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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니터 속 화면에 구현한 그래픽, 스피커에서 나오는 사운드, 알아서 이미지를 생성해 주는 인공지능(AI)까지…. 예술가들이 최근 수십 년간 급속도로 발전한 기술을 활용해 어떤 작품을 제작하고 있는지를 살펴볼 수 있는 전시가 열리고 있다. 서울 중구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 뮤지엄 전시 2관에서 열리는 ‘럭스: 시적 해상도’전이다. 독일 작가 카르스텐 니콜라이의 ‘유니컬러’부터 지난해 베이징 겨울올림픽 개막식의 시각 효과를 담당한 중국 작가 차오위시(Cao Yuxi)의 ‘AI 산수화’ 등 미디어 아티스트 12팀의 현대미술 작품 16점을 선보인다. 2021년 DDP 외벽을 장식한 라이트 쇼 ‘서울라이트’를 연출했던 박제성 서울대 조소과 교수의 AI 작품 ‘기억색 (30803202)’도 전시된다. ‘명상적 풍경’, ‘새로운 숭고함’, ‘기술적 미니멀리즘’, ‘안식처’ 등 크게 4가지 주제로 나뉜 전시는 작품마다 별도의 방으로 구성돼 있다. 식물도감 속 모든 형태를 학습한 AI가 생성한 그림, 털복숭이의 생명체가 걸어가며 형체가 계속해서 바뀌는 영상 등 실사로 구성했다면 엄청난 시간과 공이 들었을 이미지가 쉽고 빠르게 만들어지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현대미술 전시 플랫폼 ‘숨엑스’와 뽀로로 제작사로 유명한 ‘오콘’이 공동 주최하는 전시라는 점도 독특하다. 이지윤 숨 대표는 “미디어 아트라는 딱딱한 말 대신 이들 작품이 해상도와 주파수의 틈과 경계를 넘나들며 승화된 한 편의 시라는 의미를 담아 ‘시적 해상도’라는 제목을 붙였다”고 했다. 오콘은 애니메이션 제작을 넘어 현대 미술, 게임 등 다양한 콘텐츠로 영역을 확장할 계획이다. 12월 31일까지. 5000∼2만 원.김민 기자 kimmin@donga.com}

다큐멘터리 사진작가 강운구(82)가 전 세계 30여 곳의 암각화를 담은 결과물을 선보이고 있다. 서울 종로구 ‘뮤지엄한미 삼청’에서 강운구 개인전 ‘암각화 또는 사진’이 내년 3월 17일까지 열린다. 전시는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등 중앙아시아 4개국과 러시아, 몽골, 중국, 한국 등 총 8개국에서 찍은 사진 중 150여 점을 선별했다. 전시 제목은 암각화가 수천∼수만 년 전 사람들의 모습을 기록한 사진과도 같다는 의미를 담았다. 동아일보 출판국 사진부 기자를 지낸 강 작가는 50여 년 전 신문에서 울산 반구대 암각화 사진을 처음 접하고, 고래가 세로로 서 있는 모습으로 표현된 것에 대한 궁금증을 가졌다. 답을 찾기 위해 조사에 나섰고, 2017년부터 한국과 문화 친연성(親緣性)이 있다고 여겨지는 중앙아시아의 파미르고원, 톈산산맥, 알타이산맥 등 여러 곳을 3년간 다녔다. 지하 1층 멀티홀에서는 8개국 암각화 중 서로 비슷한 형태를 지닌 작품을 계절별로 구성했다. 그 다음 지하 1층 복도형 전시실부터 1층 전시실까지는 국가별 암각화를 선보인다. 마지막 제2전시실에는 한국의 반구대와 천전리 암각화를 소개한다. 강 작가는 “답사 결과 고래가 서 있는 이유는 살아있기 때문이라는 나름의 결론을 내렸다”며 “여러 국가와 비교해 보니 반구대 암각화의 고유성이 더 깊이 다가왔다”고 말했다.김민 기자 kimmin@donga.com}

한국화가 류재춘(52)의 개인전 ‘달빛이 흐르면 그림이 된다’가 서울 중구 복합문화공간 순화동천에서 열리고 있다. 크고 환한 달이 등장하는 그의 그림 54점을 한자리에 모은 전시다. 작가가 대표작으로 꼽은 ‘한국의 달, 분홍’은 북한산을 오르내리며 느낀 감흥을 담은 그림이다. 작가는 2005년부터 북한산에 다니기 시작한 뒤부터 이곳의 풍경을 연작으로 그려왔다. 올해 그린 이 작품에는 처음으로 분홍색을 넣었다. 작가는 “분홍색이 색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색이라고 생각해 시도했다”고 말했다. ‘월하’는 몽환적인 꿈의 세계를 보라색으로 표현한 작품이다. 구체적인 풍경을 직접적으로 그린 것이라기보다는, 특정한 장소에 가서 느끼는 마음의 풍경인 ‘심경(心景)’을 담은 것이다. 작가는 보라색에 대해 “힘들고 지쳐 있다가 이겨냈을 때 보이는 색”이라고 설명했다. 류 작가는 “세계가 경제 등 여러 분야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는데 희망과 위로를 주고 싶었다”며 “달을 보며 나쁜 생각을 하는 사람은 없기 때문에 달을 주제로 삼았다”고 했다. 김노암 미술평론가는 “달은 시간과 공간을 관통하는 인류 공통의 경험이자 신화적 주제로, 류재춘의 달은 한국화의 과거와 미래, 동양과 서양을 연결한다”고 평가했다. 전시가 열리는 순화동천은 출판사 한길사가 운영하는 복합문화공간이다. 한길사는 이번 전시에 맞춰 류재춘의 미술 세계를 담은 동명의 책 ‘달빛이 흐르면 그림이 된다’를 출간했다. 작품 ‘월하’와 ‘묵산’ ‘자연의 초상’ 등 105점의 도판과 작가 노트, 비평, 인터뷰를 수록했다. 작가의 인생 이야기와 작품 해설도 담겼다. 전시는 내년 2월 1일까지. 무료.김민 기자 kimmin@donga.com}

미술관에 가면 꼭 만나지만 의식하지 않으면 그냥 지나치게 되는 사람들이 있다. 바로 작품을 지키는 경비원이다. 이들은 관객을 감시하면서 배려도 하는 독특한 역할을 맡는다. 그림자처럼 감상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조심하고 관객의 동선을 피해주지만, 혹시나 손이 작품으로 향하지 않는지 ‘매의 눈’으로 지켜본다. 그런 경비원도 일에서 잠시 벗어나 그림을 감상하기도 한다. 이 책은 온종일 작품과 함께 있고 싶어 미술관 경비원이 된 사람이 썼다. 저자는 두 살 위인 형이 암 투병을 하다 스물일곱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자 큰 충격에 빠졌다. 슬픔을 떨칠 수 없던 그는 2008년 “내가 아는 가장 아름다운 곳에서, 가장 단순한 일을 하는 일자리”에 지원한다. 바로 미국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경비원이었다.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은 23만1000㎡(약 7만 평)나 되는 거대한 공간이다. 각 경비원은 매일 아침 지킬 구역을 배정받는다. 이집트, 중세 미술, 르네상스와 인상주의, 그리고 현대미술까지 수천 년에서 수만 년의 시공간을 넘나들며 작품에 얽힌 감정의 흔적을 저자는 만난다. 그는 미술관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일들을 기록함과 동시에, 형을 보내며 느꼈던 감정을 교차해 보여준다. 아들을 떠나보내고 미술관 속 ‘피에타’ 그림 앞에서 펑펑 우는 엄마의 모습, 당연했던 일상이 형의 아픔을 함께하면서 성스럽게 변했던 기억들…. 결국 모든 것은 슬픔을 받아들이고 극복하는 과정이다. 저자는 그렇게 2018년까지 10년 동안 미술관에서 일했다. 쳇바퀴처럼 돌아가는 일상에서 자신이 마비되는 것만 같을 때, 오롯이 혼자가 되어 몰입하는 경험을 책은 미술관을 매개로 보여준다. 그리고 크나큰 슬픔과 고통을 온몸으로 받아들일 때 삶의 맨얼굴이 나타나며, 그것이 찬란하고 아름다울 수 있음을 드러낸다. 책은 지식에 앞서 예술의 기본적 역할을 돌아보게 만든다. 결국 인간과 삶의 본질을 보여주는 것임을 말이다.김민 기자 kimmin@donga.com}

