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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일 서울 종로구 ‘보안1942’. 폐관한 여관을 활용한 전시공간답게 스산한 분위기였다. 전시작은 높이 2m 넘는 종이에 그린 지렁이, 돈벌레 형상을 한 불화 위주다. 음습함을 돋우는 작품 12점은 20일까지 열리는 전시 ‘귀불’의 출품작. 서울시립미술관의 ‘2022년 신진미술인 전시지원 프로그램’에 선정된 박웅규 작가(35)의 작품이다. 박 작가는 2016년 첫 개인전을 연 신진 작가지만 아트선재센터, 일민미술관 등 주요 미술관 단체전에 참여하며 주목받고 있다. 그의 작품은 한 번 보면 쉽게 잊히지 않는다. 벌레 등 통상 불쾌하게 여겨지는 것을 소재로 하기 때문이다. 이날 전시장에서 만난 그는 의외의 말을 했다. “저는 예쁘다고 생각해서 그려요. 언젠가 나방을 관찰한 적이 있어요. 엄숙해 보이더라고요. 늘 보던 벌레의 징그러움과는 달랐습니다. 반복적인 마디의 구조에서, 촘촘하게 솟아있는 잔털에서 완전한 균형미를 느꼈어요.” 올해 박 작가가 불화를 전면 차용한 것도 “불화의 대칭적인 조형미 때문”이다. 그가 그린 불화의 일부 보살은 벌레의 형태를 띠고 있다. 불화와 벌레의 공통점인 규칙적 장식들은 때론 강박적으로 다가오지만 묘하게 아름다워 보인다. 그는 “벌레를 보고 부정적인 감정을 느꼈다고 해도 이는 벌레에서 비롯된 게 아니라 벌레를 대하는 태도와 시선에서 비롯된 것이라 생각한다”고 했다. 결국 작가는 ‘성스러운 것과 기괴한 것은 한 끗 차이’라고 말한다. 이 생각의 뿌리에는 유년 시절의 경험이 있다. 독실한 가톨릭 집안에서 태어난 그의 옛집에는 십자가와 마리아상만 100여 개가 있었다. 그는 “가끔 성스러운 그 물건들이 마치 절 감시하는 공포스러운 존재처럼 느껴졌다”며 “부정과 긍정이 극단을 향하다 보면 어느 지점에서 만난다. 둘은 큰 차이가 없다”고 말했다. 스스로가 혐오스럽다고 생각하는 무언가를 생각을 달리하면 포용의 시선으로도 바라볼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무료. 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

14일 서울 종로구 보안1942. 폐관한 여관을 활용한 전시공간답게 스산한 분위기가 풍겼다. 전시작들은 높이 2m 넘는 종이에 그려진 지렁이나 돈벌레 형상을 띤 불화들이다. 음습함을 한층 돋우는 이들 작품은 20일까지 진행되는 전시 ‘귀불’의 출품작. 서울시립미술관의 ‘2022년 신진미술인 전시지원 프로그램’에 선정된 박웅규 작가(35)의 것들이었다.박 작가는 2016년 첫 개인전을 진행한 신진 작가지만, 그의 작품은 한 번 보면 쉽게 잊히지 않는다. 활용하는 소재가 통상 더럽고 불쾌하게 여겨지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날 전시장에서 만난 작가는 의외의 답을 했다. “저는 예쁘다고 생각해서 그려요.” 본인이 담대한 성격은 아니란다. 작가 또한 “벌레를 아주 무서워한다”고 했다. 두렵지만 그리게 되는 이 소재들의 매력은 무엇일까.“언젠가 유리창을 사이에 두고 나방을 관찰한 적이 있어요. 엄숙해 보이더라고요. 늘 보던 벌레의 징그러움과 달랐습니다. 벌레의 반복적인 마디의 구조에서, 촘촘하게 솟아있는 잔털에서 완전한 균형미를 느꼈어요.”올해 박 작가가 불화를 전면 차용한 것도 “불화의 대칭적인 조형미 때문”이다. 그가 그린 불화의 일부 보살은 벌레의 형태를 띠고 있다. 불화와 벌레의 공통점인 규칙적인 장식들은 때로는 강박적으로 다가와 불편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묘하게 아름다워 보인다. 그는 “벌레를 보고 부정적인 감정을 느꼈다고 한들, 그 감정은 벌레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벌레를 대하는 제 태도와 시선에서 비롯된 것이라 생각한다”고 말했다.결국 작가는 ‘성스러운 것과 기괴한 것은 한끝 차이’라는 사실을 말한다. 이 생각의 뿌리에는 유년 시절의 경험이 있다. 독실한 가톨릭 집안에서 태어난 박 작가의 옛집에는 십자가와 마리아상만 100여 개가 보관돼있었다. “밤에 집을 돌아다니면 그 성스러운 물건들이 마치 저를 감시하는 공포스러운 존재처럼 느껴졌다”던 작가는 “부정과 긍정이 서로 극단을 향하다보면 어느 지점에서 만난다. 둘은 큰 차이가 없다”고 말한다.이 철학은 인간이라는 존재에도 통용된다. 박 작가가 초기부터 그려온 ‘가래 드로잉’을 보면, 스스로가 혐오스럽다고 생각하는 내 안의 무언가를 조금은 포용할 수 있을 듯하다. “가래를 보고 ‘내 몸 안에 더러운 것들이 축적되어 있을지 모른다’는 일종의 자기혐오에서 드로잉을 시작했어요. 웃긴 건 어릴 적 가래를 보고 사리(舍利)라고 착각했던 적이 있었다는 거죠.”그는 불쾌감을 극복하거나 해소하기 위해서 벌레나 성상을 그리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괴로운 작업이지만 이제는 조금 유희적으로 받아들일 수는 있게 된 것 같다. 나쁘다고 생각됐던 것들을 제 방식으로 소화해낸 것”이라는 말이다.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

갤러리 1층 벽에 내걸린 ‘달항아리’(2018∼2022년).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달처럼 떠오른 달항아리의 반쪽에는 그늘이 드리워 있다. 18년 전부터 달항아리를 그려 온 강익중 작가(62)의 신작 ‘달이 뜬다’는 회화 작품이지만 매끄러운 표면이 도자기 같다. 세계를 무대로 활동하는 강 작가가 12년 만에 국내에서 개인전을 열고 있다. 다음 달 11일까지 서울 종로구 갤러리현대 신관과 갤러리현대 두가헌에서 개인전 ‘달이 뜬다’가 동시에 진행된다. 200여 점의 작품을 선보이는 이번 개인전은 유쾌함과 진지함의 향연이다. 특히 설치작 ‘내가 아는 것’ 연작(2003∼2022년)에선 그의 삶에 대한 지혜가 엿보인다. 색색의 알파벳, 한글, 달항아리가 그려진 수백 개의 3인치 나무 패널이 전시장 두 벽면을 촘촘히 채웠다. 멀리서 이를 보면 패널에 쓴 글자들이 단어를 만들고 뜻을 이루는 문장이 된다. 이 문장들은 “너와 나는 다르지 않다. 우리가 모여 세계를 이룬다”는 그의 세계관인 ‘연결’과 맞닿아 있다. 이번 전시는 자연과 섭리에 대한 강 작가의 철학이 특히 돋보인다. 전시장 1층에 놓인 신작 회화 ‘달이 뜬다’ 연작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지러지는 달과 달 무지개를 형상화했다. 강 작가는 달 무지개를 본 순간을 회상하며 “달 무지개를 기록하고 싶어 잠깐 한눈판 사이 금세 사라졌다. 가장 중요한 순간은 그냥 바라보고 느끼면 될 것을. 그걸 담으려고, 잡으려고 했다”며 아쉬워했다. ‘달이 뜬다’ 드로잉 연작은 화면 여백과 획의 비중을 6 대 4로 채우는 동양화의 기본 법칙을 따르면서 달항아리 그림 안에 먹과 오일스틱으로 산과 들, 사람, 동물을 그려 넣었다. 강 작가는 “다른 존재와의 연결을 추구하는 예술관을 ‘달이 뜬다’ 연작에 담았다”며 “달항아리 안에 자연과 동물, 인간 등을 한데 어울러 놓은 것처럼 작품을 통해 세상을 잇는 안테나 역할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 만물을 하나로 연결하고 응집하려는 예술가의 다음 꿈은 무엇일까. 그는 “임진강에 남북한 어린이들과 실향민의 그림을 모아 남과 북을 잇는 꿈의 다리를 만들고 싶다”고 오랜 소원을 밝혔다. 1994년 미국 뉴욕 휘트니미술관에서 그를 아꼈던 백남준과 ‘멀티플 다이얼로그’전을 열고 1997년 베니스 비엔날레 특별상을 수상한 그는 최근 전시보다는 공공미술 프로젝트에 주력해왔다. 2020년 23개국 어린이 1만2000명과 함께 종로구 광화문광장에 한글과 도자기 형상을 활용한 설치작품 ‘광화문 아리랑’을 작업한 것이 대표적이다. 이번 전시에선 강 작가가 12년간 세계 곳곳에서 공개한 대형 공공프로젝트의 스케치와 아카이브, 자작시도 볼 수 있다. 두 전시 모두 무료다.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

