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하기
올해 골든글로브상은 뮤지컬 영화 ‘라라랜드’가 휩쓸었다. 골든글로브 역사상 가장 많은 7개 부문을 수상했다. 며칠 전 영화관에서 라라랜드를 혼자 보면서 가슴 한구석이 따뜻해지면서도 텅 빈 것 같은 모순된 감정에 젖었다. 내가 꿈꾸던 꿈들은 어디로 갔을까. 나는 지금 사랑하는 사람과 살고 있을까? 마누라가 들으면 큰일 날 소리겠지만, 잃어버린 꿈과 사랑을 돌아보게 만드는 영화였다. 라라랜드는 1950∼60년대 뮤지컬 영화의 매력을 마법처럼 되살렸다. 그러나 주인공들의 고민은 요즘 밀레니얼 세대의 그것에 더 가깝다. 예전 영화 속 커플들은 어떤 어려움과 희생을 치르더라도 반드시 사랑을 쟁취하고야 말았던 것과 달리, 라라랜드의 남녀 주인공은 사랑에 빠졌지만 꿈도 포기할 수 없다. 이들의 꿈은 단순히 돈을 벌기 위한 안정적인 직장이 아니다. 밀레니얼 세대에겐 진정한 ‘자아실현’이 중요하다. 부모 세대였다면 사랑을 위해 남자는 월급쟁이가 돼야 하고, 여자는 커리어를 포기했을 것이다. 평생을 지지고 볶고 살다가 어느덧 남자도, 여자도 꿈을 잃어버린 사실을 발견할 것이다. 그러나 라라랜드의 두 주인공은 먼저 서로의 진정한 꿈을 이루길 응원한다. 그러면서 사랑도 쿨하게 떠나보낸다. 요즘 결혼하지 않고 사는 1인 가구, ‘혼밥 혼술’ 남녀가 괜히 많아지는 게 아니다. 아름다운 음악, 화려한 군무와 탭댄스가 눈요깃거리지만 내 가슴에 남은 것은 남자 주인공의 말이다. 커피숍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배우 오디션을 보지만 번번이 실패하는 여자친구에게 그는 이렇게 말한다. “위기는 인생이 내게 던지는 펀치야. 코너에 몰리더라도 펀치를 절대 피하지 않아야 해. 내가 위기를 좋아하는 이유는 마지막에 카운터펀치 한 방을 날릴 수 있기 때문이야.” 삶의 펀치에 두들겨 맞아도, 절망에 빠져도, 다리에 힘이 풀릴 것 같아도 결국 쓰러지지 않는 것은 자존감 때문이다. ‘이 한 방에 쓰러질 내가 아니다’라는 자신에 대한 사랑이다. 베스트셀러 ‘자존감 수업’의 저자인 정신건강의학과 의사 윤홍균은 “자존감은 집과 같은 것이다. 마음을 공격하는 수많은 비난과 비교, 열악한 외부 상황은 일종의 악천후다. 아무리 현실이 고돼도 집이 안락하면 견딜 수 있다”고 말한다. 새해 동아일보 문화부가 연재하고 있는 ‘희망바라기’ 시리즈의 주인공들도 마찬가지 이야기를 들려준다. 올해 데뷔 20년을 맞은 발레리나 김지영은 “무릎 수술 등 숱한 시련을 겪다 보니 남들과 다른 공감 능력이 생기는 것 같다”며 현역 최고령 무용수의 역사를 써나가고 있다. 몽골에서 기타 하나로 외로움을 달랬던 남매 가수 ‘악동뮤지션’은 “별(희망)은 눈에 안 보일 뿐이지, 사라지지 않아”라고 노래한다. 올해 대한민국도 소나기처럼 쏟아지는 펀치를 맞으며 시작했다. 대통령이 탄핵 소추로 업무가 정지된 사이에 미국과 중국, 일본의 ‘스트롱맨’들의 외교적 위협이 거세다. 경제는 1997년 외환위기 때보다 3배 어려운 ‘퍼펙트 스톰’에 휩싸일 것이라는 경고가 나온다. 문화계도 새해 벽두부터 출판계 유통회사 부도, 블랙리스트 파문으로 만신창이 상태다. 그럼에도 희망을 말하고 싶다. 쏟아지는 펀치를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맞선다면, 우리에게도 개혁의 기회가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1987년 6월 민주항쟁, 1997년 외환위기 때 민주화와 경제개혁을 이뤄서 지난 20∼30년을 버텨 왔듯이, 올해의 총체적 위기에서도 대한민국이 새롭게 거듭나는 ‘반격의 한 방’을 준비할 것으로 기대한다. 전승훈 문화부 차장 raphy@donga.com}
국내 개신교 주요 7개 교단이 중심이 된 가칭 ‘한국교회총연합회’(한교총)가 9일 오후 2시 서울 중구 정동제일교회에서 감사예배를 올리고 정식으로 출범했다. 한교총에는 대한예수교장로회(예장) 통합과 예장 합동, 예장 대신, 기독교대한감리회(기감), 기독교대한성결교회(기성),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기하성), 기독교한국침례회(기침) 등 7개 주요 교단을 비롯해 기독교한국루터회, 대한예수교복음교회 등 총 15개 교단 교단장이 함께하기로 했다. 이 교단들은 교세 면에서 한국 교회의 95% 이상을 차지해 한국 개신교 최대 연합기관이 될 것으로 전망된다. 한교총은 이날 창립선언문에서 한교총의 출범은 한국교회연합(한교연)이 갈라져 나오기 이전의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로 복귀하는 것임을 명시했다. 한기총과 한교연은 본래 한 기관이었으나 2011년 대표회장직을 둘러싼 금권 선거 논란이 일며 둘로 쪼개졌다. 분열 후 두 단체는 각각 보수 개신교계를 대변하는 역할을 맡아 왔으며 이에 통합 필요성이 꾸준히 제기됐다. 그러나 한교총이 출범하더라도 개신교 통합을 위한 기구로서 역할을 지속적으로 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 제기되기도 한다. 전승훈기자 raphy@donga.com}
올해 출가 70주년을 맞은 쌍계총림 방장 고산 스님(사진)의 ‘돈황본 육조단경 강의’가 출간됐다. 고산문화재단(이사장 영담 스님)과 쌍계총림은 고산 스님의 법문을 경전별로 엮어 ‘쌍계총림신서’를 펴낸다. 쌍계총림 쌍계사 주지 원정 스님은 5일 서울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연 기자간담회에서 “부처님 가르침을 널리 알리는 전법과 생사해탈을 위한 경문, 돈오법 수행을 널리 알리기 위해 고산문화재단과 함께 ‘쌍계총림신서’를 발간한다”고 말했다. ‘쌍계총림신서’는 고산 스님이 1948년 출가 후 제방의 강원에서 논강한 경전과 율장, 선어록 강의와 법회에서 한 법문 등을 집대성한 출판물이다. 원정 스님은 “고산 스님의 경전 강의는 수행자로서 실천과 강백으로서 강의, 학자로서 연구에 매진해 온 평생 실천수행의 결과물”이라고 전했다. 6일 발간된 ‘돈황본 육조단경 강의’는 육조 혜능 스님의 가르침을 담은 내용이다. 고산 스님이 20여 년 전 스님들 공부모임인 ‘명심회’ 스님들에게 했던 20회 분량의 강의를 엮은 것이다. 고산 스님의 ‘육조단경 강의’는 돈황본을 저본으로 하고 대승사본, 덕이본, 흥성사본, 종보본 등 다른 본을 비교해 빠지거나 잘못된 부분을 바로잡고 해석했다. 고산 스님의 강의는 동서양을 넘나드는 불교 일화와 근현대 스님들의 일화 등이 풍부하게 들어 있는 점이 특징이다. 고산 스님은 ‘육조단경’을 강의하면서 “혜능선사는 법과 부처님이 둘이 아니고 하나이며, 중생과 부처님이 일체라고 하셨다. 또 도를 닦는 이나 속인이나 둘이 아니라 하나라고 선언하셨다”며 “껍데기만 보지 말고 알맹이를 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고산문화재단 이사장 영담 스님은 “조계종 수행 가풍을 선양하기 위해 ‘육조단경’으로 쌍계총림신서 발간을 시작했다”며 “계율정신으로 돌아가자는 취지에서 ‘범망경’을 음력 3월 쌍계사 보살계 법회에 맞춰 발간하고, 조계종 소의경전인 ‘금강경’을 풀이한 ‘금강경오가해’를 차례로 펴낼 것”이라고 했다. 또 내년에는 ‘법화경’ ‘능엄경’ ‘대승기신론’ ‘유마경’을 계획하고 있다. 범패와 어산 의식에 관한 책도 발간할 예정이다. 고산 스님은 조계사와 은해사, 쌍계사 주지를 역임했고 1998년에는 조계종 총무원장을 지냈다. 2013년 쌍계총림 초대 방장으로 추대됐다.전승훈기자 raphy@donga.com}
