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운

김상운 기자

동아일보 국제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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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와 학술 분야를 취재하고 있습니다. 단행본 ‘국보를 캐는 사람들’(글항아리)을 냈고, 고고학 유튜브 채널 ‘발굴왕’을 제작했습니다. 동아시아 역사에 관심이 많습니다.

sukim@donga.com

취재분야

2025-11-06~2025-12-06
칼럼48%
문학/출판17%
역사10%
미술7%
국제일반3%
중동3%
미국/북미3%
국제정세3%
문화 일반3%
대통령3%
  • 경복궁 취향교, 제자리 찾는다

    60년 넘게 잘못 복원된 채 방치된 ‘경복궁 취향교(醉香橋)’가 제자리를 찾을 수 있게 됐다. 문화재청 산하 국립강화문화재연구소는 “최근 발굴 조사를 통해 향원정 북쪽에 있던 취향교의 원위치를 확인했다”고 6일 밝혔다. 향원정 북쪽에서 취향교의 기초로 보이는 적심(積心)과 나무기둥, 진입로의 흔적을 찾은 것이다. 문화재 당국은 6·25전쟁으로 파괴된 취향교를 1953년 복원하면서 향원정 남쪽의 함화당(咸和堂)과 잘못 연결했다. 본래 취향교는 1873년 건립 당시 향원정 북쪽의 건청궁과 연결돼 있었다. 이는 경복궁 중건 직후인 1890년대에 작성된 ‘북궐도형(北闕圖形)’에서 확인할 수 있다. 실제로 발굴 조사 이전에도 취향교와 이어진 기초석을 향원정 북쪽에서 관찰할 수 있었다. 문화재청은 취향교가 정반대 방향으로 복원된 사실을 알고 있었으나 2012년 3월 향원정을 보물로 지정할 당시 별도의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동아일보는 3년 전 새누리당 서용교 의원실의 국정감사 자료를 인용해 취향교 복원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한편 연구소는 발굴 조사에서 취향교의 난간이 본래 곡선 형태였으며, 교각이 네 열로 구성됐던 사실도 확인했다. 일제강점기 때 취향교를 헐고 그 자리에 다리를 새로 놓은 사실도 드러났다. 이 과정에서 다리를 떠받치는 기둥과 난간이 원형을 잃은 걸로 조사됐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 2017-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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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의 인디아나존스들]둥근고리칼-쇠갑옷… 재갈… 백제 전사들의 魂을 만나다

    《지난달 31일 충북 오송역에서 차로 30분. 청주 북서쪽 외곽에 이르자 야트막한 봉분들이 이어진 능선이 보였다. 동네 뒷산 같은 아늑한 분위기랄까. 왕릉급인 ‘고령 지산동 고분군’(본 시리즈 20회) 같은 웅장한 스케일은 아니다. 국내 최초로 백제 재갈과 발걸이가 출토돼 고고학계로부터 크게 주목받은 ‘청주 신봉동 유적’이다.》  동행한 차용걸 충북대 명예교수(67)가 한마디 거든다. “여기엔 백제 장수도 있지만 지름이 1m도 안 되는 조그마한 무덤에 묻힌 서민들도 함께 잠들어 있습니다. 왕릉 부장품처럼 화려하진 않지만 어디서도 볼 수 없는 백제 전사들의 생생한 흔적이 담긴 현장이죠.”○ 삼국시대 격전지 전사들의 무덤 1992년 7월 중순 무더운 여름날. 충북대 박물관 발굴팀은 도굴로 인해 처참한 몰골을 드러낸 무덤들을 조사하고 있었다. 매의 눈으로 지표를 샅샅이 훑던 조사원들의 시야에 살짝 드러난 고분 일부가 들어왔다. 상당한 크기의 목곽 무덤이었다. 이미 도굴 갱이 뚫려 있어 큰 기대를 접었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말벌 통을 제거하고 땅을 파기 시작했다. 20∼30cm를 파들어 갔을까. 길쭉한 모양의 금속 물체가 윤곽을 드러냈다. 당시 박물관 학예부장이던 차용걸이 손잡이 부분의 까만 녹을 긁어내자 순간 하얀 빛이 번쩍했다. 고대 지배층이 애용한 둥근고리칼(환두대도)의 ‘은장식’이 분명했다. 붉은색 점토층에 칼이 단단히 박혀 있는 바람에 발굴팀은 대도를 흙과 함께 통째로 파냈다. 흥미로운 것은 칼의 끝이 ㄱ자로 휘어 있었다는 점이다. 차용걸의 회고. “이런 형태의 칼은 처음이었습니다. 어떤 연유에서 끝이 휘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부장 당시 일부러 그랬을 가능성이 있어요. 청동기시대에도 주술적 의미에서 동기를 일부러 부러뜨려 묻은 게 많은데 비슷한 맥락이 아니었을까요.” 신봉동 유적이 독특한 건 조사된 300여 기의 무덤 가운데 무기나 마구(馬具)가 묻힌 비율이 거의 20%에 육박한다는 점이다. 쇠 갑옷과 투구, 둥근고리큰칼, 손칼, 화살촉, 창, 발걸이, 재갈 등 총 1300여 점의 철기 유물이 쏟아졌다. 그래서 학계에서는 이곳을 “백제 전사들의 공동묘지”라고 부른다. 요즘으로 치면 현충원 군인묘역과 비슷할까. 학계는 전사들이 4, 5세기 한반도 중부지역을 둘러싼 삼국의 치열한 전투에서 희생된 걸로 추정한다. 이곳은 한강 유역에 왕성을 둔 백제가 남쪽의 신라를 공략하기 위한 길목이자 중요한 군사거점이었다.○ 마한과 백제가 빚은 문화 답사를 마치고 고분군 바로 아래 들어선 청주백제유물전시관을 찾았다. 청주 출신 도종환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야인 시절 홍보 동영상에 나와 선보이는 ‘손잡이잔(파수배·把手杯)’이 단연 눈길을 끈다. 한쪽에만 손잡이가 달려 머그 컵처럼 생긴 이 잔은 4, 5세기 백제 중앙에서는 거의 발견되지 않는다. 하지만 신봉동 고분에서는 여러 개가 발견돼 백제에 복속되기 전 마한 토착 지배층의 문화로 해석된다. 반면 다리가 세 개 달린 그릇인 삼족기(三足器)나 돌방무덤(석실분) 등은 한성백제의 영향이다. 차용걸은 “3, 4세기 조성된 인근 청주 송절동이나 봉명동 고분은 백제의 지배를 받기 전 마한 토착세력의 문화를 반영하는 반면에 신봉동 고분은 백제화가 진척된 모습을 보여준다”고 분석한다. 일본계 토기인 스에키와 가야, 신라 토기들이 신봉동에서 발견된 것도 의미가 작지 않다. “백제가 가야를 거쳐 일본과 교류하는 과정에서 청주지역이 가교 역할을 했다고 봅니다. 전사들의 무덤에도 국제 문화교류의 흔적이 오롯이 남아있는 거지요.”●한국의 인디아나존스들청주=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 2017-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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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로크 군주의 ‘도자기 집착’… 어느 쪽이 중국 자기일까?