“폭풍 직전의 하늘은 연한 청록색이다.”강익중 작가(62)의 시 ‘내가 아는 것’의 첫 문장이다. 그는 서울 종로구 갤러리현대에서 진행 중인 개인전 ‘달이 뜬다’ 전시장 벽에 손수 이 시를 새겼다. 말 그대로 작가가 아는 것들을 나열한 시다. 뜬금없는 구절은 이렇게 이어진다.“만두 속의 부추와 돼지고기 비율은 2대 1이다”라든지 “밤하늘의 별들은 크리스마스 장식이 아니다”라든지. 싱거운 말 속에 불현듯 격언이 튀어나온다. “기회는 다시 온다”든지 “정말 필요한 것은 별로 없다” 따위의 말이다.12년 만에 열리는 강 작가의 국내 개인전은 유쾌함과 진지함의 향연이었다. 설치작 ‘내가 아는 것’ 연작(2003~2022)은 그의 삶의 지혜가 엿보이는 작품이다. 색색의 알파벳, 한글, 달 항아리가 그려진 3인치 나무패널이 전시장 두 벽면을 꽉 채웠다. 가만 살펴보면 글자는 단어를 만들고 뜻을 이루는 문장이 된다. “너와 나는 다르지 않다. 우리가 모여 세계를 이룬다”는 작가의 핵심 주제 ‘연결’과 맞닿아 있는 작품이다.최근 그는 전시보다는 공공미술 프로젝트에 주력하고 있었다. 개인전이 오랜만인 이유다. 기본 방향은 ‘내가 아는 것’ 작업에 전 세계 어린이들을 참여시키는 것이다. 국내에서는 2020년 23개국 어린이 1만2000명과 함께 서울 광화문 광장에 ‘광화문 아리랑’을 설치한 것이 대표적이다. 강 작가는 “‘당신, 무엇을 아느냐’고 물으면 어른보다 아이들이 더 잘 대답한다. 우리가 세상을 살며 많이 굴절된 것”이라고 했다.이번 전시에서는 특히 자연과 섭리에 대한 철학이 돋보인다. 전시장 1층에 놓인 신작 ‘달이 뜬다’ 연작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지러지는 달과 달 무지개를 형상화한 회화다. 강 작가는 달 무지개를 본 순간을 회상하며 “달 무지개를 기록하고 싶어 잠깐 한눈판 사이 금세 사라졌다. 가장 중요한 순간은 그냥 바라보고 느끼면 될 것을. 그걸 담으려고, 잡으려고 했다”며 아쉬워했다.그런 그가 자처한 것은 ‘안테나’다. “지금 사는 세상에서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고 아래로는 땅을 보며 그 사이를 연결하는 안테나 역할을 하겠다”는 것이다. 다른 존재와의 연결을 추구하는 그의 예술관은 32점의 신작 드로잉 ‘달이 뜬다’에서도 드러난다. 종이에 먹과 오일 스틱으로 산과 달, 사람, 동물 등 인간과 자연 등을 아이의 그림처럼 표현한 작품이다. 단순한 가운데 특이점은 여백에 있다. 강 작가는 “화면의 여백과 획의 비율을 6대4로 채우는 동양화의 기본 법칙을 따랐다”고 말했다.그는 “인생도 여백을 6에 두고 살아야 한다. 그림에 너무 빠지지 말자, 4정도만 그리자”며 장난스레 웃다가도 “사람이 만들어낸 인연이 4라면 자연은 6이다. 헤어질 수도, 다시 만날 수도 있다. 우리는 그렇게 이어져있다”며 현자 같은 말을 하곤 했다. 만물을 하나로 연결하고 응집하려는 예술가의 다음 꿈은 무엇일까. 그는 “임진강에 남북한 어린이들과 실향민의 그림을 모아 남과 북을 잇는 꿈의 다리를 만들고 싶다”며 오랜 소원을 밝혔다.전시는 다음달 11일까지.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

낮게 기울어진 해. 어스레하게 거실로 들어온 햇빛을 반려견이 쬐고 있다. 차창 너머 푸르른 나무들은 나른함을 더한다. 고즈넉한 연출 덕일까. 계속 바라보면 해가 움직일 것만 같은 착각이 든다. 황선태 작가(50)의 연작 ‘빛이 드는 공간’(2022년) 이야기다. 빛을 소재로 유리 드로잉 작업을 해온 황 작가가 30일까지 서울 강남구 갤러리 나우에서 개인전 ‘빛―시간을 담다’를 연다. 이번 전시는 ‘빛이 드는 공간’ 연작 11점, ‘빛이 있는 공간’ 연작 3점 등 유리 드로잉 신작 14점으로 구성됐다. 황 작가는 강화유리 뒷면에 창문, 침대, 테이블 등 드로잉과 풍경 사진을 붙이고, 빛이 들어오는 공간은 잘라낸 필름을 순서대로 붙인 뒤 발광다이오드(LED) 조명을 뒤에서 비추는 방식으로 작업한다. 이번 전시에서 눈에 띄는 점은 야외 풍경을 다룬 작품들이다. 황 작가는 책상이나 소파가 놓인 실내 공간에 유리창을 통과한 햇빛이 내리쬐는 모습을 주로 작업해왔다. 이번에는 가로등 불빛이 비치는 골목길, 도시 야경이 한눈에 들어오는 언덕 위 벤치 등 야외 풍경을 다룬 작품 3점을 선보였다. 실내 작업과 실외 작업은 작품 제목으로 구분할 수 있다. 실내는 ‘빛이 드는 공간’으로, 실외는 ‘빛이 있는 공간’으로 제목을 붙였다. 황 작가는 색이나 질감 표현은 과감하게 생략하고 빛과 선에 집중했다. 화룡점정은 빛이다. 빛을 각각 달리해 작품별로 이른 아침, 느지막한 오후, 흐린 날, 맑은 날을 알 수 있다. 최근 전시장에서 만난 황 작가는 “시간, 날씨에 따라 빛이 드는 풍경을 여러 차례 시뮬레이션해 작품별로 가장 적합한 빛을 찾아냈다”고 말했다. 작품의 LED 조명을 끄면 실내 조감도 같은 선만 남아 완전히 다른 느낌이 든다. 황 작가는 빛에 주목한 이유에 대해 “빛은 사물의 존재를 보여주는 가장 근원적인 요소”라고 말했다. 찬 바람이 부는 요즘, 은은한 빛을 뿜어내는 작품들은 따스함과 아늑함을 선사한다. 14개 작품 중 사람이 등장하는 작품은 없다. 황 작가는 “소파 위 쿠션, 탁자 위의 커피잔만 봐도 그곳에 어떤 사람이 머물렀는지 짐작할 수 있다. 사람에 대한 복잡한 정보를 빼고 최소한의 요소로 작업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무료.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

