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하기

1999년은 지구가 종말을 맞이할 것이라는 예언으로 떠들썩했다. 그해 여름, 동반자살을 결심한 나와 지민은 자살 전 출판사 편집자인 나의 외삼촌을 찾아간다. ‘재와 먼지’라는 출간 금지된 책을 찾기 위해서였다. ‘재와 먼지’는 지민의 엄마가 자살하기 전 쓴 책으로, 외삼촌이 기억하기로는 시간여행을 다룬 내용이었다. 책 내용은 이랬다. 한 연인이 그들의 사랑이 끝나감을 깨닫고 동반자살을 택한다. 그런데 그 순간 두 번째 삶이 시작된다. 달라진 건 시간이 역순으로 흐른다는 것. 시간을 거스르다 연인은 그들이 처음 만났던 그 순간을 찾는다. ‘이토록 설레며 우리는 만났던가.’ 둘은 이 사실을 깨닫자마자 오랜 잠에서 깬 듯 벌떡 일어나 서로를 바라본다. 그리고 시간은 다시 원래대로 흐르고 세 번째 삶이 시작된다. 소설집의 표제작인 ‘이토록 평범한 미래’는 “과거가 아니라 미래를 기억해야 한다”는 외삼촌의 말로 끝난다. 박혜진 문학평론가의 말처럼 “미래는 가장 평범한 모습으로 우리의 현재에 이미 존재하고 있다”는 뜻이다. 이는 소설집을 관통하는 메시지다. ‘사월의 미, 칠월의 솔’(2013년) 이후 9년 만에 단편소설집을 내놓은 저자는 표제작을 포함해 여덟 편의 소설을 통하여 현재를 다시 생각해 보게 한다. 지금의 선택이 미래를 바꾼다는 말을 하는 소설은 아니다. 소설 속에서 일어난 일은 그 자체로 변하지 않는다. 주인공들은 일어나버린 사건을 중심으로 어떠한 ‘이야기’를 말한다. 이야기는 주인공들이 현재를 새롭게 바라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난주의 바다 앞에서’ 속 소설가 정현은 대학 동창인 유미를 30년 만에 만나 유미가 겪은 일을 듣게 된다. 유미는 몇 년 전 아이를 잃고 큰 실의에 빠졌다. 이때 유미를 일으켜 세운 건 언젠가 정현이 들려준 체육 용어에 관한 이야기였다. 같은 결말이라도 각자가 그 결말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취사선택해 이야기를 만든다면, 그 결말은 정말 같은 결말일까. 책은 이러한 질문을 던진다. “한동안 괴로운 마음에서 좀체 벗어나지 못했다”고 고백한 저자가 어찌할 수 없는 고통 앞에서 작가가 할 수 있는 일에 대해 고민한 결과인 듯하다.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

프랑스 여성 소설가 아니 에르노(82·사진)가 올해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됐다. 스웨덴 한림원은 6일(현지 시간) “개인적 기억의 근원과 소외, 집단적 구속의 덮개를 벗긴 용기와 꾸밈없는 예리함을 보여줬다”고 선정 이유를 밝혔다. 프랑스 작가가 노벨 문학상을 받은 것은 2014년 소설가 파트리크 모디아노 이후 8년 만이다. 프랑스 릴본에서 태어난 에르노는 프랑스를 대표하는 작가로 세계에서 인정받고 있다. 루앙대에서 문학을 전공했고 1974년 자전적 소설 ‘빈 옷장’으로 등단했다. ‘남자의 자리’ ‘사건’ 등 개인적 경험을 통해 사회 구조를 파헤친 작품으로 주목받았다. 상금은 1000만 크로나(약 12억8000만 원)다. 에르노는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17번째 여성 작가가 됐다. 국내에는 ‘빈 옷장’을 비롯해 ‘탐닉’ ‘집착’ 등 주요 작품이 20권 가까이 출간됐다.허구 아닌 체험한 것만 글로 써… 낙태-빈곤 등 날것 그대로 ‘폭로’ 佛 여성작가 에르노의 삶과 작품세계소상인 딸로 태어나 교직 거쳐 등단… 사회적으로 금기시되는 주제에 천착폭력-성적 억압 등 파격적 문학실험… 기성 문단 ‘문학 아닌 노출증’ 비난도생존작가 첫 갈리마르 총서로 출간 “자신의 가면 파헤친 용기 평가받아” “우리는 (사회적 문제가 아닌) 작품 자체와 문학적 질에 집중한다. 지난해 수상자는 비(非)유럽인이었고 올해 수상자는 여성이다. 노벨 문학상 수상자의 범위를 넓히는 것도 중요하다.” 스웨덴 한림원은 6일 프랑스 여성 작가 아니 에르노(82)를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발표한 직후 이렇게 설명했다. 문학적 성취를 강조하면서도 페미니즘, 성 문제에 천착해온 여성 작가를 선정한 이유를 명확히 밝혔다. 지난해 수상자는 아프리카 탄자니아 출신으로 영국에서 활동하는 소설가 압둘라자크 구르나(74)였다. 신수정 문학평론가(명지대 문예창작학과 교수)는 “한림원이 80세가 넘은 여성 작가를 수상자로 선정한 건 자신의 가면을 가차 없이 파헤치는 작가의 용기를 높게 평가한 것”이라며 “젠더와 계급에 대한 억압, 차별을 폭로한 작가를 선정한 한림원 발표에 ‘용감하다’는 생각이 든다”고 평가했다. 에르노는 1940년 프랑스 소도시 릴본에서 카페 겸 식료품점을 운영하는 소상인의 딸로 태어났다. 루앙대를 졸업하고 중등학교 교사가 됐다. 1971년 현대문학교수 자격시험에 합격한 뒤 2000년까지 문학교수를 지냈다. 1974년 자전적 소설 ‘빈 옷장’으로 등단한 뒤 소설 ‘남자의 자리’로 1984년 프랑스 4대 문학상 가운데 하나인 르노도상을 수상했다. 2003년에는 그의 이름을 딴 ‘아니 에르노 문학상’이 프랑스에서 제정됐다. 2011년 선집 ‘삶을 쓰다’로 생존 작가 최초로 갈리마르 총서로 출간되는 기록도 세웠다. 그는 스스로 “직접 체험하지 않은 허구를 쓴 적은 한 번도 없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단언했다. 실제 2001년 펴낸 대표작인 장편소설 ‘탐닉’에는 허구가 없다. 작가는 자신이 연인과 만나고 헤어지기까지인 1988년 9월부터 1990년 4월까지의 일기를 공개했다. 이 일기를 쓸 당시에도 에르노는 이름난 작가였으며, 연인은 35세의 파리 주재 소련대사관 직원이었다. 에르노는 작가들의 소련 여행을 수행하던 연인과 레닌그라드에서 하룻밤을 보낸 뒤 파리로 돌아왔고, 연인이 소련으로 돌아가기 전까지 내연 관계를 이어갔다. 그는 사회적으로도 금기시되는 주제에 천착했다. 임신 중절 경험, 노동자 계층의 빈곤, 문화적 결핍, 가부장제적 폭력, 부르주아의 위선, 성적 억압 등에 대해 문학적 실험을 이어갔다. 2002년 출간한 장편소설 ‘집착’에서 그는 감정의 밑바닥까지 내려간 추한 모습까지도 솔직하게 드러낸다. 이 작품에서 ‘나’는 스스로 연인을 떠났다가 곧 연인에게 새로운 애인이 생기자 집착을 하기 시작하는데 이를 고백한 것. 2020년 발표한 단편 선집 ‘카사노바 호텔’에서도 폭로는 이어진다. 이 작품에서 현실에 지친 ‘나’는 오랜만에 옛 애인을 만나 근처의 카사노바 호텔로 향한다. 어머니의 병이 나날이 심해지고 있지만 ‘나’는 애인과 카사노바 호텔에서 사랑을 나누는 파격적인 서사가 펼쳐진다. 폭로를 통해 그가 그려내려 한 건 구원이다. 소상인의 딸로 태어나서 열등감과 자기혐오부터 내면화해야 했던 자신을 구원해준 것이 바로 문학이었다. 이런 자기 폭로를 통해 독자에게 공감과 연대감을 불러일으키려 했다. 모든 버림받고 소외당한 이들을 살아 있게 해준 것이 글쓰기라고 그는 고백한다. 처음 기성 문단은 “에르노의 작품을 과연 ‘문학’이라 부를 수 있느냐”고 비판했다. 폭로로 점철된 ‘노출증’이라고 치부하기도 했다. 하지만 에르노의 문학적 도전은 멈추지 않았고, 결국 노벨 문학상 수상으로 이어졌다. “내면적인 것은 여전히, 그리고 항상 사회적이다. 왜냐하면 하나의 순수한 자아 속에 타인, 법, 역사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기 때문이다.”(에르노)김재희 기자 jetti@donga.com이호재 기자 hoho@donga.com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

