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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통찰력으로 우리가 직면한 문제를 바라본다면 새로운 해결책이 나오리라 확신합니다.” 1943년 7월 미국 물리학자 J 로버트 오펜하이머(1904∼1967)는 헝가리 출신 수학자 존 폰 노이만(1903∼1957)에게 편지 한 통을 보냈다. 미국 뉴멕시코주 로스앨러모스에 거대 연구단지를 짓고 핵폭탄을 만드는 ‘맨해튼 프로젝트’가 지체되자 당시 ‘세상에서 가장 빠른 두뇌’라 불리던 노이만에게 도움을 요청한 것이다. 두 달 후인 9월 로스앨러모스에 도착한 노이만은 먼저 핵 연쇄반응을 위해 구의 중심 방향을 향해 폭발시키는 ‘내폭형’ 폭탄의 설계를 기존보다 정교하게 설계했다. 또 전하를 띠고 있는 쐐기 모양의 물질을 플루토늄 주변에 삽입해 폭탄의 폭발력을 높이자는 아이디어도 냈다. 처음 맨해튼 프로젝트는 우라늄을 사용하는 ‘포신형’ 폭탄 개발에 초점을 맞췄지만, 노이만의 합류로 플루토늄이 쓰이는 내폭형 폭탄 개발에 속도가 붙었다. 결국 1945년 7월 세계 최초의 핵실험 ‘트리니티 실험’에서 사용된 건 내폭형 폭탄이었다. 전공인 수학을 기반으로 물리학 경제학 등 여러 분야를 넘나드는 천재적인 사고를 펼친 노이만을 다룬 평전이다. 국제학술지 ‘네이처’와 영국 경제전문지 ‘이코노미스트’ 출신 저널리스트이자 과학 전문작가인 저자가 노이만의 일생을 추적했다. 노이만은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부유한 유대인이었다. 책을 읽고 싶어 도서관을 통째로 샀을 정도로 지적 호기심이 강렬했던 아버지는 노이만에게 철저한 영재교육을 시켰다. 노이만은 여덟 살 때 미적분을 척척 해낼 정도로 수학에서 두각을 보였다. 독일 베를린대 교수로 재직하던 노이만은 반(反)유대주의적 분위기를 피해 1930년 미국으로 건너갔다. 1933년부터 세상을 떠날 때까지 미국 프린스턴 고등연구소에서 독일 출신 물리학자 알베르트 아인슈타인(1879∼1955)과 함께 일했다. 그는 이해관계가 대립되는 집단의 행동을 수학적으로 다루는 ‘게임 이론’의 기초를 세워 현대경제학 발전에 공헌했다. 또 1932년 양자역학에 등장하는 개념들과 공식을 수학적으로 엄밀하게 서술해 양자역학의 발달에 이바지했다. 1941년 최초로 내장 프로그램 방식과 2진법을 도입한 ‘에드박’을 설계해 컴퓨터 혁신도 이끌었다. 평생 논문 150여 편을 발표하며 수학, 경제학, 컴퓨터과학, 기하학, 통계학 등 다양한 분야에 업적을 남겼다. 하지만 삶은 엉망진창이었다. 그는 머릿속에 가득 생각을 채우며 운전한 탓에 교통사고를 자주 냈다. 한 곡선도로엔 ‘노이만 코너’라는 별명이 붙기까지 했다. 항상 공부에 매달린 탓에 첫 번째 아내와 사이가 틀어졌고, 결혼 7년 만에 이혼했다. 여러 학문을 건드리다 보니 깊이가 없다는 지적도 받았다. 프린스턴 고등연구소 동료 중엔 그를 “고매한 학문의 전당에 빌붙어 사는 하층민”이라 부르며 질투하는 이들도 있었다. 말년엔 암이 뇌까지 퍼져 ‘7+4’ 같은 단순한 산수 문제도 풀지 못했다. 천재마저도 어찌 할 수 없는 것이 삶이란 난제일지 모른다. 1957년 2월 8일 마지막 숨을 거둔 그에 대해 두 번째 아내는 회고록에 이렇게 썼다. “노이만은 이 세상 누구보다 똑똑했지만, 감정을 다스리는 능력은 거의 원시인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그는 자연의 커다란 수수께끼, 그러나 풀리지 않은 채로 남아 있는 편이 더 좋은, 그런 수수께끼 같은 남자였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소속사 하이브가 그룹 방탄소년단(BTS)와 두 번째 재계약을 맺었다.하이브는 20일 “(하이브 산하) 빅히트뮤직 소속 아티스트 BTS 멤버 7인의 전속계약에 대한 재계약 체결에 대해 이사회 결의를 완료했다”고 공시했다. 2013년 6월 데뷔한 BTS는 앞서 전속 계약 기간을 다 채우기도 전인 2018년 10월 하이브와 재계약을 체결한 바 있다. 멤버 전원이 20일 두 번째 재계약을 맺음으로써 군 복무를 마친 2025년 이후에도 팀이 이어질 수 있게 됐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그림 동화는 평범한 사람들의 언어로 만들어 낸 이야기입니다. 민중의 언어를 일상적이면서도 시적인 언어로 빚어냈어요.” 8일 출간된 ‘그림 동화 특별판’(전 2권·민음사·사진) 자문역을 맡은 독일 민담·동화 권위자 알프레트 메세를리 전 스위스 취리히대 대중문화학과 교수(70)는 19일 화상 기자간담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형 야코프(1785∼1863)와 동생 빌헬름(1786∼1859) 그림 형제가 14년 동안 독일 전역을 다니며 200여 개의 민담을 모은 이 동화엔 민중의 목소리가 담겨 있다는 것이다. ‘그림 동화’는 그림 형제가 1812년 ‘아이들과 가정의 동화’라는 제목으로 처음 펴낸 뒤 수차례 개정한 책이다. ‘백설공주’, ‘신데렐라’, ‘헨젤과 그레텔’ 등 한국 독자도 익숙한 서양 민담이 담겼다. 메세를리 전 교수는 “그림 형제가 채집해 정리한 수많은 다양한 이야기들은 이젠 하나의 장르가 됐다”며 “인간의 긍정적, 부정적 특성을 모두 미화하지 않고 그대로 그려낸 동화를 읽으며 나라는 존재와 세상을 더 넓고 잘 이해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국내에 번역본이 많지만 신간은 그림 형제가 생전 마지막으로 펴낸 판본인 1857년 7판 정본을 처음으로 완역했다. 2011년 동양 여성 최초로 독일 바이마르 괴테 학회가 주는 괴테 금메달을 수상한 전영애 서울대 독어독문학과 명예교수(72)와 김남희 경북대 독어독문학과 교수(49)가 함께 번역했다. 전 교수는 “원문을 최대한 충실하게 번역하는 데 중점을 뒀다”며 “다른 판본은 ‘습니다’로 끝나는데 신간은 대화에선 존대어를 사용하고 본문은 평어체로 번역하며 속도감도 살리려고 했다”고 말했다. 전 교수는 또 “그림 형제가 전래 동화들을 수집했을 때는 프랑스 혁명의 영향이 유럽에 확산했고, 이를 억누르려는 강경한 대응이 이어지던 혼란한 시기”라며 “그림 형제는 각 지역에서 전해진 민담을 채집해 엮음으로써 독일 민족의 정신적 뿌리를 찾으려 했다”고 설명했다. 