‘미국 역사표준서 개발을 둘러싼 쟁점과 그 함의’는 논란을 해결하는 미국 상원의 역할을 조명했다. 18개월가량 지속된 공방은 상원이 수정 결의안을 채택하며 NCHS의 표준서 수정을 이끌어냈다. 이 과정에서 상원은 정파나 이해관계에 휩쓸리지 않았다. 공화당 52석, 민주당 48석이었지만 수정안은 99 대 1이란 압도적 표차로 통과했다. 교육은 당리당략의 대상이 아니라는 대전제 아래 지속적인 대화로 합의를 이끌어낸 것이다. 정 위원은 “한국 현대사 논쟁은 엘리트주의와 결합돼 헤게모니 쟁탈전으로 변질되며 각자의 입장을 사회 전체에 강요하려는 시도로 전락했다”고 지적했다. 송충기 공주대 교수가 발표하는 ‘과거사 정책의 타협: 1960∼70년대 서독 연방의회의 시효 논쟁’도 정치권의 조정 능력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준다. 1965년 종료될 예정이던 나치 범죄 기소 시한을 두고 10년 넘게 이어진 논쟁은 결국 1979년 시효 자체를 폐지함으로써 마무리됐다. 송 교수는 이 과정에서 2가지 점에 주목했다. 정치인들이 단기적 해결에 매달리지 않고 제도적 정책 마련에 힘을 기울였다. 특히 다소 가벼운 죄는 시효 만료를 인정하는 타협을 이끌어 찬성과 반대 진영이 서로 부담을 덜었다. 또 대중은 시효 종료에 찬성하는 입장이 우세했으나 시류에 영합하지 않았다. 송 교수는 “정치권이 국제사회와 여론의 반응을 꾸준히 청취하면서도 올바른 결과를 도출할 수 있도록 애썼다”고 평가했다. 당장의 소요를 우려해 논쟁을 비켜 가려는 태도도 바람직하지 않다. 황보영조 경북대 교수는 ‘스페인의 과거사 논쟁’을 통해 스페인 내전과 프랑코 정권 시절 희생자 관련 역사논란을 예로 들었다. 1970, 80년대 스페인은 평화 유지를 목적으로 ‘침묵협정’을 맺어 관련 과거사를 거론하지 않았다. 이는 국가가 민주주의로 나아가는 데 도움을 줬지만 본질적 문제는 잠복된 상태였다. 결국 1990년대부터 기억회복운동이 벌어졌고 지금까지 혼란을 겪고 있다. 정치권은 좌우로 갈려 소모적 공방만 일삼았고, 국민은 여전히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다. 정양환 기자 ray@donga.com}

    • 2013-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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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앞쪽에 일월오봉도, 뒤쪽에 해반도도… 양면 궁중화 첫 공개

    불교나 유교에 비해 그다지 주목받지 못했던 한국의 도교에 초점을 맞춘 유물전이 열린다. 국립중앙박물관(관장 김영나)은 10일부터 기획전시실에서 특별전 ‘한국의 도교 문화-행복으로 가는 길’을 개최한다. 국보 6건과 보물 3건을 포함한 유물 300여 점을 모아 도교문화 전반을 살피는 대규모 전시는 국내에서 처음이다. 이번 특별전에서 소개되는 ‘일월오봉도(日月五峯圖)’는 19세기 작품으로 알려져 있는데 일반에 처음 공개된다. 뒤쪽에 ‘해반도도(海蟠桃圖)’가 그려져 양면이 회화인 유일한 궁중 장식화다. 해반도도는 도교에서 최고 여신으로 여기는 서왕모의 과수원에서 3000년마다 한 번씩 열린다는 복숭아 ‘반도’를 그린 것으로 왕의 불로장생을 축원하는 뜻을 지녔다. 두 그림 모두 도식적이지 않고 세련미가 넘쳐 당대 최고의 궁중 화가가 그린 작품으로 평가된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주역참동계(周易參同契)’도 처음 선보인다. 주역참동계는 주역 64괘를 이용해 수련하는 원리와 과정을 담은 책으로 ‘포박자’ ‘황정경’과 함께 도교 3대 서적으로 꼽힌다. 16세기 조선 관료 신언식(申彦湜·1519∼1582)의 무덤에서 출토됐다. 1441년(세종 23년)에 초주갑인자(初鑄甲寅字)라는 금속활자로 찍어 간행했다. 구텐베르크가 금속활자로 성서를 찍어냈던 시기보다 42년 앞선다. 국보 제287호인 ‘백제 금동대향로’와 국보 제139호 ‘김홍도필 군선도 병풍’도 쉽게 만나기 힘든 작품이다. 금동대향로는 불교 의식에 쓰던 유물이지만, 신선들이 산다는 신산(神山)을 표현한 조각들은 도교적 세계관이 뚜렷하다. 군선도는 소를 타고 도덕경을 든 노자처럼 도교에서 신선으로 추앙받는 인물들이 등장한다. 내년 3월 2일까지. 02-2077-9000정양환 기자 ray@donga.com}

    • 2013-1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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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문수 종조부 박심은 조선 양명학의 대가”

    “그는 사람됨이 독실하여 만 사람이 막더라도 나아간다는 뜻을 지녔다. 비록 대인(大人)이라 할지라도 (잘못이 있으면) 조금도 용서하지 않았다.”(숙종실록) 벼슬에 뜻이 없어 평생 재야에서 위기지학(爲己之學·자기 수양을 닦는 학문)에 매진했다. 왕이 세자를 가르치는 서연관(書筵官)으로 명했으나 이마저 고사했다. 마지못해 잠시 지방관리를 지냈을 땐 ‘현세의 부자(夫子·공자)’라 칭송받았다. 이만한 인물이라면 한 번쯤 듣기라도 했을 터지만 지포 박심(芝浦 朴심·1652∼1707)이란 이름을 대면 웬만한 이들은 고개를 갸웃거릴 게 분명하다. 하지만 박심은 조선 양명학 계보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인물이다. 그는 양명학의 선구자인 정제두(1649∼1736)의 막역지우로 함께 사상적 체계를 세운 숨은 공로자였다. 6·25전쟁 때 그가 지은 문집들이 모두 소실돼 지금까지 별다른 조명을 받지 못했는데 최근 노승석 여해고전연구소장이 논문 ‘숙종조 박심 선생에 대한 재고찰’을 발표하며 세상에 빛을 보게 됐다. 당대만 해도 박심은 여러 대가들이 주목했던 학자였다. 우암 송시열(1607∼1689)이 1676년 유배 갔을 때 박심은 귀양지까지 찾아가 스승으로 섬기길 청했다. 우암은 주위 눈도 꺼리지 않던 그를 “참으로 두려운 친구”라며 놀라워했다. 소론의 영수였던 윤증(1629∼1714)은 “그의 대성을 기대하는 마음이 짝사랑과 같아 부끄러울 지경”이라고 말했다. 박심의 학문은 남달랐다. 정제두의 ‘하곡집(霞谷集)’에는 박심에게 경전의 해석을 놓고 여러 차례 질문하는 대목이 나온다. 아쉽게도 박심의 글은 남은 게 없으나 ‘매옹한록(梅翁閑錄)’은 그가 저술하다가 아들 박양한(1677∼1746)이 마무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박심은 암행어사로 백성들의 억울함을 풀어준 박문수(1691∼1756)의 종조부이기도 하다. 백성을 아끼는 마음은 이 집안의 전통이었을까. 박심은 홍천 현감(47세)과 영천 군수(54세)를 지내며 배곯는 주민이 없도록 전력을 다했다고 전해진다. 정양환 기자 ray@donga.com}

