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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이 김학의 전 법무부 차관을 무혐의 처리했다. 김 전 차관은 건설업자 윤중천 씨로부터 성접대를 받는 과정에서 여성들을 특수강간한 혐의를 받았다. 앞서 경찰은 김 전 차관을 기소 의견으로 검찰에 송치했다. 그러나 검찰은 “김 전 차관 등을 고소한 여성들의 진술이 신빙성이 없고 증거가 불충분하다”며 무혐의 처리했다. 이에 대해 피해 여성 중 한 명이 검경 조사에서 진술한 내용을 언론에 공개하며 울분을 토로했다. 30대 초반의 여성 A 씨는 20대 중반에 알게 된 윤 씨의 강요로 김 전 차관과 성관계를 가졌다고 주장했다. A 씨는 “검찰이 조사 과정에서 성접대 여부는 거의 안 묻고 다른 피해자들과 말을 맞췄는지에 초점을 맞추더라”고 말했다. 물론 실체적 진실은 알 수 없는 상태다. 검찰은 A 씨가 고소한 내용보다 그가 윤 씨와 1년 반 이상 만남을 이어가며 경제적인 도움을 받으려 한 점을 집중 추궁한 것으로 보인다. 검찰은 윤 씨가 A 씨에게 성접대를 강요했다는 혐의도 인정하지 않았고 A 씨가 윤 씨로부터 원하던 도움을 받지 못하자 강간당했다고 무고했을 가능성에 무게를 둔 듯하다. A 씨는 검찰 조사에서 충분히 진술할 기회가 없었던 것이 속상해 담당 검사에게 강간 혐의에 대한 진술을 정리해 편지로 보냈다고 한다. 검찰은 처음부터 김 전 차관 수사에 적극적이지 않았다. 검찰은 경찰이 이 사건 수사에 착수한 3월 김 전 차관에 대한 경찰의 출국금지 신청을 기각했다. 김 전 차관이 세 차례 소환을 거부하자 경찰이 신청한 체포영장도 기각했다. 결국 김 전 차관은 병을 핑계로 병실에서 경찰 조사를 받았다. 피해 여성은 재정 신청에 호소할 의사를 밝혔다. 재정 신청을 하면 법원이 수사 자료와 증거물을 살펴보고 기소 여부를 판단한다. 검찰은 김 전 차관의 무혐의 처리가 뒤집히지 않을 것이라고 자신할 수 있는지 묻고 싶다.}

최근 조국 서울대 형법 교수의 버클리 캘리포니아대 로스쿨 박사학위 논문을 읽었다. 물론 계기는 일각에서 제기한 표절 의혹 때문이다. 논문은 위법수집 증거에 대해 미국을 중심으로 영국 독일 일본의 판례와 학설을 비교 분석한 것이다. 난 독일 편을 자세히 읽었는데 참고문헌과 각주에서 이상한 점들을 발견했다. 그가 인용한 독일어 문헌의 저자 중에 K. Rogal이란 이름이 있다. 문외한인 나는 인터넷을 뒤져 어렵게 그것이 클라우스 로갈(Klaus Rogall)임을 알아냈다. Rogal은 Rogall의 오기였다. 알고 보니 로갈은 위법증거 분야에서 꽤 알려진 학자였다. 그러나 조 교수는 논문에 다섯 군데 쓴 로갈을 모두 틀리게 썼다. 물론 실수로 Rogall을 Rogal로 쓸 수 있다. 이상한 것은 그가 독일어 문헌을 인용할 때는 극히 저명한 몇몇 학자를 빼고는 모두 뎅커(Dencker)처럼 성만 쓰거나 K. 로갈처럼 이름 부분을 이니셜로 처리하고 있다는 점이다. 저자명은 각주에는 줄여 쓰더라도 참고문헌에는 풀 네임(full name)을 밝혀주는 것이 올바른 표기다. 조 교수는 영어와 일본 문헌의 저자는 모두 풀 네임을 써주고 있다. 독일 학자도 독일어가 아니라 영어로 쓴 문헌을 인용한 때는 반드시 풀 네임을 쓰고 있다. 유독 독일어로 쓴 독일 학자만 각주에도 참고문헌에도 풀 네임이 나오지 않는다. 각주 중에 ‘Dencker, VERWER-TUNGSVERBOTE IM STRAFPR-OZESS 10(1977)’이란 부분이 있다. ‘뎅커의 1977년 저서 ‘형사소송에서의 사용금지’의 10쪽에서 인용’이란 뜻이다. 영어 논문에서 쪽 표시는 ‘at 10’처럼 쓴다. 조 교수도 쪽수 앞에 통상 ‘at’을 다는데 여기선 달지 않았다. 그럴 수 있다. 독일인은 쪽을 표시할 때 S.10이나 약식으로 그냥 10으로 쓴다. 독일 책이니까 그렇게 각주를 달 수 있다. 이상한 것은 참고문헌에는 저자, 책 이름, 발행연도만 쓰는데 이 책의 경우는 참고문헌에도 쪽수까지 함께 쓰여 있다는 점이다. 같은 실수가 ‘ERNST BELING, DEUTSCHES REICHSTRAFPRO-ZESSRECHT 32(1928)’에도 나타난다. 독일어 책이 아니라 독일어 논문의 경우 거의 대부분의 논문에서 이런 실수가 발견된다. 책을 읽을 때 참고문헌부터 보라는 얘기가 있다. 참고문헌을 보면 그 책의 수준이 드러난다. 참고문헌이 본문에 반영된 것이 각주다. 조 교수 논문의 각주와 참고문헌에는 여러 가지 오류가 있지만 여기선 체계적인 오류만 살펴봤다. 조 교수는 과거 표절에 관한 한 강연에서 ‘각주 절도’도 표절의 한 형태로 든 바 있다. 유독 독일어 문헌의 저서들에만 저자의 풀 네임이 없다는 것, 각주의 쪽수를 참고문헌에까지 그대로 옮긴 것은 조 교수가 직접 문헌을 보고 각주를 달았다면 일어나기 힘든 일이다. 조 교수의 논문을 읽으면서 이 논문의 독일 편도 실은 영어 문헌에 크게 의존해 작성됐다고 느꼈다. 조 교수의 독일어는 이 논문을 쓸 당시에도 불안하다. 영어로 쓰인 논문이므로 독일어를 많이 표기한 것도 아닌데 독일어 오기가 많다. 그런데도 그는 독일의 판례를 직접 독일어 원문을 보고 인용한 것처럼 쓰고 있다. 사실 이 점이 이 논문의 가장 심각한 문제다. 어느 나라든 판결문은 그 나라의 가장 어려운 문헌 중 하나다. 조 교수의 독일어 실력으로 독일 판결문을 직접 읽었다는 게 잘 믿기지 않는다. 조 교수는 학자다. 조 교수가 정치인이나 연예인이었다면 그의 논문에 관심도 갖지 않았을 것이다. 조 교수에 대해서는 변희재 씨 측으로부터 제기된 표절 의혹도 있다. 그 의혹에도 일리가 있다. 서울대 연구진실성위원회가 엄격하게 조 교수의 박사논문을 심사해 봤으면 한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정부는 어제 국무회의 의결과 영국을 방문하고 있는 박근혜 대통령의 원격 결재를 거쳐 통합진보당에 대한 정당해산 심판을 헌법재판소에 청구했다. 황교안 법무부 장관은 “통진당의 목적과 활동이 헌법의 민주적 기본 질서에 위배된다고 판단했다”고 밝혔다. 정당해산 심판 청구는 헌정 사상 처음 있는 일이다. 헌재는 앞으로 내릴 결정에 막중한 책임감을 느끼고 심판에 임해야 할 것이다. 통진당은 지난해 총선 비례대표 경선에서 부정이 드러나 당원 462명이 기소됐고 순차적으로 유죄 판결이 내려지고 있다. 올해 8월에는 부정 경선에 의해 국회 비례대표가 된 이석기 의원 등의 내란음모 혐의가 드러나 재판이 진행되고 있다. 이런 통진당이 2011년 12월 창당 이후 2년도 안 되는 기간에 정당보조금과 선거보조금으로 챙긴 돈이 100억여 원이다. 다수 국민이 납득할 수 없는 상황이다. 정당해산의 심사 기준은 정당의 목적과 활동이 민주적 기본 질서에 위배되는지 여부다. 헌재는 민주적 기본질서를 ‘모든 폭력적 자의적 지배를 배제하고, 다수의 의사와 자유 및 평등에 의거한 국민의 자기 결정을 토대로 하는 법치국가적 통치 질서’로 정의했다. 통진당 내에는 민주적 진보 세력이 남아있는 것으로 보기 어렵다. 통진당은 부정 경선을 폭로하고 비판한 세력과 갈라서는 과정에서 당 스스로 부정 경선을 막을 의지가 없는 정당임을 드러냈다. 이석기 의원의 RO(혁명 조직)는 일당(一黨) 일인(一人) 독재국가인 북한이 전쟁을 일으켰을 때 여기에 가담해 우리나라를 전복하려는 계획을 짰다. 이 정도면 통진당을 헌법의 테두리 안에 놓아둘지, 축출할지를 심판해볼 수 있는 충분한 근거가 된다고 본다. 민주적 기본질서에 위배되는 정당은 국가를 위협할 뿐 아니라 정당 제도의 발전을 가로막는다. 