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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마무리된 현대자동차 노사의 임금 및 단체협약에는 눈길 끄는 대목이 여럿 있다. 우선 하투(夏鬪)의 상징이던 현대차 임단협이 6년 연속 파업 없이 타결됐다. 1987년 노조 창립 이후 역대 최장 무파업 기록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남다르다. 사상 최대 실적을 기반으로 임금 인상도 역대급이다. 노조가 추산한 임금 상승 폭은 성과급을 포함해 1인당 평균 5000만 원에 달한다.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현대차 대졸 신입사원 초봉이 9400만 원을 넘게 됐다는 글이 올라와 MZ세대 직장인들의 부러움을 사고 있다.“신입 월급 받고 62세까지 근무” 중장년층의 이목을 사로잡은 건 정년 퇴직자의 재고용을 확대한 부분이다. 현대차는 만 60세 정년 이후에도 생산직 근로자가 원할 경우 1년 더 계약직으로 일하는 ‘숙련 재고용’ 제도를 시행하고 있는데, 이 기간을 2년으로 늘리기로 한 것이다. 연봉은 신입 초봉 수준으로 줄지만 사실상 만 62세로 정년이 연장되는 효과가 있는 셈이다. 이는 현대차 노조 조합원 절반이 50세가 넘고, 해마다 2000명 이상이 정년퇴직하는 상황에서 노사가 찾은 절충안이다. 회사로서는 상대적으로 적은 인건비로 숙련 근로자를 활용할 수 있고, 근로자는 퇴직 후 맞닥뜨리는 소득 공백을 피할 수 있어서다. 현대차의 재고용 방식은 저출산·고령화로 인한 노동력 부족 문제를 해소할 대안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기대를 모은다. 65세 이상 고령인구는 올해 처음 1000만 명을 돌파해 초고령사회 진입을 목전에 뒀다. 세계 최악의 합계출산율을 정부 목표대로 1명으로 끌어올려도 2070년이면 생산가능인구가 반 토막 난다는 암울한 전망도 나왔다. 현대차처럼 정년이 지난 근로자를 재고용해 생산 인력으로 활용한다면 노동인구의 급격한 추락은 막을 수 있다는 얘기다.일본처럼 고령자 고용 방식 선택권 줘야 초고령사회를 먼저 경험한 일본은 고령 근로자 활용을 일찌감치 제도화했다. 일본의 법정 정년은 60세로 한국과 같지만, 일본 근로자들은 원하면 65세까지 맘껏 일할 수 있다. 기업이 65세까지 ‘정년 연장’, ‘정년 폐지’, ‘재고용을 통한 계속고용’ 중 하나를 선택하도록 의무화했기 때문이다. 이어 2021년부터는 70세까지 고용하도록 기업에 ‘노력할 의무’를 뒀다. 강제는 아니지만 70세까지 고용할 것을 권고한 셈이다. 이에 따라 상시근로자 21인 이상인 일본 기업의 99%가 65세까지 근로자를 고용하고 있다. 특히 70% 이상은 세 가지 옵션 중 계속고용을 통해 일할 의지가 있는 고령 인력을 쓰고 있다. 아직 호봉제가 남아 있는 일본 기업 상당수가 인건비 부담이 큰 정년 연장보다는 현대차 식의 계속고용을 택한 것이다. 도요타자동차는 다음 달부터 모든 직종에서 70세까지 재고용을 확대하기로 했는데, 일찌감치 호봉제를 폐지하고 매달 성과를 평가해 월급에 반영하는 임금 체계로 개편했기에 가능한 일이다. 한국도 60세 넘어 계속 일할 수 있도록 정년 제도를 정비해야 한다는 데 이견이 없어 보인다. 2차 베이비붐 세대 945만 명의 은퇴 쓰나미가 올해부터 몰려드는 상황에서 더 미룰 시간이 없다. 다만 지금의 호봉제를 유지한 채 노동계의 주장대로 무작정 정년을 연장하면 임금 부담이 늘어난 기업들이 청년 채용을 줄여 세대 간 갈등을 키울 우려가 크다. 현재의 이중적 노동구조에서 정년 연장의 혜택이 대기업 정규직에만 쏠릴 수도 있다. 이미 인력난에 허덕이는 중소 제조업체는 정년이 유명무실해진 지 오래다. 현대차의 계속고용 실험이 산업계 전반으로 확산될 수 있도록 판을 깔아주는 것이 정부와 국회가 할 일이다. 정임수 논설위원 imsoo@donga.com}

지난달 21일 자영업자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배민1플러스’의 주문을 껐다는 인증샷이 잇따라 올라왔다. 자영업자 300여 명이 뭉쳐서 하루만이라도 배민1을 쓰지 않겠다고 단체행동을 결의했더니, 적잖은 음식점 사장들이 동참한 것이다. 이들이 문제 삼은 배민1은 국내 1위 배달앱 ‘배달의민족’이 올해 초 도입한 새 요금제다. 그동안 음식점들은 주문 수와 상관없이 매달 8만8000원만 내면 되는 요금제를 주로 이용해 왔는데, 주문 한 건당 음식값의 6.8%를 중개수수료로 떼 가겠다고 했다. ▷새 요금제가 강제는 아니라고 했지만 손님들이 많이 찾는 ‘무료 배달’ 가게가 되려면 음식점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이를 선택할 수밖에 없는 처지다. 배달 수수료가 배달앱의 고질적 문제였지만 이제는 팔면 팔수록 손해가 나는 구조가 굳어진 셈이다. 그런데 가뜩이나 부담이 되는 중개수수료를 배민이 다음 달부터 9.8%로 올리겠다고 한다. 그러면서 음식점이 부담하는 배달비를 건당 100∼900원 낮추겠다는 당근책을 제시했다. ▷하지만 자영업자 여론은 들끓고 있다. 선심 쓰듯 배달비 몇백 원 내리는 것보다 수수료 부담이 훨씬 더 크다는 것이다. 앞으로 서울에서 2만 원짜리 치킨을 팔면 2000원에 가까운 중개수수료에 배달비, 카드 수수료, 부가세 등을 더해 6000원 정도가 빠져 나간다. 인건비, 재료비 등을 빼면 남는 게 없다는 자영업자들의 하소연이 괜한 엄살이 아니다. 전국가맹점주협의회는 11일 성명을 내고 “중개수수료를 6.8%에서 9.8%로 44% 인상하는 것은 자영업자의 절박한 호소를 매몰차게 외면한 비정한 행위”라고 했다. ▷최저임금 등의 가파른 상승과 구인난, 고금리로 외식업체들의 어려움은 말로 다할 수 없는 지경이다. 자영업자들의 대출연체율이 크게 치솟고 있는데, 외식업은 그 대표적인 업종 중 하나로 꼽힌다. 배민은 최근 한 달 새 수수료 인상 외에도 무료 서비스들을 잇달아 유료화하는 방침을 내놨다. 그러다 보니 배민의 모기업 독일 딜리버리히어로(DH)가 유럽연합의 반독점법을 위반해 4억 유로의 과징금을 낼 상황에 처했는데, 배민을 통해 자금을 확보하려 한다는 해석까지 나오는 실정이다. ▷자영업자들은 치솟는 수수료 부담에도 배달앱 시장의 65%를 장악한 배민을 떠나지 못하고 있다. 정부가 최근 내놓은 소상공인 지원 대책에 음식점 등 영세 자영업자에게 배달비를 직접 지원한다는 방안이 담겼지만, ‘갑질 횡포’라 불리는 배달앱의 구조적 문제를 손보지 않고서는 세금으로 배달 플랫폼의 배만 불리는 꼴이 될 수 있다. 자영업자들이 나서서 ‘공정한 플랫폼을 위한 전국 사장님 모임’을 만드는 현실이 서글프다. 정임수 논설위원 imsoo@donga.com}