    • 2013-1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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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독서人]“쓴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스무살의 당찬 인생론

    ‘리좀, 나의 삶 나의 글’(북드라망)을 쓴 김해완 저자는 처음부터 사람을 연신 놀라게 했다. 고등학교 중퇴의 중졸 백수가 인문비평서를 썼다는 것부터 감이 오질 않았다. 게다가 까다롭기로 악명 높은 철학자 질 들뢰즈와 펠릭스 가타리의 ‘천개의 고원’ 설명서라니. 4일 서울 광화문에서 만난 뒤엔 더 입이 쩍 벌어졌다. 1993년생 스무 살. 생일이 며칠 남았다니 굳이 따지면 아직 열아홉 살인 앳된 여성이었다. “솔직히 아쉬움이 커요. 더 편하게 풀어야 했는데, 글이 울퉁불퉁해요. 아직 여물지 못한 탓입니다. 같은 또래에게 전하고픈 메시지를 담았는데, 너무 어렵게 썼어요.” 뜨끔했다. 동년배는 둘째 치고 마흔 넘은 기자도 읽다 머리를 싸맸다. 공력이 약해 글이 난해해졌다? 노장 학자에게서나 듣던 말을 ‘애’한테 들을 줄이야. 게다가 이 조숙한 말투는 대체 뭔가. “중3 시절에 잠깐 블로그를 운영했어요. 사춘기였던지 인간관계 고민을 자주 올렸죠. 그런데 엇비슷한 범주를 벗어나지 않아요. 쓰는 어휘도 한정됐고…. 뭔가를 전할 능력이 부족하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제대로 글 쓰고 싶단 욕망이 공부에 집중하는 원동력이 됐어요.” 하지만 그가 선택한 공부는 남과 달랐다. “또 다른 구속이 존재하는” 대안학교를 고교 1학년에 때려치우고, 2008년 연구공동체 ‘수유+너머’에 들어갔다. 지금은 그 모임에서 분화된 ‘남산강학원’ 연구원으로 있다. “대입은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고 할 만큼 정신없이 읽고 쓰고 토론했다. ‘리좀…’은 그 치열했던 5년에 하나의 방점을 찍는 작업이었다. 그에게 가장 큰 충격과 지침을 줬던 책이 ‘천개의 고원’이었으니까. 들뢰즈와 가타리는 철학을 ‘도구로 써 달라’고 당부했다. 저자는 그 인문학적 개념을 사용해 삶과 세상과 조우하는 길을 찾고 싶었다. “10대는 누구나 미래를 걱정합니다. 하지만 ‘천개의 고원’은 말하죠. 자신을 표피로 규정짓지도 말고, 일상의 심층을 깨달으라고. 뭣보다 ‘살기는 쓰기’라고 일러줘요. 쓰기란 자신이 삶을 만들어가는 과정이라고 봐요. 제게 이 책은 어렴풋한 불안을 잠재우고 한 발짝 내딛는 힘을 주는 매개체였습니다.” 읽는 즐거움에 푹 빠진 어린 학자에게 추천도서를 물어본 건 실수였다. 미셸 푸코의 ‘성의 역사’는 짱짱한 명제로 자기 주체를 변환시킬 수 있다는 믿음을 줬단다. 니체와 루쉰의 글들은 자기비하나 연민에 빠지지 않게 도와줬고, 사마천의 ‘사기’는 시대와 인간을 어떻게 조망하는지를 알려줬다. 프랑스 역사학자 에마뉘엘 르루아 라뒤리의 중세 미시사 ‘몽타이유’와 페루 소설가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의 ‘세계종말전쟁’도 끝내준단다. 좀 쉬운 책은 없나.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 어떤가요? 끝자락에 나오는 뫼르소의 일갈에 정신없이 빠져들었었죠. ‘나의 인생과, 닥쳐올 이 죽음에 대한 확신이 있어. 그렇다, 나는 이것밖에 없다.’ 실존의 고민은 다른 이의 판단이나 기준이 내 삶을 보장하지 않음을 깨닫게 하죠. 인간은 고정된 이름이 아니라 하나의 여정 자체니까….” 졌다. 기자도 읽긴 했는데, 같은 책 맞나. 살짝 머쓱해졌다. 일단 ‘리좀…’부터 다시 읽어봐야겠다. 이 ‘앙팡 테리블(무서운 아이)’은 어디로 나아갈까. 기대가 부풀어 오른다. 다만 청년학도여, 너무 속도는 내지 말길. 서두르면 빨리 지치니.정양환 기자 ray@donga.com}

    • 2013-1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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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의 김장, 인류무형유산 됐다

    한국의 김장문화가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문화재청은 5일 “아제르바이잔 바쿠에서 열린 제8차 유네스코 무형유산위원회에서 ‘김장, 한국의 김치를 담그고 나누는 문화(Kimjang; Making and Sharing Kimchi in the Republic of Korea)’를 등재하기로 최종 확정했다”고 밝혔다. 김장문화는 이미 10월 24일 무형유산위 산하 심사소위에서 만장일치로 ‘등재 권고’ 판정을 받아 등재가 확실시됐다. 무형유산위는 이날 회의에서 “한국인의 일상에서 세대를 거쳐 내려온 김장은 이웃 간 나눔의 정신을 실천하고 연대감과 정체성, 소속감을 증대시킨 매개체”라며 “김장문화 등재는 자연재료를 창의적으로 이용하는 식습관을 가진 다양한 세계 공동체들의 대화를 촉진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문화재청은 “한국인의 생활 유산인 김장문화가 등재돼 국제무대에서 한국문화의 위상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고 평가했다. 당초 한국이 신청했던 등재명은 최종 회의에서 약간 수정됐다. 기존 명칭에 ‘한국의(in the Republic of Korea)’라는 대목이 추가됐다. 현지에 파견 나간 박희웅 국제교류과장은 “김장이 한국의 독특한 문화라는 점을 명확히 한 것”이라고 밝혔다. 한국의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 등재는 김장문화의 등재 확정으로 모두 16건으로 늘었다. 지금까지 등재된 유산은 △종묘제례 및 종묘제례악 △판소리 △강릉단오제 △강강술래 △남사당놀이 △영산재 △제주 칠머리당 영등굿 △처용무 △가곡, 관현악 반주에 맞춰 부르는 서정적 노래 △대목장 △매 사냥술, 인간문화유산 △줄타기 △택견 △한산모시 짜기 △아리랑이다. 한편 무형유산위에서는 31개가 최종 등재 신청 목록에 올랐다가 김장문화를 포함해 25개의 등재가 결정됐다. 중국이 신청했던 ‘중국의 주산, 주판셈 지식 및 활용’과 일본이 제출한 ‘와쇼쿠(和食), 일본의 전통 식문화’도 등재가 확정됐다. 이번에 등재된 또 다른 먹거리 문화로는 조지아의 ‘고대 조지아 전통 크베브리 와인 제조법’과 터키의 ‘터키 커피 문화와 전통’이 있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

    • 2013-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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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6세기 신라인 추정 인골 나무관 경주서 출토

    6세기 신라인으로 추정되는 인골이 묻힌 나무관(목관·사진)이 경북 경주시에서 출토됐다. 매장문화재 조사기관인 신라문화유산연구원(원장 최영기)은 5일 경주시 교동 천원마을에서 덧널무덤(구덩이를 파고 나무 관을 짜서 넣은 무덤)을 발굴했다고 밝혔다. 신라·가야지역에서 덧널무덤은 자주 발견됐으나 목관 부재가 확인된 것은 처음이다. 문화재청은 “인골과 목관 형태가 거의 온전해 당시 장례습속이나 인골 연구에 획기적인 자료”라고 설명했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

