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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천, 영암 등 전남 지역 사찰이 소장한 불교 문화재 200여 점을 한자리에서 볼 수 있는 전시가 열린다. 국립순천대(총장 고영진) 박물관은 ‘불교 문화재 순천 나들이’전을 28일까지 개최한다. 전시품 가운데는 순천 금룡사가 소장한 보물 ‘대불정수능엄경(大佛頂首楞嚴經·사진)’이 눈에 띈다. 훈민정음 창제 후 한글로 번역된 최초의 불경 언해서로 대승불교의 핵심 경전이다. 1461년(세조 7년) 조선시대 활자를 주조하는 관청인 교서관에서 금속활자를 사용해 찍어냈다. 한자 원문과 언해문으로 이뤄졌으며 10권으로 구성됐다. 한글 창제 무렵의 국어 특징을 연구하는 데도 중요한 가치를 지닌 것으로 평가된다. 2018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순천 선암사의 ‘목조 인왕상’과 고려시대의 전형적인 양식을 보여주는 ‘금동은입사향로’, 선암사의 역사를 살필 수 있는 ‘선암사 중창건도기’, 금룡사의 ‘묘법연화경’, 영암 천황사의 목탑을 장식했던 불꽃무늬 장식품과 연화문 수막새도 볼 수 있다. 선각국사 도선이 35년간 머문 광양 옥룡사의 중국제 해무리굽 청자와 연화문 막새류도 전시된다.이진구 기자 sys1201@donga.com}
조계종 상월결사 인도 순례단이 한국·인도 수교 50주년을 맞아 한국불교 중흥과 세계 평화를 기원하며 9일부터 43일간 총 1167km의 인도 도보순례에 나선다. 순례단은 스님과 신도 100여 명으로 이뤄졌으며 부처님이 성도 후 처음 설법한 사르나트(녹야원)에서 입재식을 가진 후, 부처님 성도지인 보드가야, 최초의 결집 장소인 칠엽굴과 영축산이 있는 라즈기리, 라즈기리의 나란다 대학, 부처님 열반지인 쿠시나가라, 탄생지인 룸비니 등 불교 성지를 방문한다. 또 녹야원, 마하보디대탑, 죽림정사, 쿠시나가르 등에서는 대규모 법회도 열 예정이다. 조계종은 순례에 맞춰 총무원장 진우 스님이 현지를 찾고, 연등회 전시를 비롯해 템플스테이 홍보, 사찰음식 시연·만찬 등 다양한 교류 행사도 갖는다.이진구 기자 sys1201@donga.com}

엉뚱한 이야기 하나. 2005년 7월 서울시 한강공원사업소는 생태계 교란종인 붉은귀거북(일명 청거북)을 잡아 오는 시민에게 마리당 5000원 상당의 문화상품권을 지급한다고 발표했다. 이 행사는 ‘붉은귀거북의 씨가 말랐다’는 소리까지 나올 정도로 효과가 좋았지만 오래가지는 못했다. 시민들이 너무 많이 잡아 오는 바람에 예산이 금방 동났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관심이 사라지자 한강에는 다시 붉은귀거북이 출몰했다. 환경 파괴로 인한 기후 위기가 아무리 심각하다고 해도 모두가 관심을 갖고 노력하면 극복하지 못할 리가 없다. 관건은 기후 위기를 어떻게 우리 모두의 관심사로 만들 수 있느냐다. 석유시추선 앞에서 시위하고, 삶의 터전이 파괴되는 북극곰의 안타까운 모습을 보여주는 것도 필요하지만 기후 위기가 당장 집값과 일자리, 주식, 교육 등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걸 안다면 관심은 배가될 것이다. 두 책의 저자들은 기후 문제가 거대 담론이 아닌 경제, 일자리 등 우리 실생활에 이미 깊숙이 작용하고 있는 사례를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대표적인 예가 기업이 사용 전력의 100%를 재생에너지로만 공급받도록 한다는 ‘RE(Renewable Electricity)100’ 선언이다. 기업이 2030년 60%, 2050년까지 100%를 달성하지 못하면 이 선언에 가입한 세계적 기업에는 납품할 수 없게 된다. 그러나 ‘기후위기 부의 대전환’에 따르면 2021년 우리나라 재생에너지 발전 비중은 7.5%에 불과한 실정이다. 재생에너지를 공급하지 못하면 해외 기업은 국내에 공장을 짓지 않을 것이고, 해외 기업에 납품하지 못하는 국내 기업은 주가가 하락할 것이며, 결국 산업생태계 붕괴와 일자리 상실로 이어질 수 있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기후 위기는 부동산에도 영향을 미친다. ‘기후 피해 세대를 넘어 기후 기회 세대로’에 따르면 2020년 그린피스 서울사무소는 한반도의 2030년 해수면 상승 시뮬레이션 결과 발표에서 해수면 상승과 태풍이 복합적으로 영향을 줄 경우 한반도의 5%가 물에 잠기고 332만 명이 침수 피해를 겪을 것으로 전망했다. 해양환경공단이 제공하는 ‘해수면 상승 시뮬레이터’도 2050년이면 해수면이 지금보다 0.34∼0.4m 정도 상승할 것으로 보고 있다. 지금은 주목받는 오션뷰 아파트가 나중에는 아닐 수도 있다는 말이다. ‘기후위기…’에 따르면 휴양지로 유명한 미국 플로리다주 마이애미데이드 카운티 내 주택 가격은 지난 수십 년간 전반적으로 많이 상승했는데, 그중에서도 해변보다 고지대 집값의 상승 폭이 훨씬 컸다고 한다. 해수면 상승에 따른 침수 우려 때문이다. 북극곰이나 석유시추선 이야기보다는 훨씬 더 정신이 번쩍 드는 이야기다. 그렇다고 비관할 필요는 없다. 저자들은 한목소리로 미래를 살리는 길이 있다고 말한다. 이를 위해서는 ‘적극적인 기후정책이 국제사회에서 한국의 위상을 높이고, 지속 가능한 경제구조를 만들며, 에너지 효율을 극대화하는 기회를 제공한다’는 인식의 대전환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기후 위기는 분명 심각하지만 읽고 나서 걱정이나 공포보다 ‘아직은 할 수 있어’라는 희망이 드는 건 그런 까닭일 것이다.이진구 기자 sys1201@donga.com}

엉뚱한 이야기 하나. 2005년 7월 서울시 한강공원사업소는 생태계 교란종인 붉은귀거북(일명 청거북)을 잡아 오는 시민에게 마리당 5000원 상당의 문화상품권을 지급한다고 발표했다. 이 행사는 ‘붉은귀거북의 씨가 말랐다’는 소리까지 나올 정도로 효과가 좋았지만 오래가지는 못했다. 시민들이 너무 많이 잡아 오는 바람에 예산이 금방 동났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관심이 사라지자 한강에는 다시 붉은귀거북이 출몰했다. 환경 파괴로 인한 기후 위기가 아무리 심각하다고 해도 모두가 관심을 갖고 노력하면 극복하지 못할 리가 없다. 관건은 기후 위기를 어떻게 우리 모두의 관심사로 만들 수 있느냐다. 석유시추선 앞에서 시위하고, 삶의 터전이 파괴되는 북극곰의 안타까운 모습을 보여주는 것도 필요하지만 기후 위기가 당장 집값과 일자리, 주식, 교육 등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걸 안다면 관심은 배가될 것이다.신간 ‘기후위기 부의 대전환’(다산북스)과 ‘기후 피해 세대를 넘어 기후 기회 세대로’(퍼블리온)의 저자들은 기후 문제가 거대 담론이 아닌 경제, 일자리 등 우리 실생활에 이미 깊숙이 작용하고 있는 사례를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대표적인 예가 기업이 사용 전력의 100%를 재생에너지로만 공급받도록 한다는 ‘RE(Renewable Electricity)100’ 선언이다. 기업이 2030년 60%, 2050년까지 100%를 달성하지 못하면 이 선언에 가입한 세계적 기업에는 납품할 수 없게 된다. 그러나 ‘기후위기 부의 대전환’에 따르면 2021년 우리나라 재생에너지 발전 비중은 7.5%에 불과한 실정이다. 재생에너지를 공급하지 못하면 해외 기업은 국내에 공장을 짓지 않을 것이고, 해외 기업에 납품하지 못하는 국내 기업은 주가가 하락할 것이며, 결국 산업생태계 붕괴와 일자리 상실로 이어질 수 있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기후 위기는 부동산에도 영향을 미친다. ‘기후 피해 세대를 넘어 기후 기회 세대로’에 따르면 2020년 그린피스 서울사무소는 한반도의 2030년 해수면 상승 시뮬레이션 결과 발표에서 해수면 상승과 태풍이 복합적으로 영향을 줄 경우 한반도의 5%가 물에 잠기고 332만 명이 침수 피해를 겪을 것으로 전망했다. 해양환경공단이 제공하는 ‘해수면 상승 시뮬레이터’도 2050년이면 해수면이 지금보다 0.34~0.4m 정도 상승할 것으로 보고 있다. 지금은 주목받는 오션뷰 아파트가 나중에는 아닐 수도 있다는 말이다. ‘기후위기…’에 따르면 휴양지로 유명한 미국 플로리다주 마이애미데이드 카운티 내 주택 가격은 지난 수십 년간 전반적으로 많이 상승했는데, 그중에서도 해변보다 고지대 집값의 상승 폭이 훨씬 컸다고 한다. 해수면 상승에 따른 침수 우려 때문이다. 북극곰이나 석유시추선 이야기보다는 훨씬 더 정신이 번쩍 드는 이야기다. 그렇다고 비관할 필요는 없다. 저자들은 한목소리로 미래를 살리는 길이 있다고 말한다. 이를 위해서는 ‘적극적인 기후정책이 국제사회에서 한국의 위상을 높이고, 지속 가능한 경제구조를 만들며, 에너지 효율을 극대화하는 기회를 제공한다’는 인식의 대전환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기후 위기는 분명 심각하지만 읽고 나서 걱정이나 공포보다 ‘아직은 할 수 있어’라는 희망이 드는 건 그런 까닭일 것이다.이진구 기자 sys1201@donga.com}

대한불교천태종 총무원장 무원 스님(사진)은 31일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신년 기자간담회를 갖고 “다문화가정, 탈북이주민, 이주노동자 등 다양한 계층과 세대가 서로 소통할 수 있는 천태국제다문화종합센터 건립을 추진하겠다”라고 밝혔다. 무원 스님은 “올해 천태종의 종무 기조는 ‘자성(自性·본디부터 갖추고 있는 불성)을 밝혀 만인과 소통하고, 공생할 수 있는 세상을 만들자’라는 것”이라며 “다양한 계층을 아우르는 천태국제다문화종합센터를 통해 사회적 책임과 역할을 다하고자 한다”라고 말했다. 센터는 다문화 사찰로 운영돼온 서울 관악구 명락사 내에 건립될 계획이다. 천태종은 이 밖에 올해 주요 사업으로 2대 종정을 지낸 남대충 대종사 탄신 100주년(2026년) 준비위원회도 발족할 예정이다. 무원 스님은 “불교는 복을 기원하기보다 복을 짓는 작복(作福)의 종교”라며 “새해에는 모두가 서로를 배려하면서 작복하는 삶을 살기를 기원한다”라고 말했다.이진구 기자 sys1201@donga.com}

《최근 정부가 반도체 등 국가첨단전략산업 시설투자에 대한 세액공제율을 확대하겠다고 밝혔다. 지난해 12월 23일 국회를 통과한 세액공제율이 너무 낮아 오히려 산업 경쟁력을 깎아먹는다는 지적이 빗발쳤기 때문. 다행히 법 통과 일주일여 만에 윤석열 대통령이 수정 지시를 내리기는 했지만, 법 개정까지는 아직 가야 할 길이 멀다. 양향자 국민의힘 반도체산업경쟁력강화특별위원장(무소속)은 “땅에 묻힐 뻔했던 국가 미래가 되살아났다”며 “만약 여야의 정쟁으로 법 통과가 지연된다면 그게 바로 매국 행위”라고 말했다. 그는 지난해 8월 반도체 산업 지원 특별법으로 불리는 ‘K칩스법’을 대표 발의했다.》 ―지난해 12월 23일 법 통과 때 차라리 부결시켜 달라고 했던데…. “특위에서 만든 안은 대기업은 6%→20%, 중견기업은 8%→25%, 중소기업은 16%→30%의 세액공제를 해주는 것이었다. 그런데 4개월여 동안 아무 말이 없다가 그날 갑자기 여야가 대기업만 8%로 2%포인트 더 올려주고, 나머지는 전과 똑같은 기획재정부 안으로 합의해 통과시켜 버렸다. 남들보다 더 지원해주고 뛰게 해도 모자랄 판에….” ―실망이 컸나. “사실상 대한민국 반도체 산업에 사망선고를 내린 것과 다름이 없으니까. 특위 안을 만들면서 국내 최고의 전문가들과 숱한 논의 끝에 8%로는 도저히 경쟁국들과 경쟁이 불가능하다는 데 의견을 모았다. 그래서 입안 과정에서 관련 부처 장관 릴레이 미팅과 8개 부처 장차관 당정협의회 등을 통해 숱하게 세액공제율 확대 필요성을 이야기했다. 그런데 제대로 된 설명도 없이 세수 부족을 이유로, 그것도 본회의 당일 기습 상정을 하다니…. 솔직히 그때는 이 사람들이 말로만 반도체 산업이 중요하다고 하지 사실은 아닌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아니면 처음부터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던지.” ―법 통과 당일까지 전혀 몰랐단 말인가. “그날 한국-베트남 수교 30주년 경제포럼에 참석하느라 호찌민에 있었다. 아침에 호텔에서 기조연설을 준비하는데 갑자기 전화가 빗발치더라. 지인들과 기자들 전화였는데, 오늘 본회의에 기재부 안이 올라가는데 알고 있었냐는 거다. 내가 되레 되물었다. 논의도 안 했는데 그럴 리가 있냐고. 너무 놀라서 그 뒤 일정을 다 취소하고 부랴부랴 당일 급히 귀국했다. 그리고 본회의에 참석해 이렇게 통과시킬 바엔 차라리 부결시켜 달라고 했다. 그런데 투표가 끝나고 적반하장 같은 일이 벌어졌다.” ―적반하장이라니? “특위 위원 중에서 국민의힘 소속으로는 조명희 의원이 유일하게 반대표를 던졌는데 그날 밤 전화가 왔다. 자기가 국민의힘에서 죄인 됐다고….” (죄인이라니?) “자기가 마치 반도체 산업 지원을 반대하는 사람처럼 몰렸다고….” (당신처럼 그 정도 지원으로는 안 된다는 뜻에서 반대한 것 아니었나?) “내 말이…. 그때 베트남에 조 의원도 함께 갔다가 같이 귀국했다. 오는 길에 내가 법이 이렇게 통과돼서는 절대로 안 된다고 하도 설명을 해서 당당하게 반대표를 던진 건데….” ―그런데 특위 위원장에게 사전에 얘기도 안 해줬다는 게 이해가 잘 안 간다. “법안을 제출한 뒤에 넉 달 동안 구체적인 논의가 이뤄지기를 기다렸다. 소위원회가 구성돼 논의가 시작되면 가서 설명도 하고 설득을 해야 하니까. 그래서 언제 논의가 시작되는지 이제나 저제나 기획재정위원회 국민의힘 간사만 보고 있었는데, 몇 달 동안 아무 이야기가 없었다.” (더불어민주당 간사에게 물어볼 수도 있지 않나.) “그분은 내가 민주당에 있을 적에도 계속 왜 그렇게 친기업적인 이야기만 하냐고 나를 엄청 비판하던 분이라 묻기가 어려워서…. 그래서 12월이 됐을 때는 ‘올해 안에 통과되기는 어렵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렇게 기습적으로 할 줄이야.” ―윤 대통령이 일주일여 만에 수정 지시를 했는데, 왜 생각이 바뀌었을까. 혹시 강하게 항의를 했나.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내 생각으로는… 생각이 바뀐 게 아니라 못 챙겼던 게 아닌가 싶다. 그때 대통령실이 너무 바쁜 데다 예산안, 법인세 문제 등에 초점이 가 있었으니까. 그래도 빨리 수정 지시를 내린 건 정말 잘한 거다. 우여곡절은 있었지만 대통령이 바로잡아서 반도체 투자 세액공제율을 15%(대·중견기업)로 인상하는 안을 다시 추진하기로 했으니까. 특위 안(20%, 25%)에 비하면 아쉽기는 하지만 이제 시작이니까 긍정적이라고 생각한다.” (국민의힘에서는 별 말이 없나.) “지난달 28일인가? 국회 본회의장을 나가는데 주호영 원내대표가 앞에 있었다. 그래서 얼른 다가가 ‘주 대표님!’ 하고 불렀더니 화들짝 놀라서 도망가시더라고.” ―일각에서는 세액공제율 확대가 대기업에만 혜택을 주는 것이라고도 한다. “대기업에 잘해주면 반대로 중소기업이 피해를 본다는 프레임을 너무 심하게 가동하는 사람들이 있다. ‘초부자 감세’라며 대기업을 어떻게든 악마로 만들어내려고 애쓰는데… 내 눈에는 참 처량해 보이더라. 저런 소리를 들으면 어떤 기업이 투자를 할까 싶기도 하고. 반도체는 생산량이 많으면 고정비가 하락하는 전형적인 ‘규모의 경제’ 산업이다. 그래서 반도체 산업에서는 대규모 투자가 가능한 대기업이 대표선수가 될 수밖에 없다. 그걸 대기업에 특혜 주는 것으로 보니 안타깝지. 대기업 투자를 늘릴 수 있는 법 통과를 가장 바라는 사람들이 중견·중소기업 대표들이다. 그들은 대기업의 투자 증가가 반도체 생태계를 활성화시켜 2, 3차 협력사인 자신들을 동반 성장시킨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관련 인력 부족도 심각하다고 하던데…. “반도체 분야의 인력 부족 현상이 심화된 게 이미 20년이 넘었다. 그래서 특위에서 수도권 대학은 정원 규제와 무관하게 관련 학과 정원을 늘릴 수 있게 하자는 안을 냈다. 그런데 이게 논의 과정에서 수도권 집중, 수도권 특혜 등의 벽에 부닥쳐 대학이 자체 정원 내에서 조정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학내 분란만 일 것 같은데….) “반도체 관련 정원을 늘리고 싶으면 다른 과 정원을 줄이라는 건데 해당 학과 교수들이나 학생들이 가만히 있을까? 이건 책임을 대학에 미루는 것이다.” ―당신은 광주(서을) 지역구 의원이지 않나. “지방 의원이 왜 수도권에 혜택을 줘야 한다고 하냐고? 나는 수도권 규제가 오히려 국가 전체 발전에 악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인재가 부족한데 수도권에 혜택을 주지 않으면, 인재와 기업은 지방 대신 해외로 빠져나가는 게 현실이다. 서울대 컴퓨터공학부 정원이 50여 명인데 미국 스탠퍼드대는 700명이 넘는다. 반도체 산업은 지역대항전이 아니라 국가대항전이다. 지금 상태로는 인재 확보 전쟁에서 이길 수가 없기 때문에 수도권 대학 정원 제한을 풀자고 한거다. 그걸 수도권 집중, 지역 소외 문제로만 보니….” ―작년 6월 여당 반도체특위 위원장을 수락할 때 국회 차원의 상설 특위 설치를 약속받았다고 했다. “그게 첫 번째 조건이었다. 작년 11월에 (여야가) 국회 안에 첨단산업특위를 설치하기로 의결했고, 안도 나와 있는데 국정조사니, 예산안 통과니 해서 정쟁에 빠지는 바람에 아직 만들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한쪽에서 높은 분이 내가 (위원장) 하면 안 만든다고 했다고 하더라.” (무슨 문제가 있나.) “내가 그쪽에 약간 미운털이 박혀 있으니까…. 반도체고 뭐고 내가 하는 건 다 싫어하는 그런 감정이 있어서….” ―다시 법을 개정해야 하는데, 야당이 쉽게 합의해 줄까. “정국 상황을 보면 쉽지 않을 것 같기는 하다. 여야 합의로 통과된 법을 대통령 말 한마디에 손바닥 뒤집듯 바꾼다고 벼를 것 같기도 하고…. 하지만 여야 어느 쪽이든 반도체 산업 지원법을 정쟁의 도구로 쓰는 세력은 언론은 물론이고 국민이 가만두지 않을 거라 생각한다.” ―당신은 그런 사람들을 신매국노라고 불렀던데…. “세계 각국이 반도체 패권 전쟁을 벌이고 있는데, 우리 안에 이상한 프레임으로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다. 첨단 산업 정책을 정략적 거래로 이용하는 자, 대기업 특혜라며 갈라치기 하는 자, 지역 소외 정책이라며 국토균형발전론을 오남용하는 자 등이다. 마음 같아서는 진짜 ‘매국노(賣國奴)’라고 하고 싶었다. 그런데 표현이 너무 센 것 같기도 하고, 또 이 사람들이 진짜 나라를 팔아먹은 건 아니라서 ‘나라의 미래를 땅에 묻는 것’이란 의미로 ‘묻을 매(埋)’를 썼다. 나라의 미래를 놓고 흥정하는 사람들이 나타나지 않게 언론과 국민 모두 잘 감시해야 한다.” 이진구 기자 sys1201@donga.com}

