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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일 서울 종로5가 한국교회100주년기념관에서는 ‘회초리기도대성회’라는 특이한 이름의 행사가 열렸습니다. 여의도순복음교회 조용기 원로목사와 이영훈 담임목사, 올해 104세인 김영창 목사 등이 참석했다고 합니다. 한국 교회를 잘 못 이끌고 있다는 목회자들의 반성이 담긴 행사라고 하네요. 교계 지도자들의 회개를 강조하는 발언과 회개 기도문 낭독, 종아리를 걷고 회초리로 내려치는 시간도 이어졌습니다. 행사 중 한국교회의 근본적 문제점은 회개가 없기 때문이라는 주장들이 여러 차례 나왔지만 냉소적 반응도 적지 않습니다. 개신교계의 상당수 행사에 회개라는 이름이 붙은 지 오래고, 말은 많지만 변화가 없다는 불신도 깔려 있기 때문입니다. 대형 교회 세습과 목회자의 추문, 교단장을 둘러싼 금권 선거 시비가 계속되지만 정말 “내 탓이오”라며 제대로 책임진 목회자는 없습니다. 최근 남미 3개국 순방을 마치고 로마 교황청으로 돌아가는 전용기 안에서 나온 프란치스코 교황의 말은 눈여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한 기자가 “왜 땀 흘려 일해 세금을 내는 중산층의 문제에 대해서는 잘 발언하지 않느냐”고 물었습니다. 앞서 교황은 볼리비아 방문 중 돈을 향한 무절제한 탐욕을 ‘악마의 배설물’로 비유하며 자본주의를 비판한 바 있습니다. 교황의 답은 이렇습니다. “당신이 맞다. 중산층의 어려움을 생각하지 않은 것은 내 실수다. 앞으로 이 문제에 대해 더 깊이 생각하겠다.” 종교를 막론하고 고위 성직자일수록 반성과 사과에 인색한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신(神)이 정한 무오류(無誤謬)의 사도인 그의 입에서 나온 ‘당신이 맞다’ ‘실수’ ‘깊이 생각하겠다’는 표현은 더욱 가슴에 와 닿습니다. 그 반성이 권위를 훼손하기는커녕 또 다른 매력으로 느껴지기도 합니다. 대한불교조계종은 의현 전 총무원장의 사면을 둘러싼 갈등으로 뜨겁습니다. 이번 사면 건을 1994년 개혁 정신에 대한 근본적 도전으로 여기는 이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이 갈등에는 가장 중요한 뭔가가 빠져 있습니다. 의현 전 총무원장 자신입니다. 제대로 된 참회가 없는 가운데 사면 문제를 논의한다는 것 자체가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그가 논란이 된 재심호계원 심사에서 그 뜻을 밝혔다지만 그것으로는 조계종 구성원의 눈높이를 맞추기에는 역부족입니다. 스스로 조계종의 국회 격인 중앙종회에서 참회와 함께 종교인으로서의 사생활에 대한 시비도 명명백백하게 밝혀야 합니다. 회개와 사과, 반성, 참회…. 표현은 뭐라도 좋습니다. 세상을 향한 종교인의 진솔한 고백은 부끄러움이 아닌 용기입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종교인의 새로운 덕목입니다. 김갑식 기자 dunanworld@donga.com}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는 올해 평화통일 세계공동기도주일(8월 9일)을 앞두고 조선그리스도교연맹과 함께 작성한 ‘8·15 한반도 평화통일 남북공동기도문’을 최근 발표했다. 양측은 기도문에서 “우리는 70년 동안 반복된 갈등과 대결의 역사를 속히 끝내기를 소원한다. 한 피를 나눈 형제자매, 흰 옷을 입은 우리 민족이 아름다운 일치와 평화로운 통일을 통해 자존감을 회복하기를 기대한다”고 밝혔다. 양측은 1989년부터 매년 공동기도문을 발표하고 남북공동기도주일 예배를 올려 왔다. NCCK는 광복절 공동 행사와 관련해 “남한 측 교인 300명이 평양 봉수교회를 방문해 공동기도회를 여는 방안을 조선그리스도교연맹 측에 제안했다”고 밝혔다. 김갑식 기자 dunanworld@donga.com}

《 “요즘 목사들 모이면 주된 화제가 ‘신자가 몇 명이냐?’ ‘예산은 얼마냐?’라는 것이다. 작지만 아름다운 교회와 건강한 목회정신이 살아야 한다.”(경동교회 박종화 목사) “교단장 선거 때마다 금권 선거가 문제가 된다. 루터 종교개혁 이후 개신교 역사상 지금 한국 교회만큼 타락한 적이 있느냐? 교회는 돈이 중요하지 않은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손봉호 고신대 석좌교수) 》6일 오전 서울 장충단로 경동교회에서는 보수적인 복음주의와 진보적 성향의 에큐메니컬(교회 일치) 운동을 추구해온 개신교계 원로 10여 명이 난상토론을 벌였다. 평균 70세 정도로 은퇴 목회자가 많았지만 평소 거리감이 있던 두 그룹 원로들이 한자리에 모인 것은 이례적이다. 이들은 4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김영주 총무의 주선으로 처음 만난 뒤 매달 한 차례꼴로 ‘원로들의 대화’를 갖고 있다. 소속 교단은 물론이고 목사와 장로 등 직분을 떠나 한국 교회 문제점을 진단하고 미래를 위한 대안을 제시하자는 게 모임의 취지다. 참석자가 조금씩 바뀌지만 이날은 권호경(전 NCCK 총무) 신경하(전 감리교 감독회장) 민영진(전 대한성서공회 총무) 장차남(전 예장 합동 총회장) 김상복(할렐루야교회 원로) 최복규(한국중앙교회 원로) 전병금 목사(강남교회 담임)와 대한성공회 박경조 주교 등이 참석했다. 이날 모임은 주제 발표와 답변, 토론 등으로 2시간 남짓 진행됐다. 김상복 목사는 ‘축소되어 가는 비전’을 주제로 한 발표에서 “예배는 있으나 영성은 없고 인물은 있으나 인격은 없다. 건물은 있으나 교회는 없고 명성은 있으나 존경은 없다”며 “목회자의 영적인 인격 개발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기독교윤리실천운동(기윤실) 이사장을 지낸 개신교 장로인 손 교수는 ‘종교개혁 500주년과 한국교회’라는 발표에서 “2013년 기윤실의 종교별 신뢰도 조사에 따르면 개신교가 19.4%로 가톨릭 36.7%, 불교 35.2%에 비해 훨씬 떨어진다”며 “(목회자) 마음속에 경찰이 없으면 정의를 섬길 수 없다”고 밝혔다. 토론장은 개신교 미래를 걱정하는 원로들의 자성과 제안으로 금세 뜨거워졌다. 신경하 전 감독회장은 “주의 종을 비판하면 벌 받으니, 그건 하나님에게 맡기고 목회자에게 순종하라는 게 요즘 교회 분위기다”라며 “목회자들 스스로 권위주의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했다. 장차남 목사는 “이른바 ‘문제 교회’는 전체의 10% 수준이지만 이곳들이 대형 교회이기 때문에 개신교 전체 이미지를 흐리고 있다”며 “교회들은 일치와 분단 극복을 위해 노력하고, 적어도 세금 문제는 솔선수범하자”고 제안했다. 차분하지만 따끔한 일침도 있었다. “예수님 말을 믿고 따라야 한다는데, 그분의 방법도 배워야 한다. 성경을 보면 예수님은 모든 것을 먼저 행하고 가르치셨다. 목회자의 설교도 말이 아니라 행동이 앞서야 한다.”(최복규 목사) 전병금 목사는 “이런 대화들이 교회 갱신과 개혁운동으로 구체화해야 한다”며 “교회의 지속적인 개혁이 없다면 한국 교회가 우리 사회에서 존재하기 어렵다”고, 권호경 목사는 “가능하면 이런 모임을 신학 교수, 신자들과도 함께 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모임의 간사 역할을 한 김 총무는 “교단과 성향을 넘어 우리 교회의 미래를 위한 귀한 말들이 많았다”며 “원로들과 현직 중견 목회자, 목회를 준비하는 신학생들과의 대화도 준비하겠다”고 밝혔다.김갑식 기자 dunanworld@donga.com}