    • 2013-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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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헝가리 합스부르크 왕조 보물 서울서 본다

    내년이면 한국과 수교 25주년을 맞는 헝가리의 합스부르크 왕조 보물들이 서울을 찾았다. 국립고궁박물관은 내년 3월 9일까지 지하전시실에서 헝가리 유물 190여 점을 전시하는 ‘헝가리 왕실의 보물’ 특별전을 개최한다. 17∼19세기 헝가리를 통치했던 오스트리아계 합스부르크 왕조는 화려하면서도 정교한 문화유산을 다량 배출한 유럽의 명문가. 이번 전시품은 모두 1802년 부다페스트에서 개관해 200여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헝가리 국립박물관에서 소장한 것이다. 특히 ‘18세기 유럽의 완벽한 여성 통치자’로 꼽혔던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1717∼1780)의 대관식 초상화는 매우 인상적이다. 당시 여제는 임신부였으나 대관식에서 조국과 신민을 지키는 강인함을 과시하기 위해 몇 주 전부터 말을 타고 칼을 휘두르는 연습을 했다고 한다. 1914년 사라예보 사건으로 세르비아를 침공하며 제1차 세계대전을 일으켰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프란츠 요제프 1세 초상화도 함께 전시됐다. 1630년경 제작해 황제가 대대로 물려받았다는 전용 갑주와 방패도 놓치면 아쉽다. 검은 바탕에 황금으로 도금한 꽃잎과 넝쿨 문양이 장엄하면서도 세련됐다. 무료. 02-3701-7500정양환 기자 ray@donga.com}

    • 2013-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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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강백씨 은관문화훈장

    문화재청은 올해 은관문화훈장 서훈자로 이강백 강릉선교장 관장(65)을 선정했다고 4일 밝혔다. 윤세영 중앙문화재연구원 이사(80)는 보관문화훈장, 고 조창수 전 미국 스미스소니언자연사박물관 학예관은 옥관문화훈장 서훈자로 뽑혔다. 또 제10회 대한민국 문화유산상 수상자는 보존·관리 부문에서 한병문 중요무형문화재 장도장(粧刀匠) 명예보유자(74)와 홍성표 한국문화재기능인협회 이사(76), 봉사·활용 부문에서 김종서 한국방송 PD(43)와 해반문화사랑회가 선정됐다. 시상식은 10일 오후 3시 서울 종로구 국립고궁박물관 대강당에서 열린다.}

    • 2013-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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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방광염엔 목대… 임신엔 산부추… 불임치료엔 익모초…

    “흙을 달아 흙삼이냐, 돌을 달아 돌삼이냐, 바람 따라 들어오는 바람삼이냐. 인간이 몰라서 일을 저질러 삼이 섰으니, 떠오르는 일월성신(日月星辰)님 삼을 낫게 해 주시오.” 흔히 ‘눈에 삼이 섰다’고 말하는 삼은 눈에 희거나 붉은 좁쌀만 한 수포가 생기는 질환. 북한 포격의 상흔이 여전한 인천 옹진군 연평도는 이렇게 삼이 섰을 때 ‘당지기 할머니’를 찾아갔다고 한다. 여기서 당지기란 임경업 장군(1594∼1646)을 모시는 사당인 충민사(忠愍祠)를 돌보던 이를 일컫는다. 할머니는 새벽녘 환자가 해를 보고 서게 한 뒤 팥을 한 움큼 헝겊에 싸서 눈을 문지르며 이 가락을 흥얼거렸다. 그러고는 이 팥을 하나씩 물그릇에 떨어뜨리며 삼이 낫기를 빌었다. 민속학에서 ‘민속의료’는 흥미로운 주제다. 전통사회 구성원들이 이어온 예방 및 치료체계는 당대의 생활상을 잘 반영하기 때문이다. 때로는 현대의학도 놀랄 정도로 적확한 치료법이 있는가 하면 황당한 주술요법에도 그 시대의 사회적 함의가 담겨 있다. 최근 김형우 안양대 교수와 장장식 국립민속박물관 학예연구관을 포함해 5명이 공동 연구해 발표한 ‘서해 5도 민속의료 현황과 지역적 특성’은 백령도 대청도 연평도에 전승된 민간의술을 통해 현지의 독특한 생활문화를 포착했다. 연평도의 삼 퇴치법도 얼핏 황당해 보이지만 햇빛의 정화작용과 팥의 소염작용을 이용하는 선인들의 지혜가 담겼다. 한때 연평도에 머물렀던 임경업 장군의 위엄을 빌려 마음의 안식을 주는 효과도 얻었다. 섬에서만 전해지는 민간요법은 이뿐이 아니었다. 방광염이나 요도염으로 오줌이 자주 마려운 오줌소태에는 ‘목대’라 부르는 목탁가오리를 최고로 쳤다. 옥수수수염을 약으로 썼던 내륙과 달리 바닷가다운 처방이다. 공동 연구자로 서울대 인류학과 박사를 수료한 이인혜 씨는 “‘동의보감’에도 소변보기 힘들 때 가오리가 좋다고 나오니 근거가 없지는 않다”고 설명했다. 그런데 대청도는 목대를 고아 그 물을 마시되 여성은 숫목대, 남성은 암목대를 써야 제 효능을 발휘한다고 믿었다. 임신 출산과 관련된 민속의료는 섬에서 20세기 후반에도 이어졌다. 1960년에야 백령도에 첫 병원이 들어섰고 대청도와 연평도는 그 뒤로도 한동안 산파가 출산을 관장했다. 이 때문에 지금도 산후조리에 쑥을 달여 요강에 넣고 김을 쏘이거나 양초나무(산부추) 잎을 달여 먹이면 임신을 돕는다고 여긴다. 특히 세 섬은 불임치료에 육모초(익모초)가 탁월하다는 믿음이 큰데, 단오 이전에 채취해 말린 것을 달여서 마셨다. 재밌는 것은 섬 주민들의 종교적 성향이다. 국내 기독교계에선 충남 서천군 마량진을 ‘한국 최초의 성경 전래지’로 꼽는다. 1816년 영국 해군이 처음으로 성경을 전파했다는 이유에서다. 그러나 옹진군청 사료에 따르면 같은 해 영국 해군이 백령도에도 성경을 나눠줬다는 것. 1832년 영국 런던 선교회가 선교활동을 벌였던 곳도 백령도를 포함한 주위 섬들이었다. 이 때문인지 현재 백령도 연평도 대청도 주민의 80% 이상이 천주교나 개신교 신자다. 장 학예관은 “세 섬의 민속의료가 다른 섬들에 비해 굿과 같은 주술이 매우 미미한 것도 이런 시대상이 반영된 것”이라며 “일부 남은 미신적 색채도 예부터 내려오는 토속적 전통으로 받아들여 조화를 유지했다”고 말했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

    • 2013-1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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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積善愛日 ‘종가의 정신’ 되돌아본다