미술관에 가면 늘 만나게 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온종일 작품을 지키고 서 있는 ‘지킴이’들입니다. 이분들은 관객이 작품에 너무 가까이 가지 않도록 보호하고 감시하는 역할도 하지만, 또 관람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마치 그림자처럼 저의 동선을 피해 움직이기도 합니다. 관객이 없을 때면 조용히 작품 앞에 서서 감상하는 모습을 발견할 때도 있죠. 기분이 좋은 날이면 이분들에게 인사를 건네거나 작품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기도 합니다.이런 ‘지킴이’의 시선에서 미술관의 풍경을 풀어낸 책이 나왔습니다. 패트릭 브링리가 쓰고 김희경, 조현주가 옮긴 ‘나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입니다’. 최근 출간된 이 책을 보고 미술관에 가는 경험에 대한 생각을 정리해보았습니다.갑작스러운 형의 죽음, 미술관 경비원이 되다이 책은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시작합니다.2008년 6월. 형이 세상을 떠나자 나는 내가 아는 공간 중 가장 아름다운 장소에서. 떠올릴 수 있는 가장 단순한 일을 하는 일자리에 지원했다.열한 살 때와 달리 이번에는 앞으로 나아가는 것은 생각지도 않으며 그곳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도착했다. 가슴이 벅차고 찢어지는 듯했다. 한동안은 그저 가만히 서 있고 싶었다.저자 브링리는 대학을 졸업하고 ‘뉴요커’에 입사해 선망받는 사회생활을 시작합니다. 그에게는 두 살 많은 형 톰이 있었죠. 수학 천재로 불리는 형을 저자는 어릴 때부터 따르고 좋아했습니다. 그런데 그 형이 스물일곱 젊은 나이에 암에 걸려 세상을 떠나고 맙니다. 슬픔에 잠긴 그는 ‘가장 아름다운 장소에서 하는 가장 단순한 일’을 하는 미술관 경비원이 되기로 결심합니다.총 13개의 챕터로 이뤄진 책은 브링리가 경비원으로 채용돼 출근하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그곳에서 그는 매일 아침 배정받은 구역으로 가서 온종일 전시관을 지키며 작품과 사람들을 지켜봅니다.7만 평이나 되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는 전시된 작품만 300만 점이 넘고. 브링리는 구석기 시대부터 이집트, 중세와 르네상스, 인상주의 그리고 현대미술에 이르기까지 시공간을 넘나듭니다.위대한 그림이 바위처럼 보일 때가 있다책의 매력은 미술에 관한 지식이 아니라 브링리라는 한 사람의 시선에서 바라보는 작품들의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다른 모든 것들은 옆으로 밀쳐두고, 나 혼자 오롯이 감각에 몰입해 보이는 것을 받아들이는 경험을 브링리의 서술에서 함께할 수 있습니다. 그는 이러한 감각을 이렇게 설명합니다.혼자서 말도 통하지 않는 외국 도시를 돌아 다녀본 사람이라면 그것이 얼마나 놀랍도록 몰입하게 되는 경험인지 알 것이다.가로등, 작은 물웅덩이, 다리, 교회, 1층에 난 창문으로 슬쩍 들여다보이는 광경들에 자신이 녹아서 스며드는 느낌말이다.살아 숨 쉬는 듯한 이국적인 디테일은 물론이고 심지어 날개를 퍼덕이는 평범한 비둘기마저 이상하리만치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거리를 걷는다.어딘가 시적이다.조심스럽게 미끄러지듯 거리를 누비면 마법은 깨어지지 않을 것이다.”분주하게 쳇바퀴처럼 돌아가는 일상. 쉴 틈 없이 밀려드는 온갖 자극에 진정한 나는 마비되어버리는 것 같은 순간들을 벗어나 잠시 멈추고 가만히 들여다보는 것. 브링리는 형의 부재 앞에서 그런 경험을 찾아가려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 밀려오는 슬픔과 고통, 그것의 아름다움을 오롯이 마주합니다.어머니와 함께 미술관을 찾았던 에피소드에서 그러한 경험을 그는 아름답게 묘사합니다. 미술사를 부전공했던 연극배우인 브링리의 어머니는 두 형제를 미술관에 데려간 뒤 흩어져 가장 좋아하는 작품을 찾곤 했습니다. 형 톰을 떠나보내고 모자는 미술관에 갔고, 한참 뒤 브링리는 ‘피에타’ 앞 엄마를 발견합니다.어머니는 늘 잘 울었다. 결혼식에서나 영화관에서나 눈물을 흘리곤 하는 사람이었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어깨가 흔들리고 있었다.나와 눈이 마주쳤을 때 그녀가 심장이 부서지는 동시에 충만해져서 그렇게 울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림이 어머니 안의 사랑을 깨워서 위안과 고통 둘 다를 가져다주었기 때문이다.우리는 경배할 때 아름다움을 이해한다. ‘통곡’할 때 ‘삶은 고통이다’라는 오래된 격언에 담긴 지혜의 의미를 깨닫는다.위대한 그림은 거대한 바위처럼 보일 때가 있다. 말로 표현하기에는 너무 냉혹하고 직접적이며 가슴을 저미는 바위 같은 현실 말이다.”미술관에서 우리가 만나는 건 결국 자신작품 앞에서 혹은 그것을 보는 사람들, 혹은 동료 경비원들을 보면서 겪는 감정들을 브링리는 솔직하게 또 감성을 가득 담아 전달합니다. 그런 그를 보며 미술관에서 작품을 어떻게 봐야 하는지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는데요.책에서 브링리가 설명한 작품 감상법을 소개합니다. 저 역시 가장 처음엔 이러한 방법으로 작품을 보려고 노력합니다.우선 작품에서 교과서를 쓰는 사람들이 솔깃할 만한 특이점을 찾아내려는 유혹을 버린다. 뚜렷한 특징을 찾으려 하면 나머지 부분을 무시하기 십상이다.고야가 그린 초상화가 아름다운 까닭은 그의 천재성도 있지만 색채와 형태, 인물의 얼굴, 물결처럼 굼실거리는 머리카락이 아름답기 때문이다. …예술과 만날 때 처음엔 아무것도 하지 말아야 한다. 그저 지켜봐야 한다. 자신의 눈에게 작품의 모든 것을 흡수할 기회를 주는 것이다.‘좋다’, ‘나쁘다’, ‘이건 바로크 시대 그림이다’라고 판단하면 안 된다. 이상적으로는 처음 1분 동안은 아무런 생각도 해선 안 된다. 예술이 우리에게 힘을 발휘하기까지 시간이 필요하다.”처음엔 브링리의 말처럼 아무것도 판단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면 조금씩 그림에서 이야기가 들려오기 시작합니다. 그것들을 차분히 받아들이고, 또다시 보면서 정리하는 과정을 거칩니다. 그런 뒤 그 이야기를 돌아보면, 결국 내가 무엇을 보고 있는지도 반추할 수 있게 됩니다. 미술관에 가는 것은 ‘나’를 만나러 가는 것이라는 이야기가 그래서 나오는 것이죠.브링리는 그렇게 10년을 메트에서 경비원으로 근무했습니다. 그곳에서 수천~수만 년 전의 흔적들, 전 세계에서 몰려드는 다양한 사람들, 각양각색의 배경에서 일하러 온 동료 경비원들을 받아들이며 그는 점차 슬픔을 정리하고 미술관을 떠나 세상 밖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책은 그 과정을 담고 있습니다. 미술관에서 무엇을 경험해야 할지 막막하다면, 한 번 브링리의 이야기로 만나보세요.※ ‘영감 한 스푼’은 예술에서 볼 수 있는 다양한 창의성의 사례를 중심으로 미술계 전반의 소식을 소개하는 뉴스레터입니다. 매주 목요일 아침 7시 발행됩니다.김민 기자 kimmin@donga.com}