“한 시대의 미의식에 휩쓸리지 않고 자신만의 예술 세계를 구축해 온 김태호의 ‘내재율’을 온전히 느껴 보시기 바랍니다.” 서울 종로구 표갤러리에서 열리는 전시회 ‘질서의 흔적’ 입구에는 이런 글이 관객을 맞는다. 지난달 15일 시작한 김태호 화백(1948∼2022)의 개인전은 4일 작가가 세상을 떠나며 유작전이 됐다. 갤러리 측은 “당초 이달 14일까지 전시할 예정이었지만 반응이 뜨거워 27일까지 연장하기로 했다. 그 와중에 작가가 별세해 안타깝다”고 밝혔다. 전시에서는 김 화백이 1995년부터 작업을 이어와 대표작으로 자리 잡은 ‘내재율(內在律)’ 연작 가운데 21점을 선보이고 있다. 2009년부터 올해 작품(6점)까지 두루 볼 수 있다. 특히 눈길이 가는 작품은 ‘Internal Rhythm 2022-57.’(2022년) 고인이 최근에 작업한 작품으로 주황빛이 맴도는 독특한 분위기가 관객을 사로잡는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분홍과 노랑, 초록빛도 발견할 수 있어 더욱 오묘하다. 김 화백은 살아생전 자신의 작업에 대해 “우연성이 아닌 철저한 장인 기질에 바탕을 둔 창조적 실천”이라고 했다. 그가 캔버스에 표현한 응축된 색감이 우연한 결과물이 아니라는 뜻이다. 실제 작가는 캔버스 위에 격자 선을 그은 뒤 20여 가지 색을 붓질로 쌓아 올린다. 한 겹의 물감이 마르고 난 뒤 다음 물감을 덧입히기에 인내의 시간이 필요하다. 수십 가지 색이 쌓여 두께가 1.5cm 정도에 이르면, 조각칼로 이를 깎아내며 벌집 같은 겹겹의 방을 만든다. 이번 전시에서 가장 큰 작품인 ‘Internal Rhythm 2018-63’(가로세로 132×195cm)을 보면 작가가 작품에 더한 심혈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김 화백은 작품 속 벌집 모양의 수많은 ‘사각 방’을 “저마다의 생명을 뿜어내는 소우주”라고 부르곤 했다. 온갖 형태와 빛깔을 지닌 다층적인 삶을 마주한 느낌. 표미선 표갤러리 대표는 “김 화백의 단색화에는 수행과도 같은 반복적 행위와 동양 사상이 담겨 있다”며 “멀리 떨어져 감상하기보단 나도 몰래 다가가 일렁이는 리듬을 들여다보게 만드는 힘을 지녔다”고 말했다. 김 화백의 디지털 작품도 함께 전시했다. 내재율 작품을 재해석해 영상으로 시각화한 대체불가토큰(NFT) 작품들이다. 미술계 최신 동향에 관심이 많았던 고인은 지난해부터 적극적으로 NFT 작품을 선보였다. 지난달 공개한 NFT 작품 가운데 5점을 전시장에서 상영한다.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

“한 시대의 미의식에 휩쓸리지 않고 자신만의 예술세계를 구축해온 김태호의 ‘내재율’을 온전히 느껴보시기 바랍니다.” 서울 종로구 표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는 전시회 ‘질서의 흔적’을 소개하는 서문에는 이런 글귀가 있다. 지난달 15일 시작한 전시는 김태호 화백(1948~2022)이 4일 세상을 떠나며 갑작스레 유작전이 됐다. 표갤러리는 이달 14일까지였던 전시를 27일까지 연장하기로 했다. 전시장에는 김 화백이 1995년부터 이어온 ‘내재율(內在律)’ 연작 총 21점이 전시됐다. 2009년 작부터 최신작 6점까지 두루 볼 수 있다. 전시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Internal Rhythm 2022-57’(2022년)은 고인이 가장 최근 작업한 내재율 작품이다. 표면색인 주황빛에 시선을 빼앗겼다면, 이윽고 그 아래 숨어있던 분홍, 노랑, 초록빛 색들을 발견할 수 있다. 고인은 살아생전 자신의 작업을 “우연성이 아닌 철저한 장인 기질에 의한 창조적 실천”이라 설명했다. 그가 응축된 색들을 ‘우연히’ 발견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작업 과정을 보면 알 수 있다. 김 화백은 캔버스 위에 격자 선을 긋고 20여 가지 색을 붓질로 쌓아올린다. 한 겹의 물감이 마른 뒤에 다음 물감을 덧입히기 때문에 인내의 시간이 필요하다. 수많은 색이 쌓여 두께가 약 1.5㎝ 정도에 이르면, 그는 조각칼로 이를 깎아내고 구멍을 뚫어 벌집 같은 겹겹의 방을 만든다. 출품작 중 가장 큰 사이즈 작품인 ‘Internal Rhythm 2018-63’(가로 132㎝, 세로 195㎝)을 보면, 고인이 더했을 심혈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고인은 수많은 사각의 작은 방들을 “저마다의 생명을 뿜어내는 소우주”라 말하곤 했다. 이 맥락에서 작품을 보면 지워내면서 드러나는 색들은 다층적인 삶을 대변하는 듯하다. 표미선 표갤러리 대표는 “김태호의 단색화는 한국 단색화가 추구하는 수행과도 같은 반복적 행위와 동양 사상의 정신성을 그대로 담아낸다”며 “멀리 떨어져 바라보는 것이 아닌, 가까이 다가가 색층 사이사이 일렁이는 물감 층의 리듬을 들여다보게 만드는 힘을 지녔다”고 말했다. 이번 전시에는 김 화백의 디지털 작품도 함께 전시된다. 내재율 실물 작업을 재해석해 영상으로 시각화한 NFT(대체불가토큰) 작품들이다. 고인은 원로화가임에도 지난해부터 NFT 시장에서 활발한 행보를 이어왔다. NFT 플랫폼 ‘업비트 NFT’에 지난달 내놓았던 NFT 작품 총 5개가 본관에서 상영된다.김태언기자 beborn@donga.com}

서울 도심을 걷다 보면 가끔 마주치는 장면이 있다. 보도 한쪽을 커다랗게 차지한 지하철 환풍구. 가뜩이나 불쾌한 공기에 눈살이 찌푸려지는데, 어린아이라도 무심코 올라가는 광경을 보면 다들 화들짝 놀란다. 안전도 우려되고 보기에도 우중충한 이 설치물. 어떻게 바꿀 방법이 없을까. 올해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공예디자인문화진흥원(공진원)이 공동 주최한 ‘제3회 공공디자인 국민아이디어 공모전’에서 대상을 차지한 작품은 이런 고민에서 출발했다. ‘지하철 환풍구를 활용한 도심 속 무더위 쉼터’로 대상을 받은 박성민, 조재민 씨는 “환풍구를 시민들이 편히 쉴 수 있는 공간으로 바꾸자”는 취지로 아이디어를 제안했다. 방법은 의외로 복잡하지 않다. 환풍구 내부에 공기정화필터를 달아 배출하는 공기를 깨끗하게 바꾸고, 외부에는 벤치와 생태화단을 설치해 누구나 기분 좋게 이용하도록 만들자는 디자인이다. 심사위원들도 “환경적인 측면도 잘 살려 사람과 공생을 유도하는 복합형 공공시설물로서의 가치가 뛰어나다”고 평가했다. 최근 공공디자인이 많은 관심을 받고 있다. 공공디자인은 말 그대로 공공성과 미적 감각을 동시에 살린 디자인을 일컫는다. 한마디로 ‘보기도 좋고 쓰기도 좋게’ 만들자는 뜻. 요즘엔 공공디자인을 실제 이용하는 시민들이 직접 아이디어를 내 결과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지난해 공모전 대상작인 ‘시각장애인을 위한 팔각점자형 보도블록’은 올 7월 시범 적용해 확장 가능성을 검토하고 있다. 기존에 사각형이던 점자블록을 팔각형으로 바꾸는 비교적 간단한 아이디어지만,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사각형은 네 방향만 가리키지만 팔각형은 여덟 개 방향을 알려줘 시각장애인이 방향을 보다 정확하게 알 수 있다. 공진원 측은 “교통 표지판, 화장실 안내 등에도 공공디자인을 적용할 수 있다”며 “시민 참여는 공공디자인이 추구하는 공공 가치를 지향하는 데 중요한 요소”라고 했다. 올해 처음 개최된 ‘공공디자인 페스티벌 2022’에서는 공공디자인의 가능성을 알리고 있다. 서울 중구 문화역서울284에서 5일부터 30일까지 열리는 ‘길몸삶터―일상에서 누리는 널리 이로운 디자인’ 전시장의 메인 홀은 둥글게 만든 시소 ‘동글동글동글’을 중심으로 어른과 아이가 함께 즐길 수 있는 놀이터로 꾸몄다. 공진원은 “놀이터나 시장 등 일상적인 공간이 공공디자인과 만나면 전혀 다른 모습으로 바뀔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다”며 “실제 전국에서 공공디자인이 적용된 66곳도 소개했다”고 설명했다. 치매 예방에 도움 되는 운동기구들을 예쁜 어린이놀이터처럼 만든 ‘인천 남동구 간석동 노인종합문화회관 광장’, 도시 미관을 해쳤던 장소를 알록달록한 복합생활문화시설로 변모시킨 ‘부산 수영고가도로 비콘그라운드’가 대표적이다. 다리가 불편한 노년층이 신호를 기다리는 동안 앉아 쉴 수 있도록 신호등에 부착한 깜찍한 간의의자인 ‘장수 의자’는 경기 남양주시와 포천시 등 전국 지방자치단체 70여 곳에 설치해 큰 호응을 얻고 있다. 공공디자인의 중요성이 커지고 있는 만큼 정부와 지자체, 관련 기관들이 적극 나서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이길형 한국디자인단체총연합회 명예회장은 “디자인이 이미 미술을 넘어 사회적 개념으로 확장돼 환경, 인권 등 시대적 요구와 이어지고 있다”며 “국내에서도 공공디자인을 지속적으로 관리할 컨트롤타워를 만들어 공공디자인의 질을 높여야 한다”고 말했다.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