독일은 1952년 나치의 후신인 사회주의제국당과 1956년 독일공산당을 해산한 바 있다. 우리의 정당 제도는 정당이 민주적으로 운영되는 것을 전제로 한다. 우리나라가 비례대표제를 확대하려면 비민주적 정당은 해산할 수 있어야 한다. 헌재는 통진당 강령에만 매달리지 말고 실제 활동까지 포함해서 통진당의 실체를 파악해야 한다. 강령이 순화된 표현을 사용한다고 해서 실체가 강령과 같은 것은 아니다. 민주적 기본질서는 열린 사회를 지향하는 범위 내에서 자유민주주의에서 사회민주주의까지 다양한 체제와 정책을 허용한다. 다만 민주주의를 방어하기 위한 최소한의 제한으로, 열린 사회에 주어진 자유를 이용해 북한과 같은 닫힌 사회를 만들려는 정당은 허용하지 않는다. 헌재는 심판 청구일부터 180일 이내에 결정을 내리도록 되어 있지만 강제 규정은 아니다. 그러나 헌재 결정이 늦어질 경우 내년 6·4지방선거에서 통진당이 후보를 낼 수 있으므로 가능한 한 그 전에 결정해야 할 것이다. 정부는 통진당 해산심판 청구와 함께 정당 활동 정지 가처분 신청도 냈다. 해산 여부가 결정되기까지 시일이 걸리기 때문에 그 사이에 위헌적 정당 활동을 막으려는 조치다. 조만간 헌재의 가처분 결정이 내려질 것으로 전망된다. 통진당 해산 문제로 인한 국론 분열을 막으려면 제1야당인 민주당이 통진당과 분명하게 선을 긋는 자세를 보여야 한다.}
국가정보원 댓글 사건 특별수사팀장이었다가 직무에서 배제된 윤석열 여주지청장은 어제 국정감사에 출석해 국정원 직원 트위터 글 수사를 조영곤 서울중앙지검장에게 보고하고 진행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조 지검장은 보고가 아니라 통보였으며 결재도 하지 않았다고 반박했다. 누구 말이 맞는지를 떠나 수사팀장과 지검장이 얼굴을 붉히고 맞서는 부끄러운 모습이 요즘 검찰의 자화상이다. 둘의 증언을 종합해보면 수사팀이 압수수색이나 국정원 직원 체포, 공소장 변경을 하며 지휘부의 허가를 받지 않은 것은 사실로 보인다. 검사는 판사와 달리 독립기관이 아니다. 검찰청법에 따르면 검사는 모든 사무에 대해 소속 상급자의 지휘·감독을 따라야 하며 이견이 있을 때는 이의를 제기할 수 있을 뿐이다. 윤 지청장처럼 “(조 지검장을) 모시고 함께 사건을 끌고 나가기 어렵겠다”고 판단해 멋대로 일을 처리할 수는 없다. 그러나 새롭게 드러난 국정원의 트위터 퍼나르기는 노골적으로 특정 후보를 지지하거나 폄훼하는 내용이 많다. 이미 기소된 범죄의 입증에 결정적 증거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조 지검장이 ‘야당의 정치적 이용 가능성’이라는 이유를 들어 수사를 허가하지 않은 것도 이해하기 어렵다. 검찰총장 후보군인 조 지검장이 청와대나 법무부의 눈치를 봤다는 의심을 살 만하다. 검찰은 윤 지청장이 조 지검장의 결재를 받지 않고 법원에 신청한 공소장 변경을 철회하지는 않을 것으로 전해졌다. 윤 지청장을 직무에서 배제하긴 했지만 수사 결과까지 부인하긴 어렵다는 뜻으로 비친다. 검찰이 철회하지 않는 한 공소장 변경을 받아들일지는 법원이 결정한다. 다만 수사팀의 압수수색이나 체포가 국정원직원법이 규정한 국정원 통보 없이 이뤄진 것이어서 적법성 여부가 논란이 될 수 있다. 국정원의 심리전단 직원들은 지난해 대선 전 약 3개월간 트위터에 5만5689회의 정치적 글을 올린 새로운 혐의를 받고 있다. 기존 공소장에 나와 있는 인터넷 커뮤니티 댓글보다 15.1배나 많다. 국정원 직원들이 은밀한 곳에서 여론이나 조작하기 위해 공작을 벌였다면 명백한 정치적 중립 위반이고 치졸한 짓이다. 트위터 글은 팔로(follow)하는 사람에게만 전달된다. 문제가 된 인터넷 댓글이나 트위터 글이 선거 결과를 바꾸어 놓을 정도로 영향력이 컸다고 볼 수는 없다. 하지만 민주당 등 야권은 호재를 잡은 듯 공세를 강화하고 있다. 도와달라고 한 적도 없는데 도움 받은 꼴이 되고 있다는 청와대도 곤혹스러울 것이다. 여야는 이 문제를 정략적으로 다루기보다 국정원의 올바른 개혁 방향을 찾는 데 뜻을 모을 때다.}
검찰이 어제 국가정보원 정치·선거 개입 의혹 특별수사팀장인 윤석열 여주지청장을 수사팀에서 배제했다. 야당은 국정원 수사 과정에서 채동욱 전 검찰총장에 이은 ‘제2의 찍어내기’라며 반발하고 있다. 검찰은 전날 윤 팀장이 검찰 상부에 대한 보고와 국정원에 대한 통보 없이 국정원 직원들을 체포하고 압수수색을 실시해 문책성으로 직무 배제를 했다고 밝혔다. 윤 팀장은 국정원 직원 4명의 주거지에 대한 압수수색 영장과 이들 중 3명에 대한 체포영장을 팀장 전결로 처리했다. 이에 대해 조영곤 서울중앙지검장이 “정상적인 결재 라인을 거치지 않았다”는 이유로 직무 배제 결정을 내린 것으로 알려졌다. 윤 팀장은 연가(年暇)를 내는 것으로 항의의 뜻을 표시했다. 국정원법은 수사기관이 직원에 대해 수사를 시작한 때와 종료한 때에는 지체 없이 국정원장에게 그 사실과 결과를 통보하도록 하고 있다. 국정원 직원들은 트위터에 정치·선거 관련 글을 올린 혐의를 받고 있었다. 트위터를 통한 개입은 본래 공소장에는 없던 내용이다. 윤 팀장은 상부에 알리면 압수수색이나 체포를 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그렇더라도 검사는 계통을 밟아 수사하고 부당한 지시가 있을 경우 이의를 제기해야지, 독단적으로 처리해서는 안 된다. 검찰은 기관 통보 절차를 거치지 않았다는 국정원 측 항의를 받아들여 검찰 직원 3명을 당일 조사한 뒤 귀가시켰다. 국민적 관심이 집중된 수사 중에는 웬만한 이유로는 수사팀장을 바꿔서는 안 된다. 그렇지 않아도 채 전 총장이 국정원 수사를 하다 청와대에 밉보여 혼외자(婚外子) 문제로 낙마했다는 의혹이 가시지 않고 있다. 이번 일도 원세훈 전 국정원장에 대한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 적용을 둘러싸고 채 전 총장과 수사팀, 황교안 법무부 장관과 청와대 민정수석비서관실 사이에 빚어졌던 갈등의 연장선에 있다. 새로운 혐의가 드러난 마당에 이번 직무 배제로 불필요한 의혹이 더 커질 수밖에 없다. 원 전 원장은 법원에 기소돼 있지만 트위터를 통한 선거 개입은 새로운 혐의다. 검찰이 청와대 눈치를 보느라 수사팀의 수사를 방해한다는 의심을 받지 않도록 모든 것을 명확히 밝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검찰의 수사 결과에 대한 불신이 커지고 검찰도 ‘정치 검찰’의 오명을 뒤집어쓸 수 있다.[바로잡습니다]◇19일자 A27면 ‘검찰, 국정원…’ 제하의 사설 중 국정원 측 항의로 풀어준 사람은 ‘검찰 직원 3명’이 아니라 ‘국정원 직원 3명’입니다.}