1968년 5월 30일, 정강자 작가(1942∼2017)는 음악감상실 ‘쎄시봉’에서 정찬승, 강국진 작가와 ‘투명풍선과 누드’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이 퍼포먼스로 그는 ‘1세대 실험미술가’로 기록되지만, 당시엔 ‘퇴폐미술’이라며 손가락질을 받았다. 1970년 국립공보관에서 연 첫 개인전 ‘무체전(無體展)’은 사회 비판 요소가 있다며 강제로 철거당했다. 이후 정강자는 가족과 함께 싱가포르로 떠났다. 정강자는 싱가포르에서도 인도네시아 염색 기법인 ‘바틱’을 접목한 작품을 제작하는 등 꾸준히 작업을 해나갔다. 1980년대 초에는 귀국해 미술학원을 운영하면서 낮에는 학생들을 가르치고 밤에는 그림을 그렸다. 서울 종로구 ‘아라리오갤러리 서울’은 정강자의 1995∼2010년 작품 40점을 선보이는 개인전 ‘나를 다시 부른 것은 원시였다’를 다음 달 30일까지 연다. 전시 제목은 정강자가 일기에 적었던 문구다. 그는 1980년대부터 1990년대 초까지 중남미, 아프리카, 서남아시아, 남태평양 등을 2∼3개월씩 홀로 여행했고, 당시 봤던 이국적인 풍경과 인물을 나중에 화폭에 담았다. 갤러리 지하 1층에 전시된 ‘거미’, ‘뜨개질로 우주를’ 등에선 풍부한 원색과 상상력이 드러난다. 갤러리 1층에 전시된 1990년대 후반 작품에선 한복을 비롯한 전통 소재에 대한 관심을 볼 수 있다. ‘유한한 인생’에선 한복 치마가 산처럼 우뚝 서 있는 모습을 묘사했다. 정강자는 한복 치마를 “수천 년을 남성우월주의의 지배에서 억압받은 우리 여인들의 깃발이며, 어머니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것”이라고 작가 노트에 적었다. 여성 예술가로서 정체성에 대한 고민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3, 4층엔 2000년대 작품이 전시됐다. 원색의 풍경을 배경으로 기하학적 도형으로 단순화된 인체 형상이 나타난다. ‘숲에서의 오수’, ‘숲속을 부유하는 여인’처럼 자연을 배경으로 내면을 상징적으로 드러낸 작품들이다. 강소정 아라리오갤러리 디렉터는 “작고 직전까지 작업에 전념했던 정강자는 화면 속 무한한 자유의 공간에서 펼쳐낸 상상을 통해 스스로를 해방시키고자 했다”고 말했다. 무료.김민 기자 kimmin@donga.com}

1993년 이탈리아 베네치아의 비엔날레 전시장 독일관에 백남준(1932∼2006)은 설치 작품 ‘시스틴 채플’을 선보입니다. 전시장 가운데에는 나무 선반 위에 브라운관(CRT) 프로젝터가 무더기로 쌓여 있고, 빈 벽과 천장으로 영상이 가득 메워지는 작품이었습니다. 무겁고 다루기 까다로운 CRT 프로젝터를 들고 선반 위 높은 곳에서 수일간 씨름하던 설치 스태프들이 지치자, 백남준은 이들의 숙소로 찾아가 조식에 달걀 하나씩을 추가 주문해줬다고 전해집니다. 어렵게 선보인 이 작품은 2022년 울산시립미술관의 소장품이 되었고, 지금은 서울문화재단 기획전 ‘언폴드엑스’전이 열리는 서울 중구 옛 서울역사 ‘문화역서울284’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최근 전시된 이 작품의 형태는 사뭇 다릅니다.백남준의 ‘현대판 시스틴 채플’먼저 1993년 ‘시스틴 채플’은 백남준이 베네치아 비엔날레의 독일관 대표 작가로 선정되면서 제작한 작품입니다. 백남준이 첫 개인전을 연 곳이 바로 독일이었고, 작품 세계를 인정받아 개념미술가 한스 하케(87)와 공동으로 독일관에서 전시를 열었습니다. 백남준은 이곳에서 세계 미술사의 중요한 작품으로 여겨지는 ‘시스틴 채플’을 미디어 아트 버전으로 새롭게 해석합니다. 미켈란젤로가 천장화를 그린 시스틴 채플이 종교와 신화로 가득했다면, 백남준은 동시대 예술가와 팝스타로 전시장의 벽면과 천장을 채웁니다. 영상 속에는 요제프 보이스, 존 케이지, 머스 커닝햄, 샬럿 무어먼 등 동료 예술가는 물론이고 데이비드 보위, 재니스 조플린, 사카모토 류이치까지 등장합니다. 게다가 매우 빠른 영상 전환과 시끄러운 음악은 정적인 시스틴 채플과는 완전히 반대였죠. 미디어로 발달한 대중문화를 전면에 내세운 백남준식 ‘현대판 시스틴 채플’이었습니다.나무는 철제로, CRT는 LCD로이번 문화역서울284에서 전시작의 흥미로운 점은 따로 있습니다. 바로 이 작품의 외형이 1993년 버전과는 상당히 다르다는 점입니다. 우선 1993년에 CRT 방식이었던 빔프로젝터는 액정표시장치(LCD) 빔프로젝터로 교체되었습니다. 또 이 프로젝터를 올렸던 나무 선반은 철제 비계가 되었죠. 영상과 음악의 내용은 같지만 그것을 작동하는 기계의 외관은 다릅니다. 이는 미디어 아트에 관해 여러 가지 생각할 거리를 던져 줍니다. 지금의 형태는 어떻게 결정된 걸까. 출발은 2019년 영국 테이트 모던과 미국 샌프란시스코 현대미술관이 공동 주최한 백남준 회고전이었습니다. 이 전시 기획자들은 1993년 ‘시스틴 채플’을 설치했던 엔지니어, 백남준 에스테이트 관계자와 협의해 지금의 형태를 결정합니다. 우선 CRT 빔프로젝터는 더 이상 구하기도 어려울뿐더러, 수리 기술자를 찾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LCD를 선택했고, 구조물도 전시 공간에 맞춰 다르게 만들었습니다.기술 자체보다 더 중요한 것, 인간테이트 모던 전시 큐레이터 발렌티나 라바글리아는 “백남준에게는 그것을 송출하는 기기가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고 설명합니다. 실제로 백남준은 생전 LCD 기술이 발전하자 CRT 대신 이 기술도 사용했습니다. 이러한 라바글리아의 분석은 백남준 예술 세계의 맥락에 비춰 봐도 합당한 것으로 보입니다. 백남준의 미디어 아트는 ‘최신 기술을 사용’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기술을 해체·활용해 새로운 의미를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백남준 작품에는 텔레비전에 자석을 붙여 영상을 일그러뜨리고, 브라운관을 떼어내고 그 안에 촛불을 켜놓은 것도 있죠. 여기서 백남준은 텔레비전 같은 기술의 수동적인 대상이 되지 말고, 그것을 이용해 새로운 가능성을 여는 주체가 되라고 주문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CRT냐 LCD냐를 두고 고민하는 것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 어떤 모양인지를 따지는 것 같습니다. 즉 백남준의 미디어 아트는 기술 자체에 대한 탐구가 아니라, 결국은 그것과 얽히게 되는 사람과 사회에 대한 메시지였다는 것이지요. 다만 미디어 아트 역시 시각 예술이기에 남는 고민은 있습니다. 어떤 조각 작품들은 브라운관이 주는 특유의 형태를 존중해야 하는 경우가 있죠. 또 CRT 영상 특유의 부드러운 느낌이 LCD에서는 너무 선명할 때도 있습니다. 이럴 때면 큐레이터는 전 세계에 몇 명뿐인 CRT 기술자를 수소문하거나, 전국의 고물상을 뒤져 브라운관 모니터를 구해야 합니다. 테이트 모던에서도 CRT 모니터를 구하려 온라인 오픈마켓인 이베이까지 샅샅이 찾았다고 합니다. 이렇게 보면 회화가 가장 간단하고 훌륭한 미디어라는 생각도 듭니다. 비디오 기술은 지금은 너무나 익숙하지만 생겨난 지 100여 년이 지났을 뿐이고, 계속해서 그 방식이 바뀌니 불완전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때문에 백남준의 어떤 작품들은 ‘다다익선’처럼 매번 어떻게 유지해야 하느냐란 문제에 자주 부딪힙니다. 그러나 이런 점 때문에 여러 미술관의 큐레이터와 엔지니어들이 백남준의 작품을 각기 다르게 해석해 여러 가지 결과물이 탄생하기도 합니다. 여러분도 ‘시스틴 채플’의 여러 버전을 찾아보며, 어떤 것이 가장 마음에 와 닿는지 비교해 보세요. ‘언폴드엑스’전은 12월 13일까지 이어집니다. ※뉴스레터 ‘영감 한 스푼’은 매주 금요일 오전 7시 발송됩니다. QR코드를 통해 구독 신청하시면 이메일로 먼저 받아보실 수 있습니다.김민 문화부 기자 kimmin@donga.com}