《관심을 모았던 실내 마스크 해제 시기는 결국 정해지지 않았다. 정부가 아직은 해제 시점을 밝힐 여건이 충족되지 않았다고 판단한 것. 대신 방역당국은 해제가 가능한 전제 조건을 발표했다. 정기석 국가감염병위기대응자문위원장 겸 코로나19 특별대응단장은 “60세 이상 고령층 등 고위험군의 면역력이 아직 많이 낮은 상태”라며 “전력을 다해 고위험군의 동절기 추가 접종률을 높여야 할 때에 섣부르게 실내 마스크 해제 논란을 촉발시켜 불필요한 행정력만 낭비시켰다”고 말했다.》 ―실내 마스크 해제 논란이 오히려 방역에 지장을 줬다고…. “지금 상황이 60세 이하의 건강한 사람은 동절기 추가 접종(개량 백신)을 안 해도 된다. 하지만 60세 이상 고령층과 요양병원 같은 감염취약시설에 계신 분 등 고위험군은 여전히 사망자 수 등에서 안심할 단계가 아니다. 모든 행정력을 동원해 고위험군의 개량 백신 접종률을 올려야 할 시기인데, 그 인력과 시간이 실내 마스크 해제 논란에 대응하느라 낭비됐다. 더군다나 국민에게 이제 곧 벗게 될 수 있다는 잘못된 신호를 주는 바람에 경각심을 낮춰 버린 면도 있다.” ―국민적 관심이 크긴 했다. “물론 마스크 피로도가 분명히 있고, 젊고 건강한 사람들은 벗고 싶은 게 당연하다. 하지만 60세 이하만 해제할 수도 없지 않나. 마스크를 벗으면 확진자는 반드시 는다. 고위험군의 치명률이 아직 낮아지지 않은 상황에서 섣부른 실내 마스크 해제로 고령층 등의 사망자가 늘면 어떻게 하나. 그래서 개량 백신 접종률을 더 올린 후에 풀자는 거다. 그런데, 갑자기 대전시가 이달 초 중앙정부가 먼저 풀지 않으면 이달 15일부터 먼저 벗겠다고 시점까지 밝히는 바람에 사회적 이슈가 됐다. 개량 백신 접종과 치료제 처방률 제고, 취약 시설 관리 등에 더 신경을 써서 고위험군 사망자를 한 명이라도 더 낮춰야 할 시기에 국무총리실,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중대본), 중앙사고수습본부(중수본), 중앙방역대책본부(방대본), 각 지자체 관련 공무원들이 모두 마스크 해제 논란에 대응하느라 난리가 난 거다. 23일 실내 마스크 해제 로드맵 발표도 등 떠밀려 한 면이 있다.” ―원래 예정된 계획이 아니었나. “실내 마스크 해제 여부는 방역의 우선순위에서는 훨씬 밀리는 사안이다. 내가 알기로는 12월 초까지 올해 안에 해제 로드맵을 발표해야 한다는 계획은 없었다. 모든 방역 정책이 지금까지 자문위 자문을 거쳤는데 그런 자문이 들어온 적도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지자체가 먼저 풀겠다고 나서기 시작하니까 사태를 진정시키고 제어하기 위해 발표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거다. 여건이 안 된 상태에서 해제 시점을 밝힌다는 게 말이 안 되지 않나. 만약 그렇게 한다면 그게 정치 방역이다. 그래서 결국 이번에 해제의 전제 조건만 발표할 수밖에 없었던 거고. 안 그래도 지난 정부 때 정치방역 논란이 많았는데 이제는 지자체까지 그러니….” ―대전은 방역을 잘해서 그런 건가. “이달 초 먼저 해제하겠다고 논란을 일으켰을 때 대전의 감염 취약시설 개량 백신 접종률은 30% 초반대로 전국 평균보다도 낮았다. 지금(20일 기준)도 41.8%로 전국 평균 46.4%보다 낮다. 제대로 하지도 않으면서…. 함께 실내 마스크 해제를 요구했던 충남은 중환자실 점유율이 굉장히 높다. 실내 마스크 해제로 위중증 환자가 늘면 다른 지자체로 보내야 한다는 말이다. 왜 다른 지역에 피해를 주나. 논란을 일으킬 시간이 있으면 개량 백신 접종률을 높여야지.” ―추워지면서 확진자가 늘고 있는데…. “최근에 나온 논문이 하나 있는데, 코의 온도를 낮췄더니 면역력이 확 떨어졌다는 내용이다. 간단히 말해 추워지면 왜 독감 등 호흡기 질환이 많이 발생하는지를 설명해주는 것이다. 내가 호흡기 질환 분야만 40년 경력이다. 겨울철에는 무조건 바쁘다. 지금 아이들 독감 환자도 늘고 있다. 예전 같으면 이미 폭증했어야 했는데 그렇게까지는 가지 않고 있다.” (마스크 때문인가.) “그렇다. 코로나도 마찬가지다. 마스크를 벗으면 반드시 더 는다. 그리고 지금 걸려도 검사나 치료를 안 받는 숨은 확진자가 굉장히 많다. 검사도 이제는 대부분 유전자증폭(PCR) 검사가 아닌 정확도가 떨어지는 신속 항원검사를 받는다. 드러난 통계 수치만 봐서는 안 된다.” ―내년 설 연휴 전에는 해제가 어렵나. “지금(20일 기준) 동절기 추가 접종률이 60세 이상은 27.8%, 감염취약시설은 46.4% 정도다. 이게 60세 이상은 50%, 감염 취약시설도 60%를 넘기면 대체로 고위험군(1450만 명)의 75% 정도가 면역력을 가질 것으로 보인다. 그게 실내 마스크를 해제하느냐의 마지막 기준이 될 거다. 해제 시기를 앞당기고 싶다면 개량 백신 접종률을 높이면 된다. 만약 그게 안 되면… 그때 가서도 풀 수는 없다. 그랬더니 얼마 전에 경기도 의사회에서 날 징계하겠다며 윤리위원회에 회부하더라.” ―실내 마스크를 풀 때가 아니라고 했다고 징계한다고? 더군다나 당신은 국가감염병위기대응자문위원장인데…. “이유를 물어보니까, 첫째는 지금 실내 마스크를 계속 써야 할 충분한 근거가 없는데 내가 코로나19 특별대응단장이 되면서 계속 써야 한다는 얘기를 하고 있기 때문이란다. 그리고 이게 더 기가 막힌데… 내가 경기 안양에 있는 한림대성심병원 호흡기·알레르기내과 교수지 않나. 회원이 왜 경기도 의사회 성명에 반하는 입장을 계속 얘기하냐는 거다. 정치판도 아니고 이게 무슨 일인지. 얼마 전부터는 병원에서 진료도 못하고 있다.” ※경기도 의사회는 9월 실내 마스크 즉각 해제, 코로나19 대응 체계를 2급에서 인플루엔자 수준인 4급 감염병으로 전환하라는 성명을 냈다. ―나랏일 하느라 휴직한 건가. “그게 아니고… 내가 아이들 실내 마스크를 강제하는 아동학대범이라며 경기도 의사회에 제소한 시민단체가 있는데, 한 달째 우리 병원 앞에서 집회를 하고 있다. 이 사람들이 마스크도 안 쓴 채 진료실까지 쳐들어오고, 그로 인해 다른 환자들에게도 피해를 주다 보니 병원에서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른다고 당분간 나오지 말라고 했다.” ―마스크 의무화는 지난 정부 때 결정됐고, 당신은 관여도 안 했는데 왜? “나도 모르겠다. 내 입장은 전문가로서, 그리고 학자적 양심으로, 코로나 때문에 한 사람이라도 더 사망하지 않도록 마스크를 최대한 조심스럽게 벗자는 것이다. 지금도 주요한 변이 바이러스가 4개나 돌고 있다. 아직 안심할 때가 아닌데 정부가 먼저 ‘국민들이 알아서 잘 쓰겠지’라고 생각하고 당장 실내 마스크를 해제하면 부주의한 사람들은 더 부주의하게 될 거다. 그로 인해 죽는 사람이 생기면 그 책임을 누가 져야 하나. 지금도 매일 코로나로 40∼60명이 죽는다. 지구상에 매일 이만큼이 죽는 병이 없다. 지금 질병청 안에 결핵정책과와 에이즈관리과가 있다. 코로나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사망자가 적은데도 전담과를 두고 관리한다. 하물며 매일 수십 명이 죽는 코로나를…. 정부에 조언하는 사람으로서, 내가 앞장서서 당장 실내 마스크를 풀자는 말을 할 수는 없다.” ―치료제 처방률은 왜 높지 않은 건가. “지금은 좀 올라가고 있는데, 그동안 지자체 방역당국이나 의사들이 라게브리오나 팍스로비드 같은 치료제를 처방하는 데 적극적이지 않은 면이 있었다.” (약이 있는데 적극적으로 처방하지 않았다고?) “초기에 팍스로비드가 라게브리오보다 효과가 좋은 걸로 나타났다. 그런데 문제가 팍스로비드는 함께 먹으면 안 되는 금기약이 23가지나 된다. 23가지 중 하나라도 복용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팍스로비드를 처방할 수 없는 거다. 전국에 원스톱 진료기관이 1만 곳 정도 되다 보니 내과 의사보다 다른 과 의사가 더 많을 수밖에 없는데, 그들 중에는 이 23개 약을 안 써 본 사람이 꽤 된다. 또 자신이 복용 중인 약을 말해 주지 않는 환자도 있다 보니 의사로서는 책임질 일이 생기지 않게 처방에 소극적이 됐던 거다. 이후에 라게브리오의 성적이 굉장히 올라갔는데, 라게브리오는 금기약이 없다. 그래서 지금은 치료제 처방률이 30%대로 꽤 올라갔고, 더 오르고 있다.” ―강조하는 개량 백신은 1∼4차 백신과 많이 다른가. “지금 접종하는 개량 백신은 4차까지의 백신과는 완전히 다르다. 4차까지의 백신에는 지금 유행하는 BA.5는 물론이고 오미크론도 없었다. 개량 백신은 이런 걸 모두 고려해 만들어진 것이고, 그래서 이름도 특별히 ‘개량’이라고 붙인 거다. 확실히 효과가 다르다. 60세 이하의 건강한 사람들은 안 맞아도 되지만, 60세 이상이라면 자기 방어를 위해서 꼭 맞아야 한다.” 이진구 기자 sys1201@donga.com}