꿈틀거리는 색, 요동치는 선. 프랑스 추상표현주의 작가인 장 마리 해슬리(83)의 회화들은 거침없이 내뿜는 생동감이 전시장을 가득 채운다. 열일곱 살에야 책을 보고 화가를 꿈꿨고, 22세에 실제 그림을 처음 봤다는 ‘독학 화가’인 그는 어떻게 이런 열정 가득한 작품들을 쏟아낼 수 있을까. 전북 완주군 전북도립미술관에서 열리는 기획전 ‘장 마리 해슬리―소호 너머 소호’는 그 해답을 찾는 실마리가 되어줄지도 모르겠다. 해슬리의 생애를 따라 5부로 구성된 전시는 그의 회화와 조각, 드로잉 등 112점으로 구성됐다. 초기부터 현재까지의 변모를 순차적으로 알기 쉽게 짚었다. 전시를 기획한 이인범 전 상명대 교수는 “예술이란 타고나는 것인지 교육을 통해 배우는 것인지, 그 근본적인 질문이 해슬리만큼 어울리는 작가도 없다”며 “연대기순으로 전시를 구성한 것도 그 답을 관객도 함께 고민해 보자는 취지”라고 말했다. 1부 ‘별의 순간들’은 작가가 1967년 미국 뉴욕으로 떠나기 전 작품들로 구성됐다. 프랑스 북동부 알자스에서 태어난 그는 14세부터 광부로 일했다. 원인 모를 병으로 투병하던 17세 때 형이 사준 빈센트 반 고흐(1853∼1890)의 생애를 담은 책을 보고 화가를 꿈꾸기 시작했다. 전시장을 채운 굵직한 필획의 드로잉에서 고흐의 그림자가 느껴지는 건 이 때문이다. 2부 ‘뉴욕 미술현장 속으로’는 해슬리가 본격적으로 화가의 길을 걷기 시작한 초기 10년의 작업을 망라했다. 프랑스 파리를 거쳐 1967년 뉴욕으로 간 그의 작품엔 당시 기학학적 표현이 주류였던 뉴욕 미술의 트렌드가 반영돼 있다. 대표작이 이번 전시에서도 소개된 ‘무한의 선 Ⅱ’(1978년)이다. 하지만 1980년대 해슬리는 다시 ‘고흐 정신’으로 귀환한다. 이번 전시에서 가장 인상적이기도 한 3부 ‘출발점으로의 귀환’은 커다란 캔버스에 소용돌이치는 선이 우주의 영원한 생명력을 머금었다. 특히 1982, 1983년 내놓은 ‘우주’ 시리즈는 이번 전시의 백미. 이 전 교수는 “고흐의 표현주의가 다시 살아난 느낌을 받을 수 있다”고 했다. 4부 ‘신체, 알파벳으로부터’는 다소 이질적이다. 흔히 해슬리를 추상표현주의 작가로 구분하지만, 이 섹션에선 그의 구상회화를 만끽할 수 있다. 1980년대 말 해슬리는 인간의 신체를 눈여겨봤고, ‘뒤집힌 D’(1989년)처럼 인체로 만든 알파벳 형상을 그렸다. 미술관 측은 “이전까지 결과물이 즉흥적인 작업을 통해 이뤄졌다면, 이때는 방향을 틀어 소통이라는 좀더 정교한 목적의식을 갖고 작업했다”고 설명했다. 마지막 ‘표현주의 미술의 해슬리적 전형’은 예술가로서 또 한 꺼풀을 벗어낸 작가의 현재를 마주할 수 있다. 2007년 작 ‘짐노페디’는 광부와 예술가, 구상과 비구상 등 경계를 넘어서 자유분방한 필치와 원시적 색채로 하나의 질서를 정립한 거장의 향취가 가득하다. 이 전 교수도 “해슬리의 예술은 이제 고흐와의 만남이란 기원마저 망각될 정도”라고 했다. 30일까지. 무료.완주=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

꿈틀거리는 색, 요동치는 선들. 프랑스 출신 추상표현주의 작가 장 마리 해슬리(83)가 뿜어내는 예술의 매력이다. 독학 화가였던 해슬리가 예술가로서 보여주고자 했던 것은 ‘열정’이 아닐까. 그의 그림에는 해슬리가 품었던 예술적 갈망이 그대로 배어난다. 프랑스 알자스 지역에서 태어난 해슬리는 14살 때부터 광부로 일했다. 17살이 되던 해, 원인 모를 병으로 투병생활을 이어가던 중 형이 사준 한 책을 읽고 큰 감흥을 느낀다. 빈센트 반 고흐(1853~1890)의 생애를 그린 책이었다. 이것이 해슬리가 성장기에 마주한 그림과의 첫 인연이었다. ‘남은 생애를 예술가로 살아가겠다’고 결심한 해슬리는 현재 50년 넘게 작업하며 색채추상의 대표격 화가로 거듭났다. 전북 완주군 전북도립미술관에서 열리는 전시 ‘장 마리 해슬리-소호 너머 소호’는 해슬리의 작품 전개를 따라간다. 전시는 시기별 다섯 주제로 나눠 해슬리의 드로잉, 회화, 조각 등 112점을 내놨다. 전시를 기획한 이인범 전 상명대 교수는 “예술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데에 해슬리 만큼 좋은 작가가 없다”며 “‘예술은 교육될 수 있는 것인가, 태어나는 것인가’와 같은 근본적인 질문에 대해 고민해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고흐가 해슬리에게 큰 영향을 미친 건 전시장 초입부터 알 수 있다. 프롤로그이자 에필로그인 ‘별의 순간들’ 섹션은 해슬리가 1967년 미국 뉴욕행 이전에 그린 것들을 전시했다. 굵은 필획이 돋보이는 드로잉이나 방문에 그렸던 그림들을 보면, 고흐의 표현주의 화풍을 닮아있다. 그도 그럴 것이, 해슬리는 22살이 되던 해 생전 처음 뮤지엄을 방문했다. 군복무를 위해 모로코와 독일을 전전하다 독일 뮌헨의 노이에 피나코텍 뮤지엄에서 본 고흐의 그림은 해슬리에게 열정의 불을 지폈다. 표현주의에 대한 강한 애착은 이후에도 반복된다. 해슬리는 1962년 프랑스 파리, 1967년 뉴욕으로 이주해 본격 독학 화가의 길을 걷는다. 뉴욕 생활 초기 10년간 해슬리는 ‘무한의 선 Ⅱ’(1978)과 같은 기하학적인 뉴욕미술의 트렌드를 좇았다. 하지만 이내 고흐 정신으로 귀환한다. 1980년대에 그는 소용돌이치는 선들을 그린 ‘성좌’(1987) ‘은하수’(1987) 등 표현주의적 작품들을 내놓는다. 예술가의 길로 인도했던 고흐 정신을 표방하면서 다시금 화가로서의 출발점으로 돌아온 것이다. 이즈음 해슬리에게 가장 간절했던 것은 '타인과의 소통'이었다. 그의 즉흥적이고 충동적인 작업들은 강렬한 시각적 충격을 줬지만, 대중과의 소통에 한계가 있었다. 이때 해슬리의 눈에 꽂힌 건 인간의 신체였다. 해슬리는 주관적인 감정을 절제하고, 인체로 만든 알파벳 형상을 띤 구상 회화 ‘뒤집힌 D’(1989) 등을 그리기 시작한다. 광부와 예술가, 구상과 비구상. 경계를 넘나들던 경험들은 해슬리만의 독자적인 예술 세계를 만들어냈다. 그는 2000년대 이후부터 현재까지 작품 ‘짐노페디’(2007) 등을 통해 자유분방한 필치와 원시적인 색채를 자랑하면서도 나름의 질서가 정립된 절제미를 선보이고 있다. 이 전 교수는 “이제 해슬리의 예술적 실천은 고흐와의 만남이라는 그 기원마저 망각될 정도로 독자적인 세계를 구축했다”고 평했다. 30일까지. 무료.완주=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

