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택동

장택동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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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장택동 논설위원입니다.

will71@donga.com

취재분야

2025-11-06~2025-12-06
칼럼100%
  • [오늘과 내일/장택동]합법의 탈을 쓴 파옥(破獄), 특별사면

    독일에는 절대왕정 시대에 “사면 없는 법은 불법”이라는 법언이 있었다고 한다. 법 위의 존재였던 절대군주가 자신이 내린 벌을 스스로 거둬들일 권한을 갖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시대가 바뀐 지 오래다. ‘법 앞에 평등’인 세상에서 통치권자가 자의적으로 재판 결과를 변경할 수 있다는 것은 모순처럼 보인다. 그런데도 사면권은 한국은 물론 대부분의 선진국에 존재한다. 학계에서는 이른바 ‘법치주의의 자기 교정’이라는 측면에서 근거를 찾는다. 아무리 법을 치밀하게 만들어도 완벽하지는 않으므로 불합리한 결과가 발생했을 때 바로잡기 위한 최후의 장치라는 뜻이다. 일종의 ‘필요악’인 만큼 누가 봐도 수긍할 수 있는 경우에 한해 극히 예외적으로 행사돼야 한다. 그런데 현 정부에서 실시되는 특사는 이런 원칙과는 거리가 멀다. 6일 설 특사를 포함해 윤석열 대통령이 취임한 지 채 2년이 안 되는 동안 4차례 특사가 단행됐고, 대상자는 6000명이 넘는다. 수사하고 기소해 범죄의 대가를 치르도록 하는 게 업무인 검사 출신들이 요직에 포진해 ‘검찰 공화국’으로 불리는 현 정부에서 특사가 잦은 것은 뜻밖이다. 정부는 대부분 생계형 사범이나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기 위한 사면이라고 설명한다. 설령 그렇다고 해도 횟수가 너무 잦고 대상이 과다하다. 더 심각한 문제는 정치인이나 전직 고위 공무원 등 이른바 ‘고위층’들이 뚜렷한 설명조차 없이 줄줄이 사면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번 특사에는 김기춘 전 대통령비서실장과 김관진 전 국방부 장관 외에도 10여 명의 정치인과 전직 공직자들이 포함됐다. 이 중에는 거액의 불법 정치자금을 받은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은 전직 의원들도 있다. 뒷돈을 받아 처벌받은 정치인에게 특혜를 주면서 정부는 “갈등 극복과 화해를 통한 국민통합 도모”라는 억지 명분으로 포장했다. 이전 정부들도 별반 차이가 없다. 민주화 이후 노태우 정부부터 문재인 정부까지 정식 특사가 총 41차례 이뤄졌다. 연평균 1.2회꼴이다. 이를 통해 특별사면·감형·복권된 사람만 20만 명이 넘는다. 거물급 정치인이나 전직 고위 관료는 ‘왜 특사를 못 받았는지’가 화제에 오를 만큼 사면이 당연시된다. 특사가 “형사 사법의 빗장을 열어젖히는 무소불위의 파옥(破獄) 도구”(이승호 건국대 교수)로 전락했다는 지적마저 나온다. 이처럼 무분별한 특사가 가능한 것은 ‘헌법상 대통령의 고유 권한’이라는 이유에서다. 하지만 헌법에는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대통령이 사면을 하도록 돼 있고, 학계에서는 적정한 범위 내에서 법률로 사면권을 제한하는 것은 위헌이 아니라는 의견이 많다. 그런데 현 사면법에는 특사의 절차만 규정할 뿐 기준과 조건 등 실질적 내용은 없다. 1988년 13대 국회 이후 사면법 개정안은 50건이나 발의됐다. 특사의 절차를 강화하고 대상을 제한하자는 내용이 다수다. 부패사범 선거사범 등은 특사에서 제외하고 특사 전에 대법원장의 의견을 듣거나 국회에 보고하도록 하는 방안, 형기의 일정 부분을 복역해야 사면 대상이 되도록 하는 방안 등 다양한 대책이 제시됐다. 하지만 대부분 별 논의 없이 흐지부지 폐기됐고 통과된 개정안은 3건에 불과하다. 이 가운데 의미가 있는 내용은 2007년 개정으로 사면심사위원회를 신설한 것 정도다. 그나마 사면심사위원회의 심사 결과에는 구속력이 없어서 사면권을 견제하기에는 역부족이라는 평가다. 남발되는 사면은 사법 정의의 핵심인 공정성에 대한 믿음을 근본적으로 흔든다. 지금껏 봐왔듯 대통령 스스로 사면권을 자제하기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이제 입법을 통해 사면권 남용에 제동을 걸어야 할 때다. 장택동 논설위원 will71@donga.com}

    • 2024-0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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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장택동]청사 접견실에서 수사 중인 사기 피의자 만난 치안정감

    사진 속의 경찰관은 양옆에 선 2명의 남성과 친근하게 손을 잡고 서 있다. 경찰관의 어깨에는 큰 무궁화 3개가 달린 견장이 붙어 있다. 경찰에서 경찰청장(치안총감)에 이어 두 번째 높은 계급인 치안정감이라는 뜻이다. 14만 경찰 가운데 단 7명밖에 없는 최고위직으로, 이 경찰관은 현직 모 지방경찰청장인 A 씨다. 문제는 함께 사진을 찍은 한 명이 가상화폐 사기 피의자 최모 씨라는 점이다. ▷경찰의 수사를 받는 상황이 되면 경찰관 그림자만 봐도 피하고 싶은 게 인지상정이다. 자수하려는 게 아니고서야 피의자가 제 발로 경찰관서에 간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다. 그런데 이 사진을 촬영한 장소는 A 청장의 접견실이다. 최 씨는 코인 투자금을 모은 뒤 돌려주지 않은 혐의로 A 청장이 관할하는 경찰서 중 한 곳에서 수사받던 시점에 청사를 찾아갔다. 드라마에나 나올 법한 장면이다. 경찰은 곧 기소 의견으로 최 씨를 검찰에 송치할 방침이다. ▷이 사진을 소셜미디어(SNS)에 공개한 것은 최 씨다. 접견실 내 청장 자리에 최 씨 혼자 앉아 있는 사진도 함께 올렸다. ‘나 이런 사람이다’라고 과시하는 듯하다. 사기 피해자들은 A 청장과 최 씨의 관계를 의심의 눈길로 바라볼 수밖에 없다. 반면 A 청장은 최 씨가 피의자라는 사실을 전혀 몰랐다고 주장한다. 고향 선배와 그 선배의 아들을 만나기로 했는데, 아들의 친구라는 최 씨가 함께 와서 엉겁결에 동석하게 됐다는 취지다. 시민들의 반응은 싸늘하다. 인터넷상에는 ‘무슨 얘기가 오갔는지 궁금하다’는 식의 댓글이 여럿 달렸다. ▷A 청장의 해명이 사실이라고 해도 문제다. 수사기관에서 일하는 대부분의 공직자는 모르는 사람과 만날 때 조심하는 게 몸에 배어 있다. 사진 촬영은 어림도 없고, 남이 들었을 때 오해할 소지가 없도록 말도 가려서 한다. 혹시라도 상대방이 몰래 녹음해서 ‘누구랑 친분이 있다’며 악용할 소지가 있어서다. 이를 모를 리 없는 A 청장이 처음 만났다는 최 씨와 손까지 잡고 사진을 찍어준 처신은 부적절했다. 이들이 만난 경위와 대화 내용 등을 경찰청이 철저하게 확인할 필요가 있다. ▷근래 경찰은 잇따른 고위 간부들의 일탈로 바람 잘 날이 없다. 브로커에게 인사 청탁과 함께 금품을 받은 혐의로 조사받던 전직 치안감이 스스로 목숨을 끊고, 이 사건에 연루된 현직 치안감은 기소됐다. 유치장 내 피의자를 불법 면회 시켜준 혐의로 경무관 2명이 재판에 넘겨지기도 했다. 이런 와중에 치안정감마저 석연치 않은 언행으로 입길에 오르면서 경찰에 부담을 얹게 됐다. ‘나는 잘못한 게 없다’고 변명하기에 앞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에 대해 반성부터 하는 것이 최고위직 경찰 간부가 갖춰야 할 몸가짐일 것이다. 장택동 논설위원 will71@donga.com}

    • 2024-0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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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장택동]‘저질 판사’ ‘저질 검사’