김 교수는 “종교, 교육, 도덕, 희망, 삶, 지혜 등 다양한 이야기가 담긴 종합선물세트 같은 책”이라고 했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전남 곡성군 천주교 곡성성당 옆집을 빌려서 1년을 살았어요. 사람들이 고문당하고 박해받았던 공간에서 소설 속 인물과 함께 지내며 글을 썼습니다.” 김탁환 소설가(55)는 19일 서울 중구 프란치스코 교육회관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정해박해(丁亥迫害)를 다룬 장편소설 ‘사랑과 혁명’(전 3권·해냄) 집필 과정을 설명했다. 곡성군에서 시작된 1827년 정해박해의 진원지이자 천주교인을 가둔 감옥이 있던 옥터성지에 머물며 소설을 썼다는 것이다. 그는 “매일 오전 5시 눈을 뜬 뒤 집 앞에 있는 밭에서 농사를 짓고 낮엔 소설을 썼다”며 “밤엔 꿈에 나타난 인물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작품에 대한 애정을 키웠다”고 했다. 김 소설가는 동명의 드라마로 만들어진 2004년 대하소설 ‘불멸의 이순신’(전 8권·민음사) 등 굵직한 역사소설을 발표해 왔다. ‘사랑과 혁명’은 그의 31번째 장편소설이다. 2021년 ‘당신이 어떻게 내게로 왔을까’(전 2권·해냄) 이후 2년 만의 장편으로 1568쪽에 달한다. 그는 “소설을 7번 퇴고하는데 정말 토할 것 같았다”며 웃었다. 그는 KAIST 문화기술대학원 교수와 전업 작가로 대전과 서울에서 각각 10여 년을 살았다. 대도시의 삶에 회의를 느끼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가 시작된 2021년 1월 곡성군으로 이사했다. 그는 “우연히 곡성성당을 방문했다가 천주교인이 갇혔던 감옥을 복원한 공간을 보고 감전된 것 같았다”며 “이야기의 신(神)이 1800년대의 이야기를 잘 써보라고 나를 곡성군에 보낸 것 같았다. 운명처럼 느껴졌다”고 했다. 그는 방대한 자료조사와 치밀한 고증을 바탕으로 문학적 상상력을 더해 19세기 조선에 살았던 천주교인들의 삶을 생생하게 되살려냈다. 순박한 농사꾼 청년 ‘들녘’이 천주교에 눈을 뜨는 것에서 시작해 박해에도 굴하지 않던 천주교인의 저항을 그렸다. 1권은 1801년 신유박해 이후 음지에서 확산했던 천주교의 역사, 2권은 정해박해 사건, 3권은 감옥에서 복역한 천주교인의 고민을 다루며 정해박해를 다층적으로 조명했다. 그는 “어릴 적 개신교 교회를 다니긴 했지만 천주교인은 아니다”라며 “신간은 종교소설이면서 조선의 근대화 과정을 다룬 역사소설”이라고 했다. 그는 2021년 곡성군에 작품의 주인공 이름을 딴 ‘생태책방 들녘의 마음’이란 작은 책방을 열었다. 앞으로의 계획을 묻자 수줍게 답했다. “만약에 ‘들녘’이 지금 살아 있다면 읽을 만한 책들로 책방을 꾸며서 곡성군 주민들과 소통하고 있어요. 앞으로도 곡성군 공동체 안에서 활동하면서 고민하고 깨달은 것을 쓰고 싶습니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1988년 7월 7일 서울 올림픽 개최를 2개월 앞둔 시점에서 ‘민족자존과 통일번영을 위한 특별선언’이란 이름 아래 7·7선언을 내외에 선포함으로써 이른바 북방정책에 시동을 걸고 일관되게 추진했다.” 정해창 전 대통령비서실장(86)은 최근 펴낸 회고록 ‘대통령 비서실장 791일’(나남출판·사진)에서 이렇게 회고했다. 검사 출신으로 법무부 장관을 지낸 정 전 실장은 1990년 12월부터 1993년 2월까지 노태우 전 대통령의 마지막 비서실장으로 일했다. 자신이 재직 때 쓴 8권의 업무 일지를 토대로 7년간 집필해 836쪽의 신간을 냈다. 신간은 노 전 대통령이 6·29민주화선언부터 북방정책까지 여러 정책을 추진한 과정을 세밀하게 담았다. 3당 합당, 대통령의 당적 탈퇴 결정도 생생하게 전한다. 당시 ‘물태우’로 불렸던 노 전 대통령이 주위 사람들에게 “물태우란 평가는 나쁠 것이 없다. 오히려 시대적 상황에 대한 처방으로는 물의 미지근함이 정답”이라고 밝힌 일화도 담겼다. 정 전 실장은 “잘못에 대한 질책은 아무리 따가워도 달게 받아야 할 일이었다”라면서도 “그 시대 국민과 함께 이룩한 노 대통령의 업적까지 무시되거나 폄하됐다”고 했다. 5만4000원.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기술 발전 때문에 진실과 거짓을 구분하기 힘든 미래를 그린 신간은 영미권 독자들도 흥미로워할 겁니다. 미국에서도 인공지능(AI)으로 만든 딥페이크 가짜뉴스와 이미지가 논란이 되고 있으니까요.” 영미권 출판 에이전트 바버라 지트워(56)는 15일 동아일보와의 화상 인터뷰에서 공상과학(SF) 장편소설 ‘메모리케어’(은행나무, 지난달 28일 출간·사진)를 공모전을 통해 발굴한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신경숙, 손원평 등 국내 순수문학 작가의 문학성 높은 작품을 소개하는 것을 넘어 신인의 장르문학을 선택한 건 영미권 독자의 취향을 맞추기 위해서라는 얘기다. 그는 “신간은 신춘문예 등 문학상 수상 경력이 없는 진보라 작가(32)의 데뷔작이지만 해외 시장에선 한국 내 활동 경력이 중요하지 않다”며 “문장보단 서사와 주제 위주로 검토해 영미권에서 성공할 만한 작품을 골랐다”고 말했다. 지트워는 미국 뉴욕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국제 문학 에이전트다. 약 20년 동안 한국 문학을 해외에 수출한 미국인으로 ‘한국 문학 전도사’로 불린다. 소설가 한강의 ‘채식주의자’를 영미권에 소개해 맨부커상 수상에 큰 역할을 하는 등 한국 순수문학 작가들의 작품을 주로 소개했다. 하지만 최근엔 한국 신예 장르문학 작가 발굴에 나서고 있다. 그는 지난해 2월 한국 작가를 발굴하기 위해 ‘참에이전시’를 세웠고, 두 달 뒤 제1회 ‘신예 작가 공모전’을 열었다. 이 공모전에서 지난해 11월 뽑힌 수상작이 ‘메모리케어’다. ‘메모리케어’는 번역이 진행 중이고, 곧 영미권 출판사를 통해 출간될 예정이다. 그는 “처음 한국 문학을 소개할 땐 영미권 문학평론가를 겨냥해 순수문학을 찾았지만 상황이 변했다”며 “최근 넷플릭스 시리즈 ‘오징어 게임’, 그룹 방탄소년단(BTS) 등 한국 대중문화의 인기 덕에 대중의 취향을 저격하는 한국 장르문학에 대한 관심이 높다”고 했다. 