한겨레신문의 첫 교학사 한국사 교과서 비판 기사를 보자. “교학사 교과서는 ‘연합국은 카이로선언(1943)으로 일본에게 항복을 요구하였으나’라고 했는데 여기서 카이로선언은 포츠담선언을 잘못 썼다”는 내용으로 시작한다. 역사문제연구소 등이 던져준 약 300건의 비판거리 중 이것이 가장 화끈하다고 여긴 모양이다. 그러나 오류라고 주장한 바로 그 주장이 오류다. 카이로선언에는 ‘unconditional surrender of Japan(일본의 무조건적 항복)’이란 말이 들어 있다. 포츠담선언은 그 선언을 재확인했을 뿐이다. 이 신문은 또 “일제는 1912년 토지조사령에 이어 조선민사령 부동산등기령 등을 반포해 토지조사사업을 추진했다”는 내용을 문제 삼으면서 조선민사령과 부동산등기령은 토지조사사업을 수행하기 위해 시행된 법령이 아니라고 비판했다. 그렇지 않다. 오늘날 민법과 부동산등기법에 해당하는 조선민사령과 부동산등기령은 토지조사를 위해 절대 필요한 법령이었다. 다만 토지조사령(8월)과 조선민사령 부동산등기령(3월)의 선후 관계가 교과서에 잘못 기재돼 있다. 이 신문의 다음 날 사설은 교과서의 대표적 오류로 “3·1운동 직후 일본이 한국인에게 한국어를 필수과목으로 배우게 했다”는 내용을 꼽았다. 교과서가 부속자료로 소개한 ‘(일제) 2차 조선교육령’에 ‘한국인에게 한국어 필수화’라고 쓴 부분을 언급한 것이다. ‘필수화’의 ‘화’라는 표현이 틀렸다. 한국어는 1차 조선교육령 때부터 필수였고 2차 조선교육령에서도 필수였으며 3차 조선교육령이 반포된 1938년까지 계속 필수로 남아 있었다. 2차 교육령에서 교육 시수(時數)가 줄긴 했지만 3·1운동 직후에도 일본은 한국인에게 한국어를 필수과목으로 배우게 했다. 교학사 교과서 비판에는 악의적인 비판도 많다. 그러나 정밀하지 못한 기술이 비판을 자초한 것도 사실이다. 트집 잡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눈에 불을 켜고 있는데 이렇게 트집 잡힐 교과서를 써내다니 집필자들도 한심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고도 수정 기한 내에 각고의 정신으로 완벽한 교과서를 만들려고 노력하기보다는 토론이나 강연에 참석해 자기변명을 하기에 바쁘다. 마음 같아서는 교학사 교과서는 없던 것으로 하고 새 교과서 프로젝트를 기대하고 싶다. 그러나 지금 상황이 그렇게 한가하지 않다. 기존 한국사 교과서는 모두, 그것으로 한국사를 배우면 배울수록 한국이 부끄럽게 여겨지는 교과서다. 올해 수능에서 한국사 선택비율이 10% 미만으로 떨어질 것으로 예상되는데 그게 오히려 다행스럽게 생각될 정도다. 이런 실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박근혜 대통령은 한국사를 수능 필수화하기로 했다. 교학사 교과서에 대한 융탄폭격적 비판에서 한국 현대 사학계 내 수정주의 진영의 헤게모니가 얼마나 확고한지 드러났다. 국민의 역사적 경험과 일치하는 상식적 교과서를 하나 끼워 넣는 작업이 이렇게 어렵다. 한국사 수능 필수화가 독이 든 사과임을 박 대통령도 이제는 깨달았기 바란다. 기존 교과서를 학교에서 필수로 배우는 것만으로도 해악은 충분히 크다. 그것을 달달 외워서 시험까지 보고 대학에 들어가라니 제정신인가. 기존 교과서가 문제 있다고 해서 하는 말만은 아니다. 역사라는 것이 많은 시간을 들여 공부하지 않으면 맥락조차 알기 어려운 과목이다. 그 분야에 흥미와 재능을 가진 학생들이 공부해 시험을 보면 된다. 나머지는 학교에서 필수로 배우는 것으로 족하다. 문이과 예체능계를 막론하고 국사를 필수로 시험 봐서 대학에 들어가야 하는 나라가 선진국 어디에 있는지 묻고 싶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문재인 민주당 의원은 2007년 남북정상회담 대화록이 국가기록원에 이관되지 않았다는 검찰 중간수사 결과 발표와 관련해 4일 “지금까지 확인된 것은 한마디로 대화록은 있고 NLL(북방한계선) 포기는 없었던 것 아닌가”라고 말했다. 대화록이 국가기록원이 아니라 봉하 이지원에 남아 있는 사실을 놓고 대화록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황당한 궤변이다. 봉하 이지원은 그 자체가 불법이다. 대통령기록물의 소유권은 국가에 있으며 국가가 관리한다. 그럼에도 노무현 전 대통령은 퇴임 시 청와대 이지원을 복사해 봉하마을 사저로 가져갔다. 노 전 대통령 측은 이명박 정부의 반납 요구에도 응하지 않다가 불법 논란이 확산되자 마지못해 돌려줬다. 문 의원의 말은 마치 도둑이 훔친 보석이 도둑의 집에 있는데 무슨 문제냐고 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대화록이 마땅히 있어야 할 곳은 국가기록원이라는 사실을 문 의원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국정원이 대화록을 공개하자 그 내용에 의혹을 제기하며 국가기록원에 있는 대화록을 보자고 주장한 사람도 다름 아닌 문 의원 아닌가. 그러나 대화록이 아예 국가기록원으로 이관되지도 않은 사실이 검찰 수사 결과 드러났다. 그는 2007년 3월부터 노 전 대통령이 퇴임한 2008년 2월까지 대통령비서실장이었으며 정상회담 준비위원장이었다. 그런 사람이 이제 와서 ‘어쨌든 대화록은 있다’는 식으로 말하는 것은 책임 회피일 뿐이다. 문 의원은 국가기록원 대화록과 관련 부속 서류를 함께 보자고 제의할 때 “열람 결과 NLL 포기 발언이 사실로 드러난다면 정치를 그만두겠다”고 말했다. 정계 은퇴의 전제는 대화록의 내용이지 대화록 존재 여부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 대화록의 내용이란 것도 직접 ‘포기’라는 말만 쓰지 않았을 뿐 국민의 동의도 구하지 않은 평화수역이란 기만적인 구상으로 사실상 NLL 포기 의사를 밝힌 것이나 다름없다. 노 전 대통령이 없는 지금 문 의원은 노 전 대통령의 대리인 혹은 친노 세력의 대표자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사람이 책임지려는 자세를 보이기는커녕 이치에 닿지 않는 말로 궁지에서 벗어날 구실만 찾아서는 안 된다. 그러기엔 문 의원 본인이 그동안 잘못한 말이 너무 많다.}
법무부가 채동욱 검찰총장에 대한 진상 규명 결과를 발표하고 채 총장의 사표 수리를 청와대에 건의했다. 청와대가 15일 채 총장의 사표를 수리하지 않고 감찰을 계속하겠다고 밝힌 지 12일 만이다. 법무부가 발표한 진상조사 결과에서 새로운 내용은 채 총장이 대전고검장으로 재직하던 2010년 채 총장 혼외자(婚外子) 의혹을 받는 아이의 어머니 임모 씨가 그의 집무실을 방문해 대면 요청을 했다가 거절당했다는 사실밖에 없다. 나머지는 그동안 언론이 제기한 의혹들을 확인한 것뿐이다. 법무부가 발표한 새로운 사실이 혼외자 의혹의 결정적 증거라고 볼 순 없지만 의혹에 의혹을 더한 것만은 틀림없다. 법무부는 감찰의 사전 단계인 진상 규명에서 “의혹을 사실로 볼 만한 정황을 다수 확보했다”고 밝히면서도 감찰에 들어가지는 않고 청와대에 사표 수리를 건의했다. 청와대는 진실이 밝혀질 때까지 사표 수리를 안 한다고 해놓고는 사표 수리 수순으로 가고 있다. 정황증거를 사표 수리의 명분으로 삼겠다는 것으로 보인다. 애초부터 법무부의 진상조사나 감찰을 통해 혼외자 의혹을 최종적으로 확인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럼에도 검찰의 조속한 안정을 위해 사표 수리는 불가피한 것으로 보인다. 채 총장의 사표가 수리되면 그는 사의 표명 당시 원했던 대로 공인(公人)에서 사인(私人)으로 돌아간다. 사인이 된다고 해서 검찰총장까지 지낸 사람이 자기 방어를 위해 거짓말을 해도 괜찮다는 뜻은 아니다. 정말 떳떳하다면 적극적으로 임 씨와 아이를 설득해 유전자 검사로 결백을 입증해야 한다. 그것이 검찰총장의 혼외자 의혹으로 충격을 받은 국민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다. 청와대와 법무부는 이제 새로운 총장감을 물색해 조속히 검찰을 안정시켜야 한다. 검찰총장 추천위원회 구성에서 국회 임명 동의 절차까지 두 달은 걸린다. 북방한계선(NLL) 대화록 실종, 국정원 댓글, 이석기 의원 내란음모 사건 등 검찰이 처리해야 할 중요한 현안이 산적해 있다. 