    법정에서 판사는 ‘슈퍼갑’이다. 재판 진행과 판결이 전적으로 판사에게 달려 있기 때문에 당사자들은 법관의 눈치를 살피고 지시에 따른다. 수사와 기소에서는 검사가 절대적이다. 피의자와 피고인은 “사건에 있어서는 검사가 하느님”(김두식 ‘불멸의 신성가족’)이라고 느낄 정도다. 하지만 당사자들은 조용히 판검사의 일거수일투족을 주시하고 있다. “법관은 재판을 할 때 재판을 받는 것”이라는 아하론 바라크 전 이스라엘 대법원장의 말처럼 판검사의 언행과 판단은 추후 평가의 대상이 된다. ▷재판과 수사를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보는 변호사들이 지적하는 판검사의 대표적인 문제는 막말이다. 서울변회의 법관 평가를 보면 피고인에게 “예전 같았으면 곤장을 칠 일”이라거나 “반성문 그만 쓰고 몸으로 때우라”고 하는 등 거친 말을 한 판사들이 낮은 점수를 받았다. 검사에 대한 대한변협의 평가도 비슷하다. “피해자에게 변제할 돈은 없고 변호인 선임 비용은 있냐”, “죄를 지은 사람이 너무 당당한 것 아니냐” 등 모욕적인 발언을 하는 검사들이 적지 않다고 한다. ▷다음으론 맡은 업무를 얼마나 철저하고 공정하게 처리했는지가 중요한 요소다. 별 이유 없이 재판을 1년 넘게 방치하거나 서면으로 제출한 내용도 파악하지 않은 채 공판을 진행한 판사, 원고와 피고를 혼동해 판결을 번복한 판사가 나쁜 평가를 받는 것은 피할 수 없다. 검사 평가에서도 피의자를 한 번도 조사하지 않은 채 불기소 처분하거나 증거물을 제대로 파악하지 않고 재판에 들어온 검사들이 하위권에 이름을 올렸다. ▷판검사들은 옷을 벗은 뒤에야 남의 눈에 본인이 어떻게 비쳤는지 알게 되는 경우가 많다고 토로한다. 변호사로 전업하고 법원을 다시 보게 됐다는 판사 출신의 정인진 변호사는 “인간 존중 없는 취급에 법대(法臺) 앞에 선 사람들은 분노하고 좌절한다”고 썼다. 검사 경력이 있는 변호사들도 “변호인으로서 검사를 보면 ‘나도 예전에 저랬을까’ 싶을 때가 종종 있다”고 말한다. 현직에 있을 때 깨달았으면 더 좋았을 것이다. 역지사지의 자세로 성찰하고 다른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가능한 일이다. ▷물론 밤잠을 아껴가며 재판과 수사에 전념하고 당사자들을 배려하는 판검사들이 적지 않다. 그렇지만 판검사에게는 예외 없이 높은 윤리적 기준과 업무의 완결성이 요구된다. 재판과 수사의 당사자들에게는 인생이 걸린 일이어서다. “사법기관이라는 것은 온 국민의 생명과 신체, 재산과 명예 등을 결정하는 일을 가지기 때문에 자가(본인)의 수양을 더욱 긴급히 아니하면 안 될 것”이라는 김병로 초대 대법원장의 말은 지금도 판사와 검사 모두에게 유효하다.장택동 논설위원 will71@donga.com}

    • 2024-0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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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장택동]“전 국민 상대로 한 毒性 시험”

    공식적인 사망자만 최소 1258명에 이르는 ‘가습기 살균제 참사’의 책임을 둘러싼 공방은 이 사건이 공론화된 지 14년째 이어지고 있다. 옥시의 전 대표는 2018년 유죄가 확정돼 이미 형기를 끝마쳤다. 반면 SK케미칼과 애경산업의 전 대표는 1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가 11일 진행된 항소심에서 유죄로 뒤집혔다. 이들 제품에 쓰인 화학 원료가 인체에 유해한지에 대한 판단이 관건이었다. ▷옥시가 만든 ‘옥시싹싹 뉴가습기당번’의 주원료는 PHMG다. 피부에 닿을 때는 문제가 없지만 흡입하면 폐 질환을 일으킬 수 있는 성분이라는 점이 확인됐고, 옥시 전 대표는 1심부터 유죄 판결을 받았다. 하지만 SK케미칼과 애경이 만든 ‘홈크리닉 가습기메이트’의 원료인 CMIT·MIT는 유해성을 입증하기가 한층 까다로웠다. 결국 1심 재판부는 ‘SK·애경이 만든 살균제와 옥시의 살균제는 성분이나 위해성에서 많은 차이가 있다’는 취지로 판결했다. ▷1심 판결 이후 국립환경과학원에서 CMIT·MIT가 호흡기를 통해 폐로 전달된다는 점을 입증하는 논문을 발표하는 등 새로운 연구 결과들이 나왔다. 이를 근거로 항소심 재판부는 SK케미칼·애경의 살균제를 사용한 것과 폐 질환과의 인과관계가 입증됐다고 판단했다. 특히 안전성에 관해서는 제조·판매업자에게 강력한 주의 의무가 요구된다는 것이 법원의 시각이다. 원료가 얼마나 위험한지를 알 길이 없는 소비자로서는 ‘인체에 해가 없는 제품’이라는 업체의 말을 믿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재판부는 더 근본적으로는 SK케미칼의 전신인 유공이 1994년 살균제를 만들 때부터 문제가 있었다고 판단했다. 유공은 독성시험 결과가 나오기도 전에 제품 출시를 강행했고, 이듬해 서울대에서 ‘문제 소지가 있으니 추가 실험이 필요하다’는 의견을 제시했는데도 판매 중지나 회수 조치를 하지 않았다. 2002년 이 제품을 이어받은 홈크리닉 가습기메이트를 생산할 때도 별도의 검사는 없었다. 그 결과 “장기간에 걸쳐 전 국민을 상대로 살균제의 만성 흡입 독성시험이 행해진 사건”이 됐다고 재판부는 질타했다. ▷가습기 살균제는 그동안 약 900만 명이 사용했을 만큼 인기 제품이었고 주로 큰 기업들이 만들었다. 그런데 문제가 불거지자 기업들은 ‘유해 성분인지 몰랐다’ ‘살균제가 피해의 원인인지 명확하지 않다’는 등의 변명만 내놨고, 이는 국민적 공분을 일으켰다. 대법원의 최종심이 남아 있기는 하지만 이번 재판을 통해 가습기 살균제 업체들의 법적 책임은 보다 분명해졌다. 기업들이 하루라도 빨리 배상·보상 방안에 합의해 피해자의 어려움을 덜어 주는 게 조금이나마 사회적 책임을 지는 길일 것이다.장택동 논설위원 will71@donga.com}

    • 2024-0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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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장택동]몰래 한 녹음 증거능력 있나 없나

    “선생님이 제게 ‘1, 2학년 제대로 나온 것 맞냐’고 말했어요.” 초등학교 3학년 아들에게서 이런 말을 들은 엄마는 책가방에 몰래 녹음기를 넣었다. 얼마 뒤 교사가 아이에게 “구제 불능”, “쟤가 맛이 갔어” 등의 발언을 한 것이 고스란히 녹음됐다. 이에 엄마는 교사를 아동학대 혐의로 신고했다. 1, 2심에서는 교사에게 유죄가 선고됐지만 대법원은 11일 원심을 파기했다. 녹음파일을 증거로 인정할 수 있느냐가 관건이었다. ▷형사재판에서는 아무리 결정적인 증거라도 적법하게 수집하지 않았다면 유죄의 근거가 될 수 없다. 녹음파일의 경우 대상이 ‘공개되지 않은 타인 간의 대화’라면 증거로서의 가치가 사라진다. 먼저 ‘타인 간의 대화’인지를 놓고 원심과 대법원의 판단이 갈렸다. 원심은 “녹음자(엄마)와 대화자(아들)를 동일시할 정도로 밀접한 인적 관련이 있다”는 이유에서 증거능력을 문제 삼지 않았지만, 대법원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부모라고 해도 직접 대화에 참여하지 않은 이상 당사자가 될 수는 없다는 취지다. ▷다음 쟁점은 교사가 수업 시간에 한 발언이 ‘공개된 대화’에 해당하는지였다. 원심은 교실에서 30명 정도의 학생이 함께 수업을 듣는다는 점 등을 감안할 때 공개적인 대화라고 봤다. 하지만 대법원은 수업은 학생들에게만 공개되는 것일 뿐 불특정 다수가 듣는 것은 아니라는 이유로 비공개 대화라고 판시했다. 대법원은 유·무죄에 대해선 판단하지 않았지만, 유죄 판결의 핵심 증거가 효력을 잃음에 따라 교사에게는 유리한 결과가 됐다. ▷교사들은 교실에서 몰래 녹음이 이뤄지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고 하소연한다. 일부 학생은 첩보영화에나 나올 법한 펜형·목걸이형 녹음기를 차고 등교한다고 한다. 주변의 소리를 들을 수 있게 하는 앱을 자녀의 스마트폰에 깔아서 수업 내용을 실시간으로 들은 학부모도 있었다. 이를 근거로 민원을 제기하는 경우가 종종 있고, 이 사건이나 웹툰 작가 주호민 씨 아들 사건처럼 법정 다툼으로 비화하기도 한다. 비슷한 소송에서 대법원의 이번 판결이 기준으로 작용하게 될 것이다. ▷몰래 녹음한 파일의 증거능력이 쟁점인 사건은 여럿 있다. 대법원은 아내가 남편의 불륜을 의심해 남편 모르게 통화녹음 기능을 활성화한 결과 녹음된 파일이라고 해도 부부간에 통화한 내용은 형사재판의 증거로 쓸 수 있다고 판결했다. 그러면서 “증거 수집 절차가 사생활이나 인격적 이익을 중대하게 침해해 사회 통념상 한도를 벗어난” 경우라면 증거능력이 부정될 수도 있다고 판단한 부분은 의미가 있다. 사건의 실체 입증이 다소 어려워지더라도 증거의 적법성을 엄격하게 따지는 것이 절차의 정의를 중시하는 사법제도의 발전 방향에 맞다.장택동 논설위원 will71@donga.com}

    • 2024-0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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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장택동]대형 쓰나미·방사능 유출 악몽 되살린 日 노토반도 지진