2022 카타르 월드컵 16강 브라질 전이 끝난 직후 허정무 2010년 남아프리카공화국 월드컵 감독을 인터뷰했습니다. 아쉽게 8강 진출은 못 했지만, 충분히 가능성을 보여준 만큼, 한국 축구가 더 발전하려면 무엇이 더 필요한지 듣기 위해서였죠. 아시다시피 그는 12년 전 첫 방문 월드컵 16강 진출을 이뤄냈습니다. 허 감독은 유망주 발굴 시스템, 축구 인프라 구축 등 많은 이야기를 들려줬습니다. 그런데 그중 제가 가장 들으며 놀란 것은, 정말 자존심 상하고 언급하기도 싫지만, 이제는 일본 축구가 우리보다 더 강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축구 관계자들이나 축구에 관심이 많은 분은 이미 다 아는 이야기라고 합니다. 하지만 저처럼 일반인들은 모르는 분이 더 많을 것 같습니다. 한일전에서 패한 적은 있지만, 대체로 전술 부재, 선수들 부상 등 그날의 경기력 부재를 이유로 들었지, 축구 수준을 지적한 경우는 많이 보지 못했으니까요. 우리 정서상 패인을 한국과 일본의 수준차로 말한다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죠. 어느 감독과 선수들이 “일본과의 수준 차이를 절감한 경기였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그런데 현실은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심각했습니다. 중고등학교 한일전은 이미 수십 년 전부터 거의 다 지고 있다고 합니다. 허 감독은 일본은 고등학교 팀만 수천 개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찾아보니 지난해 전 일본 고등축구연맹에 등록된 팀이 3962개더군요. 대한축구협회 자료에 따르면 우리는 190팀이었습니다. 일본은 고교 축구팀이 의무라서 그렇게 많은 걸까요?우리가 한일전 승패에만 집중할 때 일본은 이미 오래전부터 장기적인 계획을 세워 부족한 부분을 채우고, 낮은 부분을 끌어올려 왔다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 선수층도 두껍고, 대표팀 성적도 굉장히 안정돼있어 큰 기복이 없다는군요. 전 국가대표 이영표는 한 방송에서 “한국 축구가 일본보다 강하다는 착각에서 벗어나야 한다. 다른 나라들은 일본이 더 강하다는 걸 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때가 2013년입니다. 저는 일본 축구를 배우자고 하는 게 아닙니다. 일본 축구가 따로 있겠습니까. 세계 축구를 배우고 나아지기 위해 노력하다 보니 성장한 결과겠죠. 단지 일본이 장기적인 안목을 갖고 세계 축구를 따라잡기 위해 노력하는 동안 우리는 너무 단기적인 한·일전 승패에만 매몰돼있던 것은 아닌지 생각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진정한 승리는 높아진 축구 수준의 결과로 나오는 것이어야 하지 않을까요. 볼은 둥글기 때문에, 하다 보면 어쩌다 우리도 브라질을 이길 수 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런 단발성 승리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인터뷰를 준비하다가 남아공 월드컵을 앞둔 허 감독에게 월드컵에 출전했던 역대 감독들이 조언 한 기사를 보게 됐습니다. 1998년 프랑스 월드컵 사령탑이었던 차범근 감독은 이런 말을 했더군요. “월드컵을 석 달 남겨두고 네덜란드 현장 전력 분석보다 한·일전 승리에 더 신경을 썼다”라고요. 이번에 대표팀의 빌드업 축구도 마찬가지입니다만 감독이 생각하는 축구를 그라운드에서 구현하기까지는 많은 훈련과 시간이 필요합니다. 익숙해지기 전까지는 약체 팀에게 패하는 일도 생길 수 있겠지요. 그런데 당장 눈앞의 한·일전에 질까 봐 과거에 익숙하던 방식으로 시합을 치르게 하면 감독이 구현하려는 선진 축구가 제대로 안착할 수 있겠습니까. 작년 3월 벤투 감독의 대표팀이 평가전을 겸한 일본과의 친선경기에서 0대 3으로 진 뒤 여론의 비난이 워낙 거세지자 급기야 정몽규 대한축구협회장이 대국민 사과를 했습니다. 히딩크 감독도 2002 한일월드컵을 앞두고 프랑스, 체코와의 평가전에서 0대 5로 지자 ‘오대영’이란 조롱을 받았습니다. 저는 축구에 문외한입니다만, 역설적으로 저 점수 차이가 보여주는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벤투나 히딩크 감독이 월드컵 준비고 뭐고 간에 승패에 집착했다면 지더라도 저런 큰 점수 차이가 나지는 않았을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건 월드컵이지 그 과정에 벌어지는 평가전이 아니니까요. 앞서 이미 수십 년 전부터 중고등학교 한·일전은 거의 다 지고 있다고 했습니다. 이대로 간다면 앞으로 우리는 자랑스러운 태극전사들이 한·일전에서 늘 지는 모습만 보게 될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우리가 깨닫지 못하거나, 아니면 인정하지 않을 뿐 이미 그러고 있는지도 모르지요. 생각만 해도 끔찍합니다. 저도 한국인인지라 굳이 일본이 우리보다 잘한다는 걸 입 밖에 내고 싶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늘 지는 한·일전을 보고 싶지 않다면, 또 언젠가 일본이 월드컵 8강, 4강에 진출하는 걸 부러워하면서 구경하고 싶지 않다면 일본이 지금처럼 나아지게 된 과정은 반드시 배워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려면 먼저 상대의 실력을 인정해야 하고 또 긴 호흡을 가진 장기적인 계획이 필요합니다. 대한축구협회는 과연 그런 역할을 충분히 하고 있습니까?이진구 기자 sys1201@donga.com}

《12년 만에 월드컵 방문 16강 진출을 이뤄낸 카타르 월드컵. 비록 8강 진출은 못 했지만 한국 축구의 가능성을 충분히 보여준 무대이기도 하다. 12년 전 첫 방문 월드컵 16강 진출을 이뤄냈던 허정무 2010년 남아프리카공화국 월드컵 대표팀 감독(현 대전하나시티즌 이사장)은 “이번 월드컵에서 눈여겨봐야 할 것 중 하나가 일본 축구의 발전상”이라며 “우리도 일본처럼 장기적인 계획을 세우고 유망주를 발굴하는 시스템을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16강이 쉽지 않다는 전망도 많았는데, 당신은 오히려 좋은 기회라고 했더라. “우루과이, 가나, 포르투갈이 강팀이다 보니 인색한 평가가 많았는데, 나는 오히려 찬스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손흥민 황희찬 김민재 등 선수 구성이 역대 월드컵 중 가장 좋았다. 더군다나 다른 때와 달리 11월에 열리다 보니 유럽에서 뛰는 다른 나라 선수들은 시즌 중에 참가해 팀 훈련을 충분하게 하지 못했다. 우루과이가 강팀이라지만 남아공 월드컵에서 우리와 붙었을 때보다 전력이 훨씬 약해졌다. 그때 뛴 수아레스가 이번에도 뛰지 않았나. 세대교체가 안 된 거지. 포르투갈은 2002년에 우리가 이겨도 봤고, 또 마지막 경기라 워낙 변수가 많아 해볼 만하다고 생각했다. 2018년 러시아 월드컵 때 우리가 독일을 이긴 것도 마지막 경기였다. 그래서 나는 16강이 아니라 오히려 8강을 노려야 한다고 했다.” ―이번 월드컵에서 빌드업 축구가 인상적이었는데, 그동안은 왜 못 했던 건가. “단순히 볼을 돌리면서 전진하는 게 빌드업이 아니다. 목적이 있어야 한다. 단순히 볼을 돌리는 과정이라면 빌드업이 무슨 의미가 있겠나. 상대의 뒤쪽 공간이나 급소를 노리기 위한 과정이어야 하는데, 이게 쉽게 쌓아지는 능력이 아니다. 또 상대가 우리 빌드업을 깨려고 전방 압박을 할 때 그걸 다시 깨는 능력도 갖춰야 한다. 사실 빌드업 축구는 꽤 오래된 세계 축구의 흐름인데, 아쉽게도 우리가 이 흐름을 파악하는 데 좀 약했다. 꼭 한발 늦게 따라가고…. 그러다 보니 한때는 우물 안 개구리라는 말까지 들었다.” ―우리가 1986년부터 지금까지 월드컵 본선에 10회 연속 진출했는데 개구리라니…. “내가 1986년 멕시코 월드컵은 선수로,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과 1994년 미국 월드컵에는 트레이너와 코치로 참가했는데 그때까지만 해도 세계 축구에 대한 제대로 된 자료나 정보가 거의 없었다. 늘 아시아권에서만 뛰었으니까.” (그 뒤라도 도입하면 되는 것 아닌가. 당신은 네덜란드에서 뛰다 왔는데.) “그런 축구가 누구 하나가 말 한 번 한다고 바로 되는 게 아니다. 오랜 기간 훈련하고, 극한 상황을 이겨내면서 조금씩 쌓이는 거다. 축구는 말이 아니라 발로 하는 것이니까.”※김정남 멕시코 월드컵 대표팀 감독은 당시 인터뷰에서 “참고할 만한 게 없어 막막하고 두려웠다. 마라도나 한 명만 알고 아르헨티나전에 나섰다”고 말했다.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의 이회택 감독은 “일주일이면 시차 적응이 다 끝날 줄 알았다. 잔디 등 그라운드 컨디션은 신경도 못 썼다”고 말했다. ―브라질전은 좀 아쉬웠다. “개인적으로는 이강인이 몸이 참 좋은 상태였는데 왜 처음부터 기용하지 않았는지 궁금하긴 하더라. 그리고 물론 감독이 제일 잘 알 테고, 또 안에서 보는 것과 밖에서 보는 게 다르긴 하겠지만, 지더라도 과연 그렇게 무기력하게 질 수밖에 없었는지 하는 생각은 들었다. 대비를 제대로 못 한 건 아닌지….” (왜 그렇게 생각하는 건가.) “물론 브라질은 두말할 필요가 없는 세계 최고의 강팀이다. 그런데 6월에 우리가 브라질과 평가전을 하지 않았나.” ―당시 1-5로 졌는데…. “승패가 중요한 게 아니다. 평가전 때 드러난 문제점을 보완하고 대비해, 질 때 지더라도 악착같이 상대를 힘들게 만들었어야 했다. 상대의 기술이 워낙 좋기 때문에 밀착 방어와 함께 옆에서 도와주고 막아주는 협력 수비도 치열하게 했어야 했는데, 수비에서 그런 면이 잘 안 보였다. 6월 평가전에서 드러난 문제점을 정말 제대로 보완했는지…. 이런 부분은 지적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카타르 월드컵에서 브라질이 전반에만 4골을 넣으니까 후반전에는 다음 경기 대비하느라 살살 하지 않았나. 제대로 뛰었다면….” ―우리가 모르는 사정이 있었을까. “물론 그런 게 있을 수 있다. 멕시코 월드컵 때 조병득 골키퍼가 감기 걸리는 바람에 오영교 선수가 나갔다. 경기에 지니까 속 내용을 모르는 사람들은 왜 조병득을 쓰지 않았냐며 엄청나게 비난하더라.” (아팠다고 하면 되지 않나.) “그걸 어떻게 다 일일이 말하겠나. 기자회견을 열어 아파서 못 나갔다고 할 수도 없고, 지고 난 뒤라 구차하기도 하고….” ―조별 예선에서 독일, 스페인을 침몰시킨 일본 실력이 대단하던데…. “정확한 숫자는 모르겠지만 일본은 고등학교 팀만 수천 개다. 우리와 비교가 안 된다. 그리고 일반 국민이 잘 모르는 게 있는데… 성인 대표팀은 그럭저럭 버티지만 중고등학교 한일전은 이미 수십 년 전부터 거의 다 지고 있다. 일본은 굉장히 오래전부터 축구 발전을 위해 장기적인 계획을 세워 실행하고 있다. 유망주 육성은 물론이고, 이제는 유럽에 상설 캠프장까지 만든다고 한다. 전지훈련은 물론이고 유럽에서 뛰는 자국 선수들도 이용하고, 또 일본 선수들의 유럽 진출을 위한 교두보로도 활용할 계획이라는 거다.” (우리는?) “없지….” ※지난해 전일본고등축구연맹에 등록된 고교 팀은 3962개다. 대한축구협회 자료에 따르면 우리 고등부(U18) 등록 팀은 190개다. ―일본이 오래전부터 대표팀의 성적 부침이 적다고 하던데, 그런 까닭인가. “앞서 말했지만 장기적인 계획을 세워 부족한 면을 채우고, 낮은 부분을 끌어올리다 보니 우수한 선수가 끊임없이 배출돼 전력이 굉장히 안정돼 있다. 기본기나 기술은 지금 일본이 우리보다 앞선다. 근성도 많이 올라갔는데, 이번 월드컵 독일, 스페인전에서 후반에 뒤집기 하는 걸 보면 알 수 있다. 몸싸움 때 전혀 물러서지 않더라.” ―일본 축구가 한국보다 앞서는 걸 인정하지 않는 건 우리뿐이라던데 맞나. “그런 면이 있다. 내키지는 않지만 일본이 잘한다는 걸 인정해야 한다. 감정적으로만 대할 일이 아니다. 그리고 우리도 대책을 세워야 한다. 나도 일본에 지는 건 싫다. 하지만 계속 지고 싶지 않다면, 인정할 건 인정하고 이기기 위한 장기적인 계획을 세우고 노력해야 한다.” ※전 축구 국가대표 이영표는 한 방송 인터뷰에서 “한국 축구가 일본보다 강하다는 착각에서 벗어나야 한다. 다른 나라들은 일본이 더 강하다는 걸 안다”고 말했다. 이 말을 한 때가 이미 2013년이다. ―우리가 평가전이나 친선경기조차 너무 예민하다 보니 긴 호흡으로 준비하는 게 힘들다는 지적도 있는데…. “그게 참 어려운 게… 물론 평가전이 새로운 전술을 시험하고 이런저런 선수도 기용해 보는, 감독의 구상을 적용해 보는 자리인 건 맞다. 그렇긴 한데 팬들은 워낙 기대가 크다 보니 또 그렇게만 생각하지 않는다. 승패도 중요한 거지. 더군다나 한일전이면 더…. 그러니 감독 입장에서는 평가전이지만 승패를 의식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리고 이번 월드컵에도 일부 그런 게 있었지만 과도한 악플은 이제는 좀 없어졌으면 좋겠다. 내가 2000년 시드니 올림픽을 준비하면서 하도 충격을 받아 지금까지도 댓글을 못 보고 있다.” ―무슨 일이 있었나. “시드니 올림픽을 앞두고 유럽 전지훈련을 다녀온 뒤 공항에서 선수들을 다 풀어줬다. 대표팀이 대부분 대학 선수들이었는데, 바로 대학선수권대회가 있었기 때문이다. 대회가 끝나고 평가전을 위해 소집했는데 다들 몸 상태가 말이 아니었다. 한여름에 4차례 경기가 포함된 전지훈련을 다녀오고, 제대로 쉬지도 못한 채 바로 대회를 뛰었으니까. 아니나 다를까 평가전을 하는데 20분 정도 지나니까 녹초가 돼 뛰지 못하고 걸었다. 결국 1-4로 박살났다.” ―경기란 게 질 때도 있지 않나. 상대가? “일본…. 누리꾼들이 댓글로 융단폭격을 하는데, 그중 하나가 심장을 후벼 팠다.” (뭐라고 썼기에.) “그때 부친이 유럽 전지훈련 중에 돌아가셔서 급히 귀국해 장례를 치렀는데, 그 돌아가신 아버지를 걸고넘어졌다. 그 글에 너무 충격을 받아서 이후로는 지금까지 인터넷 댓글을 안 본다. 안 그래도 감독과 선수들은 지역 예선부터 본선까지 엄청난 심적 부담을 가질 수밖에 없다. 잘하면 칭찬하고, 못하면 격려해 주면 좋을 텐데 꼭 그렇게 인신공격성 댓글을 달아야 하는지. 그런 모습은 이제 좀 없어졌으면 한다.” 이진구 기자 sys1201@donga.com}