주름진 얼굴은 무심코 보면 고단하고 지친 것 같지만, 가까이 가면 화려한 색이 겹겹이 쌓여 있다. 오랫동안 지나온 시간 속에 얼굴이 마주했던 환희, 기쁜 순간들이 고스란히 기록된 것처럼 말이다. 서양 미술사를 벗어나 ‘한국인의 얼굴’을 그려온 권순철(79)의 작품 ‘아낙’이다.‘아낙’ 속 빛은 겪은 화려한 색이라면, 이 작품 옆에는 다른 방식으로 표현된 빛이 나타난다. 곽수영(69)의 성당 연작 ‘Voyage Immobile’은 캔버스에 물감을 칠한 뒤 말리고 덧칠하는 과정을 반복한 다음, 그 물감을 거꾸로 긁어냈다. 이를 통해 고딕 성당 건물에 은은하게 비춰오는 빛을 묘사해낸다.프랑스 파리의 재불작가협회인 ‘소나무회’에서 활동한 두 작가의 작품을 볼 수 있는 기획전 ‘기억으로부터’가 서울 종로구 월하미술에서 열린다. 전시는 권순철의 ‘아낙’과 곽수영의 성당 연작 등 20여 점을 1, 2층에서 선보인다. 월하미술은 소격동의 오래된 집을 리모델링한 갤러리로 앞뜰에는 감나무가 있고, 2층 벽은 짙은 푸른색 페인트가 칠해져 있다.두 작가가 활동한 ‘소나무회’는 1991년 결성돼 1992년 파리 근교 이시레물리노의 옛 탱크정비공장을 기반으로 이어졌다. 이때 한인 예술가들이 주축이 되어 공장을 46개 작업실로 개조해 함께 작업하고 토론했다. 권순철 곽수영과 이배 등이 소나무회의 1세대 작가로 꼽히며 지금까지도 재불 작가들이 참여하고 있다.월하미술을 운영하는 신영채 대표는 증조할아버지 대부터 미술 작품을 수집해 온 컬렉터다. 한국화인 운보 김기창부터 현대미술인 이우환까지 소장해온 가운데, 한국 근대 회화가 제대로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는 것을 보고 고전과 현대를 아우르는 갤러리를 운영하겠다고 결심했다. 이는 한국 고전문학을 연구한 바탕도 작용했다. 신 대표는 “우리 고유문화와 현대 미술의 접점에 대한 관심이 부족하다”며 “한국인만이 느끼는 정서가 담긴 예술을 소개하겠다”고 설명했다. 전시는 25일까지. 무료.김민 기자 kimmin@donga.com}

아시아의 젊은 컬렉터들이 최근 주목하는 일본 작가 유이치 히라코(41)의 개인전 ‘여행’이 16일 서울 강서구 ‘스페이스K 서울’에서 개막했다. 나무 모양의 머리를 한 인간이 자주 등장하는 그의 작품은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다룬다. 이번 전시는 회화와 조각, 설치 등 작품 30여 점으로 구성됐다. 전시장 입구에선 작가의 초기 소품과 드로잉, 조각을 선보인다. 그의 트레이드마크인 ‘트리 맨’이 형성되는 과정을 엿볼 수 있다. ‘트리 맨’은 일본 민속 설화의 나무 정령을 참고해 만든 것으로, 작가는 이 인물이 자화상이자 자연과 관계를 맺은 모든 사람의 초상이라고 말한다. 인물의 머리에 나무를 그려넣은 것은 인간 중심적 관점에서 벗어나 자연을 본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폭 10m, 높이 3m 대작 ‘여행’도 만날 수 있다. 4개로 분할된 화면에는 씨앗이 경계를 넘어 서로 다른 자연에 뿌리를 내려 번성하는 과정을 여행처럼 묘사했다. 마지막 장면에는 찌르레기 떼가 그려져 있다. 최근 일본 도심에서 자주 발견되는 새다. 작가는 “찌르레기는 인간과 공존한다고 생각하지 않고 그저 놓여 있는 곳에서 살아가는 것일 뿐”이라며 “인간 사회에서도 자연에서도 살아갈 수 있는 중간적인 존재라는 의미”라고 설명했다. 내년 2월 4일까지. 5000∼8000원.김민 기자 kimmin@donga.com}

프랑스 화가 조르주 루오(1871∼1958)의 대표작인 판화집 ‘미제레레’를 전남도립미술관이 소장하게 됐다. 19일 전남도립미술관에 따르면 미제레레는 올해 2월부터 소장 논의를 시작해 9개월간 프랑스 정부의 문화재 반출 심의를 거친 끝에 13일 미술관에 도착했다. 미제레레는 총 58점으로 구성된 판화집으로, 지난해 10월 6일부터 올해 1월 29일까지 미술관에서 열린 ‘인간의 고귀함을 지킨 화가, 조르주 루오’전에 전시됐다. 미술관이 구매한 미제레레는 루오가 살아 있을 때 직접 인쇄한 425개 에디션 중 16번째로 찍은 판화집으로, 루오 유족이 대대로 소장한 미공개 비매품이었다. 루오의 장손인 베르트랑 르 당테크 조르주 루오 재단 회장이 국공립미술관의 소장품이 된다는 취지에 공감해 작품을 보냈다고 한다. 미제레레는 프랑스 파리 퐁피두센터, 미국 뉴욕 현대미술관(MoMA), 영국 테이트미술관 등 해외 주요 미술관들이 소장하고 있다. 루오가 제1차 세계대전 중 그린 드로잉을 화상 앙브루아즈 볼라르의 요청으로 동판화로 옮긴 미제레레는 작품성은 물론이고 출간에 얽힌 사연으로 유명하다. 작품 제목인 미제레레는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의미로, 전쟁의 비참함과 그로 인한 사람들의 고통을 생생하게 담았다. 정웅모 천주교 서울대교구 성미술담당 신부는 “전쟁에서 모든 것이 파괴되고 무수한 사람이 생명을 잃은 참혹한 현실에서 외친 절규이자 기도”라고 설명했다. 루오가 전체 판화집을 완성한 것은 1927년이지만 제2차 세계대전 등으로 세상에 빛을 보기까지 20여 년이 걸렸다. 특히 볼라르가 갑작스레 사망한 후 유족이 작품을 돌려주려 하지 않아 소송을 했다. 루오는 1948년 발표된 판화집 서문에 “볼라르의 죽음, 독일의 점령, 소송으로 출간이 지연됐다. 나의 낙천적 성향에도 힘든 시간이었다. 내가 지상에서 사라지기 전 빛을 보게 돼 기쁘다”고 썼다. 전남도립미술관 루오전을 관람한 소설가 조정래는 미제레레를 보고 “루오는 인간이 가진 고통을 가장 잘 표현한 작가”라고 했다. 방탄소년단(BTS)의 멤버 RM은 전시를 본 후 미제레레에 실린 작품 ‘마음이 고결할수록 목덜미는 덜 뻣뻣하다’의 제목을 소셜미디어에 공유했다. 미제레레가 미술관 소장품이 되면서 관람객이 작품을 감상하기 수월하게 됐다. 이지호 전남도립미술관장은 “미제레레는 미술사의 중요 작품이며 이중섭이 루오의 작품에 찬사를 보냈고 손상기는 비평가들에게 ‘동방의 루오’라고 불리는 등 루오는 한국 작가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며 “내년 중 미제레레를 선보이는 전시를 개최할 계획”이라고 밝혔다.김민 기자 kimmin@donga.com}