    바다 건너 일본에서 발생한 지진이 한국에 영향을 미칠 대표적인 위험 요소는 두 가지다. 먼저 원자력발전소에 문제가 생겨 방사능이 유출되면 한반도에 직간접적 피해를 줄 가능성이 있다. 지진해일(쓰나미)도 공포의 대상이다. 특히 일본 서부에서 일어난 지진해일은 동해를 거쳐 바로 한반도를 덮칠 수 있다. 1일 일본 노토(能登)반도에서 발생한 규모 7.6의 강진은 이런 악몽들을 동시에 떠올리게 했다. ▷일본 본토인 혼슈섬 중서부에 위치한 이시카와현 노토반도 일대는 유라시아판과 오호츠크판의 경계 지점에 있어서 평소에도 지진이 잦다. 최근 3년간 진도 1 이상의 지진이 500차례 넘게 일어났을 정도다. 하지만 진도 6이 넘는 경우는 드물었다. 이례적인 강진으로 70여 명이 목숨을 잃고 수만 명의 이재민이 발생했다. 도로는 갈라지고 산사태까지 이어지면서 구조와 복구 작업이 늦어지고 있다. 일본 전문가들은 깊은 지하에서 고온의 유체가 상승하면서 지진이 커졌을 것이라는 등의 분석을 내놓고 있다. ▷노토반도는 강릉에서 직선거리로 약 730km 떨어져 있다. 그 사이에는 울릉도와 독도가 있을 뿐 망망대해다. 2011년 동일본 대지진 당시에는 일본 본토가 쓰나미의 방파제 역할을 해서 한국으로 밀려오지는 않았지만, 이번에는 쓰나미가 발생한 지 약 2시간 만에 동해안에 도착했고 묵호에서 가장 높은 85cm의 쓰나미가 관측됐다. 동해안에는 1983년 일본 아키타현 서쪽 해상에서 발생한 쓰나미가 최고 2m의 높이로 밀려와 3명이 목숨을 잃은 적이 있다. 당시의 참상을 기억하는 동해안 주민들은 가슴이 철렁했을 것이다. ▷노토반도 인근에는 일본 최대 원전인 가시와자키가리와 원전과 시카 원전 등이 밀집해 있다. 내진 설계가 충실하게 돼 있더라도 단전 등으로 인해 기능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도 전기 공급이 끊기면서 원자로 냉각장치가 작동을 멈춘 것이 주된 원인이었다. 후쿠시마 원전에서 나온 방사성물질은 대부분 해류를 타고 태평양으로 이동하는데도 한국에선 걱정하는 이들이 적잖다. 동해를 사이에 두고 한반도와 마주 보고 있는 일본 서부에서 비슷한 일이 일어난다면 훨씬 직접적인 위협이 될 것이다. ▷일본 정부는 현재까지는 원전의 안전성에 이상이 없다고 밝혔다. 지진 발생 인근 지역에 내려졌던 쓰나미 경보도 해제됐다. 그렇다고 안심할 수는 없다. 여진이 계속되는 가운데 일본 기상청은 1주일 안에 진도 7 수준의 지진이 또 발생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자연재해를 완벽하게 예측하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언제, 얼마나 강력한 지진이 일어날지 아무도 모르는 만큼 바짝 긴장하면서 대비하는 것이 최선이다. ‘설마’ 하고 방심하다가 뒤늦게 가슴을 치는 일은 없어야겠다.장택동 논설위원 will71@donga.com}

    • 2024-0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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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장택동]말만 앞세운 空論으론 해결 못 할 재판 지연

    “너희 아빠는 집에서 뭐 하니?” “타자 치는데요.” “타자 안 칠 때는?” “책 보는데요.” 질문자는 판사의 친구, 대답한 사람은 판사의 어린 딸이다. 남편이 밤늦게까지 재판 서류를 읽다가 조는 모습을 본 아내는 “당신이 고3이냐”며 혀를 찬다. 고등법원 부장판사 출신 정인진 변호사가 쓴 ‘이상한 재판의 나라에서’에 나오는 대목이다. 과거에는 이처럼 퇴근길에 자료를 보따리에 싸가서 밤새 씨름하는 것은 판사들의 흔한 일상이었다. 지금도 불철주야 재판을 준비하는 판사들이 적지 않지만 예전 같지는 않다고 한다. 법조계에선 ‘워라밸’을 중시하는 사회 분위기가 법원에도 스며든 데다 근래에 바뀐 제도들이 영향을 줬다고 본다. 한 전직 법관은 “열심히 일하는 판사를 우대할 방법이 없어졌다”고 했다. 판사들이 밤샘 근무를 마다하지 않았던 현실적인 동기는 고등법원 부장판사를 거쳐 법원장으로 승진하겠다는 희망이었다. 그런데 2020년 고법 부장 승진제가 폐지되면서 굳이 재판 실적에 목을 맬 이유가 사라졌고, 판사들의 투표로 법원장 후보를 정하는 법원장 후보 추천제가 도입되면서 고참 법관들이 후배 판사들을 독려하기도 어렵게 됐다는 것이다. 그 결과 판사들이 일을 덜 하게 됐고, 이는 재판 지연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지적이 적지 않다. 재판이 늦어진다는 점은 수치로 나타난다. 지난해 전국 법원에 접수된 본안 사건 수는 2013년에 비해 40만 건가량 줄었고, 판사 1명당 사건 수도 감소했다. 반면 같은 기간 민사 본안 1심 합의부 사건의 평균 처리 기간은 6개월, 형사재판 불구속 1심 합의부 사건은 2개월 정도 늘었다. 하지만 이는 고법부장 폐지나 법원장 추천제 때문이 아니라 사법부의 구조적 문제라는 반론도 만만치 않다. 대표적인 것이 법관 수가 부족하다는 주장이다. 산술적인 사건 수는 줄었더라도 민사사건은 나날이 복잡해지고, 형사재판은 법정 진술을 중시하는 공판중심주의 도입으로 길어졌는데 법관 정원은 2014년 말 증원 이후 그대로라는 것이다. 경력 법조인을 판사로 임용하는 법조일원화에 따른 법관의 고령화, 잦은 인사이동 등도 신속한 재판의 걸림돌로 꼽힌다. 이런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얽혀 재판이 늦어졌겠지만, 사안의 경중을 가려서 급한 것부터 풀어나갈 필요가 있다. 그러려면 태스크포스(TF)를 설치하거나 외부 컨설팅을 받아서라도 정확한 실태부터 진단해야 한다. 주로 재판이 복잡해진 탓이라면 그에 따라 판사들이 사건당 투입하는 시간이 얼마나 늘었는지, 법관의 근태 때문이라면 실질적인 업무량이 어느 정도 줄었는지 정밀하게 따져서 데이터를 산출하는 게 먼저다. 그래야 법원의 근무 시스템이나 기강을 개선하면 될 일인지, 법관 증원이 불가피한지 판단할 수 있다. 고법 부장 폐지와 법원장 추천제도 마찬가지다. 제도를 바꿀지 말지를 놓고 각자 주장만 내세울 게 아니라 법관의 근무 태도와 재판 기간에 미치는 영향을 구체적으로 분석한 뒤 자료를 놓고 토론해야 한다. 이런 과정을 생략한 채 알맹이 없는 공론(空論)을 주고받는 것은 문제 해결을 늦출 뿐이다. 지연된 재판의 당사자들은 견디기 힘든 고통을 겪고 있다. 형사 피고인에게는 재판이 길어지는 것 자체가 처벌이나 다름없다. 민사재판 판결을 기다리는 사이에 가정이 파탄 나거나 기업이 문을 닫는 경우도 있다. 이런 일이 누적되면 국민이 법원을 믿지 못하게 된다. 재판 기간이 10% 길어지면 사법제도에 대한 신뢰가 2% 정도 떨어진다는 분석도 있다. 재판 지연 해결을 최우선 과제로 삼은 조희대 대법원장의 실행력과 리더십이 절실하다.장택동 논설위원 will71@donga.com}

    • 2024-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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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장택동]日軍 문서로도 확인된 간토대학살, 더는 묻을 수 없다