《지난달 중순 한국이 유엔인권이사회 이사국 선거에서 낙선했다. 2006년 초대 이사국에 선출된 이래 단 한 번도 없었던 일. 4자리를 놓고 6개국이 출전한 선거에서 우리는 5위에 그쳤다. 서창록 전 유엔 인권이사회 자문위원회 위원(현 고려대 일민국제관계연구원장)은 “근본적으로 역대 정부들이 인권외교를 소홀히 한 결과가 쌓인 탓”이라고 말했다. 2014∼2020년 두 차례 유엔 인권이사회 자문위원을 역임한 그는 현재 유엔 시민적·정치적 권리위원회 위원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당신에게는 더 충격이었을 것 같은데. “월드컵에서 사우디아라비아에 진 아르헨티나 국민들이 이런 심정이 아니었을까. 그도 그럴 것이 우리는 2006년 인권이사회 출범 때부터 지금까지 3연임 금지 규정으로 2012년, 2019년 두 번 쉬었을 때 빼고는 모두 당선됐다. 더군다나 방글라데시 몰디브 키르기스스탄 베트남 아프가니스탄 등과의 경쟁이었다. 아프가니스탄은 지금 탈레반이 여성들 학교도 못 가게 하는 나라다. 다 지고 그런 나라 하나 이겼으니….” ―왜 떨어졌다고 생각하나. “물론 원인은 복합적이다. 북한 인권문제에 소홀했던 전임 정부 탓이라는 의견도 있고, 현 정부의 인권외교 부재를 꼽는 사람도 있다. 외교부 말대로 너무 많은 국제기구 선거에 뛰어들다 보니 선택과 집중에 실패해서일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근본적으로 인권에 대한 역대 정부들의 관심 부족이 원인이라고 생각한다. 오랫동안 인권외교 기반을 충분히 다지지 못해 나타난 결과다.” (우리는 유엔 사무총장까지 배출한 나라다.) “스위스 제네바는 유엔인권이사회뿐만 아니라 수십 개의 분야별 국제기구와 수백 개 국제 비정부기구(NGO)들이 있는, 매년 3000여 회의 국제회의가 열리는 다자외교의 중심지다. 그래서 170여 개국이 상주 대표부를 두고 있다.” ―갑자기 제네바 이야기는 왜 꺼낸 건가. 우리도 주제네바 대표부가 있지 않나. “있는데… 인권 담당자는 달랑 세 명이다. 내가 인권이사회 자문위원 할 때 보니, 우리 외교관들은 위원회에서 중요한 협의를 하는데도 참석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유가 뭔가.) “인원은 적은데 업무가 너무 많은 탓도 있고, 한국에서 높은 분들이 오면 의전에 투입되느라 못 오기도 했다. 또 서기관들은 대부분 2년도 채 안 있고 떠난다. 초기에는 인권에 대한 충분한 지식이 부족해 좌충우돌하며 배우는데, 그나마 조금 익숙해질 때면 가는 거다. 외교부 본부에도 인권 담당 사무관은 4명뿐이다.” ―현안 따라가기도 힘들 것 같은데. “그러다 보니 전 세계적으로 인권과 관련해 벌어지는 많은 사안을 다 파악하기가 어렵다. 외교부는 전략 실패라고 하는데… 판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큰 그림을 못 보는데 무슨 전략을 짜겠나. 그런 상황에서 마침 후보국들도 만만해 보이니 ‘설마…’ 하다가 떨어진 거지.” ―당신 같은 전문가들이 도와줄 수도 있지 않나. “외교부 정책자문위원회를 통해 정기적으로 자문은 한다. 하지만 긴박한 결정을 할 때는 외부 전문가 의견을 듣는 경우가 별로 없다. 이번 인권이사회 이사국 선거도 마찬가지였던 걸로 안다.” (외교부는 올해 4대 중점 선거 중 하나라고 했는데 전 자문위원에게 자문도 안 구했다는 건가.) “중요한 이슈들이 매일같이 있다 보니 직원들이 특정 사안을 고민하고 공부할 겨를이 없다. 누군가 지속적인 관심을 가져야 (사안별로) 외부 전문가 집단도 만들고 자문도 구할 텐데 그런 시스템이 없다.” ―다른 나라들은 어떤가. “2015년에 만났던 오스트리아 인권 담당은 아직도 있더라. 그러니 아는 것은 물론이고, 인적 네트워크도 얼마나 넓겠나. 선진국은 협상도 선거운동도 그런 사람들이 한다. 내가 2020년 유엔 시민적·정치적 권리위원회 위원 선거에서 당선됐는데, 일본 위원에게 물어보니 선거 3년 전에 외무성에서 의사 타진을 해왔다고 했다. 그리고 3년 동안 당선되는 데 필요한 훈련과 지원을 해줬다는 거다. 외국에서 관련 공부도 시켜주고, 제네바에서 활동하게도 해 주고….” (당신은?) “나 혼자 개인 플레이로 뛰었다.” ―우리 인권 외교가 오락가락이라는데, 현실을 고려하다 보니 그런 건가. “노(NO), 원칙과 실력이 없어서다.” (원칙과 실력?) “인권은 그 무엇보다도 상위에 있는 가치지만, 그렇다고 현실을 무시한 채 존재할 수도 없다. 인권 유린을 당하는 아프가니스탄 여성들을 도우려면 탈레반의 협조 없이는 불가능하지 않나. 그래서 중요한 것이… 그 나라가 가진, 인권에 대한 일관된 원칙이다. 그 원칙 아래서 인권 외교를 추진해야 실력도 생기고, 국제사회의 신뢰를 얻게 된다. 국제적 신뢰가 있으면 개별 사안에서 조금 다른 행보를 보인다고 앞뒤가 다른 나라라고 하지는 않는다. 힘이 모든 것인 국제사회에서 인권을 수호한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 원칙이 없다. 그러니 실력을 쌓을 수도 없다.” ―인권에 대한 원칙 부재가 실력 부재로 이어진다는 게 무슨 말인가. “지난달 초 유엔 인권이사회가 중국의 신장위구르족과 소수 민족에 대한 반인도적 범죄 혐의와 관련한 토론 개최 여부를 묻는 투표를 했다. 우리는 찬성표를 던졌는데, 이후 같은 사안에 대한 유엔 총회(제3위원회)의 규탄 성명에는 동참하지 않았다.” (바뀐 이유가 있나.) “앞뒤가 안 맞을 때마다 쓰는 말이 있지 않나. ‘여러 가지 제반 상황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외교부도 궁색한 거지.” ―제반 상황이 뭔지는 말 안 하던데. “한 사회가 가진 인권에 대한 신념은 오랜 시간 공들인 고민과 노력의 산물이다. 개별 사안을 어떻게 대할 것이냐는 것은 그 흔들리지 않는, 확립된 가치관을 기준으로 정하는 것이다. 현실적으로 모든 것을 그 신념에 따라 행동할 수는 없지만 기준이 있으니 입장을 달리해도 많이 벗어나지 않고, 그러다 보니 변명도 어느 정도는 남들이 보기에 이해가 가게 만든다. 그게 실력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신념은 없고, 위정자에 따라 입장이 완전히 바뀌니 준비를 할 수가 없다. 외교부는 자타가 공인하는 수재들의 집단이지만, 앞뒤가 완전히 다른데 무슨 재주로 논리를 만들겠나. 사실 외교부도 불쌍하다.” ―북한인권결의안 공동 제안국 참여 같은 것을 말하는 건가. “하든 말든 일관돼야지, 했다가 안 했다가 하면 어떻게 하나. 더군다나 우리 문제인데. 얼마 전 있었던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략과 인권 침해 규탄 결의안에 불참한 것도 마찬가지다. 솔직히 나는 윤석열 대통령이 강조하는 자유·인권의 뜻이 뭔지 궁금하다. 그냥 정치적 수사가 아닌가 싶기도 하고…. 그래서 창피한 말이지만, 우리 생각과 달리 국제사회에서 한국은 인권을 중시하는 나라라는 신뢰를 못 받고 있다. 탈북어민 강제 북송 같은 건 정말 이해하기 어려운 행위다.” ―문재인 정부는 도저히 받을 수 없는 흉악범들이라 추방했다고 했다. “설사 흉악범일지라도 돌려보냈을 때 박해받을 게 분명하면 안 보내는 게 국제인권법상 기본 원칙이다. 백번 양보해 흉악범이라 돌려보낸다고 해도, 정말 흉악범인지 절차를 거쳐 면밀하게 조사했어야 했다. 그런데 며칠 만에 보냈다.” ※2019년 11월 2일 탈북 어민 2명이 해군에 나포됐다. 이들은 귀순 의사를 밝혔으나 정부는 같은 달 5일 북측에 추방 통보를 한 뒤 7일 인계했다. 이들은 고문 끝에 참수된 것으로 알려졌다. ―왜 자칭 진보라는 정부에서 그런 일이 벌어졌을까. “박근혜 정부 시절 내가 주로 진보 진영에서 인권 운동하는 사람들을 모아서 ‘북한 인권 평화 모임’이란 걸 만들었다. 김대중·노무현 정부 때 잘못했던 것도 반성하고, 제대로 된 북한 인권 운동을 하자는 취지였다.” (‘제대로 된’이라니?) “앞서도 말했지만 인권 정책은 원칙을 확립하고 일관되게 추진해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늘 정권이 바뀔 때마다 달라졌다. 보수도 진보도 북한 인권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면 안 된다. 이런 생각에 공감하고 그렇게 돼야 한다고 했던 사람들이 문재인 정부에 많이 참여했다.” (결과를 보면 달라진 게 없는 것 같은데….) “물어봤더니… 북한 인권 문제는 건드리지 말라는 분위기라 할 수 없다고 하더라.” 이진구 기자 sys1201@donga.com}

얼마 전 영화 ‘담보’ ‘하모니’를 만든 강대규 감독을 만났습니다. 그는 ‘해운대’ 조감독, ‘히말라야’ ‘공조’ 각색 등을 맡았던 충무로의 차세대 유망주지요. 강 감독을 만난 이유는 창작자의 정당한 보상 문제에 대해 듣기 위해서였습니다. 창작자가 정당한 보상(저작권료)을 요구하는 것은 너무 당연합니다. 8월 말 ‘천만 감독’ 등 국내 영화감독 200여명이 국회에 모인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죠. 그런데 관련 법 개정이 가시화되자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사업자 등 콘텐츠를 송출하는 최종 플랫폼 산업계의 반대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습니다. 이들은 법으로 저작권료를 보장하면 △사적 계약의 자유가 침해되고 △저작물 권리자와 이용자 간 균형 발전이 저해되며 △복잡한 권리 제도로 인해 오히려 영상 콘텐츠 유통도 위축될 수 있다고 합니다. 또 감독·작가에게만 저작권료를 챙겨준다면 영화에 참여한 다른 직군과의 형평성 문제도 발생할 수 있다고 하더군요. 얼핏 그럴듯해 보입니다만, 대부분의 감독이 작품 계약 시 완전 ‘을’ 입장이라는 걸 생각하면 ‘사적 계약의 자유’와 ‘균형 발전’ 운운은 ‘갑’의 입장을 대변한 말이 아닌가 싶습니다. 한국영화감독조합의 실태조사에 따르면 국내 대부분의 감독이 평생 만드는 상업영화가 5편 미만이라는 게 그 반증이지요. 평생 기회가 5번도 채 안 오는 감독들이 조건을 따져가며 계약하기란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그런데 계약의 자유라니요. 이런저런 이유를 말하지만 결국 최종 플랫폼 산업계가 법 개정에 반대하는 가장 큰 이유는 돈 문제인 것 같습니다. 저작권법이 개정되면 콘텐츠의 복제·배포·방송·전송 등의 행위로 발생한 수익 중 일부를 창작자에게 지급해야 하니까요. 예를 들어 넷플릭스 같은 OTT 사업자는 저작권을 가진 제작사나 투자사에서 영상 콘텐츠를 사와 방송합니다. 방송으로 인해 발생하는 수익은 OTT 몫이었죠. 그런데 법이 개정되면 사 오는 비용과 별개로 이후에 방송·배포 등으로 발생한 수익 중에서 일부를 창작자에게 지급해야 합니다. OTT 입장에서는 손해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요.그런데 저는 오히려 법이 개정돼 창작자들에게 정당한 보상이 지급되는 게 길게 보면 OTT 등 최종 플랫폼 산업계가 더 많은 돈을 버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너무도 당연한 이야기입니다만, 넷플릭스나 디즈니+, 티빙 등 국내외 OTT에 볼 게 없으면 장사가 되겠습니까? 볼거리를 만드는 원천은 감독·작가 등 창작자들이죠. 국내 영화감독들의 연 평균 소득이 2000만원이 안 되는 게 우리 현실입니다. 창작자들이 모두 고흐나 밀레도 아닌데 생활고에 시달리면서 어떻게 좋은 작품을 만들겠습니까. 전에도 언급했지만 ‘범죄도시’의 강윤성 감독은 첫 번째 상업 영화가 무산된 후 두 번째를 찍는 데 17년이 걸렸습니다. 그 작품이 ‘범죄도시’죠. 그 기간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강 감독은 지금도 영화를 지망하는 청년들에게 “꿈에 목숨까지 걸지는 않았으면 한다”라고 조언한다더군요. 당장은 안 주던 돈을 줘야 하니 OTT들로서는 수익이 준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어부들도 아직 어리거나 산란기 물고기는 바다에 놔 줍니다. 물고기가 없으면 어부들도 살 수 없으니까요. 저는 정당한 보상 문제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좋은 작품이 많이 나오면 OTT 사업자들은 당연히 돈을 많이 법니다. 그렇다면 OTT 사업자들이 창작자들에게 정당한 보상을 해주는 것은 손실이 아니라 자기 밭에 씨를 뿌리는, 투자가 아니겠습니까. 그로 인해 1000억원 시장을 10조원 시장으로 만든다면, 오늘 지출한 적은 돈과는 비교할 수 없을 큰 이득이 생길 것입니다. 그게 더 나은 선택이 아닐는지요. 이진구 기자 sys1201@donga.com}