화가 김대열(71·사진) 초대전이 서울 종로구 한벽원미술관에서 21일까지 열린다. 월전미술문화재단이 주최하는 ‘김대열 수묵 언어―무상(無象)·유상(有象)’전에서는 수묵채색화인 ‘보현보살도’를 비롯해 선(禪)적 사유와 깨달음을 표현한 작품 39점을 선보인다. 김 작가는 직관을 통해 얻은 이미지를 빠른 붓놀림으로 표현한다. 한벽원미술관에 따르면 이런 방식은 종교화인 ‘선종화(禪宗畵)’나 문인화가가 느낌을 담은 ‘사의화(寫意畵)’에서 즐겨 사용하던 것이다. 작가는 이를 통해 자신의 감성에 따라 형태의 유무, 수묵의 강약을 드러내고자 했다. 전시 제목을 ‘무상·유상’으로 정한 것도 이 때문이라고 한다. 전시에 나오는 ‘보현보살도’, ‘문수보살도’ 등 불교화는 중국 둔황 벽화를 재해석한 것이다. 김 작가는 “수묵화에 객관적 사실을 그대로 묘사하기보다 나의 사고와 감정을 적극적으로 반영하고자 한다”며 “인간의 자아를 새롭게 이해하고 실현하는 과정이라는 점에서 수묵화와 깨달음이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김영재 미술평론가는 김 작가의 작품에 대해 “물길에 거침이 없듯 힘이 넘쳐흐르다 숨죽인 물의 잔잔한 흐름이 격변을 중화하는 동중정(動中靜)이 느껴진다”고 했다. 김 작가는 동국대 미술학과를 졸업하고 국립대만사범대에서 예술학 석사를 취득한 뒤 단국대 대학원에서 미술사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동국대 미술학부 교수를 지냈다. 무료.김민 기자 kimmin@donga.com}

한국에서 추상 미술이라고 하면 흔히 앵포르멜(1940, 50년대 유럽의 즉흥적 비정형 회화)이나 단색화가 떠오른다. 그러나 20세기 추상화의 출발로 여겨지는 피터르 몬드리안(1872∼1944)과 바실리 칸딘스키(1866∼1944)가 그린 기하학적 추상화는 우리 미술계에도 1920, 30년대부터 영향을 끼쳤다. 기하학적 추상의 역사를 돌아보는 전시 ‘한국의 기하학적 추상미술’이 국립현대미술관 과천에서 16일 개막했다. 전시에 소개된 작가 가운데 유영국(1916∼2002)은 미국 뉴욕에서 첫 개인전이 열리고 있다. ● 윤형근 색면 추상 최초 공개이번 전시에선 윤형근(1928∼2007)이 1969년 브라질 상파울루 비엔날레에 한국 대표 작가로 참가하며 출품한 ‘69-E8’이 처음 공개된다. 이 작품은 비엔날레에 출품했던 모습을 담은 사진에서만 확인됐을 뿐 그간 소재를 파악하지 못했다. 그러다 유족이 재작년 작업실을 정리하며 발견했고, 이번 전시를 계기로 국립현대미술관이 소장하게 됐다. 마직물이나 한지에 먹색을 번지게 한 무채색의 대표작과 달리 이 작품은 강한 색채가 눈에 띈다. 전유신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는 “이런 기하학적 추상미술은 급격한 도시화와 함께 건축과 미술의 만남에서 영향을 받았는데 윤형근도 김중업, 김수근 등 당대 대표적 건축가들과 교류했다”고 설명했다. 이번 전시는 이처럼 기하학적 추상과 디자인·건축 등의 분야가 서로 주고받은 영향을 짚는다. 첫 번째 섹션 ‘새로움과 혁신, 근대의 감각’에서는 미술과 디자인, 문학까지 확장된 기하학적 추상의 사례를 살펴본다. 김환기의 ‘론도’(1938년)와 유영국의 ‘작품1(L24-39.5)’(1939년)을 시작으로 1930년대 단성사와 조선극장에서 제작한 영화 주보, 시사 종합지의 표지를 함께 전시해 비교해볼 수 있게 했다. 특히 시인 이상(1910∼1937)이 기하학적 구성으로 디자인한 잡지 ‘조선과 건축’과 시집 ‘기상도’의 표지도 볼 수 있다. 총독부 건축과 기사였던 이상은 미쓰코시 백화점 내외부의 기하학적 모습을 “사각형의내부의사각형의내부의사각형의…”라고 시 ‘건축무한육면각체: AU MAGASIN DE NOUVEAUTES’에 표현하기도 했다. 이 밖에 1957년 한국 화가와 건축가, 디자이너가 결성한 ‘신조형파’의 활동상을 다룬 ‘한국의 바우하우스를 꿈꾸며, 신조형파’, 자연의 형태를 단순화한 추상미술을 모은 ‘산과 달, 마음의 기하학’, 1960, 70년대를 다룬 ‘기하학적 추상의 시대’, 기하학적 추상을 오늘날 작가들이 신작으로 재해석한 ‘마름모-만화경’까지, 총 5개 섹션으로 구성된다. 작가 47명의 작품 150여 점을 볼 수 있다. 내년 5월 19일까지. 2000원.● 유영국 뉴욕 첫 전시미국 뉴욕 페이스갤러리에서는 유영국의 해외 첫 개인전 ‘Mountain Within’이 10일(현지 시간) 개막했다. 산을 모티브로 한 작품 등 1960, 70년대 작품 17점을 선보이는 이 전시는 12월 23일까지 열린다. 아니 글림셔 페이스갤러리 회장이 유영국을 두고 ‘톱 클래스 화가’라고 했다고 전해진다. 페이스와 PKM갤러리, 유영국미술문화재단은 내년 이탈리아 베네치아에서도 유영국 개인전을 준비 중이다. 유영국의 아들 유진 유영국미술문화재단 이사장은 “아버지가 1940년대 일본에서 귀국 후 해외 미술 동향을 접할 수 없어 선택한 것이 가장 변하지 않는 주제인 산”이라고 했다. 이어 “아버지가 산의 형태를 본질만 남기고 자신의 느낌을 색채로 입혔다는 생각이 든다”며 “그러한 보편성이 해외로도 전해지길 기대한다”고 밝혔다.김민 기자 kimmin@donga.com}

에르메스 버킨백을 잘라 ‘버켄스탁’ 샌들로 만든다면? 영국 작가 데이미언 허스트의 회화 속 여러 개의 색점을 하나씩 잘라 따로 판다면? “신성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외치는 창작 그룹 ‘미스치프(MSCHF)’의 그간 활동을 선보이는 전시 ‘MSCHF: NOTHING IS SACRED’가 10일 서울 종로구 대림미술관에서 개막했다. 미스치프가 만든 게임, 상품, 퍼포먼스 등 100여 점을 소개한다. 미스치프는 2019년 미국 뉴욕을 기반으로 설립된 20여 명의 그룹이다. 구성원에는 예술가, 디자이너는 물론이고 개발자, 변호사도 포함돼 스타트업을 연상케 한다. 다만 이들이 무엇을 판매하는지는 정해져 있지 않다. 2주마다 웹사이트에 새로운 한정판 작품을 공개하며 온라인에서 화제와 논란을 일으켜왔다. 가장 시끄러운 소동을 만든 제품은 2021년 ‘나이키 에어맥스 97’을 커스텀 제작한 ‘사탄 신발’이다. 미스치프는 이때 팝스타 릴 나스 엑스와 협업해 에어솔에 사람의 피를 한 방울씩 넣은 ‘사탄 신발’ 666켤레를 제작, 판매했다. 신발이 논란이 되자 나이키가 ‘공식 협업이 아니다’며 소송을 제기했고, 이 신발이 시중에 유통되지 않도록 회수하는 조건으로 마무리됐다. 전시는 이 신발을 포함한 그간의 활동들을 크게 5개 부문으로 나누어 조명한다. 첫 번째 ‘아카이브’ 섹션은 미스치프가 발간한 매거진 8권을 디지털 버전으로 선보인다. 매거진에는 발표 상품, 이를 통해 보여주고자 하는 메시지 등이 자세하게 담겨 있다. 두 번째 ‘멀티플레이어’ 섹션에서는 직접 체험해볼 수 있는 여러 가지 게임이 등장한다. 버튼을 누를 때마다 숫자가 올라가거나, 의자에 앉아 있는 시간만큼 포인트가 높아지는 등 비교적 단순한 형태의 게임이다. 세 번째 섹션 ‘모두를 위한 사기, 하나를 위한 사기’에서는 사회 구조를 풍자한 시도가, 네 번째 섹션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 외 다른 모든 것들은 마스터카드로’는 현대인의 물질적 소유와 소비 심리를 꼬집은 프로젝트들이 담겨 있다. 마지막 ‘신성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섹션에서는 ‘사탄 신발’, ‘예수 신발’과 허스트의 회화를 조각낸 ‘잘린 점들’, 앤디 워홀의 판화 1점과 가품 999점을 섞어 판매한 ‘어쩌면 앤디 워홀의 ‘요정’ 진품’ 등을 볼 수 있다. 이번 전시는 대림미술관이 2년 반 만에 선보이는 기획전이다. 이여운 전시디렉터는 “즉각적이고 재치 있게 사물과 대중문화를 건드려 이야기를 풀어내는 미스치프가 일상을 예술로 만들자는 미술관의 미션과 맞닿아 있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내년 3월 31일까지. 3000∼1만7000원.김민 기자 kimmin@donga.com}