    국립민속박물관은 4일부터 기획전시실Ⅰ에서 열리는 특별전 ‘종가(宗家)’를 준비하면서 영문 소개로 골머리를 앓았다고 한다. 종가를 뭐라 설명해야 할지 난감했기 때문이다. 결국 문구는 ‘존경받는 씨족 가문의 우두머리 집안(the head family of a respected clan)’으로 선정됐다. 이건욱 학예연구사는 “독특한 종가문화를 정의하기엔 한참 부족하다”며 “김치처럼 종가도 하나의 고유명사로 세계에 알려야 하는 게 아닌가 싶다”고 말했다. 종가는 우리말로도 쉽게 설명하기 힘들다. 단순히 명문가나 본가와는 다른 질감을 지녔다. 종가를 보여주는 전시도 자칫하면 난해해지기 쉽다. 비슷한 주제를 다룬 전시가 종전에 있었으나 족보나 서책만 나열해 꽤나 지루했다. 하지만 이번 민속박물관의 종가특별전은 그런 우려를 해소하려는 고심이 엿보였다. 전체적으로 나무 살로 기와지붕을 형상화해 천장에 설치하고 곳곳에 종갓집의 대청마루와 사랑방, 장독대를 재현해 편안한 분위기를 살렸다. 그래픽디자이너들과 협업해 3차원(3D)으로 입체감 있게 종갓집 어른과 손님상, 제사를 표현한 것도 흥미로웠다. 박물관은 이번 특별전의 주제를 ‘적선애일(積善愛日)’로 삼았다. 밖에서는 선행을 쌓고 안에서는 부모에게 효도한다는 뜻이다. 이번에 전시된 영천 이씨 농암 이현보(1467∼1555) 종가의 ‘애일당구경첩(愛日堂具慶帖·보물 제1202호)’을 보면 90세가 넘은 부모를 위해 농암이 색동옷을 입고 춤을 추는 장면이 나온다. 또 귀천에 상관없이 주민들을 초대해 음식을 대접했다. 21세기 권문세가들이 종가라 불리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정양환 기자 ray@donga.com}

    • 2013-1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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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日서 환수한 쌍림열반도는 最古의 ‘가로형 佛畵’

    올해 7월 일본에서 환수된 조선불화 ‘쌍림열반도(雙林涅槃圖)’가 지금까지 발견된 가로로 그려진 우리나라 불화 중 가장 오래된 것임이 밝혀졌다. 정우택 동국대 미술사학과 교수는 지난달 30일 서울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 동악미술사학회에서 “불화를 구입한 전북 군산시 동국사 의뢰로 감정한 결과 쌍림열반도는 유일한 가로형 불화로 알려졌던 일본 게조지(華藏寺) 소장 조선불화인 석가탄생도(1692년 작)보다 앞선 16세기 중반의 조선 전기 불화”라고 발표했다. 지금까지 확인된 고려·조선 불화는 각각 160여 점. 대부분 세로로 그려졌고, 가로로 그려진 작품은 이번 쌍림열반도를 포함해 2점뿐이다. 가로 세로 224.5×87.0cm의 쌍림열반도는 석가모니가 사라쌍수 숲에서 열반하는 장면을 담은 불화. 세종 때 수양대군이 한글로 불경을 엮은 ‘석보상절(보물 제523호)’에 수록된 석가팔상도(釋迦八相圖) 중 마지막 열반도의 형식을 따랐다. 정 교수는 “염료를 활용한 이중채색법이나 금가루를 활용한 방식이 1553년 석가설법도나 1568년 삼장보살도의 제작 방식과 동일하다”며 “그림에 등장하는 승려의 복식이나 표정도 조선 특유의 양식을 잘 구현했다”고 설명했다. 무엇보다 이 불화는 그간 고려불화에서만 발견됐던 복채법(伏彩法)으로 그려져 고려에서 조선으로 불화 제작기법이 계승됐음을 증명한 첫 사례라는 점에서 그 가치가 크다. 복채법이란 그림의 색을 앞면에서 칠하지 않고 비단이나 삼베 뒷면에서 반복해서 칠해 자연스러운 질감을 연출하는 기법이다. 정은우 동아대 석당박물관장은 “17세기 조선불화와는 전혀 다른 채색법과 화풍을 보여주는 걸작”이라며 감탄했다. 회화적인 측면에서는 기존 양식을 벗어난 파격을 보여줬다. 불화 왼편에 나오는 다비식(茶毘式·화장 뒤 유골을 수습하는 의식) 장면은 대다수 열반도에 등장한다. 그런데 이 불화처럼 볏섬에 사리를 넣어 봇짐처럼 나르는 장면은 중국이나 일본 불화에서조차 유례를 찾을 수 없다. 김리나 홍익대 명예교수는 “기존 도상에 얽매이지 않고 정형화를 거부한 놀라운 불화”라고 평했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

    • 2013-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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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흥선 스님 “숭례문 석굴암 안 무너져요… 눈에 쌍심지 켤 상황 아닙니다”

    《 “숭례문? 그 정도로 눈에 쌍심지 켤 상황 아닙니다. 석굴암도 안 무너져요. 팔만대장경 상태도 비교적 나쁘지 않아요. 제발 국민들 가슴 그만 덜컹거리게 했으면 좋겠습니다.” 이게 무슨 얘긴가. 최근 문화재계 여기저기서 파열음이 끊이지 않는다. 박근혜 대통령조차 ‘원전(原電) 비리’와 동급에 놓고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했는데…. 그게 아니라니? 지난달 29일 오후 서울 덕수궁에서 만난 경북 김천시 직지사 주지 흥선 스님(57·문화재청 동산분과 문화재위원)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흥선 스님은 “문제가 없다는 건 아니다. 하지만 이래선 어떤 문제도 해결 안 된다”며 작심한 듯 말을 쏟아냈다. 그는 서울대 동양사학과에서 미술사를 전공했고 불교중앙박물관장, 문화재위원을 여러 차례 지낸 대표적인 불교계 문화재 전문가다. 특히 최근 논란이 인 석굴암과 팔만대장경 긴급안전점검단에도 참여했다. 》―점검단으로 직접 갔으니 석굴암, 팔만대장경 얘기부터 들려 달라. “(지난달) 15일 전문가 10명이 석굴암을 찾았다. 결론부터 말하자. 맞다, 균열 있다. 하지만 10년 내에 생긴 게 아니다. 그간 심각해진 것도 없다. 심지어 창건 당시 생긴 균열도 있다. 국립문화재연구소가 지속적으로 모니터링했다. 전문가들도 꼼꼼히 살폈지만 숨긴 것 없더라. 팔만대장경도 마찬가지다. 일부 경판에 문제가 있지만 최근에 악화됐다고 보는 점검단은 아무도 없었다. 오히려 장경각 뒤쪽 배수로는 좀 손봐야겠다는 쪽으로 의견을 모았다.” ―숭례문은 복원 5개월 만에 단청이 떨어져 나갔다. “앞서 얘기했지만 문제가 없다는 게 아니다. 과장하지 말라는 거지. 숭례문도 마찬가지다. 책임질 사람이 책임지고 대책을 마련하면 된다. 문화재 관계자들을 몽땅 비리집단으로 몰아서는 안 된다. 그 사람들, 박봉에도 자긍심 하나로 일한다. 그런 식으로 논란만 일으켜서는 진짜 본질적 문제는 풀리지 않는다.” ―본질이라니? 숭례문 논란에 다른 측면이 있다는 얘긴가. “단청부터 보자. 일단 단청장을 포함해 관련자들 다 잘못했다. 전통기법은 실전(失傳)됐는데 경험도 없으면서 서둘렀다. 단청이 떨어진 것은 나무가 문제였을 수 있는데 그건 아무도 안 짚는다. 제대로 안 말린 나무를 써서 수축현상이 일어나 단청에도 영향을 줬을 가능성이 크다. 기둥도 쪼개지지 않았나. (문화재)청이 서두르고 지원을 제대로 안 했다고? 그것도 차차 따져봐야겠지만 그럼 대목장쯤 되는 사람이 왜 그때는 침묵했나. 시스템이 엉망이니까 서로 책임만 떠넘긴다.” ―시스템에 어떤 문제가 있는가. “일단 현장 목소리가 반영이 안 된다. 숭례문도 완공 시기나 방식에 대해 수십 년간 이 일에 종사한 ‘쟁이’들의 얘기를 들어야지. 먹물이랑 정치권이 왜 감 놔라 배 놔라 하나. 정부는 지원은 하되 간섭은 안 하는 걸 원칙으로 삼아야 한다. 이번 논란으로 문화재청장이 경질된 것 봐라. 명색이 한 기구의 수장인데 상의도 없이 위에서 뚝딱…. 처음에 임명할 때도 문화재계 의견은 전혀 수렴되지 않았다. 정부는 이제라도 생색내기 관두고 솔직히 까놓고 일처리를 해야 한다. 괜히 국민 눈높이만 올려놓지 말고.” ―어떤 점을 정확하게 전달하지 않았다는 얘긴가. “냉정하게 말하자. 숭례문 복원 부실? 그게 우리 현실이다. 현재 한국 수준이 딱 그 정도다. 문화재가 시대를 앞서갈 거라는 기대는 접어야 한다. 사회가 발전해야 문화재도 바뀐다. 그렇다고 비관적이 될 필요는 없다. 반대로 보면 개선하고 나아질 여지도 있다는 뜻이다. 숭례문도 하나씩 고쳐 나가면 된다.” ―이번 논란들이 문화재계 자성의 기회가 되지 않을까. “이제 그런 추상적인 얘기는 관두자. 관련법을 손보면 된다. 위에서 탁상공론을 접고 관련 전문가들과 심도 있게 논의해 법부터 바꾸자. 적절하게 처우 개선하고 일벌백계하면 잡음도 없어진다. 지적도 신중해야 한다. 문제 제기야 언제든 환영이지만 사실만 갖고 얘기하자. 아니면 말고 식의 태도는 결국 스스로를 겨누는 칼이 된다.” 흥선 스님은 2시간을 넘기며 열변을 토하더니 “하도 답답해 인터뷰를 자청했다. 국민도 알 건 알아야지”라며 그제야 찻잔을 들었다. 무엇이 평정심을 지향하는 불제자의 마음을 이리도 흔들었을까. 매서운 겨울바람이 코끝을 아렸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

