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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발소 사인(sign)은 단순하지만 강렬하다. 빨강 하양 파랑의 선이 줄무늬를 이루고 있는 원통 모양의 사인은 이발소를 가리키는 만국 공통의 디자인이다. 18세기 스페인을 배경으로 한 ‘세비야의 이발사’의 무대에서도, 오늘날 미국 뉴욕과 서울에서도 이발소 사인은 같다. 중세 서양에서 이발사는 동시에 외과의사였다. 면도칼은 수염만 깎는 데 쓰인 것이 아니라 다리를 절단하는 데도 쓰였던 것이다. 이발사가 외과의사와 분리된 후에도 과거 흔적을 간직하고 있는 게 이 사인이다. 빨강은 동맥, 파랑은 정맥, 하양은 붕대를 의미한다. ▷수세식 변기는 어느 나라나 비슷하다. 최초의 수세식 변기는 1775년 조지프 브라마란 사람이 만들었다. 뚜껑이 달리지 않았을 뿐이지 오늘날 쓰이는 수세식 변기와 큰 차이가 없다. 수세식 변기가 중산계층에까지 유행하기 시작한 것은 1851년 영국 런던 수정궁의 만국박람회에서 전시되면서부터다. 얼마 뒤 세라믹 소재의 수세식 변기가 처음 등장했다. 이 백색의 변기에 ‘샘’이라는 제목을 달아 변기 그대로를 예술작품으로 제시한 것이 마르셀 뒤샹이다. 이른바 레디메이드 예술의 기원이 됐다. ▷코카콜라 병이 태어난 지 올해로 100년이 됐다. 코카콜라는 비밀스러운 제조법만큼이나 아름다운 디자인이 미국 문화의 상징으로까지 성장한 비결이다. 코카콜라는 모방 제품들이 나오기 시작하자 실루엣만으로도 다른 회사 제품과 확연히 구별되는 코카콜라 콘투어(contour·윤곽)병을 만들었다. 이 병은 사람이 아니라 상품으로는 보기 드물게 시사주간 타임의 커버를 장식했고 팝아티스트 앤디 워홀에게 영감을 줘 그의 작품 소재로 사용됐다. ▷스마트폰 디자인의 원형은 애플이 제시했다. 후발 주자들은 애플의 아이폰을 흉내 냈다고 해서 소송을 당했다. 디자인은 단순한 외양이 아니라 기능의 효율적인 표현이다. 특히 정보기기는 기능과 외양이 분리하기 어려울 정도로 섞여 있다. 기술과 문화가 앞서야 디자인도 선도한다. 사물인터넷, 로봇, 드론의 시대에 한국도 세계의 기준을 정하는 디자인을 만들 수 있어야 한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얼마 전 별세한 역사소설가 진순신(陳舜臣)은 부모가 대만인이지만 일본에서 자라고 배워 중국과 일본을 모두 잘 안다. 그가 어느 책에선가 일본인은 욕할 때도 소심해서 일본어에는 욕이 적고 그마저도 중국인이 보기에는 욕 같지도 않은 수준이라고 쓴 적이 있다. 그중에는 ‘사슴인지 말인지조차 구별 못하는 바보’라는 뜻의 욕도 있다. 지난해 5월 김영란법 관련 정무위 심사소위 속기록을 보면 사슴인지 말인지도 구별하지 못하는 국회의원 ‘나으리’들의 대화가 나온다. 김기식 새정치민주연합 의원: 언론 부분을 얘기하시지요. 강석훈 새누리당 의원: 논리적인 연장선상에서 보면 KBS, EBS뿐만 아니라 언론기관은 다 포함돼야 하는 게 아닌가. 강기정 새정치연합 의원: 그럴 것 같은데요. 길게 논의하지 맙시다. 이상직 새정치연합 의원: 그래요. 강기정 의원: 종편이고 뭐고 전부. 인터넷 신문, 종이 신문도 넣고. 박대동 새누리당 의원: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은 다 넣어야지. 이렇게 간단히 전 언론은 김영란법의 대상이 되고 말았다. 김기식 의원은 “언론사는 공공성(公共性)이 크므로 당연히 김영란법의 대상이 돼야 한다”고 취지를 설명했다. 공공성이란 말을 심각히 오해하고 있다. 똑같이 공공성이라고 써도 언론의 공공성은 국가의 공공성과는 범주 자체가 다르다. 국가는 전근대사회에서 군주의 것이었으나 시민혁명 이후 공공의 것이 됐다. 국가의 지도자를 국민이 뽑고 운영비는 세금으로 충당한다는 의미에서 공공의 것이 됐다. 오늘날 국가, 지방자치단체, 공기업, 공립학교는 당연히 공공의 것이다. 우리나라 사립학교는 말만 사립학교지 예산의 90%가 국가 돈으로 운영된다. 사실상 공공의 것이다. 대학병원도 그 직원은 사학연금의 큰 혜택을 받기 때문에 어느 정도 공공의 것이다. 언론은 전혀 공공의 것이 아니다. 언론의 공공성은 공공의 관심사를 다룬다는 것뿐이지 공공의 것이란 말이 아니다. 언론은 민간에 속한다는 것이 중요하다. 공공의 것도 아니면서 공공의 관심사를 다루는, 이 모순적인 것이 언론이다. 언론은 부정한 대접을 받고 기사를 쓰면 그것이 형법으로 처벌할 수준에 못 미치더라도 시장에서 신뢰를 상실하고 생존에 위협을 받는다. 국가는 그런 부정한 대접을 받고 도로를 깔아주고 다리를 놓아줘도 생존에 위협을 받지 않는다. 그래서 국가의 돈이 들어가는 곳은 김영란법으로 다스릴 수 있는 것이다. 방송은 신문과 달리 국가의 것으로 시작했다. 시간이 지나 민영화하면서 뒤늦게 언론의 모습을 갖췄다. 여전히 수신료에 의존하는 KBS와 EBS는 언론보다는, 민간에 맡겨서는 제작이 잘 안 되는 교양 프로그램으로 활로를 삼아야 하는 방송 공기업인 것이다. 그런 방송 공기업을 김영란법에 포함시킨다고 해서 민간 언론사를 줄줄이 엮어 들인 것이 사슴인지 말인지도 구별 못하는 짓이 아니고 무엇인가. ‘사슴인지 말인지도 구별 못하는 바보’란 말은 지록위마(指鹿爲馬)의 고사에서 나왔다. 진시황이 죽은 후 그 어린 아들 호해를 황제로 삼아 환관 조고가 실권을 쥐고 있었다. 그가 호해에게 사슴을 선물로 바치며 말이라고 하자 신하들은 두려워 진실을 말하지 못했고 호해는 사슴이라는 판단에 자신을 잃었다. 지록위마는 사슴인지 말인지도 구별 못하는 바보의 호응이 없으면 성립할 수 없다. 교수신문이 지난해의 사자성어로 ‘지록위마’를 꼽았다. 그게 뭘 두고 한 말인지 애매모호해서 교수신문답지 않았다. 김영란법의 언론사 끼워 넣기 같은 것이 지록위마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이완구 총리 후보자에게 쏟아지는 갖가지 의혹은 일단 제쳐 놓자. 그의 이력을 찬찬히 훑어보고 있노라면 남다른 생존과 적응능력이 느껴진다. 유신 시절 경제기획원 사무관에서 경찰 관리로, 민주화된 이후 지방경찰청장에서 국회의원으로, 여야 권력 교체가 시작된 이후 신한국당에서 자민련으로, 다시 한나라당으로 소속을 바꿔가면서 살아남았을 뿐만 아니라 이적할 때마다 오히려 입지를 강화하는 수완을 보여줬다. 감탄할 만한 수완이지만 기분 좋게만 느껴지지는 않는다. 뭐라고 간단히 설명하기는 어렵다. 자기 이익을 집요하게 추구하고, 털끝만큼도 손해 보지 않은 사람이 승승장구하는 것을 지켜볼 때 느껴지는 불편함이라고나 할까. 그는 김영삼 정권에서 집권당인 신한국당 의원이 됐다. 김대중 정권에서는 자민련에 입당해 DJP(김대중+김종필)연합에 의해 다시 집권당의 일원이 됐다. DJP연합이 깨질 때 한나라당으로 당적을 옮겼다. 당시 한나라당에서 이회창 후보가 대통령이 되지 못하리라고 예상한 사람은 찾기 어려웠다. 노무현 집권기에는 야당이긴 했지만 충남도지사가 됐다. 박근혜 정권에서 다시 집권당인 새누리당 의원이 됐다. 그가 총리 후보로까지 낙점된 데는 세종시를 둘러싼 박근혜 대통령과의 협력이 결정적이다. 