낮게 기울어진 해. 어스레하게 거실로 들어온 햇빛을 반려견이 정면으로 맞고 있다. 차창 너머에 있는 푸르른 나무들은 나른함을 더한다. 고즈넉한 연출 덕일까. 완성된 그림이지만, 계속 바라보다보면 해가 움직일 것만 같은 착각이 든다. 황선태 작가의 신작 ‘빛이 드는 공간‘의 이야기다. 빛을 소재로 작업해온 황 작가의 개인전 ‘빛-시간을 담다’가 30일까지 서울 강남구 갤러리 나우에서 열린다. 이번 전시에선 황 작가의 유리 드로잉 신작 14점을 선보인다. 작업의 시작은 ‘사물을 어떻게 인식할 것인가’에서 출발한다. 최근 전시장에서 만난 황 작가는 “인간의 시선으로 볼 때 우리는 ‘죽은 집’, ‘죽은 사물’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평범한 사물들도 유기적으로 상호작용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가 자신의 작업에 굳이 인간을 등장시키지 않는 이유기도 하다.“소파 위 쿠션, 탁자 위의 커피 잔만 봐도 그곳에 어떤 사람이 머물렀는지 짐작할 수 있지 않나요? 사람을 표현하게 되면, 사물의 존재감 그 자체보다는 그 사람으로 인한 많은 이야기가 연상됩니다. 사람에 대한 복잡다단한 정보를 삭제하고 최소한의 요소만 가지고 작업하고 싶었습니다.” 실제 그의 작품에는 색, 무늬, 질감 등 대개의 것이 생략됐다. 오로지 빛과 선을 사용했다. 황 작가는 “내 작품의 선은 크로키할 때처럼 감정을 넣어 그린 선이 아니라, 글자의 선처럼 사물을 지칭하기 위해 기능적으로 존재하는 선”이라고 말했다. 여기에 화룡점정은 빛이다. 그의 작품은 LED 조명을 끄면 실내 조감도 같은 선만 남는다. 황 작가가 “빛은 사물이 있음을 보여주는 가장 근원에 해당한다”며 중요성을 설파한 이유다. 작품은 단순해보이지만, 작업은 그리 간단치 않다. 각 작품마다 약 4개의 레이어로 이뤄져있다. 강화 유리 뒷면을 놓고 그 뒤에 간략한 선으로 묘사한 실내 드로잉과 풍경 사진을 인쇄한 필름, 빛이 투과하는 지점만 잘라낸 필름을 순서대로 전사한 뒤 LED 조명을 비추면 완성이다. 이번 전시에서 눈에 띄는 점은 실외 작업이다. 이제껏 황 작가는 주로 실내를 그려왔다. 책상이나 소파가 놓인 실내 공간에 유리창을 통과한 햇볕이 쬐는 식이었다. 이번에는 가로등 불빛이 비추는 골목길 모습, 한눈에 야경이 보이는 벤치를 그린 작품 3점이 함께 전시됐다. 황 작가는 “실내 작업은 ‘빛이 드는 공간’이라는 이름을, 실외 작업은 ‘빛이 있는 공간’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제목이 작품을 넘어서면 안 되기에 간단하게 구분 지었다”고 했다.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

2015년 일본 지바현에서 간호사 출신인 70대 부인이 남편을 살해한 사건이 벌어졌다. 당시 피해자의 몸에는 끔찍한 자상이 서른 군데가 넘었다. 도대체 이 부부에게는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알고 보니 이 사건에는 심각한 ‘노노(老老) 간병’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노노 간병은 환자와 간병인이 모두 65세 이상으로 주로 집에서 이뤄지는 간병을 뜻한다. 2019년 기준 일본에선 재택 간병의 59.7%가 노노 간병이었다. 이 부부도 원래는 금실이 좋기로 유명했다. 하지만 2009년 남편이 뇌출혈로 쓰러지며 시련을 맞았다. 부인은 “남편 간병은 내가 책임진다”며 치료에 헌신했지만, 2014년 남편은 또다시 뇌출혈로 쓰러지며 상황은 악화됐다. 갈수록 심리적으로도 불안한 남편 옆에서 부인도 조금씩 지쳐 갔다. 극심한 우울증에 빠져 자살 충동도 여러 차례 느꼈다. 하지만 부인은 처방약을 먹으면서도 간병을 이어갔다. 사건이 일어난 뒤, 부인을 상담한 적 있던 돌봄 매니저는 “혼자 책임지려 하지 말고 주위에 도움을 요청했다면 이 지경에 이르지 않았을 것”이라며 안타까워했다. 빈곤, 범죄 등 사회 문제를 파헤쳐 온 르포 작가인 저자는 최근 일본에서 늘어나는 ‘가족 살인 사건’을 면밀히 들여다봤다. 2015년부터 벌어진 일곱 가족의 비극을 다뤘다. 아동학대와 히키코모리(은둔형 외톨이), 돌봄 포기 등 여러 사연이 얽혀 있다. 2018년 도쿄의 한 주택가에서 벌어진 사건도 허망하고 처참하기 그지없다. 40대 남성이 숨졌는데, 살인 혐의로 체포된 이는 늙은 아버지였다. 중학교에서 30년 이상 교편을 잡았던 부친은 평생 범죄와 무관했던 시민이었다. 한데 남성의 어머니는 남편을 원망하지 않았다. “지금껏 버틸 수 있었던 것도 남편 덕분”이라며 눈물 흘렸다. 숨진 아들은 어려서부터 정신질환을 앓았다. 강박증과 대인기피증에 시달리던 그는 20대에 들어서자 어머니에게 폭력을 행사했다. 공포에 짓눌린 부인을 지키기 위해 남편은 아들을 가족과 분리시켰다. 아들을 원룸으로 독립시키고, 자신이 매일 찾아가 잠들 때까지 자리를 지켰다. 그렇게 보낸 20년 세월. 하지만 상태는 호전되질 않았고, 잠시 집에 들렀던 아들이 또다시 어머니에게 손찌검을 하자…. 아버지는 평정심을 잃고 말았다. 선뜻 권하긴 쉽지 않은 책이다. ‘어떻게 가족이 이럴 수 있나.’ 세상은 누구나 남의 일엔 쉽게 판정을 내린다. 물론 살인은 용서받지 못할 범죄이며, 존속살인은 더욱 반인륜적이다. 하지만 어떤 일들은 함부로 평가의 잣대를 갖다 대선 안 된다. 저자는 “저출산과 고령화로 가족 문제는 갈수록 더 심각해질 것”이라며 “복잡하고 무거운 현실과 공적 지원의 문제에 더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고 조언한다. 솔직히 이런 조언이 얼마나 효과가 있을지 모르겠으나, 이웃나라의 현실이 결코 남의 얘기로 들리지 않기에 마음이 무겁고 씁쓸해진다.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