    “정부 내에서 사실관계를 파악할 수 있는 기록을 발견할 수 없다.” 1923년 9월 간토대지진 당시 벌어진 조선인 학살에 대한 일본 정부의 설명은 한결같다. 2017년 아베 정부도, 현 기시다 정부도 ‘모르쇠’로 일관하며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다. 하지만 역사를 언제까지 묻어둘 수 있을까. 당시 조선인이 무참하게 살해됐다는 구체적 내용이 담긴 일본군의 보고서가 25일 공개됐다. ▷일본 방위성 방위연구소에 소장된 ‘간토지방 지진 관계 업무 상보’에는 지진 발생 사흘 뒤 사이타마현에서 40여 명의 조선인이 “살기를 띤 군중에게 죽임을 당했다”고 적혀 있다. 이 지역의 병무 담당 기관이 같은 해 12월 육군성에 보낸 것이다. 당시 일본군은 지진 피해 지역의 모든 부대에 보고를 지시했던 만큼 다른 지역에서 올린 보고서가 더 있을 가능성이 크다. 이미 100년 전에 일본 정부가 간토대학살에 대해 인지했을 것이라는 점을 보여주는 뚜렷한 물증이다. ▷있는 사실을 부인하려다 보면 말이 꼬이기 마련이다. 지난달 일본 참의원에서는 국립공문서관에 보관 중인 1924년 각의 문건이 공개됐다. “대지진 당시 조선인 범행의 풍설(소문)을 믿은 결과 살상 행위를 한 사람”들에 대한 특사를 논의하는 내용으로, 일본 내각이 학살을 알고 있었다는 또 다른 증거다. 그런데 ‘이 문서가 정부 내 문서인가’를 묻는 질의에 관방장관은 “공문서관은 독립행정법인”이라는 등 동문서답을 내놓으며 답을 피했다. 우리나라로 치면 국무회의 회의록에 해당하는 문서조차 공식 문서로 인정하길 꺼리는 웃지 못할 상황이다. ▷요즘도 일본에서는 대형 사건이 발생할 때 극히 일부이긴 하지만 한국인을 탓하는 목소리가 나온다. 2011년 동일본 대지진 당시엔 ‘조센진(조선인)을 죽이자’는 구호가 등장했고, 34명이 숨진 2019년 교토 애니메이션센터 화재 때는 ‘방화는 한국인의 습성’이라는 글이 포털사이트에 올라왔다. 미국 법학자 브라이언 레빈은 편견과 선입견이 차별, 폭력을 거쳐 집단학살로 발전하는 현상을 ‘혐오의 피라미드’라고 표현했다. 재일 한국인에 대한 편견과 차별이 또 다른 불상사로 이어지지 않을까 걱정스럽다. ▷그렇다고 일본 정부만 탓하고 있을 수는 없다. 한국 정부 역시 1950년대 초 이후 간토대학살 피해자에 대한 실태 파악조차 하지 않고 있다. 이렇다 보니 상하이 임시정부가 집계한 한국인 희생자는 6661명인데, 지금까지 신원이 확인된 사람은 500명 정도에 불과하다. 더 늦기 전에 일본 정부에 공식 사과와 공동조사를 요구하는 등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과거사를 덮은 채 이뤄지는 한일관계 개선은 언제든 무너질 수 있는 사상누각이 되기 쉽다. 장택동 논설위원 will71@donga.com}

    • 2023-1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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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장택동]“검사는 자기 손부터 깨끗해야 한다”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의 ‘쌍방울 대북송금 의혹’ 수사를 지휘하던 이정섭 수원지검 2차장검사가 갑자기 수사에서 배제됐다. 이 검사에 대해 여러 비위 의혹이 제기되자 20일 서울중앙지검이 관련 장소들을 압수수색하고, 이원석 검찰총장은 이 검사를 인사조치 한 것이다. 이 총장이 예상 밖의 강수를 뒀다는 평가가 검찰 안팎에서 나오고 있다. ▷9일 야당이 이 검사와 ‘고발 사주’ 손준성 검사에 대한 탄핵안을 발의하자 이 총장은 “나를 탄핵하라”며 강력하게 반발했다. 이 검사를 탄핵한 것은 “보복 탄핵”이라는 이유에서다. 9월 이 대표에 대한 구속영장이 기각된 마당에 이 검사까지 쌍방울 관련 수사에서 빠지게 되면 수사에 차질이 불가피할 것이라는 현실적 우려도 있었다. 그럼에도 이 총장은 이 검사를 대전고검 검사 직무대리로 발령해 수사에서 손을 떼도록 했다. ▷이 총장은 이 조치를 발표하기 전 검찰 간부들에게 “남의 죄를 단죄하는 검사는 자기 손부터 깨끗해야 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1990년대 이탈리아에서 검찰이 주도한 반부패 수사 ‘마니 풀리테(깨끗한 손)’를 연상케 한다. 평검사 시절부터 자기 관리에 철저했다는 이 총장은 2016년 ‘정운호 게이트’ 당시 특수통 출신 전직 검사장을 구속할 만큼 검찰 출신의 비리에도 엄격했다. 지난해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나는 ‘제 식구 감싸기’라는 말이 제일 싫다”며 “(검찰총장) 직분을 할 동안에 ‘감찰총장’이라는 말을 듣고 싶다”고 했을 정도다. ▷일각에선 사법시험 동기이자 지금은 직속상관인 한동훈 법무부 장관과의 관계가 이번 조치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분석한다. 한 장관에 가려 존재감이 부각되지 않는 이 총장이 도덕성, 청렴성을 내세운 것은 일종의 ‘차별화 전략’이라는 시각이다. 야당이 일단 철회한 이 검사에 대한 탄핵안을 다시 발의하지 못하도록 견제하려는 방안이라는 해석도 있다. 검찰이 자체적으로 강제수사와 인사조치까지 한 만큼 탄핵은 불필요하다는 점을 보여주려 했다는 것이다. 이 검사에게 쌍방울 수사 지휘를 계속 맡기면 두고두고 논란의 불씨가 될 수 있다는 점도 감안했을 것이다. ▷배경이 어떻든 이번 조치로 이 총장이 검사의 비위 문제에 칼을 꺼내 든 모양새가 됐다. 골프장을 운영하는 처남의 부탁으로 골프장 직원의 범죄 기록 조회, 재벌그룹 부회장으로부터 가족모임 접대 등 이 검사에 대해 제기된 의혹들도 가볍지 않다. ‘라임 전주’ 김봉현 씨로부터 술 접대를 받은 검사들에 대한 이른바 ‘99만 원 불기소’ 등 과거 검찰에서 제 식구 감싸기라는 지적을 받았던 사건이 한둘이 아니다. 이를 기억하는 시민들이 과연 ‘이원석 검찰’은 다를지 지켜보고 있다. 장택동 논설위원 will71@donga.com}

    • 2023-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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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장택동]현실성도 없고 지켜지지도 않는 ‘김영란법 식사비’ 3만원

    2016년 9월 ‘김영란법’이라고 불리는 청탁금지법이 시행되자 서울 광화문과 여의도 등지의 식당에는 2만9000원짜리 ‘김영란 세트’가 등장했다. 가짓수와 양을 줄인 한정식에 맥주 한 병을 끼워 넣는 식이다. 청탁금지법에 규정된 ‘식사비 한도 3만 원’ 때문에 매상이 줄어들 것을 걱정해 음식점 업주들이 내놓은 고육책이었다. 이제는 김영란 세트를 찾아보기 어렵다. 최소한의 구성으로 세트를 내놓으려 해도 가격을 맞추기 어려운 데다 사실상 이 조항이 사문화돼서다. ▷요즘 밖에 나가서 밥 한번 먹는 게 부담스러울 정도로 외식 물가는 가파르게 오르고 있다. 한국소비자원 집계 기준으로 2016년 9월 서울의 냉면 가격은 평균 8077원, 삼겹살 1인분은 1만3154원이었는데 지난달에는 냉면 1만1803원, 삼겹살 1만9253원으로 인상됐다. 서울 도심의 어지간한 식당에서 삼겹살에 반주를 곁들이면 3만 원을 훌쩍 넘고 한우는 엄두도 못 낸다. 그런데 청탁금지법에서 정한 식사비 한도는 7년이 넘도록 3만 원으로 고정돼 있다. ▷이 기준은 2003년 제정된 공무원 행동강령을 참고해서 만든 것이다. 자장면 한 그릇 가격이 3000원이던 시절에 만든 기준이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는 셈이다. 한덕수 국무총리가 16일 “시간과 여건 등을 비춰 봤을 때 현실화할 필요성이 있다”고 말한 이유다. 이렇다 보니 청탁금지법과 관련해 밥값을 기록하는 경우에는 흔히 참석 인원을 부풀려 1인당 비용을 줄이는 편법을 쓴다. 참석자 중 누군가가 증거를 모아 신고하지 않는 한 적발할 방법도 마땅치 않다. ▷청탁금지법이 탄생하게 된 계기는 ‘벤츠 여검사’ 사건이었다. 내연 관계인 변호사에게서 벤츠 등을 선물 받고 다른 사건에 영향을 미친 혐의로 기소된 여검사가 대가성이 입증되지 않아 무죄 선고를 받자 여론이 들끓었다. 이에 대가성 여부와 상관없이 공직자가 금품과 청탁을 받지 못하도록 하자는 취지에서 만들어진 것이 이 법이다. 공직사회의 청렴도를 높이는 데 일조했다는 평가도 있지만, 당초 취지와 달리 대상 범위가 너무 넓어졌고 지키기 어려운 조항이 섞였다는 논란도 끊이지 않는다. ▷청탁금지법이 적용되는 공직자와 교육기관·언론사 종사자는 250만 명이 넘는다. 이들은 식사비는 물론 경조사비, 선물값까지 규제를 받는다. 경조사비는 한도가 5만 원으로 정해져 있어서 여러 사람 명의로 봉투를 보내는 ‘봉투 쪼개기’가 횡행한다. 선물은 농축수산물이냐, 명절 전후냐에 따라 상한선이 5만 원에서 30만 원까지 제각각이라 품목과 날짜를 따져 가며 보내야 한다. 애매하고 비현실적인 법은 잠재적 범법자를 양산하기 마련이다.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청탁금지법의 기준을 면밀하게 손볼 때가 됐다. 장택동 논설위원 will71@donga.com}

    • 2023-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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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장택동]신설한다는 ‘절대적 종신형’, 이미 시행한 지 26년