    서세동점(西勢東漸)이 본격화된 18세기에도 중국 도자기에 대한 유럽의 열등감은 여전했다.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진행 중인 ‘왕이 사랑한 보물―독일 드레스덴박물관연합 명품전’의 가장 안쪽 전시실에 들어서면 흥미로운 공간이 나온다. 17, 18세기 중국 청나라에서 수입한 도자기와 이를 복제한 독일 마이센 자기를 일대일로 비교 전시한 것이다. 대접부터 청자, 화려한 채색 자기에 이르기까지 얼핏 보면 어떤 게 중국 자기인지 쉽게 분간이 안 간다. 왕명에 따라 중국 자기를 본떠 채색한 뒤 유약을 입힌 옛 독일 장인들의 솜씨가 대단하다. 이번 전시는 17세기 말∼18세기 초 독일 작센지방 선제후 겸 폴란드 왕으로 군림한 ‘강건왕 아우구스투스(1670∼1733)’의 수집품을 선보이는 자리다. 신성로마제국 황제를 꿈꾼 강건왕답게 왕의 권위를 뽐내는 화려한 바로크 공예품들이 관객들의 시선을 잡아끈다. 예술에 대한 그의 집착은 16세기 초부터 유럽 왕가와 귀족들을 사로잡은 중국 도자기에 대한 도전으로 이어졌다. 나란히 전시된 마이센 자기는 아우구스투스가 1710년 독일 작센지역에 세운 유럽 최초의 도자기 공장에서 생산된 것들이다. 그러나 100% 복제는 그때나 지금이나 불가능할 터. 빛이 투과할 수 있을 정도로 자기를 얇게 구워내야 하는 중국의 등롱(燈籠·등불을 켜는 기구)은 마이센 자기가 도저히 넘볼 수 없는 경지에 있었다. 얇은 자기는 가마 안에서 높은 열기를 견디지 못하고 깨지기 십상이다. 독일 장인들은 3년 넘게 실험을 거듭했지만 결국 환한 빛을 비추는 중국의 등롱을 재현하는 데 실패했다. 전시실에선 둔탁한 빛만 간신히 통과시키는 마이센 등롱을 볼 수 있다. 그렇다고 유럽의 저력을 결코 무시할 순 없다. 상아와 금, 은, 청동 등으로 만든 정교한 세공품은 눈을 떼기 힘들 정도로 화려하다. 특히 18세기 작센 선제후들이 상아를 물레에 돌려 세공하는 공예기술을 필수로 익힌 사실이 흥미롭다. 기술을 천시하지 않고 몸소 체험한 바로크 군주의 모습에서 동서양의 차이를 엿볼 수 있지 않을까. 다음 달 26일까지. 1688-0361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 2017-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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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근혜 정부 청와대, ‘박정희 풍자 연극’ 결말까지 바꿨다?

    박근혜 정부 시절 청와대가 박정희 전 대통령을 풍자한 연극의 결말까지 바꾸는데 개입한 사실이 새로 드러났다.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진상조사위원회는 30일 기자간담회를 열고 “블랙리스트에 올랐던 박근형 연출의 연극 ‘개구리’가 국립극단에서 초연될 당시 문화체육관광부가 대본 내용을 사전 검열하고 결말을 바꾸도록 요구한 사실이 드러났다”고 밝혔다. 해당 연극은 2013년 9월 당시 김기춘 청와대 비서실장이 수석비서관 회의에서 “용서가 안 되는 연극”이라고 강하게 비판한 바 있다. 진상조사위가 이날 공개한 문체부 문건 ‘국립극단 기획공연 개구리 관련 현안 보고’에 따르면 “(해당 연극이) 일부 정치 편향적이라 오해될 소지가 존재한다”며 “당초 극본 초안에는 그분(노무현 전 대통령)을 지상으로 모시고 오는 결론이었고 정치적 풍자 및 표현 등이 과도했다”고 적시돼 있다. 이어 “연출가로 하여금 결말을 수정토록 하고 과도한 정치 풍자를 대폭 완화토록 지도하는 등 문제의 소지를 최소화하도록 조치했다”고 썼다. 문체부가 블랙리스트에 오른 박근형 연출가에게 연극 대본의 결말을 수정토록 한 사실이 새로 드러난 것이다. 실제로 연극에서는 노 전 대통령을 상징하는 그분 대신 저승에 있는 동자승의 어머니가 이승으로 돌아오는 것으로 그려졌다. 김준현 변호사(진상조사위 제도개선소위 위원장)는 “예술 활동에 대한 사전 검열이 조직적으로 이뤄진 증거”라며 “블랙리스트에 따른 지원배제뿐만 아니라 작품내용에 대한 개입도 있었음을 알 수 있다”고 말했다. 이 문건은 2013년 9월경 문체부 공연전통예술과가 작성한 걸로 조사됐다. 앞서 그달 3일 연극 ‘개구리’가 공연에 들어갔으며, 9일 김기춘 실장의 비판발언이 나왔다. 이에 따라 진상조사위는 문체부가 ‘개구리’에 대한 대본 수정조치 결과를 문건으로 작성해 청와대에 보고한 것으로 보고 있다. 진상조사위는 문체부 산하 한국문학번역원 지원사업에 블랙리스트에 오른 신경림 시인과 박범신 소설가 등이 배제된 사실도 확인했다. 이시영, 김수복 시인은 2016년 2월 미국 하와이대와 UC버클리대 한국문학행사 지원에서 배제됐으며, 신경림 시인과 박범신 소설가는 지난해 9월 중국 항저우 한국문학행사에서 제외됐다. 이밖에 박명진 전 문화예술위원장과 박계배 예술인복지재단 대표가 김종덕 당시 문체부 장관에게 블랙리스트 진행상황과 대응책을 보고한 문건도 공개됐다.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 2017-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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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시대 서원 아래 깔려있던 고려사찰 영국사 실체 드러나

    조선시대 서원 아래 깔려있던 고려사찰 영국사(寧國寺)의 실체가 분명하게 드러났다. 불교문화재연구소는 “서울 도봉구 도봉서원(道峯書院) 발굴현장에서 탁본 일부만 전하는 영국사 혜거국사비(慧炬國師碑)의 원본 조각을 찾아냈다”고 27일 밝혔다. 이 비석 조각은 길이 62㎝, 폭 52㎝, 두께 20㎝로 총 281자의 한자가 새겨져있다. 정으로 훼손된 부위를 제외한 256자를 해석한 결과, 이곳이 영국사라는 사실과 혜거국사의 정확한 법명(法名)을 파악할 수 있게 됐다. 지금껏 학계에선 영국사의 위치를 놓고 이견이 있었으며, 혜거국사 법명도 동명이인의 다른 고려 국사였던 갈양사 혜거(惠居)국사와 혼동이 있었다. 도봉서원은 선조 6년(1573년) 개혁사상가 조광조(1482~1519)를 추존하기 위해 세워진 곳으로, 16세기 숭유억불 분위기에서 고려사찰 영국사 터 위에 건립됐다. 실제로 발견된 혜거국사비 곳곳에 일부러 훼손한 흔적들이 보인다. 사찰에 쓰였던 각종 석재를 해체해 서원 건립에 재활용한 사실도 드러났다. 앞서 3년 전 이곳에서는 보물급 이상으로 평가되는 금강저(金剛杵·불교의식에 사용되는 용구)와 금강령(金剛鈴·금강저에 붙는 방울) 등 청동유물 77점이 무더기로 출토된 바 있다. 이번에 새로 확인된 비석과 더불어 영국사의 높은 위상을 보여주는 유물들로 평가된다. 특히 이번 발굴에서는 통일신라시대 기단과 기와(중판선문 기와)가 확인돼 영국사가 늦어도 9~10세기경에는 존재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박찬문 불교문화재연구소 팀장은 “영국사는 통일신라시대부터 고려를 거쳐 조선 초까지 명맥을 이어온 유서 깊은 사찰이었음이 밝혀졌다”며 “금당 앞 석탑 추정지를 확대 발굴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비석을 통해 영국사 혜거국사는 10세기경 중국 유학을 다녀와 고려 전기 법안종을 전파한 승려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법안종은 고려 광종이 불교를 개혁하고 선교(禪敎) 양종을 통합하기 위해 도입한 종파다. 혜거국사는 법안종을 창시한 법안문익(885~958)의 제자이기도 하다.김상운 기자sukim@donga.com}

    • 2017-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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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근대화 노력” “망국 책임”… 대한제국 역사논쟁 불붙다