18세기 영국 탐험가 제임스 쿡은 항해 전 모든 선원에게 매주 독일식 양배추 절임인 사워크라우트를 900g씩 먹도록 명령했다. 영국인에게 낯선 독일 음식을 권한 덴 이유가 있었다. 사워크라우트 한 접시에는 비타민C 약 150g이 들어 있어 수백 년간 많은 선원을 죽게 한 괴혈병을 예방하는 데 도움이 됐다. 효모와 곰팡이, 박테리아 등 각종 미생물을 이용해 직접 만드는 발효식품은 20세기 들어 위험한 것으로 취급됐다. 이 무렵 공장에서 식품을 생산하는 것이 발달하면서 멸균 시설에서 베이킹파우더 같은 화학적 재료를 사용한 발효만이 안전하다는 인식이 굳어졌다. 음식·문화사 칼럼니스트인 저자는 이런 문화가 발효식품의 다양한 맛과 정체성을 죽였다고 본다. 책은 와인과 맥주에서 출발해 수천 년간 인류 역사와 함께해 온 발효식품의 역사를 되짚는다. 19세기 미생물학자 루이 파스퇴르가 나폴레옹 3세의 부탁으로 상한 와인을 조사하다 발효가 부패가 아닌 생식의 결과임을 알아내는 과정부터, 양치기가 깜빡하고 놓고 간 샌드위치에서 푸른곰팡이 치즈를 발견한 이야기, 한국의 김치와 독일의 사워크라우트 등 채소를 발효하는 다양한 방식 등 여러 시대와 공간을 아우른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저자는 발효 식품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을 없애고자 한다. 물론 과정이 잘못될 경우 발효 식품은 자칫 독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두려움 때문에 얻을 수 있는 수많은 영양과 효과를 포기하지 말고, 현명하게 알아나가자고 제안한다.김민 기자 kimmin@donga.com}

오늘은 대구미술관에서 10월 31일 개막한 ‘렘브란트: 17세기의 사진가’전을 소개합니다.이 전시는 네덜란드 화가 렘브란트 판 레인(1606~1669)의 판화를 모은 대규모 전시입니다. 최근에는 판화도 기술적 진화로 하나의 장르로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지만, 17세기 판화라고 하면 사이즈도 작고 색채도 제한적입니다.그래서 너무 큰 기대는 하지 말자고 생각하며 전시를 방문했는데, 우선 작품 수가 120점에 달했습니다. 현재까지 확인된 렘브란트 에칭이 290~300점이라고 하니, 전체의 절반 정도를 한 자리에서 볼 수 있는 기회인 셈입니다.전시를 담당한 이정희 대구미술관 학예연구사로부터 자세한 전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렘브란트의 DNA는 에칭에 있다”우선 어떻게 이런 전시가 가능했을지가 저는 가장 궁금했고, 그것을 질문했습니다.대구미술관에 전시된 모든 작품은 네덜란드 렘브란트순회재단(Stichting Rembrandt op Reis)가 소장하고 있는 것인데요. 이 재단을 만든 얀 멀더스 대표는 사업가 출신으로, 렘브란트 판화를 하나씩 모으면서 현재는 약 220점을 갖고 있습니다.멀더스 대표는 사업만 한 것이 아니라 네덜란드 국립발레단에서도 근무했던 문화 예술인입니다. 어느 날 우연히 누군가 보여준 렘브란트의 판화 작품과 동판을 보고 반해 컬렉션을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는 “렘브란트의 DNA가 여기에 들어 있다”고 느꼈다고 합니다.지금은 80대를 바라보고 있는 멀더스 대표는 자신이 갖고 있는 판화를 세상에 소개하고 싶은 마음에 재단을 만들고, 전시를 개최하고 있습니다. 프랑스 그르노블 미술관, 암스테르담 렘브란트 하우스 뮤지엄 등에 소장품을 대여해주고 있습니다.이번 대구미술관 전시는 벨기에 앤트워프의 판화 미술관 ‘뮤지엄 드 리드’가 렘브란트순회재단과 협업해 올해 초 열었던 전시의 확장판입니다. 벨기에에서는 84점을 전시했는데, 대구미술관에서는 120점을 선보이고 있습니다. 그 사연은 이렇습니다. “대구미술관 전시 공간이 크다 보니 84점으로는 부족하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소장자에게 요청했더니 자신이 가진 컬렉션 중에 얼마든지 마음대로 선택해도 좋다는 답을 들었습니다. 렘브란트 에칭은 워낙 오래전부터 연구가 되어 왔기 때문에, 그 주제가 대략 6~7개로 나뉩니다. 이를 기준으로 이번 전시는 7개 카테고리를 되도록 골고루 보여주자는 생각으로 구성했습니다.”시간 여행 떠나는 듯 생생한 장면들전시장에 들어서면 멀더스 대표가 ‘렘브란트 DNA가 있다’고 느낀 이유를 이해하게 됩니다. 전시는 크게 △자화상 △거리의 사람들 △성경 속 이야기 △장면들 △풍경 △습작 △인물·초상 등 7개 분류로 나눠지는데요. 여기서 물론 가장 잘 알려진 명작은 성경을 주제로 한 것들이지만, 눈길을 끄는 것은 자화상과 거리의 사람들 부분입니다.우선 자화상 코너에서는 우리가 유화로 만나는 멋진 모습의 렘브란트뿐 아니라, 헝클어진 머리, 쩍 벌린 입, 그늘 아래 어두운 얼굴 등 다양한 표정과 형태를 한 모습을 만나게 됩니다. 렘브란트가 이런저런 표정을 지어보면서, 사람의 얼굴을 탐구하는 흔적을 아주 생생하게 느껴볼 수 있습니다.이것이 확장된 버전은 바로 거리의 사람들입니다. 렘브란트는 거리로 나아가 눈먼 바이올린 연주자, 지팡이를 짚은 농부, 떠돌이 가족, 의족을 한 거지 등 현실의 풍경을 사진 찍듯 포착하고 있습니다. 아주 작은 종이 위에 찍힌 판화지만, 생생한 묘사 속에 실제로 17세기 네덜란드의 어느 거리에 와 있다는 생각이 들게 만듭니다. 시간 여행을 하는 것처럼 말이죠.이 작품들에 푹 빠져서 너무 가까이 다가서다 전시장 지킴이 분에게 저지받기도 했는데요. 이번 전시는 작은 작품 사이즈를 고려해 특별해 경계선을 치지 않았다고 이 학예사는 설명했습니다.전시 준비 과정에서 저도 고민이 많았습니다. 돋보기를 놓아야 하나 싶고, 또 작품과 관객의 안전을 헤쳐서도 안 되니까요. 그래도 바닥에 유도선만 그리고 과하게 제지하지 않기로 했는데, 이번 주말 전시장을 돌아보니 관객분들께서 스스로 조심하면서 감상하는 모습에 안심했습니다.이렇게 렘브란트의 자화상과 거리의 사람들에 푹 빠져서 보다 뒷부분에 이르면, 그가 어떻게 성경 속 주제를 교리적 차원을 넘어 인간의 이야기로 묘사했는지를 이해하게 됩니다. 이정희 학예사는 ‘착한 사마리아인’을 예로 들었습니다.이 장면을 만약 다른 작가라면 여관 주인에게 돈을 건네는 것만 부각했을 겁니다. 그런데 뒤쪽 배경에 여자가 우물에서 물을 긷고, 앞쪽에는 강아지가 볼일을 보는 모습이 나오죠. 흔히 사람들은 ‘보고 싶은 것만 본다’고 하잖아요. 그런데 렘브란트는 그것을 넘어 카메라로 찍듯 세상을 봤다는 생각이 듭니다. 앞서 벨기에 전시도 이런 부분을 강조했고, 저도 공감해 ‘17세기의 사진가’라는 전시 명을 붙이게 됐습니다.전시장에서는 렘브란트가 다양한 기법을 활용한 흔적, 또 에칭 판화를 만드는 방법을 담은 영상 등도 볼 수 있습니다. 에칭의 매력에 푹 빠져볼 수 있는 시간이 될 것 같습니다.※ ‘영감 한 스푼’은 예술에서 볼 수 있는 다양한 창의성의 사례를 중심으로 미술계 전반의 소식을 소개하는 뉴스레터입니다. 매주 목요일 아침 7시 발행됩니다.김민 기자 kimmin@donga.com}