“올해는 종교개혁 500주년입니다. 2019년은 3·1운동 100주년입니다. 한국 교회가 종교개혁의 해를 맞아 좀 더 정신 차리고, 사회개혁에 더욱 시선을 돌리는 계기가 됐으면 합니다.” 대한예수교장로회(예장) 통합 교단의 이성희 총회장(68)은 5일 열린 간담회에서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는 소회를 이렇게 밝혔다. 이 총회장은 “엄밀히 말하면 올해는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이 500주년 되는 해”라며 “그보다 앞서 한 세기 전에 얀 후스가 있었고, 장 칼뱅이 이어가는 등 종교개혁은 마르틴 루터 혼자서 이룬 것은 아니다”라고 덧붙였다. 그는 “루터의 종교개혁이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원리적 측면에 집중했다면 칼뱅의 종교개혁은 사회개혁, 사회운동적 측면이 강했다”고 했다. 칼뱅의 신학 노선을 따르는 장로교회가 사회개혁에 보다 더 중점을 둬야 한다는 말도 이어졌다. 올해 종교개혁 500주년을 계기로 일어나는 한국 개신교회의 개혁 노력이 3·1운동 100주년을 맞는 2019년까지 이어져야 한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1919년 3·1운동 당시만 해도 개신교는 독립운동을 이끌며 민족에게 사랑을 받았습니다. 당시 20만 신자들이 3·1운동을 주도했지요. 민족대표 33인 중 개신교인이 많았고 지방에선 교회들이 독립운동의 거점이었습니다.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개신교가 변화하고 개혁된 모습으로 민족의 사랑을 받을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이 총회장은 또 “한국 경제가 압축성장을 하는 과정에서 노동현장의 문제 등이 발생했듯 한국 교회도 성장하면서 주위를 살피지 못했다”며 “오늘날 한국 사회가 교회를 외면하는 것은 교회가 사회를 외면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역설적이지만 교회가 ‘성장 신드롬’에서 벗어나야 비로소 성장할 수 있다”며 외형적 성장보다는 내면적 성숙을 이루는 교회가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개신교의 오랜 과제로 꼽히는 교회 통합에 대한 의견도 나왔다. “현재 개신교 23개 교단이 참여하는 ‘한국교회총연합회(한교총)’ 출범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기득권을 내려놓고 하나로 되기 위한 개혁정신이 그 어느 시기보다 필요합니다.” 한교총은 9일 서울 정동제일교회에서 출범을 위한 예배를 가질 예정이다. 이 총회장은 1985년부터 3년간 미국 남캘리포니아 동신교회 담임목사를 지냈으며 1990년부터 종로 연동교회에서 담임목사로 시무하고 있다. 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진단검사 의학의 개척자이자 헌혈 운동의 선구자인 고 김기홍 전 한양대 의대 교수의 일생을 그린 전기 ‘의당 김기홍’(더숲)이 출간됐다. 서울대 의대를 졸업하고 미국 유학 후 국립중앙의료원 창설에 기여했고, 수도의과대(고려대 의대 전신) 병리학 교수를 지냈다. 그는 국내에선 낯설던 진단검사 의학(환자의 가검물을 통해 병의 원인을 찾는 것)을 독립된 분야로 발전시켰다. 그는 또 1968년 한국헌혈협회를 창설해 당시 돈을 받고 피를 파는 매혈 문화를 단시간에 헌혈 문화로 바꿔 놓는 데 기여했다. 1972∼86년 한양대 의대 재직 시 의료 서비스 개념을 도입하기도 했다. 이런 공로로 그는 1986년 대한민국학술원 정회원에 추대됐다. 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2017년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 한국교회 개혁실천 신년기도회가 8일 오후 5시 서울 여의도순복음교회에서 열린다. 이 기도회는 ‘우리는 한국교회 인테그리티(정직, 청렴, 고결)를 실천하겠습니다’를 주제로 열리며 종교개혁500주년성령대회(대회장 소강석 목사)와 세계성령중앙협의회(대표회장 배진기 목사)가 주최하고 한국교회개혁실천위원회(명예위원장 민경배 이영훈 목사)가 주관한다. 신년기도회에서는 종교개혁 500주년과 평양장대현교회 성령대부흥 110주년을 맞아 한국교회 개혁 선언을 위한 공동기도를 한다. 전승훈기자 raphy@donga.com}
박근혜 대통령이 2014년 5월 세월호 참사 이후 국가 대개조를 위한 대국민 담화에서 “낙하산 인사를 하지 않겠다”라고 발표했으나 다음 날 당시 김기춘 대통령비서실장이 낙하산 인사 청탁을 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유진룡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60·사진)은 27일 CBS 라디오 ‘시사자키 정관용입니다’를 통해 “2014년 5월 19일 박 대통령이 대국민 담화를 통해 ‘관피아의 폐해를 끊겠다’고 밝혔으나 다음 날 김 전 실장이 방송인 자니 윤(본명 윤종승·80)을 한국관광공사 상임 감사로 임명하라며 낙하산 인사를 종용했다”라고 밝혔다. 유 전 장관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어 나흘 뒤 자니 윤을 직접 만나 관광공사 상임 감사가 아닌 홍보대사를 제안했고, 자니 윤도 이를 받아들여 모철민 당시 대통령교육문화수석을 통해 김 전 실장에게 전달했다”라며 “그러자 김 전 실장이 ‘시키는 대로 하지 왜 자꾸 쓸데없는 짓을 하느냐’며 ‘그대로 하라’고 지시했다”라고 밝혔다. 유 전 장관은 ‘체육계 황태자’였던 김종 전 문체부 2차관이 청와대를 거쳐 인사 청탁을 한 사실도 밝혔다. 그는 “김 전 차관이 체육 관계자 인사 청탁을 해 ‘청와대 공직인사위원회에서 통과될 수 없는 인물’이라고 거절하자 김 전 차관이 ‘그건 자기가 해결하겠다’고 답했고, 다음 날 김 전 실장이 바로 (같은 인물의 인사 청탁) 전화를 줬다”라고 말했다. 유 전 장관은 “김 전 차관이 최순실에게 얘기했고 누군가를 통해 김 전 실장에게 전한 것 같다”라며 “평소 김 전 차관이 ‘김기춘 실장이 자신의 배경이다’라고 말하고 다녔다”라고 덧붙였다. 유 전 장관은 또 박 대통령이 세월호 참사 이후 국무회의에서 장관 등 국무위원들과 한마디 상의 없이 해경 해체 등의 정부조직 개편안을 발표했다고 밝혔다. 유 전 장관은 “당시 국무회의에서 박 대통령에게 정부 조직 개편같이 중요한 문제를 국무위원들과 한마디 상의도 하지 않고 결정하는 것은 굉장히 위험한 일이라고 문제를 제기하자 박 대통령이 크게 역정을 냈다”라고 말했다. 그는 “박 대통령이 ‘그러면 내가 대한민국 모든 사람의 얘기를 다 들으라는 거냐’며 화를 냈다”라며 “박 대통령은 국무위원들이 돌아가면서 한마디씩 하는 게 토론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라고 말했다. 유 전 장관은 또 반정부적 문화예술계 인사 명단이 담긴 이른바 블랙리스트 논란과 관련해 “김 전 실장이 취임한 2013년 8월 이후 이런 일들이 일어났다”라고 말했다. 블랙리스트에는 고은 시인도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김정은 kimje@donga.com·전승훈 기자}