    “대한제국은 정치적 측면에서 시대에 역행했다. 민권 확대로 변혁이 이뤄져야 하는데 오히려 황제 권력을 강화했다.”(한철호 동국대 교수) “대한제국은 무능해서 자력으로 근대화할 수 없는 나라였다는 인식은 일제가 국제사회를 상대로 퍼뜨린 왜곡에서 비롯됐다.”(이태진 서울대 명예교수) 최근 문화재청 산하 국립고궁박물관이 주최한 ‘대한제국, 부국강병한 근대적 자주국가를 꿈꾸다’ 학술회의에서는 역사학자들이 격한 언쟁을 주고받았다. 이달로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한 지 120주년을 맞아 기획된 행사였다. 대한제국에 대한 평가는 학계에서 여전히 ‘뜨거운 감자’다. 앞서 문화재청은 142억 원을 들여 대한제국과 관련한 덕수궁 석조전과 중명전, 환구단을 잇달아 복원했다. 하지만 일반인들 사이에선 대한제국의 무능이 망국으로 이어졌다는 비판이 꾸준히 제기된다. 진실은 뭘까. 대한제국 재평가론자들은 고종의 자강(自强) 노력을 강조하며 망국의 책임은 대한제국이 아닌 일본 제국주의에 있다고 본다. 대표적인 재평가론자인 이 명예교수는 ‘대한제국의 산업근대화와 중립국 승인 외교’ 논문에서 열강들을 상대로 전시(戰時) 중립국 지위와 차관을 얻기 위한 고종의 외교적 노력을 강조하며 “대한제국은 결코 무능해 멸망을 자초한 나라가 아니었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특히 1902년 체결된 영일동맹이 대한제국의 투쟁을 저지하기 위해 일제가 영국 정부를 설득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대한제국의 자구책이 수포로 돌아간 건 국제사회에서 일본의 집요한 방해 때문이라는 것이다. 한 교수는 ‘대한제국기 대미관계 및 주미 공사관의 활동’ 논문에서 “망국의 책임을 일제의 탓만으로 돌리는 것은 자기 합리화에 지나지 않는다”고 반박했다. 과연 대한제국이 주어진 여건에서 최소한의 국가운영 능력을 갖췄는지 자성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한 교수는 중립국 승인 외교 노력에 대해서도 “일본 방해가 치밀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군사력의 뒷받침 없이 중립국 외교에 매달린 정책은 안일했다”고 지적했다. 대한제국 비판론자들은 일제의 방해로 대한제국이 개혁할 시간이 부족했다는 재평가론자들의 주장도 받아들이지 않는다. 클라우스 디트리히 홍콩교육대 교수는 ‘대한제국을 둘러싼 경쟁’ 논문에서 “1895년 청일전쟁이 끝난 이후 1904년 러일전쟁이 발발하기 전까지 러시아, 일본을 포함해 어떤 나라도 한반도에 대한 헤게모니를 장악하지 못했다”며 “이 시기에 몇 가지 지정학적 시나리오를 전개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려 있었다”고 분석했다. 약 10년에 걸쳐 한반도에서 열강들의 세력 균형이 이뤄진 만큼 대한제국의 주체적인 외교가 가능했다는 얘기다. 대한제국에 대한 평가는 일제강점기를 포함한 한국 근현대사 전반에 대한 시각과 직결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재평가론자들은 대한제국 국호의 일부를 이어받아 ‘대한민국’이 된 것처럼 대한제국 역사는 임시정부로 고스란히 계승됐다고 본다. 항일 의병과 안중근 의사 거사에 앞서 고종의 밀지가 전달됐다는 주장도 비슷한 맥락이다. 그러나 임정을 연구해온 한시준 단국대 교수는 “1917년 7월 박은식 신채호 조소앙이 발표한 ‘대동단결선언’에는 군주가 주권을 포기했으므로 국민이 주권을 행사해야 한다는 원칙이 명시됐다”고 말했다. 임정이 일부 복벽(復(벽,피))주의자들의 왕정 요구를 거부하고 민주공화정을 지향한다는 뜻을 명확히 선포했다는 것이다.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 2017-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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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종이비행기]경주 황룡사 터에 서서…

    얼마 전 부모님을 모시고 경북 경주를 다녀왔다. 유명 관광지라 방문 경험이 있을 것으로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았다. 황룡사와 분황사, 감은사 터는 팔십 평생 처음이라는 말씀이었다. 수학여행이나 효도관광으로 찾는 곳이 불국사, 석굴암, 천마총, 첨성대 등으로 한정돼 있기 때문이다. 거대한 왕실사찰 황룡사 터에 섰을 때 솔직히 막막했다. 명색이 문화재 담당 기자지만 주춧돌만 남은 황량한 풍경만 놓고 당시 모습을 묘사하는 게 쉽지 않았다. 금당과 목탑 터를 차례로 돌다 지난해 11월 개관한 황룡사 역사문화관을 찾았다. 상당수 유물이 복제품이었지만 전시시설은 만족스러웠다. 목탑 구조를 복원한 모형이나 목탑에서 내려다본 신라시대 왕경 재현은 주춧돌만으로 상상하기 힘든 부분을 흥미롭게 보여줬다. 관람 내내 마음에 찜찜한 구석도 있었다. 지난해 4월 역사문화관 공사 과정에서 통일신라 유적이 파괴됐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주춧돌만 덩그러니 보여주는 게 능사는 아닐 거다. 문화재를 온전히 보존하는 동시에 제대로 활용하는 묘수를 찾기란 참 쉽지 않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 2017-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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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앙박물관 유물 4만점 내년 ‘고향’으로

    서울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4만4000여 점의 유물이 내년 말까지 지방 국립박물관으로 대거 이관된다. 배기동 국립중앙박물관장은 취임 100일을 맞아 25일 열린 간담회에서 “중앙박물관이 갖고 있는 유물이 (지방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고 질도 높다”며 “각 지방 국립박물관의 대표 브랜드가 될 수 있는 유물들을 이관해 관람객들을 끌어들이겠다”고 밝혔다. 출토지가 분명한 유물들을 해당 지방 박물관으로 보내겠다는 것으로, 유물은 제자리에 놓여야 진정성이 있다는 문화재 보존 원칙에도 부합한다. 박물관에 따르면 내년까지 서울에서 지방 국립박물관으로 이관될 유물 4만4000여 점은 중앙박물관이 소장한 전체 유물의 약 11%에 달한다. 아직 구체적인 이관 품목이 결정되진 않았지만 박물관 안팎에서는 보물 제1359호 ‘경주 감은사 터 삼층석탑 사리장엄구(舍利莊嚴具·사리를 봉안한 공예품)’와 보물 제343호 ‘부여 외리 산수봉황 무늬벽돌’, ‘칠곡 정도사조탑형지기(淨兜寺造塔形止記·탑을 쌓은 내력을 적은 기록)’ 등이 이관 대상으로 거론되고 있다. 배 관장은 “모나리자를 보기 위해 파리 루브르박물관을 찾는 것처럼 예컨대 공주의 무령왕릉 출토 유물이나 부여의 금동대향로를 지방 국립박물관으로 이전해 브랜드화하는 전략을 세울 것”이라고 설명했다. 문화재의 본래 자리를 되찾는 동시에 지역주민들의 문화 수요를 충족한다는 점에서 바람직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학생이나 어린이를 위한 별도의 관람공간을 조성하겠다는 계획도 밝혔다. 그는 “어린이와 어른이 한 공간에 있다 보니 간섭작용이 일어난다”며 “관람객들이 집중력 있게 유물을 감상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겠다”고 말했다. 내년 고려 건국 1100주년을 맞아 준비하는 ‘대고려전’과 더불어 국사편찬위원회와 손잡고 고려시대 금석문에 대한 연구를 추진하고 있다는 내용도 소개했다. 올해 말 국립경주박물관을 시작으로 전국 지방 박물관들이 고려 관련 전시를 잇달아 개최할 예정이다. 배 관장은 “우리 민족과 인류의 기원을 주제로 한 이른바 ‘인류의 여명’ 전시도 추진하고 싶다”고 덧붙였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 2017-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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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획 한획, 닮은듯 다른…