연고나 이념을 떠나 검찰 조직 내에서 두루 신망이 높고 윤리적으로도 문제가 없는 인물을 찾아내야 할 것이다.[바로잡습니다]◇본보 9월 28일자 A27면 채동욱 검찰총장 관련 사설에서 ‘채 총장이 서울고검장으로 재직하던 2010년’은 ‘채 총장이 대전고검장으로 재직하던 2010년’이 맞습니다.}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의장이자 제주교구장인 강우일 주교는 최근 국가정보원 규탄 시국 선언에 나선 사제들의 움직임을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라고 말했다. 국정원이 민주주의를 어느 정도 훼손했는지는 격렬한 정치적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러나 주교가 국정원 규탄을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라고 말하면 그 발언은 사제와 신자에게 의견이 아니라 명령이 된다. 자신의 신념이 틀릴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세속화한 근대 시민의 사고방식이다. 그러나 종교적 신념은 그렇지 않다. 그래서 현실정치에 종교적 신념이 개입하면 위험하다. 교회는 교회 일에나 신경 쓰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교회가 세속의 한가운데 존재하는 이상 불가피하게 속세의 권력과 싸워야 할 때가 있다. 현대 가톨릭의 역사만 봐도 프랑스 교회는 국가 권력으로부터 종교 사학(私學)의 자율성을 지키기 위해 싸웠고 지금도 싸우고 있다. 오늘날 가톨릭 교회는 근대적 자유가 낳은 생명 경시 풍조, 즉 낙태 같은 문제에 경종을 울리고 있다. 하지만 민주주의로 말하자면 천주교는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멀다. 주교급 이상이 모이는 자리에 가보면 한국의 모든 주교보다도 높은 신부가 한 명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랄 것이다. 바로 주한 교황청 대사다. 그는 아무리 젊어도 나이든 한국 주교들을 아랫사람 대하듯 한다. 주교 임명 제청권을 갖고 총독처럼 군림하는 주한 교황청 대사, 교황을 정점으로 하는 수직적 위계질서를 가진 천주교의 모습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교회는 제 생긴 모습을 보고 남 얘기를 해야 하는 법이다. 교회는 오히려 민주주의의 반대편에 섬으로써 정의를 수호하기도 한다. 다수의 결정이 파괴할 수 있는 소수의 인권을 보호하는 것이 민주주의 사회에서 교회에 주어진 중요한 사명 중 하나다. 천주교 사제든 신자든 시민사회의 일원으로 정치적 의사를 표시하는 것이야 누가 말리겠는가. 그러나 교회의 힘을 빌려 사제들의 이름으로 이뤄지는 시국선언은 아무리 선의라 하더라도 종교와 정치의 긴장을 깰 수 있는 위험한 일이다. 군사 독재 시절 교회가 민주주의의 소도(蘇塗) 같은 역할을 하던 때가 있었다. 1987년 민주화 이후 정당이 제 기능을 찾고 시민단체들이 생겨나면서 교회는 더이상 그런 역할을 맡을 필요가 없어졌다. 군사 독재 시절 정의구현사제단의 역할을 높이 사면서도 오늘날 그 집단이 점점 더 시대착오적이라고 여겨지는 것은 교회를 둘러싼 정치 환경이 변한 줄 모르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정의구현사제단의 함세웅 신부가 얼마 전 천막농성 중인 김한길 민주당 대표를 방문해 “지난 대선은 원천 무효”라고 말했다. 대선 불복이라는 비판을 받을까 전전긍긍하는 김 대표를 순간 당황하게 만든 발언이었다. 함 신부를 볼 때마다 거추장스러운 신부의 옷을 벗고 차라리 정치인이 되는 것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냥 민주주의라고 말하면 될 것을 민주주의와 친하지도 않은 성부나 성자나 성령을 들먹이면서 정의 운운하는 것은 우습지 않은가. 전임 보수파 교황들과는 뭔가 다르다는 프란시스코 1세의 최근 강론 중 ‘훌륭한 가톨릭 신자는 정치에 개입한다’는 발언이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 회자되고 있다. 그러나 이 강론의 내용을 끝까지 읽어 보면 그 정치 개입이라는 것은 정치가들을 규탄하는 것이 아니라 비록 그들이 사악한 정치인이라 하더라도 좋은 통치를 할 수 있도록 기도하는 것이다. 기도는 최고의 정치 개입이라는 것, 이것이 강론의 결론이다. 국정원 규탄 시국선언에 참여한 사제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교황의 말씀이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채동욱 검찰총장이 어제 ‘혼외자(婚外子)’ 의혹을 제기한 조선일보를 상대로 정정 보도 청구소송을 냈다. 조선일보의 최초 보도 이후 18일 만이고, 조선일보가 정정 보도를 거부한 지 15일 만이다. 채 총장의 소송 제기는 늦었지만 의혹을 해소하기 위한 첫걸음이라고 본다. 채 총장은 “법 절차에 따라 유전자(DNA) 검사를 포함한 모든 노력을 기울여 신속히 진실이 규명되도록 할 것”이라며 조선일보가 지목한 혼외자와 그 어머니 임모 씨 측에도 이른 시일 내에 유전자 검사에 응해줄 것을 부탁했다. 유전자 검사는 진실을 정확하게 밝히는 유일한 방법이다. 그러나 유전자 검사는 소송으로도 강제할 수 없고, 임 씨가 아이의 법률 대리인으로서 동의해야 가능하다. 임 씨는 언론사에 보낸 편지에서 아이가 채 총장의 아이로 알려지기까지 자신의 책임을 인정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유전자 검사에 적극 협조해 채 총장이 받고 있는 의혹을 해소하는 것이 도리다. 채 총장의 소송 제기가 일종의 지연책이 아니기를 바란다. 정정 보도 청구소송은 판결이 나는 데까지 1년 정도가 걸린다. 채 총장의 소송은 시간이 경과해 국민의 관심이 사라지기를 기다리는 것일 뿐, 임 씨가 유전자 검사에 동의하지 않아 진실을 가리지 못한 채 끝날 것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다. 검찰총장까지 지낸 사람으로서 소송에서도 진정한 진상 규명 의지를 보여야 한다. 채 총장은 어제 사퇴 의사를 다시 밝혔다. 청와대와 법무부는 야권이 채 총장의 사퇴에 정치적 의혹을 제기하자 채 총장의 사표를 반려하고 진상 조사를 벌이고 있다. 그러나 진상 조사에는 강제 수사권이 없어 의혹을 근원적으로 해소하기 어렵다. 채 총장의 말처럼 이미 논란이 지나치게 확산돼 설령 그가 억울한 것으로 밝혀진다고 해도 검찰총장으로 복귀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렵다. 채 총장이 의혹 해소를 위한 소송을 제기한 이상 정부는 이쯤에서 진상 조사를 접고 채 총장의 사표를 수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검찰총장의 부재(不在) 상태가 장기화하는 것은 피해야 한다. 지금 당장 추천위원회를 가동해 검찰총장 후보를 뽑고 국회의 청문 절차를 거쳐 정식 임명한다고 해도 두 달이 넘게 걸린다. 이석기 내란음모 사건, 북방한계선(NLL) 대화록 사건 등 국가적으로 중요한 수사가 여러 건 동시에 진행되고 있다. 청와대는 서둘러 검찰 조직을 안정시키고 정상화해야 한다.}