안녕하세요. 동아일보 김태언 기자입니다.시작 전 한 가지 질문을 드립니다. 다정한 느낌을 풍기는 글, 그림, 사진, 영상이 있다고 가정해봅시다. 괜스레 그 작가를 만나보고 싶어집니다. 뜻하지 않게 작가를 만나게 됐습니다. 신난 마음에 말을 걸었는데, 생각보다 무심합니다. 이때 여러분은 어떤 생각이 드시나요?‘뭐지? 내가 마음에 안 드나?’‘내가 잘못 판단했군. 별로네.’‘속았다. 작품은 꾸며낸 건가?’여러 가지 감정이 들 겁니다. 그런데 더 호기심이 생긴 분은 없으셨나요? 전 어떤 이와 그가 표현해낸 무언가 사이에 괴리가 있을 때 ‘더 친해지고 싶다’고 생각했던 적이 종종 있었습니다. 괜한 오기였을 수도 있습니다.제가 이상하게 느껴지신다면, 오늘 레터를 천천히 읽어봐 주세요. 오랫동안 베일에 싸여있었던 사진가 비비안 마이어(1926~2009)는 냉정하고도 다정한, 쉽게 단정 짓기 어려운 인물입니다.사람이 사람을 좋아하는 방법사람이 사람을 좋아하는 방법1. 보모로 일해 온 비비안 마이어는 사후에 그의 수많은 사진이 공개되며 명성을 얻는다. 잘 알려지지 않은 비비안의 생애는 대중의 호기심을 사기 충분했다.2. 그를 스쳤던 고용주들과 아이들은 속내를 잘 비추지 않는 비비안을 ‘엄격하고 냉정한 사람’이라 기억했지만, 비비안의 사진에는 순수한 인간애가 흐른다. 3. 이는 비비안의 유년기로 설명된다. 그는 가족의 분열과 불안정한 부모를 경험했다. 그는 과거와 절연하고 사람들과 거리를 두며 스스로를 보호했다. 하지만 사람과 세상에 관심이 많았고, 이는 사진으로 드러났다.스스로 무명을 택한다2007년, 미국 시카고 경매장에는 무명 사진작가가 찍은 네거티브 필름이 다수 출품됐습니다. 당시 역사학도였던 존 말 루프는 자신의 책에 실을 만한 사진이 있을까 싶어 이 필름들을 샀습니다. 사진을 찍은 이는 ‘비비안 마이어’. 인터넷을 뒤져도 나오는 정보는 없었습니다. 그러다 2년 뒤, 신문에서 이 작가의 부고를 발견하곤 그에 대한 정보를 수집합니다.비비안은 한 마디로 설명하기 어려운 작가였습니다. 평생을 평범한 보모로 살았는데, 그의 창고에는 14만 장의 사진이 방치되어있었죠. 이 소식을 들은 대중들은 비비안의 ‘별나지 않은 생활과 눈에 띄는 재능’이라는 갭을 매혹적으로 받아들였습니다.비비안은 파헤칠수록 비밀스러웠습니다. 비비안과 교류했던 사람 중에는 그와 친밀한 사람이 아주 적었습니다. 그의 과거는 물론이며, 심지어 어떤 고용주는 비비안이 사진을 찍는 줄도 몰랐습니다. 비비안은 자신의 사진을 쉽게 보여주지 않았거든요. 겉으로 보기에 그는 그저 한 집에서 다른 집으로 이동하는 삶을 살았던 겁니다. 스스로 무명을 택했던 거죠.왜일까요? 책 ‘비비안 마이어: 보모 사진작가의 알려지지 않은 삶을 현상하다’(북하우스)에 따르면 그는 자신의 과거와 단절하기로 작정한 듯합니다. 비비안의 유년기는 불행했습니다. 알코올 중독자 아버지, 그와 이혼 후 심각한 정신질환을 앓던 어머니, 조현병 환자인 오빠까지. “과거를 빼앗긴 사람들이 가장 열정적으로 사진을 찍게 되는 것 같다”는 수전 손택의 말처럼 비비안은 24살이 되던 해부터 40년간 사진기를 놓지 않습니다.자신의 이야기를 쉽게 말하지 않는 그에게 사람들은 거리감을 느꼈습니다. 비비안이 본인 몸보다 훨씬 큰 남성복을 입거나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았던 것도 자신을 방어하기 위함이었겠죠. 실제 비비안이 돌봤던 다수의 아이들은 자신의 보모가 “차갑고 다가가기 힘든 사람”이라며 정서적 유대가 없었다고 회상했습니다.비극을 볼 줄 아는 사진가특이한 건 그의 사진은 무심한 느낌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비비안이 찍은 사진은 그를 전혀 다른 사람처럼 느껴지게 합니다.비비안은 행인들의 뒷모습과 신체 일부를 찍곤 했습니다. 그의 트레이드마크죠. 잘게 주름진 손등, 터진 양말과 지팡이, 아이들을 꼭 부여잡은 양손. 비비안은 아주 사소한 몸짓으로 전체 이야기를 전달할 줄 아는 작가였습니다.촬영 대상은 부유한 사람부터 거리의 부랑자까지 다양했습니다. 비비안에게는 거리를 지나는 사람이라면, 인종ㆍ계급ㆍ빈부 그 무엇도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보통 원샷(한 프레임에 한 사람만을 담은 샷)으로 피사체를 담았는데요. 세월을 지내온 한 인간에 대한 호기심과 탐구심이 고스란히 드러납니다.실제로 비비안이 보모로 가장 오래 일했던 겐스버그가의 세 아이는 그를 달리 기억합니다. 이들은 말년에 숙소를 구해주고, 비비안이 사망한 후에도 부고를 내며 그를 “두 번째 엄마”라 칭합니다. 자신들을 16년간 돌봐준 그를 두고 “그녀를 아는 모든 사람의 삶을 마법처럼 감동시킨 자유롭고 친절한 영혼”이라고 설명했죠.이런 유대감이 쉽게 만들어졌을 리 없습니다. 겐스버그 가족은 비비안을 가족의 일원으로 받아들여 명절이나 휴가철에도 함께 했습니다. 비비안이 당시 찍은 홈 무비를 보면 비비안도 아이들을 많이 사랑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아이들을 한껏 안고 여러 번 입을 맞추고, 평온하게 웃습니다. 그는 이곳에서 생전 처음 장기간의 안락함과 사랑을 느꼈던 듯합니다. 아이들이 성장해 떠나야 하는 때가 왔을 때, 비비안의 작품 기류는 급격히 바뀝니다. 이 가족과의 결별이 비비안의 내면을 무너뜨렸던 겁니다.내 안의 모순을 이해하는 법겐스버그 가족과 헤어질 즈음인 1966년 말부터 그는 갑자기 신문의 모든 면을 사진에 담습니다. 비비안의 창고가 발견됐을 때, 그 안에는 8톤에 달하는 신문과 인화하지 않은 사진이 쌓여있었는데요. 이는 그가 ‘저장강박증’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실제로 비비안은 저장강박증 때문에 해고된 적이 여러 번 있었고요.저장강박증은 사용 여부와는 상관없이 물건을 버리지 못하고 일단 저장해두는 강박장애의 일종입니다. 정신의학적 측면으로 보자면, 어린 시절 충분한 사랑을 받지 못하거나 좌절과 분열을 경험한 사람은 낮은 자존감과 정체성 혼란에 시달리다가 통제감을 얻기 위해 무언가를 강박적으로 수집한다고 합니다. 감정의 깊은 공허함을 채우려고 사람이 아닌 물건에 집착한다는 말이죠.사진도 신문처럼 비비안에게는 무언가를 저장하는 행위였습니다. 사진은 피사체를 찰나의 순간에 붙잡아놓으니까요. 여기서 비비안이 사진을 많이 현상하지 않은 이유가 일부 설명됩니다. 궁극적으로 자신이 찍은 사진을 ‘보고 싶다’기보다는 ‘찍고 싶다’는 욕망이 훨씬 컸던 거죠.그리고 찍는 행위에 진심이었다는 것은 그의 작품이 말해줍니다. 비비안의 사진은 그가 사진을 찍는 순간 어떤 모습이었고 무엇을 느꼈는지 상상하게 합니다. 쪼그려 찍었음이 분명한 거리의 아이들, 혼자인 자신 뒤에서 친밀하게 기대어 잠든 노부부. 능력을 과시하려는 것이 아닌, 오로지 자기만족을 위해 찍은 사진들이 아니고서는 느낄 수 없는 순수함이 비비안 작품의 강력한 특징입니다.차가운 외면을 하고서는 그렇지 못한 작품을 남긴 작가. 작품성에 대한 평가는 갈릴지언정, 비비안의 진심이 잔잔한 감동을 주는 것은 사실입니다. 직접 사람을 대면하기 힘들었던 그는 사진기를 방패 삼아 인간이라는 존재에 다가갔던 것은 아닐까요? 그리고 그렇게 비비안은 온기 있는 본래 자신의 모습에 가까워지는 중이었을지 모릅니다.여러분에겐 비비안의 사진과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 있나요? 남들의 평가 말고, 진정 ‘나’의 모습을 띠고 있는 건 언제, 무엇을 할 때인가요? 서투른 관계 맺음으로 진짜 내 모습을 드러내기 어려웠던 경험이 있다면, 우리도 비비안 같은 이들에게 한 번쯤은 손 내밀어 봐도 좋을 것 같습니다.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

영국에 사는 저널리스트인 저자는 12세 무렵 절친한 친구를 떠나보내는 아픔을 겪었다. 친구 해리엇은 불어난 하천에 빠진 반려견을 구하려다 목숨을 잃었다. 장례식에서 저자는 처음엔 ‘저 관 속에 든 게 뭘까’ 궁금해 하다가 문득 뭔가를 깨달았다. “시신은 그리 간단히 사라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실제로 한 사람이 숨지면 가족이든 누구든 어떻게든 보살피고 처리해야 한다. “죽음은 ‘순간’이 아닌 ‘과정’이라는 것”을 배운 저자는 고통스러운 사건을 계기로 ‘죽음과 함께하는 사람들’에게 줄곧 호기심을 지녀왔다고 한다. 영안실과 해부실, 화장장, 인체냉동보존연구소 등 다양한 관련 현장을 취재한 것도 그런 연유였다. 책에는 모두 12명의 ‘죽은 자들을 마주하는 이들’이 등장한다. 장의사나 사망 현장 특수청소원처럼 낯설지 않은 직업부터 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는 참사 뒤 활동하는 희생자 신원확인 담당자나 사람이 숨지면 얼굴을 석고 등으로 본뜬 ‘데스마스크’ 조각가 등을 만나 속내를 들어본다. 유독 가슴에 남는 이는 ‘사산 전문 조산사’다. 이미 숨을 거뒀거나 출산해도 생존 확률이 거의 없는 신생아를 받는 일을 담당한다. 너무나 잔인한 일이지만, 조산사인 클레어는 생각이 달랐다. “아기를 살리진 못하지만 가족은 보살필 수 있겠다”는 마음으로 이 직업을 택했다고 한다. 클레어의 중요 업무 가운데 하나는 가족들이 나중에 후회하지 않도록 애도하는 방법을 안내하는 것. 아이의 생김새를 설명해주고, 가능하면 담요로 감싸 안아보도록 제안한다. 아기의 사진, 손과 발 도장도 상자에 넣어준다. 가족에게도 배려가 되지만 “실제 아이가 세상에 존재했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들을 ‘탄생과 죽음을 한꺼번에 다룬다’고 표현했다. 죽음을 마주하는 이들은 공통점이 있다. 모두 사망자들에게 최선을 다한다.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정성을 쏟는다. 그게 “죽은 자는 물론 산 자에 대한 예의”라 믿기 때문이다. 우리도 안다. 삶은 언제나 죽음과 맞닿아 있다. 평소엔 짐짓 모른 척하고 지낼 뿐. 저자가 소개한 이런 이들이 있기에 우리는 다시 삶의 정상궤도로 돌아갈 수 있다. 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

영국에 사는 저널리스트인 저자는 12살 무렵 절친한 친구를 떠나보내는 아픔을 겪었다. 친구 해리엇은 불어난 하천에 빠진 반려견을 구하려다 목숨을 잃었다. 장례식에서 저자는 처음엔 ‘저 관 속에 든 게 뭘까’ 궁금해 하다가 문득 뭔가를 깨달았다. “시신은 그리 간단히 사라지지 않는다”는 사실을.실제로 한 사람이 숨지면 가족이든 누구든 어떻게든 보살피고 처리해야 한다. “죽음은 ‘순간’이 아닌 ‘과정’이라는 것”을 배운 저자는 고통스런 사건을 계기로 ‘죽음과 함께 하는 사람들’에게 줄곧 호기심을 지녀왔다고 한다. 영안실과 해부실, 화장장, 인체냉동보존연구소 등 다양한 관련 현장을 취재한 것도 그런 연유였다.책에는 모두 12명의 ‘죽은 자들을 마주하는 이들’이 등장한다. 장의사나 사망현장 특수청소원처럼 낯설지 않은 직업부터 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는 참사 뒤 활동하는 희생자 신원확인 담당자나 사람이 숨지면 얼굴을 석고 등으로 본뜬 ‘데스마스크’ 조각가 등을 만나 속내를 들어본다.유독 가슴에 남는 이는 ‘사산 전문 조산사’다. 이미 숨을 거뒀거나 출산해도 생존 확률이 거의 없는 신생아를 받는 일을 담당한다. 너무나 잔인한 일이지만, 조산사인 클레어는 생각이 달랐다. “아기를 살리진 못하지만 가족은 보살필 수 있겠다”는 마음으로 이 직업을 택했다고 한다.클레어의 중요 업무 가운데 하나는 가족들이 나중에 후회하지 않도록 애도하는 방법을 안내하는 것. 아이의 생김새를 설명해주고, 가능하면 담요로 감싸 안아보도록 제안한다. 아기의 사진과 손ㆍ발 도장도 상자에 넣어준다. 가족에게도 배려가 되지만 “실제 아이가 세상에 존재했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들을 ‘탄생과 죽음을 한꺼번에 다룬다’고 표현했다. 죽음을 마주하는 이들은 공통점이 있다. 모두 사망자들에게 최선을 다한다.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정성을 쏟는다. 그게 “죽은 자는 물론 산 자에 대한 예의”라 믿기 때문이다. 우리도 안다. 삶은 언제나 죽음과 맞닿아있다. 평소엔 짐짓 모른 척 하고 지낼 뿐. 저자가 소개한 이런 이들이 있기에 우리는 다시 삶의 정상 궤도로 돌아갈 수 있다. 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