세종시는 한국이 국가적 차원에서 합리적 선택에 실패한 대표적 사례다. 세종시는 노무현 정권이 ‘재미 좀 본’ 수도 이전 공약을 지킨다고 정말 법을 만들었을 때 실패했고, 헌법재판소가 그때까지 소수의 법학자 외에는 듣도 보도 못한 ‘관습헌법’을 들어 수도 이전을 위헌으로 판단했을 때 더 큰 실패의 길을 열었다. 박 대통령이 찬성해서 수도 이전을 수도 분할로 변경했을 때 더 큰 실패가 실현됐고, 이명박 정권이 세종시 수정안을 추진할 때 박 대통령이 반대함으로써 최종적으로 실패한 것이다. 세종시는 오로지 박 대통령의 당선을 위해서는 성공이었는데 그 성공을 위한 충청권 파트너가 이 후보자였다. 이 후보자가 권력에 항의해 사표를 던진 적(충남도지사 임기 만료 1년을 앞두고 사퇴한 것)이 한 번 있는데 이명박 정권에서 세종시 수정안을 추진할 때다. 세종시가 없었다면 이완구도 박근혜도 현재의 자리에 없다. 지금 박 대통령이 필요로 하는 총리의 자질은 한 나라를 경세할 만한 식견도, 내각을 다잡는 리더십도 아니다. 식견은 자신의 식견으로도 충분하고, 장관은 대면(對面)도 없이 통솔한다고 자부하는 박 대통령이다. 그에게 절실한 것은 청와대 정무수석의 역할을 내각 차원에서 해줄 수 있는 정치기술이다. 박 대통령 자신에게는 물론 없고, 그의 비서실장에게도 없고, 또 새로 낙점할 후임 비서실장에게도 분명히 없을 그런 기술 말이다. 이 후보자는 오늘 시작되는 청문회에서 각종 의혹에 대한 해명을 시도할 것이다. 안 봐도 뻔한 것은 이런 것이다. 언론 보도통제 압력에 대해서는 불찰이었다고 사과하고 억대 연봉 차남의 건강보험료를 떼먹은 일은 미처 몰랐다고 하면서 뒤늦게 납부할 것이다. 부동산 투기 의혹은 지루한 공방으로 무슨 말인지 모르게 만들어버릴 것이다. 본인의 병역 기피 의혹이나 경기대 조교수 특혜채용 의혹은 오래전 일이라 의혹을 뒷받침할 확실한 증거가 나오지 않는 한 완강히 부인하면서 버틸 것이다. 조선왕조실록을 읽다 보면 사욕(私慾)을 의리(義理)에 앞세운다고 비판하는 말을 자주 볼 수 있다. 공직자의 공적 마인드는 예나 지금이나 중요하다. 유감스럽게도 이 후보자의 삶에서는 대의(大義)를 위해 자신을 희생한 순간은 거의 보이지 않고, 있는 기회는 모조리 활용해 자기 이익을 실현한 순간은 너무도 많이 눈에 띈다. 국민의 존경을 받을 총리감이 아니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프랑스 작가 발자크의 소설 ‘고리오 영감’은 금리생활자 중심의 자본주의 사회를 배경으로 한다. 소설에 등장하는 젊은 법학도 라스티냐크는 같은 하숙집에 살고 있는 빅토린 양과 결혼하면 100만 프랑의 재산을 손에 쥔다. 그러면 스무 살에 매년 5만 프랑의 이자소득(금리 5%)을 얻는다. 그것은 당시 파리에서 잘나가는 변호사가 온갖 수완을 발휘해 쉰 살이 되어서야 얻을 수 있는 소득이었다. 빅토린 양이 매력적이진 않았지만 라스티냐크는 그녀와 서둘러 결혼해야 했다. ▷독일 경제학자 힐퍼딩은 ‘금융자본’이란 책을 썼다. 그는 자본가와 노동자 외에 금리생활자의 출현에 주목했다. 산업자본주의 시대를 지나 금융자본주의 시대가 되면 직접 기업을 운영하는 대신 저축으로 안정적인 이자를 추구하는 기생적인 계층이 등장한다는 것이다. 케인스는 자본주의의 존속을 위해 ‘금리생활자의 안락사’를 주장했고, 그 방법으로 저금리 정책을 제안했다. 그의 저금리는 물가 상승으로 금리 효과를 상쇄하는 사실상의 제로 금리를 지향했다. ▷유럽 일본은 오래전에 실질 제로 금리를 지나 실질 마이너스 금리 시대로 접어들었다. 우리나라는 올해 실질 마이너스 금리가 예상된다. 한은 기준금리가 사상 최저인 연 2.0%로 떨어지면서 은행에는 연 1%대 1년 정기예금 상품이 속속 등장했다. 한은이 예측한 올해 물가상승률은 1.9%다. 금리가 연 1.9%인 정기예금에 가입하더라도 이자에서 떼는 이자소득세와 주민세를 고려하면 금리가 물가상승률에도 미치지 못한다. ▷실질 마이너스 금리는 금리생활자에게 은행에서 돈을 빼내 다른 투자처를 찾지 않으면 ‘안락사’를 당할 수 있다는 강력한 신호다. 일본은 실질 마이너스 금리 시대에 접어들면서 상가 등 수익형 부동산이나 주식 또는 해외로 눈을 돌렸다. 어느 사회나 저금리 시대부터 재테크란 말이 유행하기 시작하지만 그때만 해도 재테크는 선택이었다. 마이너스 금리 시대엔 재테크는 필수가 된다. 예전보다 더 머리를 굴리지 않으면 안 되는 힘든 세상이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 차기 대한변호사협회장으로 선출된 하창우 변호사(61)는 직선제하에서 두 번째로 선출된 협회장이다. 판검사 출신 전관 변호사가 아니면 명함도 못 내밀던 시절인 1986년 연수원을 수료한 뒤 바로 변호사업계에 들어섰다. “하 변호사는 연수원 출신 변호사요”라는 말을 수도 없이 들었다. 그 말에는 법원이나 검찰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르는 사람이 무슨 변호사를 하느냐는 비아냥거림이 숨어 있다. 이런 설움을 딛고 30년 변호사 외길을 걸어왔다. 하루에 버스 몇 번 들어오지 않던 경남 남해의 시골 마을에서 태어났다. 독하게 공부해서 명문 경남중고등학교와 서울대 법대를 나왔다. 그가 사법시험 존치를 공약으로 내세워 당선된 데는 가난을 딛고 일어선 자신의 배경이 있다. 서울지방변호사회 회장 시절인 2008년 ‘법관평가제’를 도입했고 이제 ‘검사평가제’도 시작할 계획이다.말이 온화하고 신중한 가운데 강단이 있다. 하 변호사는 23일 취임한다. 》 숫자 늘면 권위 떨어진다는 대법원―변협 회장의 위상이 예전과 같지 않다. “최근 6년간 변협의 위상이 많이 떨어졌다. 협회장들이 회장 자리를 개인의 명예를 위해 이용했지 실제 되고 나서 국민을 위해 한 게 없다. 변협의 존재감마저 없어졌다. 심각한 문제다. 국민의 신뢰를 얻는 게 급선무다. 변호사 공급과 수요의 균형이 깨져 변호사 배출 숫자를 줄여야 한다는 목소리가 변호사 업계에 높다. 그러나 변협이 요구만 해서는 안 된다. 먼저 변협이 국민을 위해 일하는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 그러지 않고 사법 개혁이다 검찰 개혁이다 외쳐봐야 국민이 들어주지 않는다.” ―대법원이 추진하는 상고법원은 어떻게 보는가. “위헌이라고 본다. 헌법에 ‘법원은 최고법원인 대법원과 각급 법원으로 조직된다’고 돼 있다. 최고법원은 대법원이고 각급 법원은 대법원의 하급심을 말한다. 상고법원은 상고심에 대법원 외에 별도의 법원을 둔다는 것이다. 상고법원은 헌법상 위치가 없다.” ―대법원이 처리해야 할 사건이 너무 많아 상고법원안이 나온 것 아닌가. “대법관 수를 안 늘리고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것이 잘못이다. 대법원 사건을 대법원장을 제외한 나머지 대법관 12명으로 나누면 한 사람당 한 해 3000건이다. 대법관 한 명이 감당할 수 있는 선을 넘어선다. 그러다보니 심리불속행이라는 꼼수가 나왔다. 사건 중 70%를 판결 이유도 쓰지 않고 기각해버리는 것이다. 대법원까지 갔는데 심리불속행으로 사건이 종결되면 당사자는 분노한다. 