새로운 형태의 예술 전시인가, 가볍게 즐기는 엔터테인먼트 콘텐츠인가. 고화질 빔프로젝터와 매핑 시스템, 음향 시설을 통해 예술 작품을 소재로 한 영상을 사방에 송출하는 ‘몰입형 전시’는 최근 수년간 미술계의 뜨거운 감자였다. 그간 몰입형 전시는 빈센트 반 고흐, 클로드 모네 등 작고한 작가의 작품을 주로 다뤄온 가운데 영국 작가 데이비드 호크니(86)가 참여한 전시가 열리고 있다. 서울 강동구 ‘라이트룸 서울’에서 1일 시작한 ‘데이비드 호크니: Bigger & Closer’는 가로 18.5m, 세로 26m, 높이 12m 규모 공간에서 열린다. 프로젝터 20여 개, 스피커 1000여 개를 갖추고 바닥까지 5개 면을 사용한다. 상영되는 영상은 ‘원근법 수업’, ‘호크니, 무대를 그리다’, ‘도로와 보도’, ‘카메라로 그린 드로잉’, ‘수영장’, ‘가까이서 바라보기’ 등 6개 주제로 구성됐다. 국내에서 열린 전시 대부분은 여러 개의 공간을 활용해 작품 자체를 보여주는 데 집중했다면, 호크니 전은 작가의 육성 내레이션이 나오고 스토리를 갖추고 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또 한 공간에 앉아서 감상하는 형태로, 대규모 영화관에 온 듯한 느낌을 준다. 영국에서 제작돼 런던에서 먼저 선보인 이 전시는 비평가에게는 부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가디언은 빠르게 전환되는 화면과 단편적인 설명 때문에 “잘못된 렌즈로 위대한 예술을 보는 듯하다”고 지적했다. 아트리뷰는 “퀴어 문화 등 호크니 예술의 중요한 영향력이 빠졌다”고 봤다. 기자가 직접 보니 작품 자체보다는 호크니 작품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감상하는 쪽에 가까웠다. 다만 미술관에서 그림을 보는 경험이 많지 않은 관객을 대상으로 저변을 확대한다는 점에서는 긍정적이다. ‘라이트룸 서울’은 전시장 외에도 4만9586㎡(약 1만5000평) 규모 부지에 아트숍, 카페, 레스토랑, 온실과 정원 등을 갖출 예정이다. 아직은 전시장만 완공된 상태다. 내년 5월 31일까지. 1만5000∼3만 원.김민 기자 kimmin@donga.com}

이사 가는 날. 매일 쓰던 소파와 의자, 탁자와 거울이 밧줄에 꽁꽁 묶이고 잡동사니를 담은 박스들이 차곡차곡 쌓여 있다. 익숙했던 집 안 풍경이 극적으로 변하는 순간, 가구들은 무대 위 배우가 된 것처럼 낯선 모습으로 살아난다. 유근택 작가(58·사진)의 연작 ‘이사’ 속 장면이다. ‘분수’, ‘창문’, ‘이사’ 등 유근택의 주요 연작 40여 점을 선보이는 개인전 ‘반영’이 서울 종로구 갤러리현대에서 열리고 있다. 대학에서 동양화를 전공한 유근택은 전통 수묵화가 추구했던 관념적 정신성을 벗어나 삶의 장면에서 포착한 감각의 정신성을 드러내 왔다. 이른바 ‘일상성’으로 한국화단의 신선한 움직임을 이끌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일상성’은 단순히 일상의 모습을 표현하는 차원이 아니다. 오히려 일상의 독특한 순간에 느끼는 낯선 감각, 여기서 이어지는 정신적 깨달음을 말한다. 깨달음은 저 먼 곳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갖고 있는 몸, 발 디딘 땅에서 출발한다는 의미다. 이런 관점에서 갤러리 1층에서 만나는 ‘창문’과 ‘이사’ 연작은 작가가 거주하는 집에서 만나는 순간들을 표현했다. 2022년 작품 ‘창문-새벽’은 부친의 장례식을 치른 뒤 집으로 돌아와 본 창밖 풍경을 담았다. 유근택은 “별빛과 불빛이 합쳐진 풍경이 일상적이지만 너무나 놀랍게 다가와 홀린 듯 그렸다”고 말했다. 2층에 전시된 ‘세상의 시작’은 만물의 근원인 땅이 갖는 “두더지 게임처럼 끊임없이 솟아오르는” 생명력을 표현했다. 그림 속 땅 위에는 식물뿐 아니라 선풍기, 세면기, 변기 등 각종 생활 집기가 솟아난다. 인간 문명이 만든 온갖 물건들도 결국에는 스러져 흙으로 돌아가고, 그 흙에서 새로운 것이 탄생하는 과정을 돌아보게 한다. 지하 전시장으로 이동하면 ‘분수’ 연작이 관객을 사방에서 에워싼다. “모든 물방울을 놓치지 않고 표현하려고 집중했다”는 작가는 오르내리는 물줄기의 순간을 포착하며 탄생과 소멸을 은유한다. 산다는 것이 찰나에 불과하더라도 그 가운데 느껴지는 아름다움은 진실이 아니냐며. 작가는 “이 방에 들어서면 아무 생각이 없어지기를 바라면서 그렸다”고 말했다. 한지 위에 수묵화를 그리는 작가가 여러 겹 배접한 종이를 물에 흠뻑 적신 다음 철솔로 밀어내며 작업한 흔적도 유심히 볼 필요가 있다. 작가는 “종이의 물성 자체가 시각 언어를 만들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작업했다”고 설명한다. 한지를 몸과 그림이 만나는 무대로, 철솔질은 몸의 감각을 구현하는 통로로 본 것이다. 12월 3일까지. 무료.김민 기자 kimmin@donga.com}

“자판을 치는 것과 직접 쓰는 것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일주일에 한 번이라도 손으로 글씨를 써보면 어떨까요?” ‘2023 여초서예대전’에서 성인부 대상(문화체육관광부 장관상)을 받은 문용기 씨(61)는 ‘쓰기’의 매력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동아일보사와 인제군문화재단, 여초서예관이 공동 주최한 이번 대회에 참가한 문 씨는 순수캘리 부문에서 최고상을 받았다. 기존에 한글, 한문·전각, 문인화 부문이 있었고, 올해 순수캘리가 신설됐다. 여초서예대전은 서예가 여초 김응현 선생(1927∼2007)을 기리는 서화경연대회로 서예 연구단체인 동방연서회와 동아일보사가 1961년 국내 최초로 개최한 휘호대회인 ‘전국 남녀 초중고등학교 학생휘호대회’에 뿌리를 두고 있다. 여초서예대전은 9월 2일 성인부(20세 이상)와 기로부(70세 이상)가 참여한 ‘제9회 여초전국휘호대회’와 초등부 및 중고등부가 참여한 ‘제46회 전국학생휘호대회’로 나뉘어 열렸다. 문 씨는 주요한(1900∼1979)의 시 ‘샘물이 혼자서’를 주제로 골랐다. 그는 “그날따라 이 주제가 눈에 들어와 평소 즐겨 그리던 대나무를 시 옆에 그려 넣었다”며 “대나무는 흑백이 확연히 드러나도록 표현했다”고 말했다. 수상작 ‘샘물이 혼자서’는 묵의 농담을 달리하며 그린 대나무와 생동감을 지닌 글이 멋스럽게 어우러진다. 그는 “캘리그래피를 하기 전 문인화를 먼저 시작했다”며 “사군자 중 하나인 대나무에 익숙하다”고 말했다. 그는 “서실 친구들과 가벼운 마음으로 대회에 참가했다가 큰 상을 받게 됐다”며 기뻐했다. 개인 사업을 하고 있는 그는 약 15년 전 친구의 권유로 강원 춘천시 춘천문화원에서 문인화를 배우기 시작했다. 이어 한글로 다양한 글씨체를 실험해 볼 수 있는 캘리그래피의 매력에도 빠졌다. 그는 “(캘리그래피는) 여성 선생님에게 배웠고, 선생님을 닮고 싶어 하다 보니 글씨체도 섬세한 편”이라며 웃었다. 그는 묵향을 맡아 가며 한 자 한 자 글씨를 써보는 경험이 지금처럼 모든 것이 빨리 돌아가는 시대에 큰 즐거움이자 매력이 될 수 있다고 했다. “타자를 치지 말고 (글씨를) 써보라는 이야기를 젊은 친구들에게도 많이 하고 있습니다. 붓끝에서 나오는 자기만의 선이 있거든요. 또 먹물은 까만색이지만 물의 양에 따라 여러 가지 색을 낼 수 있어 그 변화를 보며 그리고 쓸 수 있다는 것이 엄청난 정서적 경험이 됩니다. 집중하는 경험도 정신적으로도 큰 도움이 되고요.”김민 기자 kimmin@donga.com}