직장인들의 로망이 ‘굵고 짧게’에서 ‘가늘고 길게’로 바뀐 계기는 1997년 외환위기다. 외환위기 이후 조기 퇴직이 일상화됐지만 개인의 노후 준비나 사회 안전망은 이를 쫓아가지 못하면서다. 20년이 더 흘러 워라밸을 챙기는 2030세대의 등장으로 ‘임포자’(임원 포기자), ‘승포자’(승진 포기자) 같은 신조어가 쏟아졌다. 일찍 임원 달고 일찍 집에 가느니 ‘만년 부장’, ‘만년 과장’으로 장수하겠다는 직장인이 늘어난 것이다. 호봉·직급 체계가 엄격한 공무원 사회나 금융권에선 실제 승진 발령을 거절한 사례가 나왔다. ▷대기업 노사의 임금협상 테이블에 ‘승진 거부권’을 처음 올린 건 현대자동차 노조다. 2016년 임협에서 일반·연구직 직원들에게 과장 승진을 거부할 권리를 달라고 요구했다. 과장이 되면 노조를 탈퇴해야 하고 성과연봉제도 적용받는데, 인사고과 압박과 고용 불안에 시달리는 관리자가 되느니 노조 울타리 안에서 정년을 보장받겠다는 취지였다. 그해 현대중공업 노조도 승진 거부권을 요구하면서 두 회사 노조는 동맹 파업을 강행했다. ▷사측이 인사권 침해라며 거절했던 승진 거부권을 현대중공업 노조가 올해 임단협에서 재차 요구하고 나섰다. 8년 전에는 승진 거부 요구가 월권이다, 기상천외하다는 비판 일색이었지만 지금은 뜬금없지만은 않다는 반응이 나오고 있다. 승진·출세보다는 워라밸과 안정을 선호하는 MZ세대와 준비 안 된 노후 공포에 시달리는 중장년층 직장인에게 어필할 수 있는 이슈라는 얘기다. ▷대기업 노조들이 올해 임단협에서 일제히 ‘정년 연장’을 꺼내든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현대차·기아 노조를 비롯해 HD현대그룹 조선 3사, LG유플러스 노조 등이 60세 정년을 64세나 65세로 올리자고 요구하고 있다. 법정 정년은 2013년 60세로 연장된 뒤 변함없는데, 국민연금을 받는 나이는 지난해 63세에서 2028년 64세, 2033년 65세로 계속 늦춰지면서 ‘소득 절벽’이 길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다 보니 노동시장에서 퇴장하는 실질 은퇴 나이는 72.3세일 정도로 수많은 고령층이 정년 이후에도 일자리 주변을 맴돌고 있다. ▷우리보다 먼저 초고령사회로 진입한 일본은 수십 년에 걸쳐 정년을 높인 데 이어 기업들이 65세까지 ‘정년 연장’, ‘재고용을 통한 계속 고용’ ‘정년 폐지’ 중 하나를 택하도록 의무화했다. 비슷한 길을 뒤따라 걷는 한국이 참고할 만한 대안이다. 다만 노동계 주장대로 무작정 정년을 연장하면 기업 부담이 커지고 청년 일자리를 빼앗는다는 논란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인구 소멸 걱정이 없던 때에 굳어진 호봉제 중심의 임금 체계, 노동시장 경직성, 법적 노인 연령 등을 함께 풀어야 정년 연장도, 일손 부족도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정임수 논설위원 imsoo@donga.com}

아파트 사전청약의 원조는 보금자리주택 사전예약이다. 이명박 정부가 2009년 수도권 그린벨트를 풀어 ‘반값 아파트’를 공급하면서 처음 도입했다. 통상 아파트 착공 즈음에 하는 청약보다 2, 3년 앞당겨 입주자를 모집하는 것으로, 당첨자는 본청약 때 먼저 계약할 기회를 갖는다. 하지만 사전예약 이후 본청약까지 평균 4년, 최장 8년이 걸리면서 보금자리주택 사전 당첨자 중 실제 입주한 사람은 40%에 그쳤다. 무주택자들의 내 집 마련 불안감을 덜어주겠다며 시행된 제도는 얼마 안 가 폐지됐다.▷사실상 용도 폐기된 카드를 다시 꺼내든 건 문재인 정부다. 전방위 규제에도 부동산 과열이 계속되자 주택 공급 시그널을 보내 집값을 잡겠다며 2021년 이를 부활시켰다. 당시 정부는 “사전청약에서 본청약까지 기간을 2년으로 최소화하겠다”고 했고, 국토교통부 장관은 “영끌해서 집 사지 말고 분양받으라”고 부추겼다. 하지만 단기간에 주택 공급이 어려운 상황에서 민심 달래기용 미봉책에 그칠 것이라는 우려가 높았다.▷예상대로 우려는 현실이 됐다. 2021년 7월 이후 사전청약을 진행한 공공아파트 99개 단지 가운데 현재 본청약을 끝낸 곳은 13개에 불과하다. 이 중에서도 본청약 시기를 제대로 지킨 단지는 1개뿐이다. 토지 보상이나 기반시설 조성이 제대로 되지 않은 상태에서 사전청약을 무리하게 밀어붙인 탓에 대다수 사업이 지연되고 있는 것이다. 기존 주민들의 반대로 사업이 미뤄지는 건 기본이고, 지구 조성 과정에서 문화재가 발굴되거나 법정보호종인 맹꽁이가 발견돼 본청약이 하염없이 늦춰진 곳도 있다.▷사전청약 당첨자들은 본청약에 맞춰 계약금, 중도금 같은 자금 마련 계획을 세우고 전월세 계약도 해놨는데 이를 송두리째 바꿔야 할 처지다. 사업이 연기되는 과정에서 발생한 분양가 상승 부담도 고스란히 감당해야 한다. 최근 건설 자재 값과 인건비 등이 대폭 오르면서 본청약이 1년 미뤄진 단지의 분양가는 사전청약 때보다 최대 1억 원 넘게 뛰었다고 한다. 민간 사전청약 아파트 중엔 공사비 급등으로 건설사가 사업을 아예 포기한 곳도 나왔다.▷사업 지연 피해가 속출하자 국토부는 어제 사전청약 신규 시행을 중단하겠다고 밝혔다. 10여 년 전의 실패를 답습하고 2년 10개월 만에 사전청약 제도가 또 폐지되는 것이다. 청약 시점만 앞당기는 것일 뿐 실질적인 공급 확대 효과는 없는 불완전한 제도를 재도입한 지난 정부의 잘못이 크지만, 공공분양 ‘뉴홈’에 사전청약을 활용하다가 뒤늦게 폐지한 현 정부도 책임에서 자유로울 순 없다. 무주택 실수요자들을 희망 고문하는 어설픈 대책을 재탕 삼탕하는 일이 더는 없어야 할 것이다.정임수 논설위원 imsoo@donga.com}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만큼 막말과 궤변이 화제가 되는 정치인을 찾기도 어려울 것이다. 사실이 아닌 말들을 아무렇지 않게 트위터에 올려, 대통령 임기 마지막 달에는 트윗 471개에 ‘허위 정보’ 딱지가 붙어 공개 제한 조치를 받았다. 팬데믹 위기 때는 “백신이 없어도 결국 코로나바이러스는 사라질 것”이라는 비과학적 주장을 늘어놔 조롱거리가 됐다. 11월 대선을 앞두고 다수의 형사·민사 재판에 처해 있는 트럼프에게 미 법원은 재판 관련자들을 비방하거나 위협하지 말라며 세 차례 함구령을 내렸다. ▷그런데 최근 트럼프 전 대통령이 한국을 겨냥해 사실과 다른 발언들을 거침없이 쏟아내고 있다. 지난달 시사주간지 타임과의 인터뷰에서 “왜 우리가 부유한 한국을 방어해야 하느냐”, “불안정한 위치에 4만 명의 병력을 두고 있는데 한국은 방위비 분담금을 거의 내지 않고 있다” 등의 주장을 한 것이다. 하지만 CNN 방송이 “최소 32개의 오류를 확인했다”고 보도할 정도로 트럼프의 타임 인터뷰는 거짓투성이였다. ▷현재 주한미군은 2만8500명으로 4만 명이라는 숫자부터 사실과 다르다. 또 한국은 통상 인건비를 제외하고 주한미군 주둔 비용의 40∼50%를 부담하고 있다. 특히 조 바이든 행정부와 협상을 통해 2021년 방위비 분담금을 13.9% 인상해 10억 달러 가까이를 냈고, 내후년까지 한국 국방비와 연동해 해마다 분담금을 올리기로 했다.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를 향해 방위비를 압박했던 트럼프가 공격 대상을 한국으로 옮기면서 근거 없는 ‘안보 무임 승차론’을 내세운 셈이다. ▷이어 트럼프는 11일 뉴저지주 대선 유세에서 “한국이 미국의 해운(shipping), 컴퓨터 등 많은 산업을 빼앗아갔다”며 “그들은 미군에 방위비를 낼 만큼 많은 돈을 벌고 있다”고 했다. 한국은 미국의 해운, 컴퓨터 산업을 뺏은 적이 없을뿐더러 한국이 경쟁력을 가진 조선, 반도체로 범위를 넓혀 봐도 억지스럽다. 중국 조선업이 3년째 한국을 제쳤고, 치열한 반도체 패권 경쟁 속에 한국 대표 기업이 미국에 400억 달러 이상을 투자하기로 한 상황에서 한국을 겨누는 건 황당하다. 결국 터무니없는 ‘산업 약탈론’까지 들이밀며 방위비 증액을 재차 압박한 것이다. ▷워싱턴포스트는 2015년 트럼프의 첫 대선 출마 선언 직후 인터뷰와 공개 발언, 트윗 등을 점검해 그의 막말과 거짓 주장이 치밀한 계산에 따른 것이라고 분석한 바 있다. 막말을 던져놓고 반응이 좋으면 끝까지 밀고 나가고, 선동적인 거짓말을 뱉은 뒤엔 진실처럼 포장해 지지를 끌어낸다는 것이다. 사상 최대 대미 무역흑자에다 방위비 분담 문제가 걸려 있는 우리로선 트럼프의 ‘거짓말 베팅’, ‘막말 베팅’의 강도가 더 높아질까 우려스럽다.정임수 논설위원 imsoo@donga.com}