《최근 6·25전쟁 때 세운 무공으로 프랑스 최고 훈장인 ‘레지옹 도뇌르 슈발리에’까지 받은 노병들의 국립현충원 안장이 거부됐다. 현행 국립묘지법이 국내 무공훈장을 받은 사람만 대상으로 하기 때문. 여론의 질타가 쏟아지자 국가보훈처는 법 개정을 추진하겠다고 밝혔지만 언제 통과될지는 미지수다. 6월 프랑스 정부로부터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은 박동하 옹(94·예비역 하사)은 “60여 년 동안 국방부, 육군본부 등에 전쟁 때 세운 무공을 인정해 달라고 요청했는데, 민원 접수도 제대로 해주지 않았다”고 말했다.》 ―왜 인정할 수 없다는 겁니까. “우리 육군에 기록이 없다는 거지요. 제가 1951년 경기 양평 ‘지평리 전투’, 강원 양구 ‘단장의 능선 전투’ 등에서 잘 싸웠다고 전쟁 중에 프랑스로부터 동성십자훈장 두 개를 받았어요. 그걸 인정받고 싶어서 전역하고 1960년대부터 국방부, 육군본부 등에 민원을 넣었지요. 그런데, 대부분 접수도 제대로 안 해줬어요. 어쩌다 받아줘도 우리 측 기록이 없어 인정해줄 수 없다고 하더군요. 당연하지요. 전 프랑스 대대에 배속돼서 싸웠으니까 전투 기록은 프랑스에 있을 수밖에 없잖아요.” ―프랑스 기록을 제출하면 될 텐데요. “왜 안 했겠어요. 그런데 주한 프랑스대사관에서 사실증명까지 보냈는데도 인정해주지 않더라고요. 제가 프랑스군에 배속돼 싸웠을 뿐이지, 프랑스를 위해 싸운 게 아니잖아요. 외국군에 소속돼 치른 전투는 조국을 위해 싸운 게 아닌가요? 어떻게 보면 프랑스가 대신 기록하고 훈장을 준 것뿐인데…. 프랑스는 레지옹 도뇌르 훈장까지 주는데 정작 내 나라는 60년 동안이나 모른 척했으니….”※ 레지옹 도뇌르 훈장은 1∼5등급까지 있고, 슈발리에는 5등급이다. 해리포터 시리즈의 조앤 롤링, 삼총사의 알렉상드르 뒤마, 드레퓌스 사건의 알프레드 드레퓌스, 지휘자 정명훈 등이 슈발리에를 받았다. ―지평리 전투가 6·25전쟁 10대 전투 중 하나일 정도로 중요한 전투였더군요. “당시 중공군 개입으로 서울을 다시 잃었어요. 중공군은 5만 명 정도였는데 우리는 국군, 미군, 프랑스군 다 합쳐 5000여 명에 불과했지요. 사흘간 밤이 되면 중공군이 꽹과리와 나팔을 불며 쳐들어오는데, 마치 시커멓고 커다란 파도가 끝없이 몰아닥치는 것 같았어요. 살아남은 게 기적이었죠. 그저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는다는 생각밖에는 안 들더라고요. 정신없이 총을 쏘고 백병전을 벌였는데… 지평리 전투는 패전을 거듭하던 유엔군이 중공군의 인해전술을 물리친 최초의 전투였어요. 이 승리로 서울을 재탈환할 수 있었고요.” ―프랑스 부대에는 어떻게 배속된 겁니까. “제 고향이 평안남도 순천인데 전쟁 터지고 공산당을 피해 서울로 내려왔어요. 집안이 소지주 정도 됐는데, 계속 남아 있다가는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르겠더라고요. 그리고 1950년 12월 국군에 입대했고, 두 달 정도 지난 후 미 2사단 23연대 프랑스 대대에 배속됐지요. 프랑스군으로만 대대 병력을 모두 채울 수 없었기 때문에 나머지는 한국군을 차출했다고 해요. 한국군은 140명 정도 됐던 것 같아요.” (영어 소통이 가능해서 뽑혔다고 하던데요.) “그 정도는 아니고, 중졸 이상 중에 ‘예스’ ‘노’ 정도만 할 줄 알면 뽑았어요. 부대 안에서는 손짓, 발짓으로 의사소통을 했는데 생활하는 데 큰 지장은 없었어요. 프랑스군이 대단했던 게 미군 연대장이나 사단장도 프랑스 대대장을 함부로 대하지 못했어요. 맥아더 장군과도 맞짱을 뜨시던 분이니까요.” ―맥아더 장군은 유엔군 사령관인데 대대장이 어떻게…. “우리 대대장이 6·25전쟁에 참전하기 위해 중장에서 중령으로 자진 강등한 랄프 몽클라르 장군이었거든요.” (자진 강등요?) “우리 국민 중에 그분을 모르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제가 꼭 이야기하고 싶어요. 유엔군 파병이 결정됐지만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지 얼마 안 됐을 때잖아요. 프랑스도 병력을 보낼 여력이 없었대요. 그래서 프랑스 정부가 시찰단만 보내려고 했는데 ‘몽’ 장군이 그러면 안 된다고 하고, 몸소 전국을 돌며 모병해 참전했어요.” ―프랑스군은 전부 자원병이었습니까. “네, 모두 자원 입대자들이었어요. 그런데 편제상 대대는 중령이 지휘하기 때문에 중장이 맡는 건 안 된다는 지적이 나오자, ‘몽’ 장군이 ‘계급은 중요하지 않다’며 중령으로 자진 강등해 한국에 왔지요. 곧 태어날 자식에게 자유와 평화라는 숭고한 가치를 위해 참전했다는 긍지를 물려주고 싶다며…. 그때 그분이 58세였어요. 아내는 만삭이었고요. 1, 2차 세계대전을 다 겪은 분이에요. 전쟁이라면 지긋지긋했겠지요. 더군다나 어린 아들과 만삭의 아내를 두고…. 지금 우리가 누리는 이 자유는 그런 분들의 희생으로 지켜졌다는 걸 잊지 않았으면 합니다.”※랄프 몽클라르(1892∼1964). 본명은 라울 샤를 마그랭베르느레. 몽클라르는 2차대전 때 나치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사용한 가명이다. ―종전 후에도 프랑스와 계속 교류를 가졌더군요. “그 사람들이 참 대단한 게, 외국인이지만 프랑스 부대에서 함께 싸웠기 때문에 저희들을 프랑스 군인과 똑같이 대해줬어요. 1960년대 중반쯤인 것 같은데… 주한 프랑스대사관 무관이 저를 수소문해서 연락을 해 오더라고요.” (대사관 무관이 왜….) “보니까 전쟁 때 함께 싸운 소대장이었어요. 참전했던 장교들이 종종 무관으로 오더라고요. 올 때마다 연락을 하고, 주한 프랑스대사관에서 6·25전쟁 참전 관련 행사를 하면 늘 불러줬지요. 프랑스에서 높은 분들이 올 때도 꼭 초청해주고요. 전쟁에서 보여준 제 무공 때문에 프랑스군 위상이 높아져 감사하다면서요.” (실례지만 우리는?) “아무것도….” ―2018년 프랑스 외교부 장관이 왔을 때 판문점에 동행한 것도 그런 차원입니까. “장이브 르드리앙 프랑스 외교부 장관이었는데, 이번에 함께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은 박문준 씨와 함께 갔지요. 2019년 방데…뭐라는 전함(프랑스 태평양함대 소속 방데미에르 전함)이 인천항에 왔을 때도 초청받아 갔고요. 한국과 프랑스 간에 군사적인 행사가 있으면 꼭 부르더라고요. 전에는 제가 버스 타고 갔는데, 지금은 거동이 불편하다 보니 주한 프랑스대사관에서 차를 보내줘요.” ―작년 5월 프랑스 국방부가 파리에서 6·25전쟁 참전 대대 전사자 명비 제막식을 가졌는데 한국군 24명도 포함됐더군요. “전쟁 때도 느꼈지만 그 사람들은 우리가 한국군이라고 차별하지 않고, 똑같은 전우로 대해줬어요. 그리고 정말 대단한 게, 지금까지 70여 년 동안 기록을 보존하고 있으니까 가능한 일이잖아요. 자기 나라 군인도 아니고, 차출된 남의 나라 졸병 명단까지 70년을 보존한다는 게 어떤 국가의 철학, 정신이 없다면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해요.”※육해군 3421명을 파견한 프랑스는 전사자 262명, 부상자 1008명, 실종자 7명이 희생됐다. ―선생님처럼 유엔 참전국에 배속된 한국군이 2만 명이라는데, 우리는 정확한 명단도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고 합니다만. “제가 작년에 프랑스 최고 무공훈장인 ‘군사훈장’, 올해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았는데, 없던 무공을 갑자기 세워서 받은 게 아니잖아요. 전쟁 때 프랑스 대대에서 무공훈장 받은 기록이 남아 있어서 세월이 지나 받게 된 거죠. 이번에 제 문제로 논란이 되니까 국가보훈처가 법 개정을 추진하면서 유엔 참전국 훈장을 받은 사람들의 정확한 숫자를 파악하겠다고 했는데, 다행이기는 하지만 늦어도 너무 늦은 거죠.” (혹시 레지옹 도뇌르 훈장이 부상도 좀 있습니까? 최고 훈장인데.) “하하하, 별거 없더라고요. 우리 돈으로 월 6000∼7000원 정도 나오는데, 어려운 사람들에게 기부하는 게 관행이라고 해서 그렇게 했어요. 돈이 아니라 명예지요.” ―실례지만, 왜 그토록 무공훈장을 인정받고 싶었던 겁니까. “제 나이 아흔넷인데 뭘 더 바라겠어요. 단지 목숨을 걸고, 젊음을 바쳐 나라를 지켰다는 걸 내 나라에서 인정받고 싶었던 것뿐이죠. 현충원 안장 요청도 그런 차원이고요. 훈장이 중요한 게 아니에요. 프랑스 대대에서 함께 싸웠던 140여 명의 한국군 전우들은 이제 거의 다 죽었어요. 훈장을 받은 저도 인정을 못 받는데, 그들은 누가 기억을 해주나요. 바다 건너 프랑스에서는 기억을 해주는데, 정작 조국에서는 아무도 모른다면… 우리는 누굴 위해 싸운 건가요.” 이진구 기자 sys1201@donga.com}

‘범죄도시’의 강윤성 감독과 저작권료에 관한 이야기를 나눈 인터뷰가 나간 뒤 이런 말을 하는 분들이 많았습니다. 처음부터 감독들이 제작사와 계약을 잘 맺으면 된다는 것이죠. 정말로 영화를 잘 만들 자신이 있다면, 계약금도 충분히 받고, 다음에 발생할 흥행도 고려해 계약하면 되지 않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정당한 보상’ 요구도 애초에 창작자들이 저작권을 제작사에 안 넘겼다면 벌어지지 않을 문제라는 것이죠. 물론 그렇습니다. 스스로 계약을 불리하게 해놓고, 나중에 문제가 있다고 하는 것은 좀 이상해 보일 수 있습니다. 저 또한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해서 같은 질문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오징어게임처럼 초대박 작품을 만든 감독이 아닌 한 제작사와 대등한 계약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하더군요.한국영화감독조합에 따르면 국내 영화감독들이 평생 제작사와 제대로 계약을 맺고 찍는 상업영화가 평균 5편이 안 된다고 합니다. 30, 40대 감독들은 3편이 안 되고요. 평균 수치니, 유명감독이 아닌 경우에는 이보다 훨씬 적겠지요. 작품 수가 이렇게 적은 것은 결국 제작사, 투자사를 잡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작품을 만들 기회가 적은 감독들에게 애초부터 당신이 계약을 잘했으면 되는 것 아니냐고 하는 것은 너무 가혹한 말입니다. 누군들 그렇게 하고 싶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취업이 절실한 청년들에게 회사 재무 상태, 복지, 임금, 근무 환경 등을 다 따져보고 마음에 안 차면 가지 말라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지요.대부분의 감독이 추후 발생하는 수익은 고사하고, 계약금도 많이 요구하지 못하는 데는 이런 현실도 있다고 합니다. 한정된 제작비에서 감독 계약금을 올려줄 경우 다른 부문, 예를 들어 컴퓨터 그래픽이나 음악 같은 곳에 쓸 돈이 줄어든다는 것이죠. 영화를 찍을 기회도 적은 감독들이, 간신히 찍게 된 작품의 질을 떨어트리면서까지 자기 계약금을 올려 받기는 힘들다는 것입니다. 지난번 기사에서 저는 창작자에 대한 정당한 보상이 ‘생존권’ 또는 ‘최저생계비’라고 했습니다. 어느 산업이든 발전하려면 인프라가 튼튼해야 합니다. 창작자들이 영화 분야의 인프라인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겠지요. 그런데 작품 활동은 물론이고, 생계조차 불투명하다면 누가 영화 산업에 뛰어들겠습니까. 강 감독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국회에서 저작권법이 개정돼 외국에서 저작권료를 받게 되면 저작권 관리 단체가 그중 일부를 적립해 창작자들을 위해 쓸 계획이라고요. 세계의 저작권 관리단체들은 저작권료 수입액의 일정 비율을 창작자들을 위한 생활 및 의료 지원금, 복지 등에 사용하고 있습니다. 어느 분야나 비슷하겠지만 창작 활동은 직업 안정성이 굉장히 떨어지기 때문에 꾸준히 일한다는 게 쉽지 않지요. 마음이 불안한데 어떻게 좋은 작품이 나오겠습니까. 적더라도 자기 작품으로 인해 꾸준히 수입이 생기거나, 혹은 저작권료 수입을 통한 기금으로 작품 활동에 도움을 받을 수 있다면 지금보다 훨씬 나은 K 콘텐츠가 양산될 수 있을 것입니다. 비교가 적당한지 모르겠습니다만, 과거 한국 축구가 월드컵이나 올림픽에서 대패하고 나면 유소년 축구부터 육성해야 한다, 잔디 구장이 필요하다, 체계적인 선수 육성 시스템이 필요하다며 인프라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다른 분야도 비슷합니다. 그런데 유독 영화 분야는 우리 작품이 아카데미상, 에미상을 탈 때마다 K 콘텐츠가 중요하다고 그렇게 얘기하면서도 그 뒤에 가려진 잘못된 현실을 개선하려는 노력은 적은 것 같습니다. 좋은 작품은 땀으로 만들어야지, 피로 만들어서는 안 되지 않겠습니까.이진구기자 sys1201@donga.com}

최근 범죄도시의 강윤성, 오징어게임의 황동혁, 한산의 김한민 감독 등 국내 영화감독 200여명이 국회에 모였습니다. 우리 영화가 전 세계에서 각광을 받고 있는데, 정작 감독, 작가 등 창작자들에게는 단 한 푼의 보상도 없는 현실을 개선하기 위해서였지요. 그래서 왜 이런 어이없는 상황이 벌어졌는지 묻기 위해 강 감독을 인터뷰했습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유는… 외국에서 주기 싫어서 안 주는 게 아니라, 국내법에 받을 근거가 없기 때문에 못 받는 것이었습니다.설명에 앞서 지금 감독 등 창작자들이 요구하는 것은 ‘정당한 보상’입니다. 하지만 아직은 낯선 개념이라 영화계 안에서도 저작권료와 혼재해 쓰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저도 지난 기사에서는 독자의 이해를 위해 한국영화감독조합의 양해를 얻어 ‘저작권료’라고 표현했지요. 하지만 정확히 말하면 ‘정당한 보상’은 저작권자에게 지급하는 저작권료나, 연출료, 인센티브와는 조금 다른 개념입니다. 작품의 이용 횟수에 비례해 창작자에게 일정 보상을 지급하자는 것이죠. 우리나라 저작권법은 특약을 맺지 않는 한 법적으로 제작사가 저작권을 갖도록 하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저작권료는 저작권을 가진 제작사나, 제작사로부터 저작권을 산 투자사가 가져가지요. 계약금은 말 그대로 계약금일 뿐입니다. 계약금을 받은 후 작품이 이후 어떤 수익을 내도 창작자에게 돌아오는 것이 없는 것은 이런 구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시다시피 영화 같은 영상저작물은 만들어진 후 수십 년이 지나도 재상영 등을 통해 수익을 낼 수 있습니다. 명절 때마다 방송에서 단골로 트는 영화들이 그런 경우죠. 방송사는 이 영화의 방영권을 저작권을 가진 제작사나 투자사로부터 사 옵니다. 방송사는 영화를 틀고 광고 등으로 이익을 얻고요. 제작사 또는 투자사, 방송사 모두 이 영화로 인한 이익을 얻는 것이죠. 그런데, 앞서 말한 이런 구조 때문에 정작 이 영화를 만든 감독과 작가에게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보통 감독들이 시나리오 하나를 완성하는데 보통 2~3년, 더 긴 경우도 많다고 합니다. 오징어게임의 황동혁 감독이 스트레스로 이빨 6개가 빠졌다는 것은 유명한 이야기죠. 강 감독도 범죄도시 투자자를 못 구해 3년이나 촬영을 못 했다고 합니다. 그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겁니다. 영화 ‘타이타닉’에 출연했던 5살 꼬마는 단 한 줄의 대사밖에 없었는데 타이타닉이 재상영을 거듭하면서 지금까지 25년째 분기별로 200~300달러를 받고 있다고 합니다. 만약 타이타닉이 우리 영화였다면, 25년째 그렇게 혼신의 힘을 다해 작품을 만든 사람에게는 아무것도 없고, 구매담당자가 사 온 영화를 틀기만 한 방송사는 25년째 돈을 번 셈이죠. 이거 좀 너무한 거 아닌가요?이런 주장을 하면, 감독들만 잘 먹고 잘살려고, 자신들 배만 불리려고 하려는 것 아니냐고 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강 감독이 인터뷰 중에 제게 물은 게 있습니다. 감독들이 제작사와 제대로 계약을 맺고 찍는 영화(상업영화 기준)가 평생 몇 편이나 될 것 같으냐고요. 저도 답을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한국영화감독조합 실태조사에 따르면 5편이 되지 않았습니다. 30, 40대 감독들은 평균 3편이 안 되고요. 물론 유명 감독들은 다릅니다만 그들도 작품이 터지기 전까지는 마찬가지입니다. 강 감독도 30살 때 상업영화를 찍을 기회가 있었는데 무산된 후 데뷔에 17년이나 걸렸다고 했습니다. 그 영화가 범죄도시죠. 그런데 상업영화 기준으로 신인급 감독의 계약금은 5000만원 정도라고 합니다. 2~3년에 걸쳐 시나리오를 완성해야 제작사와 계약을 맺을 테니 연봉으로 치면 2000만원이 안 되는 셈이죠. 그나마 한 번에 주지 않고 제작사와 계약할 때 절반, 투자사를 찾으면 나머지 절반을 주는 게 관행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투자사를 못 찾아 영화가 엎어지는 게 비일비재하지요. 범죄도시조차 3년 동안 투자사를 못 찾았으니까요. 감독들이 말하는 ‘정당한 보상’은 배를 불리자는 게 아닙니다. 그들에게 이런 표현은 실례입니다만… 저는 ‘생존권’ 또는 ‘최저생계비’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우리가 범죄도시나 오징어게임, 기생충 같은 작품에 뿌듯해한다면, 그런 작품이 나올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주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죠. 영화 분야뿐만 아니라 다른 사회 분야가 다 마찬가지지만 노력과 성과의 결과에 대한 정당한 보상은 우리 사회를 움직이는 기본 원리입니다. 범죄가 나쁜 것은 정당한 노력 없이 남의 것을 가로채거나, 적은 노력으로 큰 이득을 보려 하기 때문이지요. 이빨이 빠질 정도로 고생해 만든 결과물을 만든 사람에게는 아무것도 없고, 수십 년 동안 돈과 유통망을 가진 사람들만 이득을 본다면… 그게 범죄도시 아닌가요? 이진구기자 sys1201@donga.com}