    한자 문화권인 한중일은 예부터 붓을 사용한 독특한 서체를 발전시켰다. 이 중 한국과 일본은 한글과 가나를 각각 창안해 이에 적합한 고유 서체를 만들었다. 진귀한 고서(古書)들을 통해 삼국의 서체를 한자리에서 감상할 수 있는 ‘한중일 서체 특별전’이 최근 서울 용산구 국립한글박물관에서 열렸다. 중국 은허박물관에서 정밀 복제한 갑골문은 글씨 바탕이 된 거북이 뱃가죽의 형태가 완연하다. 기원전 1300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한자 원형답게 복잡한 부호를 닮은 자형들이 독특하다. 중국학계에 따르면 제사와 전쟁, 사냥, 질병에 대한 내용이 주로 적혀 있다. 원소장품에 대한 대여를 추진했으나, 사드 논란에 따른 영향으로 복제품이 전시됐다. 일본 자료에서는 1527년 쓰인 ‘이세 이야기(伊勢物語)’가 눈길을 끈다. 오늘날 소설과 비슷한 양식의 이 책에는 한 남자가 우연히 마주친 아름다운 여인에게 자신의 옷을 찢어 시를 적어 보낸 이야기 등이 적혀 있다. 낭만적인 내용답게 필체가 호방하고 선의 변화가 다채로운 것이 특징이다. 1798년 정조가 큰외숙모에게 쓴 한글 편지도 이채롭다. 스스로를 조카라고 칭하며 외숙모의 안부를 살뜰히 챙기는 내용이다. 글에 담긴 정갈한 서체에 꼿꼿한 철인군주의 성품이 오롯이 담겨 있다. 훈민정음언해본과 월인석보 등 초기 훈민정음 글씨체를 볼 수 있는 판본들도 볼 수 있다. 마치 아이들이 제멋대로 휘갈겨 쓴 것 같은 옛 필사본 소설의 서체도 인상적이다. 전시품에 대한 상세 설명을 별도의 전자 모니터에 담아 서체 관람에 집중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내년 1월 21일까지. 02-2124-6455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 2017-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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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단독]와타나베 쇼고 “밀반출 조선 묘지, 한국에 있는게 맞다”

    “불법으로 반출된 문화재를 갖고 있으면 업계에서 축출돼 결국 문을 닫아야 합니다.” 최근 서울 중구 롯데호텔에서 만난 일본 고미술상 와타나베 쇼고(渡邊祥午·51) 씨는 ‘이선제 묘지(墓誌·죽은 사람의 행적을 새긴 것)’ 국내 환수에 도움을 준 이유를 묻자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이 묘지는 조선 전기 고위관직을 지낸 이선제(1390∼1453)의 생애를 분청사기에 새긴 것으로 독특한 양식으로 제작돼 보물급 이상의 가치를 지녔다고 평가된다. 와타나베 씨는 묘지 소장자였던 고(故) 도도로키 다카시(等等力孝志) 씨의 미술품 거래 대리인으로 고인에게 한국 반환을 설득했다. 강임산 국외소재문화재재단 협력지원팀장은 “와타나베 씨의 도움으로 임종을 눈앞에 둔 소장자를 병원에서 만나 무상기증을 제안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이선제 묘지는 무덤에서 도굴된 뒤 1998년 한국 고미술상들에 의해 일본으로 밀반출됐다. 불법으로 팔아넘긴 문화재를 원래 자리로 돌려놓기까지 양국의 일부 고미술상들이 정확히 반대 방향으로 관여한 아이러니한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자국(自國) 문화재도 아니고 거래 수익과 무관한 문화재 환수에 와타나베 씨가 선뜻 도움을 준 까닭은 무엇일까. 그는 소장자의 명예와 3대째 내려온 가업(家業)의 신조를 꼽았다. “불법 반출 문화재는 소장자의 명예가 달린 문제죠. 고객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동시에 그의 평판을 지키는 게 제 의무이자 조부 때부터 원칙입니다.” 그가 운영하는 고미술품 거래업체 와타나베산포도(渡邊三方堂)는 1924년 설립돼 “사고파는 쌍방이 마음속 깊이 만족하고 사회에도 보탬이 돼야 한다”는 가훈을 3대째 고수하고 있다. 그의 집안은 한국 문화재와 인연이 깊다. 현재 삼성미술관 리움에 소장된 고려불화 ‘아미타삼존도’(阿彌陀三尊圖·국보 제218호) 거래에 그의 아버지가 도움을 줬다고 한다. 그는 “고 이병철 회장이 선친의 일본 사무소를 방문한 적이 있다”며 “저도 아모레퍼시픽에 소장된 고려불화 ‘수월관음도’ 거래에 관여했다”고 했다. 양국 고미술 업계는 어떤 차이점이 있을까. 와타나베 씨는 업계의 독특한 구조와 행정제도를 예로 들었다. “일본에서는 미술품 거래 단체에 들어가야 매매 정보와 은행 융자를 받을 수 있습니다. 장물 취득 등 부정 거래를 하면 내부규정에 따라 단체에서 쫓겨나 생존할 수 없어요.” 고미술상들이 매년 정기적으로 경찰에 거래 내용을 보고하는 제도도 무시할 수 없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만약 거래 정보를 가짜로 써낸 사실이 드러나면 세무조사 등 각종 처벌이 뒤따른다. 고미술품 가격을 둘러싼 논란이 적지 않은 한국과 달리 일본은 비교적 합리적인 가격 결정 구조를 갖고 있는 것도 다른점이다. 와타나베 씨는 “한국 고미술 시장은 규모가 작아 담합이 이뤄지기 쉽다”며 “반면 일본에는 ‘도쿄미술클럽’ 같은 미술품 거래 단체가 전국에 5개나 설립돼 있어 적정 가격인지를 쉽게 체크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에게 이선제 묘지 환수에 대한 소감을 물었다. “묘지에 이름이 적혀있는 이선제의 다섯째 아들이 조선통신사로 일본으로 건너오는 도중 병에 걸려 숨졌다는 안타까운 사연을 들었습니다. 예부터 한국이나 일본이나 불이 나면 조상의 위패부터 모셨습니다. 묘지는 하나의 위패로 가문에도 매우 중요합니다. 늦었지만 광산 이씨 문중과 한국에 돌아가게 돼 다행입니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 2017-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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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불탄 숭례문’ 건축부재 3532점, 9년만에 본격 보존처리

    2008년 ‘숭례문 화재’ 당시 불에 탄 건축 부재들이 9년 만에 본격적인 보존 처리에 들어간다. 문화재청은 숭례문 피해 부재들을 18일 경기 파주시 전통건축부재보존센터로 이송을 시작했다. 이날 이송에 앞서 경복궁 내 창고에 보관된 부재들이 언론에 공개됐다. 부재들은 표면이 불에 타 까만 게 많았지만 기둥과 보, 공포 등 형태가 남아있었다. 특히 일부 목재는 단청 색상이 뚜렷했고, 봉황무늬가 새겨진 기와들도 여럿 눈에 띄었다. 부재 보존 관리를 맡은 문화재청 산하 전통건축수리기술진흥재단은 충격을 방지하기 위해 포장한 부재들을 무진동 차량에 실어 옮겼다. 피해 부재는 총 3532점으로 재단은 다음 달 17일까지 보존센터로 이송을 마친 뒤 세척, 소독을 진행할 예정이다. 부재 중에선 목재가 1888점으로 가장 많고 기와가 1060점, 못 등 철물이 584점 등이다. 보존 처리를 거친 부재들은 고건축 연구와 전시에 주로 활용되며, 이 중 상태가 양호한 것은 향후 숭례문 수리 때 사용될 계획이다. 올해 말 완공되는 보존센터에는 총 251억 원의 예산이 투입됐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 2017-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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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숭례문보다 倍 비싼 진해우체국? 경복궁 근정전이 겨우 32억?

    시장 가격으로 환산할 수 없는 문화재에 대해 국가기관이 산정한 자산가치는 얼마쯤 될까. 김병욱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문화재청과 국립중앙박물관으로부터 받은 자료에 따르면 사적 제291호 ‘창원 진해우체국’은 보험가가 534억392만 원에 이르는 것으로 조사됐다. 3위인 국보 제1호 숭례문(254억 원)의 두 배가 넘는 금액이다. 이 우체국은 1912년 완공된 근대문화재로 1만899m²의 면적이 사적으로 지정돼 있다. 사적 제443호 ‘구도립대구병원’은 보험가 485억6000만 원으로 2위에 올랐다. 이어 ‘구서울대 본관’(사적 제278호, 231억2000만 원)이 뒤를 이었다. 국보나 보물에 비해 사적의 보험가가 높은 것은 지정범위가 넓은 데다 다수의 건축물이 사적 안에 포함되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 고궁 내 전각들의 국유재산가액이 낮게 책정돼 복구비용을 충당하기 어렵다는 지적도 제기됐다. 16일 문화재청 국정감사에서 김석기 자유한국당 의원이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경복궁의 정전(正殿)인 근정전은 32억9000만 원의 국유재산가액이 산정됐다. 이어 교태전 16억8000만 원, 자경전 12억7000만 원, 수정전 8억8000만 원 순이었다. 보험금은 통상 국유재산가액의 70% 수준으로 지급된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 2017-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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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유재란 명량대첩때 쓴 ‘조란탄’ 발굴