일본의 근대화는 남쪽에서 들고일어나 중앙의 에도(江戶·현재의 도쿄) 막부를 타도한 뒤 이뤄진 것이다. 막부 타도에 앞장선 것은 조슈(長州) 번과 사쓰마(薩摩) 번. 조슈 번은 혼슈(本州)의 최남단으로 야마구치(山口) 현 일대다. 사쓰마 번은 규슈(九州)의 가고시마(鹿兒島) 현 일대다. 일본 근대화의 유산도 규슈와 야마구치 현에 많이 퍼져 있다. 일본 정부는 규슈와 야마구치 현의 근대화 산업유산 28개를 묶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추천하기로 결정했다. ▷이 가운데 야하타(八幡) 제철소와 나가사키(長崎) 조선소가 가장 유명하다. 일본 역사교과서에도 메이지(明治) 시대의 대표적 공업시설로 거론된다. 야하타 제철소는 신일본제철에 의해, 나가사키 조선소는 미쓰비시(三菱) 중공업에 의해 현재도 가동되고 있다. 나가사키 항 남서쪽의 인공섬 하시마(端島)에는 해저 석탄을 캐는 탄광이 있었다. 나가사키 조선소와 함께 미쓰비시의 소유였다. ▷나가사키 조선소와 하시마 탄광은 징용으로 끌려간 우리 국민의 아픔이 서린 곳이다. 나가사키 조선소에는 태평양전쟁 당시 한국인 4700여 명이 징용돼 군함을 건조했다. 이 중 1600명은 1945년 8월 원폭 투하 때 숨졌다. ‘감옥섬’으로 불리던 하시마 탄광에서는 해저 1000m까지 내려가는 갱도에서 하루 12시간씩 강제노동을 했다. 견디지 못해 탈출하다 익사한 사람을 포함해 한국인 122명이 사망했다. 한국 외교부는 일본 정부에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기리는 세계문화유산으로 적절하지 않다’는 뜻을 전달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일본은 규슈·야마구치 현의 근대화 산업유산군을 세계문화유산으로 추천하면서 ‘비(非)서양세계에서 근대화의 선구’라는 슬로건을 내걸었다. 서양의 근대화에도 자본가에 의한 노동자의 착취라는 어두운 면이 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국민 사이의 일이다. 일본의 근대화에는 일본인에 의한 한국인과 중국인 착취라는 어두운 면이 있다. 일본은 이웃 국가에 끼친 고통에 대해 한마디라도 반성하는 모습을 보였어야 한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술집 여주인 Y 씨와 사이에 혼외(婚外) 자식이 있다는 의혹이 제기된 채동욱 검찰총장이 전격 사퇴했다. 어제 법무부가 채 총장에 대한 감찰에 착수했다고 밝힌 직후다. 채 총장은 부산에서 근무하던 시절 만난 Y 씨와의 사이에 아이가 있다는 보도가 나온 이후에도 ‘사실무근’임을 강조하며 완강하게 버텼지만 법무부가 감찰 착수를 발표한 지 1시간 만에 사의를 표명했다. 그는 물러나면서도 혼외 자식에 대한 보도는 사실무근임을 거듭 주장했다. 법무부는 “국가의 중요한 사정기관 책임자에 대한 도덕성 논란이 지속되는 것은 검찰에 대한 국민 신뢰에 심대한 영향을 미치는 중대한 사안”이라고 감찰 착수 배경을 밝혔다. 법무부가 채 총장에게 혼외 아들이 있다는 조선일보의 보도 이후 논란이 1주일가량 지속됐음에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다가 박근혜 대통령이 귀국한 지 이틀 만에 감찰 착수를 발표하자 채 총장은 물러나라는 뜻으로 받아들인 듯하다. 그가 자리에 계속 있더라도 ‘식물 검찰총장’이 되기 쉬웠을 것이다. 채 총장은 설혹 혼외 자식이 없다고 하더라도 지금까지 드러난 사실만으로도 감찰 대상에 해당한다. 채 총장과 알고 지낸 Y 씨는 언론사에 보낸 편지에서 채 총장이 자기 아이의 아버지임을 부인했다. 그러나 채 총장이 1999년 부산지검 동부지청 검사로 있던 시절부터 오랜 기간 알고 지냈으며 아이 학적부에 아버지 이름을 ‘채동욱’이라고 올리고, 자기 식구들에게까지 채 총장이 아이 아버지라고 말했다고 밝혔다. 채 총장도 부인하지 않았다. 검찰총장이 이런 논란에 휩싸여 있으면 정상적인 업무 수행이 어렵고 검찰 조직도 흔들릴 수밖에 없다. 법무부가 감찰 착수를 발표하기 하루 전에 채 총장은 조선일보를 상대로 정정보도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소송과는 별도로 유전자 검사 실시도 추진하겠다고 밝혔으나 신속한 의혹 해소로 이어질지는 불투명했다. 유전자 검사는 Y 씨가 동의해야 할 수 있기 때문에 채 총장의 의지만으로는 안 된다. Y 씨가 동의하더라도 현재 아들이 미국 체류 중이어서 언제 성사될지도 알 수 없었다. 그동안 청와대는 국가정보원의 댓글 수사 등과 관련해 채 총장과 갈등을 빚는 분위기였다. 특히 원세훈 전 국정원장에게 선거법 위반 혐의가 적용되자 청와대의 분노가 컸다고 한다. 야권은 이를 박근혜 대통령의 정당성을 공격하는 빌미로 삼고 있다. 얼마 전 청와대 개편 인사 때 경질됐던 곽상도 민정수석비서관에 대해서도 검찰을 장악하지 못한 책임을 물은 것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야당은 법무부의 감찰 착수에 대해 “채 총장의 사퇴를 강요하기 위한 정치적 압박”이라고 공격하고 있다. 채 총장이 법무부의 감찰 착수에 즉각 사의를 표명한 것은 직전의 강경한 태도에 비추어 떳떳해 보이지 않는다. 채 총장은 사의 표명으로 공직자에서 민간인 신분으로 돌아갔다. 사인(私人)인 그에게 혼외 자식의 진실을 밝히라고 요구하는 것이 어려워졌다. 그는 사퇴문에서 정정보도 청구 소송이나 유전자 검사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혼외 자식 논란도 유야무야될 가능성이 없지 않다. 그러나 국민적 관심 속에서 진실 공방이 벌어졌던 이 사건이 흐지부지 끝난다면 허망하다. 만약 검찰총장의 자리에까지 오른 사람이 언론의 보도 내용이 사실인데도 언론사가 결정적 증거를 갖고 있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에 부인했다면 뻔뻔스러운 처신이다. 또한 언론사는 정황 증거만으로 혼외 자식이 있다는 단정적인 보도를 했다면 무책임하다. 채 총장은 사퇴문에서 ‘근거 없는 의혹 제기로 공직자의 양심적인 직무 수행을 어렵게 하는 일이 되풀이되지 않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그가 진정 진실 규명을 원한다면 국민에게 약속했던 정정보도 청구 소송과 유전자 검사를 계속 진행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옳다. 그러지 않으면 사람들은 그가 거짓말을 한 것으로 여길 수밖에 없다. 그는 총장추천위원회를 거친 최초의 검찰총장이다. 이명박 청와대의 인사 검증과 국회의 인사청문회도 거쳤다. 그럼에도 Y 씨는 어떤 검증에서도 드러나지 않았다. 박 대통령은 이명박 정권의 법무부가 추천한 총장 후보를 처음부터 마뜩하지 않게 여겼다는 말이 나오고 있다. 청와대가 새 총장으로 정권의 검찰 장악력을 높일 수 있는 인물을 고를 것이라는 예측도 있다. 그러나 검찰은 정권으로부터 독립적이어야 한다. 청와대는 검증 시스템의 강화와 함께 신망이 높은 검찰총장을 임명해 흐트러진 검찰 조직을 안정시켜야 한다.}