2013년 ‘응답하라 1994’라는 제목의 드라마가 방영됐습니다. 이 드라마는 당시 유행했던 음악과 감성을 담아 큰 화제를 불러 일으켰습니다. 1994년은 대한불교조계종에도 특별한 해입니다. 당시 의현 총무원장의 3선 시도를 둘러싼 갈등 끝에 폭력 사태가 벌어지고 반대하는 대규모 승려대회도 열렸습니다. 스님은 물론이고 승가대학원에 재학 중인 학인(學人)과 대학생 불자들이 들불처럼 일어섰습니다. 결국 의현 총무원장은 4월 13일 사퇴하고, 이틀 뒤 종단 개혁을 위한 개혁회의가 출범합니다. 조계종 사람들은 1994년 불교민주화 과정을 우리 사회 민주화의 분수령이 된 1987년 6월 민주항쟁에 곧잘 비유합니다. 조계종이라는 공식 명칭 대신에 ‘개혁종단’이라는 말을 쓰고, 종단사를 언급할 때 종단 개혁 전과 후로 나누기도 합니다. 개혁에 참여했던 스님과 대학생 불자들에게 1994년 종단 개혁은 자랑스러운 역사이자 자존심입니다. 이른바 종권(宗權)은 물론이고 금권, 정치권 후원까지 받은 거대한 벽을 무너뜨렸으니까요. 그런데 지난달 의현 전 원장에 대한 징계 수위를 21년 만에 멸빈에서 공권 정지 3년으로 낮춘 재심호계원 판결이 큰 파란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8일 종단에서 근무하는 재가불자로 구성된 종무원조합은 이 판결에 대해 “1994년 종단 개혁 당시의 개혁정신을 고려하지 못한 결정”이라며 “종헌(宗憲)·종법과 종도들의 공의에 따라 공명정대하게 처리해 달라”고 종단에 요청했습니다. 평소 자기 목소리를 내지 않는 종무원 분위기를 감안하면 매우 이례적입니다. 1994년 개혁 주체들이 기득권 세력이 되면서 20여 년 전 개혁정신이 퇴색했다는 비판도 있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과거의 늪에 빠져 있던 조계종을 시대와 함께 걷는 종단으로 만들었다” “오늘의 조계종을 만든 개혁”이라는 평가에 대해서는 이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9일 백양사 인근에서는 종단 개혁을 주도한 세력의 하나인 실천불교전국승가회(실승) 회원들이 갑론을박을 벌였습니다. 호계원 판결을 성토하는 분위기 속에 백양사 방장이자 실승 고문인 지선 스님은 “절집에 목 베는 공사(公事·여러 사람이 함께 하는 논의)는 없다. (본인이) 참회하면 대중의 뜻을 물으면 된다”고 했습니다. 일각에서 주장하는 승려대회 개최와 관련해서는 “실승은 정치단체가 아닌 수행단체다. 자비로 저항해야 한다”고 선을 그었습니다. 복권을 추진한 쪽에선 의현 전 원장의 참회가 있었고 고령이라는 점, 그리고 1994년 징계 당시 있었던 절차상의 문제 등을 고려한 판결이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종단의 바닥 정서는 이번 판결을 개혁정신의 훼손, 과거로의 후퇴로 여기고 있습니다. 조계종 대다수 구성원의 목소리는 분명합니다. 의현 전 원장의 복권 문제는 찬반을 떠나 종헌 개정 차원에서 제대로 다뤄져야 할 사안이라는 겁니다. 1994년 이전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는 명백한 메시지가 필요합니다. 아니, 지금은 빛이 바랜 그 개혁정신을 제대로 실천하겠다는 응답이 필요합니다. 김갑식 기자 dunanworld@donga.com}

지난달 17일 해인사 송광사와 함께 3보(寶) 사찰로 불리는 통도사 주지로 취임한 영배 스님(63)은 한때 조계종의 ‘풍운아’로 불렸다. 총무원장을 지낸 원로 몫으로 여겨지던 동국대 이사장을 54세의 나이에 맡은 것도 그렇고, 명쾌한 화법이나 배우 뺨치는 외모도 화제였다. 영배 스님은 동국대 교수였던 신정아 씨의 학력 위조사건과 변양균 대통령정책실장과의 스캔들이 불거지자 2009년 이사장 자리에서 물러났다. 1일 서울 종로구 우정국로 불교신문사 사장실에서 스님을 인터뷰했다. 이날은 종단의 겸직 금지 규정에 따라 사장으로 재임하는 마지막 날이었다. ―불교신문사 사장에 이어 통도사 주지 취임, 다시 풍운아가 된 게 맞는 것 같습니다. “풍운아는 무슨요? (웃음) 이사장에서 물러난 뒤 선방도 다니고 기도 많이 했습니다. 그 덕에 부처님께서 봉사하라고 기회를 주신 것 같습니다.” ―큰 사찰 주지가 바뀔 때마다 우여곡절이 많습니다. 주지 권한이 너무 많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선거로 뽑는 제도에 문제가 있긴 합니다. 내 편 네 편이 생기고, 돈 문제와 싸움까지 일어나게 됩니다. 대중의 뜻을 모아 가급적 선거를 지양하는 게 바람직하죠. 농담이지만 전임 주지 스님과 업무 인수인계를 하면서 ‘오늘부터 일절 불이익이 없도록 하겠다’고 했습니다.” ―통도사 화합을 위한 계획이 있습니까. “통도사 일주문 양쪽 돌기둥에 ‘방포원정 상요청규(方袍圓頂 常要淸規) 이성동거 필수화목(異姓同居 必須和睦)’이란 구절이 있어요. 방포(가사)와 원정(둥근 머리)은 스님을 가리키는데, 스님 사는 곳엔 맑은 규율, 성 씨 다른 다양한 사람들이 사는 곳엔 화목이 필요하다는 얘기죠.” ―불교가 젊어져야 한다는 의견이 많습니다. “사회적 역할을 강화해야 합니다. 통도사 직영으로 무료 급식소를 운영하고, 산문에서 시작되는 약 2km의 숲길을 공연과 전시가 가능한 문화가 있는 길로 새로 디자인할 계획입니다. 청년실업 등으로 힘든 젊은 사람들이 찾는 사찰로 바뀌어야 합니다.” 신정아 사건은 그의 삶에서 너무나 큰 흔적이기에 그대로 지나칠 수는 없었다. 의외로 담담하고 주저 없는 답변이 돌아왔다. ―사건 뒤 신정아, 변양균 씨와 만난 적이 있나요. “신정아 씨가 통도사로 내려온 적 있습니다. 그때 ‘당신은 아직 젊다. 당신 능력과 재주에 6년 정도만 투자하면 세상에서 그렇게 문제 삼는 예일대 박사 학위는 따고도 남는다. 어려움을 그렇게 극복하라’라고 말해 준 적이 있어요. 변양균 씨와는 만날 기회가 없었고요.” ―너무 ‘쿨’한데, 화도 안 났습니까. “사람이니 당시에는 그럴 수도 있지만 지금은 그런 것 없어요. 나의 업(業) 때문에 학교에 피해를 끼치고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게 미안할 뿐이죠. 주변에서 점 볼 줄 아는 분들이 ‘여자 조심하라’고 하길래 출가자한테 별 소리다 했더니 결국 일이 생기긴 했어요. 허허.” ―요즘 자리다툼과 돈, 여성을 둘러싼 출가자의 범계(犯戒) 문제가 끊이지 않습니다. “불자들은 출가자를 통해 부처님 법을 받아들이는데 출가자가 사람들의 신망을 잃었다면 자격이 없습니다. 알아서 스스로 물러나야죠.” ―의현 전 총무원장의 멸빈(滅[·승려 자격을 박탈하는 징계) 구제에 대한 논란도 커지고 있습니다. 징계 당시 부인과 아이까지 있었다는 보도도 나왔는데요. “절차 문제를 들어 구제하는 것은 틀렸어요. 편법이 아니라 종헌 차원의 논의가 필요합니다. 1994년 종단개혁은 서의현 개인이 미워서가 아니라 종단을 바로잡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무엇보다 94년 개혁정신에 대한 존중이 아쉽습니다.” ―총무원이 이 논란을 29일 열리는 대중공사 주제의 하나로 정했는데요. “그것도 이상합니다. 대중공사는 종단 미래를 위한 계획을 세우기 위한 것인데 법리적 문제인 이 문제를 논의하는 것은 맞지 않아요.” 김갑식 기자 dunanworld@donga.com}