    정유재란 당시 철이 없어 돌로 탄환을 제조해 왜군에게 맞섰던 조선 수군의 사정을 보여주는 유물들이 전남 진도와 해남 사이 명량해협에서 발견됐다. 문화재청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는 올해 5월 시작한 명량해협 수중 발굴조사 성과를 12일 공개했다. 이날 연구소가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올해 발굴에서는 돌을 둥글게 갈아 만든 지름 2.5cm 크기 조란탄(사진)이 처음 나왔다. 수중 탐사는 2012년 이후 5차례에 걸쳐 진행됐다. 조란탄은 조선 수군이 화약 20냥을 잰 지자총통으로 300발을 한꺼번에 쐈던 둥근 공 모양의 탄환이다. 조사 지점은 정유재란 시기 이순신 장군이 12척 배로 왜군 함대 133척을 물리친 울돌목에서 남동쪽으로 약 4km 떨어진 곳이다. 명량해전 직전 소규모 전투가 벌어졌으며 이순신 장군도 난중일기에서 ‘무수히 많은 조란탄을 쐈다’고 기록했다. 조란탄보다 크기가 큰 돌포탄, 기관총 방아쇠 구실을 한 노기(함선에 거치해 쓰는 석궁 형태 자동화기 쇠뇌의 방아쇠 부분) 등 다른 전쟁 유물도 함께 발굴됐다.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 2017-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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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종이비행기]옛 흔적 생생한 ‘화장실 고고학’

    지난달 경북 경주 ‘동궁과 월지’ 발굴 현장에서 발견된 ‘왕궁 화장실’ 유적을 취재할 때 “기생충 알이 나왔거나 땅을 팔 때 냄새가 났는지”를 연구원들에게 물어봤다. 2003년 전북 익산 왕궁리 유적을 발굴한 전용호 국립나주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관이 들려준 얘기가 문득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는 “당시 구덩이를 파면서 구린 냄새가 심하게 풍겨 의아했다”고 했다. 이에 발굴팀은 해당 구덩이의 흙을 채취해 분석했는데, 여기서 다량의 기생충 알을 확인했다. 삼국시대 공중화장실 유구가 국내 최초로 발굴된 것이다. 왕궁리 화장실 유적은 백제 사람들의 식생활을 파악할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했다. 채식 위주 식단에서 많이 감염되는 회충이나 편충이 주로 조사됐다. 해외 고고학계에선 생활 유적에서 출토되는 ‘똥 화석(분석·糞石)’을 중시한다. 기록이 없는 선사인들의 영양 상태나 식생활을 유추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되기 때문이다. 일본 학계에서는 이른바 ‘화장실 고고학’이라는 용어가 생길 정도다. 그동안 국내에선 화려한 부장품이 출토되는 고분 발굴에만 관심이 집중됐다. 하지만 옛사람들의 생생한 흔적은 오히려 화장실 같은 생활 유적에 남아있지 않을까.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 2017-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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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의 인디아나존스들]이성산성 주인, 백제냐 신라냐… 미스터리 풀어줄 목간 한 점

    “기술은 시간을 절대 추월할 수 없어요. 기술이란 때가 되어야 나타나는 겁니다.” ‘구루(Guru)’의 말은 짧고 단정적이지만 그 속에 힘이 있다. 단순한 교과서 지식이 아니라 수십 년 세월 자신이 경험한 산지식이 응축돼 있기 때문이다. 지난달 25일 땀을 뻘뻘 흘리며 도착한 경기 하남시 이성산성(二聖山城) 동문(東門) 터. 멀리 한강 일대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탁 트인 구릉 가장자리로 6m 너비의 바닥과 벽면을 감싼 석축이 보였다. 동행한 심광주 토지주택박물관장(56)이 안쪽 바닥 면에 솟아있는 두 개의 문지공석(門址孔石·기둥이 무너지지 않게 고정시키는 돌)을 조용히 가리켰다. 사각형의 큼지막한 돌에 원형의 구멍이 이중으로 파여 있다. 1500년 전 이 돌에 고정된 커다란 나무문을 신라 병사들이 두 눈을 부릅뜨고 지켰을 것이다. 그는 “이런 모양의 돌구멍은 전형적인 신라 석성에서나 볼 수 있다”며 “산성 쌓기는 건축과 토목 기술이 융합된 당대의 원천기술로 축성 방식을 들여다보면 누가 쌓았는지 알 수 있다”고 했다.○ 신라 관직명 적힌 목간(木簡) 출토 1990년 7월 초순 이성산성 1차 저수지 발굴 현장. 장마로 습한 현장은 자욱한 안개까지 깔려 시종 가라앉은 분위기였다. 3개월 동안 이어진 강행군으로 지친 연구원과 인부들은 말없이 땅만 팠다. 당시 50대 후반의 베테랑 작업반장(발굴 현장의 인력을 감독하는 사람) 임철웅이 깊은 침묵을 깼다. 지표로부터 2m 깊이에서 한자가 적힌 나무 쪼가리(목간)를 발견한 것이다. 소리를 듣고 뛰어온 당시 한양대박물관 책임조사원 심광주가 숨죽인 채 목간 글씨를 하나씩 확인했다. 해서체 달필로 쓴 간지(干支·연대)와 관직명이 뚜렷하게 보였다. 심광주의 회고. “3년 내내 학수고대하던 명문 자료를 처음 출토한 순간이었습니다. 산성 축성 시기와 주체를 파악할 수 있는 강력한 증거를 얻은 겁니다.” 목간에는 무진년(戊辰年) 간지와 남한성(南漢城) 지명, 도사(道使) 관직이 한꺼번에 적혀 있었다. 저수지에서 고구려나 백제 유물은 없었고 신라 것만 나온 걸 감안하면 무진년은 신라가 한강 일대에 진출한 이후인 608, 668, 728, 788년 중 하나라는 게 그의 견해다. 특히 도사는 신라 관직명으로 6, 7세기 자료에 주로 나타나기 때문에 함께 출토된 토기 양식을 고려하면 608년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신라 진흥왕이 백제로부터 한강 유역을 빼앗은 지 50여 년이 지난 시점이다. 삼국통일로 나가는 길목에 있던 신라는 아마도 남한강을 지척에 둔 이성산성에 강력한 방어진지를 구축했을 것이다. 목간의 출토 위치도 매우 중요했다. 1차 저수지는 지층상 성벽을 처음 쌓을 때 함께 조성된 사실이 확인됐는데, 목간은 저수지 바닥에서 불과 1m 높이에서 발견됐다. 이는 목간이 가리키는 연대가 이성산성이 축조된 시기와 근접해 있음을 보여주는 강력한 근거였다.○ “삼국 중 누가 쌓았나” 논란 발굴 전 학계는 이성산성을 백제 성곽으로 봤다. 지금도 학계 일각에선 백제로 보는 시각이 여전하다. 백제 왕도인 풍납토성, 몽촌토성이 이성산성에서 불과 5km 거리에 있는 데다 근처 미사리에서 백제 마을 유적이 나왔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다산 정약용도 이곳을 백제 하남위례성으로 추정했다. 2000년에는 고구려 관직명 ‘욕살(褥薩)’이 적힌 것으로 추정되는 목간과 고구려 자가 출토돼 고구려가 이성산성을 처음 쌓았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한강을 둘러싼 삼국의 경합을 재현하듯, 이성산성을 처음 축조한 주체를 둘러싸고 학계가 셋으로 갈린 셈이다. 그러나 유물과 유적이 가리키는 결론은 명확하다는 게 심광주의 견해다. 토성(土城) 중심의 백제 산성과 달리 전형적인 석성(石城)이고, 수직으로 쌓아올린 성벽이 무너질 것에 대비해 삼각형 단면의 석축을 성벽 하단에 덧대 쌓는 보축(補築)이 발견된 것도 이성산성이 신라 산성임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30년을 발굴했는데도 백제 유물이 거의 나오지 않아요. 신념처럼 믿는 것과 명확한 고고학 증거가 서로 다를 땐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이성산성 발굴은 성곽을 볼 때 위치나 역사적인 배경보다 기술에 더 주목해야 한다는 깨달음을 제게 줬습니다.” ●한국의 인디아나존스들하남=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 2017-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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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시구로 “노벨상 소식 듣고 가짜뉴스 아닌지 의심”