“노랑 오리가 돌아왔다!” 서울 송파구 석촌호수는 남녀노소에게 사랑받는 산책로이자 데이트 코스. 2014년 10월 이곳은 북새통을 방불케 했다. 앙증맞고 통실한 오리 한 마리 때문이었다. 네덜란드 출신 플로렌테인 호프만(45·사진)의 ‘러버덕’을 보기 위해 한 달 동안 500만 명이 넘게 몰렸다. 얼마나 인기였는지 순회전시를 떠난 오리가 아쉬워 2017년 호프만의 또 다른 작품 ‘스위트스완’(백조 5마리)을 설치하기도 했다. 30일 슈퍼스타 오리가 다시 호수로 날아들었다. 롯데물산과 송파구청이 주최한 ‘러버덕 프로젝트 서울 2022’로 예전 모습 그대로 돌아왔다. 높이는 18m로 전보다 1.5m 정도 커졌다. 설치 비용은 14억 원. 송파구 롯데월드타워에서 28일 만난 호프만 작가는 “당시엔 서울을 잘 몰랐다. 다들 너무 환대해줘서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다”며 “돌아온 러버덕을 보며 그때와 지금의 삶을 비교해 보고, 또 다른 이들과 교류하는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가 러버덕을 처음 구상한 건 2001년이었다. “세계를 하나의 욕조라 상상하고, 욕조에 띄운 러버덕이란 국적도 성별도 없는 캐릭터를 통해 평화를 얘기하고 싶었습니다. 여러 과정과 실험을 거쳐 2007년 프랑스에서 처음 선보였죠. 지금까지 16개 나라에서 전시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기회가 된다면 한국의 다른 장소에도 러버덕을 전시하고 싶어요.” 2014년 국내에서 러버덕은 하나의 문화 현상이 됐다. 관련 ‘밈(meme·인터넷 유행 콘텐츠)’이 쏟아졌고, 러버덕이 바람이 빠지거나 살짝 고꾸라지기만 해도 화제를 모았다. 작가는 “이런 밈들은 처음 보는데 정말 재밌다”며 “관객들이 러버덕을 통해 창조적인 행위를 하는 것 자체가 고맙다. 한국에서 러버덕이 유독 인기인 이유를 이제야 알겠다”고 했다. 그는 ‘공공미술은 모든 사람을 위해 존재해야 한다’는 철칙을 갖고 있다. “대형 러버덕 앞에서 관객들은 자신이 작은 존재란 걸 알게 되죠. 누구나 ‘평등하게’ 작다는 거죠. 그런 조건 아래 모두 하나 되는 느낌을 받길 바랍니다.” 순회전시지만 실은 러버덕은 전시 때마다 새로 만든다. 이번에 설치한 러버덕 역시 다음 달 31일 전시가 끝나면 생을 마감한다. 2014년에는 에코백으로 제작해 새 생명을 얻었고, 올해도 재활용할 예정이다. 이번 전시엔 러버덕의 친구 넷도 몰려왔다. 롯데월드타워를 포함해 주변 4곳에 ‘레인보덕’ ‘드라큘라덕’ ‘스컬덕’ ‘고스트덕’이 자리 잡았다. 이들은 1.4m 크기다. 인근 5곳에는 1.4m 크기의 러버덕을 각각 설치해 석촌호수까지 포함하면 총 6마리의 러버덕을 볼 수 있다. 이들 역시 다음 달 31일까지 전시한다.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

2014년, 서울 송파구 석촌호수에는 유례없는 인파가 몰렸다. 앙증맞은 부리와 통통한 엉덩이를 자랑하는 ‘러버덕’을 보기 위해서였다. 당시 연인, 가족, 친구끼리 러버덕을 보러 온 480만 명은 지금도 여전히 돈독할까. 롯데물산과 송파구청은 8년 만에 다시 ‘러버덕 프로젝트 서울 2022’를 진행한다. 30일 러버덕이 다시 석촌호수에 모습을 드러내며 향수를 자극할 예정이다. 설치비용만 14억. 크게 달라진 건 없다. 높이 18m, 가로 19m, 세로 23m 크기로, 전보다 높이가 1.5m 높아졌을 뿐이다. 28일 롯데월드타워에서 만난 네덜란드 출신 작가 플로렌타인 호프만(45)은 “당시에는 서울이라는 도시를 잘 몰랐는데, 환대해주셔서 좋은 기억을 가지고 있었다”며 “이 작품 앞에서 그때와 다른 사람들이 서로 교류하고, 또 그때와 지금 본인의 삶을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길 바란다”고 했다.호프만이 러버덕을 구상하기 시작한 것은 2001년. “세계를 하나의 욕조로 설정하고 국적도, 성별도 없는 캐릭터를 통해 평화를 말하고 싶다”는 목적 하에 만들어진 것이다. 여러 번의 스케치와 기술적 실험 끝에 2007년 프랑스에서 처음 선보여졌다. 현재까지 전 세계 16개국을 순회하며 25회 이상 전시를 이어가고 있다. 그는 “기회가 된다면 석촌호수가 아닌 한국의 다른 장소에서도 러버덕을 선보이고 싶다”고 했다.국내에서는 2014년 이후 러버덕과 관련된 많은 밈(memeㆍ재밌는 말이나 행동을 온라인상에서 모방하거나 재가공한 콘텐츠)들이 생겼다. 당시 러버덕이 호수 위를 유영해도, 바람이 빠져 고꾸라지거나 납작해져도 화제에 올랐다. 이날 이 밈들을 처음 접한 호프만은 유쾌하게 웃으며 “보는 이들이 스스로 창조성 있는 행위를 한다는 것은 작가로서 기쁜 일이다 왜 한국에서 러버덕이 인기 있었는지 이제야 알 것 같다”고 했다.호프만은 ‘대형’ ‘공공’ 설치미술을 진행해온 이유에 대해 “공공미술을 할 때 ‘모든 사람을 위해 존재해야 한다’는 철칙을 가지고 임한다“며 ”큰 러버덕 앞에서 사람들은 자신이 작은 존재라는 것을 깨닫는다. 작다는 평등한 조건 속에서 모두 하나 되는 느낌을 받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러버덕은 다음달 31일까지 전시된 뒤 재활용될 예정이다. 러버덕은 설치되는 장소에 맞춰 매번 새로 제작되는데, 8년 전에는 러버덕 고무를 재활용해 에코백을 제작된 바 있다.호프만은 올해 서울 프로젝트를 위해 ‘러버덕의 친구들’인 레인보우덕, 해골덕, 드라큘라덕, 고스트덕을 만들어 롯데월드타워와 몰 9곳의 포토존에 배치했다.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

한국 추상미술의 거장 김창열 화백(1929∼2021)의 별명은 너무나 유명하다. 1971년 ‘밤에 일어난 일’을 시작으로 줄곧 물방울만 그려 ‘물방울 화가’라 부른다. 김 화백의 둘째아들인 김오안 영화감독(48·사진)은 언제나 궁금했다. “왜 당신께선 평생 수십만 개의 물방울만 그리는 ‘예속’을 스스로 선택한 것일까.” 그 답을 찾아 김 감독은 카메라를 들었다. 28일 개봉하는 다큐멘터리 ‘물방울을 그리는 남자’는 아들이자 한 명의 예술가인 김 감독이 아버지에게 바치는 헌사이자 재해석이다. 서울 종로구 동아미디어센터에서 26일 만난 그는 “아버지 작품은 아름답지만, 아름답다는 이미지가 내밀한 깊이를 숨겨왔다”며 “화가 내면의 고통과 철학의 깊이를 보여주고자 했다”고 말했다. 스크린에서 김 화백은 다양한 면모를 드러낸다. 작업 땐 고독한 수도승 같았지만 과거를 회상하면 단박에 울음을 쏟아냈다. 일제강점기와 6·25전쟁을 겪은 뒤 가족과 떨어져 “혼자 살아남았다”는 죄책감이 평생 가슴을 짓눌렀다. 김 화백은 “물방울은 모든 기억을 지우기 위한 것이다. 모든 악과 불안을 물로 지우고 싶다”고 털어놨다. 촬영은 쉽지 않았다. 김 감독은 “아버지란 존재는 너무 가까우면서도 커서 거리감을 조절하기 힘들었다”고 했다. 영화는 2014년부터 5년 동안 한국과 프랑스를 오가며 만들었다. 어느덧 아버지가 프랑스에서 물방울 작품을 구상했던 40대가 된 아들은 오랜 궁금증을 풀었을까. “글쎄요. 다만 이렇게 얘기할 수 있겠네요. 말수는 적지만 옆에만 있어도 사랑을 느끼게 해준 이. 심각했지만 와인 한 잔 마시면 노래를 부르던 이. 세월이 흐르니 이젠 조금 아버지를 알 것 같아요.”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