지난달 산티아고를 포함해 스페인 성지를 순례한 기억이 생생합니다. 일주일 남짓의 길지 않은 여정에 많은 성지를 둘러봤기에 어쩌면 달리는 말 위에서 풍경을 바라보는, 주마간산(走馬看山) 아닐까 합니다. 그럼에도 지울 수 없는 것은 가톨릭 성인(聖人)들에 얽힌 스토리텔링입니다. 산티아고(성 야고보의 스페인어 표기)에는 예수의 제자 야고보가 당시 세상 끝으로 여긴 이베리아 반도에 복음을 전한 뒤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순교했고, 이후 제자들이 그 유해를 이곳에 안장했다는 일화가 전해집니다. 아빌라는 데레사 성녀의 도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인근 작은 도시 알바 데 토르메스의 한 수도원에는 수백 년 세월이 지나도 썩지 않는 것으로 알려진 그의 심장과 한쪽 팔이 보존돼 있습니다. 톨레도의 대성당을 찾는 이들은 성모자상 앞에서 무엇에 끌린 듯 발걸음을 멈추곤 합니다. 성모자상 중에서 드물게 환하다는 미소 때문이죠. “그 미소를 제대로 음미하려면 몇 도 각도에서 봐야 한다”는 가이드의 친절한 설명도 이어졌습니다. 야고보의 유해가 진짜 묻혀 있을까요? 데레사 성녀의 심장은 정말 썩지 않을까요? 신앙의 유무에 따라 신비한 종교현상에 대한 입장은 달라질 수 있습니다. 신자 중에서도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다는 의견도 있을 수 있습니다. 믿거나 말거나, ‘전설 따라 삼천리’일 수도 있지요. 그럼에도 흥미로운 것은 수많은 비(非)가톨릭 신자들조차 성인들에 얽힌 스토리텔링을 따르고 있다는 겁니다. 저도 예외는 아니었죠. 야고보의 무덤을 두 팔로 껴안고, 데레사 성녀의 심장을 바라보며 기도하는 의식에 동참했습니다. 산티아고를 비롯한 성지에서 만난 이들 중에는 가톨릭을 포함한 다양한 종교의 신자와 무신론자도 포함돼 있었습니다. 블랙 마돈나가 있는 몬트세라트 성지에서 만난 안톤 야스퍼라는 젊은이는 종교개혁이 시작된 독일 출신이었습니다. 마르틴 루터와 달리 교회 내부의 쇄신을 선택한 이냐시오의 흔적을 보는 소감을 묻자 “개신교 신자이지만 그게 무슨 상관이냐. 가톨릭 성인들과 관련한 성지들을 둘러봤는데 많은 걸 배웠다”고 했습니다. 스토리텔링에 매혹된 사람들이 이 도시들을 먹여 살리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개인의 처지에 따라 순례 또는 관광으로 조금씩 색깔이 바뀔 뿐이죠. 문득, 이웃 종교의 종교시설 또는 성지화 과정에 거부감이 큰 국내 종교계의 분위기가 떠오릅니다. 종교적 스토리텔링, 그것은 갈등과 다툼의 원인이 아니라 서로 지켜줘야 할 매력적인 우리 문화의 자산 아닌가 합니다.김갑식 기자 dunanworld@donga.com}

“메르스 때문에 8일간 쉬었어요. 여기 못 오셔서 그런지 얼굴빛들이 좋지 않아 마음이 무거웠습니다.”(김경숙 젤뚜르다 수녀) “25주년 감사 미사 때 수녀님께서 그동안 고마웠던 분들의 이름을 한 사람씩 차례로 꼽는데 그 마음이 목소리에서 느껴져 ‘찡했습니다’.”(나봉균 신부) 23일 대전 동구 대전성모의 집에서 이곳 책임자인 김 수녀와 천주교대전교구에서 사회복지 활동을 총괄하는 사회사목국장 나 신부를 만났다. 대전천변에 있는 60m²(20평) 남짓한 이 공간은 한눈에 보기에도 낡은 조립식 건물이다. 계단을 밟고 2층으로 올라가면 단체로 식사할 수 있는 식탁들이 놓여 있고, 한편에 주방이 보인다. 계단도 가파르고, 대형 선풍기가 돌고 있지만 내부 공기는 후텁지근했다. 하지만 불편한 이 공간은 대전교구가 벌여온 ‘100원 나눔 운동’의 상징이다. 이곳은 무료급식소이면서도 이용자들의 자존감을 지켜주기 위해 한 끼에 100원을 내도록 유도해왔다. 현재 대전교구장인 유흥식 주교가 사목국장으로 있던 1989년 대전성모의 집 설립을 주도했다. 교구는 미사 때마다 한 끼 100원씩 헌금해 이웃을 돕자는 취지의 ‘한 끼 100원 나눔운동본부’을 설립해 사회나눔 활동도 적극적으로 실천하고 있다. 두 사람의 대화에서는 자연스럽게 최근 경사와 메르스(MERS·중동호흡기증후군) 얘기가 먼저 나왔다. 메르스 여파로 급식소 문이 한동안 닫혔고, 20일에는 개원 25주년 기념미사가 봉헌됐기 때문이다. 김 수녀는 “거의 매일 보던 얼굴들이 안 보이면 혹시 안 좋은 일이 벌어진 것 아닌가 해서 가슴이 쿵쿵 뛴다”면서 “누군가 다른 급식소에서 봤다고 말해 주면 그제야 한시름 놓곤 한다”고 했다. 나 신부는 “수녀님들과 자원봉사자들의 헌신적인 노력이 없었다면 성모의 집의 오늘은 없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하루 200명 정도가 성모의 집을 찾고 있다. 이용자들은 하루 세 끼를 모두 먹을 수 있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에 유난히 식사량이 많은 것이 특징이다. “식사량 때문에 다툼이 있는 급식소도 있다는데 우리는 ‘무한리필’이죠. 조금 부담이 되더라도 먹는 음식은 원하면 언제나 충분하게 배식하려고 노력합니다.”(김 수녀) 최근 몇 년 사이 이곳의 가장 큰 고민은 이전 문제다. “대전천에서 교구청까지 걸으면서 이전 장소를 물색하기도 했습니다. 안전과 위생 등 여러 이유로 옮겨야 하는데 이전 예정지에 사는 주민들의 반대로 계획이 무산됐죠.”(나 신부) “계단이 가파른 편이라 거의 기어오르다시피 해서 오는 분들도 있어요. 큰 사고가 날까봐 걱정이 많아요.”(김 수녀) 하지만 이들의 표정은 낙관적이었다. 김 수녀는 “큰일을 이뤄주시는 건 자원봉사자들과 성모님”이라며 “앞으로 좋은 일이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최근 에세이 ‘가끔은 미쳐도 좋다’(바오로딸)를 출간한 나 신부는 2002년부터 장애인과 이주민, 빈민 등을 위한 사목활동에 주력해왔다. “종종 자원봉사라면 만사를 제쳐두고 나서는, 제대로 ‘미친’ 분들을 만나게 됩니다. 하하. 이분들이야말로 교회와 사회를 선한 방향으로 이끄는 분들이라고 생각해요.” 대전성모의 집 후원은 042-627-7571.대전=김갑식 기자 dunanworld@donga.com}