    “노벨상을 탈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다면 오늘 아침 머리라도 감고 나왔을 텐데요….” 5일(현지 시간) 영국 런던의 한 출판사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가즈오 이시구로는 자신의 노벨 문학상 수상이 전혀 뜻밖이라는 소감을 재치 있게 표현했다. 그는 “동시대의 위대한 작가들도 타지 못한 상을 내가 탔다고 하니 마치 사기처럼 느껴졌다”고도 했다. 앞서 그는 수상 직후 자택에서 가진 언론 인터뷰에서도 “에이전트로부터 수상 소식을 듣고 ‘가짜 뉴스’의 희생자가 된 게 아닌지 의심했다”고 말했다. 지난해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가수 밥 딜런이 열흘 넘게 아무런 입장을 내놓지 않은 것과 달리 이시구로는 수상 소감을 즉각 피력했다. 그는 BBC와의 인터뷰에서 “노벨 문학상 수상은 앞선 시대의 위대한 작가들이 남긴 발자취를 나도 따라 걷고 있음을 뜻한다. 대단한 영광이자 훌륭한 표창”이라고 했다. 이시구로의 수상 소식에 국내 출판시장은 곧바로 들썩였다. 서울 종로구 교보문고 광화문점은 7일 오전 9시 반에 개장하자마자 그의 책을 찾는 고객들로 붐볐다. 회사원 홍승범 씨(28)는 “노벨 문학상을 받은 작가라 화제가 되고 있다고 해서 일찍부터 서점을 찾았다”며 “대표작인 ‘남아있는 나날’과 ‘나를 보내지 마’에 특히 관심이 간다”고 말했다. 이 서점은 이시구로의 작품만 별도로 모은 판매대 2개를 새로 마련했다. 온라인 서점 예스24에 따르면 노벨 문학상 수상 전 일주일 동안 6권이 판매됐던 이시구로의 책은 수상 직후 이틀 동안에만 1944권이 팔렸다. 대표작 ‘남아있는…’과 ‘나를… ’은 예스24의 일별 종합베스트셀러 순위 1, 2위에 나란히 올랐다. 알라딘도 수상 전 한 달 동안 이시구로의 작품이 17권 팔렸으나 수상 직후부터 6일 오전까지 885권이 나갔다고 밝혔다. 한편 일본계 영국인인 이시구로의 선정 소식에 일본 열도는 뜨거운 반응을 보였다. 각 신문은 호외를 발행했고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도 즉각 “일본에도 많은 팬이 있다. 함께 축하하고 싶다”는 축하 메시지를 발표했다. NHK는 수상 직후 뉴스에서 작가의 출생지인 나가사키 거리의 시민들 반응을 전하고 대형서점마다 이시구로 코너가 단장되는 장면을 보도했다. 산케이신문은 “내 세계관에는 일본이 영향을 미치고 있다. 내 일부는 언제나 일본인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그의 발언을 비중 있게 전했다. 일부 매체는 50여 년 전에 그를 가르친 나가사키 지역 유치원 교사를 인터뷰하기도 했다. 91세의 이 교사는 “어린 이시구로가 동화책을 잘 읽었던 게 기억에 남는다”고 회고했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 도쿄=서영아 특파원}

    • 2017-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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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채널A ‘도시어부’, 예능 프로 새 강자로 떠올라

    낚시를 주제로 한 새로운 형식의 채널A 예능 프로그램 ‘나만 믿고 따라와, 도시어부’(매주 목요일 밤 11시·사진)가 방영 5회 만에 전국 기준 동시간대 종합편성채널 시청률 1위에 올랐다. 지상파 채널을 포함한 전체 8개 TV 채널 중에서도 2위를 기록해 예능 프로그램의 새로운 강자로 떠올랐다. 닐슨코리아에 따르면 5일 방영된 채널A의 도시어부는 전국 기준 3.916%의 시청률로, 같은 시간대 종편 4개사 프로그램 중 1위를 차지했다. 그동안 종편 예능에서 선두였던 JTBC ‘썰전’의 시청률은 전 회 4.621%에서 3.045%로 내려앉았다. TV조선 ‘시골빵집’은 1.085%, MBN ‘신동엽의 고수외전’은 0.991%에 머물렀다. 도시어부의 시청률은 SBS ‘내 방을 여행하는 낯선 이를 위한 안내서’(3.557%), KBS 2TV ‘해피 투게더’(3.410%) 등도 제쳤다. 지난달 7일부터 방영되기 시작한 도시어부는 배우 이덕화(66)와 개그맨 이경규(58), 힙합 래퍼 마이크로닷(25) 등 다양한 연령대의 연예계 낚시광들이 황금어장에서 겪는 에피소드를 다룬다. 5일 방송에서는 3회째부터 게스트로 출연 중인 배우 이태곤이 거제도에서 낚시하는 과정이 펼쳐졌다. 고전을 면치 못한 다른 출연자들과 달리 이경규는 문어와 오징어를 여럿 낚아 올려 타고난 어복을 입증했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 2017-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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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日帝가 옮긴 불상… “원래 고향 경주로”vs“권력상징 靑에 둬야”