대법관 수를 늘려 심리를 충실히 하는 것이 정도(正道)다. 독일은 우리나라 대법관에 해당하는 인원이 100명도 넘는다. 대법관 수를 3배인 38명으로 늘려 대법관 한 명당 사건을 1000건으로 줄이고 장기적으로 4배 정도인 50명으로까지 늘려야 한다.” ―대법원은 왜 대법관 수를 늘리려 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가. “대법관 수가 많아지면 권위가 떨어진다고 대법원은 생각한다. 헌법재판소 헌법재판관은 9명에 불과한데 대법관이 30명, 50명이 되면 대법관 가치가 떨어진다고 보는 것이다. 상고법원을 따로 두자는 것은 대법원은 한 해 100건 정도의 주요 사건만 다루고 나머지는 모두 상고법원에서 처리하도록 함으로써 대법원을 헌재에 버금가는 정책 법원으로 만들겠다는 것이다. 권위도 높이면서 자기네 일도 편하게 하겠다는 얘기인데 사법 개혁이 국민의 이익을 위해서 추진돼야지 법관들의 이익을 위해 추진돼서는 안 된다.”상고법원, 대법관 위한 제도여서 반대 ―요즘은 대법관 출신 변호사가 전관예우의 꽃이라는데…. “상고심은 숫자가 얼마 안되는 대법관 출신 변호사들이 거의 독점하고 있다. 그래서 수임료가 비쌀 뿐만 아니라 상대방이 대법관 출신 변호사를 선임하면 나도 안 할 수 없다는 식이 된다. 항소심 변호사가 상고이유서를 써도 상고이유서에 대법관 출신 변호사의 이름을 빌리지 않을 수 없다. 도장 하나 받는데 과거 3000만 원이었는데 지금은 5000만 원이다. 로펌 내부에서도 변호사들이 자기 사건을 자기 로펌에 와 있는 대법관 출신변호사에게 맡기기 위해 줄을 선다고 한다.” ―전관예우 금지법이 별 소용이 없는가. “변호사법은 종전 근무지에서의 변호사 영업을 1년간 금지하고 있지만 별 소용이 없다. 전관 변호사가 사건을 맡으면서도 선임계는 로펌에 있는 다른 변호사가 내는 식으로 우회한다. 검찰 쪽이 더 심해 검사장급 이상 출신의 변호사는 선임계도 안 내고 전화 변론을 해주는 것만으로 억대 수임료를 받는다. 이것은 단순히 탈법만이 아니라 탈세가 된다. 수입에 대한 근거가 없기 때문에 세금을 매길 수도 없다. 취임하면 전관비리 신고센터를 만들 생각이다.” ―서울변호사회장 시절 도입한 법관평가제를 자평하자면…. “2008년 서울변호사회를 시작으로 2013년 가장 보수적인 대구변호사회까지 14개 지방변호사회 모두가 참여하고 있다. 법관평가가 막말 판사를 걸러내는 등 법정 민주화에 기여했다. 실제로 예전에 고법부장 승진에서 연거푸 탈락했던 한 부장판사는 2번 베스트(best)에 뽑힌 뒤 승진한 경우가 있고 최근 워스트(worst)에 3년 연속 선정된 어느 부장판사는 사법연수원 성적은 좋았으나 고법부장 승진에 탈락하고 서울지법 부장에서도 좌천됐다.” ―변협 회장에 취임하면 검사평가를 실시하겠다고 공약했는데…. “법관평가가 7차례 이뤄지면서 정착 단계에 들어섰고 이제 검사평가를 할 시점이 왔다.” ―법관은 형사소송의 검사-변호사 대립구도에서 제3자에 해당하지만 검사는 변호사의 상대방이다. 변호사가 검사를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을까. “그렇게 따지면 법관도 마찬가지다. 민사소송에는 원고와 피고가 있고 승소 측에도 패소 측에도 모두 변호사가 있지만 이긴 변호사든 진 변호사든 법관을 평가한다. 한 검사가 여러 사건을 다루고 각각의 사건마다 다른 변호사와 다툰다. 이 검사를 상대했던 변호사들의 의견을 종합하면 부당하지 않은 평가가 나올 수 있다.”사법시험 그대로 두는 게 서민정책 ―사법시험을 존치시키겠다는 선거 공약은 현재의 로스쿨을 흔드는 것 아닌가. “로스쿨은 여러 문제를 안고 있다. 학비가 비싸고 학사관리가 잘 안되고 장학금은 부족하다. 로스쿨 교수가 법대 시절보다 3배 증가하면서 인건비가 로스쿨 유지비의 45%나 차지해 25개 로스쿨이 거의 대부분 심각한 적자 상태에 있다. 이것은 로스쿨 자체의 문제이지 사시 존치와는 상관이 없다. 로스쿨은 일본이 도입한 뒤 우리도 들여온 것이다. 일본도 로스쿨 통폐합, 로스쿨 인가 자진반납 등 파행이 계속되고 있다. 독일은 로스쿨을 도입했다 폐지했다. 로스쿨은 기본적으로 영미법제 제도다. 우리 토양과 맞지 않는다. 제도적인 보완을 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사시를 존치시키자는 것이다. 일본도 로스쿨과 함께 예비시험이란 제도가 있다.” ―사시 존치는 현 위철환 회장도 주장했던 공약이지만 큰 진전이 없었다. 앞으로 어떻게 진전시킬 것인가. “내가 할 일은 국회에 발의된 사시 존치 관련 변호사법 개정안 4건을 통합해 통과시키는 것이다. 홍준표 경남지사가 내게 사시 존치를 지지한다는 메시지를 보내와 깜짝 놀랐다. 내년엔 총선이 있다. 사시 존치는 서민정책이고 지지하는 국민이 70%에 이른다. 정치인들이 여론을 무시하기 어렵다. 새누리당은 사시 존치 쪽으로 거의 와 있다. 다만 새정치민주연합은 노무현 정권에서 로스쿨을 도입한 당사자여서 반대하고 있다. 그렇지만 여당이 당론으로 정하면 통과될 것으로 믿는다. ―최근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 변호사들의 과거사 수임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는가. “나는 아직 취임 전이라 사실관계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지는 않다. 다만 변호사법은 공무원으로서, 또는 중재위원으로 활동했던 변호사의 해당 사건 수임을 금지하고 있다. 이런 수임은 검찰의 형사처벌 대상일 뿐 아니라 변협의 징계사안이기도 하다. 국가의 돈을 받고 국가를 위해 일했던 사람이 자기가 다뤘던 사건을 맡아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내는 것은 말이 안 된다.”기소권 준 변협 세월호법안은 잘못 ―법무법인 혹은 법무법인의 다른 변호사 이름으로 수임하는 것은 어떤가. “변호사법은 법무법인도 하나의 변호사로 본다. 어느 로펌의 변호사가 과거사위원회에서 활동했다면 그가 로펌에 돌아갔을 때 그 로펌이나 로펌 내의 누구도 그 사건을 수임할 수 없다. 실제 수임료를 누가 받았는지가 중요하다. 형식적으로 다른 변호사가 수임했더라도 의뢰인은 누가 실제 변호했는지 알 수 있다. ―일부는 과거사위의 조사관을 브로커로 고용했다고 한다. “변호사법에 따르면 변호사가 변호사 아닌 사람과 이해를 나누지 못하도록 돼 있다. 조사관들이 사건을 소개해주고 돈을 받았다면 변호사법 위반이 된다.” ―대한변협은 최근 묵비권 행사와 허위진술을 강요한 민변 변호사 2명에 대한 검찰의 징계 신청을 기각했다. “자기에게 불리한 진술을 하지 않을 권리는 헌법이 보장하는 권리다. 변호사라면 당연히 피의자에게 묵비권을 행사하라고 할 수 있다. 변협이 기각할 수 있는 사안이다.” ―단순히 묵비권 행사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허위진술을 하도록 한 것이라면…. “우리나라는 미국이나 일본과는 달리 수사기관에서 한 피의자의 허위진술을 처벌하는 허위진술죄가 없다. 변호사가 피의자에게 허위진술을 시키는 것이 법을 위반했다고는 볼 수는 없다. 다만 변호사윤리규정을 위반했다고 볼 여지는 있다. 이것도 역시 허위진술을 정말 시켰는지 사실관계를 먼저 파악해야 한다.” ―위철환 회장 체제의 현 변협이 민변에 끌려 다닌다는 평가가 있다. “지난해 세월호특별법을 두고 나오는 말인 것 같다. 변협이 피해자에게 수사권과 기소권을 주는 법안을 만들었다. 그러나 그것은 근대 형사법의 대원칙인 ‘자력구제 금지(피해자는 수사 기소 재판을 할 수 없다)’의 원칙에 위배된다. 변협은 민감한 사안에서 정치적 중립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제 임기에 변협이 여야 정쟁에 휘말려 중립성을 훼손했다는 비판을 듣는 일이 없도록 할 것이다.”}