‘나 또한 죽는 그날까지 꽃씨를 뿌리는 남자로 살리라. 내 가는 길마다 사랑의 꽃씨, 화합의 꽃씨, 꿈의 꽃씨를 뿌리며 살리라.’ 한국 개신교계의 대표적 중견 목회자로 꼽히는 소강석 새에덴교회 담임목사(53·사진)가 최근 출간한 에세이 ‘꽃씨 심는 남자’(샘터)의 한 구절이다. 이 책은 지리산 산골에서 태어난 그가 집안 반대를 무릅쓰고 목회자의 꿈을 키워 개척교회에서 신자 4만 명의 교회를 이루기까지의 사연을 진솔하게 담아냈다. 하지만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맨손과 맨몸, 맨땅에서 일어선 이른바 ‘3M(맨) 목회자’의 성공담이 아니다. 꽃씨 얘기다. 소 목사는 “이 책은 분열된 한국 교회뿐만 아니라 남북으로 나뉜 우리 민족을 하나로 만들어 화합과 통일의 ‘꽃’을 피우는 작은 꽃씨의 삶을 살겠다는 나의 다짐”이라고 말했다.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은 추천사에서 “내가 본 소강석 목사는 한국 교회를 대표하는 차세대 목회자로 사자후를 토해내는 모습도 있지만, 동시에 글을 사랑하는 문학 소년의 순수한 감성과 애틋함을 지니고 있다”고 했다.김갑식 기자 dunanworld@donga.com}

예수회를 설립한 로욜라의 이냐시오가 태어난 지 24년 뒤인 1515년 스페인 중부 도시 아빌라. 유대인 귀족 가정에서 한 여자 아이가 출생했다. 아무도 몰랐다. 그 아이가 나중 ‘아빌라의 성녀’ ‘예수의 데레사’라는 위대한 수식어의 주인공이 될 줄은. 그는 19세기 말 프랑스에서 출생해 24세에 생을 마감한 ‘소화(小花) 데레사’와 구분하기 위해 또는 ‘대(大) 데레사’로 불리기도 한다. 성녀 데레사(1515∼1582)는 가톨릭사에서 매우 독특하고 중요한 인물이다. 예나 지금이나 남성 중심의 가톨릭 시스템에서 여성이 가톨릭 쇄신의 주역으로 활동했기 때문이다. 500년 전이라는 시간의 무게까지 더하면 상상하기 쉽지 않은 일이다. 8일 마드리드에서 북서쪽으로 85km 떨어진 소도시 아빌라. 해발 1131m의 고지대에 로마시대 성벽이 보존된 고요한 도시는 말 그대로 ‘성녀의 도시’였다. 아빌라는 올해 데레사 탄생 500년을 맞아 여러 기념행사를 치렀고, 곳곳에는 데레사를 주제로 한 그림과 깃발, 조각 등이 넘쳐났다. 어린 데레사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14세부터 수녀원에서 자랐고, 19세에 가르멜 수녀원에서 수녀로 서원했다. 하지만 그는 52세 때인 1567년 가르멜 초기 규칙대로 수도생활에 전념하자며 4명의 수녀와 함께 ‘맨발의 가르멜’ 수도회를 창립한다. 이들은 엄동설한에도 맨발로 샌들만 신고 다녔다. 맨발은 절제와 고행, 금욕의 상징이다. 이들은 외부와의 접촉이 차단된 봉쇄(封鎖) 수도원에서 기도와 노동의 가치를 지켜냈다. 이후 데레사 수녀는 스페인 전역에 남녀 수도원 17개를 세웠다. 1970년 교황 바오로 6세는 교회의 개혁가이자 영성가, 저술가였던 그를 여성으로서는 처음으로 교회학자로 선포했다. 현재 박물관으로 운영되고 있는 엔카르나시온 가르멜 수도원은 데레사 수녀가 추구한 삶과 영성의 세계를 살펴볼 수 있는 공간이다. 입구부터 봉쇄 수도원이라는 말의 의미가 다가왔다. 좁은 문을 들어서면 스스로 밖으로 나갈 수 없고, 안의 끈을 당기면 외부에서 출입문을 열어 주도록 돼 있다. 작은 면회실은 창살이 있어 감옥의 면회실을 연상시켰다. 이곳에는 데레사 수녀의 활동을 알 수 있는 각종 자료와 함께 소박한 주방, 수녀들이 연주한 악기 등이 전시돼 있다. 한쪽에는 데레사 수녀가 52세 때 고해신부로 인연을 맺은 25세의 성 십자가의 요한과 관련된 유물도 남아 있다. 데레사 수녀의 영성에 영향을 받은 십자가의 요한은 남자 맨발의 가르멜 수도회를 연다. 가장 인상적인 곳은 데레사 수녀와 아기 예수의 만남을 묘사한 공간이다. 데레사 수녀는 이때 “나는 데레사의 예수다”라는 말을 들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예수의 데레사’라는 별칭이 붙게 된 신비 체험의 순간이다. 신학대학원 교수를 지낸 다니엘 데 파블로 마르토 신부는 “목표를 세웠지만 희생과 고행이 없다면 이룰 수 없다”며 “필요한 것 중에서도 가장 필요한 것을 선별할 줄 아는 영성이야말로 성녀 데레사가 발견한 기쁨이자 충만”이라고 말했다. 1582년 데레사 수녀는 다른 지역에서 수도원을 만든 뒤 아빌라로 돌아가던 중 서쪽의 알바 데 토르메스에서 묵다 “주여, 나는 성 교회의 딸”이라고 거듭 말하며 숨을 거뒀다. 그곳 수녀원에는 데레사 수녀의 유해가 있다. 이곳에는 수백 년 세월이 지나도 썩지 않는 것으로 알려진 그의 심장과 한쪽 팔이 보존돼 있어 순례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천주교주교회의 이정주 신부는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는 것은 현대 가톨릭교회의 기본 정신 중 하나”라며 “특히 가난과 깊은 영성을 바탕으로 한 데레사 성녀의 개혁 정신은 현재 프란치스코 교황까지 이어지고 있다”고 말했다.아빌라(스페인)=김갑식 기자 dunanworld@donga.com}