한국에 ‘국민 메신저’ 카카오톡이 있다면 일본엔 9600만 명이 쓰는 라인(LINE)이 있다. 메시지만 주고받는 게 아니라 뉴스를 보고 온라인 쇼핑을 하고 만화와 음악을 즐기고 공공요금까지 납부해 일본 신문들이 “라인 앱은 사회 인프라”라고 칭할 정도다. 라인은 이해진 네이버 창업자가 기획하고 신중호 대표가 개발을 총괄한 한국산 서비스로 2011년 6월 출발했다. 동일본 대지진 때 현지에 머물면서 통신망 붕괴를 경험한 이해진 창업자가 재난 상황에서도 연락 가능한 모바일 메신저로 일본 시장을 공략하자고 한 것이다. ▷일본 정보기술(IT) 기업 소프트뱅크와 ‘반반 경영’을 시작한 건 2019년부터다. 네이버의 라인과 소프트뱅크가 운영하는 일본 최대 포털 야후저팬이 결합해 ‘라인야후’가 자리 잡았다. 소프트뱅크의 손정의 회장이 온라인 비즈니스를 망라한 거대 플랫폼을 만들겠다며 협업을 먼저 제안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런데 네이버가 13년간 공들여 키워 온 거대 메신저 기업의 경영권을 빼앗길 위기에 처했다. ▷사태의 발단은 지난해 11월 라인의 고객 정보를 관리하는 네이버 가상서버가 해킹당해 개인정보 51만여 건이 유출되면서다. 그러자 일본 총무성은 올 들어 두 차례 행정지도를 통해 네이버와 맺은 지분 관계를 재검토할 것을 요구했다. 민간 IT 기업의 해킹 사고를 문제 삼아 정부가 지분 변경을 요구하는 건 극히 드문 일이다. 앞서 페이스북이 해킹돼 5억 건 이상의 개인정보가 유출됐는데도 일본 정부가 별다른 조치를 하지 않았던 것과 비교된다. ▷이어 라인야후의 이데자와 다케시 사장은 8일 “소프트뱅크가 과반이 되도록 네이버에 자본 변경을 강하게 요청하고 있다”고 밝혔다. 총무성의 행정지도에 따라 네이버에 지분 매각을 공식 요구했다는 것이다. “한국 네이버와 연결된 네트워크를 차단하고, 업무 위탁을 제로로 하겠다”며 기술 협력도 사실상 모두 끊겠다고 했다. 또 ‘라인의 아버지’로 불리는 신중호 대표를 사내이사에서 배제하고 이사회 멤버 전원을 일본인으로 채운다고 한다. 라인야후에서 네이버를 배제하려는 일본의 전방위 작업이 본격화된 셈이다. ▷이는 일본 국민 80%가 쓰는 메신저 플랫폼을 한국 기업 손에 두지 않겠다는 의도로밖에 해석되지 않는다. 페이스북, 유튜브 같은 미국 공룡 플랫폼은 손댈 수 없으니 라인만이라도 일본의 통제 아래 두겠다는 것이다. 라인야후에 대한 지배력 상실은 단순히 일본 1위 메신저를 빼앗기는 데 그치지 않는다. 1억 명 넘는 동남아 라인 이용자를 발판으로 ‘아시아 최고 IT 기업’이 될 기회마저 일본 기업에 넘어가게 된다. ‘네이버 라인’이 ‘일본 라인’이 되는 것을 한국 정부가 뒷짐 지고 지켜만 봐서는 안 되는 이유다.정임수 논설위원 imsoo@donga.com}

국내 원자력발전소를 흔히 ‘화장실 없는 아파트’에 비유하는 이들이 있다. 원전을 가동하면 필연적으로 사용후 핵연료가 배출되는데 지금껏 이를 영구 처분하는 시설, 즉 ‘고준위 방사성폐기물 처리장(방폐장)’ 없이 임시로 보관해 왔기 때문이다. 경북 경주에 2015년부터 운영 중인 방폐장이 있지만 원전에서 쓴 작업복, 부품 같은 방사능 세기가 약한 중·저준위 폐기물만 처분할 수 있다. 고준위 방폐장 건설은 1980년대부터 아홉 차례에 걸쳐 부지 선정이 시도됐지만 주민 반발과 여야 갈등으로 번번이 무산됐다. 격렬한 반대 시위를 불러온 2003년 ‘부안 사태’로 사회적 갈등은 극에 달했다. 이후 박근혜·문재인 정부에서 두 번의 공론화 과정을 거쳐 도출된 게 특별법 제정이다. 고준위 방폐장 설립 근거와 부지 선정 절차, 유치 지역 지원 등을 담은 견고한 법제도를 만들어 불필요한 갈등을 줄이고 지속 가능성을 담보하자는 취지였다.6년 뒤 사용후 핵연료 처리 한계 하지만 특별법은 지난 20대 국회에 이어 또다시 자동 폐기될 처지에 놓여 있다. 그동안 줄다리기하던 특별법 세부 내용을 두고 여야가 잠정 합의했지만, 야당의 ‘채 상병 특검법’ 단독 처리 등으로 극심한 대치가 계속되고 있어서다. 이번 21대 국회 임기가 끝나는 29일까지 3년 전 발의된 ‘고준위 방사성폐기물 관리 특별법’이 통과될지 미지수다. 국회가 특별법 처리에 손놓고 있는 사이 고농도 방사능과 높은 열을 내뿜는 사용후 핵연료는 원전 부지 내 임시저장시설에 쌓여 가고 있다. 1978년 첫 원전을 가동한 이래 46년간 누적된 핵폐기물은 1만8000여 t에 달한다. 그런데 이들 저장시설마저 한빛원전을 시작으로 2030년부터 순차적으로 포화 상태가 된다. 이대로 방치하다가는 원전 가동이 중단돼 전력 공급에 심각한 차질을 빚을 수 있다는 뜻이다. 대만에서는 궈성원전 1호기가 저장시설 포화로 2021년 조기 폐쇄된 바 있다. 에너지 해외 의존도가 90%가 넘는 우리로선 일부 원전이라도 멈추면 발전량 부족, 전기요금 인상 같은 심각한 후폭풍이 우려된다.‘고준위 특별법’ 21대 국회서 처리해야 첫발도 떼지 못한 한국과 달리 선진국들은 고준위 방폐장 건설에 속도를 내고 있다. 반세기 넘게 쌓인 핵폐기물을 더는 방치할 수 없다는 판단에서다. 원전 발전 의존도가 40%에 달하는 핀란드는 내년에 세계 최초로 고준위 방폐장을 완공한다. 스웨덴과 프랑스는 부지를 정하고 건설 준비 단계에 있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로 방사성폐기물에 민감한 일본마저 부지 선정 작업에 돌입했다. 세계 10대 원전 운영국 가운데 부지 선정 절차를 시작하지 못한 나라는 한국과 인도 두 곳뿐이라고 한다. 한국이 30조 원대 원전 수출을 위해 공들이는 체코도 4개의 후보지를 정한 데 이어 유럽연합(EU)의 친환경 정책에 맞춰 건설 일정을 앞당기고 있다. 앞서 EU는 원전을 친환경 투자 기준(녹색분류체계)에 포함시키면서 고준위 방폐장 건설을 전제 조건으로 내걸었다. 방폐장 건설 계획을 세우지 못하면 재도약을 선언한 K원전의 유럽 수출길이 막힐 수 있다는 얘기다. 원전이 경제적이면서 탄소 배출이 없는 청정 에너지원이긴 하지만 사용후 핵연료가 자연 상태로 돌아가기까지 수만 년이 걸린다고 한다. 방폐장 건설을 외면하는 건 현 세대가 값싼 전기의 혜택은 다 누리면서 부담은 미래세대에 전가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더군다나 고준위 방폐장을 짓는 데 30년 넘는 긴 시간이 걸린다. 당장 특별법이 통과된다 해도 늦었다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다. 탈원전 대 친원전 프레임에 갇혀 폐기물을 후대에 떠넘기는 ‘폭탄 돌리기’를 이젠 멈춰야 한다.정임수 논설위원 imsoo@donga.com}