그는 국내에서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여성 장르문학 작가의 작품도 해외 출판 계약을 추진 중이다. 웹소설 작가 출신 장세아의 장편소설 ‘런어웨이’(아프로스미디어), 번역가 출신 박현주의 장편소설 ‘서칭 포 허니맨’(위즈덤하우스) 등이 대상이다. 성과도 있다. 박소영 작가의 SF 장편 ‘스노볼’(창비)은 대형 출판사 펭귄랜덤하우스를 통해 내년에 영미권에서 출간될 예정이고 프랑스, 이탈리아, 독일 출간 계약도 진행 중이다. 그는 “특히 한국은 장르문학에서 젊은 여성 작가의 강세가 두드러지고 있다”고 했다. 향후 한국 문학이 해외에서 인정받기 위해선 무엇이 중요할까. “마케팅요. 한국에선 유명해도 영미권에서 책을 처음 낸다면 사실상 신인이나 다름없어요. 한국 작가가 눈도장을 찍기 위해선 해외 출판사 편집자도 만나고, 마케팅과 홍보에도 적극적이어야 합니다. 제가 신인 작가에게 주목하는 것도 이 과정에 더 적극적이기 때문입니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아주 좋은 소식!” 지난해 초 저자는 영국 출판사 혼퍼드 스타로부터 이 같은 e메일을 받았다. 저자가 번역한 정보라 작가의 단편소설집 ‘저주토끼’(2017년·래빗홀)가 노벨 문학상, 프랑스 공쿠르상과 함께 세계 3대 문학상으로 꼽히는 영국 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 1차 후보에 올랐다는 것이다. 기뻐서 비명을 지르던 저자에게 곧바로 다른 e메일이 도착했다. 역시 저자가 번역한 박상영 작가의 연작소설집 ‘대도시의 사랑법’(창비)도 같은 부문 1차 후보에 올랐다는 소식이었다. 백인이 아닌 사람이 번역한 두 권의 책이 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에서 동시에 후보로 선정된 건 처음이었다. ‘저주토끼’가 최종 후보에 오르며 저자는 부커상 최종 후보에 오른 첫 번째 한국인 번역가가 됐다. 저자는 당시 심정을 “유색 인종이라고, 한국인이라고, 비(非)원어민 번역가라고 날 무시하는 사람은 이제 아무도 없을 것”이라고 회고했다. 돈을 꽤 잘 벌었던 통역사였던 저자가 가난한 문학 번역가가 된 뒤 겪은 희로애락을 담은 에세이다. 저자는 번역한 작품이 주목받아도 눈에 띄지 못했고, 낮은 번역료에 생활비를 걱정하면서도 문학 번역을 포기하지 않았다. “(일감을 주는) 클라이언트는 얼마든 대체 가능하며 번역 일은 도처에 널려 있다”는 저자의 선언은 ‘번역가는 얼마든지 대체 가능하다’는 출판계의 인식에 반기를 든다. “내 영혼의 작은 파편이 번역에 실리게 되고, 독자는 그 파편에 반응하는 듯하다”는 고백에선 문학에 대한 진심이 느껴진다. 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새삼스러운 말이지만 일본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 작가의 문장은 흡인력이 높다. 곳곳에 심어둔 복선과 적절한 은유 덕에 책장을 계속 넘기게 된다. 장편소설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을 읽으며 또 한번 든 생각이다. 남자 주인공, 첫사랑, 평행 세계, 도서관…. 출간 전 공개된 내용으론 하루키가 6년 만에 내놓은 신작은 너무 익숙한 서사였다. 기대만큼 불안도 많았다. 국내 출간 뒤 읽어 보니 현재 시점에선 눈에 거슬리는 부분도 있다. 하루키가 기존 작품 세계에서 더 나아갔느냐고 묻는다면 자신 있게 말하긴 힘들다. 예를 들어 신작에서 남자, 여자 주인공이 편지로 교류하는 장면은 하루키 작품에서 반복적으로 사용된 설정이다. 국내엔 ‘상실의 시대’라는 제목으로 더 알려진 1987년 장편소설 ‘노르웨이의 숲’(민음사)에서도 요양원에서 지내던 여자 주인공이 남자 주인공과 편지로 소통했다. 신작에서 여자 주인공이 자신이 꿈에서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이었다고 남자 주인공에게 고백하는 장면은 꼭 필요한지 의문이 든다. 2017년 장편소설 ‘기사단장 죽이기’(전 2권·문학동네)에서 남자 주인공이 연상의 유부녀와 성관계를 맺는 장면처럼 말이다. 그럼에도 책을 계속 읽게 되는 건 매끄러운 표현력 덕이다. “마치 수천 가닥의 보이지 않는 실이 너의 몸과 나의 마음을 촘촘히 엮어가는 것 같다”는 남자 주인공의 고백은 사랑에 빠진 10대의 마음을 아름답게 형상화한다. 풀피리 소리가 허공에 울려 퍼지고, 오래된 나선형 나무 계단이 있는 망루가 지키는 도시에 대한 묘사는 건조하지만 세밀하다. 빈약한 서사는 실패가 아닌 작가의 의도로 읽힌다. 하루키는 신작 출간 직후 일본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젊은 시절에는 대중적이고 액션이 있는 작품에 이끌렸다. 하지만 나도 이제 나이가 들었다. 차분하게 사람의 내면을 제대로 그리고 싶었다”고 했다. 하루키는 2020년 소설집 ‘일인칭 단수’(문학동네)에서 20여 년 동안 절연했던 아버지 이야기를 꺼내기도 했다. 이런 걸 고려하면 신작엔 최근 작품 경향이 반영됐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신작의 번역가 홍은주 씨는 최근 기자와의 e메일 인터뷰에서 “신작에선 그동안 하루키의 장편에 어김없이 등장하던 모험적 요소를 거의 찾아볼 수 없다”며 “애초에 이야기를 넓히기보다 ‘좁힐’ 생각으로 파고든 작품”이라고 평가했다. 또 홍 씨는 “최근 하루키의 시선이 내면으로 향하는 경향이 있었다”며 “날 선 긴장감, 화려함이 있던 자리에 ‘조용함’이 자리 잡았다”고 했다. 그동안 일본 문학계에선 하루키가 노벨 문학상을 받으려면 사회 문제를 다룬 작품을 써야 한다는 의견이 많았다. 하지만 노년의 하루키는 이와 정반대로 내면에 집중한 작품을 내놨다. 그럼에도 14일 기준 영국의 유명 도박사이트 나이서오즈에서 하루키는 다음 달 5일(현지 시간) 발표되는 올해 노벨 문학상 유력 후보 1위에 올랐다. 물론 하루키가 노벨 문학상 후보로 언급된 건 한두 번이 아니긴 하다. 그래도 하루키가 노벨 문학상을 받는다면 신작은 그의 작품 세계를 논할 때 빼놓기 힘들 것이다. 