    “병적인 집착과 광기에 이른 상태에서 일면식도 없던 피해자의 여동생과 모친, 피해자에 대한 살해 범행을 이어 나갔는바… 참작할 만한 사정이 전혀 없고 앞으로 교화될 가능성도 적어 보인다.” 이른바 ‘세 모녀 살해 사건’의 범인 김태현에 대한 판결문의 일부다. 그는 온라인 게임에서 알게 된 피해자가 연락을 거부하자 두 달 동안 스토킹하다 집에 침입해 세 명의 목숨을 잔혹하게 빼앗았다. 전국에는 김태현을 비롯해 살인이나 그에 버금가는 중범죄를 저지른 1300여 명의 무기수가 복역 중이다. 귀가하던 여성을 납치 살해한 뒤 시신을 358조각으로 훼손한 오원춘, ‘계곡 살인’의 이은해와 ‘신당역 살인’의 전주환 등이 포함돼 있다. 법원이 이들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한 것은 수감 기간이 최장 50년인 유기징역보다 무겁게 처벌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그런데 무기수는 수감된 지 20년이 지나면 가석방 대상이 된다. 김태현은 18년 뒤, 오원춘은 9년 뒤에는 풀려날 가능성이 생긴다. 실제로 2015∼2022년 119명의 무기수가 가석방됐다. 반면 징역 42년형을 받은 ‘n번방 사건’ 조주빈의 경우 최소 32년을 복역해야 한다. 징역형은 형기가 10년 이상 남아 있으면 가석방 대상에서 제외되기 때문이다. 이런 모순을 해소하기 위해 정부는 지난달 31일 무기형을 가석방이 허용되지 않는 무기형(절대적 종신형)과 가석방이 허용되는 무기형(상대적 종신형)으로 나누는 내용의 형법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일부 악질적 흉악범은 평생 가석방 대상에서 배제하겠다는 취지다. 이에 반대하는 측에서는 풀려날 수 있다는 희망을 박탈하는 것은 인간의 존엄성을 파괴하고 교화의 여지를 없애는 과도한 처벌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피해자는 가장 기본적인 인권인 생명권을 빼앗겼고 유족들은 끔찍한 고통을 안고 살아가는데 가해자는 자유를 되찾을 수 있다는 게 사법적 정의에 부합하나. 응보(應報)는 현대에서도 형벌의 중요한 목적 중 하나다. 또 석방된 무기수가 다시 범죄를 저지를 가능성도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무기징역이 선고된 살인범이 가석방된 뒤 제보자의 아들을 살해하려다가 붙잡히는 등 실제 사례도 적잖다. 다만 실질적 사형폐지국인 한국에서 절대적 종신형을 도입하는 것에 문제가 없는지는 짚어봐야 한다. 법조계에서는 ‘사형이라고 쓰고 가석방 없는 무기형이라고 읽는다’고 말한다. 1997년 마지막 사형 집행 이후 26년간 사형은 본래의 의미가 아닌 절대적 종신형으로서 기능을 해왔다는 뜻이다. 이를 그대로 둔 채 절대적 종신형을 신설하면 사실상 내용이 같은 최고형벌이 두 가지 존재하게 되는 결과가 된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선 영국처럼 사형제를 폐지하고 절대적 종신형으로 대체하는 방안이 있다. 국내 여론도 긍정적이다. 2018년 국가인권위원회의 조사에서 응답자의 3분의 2가 대체형벌 도입을 전제로 한 사형제 폐지에 찬성했고, 이 중 79%는 대체형벌로 절대적 종신형이 적합하다고 답했다. 반면 미국 텍사스, 플로리다주 등에서는 절대적 종신형을 두면서도 사형을 집행함으로써 사형-절대적 종신형-상대적 종신형 순으로 처벌의 강도를 구분하고 있다. 현 정부는 사형제 폐지에 반대하고 있고, 사형 집행에는 모호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현상 유지’로 사형에 관한 논란은 피하면서 절대적 종신형에 집중하겠다는 의도일 것이다. 하지만 형벌 체계에 부조화가 생기지 않도록 하려면 사형제 존폐와 절대적 종신형 도입을 한 테이블에 올려놓고 논의해야 한다고 본다. 그것이 논란의 소지를 남기지 않고 이 문제를 명확하게 정리할 수 있는 길일 것이다. 장택동 논설위원 will71@donga.com}

    • 2023-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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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장택동]‘기계적인 자료수집만 한다’는 법무부 인사검증단

    11일 법무부에 대한 국정감사의 쟁점은 인사검증 부실 문제였다. 야당 의원들은 이균용 대법원장 후보자의 재산신고 누락, 김행 여성가족부 장관 후보자의 ‘주식 파킹’ 의혹 등을 지적하며 ‘법무부가 제대로 확인했느냐’ ‘본인이 아니라고 하면 아닌 것이냐’고 추궁했다. 이에 한동훈 장관은 “법무부 인사정보관리단(인사검증단)은 프로토콜(정해진 절차)에 따라 기계적으로 자료를 수집하고 의견 없이 대통령실 공직기강비서관실에 넘긴다”고 답했다. 단순히 실무 작업만 한다는 취지다. ▷인사검증을 전담했던 대통령민정수석실이 폐지된 이후 1차 검증은 인사검증단, 2차 검증은 공직기강비서관실에서 맡는 것으로 역할이 나뉘었다. 대통령실은 지난해 6월 인사검증단을 신설할 당시 “대통령실은 정책 중심으로 가니까 고위공직자들의 검증 과정은 내각으로 보내는 것이 맞는다”고 했다. 인사검증의 무게중심이 공직기강비서관실보다는 인사검증단에 있다는 뜻으로 해석됐다. 법무부의 권한이 지나치게 커진다는 비판이 나왔지만, 이중으로 검증이 이뤄지는 만큼 부실 검증은 줄어들 것이라는 전망도 있었다. ▷하지만 인사검증의 수준은 여전히 국민의 기대에 못 미친다. 인사검증 업무는 인사혁신처가 권한을 위임하는 형식으로 이뤄지므로 시행령에서 정하기에 따라 어느 부처로든 넘길 수 있다. 인사검증단에는 검찰 경찰 국세청 국가정보원 등 여러 기관에서 직원이 파견되므로 부처 전반을 조율하는 국무조정실 산하에 두는 것이 더 적합하다는 의견도 적지 않았다. 그럼에도 법무부에 설치한 것은 사실 확인과 법적 쟁점 파악에 전문성이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자료 취합으로 역할이 한정된다면 인사검증단을 굳이 법무부에 둬야 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인사검증에 대한 책임 소재도 불분명한 상태다. 한 장관은 지난해 7월 국회에서 인사검증과 관련해 “국민적 지탄이 커지면 제가 책임져야 할 상황도 생기지 않겠나”라고 말했다. 올 2월 국가수사본부장으로 임명됐던 정순신 변호사가 낙마할 당시에는 “정무적 책임감을 느낀다”고도 했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책임을 진다는 것이냐’는 질문에는 “아니다”라고 말했다. 대통령실 역시 부실 검증 책임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다. ▷인사검증단 설치의 또 다른 명분이었던 ‘인사검증의 투명성 제고’ 역시 달라진 게 별로 없다. ‘음지’에 있던 인사검증을 ‘양지’로 끌어내 감시 가능한 통상의 시스템으로 만들겠다던 법무부의 당초 설명과 달리 국회에서 검증 과정을 물어도 ‘통상적으로 업무를 했다’는 식으로 답변을 피하고 있다. 인사검증단이 출범한 지 1년 4개월이 지났지만 이 조직이 왜 필요한 것인지는 여전히 의문형으로 남아 있다. 장택동 논설위원 will71@donga.com}

    • 2023-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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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장택동]축구 응원으로 불거진 ‘차이나 게이트’ 논란

    한국과 중국의 축구 국가대표팀이 아시안게임 4강 티켓을 따내기 위해 맞붙은 1일. 중국 광저우에서 경기가 열린 만큼 현장에선 중국 팬들의 일방적인 응원이 쏟아졌다. 그런데 당시 국내 포털사이트 다음에서 진행된 ‘클릭 응원’에서도 92%가 중국을 응원하고 한국 응원은 8%에 그쳤다는 결과가 나왔다. 같은 경기에서 네이버가 실시한 ‘터치 응원’에선 한국을 응원한 비율이 94%, 중국은 6%였다. 이렇게 상반된 결과가 나온 이유가 뭘까. ▷다음의 응원하기에서 한국보다 다른 나라를 압도적으로 응원한 사례는 여럿 있었다. 지난달 13일 열린 한국과 사우디아라비아 간의 축구 친선 경기에선 사우디 응원 비율이 52%였고, 한국과 키르기스스탄의 아시안게임 축구 16강전에서는 키르기스스탄이 85%의 응원을 받았다. 여자 축구에서도 남북한이 맞붙은 아시안게임 8강전에선 북한에 75%, 한국과 홍콩 간의 예선전에서는 홍콩에 91%의 응원이 몰렸다. 이 정도면 우연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의심스러운 대목은 더 있다. 평소 이용자는 네이버가 다음보다 6배가량 많다(마케팅 조사 업체 샘러시 8월 집계 기준). 반면 축구 한중전 응원 클릭 수는 다음이 네이버보다 3배 이상 많았다. 누군가 매크로 프로그램(특정 작업을 반복하는 소프트웨어)을 통해 대량으로 클릭을 했을 것이라는 의구심이 들 만하다. 로그인을 해야 응원에 참여할 수 있는 네이버와 달리 다음은 누구나 횟수에 제한 없이 클릭을 할 수 있어서 조작에 취약하다는 측면도 있다. 결국 다음은 “클릭 응원 숫자가 과도하게 부풀려질 수 있다”며 이 서비스를 잠정 중단했다. ▷문제는 누가 이런 일을 벌였느냐다. 여권과 일부 누리꾼은 중국을 배후로 지목하고 나섰다. 중국 정부는 그동안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등을 이용해 친중국 메시지를 전파하고 외국의 선거에 개입하고 있다는 의심을 받아온 터다. 2020년 한국 총선 때에도 중국 측이 온라인에서 보수진영에 불리한 여론을 조성했다는 ‘차이나 게이트’ 의혹이 불거진 적이 있다. 여당에선 해외에서 접속하는 이용자들은 댓글에 국적을 표기하도록 하는 방안까지 제시하고 있다. ▷하지만 현재로서는 다음 클릭 응원에 중국이 개입했다는 근거가 없다. 일각에선 한국 누리꾼이 장난으로 한 짓이라는 주장도 나온다. 이번 사건을 의아하게 여기는 이들이 많고, 정치권으로까지 논쟁이 번진 만큼 유야무야 넘길 수는 없어 보인다. 다음이 적극적으로 나서서 이번 일의 원인을 규명하는 것이 급선무다. ‘차이나 게이트’의 증거가 될 사안인지, 아니면 해프닝으로 끝날 일인지는 그다음에 따져봐도 늦지 않겠다. 장택동 논설위원 will71@donga.com}