“고난을 함께 나눌 수는 있어도 태평성대의 즐거움(樂)을 나누지는 못할 인물이다.” 사마천의 사기(史記)에는 월나라와 오나라의 치열한 싸움이 나온다. 오나라에 패했던 월나라의 왕 구천이 3년간의 ‘와신상담(臥薪嘗膽)’ 끝에 드디어 복수에 성공했다. 이때 승리의 일등공신이었던 월나라의 재상 범려는 자신이 모시던 왕 구천을 떠나며 위와 같은 말을 남겼다. 회사에서나 가정생활에서도 이런 사람들이 꽤 많다. 어려울 땐 믿고 따를 만한 사람이었는데, 함께 즐기기엔 힘든 사람이다. 회식 자리에서 혼자만 술을 너무 마셔 분위기를 망치는 직장 상사, 모처럼 가족 나들이에 돈도 제대로 쓸 줄 모르고 싸우다가 ‘다시는 함께 놀러오나 봐라’고 씩씩대는 부부들…. 문화적 소양을 갖추지 못한 권력자나 졸부들에게 갑자기 닥친 즐거움은 무절제한 부패 스캔들로 귀결되게 마련이다. 올해 동아일보 문화부는 한 해를 결산하는 시리즈의 제목을 ‘2016 문화계 오樂가樂’으로 붙였다. 즐거움이 오고, 가는 연말연시에 우리 문화계를 돌아보자는 취지다. 조선시대에도 임금과 백성이 함께 즐기는 문화인 ‘樂’은 국정의 가장 중요한 과제 중 하나였다. 박근혜 정부가 ‘문화융성’을 국정기조로 내세웠지만, 바로 문화 분야에서 발생한 스캔들로 몰락하게 된 것도 의미심장하다. 문화융성에 대한 깊은 철학이 없이 그저 ‘문화로 돈을 버는 것’으로 치부한 천박함이 최순실 게이트를 불러왔다. 김기춘 전 대통령비서실장이 청와대 직원들에게 지시한 업무지침도 어처구니가 없었다. ‘야간의 주간화’ ‘휴일의 평일화’ ‘가정의 초토화’ ‘라면의 상식화’라니…. 북한의 ‘4대 군사노선’을 방불케 하는 시대착오적 지침으로 어떻게 ‘국민행복’과 ‘저녁(문화)이 있는 삶’을 실현할 수 있을 것인가. 21세기 4차 산업혁명 시대에 필요한 것은 ‘문화의 산업화’가 아니라 ‘산업의 문화화’다. 문화로 돈을 벌려 하기보다는, 일과 산업이 즐거움 그 자체가 돼야 한다는 뜻이다. 한국이 1인당 국민소득 3만 달러 문턱에서 번번이 좌절하고 있는 것은 개발시대의 사고방식을 버리지 못한 탓이다. 요즘 촛불집회에서 가장 많이 불리는 노래 중 하나는 뮤지컬 ‘레미제라블’에 나오는 ‘민중의 노래’다. 이 노래의 배경은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이 끝난 후 41년이 지난 1830년이다. 대혁명이 일어났지만 민중의 삶에 당장 큰 변화는 오지 않았고, 장발장은 먹을 것이 없어서 빵을 훔쳐야 했다. 우리 사회도 ‘촛불혁명’으로 대통령이 탄핵된다고 해서 당장 변화하지는 않을 것이다. 한국은 세계사에서 유례없이 산업화와 민주화를 동시에 이룬 나라였지만 여전히 천민자본주의, 정경유착의 고리는 끊어내지 못하고 있다. 촛불은 노블레스 오블리주, 도덕성, 정신문화 성숙을 향한 ‘일상 속 명예혁명’으로 끊임없이 타올라야 할 것이다. 최근 한 대학가에는 ‘박정희의 최대 실패는 자식교육’이라는 현수막이 내걸렸다고 한다. 우리도 제2의 박근혜, 최순실, 정유라를 만드는 교육을 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볼 때다. 엄마가 아이의 숙제를 대신 해주고, 학급 회장 출마 연설문도 써주고, 대학이나 직장 갈 때 자기소개서까지 채워 주고 있지 않은지. 최순실이 없으면 아무런 결정도 내리지 못했던 박 대통령처럼, 우리 아이들도 부모가 조종하는 자동인형으로 키우고 있지 않은가 하는 물음이다. 최순실 게이트에도 불구하고 새뮤얼 헌팅턴의 ‘문화가 중요하다’는 말은 차기 정부에서도 여전히 유효하다. 전승훈 문화부 차장 raphy@donga.com}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를 수사하는 박영수 특별검사팀이 26일 문화예술계 인사를 이념 성향에 따라 분류해 지원했다는 이른바 ‘블랙리스트’ 의혹에 관한 수사를 본격화했다. 박 특검팀이 26일 문화체육관광부를 압수수색한 곳은 10월 27일 검찰 특별수사본부(본부장 이영렬 서울중앙지검장)가 파헤친 곳과는 다르다. 특검이 기존 검찰 수사에서 벗어나 새로운 수사의 갈래를 찾아냈다는 의미다. 이날 특검은 문체부 예술정책관실과 기획조정실, 콘텐츠정책관실, 관광정책관실 그리고 조윤선 장관 집무실과 차관실을 압수수색했다. 이들을 하나로 꿰는 것은 ‘문체부 인사 개입’ ‘문화계 블랙리스트’ 의혹이다. 특검은 블랙리스트 작성에 관여한 곳으로 지목된 예술정책관실에서 실제 리스트를 확보한 것으로 알려졌다. 청와대가 문화계 인사들을 이념 성향으로 분류한 명단을 문체부 예술정책국에 내려보냈다는 의혹은 2014년 중반부터 제기되기 시작했다. 유진룡 전 문체부 장관은 26일 CBS라디오 ‘시사자키 정관용입니다’와의 인터뷰에서 “(2014년 7월) 퇴임 전 블랙리스트 형식 이전에 수시로 김기춘 당시 대통령비서실장의 지시라고 하면서 모철민 수석이나 김소영 문화체육비서관을 통해 문체부로 전달됐다”고 주장했다. 유 전 장관은 그 문서의 출처가 정무수석실 국민소통비서관실이었다는 얘기도 들었다고 밝혔다. 당시 정무수석은 조윤선 문체부 장관이었고, 정무수석실 산하 국민소통비서관은 정관주 전 문체부 1차관이었다. 특검은 조 장관과 정 전 차관이 리스트 작성에 관여했다는 의혹에 대해 집중 조사할 방침이다. 특검은 조 장관의 윗선 격인 김기춘 전 실장이 큰 흐름에서 이러한 지시를 내려보냈을 것으로 의심하고 있다. 특검이 블랙리스트 작성 실체를 밝혀낸다면 문화계는 물론이고 사상(思想)의 영역까지 입맛에 맞게 관리하려 한 정권의 구태(舊態)가 도마에 오를 것으로 보인다. 10월 국회 국정감사에서 도종환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블랙리스트의 존재를 알리는 문예위 문건을 공개했다. 명단에는 △2015년 ‘세월호 정부 시행령 폐기 촉구 선언’ 서명 문화인 594명 △2014년 ‘세월호 시국선언’ 문학인 754명 △문재인 후보 지지 선언(6517명)과 박원순 서울시장 후보 지지 선언(1608명) 문화인 등 총 9473명이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다. 또 8월 숨진 김영한 전 대통령민정수석비서관이 남긴 비망록에는 김 전 실장이 “문화예술계의 좌파 책동에 투쟁적으로 대응할 것”(2014년 10월 2일)이라고 지시했다는 내용이 포함된 사실이 드러나기도 했다. 이에 따라 문화연대와 서울연극협회, 한국독립영화협회 등 12개 단체는 이달 초 특검팀에 블랙리스트 의혹과 관련해 김 전 실장과 조 장관, 모철민 주프랑스 대사(전 교육문화수석), 정 전 차관 등 9명을 고발했다. 한편 문체부는 10월 조윤선 장관 취임 한 달 만에 장관 컴퓨터 하드디스크를 교체해 블랙리스트 관련 자료의 증거 인멸을 시도한 것이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됐다. 당시는 검찰에서 미르·K스포츠재단 특혜 수사를 위해 문체부를 압수수색한 지 일주일이 지나지 않은 시점이다. 이와 관련해 문체부 측은 “장관실 컴퓨터 하드디스크 교체는 2년 만에 새 장관 부임에 따른 자연스러운 교체”라며 증거 인멸 의혹을 부인했다. 전승훈 raphy@donga.com·신나리 기자}