정지영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 ‘천안함 프로젝트’는 천안함 사건의 민군합동조사위원회 결론에 의문을 제기한 영화다. 백낙청 씨의 창비가 낸 책 ‘천안함을 묻는다’의 영화판이라고나 할까. 개봉 첫날인 5일과 이튿날인 6일 164회 상영에 2550명이 봤다. 한 회 15.5명꼴. 메가박스가 7일부터 자신의 영화관에서 상영을 중단하면서 관객은 다시 그 절반 수준으로 줄었다. ▷메가박스는 이틀 만의 상영 중단 이유를 기대 이하의 관객수가 아니라 ‘일부 단체의 항의와 시위 예고로 관객의 안전을 보호할 수 없어서’라고 밝혔다. 영화 상영 지지 측과 반대 측은 모두 메가박스가 밝힌 이유가 못마땅하다는 눈치다. 지지 측은 영화관이 위협을 느꼈다면 일단 경찰에 신고부터 하는 것이 순서인데 경찰에 보호 요청도 하지 않고 돌연 상영을 중단한 것은 납득할 수 없다는 반응이다. 메가박스가 ‘높은 곳’에서 모종의 압력을 받았다는 의혹까지 제기하고 있다. 반대 측은 영화관이 수지타산을 맞출 수 없어 상영을 중단하고도 외부 압력을 핑계 삼는 바람에 불필요한 논란을 빚고 있다고 주장한다. ▷‘천안함 프로젝트’ 상영에 앞서 천안함 사고 유족은 상영금지 가처분 신청을 냈다. 법원은 표현의 자유를 이유로 기각했다. 논란의 여지가 없는 결정이다. 그렇다고 법원의 결정이 이 영화의 상영이 우리 사회에 유해하다고 보는 사람들의 시위나 항의까지 금지한 것은 아니다. 다만 시위와 항의를 넘어서는 위협을 했다면 협박이 된다. 그런 위협이 있었다면 메가박스는 공개하는 것이 옳다. ▷메가박스 CJ 롯데시네마를 국내 3대 영화배급사라고 부른다. ‘천안함 프로젝트’는 영화 상영 전부터 사회적 논란으로 화제가 된 작품인데도 CJ와 롯데시네마는 상영을 하지 않기로 했다. 수익성이 없다고 봤기 때문이다. 메가박스만 수익성 판단을 잘못했을 가능성이 크다. 메가박스 같은 상업적인 영화배급사가 한 회 20명도 안 드는 영화를, 예상치 못한 사고로 이어질 수 있는 시위까지 감수하며 상영하리라는 기대는 애당초 무리 아닌가.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프랑스어 사보타주(sabotage)는 우리나라에서 흔히 노동자의 태업(怠業)으로 번역된다. 그러나 사보타주는 태업과 다르다. 내가 사보타주란 말이 실제로 어떻게 쓰이는지 알게 된 것은 프랑스 특파원 시절 TV에서 TGV 선로를 누군가 훼손해 열차 탈선의 위험을 초래했다는 뉴스를 봤을 때다. 뉴스는 일부 극좌적인 철도 노조원의 반발이 여론의 지지를 받기 어려운 사보타주에까지 이르렀다고 비판했다. 사보타주는 시설 파괴행위다. 태업은 프랑스어로 그레브 페를레(gr`eve perl´ee), 영어로 슬로다운(slowdown)이라고 한다. 사보타주를 하기 위해서는 산업의 구조나 설비를 잘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그래서 사보타주는 애초 노동자들의 저항 수단으로 발전했다. 그러나 사보타주 같은 과격한 수단은 일상적 노동쟁의에서는 잘 쓰지 않는다. 노동운동이 혁명의 성격을 띠고 군사적으로 전화(轉化)할 때 주로 나타난다. 우리나라도 해방 정국에서 이런 사보타주가 종종 있었다. 남로당이 배후에서 조종한 사보타주였다. 6·25전쟁이 끝난 뒤 남로당 세력이 사라지고 사보타주란 말도 언론에서 거의 보기 힘들어졌다. 그런데 통합진보당 이석기 의원이 국가시설 파괴를 모의했다는 소식을 듣고 떠오른 말이 사보타주다. 국가정보원에 따르면 이 의원 측 지하조직이 파괴 목표로 삼았다는 통신시설 중에 KT 혜화지사가 포함돼 있다. KT 혜화지사가 서울 곳곳에 있는 다른 KT 지사와 어떤 차이가 있는지 통신 소비자들로서는 잘 알 수 없다. 나도 처음 알았지만 KT 혜화지사는 인터넷이 해외로 연결되는 관문과 같은 곳이라고 한다. 이곳이 타격을 입으면 원활한 인터넷 이용이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 이 의원 측 지하조직은 또 경기 평택물류기지도 파괴 목표로 삼았다고 한다. 우리가 석유와 가스를 사용하고 있지만 이게 어디서부터 어떻게 들어오는지는 잘 모르고 알 필요도 느끼지 않는다. 평택물류기지는 수도권에 석유와 가스를 공급하는 주요 물류기지라고 한다. 철도에 대한 사보타주는 사보타주의 전형과 같은 것이어서 누구나 금방 상상할 수 있다. 그러나 철도의 어느 지점을 타격할 것인지는 그 분야에 대한 전문성을 필요로 한다. KT 혜화지사와 평택물류기지는 통신과 물류 산업을 잘 알지 못하면 특정하기 어려운 곳이다. 사보타주는 테러와 다르다. 사보타주의 1차적 목표는 인명 손상이 아니라 시설 파괴다. 시설 파괴 과정에서 인명이 손상되기도 하겠지만 기본적으로는 시설 파괴를 통해 사회 혼란을 부추기는 것이다. 유럽 국가에서 사보타주는 허무주의적인 극좌파 노동운동가나 철없는 환경원리주의자들이나 저지르는 짓으로 여겨진다. 사보타주를 위한 사보타주는 의미가 없다. 그러나 우리나라처럼 적성국인 북한과 대치하는 나라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북한은 지금 당장 전쟁을 일으킬 처지나 상황에 있지 않다 하더라도 전시를 위한 작전계획은 갖고 있고 그것을 끊임없이 수정한다. 그 주변 계획에는 남한에서의 사보타주 계획도 들어 있을 것이다. 사보타주 계획도 당장 실행에 옮기는지 여부와 상관없이 상황 변화에 맞춰 계속 고쳐야 할 것이다. 누군가는 북한을 위해 그런 작업을 남한에서 하고 있을 것이라고 충분히 추정할 수 있다. 나로서는 국정원의 이 의원 측에 대한 혐의가 이 의원 주장대로 국정원의 상상력에 의한 날조인지 어떤지 현재로선 판단할 능력이나 정보가 없다. 어느 쪽이 맞는지는 조금 더 지켜봐야 할 것이다. 그러나 누군가가 국회의 정보력을 이용해 국가 시스템을 체계적으로 분석하고 혼란을 극대화할 수 있는 목표를 골라낸 후 그 목표들을 파괴할 실행 계획을 짠다는 것은 그것이 설혹 상상이라 하더라도 섬뜩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북한을 추종하는 세력이 어느 때보다 깊숙이 여러 산업 부문과 국가기관에 침투해 있는 지금, 우리가 잊고 있었던 위험을 환기시켜 줬다고나 할까.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경남 합천 해인사, 경남 양산 통도사, 전남 순천 송광사를 3보(三寶) 사찰이라 부른다. 이 중 해인사는 부처님 말씀인 팔만대장경을 보관하고 있다고 해서 불(佛) 법(法) 승(僧) 3보 중 법보 사찰이라고 한다. 팔만대장경은 고려 때 몽고의 침략을 받아 강화도에 천도하고 있던 무신 정권이 강화도 선원사에 도감(都監)을 설치하고 만든 것이라고 교과서에 나온다. 그러나 대장도감은 인천 강화도가 아니라 경남 남해에 있었다는 증거가 새로 제시됐다. ▷기존 강화 제작설은 ‘조선 태조가 강화 선원사에서 옮겨온 대장경을 보러 용산강에 행차했다’는 태조실록의 기록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선원사는 1245년에 창건됐고 이때는 대장경 판각이 90% 이상 완료된 시점이라 강화 제작설은 의심을 받았다. 이후 강화 선원사에 대장도감을, 남해에 분사(分司) 대장도감을 설치했을 것이라는 새로운 추측이 나왔다. 그러나 불교서지학자인 박상국 한국문화유산연구원장은 2010년 “대장도감 판본과 분사 대장도감 판본을 조사해 본 결과 두 곳은 동일한 장소였고 그것이 남해였다”고 주장했고 본보는 이를 최초로 기사화했다. ▷박 원장은 27일 남해군에서 열리는 한 세미나에서 판본 전체를 일일이 조사한 종합 결과를 제시한다. 대장경 각 권의 끝에는 간행 기록이 나와 있다. 간행 기록에 분사 대장도감이라고 된 것은 모두 500권이다. 