김창열 화백(1929~2021)은 ‘물방울 화가’라 불린다. 그는 1971년 ‘밤에 일어난 일’을 시작으로 줄곧 물방울만을 그렸다. 그의 차남 김오안(48)은 그런 아버지가 궁금했다. “어떤 사람이 돼야만 수십만 개의 물방울을 그리는 예속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을까.” 사진작가이자 영화감독으로 활동 중인 김오안은 다큐멘터리 ‘물방울을 그리는 남자’의 감독이 되어 그 답을 찾아간다. 26일에 영화 개봉을 이틀 앞두고 서울 종로구 동아일보에서 만난 김 감독은 “아버지 작품은 아름답지만, 아름답다는 단순한 이미지가 그 깊이를 숨겨왔다”며 “그 뒤에 있는 내면의 고통, 철학의 깊이를 보여주고자 했다”고 말했다. 영화 속 김창열은 휴전선을 넘던 순간을 떠올리며 울음을 쏟는다. 일제강점기와 6·25전쟁 등을 겪으며 ‘혼자 살아남았다’는 죄책감을 가져온 그는 이렇게 말한다. “물방울은 모든 기억을 지우기 위한 것이다. 나는 모든 악과 불안을 물로 지운다.” 김 감독은 아버지를 여러 면모를 가진 한 인간으로 묘사한다. 그리고 물방울은 이런 아버지의 모습을 닮아있었다. 김 감독은 “순수한 동시에 눈물처럼 보여 슬프기도 하고, 아름답고도 소멸하기 쉬운 나약한 것을 물방울이라는 단순한 오브제로 표현했다는 점이 놀랍다”고 했다. 고독한 도인 같았던 아버지에게서 “항상 비밀을 가진 느낌을 받아” 시작한 작업이었지만, 그는 “‘김창열 화백의 삶과 작품’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만들려 했지만 아버지라는 대상은 너무나 가깝고 커서 거리감을 조절하기 힘들었다”고 말한다. 이에 공동연출자인 브리짓 부이요 감독의 조언을 받아 아들의 시선에서 내레이션을 하며 아버지의 세계를 이해해간다. 영화는 2014년부터 5년간 한국과 프랑스를 오가며 만들었다. 영화를 시작할 무렵, 아들은 프랑스로 가 물방울 그림을 구상했던 당시 김창열과 같은 나이인 마흔살이 됐다. 어릴 적 아들에 눈에 비친 아버지는 푸근한 ‘산타클로스’보다는 수수께끼 같은 ‘스핑크스’에 가까웠다. “아버지가 남다르단 걸 시간이 지나며 알게 됐다”는 김 감독은 오늘날 아버지를 이렇게 추억한다.“말수는 적었지만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사랑을 느끼게 해준 사람. 심각하다가도 포도주를 마시면 노래를 부르던 사람.”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

여러분 안녕하세요, 김태언 기자입니다.지난주, 백남준(1932~2006)의 ‘다다익선’이 4년 만에 재가동됐습니다.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의 중심을 지키던 다다익선에 드디어 불이 들어오게 된 거죠. 2018년, 다다익선은 일부 모니터가 고장 나 가동이 중단됐고 이듬해부터 복원 작업에 들어갔습니다. 그 복원 과정이 어땠는지 담당 학예연구사를 만나 들어봤습니다.더 나아가 전 세계적으로 미디어아트 소장품들의 보존 방법은 어떤지도 살펴봅니다. 미디어아트 작품을 주로 소장하는 기관에는 대개 테크니션(기술자)이 있습니다. 이들만 있으면 만사형통일까요? 미디어아트를 주로 담당하는 큐레이터와 미술관은 무엇 때문에 고군분투 중인 걸까요? 확인하러 가봅시다.4년 만에 깨어난 다다익선, “인공호흡기 단 상태”1988년 9월 15일, 다다익선이 처음으로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그로부터 34년이 지난 올해 같은 날, 다다익선은 약 4년 만에 재가동됐죠. 하지만 점등한 지 5분 만에 모니터 1대가 꺼지는 등 불안한 모습이었는데요. 국내 미디어아트 보존 처리 관련 성과를 입증할 행사였지만, 작품 자체는 “인공호흡기를 단 상태나 마찬가지”라는 평을 받습니다.‘원본 고수냐, 변환이냐’ 다른 비전 가진 세계 미술관들백남준은 생전 작품의 외형을 신기술로 대체하는 데에 개방적이었습니다. 외형이 변해도 본질만 지키면 된다는 철학이었지요. 하지만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닙니다. 전 세계 각 미디어아트 기관들은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의 변환 정도를 두고 각기 다른 정책을 갖고 있습니다. 다다익선, 그게 뭔데?1986년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 개관을 앞두고 백남준은 미술관으로부터 한 의뢰를 받습니다. 과천관 정중앙에 놓인 램프코어(각 전시장을 연결하는 나선형 공간)에 놓일 작품을 만들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백남준은 설계를 맡은 김원 건축가와 함께 작업을 진행합니다. 다다익선은 높이 18m, 지름 7.5m의 철골 구조에 6¤25인치 모니터 1003개를 탑처럼 쌓은 작품입니다. 10월 3일 개천절을 상징하기 위해 1003개의 모니터를 사용했다고 하죠. 백남준 작품 중 최대 규모이기도 합니다. 이들 모니터에는 8개의 영상 작품이 나오는데요. 경복궁, 부채춤, 프랑스 개선문, 그리스 파르테논 신전 등 각국의 문화 상징물이 떠다니죠. 동양-서양, 과거-현재, 예술-과학의 조화를 꿈꾼 그의 철학이 담겨있습니다.그런데 그것 아시나요? 2019년 미술관은 영상, 모니터, 철재구조물 등을 ‘다다익선’이라는 하나의 작품으로 소장품에 등록했습니다. 그 전까지는 다다익선 중 백남준의 작품은 영상이었죠. 탑 형태의 구조물은 건축가 김원이 설계했던 것이고요. 이전부터 영상, 모니터, 철재구조물을 모두 하나의 작품으로 인식해왔던 것은 ‘다다익선의 원본성’이란 무엇인지에 대한 많은 논란을 불렀습니다.영상만 그대로 보존되면 원본이라고 말할 수 있었을까요? 모니터나 철골이 바뀐다면요? 실제 예전부터 가장 논쟁적이었던 것은 모니터입니다. 다다익선 원작이 사용하던 모니터는 ‘뚱뚱한 모니터’로 잘 알려진 삼성전자 기종의 CRT 모니터입니다. 이것을 LCD나 LED 모니터로 바꾸면 특유의 볼록한 볼륨감이 사라지죠. 그러면 원본이 아니게 되는 걸까요?다다익선 살리기현재 CRT 모니터를 만드는 공장은 사라졌고, 시중에서 잘 판매되지도 않습니다. 이 경우, 미디어아트의 수명을 늘리는 방법으로는 크게 3가지가 있습니다.▲원작과 동일 기종의 중고품으로 대체 ▲동일사양의 제품으로 교체▲최신 기술 적용실제로 2003년 다다익선의 일부 모니터가 노후화되어 정상 가동이 불가능해지자 회색 구형 TV로 전부 교체했습니다. 당시 미술관은 삼성전자의 후원 등을 통해 다다익선 모니터를 모두 교체하는 리모델링 작업을 진행했습니다. 당시는 백남준이 생존해있을 때라 작가의 양해 아래 진행됐죠.하지만 그 후로도 고장과 수리가 반복됐고 결국 2018년 2월 가동을 중단합니다. 한국전기안전공사가 “작품을 계속 가동하면 화재나 폭발 위험이 있는 상태”라 판단했고, 삼성이 후원한 동종 모니터는 이미 단종돼 대책이 없는 상황이었으니까요. 2019년, 미술관은 국내외 전문가 자문을 거쳐 ‘보존·복원 3개년 계획’을 마련했고, 이 과정을 거쳐 이번에 다다익선은 재가동됐습니다. 그 과정을 담당자인 권인철 학예연구사의 입을 통해 들어봅시다.-다다익선 보존·복원에 있어 가장 우선됐던 것이 무엇인가요?원형을 최대한 보존하되 일부 대체 디스플레이 기술을 도입하는 방향으로 진행됐습니다. 중고품 CRT 모니터 확보가 가장 먼저 진행됐고, LCD 디스플레이도 확보했습니다. -정밀 검사 결과 어땠습니까?더 이상 사용이 어렵게 된 266대는 LCD로 교체했고, 나머지 737대는 크고 작은 수리와 교체가 진행됐습니다. 737대 중 41대는 확보한 중고품 CRT 모니터로 대체했고요.-더 이상 사용이 어렵다는 266대가 상단의 6, 10인치 CRT 모니터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그 이유가 있나요?크기가 작은 모니터일수록 발열에 취약하고, 그만큼 내구성도 떨어집니다. 6인치의 경우 겨우 1~2대 정도만 구할 수 있을 정도로 중고 물량이 부족했고요. 10인치는 다다익선 전체 모니터 수량의 절반을 넘습니다. 중고시장에서 구할 수 있는 물량의 한계가 있었습니다. -CRT 모니터 확보 과정을 조금 더 듣고 싶습니다. 현재 다다익선용 CRT 모니터는 국내에서만 수급한 물량입니다. 서울 황학동 중고시장과 전국 재활용센터를 돌면서 600여대를 구했습니다. “국립현대미술관에서 CRT 모니터를 모두 가져갔다”는 소문이 들릴 정도로 발품을 팔았습니다. 현재 다다익선에 사용된 동일한 CRT 모니터는 국내에서 구하기 어렵게 됐죠. 국내 말고도 미국, 중국 등을 오가며 동일기종이 아닌 대체 모니터를 확보하려 나섰습니다.-모니터 외에 백남준의 영상에도 변화가 있나요?네. 8개 영상의 경우 비디오테이프 버전에서 디지털로 변환했습니다. 8개 영상 원본은 그대로 보존하고, 디지털로 복원을 실시한 거죠. -수리에 사용된 중고 제품도 생산된 지 오래라 언제든 수명을 다할 수 있습니다. 예방법이 무엇이 있을까요?모니터링과 보존환경을 개선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입니다. 우선 가동시간을 주4일, 하루 2시간으로 정했습니다. 또 과열을 막기 위한 냉각 설비, 전기 설비 시설을 새로 교체했죠. 앞으로도 수시로 점검하고 대체 디스플레이 적용성을 계속 검토할 계획입니다. 원본 고수냐, 변환이냐, 그것이 문제로다미디어아트의 보존·복원은 이미 세계적으로 대두된 문제입니다. 기술 발전이 워낙 빠르다보니 현 시점에서 가장 선두적인 기술과 제품을 사용했더라도 금세 구시대의 유물이 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다다익선의 재가동은 국내 미디어아트 보존·복원 역사에 있어 중요한 사건입니다. 국내 미디어아트 중심 미술관인 울산시립미술관의 서진석 관장은 해외유수의 미디어 아트 전문기관들과 함께 2006년부터 ‘미디어아트 아카이브 네트워크 포럼’이라는 국제행사를 진행했습니다. 서 관장은 이 경험을 바탕으로 크게 3가지 사례를 들어 미디어아트 보존·복원 방향을 설명합니다.독일의 ‘예술과 미디어센터’(ZKM): 원본 유지ZKM은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모두 원본을 고수합니다. 수명이 다한 미디어 작품의 TV들을 대체할 수천대의 TV들을 지속적으로 사 수장고에 보관하고 있습니다. 모니터나 비디오 플레이어 같은 하드웨어뿐 아니라 소프트웨어도 원본을 유지하려고 노력합니다. 구시대 소프트웨어 프로그램을 많은 비용을 들여 다시 복원하는 겁니다. 쉽게 설명하자면, 비디오테이프에 담긴 영상을 디지털파일로 변환시키지 않고 그대로 가져가는 식이죠.일본의 NTT ICC(InterCommunication Center): 변형 가능아시아 최대 미디어아트 기관은 ICC미술관은 창작자의 동의 하에 작품을 변형시킬 수 있도록 합니다. ICC미술관은 미디어아트 작품을 사들일 때부터 구입 계약서와 보존·복원 설명서를 함께 작성합니다. 하드웨어의 경우 옛 제품인 브라운관 TV는 LCD, LED, OLED 모니터로 바꿀 수 있고요. 소프트웨어라면 옛 운영체제인 DOS를 Window로 변환할 수 있는 거지요. 시각적으로 원본을 해칠지라도 내면의 개념을 더 중시하는 겁니다.영국의 뉴미디어아트 기관 FACT: 일부 변형 가능영국의 FACT는 하드웨어는 원본을 유지하고, 소프트웨어는 변환시키는 방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TV 케이스는 그대로 두고 뚱뚱한 모니터인 CRT 모니터를 평면 모니터인 LCD 모니터로 교체하는 식이죠. 이처럼 미디어아트 보존·복원 방식에는 정답이란 없습니다. 시대 변화에 맞게 맞춰가야 한다는 의견도, 원작의 고유성을 살리자는 의견도 모두 타당해보입니다. 여러분이 생각하시는 적절한 방법은 무엇인가요?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