《 비선 실세들의 놀이터, 예산 빼먹는 ‘빨대’를 꽂기 가장 쉬운 부처, 부당한 윗선의 지시를 군말 없이 수행한 뒤 책임은 부하 직원에게 떠넘기는 ‘영혼 없는 공무원’…. 2016년은 문화체육관광부 출범 이래 가장 곤혹스러운 비판이 제기된 한 해였다. 최순실 차은택 등 박근혜 정부 비선 실세들의 이권 개입과 국정 농단 사태의 핵심 무대가 문체부였던 것으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의혹에 휩싸인 문체부 사업은 문화창조융합벨트, 국가브랜드 선정, 문화융성, 늘품체조, 미르재단 사업 등 무려 20여 가지다. 》 ○ 도화선 된 ‘미르재단·K스포츠재단’ 문체부는 비선 실세들의 국정 농단 사태의 도화선이 된 ‘미르재단’과 ‘K스포츠재단’의 설립허가를 내준 주무 부처였다. 지난해 10월 문체부 대중문화산업과장이 윗선의 지시를 받아 청와대에서 열린 재단 설립 회의에 참석해 ‘10월 27일 미르재단 현판식에 맞춰 반드시 설립 허가가 이뤄질 수 있도록 하라’는 지시를 받은 것으로 드러났다. 실제로 문체부는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로부터 미르재단 설립 허가 서류를 제출받은 지 하루 만에 허가를 내줬다. 9월 국정감사에서는 문체부 국감 사상 처음으로 7급 주무관이 증인으로 단상에 섰다. 장관부터 실장, 국장, 과장까지 전부 미르재단 허가에 ‘책임이 없다’고 발뺌을 하는 바람에 말단 직원이 책임을 뒤집어쓴 것이다. 그야말로 ‘영혼 없는 공무원’들의 부끄러운 모습이었다.○ 비선 실세의 놀이터 문화창조융합본부 폐지 문체부가 비선 실세들의 놀이터가 된 데에는 최순실의 ‘사업 파트너’ 격인 차은택의 역할이 컸다. 차은택은 최순실에게 자신의 은사인 김종덕 홍익대 시각디자인과 교수를 문체부 장관으로, 외삼촌인 김상률 숙명여대 영문학부 교수를 청와대 교육문화수석비서관으로, 광고계 선배인 송성각 씨를 한국콘텐츠진흥원장으로 추천했다. 결국 차은택은 ‘교문수석-장관-콘진원장’으로 이어지는 인맥을 통해 국가의 문화정책을 움직였다. 이들이 주도한 국가브랜드 ‘크리에이티브 코리아’ 선정 사업은 26억 원의 예산 투입에도 불구하고 표절 논란에 휩싸였다. 또한 차은택이 초대 단장을 맡았던 문화창조융합본부는 내년 3월에 폐지될 예정이다. 국회에서 관련 예산도 780억 원이나 대거 삭감됐다.○ 문화예술인 블랙리스트 논란 청와대가 이념 성향에 따라 예술인을 분류한 이른바 ‘블랙리스트’를 문체부에 내려보냈다는 의혹도 제기됐다. 앞서 복수의 문체부 전·현직 공무원은 본보에 “2014년 중반부터 청와대가 문화계 인사들을 이념 성향으로 분류한 명단을 문체부 예술국에 내려보내 좌파 인사에 대한 지원을 못하도록 했다”고 밝혔다. 리스트에 포함된 1만 명 가까운 예술인들은 반발했고 12일 문화예술계 12개 단체가 김기춘 전 대통령비서실장 등 9명을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와 강요, 업무방해 등 혐의로 박영수 특별검사팀에 고발했다.○ 문체부 조직 축소될까 문체부는 문화, 체육, 관광, 해외 국정홍보 등 다양한 업무를 담당하고 있다. 그러나 비선 실세의 농단으로 만신창이가 된 문체부 조직이 차기 정부에서는 대거 축소될 것이라는 전망이 제기된다. 이에 따라 9월 새로 취임한 조윤선 문체부 장관은 “최순실 차은택 관련 문제 사업은 과감히 폐지하고, 관련 직원은 인사 조치하겠다”며 문체부 자체 개혁 작업에 나서고 있다. 최근 정관주 1차관이 사의를 표명했고, 윤태용 문화콘텐츠산업실장과 원용기 종무실장의 사표가 수리됐다. 현재 1급 간부 7명 중 4명의 자리(문화예술정책실장, 문화콘텐츠산업실장, 종무실장, 국립중앙도서관장)가 공석이라 대대적인 인사가 뒤따를 예정이다. 김정은 kimje@donga.com·전승훈 기자}
“무슨 명예를 얻거나 돈을 위해 연극을 해온 건 아니었어요. 연극이 좋아서 평생 해왔을 뿐인데, 정부에서 우리 같은 사람까지 생각해서 훈장을 준다니 감사합니다.” 60년 동안 연극 연출가의 외길 인생을 걸어온 임영웅 극단 산울림 대표(80·사진)가 문화예술 공로자에게 주는 최고 훈장인 금관문화훈장을 받는다. 문화체육관광부는 20일 올해 문화예술 발전에 기여한 유공자 18명을 문화훈장 수훈자로 선정했다. 최고 영예인 금관문화훈장을 받는 임 대표는 1955년 ‘사육신’을 연출하면서 연극계에 데뷔했고 1969년 ‘고도를 기다리며’를 초연한 이래 다양한 작품으로 세계적 호평을 받으며 한국 연극의 위상을 높였다. 또한 1970년 극단 산울림을 창단하고 1985년 소극장 산울림을 개관한 후 완성도 높은 국내외 문제작을 공연해 연극계와 문화예술 발전에 기여했다. 연극 ‘고도…’는 1969년 초연한 이후 2000회가 넘게 무대에 올라 50만 명 이상의 관객을 끌었다. 지난해에는 45주년 기념 공연이 열리기도 했다. 임 대표는 “가까운 장래에 ‘고도…’는 또다시 무대에 올라갈 것”이라며 “작품은 자체의 생명이 있는 거니까 내가 죽기 전 할 수 있을 때까지 하고, 후배들이 이어서 또 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평생 고도를 기다려 왔는데, 아무래도 내가 (저세상으로) 가야지 만나지, 살아있을 때는 못 만날 것 같다”며 “그래도 죽을 때까지 고도를 계속 기다릴 것”이라고 했다. 한편 은관문화훈장 수상자로는 평론가 김윤식, 소설가 서정인, 화가 백영수, 사진작가 육명심 씨가 선정됐다. 보관문화훈장은 고 이운형 세아그룹 회장, 김성우 전 한국일보 주필, 변시지 제주 서귀포 기당미술관 명예관장, 임헌정 코리안심포니오케스트라 예술감독에게 수여된다. 제48회 대한민국 문화예술상(대통령 표창)에는 성악가 사무엘 윤 등 6명이 선정됐고, 제24회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장관 표창)에는 소설가 해이수, 비올리스트 리처드 용재 오닐 등 9명이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시상식은 21일 오전 10시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멀티프로젝트홀에서 열린다. 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김종덕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은 15일 조양호 전 평창동계올림픽 조직위원장이 사퇴한 배경에 청와대 측의 압력이 있었음을 인정했다. 김 전 장관은 이날 국정조사 특별위원회 4차 청문회에 출석해 "5월 안종범 청와대 전 경제수석인지 현정택 전 정책조정수석인지 전화를 걸어와 '조 위원장이 한진해운 문제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아 대통령이 걱정하고 계시다'고 말했다"고 했다. 김 전 장관은 "다음 날 조 위원장을 만나 대통령이 겸직 때문에 우려하는 것 같다고 말씀드렸더니 조 위원장이 '그럼 내가 관둘게요'라고 했다"고 밝혔다. 