    ‘청와대 불상’으로 알려진 석조여래좌상(石造如來坐像·서울시 유형문화재 제24호)은 말 그대로 구중궁궐에 깊숙이 감춰져 있다. 청와대 앞 검문소와 연풍문(방문객 출입구)을 차례로 통과해 비서동 앞에 들어서면 춘추관(청와대 출입기자실)으로 이어지는 큰길이 나온다. 이 길을 따라 한참을 걸으면 외국 손님을 맞는 상춘재가 보이며, 여기서 다시 직진해 대통령 관저 뒤쪽으로 가면 한자로 ‘天下第一福地’(천하제일복지·세상에서 가장 길한 명당)라고 새겨진 큰 바위가 있다. 바위에서 청와대 유일의 정자인 오운정 건너편으로 나아가면 단청 지붕의 보호각 아래 가부좌를 틀고 있는 불상을 볼 수 있다. 보안구역이라 청와대 관계자가 아닌 일반인이 가볼 수도 없다. 일제강점기인 1939년부터 80년 가까이 이 자리를 지킨 청와대 불상을 둘러싸고 최근 이전 논란이 불거지고 있다. 통일신라 당시 불상이 처음 들어선 천년고도(千年古都)로 돌려보내야 한다는 주장이 문화재계 일각과 경주지역을 중심으로 제기된 것이다. 그러나 권력의 중심에 있는 청와대의 상징성을 감안해 지금의 자리를 유지해야 한다는 반론도 만만치 않다. 광복 이후 이 불상은 청와대가 갖는 상징성과 맞물려 해프닝을 빚었다. 김영삼(YS) 대통령 시절 성수대교·삼풍백화점 붕괴, 서해 페리호 침몰, 아시아나 항공기 추락 등과 같은 대형 참사가 잇따르자 세간에는 “개신교 장로 출신 대통령이 청와대 불상을 치웠기 때문”이라는 흉흉한 소문이 나돌았다. 이에 청와대는 1994년 보안구역 안으로 출입기자들을 데리고 가 불상을 전격 공개했다. 새 정부 들어선 문재인 대통령 지시로 올 6월부터 문화재청이 청와대 불상의 국가문화재 지정을 추진하고 있다. 문화재청은 불상 이전과 국가문화재 지정은 별개 사안이라고 말하지만 문화재계는 이르면 연말 불상이 보물로 지정되면 이전 논의가 급물살을 탈 것으로 보고 있다. 청와대 불상은 기구한 내력만큼이나 탈(脫)권위와 일제 잔재 청산, 종교계 갈등의 복잡한 요소들이 잠복해 있다. 불상에 얽힌 사연을 하나씩 풀어본다.‘미남 불상’ 어떻게 생겼나 8, 9세기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걸로 추정되는 청와대 불상은 ‘미남불(美男佛)’로 불릴 정도로 용모가 수려하다. 시원한 이목구비와 떡 벌어진 어깨, 두툼한 팔과 손, 유연하게 흘러내린 법의(法衣) 자락 등이 석굴암 본존불을 닮았다. 이마에는 백호(白毫·양 눈썹 사이에 난 희고 부드러운 털) 흔적도 남아 있다. 최근 청와대 경내에 들어가 불상을 조사한 임영애 경주대 교수(불교미술사학)는 “보통 이 시기 불상은 얼굴이 제대로 남아있는 게 별로 없는데 청와대 불상은 코끝이 살짝 깨졌지만 전반적으로 보존 상태가 양호하다”며 “잘 만든 수작으로 보물급 가치가 충분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잘 보존된 몸체와 달리 불상을 떠받치는 받침대인 대좌(臺座)는 3분의 1만 남아있다. 이 시기 대좌는 위치에 따라 상·중·하대가 한 세트를 이루는데 청와대 불상은 현재 상대(上臺)만 있는 상태다. 그런데 최근 임 교수가 청와대 불상의 중대(中臺)가 국립춘천박물관에 보관돼 있다는 연구 결과를 내놓았다. 이에 따르면 미술사학자 신영훈 씨가 1961년 논문에서 밝힌 청와대 불상 중대의 실측치가 춘천박물관의 것과 거의 일치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중대가 적어도 1960년대까지는 청와대 불상과 함께 있었다는 얘기가 된다. 대좌의 가장 아랫단을 구성하는 하대(下臺) 없이 불상을 상대와 중대 위에 올려놓고 균형을 잡기는 힘들다. 이 때문에 중대를 따로 보관하던 중 어느 시점엔가 청와대 불상과 한 세트라는 사실이 잊혀진 것으로 보인다. 임 교수는 “2002년 국립춘천박물관이 개관하면서 별도 보관된 중대를 옮긴 사실이 확인된다”고 설명했다. 이와 관련해 하대는 일제강점기에도 존재하지 않았던 걸로 보인다. 총독부박물관 관계자가 경주에 내려가 여러 절터를 돌며 하대를 찾았지만 결국 빈손으로 돌아왔다는 기록이 남아있다.최고 권부(權府)로 오기까지 신라 왕경에 봉안된 불상이 일제강점기 총독 관저를 거쳐 청와대까지 온 과정에는 암울한 한국 근현대사가 투영돼 있다. 이야기는 1912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일제강점기 언론과 조선총독부 기록에 따르면 초대 총독을 지낸 데라우치 마사다케(寺內正毅)가 1912년 11월 2박 3일 일정으로 경주 곳곳을 순시했다. 이때 데라우치는 지역 금융조합 이사였던 고다이라 료조(小平亮三)의 정원에 놓인 불상을 보고 관심을 보였다. 사업상 총독의 환심을 살 필요가 있었던 고다이라는 눈치껏 불상을 경성 왜성대(倭城臺·현 서울 남산 일대)에 있던 총독 관저로 보냈다. 총독부는 1939년 총독 관저를 왜성대에서 지금의 청와대가 있는 경복궁 안으로 옮겼다. 광복 이후 불상이 청와대 경내에 머물게 된 연유다. 흥미로운 건 일제강점기에도 최고 권부에 좌정한 불상의 거취가 논란으로 떠올랐다는 점이다. ‘석가여래상의 미남석불, 즐풍욕우(櫛風浴雨) 참아가며 총독 관저 대수하(大樹下)에’ 제목의 1934년 3월 29일자 매일신보 기사는 “이 불상은 경주 골짜기에 안치돼 있던 것인데 지금 풍우에 시달리고 있다는 것은 너무도 애석해 견딜 수가 없다”는 총독부박물관 관계자의 말을 전하고 있다. 이어 “박물관에서는 불상을 가져왔으면 하고 있으나 이미 총독 관저의 물건이 된 이상 마음대로 할 수 없는 형편이므로, 총독의 허가를 얻어 박물관에 진열해 보려고 희망하는 중이다”라고 덧붙였다. 전문기관이 아닌 총독 관저에 있다 보니 불상에 대한 보존 조치가 미흡했지만 총독 눈치를 보느라 박물관이 속만 태운 사실을 알 수 있다.불상 원래 자리는 어디 청와대 불상의 출처는 내력과 연관돼 가장 관심을 끄는 대목이다. 정확히 어느 사찰에 봉안돼 있었는지를 알아야 이전 위치를 확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청와대 불상이 경주에서 온 것은 확실하지만 구체적인 사찰 터에 대해서는 학계에서도 의견이 엇갈린다. 삼국사기 등 사료와 일제강점기 기록들에 따르면 청와대 불상의 출처는 경주 남산이나 이거사(移車寺)터, 유덕사(有德寺)터 중 한 곳으로 추정된다. 지금은 모두 흔적만 남아있는 이른바 폐사지(廢寺址·절터)들이다. 이 때문에 보존 관리를 위해 전문 인력이 있는 국립경주박물관으로 옮겨야 한다는 주장이 있지만 “문화재는 제자리에 두는 게 원칙”이라는 반론도 제기된다. 경주 남산설은 앞서 언급한 1934년 3월 29일자 매일신보 기사 중 “(청와대 불상이) 총독부박물관 홀에 진열돼 있는 약사여래와 같은 골짜기에 안치돼 있었다”는 총독부박물관 관계자의 발언에 근거한다. 여기서 언급된 약사여래상은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된 ‘경주 남산 삼릉곡 석조약사여래좌상’일 가능성이 높다. 다시 말해 청와대 불상도 석조약사여래좌상과 함께 남산에 있었다는 얘기가 된다. 그러나 해당 불상이 경주 유덕사터에서 왔다는 총독부박물관 기록도 있다. 삼국유사에는 “신라의 최고위 관료였던 최유덕이 자기 집을 내놓아 유덕사를 세웠다”는 내용이 전한다. 일각에서는 삼국사기 기록에 근거해 유덕사를 이거사로 간주하는 견해도 있다. 이와 관련해 청와대 불상과 쌍둥이처럼 닮은 불상이 경주 남산에 있다는 임영애 교수의 최근 연구 결과를 주목할 만하다. 그에 따르면 왼팔과 왼쪽 무릎 위에 새겨진 길쭉한 물방울 모양의 옷 주름이나 상대(上臺)의 연꽃무늬, 중대(中臺)의 신장상 조각 등 전반적인 형태에서 두 불상이 꼭 빼닮았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청와대 불상의 출처가 남산일 가능성이 높다는 분석이 나오지만 같은 석공이 만든 불상이라도 각기 다른 사찰에 봉안될 수 있다는 반론도 제기된다.이전을 둘러싼 논란 문화재계 일각에서는 경주 이전이 문화재 제자리 찾기와 더불어 총독부의 강압적인 문화재 침탈을 바로잡는 조치임을 강조한다. 일제강점기에 함부로 옮겨진 불상을 원위치로 되돌려 놓음으로써 일제 잔재를 청산하자는 논리다. 총독부는 1915년 9, 10월 경복궁에서 조선물산공진회를 개최하며 ‘홍법국사 실상탑’(국보 제102호)’ 등 전국 각지의 석탑들을 경성으로 옮겨놓기도 했다. 당시 경복궁의 수많은 전각이 헐리고 그 자리에 총독부 청사와 관저가 들어섰다. 보안상 출입이 엄격히 통제되는 청와대를 벗어나 많은 사람이 감상할 수 있는 곳에 불상을 둬야 한다는 명분도 있다. 이와 관련해 광복된 지 70년이 넘었지만 청와대 불상은 정밀 학술조사나 국가문화재 지정이 지금껏 이뤄지지 못했다. 최근 대통령의 지시가 있고 나서야 문화재청과 서울시를 중심으로 본격적인 조사가 진행됐다. 그러나 불상의 정확한 출처를 파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이전부터 추진하면 또 다른 논란을 불러올 수 있다는 지적도 있다. 또 폐사지에 뒀을 때 관리 부실 우려도 간과할 수 없다. 불교계 입장도 변수다. 조계종은 최근 “불교계와 전문가의 의견 수렴을 통해 제대로 된 정책이 수립되고 이에 따라 보존 환경이 마련되는 게 우선”이라는 성명을 발표했다. 즉각적인 불상 이전에 사실상 반대한 셈이다. 앞서 조계종은 이명박 정부 때 일부 개신교 단체가 종교적 편향성을 이유로 불상 이전을 요구한 데 대해서도 반대했다.▼청와대 안 문화재 또 무엇이 있나▼靑 관저뒤 바위엔 ‘天下第一福地’ 조선시대 글씨 남아… 대한제국 시절 침류각도 문화재청와대 경내에는 석조여래좌상뿐만 아니라 다른 문화재들도 남아있다. 조선왕조 정궁(正宮)인 경복궁과 연접해 있다보니 조선시대 유물이나 유구가 대부분이다. 2007년 대통령경호실이 발간한 ‘청와대와 주변 역사 문화유산’에 따르면 관저 뒤쪽에 있는 ‘天下第一福地(천하제일복지·세상에서 가장 길한 명당)’가 새겨진 바위는 300∼400년 전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예부터 청와대 일대가 풍수지리상 최고의 길지였음을 알 수 있다. 글자 왼쪽에 ‘延陵吳据(연릉오거)’라는 관지(款識·그림이나 글씨 뒤에 작가 이름이나 날짜를 표기한 것)가 새겨져 있는데, 중국 남송시대 연릉에 살던 오거의 글씨를 집자한 것으로 분석된다. 지금의 대통령 관저 자리에 있던 침류각(枕流閣·서울시 유형문화재 제103호)은 1905년 대한제국 시기에 지어진 전각이다. 1989년 대통령 관저를 새로 짓는 과정에서 상춘재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전각 이름인 ‘침류(흐르는 물을 베개로 삼는다는 뜻)’에서 짐작할 수 있듯 풍류를 즐기던 장소로 보인다. 침류각은 고종 당시 신무문 밖 후원에 건립한 전각들 가운데 청와대에 남은 유일한 건물이다. 팔작지붕을 이은 정면 4칸, 측면 2칸짜리 몸채에 좌우 한 칸씩 돌출시킨 구조다. 이 밖에 비서동 근처에는 조선왕실이 경복궁 후원에 관상용으로 둔 괴석(怪石)들이 남아있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 2017-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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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조의 국장-고종의 능행… 왕의 행렬 따라가 볼까