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2009년 대기업에 입사했다. 자영업을 하다 1997년 외환위기로 쓰디쓴 실패를 맛본 아버지의 조언을 따른 것이다. 회사에선 부모님에게 꽃바구니를 보내 합격 사실을 알렸다. 회사 배지를 가슴에 달고 가족사진을 찍었다. 자랑스러웠다. 희망찬 미래를 향해 힘차게 나아가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회사에선 매일 오전 6시 50분부터 회의가 시작됐다. 영업직이라 접대가 일상이었다. 점심 저녁으로 술을 마셨다. 대리가 된 뒤 오른 연봉이 오락가락하는 마음을 잡았지만 버티기 어려웠다. 2013년 회사를 박차고 나왔고 우여곡절 끝에 유명 웹툰 작가로 우뚝 섰다. 경기 부천시 부천국제만화축제에서 17일 ‘청춘월담-불안을 넘어, 현재까지’라는 주제로 웹툰 작가 지망생에게 강연하는 김보통 작가(42) 이야기다. 서울 마포구 작업실에서 11일 만난 그는 자신의 인생을 가감 없이 털어놓았다. 수필 같은 만화로 독자의 공감을 이끌어낸 작가다웠다. 그는 아버지가 암으로 세상을 떠나는 과정을 보며 그린 2013년 웹툰 ‘아만자’, 육군 내 탈영병 잡는 군무이탈 체포전담조 DP(Deserter Pursuit)에서 복무한 경험을 담은 2015년 웹툰 ‘D.P 개의 날’ 등을 그렸다. ‘대기업 입사, 웹툰 작가로서의 성공 모두 재능 덕 아니냐’고 묻자 그는 고개를 저으며 “나 역시 끊임없이 실패했다”고 말했다. “퇴사 후 DJ(디스크자키)를 준비하다가 재능이 없어서 포기했어요. 작은도서관을 세우는 사업을 하려고 책 2000권을 샀다가 지방자치단체 지원을 못 받아 포기하면서 퇴직금도 날려 먹었죠. 법학전문대학원(로스쿨)에도 떨어져 좌절했습니다.” 막막함과 불안에 시달리던 그에게 기회는 우연히 왔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취미로 그림을 그리던 어느 날 웹툰 ‘송곳’의 최규석 작가(46)로부터 “웹툰 한번 그려 보지 않겠냐”는 제안을 받은 것이다. 잠시 돈이나 벌자고 시작했는데 데뷔작 ‘아만자’에 대한 독자 반응이 뜨거웠다. 그는 2014년 ‘오늘의 우리 만화’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상, 2015년 부천만화대상 시민만화상도 받았다. 웹툰 제작사 ‘스튜디오 타이거’도 2021년 세웠다. “승승장구한 것처럼 보이지만 심적으론 힘들었어요. 프리랜서라 불안했고, 웹툰을 주 2회 그리려면 잠을 줄이며 일해야 했거든요. 하지만 재밌으면서 돈을 벌 수 있는 일을 찾은 것만으로 좋았죠.” 그는 자신의 영역을 한정 짓지 않는다. 넷플릭스 드라마 ‘D.P.’에서 2021년 시즌1, 올 7월 시즌2 모두 각본가로 참여했다. 최근엔 미국 할리우드 제작사로부터 “시나리오를 써 달라”는 제안을 받고 검토 중이다. 그는 “인공지능(AI) 챗봇인 ‘챗GPT’를 써봤는데 기초 자료조사에 활용할 정도는 된다”며 “작화 부문에선 AI의 발전 속도가 빠른 만큼 웹툰 작가도 그림이 아닌 이야기로 승부해야 한다”고 했다. “웹툰, 소설, 영화, 게임 모두 매체가 다르지만 ‘이야기’의 본질은 같아요. 그림을 잘 그리는 웹툰 작가보단 이야기를 만드는 창작자가 되고 싶다는 유연한 사고를 지녀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예비 창작자에게 당부를 부탁하니 그는 자신이 한때 취미로 했던 권투로 비유해 답했다. “권투에서 제일 무서운 상대는 잘 때리는(성공) 사람이 아니라 세게 맞았는데(실패) 안 힘들어하는 사람입니다. 웹툰으로 일확천금을 얻을 거라고, 내 작품이 영상화돼 넷플릭스 1위가 될 거라고 기대하면 부담에 창작 못 해요. 기회가 올 때까지 맷집을 키우고, 일희일비하지 마세요.”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호그와트 입학 통지서, 예언자일보, 블랙 가문 가계도 벽지…. 서울 강남구에 2일 문을 연 ‘하우스 오브 미나리마 서울’에서 판매하는 굿즈(기념품)다. 영국 작가 조앤 K 롤링(56)이 소설 해리포터 시리즈에서 선보인 마법 용품을 파는 것이다. 이 가게 바닥엔 호그와트 세계를 그린 ‘도둑 지도’가 그려져 있고, ‘딱총나무 지팡이’처럼 생긴 펜으로 방명록에 글을 쓸 수 있다. 하루 500명 이상 찾아올 정도로 해리포터 마니아들에게 인기다. 이 가게를 운영하는 건 해리포터 시리즈를 국내에 출간한 출판사 문학수첩이다. 영화 해리포터 시리즈의 소품을 만들었던 영국 디자인 회사 미나리마와 협업해 문을 열었다. ‘해리포터와 마법사의 돌’ 등 소설뿐 아니라 마법 용품에 대한 설명이 곁들여진 삽화책 ‘미나리마의 마법’ 등 문학수첩이 펴낸 해리포터 관련 책도 판다. 이승희 하우스 오브 미나리마 서울 부장은 “20여 년 전 소설로 처음 해리포터를 접한 30, 40대가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에서 영화를 본 자녀를 데리고 가게를 찾는다”며 “굿즈와 해리포터 관련 책을 함께 사는 어린이 독자가 늘고 있다”고 했다. 최근 출판사들이 불황을 타개하기 위해 굿즈 사업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출판사 북스피어는 지난달 18일 일본 작가 미야베 미유키 장편소설 ‘삼가 이와 같이 아뢰옵니다’를 펴내며 우표와 지도, 포스터 등 다양한 굿즈를 함께 팔았다. 1만9800원짜리 책에 모든 굿즈를 더한 가장 비싼 세트 가격은 3만9480원으로, 이 세트를 비롯해 1000세트가 모두 팔렸다. 김 대표는 “고급스럽게 만들어 굿즈만으로는 세트당 1000원씩 손해를 봤지만 마케팅 효과가 컸다”며 “책이 출간 3주 만에 1만 부 팔리며 전작인 장편소설 ‘영혼 통행증’(2021년)보다 두 배 이상 빠른 속도로 나가고 있다”고 했다. 소형 출판사들은 주로 텀블벅 등 펀딩 사이트를 통해 책과 굿즈를 함께 판매한다. 지난해 1월 장편소설 ‘마담 보바리’를 펴내며 손수건, 디퓨저를 함께 판 김요안 북레시피 대표는 “소형 출판사는 대형 출판사처럼 마케팅에 돈을 쓸 수 없기에 굿즈를 소량 제작해 펀딩 사이트에서 판매한다”고 했다. 