김 전 장관은 또 여명숙 문화창조융합벨트 본부장을 해임하게 된 배경에 대해 "여 본부장이 직원들과 불화가 심해 업무가 안 될 정도여서 김상률 대통령교육문화수석과 상의해 내보낸 것"이라고 했다. 차은택 씨의 대학원 은사인 김 전 장관은 "차 씨가 자기를 도와주는 분은 최 회장(최순실)이라고 하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며 "여러 가지 것들이 저를 건너뛰어 결정되는 것이 너무 많아 올해 초 사퇴 의사를 청와대에 전달했다"고 말했다. 차 씨의 외삼촌인 김상률 전 수석도 "차 씨의 추천은 있었지만 인사는 보안 사안이라 내가 어떻게 뽑혔는지 물어보지 않았다"고 말했다. 한편 김환균 전국언론노조 위원장은 "김영한 전 민정수석의 비망록에 따르면 박 대통령이 KBS를 지속적으로 감시 및 사찰해 왔고, 세계일보 등 여러 언론사도 탄압해 왔다"며 "허원제 정무수석이 SBS의 탐사보도 프로그램 '그것이 알고 싶다'의 세월호 7시간 방송을 막기 위해 SBS와 접촉했다"고 의혹을 제기했다.전승훈기자 raphy@donga.com이지훈기자 easyhoon@donga.com}
2013년에 개봉한 영화 중에 ‘화이트 하우스 다운’ ‘백악관 최후의 날’이란 액션 영화가 있다. 할리우드 영화가 미국 백악관까지 폭파시키자 최후의 성역이 무너졌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요즘 한국의 상황도 ‘블루 하우스 다운’ ‘청와대 최후의 날’을 방불케 한다. TV 뉴스는 어떤 영화보다도 스펙터클하다. 영화 속 백악관처럼 테러 공격을 받지 않았는데도, 청와대는 내부에서 스스로 무너지고 있는 중이다. 제이미 폭스가 대통령 역을 맡은 ‘화이트 하우스 다운’은 백악관의 내부 구조를 속속들이 알 수 있는 영화다. 테러 공격을 받은 대통령이 엘리베이터 통로에 숨어 있다가 위층의 관저 침실로 올라가는가 하면 집무실과 식당, 지하 군사벙커까지 한 건물 안에서 종횡무진 뛰어다닌다. 한국의 청와대라면 상상할 수 없는 장면이다. 대통령 집무실(본관)과 관저, 직원들이 근무하는 건물(위민관)이 각각 500m씩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걸어서 15분, 차로도 5분씩 걸리는 거리다. 경비초소도 2개나 거쳐야 한다. 2013년 33년 만에 청와대로 돌아온 박근혜 대통령은 6000여 m²의 대규모 관저에서 홀로 지내 왔다. 16년 동안 청와대에서 청소년기의 대부분을 보냈던 박 대통령에게 청와대는 집무실보다 관저가 익숙했을 것이다. 쉽게 접근할 수 없는 대통령의 관저는 ‘박근혜 최순실 게이트’가 잉태될 수 있었던 공간적 배경이다. 청와대에서 근무했던 경험자에 따르면 YS, DJ, 노무현, MB 등 역대 대통령들도 관저에서 업무를 보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비서실장이 한밤중에도 잠옷 차림의 대통령에게 보고를 하고, 새벽에 관저에 찾아가 대통령과 함께 집무실로 출근하기도 했다. 그러나 현 정부에서는 이런 관행이 힘들어졌다. 박 대통령이 관저에 들어가 올림머리 헤어스타일을 풀어헤친 이후엔 대면보고가 힘들었기 때문이다. ‘여성 대통령의 특수성’을 감안한다면 박 대통령은 더욱더 출근 시간을 지키고 집무실 정위치에서 근무했어야 했다. 그랬으면 ‘세월호 7시간’ 같은 비극은 없었으리라. 조선시대 경복궁에서도 왕의 침전인 강녕전은 집무실인 사정전과 담 하나를 사이에 둘 정도로 가까웠다. 그래도 왕은 오전 7시부터 의관을 갖추고 신하들과 함께 하는 공부인 조강(朝講)을 하며 공식 일정을 시작했다. 세종대왕이 침소인 강녕전에서 훈민정음을 창제했듯이 왕은 침전에서도 일을 멈추지 않았다. 이제 국민들은 ‘포스트 박근혜’를 준비한다. 이렇게 큰 사태를 겪고도 다시 과거로 돌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그중에 하나가 바로 청와대를 바꾸는 일이다. 청와대는 일제강점기 총독부 관저 자리였다. 북쪽이 산으로 가로막힌 요새 형태의 청와대는 식민지 시대, 군부독재 시대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제왕적 대통령제’를 고치기 위한 개헌이 논의되는 만큼 청와대를 산속이 아닌 도심으로 옮겨야 한다. 청와대를 여의도로 옮겨 대통령이 국회와 수시로 논의할 수 있게 하면 어떨까. 영국 총리 공관인 다우닝가 10번지는 웨스트민스터 의사당 인근 주택가에 있다. 공관에는 총리 사무실이나 책상도 없다. 총리는 상시로 열리는 국회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야 하기 때문이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의 집무실도 연방의회 의사당을 마주 보고 있다. 청와대를 세종로 한복판으로 옮기는 것도 좋겠다. 자칫 잘못하면 민심의 촛불 파도에 휩싸일 수 있다는 두려움 속에 국정을 펼칠 수 있도록 말이다. 전승훈 문화부 차장 raphy@donga.com}
제1회 담월 송서율창 제전이 4일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 전통문화예술공연장에서 열렸다. 이 대회는 경기 명창 담월(淡月) 묵계월 선생의 업적을 기리고, 글읽는 소리의 대중화를 위해 사단법인 서울전통문화예술진흥원(이사장 유창·서울시 무형문화재 제41호 송서율창 보유자)이 주최한 대회다. 송서(誦書)란 소설, 고문 등 산문을 읽는 소리로 전문 음악가들이 예술성을 가미해 읽기 시작하면서 국악의 한 장르가 됐다. 율창(律唱)은 시 등 운문을 읽는 소리다. 이날 경연에는 초등학생부, 중·고등학생부 및 신인부, 일반부, 명인부 5개 부문에 걸쳐 200여명이 넘는 경연자가 참여해 천자문, 삼설기, 계자제서, 전죽벽부, 명심가, 촉석루 등 주옥같은 송서와 율창을 경연했다. 국악을 전문적으로 배우지 않은 일반 시민들의 참여도 많았다. 초등학생부에는 50여명이, 직장인이 중심이 된 신인부에는 100여명이 몰렸다. 특히 이날 맑은 목으로 낭랑하게 고서설 삼설기를 불러 초등부 장원을 차지한 추명연 군(11·강원 태백 장성초등학교)은 송서를 배우기 위해 초등학교 3학년때인 3년 전부터 매주 한 번도 빠지지 않고 강원도 태백에서 서울로 상경한 사연이 알려져 주위를 놀라게 했다. 추명연 군이 부른 삼설기(三說記)는 세 명의 선비가 백악산에 봄놀이를 갔다가 술에 취해 황천에 들어가 염라대왕 앞에 각기 소원을 말하는데, 세 번째 선비가 지나치게 욕심을 부리다 지옥으로 추방되었다는 내용의 불교설화에 기반한 풍자적인 고소설이다. 일제강점기 가객 이문원만이 가지고 있던 것을 경기명창 묵계월이 배워 현재 서울시 무형문화재 송서율창 보유자인 유창 명창에게 전승한 대표적인 송서이다. 한편 24명의 송서율창 명창들이 참여해 국회의장상을 놓고 벌인 명인부 대상에는 역시 송서 삼설기를 부른 김선주 씨(여·29)가 차지했다. 김 씨는 송서율창뿐만 아니라 경기민요 명창으로도 유명한 차세대 소리꾼으로 출중한 기량을 선보이며 초대 담월 송서율창 경연대회 대상을 차지하는 영예를 차지했다. 이외에 부문별 대상은 △중고등부 이송미(18) △신인부(예샘소리단) △일반부 고영란 씨(50)가 차지했다.