1994년 대한불교조계종 사태 당시 멸빈(승적의 영구 박탈) 징계를 받았던 전 총무원장 의현 스님(80·사진)이 승적을 회복할 것으로 보여 관심을 모으고 있다. 조계종 내에서 사법부 기능을 담당하는 재심호계원(원장 자광 스님)은 18일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에서 제96차 심판부를 열고 의현 스님이 제기한 재심 신청을 받아들여 공권정지 3년으로 감형하는 판결을 내렸다. 1994년 종단 사태는 두 차례 총무원장을 지낸 의현 스님의 3선 연임 시도를 둘러싼 갈등으로 촉발됐다. 이 사태는 연임 지지와 반대 세력이 맞서 극심한 폭력 사태 끝에 의현 스님이 사퇴하면서 일단락됐다. 조계종에 따르면 재심호계원은 의현 스님이 △지난날의 과오에 대해 참회하고 20년 이상 환속하지 않고 스님의 신분으로 살아온 점 △현재 80세가 넘은 고령으로 본인이 마지막을 종단 소속 스님으로 돌아오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는 점 등을 참작해 공권정지 3년을 확정했다. 이에 따라 의현 스님은 재심이 확정된 날로부터 3년이 지나면 조계종 스님으로 사면복권된다. 의현 스님은 이날 심리에 참석해 재심호계위원들에게 지난날의 과오를 눈물로 참회하며 마지막 삶을 종단 스님으로 살 수 있는 기회를 달라고 호소한 것으로 알려졌다.김갑식 기자 dunanworld@donga.com}

“친구들을 사귈 수 있고, 종교적인 의미도 되새길 수 있어요.” 9일 세계적인 순례길 스페인 산티아고에서 만난 한 순례객의 말입니다. 이탈리아 출신의 40대 엔지니어라고 자신을 밝힌 그는 자전거를 타고 있었습니다. 이탈리아에서 프랑스 남부 루르드까지 이동한 뒤 그곳에서 자전거로 13일째 산티아고를 향해 페달을 밟고 있다고 하더군요. 그의 세 번째 산티아고행입니다. 왜 산티아고에 여러 번 오느냐고 물었더니 그는 몇 가지 이유를 꼽다가 “잘 모르겠다”며 웃었습니다. 알려진 대로 산티아고는 예수의 열두 제자 중 하나인 야고보(스페인식 이름 산티아고)의 무덤이 있는 스페인 서북쪽 도시 산티아고데콤포스텔라로 가는 길입니다. 스페인의 가톨릭 성지를 취재하다 경험한 4km 정도의 도보 순례는 특별한 경험이었습니다. 1시간 남짓 걸으면서 가장 인상적으로 다가온 것은 길에서 만난 이들의 미소와 웃음이었습니다. 네덜란드 출신의 부부 순례객은 이쪽에서 양해를 구하며 사진을 찍자 자신들도 카메라를 들이대며 활짝 미소를 지었습니다. 산티아고 가는 길에는 정말로 다양한 국적과 피부색, 연령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을 마주칠 때마다 예외 없이 처음으로 나누는 ‘공통 언어’는 바로 웃음이었습니다. 그 길에는 한국인 순례객들도 빠지지 않습니다. 11일째 순례 중이라는 이윤정 씨(41)는 하루 20∼30km씩 걸었다고 했습니다. 2주간의 휴가를 내고 이 길을 찾았다고 하더군요. 그는 “내 삶의 힘든 시기에 꼭 한번 산티아고에 오고 싶었는데 생각보다 그 시기가 빨라졌다”고 하더군요. 순례객들의 웃음 뒤에는 다양한 이유가 숨어 있을지 모릅니다. 제가 다시 그 길을 제대로 걷게 된다면 더 많은 이해를 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이유 따위는 필요 없어! 이렇게 말할 수도 있겠지요.―산티아고에서 김갑식 기자 dunanworld@donga.com}