국내 매거진 그룹 노블레스미디어인터내셔날의 갤러리 ‘노블레스 컬렉션’이 중국 상하이 아트페어 ‘웨스트번드 아트 앤드 디자인’에 참가했다. 2014년부터 열린 이 아트페어는 지난해 미국 거고지언, 스위스 하우저 운트 비르트, 영국 리슨갤러리 등 세계 유명 갤러리들이 참여해 왔다. 10일부터 13일까지 열리는 올해는 19개국 43개 도시에서 온 100여 개 해외 갤러리가 참여한다. 노블레스 컬렉션은 ‘웨스트번드 아트 앤드 디자인’ VIP 라운지에 전시 ‘Contourless’를 마련했다. 김종학(85), 김근태(69), 이배(66), 김택상(64), 이수경(59), 정용국(50), 이소정(43), 손동현(42), 이은실(39), 박형진(36) 등 국내 작가 10명의 회화와 설치 등 19점으로 구성했다. 이들은 한국 전통 미술에 대해 고민하고 다양한 시도를 해 왔다. 현대한국화를 그리는 손 작가가 기획에 참여했다. 김종학 작가는 꽃을 모티브로 한 ‘무제’를 선보였다. 숯의 작가 이배는 숯가루로 만든 먹물을 사용해 그린 드로잉 ‘Brushstroke―L’을 선보였다. 웅덩이에 캔버스 천을 깔고 안료 섞은 물을 부어 만든 김택상 작가의 ‘Breathing light―Red shadow’, 한지에 수묵으로 무한 증식하는 잎을 그린 정용국 작가의 ‘Rootless Tree’, 손 작가의 수묵산수화 ‘3P04’도 소개됐다. 노블레스 컬렉션은 “다채로운 방식으로 작업한 작품들을 통해 한국 미술의 가능성과 새로운 방향성을 세계에 널리 알리고 싶다”고 밝혔다. 노블레스 컬렉션은 11, 12일에는 미술계간지 ‘아트나우 차이나’와 함께 총 5회에 걸쳐 포럼 ‘아트나우 포럼: 예담’을 개최한다. 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

비디오아트 선구자인 백남준(1932∼2006)이 1992년 국립현대미술관과 함께 기획한 전시 ‘백남준·비디오때·비디오땅’은 기념비적인 작품이 등장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고딕 성당과 유사한 구조물에 TV 모니터들을 붙이고 첨탑 부분에 주제에 맞는 오브제들을 단 작품인 ‘나의 파우스트 시리즈’(1989∼1991년)가 주인공. 모두 13점으로 이뤄진 작품은 각각 환경과 농업, 예술, 통신, 교통, 민족주의 등 백남준의 세계관을 상징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10일부터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서 열리는 전시 ‘백남준 효과’는 작가가 활발하게 활동했던 시대의 한국 미술을 다시 소환한다. 출품작은 총 103점으로 이중 ‘나의 파우스트 시리즈’는 13점 가운데 6점을 선보인다. ‘비밀이 해제된 가족사진’(1984년) 등 백남준의 1980, 90년대 대표작 43점과 당시 함께 활동했던 구본창, 이불 등 국내 작가 25명의 1990년대 대표작 60점도 전시된다. 이번 전시는 1984년 귀국한 백남준이 1990년대 한국 현대미술 발전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체험적으로 가늠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이수연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는 “백남준은 1990년대 국내 현대미술계에 실험적인 키워드들을 던졌던 전략가이자 기획자, 문화번역자라 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전시는 백남준의 주요 메시지라 할 수 있는 △세계화 △과학과 기술의 발전 △믹스트미디어(mixed media·여러 매체를 함께 사용하는 미술 기법) △다원성 등으로 구분됐지만 딱히 얽매일 필요는 없다. 오래 세월이 흐른 작품들이지만 탁월한 재료 선정과 기법 덕에 최신 현대미술을 만나는 듯한 신선함마저 안겨준다. 내년 2월 26일까지. 입장료 2000원.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

담백한 꽃과 새, 은은하게 펼쳐진 산과 강, 호젓한 정자에 걸터앉은 선비와 아이…. 여기까지만 보면 여느 한국화 전시 중 하나라 여길지 모르겠다. 익히 알지만 친근하고 좋은 기운에 발걸음이 차분해진다. 그런데 드문드문 뭔가 좀 낯설다. 어진(御眞·임금의 초상)인가 싶어 들여다보니 마이클 잭슨이고, 불화처럼 보여 다가가니 덥수룩한 수염의 성인 남성 천사라니. 도대체 무슨 전시일까. 서울 종로구 일민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기획전 ‘다시 그린 세계: 한국화의 단절과 연속’은 낯익음과 낯섦이 공존하는 독특한 전시다. 기본적으로 일민미술관이 소장한 겸재 정선(1676∼1759)이나 추사 김정희(1786∼1856), 오원 장승업(1843∼1897) 등 조선시대 걸작부터 시대순으로 관람할 수 있는데, 그 사이사이에 ‘이질적인’ 작품들이 포진해 있다. 뭔가 뒤섞인 듯 보이지만 구분은 어렵지 않다. 작품이 전시된 벽지를 보면 안다. 전시의 뼈대를 이루는 고전은 회색 벽지에 배치됐고, 현대 작품은 사이사이에 다른 색깔의 벽지에 자리하고 있다. 장서영 일민미술관 에듀케이터는 “작품들을 섞어 진열함으로써 과거에서 현재를 만나고, 현재에서 과거를 살피는 체험을 통해 한국화의 정의를 다시금 고민해 보길 바랐다”고 설명했다. 모두 43점이 출품된 고전 작품들은 하나하나가 보물급이다. 18세기 한강에 있던 정자를 그렸다는 겸재의 ‘숙몽정’과 서예 필선이 도드라지는 추사의 ‘사시묵죽도사폭병’, 실험적인 구도가 눈길을 사로잡는 오원의 ‘화조도’는 발길을 한참 동안 멈추게 한다. 근현대 고전도 만만찮다. 소나무와 선비 아홉 명을 그린 고희동(1886∼1965)의 ‘송하관류도’(1927년)와 설산 풍경을 담은 박승무(1893∼1980)의 ‘설청계방’도 놓치기 아깝다. 본격적인 채색 한국화가 등장하는 2층 전시도 범상치 않다. 김은호(1892∼1979)의 ‘미인도’부터 서세옥(1929∼2020)의 ‘춤추는 사람들’, 황창배(1947∼2001)의 ‘새로 쓰는 선비론 삽화’ 시리즈에까지 이르면 한국화의 역사를 아우를 수 있다. 고전이 감동이었다면, 현대 한국화는 재미지다. 손동현의 2008년 작 ‘왕의 초상(P.Y.T)’은 마이클 잭슨이 조선 임금의 어진처럼 포즈를 잡고 앉았다. 그의 또 다른 작품 ‘한양’(2022년)은 정선의 산수화를 애니메이션에서의 공간처럼 해석했다. 박그림의 ‘심호도’ 시리즈(2021∼2022년)는 고려·조선 불화의 도상이지만 곳곳에 현대인의 얼굴과 민화적인 호랑이가 등장한다. 한국 작가가 그리지 않은 작품도 있다. 겸재와 오원의 작품 사이에 있는 ‘과거에 대한 고찰’(2021년)은 프랑스 화가 로랑 그랑소(50)의 회화다. 3개 화폭으로 구성된 작품은 왼쪽에 윤두서(1668∼1715), 오른쪽엔 겸재 그림을 재해석한 회화를 그려 넣었다. 가운데 화폭엔 동그라미가 중첩된 광원(光源)이 포진했다. 장 에듀케이터는 “광원은 과거와 현재의 시공간을 아우르는 통로를 상징한다”며 “시대와 국적을 뛰어넘어 ‘가장 한국적인 느낌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을 담았기에 이번 전시와 잘 어울리는 작품”이라고 했다. 내년 1월 8일까지. 5000∼7000원.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