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병실에 앉아 텔레비전 뉴스를 보다 박근혜 대통령의 모습이 비추자 어머니가 말씀하셨다. "쟤는 얼굴이 멀쩡하네. 아무렇지도 않네." 나라를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고 대통령의 안색이 저렇게 좋으냐는 당신의 한탄이셨다. 역시 우리엄마는 언제나 핵심을 찌르셔. 감탄하며 내 머리에 또 다른 얼굴들이 스쳐 지나갔다. 비상시국회의에 참석한 야권 지도자들의 웃는 얼굴. '비상시국'과 어울리지 않는 그들의 환한 미소가 눈에 거슬렸다. 국민들은 나라가 걱정돼서 속이 타들어 가는데.....나라를 걱정하는 게 직업이어야 할 정치인들은- 대통령은 자기만 살 궁리나 하고 국회의원들은 우왕좌왕 국민들 눈치만 보며 계산기를 두드린다. 집회에 나가기 며칠 전에 겨울코트를 들고 의류수선실에 갔다. "아저씨-이거 입고 촛불집회 나갈 거니까, 단추 튼튼하게 달아주세요." 내 입에서 촛불이 떨어지자마자 아저씨가 날 물끄러미 보더니 다른 일감을 제치고 내 옷을 잡았다. '촛불' 덕분에 오래 기다리지 않고 5분만에 수선이 끝난 코트는 어찌나 단추를 단단히 박았는지 십년이 지나도 안 떨어질 것같다. 비가 오지 않기를 빌었다. 비가 오더라도 젖을 만큼 쏟아지지 않기를 빌었다. 토요일 오후 1시, 어머니를 씻기고 운동시킨 뒤에 요양병원을 나오니 비와 눈이 거세게 흩날렸다. 그래 쏟아져도 지금 다 쏟아져라. 집회가 열리는 저녁엔 하늘이 뽀송뽀송 하기를 빌면서 근처의 식당에 들어가 청국장에 밥을 비벼먹었다. 추위를 이기려면 든든히 먹어야지. 집에서 좀 누워있다 택시를 타고 서대문역에 내렸다. 허겁지겁 걸어 서 친구들과 약속한 서울역사박물관에 도착하니 오후 4시 50분. 차를 마시고 일어나 광화문으로 걸어갔다. 핫팩을 나눠주는 아줌마를 나는 그냥 지나쳤다. 털모자를 쓰고 가죽장갑에 위아래 내복을 입어 한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인파에 파묻혀 걷는데 촛불을 파는 노점상 앞에 긴 줄이 보였다. 그냥 촛불은 천원, Led 촛불은 이천원이었다. 더 비싸도 살텐데, 바가지를 씌우지 않고 적정한 가격을 제시하는 양심적인 상혼이 고마웠다. 바람이 불면 촛불은 꺼진다는 망언을 한 국회의원 아무개를 욕하며 Led 촛불 세 개를 샀다. "(전등의) 위를 누르면 꺼져요."라는 노점상 아저씨의 설명을 듣고 종이컵 바닥에 전등을 끼워넣는데, 잘 들어가지 않아 옆에 선 친구가 도와주었다. 연세가 지긋한 어르신들. 아이들을 셋이나 데리고 나와 손에 손을 잡은 가족도 보였다. 앞으로 뛰쳐나가려는 딸애에게 "오늘은 엄마 손을 꼭 잡아야 해."라고 말하는 소리가 귀에 들렸다. 이 추운 날에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나온 부모들의 용기가 가상했다. 이미 사람들의 장벽에 가로막혀 우리 일행은 무대가 펼쳐지는 중앙으로 진출하지 못하고, 귀를 무대에 열어두고 섰다 걸었다를 반복하며 바깥을 맴돌았다. 광장의 가장자리엔 유모차를 끌고 나온 부모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밖은 시끌시끌한데 유모차 안에서 고이 자는 애들의 얼굴은 한편의 시처럼 아름다웠다. 잃어버린 아이를 찾았다는 안내방송이 나오자 사람들 사이에 기쁨의 함성이 퍼졌다. 어디선가 "영미 누나!" 소리가 들려 앞을 보니 이게 대체 몇십년만인가. 어느 정치인을 보좌한다는 대학후배를 만나 잠깐 인사를 나누었다. 안치환의 흥겨운 노래에 맞춰 춤을 추는 젊은이들에 섞여 나도 몸을 흔들었다. 토요일 저녁, 광화문은 해방구였다. 사람들의 열기로 가득한 광장은 춥지 않았다. 도도한 불빛 속에 나도 촛불을 들었다.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다고 믿지는 않지만, 어둠이 빛을 이기게 내버려두고 싶지는 않아서. 젊은 날에, 87년 유월의 그 뜨겁던 거리에서도 부끄러워 외치기를 주저했던 구호를 내가 먼저 선창했다. 박근혜를 구속하라! 그날 처음 만나 '광장고등학교' 동문이 되기로 약조한 우리는 8시의 소등행사를 마치고 행진을 할래 말래 설왕설래하다, 중년의 건강을 생각해 발길을 돌렸다. 그냥 헤어지지 섭섭해, 전철을 타고 홍대 역에서 내려 술을 마시며 시국을 논했다. 잠룡이란 말, 맘에 안 들어. 제왕적 대통령을 만든 일등공신은 이 나라 언론이 아닌가. 1년에 절반은 차기대권주자의 지지도를 싣는 신문과 방송들. 반성해야 해. 제왕에만 관심을 두는 언론이 제왕적 대통령을 만들었어. 이번에도 죽 쒀서 개 주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지금 누가 답을 갖고 있겠어요. 전직 국회의원과 한국노총의 연구원과 시인이 함께 한 술자리가 끝난 뒤, 홍대의 그 수상한 거리에서 술김에 우리는 또 외쳤다. 박근혜를 구속하라!!최영미 시인}
병실에 앉아 텔레비전 뉴스를 보다 박근혜 대통령의 모습이 비추자 어머니가 말씀하셨다. "쟤는 얼굴이 멀쩡하네. 아무렇지도 않네." 나라를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고 대통령의 안색이 저렇게 좋으냐는 당신의 한탄이셨다. 역시 우리엄마는 언제나 핵심을 찌르셔. 감탄하며 내 머리에 또 다른 얼굴들이 스쳐 지나갔다. 비상시국회의에 참석한 야권 지도자들의 웃는 얼굴. '비상시국'과 어울리지 않는 그들의 환한 미소가 눈에 거슬렸다. 국민들은 나라가 걱정돼서 속이 타들어 가는데.....나라를 걱정하는 게 직업이어야 할 정치인들은- 대통령은 자기만 살 궁리나 하고 국회의원들은 우왕좌왕 국민들 눈치만 보며 계산기를 두드린다. 집회에 나가기 며칠 전에 겨울코트를 들고 의류수선실에 갔다. "아저씨-이거 입고 촛불집회 나갈 거니까, 단추 튼튼하게 달아주세요." 내 입에서 촛불이 떨어지자마자 아저씨가 날 물끄러미 보더니 다른 일감을 제치고 내 옷을 잡았다. '촛불' 덕분에 오래 기다리지 않고 5분만에 수선이 끝난 코트는 어찌나 단추를 단단히 박았는지 십년이 지나도 안 떨어질 것같다. 비가 오지 않기를 빌었다. 비가 오더라도 젖을 만큼 쏟아지지 않기를 빌었다. 토요일 오후 1시, 어머니를 씻기고 운동시킨 뒤에 요양병원을 나오니 비와 눈이 거세게 흩날렸다. 그래 쏟아져도 지금 다 쏟아져라. 집회가 열리는 저녁엔 하늘이 뽀송뽀송 하기를 빌면서 근처의 식당에 들어가 청국장에 밥을 비벼먹었다. 추위를 이기려면 든든히 먹어야지. 집에서 좀 누워있다 택시를 타고 서대문역에 내렸다. 허겁지겁 걸어 서 친구들과 약속한 서울역사박물관에 도착하니 오후 4시 50분. 차를 마시고 일어나 광화문으로 걸어갔다. 핫팩을 나눠주는 아줌마를 나는 그냥 지나쳤다. 털모자를 쓰고 가죽장갑에 위아래 내복을 입어 한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인파에 파묻혀 걷는데 촛불을 파는 노점상 앞에 긴 줄이 보였다. 그냥 촛불은 천원, Led 촛불은 이천원이었다. 더 비싸도 살텐데, 바가지를 씌우지 않고 적정한 가격을 제시하는 양심적인 상혼이 고마웠다. 바람이 불면 촛불은 꺼진다는 망언을 한 국회의원 아무개를 욕하며 Led 촛불 세 개를 샀다. "(전등의) 위를 누르면 꺼져요."