‘황석영의 한국 명(名)단편 101’이 10권으로 출간됐다. 누군가의 이름을 걸고 나오는 선집류는 흔치 않다. 그렇다 보니 황석영 자신이 자신의 작품을 뽑는 다소 민망한 일도 발생했다. 광복 이전 작가로는 염상섭 이기영 현진건 채만식 김유정 이태준 박태원 강경애 이상 김사량 등 모두 10명의 작품이 선정됐다. 한국 최초의 근대소설 ‘무정’을 쓴 이광수의 작품은 없다. ‘먹고 마시고 훌쩍이는 사람의 일상이 잘 안 보인다’는 게 그가 내건 이유다. ▷이광수와 동시대에 그 점을 격렬히 비판한 작가는 김동인이다. 그런 기준이라면 이광수는 아니더라도 김동인은 포함돼야 한다. 그러나 김동인의 ‘발가락이 닮았다’도, ‘감자’도, ‘배따라기’도 없다. 이외수의 작품은 아무리 완화된 기준을 적용해도 한국대표문학선집에 들어갈 만한 것이라고 보기 어렵다. 그런데도 이외수의 작품 ‘고수’는 당당히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이외수는 있는데 이광수도 김동인도 없는 문학선집은 공정하지 않다. ▷이광수와 김동인이 친일을 했다 해도 문학은 문학이다. 이광수의 ‘무정’은 ‘홍길동전’ 같은 조선시대 소설과도, ‘혈의 누’ 같은 개화기 신소설과도 완전히 다른 소설의 길을 열었다. 김동인은 이광수 소설에 남아 있는 도덕적 요소까지 제거하고 이미 1930년대에 단편이 이를 수 있는 최상의 경지까지 갔다. 이광수와 김동인을 문학사에서 빼는 것은 마르틴 하이데거가 나치에 동조했다고 그의 철학을 독일 철학사에서 빼는 것과 마찬가지다. ▷황석영은 근대문학의 기점을 이광수의 ‘무정’이 아니라 3·1운동 이후 염상섭의 소설부터로 잡았다. 염상섭은 식민 상황에 대한 인식을 처음으로 작품화한 작가다. 그러나 그는 첨예한 의식에 비해 그것을 형상화하는 능력은 상대적으로 떨어진다. 염상섭의 소설들이 술술 읽히지 않는 이유다. 사실 황석영의 소설도 그런 면이 있다. 작가가 나이 72세 정도 되면 세상을 아우르는 맛이 있어야 하는데 그의 컬렉션을 보면 여전히 속 좁은 황석영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대법원의 이석기 판결이 헌법재판소의 통합진보당 해산 결정 내용과 다르다는 주장은 근거가 없다. 헌재 결정은 항소심 판결 후에 나왔다. 항소심은 내란 선동 혐의만 인정하고 내란 음모 혐의를 부인했다. 헌재는 대법원 판결도 그 정도 선에서 내려질 것으로 예상했다고 한다. 헌재는 마리스타 회합에 대해 내란 선동이란 표현도, 내란 음모란 표현도 쓰지 않고 ‘내란 관련’ 회합이라고 불렀다. 헌재 결정문 어디에도 체계를 갖춘 범죄조직으로서의 RO에 대한 언급은 없다. 헌재가 RO의 실체를 인정했다고 주장하는 측도 직접적인 언급이 없다는 것을 잘 안다. 다만 ‘경기동부연합, 광주전남연합, 부산울산연합의 구성원들이 주도세력’이라는 등의 표현을 두고 RO의 실체를 인정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내란 음모, RO의 존재를 주장한 것은 헌재가 아니라 법무부와 검찰이다. 대법원은 내란 음모와 RO의 존재를 부인했고 헌재는 판단하지 않았다. 헌재는 개인의 처벌이 아니라 정당의 해산을 다루기 때문에 ‘내란 관련’ 회합의 존재와 그 회합을 주도한 것이 이석기 중심의 세력이라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봤다. 이 차이에 대해 헌재에서도 대법원에서도, 심지어 법무부에서도 불만의 목소리는 나오지 않는다. 검찰만 내란 음모가 인정되지 않아 다소 불만이 있을 뿐이다. 내란죄는 워낙 세분화돼 있어 어디까지가 내란 선동인지, 내란 음모인지, 내란 예비인지, 내란 미수인지 구별하기 쉽지 않다. 이런 때는 전문가들의 개념을 건너뛰어 팩트 그 자체로 향해야 한다. 여기서 우리가 건망증으로 잠시 잊고 있던, 마리스타 회합의 대화를 일부라도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 이석기: (지금은) 준전시가 아니라 전쟁이다. …남녘의 우리 혁명가는 조선혁명이라는 전체적 관점에서, 남쪽의 혁명을 책임진다는 관점에서 현 정세를 바라봐야 한다. …이를 위해 정치군사적 준비, 구체적으로 물질기술적 준비를 해야 한다. 이상호: 혜화동과 분당에 전화국이 있는데 거기에는 진공 형태가 돼야 하기 때문에 몇 개의 문을 통과하는 문제가 있으며 이런 것들은 목숨을 건다고 되는 문제가 아니라 굉장히 기술적이고 과학적인 준비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최전선은 (전시에) 예비검속되면 사실은 별로 할 수 있는 것은 없고… 무장을 어떻게 할 것인가가 문제다. 이영춘: 북부에는 발전이나 지하철 철도 등 국가기간산업들이 많이 포진돼 있는데 그런 곳과의 관계를 만들어 나가야 한다는 의견이 있었고, 전시 후방교란을 잘해야 된다는 의견과 예비역 중심으로 팀을 꾸리고 군사적 대응 매뉴얼을 짜야 한다는 의견이 있었다. 중요한 것은 살아 있는 이런 팩트이지 내란 선동이니 음모니 하는 사태 규정이 아니다. 이런 대화가 녹음됐다는 것이 기적 같은 일이다. 내란 선동인지 음모인지 구별할 수 없는 사람도 위험천만한 내란 관련 회합이 있었다는 사실만은 전문가의 도움 없이도 알 수 있었다. 헌재의 ‘내란 관련’이란 말이 바로 그런 것, 내란 선동이나 음모로 개념화하기 이전에 즉각적으로 우리의 공분을 자아낸 그 무언가를 지칭한다. 대법원이 내란 음모를 부인하면서도 “내란 선동은 내란 음모에 준(準)하는 불법성이 있다”고 굳이 밝힌 것도 그런 공분을 거스르지 않으려 한 것이다. 영국 철학자 프랜시스 베이컨은 언어가 진실에 이르는 것을 도와주기보다는 방해할 때 그 언어를 시장의 우상(Idola Fori)이라고 불렀다. 지금 내란 선동이니 음모니, RO의 실체가 있니 없니 하는 논란이 진실을 가리는 우상이다. 진실은 단순하다. 대다수 국민이 공분했고 그 공분에 값하는 통진당 해산과 이석기 처벌을 얻어냈다는 것이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외로운 늑대(lone wolf)는 오늘날 조직 밖에서 테러를 자행하는 개인을 지칭하는 부정적인 의미로 주로 사용되지만 본래는 그렇지 않았다. 트로츠키의 별명이 ‘외로운 늑대’였다. 트로츠키는 레닌과 달리 어떤 조직도 손에 넣으려 하지 않았다. 