    흥인지문을 통해 한양도성 밖으로 행차한 조선시대 왕의 행렬은 어떤 광경이었을까. 서울역사박물관 산하 한양도성박물관은 왕실 행사를 통해 한양의 동쪽 대문이던 흥인지문을 집중 조명하는 ‘흥인지문, 왕을 배웅하다’ 기획전을 선보이고 있다. 1776년 영조의 국장과 1872년 고종의 능행 행렬을 중심으로 전시를 구성했다. 1부 ‘왕의 마지막 길’에선 원릉(元陵)을 향해 나아가던 영조의 대여가 흥인지문을 통과하는 모습을 담았다. 영조의 국장은 27개월 동안 진행됐는데, 대여에 비해 흥인지문의 높이가 낮아 문지방 박석을 제거해야만 했다. 2부 ‘능행, 선왕의 기억’에서는 영조가 묻힌 원릉으로 능행한 고종 행렬이 통과한 흥인지문 주변 풍경을 살펴본다. 즉위 후 매년 가을마다 능행에 나선 고종은 1892년 조선 개국 500주년을 맞아 원릉을 비롯해 익종 수릉(綏陵), 태조 건원릉(健元陵), 선조 목릉(穆陵)을 찾았다. 19세기 말 한양을 방문한 서양인들의 기행문을 통해 왕의 행렬에 앞서 서둘러 정비된 도로와 구경 나온 백성들의 모습 등을 엿볼 수 있다. 기획전과 연계된 특별강연에서는 영조 국장 절차와 고종 능행의 정치적 의미 등을 다룬다. 12월 17일까지. 02-724-0243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 2017-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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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300년 전 신라 왕궁 ‘수세식 화장실’ 첫 발견

    8세기 중엽 통일신라시대 서라벌(경주) 동궁(東宮). 판축 담장(흙을 다져 올린 담장)을 거느린 동문(東門)에 들어서자 좌우로 아담한 기와건물과 우물이 보인다. 기와건물은 가로 두 칸, 세로 한 칸짜리로 타일 모양의 민무늬 전돌(벽돌)이 바닥에 깔려 있다. 특히 서쪽 공간에 놓인 너비 118cm, 길이 175cm의 독특한 석물(石物) 세트가 눈길을 끈다. 이것은 무엇에 쓰던 물건인가. 화강암을 타원형으로 잘 다듬은 뒤 무언가 아래로 배출될 수 있도록 구멍을 뚫었다. 그 위에 발판이 달린 직사각형 모양의 화강암 판석(板石) 두 개가 나란히 놓여 있다. 석물 아래는 물을 흘려보낼 수 있는 배수로가 연결돼 있다. 당시 사람이 아니라도 약간의 눈썰미만 있다면 용도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 이것은 1300년 전 신라 왕궁에서 사용한 매우 세련된 ‘수세식 화장실’이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가 26일 경북 경주시 ‘동궁과 월지(안압지)’ 발굴 현장에서 동궁 내 수세식 화장실과 동문 터, 우물, 배수로, 도로 유구 등을 공개했다. 동궁은 태자와 그를 보좌하던 관료들이 생활한 공간으로, 삼국 통일 직후인 679년(문무왕 19년) 조성됐다. 신라시대 왕궁 화장실이 발견된 건 처음으로, 석재 변기와 배수로 유구가 세트로 발굴된 것도 전례가 없다. 앞서 백제 궁성 터로 추정되는 전북 익산시 왕궁리 유적에서 공중화장실이 발견됐지만, 이때는 변기 없이 뒤처리 막대기가 묻힌 구덩이만 나왔다. 이번 동궁 화장실에서 특기할 만한 것은 발판이 달린 직사각형 판석이다. 양쪽 판석의 좌우를 바꿔보면 놀랍게도 경주 불국사에서 발견된 변기와 흡사하다. 당초 학계에서는 불국사 석물의 용도를 놓고 여러 추론이 나왔는데, 이번 발굴로 변기였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단, 불국사에선 동궁처럼 배수로가 설치된 화장실 유구는 발견되지 않았다. 연구소는 직사각형 판석으로만 변기를 사용하다가 나중에 타원형 변기를 만든 뒤 기존 판석을 발판으로 재활용한 걸로 보고 있다. 신라시대에 기와는 궁궐이나 관청, 사찰 같은 격식 있는 건물에만 쓰였다. 이런 기와와 더불어 화장실 바닥과 배수로에 전돌을 깔고 수세식 변기를 설치한 건 이례적이다. 박윤정 학예연구관은 “외부에서 물이 유입된 흔적이 없는 걸로 보아 항아리에 담긴 물을 떠서 오물을 흘려보낸 것으로 추정된다”고 설명했다. 근처에서 남북 21.1m, 동서 9.8m 규모의 거대한 동문 터가 발견된 것도 주목할 만하다. 학계는 월지를 둘러싼 동궁의 정확한 영역을 아직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동문 터 발굴을 계기로 동궁의 동쪽 경계를 확인하게 된 것이다. 동문 터는 지름 2.2m의 거대한 적심(積心·기둥을 올리기 위해 밑바닥에 까는 돌) 10개로 구성됐으며, 2개의 널찍한 계단과 연결돼 있다. 왕궁 화장실 맞은편에서는 7.2m 깊이의 통일신라시대 우물이 확인됐다. 흥미로운 것은 우물 안에서 인골 4구와 각종 동물 뼈, 토기 등이 발견된 점이다. 연구소는 4.8m 깊이에서 토기와 함께 나온 어린 사슴의 뼈는 통일신라 때 우물을 폐기하면서 제의를 올린 흔적으로 해석했다. 30대 후반 남성으로 추정되는 인골 한 구와 6개월∼8세가량의 영·유아 인골 세 구는 사슴 뼈보다 위에서 발견됐는데, 탄소연대 측정 결과 고려시대 사람으로 조사됐다. 이와 관련해 2000년 국립경주박물관 부지 내 신라시대 우물에서 어린아이의 유골이 나와 인신공양 가능성이 제기된 바 있다. 그러나 인골을 분석한 김재현 동아대 교수는 “동궁 인골에서는 특별한 외상 흔적이 발견되지 않아 인신 제의로 보기는 힘들다”고 말했다. 경주=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 2017-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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