라는 노점상 아저씨의 설명을 듣고 종이컵 바닥에 전등을 끼워넣는데, 잘 들어가지 않아 옆에 선 친구가 도와주었다. 연세가 지긋한 어르신들. 아이들을 셋이나 데리고 나와 손에 손을 잡은 가족도 보였다. 앞으로 뛰쳐나가려는 딸애에게 "오늘은 엄마 손을 꼭 잡아야 해."라고 말하는 소리가 귀에 들렸다. 이 추운 날에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나온 부모들의 용기가 가상했다. 이미 사람들의 장벽에 가로막혀 우리 일행은 무대가 펼쳐지는 중앙으로 진출하지 못하고, 귀를 무대에 열어두고 섰다 걸었다를 반복하며 바깥을 맴돌았다. 광장의 가장자리엔 유모차를 끌고 나온 부모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밖은 시끌시끌한데 유모차 안에서 고이 자는 애들의 얼굴은 한편의 시처럼 아름다웠다. 잃어버린 아이를 찾았다는 안내방송이 나오자 사람들 사이에 기쁨의 함성이 퍼졌다. 어디선가 "영미 누나!" 소리가 들려 앞을 보니 이게 대체 몇십년만인가. 어느 정치인을 보좌한다는 대학후배를 만나 잠깐 인사를 나누었다. 안치환의 흥겨운 노래에 맞춰 춤을 추는 젊은이들에 섞여 나도 몸을 흔들었다. 토요일 저녁, 광화문은 해방구였다. 사람들의 열기로 가득한 광장은 춥지 않았다. 도도한 불빛 속에 나도 촛불을 들었다.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다고 믿지는 않지만, 어둠이 빛을 이기게 내버려두고 싶지는 않아서. 젊은 날에, 87년 유월의 그 뜨겁던 거리에서도 부끄러워 외치기를 주저했던 구호를 내가 먼저 선창했다. 박근혜를 구속하라! 그날 처음 만나 '광장고등학교' 동문이 되기로 약조한 우리는 8시의 소등행사를 마치고 행진을 할래 말래 설왕설래하다, 중년의 건강을 생각해 발길을 돌렸다. 그냥 헤어지지 섭섭해, 전철을 타고 홍대 역에서 내려 술을 마시며 시국을 논했다. 잠룡이란 말, 맘에 안 들어. 제왕적 대통령을 만든 일등공신은 이 나라 언론이 아닌가. 1년에 절반은 차기대권주자의 지지도를 싣는 신문과 방송들. 반성해야 해. 제왕에만 관심을 두는 언론이 제왕적 대통령을 만들었어. 이번에도 죽 쒀서 개 주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지금 누가 답을 갖고 있겠어요. 전직 국회의원과 한국노총의 연구원과 시인이 함께 한 술자리가 끝난 뒤, 홍대의 그 수상한 거리에서 술김에 우리는 또 외쳤다. 박근혜를 구속하라!!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대학입학 논술 준비부터 취업을 준비하는 성인까지 논술과 면접을 체계적으로 준비할 수 있는 ‘글쓰기 공부를 위한 시사교양 논설선집’(동아일보사·사진)이 발간됐다. 이 책은 동아일보에 최근 1년간 실렸던 사설과 칼럼 80편을 정치, 경제, 국제, 사회, 문화, 정보기술(IT), 환경, 스포츠, 인물 등 분야별로 엄선했다. 다양한 시사 이슈에 대한 칼럼을 통해 관련 지식과 정보뿐 아니라 논리적이고 균형 잡힌 시각으로 글쓰기를 연습할 수 있도록 했다. 이를 위해 교육 현장에서 신문을 활용해 교과 지식을 지도하는 정규희(용화여고) 이만석(문정고) 김광원 교사(정의여고)의 해설도 덧붙였다. 책에는 사설 및 칼럼 원문뿐 아니라 ‘용어의 이해’를 통해 시사 용어를 해설해주고, 시사 이슈에 관한 기사와 그래프까지 곁들여 이해가 쉽도록 했다. 또 기업의 면접 현장에서 면접관들이 해당 이슈와 관련해 던질 만한 질문도 제시돼 있고, 관련 이슈에 대해 더 깊이 알아보고 싶을 때 참고할 수 있는 책도 추천한다. 이 책의 편집에 참여한 황호택 동아일보 논설주간(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장)은 “좋은 글을 쓰려는 사람은 많이 읽고, 많이 써보고, 많이 생각하는 노력을 해야 한다”며 “대입을 앞둔 고교생뿐 아니라 각 공사·공단·언론사의 상식 및 작문시험은 물론 대기업의 직무적성 평가, 구술면접까지 종합적으로 준비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상생’ ‘문화’ ‘창조’ ‘융합’ ‘콘텐츠’…. 설마 이런 단어가 나쁜 의미로 쓰이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이제 이 말을 들으면 권력을 등에 업은 자들의 후안무치한 날도둑질만 떠오르게 됐다. 시작은 ‘상생과 공존’이었다. 박근혜 대통령이 후보 시절 ‘경제민주화’를 내걸면서 자주 쓰던 용어다. 박 대통령은 당선인 시절 “중소기업 대통령이 되겠다”고 선언했고, 대통령 취임식 행사부터 중소기업 대행사에 맡겼다. 이랬던 박 대통령이 임기 중반 대기업 총수들과 직접 독대하며 수백억 원 규모의 재단을 만들고 나선 것은 아이러니다. ‘상생과 공존’은 최순실과 차은택이 급조해 만든 ‘K’자로 시작되는 신생 기업들도 나랏일을 싹쓸이 수주할 수 있다는 말로 변질됐다. 실제로 박 대통령은 차은택이 포스코 계열의 광고사를 강탈하려 했을 때 “대기업보다는 중소기업이 인수하는 게 낫지 않겠느냐”고 거들기도 했다. ‘문화융성’이란 말도 마찬가지다. 박 대통령의 취임사에서 역대 정부 최초로 문화 정책이 4대 국정기조에 포함되자 문화계의 기대는 컸다. 프랑스의 문화대통령으로 칭송받는 프랑수아 미테랑 전 대통령의 10분의 1만 따라갔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미테랑은 1981년 취임 후 문화 진흥을 위한 ‘그랑프로제’를 내걸고 오늘날 파리의 관광명소가 된 루브르 박물관의 유리 피라미드, 오르세 미술관, 바스티유 오페라극장, 초현대식 미테랑 국립도서관, 라데팡스 등을 건설했다. 이후 파리는 프랑스의 수도를 넘어 세계의 문화수도로 거듭났다. 그러나 현 정부의 ‘문화융성’은 비선 실세의 가족과 친구만 융성시키는 정책이었다. 분야도 케이팝, 한식, 영상 콘텐츠 등 돈 되는 문화산업에만 집중됐다. 한 출판인은 페이스북에 “출판계는 돈이 안 돼서인가 차은택, 최순실 이름을 아는 사람이 없다”고 자조했다. ‘문화창조융합본부’ ‘국가브랜드’ ‘케이스타일 허브’ 등 거창한 구호를 내세웠지만, 문체부 담당 직원조차도 무슨 뜻인지 잘 설명하지 못했다. 최순실 게이트 이후 서점가에는 ‘대통령의 말하기’와 ‘대통령의 글쓰기’ 책이 베스트셀러로 등장했다. 대통령의 말과 글이 제대로 소통되지 않고, 국정 농단 세력에 의한 자의적인 해석이 난무할 때 얼마나 부패의 악취가 진동하는지를 체감했기 때문이다. ‘대통령의 말하기’ 책에서 저자는 ‘생각이 곧 말이다’라고 강조한다. 지도자에게 불현듯 떠오르는 표현은 끊임없는 사색의 결과이며, 철학에서 나온 말이어야 진정한 내 말이 될 수 있다는 내용이다. 박 대통령이 ‘대면보고’를 받지 않았던 것은 그가 누구의 도움 없이 스스로 생각하거나 즉각적으로 판단·결정하는 데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방증한다. ‘문화융성’ ‘창조경제’와 같은 국정기조도 자신의 철학에서 나온 말이 아니었기 때문에, 결국 비선 실세의 개입을 필요로 했고 그들의 농단에 휘둘리는 신세가 된 것이다. 지난 주말 서울 도심에서 100만 명의 시민이 몰린 촛불시위의 민심은 분노에 앞선 부끄러움이었다. 대통령이 진짜가 아닌 꼭두각시에 불과했고, 그의 기본적 말과 글조차 믿을 수 없다는 국가적 신뢰 붕괴에 대한 절망이었다. 그러나 100만 시민은 분노를 절제하고, 축제와 같은 평화시위를 해냈다. 외신들은 전 세계에서 볼 수 없는 아름다운 시위라며 놀라워했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대통령에게 상처받은 국민적 자존심을 더 이상 추락시킬 수 없다는 결의가 느껴지는 집단적 자각의 현장이었다. 전승훈 문화부 차장 raphy@donga.com}