    • 2013-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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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개미가 불을 다룰 줄 알았다면…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혹시 대중가요가 떠오르는가. 조용필의 ‘어제 오늘 그리고’를 떠올렸다면 요즘 세대는 아닐 터. 사실 이 철학적 질문은 프랑스 화가 폴 고갱(1848∼1903)이 그린 작품 제목이다. 타이티 섬을 배경으로 인간의 삶을 향해 본질적 질문을 던지는 걸작이다. 하버드대 석좌교수로 ‘통섭’ ‘개미’를 집필해 국내에서도 지지층이 상당한 세계적 생물학자인 저자가 고갱의 이 그림을 화두로 삼은 이유는 자명하다. 여든네 살의 노학자는 자신이 평생을 바쳐 연구한 인간의 근원을 이제 결론짓고 싶어 한다. 인류는 어떻게 진화했고, 왜 이 땅을 지배하는 정복자가 되었는지를. 진화생물학에서 인간이 현 문명을 이룬 것은 정말 우연에 우연이 겹친 일이었다. 지구에는 인류 이전에 번성했다가 사라져 간 생물 종이 무수히 많았다. 호모사피엔스보다 앞선 여러 영장류도 상당 수준 진화했다가 마지막 계단을 딛고 올라서지 못했다. 이 지극히 낮은 확률 탓에 종교는 신이 인간을 선택했다는 논지를 펴곤 한다. 하지만 저자는 제로에 가까웠던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최상위로 진화할 수 있었던 요인이 숨어 있다고 봤다. 예를 들어 훨씬 먼저 고도의 사회 조직을 이룬 개미나 벌들은 작은 덩치 탓에 불을 사용할 수 없었다. 게다가 인간은 모든 정상적 구성원이 번식 능력을 지녔고, 이를 위해 경쟁하는 체제를 이뤘다. 경쟁은 다툼도 야기하지만, 연대와 동맹도 양산한다. 이는 절대적 위계질서와 혈연관계로 이뤄진 개미와 달리 유동적 구조라는 점을 염두에 둬야 한다. 전략과 상황에 따라 속임수와 배신은 물론이고 호혜와 이타성도 끼어들 여지가 있다는 얘기다. 이쯤에서 저자는 인간의 본질을 다시금 정리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한다. 흔히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로 대중에게 각인되어 온 유전자의 진화만으로는 인간의 번영은 불가능했다고 설파한다. 종족을 퍼뜨리려는 유전자의 개체적 본능과 사회공동체의 집단적 협력이 상생 작용을 일으킨 덕분에 인류는 여타 생물들을 제치고 왕좌에 오를 수 있었다. ‘지구의 정복자’는 엄청나게 논쟁적인 책이다. 그것도 핵폭탄 급이다. 동의하건 안 하건 누구나 이 정도 주장은 펼칠 수 있지 않나 싶겠지만, 그게 다름 아닌 에드워드 윌슨이었기 때문이다. 저자는 오랜 세월 유전자의 단일적 관점으로 진화를 설명하는 ‘혈연선택’의 주창자다. 1975년 ‘사회생물학’이란 책으로 진화생물학의 토대를 이뤄 낸 주인공이다. 그런 그가 돌연 학계에서는 ‘집단선택’이라 부르는 유전자와 집단의 상호 영향을 강조하는 학설로 돌아선 것. 비유를 하자면 교황이나 추기경을 지낸 분이 여든 넘어 불교나 이슬람으로 개종하겠다고 선언한 충격과 진배없다. 그런데 그의 제자로 책을 감수한 최재천 이화여대 에코과학부 석좌교수에 따르면 저자의 전향(동료에겐 변절)은 어느 정도 예상됐던 ‘커밍아웃’이었던 모양이다. 1994년 ‘자연주의자’ 출간 때부터 윌슨 교수는 유전자의 혈연 선택에 불편한 감정을 지니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다 2005년 미국 텍사스에서 열린 학회에서 공개적으로 입장을 드러내더니, 급기야 2010년 ‘초협력자’를 쓴 마틴 노왁 하버드대 수학과 교수와 함께 네이처에 혈연선택을 공격하는 논문을 게재하기에 이른다. 이에 대표적 진화학자 156명이 반박 논문을 발표했고, 지난해 나온 ‘지구의 정복자’는 그 재반격을 총정리한 책이다. 솔직히 책의 주장이 썩 와 닿지는 않는다. 인용 사례들이 전작에서 익숙한 데다, ‘그게 아니니 이게 맞지 않나’라는 식의 몇몇 추론도 거슬린다. 이미 대세로 굳어져서가 아니라, 유전자 진화론의 견고한 논리를 깨뜨리는 결정적 근거도 약해 보인다. 그렇다고 윌슨 교수의 열정까지 폄훼할 수는 없다. 이미 일가를 이룬 대가가 업적과 명성에 안주하지 않고 스스로 열악한 이단의 길을 선택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더욱이 평생의 학문적 성과를 헌신짝처럼 내팽개치는 결의는 경이로울 정도다. 과거와 미래에 얽매이지 않고 오직 현재 도달한 결과로만 승부하려는 학자적 자세도 존중해야 한다. 어쩌면 윌슨 교수는 고육지책(苦肉之策)을 쓴 건 아닐까. 사실 진화론이 혈연선택으로 기울며 반대파, 특히 종교와는 만날 수 없는 루비콘 강을 건너 버렸다. 하지만 집단선택을 통해 진화가 유전자로만 결정된 게 아니라고 하면, 다시금 소통할 여지를 되살릴 수 있다고 여긴 것은 아닐지…. 나이가 지긋해지면 옳은 게 항상 다 옳은 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처럼. 속내야 알 수 없으나 이제 고민은 그만의 몫이 아니다. 이미 밥상은 엎어졌다. 학자들은 한판 붙건, 다시 상을 차리건 또다시 치열한 시대를 맞았다.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자못 흥미진진하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