사우디아라비아가 사막 위에 짓는 미래형 신도시 ‘네옴시티’에서 가장 주목받는 건 주거지구 ‘더 라인’이다. 조감도를 보면 홍해 연안에서 사막을 향해 좁다란 담벼락 두 개가 끝없이 이어진 것 같지만, 실상은 서울 롯데월드타워만 한 높이 500m의 빌딩 두 채가 200m 간격을 두고 170km 길이로 서 있다. 이 거대한 유리빌딩에 사람들이 산다. 두 빌딩 사이엔 숲이 우거지고 강이 흐르고, 건물 안엔 사무실 학교 병원 등 필요한 게 다 있다. 170km면 서울에서 대전쯤 거리인데, 지하 고속철도로 20분이면 닿는다.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가 3년 전 이 길쭉한 선형 도시의 계획을 발표했을 때 웬만한 공상과학(SF) 영화도 울고 갈 정도라는 평가가 쏟아졌다. 실현 불가능한 허상이라는 비판에도 더 라인 프로젝트는 2022년 11월 첫 삽을 뜨며 현실화를 위한 발걸음을 내디뎠다. 사우디의 미래를 이끌 대역사에 국내 건설사도 참여했다. 삼성물산과 현대건설 컨소시엄은 더 라인의 핵심 기반시설인 지하 철도 터널 공사를 맡고 있다. ▷사우디 수도 리야드의 인구가 700만 명인데, 현대 과학기술을 집약해 900만 명이 거주하는 최첨단 선형 도시를 만들겠다는 게 빈 살만의 야심 찬 구상이다. 1단계로 2030년까지 150만 명을 거주시키기로 했다. 그런데 최근 1단계 목표 인구가 30만 명으로 대폭 축소될 것이라는 외신 보도들이 잇따르고 있다. 지금 개발 속도라면 2030년까지 전체 170km 중 2.4km 정도만 공사를 끝낼 수 있다는 것이다. ▷사우디의 재정 상황도 회의론에 힘을 보태고 있다. 더 라인을 비롯해 네옴시티 전체 공사비는 당초 5000억 달러에서 1조5000억 달러까지 불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초기 사업비를 대야 하는 사우디 국부펀드는 축구, 골프, 게임, 전기차 등에 돈을 펑펑 쓰면서 보유 현금이 1년 새 500억 달러에서 150억 달러로 쪼그라들었다. 국제유가가 예상보다 낮게 유지된 탓에 국영 석유기업 아람코의 순이익도 지난해 25%나 줄어 오일머니를 투입하기도 쉽지 않은 형편이다. ▷이러다 보니 사우디 정부는 해외 투자 유치에 공을 들이고 있다. 미국 뉴욕 맨해튼에 사무실을 연 데 이어 전 세계 은행 관계자들을 현장으로 초청해 투자 설명회를 연다고 한다. 최근 ‘세계 최대 토목공사가 24시간 진행되고 있다’는 문구를 달아 더 라인 공사 현장을 촬영한 영상까지 공개했다. 빈 살만이 ‘탈(脫)석유’를 위해 추진하는 네옴시티에는 더 라인 외에도 바다 위에 조성되는 산업단지 ‘옥사곤’, 2029년 겨울아시안게임이 열릴 관광레저단지 ‘트로제나’ 등이 들어선다. 완전체 도시를 표방한 네옴이 사막의 기적이 될지, 신기루가 될지는 좀 더 지켜볼 일이다. 정임수 논설위원 imsoo@donga.com}

올 들어 잡코인 가운데 가장 화제가 된 게 ‘월드코인’이다. 은색 구슬처럼 생긴 홍채 인식 기구에 자신의 홍채를 등록하기만 하면 코인 수십 개를 무상으로 받을 수 있어 세계 곳곳에서 선풍적 인기를 끌었다. 국내에 문을 연 월드코인 행사장들도 공짜 코인을 받겠다며 대기표를 받아든 이들로 북적였다. 그런데 행사장마다 눈에 띈 건 20, 30대보다 지인들과 삼삼오오 온 장노년층이었다. 이른 아침부터 줄 선 노인들도 많아 코인이 뭔지 제대로 알고 온 사람이 얼마나 되는지 의문이라는 얘기가 돌았다. ▷요즘 우후죽순 열리는 잡코인 투자 설명회도 젊은 세대보다 장노년층이 훨씬 많이 목격된다. 이쯤 되면 젊을 땐 공격적인 투자를, 나이 들면 수비적 투자를 한다는 말이 옛말이 된 듯하다. 하지만 잡코인 중에 정체를 알 수 없거나 시세 조종의 표적이 되는 게 상당수다. 월드코인도 “민간 기업이 개인의 생체정보를 마구잡이로 수집한다”, “실체 없는 폰지 사기다”라는 논란 속에 일부 국가가 사업을 중단시키면서 보름 만에 가격이 반 토막 났다. ▷비트코인 가격이 1억 원을 오르내리며 불장을 이어가자 덩달아 기승을 부리는 것이 가상자산 사기 범죄다. 지난해 경찰에 검거된 코인 범죄자는 1000명에 육박하며 1년 새 3배 넘게 급증했다. 카카오톡 등으로 특정 코인의 매매를 부추기는 ‘코인 리딩방’은 흔한 일이 됐고, 코인을 발행하겠다며 연예인, 운동선수 등을 앞세워 투자를 받은 뒤 잠적하는 ‘스캠 코인’이 성행하고 있다. 거래소에 상장된 종목과 이름만 같은 가짜 코인을 싸게 준다고 속여 돈을 가로채는 사기도 잦다. ▷그런데 코인 사기에 연루되는 장노년층이 늘고 있어 걱정스럽다. 최근 9개월 동안 금융감독원에 접수된 가상자산 사기 피해 3건 중 1건이 50대 이상의 신고였다. 올 들어선 60대 이상에서 피해 신고가 60% 가까이 급증했다. 장노년층 ‘코인 개미’ 가운데 노후자금이나 퇴직금 같은 목돈을 투자하는 큰손이 많다 보니 사기범들의 주요 타깃이 되는 것이다. 국내 가상자산 투자자 606만 명 중 1000만 원 이상의 코인을 보유한 사람이 20, 30대를 통틀어 10%도 안 되지만 50대와 60대 이상에선 각각 13%나 된다. ▷여기에다 장노년층이 블록체인, 대체불가토큰(NFT) 등 신기술에 익숙지 않다 보니 사기에 쉽게 현혹되는 편이다. 경기 불황을 틈타 매달 연금처럼 배당금을 준다고 꼬드기는 코인 사기에 노인들이 넘어가기 십상이다. 소득 없는 고령층이 한번 금융사기를 당하면 회복이 불가능하다. 사회적으로도 여간 심각한 문제가 아니다. 코인 범죄를 뿌리 뽑고 노인들에게 피 같은 노후자금을 지킬 수 있는 능력을 키워 주는 것도 시급한 민생 과제다.정임수 논설위원 imsoo@donga.com}

행동주의 펀드의 장단점이 있는데도 한국에서 유독 ‘기업 사냥꾼’이라는 나쁜 이미지가 굳어진 건 외국계 펀드의 ‘먹튀’가 잇따르면서다. 지배구조 개선을 명분 삼아 기업을 압박한 뒤 주가가 오르면 막대한 시세 차익을 챙겨 떠난 사례가 반복된 것이다. 소버린이 SK그룹을 공격해 1조 원 가까운 차익을 올렸고, 칼 아이칸은 KT&G를 상대로 1500억 원을 벌었다. 엘리엇매니지먼트는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에 제동을 걸더니 한국 정부를 상대로 1조 원짜리 투자자-국가 간 소송(ISD)을 제기했다. ▷요즘 개미투자자들에게는 단 1%의 지분으로 K팝 지형을 뒤흔든 토종 행동주의 펀드가 유명하다. 이창환 대표가 이끄는 얼라인파트너스는 SM엔터테인먼트와 라이크기획 간의 계약을 문제 삼아 경영권 분쟁을 촉발시키더니 ‘이수만 없는 SM’의 전환점을 만들어냈다. 이보다 앞서 한진그룹과 경영권 분쟁을 벌인 KCGI, 일명 강성부펀드는 한진 오너 일가의 갑질 논란에 대한 사회적 공분을 등에 업고 이름을 날렸다. 한때 개미들 사이에선 ‘강따’(강성부 따라잡기) 투자법이 유행하기도 했다. ▷그런데 행동주의 펀드들의 표적이 되는 한국 기업이 갈수록 늘고 있다고 한다. 한국경제인협회가 낸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행동주의 펀드의 공격을 받은 한국 기업은 77곳으로, 4년 만에 10배 가까이 급증했다. 조사 대상 23개국 가운데 미국, 일본에 이어 세 번째로 많은 규모다. 한국 기업들이 팬데믹을 거치며 역대급 실적을 올렸는데도 주가는 저평가된 곳이 많다 보니 국내외 펀드들의 먹잇감이 되는 것이다. ▷올 들어 정부가 증시 저평가를 해소하겠다며 ‘기업 밸류업’ 대책을 내놓자 이에 편승한 행동주의 펀드의 공습이 더 거세지고 있다. 3월 주주총회에서 배당·자사주 매입 확대, 경영진 교체, 감사위원 선출 등을 요구한 펀드가 한둘이 아니다. 전략도 더 치밀해졌다. 늑대가 무리 지어 먹잇감을 사냥하듯 소수 지분을 가진 펀드들이 뭉쳐 한 기업을 공격하는 ‘울프 팩’ 전술이다. 삼성물산 주총에선 영국계 시티오브런던 등 5개 펀드가 연합해 회사가 계획한 것보다 8000억 원이나 많은 주주 환원을 요구하다가 표 대결에서 졌다. ▷해외에서는 행동주의 펀드가 기업의 사회·환경적 책임을 감시하는 역할을 한다는 긍정적 평가도 받지만, 단기 주가 부양에만 매달려 경영권을 위협하고 기업의 성장 동력을 갉아먹는 펀드가 적지 않다. 하지만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차등의결권, 포이즌필 같은 투기적 펀드에 맞설 경영권 방어 장치는 여전히 국내에 도입되지 않고 있다. 이런 상태에서 통 크게 주주 환원을 확대하라고 하는 건 총 없이 전쟁터에 나가라는 말이나 다를 바가 없다. 정임수 논설위원 imsoo@donga.com}