    • 2023-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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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장택동]70년 된 작량감경, 손볼 때 됐다

    ‘형량이 적절하냐’는 비판이 제기되는 것은 형사재판을 담당하는 판사들로서는 피하기 어려운 숙명 같은 일이다. 이균용 대법원장 후보자 역시 예외가 아니다. 일부 언론은 이 후보자가 과거 성범죄 항소심 재판에서 ‘교화의 여지가 있는 젊은 나이’라는 등의 이유로 형을 낮춰준 것은 부적절하다고 지적한다. 이에 이 후보자 측은 “신중하게 양형요소를 검토한 결과일 뿐이지 1심보다 높은 형량을 선고한 사건도 많다”고 반박하고 있다. 양형 과정은 복잡하고 정해진 답도 없다. 판사는 법에 정해진 형량에 수많은 양형요소를 따져 형을 가중하거나 감경하면서 선고형의 범위를 정해나간다. 기본적으로 형법에는 경합범, 누범 등은 형량을 높이고 심신장애, 종범(從犯) 등은 낮출 수 있다고 돼 있다. 이 요소들을 양형에 얼마나 반영할지는 판사가 정한다. 이게 끝이 아니다. 판사는 ‘범죄의 정상에 참작할 만한 사유가 있는 경우’ 형량을 절반까지 추가로 줄여줄 수 있다. 이 조항은 1953년 형법 제정 당시부터 작량감경(酌量減輕)이라는 이름으로 존재했고, 2020년 ‘정상참작감경’으로 명칭만 바뀌었을 뿐 내용은 그대로다. 그런데 ‘참작할 사유’가 뭔지, 어느 정도까지 형을 줄여줄 수 있는지는 법에 언급돼 있지 않다. 판사의 재량에 맡겨져 있는 만큼 판사들 간에 편차가 발생할 소지도 크다. 특히 문제가 되는 것이 ‘진지한 반성’이다. 파렴치범도 반성한다는 이유로 형을 깎아주는 일이 흔한 게 현실이다. 성범죄 피고인의 약 70%가 잘못을 뉘우쳤다는 이유로 형량이 낮아졌다. 아동학대로 집행유예를 받은 사례 중 62%가 진지한 반성을 이유로 감형됐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진정성을 입증하기 어려운 반성을 이유로 감형을 받는 사례가 잦다 보니 피해자는 비분강개하고, 반성문 대필 시장은 성행하고 있다. 피해자가 처벌을 원치 않는다거나 형사처벌 전력이 없다는 것도 자주 등장하는 작량감경 사유다. 피고인이 ‘잔인하고 포악한 본성이라고 보기 어렵다’고 해서 형을 낮춰준 사례도 있었다. 이런 이유들이 감형에 얼마나 영향을 미쳤는지도 판결문에 적혀 있지 않다. 그렇다 보니 항간에서는 전관 변호사를 선임하면 작량감경을 받느니, 판사에게 밉보여 형량이 높아졌느니 하는 이야기까지 나오게 된다. 판사는 ‘양심’에 따라 판결한다는 헌법상 권리는 존중돼야 한다. 잇따른 특별법 제정으로 범죄의 형량이 높아지는 추세에서 작량감경이 처벌의 형평성을 맞추는 데 긍정적 역할을 한다는 평가도 나온다. 그렇더라도 한 사람의 인생을 좌우할 수 있는 형량을 정하는 데 자의적 판단이 개입할 여지는 최소화하는 것이 죄형법정주의 원칙에 부합한다고 본다. ‘진지한 반성’ 등은 대법원 양형기준에 감경요소로 제시된 것들이므로 별문제 없다는 의견도 있다. 하지만 양형기준은 법원이 내부적으로 정한 참고 사항일 뿐이다. 감형 사유를 법률에 구체적으로 명시해 법적 근거를 갖추도록 하는 것이 양형 논란을 줄이는 한 방법일 것이다. 작량감경 도입 이후 70년이 흐르는 동안 공정성에 대한 국민의 요구는 훨씬 높아졌고, 이는 양형에도 적용된다. 2020년 한 여론조사에서 ‘법원에서 선고하는 형벌에 일관성이 있다고 생각하는지’를 묻는 질문에 ‘그렇다’는 답변이 10%, ‘그렇지 않다’는 응답이 86%였다. 양형에 대한 여론이 이 정도로 부정적이라는 점은 사법부가 무겁게 받아들여야 한다. 지나치게 틀에 얽매이지 않으면서도 객관성을 담보할 양형제도를 만드는 일은 고난도의 작업이다. 이 분야에 전문성을 갖춘 사법부가 주도적으로 고민하고 해법을 내놔야 할 것이다.장택동 논설위원 will71@donga.com}

    • 2023-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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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장택동]광화문광장 2.5배 넓이에 CCTV 1대… ‘치안 사각’ 도시공원

    엄마와 함께 서울 올림픽공원 내 키즈카페에 놀러 간 다섯 살 아이는 엄마가 다른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는 새 밖으로 나간 뒤 돌아오지 않았다. 신고를 받은 경찰은 100명이 넘는 인력을 동원해 수색에 나섰지만 카페 근처에 폐쇄회로(CC)TV가 없어 어려움을 겪었다. 아이는 다음 날 인근 호수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CCTV가 있었다면 아이의 행방을 빨리 파악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여론이 들끓었다. 2016년 9월 벌어진 안타까운 일이다. ▷이 사건 이후 국회는 도시공원 내 범죄나 안전사고 우려가 있는 지점에 CCTV 설치를 의무화하도록 도시공원법을 개정했다. 그런데 시행령이나 규칙에 설치 간격이나 장소 등 구체적인 기준이 없고, 설치하지 않았을 때 벌칙 조항도 없다. 유명무실한 법조문이 돼 버린 것이다. 이렇다 보니 최근 여교사 폭행 살인 사건이 발생한 관악산생태공원은 축구장 10개 넓이에 CCTV가 7대뿐이고, 인근 독산자연공원에는 광화문광장 2.5배 면적에 1대만 있다. CCTV를 설치했다는 시늉만 낸 수준이다. ▷범죄는 범인의 성향, 처벌의 강도, 범행 장소의 환경 등 다양한 요소에 영향을 받는다. 이 중 환경 개선에 초점을 맞춰 범죄를 억제하는 기법을 ‘범죄예방 환경설계(CPTED)’라고 부른다. CCTV 설치는 범행 의지를 꺾는 환경을 조성한다는 점에서 CPTED의 중요한 요소다. 실제로 경찰청이 분석해보니 CCTV가 있는 곳 근처에서는 야간에 강도 절도 등 5대 범죄가 11% 정도 감소했다. 이번 사건 범인도 “CCTV가 없는 걸 알고 범행을 저질렀다”고 했다. CCTV가 더 촘촘하게 설치돼 있었다면 범행을 포기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CCTV를 늘리는 것에 반대하는 목소리도 있다. 중국 정부는 5억 대의 CCTV를 통해 주민의 목소리와 홍채 등 생체 정보까지 광범위하게 수집한다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이처럼 악용된다면 시민의 일거수일투족이 감시받는 ‘빅 브러더’ 사회가 현실화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일각에선 범죄자들이 CCTV가 있는 장소를 피해 다른 곳에서 범행을 저지르는 ‘풍선효과’가 나타날 뿐 전체 범죄 감소에는 큰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런 우려들을 감안하더라도 최소한 도시공원처럼 치안 확보가 필수적인 곳에 CCTV를 확대하는 것은 불가피해 보인다. 지난해 한국소비자원의 설문조사에서도 응답자의 77%가 ‘도시공원에 CCTV를 추가 설치해야 한다’고 답했다. 흉악범죄가 일어난 뒤에야 늘리겠다고 부산을 떨 게 아니라 법률이나 시행령을 고쳐 근본적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다. 일상에 지친 시민들이 안전하게 쉬어야 할 공원이 불안과 공포의 공간으로 바뀌는 일은 막아야겠다.장택동 논설위원 will71@donga.com}