    • 2013-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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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토요판 커버스토리]文史哲의 쓴웃음… 인문학의 참맛을 찾는 사람들

    “한국인이 처음 말한 사자성어가 중국 사전에 등재돼 있다는 걸 아세요? 바로 ‘유전무죄 무전유죄’입니다. 1988년 (인질범) 지강헌이 한 말이죠. 25년이 지난 현재, 정의는 얼마만큼 진보했을까요? 사마천이 던진 ‘천도(天道)는 과연 존재하는가’라는 질문과 연관시켜 고민해 봅시다.”(홍승태 경희대 후마니타스 칼리지 객원교수) 8일 오후 7시 서울 동대문구 경희대 청운관. 요즘 말로 ‘불금(불타는 금요일)’이건만 강의실에선 수업이 한창이었다. 그런데 40여 명의 수강생 중엔 머리가 희끗한 이가 많았다. 경희대의 교양 수업 과정인 ‘후마니타스 칼리지’의 교수들이었다. 로마 철학자 키케로가 ‘문명을 만드는 인간’이라는 뜻으로 만든 단어 후마니타스. 이 단어를 딴 이 과정의 교수들은 매월 1, 2회씩 모여 이런 워크숍을 연다. 학생에게 가르칠 내용을 함께 점검하고, 다른 전공 분야도 배울 기회를 갖자는 취지다. 교수 2, 3명이 주제를 발표하고 집단 토론을 하는 형식으로 진행되는데, 5∼6시간을 훌쩍 넘긴다. 이날도 도시락을 먹으며 토론에 한창이었다. “이건 약과죠. 지난해까지는 토요일 하루 종일 했어요. 가족의 원성이 하도 자자해 시간대를 옮긴 겁니다.”(유원준 사학과 교수)‘취업 준비생’이 아닌 ‘학생’ 길러 내는 인문학 교육 경희대는 2011년 1학기부터 후마니타스 칼리지를 운영하고 있다. ‘문사철’을 가르쳐 취업준비생이 아니라 진짜 공부를 하는 ‘학생’을 길러 내겠다는 계획이다. 신입생들은 1, 2학기 필수과목으로 이 과정을 들어야 한다. 수강생 중 최소 10%는 F학점을 받는다. 도정일 후마니타스 칼리지 대학장은 “배우려 하지 않는 선생은 제대로 가르칠 수 없다”며 교수 워크숍을 강조했다. 교양은 전공만 파고든다고 해결되는 게 아니다. 인문학은 물론이고 사회과학 자연과학 예술까지 망라하는, 영역 없는 교양을 연구하는 교수가 되자는 것이다. 인문학의 본질도 여기에 있다고 믿었다. 갓 입학한 신입생에게 해나 아렌트나 루쉰(魯迅)을 가르치는 건 ‘돼지 목에 진주 목걸이’였다. 하지만 1학기가 지나자 학생들의 ‘눈빛’이 달라졌다. 어린애 같던 말투가 바뀌고 어휘가 풍부해졌다. 삼삼오오 독서 모임도 만들었다. 요즘 세대는 책과 인문학을 싫어한다는 건 틀린 말이었다. 제대로 된 접근법을 몰랐을 뿐이다. 유재홍 후마니타스 행정실장은 “학생들이 만든 ‘아레테(Arete)’가 후마니타스 칼리지의 최대 성과”라고 말했다. 그리스어로 탁월함을 의미하는 아레테는 후마니타스 칼리지가 생긴 해 가을 자생적으로 만들어진 교양 수업 수강생들의 모임이다. 혼자서는 벅차니 함께 공부하자고 모이기 시작해 지금은 수백 명이 참여하는 동아리가 됐다. 지난해부터는 교육부의 ‘교육역량강화사업’ 대상으로 선정돼 지원금도 받는다. 요즘 아레테는 ‘감시와 처벌’(미셸 푸코)과 ‘나쁜 사마리아인’(장하준), ‘관촌수필’(이문구) 등을 읽고 토론한다. 도 학장은 “교수가 학생에게 씨앗을 뿌렸다면, 이제 학생에게서 교수들이 과실을 얻고 있다”고 말했다. 학생들의 자발성이 선생들에게도 인문학을 새롭게 받아들이는 계기가 됐다는 말이다. 전공 중심을 외치던 교수들도 점차 마음을 열었다.시대정신 고민하고 동시대인의 감성 이해하고 상아탑에서 인문학을 지키려는 노력은 다른 곳에서도 활발하게 나타나고 있다. 부산대엔 20년 가까이 이어진 연구 모임이 있다. 1995년 3월 시작한 ‘인문학담론모임’이다. 현재 강명관(한문학) 곽차섭(사학) 오경환(일문학) 윤애선(불문학) 김혜준 교수(중문학)가 주축이 되어 끌어가고 있다. 이 모임은 학생들이 졸업하고 마주할 한국 사회가 갈수록 첨예한 경쟁 사회로 변질되니, 인문학 교수들이 모여 고민을 나눠 보자는 취지로 시작됐다. 인문학에 내재된 ‘통섭’의 정신을 살리면 더욱 심도 깊은 공부를 할 수 있겠다는 욕심도 있었다. “분위기는 자유로웠지만 내용은 만만하지 않았습니다. 인문학은 물론이고 예술 정치학 경제학 사회학 천문학에 심지어 양자역학도 주제로 삼는 ‘끝장 토론’이었어요. 1년에 8번 정기적으로 모였지만 평소에도 수시로 논쟁을 펼쳤습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싸우는 줄 알았을 거예요. 거친 분위기에 적응 못 해서 떨어져 나간 교수들도 생겼습니다.”(강명관 교수) 하지만 2007년 6월 100회 모임을 가진 뒤 모임은 발전적 해체를 선언했다. 12년 정도 했으니 충분히 성과를 거뒀다는 자평도 있었지만, 순수연구모임을 ‘정치적’으로 보는 시각이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총장 선거가 다가오면 색안경을 끼고 보는 이가 적지 않았다. 3년 정도 휴식기를 가진 모임은 2011년 다시 시작됐다. 강 교수가 올해 초 펴낸 ‘침묵의 공장’(천년의상상)에서 갈파했듯 대학이 “학문은 국가에 시들고, 공부는 자본에 지치며 인문학이 굴종하는 시대”에 접어들었다는 위기감 때문이었다. 특히 인문학이 상업적으로 소비되는 세태에 대해 교수들이 함께 고민하고 대처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됐다. “인문학 서적이 잘 팔린다고 하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자기계발이나 힐링에 초점을 맞춘 ‘타깃형 인문서적’이 팔리는 겁니다. 기업 역시 이윤을 내기 위해 인문학을 이용하고 싶다는 바람이고요. 하지만 인문학의 생명은 비판성입니다. 기존 학문과 사회, 국가와 세계를 냉철하게 비판하는 힘을 기르는 것이 중요합니다.”(강 교수) 이 모임은 최근 ‘배의 침몰’에 관심을 갖고 있다. 여기서 배는 인문학이거나 한국 사회거나 세계 자본주의 체제일 수도 있다. 인류가 몸을 싣고 있는 기존의 그릇이 서서히 가라앉고 있는데 이를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는 진단이다. 강 교수는 “현대사회의 소비 지향적 흐름은 인문학의 부재 혹은 몰락과 무관치 않다”며 “정부와 사회, 대학이 이에 대한 책임감을 느끼고 변화를 서둘러야 한다”고 말했다. 전남대의 인문학 프로젝트 ‘감성인문학사업단’은 학내 호남학연구원 인문학자들이 주축이 돼 2008년부터 한국연구재단의 인문학진흥사업 지원을 받아 공동 연구를 하고 있다. 올해 그 첫 성과물인 ‘우리 시대의 슬픔’을 책으로 엮어 냈고, 지난달 두 번째로 ‘우리 시대의 분노’를 출간했다. 내년 2월 세 번째 ‘우리 시대의 사랑’을 내놓을 계획이다. 이들이 감성과 인문학의 결합에 주목한 이유가 뭘까. 인간을 공부하는 학문인 인문학이 시대의 감성을 놓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반성이 출발점이었다. 동시대를 살아가는 인간의 감성을 소홀히 다룸으로써 인문학의 위기를 유발했다는 자성이었다. 한순미 전남대 HK연구교수는 “감성을 인문학 이론으로 판단하자는 것이 아니라 인문학이 이런 감성을 학문의 주제로 삼아야 한다는 의미”라며 “기존의 틀을 깨지 않으면 인문학이 동시대인과 함께 갈 수 없다는 고민에서 나온 것”이라고 설명했다. 예를 들어 인간의 감성 중 하나인 분노는 최근 한국 사회에서 일상이 돼 버렸다. 정치나 산업 현장뿐 아니라 미디어와 인터넷에서도 분노가 넘쳐 난다. 하지만 이런 분노를 생산하는 사회의 물적 토대라든가 현실에 스며든 분노가 어떻게 자기 파괴를 일삼는지는 관심 밖이다. 이 사업단은 이런 감성을 확대하거나 은폐하는 이데올로기적 장치를 인문학에서 찾아야 한다고 본다. 한순미 교수는 “교수들의 세미나를 바탕으로 학생이나 일반 시민을 위한 기획 강좌를 주기적으로 열고 있는데 반응이 뜨겁다”며 “인문학이 시대정신을 치열하게 고민한다면 인문학은 강력한 생명력을 되찾을 수 있다고 믿는다”고 말했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