《 지난해 8월 프란치스코 교황은 방한 당시 자신을 낮추는 소통과 공감의 카리스마로 한국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그는 가톨릭 역사상 첫 예수회 출신 교황이다. 그의 교황 명에는 ‘빈자(貧者)들의 성인’으로 불리는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1182∼1226)의 삶을 따르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다. 또 하나, 22세에 입회해 평생을 지켜 온 예수회 영성은 그를 이해하기 위한 열쇠다. 예수회 창설자인 로욜라의 이냐시오 성인(1491∼1556)의 생가 및 기념성당 등에 이어 ‘맨발의 가르멜’ 수도회를 창립한 성녀 데레사(1515∼1582)의 삶을 통해 프란치스코 교황이 추구해 온 영성의 뿌리를 찾아간다. 》스페인 북부 빌바오에서 1시간 반 거리에 있는 작은 도시 로욜라. 이곳은 예수회의 출발점이자 심장이다. 예수회는 내적으로 이냐시오의 저서인 ‘영성수련’을 통해 가톨릭 내부의 쇄신을 주도하고, 대외적으로는 신대륙과 아시아 선교에 적극적으로 나서 가톨릭의 세계화에 기여했다. 예수회 선교사들은 청빈 정결 순명의 3대 서원뿐 아니라 교황에 대한 절대적인 충성까지 서약했다. 한마디로 예수회는 종교개혁으로 무너져 가는 가톨릭의 보루였다. 10일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가운데 도착한 로욜라는 스위스 계곡의 소도시를 연상시켰다. 이냐시오 생가 및 기념성당 앞에는 작은 개울이 흐르고 멀리 한쪽에는 병풍 같은 산들이 서 있다. 이냐시오 생가는 박물관으로 조성돼 많은 사람이 찾고 있다. 이곳에는 한때 기사의 삶을 좇다 성직자의 길을 선택한 그의 행적에 얽힌 그림과 물건들이 전시돼 있다. 특히 4층 ‘회심(回心)’의 소성당은 한 젊은이가 하느님에게 삶을 바치는 결정적 순간을 묘사하고 있다. 지금으로부터 약 500년 전인 1521년 스페인 귀족 가문 출신의 한 젊은이는 인근 팜플로나에서 프랑스군과 교전하다 다리 부상으로 귀환해 요양한다. 그는 무료한 시간을 기사도의 활동을 그린 책으로 때우려고 했지만 마침 집에는 그런 종류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예수 그리스도와 성인들의 삶에 관한 책을 집어든 그는 뜻밖에 이 과정에서 평소 일상에서 찾지 못한 기쁨과 평안을 찾는다. 심지어 아기 예수를 안고 계신 성모 마리아를 보는 환시(幻視)까지 체험한다. 이냐시오는 그 뒤 동북부 카탈루냐 주에 있는 몬트세라트(톱니 모양의 산)의 성모 마리아에게 봉헌된 제단에 기사의 상징인 장검과 단검을 봉헌한다. 검 대신 그가 손에 쥔 것은 순례자의 지팡이였다. 1522년 그는 이곳에서 15km 떨어진 만레사 동굴에서 구걸로 생계를 꾸려 가며 기도와 명상의 시간을 갖는다. 이냐시오 생가의 순례객 담당자인 아이노아 빌라 씨는 “이곳은 전 세계에 걸쳐 활동하는 예수회를 잉태한 모원(母院) 같은 곳”이라며 “가톨릭 성직자뿐 아니라 다른 종교의 지도자와 신자들이 찾고 있다”고 말했다. 이곳을 찾는 방문객은 한 해 10만 명에 달한다. 이곳에는 생가와 기념성당뿐 아니라 영성수련센터, 예수회 수도원도 들어서 있다. 수도원에는 평균 연령 82세인 신부와 수도사 50여 명이 거주하고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도 주교 시절인 1991년 이곳을 방문해 이냐시오 성인의 흔적을 더듬으며 기념 미사를 집전하기도 했다. 빌라 씨는 “2년 전 프란치스코 교황이 선출됐을 당시 침묵 그 자체인 수도원마저 광란의 도가니가 됐다”며 “그 다음 날 세계 각국의 미디어가 로욜라에 몰렸다”고 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자신이 예수회 출신이라는 이유로 예수회에 대한 특별한 언급을 하지는 않지만 교황과 예수회의 관계는 바늘과 실의 관계다. 아돌포 니콜라스 예수회 총장은 2주에 한 번씩 교황을 면담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11일 찾은 만레사에는 이냐시오가 수도한 동굴경당(소규모 그룹이 이용하는 순례자용 성당)이 있다. 그는 이곳에서 11개월간 생활하면서 많은 메모를 남겼고, 이는 현재 가톨릭에서 가장 많이 사용하는 수련서인 저서 ‘영성수련’이 됐다. 이 저서는 이냐시오가 겪은 신비 체험을 기초로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을 동시에 살필 것을 강조하고 있다. 영성수련은 가톨릭 입장에서 볼 때 종교개혁이라는 최대의 위기를 맞은 교회 개혁에 대한 예수회의 입장을 명확하게 보여 준다. 마르틴 루터가 교회를 떠나 개혁 운동을 전개한 반면 이냐시오는 내적 쇄신을 통한 영적 개혁을 선택한 것이다. 영적 개혁과 교황의 명에 따라 세계 어디든지 나가는 선교 서약은 예수회의 ‘적응주의’ 선교 정신을 보여 준다. 예수회원들은 적극적인 선교를 위해 사제복 착용이나 공동으로 바치는 성무일도(聖務日禱) 등을 의무화하지 않는 반면 현지 토착 문화는 상당 부분 수용했다. 예수회원들은 최종 서원 단계에서 고위직에 오르기 위해 ‘애쓰지도 야망을 품지도 않는다’는 특별 서약까지 한다. 취재에 동행한 천주교주교회의 이정주 신부는 “이냐시오 성인의 ‘영성수련’은 현재까지도 가톨릭교회와 사제들에게 깊은 영향을 끼치고 있다”며 “프란치스코 교황이 보여 준 가난과 단순함, 파격의 행보는 자신을 낮추고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위하여’라는 예수회 정신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 말했다.로욜라·만레사=김갑식 기자 dunanworld@donga.com}
《 지난달 27일 경기 용인시 수지구 새에덴교회. 이날 신학자 무라오카 다카미쓰 씨를 비롯한 일본 개신교계 지도자와 목회자 15명으로 구성된 ‘사죄와 화해 방문단’이 예배에 참석했다. 이들은 사과문을 낭독하고 신자들을 향해 엎드려 절한 뒤 한참 동안 흐느껴 울었다. 이에 교회 장로들이 나서 이들의 눈물을 닦아주면서 일으킨 뒤에야 사죄의 절은 끝났다. 이에 앞서 방문단은 일본대사관 앞에서 열린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 주관의 수요시위에 참석해 사죄의 뜻을 밝혔다. 》사죄와 화해의 예배는 이 교회 소강석 담임 목사(53)가 산파 역할을 맡았다. 그는 한일기독의원연맹 지도목사로 한국과 일본 간 과거사 청산과 화해를 위한 노력을 기울여 왔다. 최근 서울 인사동에서 만난 그는 “예배에 참석한 신자들 역시 처음에는 반신반의하다 이들의 눈물에 마음을 열었다”며 “비록 작은 모임이지만 진실이 담긴 사죄와 눈물이야말로 양국이 화해의 길로 갈 수 있는 해법이라는 사실을 확인했다”고 말했다. 그는 맨손과 맨몸, 맨땅에서 일어섰다며 ‘3M 목회자’를 자처한다. 1988년 서울 가락동 지하 공간에서 4명이 모여 창립예배를 올렸으며 현재 신자 3만5000여 명의 교회를 이끌고 있다. 요즘 새로 생긴 별명은 ‘개신교계의 역사 지킴이’다. 그는 2006년부터 일본 목회자들과 교류하며 일본 정부의 역사 왜곡을 바로잡기 위해 노력했고, 2007년부터 6·25전쟁 참전용사의 한국 방문과 이들을 위로하는 활동을 본격화했다. 특히 올 1월 6·25참전용사 초청 보은행사와 북한 돕기, 고려인과 조선족 동포를 체계적으로 지원하기 위한 사단법인 한민족평화나눔재단이 설립됐다. 교단도 아닌 개별 교회 목회자로서는 버거운 역할이다. 중대형 교회를 개척한 뒤 지교회(支敎會) 등을 늘려가는 기존 목회자들의 행보와도 다르다. “맨손으로 시작해 목회자로 성공하기 위해 발이 부르트도록 뛰었고, 결실도 이뤘습니다. 그런데 40대 들어 ‘이제 어디로, 무엇을 위해 가야 하나’ 하는 ‘제2의 사춘기’가 왔어요. 더 큰 교회로 가야 합니까? 그건 아니죠.” 결론은 민족과 사회를 위해 기여하는 교회였다. 그는 “요즘 교회들이 자기 성장에만 몰두해 욕먹고 있지만 과거에는 그렇지 않았다”며 “구한말과 일제강점기 우리 교회는 항상 민족의 아픔을 보듬으면서 사회 발전에 기여해 왔다”고 덧붙였다. 적지 않은 예산이 들어가는 교회 외부활동에 대한 신자들의 불만은 없을까? 그는 “인터넷이 발달해 우리 활동이 불투명하면 견딜 수 없을 것”이라며 “우리 신자들은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하는 분들이 많다”며 껄껄 웃었다. 그는 6·25전쟁 관련 행사 등으로 ‘6월에 바쁜 남자’이기도 하다. 하지만 올해는 메르스 여파로 이달에 예정된 ‘한국전 참전용사 초청 보은 및 우호증진 예배’를 다음 달 25일로 옮겨 진행한다. 미국과 캐나다, 콜롬비아 참전 용사 및 가족 등 45명이 방한한다. 이달 중 자전적 에세이 ‘꽃씨 심는 남자’(샘터사)를 출간하는 소 목사는 “어려웠던 경험을 담은 책이 젊은이에게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며 “어느 지역의 ‘큰 교회’ 목사보다는 우리 역사와 사회의 발전을 위해 열심히 기도한 목사로 기억되고 싶다”고 말했다.김갑식 기자 dunanworld@donga.com}