미국의 법의학이 조그마한 상자 하나에서 시작됐다면 믿어지겠는가. 1940년대 만들어진 ‘손바닥 연구 모형’이란 상자를 살펴보자. 살짝 섬뜩할 수 있는데, 핏자국이 튄 벽지와 불탄 침대, 목을 매달아 숨진 시체의 미니어처가 세밀하게 표현돼 있다. 사건 현장을 재연한 것이다. 상자 크기는 실제 현장의 12분의 1이다. 이 상자를 처음 만든 건 미국에서 ‘과학수사의 어머니’라 불리는 프랜시스 글레스너 리(1878∼1962)다. 미 메릴랜드주 수석검시관실 공공정보관인 저자는 최초의 여성 법의학자인 리의 생애를 되짚으며 미 법의학의 초기 발전 과정을 살펴본다. 사실 리는 법의학과 관련된 정규 훈련도 대학 학위도 받지 않았다. 부유한 집안 출신으로 의학에 관심이 많았지만, 꿈꿨던 하버드대 의대는 여성을 뽑지 않았다. 당시 여느 여성들처럼 결혼해 가정을 꾸린 리가 법의학에 관심을 가지게 된 건 무려 51세 때였다. 한 치료시설에서 검시관 조지 버지스 매그래스(1870∼1938)를 만나며 리는 못다 한 꿈을 다시 펼쳐 나간다. 당시 미국에는 ‘코로너’라는 독특한 신분이 있었다. 사망 사건만 다루는 게 아니라 세금을 걷는 일도 했다. 게다가 의학이나 법학은커녕 글도 모르는 이들이 상당수였다고 한다. 주로 고위관료들이 자기 입맛에 맞는 이를 앉히는 ‘정치적인’ 자리였다. 매그래스는 리에게 “제대로 훈련받은 의사가 사망 원인을 진단하도록 제도를 바꿔야 한다. 대학에도 법의학과를 개설해 전문가를 길러야 한다”고 일러줬다. 가족에게 물려받은 재산이 상당했던 리는 법의학을 독학하며 즉각 행동에 나섰다. 1931년 하버드대에 막대한 돈을 기부하고 미 최초의 법의학과를 개설했다. 1934년엔 법의학 전문 도서관도 만들었다. 앞서 언급한 손바닥 연구 모형을 만들고, 경찰 교육생들에게 이 모형을 통해 훈련받도록 했다. 리는 방대한 지식과 뛰어난 업적을 받아 여성 최초로 뉴햄프셔주에서 경찰 경감이 됐다. 현재 미국에는 리가 만든 손바닥 연구 모형 가운데 18개가 남아 있다고 한다. 현대 법의학의 관점에선 다소 엉성하지만, 꼼꼼하고 놀라운 표현력은 지금도 놀랍다. 사회에 굴하지 않고 당당히 맞서며 세상을 바꾼 여성에게 경의를 표한다.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

“당신은 당신을 좋아하나요?” 설치미술가인 박혜수 작가(48)는 요즘 만나는 사람마다 이런 뜬금없는 질문을 던진다고 한다. 굳이 한 사람의 인생을 평가하려는 의도는 아니다. ‘사는 게 재밌는지’ ‘지금 현재 스스로에게 무엇을 느끼는지’ 어쩌면 시시콜콜한 것들에 대한 궁금증이다. 그리고 그 답에 삶과 예술이 추구하는 뭔가가 숨겨져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관객에게 질문을 던지고 그에 대한 답을 토대로 전시를 구성하는 방식으로 주목받고 있는 박 작가가 책 ‘묻지 않은 질문, 듣지 못한 대답’(돌베개·사진)을 16일 출간했다. 한 편의 작업노트라 할 수 있는 이 책에는 그가 창작활동을 위해 모아온 다양한 사람들의 사연이 빼곡하다. 사랑이나 실연, 꿈과 같은 보편적인 주제를 작품에 담아온 그의 예술세계를 엿볼 수 있다. 서울 금천구 ‘아트센터 예술의 시간’에서 열리고 있는 개인전 ‘모노포비아―외로움 공포증’ 전시장에서 21일 만난 그는 “남들의 버려진 꿈이나 헤어진 연인이 남긴 물건, 혹은 고독사와 나이 듦 등을 다룬 작업 과정도 책에 담았다”며 “수많은 상실 속에도 여전히 소중한 것은 무엇인지 되묻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작품을 통해 질문을 던지는 박 작가의 방식은 조소과 학생이던 20대 때 조우했던 영화 한 편이 큰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올해 프랑스 칸 영화제에서 송강호가 남우주연상을 받은 영화 ‘브로커’로 친숙한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원더풀 라이프’(2001년)란 작품이었다. “영화는 세상을 떠나는 이들이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기억 하나를 고르는 줄거리였어요. 그런데 전 지금까지의 인생에선 선택할 게 없구나 싶었죠. 가족과 사회가 원하는 모습을 충실히 따라왔기 때문이었죠. 문득 꿈이나 사랑 같은, 나이 들수록 ‘사라져 가는 것’들에 대해 생각해 봤어요. 어쩌면 사라지는 것들 중에 더 지켜야 하는 게 많은 게 아닐까요.” 11월 26일까지 열리는 이번 개인전 역시 그런 고민의 연장선이라 할 수 있다. 무표정한 공장 노동자들이 첫사랑 얘기를 할 땐 미소 짓는 영상, 사랑하는 이와 이별한 뒤에 홀로 써내려갔던 일기…. 작품들은 시종일관 타인의 사연을 다루지만, 그 속에서 작가는 물론이고 관객들은 자신의 기억을 되찾아간다. “감정을 느끼고 표현하는 건 누구나 포기해선 안 되는 일이죠. 굳이 전시에서 제 얘기는 생략하는 이유도 작가에게 집중하면 관객이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질 기회를 놓치기 때문이에요. 무언가를 상실한 경험이 있다면, 지금 당신은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묻고 싶은 겁니다.” 이런 상호작용은 작가에게도 자신을 깨우는 질문으로 돌아온다. 그에게 관객은 아무 접점이 없는 ‘제3자’가 아니다. 박 작가는 “작품을 감상하는 그들이야말로 나를 비추는 거울”이라며 “작품을 통해 서로의 내면을 비출 수 있기를 바란다”고 했다. 관객에게 질문을 던지는 작가. 그가 가장 많이 던진다는 질문을 되물어봤다. 작가는 스스로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저요? 전 저를 너무 좋아하죠. 거울 보는 걸 두려워하지 않거든요.”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

20대 중반의 한 조소과 학생은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원더풀 라이프’(2001)를 보고 생각에 잠겼다. 영화는 세상을 떠난 이들이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기억 하나를 고르는 내용인데, 이 학생은 영화를 보고 “지금까지 인생 중에는 선택할 게 없다”고 생각했단다. 가족과 사회가 원하던 것만을 충실히 따라왔기 때문이었다. “꿈이나 사랑 같은 개인의 삶에서 사라지는 것들을 생각했다”는 그는 “사라지는 것들 중에는 지켜야할 것들이 많았고, 얻으려는 것들 중에는 긴 기쁨을 주는 것이 없다”고 깨달았다.어느덧 그는 중견 작가가 되어 남들에게 다소 뜬금없는 질문을 던지고 다닌다. “너는 네가 좋니?”박혜수(48)는 사랑, 실연, 꿈과 같은 보편적인 주제를 갖고 설문조사와 분석을 거친 뒤 시각예술 작품을 만들어 발표해왔다. 16일 발간된 책 ‘묻지 않은 질문, 듣지 못한 대답’(돌베개)은 그의 작업노트로, 그가 모아온 남들의 버려진 꿈이나 헤어진 연인이 남긴 물건과 사연 등이 빼곡하다. 또 고독사와 나이 듦, 코로나 유가족 등에 대한 작업 이야기도 함께 담으며 수많은 상실 속에서도 여전히 소중한 것들에 대해 되묻는다.21일 서울 금천구 ‘아트센터 예술의 시간’에서 만난 그는 2013년부터 지속해온 사랑과 실연에 관한 프로젝트 ‘굿바이 투 러브’를 마무리 짓는 전시 ‘모노포비아-외로움 공포증’(~11.26)을 되돌아보고 있었다. 박혜수는 “이별 후에 남은 건 당신”이라며 “꿈이든 사랑이든 자신의 과거든 무엇인가를 상실하고 혼자가 된 당신은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 묻고 싶다”고 했다.그의 작업의 핵심은 감정을 건드린다는 점이다. 무표정했던 중년 공장 노동자들이 첫사랑을 이야기하며 미소짓는 영상, 이별 후 누군가가 혼자 끄적인 일기…. 타인의 사연을 다루는 작품이지만, 관람객들은 그 안에서 자신의 경험과 기억을 찾고 어떠한 감정을 안고 돌아간다. “감정을 느끼고 표현하는 것을 중요시하고, 이 일은 포기해서는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는 작가의 철학은 관람객에게 고스란히 전해진다. 작가 본인의 이야기를 전시에서 생략하는 이유기도 하다. “제 이야기가 들어가면 작가에게 집중돼요. 관람객들이 스스로 ‘나’에 대한 질문을 안고 가는 것이 주 목적인데, 제가 주인공이 될 순 없죠.”작가 또한 수많은 이들의 사연과 관람객들을 통해 자신의 모습을 본다. 과거 혹은 현재, 미래의 자신을. 사람을 좋아하느냐고 물으니, 그는 “사람들에게 관심이 많다. 하지만 ‘그 사람’에겐 관심이 없다”고 답한다. “전 관람객을 제3자로 생각하지 않아요. 사람들은 나를 비추는 거울이더라고요. 전 거울 보는 걸 두려워하지 않아요. 관람객들도 저를 보면 그랬으면 해요.”책과 전시를 보다보면 일관되게 ‘나’를 깨우는 질문들을 마주한다. “사는 게 재밌는지” “너는 누구인지” “너는 지금 무엇을 느끼고 있는지” 따위들, 그리고 “너는 너를 좋아하는지”까지. 잘 물어오지 않았던 이 질문이야말로 필요한 질문은 아닐까. 작가가 던져놓은 질문을 그에게 되물었을 때 그는 자신있게 대답했다.“저는 저를 너무 좋아하죠.”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