    • 2013-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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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익산 미륵사지 석탑 복원향한 첫돌 올려

    26일 오후 2시경 전북 익산시 금마면 미륵사지. ‘둥둥’ 북소리가 울렸다. 이의상 석장(중요무형문화재 제120호)이 손을 들자 월주 스님(전 조계종 총무원장)과 박성일 전북도 행정부지사, 이한수 익산시장을 비롯한 참석자들이 광목천을 당겼다. 탑 기둥 받침돌인 1.2t의 심초석(心礎石)이 서서히 움직여 탑 터 중심에 놓이기 시작했다. 1915년 일제가 콘크리트로 땜질한 지 약 100년. 익산 미륵사지 석탑(국보 제11호)의 부활을 알리는 서막이 열렸다. 이날 현장에는 흐린 날씨에도 백제 무왕(600∼641)이 창건한 삼국시대 최대 사찰 터가 시원하게 펼쳐져 있었다. 서탑(西塔)에 해당하는 미륵사지 석탑은 현재 터만 남은 채 보수공사 가건물이 들어섰다. 주위엔 탑을 해체하고 나온 돌 부재 2500여 개(총 중량 1800t)가 끝도 없었다. 최종덕 문화재청 정책국장은 “해체 전 높이 14.6m, 너비 12.5m의 규모였다”며 “국내 현존하는 최고(最古), 최대 석탑의 위용을 실감하게 한다”고 설명했다. 이날 심초석을 놓는 정초식(定礎式)은 1999년 해체 보수가 결정된 지 14년 만에 닻을 올린 복원의 첫발이었다. 긴급 보수가 이뤄진 일제강점기 이후 미륵사지 석탑은 몸체 절반을 콘크리트로 발라 다소 흉물스러웠다. 무너지기 직전인 탑을 당시로서는 최신이던 시멘트 공법으로 형태만 잡아놓은 것. 하지만 1998년 안전검사에서 붕괴 우려 판정을 받고 대수술에 들어갔다. 2001년 10월 본격적으로 시작한 해체는 10년 넘게 걸리는 대공사였다. 오랜 세월 석탑과 눌어붙은 콘크리트를 제거하는 게 가장 까다로웠다. 문화재청은 일일이 정으로 쪼아서 떼어내는 수작업을 선택했다. 국립문화재연구소 건축문화재연구실의 김영철 사무관은 “탑 부재에 최대한 상처를 주지 않으려다 보니 시간이 많이 걸렸다”고 말했다. 다시 쌓는 일도 만만치 않다. 기단 계단과 2층 옥개석(屋蓋石·석탑 지붕돌) 정도만 새로 만들고 나머지는 해체 직전 6층 무너진 형태로 돌아간다. 관건은 불완전한 탑을 유지하는 접착 소재였다. 연구 끝에 치아 시술 재료로도 쓰는 티타늄 합금을 사용하기로 했다. 문화재청은 “콘크리트보다 접합 강도가 높고 조형미도 살리려는 방안”이라고 밝혔다. 건립 당시 9층으로 추정되는 탑을 6층으로 복원하는 이유는 뭘까. 탑 전체의 정확한 형태를 알 근거가 없는 데다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여부가 걸려 있기 때문이다. 미륵사지 석탑은 2015년 등재를 기대하는 ‘백제역사유적지구’의 핵심인데 과도한 복원은 치명적 감점 요소가 될 수 있다. 각계각층 5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이제 막 초석을 놓은 석탑은 이르면 2016년 8월 말 다시 우리 품으로 돌아온다. 이날 인근 미륵사지유물전시관에서는 ‘미륵사지 석탑 사리장엄 특별전’이 개막했다. 2009년 1월 해체 도중 발견된 사리장엄(舍利莊嚴) 일체를 내년 3월 30일까지 전시한다.익산=정양환 기자 ray@donga.com}

    • 2013-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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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겸재정선화첩 21점 全작품 일반에 첫 공개

    영구대여 형식으로 국내에 환수된 조선화가 겸재 정선(1676∼1759)의 ‘겸재정선화첩’ 21점이 사실상 처음으로 일반에 공개된다.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이사장 안휘준)은 25일 “화첩을 연구한 총서 ‘왜관수도원으로 돌아온 겸재정선화첩’을 발간하며, 26일부터 국립고궁박물관에서 화첩 진본을 만날 수 있다”고 밝혔다. 겸재정선화첩은 그간 몇몇 그림이 전시됐으나 21점을 한자리에서 소개하는 것은 처음이다. 내년 2월 2일까지 이어지는 이번 특별전에서는 일주일에 1점씩 진본을 소개하고, 나머지 20점은 영인본으로 전시한다. 묶여진 화첩을 한꺼번에 펼칠 수 없기 때문이다. 연구총서에서는 대표작으로 꼽힌 ‘금강내산전도’와 ‘만폭동도’ ‘구룡폭도’ 이외의 그림들에 대한 상세한 설명이 곁들여졌다. 특히 ‘함흥본궁송도’(사진)와 ‘연광정도’는 실재 경관을 그리는 진경산수(眞景山水)의 창시자인 겸재가 직접 풍경을 보지 않고 그린 드문 케이스다. 함흥본궁송도는 태조 이성계가 고향집에 심었다는 소나무를, 연광정도는 당시 평양성에 있던 연광정(練光亭)을 그린 그림이다. 정양환 기자 ray@donga.com}