그는 조직의 힘을 빌려서 명령으로 사람을 움직이려 하지 않았고 오로지 말과 글로 설득하려 했다. 그 자신이 어떤 조직에도 복종하지 않다가 결국 스탈린이 보낸 자객의 도끼에 맞아 살해됐다. ▷외로운 늑대는 일견 모순적으로 들린다. 늑대는 보통 떼를 지어 다닌다. 늑대가 좋아하는 먹이는 대형 포유류인데 이것은 혼자 사냥하기 어렵다. 하지만 늑대는 어느 정도 나이가 되면 자신의 무리를 만들기 위해 무리를 떠나야 한다. 늑대에게는 이때가 큰 시련기다. 이성의 늑대를 만나 새로운 무리를 형성하면 다행이지만 그런 과정이 순조롭지 않을 경우 외로운 늑대들이 모여 평균적 늑대들보다 더욱 공격적인 무리가 만들어지기도 한다. ▷터키-시리아 접경도시 킬리스에서 실종된 18세 김모 군이 ‘이슬람국가(IS)’에 가담했다는 것이 확인되면 한국인 중에서는 자생적 이슬람 테러리스트가 된 최초의 외로운 늑대로 기록될 것이다. IS는 알카에다와 달리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활용해 세계 각지로부터 가담자를 모집하는 것이 특징이다. 미국 중앙정보국(CIA)에 따르면 IS에 가담한 외국인은 1만5000여 명이다. 중국인과 일본인도 각각 100명, 10명 정도가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김 군은 교우 관계 때문에 중학교를 그만둔 뒤 혼자 검정고시를 준비했다. 가까이 있는 부모나 친구보다 비밀 SNS로 대화한 터키의 하산이란 친구가 더 솔직하게 얘기를 나누는 사이였는지 모른다. 자신에게는 희망이 없어 보이는 사회에서 홀로 인생의 의미를 암중모색하면서 뭔가 강렬한 것에 이끌렸을 수 있다. 그것이 무엇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IS의 영향력이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절대악(絶對惡) 사우론의 자장처럼 멀리 극동에까지 미치고 있다는 불길한 느낌이 든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예수 당시의 유대인들이 예수의 처형을 요구한 이유는 신성모독이었다. 성경에 따르면 분노한 군중이 예수를 대제사장 앞으로 데려왔다. 대제사장이 예수에게 물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가.” 예수가 대답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인자(人子)가 전능하신 자의 오른쪽에 앉아 있는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볼 것이다.” 그러자 대제사장은 자기 옷을 찢으며 말했다. “이 사람이 하나님을 모독했다.” ▷프랑스 주간지 샤를리 에브도의 무함마드(마호메트) 만평은 이슬람권에서 신성모독으로 여겨졌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다른 사람의 종교를 조롱해서는 안 된다. 표현의 자유에도 한계가 있다”고 말했다. 우리는 잔인한 종교전쟁의 역사를 잘 알고 있다. 서로 다른 믿음은 존중돼야 한다. 다만 샤를리 에브도의 만평은 종교가 다른 종교를 조롱한 것이 아니라 세속 언론이 종교를 풍자한 것이다. 샤를리 에브도는 가톨릭도 풍자의 대상으로 삼는다. 교황도 종교인이라 타 종교인의 마음을 누구보다 깊이 헤아리는 듯하다. ▷근대 문화는 하나의 신성에서 다른 신성으로 옮겨간 것이 아니라 어떤 신성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데 특징이 있다. 이로부터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자유가 싹텄다. 종교의 자유에서 사상의 자유가 나오고 표현의 자유가 나왔다. 예수도 무함마드도 조롱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다는 정신이 근대 언론의 기반이다. 이를 거부하는 사람들과 싸우는 데 연대하는 것, 이것이 바로 ‘내가 샤를리다(Je suis Charlie)’의 정신이다. ▷표현의 자유에도 한계가 있다. 어느 사회든 사람을 죽이라고 선동하는 발언을 놔두지 않는다. 또 각 나라의 역사적 경험에 따른 한계도 있다. 서유럽에서 홀로코스트를 부인하는 발언은 처벌을 받는다. 우리나라에서도 북한 체제를 찬양 고무하는 발언을 허용하지 않는다. 그러나 종교적 신성과 관련해서는 다르다고 생각한다. 근대 문화는 신성모독적이다. 비판할 수 없는 절대적인 종교적 신성이 생기는 순간 다시 전근대로 돌아갈 위험에 빠질 수 있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박근혜 대통령의 별명 중에서는 이런 것도 있다. 말이 안통하네트(마리 앙투아네트의 변형). 어제 기자회견을 본 사람 중에는 콘크리트 벽을 보고 얘기하는 기분이 든다는 사람도 있었다. 어떤 이들은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 라며 체념을 토로했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저희 백성들은 견마지로(犬馬之勞)를 다하겠습니다’라는 자조 섞인 반응도 나왔다. 예전에는 좌파정권이면 우파매체가 비판하고 우파정권이면 좌파매체가 비판했는데 이번 정권에는 좌우 매체가 합심해서 비판했는데도 씨도 안 먹혔다. 박 대통령이 고집이 세서 안 먹혔다고 볼 수도 있고 ‘카더라’ 소문만 물고 늘어진 부당한 공격에 굴복하지 않았다고 볼 수도 있다. 그는 문고리 권력 3인방을 내칠 수 없다고 못박음으로써 공격자들에게 후퇴의 명분이 될 전리품도 남겨주지 않았다. 불도저라는 별명을 가진 이명박 전 대통령도 광우병 시위에 밀려 청와대 뒷산에 올라 훌쩍거렸다. 프랑수아 미테랑 프랑스 대통령은 고집 센 영국의 마거릿 대처 총리를 두고 ‘영국 안의 유일한 남자’라고 말한 적이 있다. 박 대통령도 ‘청와대 안의 유일한 남자’로 불릴 만하다. 다만 유연성이 떨어지는게 문제다. 박 대통령은 모두 발언이 끝나고 기자회견이 시작되자 딴 사람이 된 듯 어눌해졌다. 모두 발언에서 스마트팜, 할랄시장 같은 전문 용어를 수두룩하게 나열하던 어휘력도 크게 떨어졌다. 그런 식으로라면 면접시험은 100% 낙방이다. 저녁에 보고서는 열심히 읽고 공부하는지 모르지만 대화가 부족한 탓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박 대통령에게 필요한 것은 수다와 같은 대화다. 여성의 수다는 남성의 술자리 같은 것이다. 대처는 다우닝가의 총리 관저에서 회의가 길어지면 보좌관들을 위해 손수 저녁식사를 준비하면서 ‘수다’를 나눴다고 한다. 그것은 각계각층 국민을 청와대로 초청해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나 장관들의 대면보고를 필요하면 조금 더 늘려가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다. 박 대통령이 정윤회 문건 등 예민한 질문에 답변할 때 억울해하는 감정이 강하게 느껴졌다. 