표정훈 출판평론가는 “마니아 독자들은 굿즈를 사기 위해 기존에 보유한 책을 또 사기도 한다”며 “굿즈 판매가 책 판매에도 긍정적 효과를 낼 수 있다”고 했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1923년 간토대지진 당시 오키나와 사람들은 일본 본토 사람들에게 죽임을 당한 피해자였다. 하지만 동시에 자경단으로 활동하며 (학살의) 가해자가 되기도 했다.” 오키나와 문학을 대표하는 일본 작가 메도루마 슌(63)은 11일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이렇게 말했다. 무고한 조선인들이 희생된 간토대지진 학살 당시 오키나와 사람들에겐 피해자와 가해자라는 두 가지 모습이 있었다고 자성의 목소리를 낸 것이다. 그는 “오키나와 사람들은 본토 일본인보다 계층이 아래였고, 본토 일본어를 능숙하게 말하지 못해 조선인으로 의심받아 죽곤 했다. 하지만 본토 일본인에게 차별받는 것이 두려워 조선인을 차별하는 편에 선 오키나와 사람들의 이중성도 직시해야 한다”고 했다. 이어 “역사의 가해자가 되지 않으려는 노력을 모두가 기울이지 않으면 언젠가 가해자가 된다”고 강조했다. 메도루마 작가는 1960년 오키나와에서 태어났고 1997년 장편소설 ‘물방울’(문학동네)로 나오키상과 함께 일본 최고 권위의 양대 문학상으로 꼽히는 아쿠타가와상을 수상했다. 2000년 ‘혼 불어넣기’(아시아)로 가와바타 야스나리상도 받았다. 그는 단편소설 ‘어군기’ 등으로 일본 제국주의, 본토의 오키나와에 대한 차별 등을 강하게 비판해 왔다. 그는 “일본에서 천황을 비판하면 우익이 위해를 가하기 때문에 내가 천황을 비판하는 소설을 쓰면 신변에 문제가 생기지 않을까 걱정하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난 굴하지 않는다. 천황의 전쟁 책임을 묻는 것은 일본 제국주의 식민 지배의 책임을 묻는 일”이라고 했다. 그는 서울 은평구가 주최하는 제7회 ‘이호철통일로문학상’ 본상 수상 작가로 선정돼 이날 회견에 나섰다. 이 상은 실향민 출신으로 분쟁과 평화에 대한 소설을 썼던 이호철 작가(1932∼2016)를 기리고자 2017년 제정됐다. 김성호 이호철통일로문학상 선정위원장은 메도루마 작가에 대해 “식민지적 차별과 억압, 미군 주둔 문제 등 오키나와가 처한 권력 구도의 모순과 부조리를 비판하고 문학적 승화를 실천하기 위해 노력해 왔다”고 밝혔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어느 날 세상에 완벽한 진통제 ‘NSTRA-14’가 등장한다. 중독성도, 부작용도 없는 이 진통제 덕에 이젠 아픔을 호소하는 이는 없다. 고통이 사라지자 천국이 도래한 것만 같았다. 하지만 곧 이에 반대하는 신흥 종교 ‘교단’이 등장한다. 교단은 “고통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든다”고 주장하며 NSTRA-14를 만든 제약회사 직원들에게 테러를 가한다. 고통 없는 세상을 꿈꾸는 이들은 이에 대항해 교단 지도자들을 살해한다. 고통 없는 사회는 진정 천국일까. 고통을 두고 벌어진 이 싸움은 어디로 치달을까. 지난달 31일 출간된 정보라 작가(47)의 장편소설 ‘고통에 관하여’(다산책방·사진)는 고통이 사라진 세계를 그린다. 미래를 상상하는 공상과학(SF)에 등골을 서늘하게 하는 서사가 가득한 호러를 버무린 독특한 작품을 펴냈던 정 작가가 이번엔 살인 사건의 비밀을 추적하는 스릴러를 더했다. 정 작가는 8일 전화 인터뷰에서 “고통이 사라지자 고통을 다시 갈망하기 시작한 세상의 모습을 실감 나게 그리고 싶었다”고 했다. “인간에게 신체와 감각이 있으니 쾌락을, 고통을 느낄 수 있는 겁니다. 고통과 쾌락의 근원이 같다는 점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정 작가가 고통에 대해 고민하게 된 건 2009년 미국 인디애나대에서 슬라브 문학을 전공하며 박사 논문을 쓰면서다. 안드레이 플라토노프(1899∼1951) 같은 러시아 작가들은 당시 러시아에 만연한 고통을 벗어나기 위해 유토피아 소설을 썼다. 러시아 민중이 식량이 없어 굶어 죽는 생활고와 피비린내 나는 러시아 혁명을 거치며 인간의 고통에 대해 질문하기 시작했고, 러시아 작가들은 이런 고통이 사라진 유토피아를 꿈꾸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2018년 미국의 한 SF 행사에서 마약성 진통제에 대한 문제를 들으며 다시 한번 고통에 대해 생각했어요. 1991년 걸프전, 2018년 아프가니스탄 전쟁에 참전한 미국 군인들이 부상 후유증을 치료하기 위해 마약성 진통제를 복용하다 마약 중독자가 됐죠. 최근 한국 사회에도 프로포폴 같은 마약성 진통제가 널리 퍼지고 있는 점에도 영향을 받았어요.” 그는 “신흥 종교 ‘교단’을 소설에서 그린 건 최근 논란이 된 종교단체 JMS처럼 고통스러운 사회일수록 사람들이 사이비 종교에 빠지기 때문”이라며 “고통이 사라지는 유토피아를 꿈꾸는 사람들이 여전히 이 시대에 많다는 걸 깨닫고 작품을 쓰기 시작했다”고 했다. 정 작가는 지난해 단편소설집 ‘저주 토끼(Cursed Bunny·래빗홀)’가 영국 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 최종 후보에 오르며 주목받았다. 부커상은 노벨 문학상, 프랑스 공쿠르상과 함께 세계 3대 문학상으로 꼽힌다. 그는 12일(현지 시간) 독일 베를린 국제문학축제에선 한국의 환상문학에 대해 강연한다. “해외 독자들은 옛 고대 신화 전설이 현대 한국의 환상문학에 미치는 영향에 관심이 많더라고요. 저 역시 올해 5월 구미호 설화를 재해석해 장편소설 ‘호’(읻다)를 펴냈어요. 다음 장편소설에선 귀신 이야기로 돌아올 계획입니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윤석열 대통령이 8일 과거 소송에서 MBC 측을 대리해 이해충돌 방지 규정 위반 논란이 불거진 정민영 방송통신심의위원회(방심위) 위원에 대한 해촉안을 재가했다. 정 위원의 해촉으로 방심위 구도가 여권 우위로 바뀐 가운데 방심위는 이날 전체회의를 열어 류희림 방심위원(64)을 위원장으로 선출했다. 대통령실은 이날 언론 공지에서 “윤 대통령은 인사혁신처에서 상신한 정 위원에 대한 해촉안을 재가했다”고 밝혔다. 