조선 후기, 한강변 압구정 동쪽에는 미상의 정자가 있었다. 1749년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이 정자의 이름은 ‘숙몽정’. 한국화의 뿌리와도 같은 조선의 화가 겸재 정선(1676~1759)은 정자 뒤로 펼쳐진 기암절벽 풍경과 정자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선비와 어린 아이를 그렸다. 지금은 없어진 이 정자는 정선의 그림 ‘숙몽정’(1700년대)으로 그 흔적을 짐작할 수 있다.서울 종로구 일민미술관은 ‘다시 그린 세계: 한국화의 단절과 연속’ 전시장의 가장 초입에 ‘숙몽정’을 놓았다. ‘한국화의 개념과 한국화의 기반이 되는 전통이 사라지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질문을 은유한 셈이다. 출품작은 크게 소장품과 대여품으로 나뉘어있다. 소장품은 겸재 정선, 추사 김정희(1786~1856), 오원 장승업(1843~1897) 등 ‘고전’이라 칭해지는 예술가 24명의 작품 42점. 대여품은 ‘현대’라 불리는 동시대 작가 13명의 작품 69점이다. 한국적 재료나 소재를 작업에 이어가고 있는 작가들을 추렸다.독특한 점은 전시 구성이다. 한데 섞여 있는 이 작품들을 구분하는 방법은 벽지 색이다. 전시의 주축이 되는 것은 회색 벽지다. 전시장은 툭툭 끊어진 회색 벽지와 그 사이로 다양한 색의 벽지들이 끼어있는 형식이다. ‘고전’ 작품은 회색 벽지에, ‘현대’ 작품이 그 사이사이에 자리하고 있다. 미술관 측은 “소장품과 대여품을 섞어 진열하면서 과거 속에서 현재를, 현재 속에서 과거를 살피며 한국화의 정의를 고민해봤으면 한다”고 말했다.정선의 ‘숙몽정’에서 시작한 고전 작품들은 시대순으로 배치되어 있다. 서예의 필선이 두드러지는 김정희의 ‘사시묵죽도사폭병’(1840년대)과 실험적인 구도와 담채법이 특징인 장승업의 ‘화조도’(1860년대)를 선두로 그들의 영향을 받은 이들의 작품이 펼쳐진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고전도 변화를 겪는다. 소나무와 아홉 명의 선비를 그린 고희동의 ‘송하관류도’(1927년)에서 발견되는 작아진 글씨나 설산 풍경을 그린 박승무의 ‘설청계방’(1940년대)에서 살펴볼 수 있는 장방형 비율이 대표적이다.변화의 속도는 2층 전시장에서부터 더 빨라진다. 김은호(1892~1979)의 ‘미인도’(1940년) 등으로 대표되는 채색화가 등장하면서부터다. 일본 유학을 통해 서양화풍의 일본화에 영향을 받은 작가들은 1936년 ‘후소회’를 설립해 수묵산수화를 주로 그린 이상범(1897~1972)과 그의 제자들과 쌍벽을 이뤄갔다. 이 흐름은 1950년부터 한국화가들이 추상표현주의를 수용하면서 또 한번 큰 변화를 맞이한다. 서세옥(1929~2020)의 ‘춤추는 사람들’(1995년)이나 황창배(1947~2001)의 ‘새로 쓰는 선비론 삽화’ 시리즈(1997~1998년) 등은 단순한 선이 눈에 띈다.사실 시대 흐름에 따른 한국화의 변화 양상을 따라가기 쉬운 전시는 아니다. 분절된 회색 벽지 사이사이에 놓인 화려한 현대 작품들 때문이다. 마이클 잭슨의 모습을 한국화 구도로 그린 손동현의 ‘왕의 초상(P.Y.T)’(2008년), 불교 도상에서 모티브를 얻은 박그림의 ‘심호도’ 시리즈(2021~2022년) 등은 고전 작품처럼 담백함은 덜하지만 어딘지 친숙하다. 또 조선의 화가 윤두서와 정선의 그림을 재해석한 회화 ‘과거에 대한 고찰’(2021년)의 주인은 프랑스 출신 예술가 로랑 그라소(50)다. 시대와 국적을 뛰어넘어 발견되는 ‘한국적이라는 느낌’의 근원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전시는 내년 1월 8일까지. 5000~7000원.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

스위스 정신의학자 루트비히 빈스방거(1881∼1966)는 갓 스무 살이 된 장남을 잃었을 때 그 비통한 마음을 정신분석학 창시자인 지크문트 프로이트(1856∼1939)에게 알렸다고 한다. 프로이트는 빈스방거를 이렇게 위로했다. “사별 뒤 극심한 슬픔은 언제나 끝이 납니다만, 그 후에 무엇으로도 고인을 대신할 수 없는 기나긴 날들이 이어집니다. 다른 무엇으로 대체해보려 해도 역시 고인과는 어딘가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그걸로 괜찮습니다. 그렇게 해야만 고인에 대한 사랑을 유지해갈 수 있습니다.” 지난달 29일 서울 용산구 이태원 골목에서 안타까운 생명들이 숨을 거뒀다. 그 어이없고 난데없는 희생을 목도하고 수많은 이들이 혼란에 빠졌다. 준비 없는 이별을 맞닥뜨린 유족과 주변인들은 그 비통함을 어떻게 헤쳐 나갈 수 있을까. 한림대 생사학연구소 연구위원인 저자는 3년간 세상을 휩쓸고 있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가족을 떠나보낸 유족들을 인터뷰했다. ‘애도 상담 전문가’로 활동하는 그는 이태원 핼러윈 참사와 사인(死因)이나 처지는 다르지만 사별을 마주한 이들의 심정을 가까이에서 들여다본다. 갑작스러운 이별은 남은 이들에게 한꺼번에 많은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그중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자책감이다. 책에 등장하는 유족들은 대부분 고인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한 사례를 떠올리거나 자기 탓에 일찍 떠난 건 아닌지 고민하는 경우가 많았다. 저자는 “위기 상황 속 극도의 불안이 자기 자신에게 향하는 것이 죄책감”이라며 “이러한 죄의식은 대개 비합리적인 것으로,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일어난 것이라는 현실 검증을 통해 완화될 수 있으나 그렇지 못한 경우는 위험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럴 때 당장은 쉽지 않겠지만 시간을 갖고 ‘상실노트 쓰기’를 해보라고 저자는 추천한다. 글쓰기를 통해 고인과의 지난 시간을 추억하고 자신의 감정을 객관화하려 노력하는 것이다. 저자는 “사별한 이들이 경험하는 죄책감을 고인과의 화해에 대한 소망으로 이해하고 배려해야 한다”고 짚어준다. 이때 중요한 점은 감정이 생생할 때 이런 작업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고인과의 추억을 마주하며 관계를 재정립하는 과정은 기나긴 애도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강조한다. 프로이트가 얘기했듯, 애도는 기나긴 날들이 이어지는 여정이다. “삶은 끝나도 관계는 지속되기” 때문이다. 이별의 슬픔은 떠난 이와의 관계를 끝내버린다고 극복되는 것이 아니다. 고인과의 관계가 죽음으로 인해 마무리됐다고 해버리면, 사별 뒤에 오래도록 고인을 잊지 못하는 이들에게 부정적인 편견이 덧씌워질 수 있다. 저자는 “고인과의 심리적 유대감은 제사나 추모 문화 등의 환경에 따라 유지되고 진화할 수 있다”며 “이럴 때일수록 주변의 지지와 위로가 필요하다”고 조언한다. 사별을 겪은 이들은 그 이전과는 전혀 다른 환경에 놓인다. 어떤 유족들은 세상에 대한 인식이나 가치에 대한 신념 같은 기존의 인식 체계가 붕괴되기도 한다. 특히 외부적 요인으로 인한 헤어짐일 경우 정신적 충격은 더욱 클 수밖에 없다. 하루하루 견디는 것조차 힘든 이들이 거기에 얽매이지 않도록, 그 이후의 삶에 적응할 수 있도록 주변과 사회에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저자는 말한다. “슬픔을 경험하는 사람들이 그 어떤 모멸도 받지 않고 자신의 감정을 더 많은 사람들과 공유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그 어느 때보다, 말할 수 있는 것을 말하게 해주고 아픈 목소리를 들어주는 태도가 절실하게 필요한 시간이다.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