국민연금을 애초 받을 나이보다 1∼5년 앞당겨 일찍 타가는 걸 조기노령연금이라고 한다. 정년을 채우지 못하고 퇴직한 사람들의 노후 소득을 보장해주기 위해 1999년 도입됐다. 국민연금 가입 기간이 10년 넘고 소득이 일정 수준 이하면 신청할 수 있지만, 미리 당겨 받는 만큼 일종의 페널티가 있다. 1년 일찍 받을 때마다 연금액이 연 6%씩 깎여 3년 먼저 받으면 18%가, 5년 미리 받으면 30%가 감액된다. ▷원래 받을 나이가 됐다고 연금액이 다시 올라가지도 않는다. 5년 일찍 받으면 당초 받을 연금의 70%를 죽을 때까지 받는다는 얘기다. 조기노령연금을 ‘손해연금’으로 부르는 이유다. 그런데 이렇게 손해를 보면서도 조기에 연금을 타가는 사람이 지난해 11월 현재 85만 명에 육박했다. 10년 새 갑절 이상으로 불어난 규모다. 이 속도라면 조기연금 수급자는 올해 96만 명을 거쳐 내년이면 100만 명을 넘어선다고 한다. ▷조기 수령자가 급속도로 늘어나는 건 은퇴는 점점 빨라지는데 노후 준비는 턱없이 모자란 탓이 크다. 지난해 한국의 55∼64세가 가장 오래 일한 직장을 그만둔 나이는 평균 49.4세에 그쳤다. 법정 정년은 60세이지만 현실 정년은 49세라는 뜻이다. 이런데도 은퇴하지 않은 가구 중 노후 준비가 잘된 가구는 8%가 안 되고, 이미 은퇴한 가구도 열에 여섯은 생활비가 부족한 형편이다. 은퇴 후 먹고살기가 빠듯해 국민연금이라도 당겨 받아야 할 처지라는 얘기다. ▷여기에다 국민연금을 받는 나이마저 늦춰지면서 은퇴 후 ‘소득 크레바스’(소득 절벽)가 길어지고 있다. 연금 수급 나이가 과거엔 법정 정년과 똑같은 60세였다가 2013년부터 5년마다 한 살씩 늦춰지도록 변경됐다. 마침 지난해도 연금 수급 연령이 62세에서 63세로 한 살 늦춰졌는데, 원래 연금을 탈 순번이던 1961년생이 1년을 더 기다리지 못하고 조기연금을 대거 신청했다고 한다. 수급 연령이 늦춰지는 5년마다 조기노령연금 신청이 눈에 띄게 늘어나는 배경이다. ▷앞으로 1965년생, 1969년생 등 ‘낀 세대’가 1년 더 길어질 소득 공백기를 견디지 못하고 조기에 연금을 타갈 여지가 적지 않다. 문제는 지난해 조기노령연금 평균 수령액이 월 66만 원 정도에 그친다는 점이다. 은퇴 후 부부에게 필요한 최소 생활비(월 231만 원)의 30%도 안 되는 수준이다. 안 그래도 생애평균소득 대비 국민연금으로 받는 돈이 40%에 불과한데, 미리 타간다고 페널티까지 받으니 노후 버팀목이 되기에 한참이나 부족한 것이다. 쥐꼬리 수준의 공적연금 안에서도 빈익빈 부익부가 벌어지고 있는 현실이 씁쓸하다.정임수 논설위원 imsoo@donga.com}

옛날 야구장이나 콘서트장 앞에서 웃돈을 주고 암암리에 사고팔던 암표를 요즘 디지털 세대는 ‘플미’(프리미엄) 티켓이라고 부르고, 시간 안 되고 손 느린 사람들은 ‘댈티’(대리 티케팅)를 시킨다. 온라인 공간에서 매크로 프로그램을 이용해 재빨리 티켓을 선점한 뒤 비싸게 되파는 식의 암표가 확산되면서 벌어진 일이다. 컴맹이어도 몇만 원에 프로그램을 구매해 쓸 수 있다 보니 티켓 예매뿐만 아니라 대학교 수강 신청, 캠핑장 예약 등에도 매크로가 활용된다고 한다. ▷매크로는 자주 사용하는 여러 개의 명령어를 하나로 묶어 자동 반복 작업을 시키는 프로그램이다. 통상 티켓을 예매하려면 사이트 로그인→부정사용 방지 문자 입력→좌석 선택→결제 등 여러 단계를 거쳐야 하는데 매크로를 동원하면 클릭 한 번으로 순식간에 처리할 수 있다. 몇 년 전부터는 보안 절차를 무너뜨리는 자체 매크로를 개발하는 건 물론이고 예매 총책부터 티켓 운반책, 자금 모집책 등을 두고 표를 싹쓸이하는 조직화된 암표상들이 활개를 치고 있다. ▷이렇다 보니 ‘피케팅’(피가 튈 만큼 치열한 티케팅)이 벌어지는 공연이나 스포츠 경기의 암표는 부르는 게 값이다. 지난달 피아니스트 임윤찬과 서울시향 얍 판 츠베덴 음악감독의 협연 연주회는 예매 창이 열린 지 1분 만에 매진되더니, 당일 중고거래 사이트에 15만 원짜리 R석 티켓이 100만 원 넘는 암표로 등장했다. 롤드컵(리그오브레전드 월드 챔피언십) 결승전은 400만 원, 가수 임영웅 콘서트는 500만 원까지 암표 가격이 치솟았다. 부모님을 위해 효도 한번 해보려던 자녀들이 엄두도 못 낼 금액이다. ▷늦었지만 이달 22일부터 ‘매크로 암표상’이 처벌 대상이 된다. 개정된 공연법에 따라 매크로를 동원해 사재기한 공연 티켓을 팔다 적발되면 1년 이하의 징역이나 1000만 원 이하 벌금이 부과되는 것이다. 국민체육진흥법 개정안도 최근 국회 문턱을 넘어 이르면 8월부터 스포츠 경기 암표를 팔다 적발돼도 같은 처분을 받는다. 하지만 법의 그물이 성글어 벌써부터 실효성이 크지 않을 거라는 얘기가 나온다. ▷매크로가 사용됐는지 확인하기가 어려운 데다 암표 몇 장만 팔아도 벌금을 충당할 수 있을 정도로 처벌 수위가 낮은 탓이다. 최근 공연 현장에서 ‘본인 확인’을 강화하자 암표상들이 제3의 아이디로 예매한 뒤 구매자 아이디로 곧장 바꾸는 ‘아옮’(아이디 옮기기)으로 빠져나갈 구멍을 속속 만드는 실정이다. 일본, 대만처럼 아예 제도적으로 티켓을 웃돈 주고 판매하는 것 자체를 금지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는 이유다. K컬처의 위상은 세계적 수준으로 높아지는데 암표를 뿌리 뽑을 법과 제도는 언제나처럼 뒤늦게 따라오고 있다.정임수 논설위원 imsoo@donga.com}