박 대통령은 “정윤회 씨와 이재만 등 세 비서관이 잘못이 없는 줄 진작 알았지만 이번에 검찰이 샅샅이 털어보니 정말 잘못이 없는 게 드러난 게 아니냐”고 말했다. 억울함이 근거가 없지 않다. 그러나 대통령이 억울하다고 해서 그 억울함이 국민에게 느껴지게 하는 것은 대통령답지 못하다. 영국 타블로이드판 신문 선이 휴양 중 옷을 갈아입는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의 엉덩이 사진을 찍어 보도한 적이 있다. 독일 타블로이드판 신문 빌트는 “스타킹 차림의 영국 여왕 사진을 실으면 기분이 어떻겠냐”고 분개했다. 그때 메르켈 총리는 “보도는 고상한 영국적 취향이라고 생각하기 어려운 것”이라고 말하고 소송제기는 하지 않고 끝내버렸다. 이런 총리의 반응에 대해 독일 신문들은 “진정한 위정자다운 면모”라고 평가했다. 박 대통령도 진정한 위정자다운 면모를 보여주었으면 한다. 산케이 신문에 대해서는 외교문제도 있고 하니 대통령 본인이 처벌을 원하지 않는다는 의사를 밝히는 것이 좋겠다. 세계일보에 대해서도 사과문 정도로 타협을 봐야 한다. 박 대통령이 ‘드물게 보는 사심 없는 분’이라고 언급한 김기춘 비서실장은 가정에 어려운 일이 있는 만큼 청와대가 안정되는 대로 사직을 허하는 것이 좋겠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대선 후보 시절 민정계 최창윤을, 김대중 전 대통령은 당선된 뒤 영남 출신인 김중권을 비서실장으로 임명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친노이긴 했지만 바른 소리 잘하는 유인태를 정무수석으로 뒀다. 박 대통령도 이제 생각이 좀 다른 사람을 써보면 어떨까.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자살하는 사람은 머뭇거린다. 대부분 한 번에 목숨을 끊지 못하고 여러 번 시도하다가 실패하거나 마지막으로 치명상을 가해 죽는다. 이때 치명상이 아닌 자해로 생긴 손상을 주저흔(躊躇痕·주저한 흔적)이라고 한다. 서초 세 모녀의 살인범 강모 씨(48)의 손에도 자살을 머뭇거린 흔적이 남아있었다. 아내와 두 딸을 목 졸라 죽였으나 제 손으로 자신을 죽일 용기는 없었던 것이다. ▷강 씨는 ‘연세대 경영학과 졸업, 컴퓨터 3D 디자인 업체 부장, 강남 11억 원대 아파트 보유, 혼다 어코드 보유’라는 자신의 정체성에서 쉽게 빠져나올 수 없었던 모양이다. 3년 전 사오정의 나이에 실직한 뒤 아파트를 담보로 5억 원을 대출받아 매월 400만 원씩 아내에게 생활비로 준 것도, 고시원을 오가며 출근하는 행세를 한 것도, 아내가 실직을 눈치챈 뒤에도 딸들에게 계속 비밀로 한 것도, 동창회비로 매년 30만 원을 낸 것도 그래서였는지 모른다. ▷그는 실직을 만회해보려고 주식투자를 했으나 2억7000만 원을 날렸다. 그의 진짜 위기는 주식투자 실패로 직장을 계속 다니는 척하는 것조차 힘들어진 상황에서 왔다. 딸들에게도, 양가 부모들에게도, 동창들에게도 숨길 수 없는 순간이 온 것이다. 그는 유서에 ‘막판에 왔다’고 썼다. 실직 상태에서의 2억7000만 원 손실은 대단히 큰 것이지만 막판은 경제적이라기보다는 심리적인 것이다. 11억 원의 아파트를 팔아 5억 원의 대출을 갚고 통장 잔액 1억3000만 원을 보태면 그에게는 아직도 7억3000만 원이 남는다. ▷그는 아내와 두 딸을 죽인 뒤 차로 아파트를 빠져나갔다. 충북 청주에 도착한 뒤 119안전센터에 전화해 “아내와 딸을 죽였다”고 자진 신고하고 현관문 비밀번호까지 알려줬다. 목적지도 없이 고속도로를 내달리다 경북 문경에서 검거됐을 때 자신이 어디에서 있는지도 모를 정도로 정신이 없었다고 한다. 영화 ‘국제시장’의 억새풀 같은 가장과는 판이한, 유리잔같이 깨지기 쉬운 이 시대 한 가장의 모습을 보는 기분이 몹시 씁쓸하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경제학 역사에서 가장 유명한 논쟁은 19세기 초반 영국 곡물법 폐지를 둘러싼 리카도와 맬서스의 논쟁이다. 리카도의 자유무역과 맬서스의 보호무역이 맞붙어 자유무역이 승리했다. 20세기에 다시 큰 논쟁이 케인스와 하이에크 사이에 벌어졌다. 케인스는 국가의 적극적 시장 개입을, 하이에크는 가능한 한 시장에 맡길 것을 주장했다. 처음에는 케인스주의가 승리한 듯 보였으나 결국 하이에크의 신자유주의가 승리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새로운 논쟁 구도가 형성되고 있다. 폴 크루그먼, 조지프 스티글리츠가 한편에, 그레고리 맨큐가 다른 한편에 있다. 지난해 토마 피케티의 ‘21세기 자본’이 영역되면서 전선은 크루그먼의 지지를 받는 피케티와 맨큐 사이로도 번졌다. 피케티와 맨큐가 최근 미국 보스턴에서 열린 미국경제학회 연차학술총회에서 맞붙었다. 피케티는 주요 선진국의 300년 조세 자료를 분석해 부의 소수 집중을 증명했지만 맨큐의 응답은 “그래서 어쩌라고?”였다. 부의 불균형은 경제적 기여의 당연한 대가라는 것이다. ▷피케티 훨씬 이전에, 피케티보다 훨씬 유명한 경제학자가 프랑스에 있었다. 장바티스트 세이다. 세의 법칙은 공급이 이뤄지면 수요는 자연스럽게 생겨나므로 공급 과잉은 없다는 것인데 리카도와 맬서스 논쟁에도, 케인스와 하이에크 논쟁에도 세에 대한 입장이 깔려 있다. 맬서스와 케인스는 세의 법칙을 부인한다. 자본주의는 놔두면 공급 과잉으로 위기에 빠진다는 점을 인정한 것이고 이 점을 끝까지 밀고 간 사람이 마르크스다. ▷피케티의 책 제목은 마르크스의 ‘자본’을 패러디했지만 혁명을 주장하지는 않는다. 부유세 부과 같은 정치적 개입으로 부의 소수 집중을 막을 수 있다는 것이다. 다만 부유세는 한 나라에서만 부과하면 부자가 다른 나라로 갈 수 있어 그가 주장한 것이 글로벌 부유세다. 반면 맨큐는 한 개인의 부는 세대를 거치면서 분산되고 줄어들어 자연스럽게 평균치에 접근한다고 본다. 쉽게 어느 쪽 손을 들어주기 어렵다. 그래서 논쟁은 계속된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성욕에는 정년이 없다는 말이 있다. 노인도 성욕이 있다. 그러나 노인의 성욕이 아니라 노인을 향한 성욕은 적응이 잘 안 된다. 노인에게 성욕을 느끼는 것을 노인성애증(gerontophilia)이라고 한다. 아이에게 성욕을 느끼는 소아성애증(pedophilia)과 마찬가지로 병적인 증상이다. 남자 노인을 향한 성욕을 알파메가미아, 여자 노인을 향한 성욕을 아닐릴라그니아라고 부른다. 노인성애증이라는 말은 리하르트 폰 크라프트에빙이 만들어냈다. 지크문트 프로이트와 비슷한 시기에 활동했던 정신의학자다. ▷인천의 가방 시신 살해범 정형근이 할머니를 성폭행하려다 할머니가 저항하자 살해한 것으로 밝혀졌다. 경찰 발표에 따르면 정형근은 할머니와 술을 마시다 욕정이 생겨 성폭행을 시도했다. 이 과정에서 할머니가 저항하자 옆에 있던 사기 물컵으로 할머니를 폭행해 쓰러뜨렸으며, 이후 할머니가 숨진 줄 알고 가방에 담으려다 숨지지 않은 사실을 알고 흉기로 살해했다. 살해범은 55세이고 피해자 할머니는 71세다. ▷그러나 가해자의 병적 도착으로만 노인 대상 성범죄를 설명할 수 없다. 