“역대 정부 최초로 정부의 국정기조에 ‘문화융성’이 포함되자 문화체육관광부가 무척 기대가 컸던 것이 사실입니다.”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여성문화분과 전문위원으로 파견됐던 김태훈 현 문체부 관광정책관은 2013년 2월 25일 박근혜 대통령이 취임사에서 4대 국정기조 중 하나로 ‘문화융성’이 포함됐을 때 문체부 내의 분위기를 이렇게 전했다. 당시 인수위에 참가했던 한 인사는 “인수위에서 창조경제는 원래 정보통신 관련 산업 분야에서만 논의됐는데, 취임사에서 문화와 창조경제가 융합된 ‘문화융성’이 국정기조로 택해지는 것을 보고 누군가 비선에서 역할을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실제 문화융성은 급조된 국정기조였기 때문에 개념조차 불분명했다. 이 때문에 당시 모철민 대통령교육문화수석비서관이 유진룡 문체부 장관과 함께 문화융성의 개념부터 세부 정책까지 총괄해서 채워 넣는 역할을 맡았다. 2013년 7월에는 문화융성의 컨트롤타워 역할을 하는 대통령 직속기구로 ‘문화융성위원회’가 출범했고, 이듬해 1월에는 매달 마지막 주 수요일을 ‘문화가 있는 날’로 지정했다. 정권 초기의 문화융성 정책은 연극, 무용, 출판, 학술 등 순수예술까지 다 포함된 개념이었다. 문체부에는 ‘인문정신문화과’가 신설되기도 했다. 그러나 2014년 7월부터 문화융성의 개념은 ‘융·복합 콘텐츠 산업’ 지원으로 크게 변질된다. 유 전 장관이 최순실 씨의 딸 정유라 씨와 관련된 승마협회 비리 조사 문제로 경질된 시기와 겹친다. 같은 해 8월 최 씨의 측근으로 CF 감독인 차은택 씨가 문화융성위원으로 위촉됐다. 최 씨가 예산 400억 원 규모의 문화창조융합센터 계획 보고서를 작성한 것도 이즈음이다. 이후 비선 실세가 문화융성을 각종 이권을 챙기는 ‘놀이터’로 만들기 위한 인적 조치가 속도를 낸다. 8월에는 차 씨의 홍익대 대학원 지도교수인 김종덕 장관이 취임하고, 12월에는 차 씨의 외삼촌인 김상률 숙명여대 교수(56)가 대통령교육문화수석에 임명됐다. 1기 문화융성위 위원이었던 중견 배우는 “융성위가 초반에는 대통령도 참석해서 대단한 회의처럼 생각했는데 곧 껍데기만 있다는 게 드러났다”며 “그저 밥 한번 먹고 오는 자리였다. 결국 비선 실세들이 이미 모든 것을 결정해 놓았기 때문인 것 같다”고 말했다. 비선 실세의 문화융성은 차 씨가 2015년 4월 창조경제추진단장 겸 문화창조융합본부장으로 임명된 이후부터 현 정부의 문화융성 예산도 본격적으로 팽창하기 시작했다. 문화창조벤처단지, 문화창조아카데미, K팝 아레나 등 문화창조융합벨트 사업에는 2019년까지 7000억 원의 국고 지원이 계획됐다. 정부가 국민에게 문화 향유의 기회를 늘렸다고 홍보해 온 ‘문화가 있는 날’도 대통령의 ‘찬조 출연’으로 비선 실세들이 세 과시를 하는 행사로 변질됐다. 2014년 8월 박근혜 대통령은 ‘문화가 있는 날’에 차 씨가 연출한 뮤지컬 ‘원데이’를 관람하고, 같은 해 11월에는 역시 차 씨가 개입해 만든 ‘늘품체조’ 시연회에 참석했다. 연출가 윤호진 씨는 “김종덕 장관 취임 후 ‘융·복합’이 유독 강조되면서 수준 떨어지는 공연도 무대에 영상만 틀면 지원금을 주길래 뭔가 돈이 샌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말했다. 문체부의 전직 고위 관료는 “문화융성의 기초는 인문학, 학술, 연극, 무용 등 순수예술의 활성화와 가장 직결되는 부분”이라며 “차은택이 실세가 되면서 순수예술은 도외시되고 문화콘텐츠 산업만 강조되는 기이한 구조로 변질됐다”고 말했다. 전승훈 raphy@donga.com·조종엽 기자}
현 정부의 4대 국정기조에 포함된 ‘문화융성’은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최종 보고서에 나오지 않았는데도 불과 나흘 뒤인 박근혜 대통령 취임사에 갑자기 포함돼 비선 실세가 개입했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박 대통령 취임 전 인수위에 참여했던 고위급 인사는 8일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인수위의 문화여성 분과에서는 문화향유권, 문화복지 확대 등만 논의됐을 뿐 ‘문화융성’이란 키워드는 나오지 않았다”며 “그런데 역대 정부 최초로 취임사 국정기조에 문화융성이 포함되자 무슨 의미인지 다들 놀라워했다”고 말했다. 실제로 인수위가 발행한 ‘제18대 대통령직인수위백서’(전체 731쪽)에서도 문화융성이란 말은 찾아볼 수 없다. 2013년 2월 21일 인수위 최종 보고서에서 발표된 ‘5대 국정목표’는 △일자리 중심의 창조경제 △맞춤형 고용·복지 △창의교육과 문화가 있는 삶 △안전과 통합의 사회 △행복한 통일시대의 기반 구축이었다. 인수위는 ‘창의교육과 문화가 있는 삶’이란 항목에 대해 “학생들이 꿈과 끼를 키우고 창의력을 높일 수 있도록 학교교육을 정상화하고, 국민이 삶 속에서 자연스럽게 문화를 누리고 정신적인 풍요로움을 느낄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라고 설명해 현 정부의 문화융성과는 거리가 멀다. 그러나 나흘 뒤인 2월 25일 박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4대 국정기조에 문화융성을 포함시켰다. 박 대통령은 당시 “문화와 첨단기술이 융합된 콘텐츠산업 육성을 통해 창조경제를 견인하고, 새 일자리를 만들어 나갈 것”이라며 “새 시대의 삶을 바꾸는 ‘문화융성’의 시대를 국민 여러분과 함께 열어가겠다”고 밝혔다. 이는 문화체육관광부가 ‘비선 실세’ 최순실 씨와 차은택 CF감독이 주도했던 문화창조융합벨트에 2019년까지 총 7000억 원을 쏟아붓는 예산 지원 계획을 세우는 배경이 된다. 당시 취임사 준비위원회에 참여했던 한 인사는 “박 대통령의 취임사는 막판까지 최종 수정 작업이 거듭됐고 구체적인 내용은 전날까지 극비에 부쳐졌다”며 “문고리 3인방의 한 사람으로 꼽히는 정호성 전 비서관이 최종 수정 작업을 주로 맡아서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고 말했다. 그는 “취임사가 최종본 때 크게 수정됐다”며 “비선 실세들이 문화융성을 급조해 자신들의 이권을 챙기는 도구로 삼으려 했던 것 같다”고 덧붙였다. 복수의 문체부 고위 간부들은 “문화융성에 대한 개념이 인수위에서는 논의되지 않았는데 취임사에 아무런 설명 없이 갑자기 들어갔다”며 “그 뒤 당시 모철민 대통령교육문화수석의 지시로 문체부 내에서 긴급하게 문화융성의 개념과 가치, 세부 정책을 채워 넣느라 곤욕을 치렀다”고 말했다.전승훈 raphy@donga.com·김정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