이 중 473권의 목판이 ‘대장도감’이라고 된 네 글자를 파내고 새로 ‘분사 대장도감’이란 여섯 글자를 다시 새겨 끼워 넣었다. 대장도감과 분사 대장도감은 같은 장소였다는 것이 된다. 그렇다면 선원사는 대장경이 남해에서 제작된 뒤 강화성 서문 밖 판당에 옮겼다가 조선 초 해인사로 다시 옮길 때 거쳤던 경유지일 가능성이 높다. ▷팔만대장경은 경주, 서울 종묘와 함께 1995년 우리 문화유산으로는 최초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지정됐다. 동양에서 만들어진 20여 종의 대장경 가운데 으뜸가는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런 귀중한 유산에 대해 역사학계가 그동안 기초적인 사실 조사마저도 너무 안이하게 해온 것은 아닌지 반성해 볼 필요가 있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독일 앙겔라 메르켈 총리가 20일 뮌헨 인근 다하우의 옛 나치 강제수용소를 찾아 고개를 숙이고 “깊은 슬픔과 부끄러움을 느낀다”고 사죄했다. 현직 독일 총리로 이곳을 방문한 것은 메르켈 총리가 처음이다. 다하우 수용소는 나치가 세운 첫 강제수용소로 다른 수용소의 모델이 됐다. 역시 나치가 세운 폴란드의 아우슈비츠 수용소처럼 가스실을 설치하진 않았지만 비인간적 대우와 열악한 위생환경으로 유대인과 소련군 포로 등 3만여 명이 이곳에서 사망했다. 메르켈 총리는 “당시 독일인 대부분이 대학살에 눈을 감았고 나치 희생자들을 돕기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며 “(이번 방문은) 역사와 현재의 다리가 돼서 미래로 나아가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영국 BBC방송은 메르켈 총리가 짧지만 감동적인 연설을 했다고 평가했다. 일본 패전일인 15일 ‘전몰자 추도식’에서 침략과 식민지배에 대한 반성과 사과를 하지 않았던 아베 신조 일본 총리와는 너무나 대조적이다. 일본도 1995년 무라야마 도미이치 총리가 식민지 지배와 침략으로 아시아 각국에 다대한 손해와 고통을 주었다는 담화를 발표했다. 또 1993년 호소카와 모리히로 총리 이래 역대 일본 총리들은 전몰자 추도식에서 가해 책임을 빼놓지 않고 언급해 왔다. 그런데 아베 총리는 이번 추도사에서 그런 대목을 빼 버려 국내외의 비난을 자초했다. 독일이 프랑스와 함께 유럽연합(EU)의 쌍두마차가 되고 위기의 EU 경제를 견인하는 국가가 된 것은 자신이 저지른 전쟁을 철저히 반성했기 때문이다. 빌리 브란트 서독 총리는 1970년 폴란드 방문 때 1943년 나치의 점령에 저항해 봉기를 일으켰다가 희생된 바르샤바 게토 지구의 유대인 추모비 앞에 무릎을 꿇어 전 세계를 가슴 뭉클하게 했다. 그만이 아니라 전후 독일 총리와 대통령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사과와 반성을 표했다. 독일이 한두 번 사과에 그치지 않고 지금까지도 계속 사과하는 것은 국내적으로 나치의 후계자를 자임하는 극우파의 계속되는 준동을 막으려는 의도도 있다. 메르켈 총리도 다하우 수용소에서 극우파에게 경고를 보냈다. 아베 총리와 각료들은 역사적 퇴행을 막기보다 오히려 조장한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바로 이것이 지금 독일과 일본의 차이다.}
국가정보원 정치·선거 개입과 경찰 수사 축소 의혹을 수사한 검찰이 경찰 사이버범죄수사대의 폐쇄회로(CC)TV 녹취록을 왜곡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원세훈 전 국정원장과 김용판 전 서울지방경찰청장을 기소할 때 공개한 자료다. 검찰이 기소와 동시에 CCTV 녹취록 같은 증거자료를 언론에 공개한 것도 부적절했지만, 그마저 일부가 왜곡됐다니 실망스럽다. 6월 14일 검찰이 수사 결과를 발표하며 공개한 자료 중 ‘국정원 직원 노트북에서 선거 관련 글 확인’이란 부분에는 경찰 분석관이 “저는 이번에 박근혜 찍습니다”라며 누군가의 댓글을 읽는 대목이 있다. 실제 동영상을 확인해 보면 이 댓글은 국정원 직원이 쓴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쓴 것이다. 검찰은 “국정원 직원이 그 댓글을 썼다고 한 적이 없다”고 해명했지만 노트북의 소유자인 국정원 직원이 작성한 댓글을 분석관이 읽는 것처럼 보이는 게 사실이다. 또 검찰 자료에는 경찰 분석관이 “대박, 노다지를 발견했다”고 말하며 선거 관련 글을 상당수 확인한 것처럼 나온다. 그러나 실제 동영상에는 이어 ‘다 북한 핵실험 이런 글들밖에 없다. 문제는 이게 그 북한 쪽이 아니라 선거 관련된 게 있느냐는 거지’라는 말이 나온다. 그런데 검찰 자료는 ‘북한 로켓 관련 글들… 선거 관련된 것은 확인해 봐야…”라고 모호하게 처리했고 “이거는 언론보도에는 안 나가야 할 거 아냐”라는 말로 이어져 오해를 샀다. 동영상이란 것이 어느 부분을 잘라서 어디다 갖다 붙이느냐에 따라 받는 인상이 달라지거나 사실을 왜곡할 수 있다. 16일 민주당 박영선 의원은 국회 국정조사에서 김 전 청장의 축소 수사 의혹을 추궁하면서 경찰 분석관들이 “다 갈아 버려” “예, 다 갈아 버릴게요, 싹 다”라고 대화하는 동영상을 공개했다. 마치 자료 은폐를 공모한 것처럼 들린다. 그러나 새누리당 김진태 의원의 확인 결과 “다 갈아 버려” 앞에는 “쓸데없는 것들”이란 말이 있었다. 검찰 기소대로 국정원의 댓글 공작이 선거 개입에 해당되는지, 경찰의 축소 수사가 있었는지는 법원이 판단할 일이다. 다만 검찰이 왜곡 논란을 빚을 만한 자료를 공개한 책임은 가볍지 않다. 검찰은 “요약 정리 과정에서 일부 누락 부분이 있을 수 있지만 큰 흐름은 공소사실을 뒷받침한다”고 변명했다. 안이한 인식이다. 큰 흐름과 상관없이 왜곡된 녹취록은 여론에 영향을 미쳤다. 수사의 최후 보루인 검찰마저 ‘짜깁기 유혹’에 넘어가서는 안 된다.}

해발 4810m의 몽블랑은 유럽에서 가장 높은 산이다. 프랑스어로 ‘하얀 산(Mont Blanc)’이란 뜻이다. 멀리서 보면 너무나 아름다워 ‘하얀 여인’이라는 별명으로도 불린다. 몽블랑의 산봉우리들을 변형된 육각형 모양의 하얀 별로 형상화해 로고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 독일제 고가 만년필 몽블랑이다. ▷조지프 필 전 주한 미8군 사령관(중장)이 2008∼2011년 한국 근무 당시 한국인으로부터 고가의 선물을 받고도 신고하지 않은 사실이 미 국방부 감사에서 적발됐다. 그 선물 중에 우리 돈으로 160만 원이 넘는 도금한 몽블랑 만년필 ‘몽블랑 마이스터슈튀크 클라시크’도 들어 있었다. 필 전 사령관은 “오랫동안 사귄 한국인 친구로부터 선의로 선물 받았다”고 주장했지만 조사관들은 한국인 친구가 영어를 못하고 둘이 손짓발짓으로 의사소통했다는 점을 들어 받아들이지 않았다. 필 전 사령관은 한국 근무 이후 1년 가까이 보직이 없었고 지난해 계급이 한 단계 강등된 소장으로 전역했다. ▷한국에서는 김영란법으로 불리는 ‘부정청탁 금지 및 공직자의 이해충돌 방지법’ 제정안이 지난달 30일 국무회의를 통과했다. 몽블랑 만년필은 김영란법으로 말하자면 100만 원 이상 금품에 해당한다. 김영란법 원안은 직무와 관련 없어도 100만 원 이상의 금품을 받은 공직자는 모두 형사처벌하도록 돼 있었다. 그러나 국무회의를 통과한 법안은 직무와 관련 없이 금품을 받으면 과태료를 물도록 하는 데 그쳤다. 