윤 대통령은 이날 인도네시아 순방을 마치고 인도로 이동하기 직전 해촉안을 재가했다고 관계자가 전했다. 변호사이자 야권 추천 방심위원인 정 위원은 윤 대통령의 비속어 발언 논란과 손석희 전 JTBC 대표이사의 동승자 의혹 논란 보도 등과 관련된 소송에서 MBC 측을 대리한 것으로 나타나 이해충돌 논란이 불거졌다. 국민권익위원회도 이날 정 위원에 대한 이해충돌 방지 위반 고발 사건 조사 결과를 발표하면서 “정 위원이 이해충돌방지법을 위반해 징계와 과태료 부과가 필요하다고 판단했다”고 밝혔다. 권익위는 정 위원이 최근 해촉된 정연주 전 방심위원장의 해촉 처분 집행정지 신청의 법률대리를 맡고 있으면서도 심의위원장 호선(互選)과 관련된 회의에 신고·회피 절차 없이 참석한 점도 이해충돌 방지 위반이라고 판단한 것으로 알려졌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통화에서 “변호사인 정 위원이 MBC로부터 여러 사건을 수임해 법률 대리를 하는 등 사적 이해관계가 얽혀 있는데도 신고나 회피 절차 없이 MBC 관계자들의 징계 조치를 결정하는 방심위 심의·의결에 56회 참석했다”며 “방심위 심의의 공정성, 독립성, 신뢰성을 훼손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정 위원의 해촉으로 방심위원의 정치적 구도는 여권 추천 4명, 야권 추천 3명으로 여권 우위로 바뀌었다. 전체회의에는 여권 추천 류희림, 황성욱, 허연회, 김우석 위원과 야권 추천인 옥시찬, 김유진, 윤성옥 위원이 참석했지만 야권 위원들은 중도 퇴장해 위원장 호선에 참여하지 않았다. 류 신임 위원장은 대구 출신으로 YTN플러스 대표이사 사장을 지냈다. 최근 해촉된 정연주 전 위원장의 후임으로 지난달 18일 윤 대통령이 위촉한 인사다. 더불어민주당 언론자유특별위는 이날 성명서에서 “(해촉 사유로) 이해충돌 방지 규정 위반을 들었으나 이는 구실일 뿐 방심위의 방송심의를 좌지우지해 방송을 통제하기 위한 목적”이라고 비판했다. 장관석 기자 jks@donga.com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보도채널 YTN의 주인이 이르면 올해 말 바뀐다. YTN 1대 주주인 한전KDN(지분 21.43%)과 4대 주주인 한국마사회(9.52%)는 8일 신문 등을 통해 YTN 지분 매각 사전공고를 내고 “두 회사가 보유한 YTN 지분 30.95%(보통주 1300만 주)를 전량 일괄 매각한다”고 밝혔다. 매각 자문사는 삼일회계법인이다. 두 회사는 다음 달 중하순까지 입찰 참가 신청을 받아 최고가 입찰자를 낙찰자로 선정한다. 방송법 제15조에 따르면 낙찰자는 방송통신위원회의 최다액 출자자 등 변경승인을 거쳐야 한다. 변경승인은 최대 60일(업무일 기준)이 걸린다. 이르면 올해 말 매각 절차가 끝날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한전KDN과 한국마사회는 1997년 외환위기 당시 자본잠식 상태였던 YTN의 증자에 참여하는 방식으로 지분을 획득했다. 두 회사 외에 한국인삼공사(19.95%), 미래에셋생명보험(11.72%), 우리은행(7.4%) 등이 YTN 대주주다. 지분 매각에 반대해 왔던 YTN은 이날 입장문을 내고 “공공기관들은 지금이라도 일방적인 민영화 추진을 멈추라”고 했다. 전국언론노동조합 YTN지부도 성명을 통해 “지분 매각에 공익적 고려는 없다. 모든 수단을 동원해 막아낼 것”이라고 했다. 이호재 기자 hoho@donga.com세종=김도형 기자 dodo@donga.com}

1959년 벨기에 의사 폴 얀센(1926∼2003)은 탁월한 진통제를 개발했다. 이 진통제는 극심한 고통에 시달리는 말기 암 환자를 위해 주로 사용됐다. 환자들이 큰 수술을 받을 때 통증을 완화하기 위한 마취제 역할도 했다. 한때 의료계에선 이 진통제가 ‘기적의 약물’이라 불렸다. 하지만 2021년 이 진통제 때문에 사망한 미국인은 7만 명이 넘는다. 이 진통제는 만 50세 이하 미국 성인의 사망 원인 1위다. 헤로인보다 50배, 모르핀보다 100배 강력하고 2mg만 복용해도 사망할 수 있는 이 치명적인 진통제의 별명은 ‘좀비 마약’, 이름은 펜타닐이다. 미국 탐사 전문기자 벤 웨스트호프는 저서 ‘펜타닐’에서 펜타닐이 죽음의 마약이 된 과정을 추적한다. 펜타닐 원료 생산 시설에 잠입해 취재하고, 4년에 걸쳐 160여 명을 인터뷰해 펜타닐 생산과 유통 과정을 생생하게 써냈다. 저자는 최근 미국에서 펜타닐이 급속도로 퍼진 배후로 중국과 멕시코를 지목한다. 중국 화학업체들이 펜타닐 원료인 전구체(前驅體)를 생산해 멕시코 마피아에게 수출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기업들은 중국 정부에서 표창을 받지만 제재는 거의 받지 않는다. 멕시코에서 제조된 펜타닐은 국제택배로 국경을 넘어 미국 전역에 퍼진다. 마약 단속에 적극적이지 않은 중국 정부와 마약으로 골머리를 싸매고 있는 미국 정부의 갈등은 ‘신아편전쟁’으로 불릴 정도로 격화되고 있다. 특히 멕시코 마피아는 다크웹(접속하려면 특정 프로그램을 이용해야 하는 웹사이트)을 적극 활용하고 있다. 정부 단속을 피해 10대 청소년과의 ‘비대면 직거래’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저자는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1913∼1994)이 1971년 “미국의 공공의 적 1위는 마약 남용”이라며 마약과의 전쟁을 선포했지만 50년이 지나도록 미국은 전쟁에서 이기지 못하고 있다고 평가한다. 한국은 마약 문제가 바다 건너 이야기라고 안심할 수 있을까. 양성관 의정부백병원 가정의학과장은 저서 ‘마약 하는 마음, 마약 파는 사회’에서 한국은 과거 주요 마약 생산국이었고, 최근엔 마약 주요 소비국으로 떠오르고 있다고 지적한다. 1970년대 부산은 일본 야쿠자들이 활약했던 ‘코리아 커넥션’의 중심지였다. 야쿠자들은 대만에서 필로폰의 원재료인 슈도에페드린과 에페드린을 수입했다. 필로폰을 제조할 때 나는 악취를 숨기기 위해 부산 근처의 악취가 심한 돼지 사육장 안에 비밀 공장을 차린 뒤 필로폰을 일본으로 수출했다. 대만에서 원료 1kg을 14만 원에 산 뒤 필로폰을 만들면 10억 원에 팔 수 있을 정도로 수익성이 높아 한국 조폭도 야쿠자를 따라 필로폰 공장을 만들었다. 1982년 일본 필로폰 시장의 88.3%를 한국산 필로폰이 차지할 정도로 한국은 마약 생산국으로 유명했다. 