《최근 강윤성(‘범죄도시’), 황동혁(‘오징어게임’), 김한민(‘한산’) 등 국내 영화감독 200여 명이 국회에 모였다. 우리 영화가 아카데미 등 국제 영화상을 석권하고 있는데도 정작 감독, 작가 등 창작자들에게는 단 한 푼의 저작권료도 돌아오지 않는 현실을 말하기 위해서다. ‘범죄도시’(2017년 개봉)의 강 감독은 “외국에서 우리 작품이 상영돼도, 국내법이 없기 때문에 못 받고 있다”고 말했다. 강 감독은 올해 흥행작인 ‘범죄도시 2’에서 기획을 맡았다.》 ―국내법이 없어 못 받는다는 게 무슨 말입니까. “유럽과 남미에는, 예를 들어 방송사가 ‘범죄도시’를 틀면 작가와 감독 등 창작자에게 수익의 일부(저작권료)를 지급해야 하는 법이 있어요.” (받으면 되지 않습니까.) “외국에서 저작권료를 받으려면, 우리도 국내에서 방송한 외국 작품에 대해 줘야 해요. 자신들은 받을 수 없는 곳에 저작권료를 보내면 불법 송금으로 처벌하는 나라도 있거든요.” ―주는 법이 없어 못 받는다는 거군요. “저작권 시장에 아예 들어가지를 못하고 있는 거죠. 오죽하면 외국에서 ‘돈은 쌓이고 있는데, 주고 싶어도 한국이 저작권 시장에 참여하지 않아 못 준다’고 하겠어요.” (쌓이고 있다는 게….) “그 나라 법에 따라 한국 작품 저작권료를 모아 놓고는 있으니까요. 우리가 법만 만들면 가져올 수 있는 거죠.” (우리가 저작권 보호를 위한 베른협약에 가입한 게 1996년인데 왜 아직도 관련 법이 없습니까.) “음악 분야와 달리 영화는 창작자들이 자기 권리를 찾겠다는 생각을 한 게 오래되지 않았어요. 저작권법이 영화감독을 사실상 창작자로 인정하지 않고 있는 탓도 있고요.” ―영화감독이 왜 창작자가 아닙니까. “법이 별도의 특약이 없으면 제작사가 모든 저작권을 갖는 것으로 하고 있거든요. 창작자지만 권리는 없는 거죠. 그래서 법으로 창작자를 보호해야 한다는 생각을 잘 안 해 온 것 같아요.” (문화체육관광부나 영화진흥위원회는 뭘 하고 있던 건가요.) “모르겠어요. (법 개정) 얘기를 하면 복잡하다, 어렵다고만 하고….” ―특약이 없는 한 제작사가 모든 저작권을 갖는다는 건 불합리한 것 같은데…. “영화에는 감독 배우 작가 스태프 등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고, 또 모두 어느 정도 자기 권리를 요구할 수 있는 부분이 있어요. 이걸 구분하는 게 대단히 복잡하기 때문에 관행적으로 제작사가 모든 권리를 갖는 걸로 했는데, 그게 굉장히 오래되다 보니…. 하지만 이제는 카페에서 노래 하나를 틀어도 정당한 보상을 받는 시대니까, 영화도 바꾸자는 거죠.” ―어떻게 바꾸자는 겁니까. “창작자들이 저작권을 양도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쩔 수 없는 부분이 있어요. 하지만 그 후에 TV 재방영, 넷플릭스 유튜브 판매 등으로 발생한 부가적인 수익에 대해서는 정당한 보상을 받을 수 있는 권리를 법에 넣자는 거죠. 지금까지는 저작권법상 권리가 없기 때문에 작품이 흥행에 성공해도 계약금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거든요.” ―애초에 특약을 맺거나 계약을 잘해서 많이 받으면 안 됩니까. “창작자들이 (제작사와) 계약을 잘 맺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해요. 우리나라 감독들이 평생 평균 몇 편이나 제작사와 제대로 계약을 맺고 찍을 거라고 생각하세요?” (글쎄요… 10여 편?) “제작사, 투자자가 갖춰진 상업 영화의 경우 평균 5편 이하예요. 한국영화감독조합에서 실태조사를 했는데 30, 40대 감독들은 평균 3편이 되지 않고요. 기회 자체가 없는 감독들에게 계약 관행을 바꾸라는 건 비현실적인 얘기죠. ‘범죄도시’도 투자자를 찾지 못해 3년이나 촬영을 못했거든요.” ―왜 투자를 안 한 겁니까. “형사가 주먹들 잡는 얘기는 너무 뻔하다고….” (투자자를 못 구하면 어떻게 됩니까.) “영화가 엎어지는 거죠. 우리나라 감독은 보통 시나리오도 같이 쓰는데, 원작이 있는 경우도 각색하는 데 시간이 많이 걸려요. 보통 2∼3년. 더 긴 경우도 많고요. 그런데 영화가 엎어지면 그 시간이 다 날아가는 거예요.” ―17년 만에 데뷔했다는데 맞습니까. “서른에 상업영화를 할 기회가 있었는데 어쩌다 보니 무산됐어요. 그 뒤로 ‘범죄도시’를 찍을 때까지 17년 동안 기회가 없었지요. 30대 때는 그래도 견딜 수 있었는데, 점점 나이가 들면서 정말 힘들고 서럽더라고요. 오죽하면 제가 영화를 지망하는 청년들에게 ‘꿈에 목숨까지 걸지는 말았으면 한다’고 말하겠어요. 한 편 찍을 기회가 절실한 감독들이 보상과 특약 얘기를 한다는 건… 꿈같은 얘기죠.” ―제작사는 저작권법 개정이 달갑지 않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만. “그 부분이 오해가 없어야 하는데, 제작사나 투자자 수익을 나눠 달라는 게 아니에요. 예를 들면, 음악 분야는 방송사가 음반을 사용하면 가수나 연주자 등 실연자에게 보상금을 지급해요. 그것처럼 영화도 넷플릭스 같은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등에서 방영했을 때 발생한 수익 중 일부를 창작자에게 주자는 거죠. 그러면 투자자나 제작사에 부담도 안 될 테고. 이런 상태가 개선되지 않으면 지금은 ‘오징어게임’ ‘수리남’ 등 K콘텐츠에 세계가 열광하고 있지만 얼마 못 가 영화 산업 기반이 고사될 수 있어요.” ―역대 어느 때보다 잘나가고 있는데 고사라니요. “우리 영화감독들 평균 연봉이 2000만 원이 안 돼요.” (계약금이 그 정도입니까?) “상업 영화의 경우 신인급 감독이 한 5000만 원 정도 받아요. 그런데 대체로 계약할 때 일부 주고, 투자가 이뤄지면 나머지를 줘요. 투자자를 못 찾으면… 나머지 돈은 없는 거죠. 엎어지는 영화가 많다고 했잖아요? 오죽하면 감독조합에서 실태조사를 해보니 감독이 셋 중 하나(30.2%)가 작년에 작품으로 번 돈이 0원이겠어요.” ―그 정도일 줄은 몰랐습니다. “그래서 많은 창작자들이 투잡, 스리잡을 뛰고 있어요. 당연히 창작할 시간과 에너지가 줄지요. 직업 안정성이 떨어지면 새로운 인재는 들어오지 않고, 기존 인재들은 해외로 빠져나갈 테고요. 이대로라면 지금의 화려한 성과도 10년을 넘기지 못할 것이라는 말이 괜히 나오는 게 아니에요. 상업적으로 성공한 감독들은 그래도 괜찮아요. 문제는 후배·신인 감독들이죠. 저작권법 개정을 통해 자기 작품이 가치를 인정받고, 적더라도 꾸준한 수입이 생긴다면 훨씬 더 좋은 영화를 만들 수 있을 거예요.” ―영화 ‘타이타닉’에서 딱 한 마디 했던 아역배우는 25년째 출연료를 받고 있다던데요. “타이타닉이 1997년에 개봉했는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요즘은 그래도 정산하면서 (흥행에 따라) 인센티브를 주는 경우가 있긴 한데 개봉 후 몇 번만 정산한다 또는 개봉 뒤 2, 3년까지만 준다 이런 식이에요. 사실 평생 권리를 줘야 되거든요. 음악은 사후 70년까지 권리를 인정해 주잖아요. 명절 때마다 방송사에서 그렇게 틀어서 돈을 벌었으면 정당한 보상은 당연한 건데….”※5세 때 타이타닉에 출연했던 리스 톰프슨(30)은 극중 이름도 없었고, 대사는 “우린 어떻게 되는 거야?’ 딱 한 마디였다. 하지만 타이타닉이 재상영을 거듭하면서 지금까지 25년 동안 분기별로 200∼300달러를 받고 있다고 한다. ―감독 계약금은 어떻게 정합니까. “대체로 제작사에서 전에 계약했던 곳에 ‘그때 얼마 줬어?’ 하고 물어서 정하지요. 상업영화 신인감독이 5000만 원 정도라고 해도 이게 시나리오 작업에 2년 정도 걸리니까 결코 많은 게 아니에요.” (너무 짠데요.) “투자자들도 다 이 분야에 오래 있던, 안목이 있는 사람들이라 갑자기 팍 올리기가 쉽지 않아요. 그분들이 알고 있는 통상적인 가격이 있거든요.” (‘범죄도시’도 가능성을 못 알아봤다면서요.) “하하하. 시나리오, 연출, 컴퓨터그래픽 등 다 정해진 선이 있어서 내 것만 올려달라고 하기는 힘들어요. 영화 시장은 늘 돈이 모자라거든요.” ―순제작비만 200억, 300억 원인 작품도 많은데 늘 돈이 없다니요. “2억 원짜리 영화도 투자자를 찾기 힘든 게 우리 현실이에요. ‘제작비 200억 원’ 이러면 마치 아낌없이 돈을 퍼부은 것 같아 보이지만 실상은 400억, 500억 원 들어갈 걸 깎고 또 깎고 줄여서 만든 거예요. 그러니 여유가 없지요. 화려해 보이지만 그림자도 짙은 게 우리 영화계 현실이에요.” 이진구 기자 sys1201@donga.com}

올해만큼 국내 수학계에 경사가 거듭된 해가 또 있을까요. 허준이 미 프린스턴대 교수의 필즈상 수상, 수학 국가 등급 최고 그룹 승격, 국제수학올림피아드 종합 2위 등 그야말로 뉴스가 쏟아졌습니다. 그런데 참 신기한 일입니다. 우리 수학 교육은 수포자(수학 포기자)란 말이 나올 정도로 붕괴했고, 대학에서 수업이 안 될 정도라는데 어떻게 이런 결과가 나오는 걸까요. 하도 궁금해서 최근 금종해 국제수학연맹(IMU) 집행위원을 인터뷰했습니다. IMU는 수학계의 노벨상인 필즈상을 수여하는 곳이지요. 그는 고등과학원 교수이자 대한수학회장이기도 합니다. 먼저 이해를 돕기 위해 초등학교 3학년 때 처음 배운다는 분수 문제를 소개합니다.길이가 45cm인 색 테이프를 영훈이와 지연이가 나누어 가지려고 합니다. 지연이가 가져갈 수 있는 색 테이프는 몇 cm일까요?영훈= 45cm의 5/9만큼 가져갈게.지연=그러면 나는 나머지를 가져갈게.여러분은 이 문제가 쉽게 이해가 되는지요. 어른도 잠시 생각을 해야 하는데 분수가 뭔지 모르고 처음 배우는 초등학생들이 이해할 수 있을까요? 2019년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은 수포자의 첫 갈림길이 초등학교 3학년 ‘분수’에서 시작된다고 발표했습니다.여기서 몇 가지 의문이 생깁니다. 왜 이렇게 어렵게 가르치는 걸까요. 그리고 학생들이 어렵게 느낀다면 나라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요. 상식적인 답은 쉽게 가르칠 수 있다면 가능한 한 쉽게 가르쳐야 하고, 그 방법을 찾아서 제공하는 게 교육자와 국가의 의무라는 것입니다. 그 노력을 다한 뒤에도 남는 어려운 부분에 대해서는 학생들을 설득해야 합니다. 어렵지만 꼭 필요한 것이니 배워야 한다고.그런데 우리 현실은 쉬운 걸 쓸데없이 꼬아서 어렵게 가르치고, 어렵다고 하니 안 배워도 된다며 수능 출제범위에서 빼버린다고 합니다. 2009 개정 교육 과정에서는 행렬, 2015 개정 교육 과정에서는 공간벡터가 삭제된 게 그런 이유지요. 고등학교를 졸업한 지 오래돼 잘 몰랐습니다만 요즘 수능 수학은 고2, 고3 1학기 범위에서만 출제할 수 있다는군요. 금 교수는 “하도 어렵다고 아우성치니 학습 부담을 줄여준다는 취지인데 덕분에 대학에서 수업이 안 될 지경”이라고 했습니다. 당연한 결과겠지요. 입시에 안 들어가는 내용을 공부할 학생이 어디 있겠습니까.금 교수는 우리가 ‘수포자’라는 정체불명의 부정적인 용어를 써서는 안 된다고도 말했습니다. 생각해보니 ‘수포자’라는 기준이 뭔지 모르겠습니다. 물론 기초학력이 미달하는 학생들은 있습니다. 그러면 ‘포기자’인가요? 이 학생들이 “더 이상 나는 공부고 뭐고 아무것도 안 하고 살겠다”라고 천명이라도 했습니까. 수학을 어렵게 느끼고 싫어하는 학생도 분명히 있습니다. 싫어한다고 다 포기자인가요? 공부가 좋아서 하는 학생은 또 몇이나 되겠습니까. ‘싫다’와 ‘포기한다’라는 분명히 다른 것입니다. 우리나라 문해력이 문제라더니 정말 그런 것 같습니다. 금 교수는 “진짜 수학 포기자는 학생들이 아니라 제대로 가르치는 걸 포기한 나라”라고 했습니다. 수학이 어려워서 싫은 건 ‘포기’가 아니라 ‘포비아(공포)’일 뿐이고, 그러면 나라와 교육자들은 학생들이 겁먹지 않고 재미를 느끼며 배울 수 있는 방법을 찾아서 제공해야 할 의무가 있는데 안 한다는 것이죠. 앞서 말했지만 어려워도 앞으로 살아가는 데 필요하기 때문에 꼭 배워야 한다고 설득도 하고요. 그런 노력은 1도 안 하고 어렵다고 이 내용, 저 내용 빼고, 그래도 어렵다고 하면 ‘수포자’라고 낙인을 찍고, 더 나아가 안 배워도 대학 갈 수 있다고 하는 나라야말로 진짜 ‘수포자’라는 겁니다.이상한 교육 정책이 나올 때마다 근거로 드는 게 어려운 수학이 사교육을 부채질한다는 말입니다. 금 교수는 “수능을 구구단으로만 낸다고 사교육이 없어지겠느냐”고 말했습니다. 온갖 종류의 구구단 시험 문제가 만들어져서 학원에 다니게 할 거라는 것이죠. 사교육 증가의 본질은 경쟁인데 자꾸 어려운 교육 탓으로 돌리니 입시제도가 누더기가 되고, 결국 수백억 원씩 버는 소위 일타강사들만 양산했다는 것입니다. 그러고 나니 사교육 기회에서 상대적으로 소외된 학생들을 위해 EBS 수능을 만들고 그 안에서 출제하도록 했지요. 이런 코미디가 어디 있나요. 아무리 출제범위를 줄이고, 문제를 쉽게 내도 사교육이 줄지 않는다는 게 그 반증 아니겠습니까.인터뷰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생각을 바꿔야 합니다. 왜 학생들이 쉬운 것만 배워야 합니까? 문제는 쉽게 낼 수 있지만 공부는 어려운 것도 배워야지요. 아니면 나라가 안 배워도 평생 걱정 없이 먹고 살 수 있게 해주던지요. 그러지도 못하면서…. 이건 나라 망하자는 이야기에요.”저는 우리 사회, 교육 당국이 금 교수의 이 말을 다시 한번 곱씹어봤으면 좋겠습니다. 그가 뭐가 아쉬워서 이렇게 피를 토하며 걱정하겠습니까.이진구 기자 sys1201@donga.com}