깁스를 하거나 휠체어를 탄 사람에게 성애를 느끼는 것을 보행장애인 성애증(abasiophilia)이라고 한다. 병적 도착이라기보다는 저항이 어려운 상대를 골라 성범죄를 저지르는 것에 가깝다. 노인도 자력으로 스스로 보호할 힘이 약하다는 점에서 비슷한 면이 있다. 노인이 쉽게 강도 절도의 피해자가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정상적인(도착적이지 않은) 성범죄의 피해자가 될 수 있다. ▷2년 전 경기 평택시의 한 병원에서 62세 여성 환자가 33세 남자 간호조무사로부터 성폭행을 당했으나 가족한테 알리지도 못했다. 뒤늦게 경찰에 신고했지만 “먼저 유혹하지 않았으면 그랬을까”라는 주변의 싸늘한 시선에 시달려야 했다. 인천 살해 사건도 성폭행으로 끝나고 말았다면 71세 할머니가 쉽게 신고할 수 있었을지 의문이다. 범인은 이런 점을 노린 건지 모른다. 여성 노인의 성범죄 피해에 사회가 경각심을 가져야 할 때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12월 29일자 사설 ‘이석기 내란죄인지도 모르고 구명 나선 카터센터’ 중 이 씨가 항소심에서 유죄판결을 받은 것은 내란 음모가 아니라 내란 선동입니다. ◇29일자 A6면 ‘광고총량제, 지상파방송만 살찌워’ 기사에서 방송협회가 광고총량제에 따른 지상파방송 매출 증가액을 연간 2759억 원으로 보고 있다는 내용은 올 9월 한국방송학회 세미나에서 나온 것으로 방송협회와는 관계없습니다.}

헌법재판소 결정으로 통합진보당이 해산되면서 의원직을 박탈당한 이상규 전 의원과 나는 대학 동기다. 동기라고는 하지만 학과 인원이 너무 많아 학교 다닐 때는 잘 몰랐다. 그가 정치 활동을 시작한 후에야 간혹 동기들이 모이는 자리에서 만나 얘기를 나눴다. 소탈한 성격이지만 진지하면서도 실천력이 느껴지는 친구다. 그는 2012년 총선 때 서울 관악을에서 후보단일화 여론 조작에 연루돼 물러난 이정희 전 대표의 자리를 이어받아 의원이 됐다. 운이 좋았지만 그의 격의 없음과 부지런함도 한몫했을 것이다. 그는 의원이 된 후에도 밤늦게 귀가할 때는 버스 종점 주변에서 삼삼오오 어울리는 주민들의 술자리에 끼어들어 한잔씩 하고 헤어졌다고 한다. 그는 정무위에 배치된 걸 못마땅해했다. 대학 졸업 이후 해온 게 노동운동밖에 없기 때문에 환경노동위에서 활동하고 싶었다고 한다. 그가 정무위 소관인 금융을 잘 알 턱이 없다. 한번은 그가 ‘자본시장연구원’이 주최한 세미나에 참석해 청중석 맨 뒷자리에 앉아 경청하는 사진이 신문에 나왔다. 자본시장연구원장이 내 고교 동기라 어느 술자리에서 물어보니 행사 전에 그가 온다는 얘기는 없었고, 행사 때 직원이 보고 알려와 가서 인사를 나눴다고 한다. 공부를 해서라도 의원 일 제대로 하고 싶어 하는 마음이 느껴졌다. 그는 의원이 되고 난 뒤 지역구인 난곡 꼭대기에 2억9500만 원짜리 아파트를 2억7500만 원 빚을 내 샀다. 오십 나이에 부인과의 사이에 두 살과 여섯 살짜리 자녀를 두고 있다. 난생처음으로 집도 장만하고 가정다운 가정을 꾸려보려 했는데 의원직 박탈로 다시 실업자가 됐다. 어쩌면 집을 팔고 의원이 되기 전에 하던 건설현장 배관공 일을 다시 해야 할지 모른다. 그는 김선동 전 의원처럼 국회에서 최루탄을 터뜨리지도 않았고, 이 전 대표처럼 여론 조작에 연루된 적도 없고, 무엇보다 이석기 김미희 김재연 전 의원의 RO(혁명조직) 모임에 참석하지도 않았다. 그 모임은 경기도당의 모임이어서 서울시당 소속인 그는 거기에 갈 이유가 없었다고 한다. 그에 따르면 철거민 동네인 성남 지역을 중심으로 형성된 경기도당은 예전부터 수뇌부를 정점으로 규율이 강한 조직이다. 통진당은 지역 운동권의 연합체인 전국연합으로부터 시작했기 때문에 같은 당이라도 경기 서울 울산 광주·전남 등 시도당별로 조직과 활동 방식은 큰 차이가 난다고 한다. 내가 그의 면전에서 통진당 해산은 당연한 것이라고 주장할 때도 그는 자신과 생각이 다른 사람과는 말도 하지 않겠다는 식의 태도는 보이지 않았다. 그는 헌재의 통진당 해산 결정을 비판했지만 이런 말을 덧붙였다. “통진당이 해산 이전에 이미 국민의 마음을 얻는 데 실패했다.” 국민의 마음을 거론한 데서 우리가 그동안 이념이 다름에도 대화를 나눌 수 있었던 공통의 기반 같은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과거 주사파 대부 김영환 씨가 밀입북해 받은 돈 중 500만 원을 1995년 그에게 줬다는 증언을 완강히 부인한다. 그는 이적단체에 연루돼 처벌받은 적은 없지만 검찰에 따르면 일심회의 대북보고서에 ‘주체사상의 중심이 확고히 선 동지’로 표현돼 있다. 그의 비밀을 내가 속속들이 알지 못한다. 다만 약 20년 전 그 일은 김 씨의 말 이외에는 지금 와서 증명할 방법이 없다. 이런 식의 주장은 매카시즘만 조장할 뿐이다. 헌재의 통진당 해산 결정은 그 결정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제 역할을 했다. 통진당은 역사의 패배자가 됐다. 경기도당의 RO 모임은 일반 국민만이 아니라 다른 시도당의 통진당원들에게도 충격적이었을 수 있다. 이제 해산을 당한 쪽에도 스스로를 돌아봐서 변화를 모색할 여지를 줘야 한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과거 왕조 시대에는 왕의 이름을 피하는 기휘(忌諱)의 풍습이 있었다. 임금님 같은 높은 분의 이름은 함부로 불러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기휘는 사라졌지만 기휘를 낳은 심리는 남아 있다. 대통령을 소재로 하는 드라마나 영화는 미국에서든 한국에서든 처음 나왔을 때는 상당히 조심스러웠다. 그리고 여전히 현직 대통령을 다루는 드라마나 영화는 쉽게 만들어지지 않는다. ▷북한에서 김정은은 최고 존엄이라 불린다. 존엄은 라틴어로 아우구스투스다. 고대 로마에서 최초의 황제가 아우구스투스라는 호칭을 얻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초기 기독교의 대표적 교부철학자다. 프랑스에는 존엄한 필리프(필리프 오귀스트)로 불린 위대한 왕이 있었다. 북한은 존엄만으로도 모자랐는지 최고라는 수식어를 덧붙였다. 최고 존엄은 우리 식으로 지존(至尊)인데 그런 말은 기독교적 신 아니면 무협지 속의 비현실적 영웅에게나 붙이는 말이다. ▷북한 최고 존엄의 암살을 다룬 미국 코미디 영화 ‘인터뷰’의 극장 개봉이 무산됐다. ‘평화의 수호자(GOP)’라는 정체불명 집단이 얼마 전 “2001년 9월 11일을 기억하라”고 위협하자 영화관들이 상영을 포기했고 결국 영화제작사 소니픽처스가 개봉 계획을 철회했다. 지난달 GOP의 소니 해킹 당시 해킹에 쓰인 악성 소프트웨어에서 한글 코드가 발견돼 북한의 소행일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최고 존엄 앞에서 입을 가리고 웃는 황병서, 양손을 공손히 포갠 최룡해가 보였을 반응이 짐작이 간다. ▷이름과 이미지는 오늘날도 묘한 주술적 힘을 갖고 있다. 어느 나라든 자국 지도자가 암살되는 영화에 거부감을 보일 것이다. 