    • 2023-0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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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장택동]“‘50억 클럽 특검’ 제기되자 망치로 휴대전화 부쉈다”

    “특별수사의 출발점이 뭐냐. 바로 ‘휴대전화를 찾으라’는 거다.” 2017년 3월 당시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을 수사하던 박영수 특별검사가 기자간담회에서 한 말이다. 25년간 검사로 일한 박 전 특검은 휴대전화가 ‘물증의 보고(寶庫)’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실제로 정호성 전 대통령부속비서관의 휴대전화에서 발견된 녹음파일 등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 세월이 흘러 ‘50억 클럽’ 의혹 사건의 피의자로 처지가 바뀐 박 전 특검에게는 자신의 휴대전화가 큰 골칫거리였을 것이다. ▷이제 휴대전화는 ‘나보다 나를 더 잘 아는’ 존재가 됐다. 스마트폰에 내장된 위성위치확인시스템(GPS)은 내가 언제 어디에 있었는지를 정확하게 기록한다. 누구와 얼마나 자주 통화했는지, 문자메시지나 소셜미디어(SNS)로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 뭘 검색하고 어떤 분야에 관심을 갖고 있는지도 휴대전화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이렇다 보니 휴대전화 분석이 수사의 핵심 과정이 됐다. 경찰이 휴대전화를 증거 분석한 건수가 2011년 3300여 건에서 2021년에는 5만8000여 건으로 폭증했을 정도다. ▷이를 잘 알고 있는 검사 출신들이 자신이 수사 대상이 됐을 때 휴대전화를 빼앗기지 않으려 한 사례는 많다. 우병우 전 대통령민정수석은 국정농단 사건에 대한 검찰 수사가 본격화되기 전 휴대전화를 바꿨다. ‘라임 전주’ 김봉현 씨에게 술접대를 받은 혐의로 수사를 받던 검사와 검찰 출신 변호사도 압수수색 전 휴대전화를 교체했다. 2020년에는 당시 수사 대상에 오른 한동훈 검사장의 휴대전화를 압수하는 과정에서 수사 검사와 한 검사장 간에 몸싸움이 벌어지기도 했다. ▷검찰이 최근 대장동 업자들에게 200억 원을 약속받은 혐의 등으로 박 전 특검에 대해 구속영장을 재청구하면서 그가 올해 ‘2월 16일경’ 망치로 휴대전화를 부쉈다는 내용을 적시했다고 한다. 공교롭게도 당시 더불어민주당 박홍근 원내대표가 본격적으로 “50억 클럽 특검이 불가피하다”고 주장한 날이다. 강이나 바다에 던진 것도 아니고 망치로 부쉈다는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망치 훼손’이 사실이라면 박 전 특검이 다급하게 움직인 걸로 볼 수도 있는 대목이다. ▷휴대전화를 압수당해 본 사람들은 ‘영혼을 털린 것’이라고 말한다. 법원은 휴대전화 압수수색영장에 검색어와 검색 대상 기간을 적도록 해 남용을 막는 방안을 추진 중이지만 검찰이 반대하고 있다. 수사 방식을 속속들이 알고 있어 검사 출신들이 휴대전화 압수에 더 민감해하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증거 인멸은 공정한 수사와 재판을 방해한다. 특검을 지낸 고위직 출신 법조인까지 망치로 휴대전화를 폐기했다는 영장 내용에 황당해하는 일반인이 많을 것 같다. 장택동 논설위원 will71@donga.com}

    • 2023-0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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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장택동]‘자율주행차라도 안전 지킬 책임은 운전자에게 있다’

    ‘저것은 차량인가, 자전거인가, 아니면 또 다른 존재인가.’ 깜깜한 도로에서 자전거를 끌고 길을 건너는 여성을 발견한 우버의 자율주행차 시스템은 ‘멘붕’에 빠졌다. 정체를 파악해야 어떻게 대응할지 정할 수 있는데, ‘자전거를 끌고 무단 횡단하는 사람’은 시스템의 예상 범위 내에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차량이 제때 멈추지 못해 이 여성은 차에 치여 목숨을 잃었다. 2018년 3월 18일 밤 미국 애리조나주 템피에서 발생한 이 사고는 자율주행차에 의한 교통사고로 보행자가 희생된 첫 사례로 기록됐다. ▷“2017년 말까지 로스앤젤레스(LA)에서 뉴욕까지 완전히 자율로 주행하는 차량을 완성할 것이다.” 2016년 10월 일론 머스크 테슬라 최고경영자(CEO)의 호언장담처럼 자율주행차는 곧 현실로 다가올 미래로 여겨졌다. 기대가 커지면서 2010년대 들어 메르세데스벤츠, 포드, 폭스바겐, 혼다 등 내로라하는 자동차 업체는 물론이고 구글, 인텔 같은 정보기술(IT) 기업들도 자율자동차 개발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한국의 현대자동차·기아도 자율자동차 개발 대열에 합류했다. ▷하지만 완전 자율주행차 시대가 오려면 아직 갈 길이 멀다. 자율주행 기술 단계는 레벨 0∼5까지 총 6단계로 나뉘는데, 위험 상황에서도 시스템 스스로 대처하는 레벨 4 수준 이상의 차량을 상용화한 업체는 없다. 비상시에만 운전자가 운전대를 잡는 레벨 3 수준에 도달한 기업도 메르세데스벤츠, 혼다, 볼보뿐이다. 예상만큼 성과가 나오지 않자 포드 등은 자율주행차에 대한 투자를 축소하면서 기대수준을 낮추는 분위기다. ▷기술적 문제도 있지만 자율주행차가 교통사고를 냈을 경우 누구에게 법적 책임을 물어야 할지도 난제다. 미국 법원은 2018년 우버의 첫 자율주행차 사망사고와 관련해 최근 당시 시험차량 운전자에 대해 과실치사 혐의로 보호관찰 3년의 유죄를 선고했다. 비상 상황에 대처해야 할 운전자가 스마트폰으로 TV를 보느라 주의 의무를 게을리했다는 이유에서다. 미 교통당국은 시스템이 보행자를 감지하지 못하는 등 우버 측의 책임도 있다고 지적했지만 애리조나주 검찰은 ‘형사책임을 물을 수 있는 법적 근거가 없다’며 우버를 기소하지는 않았다. ▷이번 판결로 자율주행차 사고에 대한 책임 논란이 일단락됐다고 보긴 힘들다. 자율주행 기술의 수준에 따라 교통사고 시 운전자나 차주, 제조사 간에 법적 윤리적 책임의 적정선을 놓고 논쟁이 이어질 공산이 크다. 다만 자율주행 기술의 완전성이 입증되기 전까진 운전자의 책임이 ‘0’이 되기는 어려워 보인다. 운전대에서 완전히 손을 놓아도 되는 세상에 대한 기대는 잠시 뒤로 미루고, 어떤 차를 운전하든 최선의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현명할 듯하다. 장택동 논설위원 will71@donga.com}

    • 2023-0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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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장택동]경찰-지자체공무원 몸싸움… 처음 보는 ‘공권력 亂場’

    집회나 시위 현장에서 경찰과 지방자치단체는 ‘원팀’처럼 움직일 때가 많다. 집회 주최 측에서 허가받지 않은 시설물을 설치하려고 하면 지자체 소속 공무원들이 철거에 나서고, 경찰이 도와주는 식이다. 그 과정에서 집회 참가자와 경찰·공무원이 충돌하기도 한다. 그런데 17일 대구퀴어문화축제 현장에서는 전례 없는 광경이 펄쳐졌다. 도로 한복판에서 경찰과 지자체 공무원들 간에 집단 몸싸움이 벌어진 것이다. ▷이날 오전 7시경부터 대구 중구 반월당 네거리 대중교통전용지구에 약 500명의 시청·구청 소속 공무원들이 모여들었다. 퀴어축제 무대 설치를 막기 위해서다. 오전 9시 반경 행사 장비를 실은 트럭이 현장에 도착하자 공무원들이 가로막았다. 이에 경찰은 “밀어”라며 공무원들 해산에 나섰고, 공무원들은 “막아”라고 소리치며 버텼다. 행사 관계자들은 “경찰 파이팅”을 외쳤고, 반면 주변의 일부 상인들은 공무원을 응원했다. 40여 분간 이어진 난장판 끝에 대구시 측이 철수하면서 상황은 일단락됐다. ▷대구시와 경찰 간에 갈등이 빚어진 것은 집회 주최 측이 주변 도로까지 사용할 수 있느냐를 놓고 의견이 갈렸기 때문이다. 도로법상 도로점용 허가권은 대구시에 있고, 통행 및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도로의 적치물을 치울 수 있다는 게 대구시의 입장이다. 시민의 통행을 보장하기 위해 행사 트럭 진입을 막으려 했다는 취지다. 반면 경찰은 집회의 자유는 헌법상 권리이고, 합법적 집회에선 별도로 허가를 받지 않아도 주변 도로 이용이 가능하다고 판단했다. 한 전문가는 “집회의 자유와 통행권이 부딪히는 지점인데, 법원 판례는 집회의 자유를 우선시하는 경향이 있다”고 설명했다. ▷이번 행사는 오래전부터 예정돼 있었고 상인 등이 낸 집회금지 가처분 신청도 법원이 15일 기각했다. 시간적 여유가 있었던 만큼 기관 간에 이견이 있다면 밤샘 토론을 해서라도 조용히 해결했어야 했다. 그런데 사전 조율을 못 한 채 시민들 앞에서 볼썽사나운 모습을 보인 것이다. 충돌 이후에도 두 기관은 서로를 비난하기에 바쁘다. 홍준표 대구시장은 “대구경찰청장에게 책임을 묻겠다”며 목소리를 높였고, 대구경찰청 측은 “누구보다 법을 잘 아는 분이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고 홍 시장을 비판했다. ▷시민들의 시각에선 경찰과 대구시 모두 막강한 공권력을 가진 기관들이다. 양측이 서로 다른 방식으로 공권력을 행사한다면 시민들로서는 어느 쪽을 따라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다. 질서를 유지하고 시민을 보호해야 할 공권력이 오히려 질서를 어지럽히고 시민을 혼란스럽게 만들어서야 되겠나. 경찰과 대구시는 “어리둥절하다” “무슨 코미디냐”는 시민들의 질책을 아프게 새겨들어야 한다. 장택동 논설위원 will71@donga.com}