개화기 신여성이자 근대 한국불교의 대표적 비구니로 꼽히는 일엽(속명 김원주·1896∼1971) 스님을 조명하는 학술대회가 열린다. 평남 용강에서 목사의 딸로 태어나 한국과 일본에서 신학문을 공부한 스님은 1920년대 잡지 ‘신여자’를 창간하고, ‘신정조론’ ‘자유연애론’으로 대표되는 여성계몽운동을 펼쳐 당시 사회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여러 번의 결혼과 동거 등 사연 많은 사랑 끝에 1933년 모든 것을 버리고 만공 스님 문하로 출가했다. 입산 후에는 스승의 뜻에 따라 절필하고 비구니의 총본산인 견성암에서 참선수행으로 일관했다. 스님의 친아들이자 이당 김은호 화백의 양자였던 일당 스님이 지난해 입적하기도 했다. 김일엽문화재단은 12일 충남 서산시 한서대에서 ‘오늘, 왜 김일엽인가’라는 주제로 ‘제1회 김일엽 학술대회’를 개최한다. 방민호 서울대 교수가 ‘김일엽은 누구인가’, 유진월 한서대 교수가 ‘김일엽과 콘텐츠 활용 방안’, 박진영 아메리칸대 교수가 ‘김일엽: 여성과 불교철학’, 김광식 동국대 교수가 ‘김일엽 불교의 재인식(인연, 수행, 출가를 중심으로)’, 김주리 한밭대 교수가 ‘김일엽 문학의 연구방향에 대한 고찰’을 주제로 각각 발표한다. 재단은 “한국 근대사의 대표적 신여성인 김일엽의 생과 문학 활동, 여성운동, 불교사상 등을 망라해 연구함으로써 김일엽의 위상을 재정립하고 콘텐츠 사업 등으로 발전시키겠다”고 밝혔다. 재단은 앞으로 일엽 스님에 대한 영문판 평전과 전집을 출간하고, 장기적으로 기념관과 근대여성문학관을 건립할 계획이다.김갑식 기자 dunanworld@donga.com}
대한불교천태종 총본산인 충북 단양 구인사가 개산(開山·창건) 70주년을 맞아 기념대법회와 학술대회, 사진전, 음악회 등 다채로운 행사를 개최한다. 구인사 창건은 고려시대 대각국사 의천 이후 억불 정책에 의해 사실상 맥이 끊겼던 천태종의 중흥을 의미한다. 구인사는 1945년 상월원각대조사가 제자들을 인솔하고 단양군 백자리에 있는 여의생 마을을 찾으면서 시작됐다. 8명의 신도가 입사(入舍)하면서 5월 단오일에 개관했다. 천태종은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수행하는 ‘주경야선(晝耕夜禪)’의 종풍을 바탕으로 현재 500여 명의 스님과 250만 명의 신도들이 있는 교단으로 성장했다. 19일 오전 10시 구인사 광명전에서는 ‘한중일 3국 천태종 개산과 수행종풍’을 주제로 한 학술대회가 진행된다. 20일 같은 장소에서 개산 70주년 기념 대법회가 열린다. 개산 이후 역사를 한눈에 살펴볼 수 있는 사진전은 12일부터 불교천태중앙박물관 3층 제1전시실에서 열린다. 이 전시는 ‘구봉팔문 연화도량’ ‘초가삼간 수행도량’ ‘천태종 근본도량’ ‘3대지표 실천도량’ ‘미래불교 견인도량’의 5가지 주제로 구성됐다. 19일 오후 6시 반 광명전 5층에서는 음악회도 봉행된다. 4일 간담회에 참석한 천태종 총무부장 월도 스님은 “구인사 개산 70주년은 새로운 70년을 준비하는 기회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김갑식 기자 dunanworld@donga.com}

“한산한수 필자유의(閑山閑水 必自有意), 청나라 때 승려이자 문인, 화가였던 팔대산인(八大山人)의 작품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유유자적한 산수에도 반드시 그 뜻이 있다고 합니다. 산과 물, 바로 자연의 지혜를 배워야죠.” 2일 서울 인사동의 한 갤러리에서 만난 봉은사 주지 원학 스님(62)의 말이다. 스님은 17∼23일 서울 종로구 인사동9길 아라아트센터에서 7번째 개인전을 갖는다. 16세 때인 1965년 도성 스님을 은사로 출가한 그는 남다른 행보를 걸어왔다. 대한불교조계종 총무부장과 종단의 국회 격인 중앙종회 의원, 10·27법난피해자명예회복위원회 위원장을 지냈고, 2008년에는 정부의 종교 편향을 비판하는 범불교도대회를 주도했다. 그는 종단의 행정 업무를 담당하는 이른바 ‘사판(事判)’의 고수다. 그러면서도 그가 줄곧 놓지 않은 것은 14세에 처음 잡은 붓이다. 해인사의 도인으로 불리던 지월 스님은 손상좌 원학 스님의 재주를 눈여겨보다 “글씨냐, (일반)대학이냐, 선방이냐” 택하라고 했다. 젊은 출가자의 선택은 묵향(墨香)이었다. 이후 강원에서 경전을 공부하면서 남종화의 거장인 의재 허백련의 제자인 우계 오우선에게서 산수화, 청남 오재봉에게서 서예를 배운다. 이번 전시에는 산수화와 사군자에 포도와 연꽃, 소나무 등을 보탠 10군자, 금강경 등을 옮긴 작품 등 70여 점이 출품됐다. 40년 이상 공들여 온 서화는 스님에게 수행의 또 다른 이름으로 존재해 왔다. 사실적인 북종화와 달리 남종화는 자신의 직관을 담아내는 사의(寫意)적 표현이 핵심이다. “남종화는 육조 혜능 스님으로 대표되는 남종선(南宗禪)과 맥이 이어집니다. 처음부터 100계단을 차례로 밟는 게 아니라 일념 공부를 통해 단박에 그 계단들을 뛰어넘는 경지로 가는 것이죠. 선비정신과 깨달음을 기초로 한 직관적 작업이 남종화의 정수죠.” 원학 스님이 스스로 정한 자호(自號)는 삼이당(三耳堂)이다. “출가자 본분은 부처님 은혜를 갚는 머슴 역할 아니겠습니까. 머슴이 일 잘하려면 두 귀가 잘 열려 있어야 하고, 여기에 마음속 귀까지 열려 있어야 한다는 의미죠.” 2013년 봉은사 주지로 취임한 원학 스님은 역사와 문화가 어우러진 도심 사찰의 문화콘텐츠 개발에도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봉은사는 최근 사찰음식과 다도, 휴식이 가능한 전통문화체험관 건립을 추진하고 있다. 개별 사찰로는 최초의 국악관현악단이 창설됐고, 7일에는 조계종 불교음악원도 개원한다. “몸은 불가피한 인연으로 도심에 있어도 마음의 근본이 달라져서는 안 됩니다. 제 그림은 자연과 부처님이 준 가르침을 잊지 않겠다는 다짐이기도 합니다.”김갑식 기자 dunanworld@donga.com}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장 자승 스님은 경남 양산 통도사 주지로 영배 스님(63·사진)을 임명했다고 1일 밝혔다.}

중앙 윗부분에는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성모 마리아가 조선시대 왕비 복장으로 앉아 있다. 그 품에 앉아 있는 아기 예수는 왕자 예복인 사규삼(四揆衫)을 입고 빨마 가지(순교자의 승리를 상징하는 대추야자)를 들고 있다. 그 아래 좌우로 124위 복자들은 구름 속에 도열해 있다. 중앙 좌측에는 윤지충 바오로가 상복을 입고 서 있고, 건너편 쪽에는 중국인 주문모 신부가 사제 복장인 수단에 중백의, 붉은 영대를 걸치고 복음서를 들고 있다. 26일 서울 중구 중림로에 있는 천주교서울대교구 이콘연구소(소장 장긍선 신부)에서 만난 ‘한국순교복자 124위 복자화’의 모습이다. 이콘은 주로 동방교회에서 발달한 예배용 그림을 가리킨다. 이 복자화는 장 신부와 최진호 이정희 씨의 작품으로 꼬박 7개월이 걸렸다. 판에 천을 덧붙이고 아교를 칠하는 판 작업에만 두 달이 걸렸다. 이탈리아와 러시아 등지에서 공수해 온 천연 안료가 사용됐다. “복자들이 순교할 당시의 상황과 양반과 중인, 궁녀 등 신분에 맞춰 갓과 도포, 저고리의 모양을 다르게 표현했다. 결혼하지 않거나 부부이면서도 동정(童貞)을 지킨 이들에게는 빨마 가지 대신 백합을 상징으로 했다.”(장 신부) 복자화는 전체적으로 화려한 분위기가 강하다. 순교의 고통을 겪었지만 천상의 영광을 얻었다는 의미에서 실제보다 밝고 아름답게 묘사됐다는 설명이다. 29일은 지난해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시복된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의 기념일이기도 하다. “날짜를 맞춘 것은 아니지만 공교롭게도 복자 기념일을 앞두고 그림이 완성돼 그 의미가 더 깊다. 가톨릭에서 복자와 성인들은 일반 사회의 위인과 비슷한 위치에 있다. 복자화를 보고 기도하면서 가톨릭 신자들이 신앙 선배들의 삶을 충실히 따르기를 바란다.”(장 신부) 최진호 씨는 “자료가 많지 않고 시간이 오래 걸리는 작업이라 쉽지 않았다”며 “복자들의 삶을 공부하고 표현하면서 스스로의 신앙을 돌아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됐다”고 말했다. 이정희 씨는 “이콘의 전통적인 기법을 바탕으로 우리 복식과 순교사에 맞춘 복자화를 완성해 기쁘다”며 “기교보다는 마음으로 작업한 작품이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이 연구소는 2003년 문을 열었다. 1997년부터 5년간 러시아정교회 신학교 대학원 과정에서 이콘화를 공부한 장 신부의 귀국이 계기가 됐다. 1년에 한 번 수강생을 모집하는데 현재까지 150여 명이 거쳐 갔다. 대형 프로젝트가 있으면 이번처럼 팀을 꾸려 이콘 제작에 나선다. 연구소는 최근 가톨릭대 신학대학 개교 160주년 기념 성화도 완성했다. “이콘은 그리스도교 미술의 초기 형태인데 단순하면서도 깊은 영성을 담는 것이 특징이다. 불화(佛畵)의 진수를 맛보려면 경전과 교리를 잘 알아야 하는 것처럼 이콘 역시 성서와 교리에 대한 이해가 중요하다. 공들여 이콘 작업에 매달리면 그림은 물론이고 신앙 공부도 함께 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장 신부) 연구소는 6월 2일까지 서울 중구 명동길 갤러리1898에서 제8회 이콘연구소 회원전 ‘영혼의 빛을 따라서’를 연다. 복자화와 함께 회원 30여 명의 작품을 만날 수 있다. 02-727-2336, 7김갑식 기자 dunanworld@donga.com}