일본 정부는 지난해부터 한국의 행정고시에 해당하는 국가공무원 종합직 시험의 응시 연령을 만 19세로 한 살 낮췄다. 또 공무원도 근무시간을 조정해 평일 하루를 쉴 수 있도록 주 4일 근무제를 확대하기로 했다. ‘일본을 움직이는 꽃’으로 선망받던 공무원의 인기가 수직낙하하자 내놓은 대책이다. 박봉에다 잦은 야근, 상명하복이 당연시되는 공직 사회를 일본 청년들이 기피하면서 공무원 지원자는 10년 새 반 토막 났다고 한다. ▷한국도 별반 다르지 않다. 한때 100 대 1에 육박했던 9급 공무원 시험의 경쟁률은 올해 22 대 1로 32년 만에 가장 낮았다. 출세의 지름길로 통하던 5급 공채(옛 행시) 지원자도 1만여 명에 그쳐 2000년 이후 가장 적었다. 몇 년 전 미국의 한 일간지가 한국의 공시 열풍을 소개하며 “한국에서 공무원이 되는 건 하버드대 입학보다 어렵다”고 했는데 격세지감이다. ▷게다가 어렵게 관문을 통과해 놓고 공직을 내려놓는 이들이 한둘이 아니다. 민간 기업으로 이직하기 위해 정부공직자윤리위원회의 취업 심사를 받는 퇴직 공무원은 해마다 늘어 지난해 1000명에 육박했다. 과거엔 장차관이나 고위 공무원이 임기를 마치고 민간으로 자리를 옮겼다면, 요즘에는 국·과장급 베테랑 공무원에 이어 20, 30대 공무원까지 가세하고 있다. 로스쿨이나 의학전문대학원 진학, 구체적인 취업계획 없는 단순 퇴직 등을 모두 포함하면 지난해 퇴직한 5년 차 미만 공무원은 1만3000명을 웃돈다. ▷엘리트 공무원들이 선호하는 경제·외교부처에서 직원 이탈이 가속화하는 것도 최근 몇 년 새 뚜렷해진 현상이다. 급여나 워라밸 등 근무 조건은 열악한데 인사 적체는 해결될 기미가 없고, 지시는 정권이 내리는데 책임은 공무원이 지는 사례가 잇따르면서 젊은 엘리트 관료들의 사기가 꺾인 결과다. 리더가 될 만한 인재들이 줄줄이 떠나면서 정권의 지시만 충실히 따르는 ‘영혼 없는 관료’만 남게 될까 봐 걱정이라는 얘기들이 관가 안팎에서 나오는 이유다. ▷앞으로 이탈 행렬은 계속될 듯하다. 한국행정연구원의 실태조사에서 중앙 및 지방 공무원 10명 중 4명꼴로 기회가 되면 이직할 의향이 있다고 했다. 9급 공무원 초봉이 올해 처음 3000만 원을 넘기고, 공무원 임금이 민간의 83%인 상황에서 이직 이유로는 ‘낮은 보수’가 압도적 지지를 받았다. 규제를 만들어내는 ‘철밥통’ 공직 사회보다 도전과 창의력이 강조되는 민간 영역에 인재가 몰려든다는 측면에서 탈(脫)공무원 움직임은 바람직하다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자부심과 꿈을 잃은 젊은 공무원의 엑소더스는 정부 위기의 신호가 아닌지 돌아봐야 한다.정임수 논설위원 imsoo@donga.com}

월급 빼고 안 오른 게 없어 ‘…플레이션’을 붙인 신조어가 하루가 멀다고 쏟아지더니 이번엔 프루트플레이션(과일+인플레이션) 차례다. 전체 물가를 끌어올릴 정도로 과일값 상승세가 심각하다는 뜻이다. 요즘 마트에서 사과 한 개에 5000원쯤 하는 장면은 새삼스럽지 않고 백화점에선 사과 한 알을 포장해 2만 원 가격표를 붙인 상품까지 등장했다. 서민들이 과일을 들었다 놨다 망설이는 게 아니라 그냥 외면하는 처지가 됐다. 체감만 그런 게 아니다.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달 과일값은 1년 전보다 38% 넘게 급등해 32년 만에 최대 폭으로 뛰었다. 2월 물가 상승률(3.1%)의 12배를 웃도는 수준이다. 사과, 귤은 70% 넘게 치솟아 가격이 널뛰기하는 코인이냐는 말이 절로 나온다. 국책연구원인 농촌경제연구원은 이달에도 딸기, 토마토, 대파, 호박 등 과일·채소값이 적게는 10%대에서 많게는 50% 이상 오를 것으로 내다봤다. 과일값이 이처럼 폭등하는 건 지난해 이상 기후로 흉작이 든 탓이다. 봄엔 이상 저온, 여름엔 폭염과 폭우, 가을에는 병충해 등의 악재가 겹치면서 주요 과일의 생산량이 20∼30%씩 급감했다. 게다가 가격 상승세를 주도하는 사과, 배는 까다로운 검역으로 수입이 안 된다. 정부는 병해충 유입 등을 우려해 세계무역기구(WTO)의 동식물 위생·검역조치(SPS)에 따라 사과, 배, 복숭아 등 8개 작물의 수입을 제한하고 있다. 다른 나라가 이들 작물을 우리나라에 수출하려면 8단계로 이뤄진 수입위험분석 검역 절차를 거쳐야 하는데 아직 이걸 통과한 곳이 없다. 1992년 이후 미국 독일 뉴질랜드 등 11개국이 한국에 사과 수입 허용을 요청했지만, 진전 속도가 가장 빠른 일본도 8단계 중 5단계 관문에 멈춰 있다. 사과, 배의 생육 주기가 1년 단위인 점을 감안하면 올가을 햇과일이 나오기 전까지 가격 초강세가 이어질 수밖에 없다. 사과, 배 가격이 뛰면 대체 과일로 수요가 옮겨가 과일값이 연쇄적으로 오르고 채소값 상승세까지 자극할 소지가 다분하다. 이는 곧장 외식·식료품 가격 상승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치솟는 과일값을 잡지 않고는 물가 상승률 2%대 회귀가 힘들 수 있다는 얘기다. 정부가 이번에도 꺼내든 카드는 ‘세금으로 할인 지원’이다. 설 연휴를 앞두고 690억 원을 들여 농축수산물 할인 지원에 나선 데 이어 다음 달까지 또 600억 원을 투입해 사과, 배 등을 할인해 주고 수입 과일의 관세를 낮추기로 했다. 하지만 이 같은 일회성 재정 지원이 근본적인 대책이 될 수 없다. 반짝 세일이 365일 세일이 되면 시장 가격을 왜곡하고 물가 잡기에도 힘이 달릴 뿐이다. 금(金)사과, 금배 현상이 어쩌다 올해 발생한 일이라고 넘어간다면 오산이다. 농가 고령화로 문 닫는 과수원이 늘고 있는 데다 기후 변화까지 겹쳐 과일 재배 면적은 빠르게 줄고 있다. 사과 재배 면적이 매년 1% 감소해 2033년이면 서울 여의도의 10배에 달하는 재배지가 사라진다고 농촌경제연구원은 예측했다. 지구 온난화 여파로 2070년대엔 강원 일부 지역에서만 사과 재배가 가능하다는 관측도 있다. 이제 국내 작황에만 사과, 배의 수급과 가격을 의존하기보다 일정 부분 시장 개방을 검토할 때가 됐다. 그래야 소비자 선택권이 넓어지고 탄력적인 물가 대응도 할 수 있다. 정부는 수입 가능성을 거듭 일축하고 있지만, 금값 과일이 단기간에 해결할 수 없는 구조적 문제로 자리 잡은 만큼 중장기 수입 로드맵을 마련해야 한다. 국내 생산 기반이 무너지지 않도록 과일 농가의 자생력을 키워주는 대책도 뒷받침돼야 할 것이다. 농산물 유통구조를 개선하고 기후 변화에 맞춰 품종을 개량하는 방안도 시급하다. 국민들이 사과, 배 하나 사먹는 걸 사치라고 생각하는 사회는 정상이 아니다.정임수 논설위원 imsoo@donga.com}

부동산 고수와 현금 부자들이 모여 있는 경매 시장은 부동산 경기 선행지표로 통한다. 경매를 찾는 발걸음이 뜸해지면 부동산이 하락기에 접어들었다는 뜻이며, 반대로 경매 시장이 꿈틀대면 침체기가 끝났다는 신호로 본다. 요즘 경매 시장은 매물은 쌓이는데 입찰에 참여하는 사람이 줄면서 역대급 한파가 몰아치고 있다. 올 1월 전국 법원에 들어온 신규 경매 신청은 1만 건을 넘어서며 월별 통계로 10년 6개월 만에 가장 많았다. ▷고금리와 경기 침체의 직격탄을 맞은 가계와 기업, 자영업자들이 빚을 제때 갚지 못하면서 경매로 넘어가는 부동산이 급증하고 있는 것이다. 국내 기업 10곳 중 4곳이 번 돈으로 이자도 못 내는 형편이고, 한계에 부닥친 소상공인·자영업자의 줄폐업이 이어지다 보니 아파트형 공장이나 상가도 줄줄이 경매에 나오고 있다. 지난달엔 서울 명동 중심거리의 꼬마빌딩이 외환위기 이후 처음으로 경매에 나왔지만 새 주인을 찾지 못하고 유찰됐다고 한다. ▷무엇보다 경매로 날리는 ‘영끌족’의 부동산이 수두룩하다. 지난해 경매가 진행된 서울 아파트는 7년 새 가장 많았고, 최근 교통이나 학군 좋은 대단지 아파트도 대거 경매로 쏟아지고 있다. 통상 3개월 이상 이자가 연체되면 은행 등 금융회사가 경매를 신청할 수 있는데, 부동산 급등기에 무리하게 대출받아 집을 산 영끌족이 눈덩이처럼 불어난 이자를 더는 감당할 수 없는 처지가 된 것이다. 소득 기반이 취약한데도 과도하게 빚을 낸 20, 30대 영끌족의 충격이 더 크다. 지난해 가계가 자유롭게 쓸 수 있는 가처분소득은 1%대로 늘어난 반면 물가 영향을 뺀 이자 비용은 27% 넘게 치솟았다니 예견된 결과라 할 만하다. ▷여기에다 전세 사기와 역전세난의 여파로 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한 세입자들이 법원에 강제 매각을 신청하는 강제경매 또한 늘고 있다. 1월 수도권에서 강제경매를 신청한 아파트·오피스텔·빌라는 역대 가장 많았다. 이 중 전세를 끼고 갭투자한 2030세대가 집주인인 매물도 적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경매로 넘어간 서울 빌라 10채 가운데 1채 정도만이 낙찰되는 수준이어서 보증금을 날릴 위기에 처한 세입자들은 뜬눈으로 밤을 새우고 있다. ▷아파트부터 상가, 빌라까지 경매 물건이 쌓이지만 수차례 유찰에도 주인을 찾지 못하는 사례가 속출하고 있다. 최근 2년간 시중은행이 경매를 신청한 4건 중 1건은 아직 낙찰자를 찾지 못했고, 그나마 매각에 성공한 4건 중 1건도 은행이 돌려받아야 할 금액보다 낙찰가가 낮았다고 한다. 부동산 시장 침체와 고금리 폭탄의 파장이 영끌족의 눈물을 거쳐 금융권 부실로 옮겨가고 있어 우려스럽다. 정임수 논설위원 imsoo@donga.com}