    • 2013-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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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佛 한국유물, 캐비닛 속에 찬장그릇처럼 쌓여 있었다

    《 18일 오후 프랑스 파리에 있는 국립 기메 동양박물관 지하 2층. 피에르 캉봉 수석학예연구원이 ‘한국(Cor´ee)’ 이라고 적힌 수장고 문을 여는 순간 눈앞이 환해졌다. 고려불화 ‘수월관음도(水月觀音圖)’와 ‘아미타내영도(阿彌陀來迎圖)’를 중심으로 고려청자와 조선목기, 민화들이 즐비했다. 한국 언론에 첫 공개한 수장고에는 한국 유물 1000여 점을 소장했다는 기메 박물관답게 휘황찬란한 보물들이 빼곡했다. 하지만 반가움도 잠시, 이내 안타까움이 몰려왔다. 수장고 방문 직전 둘러본 한국 전시실에는 100여 점만 전시된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나마 2001년 한국실을 세 배(360m²)로 확장해 늘어난 것이었다. 일반 관객이라면 나머지 900여 점은 파리에 가도 볼 수 없다는 뜻이다. 캉봉 연구원은 “1만5000여 점씩 있는중국과 일본에 비하면 소장 유물 대비 전시실이 매우 넓은 편”이라고 설명했지만, 위로가 되진 않았다. 》사정은 제3세계 유물로 명성 높은 게브랑리 박물관이나 프랑스가 자랑하는 관요(官窯)의 중심 세브르 도자기전당도 엇비슷했다. 각각 700여 점, 250여 점의 한국 문화재를 소장했지만 전시 수량은 겨우 3점과 30여 점이었다. 19일 방문한 파리시립 체르누치 아시아유물박물관은 이응로 화백(1904∼1989)의 작품을 120여 점이나 갖고 있지만 전시관에는 단 1점도 걸려 있지 않았다. 다만 다행스러운 것은 조만간 이런 아쉬움을 달랠 기회가 잦아질 것이라는 점이다. 최근 한류를 타고 프랑스에서도 한국에 대한 관심이 드높아진 덕분이다. 특히 2014년 한-프랑스 수교 130주년을 맞아 많은 프랑스 박물관들이 너도나도 특별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기메 박물관이나 세브르 도자기전당은 물론이고 한국과 딱히 연관성을 찾기 힘든 파리 장식박물관도 마찬가지였다. 14일 만난 올리비에 가베 장식박물관장은 “한국의 전통장식 공예가 1, 2명은 이미 섭외가 마무리되고 있는 상황”이라며 “한국의 과거와 현대를 아우르는 아름다운 전시로 파리 시민을 사로잡을 것”이라고 말했다. 관건은 지속성이었다. 유럽, 특히 프랑스에서 중국과 일본은 이미 한때의 트렌드를 넘어 엄연한 문화사조로 자리매김한 지 오래다. 소장 문화재를 산술적으로만 따져 봐도 기메 박물관은 15배 이상 차이가 났다. 세브르 도자기전당도 양국 유물을 수천 점씩 갖고 있었다. 18세기 중국, 19세기 일본풍(風) 유행이 불었던 것을 감안해도 상대적 격차가 컸다. 세브르 도자기전당의 다비드 카메오 총관장은 “한국 특별전이 성공하고 관심이 증폭된다면 한국 유물 전시 대우도 달라질 것”이라고 말했다. 일련의 전시들이 일회성 이벤트로 끝날 수도 있다는 뉘앙스가 깔린 발언이었다. 이런 우려는 곳곳에서 감지됐다. 13일 세브르 도자기전당 수장고를 찾았을 때 담당 학예사는 유물들이 어느 시대 것인지도 제대로 설명하지 못했다. 방습, 방진 시설도 갖추지 못한 캐비닛에 여염집 부엌 찬장처럼 문화재가 쌓여 있었다. “한국 유물이 가장 매력적”이라는 말은 립 서비스로 들렸다. 700여 점이나 소장한 게브랑리 박물관은 구한말 것으로 짐작되는 여성 저고리 3점만 상설 전시했다. ‘가장 오래된 한국 유물은 뭔가’라는 질문에는 “홈페이지에서 검색하면 찾을 수 있다”는 대답만 돌아왔다. 전문가들은 상황이 이런 만큼 한국 정부와 기업의 관심이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파리1대학(팡테옹 소르본) 문화재보존복원학과의 정수희 박사는 “수교 130주년이란 좋은 기회를 맞은 만큼 학술 교류를 통해 공동 보존연구를 확대해야 한다”며 “일본이나 중국이 정부 기업의 지원을 바탕으로 독자적 영역을 구축했음을 벤치마킹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크리스틴 시미지 체르누치 박물관장도 “오히려 1970년대까지는 다양한 교류가 지속되다가 (한국이 경제적으로 발전한 뒤에) 네트워크가 끊겼다”며 “프랑스 문화계도 최근 악화된 경제 상황으로 분위기가 뒤숭숭한 만큼 틈새를 공략하는 혜안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 기사는 한국언론재단이 10∼20일 프랑스에서 진행한 ‘KPF 디플로마-문화재 보존과 복원’ 연수과정을 통해 취재가 이뤄졌습니다.파리·세브르=정양환 기자 ray@donga.com}

    • 2013-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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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립중앙박물관 새 청자실, 교과서에 나온 청자 총출동

    고려청자의 진수를 담은 국립중앙박물관 청자실이 26일 1년의 준비 끝에 재개관한다. 박물관 측은 “기존 벽과 진열장 색상을 모두 교체하고 조명기구도 유물 본연의 색을 최대한 감상할 수 있도록 바꿔 청자의 진면목을 충분히 맛볼 수 있도록 개편했다”고 밝혔다. 기존 청자실은 60여 점 정도만 전시가 가능했으나 이번 리노베이션으로 국보 11점과 보물 6점을 포함해 모두 160여 점을 한꺼번에 만날 수 있다. 국보 제60호 ‘청자 사자형 뚜껑 향로(靑磁 獅子形蓋 香爐)’, 제96호 ‘청자 구룡형 주전자(靑磁 龜龍形 注子)’, 제114호 ‘청자 상감모란국화문 참외모양 병(靑磁 象嵌牡丹菊花文 瓜形 甁)’ 등이 추가 전시된다. 이번 전시실 개편의 핵심은 고려청자의 ‘비색’과 ‘상감’을 좀더 세밀하게 살필 수 있도록 유물을 배치했다는 점이다. 비색에 초점을 맞춘 ‘색과 조형’, 상감기법에 집중한 ‘장식과 문양’으로 2개의 방을 따로 만들었다. 장성욱 미술부 학예연구사는 “일부 중첩되기도 하지만 색을 중시했던 시기와 상감에 관심을 쏟았던 시기가 고려 전기와 후기로 구분된다”며 “순차적으로 관람하면 고려인의 청자에 대한 미의식의 흐름이 변화하는 과정도 자연스레 배울 수 있다”고 말했다. 정양환 기자 ray@donga.com}

    • 2013-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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