스위스 정신의학자 루트비히 빈스방거(1881~1966)는 갓 스무 살이 된 장남을 잃었을 때 그 비통한 마음을 정신분석학 창시자인 지그문트 프로이트(1856~1939)에게 알렸다고 한다. 프로이트는 빈스방거를 이렇게 위로했다.“사별 뒤 극심한 슬픔은 언제나 끝이 납니다만, 그 후에 무엇으로도 고인을 대신할 수 없는 기나긴 날들이 이어집니다. 다른 무엇으로 대체해보려 해도 역시 고인과는 어딘가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그걸로 괜찮습니다. 그렇게 해야만 고인에 대한 사랑을 유지해갈 수 있습니다.”지난달 29일 서울 용산구 이태원 골목에서 안타까운 생명들이 숨을 거뒀다. 그 어이없고 난데없는 죽음을 목도하고 수많은 이들이 혼란에 빠졌다. 준비 없는 이별을 맞닥뜨린 유족과 주변인들은 그 비통함을 어떻게 헤쳐 나갈 수 있을까.신간 ‘코로나를 애도하다’의 저자인 양준석 한림대 생사학연구소 연구위원은 3년 넘게 세상을 휩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가족을 떠나보낸 유족들을 인터뷰했다. ‘애도 상담 전문가’로 활동하는 그는 이태원 핼러윈 참사와 사인(死因)이나 처지는 다르지만 사별을 마주한 이들의 심정을 가까이에서 들여다본다.갑작스런 이별은 남은 이들에게 한꺼번에 많은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그 중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자책감이다. 책에 등장하는 유족들은 대부분 고인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한 사례를 떠올리거나 자기 탓에 일찍 떠난 건 아닌지 고민하는 경우가 많았다. 저자는 “위기 상황 속 극도의 불안이 자기 자신에게 향하는 것이 죄책감”이라며 “이러한 죄의식은 대개 비합리적인 것으로,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일어난 것이라는 현실 검증을 통해 완화될 수 있으나 그렇지 못한 경우는 위험할 수 있다”고 말한다.이럴 때 당장은 쉽지 않겠지만 시간을 갖고 ‘상실노트 쓰기’를 해보라고 저자는 추천한다. 글쓰기를 통해 고인과의 지난 시간을 추억하고 자신의 감정을 객관화하려 노력하는 것이다. 저자는 “사별한 이들이 경험하는 죄책감을 고인과의 화해에 대한 소망으로 이해하고 배려해야 한다”고 짚어준다. 이때 중요한 점은 감정이 생생할 때 이런 작업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고인과의 추억을 마주하며 관계를 재정립하는 과정은 기나긴 애도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강조한다.프로이트가 얘기했듯, 애도는 기나긴 날들이 이어지는 여정이다. “삶은 끝나도 관계는 지속되기” 때문이다. 이별의 슬픔은 떠난 이와의 관계를 끝내버린다고 극복되는 것이 아니다. 고인과의 관계가 죽음으로 인해 마무리됐다고 해버리면, 사별 뒤에 오래도록 고인을 잊지 못하는 이들에게 부정적인 편견이 덧씌워질 수 있다. 저자는 “고인과의 심리적 유대감은 제사나 추모문화 등의 환경에 따라 유지되고 진화할 수 있다”며 “이럴 때일수록 주변의 지지와 위로가 필요하다”고 조언한다.사별을 겪은 이들은 그 이전과는 전혀 다른 환경에 놓인다. 어떤 유족들은 세상에 대한 인식이나 가치에 대한 신념 같은 기존의 인식 체계가 붕괴되기도 한다. 특히 외부적 요인으로 인한 헤어짐일 경우 정신적 충격은 더욱 클 수밖에 없다. 하루하루 견디는 것조차 힘든 이들이 거기에 얽매이지 않도록, 그 이후의 삶에 적응할 수 있도록 주변과 사회에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저자는 말한다. “슬픔을 경험하는 사람들이 그 어떤 모멸도 받지 않고 자신의 감정을 더 많은 사람들과 공유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그 어느 때보다, 말할 수 있는 것을 말하게 해주고 아픈 목소리를 들어주는 태도가 절실하게 필요한 시간이다.김태언기자 beborn@donga.com}

“그의 아내가 아닌/나의 이름으로 서 있는 이곳/아직 낯설어/그의 그림이 아닌/나의 그림으로 채워진 이곳/그건 더 새로워….” 올해 9월 처음 선보인 창작뮤지컬 ‘라흐 헤스트’는 여성 화가이자 미술평론가인 김향안(1916∼2004)의 삶을 재조명한 작품. 시인 이상(1910∼1937)과 화가 김환기(1913∼1974)라는 두 천재 거장의 부인으로 많이 알려졌지만, 김향안 역시 자기만의 세계를 공고히 구축한 예술가였다. ‘라흐 헤스트’는 “예술은 남다”라는 프랑스말로, “사람은 가고 예술은 남는다”라는 김향안의 어록에서 따왔다. 과거부터 미술을 포함한 예술무대는 남성 중심으로 흘러갔다. 유명 화가의 부인은 그들을 뒷받침하는 조력자로 여겨졌다. 하지만 상당수는 독립적 정체성을 지닌 미술가들이었다. 최근 미술계에선 이들의 작품을 재조명하며 평가도 다시 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서울 종로구 갤러리라온에서 2일 만난 류민자 작가(80)는 “고유한 한 명의 작가로 인정받고 싶고, 인정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한국적 추상화의 대표주자였던 하인두(1930∼1989)의 부인인 그는 올해 6, 7월 이곳에서 한국화 등 50여 점을 선보인 개인전 ‘류민자’를 열었다. “한국 근현대 여성 작가들은 가사와 육아, 내조로 1인 3, 4역을 해야 했죠. 전업 작가는 꿈도 못 꿨어요. 물론 그게 당시엔 주어진 삶이었으니 후회는 없어요. 이 나이에도 붓을 들 수 있어 감사할 따름이죠.” 한국화가 안상철(1927∼1993)을 기리며 세운 안상철미술관이 최근 나희균 작가(90)를 소개하는 데 애쓰는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안상철의 부인인 그가 살아 있을 때 제대로 조명해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나 작가는 한국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인 나혜석(1896∼1948)의 조카다. 나 작가의 큰딸인 안재혜 안상철미술관장은 “어머니는 시간이 많지 않다고 여기시는지 매일 식사하듯 작품 활동에 매진하고 있다”고 말했다. 국내 1세대 조각가인 문신(1922∼1995)의 부인이자 창원시립마산문신미술관 명예관장인 최성숙 작가(76)는 요즘 잠잘 시간도 쪼개 쓴다. 동양화를 주로 그려온 최 작가는 “올해가 문신 탄생 100주년인 데다 프랑스에서 열린 한국작가 초대전에 제 작품도 출품해야 해 너무 바빴다. 지난달 31일부터 열린 ‘문신 탄생 100주년 기념 국회특별전’도 기획했다. 예술작업과 외부활동을 함께하는 게 참 힘들긴 하다”고 했다. 뒤늦게 작가의 길로 들어선 이도 있다. 국내 1세대 행위예술가로 꼽히는 이건용 화백(80)의 부인 승연례 작가(73)는 2017년 첫 개인전을 가진 뒤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올해 9월 세 번째 개인전을 열었다. 승 작가는 동아일보와의 통화에서 “미술을 전공했지만 결혼 뒤 가사에 집중했다. 그림을 그리고 싶은 욕구는 언제나 가득했는데, 갤러리 측에서 작품을 보고 요청해와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했다”고 말했다. 정필주 울산시립미술관 학예연구사는 “박래현(김기창 부인)과 박인경(이응노 부인) 등 화가의 부인은 한국 사회가 요구한 내조자의 길을 걸으면서도 예술을 고민한 당대의 화가였다”며 “유명 화가의 부인이란 편견 없이 작품만으로 제대로 평가를 받을 기회가 적었다”고 했다. 황규성 갤러리라온 대표도 “여성 원로 작가들은 작품보다 누군가의 부인이나 어머니로 정의되는 일이 많았다”며 “이젠 미술계도 그들을 다룬 전시는 물론이고 학술적인 연구도 본격적으로 진행해 정당한 지위를 찾아줄 때가 됐다”고 말했다.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