전시장 한쪽에 세워진 채 샛노란 빛을 머금은 가로등. 오래전 유럽 거리를 밝히던 가스등처럼 밝아졌다가 어두워지길 반복한다. 안개 낀 프랑스 파리 센강 주변을 산책하면 이런 기분이 들까. 몇 발짝을 더 내디디니 파블로 피카소와 클로드 모네의 작품이 눈앞에 펼쳐졌다. 국립현대미술관 과천이 위대한 예술가들이 모여들던 19세기 파리의 노천카페로 탈바꿈했다. 21일 개막한 ‘MMCA 이건희컬렉션 특별전: 모네와 피카소, 파리의 아름다운 순간들’이 관객을 몽환적인 걸작의 세계로 초대한다. 국립현대미술관이 선보이는 세 번째 이건희컬렉션 특별전으로, 작가들 면면만 봐도 가슴이 뛴다. 모네, 마르크 샤갈, 호안 미로,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 카미유 피사로, 폴 고갱, 살바도르 달리의 회화 7점이 전시장을 수놓았다. 미술관은 “4월에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첫선을 보였던 모네의 ‘수련이 있는 연못’(1917∼1920년)을 제외하면 모두 처음 공개하는 작품들”이라고 밝혔다. 가장 중심이 되는 작가는 피카소다. 고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기증한 피카소 도자 112점 가운데 90점을 대거 선보였다. 1948년부터 1971년까지 만들어진 ‘피카소 도자 에디션’의 대표작들이다. 전유신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는 “피카소가 회화나 조각, 판화에 활용했던 다양한 주제와 기법이 응축돼 작가의 예술세계 전반을 살필 수 있다”고 했다. 전시 제목에서 짐작되듯 작가 8명은 공통점이 있다. 모두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 파리에서 활동했다. 당시 파리는 세계적인 미술의 중심지로, 이들은 다양한 관계 속에서 서로에게 영향을 끼쳤다. 모네와 르누아르는 파리 문화계에서 유명했던 절친. 피사로와 고갱은 돈독한 사제지간이다. 피사로는 이번 전시에 나온 고갱의 ‘센강 변의 크레인’(1875년) 등을 보자마자 그의 재능을 알아봤다고 한다. 이후 증권 중개인이던 고갱을 가르쳐 전업 화가로 이끌었다. 함께 전시한 피사로의 ‘퐁투아즈 곡물 시장’(1893년)이 왠지 닮은 기운을 풍기는 연유가 짐작된다. 피카소와 미로, 달리는 스페인 출신이지만 파리에서 처음 만났다. 미로와 달리가 파리에 온 이유가 피카소 때문이었다고 한다. 달리의 ‘켄타우로스 가족’(1940년)과 피카소의 도자 ‘켄타우로스’(1956년), 사람과 새와 별이 있는 밤 풍경을 담은 미로의 ‘회화’(1953년)와 피카소의 ‘큰 새와 검은 얼굴’(1951년)을 살피노라면, 파리의 밤하늘 아래서 셋은 어떤 대화를 나눴을지 궁금해진다. 르누아르와 샤갈 역시 피카소와 이어진다. 피카소는 전시에 소개된 르누아르의 ‘노란 모자에 빨간 치마를 입은 앙드레(독서)’(1917∼1918년)를 본 뒤 1919년 존경을 담아 르누아르의 초상화를 그렸다. 샤갈도 파리를 사랑했으나 피카소를 처음 만난 곳은 1940년대 말 프랑스 남부였다. 샤갈의 ‘결혼 꽃다발’(1977∼1978년)은 당시 도자에 매진하던 피카소의 영향을 느낄 수 있다. 바깥에 설치한 회화들 곁을 거닐다가 도자의 숲을 돌아본 뒤 전시장 가운데 설치한 테이블에서 쉬어가는 경로를 추천한다. 잠시 앉아 ‘걸작의 풍경’을 바라보면 삶을 토닥이는 예술의 숨결이 귓가를 간질인다. 무료이며 국립현대미술관 홈페이지(mmca.go.kr)에서 예약해야 한다. 1인당 4장까지 가능하다. 관람 희망일 14일 전 오후 6시부터 예약할 수 있다. 회차당 70명씩 하루 8회 차 관람을 진행한다. 현장에선 회당 30명, 하루 240명까지 따로 접수를 한다. 내년 2월 26일까지. 월요일 휴관. 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

전시장에 놓인 가로등 불이 깜빡거린다. 밝아졌다, 어두워졌다를 반복하는 곳. 마치 흐린 날 프랑스 파리의 노천 카페에 온 듯 하다. 21일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서 개막하는 ‘MMCA 이건희컬렉션 특별전: 모네와 피카소, 파리의 아름다운 순간들’은 관람객들을 19세기 말 파리로 초대한다. 이 전시는 마르크 샤갈, 호안미로,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 클로드 모네, 카미유 피사로, 폴 고갱, 살바도르 달리의 회화 7점과 파블로 피카소의 도자 90점을 선보인다. 고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기증한 해외미술작품 중 피카소의 도자 22점을 제외한 모든 작품이 다 나왔다.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진행했던 ‘어느 수집가의 초대-고 이건희 회장 기증 1주년 기념전’에 출품됐던 모네의 ‘수련이 있는 연못’(1917~1920)을 제외하면 모두 첫 공개다. 이들 8명의 작가는 모두 19세기 말~20세기 초 프랑스 파리에서 활동했다. 이 시기 파리는 전 세계 예술가들이 모이는 국제 미술의 중심지였다. 이들은 스승과 제자로, 선후배와 동료로 만나 각자의 성장을 거듭했다. 전유신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는 “국적 다른 8명의 거장들이 파리에서 만나 교류하는 모습을 보여주고자 했다”고 말했다. 전시장 초입에 놓인 피사로와 고갱은 유명한 사제지간이다. 피사로는 고갱의 초기작 ‘센강 변의 크레인’(1875) 등을 접한 뒤 그의 재능을 알아본다. 피사로는 당시 증권 중개인이었던 고갱에게 직접 풍경화를 지도하고 전시회 참가 기회를 주는 등 전업 화가의 길로 이끈다. 파리 근교의 전원 풍경과 아이 손을 잡고 강변을 걷는 어머니의 뒷모습을 포착한 ‘센강 변의 크레인’이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모여들었던 시장 풍경을 그린 피사로의 ‘퐁투아즈 곡물 시장’(1893)과 어쩐지 비슷한 느낌을 풍기는 이유다. 작가들 사이에서도 큰 주축이 되는 작가는 피카소였다. 미로와 달리는 피카소를 만나기 위해 처음 파리를 방문한 작가들이다. 세 사람은 모두 스페인 출신이지만 파리에서 서로를 처음 만나 교류했다. 이는 작품으로 증명된다. 그리스 신화 속 반인반마 종족인 켄타우로스를 주제로 한 달리의 ‘켄타우로스 가족’(1940)과 피카소의 도자 ‘켄타우로스’(1956), 사람과 새와 별이 있는 밤 풍경을 추상적으로 표현한 미로의 ‘회화’(1953)와 피카소의 ‘큰 새와 검은 얼굴’(1951)은 작가들 간의 접점을 보여준다. 르누아르는 피카소가 뒤늦게 매료된 작가다. 피카소는 르누아르의 ‘노란 모자에 빨간 치마를 입은 앙드레(독서)’(1917~1918)를 발견하곤 1919년 존경의 마음을 담아 르누아르의 초상화를 그렸다. 샤갈은 피카소를 1910년부터 피카소를 만나고자 노력했지만 제2차 세계대전 등으로 인해 불발되다 1940년대 말 피카소가 도자를 제작하던 남프랑스에서 처음 조우한다. 연인과 꽃 등을 통해 생의 순간들을 담은 샤갈의 ‘결혼 꽃다발’(1977~1978)은 피카소가 꽃다발이나 비둘기 등을 그려낸 도자와 겹쳐봐도 좋다.작가들 간 관계성이 전시 기획의 착점이 됐지만, 작품은 개별로 관람하기에 더 적절하게 꾸려졌다. 원형 전시장은 3개의 레이어로 나뉘어 외벽에는 회화 작품을, 가운데에는 피카소의 도자를, 가장 안쪽에는 카페처럼 공간을 구성했다. 이번 전시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피카소의 도자들은 1948~1971년에 제작된 ‘피카소 도자 에디션’을 대표하는 작품들로, 피카소의 도자에는 그가 회화, 조각, 판화작품에서 활용했던 다양한 주제와 기법들이 응축돼있어 피카소 예술세계 전반을 살펴볼 기회다. 내년 2월 26일까지. 무료.김태언기자 bebor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