26일 민족종교 갱정유도(更定儒道)의 최고 지도자인 한양원 도정(道正·92)을 간담회에서 만날 기회가 있었습니다. 민족종교협의회 회장이기도 한 그는 나라의 큰 행사나 종교 지도자 모임에서 항상 갓을 쓰고 도포를 입은 채 멋진 풍모를 자랑해 왔습니다. 갱정유도에는 유교를 갱신해 예(禮)를 되찾자는 취지로 지리산 청학동 등에서 옛 모습을 하고 사서삼경을 공부하며 살아가는 분들이 모여 있습니다. 이날 간담회의 주제는 평화통일 선포 50주년을 기념한 학술 세미나였습니다. 6월 4일 서울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열리는 이 행사에서는 송석구 전 동국대 총장이 ‘한반도 평화통일과 민족도의 정신’을 주제로 기조강연을 합니다. 세미나가 끝난 뒤에는 갱정유도에 소속된 갓 쓴 도인 200∼300명이 거리로 나와 50년 전 벌였던 거리 행진을 재현하며 ‘통일과 평화를 염원하며 드리는 두 번째 호소문’을 발표할 예정입니다. 1965년 6월 6일 현충일 아침, 두루마기를 입고 갓을 쓴 갱정유도 도인 500여 명은 전북 남원에서 상경해 서울 시내에서 조선독립만세를 부르며 평화통일 선언문이 담긴 유인물 30만 장을 시민들에게 배포했습니다. 당시 언론에서는 ‘기이한 난동’ ‘갓 데모’ 등으로 묘사했네요. 갱정유도가 작성한 ‘통일과 평화를 위한 민족선언’에는 ‘원미소용(遠美蘇慂)하고 화남북민(和南北民)하자·미국과 소련의 종용(꼬임)을 멀리하고 남북민이 화합하자’ 등 4개 항목이 들어 있습니다. “‘원미소용’은 민족을 분단시킨 미국과 소련의 종용을 멀리하자는 의미인데 당시 정권은 이를 ‘미국을 멀리하고 소련의 종용을 받자’로 해석했습니다.” 당시 행사에 참가했던 한 도정의 말입니다. 그는 “경찰이 반공법 위반으로 나를 비롯한 주동자들을 구속했지만 결국 92일 만에 무혐의로 석방됐다”고 하더군요. 간담회에서는 행사 주제와 한 도정의 풍모 때문인지 최근 건강과 도인술 등에 얽힌 얘기가 많이 나왔습니다. 그는 2013년 택시에서 내리다 손가방이 문에 낀 채 달리는 차에 매달려 30m가량 끌려가는 끔찍한 사고를 당했습니다. 엉덩이와 허벅지 쪽 뼈가 으스러져 중환자실로 실려 갔습니다. 가족들은 그가 14일 동안 의식을 찾지 못하자 장례 준비까지 마쳤다네요. 하지만 한 도정은 건강을 회복해 다리를 조금 저는 것 말고는 큰 불편 없이 활동하고 있습니다. “타고난 건강에 과로(過勞) 과민(過敏) 과식(過食)을 피하고, 아침마다 도인체조를 하면서 어려움을 넘겼다”는 게 그의 설명입니다. 성균관장과 초대 성균관대 총장을 지낸 심산 김창숙 선생의 비서를 했던 그는 가톨릭 노기남 대주교와 김수환 추기경, 불교의 효봉·경봉 스님, 개신교 강신명 한경직 목사 등과 활동한 인물이기도 합니다. 문선명 통일교 총재(1920∼2012)에게는 주역을 가르치기도 했습니다. “이제 ‘백 세 장수하라’는 말 들으면 기쁘지도 않아. 몇 년 안 남았는데 뭐. 백이십은 가야지. 하하.” 호탕한 그의 말입니다. 10년 뒤에도 우리 종교계의 산증인인 그에게서 비화를 계속 듣고 싶습니다.김갑식 기자 dunanworld@donga.com}

불기 2559년 부처님오신날인 25일 서울 조계사를 비롯한 전국 사찰 2만여 곳에서 봉축 법요식이 봉행됐다. 이날 조계사에서 열린 대한불교조계종 법요식은 북과 종을 울리는 명고(鳴鼓)와 명종(鳴鐘) 의식으로 시작해 아기 부처를 씻기는 관불(灌佛)의식, 봉축사, 종정 법어 등의 순서로 진행됐다. ‘이웃과 함께 하는 법요식’으로 개최한다는 취지로 지진 피해를 입은 네팔의 카만 싱 라마 대사, 성소수자인 김조광수 영화감독, 전명선 세월호 가족대책위원장 등이 참석해 헌화를 맡았다. 종정 진제 스님은 원로회의 의장 밀운 스님이 대독한 봉축법어에서 “한반도 통일과 세계평화, 모든 이웃의 아픔을 같이하는 등을 밝혀 부처님 오시는 길을 아름다운 등으로 장엄하자”고 말했다. 자승 스님은 봉축사에서 “올해는 광복 70주년을 맞이하는 뜻 깊은 해이지만 분단으로 70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며 “스스로 하나 되고자 하는 일심(一心)으로, 대화와 교류를 통해 신뢰를 쌓는 일에 최선의 노력을 다해야 한다”고 밝혔다. 박근혜 대통령은 김종덕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대신 읽은 축하 메시지에서 “부처님께서 주신 자비와 평화, 겸손과 화해의 가르침으로 서로를 이해하며 밝은 미래로 함께 나아갈 수 있도록 지혜와 원력을 모아주시기를 부탁드린다”고 당부했다. 법요식에서는 “전쟁은 인간에 대한 최대의 악행이고 평화는 만복의 근원이다. 한반도에서 긴장을 완화하며 평화적 환경을 마련하기 위한 실천행에 정진하겠다”는 취지의 남북공동발원문이 4년 만에 발표됐다. 법요식에는 조계종 스님과 불교 신도 외에도 남궁성 원불교 교정원장, 박남수 천도교 박남수 교령, 한국이슬람중앙회 이주화 이맘 등 이웃종교 대표,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 문재인 새정치민주연합 대표, 박원순 서울시장 등 정관계 인사 등 1만여 명이 참석했다.김갑식 기자 dunanworld@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