《수학계 노벨상인 필즈상 수상(허준이 미국 프린스턴대 교수), 수학 국가 등급 최고 그룹 승격, 국제수학올림피아드 종합 2위. 올해 한국 수학계는 금자탑이라 할 정도로 눈부신 업적을 쌓았다. 하지만 밑바탕이 돼야 할 초중고교 수학교육은 정반대로 ‘수포자(수학 포기자)’를 넘어 ‘수학의 붕괴’라는 말까지 나오는 상황. 4년마다 필즈상을 수여하는 국제수학연맹(IMU)의 금종해 집행위원(65·고등과학원 교수·대한수학회장)은 “수포자가 양산된 진짜 이유는 나라가 수학을 제대로 가르치는 걸 포기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나라가 제대로 가르치는 걸 포기했다고요? “수학이 어려워서 싫은 학생들은 늘 있어요. 이건 ‘포기’가 아니라 ‘포비아(공포)’예요. 그러면 나라는, 교육자는 어떻게 해야 해요? 학생들이 겁먹지 않고 재미를 느끼며 배울 수 있는 방법을 찾아서 제공해야 하잖아요. 어렵지만 필요하기 때문에 꼭 배워야 한다고 설득도 하고…. 진짜 수포자는 학생들이 아니라 수학을 제대로 가르치는 걸 포기한 나라예요. 수학이 어렵다고 이 내용, 저 내용 빼면서 정작 학교에서는 쓸데없이 어렵게 가르치니까요.” ―어떤 면에서 쓸데없이 어렵다는 겁니까. “초등학교에서 분수를 이렇게 가르쳐요. ‘길이가 45cm인 색 테이프를 영훈이와 지연이가 나누어 가지려고 합니다. 지연이가 가져갈 수 있는 색 테이프는 몇 cm일까요? 영훈=45cm의 5/9만큼 가져갈게. 지연=그러면 나는 나머지를 가져갈게.’ 그리고 45cm 길이의 색 테이프 그림이 있어요. 그림과 대화까지 있다 보니 어떤 건 문제만 한 페이지나 돼요. 풀기도 전에 문제를 보다가 질려버리죠. 이 문제가 머리에 쉽게 들어옵니까?”※2019년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은 수포자의 첫 갈림길이 초3 ‘분수’에서 시작된다고 발표했다. ―왜 그렇게 가르치는 건가요. “실생활 소재를 이용해 가르쳐야 한다는 개념을 무리하게 적용한 거죠. 그럴 내용도 있고 아닌 것도 있는데…. 분수 계산은 기능적인 거예요. 45×5/9=25. 먼저 이렇게 가르쳐주고 나중에 원리를 알려줘야 하는데, 거꾸로 원리부터 알려주면 초등학생들이 어떻게 이해하겠어요. 어렵다고만 느끼지. 자전거를 탈 줄 알면 왜 바퀴가 이렇게 돌아가는지 이해하기가 쉽잖아요. 그런데 먼저 바퀴가 돌아가는 원리부터 설명하면 애들이 자전거를 타고 싶겠어요? ‘자포자’가 되겠지요. 쉽게 가르칠 수 있는 걸 왜 일부러 어렵게 가르치는지…. 그리고 우리가 수포자처럼 개념도 모호하고 부정적인 말은 함부로 쓰면 안 돼요.” ―개념이 모호하다니요. “기초학력이 미달하는 학생들은 있어요. 그런데 그 외에 설문조사로 ‘수학에 흥미가 없느냐’ ‘수학을 못한다고 생각하느냐’를 물어 그렇다고 답한 학생들까지 포함시키는 경우가 많잖아요. 일정 점수 이상 문제를 못 풀었다고 왜 ‘포기자’라는 낙인을 찍나요? 풀고 싶은데 아직 몰라서, 조금 어려워서 못 풀 수도 있잖아요. 학생이니까, 조금 늦더라도 더 배워서 풀면 되지요. 수포자라는 용어를 쓰는 건… 오히려 수포자를 조장하는 환경을 만드는 것일 수 있어요. 그리고 생각을 바꿔야 해요. 왜 학생들이 쉬운 것만 배워야 합니까? 문제는 쉽게 낼 수 있어요. 하지만 공부는 어려운 것도 배워야지요. 우리 수학 수준을 낮춘다고 다른 나라도 낮추나요? 이건 나라 망하자는 거예요.” ―어려운 수학이 사교육 증가를 부른다는 주장도 있습니다만…. “그런 이유로 지금까지 계속 쉽고 부담이 작게 가르쳐 왔지만 사교육은 되레 늘었잖아요. 본질은 경쟁에 있지 쉽고 어렵고에 있는 게 아닌데…. 입시를 구구단으로만 치르면 사교육이 없어지겠습니까? 온갖 종류의 구구단 시험 문제가 만들어져서 학원에 다니게 하겠죠. 입시제도를 자꾸 누더기로 만들다 보니 결국 몇 백억 원씩 버는 소위 ‘일타’ 강사들만 탄생시켰어요.” ―그러다 보니 교육도 점점 더 양극화가 되고 있습니다. “서민층 자녀들은 있는 집 애들만큼 사교육을 받기 어려우니까요. 그러니까 또 EBS 교재를 만들어 그 안에서 출제하게 하고… 코미디죠. 대학도 문제가 있어요. 학생들 눈치만 보고….” ―눈치요? “전공별로 모르면 안 되는 과목들이 있어요. 이런 과목들을 배우지 않으면 우리 대학은 입학할 수 없다고 해야 학생들이 공부를 할 텐데 그런 말을 안 하죠. 애들이 지원하지 않는다고. 서울대도 못하니 어느 대학이 할 수 있겠어요. 대한수학회장 임기 4년(재임) 내내 가장 많이 말한 게 우리 수학 교육이었어요. 그게 주 임무가 아닌데….” ―그럼 누가 그런 얘기를 합니까. “대한수학회장의 임무는 허준이 교수 같은 연구자들을 키우고, 국가 수학 수준을 높이는 거지 초중고교 수학 교육과정을 얘기하는 게 아니에요. 그런데 교육이 망가져 가는데도 말하는 사람이 없다 보니 나서게 된 거지요. 교육은 정치 이슈가 되면 안 돼요. 보세요. 대부분의 학부모들은 공부를 잘 못하는 자녀를 데리고 있습니다.” (잘하는 학생은 소수일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그렇지요. 그런데 ‘공부를 못해도 당신 아이가 좋은 대학을 갈 수 있다, 어려운 거 안 배워도 대학 갈 수 있다’고 하면 학부모들은 솔깃해질 수밖에요. ‘이 과목은 우리 애가 어려워서 못하는데 안 해도 된다고? 그럼 좋은 대학 갈 수 있겠네’ 이렇게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프로파간다(propaganda·선동 선전)죠. 고1, 고3 2학기 범위에서는 수능 출제를 못하게 하는 게 말이 됩니까.” ―3년 동안 배운 것의 절반에서만 문제를 낸다는 건가요. “하도 ‘수학은 어렵다’고 하니 학습부담을 줄여준다는 건데… 되레 수학 교육만 엉망이 됐습니다. 2009 개정교육과정에서는 행렬, 2015 개정교육과정에서는 공간벡터가 삭제됐지요. 수학계가 아우성을 치니 2022 개정교육과정에 행렬이 다시 들어갔지만 그나마 어려운 부분은 다 빠지고 기본 개념만 가르치는 정도죠.” ―행렬을 다시 넣은 이유는 뭡니까. “행렬을 모르면 인공지능(AI), 빅데이터를 할 수가 없어요. 기본 중의 기본이니까요.” (이세돌 9단과 알파고가 붙은 게 2016년인데 어떻게 이제야….) “그런 게 한두 개가 아니에요. 기하학은 수능 출제범위에서 퇴출됐다가 1년 만인 2022학년도 수능에 선택과목으로 들어갔어요.” (허준이 교수가 필즈상을 받은 분야 아닌가요.) “대수기하학을 바탕으로 조합론의 오래된 난제를 다수 해결하고 조합 대수기하학의 새 지평을 연 공로를 인정받아 받았지요.” ―올해 국제수학올림피아드 대표단(6명)이 모두 서울과학고 학생들이더군요. 우연인가요. “다단계 선발시험으로 뽑는데 전에는 일반고, 지방 소재 고교 학생들도 있었어요. 그런데 올림피아드 인기가 높아지니까 중학교 때부터 3∼5년씩 전문적으로 사교육을 받으면서 준비하는 학생들이 생겼지요. 집에서 지원해줄 여력이 안 되면 점차 선발되기 쉽지 않은 구조가 된 거예요. 서울과학고 학생들을 뽑은 게 아니라, 1∼6등이 모두 서울과학고인 거죠. 저는 규정을 바꿔서 한 학교 학생들로 모두 채우는 걸 바꾸고 싶지만 그것도 쉽지는 않아요.”※7월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열린 제63회 대회에서 우리 대표단은 금3, 은3으로 종합 2위를 차지했다. ―대한수학회가 선발을 주관하지 않습니까? 회장이신데…. “과거 해보려고 한 적이 있는데 항의가 심했어요. 오랫동안 준비하는 학생들이 많은 데다 한 번 메달을 땄는데도 두 번, 세 번 또 나가서 따려고 하는 애들도 있으니까요.” (다른 나라는 어떻게 선발합니까.) “대부분 성적순으로 뽑지요. 수학이 그냥 좋고 잘해서 두 번 이상 나가는 학생도 있기는 해요. 하지만 2000년 제가 채점위원장일 때 러시아 단장에게서 들었는데 러시아는 2명 정도는 성적순이 아닌 단장 재량으로 발탁한다고 하더군요.” ―발탁은 어떤 기준으로 합니까. “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낼 수 있는지 보다 이 학생이 앞으로 훌륭한 수학자로 성장할 가능성이 있는지를 본다더군요. 그래서 단장이 선발한 학생들은 실제 대회 성적은 좋지 않은 경우가 많았다고 했어요. (우리 학생들도)한 번 재능을 확인했으면 귀한 시간을 같은 과정을 반복하는 데 쓰지 말고 고급 수학이나 인문학 같은 다른 걸 공부하면 더 좋을 텐데….” 이진구 기자 sys1201@donga.com}

《최근 우리 사회에서 ‘심심(甚深)하다’(마음의 표현 정도가 매우 깊고 간절하다)의 의미를 놓고 문해력 저하 논란이 일었다. ‘심심한 사과’의 ‘심심’을 ‘하는 일 없이 지루하고 재미없음’으로 이해한 누리꾼들이 공지 글을 올린 업체에 부적절한 표현이라고 항의를 한 것. 댓글 하나에서 시작된 이 문제 제기는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동조하면서 사회적 이슈로 번졌다. 서영아 국가문해교육센터장은 “문해력은 단순히 어떤 단어의 뜻을 알고 모르는 능력을 말하는 게 아닌데 최근의 문해력 논란은 다소 초점이 어긋난 부분이 있다”고 말했다.》 ―심심하다 외에도 사흘, 금일(今日) 등의 뜻을 모른다고 문해력 논란이 일지 않았나.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제 성인 문해 능력 조사’는 문해력을 ‘가정, 일터 등 일상생활에서 문서화된 정보를 이해·활용하고, 지식과 잠재력을 넓힐 수 있는 능력’으로 정의한다. 성인이 일상생활을 영위하는 데 필요한 기본적인 능력을 말하는데, 단순히 어떤 특정한 단어를 알고 모르는 걸 가지고 문해력이 있다, 없다고 하지 않는다. 모르면 찾아보면 되니까.” (뜻을 몰라도 찾아보면 문해력이 있다는 것인가.) “그렇다. 아는 단어라는 게 사람마다 차이가 있고, 또 알게 되는 시기가 다르기 때문에 특정 시점에 어떤 단어를 아는지 여부가 문해력을 가늠하는 기준이 될 수는 없다. 무엇보다 그런 대표성을 부여받는 단어나 문장들이 없다. 당연히 단어 뜻을 물어보는 식으로 문해력을 평가하지도 않고.” ―그런데 왜 그렇게 사회적 이슈로 번졌을까. “정확히 알 수야 없겠지만 묘하게 논리가 확대된 면이 있는데… 문해력(文解力)을 글자 그대로 문자를 읽고 이해하는 좁은 의미로만 생각하다 보니 벌어진 일이 아닌가 싶다. 그러다 보니 ‘이런 단어도 몰라?’ ‘그럼 글도 이해 못 하는 것 아니야?’ ‘어쩌다 교육이 이렇게 된 거지?’ 이렇게 커진 게 아닌지…. 단어를 알고 문장을 이해하는 게 기본적으로 필요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심심하다’ 논란도 차분하게 생각하면 그렇게까지 문해력 논란으로 번질 일은 아닐 수 있다.” ―어떤 면에서 그런가. “‘심심하다’도 그렇고 최근 대부분의 문해력 논란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 벌어진다. SNS는 약관을 읽고, 동의하고, 가입하는 절차를 거쳐야 이용할 수 있다. 그 과정에서 자신이 모르거나 애매한 부분이 있다면 검색도 하고 친구들에게 묻기도 했을 거다. 문해력의 진정한 의미인 일상생활을 영위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단지 실생활에서 잘 안 쓰는 단어 뜻을 몰랐다고 문해력이 없다고 할 수 있을까? 다시 말하지만 문해력은 단어 실력 테스트가 아니다. 어휘력이 부족하다고는 할 수 있겠지만…. 오히려 최근 문해력 논란은 문해력이 아니라 소통력 저하 때문이 아닌가 싶다.”―소통력 저하? “내가 모를 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인터넷 검색을 하거나 주변에 물어보려는 마음…. 상대가 모르면 ‘그 단어는 이런 뜻이다’라고 알려주려는 마음. 그런 마음이 있었다면 논란 자체가 벌어지지 않았을 거다. 그런데 한쪽은 왜 이런 단어를 쓰냐며 언성을 높였고, 다른 한쪽은 그런 것도 모르냐, 한심하다며 조롱했다. 문해력 저하가 아니라 소통력 저하가 더 큰 문제가 아닌지…. 그래서 우리가 문해 교육을 할 때도 단순히 글과 문장을 이해하는 걸 최종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모르는 것을 묻고, 서로 협력해 생활에 필요한 문제를 해결하는 것까지 경험을 시킨다. 그런 면에서 보면 ‘심심하다’ 논란은 또다른 측면에서 문해력 저하를 보여주는 게 아닌가 싶다. 한 번만 찾아보거나 물어봐서 모르는 걸 알아냈다면 벌어지지 않았을 테니까.” ―실제 문해력은 어떻게 평가하나. “최근 논란이 된 것처럼 단어 뜻을 아는지를 묻지는 않는다. 3년마다 18세 이상 성인 4400만 명 중 1만 명 정도를 표본 추출해 직접 대면 조사를 하는데 숫자 읽기, 지명 쓰기 등 아주 기본적인 것부터 약 복용량 이해 및 측정, 인터넷 정보 이해, 전기요금 계산 등 다소 어려운 것까지 주관식·객관식 43개 문항을 풀게 한다. 3분의 2 이상을 맞히면 일상생활에 필요한 충분한 문해력이 있다고 평가하는데, 학력으로 비교하면 중학교 졸업 이상 수준을 말한다.” ―‘일상생활에 어려움이 있는 정도’라는 게 감이 잘 안 오는데…. “2020년 조사에서 성인 4400만 명 중 200만 명(4.5%)이 기본적인 읽기, 쓰기, 셈하기가 불가능한 수준이었다. 기본적인 읽기, 쓰기, 셈하기는 되지만 일상생활 활용이 쉽지 않은 사람도 180만 명(4.2%)이나 된다. 이런 분들 중에는 은행에서 통장을 만들지 못해 평생 통장 없이 사는 분들도 있다. 또 500만 명(11.4%)은 가정, 여가 등 단순한 일상생활에는 활용 가능하지만 경제활동 등 복잡한 일상생활에 활용하는 건 쉽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모두 880만 명(20.2%)에 달하는데 성인 5명 중 한 명이 문해력이 낮아 일상생활에 어려움이 있는 셈이다.” ―지금 대한민국에 ‘문맹’인 분들이 200만 명이나 된다는 건가. “문맹, 까막눈이라는 말이 너무 안 좋아서 우리는 비문해자라고 부르는데 고령층이 많기는 하지만 10∼40대도 있다. 이분들은 그래서 거의 집에서 멀리 나가질 않는다. 버스를 탈 수도 없고, 글을 모르니 길을 잃기도 쉬우니까. 당연히 소득도 굉장히 낮을 수밖에 없다. 대도시, 고학력 분들이 들으면 ‘설마…’ 하겠지만 인구주택총조사 통계를 보면 우리나라 저학력 인구가 400만 명 정도나 된다.” (저학력이라면….) “중학교를 졸업하지 못한 중퇴 이하를 말한다. 성인 10명 중 한 명 정도가 중학교 중퇴 이하다.” ―선진국은 문해력 강화를 굉장히 중요한 정책으로 시행하는 것 같던데…. “프랑스는 성인의 약 7%가 문해 수준이 낮은 걸로 보고 있다. 이 때문에 비문해퇴치사무국이라는 국가 정책기구를 두고 있고, 정기적으로 국민의 문해 수준을 조사한다.” (낮다는 게 어느 정도를 말하는 건가.) “읽고 쓰기, 셈하기가 안 되거나 글을 읽고 쓰기는 해도 일상생활에 활용이 미흡한 수준이라고 보면 된다. 이 때문에 국가가 정책적으로 관련 광고도 낸다.” ―‘아는 게 힘이다’ 이런 종류인가. “하하하. 자동차 광고처럼 보이는 포스터인데 설명을 읽으면 자동차 광고가 아니라 다른 광고라는 걸 알 수 있다. 그리고 설명 아래 ‘주변에 이 광고를 자동차 광고로 이해하는 사람이 있으면 글을 모르는 것이니 가까운 교육기관을 소개해 줘라’고 돼있다. 국제기구들도 문해력을 중요하게 여기는 건 마찬가지다. OECD는 조사 지표를 만들어서 회원국끼리 문해 능력 수준을 비교하고 있다. 물론 조사도 하고 있고. 유네스코(UNESCO), 유럽연합(EU)은 문해 능력을 사회경제적 발전은 물론이고 민주주의 가치 실현을 위해서도 반드시 갖춰야 할 기초 능력으로 여기고 있다.” ―문해력과 민주주의가 어떻게 연결된다는 건가. “조사를 해보면 문해력 수준이 낮을수록 정치에 대한 관심이 떨어지는 경향을 보인다. 반대로 문해력이 높으면 정치 관심이 높다.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려면 구성원들이 비판적이고 분석적인 사고를 해야 하고, 사실과 의견도 구별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런데 문해력이 떨어지면 이런 사고를 하기 어렵다.” (우리 사회가 자꾸만 남의 말은 안 듣고 극단적으로 치닫는 걸 보면 확실히 문해력이 떨어진 것 같기는 하다.) “하하하. 그렇게 생각할 수도….”※세계적인 인지신경학자인 메리언 울프 교수는 저서 ‘다시, 책으로’에서 “민주주의의 가장 큰 걸림돌은 비판적이고 분석적인 시민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고, 수준 높은 읽기를 할 수 없는 이들은 비판적이고 분석적인 사고를 하지 못한다. 문해력 저하가 민주주의의 위기를 초래할 수 있다”고 말했다.국가문해교육센터성인 문해 교육을 위해 2016년 출범한 국가평생교육진흥원 산하 기구. 전국 지자체, 학교, 평생교육시설, 비영리 민간단체 등과 함께 연간 7만여 명을 교육하고 있으며, 3년마다 전국 성인문해능력조사를 시행하고 있다. 이진구 기자 sys1201@donga.com}