유럽 미술 거장 렘브란트 판레인(1606∼1669)의 판화가로서의 면모를 볼 수 있는 전시가 대구 수성구 대구미술관에서 지난달 31일 개막했다. 미술관이 네덜란드 렘브란트순회재단과 벨기에 판화 전문 미술관 뮤지엄 더레이더와 협업한 전시다. 이 미술관에선 미국 미니멀리즘 예술의 대표 작가 칼 안드레(88)의 작품을 볼 수 있는 기획전도 함께 열리고 있다. 작가가 아시아에서 개최한 첫 개인전이다.● 동판화의 역사를 바꾼 렘브란트대구미술관 1전시실에서 열리는 2023 해외교류전 ‘렘브란트, 17세기의 사진가’는 렘브란트의 동판화 120여 점을 소개한다. 지금까지 확인된 렘브란트의 동판화가 300여 점인 것을 감안하면 작품 수가 적지 않다. 작품들은 △자화상 △거리의 사람들 △성경 속 이야기 △장면들 △풍경 △습작 △인물·초상 등 7개 주제로 분류했다. 특히 ‘자화상’과 ‘거리의 사람들’ 섹션에서 렘브란트가 인물 묘사를 생생하게 하기 위해 고민하는 과정을 엿볼 수 있다. ‘자화상’에선 렘브란트가 자신의 멋진 모습뿐 아니라 편한 모자를 쓰고 웃거나, 덥수룩한 머리를 하고 인상을 쓰는 표정 등 여러 표현을 연구했음을 알 수 있다. ‘거리의 사람들’에선 눈먼 바이올린 연주자, 떠돌이 농부 가족 등 길 위의 풍경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작품을 볼 수 있다. 작가가 인간의 모습에 대한 현실적 탐구를 통해 성경을 다룰 때도 교리를 넘어 사람 이야기로 풀어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정희 대구미술관 학예연구사는 “다른 작가라면 ‘착한 사마리아인’을 주제로 여관 주인에게 돈을 건네는 성경 속 이야기만 부각했을 텐데, 렘브란트는 우물에서 물을 긷는 여자, 볼일을 보는 강아지 등을 묘사해 현실 속 풍경처럼 연출했다”며 “그 시대 풍경을 사진을 찍듯 사실적으로 기록했다는 의미에서 전시 제목을 ‘17세기의 사진가’라고 붙였다”고 말했다. 이 밖에 붉은색 잉크와 검은색 잉크로 각각 찍은 작품 ‘의족을 하고 있는 거지’, 에칭과 드라이포인트(판면을 예리한 철침으로 긁는 기법) 등 다른 기법을 과감히 결합한 ‘얀 루트마, 금세공인’ 등 렘브란트가 새로운 기술을 실험한 흔적도 볼 수 있다. 이 학예연구사는 “일부 미술사가들은 렘브란트가 동판화의 역사를 바꿨다고 할 정도로 중요하게 평가한다”며 “그러한 면모에 초점을 맞춰 전시를 구성했다”고 설명했다. 내년 3월 17일까지.● 칼 안드레, 쌓아올린 향나무-나열한 강철판 작품 공개칼 안드레 개인전이 열리는 대구미술관 어미홀은 미술관 중앙의 높이 18m, 너비 15m, 길이 50m 규모 공간이다. 이 전시는 동시대 미술 동향을 소개하는 2023 어미홀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마련됐다. 안드레는 1960년대 초반 미국을 중심으로 전개된 미니멀리즘의 대표 작가다. 미니멀리즘은 단순함과 간결함을 추구하는 한편 현상학을 받아들여 ‘작품은 보는 사람이 받아들이는 바가 중요하다’는 미학을 펼쳤다. 작품들은 나무 금속 벽돌 등 단순한 재료만으로 만드는 경향이 있다. 이번 전시에선 서양 향나무 21개를 쌓은 ‘메리마운트’를 비롯해 ‘4번째 스틸 스퀘어’, ‘벨지카 블루 헥사큐브’ 등 산업 재료를 그대로 배치한 작품들을 만날 수 있다. 강철판 21개를 나열한 ‘라이즈’는 관객이 위로 직접 걸어볼 수 있는 작품이다. 시간이 흘러 녹슨 쇳내가 미세하게 풍겨오는 가운데 자신의 감각에 집중하는 경험을 할 수 있다. 12월 31일까지. 미술관 입장료 700∼1000원.대구=김민 기자 kimmin@donga.com}

소설 ‘영원한 이방인’(1995년), ‘척하는 삶’(1999년) 등을 통해 미국에서 디아스포라 문학의 대표 작가 중 한 명으로 꼽히는 저자의 9년 만의 신작이다. 저자의 여섯 번째 장편소설이기도 한 이번 작품의 주인공은 20대 청년 틸러 바드먼이다. 이전 소설의 주인공들이 외부인 취급을 받는 아시아계 미국인, 위안부 가해자인 일본인 군의관 등 색깔이 뚜렷한 캐릭터인 데 비해 이번 주인공은 불투명하다. 틸러는 한국인의 피가 8분의 1 정도 섞여 있지만, 외모로는 혈통을 알아차리기 어렵다. 그는 자신이 사는 곳을 ‘스태그노’(액체가 고여 흐르지 않는 상태), 즉 어떠한 변화도 없는 고인 물이라 부르며 이곳에서 30대의 미스터리한 여성 벨과 그의 8세 아들 빅터 주니어와 함께 산다. 소설은 틸러가 스태그노에 사는 현재와, 중국인 사업가 퐁 로우를 만나 해외로 떠나는 1년 전 시점을 번갈아 가며 다룬다. 과거 시점에서 틸러는 부유한 자산가가 몰려 사는 대학도시 ‘던바’에 살다가 퐁을 만나며 아버지를 떠나 중국 선전, 마카오, 홍콩 등 이국으로 표류한다. 그 후 벨을 만나고 서로의 과거에 대해 묻지 않은 채, ‘요리 천재’인 빅터 주니어를 따라 밖의 세계로 차츰 나간다. 두 이야기의 공통점은 틸러가 지겨울 정도로 평온한 세계에 살다가 감각에 이끌려 균형을 깨고 낯선 세계로 자신을 내던진다는 점이다. 과거의 영웅 소설이 뚜렷한 목적의식을 갖고 도전에 나서는 주인공 서사를 담았다면, 이 소설은 그러한 성취보다 순간의 감각을 앞세운다. 틸러는 끊임없이 무언가를 맛보고 탐닉하고 경험하며 자신을 세계 속에 푹 적신다. 작품에서 음식은 중요한 역할을 한다. 9년 만의 신작에서 작가는 본질이 무엇인지, 뿌리는 어디에 있는지, 그 무엇도 확신할 수 없는 시대의 새로운 인물 서사를 시도한다. 무언가를 성취하려는 게 아니라, 맛보고 느끼는 살덩이로 살아가는 과정 자체를 찬미한다. “나는 삶으로부터 사라지는 게 아니라, 삶 속으로 사라지고 싶었다”는 말처럼, 세계와 부딪치고 쓰러지는 과정에서 진정한 ‘나’를 찾기를 바라면서.김민 기자 kimmi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