    • 2023-0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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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제 사문화돼야 할 국회의원 불체포특권[오늘과 내일/장택동]

    “‘지위가 아무리 높은 사람이라도 법은 그 위에 있다’는 법언이 있다. 그런데 불체포특권이 있으면 ‘당신이 의원이라면 법이 건드리지 못한다’로 바뀌게 된다.” 국제적 헌법 자문기구인 베니스위원회가 2014년 채택한 보고서 내용이다. 불체포특권은 ‘법 앞의 평등’ 원칙을 훼손할 뿐 아니라 범죄를 저지른 의원에게 피신처를 제공하고, 국회와 정치에 대한 국민의 신뢰를 약화시키는 등 부작용이 많다고 분석했다. 한국의 현실에 꼭 들어맞는 지적이다. 의원 불체포특권을 인정하는 국가는 많지만 이를 놓고 한국처럼 논란이 거세게 벌어지는 나라는 드물다. 체포동의안이 국회에 넘어올 때마다 여야 또는 계파 사이에서 정쟁이 벌어지고, 체포를 막기 위해 ‘방탄 국회’가 열린 것도 여러 차례다. 12일 ‘전당대회 돈봉투 사건’의 윤관석, 이성만 의원에 대한 체포동의안 표결을 전후해 정치권에는 또 한바탕 격랑이 일 것이다. 나라마다 불체포특권을 운용하는 방식에는 차이가 있다. 미국은 헌법에서 ‘반역죄, 중죄, 치안위반죄’를 불체포특권의 예외로 뒀지만, 이 세 가지 혐의가 모든 범죄를 포괄한다는 대법원의 해석에 따라 불체포특권이 실질적으론 작동하지 않는다. 일본 헌법은 의원의 불체포특권을 인정하되 법률이 정하는 경우 제한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뒀다. 반면 한국에서는 회기 중에 의원을 구속하려면 범죄의 종류나 경중과 관련 없이 먼저 체포동의안이 가결돼야 한다. 한국에서 체포동의안이 국회를 통과하는 경우도 많지 않다. 지금까지 국회에 요청된 체포동의안은 총 68건인데 이 중 17건만 통과됐다. 체포동의안 가결률이 일본은 90%, 독일은 92%에 이르는 것과 대비된다. ‘한국 검찰이 무리하게 구속영장을 청구했기 때문 아닐까’라는 의심을 해볼 수 있다. 하지만 1989년 이후 부패 범죄로 유죄가 확정된 국회의원 25명 가운데 체포동의안이 가결된 사례는 3건에 불과했다. 나머지 22명은 범죄 혐의가 뚜렷해서 영장을 청구했는데도 국회의 문턱을 넘지 못했다는 의미다. 의원들이 법리, 증거와 무관하게 정치적·감정적으로 투표를 하기 때문에 이런 결과가 나왔을 것이다. 1948년 제헌헌법부터 의원에게 불체포특권을 보장하고 있는 것은 정부가 국회를 탄압해 국회의 기능이 침해되는 일을 막기 위해서였다. 민주화 이전에는 의원을 보호할 법적 장치가 필요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지금의 불체포특권은 본래의 취지와는 거리가 먼 방식으로 운용되고 있고, 사법 절차에 정치적 판단을 개입시키는 역효과를 낳고 있다. 그래서 불체포특권을 폐지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적지 않다. 올해 2월 갤럽의 조사에서 불체포특권 폐지에 찬성(57%)한 응답자가 반대(27%)보다 두 배 이상 많았다. 하지만 상당수의 전문가들은 불체포특권의 폐해를 인정하면서도 폐지는 신중히 해야 한다고 말한다. 독재정권 출현 등 만일의 상황을 대비해서라도 최소한의 안전장치는 남겨둬야 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이런 차원에서 불체포특권을 유지해야 한다면 정상적으로 헌법 질서가 유지되는 상황에서는 사실상 사문화되는 수준으로 사용이 제한돼야 한다. 이는 국회법 개정으로 어느 정도 가능하다. 무기명으로 이뤄지는 체포동의안 투표를 기명으로 바꿔 각 의원이 투표에 대한 정치적 책임을 지도록 하고, 국회 보고 이후 일정 기간 내에 표결이 이뤄지지 않으면 가결로 간주하는 방안 등이 거론되고 있다. 법률 개정의 열쇠를 쥐고 있는 국회가 자신의 특권을 버리거나 줄일지는 의문이다. 여론이 강력하게 압박해야 국회가 움직일 것이다. 이해관계나 동료 의식을 핑계로 체포동의안에 반대표를 던지는 것을 의원 스스로 부끄럽게 여기도록 정치 문화도 달라져야 한다. 유권자가 이를 감시하고 심판해야 불체포특권 남용을 근절할 수 있을 것이다.장택동 논설위원 will71@donga.com}

    • 2023-0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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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빚 깎아 줄 테니 갈라파고스 살리라”[횡설수설/장택동]

    갈라파고스 제도에서 200만 년 전부터 살아온 10여 종(種)의 핀치새는 종에 따라 먹이가 다르고 부리 모양도 다르다. 찰스 다윈이 이를 보면서 진화론의 영감을 얻었다고 해서 ‘다윈의 핀치’라고 불린다. 그런데 핀치들 가운데 ‘맹그로브 핀치’라는 종이 멸종 위기를 맞았다. 지구온난화로 갈라파고스가 따뜻하고 습해지면서 늘어난 흡혈 파리가 맹그로브 핀치의 새끼를 집중적으로 공격한 것이 주원인이다. ▷남미 에콰도르에서 서쪽으로 약 1000km 떨어진 갈라파고스 제도는 약 9000종의 동물이 살고 있는 생물다양성의 보고(寶庫)다. 수백만 년 동안 대륙과 단절돼 있었고 대형 육식동물이 없어 독자적으로 진화한 고유종이 많다. 하지만 갈라파고스의 상징인 자이언트거북, 바다이구아나 등의 개체 수가 근래 급감하고 있다. 바다에서도 갈라파고스 담셀이라고 불리는 작은 어류가 멸종되는 등 생태계 전체가 위기를 맞고 있다. ▷바닷물 온도가 높아지는 엘니뇨 현상이 잦아지고 있는 것이 갈라파고스의 동물들에게는 재앙이나 마찬가지다. 지구온난화로 강한 엘니뇨가 발생하면 플랑크톤이 줄면서 먹이사슬이 붕괴되기 때문이다. 1982년 발생한 갈라파고스 펭귄의 대량 폐사도 엘니뇨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인간에 의한 환경 파괴도 갈라파고스를 위협한다. 지난해에만 28만 명의 관광객이 이곳을 방문했고 3만여 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이들이 버린 쓰레기와 선박에서 유출되는 기름이 육지와 바다를 오염시킨다. ▷9일 크레디트스위스와 에콰도르 정부는 ‘자연보호-부채 교환(debt-for-nature swap)’ 계약을 체결했다. 16억 달러 규모의 에콰도르 국채를 6억5600만 달러 상당의 환경채권으로 바꾸는 방식이다. 이 과정에 미국국제개발금융공사(USIDFC), 미주개발은행(IDB) 등 기관들이 참여해 채권자의 부담을 분산한다. 에콰도르로서는 원금과 이자를 합쳐 약 11억 달러의 부채가 줄어드는 효과가 있다. 그 대신 앞으로 18년 동안 3억2300만 달러를 갈라파고스 환경 보전에 투입해야 한다. 이로써 갈라파고스 환경 파괴를 막을 최소한의 재원은 마련됐지만 이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다양한 생물이 사는 저개발 남반구 국가들은 대부분 서방국의 식민지배를 받은 경험이 있다. 독립 이후에도 정치가 불안하고 경제는 낙후해 환경에 관심을 가질 여력이 없는 만큼 선진국의 지원이 절실하다. 에콰도르의 경우 전 세계 온실가스 배출량의 0.1%만 배출했지만 지구온난화의 피해는 고스란히 입고 있는 게 현실이다. 생태계가 무너지면 개도국뿐 아니라 연쇄적으로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가 타격을 입는다. 개발의 혜택을 누려온 선진국들이 그에 걸맞은 책임을 져야 할 시간이 됐다.장택동 논설위원 will71@donga.com}

    • 2023-0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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