웅장하거나 매끈하지는 않다. 오히려 어딘가 모르게 허름하고 어눌한 분위기가 묻어난다. 하지만 그 거친 결 사이로 깊은 고민을 담아온 조각가들의 전시가 동시에 열리고 있다. 30년 넘게 조각에 천착한 정현 작가(66)와 박미화 작가(65)가 그들이다. 서울 성북구 성북구립미술관에서 열리는 정 작가의 개인전 ‘시간의 초상: 정현’은 작품마다 철학적 사유가 진득하다. 대표적으로 ‘무제’(2022년)는 시커멓게 타버린 나무들이 서로를 지탱하며 무너지지 않는 형상이 인상적이다. 정 작가는 “2019년 발생한 강원 고성 산불 현장의 잿더미에서 건진 나무들”이라며 “시련을 겪은 것들은 언제나 아름답다”고 했다. 조각 및 설치 87점과 드로잉 등 110점으로 구성된 전시는 정 작가의 1980년대 작품부터 최신작까지를 망라했다. 대부분의 재료가 나무토막이나 아스팔트, 콘크리트, 잡석과 석탄이다. 작가는 “기교는 최소화하고 시간이 만들어놓은 물질의 상처와 아픔을 최대한 끌어내고자 했다”고 말했다. 그간 공개하지 않았던 석고 작품도 인상적이다. 두 손을 가지런히 모은 길쭉한 인간의 형상인 ‘무제’(1987년)나 거세게 표현된 인간의 얼굴인 ‘무제’(1998년)를 보면 “브론즈가 화장한 얼굴이라면 석고는 맨 얼굴”이란 말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정 작가는 “많은 이들이 석고를 ‘과정의 재료’로 여기지만, 석고의 풋풋함이 좋다”고 했다. 다음 달 4일까지. 서울 종로구 아트스페이스3에서 다음 달 3일까지 열리는 박 작가의 개인전 ‘Lesser 더 적게’도 닮은 점이 많다. 박 작가도 버려진 목재 등을 이용해 “보잘것없어 보이는 것들”에 애정 어린 시선을 둬왔다. 전시엔 그의 또 다른 도전이 돋보였다. 조각에서 흙은 주로 굽거나 칠해서 사용하는데, 박 작가는 젖은 흙으로 형상을 빚어 “날것인 상태로” 배치했다. 전시장을 길쭉하고 넓게 장식한 ‘지성소’와 ‘회랑’은 누워 있는 천사와 웅크린 양 등 무기력하면서도 왠지 눈이 가는 자그마한 존재들이 한데 모여 있다. 두 작품 모두 지난해부터 올해까지 작업했다. 모두 13점을 선보인 이번 전시 작품들은 대부분 긁히고 파인 자국들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고충환 미술평론가는 “박미화의 작업은 권력과 무지에 희생당한 존재들을 기억하고 기록하고 기념하는 일”이라며 “존재를 연민으로 감싸는 애틋한 시선이 인상적이다”라고 평했다. 박 작가는 이번 전시작 대부분을 판매하지 않을 예정이다. 박 작가는 “지구에서 더 적게 자취를 남기고 싶다”며 “흙 조형들은 전시가 끝난 뒤 흙으로 되돌려 보내겠다. 이 역시 새로운 작업으로 재탄생될 것”이라고 말했다.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

‘이것은 드로잉인가 회화인가.’ 서울 종로구 토포하우스에서 다음 달 13일까지 열리는 ‘긴 호흡: 다섯 작가의 드로잉’ 전시는 드로잉을 ‘대상의 윤곽을 채색 없이 선으로 그리는 것’이라고 여겼던 관람객의 생각을 흔들어 놓는다. 드로잉을 기본으로 하되 채색을 곁들였다. 원로 작가 윤동천(65), 정현(66), 곽남신(69), 오원배(69), 서용선(71)의 드로잉 총 25점을 선보이는 전시를 통해 변화하는 드로잉의 개념을 확인할 수 있다. 전시장 초입에 놓인 조각가 정현의 드로잉 6점은 비교적 익숙하다. 종이에 오일바 등으로 나무와 인간을 그렸는데, 거친 느낌을 풍긴다. 그는 서문에서 “내 감정이 가장 첫 번째로 표현되는 것이 드로잉”이라고 설명했다. 전시장에서 28일 만난 오 작가는 “더 이상 드로잉을 ‘작품의 밑바탕’ 혹은 ‘연습용’으로만 정의할 수 없다”고 말했다. 실제 오 작가의 작품 ‘무제’(2022년)는 로봇 형상을 구체적으로 그리고 채색을 곁들였다. 오 작가는 “드로잉이 회화보다는 단순하고 즉흥적인 요소를 갖고 있지만, 그 자체로도 작품으로 인정받는 추세”라고 했다. 곽 작가의 작품은 일반적인 ‘드로잉’ 개념과 거리가 더 멀다. 종이에 수채색연필로 작업한 ‘실루엣 놀이’(2019년)는 그림자까지 그려 멀리서 볼 땐 입체 작품처럼 보인다. 곽 작가는 “최근 물감을 쌓아가면서 화면을 구성하는 전통적 회화보다는 가볍고 단순한 회화를 추구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드로잉적인 회화’가 탄생했다. 이 작업은 기존 회화보다 더 자유롭다”고 했다. 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