양 과장은 최근 한국 마약 소비층이 20, 30대로 낮아지고 있고, 청소년 마약 중독도 큰 문제로 떠오르고 있다고 지적한다. 엑스터시, LSD(환각제의 일종), 신종 마약 ‘야바’ 등 다양한 마약이 젊은 층의 인생을 나락으로 떨어트리고 있다는 것이다. 당장 경각심을 갖지 않는다면 마약 중독자와 거래상으로 가득한 모습을 한국의 거리에서 목격하게 될지 모른다. 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윤석열 대통령이 8일 과거 소송에서 MBC 측을 대리해 이해충돌 방지 규정 위반 논란이 불거진 정민영 방송통신심의위원회(방심위) 위원에 대한 해촉안을 재가했다. 정 위원의 해촉으로 방심위 구도가 여권 우위로 바뀐 가운데 방심위는 이날 전체회의를 열어 류희림 방심위원(64)을 위원장으로 선출했다.대통령실은이날 언론 공지에서 “윤 대통령은 인사혁신처에서 상신한 정 위원에 대한 해촉안을 재가했다”고 밝혔다. 윤 대통령은 이날 인도네시아 순방을 마치고 인도로 이동하기 직전 해촉안을 재가했다고 관계자가 전했다. 변호사이자 야권 추천 방심위원인 정 위원은 윤 대통령의 비속어 발언 논란과 손석희 전 JTBC 대표이사의 동승자 의혹 논란 보도 등과 관련된 소송에서 MBC 측을 대리한 것으로 나타나 이해충돌 논란이 불거졌다. 국민권익위원회도 이날 정 위원에 대한 이해충돌 방지 위반 고발 사건 조사 결과를 발표하면서 “정 위원이 이해충돌방지법을 위반해 징계와 과태료 부과가 필요하다고 판단했다”고 밝혔다. 권익위는 정 위원이 최근 해촉된 정연주 전 방심위원장의 해촉 처분 집행정지 신청의 법률대리를 맡고 있으면서도 심의위원장 호선과 관련된 회의에 신고·회피 절차 없이 참석한 점도 이해충돌 방지 위반이라고 판단한 것으로 알려졌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통화에서 “변호사인 정 위원이 MBC로부터 여러 사건을 수임해 법률 대리를 하는 등 사적 이해관계가 얽혀 있는데도 신고나 회피 절차 없이 MBC 관계자들의 징계 조치를 결정하는 방심위 심의·의결에 56회 참석했다”며 “방심위 심의의 공정성, 독립성, 신뢰성을 훼손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정 위원의 해촉으로 방심위원의 정치적 구도는 여 추천 4명, 야 추천 3명으로 여권 우위로 바뀌었다. 전체회의에는 여권 추천 류희림, 황성욱, 허연회, 김우석 위원과 야권 추천인 옥시찬, 김유진, 윤성옥 위원이 참석했지만 야권 위원들은 중도 퇴장해 위원장 호선에 참여하지 않았다. 류 신임 위원장은 대구 출신으로 YTN플러스 대표이사 사장을 지냈다. 최근 해촉된 정연주 전 위원장의 후임으로 지난달 18일 윤 대통령이 위촉한 인사다.장관석 기자 jks@donga.com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방송통신위원회가 지난해 대선 당시 허위 인터뷰 논란과 관련해 언론사를 대상으로 실태 점검에 나선다. 방통위는 “대선 과정에서 논란을 빚은 가짜뉴스 및 허위정보 보도와 관련해 KBS와 MBC, JTBC 등의 팩트체크 시스템에 대해 실태 점검을 할 예정”이라고 7일 밝혔다. 해당 방송사들이 허위 인터뷰 논란이 일고 있는 지난해 3월 뉴스타파의 대장동 관련 보도를 인용 보도한 과정을 들여다보겠다는 것이다. 방통위는 이들 방송사가 재허가·재승인 시 제출한 공정성과 객관성 확보 계획을 제대로 이행했는지 점검하고 재허가·재승인 조건을 위반한 경우 시정 명령을 내릴 예정이다. 문화체육관광부는 서울시와 함께 뉴스타파의 신문법 위반 여부를 검토하기로 했다. 신문법에 따르면 보도 내용이 발행 목적 등을 현저하게 반복해 위반한 경우 발행 정지 명령 등을 내릴 수 있다. 문체부는 “뉴스타파가 800여 개 인터넷신문이 참여한 인터넷신문위원회의 자율심의에 참여하지 않고 있다”고 덧붙였다. 한편 뉴스타파가 2018년 네이버 다음 등 포털의 콘텐츠 제휴 심사에서 70여 개 신청사 가운데 유일하게 통과한 것도 논란이 될 것으로 보인다. 네이버 관계자는 “당시 뉴스타파만 기준 점수를 넘었다”고 밝혔다. 이호재 기자 hoho@donga.com전혜진 기자 sunrise@donga.com}

대통령실이 5일 지난해 대선 당시 신학림 전 언론노조위원장이 화천대유 대주주 김만배 씨로부터 억대의 돈을 받고 허위 인터뷰를 진행했다는 의혹에 대해 “희대의 대선 정치 공작 사건”이라고 강하게 규탄했다. 대선 직전 허위 정보를 생산해 민의 왜곡을 시도한 것은 민주주의에 대한 중대한 위협이라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대통령실 고위 관계자는 5일 성명을 통해 “대장동 사건 몸통을 이재명에서 윤석열로 뒤바꾸려 한 정치 공작적 행태가 서서히 드러나고 있다”며 “김만배·신학림 거짓 인터뷰 대선 공작은 대장동 주범 그리고 언노련 위원장 출신 언론인이 합작한 희대의 대선 정치 공작 사건이라는 의심을 지우기 어렵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날조된 사실, 공작의 목표는 윤석열 후보의 낙선이었다”면서 “정치 공작과 가짜뉴스는 국민의 민심을 왜곡하고, 선거제도를 무용지물로 만드는 민주주의의 최대 위협 요인”이라고 했다.대통령실은 이 사건을 두고 “김대업 정치공작, 기양건설 로비 가짜 폭로 등의 계보를 잇는 2022년 대선의 최대 정치 공작 사건”이라고 규정했다. 두 사건은 2002년 대선 당시 한나라당(국민의힘 전신) 이회창 후보를 겨냥해 제기된 의혹이었다.대통령실은 해당 인터뷰를 인용 보도한 언론들도 지적했다. 이 관계자는 “조작 인터뷰를 4개 아이템에 할애해 보도한 방송사 등 집중적으로 가짜뉴스를 실어 나른 언론 매체들이 있었다”며 “기획된 정치 공작의 ‘대형 스피커 역할’이 결과적으로 이뤄진 것”이라고 했다. 방송통신심의위원회는 방송심의소위원회를 열고 뉴스타파의 기사를 인용해 보도한 방송사에 대한 긴급 심의 안건을 상정하기로 했다. 관련 민원 60여 건이 방심위에 제기된 데 따른 것이라고 방심위 관계자는 설명했다. 정치권 반응은 엇갈렸다. 국민의힘 윤재옥 원내대표는 “철저한 수사를 통해 이 정치공작의 배후를 밝히고, 공모하고 동조한 자를 밝혀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더불어민주당은 이날까지 관련된 공식 입장을 내지 않고 있다. 민주당 박주민 의원은 SBS 라디오에서 “지난해 대선과 완전히 정반대의 상황이 노출되고 있기 때문에 (허위 인터뷰라는 것에 대해) 신중하게 접근하고 진위부터 살펴봐야 한다”고 밝혔다.이상헌기자 dapaper@donga.com이호재기자 hoho@donga.com신나리기자 journari@donga.com}