팀 쿡 최고경영자(CEO)가 2014년 “아무도 모르게 하는 게 있다”고 했지만, 애플이 자율주행 전기차를 개발한다는 건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애플의 전 이사회 임원이 한 인터뷰에서 “스티브 잡스의 생전 꿈이 혁신 자동차 ‘아이카’를 만드는 것이었다”며 애플 애호가들을 흥분시켰고, 이름난 자동차 엔지니어와 디자이너들이 줄줄이 애플로 자리를 옮겼다. 테슬라의 일론 머스크 CEO가 “애플이 우리가 해고한 사람을 모두 고용한다”고 할 정도였다. ▷10년간 애플이 개발해온 ‘애플카’는 전 세계 언론과 기업, 투자자의 관심을 한 몸에 받았다. 애플이 공동 개발과 위탁 생산을 위해 BMW, 현대차·기아, 닛산 등을 물밑 접촉했다는 소식이 알려질 때마다 관련 기업 주가가 치솟았다. 월가의 투자은행들은 ‘애플의 차세대 캐시카우는 스마트폰 아닌 자동차’, ‘애플카 출시 4년 내 자동차 강자가 될 것’ 등의 전망을 쏟아냈다. 입 다물고 있던 쿡 CEO도 “그동안 많은 내부 연구가 빛을 보진 못했지만 자율주행은 다를 것”이라며 힘을 보탰다. ▷그런데 애플이 공들였던 애플카 개발을 접고 2000여 명이 몸담았던 전기차 조직을 해산할 것이라고 27일 외신들이 보도했다. 애플카 출시가 2025년에서 2026년으로 연기된 데 이어 2028년까지 미뤄진다더니 결국 포기 수순에 들어간 것이다. 혁신의 상징 애플도 자율주행 기술의 벽을 넘지 못한 탓이 크다. ‘바퀴 달린 스마트폰’을 만들겠다는 야심한 계획은 운전자가 운전대를 잡아야 자율주행이 가능한 수준으로 수정돼 테슬라 짝퉁이 될 것이냐는 혹평이 쏟아졌다고 한다. ▷냉각기에 접어든 전기차 시장 상황도 영향을 끼쳤다. 3년간 연평균 65%씩 고속 성장하던 전기차 판매량은 올해 9% 증가에 그친다고 한다. 얼리어답터들은 이미 구매를 끝냈고, 일반 소비자는 비싼 가격과 불편한 충전 때문에 전기차 구매를 꺼리고 있어서다. 게다가 미국, 유럽 등 주요국들이 전기차 전환 속도 조절에 나서고 있다. 이러다 보니 글로벌 완성차 업체들은 전기차 대신 전기차로 가는 징검다리로 여겨졌던 하이브리드차 생산으로 방향을 틀고 있다. ▷중국 전기차의 공세 또한 무섭다. 테슬라를 제치고 세계 전기차 1위에 오른 중국 비야디를 두고 미국자동차연합은 “중국 초저가 전기차가 핫케이크처럼 팔릴 것”이라며 위기감을 드러냈다. 요즘 중국 차는 싸구려라는 꼬리표를 떼고 품질까지 인정받고 있어 더 위협적이다. 중국 가전업체 샤오미는 최근 첫 전기차를 공개하며 “포르셰와 테슬라가 라이벌”이라고 선언했다. 머스크 CEO가 “무역장벽이 없다면 중국 전기차 업체들이 경쟁사를 다 무너뜨릴 것”이라고 했는데, 우리도 허투루 넘길 얘기가 아니다.정임수 논설위원 imsoo@donga.com}

10년 전만 해도 미국 수도 워싱턴에 사무소를 낸 국내 기업은 삼성전자, 현대자동차 등 손에 꼽을 정도였다. 그런데 지금은 중견기업들까지 가세해 40여 개 기업이 워싱턴사무소를 운영한다고 한다. ‘아메리카 퍼스트(America First)’를 내세운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부터 ‘바이 아메리칸(Buy American)’ 기치를 높이 든 조 바이든 행정부까지 미국의 굳건한 보호무역 장벽을 경험한 기업들이 사무소를 두고 워싱턴의 정·관계 채널을 강화하는 데 힘을 쏟고 있는 것이다. ▷특히 미국 정부가 2022년 인플레이션감축법(IRA)부터 이른바 ‘칩스법’(반도체지원법)까지 글로벌 공급망 재편을 위한 공격적 입법을 추진하면서 이런 움직임이 가속화됐다. 한국 기업을 차별하는 IRA가 미 의회를 통과한 뒤에야 부랴부랴 대응에 나섰던 한국 정부에 의존하기보다, 자체 네트워크를 쌓아 각자도생하겠다는 것이다. 삼성전자가 한국과 인연이 각별한 마크 리퍼트 전 주한 미국대사를 북미총괄 부사장으로, LG그룹이 15년간 백악관에 몸담았던 조 헤이긴 전 부비서실장을 워싱턴 공동사무소장으로 임명한 게 이즈음이다. ▷최근엔 현지의 ‘친한파’ 인사 대신 ‘미국통’으로 꼽히는 국내 외교안보 출신 인사를 영입해 글로벌 현안에 대응하려는 기업이 늘고 있다. 현대차는 지난해 외교부 북미과장을 거친 김일범 전 대통령실 의전비서관을 부사장으로 영입해 미국 대관 업무를 맡겼다. 아산정책연구원 워싱턴소장을 지낸 우정엽 전 외교부 외교전략기획관도 현대차 전무로 합류한다고 한다. 윤석열 대통령의 ‘외교안보 교사’로 불린 김성한 전 국가안보실장은 HD현대의 조선 지주사(HD한국조선해양) 사외이사 선임설이 돌고 있다. ▷각 기업의 ‘워싱턴 라인’들은 11월 치러지는 미국 대선에 촉각을 곤두세우며 물밑 로비 활동을 강화하고 있다. 4대 그룹의 대미 로비자금은 벌써 사상 최대 규모로 늘었다. 워싱턴 현지 사무소들은 현재 ‘워룸’(전시 상황실)처럼 운영되며 미국의 경제·통상 정책 동향을 수집하고 있다. 트럼프 전 대통령 쪽이든, 바이든 대통령 쪽이든 접촉을 최대한 늘려 선거 결과에 따른 정책 변화에 발 빠르게 대응하겠다는 것이다. ▷대선이 8개월 남짓 남아 변수가 많지만, 지금 분위기로는 트럼프의 재집권 가능성이 최대 리스크다. 당선되면 취임 첫날 바이든 정부의 IRA를 폐기하겠다고 공언한 만큼, 미국에서 관련 공장을 가동 중인 국내 기업들은 타격이 불가피하다. 중국에 대한 징벌적 관세나 수출 통제의 여파도 쓰나미처럼 몰려올 것이다. 이미 각국은 트럼프의 귀환에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 캐나다처럼 아예 정부 차원의 태스크포스를 만든 나라도 있다. 우리만 기업에 대비를 맡겨두고 사실상 손 놓고 있는 건 아닌지 걱정스럽다.정임수 논설위원 imsoo@donga.com}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반세기가 흐른 1995년, 일본 곳곳에서 ‘침략의 역사를 제대로 기억하자’는 움직임이 일었다. 도쿄에서 서북쪽으로 100km쯤 떨어진 군마(群馬)현에서도 조선인 6000여 명이 강제징용으로 끌려왔고, 이 중 상당수가 가혹한 노동에 시달리다 숨진 사실이 밝혀졌다. 이들의 아픔을 달래기 위해 지역 시민단체와 기업, 주민들이 십시일반으로 돈을 모아 추도비 건립에 나섰다. 재일동포들도 총련, 민단 가릴 것 없이 힘을 보탰다. ▷그렇게 2004년 세워진 것이 다카사키시 ‘군마의 숲’ 공원에 있는 ‘군마현 조선인·한국인 강제연행 희생자 추도비’다. 비석 앞면엔 ‘기억 반성 그리고 우호’라는 글이 일본어와 한글, 영어 순으로 크게 쓰여 있다. 뒷면에는 한국인에게 큰 손해와 고통을 입힌 역사를 반성해 잘못을 반복하지 않겠다는 긴 글이 일본어와 한글로 적혔다. 일본의 반성을 담은 추도비가 지자체 소유 공원에 들어선 건 군마현이 유일한데, 당시 현은 정치적 행사를 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설립을 허가했다. ▷그런데 20년간 ‘한일 우호의 상징’으로 있던 이 추도비가 29일부터 철거에 들어간다. 군마현은 2주 동안 공원 전체를 폐쇄하고 추도비를 철거한다고 한다. “강제동원 역사를 부정하는 만행”이라며 철거를 반대하는 시민단체와 철거를 지지하는 우익단체의 충돌을 고려한 조치다. 시민단체가 추도비 앞에서 정치적 발언을 했다는 것을 트집 잡아 극우 세력들이 철거를 주장한 건 아베 신조 정권이 출범한 2012년 무렵이다. 이때부터 일본 각지의 한국인 위령비, 추모비가 우익 세력의 표적이 됐다. ▷이어 2014년에는 도쿄에 있는 ‘간토대지진 조선인 희생자 추도비’ 철거를 주장해 온 혐한 단체가 군마현 추도비 철거 청원을 냈고, 자민당 의원이 다수였던 현의회가 이를 받아들였다. 군마현은 일본의 첫 부자 총리인 후쿠다 다케오·후쿠다 야스오, 나카소네 야스히로, 오부치 게이조 등 자민당 출신 총리를 4명이나 배출한 보수 텃밭이다. 추도비를 지키는 시민 모임이 소송으로 맞대응하며 법정 싸움에 들어갔지만 보수 색채가 짙은 일본고등재판소에 이어 최고재판소까지 군마현의 손을 들어줬다. ▷일본 전역에 150개가 넘는 조선인 추모비가 있는데, 지방정부가 직접 철거에 나선 건 이번이 처음이라고 한다. 집권 내내 역사수정주의적 관점으로 과거사를 미화하려고 했던 아베 정권의 ‘침략의 역사 지우기’가 군마현에서 실현되고 있는 셈이다. 지난해 한일 정상의 수차례 만남으로 파행을 거듭하던 양국 관계가 정상화 궤도에 복귀하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가해의 기억을 지워 가는 일본의 변화 없는 태도가 계속되고 있어 씁쓸하다.정임수 논설위원 imsoo@donga.com}