한국에서 핼러윈은 문화·상업적으로 ‘만들어진 문화’다. 전문가들은 MZ세대(밀레니얼+Z세대)가 유년 시절을 보낸 2000년대 초 영어 유치원과 학원에 원어민 강사 채용이 일반화되고 수업의 일환으로 핼러윈 파티가 정착되면서 핼러윈 문화가 확산됐다고 분석한다. 어릴 때부터 핼러윈 파티를 접한 MZ세대에게 핼러윈은 더 이상 미국 문화가 아니라 설이나 추석 같은 명절처럼 익숙한 문화가 됐다는 것이다. 설동훈 전북대 사회학과 교수는 30일 “지금 10, 20대는 어린이집을 다니던 미취학 아동 때부터 원어민 강사와 함께 코스튬 플레이를 즐기며 핼러윈에 익숙해진 세대”라며 “성인이 된 지금도 이들에게 핼러윈은 자연스러운 문화가 됐다”고 말했다. 한국의 핼러윈 문화는 MZ세대를 대상으로 한 마케팅과 맞물리며 규모가 커졌다는 의견도 나온다. 이택광 경희대 글로벌커뮤니케이션학부 교수는 “2000년대 초 국내 테마파크에서 핼러윈 축제를 기획하며 학원가에서 소규모 집단이 즐기던 파티에서 대규모 축제로 몸집을 키웠다”고 했다. 회사원 이하영 씨(28)는 “초등학생 때부터 가족과 놀이동산에 가서 핼러윈 퍼레이드를 접했다”며 “10월이 되면 음식점과 상점이 각종 핼러윈 이벤트를 열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핼러윈을 즐기게 됐다”고 말했다. 실제 핼러윈 문화에 익숙해진 MZ세대가 성인이 되면서 서울 용산구 이태원과 마포구 홍대입구역 일대 클럽에서 핼러윈을 마케팅에 활용하기 시작했다. 어린이가 있는 가족과 이웃들이 소규모로 즐기는 미국 핼러윈과 달리 한국의 핼러윈이 테마파크와 클럽을 중심으로 대규모 인파가 몰리는 축제로 자리 잡은 배경이다. 소셜미디어도 핼러윈 문화가 폭발적으로 확산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독특한 복장을 한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올리면 뜨거운 관심을 받기 때문이다. 이 교수는 “한국의 핼러윈 문화는 코스튬 플레이를 한 사진을 SNS에 올리는 ‘인증샷’ 문화와 만나며 핼러윈 축제가 열리는 클럽 일대에 폭발적인 인파를 끌어들였다”고 말했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

‘이것은 드로잉인가 회화인가.’서울 종로구 토포하우스에서 다음달 13일까지 진행되는 ‘긴 호흡: 다섯 작가의 드로잉’ 전시의 첫 인상이다. 이곳에는 다섯 명의 국내 원로 작가 윤동천(65), 정현(66), 곽남신(69), 오원배(69), 서용선(71)의 드로잉 총 25점이 전시되고 있다.드로잉을 ‘대상의 윤곽을 채색 없이 선으로 그려내는 것’이라고만 생각했다면, 이번 전시를 통해 변화하고 있는 드로잉의 개념을 살펴볼 수 있다. 전시장 초입에 놓인 조각가 정현의 드로잉 6점은 비교적 익숙하다. 종이에 오일바 등으로 나무와 인간의 형상을 그렸는데, 거친 느낌을 풍긴다. 그는 서문에서 “내 감정들이 가장 첫 번째로 표현되는 것이 드로잉”이라고 했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돌리면, 드로잉이라기에는 생경한 작품들이 놓여있다.28일 전시장에서 만난 오 작가는 “더 이상 드로잉을 ‘작품의 밑바탕’ 혹은 ‘연습용’으로만 정의할 수 없다”고 말했다. 실제 오 작가의 작품 ‘무제’(2022년)는 종이 위에 작업했다는 점을 제외하면, 구체적인 로봇의 형상을 그려 넣고 채색까지 곁들여 ‘드로잉’에 대한 고정된 이미지와는 결이 다르다. 오 작가는 “드로잉이 회화보다는 단순하고 즉흥적인 요소를 갖고 있지만, 그 자체로도 작품으로 인정받는 추세”라고 했다.곽 작가의 작품은 더욱 보편적인 ‘드로잉’ 개념과 멀다. 작품 ‘실루엣 놀이’(2019년)는 종이 위에 수채색 연필로 작업했는데, 그림자까지 그려 넣어 멀리서 볼 땐 입체 작품처럼 보이기도 한다. 같은 날 만난 곽 작가는 “최근 물감을 쌓아가면서 화면을 구성하는 전통적 회화보다는 가볍고 단순한 회화를 추구했다. 그러다보니 ‘드로잉적인 회화’가 탄생했고, 이 작업은 기존 회화보다 더 자유스러움이 있다”고 말했다.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

중세 유럽의 여러 사료나 도상에 나오는 악마들은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머리에 뿔이 달렸고, 몸에 반점이나 줄이 가로로 그어져 있다. 이 때문인지 12, 13세기에 줄무늬 옷은 비하의 상징이 되기도 했다. 당시에 줄무늬 옷을 입는 이들은 집시나 죄수처럼 사회에서 배척받는 사람들이었다. 줄무늬 옷이 기본 아이템으로 여겨지는 현대사회에서는 이해하기 어렵지만, 당시엔 줄무늬 자체가 혼란을 야기하는 존재로 여겨졌다. 스위스 로잔대와 제네바대에서 초빙교수를 지내며 ‘중세 문장학의 대가’로 꼽히는 저자는 “중세인은 자연에서 줄무늬를 발견하는 게 굉장히 어려운 일이었기에 공포감과 혐오감을 느꼈다”고 설명한다. 무질서의 상징이던 줄무늬는 근대 유럽에서 새로운 지위를 얻는다. 가로 줄무늬가 아니라 세로 줄무늬가 등장하면서 신성로마제국을 중심으로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게 된다. 장 클루에(1486∼1540)의 그림 ‘프랑수아 1세의 초상’에서 보듯, 군주들마저 세로 줄무늬 옷을 입고 초상화 모델로 설 정도였다. 세로 줄무늬가 귀족적인 이미지를 보여주는 상징물이 됐다. 하지만 여전히 일부 계층의 상징이나 이국적인 이미지가 강했던 줄무늬는 미국으로 건너가 또 한번 변화를 맞는다. 직물이나 실내 장식으로 퍼지던 줄무늬는 독립혁명이 시작된 1775년을 기점으로 정치적 아이콘으로 떠오른다. 당시 미국인은 영국에 맞서며 13개의 식민지를 뜻하는 빨간색과 하얀색으로 이뤄진 가로 줄무늬 깃발을 만든 것이다. 이때부터 줄무늬는 자유주의 독립사상에 대한 지지를 표현하는 수단으로 등극했다. 전위적인 예술가들에겐 줄무늬가 도발적이면서도 불량스러운 이미지로 애용됐다. 괴짜였던 파블로 피카소(1881∼1973)는 위아래로 줄무늬 옷을 입은 모습을 자주 드러냈다. 프랑스 설치미술가 다니엘 뷔렌(84)도 줄무늬를 주제로 50년 가까이 활동하고 있다. 줄무늬라는 하나의 소재를 따라 천변만화하는 역사를 따라가다 보면, 줄을 긋는다는 하나의 행위가 어쩌면 가장 파격적인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사실에 놀라게 된다.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

서울 종로구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올해의 작가상’ 10년을 기념하는 전시 ‘올해의 작가상 10년 기록’이 28일부터 열린다. 이번 전시는 도록과 영상 아카이브 자료 등으로 이뤄진다. 2~3 전시실에서는 작가 선정과 심사 과정, 작가의 작업실 모습, 신작 제작 과정, 작가의 개별 인터뷰 등 10년간 축적된 영상 기록 자료를 펼쳐놨다. 4 전시실에서는 역대 발간된 ‘올해의 작가상’ 도록과 전시 자료들로 구성됐다. 올해의 경우 미술관은 ‘올해의 작가상’ 작가를 선정하지 않기로 했다. 내년에는 2월 ‘올해의 작가상’ 수상자를 발표하면서 그동안 지적된 문제점 등을 반영한 개선안을 내놓을 예정이다. 이제껏 후보작가 경쟁 체제로 진행되는 선정 방식에 대한 지적과 특정 장르에 선정 작가가 치우친다는 비판 등이 있었다. 전시는 내년 3월 26일까지. 올해의 작가상은 국립현대미술관이 1995년부터 2010년까지 개최한 ‘올해의 작가’ 전시에서 출발했다. 2012년부터는 SBS문화재단과 장기 후원협약을 맺고 4명의 후보작가 중 한 명을 최종 수상자로 선정하는 형태로 운영하고 있다.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