최근 윤은호 인하대 문화콘텐츠문화경영학과 초빙교수를 인터뷰했습니다. 윤 교수는 자폐성 장애를 가진 등록 장애인 중에는 유일한 교수이지요. 그를 인터뷰한 것은 드라마를 계기로 현실에서는 자폐성 장애를 가진 분들이 어떤 어려움을 겪고 있는지 듣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이 드라마의 인기가 ‘재미있고 훈훈했던 좋은 작품’으로 끝나지 않고, 사회적 약자들의 삶을 변화시키는 쪽으로 이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있었지요.하고 싶은 말은 많습니다만 저는 가장 먼저 국립국어원이 자폐와 관련된 용어를 자폐 당사자들의 의견을 반영해 바꾸거나 순화시키면 어떨까 합니다. 인터뷰를 하다보니 우리가 얼마나 자폐성 장애에 대해 무관심했는지 알게 됐기 때문이죠. 드라마에도 나오듯이 자폐는 병이 아닙니다. 윤 교수에 따르면 국제표준인 ‘세계표준질병 사인 분류(ICD)’에도 ‘자폐성 장애(자폐스펙트럼 장애)’를 유일한 공식용어로 쓰고 있다고 하는 군요. 그런데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에는 ‘자폐증(自閉症)’으로 돼있고, 관련 용어들의 설명도 거의 대부분 부정적입니다. ‘자폐성’은 ‘자기 자신 속에 틀어박혀 현실에서 도피하는 상태’, ‘자폐성 경향’은 ‘다른 사람들과의 의사소통을 회피하고 자기 가운데에 파묻혀 주위로부터 고립되는 경향’ 이런 식으로요. 장애는 병이 아닙니다. 시각장애인, 청각장애인을 병자로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 유독 우리사회는 자폐당사자들을 포함한 발달장애인들을 부정적으로 보는 것 같습니다. 국립국어원의 우리말샘에는 표준어뿐만 아니라 신조어, 중세 한국어와 근대 한국어의 고어, 방언, 외래어로 인정되지 않은 외국어까지 약 110만 개가 넘는 표제어가 수록돼있습니다. 여러분은 ‘샤랑’이라는 말을 들어보셨습니까? 우리말샘에 따르면 ‘사랑’의 평안북도 지방 방언이라네요. 우리말샘에는 ‘샤랑트강’이란 생전 처음 듣는 강도 등재돼있습니다. 프랑스에 있는 작은 강 이름이더군요. 그런데 자폐성 장애를 가진 분들이 스스로를 지칭하는 ‘자폐당사자’란 말은 없습니다. 당연히 표준국어대사전에도 없지요. 말과 글은 그 사회가 특정 대상을 어떻게 보고, 생각하고 있는지 가늠할 수 있는 바로미터입니다. 올바른 인식 없이 제대로 된 정책이 나올 수 있겠습니까. 조금 다른 이야기입니다만 이런 잘못된 인식은 자폐당사자들이 장애인 진단을 받기 위해 병원에 갔을 때도 벌어진다고 합니다. 자폐 진단 기준에 아이큐(IQ) 테스트는 없는데 이상하게 우리나라 병원에서는 먼저 IQ테스트를 한 뒤에 IQ가 높으면 자폐 진단을 잘 안 해준다는 거지요. 윤 교수 본인이 겪은 일입니다. 아마도 자폐성 장애를 일종의 ‘저능아’로 치부하는 잘못된 인식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러다보니 고인지 자폐당사자들의 경우 장애인정을 받기 위해 실제보다 더 장애가 심한 것처럼 과잉 행동을 하게 되는 슬픈 현실도 벌어진다고 합니다. 장애를 가진 것도 서러운데 장애인정을 받기 위해 상태가 더 심한 것처럼 연기를 해야 한다는 것이죠. 국내에 장애인으로 등록한 자폐당사자는 3만 명 정도입니다. 그런데 다른 장애와 달리 자폐성 장애는 자폐진단을 받아도 장애인 등록을 하지 않는 분들이 많다고 하는군요. 어쩌면 자폐성 장애를 부정적으로 보는 우리 사회의 잘못된 인식도 영향을 미친 게 아닌가 싶습니다. 한 드라마가 가져온 자폐성 장애에 대한 관심을 그저 재미있는 작품 하나 본 걸로 끝낸다면 너무 아깝지 않을까요.이진구 기자 sys1201@donga.com}

《2022년 여름, 한 드라마가 ‘자폐’에 대한 우리 사회의 고정관념을 바꿔놓고 있다. 자폐는 병이 아닌 장애이기에 자폐증(自閉症)이라 부르면 안 되고, 집착하는 특징도 그들이 가진 흥미라는 점을 인정해 존중하자는 것. 자폐성 장애인으로 국내 처음 박사 학위를 취득했던 윤은호 인하대 문화콘텐츠문화경영학과 초빙교수(36)는 “당연한 얘기지만 현실은 드라마와는 많이 다르기에 편하게 보지만은 못했다”며 “자폐성 장애(자폐스펙트럼 장애)에 대한 관심이 실제 변화로 이어질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어떤 점이 편하지 않던가요. “네, 네. 드라마에는 우영우가 어떻게 서울대 학부에 입학했는지 안 나오는데… 제가 서울대 장애인 전형에 지원했을 때는 원서도 못 냈거든요.” (원서를 못 내다니요?) “2005년 서울대 장애인 전형에 지원했는데, 당시 서울대는 지원 자격이 되는지 사전 검증을 했어요. 여기를 통과한 학생만 원서를 낼 수 있었던 거죠. 제 경우는 직원분이 ‘자폐성 장애인을 교육해 본 적이 없어서 받을 수가 없다’고 하더라고요. 돌발 행동을 할 수 있어서 어렵다고도 하고. 면전에서….” ―장애 때문에 장애인 전형에 지원할 수 없었다는 겁니까. “그런 셈이죠. 기가 막혀서 당시 언론에 투고를 했는데 학교에서 봤나 봐요. 며칠 뒤 전화가 오더라고요. 지금이라도 지원하고 싶으면 내라고. 그런 식으로는 들어가고 싶지 않았어요. 그래서 비장애인 수험생들과 똑같이 시험 보고 인하대에 들어갔지요. 인하대에는 장애인 전형이 없었거든요.” (우영우도 장애인전형이 아닐 수 있을까요.) “그럴 수도 있어요. 그런데 그러려면 비장애인 학생들과 똑같은 장소에서 똑같은 시간에 시험을 봐야 하기 때문에 경쟁이 힘들어요.” ―별도의 고사장이 제공되지 않습니까. “정부가 분류한 15가지 장애 중 청각, 시각, 뇌병변 등 운동장애인에게만 해당돼요. 나머지는 비장애인 학생들과 같은 교실에서 시험을 봐요. 시각장애인에게는 점자 문제지, 청각장애인에게는 별도의 시험실, 뇌병변 등 운동장애인에게는 1.5배의 시험 시간 등 배려가 있는데 다른 장애인에게는 없어요. 장애인 선수와 비장애인 선수가 같은 트랙에서 달리는 셈이죠.” ―드라마다 보니 실제와 차이 나는 부분도 있었겠지요. “솔직히… 쉽게 보기 힘든 부분도 있기는 했어요. ‘저렇지는 않은데…’ 하는 생각이 들 때마다 TV를 껐다, 켰다 반복하곤 했지요. 예를 들면 큰 소리가 날 때 자폐당사자가 손으로 귀를 두드리고 누르며 막는 장면이 나오잖아요. 자폐당사자들은 귀를 막기는 해도 두드리지는 않아요. 소리 때문에 귀가 아파서 막는 건데 거기를 또 두드리면 더 아프니까요. 3회에 나온 ‘펭수’에 빠진 자폐당사자도 현실에서는 좀 있기 힘들어요.” ―자폐성 장애에는 어떤 물건에 빠지는 특징도 있지 않습니까. “그렇긴 한데 대부분 아주 어릴 때 생겨요. 펭수는 2019년에 나왔잖아요. 성인이 됐을 때, 짧은 시간에 그렇게 확 빠지기는 쉽지 않거든요. 물론 드라마적인 요소 때문에 그런 것이겠지만… 실제 자폐당사자들은 만나서 얘기를 들어봤다면 더 좋지 않았을까 해요. 그리고… ‘우영우’로 인해 사회적 관심이 는 것은 긍정적인데 반대로 혐오 발언이 더 늘어난 면도 있어서 안타까워요.” ―그럴 이유가 있습니까. “‘우영우’가 뭘 잘못해서는 아니에요. 전에는 관심 자체가 없어서 우리 같은 사람들에 대한 혐오 발언도 적었어요. 그런데 드라마가 뜨면서 평소에 장애인을 혐오하는 사람들에게는 또 하나의 비하할 소재가 생긴 거죠. 오늘도 다른 자폐당사자분들과 이야기하다 왔는데… 확실히 전에 비해 혐오, 비하가 더 늘어난 게 느껴진다고 해요.” (실례지만 어떤 식으로….) “뭐 욕하는 경우도 있고, 자폐당사자들이 지나가면 ‘우영우 간다’ 이러기도 하고….” ―드라마 덕분에 ‘자폐증’이 왜 잘못된 표현인지 알게 됐습니다. “자폐에 대해 가장 잘못된 표현인데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게 ‘자폐증’이란 말이에요. 자폐성 장애에는 정말 다양한 스펙트럼이 있는데 모두를 싸잡아 병으로 규정하는 것이니까요. 장애는 병이 아니거든요. 국제표준인 ‘세계표준질병 사인 분류(ICD)’에서도 ‘자폐성 장애’를 유일한 공식용어로 쓰고 있어요. 그런데도 우리는 표준어에 ‘자폐증’, ‘자폐적’을 등재하고, 설명도 부정적으로 하고 있지요.” ―어떤 점이 잘못된 설명인가요. “‘자폐적’을 ‘다른 사람들과의 의사소통을 회피하고 자기 내면세계에 파묻혀 주위로부터 고립되는 것’으로 설명해요. 자폐당사자 모두를 싸잡아 외부와 접촉을 거부하고, 현실에서 도피해 내면세계에 틀어박힌, 치료가 필요한 부정적인 존재로 보는 거죠. 그러다 보니… 제가 최근 3년 동안 기사를 조사해봤는데, 정치권이나 언론에서도 부정적인 상황을 비유할 때 쉽게 ‘자폐’란 단어를 써요. 예를 들면 ‘자폐적 역사관을 청산해야’ ‘자폐적 경향을 보이는 사회문화를 바꿔야’ 이런 식으로요.” ―외국에는 자폐성 장애를 가진 의사, 교사, 프로그래머, 연구자 등이 수두룩한데 왜 우리는 보기 힘든 겁니까. “그게… 자폐를 포함해서 정신적 장애를 가진 사람이 대한민국 일반 학교에 진학하면 그 순간부터 괴롭힘 등 학교 폭력을 벗어나는 게 거의 불가능해요. 저도 상처가 아물 새가 없었으니까요. 돈이나 물건을 뺏는 건 일상적이고…. 그래서 중고교 시절에 힘들어도 미래를 위해 일반학교에 남을지, 아니면 특수학교나 특수학급으로 갈지 갈림길에 서요. 대부분은 특수학교를 선택하죠.” ―학교 폭력 때문인가요. “네, 네. 특수학교로 옮기면 학교 폭력은 줄지만 대학 진학 공부와는 완전히 멀어지게 되요. 뒷받침만 되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학생들도 사라질 수밖에 없는 거죠. 자폐를 포함해 정신적 장애를 가진 학생들이 얼마나 학교 폭력을 당하는지 나라에서 조사라도 해줬으면 좋겠는데…. 제가 알기로는 제대로 한 번 조사한 적이 없어요. 자폐성 장애가 있는데도 장애인 등록을 하지 않는 분도 많고요.” ―장애 등록을 하지 않는 이유가…. “자폐성 장애인으로 등록된 분이 3만 명 정도 되는데 미등록자가 상당히 많아요. 아이가 자폐성 장애를 갖고 있다는 걸 인정하지 않는 부모님들이 많거든요. 그저 조금 불편하거나 발달이 늦는 것, 치료하면 나아지는 것으로 생각하시죠. 그런 부모님들은 아이가 다른 자폐성 장애를 가진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도 통제해요.” (생활에 지장이 없는 정도라 그런 것 아닙니까.) “진단상으로는 자폐성 장애가 있는데 부모님이 인정하지 않아 장애인 등록을 못한 친구가 있어요. 입대했는데 결국 관심사병으로 찍혀 굉장히 힘들게 복무했지요. 정신 질환도 있어서 약을 먹는데 장애인 등록을 하지 않아서 도움도 받을 수가 없고요. 우영우도 남자였으면 군대 갔을지 몰라요.” ―장애인이 왜 군대를 갑니까. “자폐 진단 기준에 아이큐(IQ)는 있지도 않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이상하게 IQ가 사실상 기준이 돼요. 이 수치가 높으면 자폐 검사를 잘 안 해 주는 거죠. 저도 2002년인가 재진단 받으러 병원에 갔더니 IQ검사부터 시켰는데 수치가 높게 나오니까 (재진단 검사가) 안 될 것 같다고 하더라고요. 그리고 제대로 진단 검사할 수 있는 곳도 적다 보니 좋은 의사 선생님은 예약해도 3년 후에나 받을 수 있어요. 자폐진단 검사를 제대로 못 받으면 (군대) 갈 수 밖에 없죠. 서러운 게 어디 한두 가지인가요. 제가 박사 학위를 딴 게 이상하다고 민원을 넣은 사람도 있었으니까요.” ―무슨 그런 민원이…. “처음 자폐성 장애인 등록을 하면 2년 후에 한 번 더 진단 검사를 받고 재등록을 해야 해요. 그러면 영구적으로 장애인 등록이 되는 거죠. 그런데 이후에도 누가 ‘쟤 이상하다’고 지자체에 민원을 넣으면 지자체에서 자폐당사자에게 진단 검사를 다시 받아 결과를 제출하라고 해요. 그래서 저도 2018년에 또 검사를 받았어요.” (박사 취득이 뭐가 이상하다는 겁니까.) “저런 애가 어떻게 박사를 받느냐고… 결국 다시 받았어요. 비용이 40만∼50만 원 드는데 정부 보조는 10만 원이에요. 나머지는 제가 내야 해요. 그게 우영우에는 안 나오는… 우리 현실이에요.” 윤은호 교수(36)자폐성 장애인으로는 국내 처음으로 2016년 박사 학위(문화경영학)를 취득했다. 2019년부터 모교인 인하대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으며, 자폐성 장애를 가진 등록 장애인 중 교수는 그가 유일하다. 이진구 기자 sys1201@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