2022년 대선을 보름 남짓 앞두고 지난 정부가 청년들의 목돈 만들기를 돕겠다며 내놓은 게 ‘청년희망적금’이다. 만 19∼34세가 매달 50만 원 한도 안에서 2년간 저금하면 연 10%에 가까운 금리를 받을 수 있는 상품이다. 은행 기본금리에 정부가 주는 장려금과 비과세 혜택이 더해져서다. 급여가 3600만 원 이하인 사람만 가입할 수 있어 “무직, 실직 청년은 어쩌란 말이냐”, “금수저 알바생은 되고 고연봉 흙수저는 안 되냐”는 불만이 쏟아졌지만 290만 명이 가입하며 히트를 쳤다. ▷한도를 꽉 채워 꼬박꼬박 저축한 청년이라면 만기가 되는 다음 달 1298만 원이 찍힌 통장을 받아들고 꽤나 뿌듯해할 것이다. 스무 번째 저금 날이던 지난해 9월,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는 1000만 원을 모았다는 인증샷이 쏟아졌다. 이들과 달리 파격적 금리 혜택을 포기하고 중간에 적금을 해지한 청년도 86만 명이 넘는다. 가입자 10명 중 3명꼴이다. 직장에 들어가면 희망적금과 비슷했던 ‘재형저축’부터 가입해 종잣돈을 모았던 부모 세대라면 혀를 찰지 모른다. ▷물론 중도 해지 청년 중엔 “티끌 모아 티끌”이 싫다며 코인이나 주식 ‘한 방’을 찾아 떠난 이들도 있다. 하지만 “저축은커녕 생활비도 빠듯하다”며 마지못해 적금을 깬 청년이 대다수다. 번듯한 일자리를 얻지 못해 소득은 불안한데 전월세 가격부터 지하철 요금까지 안 오르는 게 없으니 허리띠 졸라매고 적금부터 깨는 것이다. 희망적금의 업그레이드 버전 ‘청년도약계좌’가 외면받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도약계좌는 5년간 매달 70만 원까지 저축해 5000만 원 정도를 모으는 것인데, 가입자가 정부 예상치의 20%도 안 된다. ▷SNS에 ‘거지방’을 만들어 돈 쓰지 않는 것을 서로 독려하고, 생활비를 한 푼도 안 쓰는 ‘무지출 챌린지’에 도전하는 청년들에게 저축은 사치일 뿐이다. 취업난 속에 고물가와 고금리의 충격을 온몸으로 맞다 보니 빚 수렁에 빠진 청년도 한둘이 아니다. 2030세대가 금융권에서 대출받았다가 갚지 못한 돈은 반년 새 40% 넘게 늘었다. 빚 돌려막기를 하며 금융회사 3곳 이상에서 돈을 빌린 20, 30대는 142만 명이나 된다. ▷총선을 앞두고 이번에도 정부와 정치권이 2030세대를 겨냥한 청년 대책들을 연이어 내놓고 있다. 하지만 교통비와 아침밥을 지원하고 전월세 대출을 늘려주고 빚을 탕감해주는 땜질식 처방으로는 벼랑 끝에 몰린 청년들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어렵다. 미래 세대에게 필요한 건 푼돈 얹어주는 적금 통장이 아니라 꼬박꼬박 월급 주는 질 좋은 일자리다. 그래야 자립해서 스스로 돈도 모으고 빚도 갚아 나갈 수 있다. 청년을 ‘희망고문’하는 공약들을 가려내는 건 이제 우리의 몫이다. 정임수 논설위원 imsoo@donga.com}

김 수출의 역사는 191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말이 좋아 수출이지, 조선을 무단 통치한 일본이 완도 어민들에게 김 양식과 가공법을 가르친 뒤 생산한 김 대부분을 수탈해 갔다. 광복 이후에도 김은 외화벌이 1등 공신이어서 “완도에서는 개도 500원짜리 지폐를 물고 다닌다”는 말이 돌았다. 김 최대 주산지가 지금은 고흥이다. 1978년 일본이 자국 어민을 보호하겠다며 한국산 김 수입을 막은 이후 완도의 김 양식장이 미역, 다시마, 톳으로 바뀌면서다. ▷한 세기가 훨씬 지나 김 수출은 1조 원 시대를 열었다. 김을 대규모로 생산해 상품화하는 나라는 한중일 3개국뿐인데, 우리가 세계 시장의 70%를 휩쓸며 압도적 1위를 자랑한다. 여의도의 218배 규모에 달하는 양식장에서는 중국, 일본을 합친 것보다 더 많은 양의 김이 생산되는데 맛과 향 등 품질도 한국산이 우월하다. 특히 김 두께를 조절하는 가공 기술이 탁월해 얇은 김밥용 김은 우리만 생산할 수 있다. ▷해외에서 인기가 좋은 건 밥에 싸먹는 김보다 간식용 김이다. 김부각, 김스낵, 김칩, 김스틱처럼 형태를 다양화하고 겨자, 김치, 치킨, 아보카도 등 각양각색의 맛을 입혀 나라별 입맛을 공략했다. 아시아뿐 아니라 미국, 유럽, 중동, 남미 등 120개국으로 수출 시장을 넓힐 수 있었던 힘이다. 얼마 전만 해도 서양에서 김을 먹으면 ‘검은 종이(black paper)’를 먹는다며 조롱받았지만 지금은 할리우드 스타들이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건강과 다이어트에 좋고, 맛도 좋다’며 김 사진을 올릴 정도다. ▷그래도 서구권에서는 여전히 김을 ‘바다의 잡초(seaweed)’로 인식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미국에선 전체 가구의 5% 정도만 김을 먹는다고 한다. 이를 바꿔 말하면 우리가 개척할 시장이 그만큼 넓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래서 정부와 기업들은 바닷가에 버려진 해조류와 달리 김은 양식장에서 정성껏 키운 ‘바다의 채소(seavegetable)’라는 점을 꾸준히 홍보하고 있다. 김 산업과 수출을 체계적으로 육성하기 위해 ‘김 산업 진흥구역’도 처음 지정했다. ▷일본에선 양식 어민이 가공, 판매까지 도맡아 하는 사례가 많다. 이와 달리 한국은 양식, 마른김 생산, 수출 등으로 분업화가 잘돼 있지만 진흥구역을 만들어 한층 더 발전시키겠다는 것이다. 1차로 선정된 곳은 친환경 김으로 유명한 전남 신안·해남군, 충남 김 생산의 95%를 차지하는 서천군이다. 최근 서천에서는 전국 최초로 ‘마른김 거래소’가 문을 열었다. 거래소를 통해 입찰 방식으로 수출 계약을 진행해 김값을 제대로 받겠다는 취지다. 첫날부터 8개국 바이어들이 몰렸다고 한다. 이런 노력들이 더해져 김이 ‘바다의 반도체’라는 이름값을 하길 기대한다. 정임수 논설위원 imso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