원안보다 후퇴했다는 비판이 나왔지만 과태료를 문 공무원은 옷을 벗어야 하니까 크게 후퇴한 것은 아니라는 반론도 있다. ▷한국처럼 뇌물과 선물 사이에 명절 떡값, 전별금, 휴가비, 향응 등 외국어로 번역하기 힘든 다양한 개념을 가진 나라도 보기 드물 것이다. 모두 공무원이 돈을 받고도 직무와 관련이 없다고 우기면서 만들어진 말들이다. 김영란법은 공무원 사회에 더는 선물과 뇌물 사이의 중간지대는 없다고 선언한 것이다. 선물과 뇌물 사이의 기준점을 100만 원으로 일률적으로 정해 단순 무식하게 구별하지 않으면 부패를 없앨 수 없는 지경에 온 우리의 처지가 씁쓸하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국사를 시험 평가 기준에 넣어야 한다.” 박근혜 대통령의 이 한마디가 교육부를 곤혹스럽게 하고 있다. 이 말은 실은 고교 교육과정과 대학입시 제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말이다. 국어 영어 수학은 수능 필수 과목처럼 보이지만 정확히는 그렇지 않다. 대학과 전공에 따라서는 국어 영어 수학 중 일부를 보지 않고 갈 수 있는 곳이 적지 않다. 그런데도 국사만 수능 필수 과목으로 만든다는 것이 적절한가. 대학입시는 자율화로 가고 있다. 대학은 원하면 국사 수능 점수를 요구할 수 있다. 서울대가 그렇다. 더 많은 대학이 원하면 좋겠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하다. 서울대도 국사 때문에 우수한 학생을 뺏기고 있다고 여겼는지 국사를 필수 과목에서 제외하려 한다는 얘기가 있었는데 대통령의 말이 나오자 없던 일로 했다. 대학입시 과목에 넣어야만 교육을 강화하는 것이라는 생각도 단순하다. 고교 사회탐구 과목은 현행 교육과정에서 원칙적으로 모두 선택과목인데 국사만 필수과목으로 바뀌었다. 물론 국사 교육을 강화하기 위한 것이다. 굳이 국사 교육을 더 강화하려면 교육시간을 늘리면 된다. 국사를 반드시 배워야 하니까 시험을 치고 그 결과는 내신에 반영된다. 수능만 평가라는 생각은 내신을 중시해 입시에 반영하도록 한 교육 이념과도 맞지 않다. 국사의 수능 필수화는 애당초 무리한 것이다. 그러나 대통령이 그런 말을 해버렸으니 교육부는 대책을 내놓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여기서 한국사능력평가시험이라는 해괴한 발상이 나왔다. 수능일 전에 한국사능력평가시험이라는 것을 봐서 ‘통과’와 ‘비통과’만 결정하겠다는 것이다. 그런 시험을 따로 운영한다는 것도 번잡한 일이지만 언어능력평가시험도 아니고 역사능력평가시험이라니 외국 언론의 토픽감이다. 수능이든 내신이든 한국사능력평가시험이든 시험을 봐야 국사를 잘할 수 있다는 생각이 무엇보다 잘못됐다. 국사를 포함해 모든 역사 교육은 암기 과목이 되는 순간 실패하도록 돼 있다. 프랑스 파리 특파원 시절에 한 영국인 강사가 프랑스인 청중에게 자기 나라 국사 교육을 한탄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그 강사는 “요새 아이들은 제2차 세계대전을 잘 모른다”며 “히틀러가 화가인 줄 아는 아이들도 있다”고 말했다. 그런데 그가 생각하는 해결책은 우리와 달랐다. 그는 “영국의 교육이 맥락에 대한 지식 없이 선다형 문제에 답하기 위해 이뤄지고 있어 그렇다”면서 프랑스식 논술형 문제에 부러움을 표시했다. 지금도 기억하는 고교시절 선생님이 있다. 국사는 아니고 세계사 선생님이었다. 유신체제가 무너진 1980년 무렵의 서울 변두리 공립학교는 엉망이었다. 학생들은 머리 기르게 해달라고 학교 유리창을 부수고 다녔다. 교사들도 수업에 잘 들어오지 않고 자습을 시키기 일쑤였다. 그 와중에도 간혹 세계사 선생님이 들어와 들려주신 강의가 잊혀지지 않는다. 주군과 봉신의 계약관계를 중심으로 한 중세 봉건제에 대한 설명, 중세와 프랑스혁명 사이에 낀 절대주의 시대의 의미, 아편전쟁의 원인이 된 조공무역의 의미를 그때 들었다. 시험엔 별 도움이 되지 않았지만 후에 역사를 더 잘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 나는 비록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 국사 시험을 본 세대지만 내 아이들만큼은 국사로 평가받길 원하지 않는다. 일본 국사교과서는 왜의 가야 지배를 가르치고 중국 국사교과서는 조선을 속국처럼 표현한다. 우리 국사교과서가 가르치는 내용과 다르다. 모두 정확한 것은 아니다. 어느 나라든 초중고교의 국사는 민족의 자긍심을 높이기 위해 교묘하게 사실에 눈감거나 사실을 왜곡하는 측면이 있다. 국가의 일원으로 사는 이상 국사를 배우지 않을 권리까지 요구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국사로 평가받지 않을 권리는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아이로니컬하지만 진정한 국사는 고교를 벗어나야 비로소 배울 수 있는 것이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남성 인권단체인 ‘남성연대’의 성재기 대표가 서울 마포대교에서 한강으로 투신해 실종됐다. 성 대표는 투신하기 전날 남성연대 인터넷 홈페이지에 글을 올려 남성연대를 후원해 줄 것을 호소하며 투신을 예고했다. 목숨을 담보로 한 퍼포먼스를 하려다 자살극으로 종결된 셈이다. 성 대표의 투신 예고문을 읽어 보면 자살 퍼포먼스를 넘어 실제로 자살할 의도를 갖고 있었는지 불분명하다. 투신하기 전 트위터에는 “살아 나올 자신이 있다”는 글을 올리고, 투신 직전에 수심 등을 살폈고 수상안전 강사도 대기시켰다고 한다. 그러나 “제가 잘못되면 다음 2대 남성연대 대표는 사무처장이 이어받습니다” “저희의 구차한 시도가 실패하더라도 부디 기억해 주십시오” 같은 글은 사망의 위험성을 인식하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미필적 고의에 의한 죽음으로 볼 여지도 있다. 이런 만용을 모방하는 사람들이 나오지나 않을까 걱정스럽다. 성 대표의 투신 현장에는 남성연대 회원들과 KBS 기자들이 있었다. 그가 의도한 자살 퍼포먼스는 언론 노출을 전제로 한 것이다. 투신 인증 사진을 찍어 인터넷에 올리려고 한 남성연대 회원들과, 취재하러 나온 KBS 기자들은 그의 퍼포먼스를 부추기는 데 일조했다고 볼 수도 있다. 특히 KBS 기자들은 생명을 최우선으로 해야 하는 언론의 취재 준칙을 지키지 않았다. 당시 한강은 오랜 장마로 수량이 많고 물살이 거세 투신한 후 헤엄쳐 나오기에는 위험한 상황이었다. KBS 측은 투신하기 전과 뒤에 두 차례 신고를 했다고 해명했고 촬영한 영상을 방영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경찰과 구조대가 출동하지 않은 상황에서 자살을 막기보다 취재를 앞세운 태도는 어떤 변명도 통하기 어렵다. 성 대표의 남성연대는 우리 사회에서 남성이 여성보다 차별받고 있다는 도발적인 문제 제기를 하며 여성가족부 폐지와 군 가산점제 부활 등을 주장해 온 단체다. 여성단체들과는 달리 정부의 후원을 받지 않는다고 자부했지만 대신 2억 원이 넘는 빚에 시달렸다. 그의 자살 퍼포먼스는 사회적인 관심을 끌어 후원금을 모으려는 의도로 기획됐다. 문제 해결을 위한 손쉬운 방법으로 생명을 이용하는 어떤 시도도 우리 사회가 용납해서는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