동아일보 부설 화정평화재단 이사장을 지낸 이채주 전 동아일보 주필(사진)이 4일 별세했다. 향년 89세. 서울대 법대를 졸업한 고인은 1958년 서울신문에서 기자 생활을 시작했다. 1962년 동아일보로 옮겨 경제부장, 외신부장, 동경지사장, 출판국장, 편집국장, 주필을 지냈다. 일민문화재단과 인촌기념회 이사를 역임했다. 고인은 전두환 정권의 이른바 ‘보도지침’이 있던 1983년 5월부터 3년 8개월 동안 편집국장으로 재직했다. 가택연금 중이던 김영삼 전 대통령이 정치민주화를 요구하며 단식을 하던 1983년 6월, 언론은 김영삼의 이름도, 단식이란 말도 쓰지 못했다. 하지만 당시 동아일보는 ‘YS 단식 23일 만에 중단’ 기사를 내보냈다. 고인은 1985년 2월 총선 당시 보도지침을 여러 차례 따르지 않았고, 그해 8월 국가안전기획부로 연행돼 장시간 조사를 받으며 고초를 겪기도 했다. 고인은 2008∼2017년 화정평화재단 이사장을 지내며 국제 관계 개선에도 힘을 쏟았다. 일본 아사히신문, 중국 국책 연구기관인 중국현대국제관계연구원과 한중일 포럼을 수차례 열었다. 유족으로는 부인 방효석 씨와 아들 석호 베리타스캐피탈 대표이사, 준호 신화씨엔에스 대표이사, 제호 기아 과장이 있다. 빈소는 서울성모병원, 발인은 6일 오전 11시 반. 02-2258-5940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일본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74) 열풍이 다시 불까. 국내에 6일 출간되는 하루키의 새 장편소설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문학동네·홍은주 옮김·사진)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6년 만의 새 장편소설인 신간은 예약 판매만으로 온라인서점 예스24에서 8월 다섯째 주 종합 1위에 올랐다. 문학동네에 따르면 작가의 직전 장편소설 ‘기사단장 죽이기’(전 2권·문학동네·2017년) 1권보다 온라인서점 예약 판매량이 2, 3배로 늘었다. ‘기사단장 죽이기’ 출간 후에도 ‘오래되고 멋진 클래식 레코드’(문학동네·2022년), ‘일인칭 단수’(문학동네·2020년)가 나왔지만 각각 에세이와 소설집이었다. ● “70대 하루키, 청년 시절 자신 만나 세계관 완성”신작은 30대 남자 주인공 ‘나’가 10대 시절에 글쓰기라는 취미를 공유했던 여자친구를 떠올린 뒤 ‘사방이 높은 벽에 둘러싸인, 아득히 먼 수수께끼의 도시’를 찾아가는 이야기다. 하루키가 1980년 문예지에 발표했지만 책으로 발간되지 않은 동명의 중편소설을 고쳐 쓴 작품이다. 앞서 하루키는 이 중편에 나온 ‘벽에 둘러싸인 마을’이라는 설정을 1985년 장편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전 2권·민음사)에 등장시킨 적이 있다. 이현자 문학동네 편집국장은 신작을 “70대의 하루키가 43년이라는 시간의 벽을 넘어 청년 하루키를 만나 자신의 세계관을 완성한 소설”이라고 했다. 이어 “하루키가 천착해온 상실과 재생이라는 주제를 다룬다”며 “작가는 특히 코로나19로 인한 사람들 간의 단절 속에서도 과거 세대와 현재 세대가 교류한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했다”고 말했다.● “심리묘사 집중, 초기작 매력 담겨”‘세계의 끝과…’를 포함해 하루키 작품을 다수 번역한 김난주 번역가는 신작에 하루키 초기작의 매력이 담겼다고 평가했다. 하루키는 1979년 중편소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문학사상사)로 등단한 뒤 주로 개인의 내면을 섬세하게 그렸다. 이후 1995년 옴진리교의 도쿄 지하철역 사린가스 테러가 일어나자 1997년 논픽션 ‘언더그라운드’(전 2권·문학동네)를 펴내는 등 사회 문제에도 관심을 기울여왔다. 김 번역가는 “신간은 여자친구에 대한 ‘나’의 감정 등 심리 묘사에 집중한다”며 “작가가 아쉬웠던 숙제(책 출간)를 매듭짓고, 하고 싶었던 말을 마무리하려 한 것 같다”고 했다. 하루키는 후기에서 “나에게 이 작품은 줄곧 목에 걸린 생선 가시처럼 신경 쓰이는 존재였다”고 했다. 그는 올해 4월 신작이 일본에서 출간됐을 때 인터뷰에서 “벽이 무엇인지 그 의미를 생각하며 썼다”며 “(1980년 중편소설을 쓸 당시에 비해) 쓰고 싶은 것을 쓸 만큼 실력이 늘었고 다시 써야 할 때가 됐다”고 말했다. 신작이 ‘하루키 월드’의 집대성에 가깝다는 평가도 나온다. 2002년 장편 ‘해변의 카프카’(전 2권·문학사상사)처럼 소년이 주인공이고, 2009년 장편 ‘1Q84’(전 3권·문학동네)처럼 현실과 유사한 평행세계가 등장하는 등 그의 작품세계가 강하게 녹아 있다는 것. 신작을 미리 읽은 김겨울 작가는 “벽으로 둘러싸인 미지의 도시가 등장하고, 자신의 그림자를 버려야 그 도시로 넘어갈 수 있다는 설정은 하루키 독자라면 익숙할 것”이라고 했다. 신간은 일본에서 출간 2개월 만에 40만 부가 팔렸고, 일본 오리콘 차트가 집계한 올 상반기(1∼6월) 서적 판매 1위에 올랐다. “일본어 원서를 받자마자 밤새 읽었다”는 김 번역가는 “소설적 재미를 추구하지는 않았지만 작가의 긴 역사 속에서 충분히 읽을 만한 작품”이라고 말했다. 김 작가는 “서사적 측면을 중요시하는 독자는 지루할 것이고, 묘사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신작을 즐길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밝혔다. 표정훈 출판평론가는 “판매량과는 별개로 독자들이 신작의 문학적 성취 여부를 중요하게 평가할 것”이라고 했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