그러나 일단 제작된 이상 테러 위협에 굴복해 상영하지 않는 것은 또 다른 문제다. 유럽에서 무함마드 캐리커처는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지만 독일은 덴마크 만평가 쿠르트 베스테르고르에게 언론상을 수여해 유럽에서 자유의 지표로 삼았다. 미국 작가 티머시 스탠리는 “완전히 쓰레기 같은 평가를 받은 영화가 미국의 표현의 자유를 중대한 시험대에 올려놨다”고 논평했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재미교포 신은미 씨가 종북 논란 토크 콘서트에 대해 검찰 조사를 받기 위해 출두하면서 “내가 한 말은 모두 지난해 문화부 우수 문학도서로 선정된 ‘재미동포 아줌마, 북한에 가다’에 나온 말”이라고 주장했다. 우리가 흔히 문화부 우수도서로 알고 있는 것은 우수 학술·교양 도서다. 우수 문학도서는 좀 다르다. 우수 학술·교양 도서는 좋은 책 출판을 진흥한다는 목적이 크지만 우수 문학도서는 책을 널리 읽힌다는 독서 진흥의 성격이 강하다. ▷우수 문학도서 선정은 2012년까지 한국도서관협회가 담당했다. 그러나 한국도서관협회가 도서관 이용률만 고려해 베스트셀러처럼 잘 읽히는 책 위주로 책을 선정한다는 비판이 제기되자 지난해 선정권이 시민단체인 ‘책 읽는 사회문화재단’으로 넘어갔다. 이 재단 홈페이지에는 재단과 연대한 시민단체로 문화연대, 한국작가회의(옛 민족문학작가회의), 민주화를 위한 전국교수협의회, 전국교직원노동조합 등 주로 좌파 성향의 단체들이 소개돼 있다. ▷우수 문학도서는 5개 분야로 나뉘어 선정되는데 신 씨의 책은 수필 분야에서 뽑혔다. 수필 분야 선정위원장은 문학평론가 황광수 씨였다. 그는 한국작가회의 문화정책위원장, 민족문학연구소 소장을 지냈다. ▷신 씨의 책이 우수 문학도서가 된 것은 ‘책 읽는 사회문화재단’이 지난해 선정 작업을 주도하지 않았다면 상상하기 어렵다. 올해부터는 우수 문학도서 선정 작업이 우수 학술·교양 도서 선정을 주관하는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에 합쳐졌다. 그러나 우수 학술도서와 우수 교양도서의 각각 11개 분야에 이미 문학이 한 분야로 들어가 있는데 우수 문학도서를 또 따로 선정한다는 건 우습다. 우수가 너무 많으면 우수의 격이 떨어진다. 문화부가 우수를 남발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재미교포 신은미 씨의 종북 논란 강연에 항의해 일명 ‘로켓 캔디’를 던진 전북 익산의 고3 학생 오모 군은 범죄자이긴 하지만 청소년이다. 그런데도 입만 열면 관용을 외쳐온 자칭 진보주의자들이 어느 사회든 가장 기본적인 관용의 대상인 청소년에게 정작 털끝만큼의 관용도 보이지 않는다. 이택광 경희대 교수는 SBS 라디오의 한 시사프로그램에서 오 군의 행위를 ‘전형적인 테러범의 방식’ ‘우리가 살고 있는 공동체적 기반 자체를 부정하는 행위’라고 불렀다. 오 군의 행위는 테러임에 틀림없지만 성인이 아니라 사리분별이 흐린 청소년의 행위다. 그가 직접 만들어 양은냄비에 담은 폭발물이 얼마나 대단한 살상력을 가졌는지도 의문이다. 그런데도 다 큰 성인이 엄청난 성능의 폭발물을 지니고 테러를 시도한 것처럼 말하는 것은 균형감을 현저히 상실한 태도다. 프랑스에는 아프리카계의 위험한 청소년들이 많다. 말만 청소년이지 성인이나 다름없이 키가 크고 힘이 센 그들이 약한 여성이나 노인, 아시아계를 상대로 하는 갈취행위나 이유 없는 방화 및 손괴행위를 직접 당해보면 화가 나지 않을 수 없다. 프랑스는 이 청소년들의 범죄행위로 골머리를 앓은 지 수십 년이 됐다. 이들에 대한 처벌을 강화해보려고 수차례 시도했지만 매번 청소년을 성인으로 취급해서는 안 된다는 진보주의자들의 반대에 부닥쳐 실패하고 만다. 진보는 원래 그런 것이다. 오 군은 일간베스트저장소나 네오아니메 같은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활동했다고 한다. 이런 커뮤니티에 극우적이라고 볼 만한 주장도 적지 않다. 오 군도 그런 성향을 일부 공유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오 군처럼 이런 커뮤니티에서 활동하는 이들은 상당수가 넓은 의미의 청소년이다. 이들이 잘못된 길을 간다면 어른들이 계도해야지 조롱이나 할 일은 아니다. 진중권 동양대 교수는 나이 오십이 넘은 어른이, 그것도 학생을 가르치는 교수라는 사람이 애들을 상대로 일베충이니 찌질이니 성적 루저(loser)니 하는 말을 서슴없이 퍼붓는다. “일베는 사회의 낙오자들이 권력에 대한 좌절된 욕망에서 자신을 권력과 환상적으로 일체화한 후 그 환각에 빠져 권력이 시키지도 않았는데도 자발적으로 권력의 주구(走狗)가 되어 사회적 약자를 공격하는 것”이라는 식의 독설도 주저하지 않는다. 전상진 서강대 교수는 한겨레신문에 “(오 군 등의 행위는) 현 상황에 만족하지 못하는 이들이 자기보다 힘센 자들을 공격하는 대신 약하고 만만한 희생양을 골라 불만을 배설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 말은 오 군이 파시스트라는 것과 다름없다. 그러나 겨우 고3인 학생이 무슨 사회적 낙오자여서 사회에 불만을 배설할 필요를 느꼈을까. 또 고3 학생이 권력에 대한 무슨 좌절을 맛보았다고 권력과 환상적 일체화를 추구했을까. 오 군은 단순히 영화 ‘택시 드라이버’의 로버트 드니로처럼 제 눈에 엉망인 사회를 자신이 나서 바로잡겠다는 영웅주의적 망상에 사로잡힌 것인지 모른다. 사회에 대한 비판적 인식은 좋은데 폭력으로 해결하겠다는 데서 잘못된 길로 들어섰다. 난 진보주의자가 아니라서 청소년도 잘못했으면 단단히 혼나야 한다고 생각하는 쪽이다. 다만 청소년기는 인생에서 젤(gel)과 같은 시기다. 실수는 하지만 아직 굳어지지 않은 그들을 확신범으로 몰아서는 안 된다. 많이 배운 어른들이 사고도 단순하고 글도 서툰 청소년들을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로 비웃고 조롱하는 것은 더 위험한 심리 상태로 몰고 갈 뿐이다. ‘싸가지 없는 진보’의 저자 강준만 씨가 책 속에서 공감 가는 말 한마디를 했다. “일베는 싸가지 없는 진보의 부메랑일 수 있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재미 작가 수키 김이 쓴 북한 여행기 ‘Without you, there is no us’(한글판 제목 ‘평양의 영어선생님’)가 작가 윤리에 관한 미묘한 논란에 휩싸였다. 이 책은 그가 2011년 평양과학기술대에서 6개월간 학생을 가르친 체험을 바탕으로 쓴 글이다. 김진경 평양과기대 총장은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수키 김의 태도와 책, 거짓말로 정말 화가 난다. 그가 우리를 속였다”며 “특히 대학교수들이 선교사라는 것은 잘못된 주장”이라고 비난했다. 김 총장도 평양에서 대학을 꾸려나가자면 어려움이 많을 것이다. ▷수키 김은 블로그를 통해 자신을 변호했다. “기자로서 북한을 3차례 다녀왔을 즈음 그곳에 정착하지 않으면 선전만 해줄 뿐 의미 있는 얘기를 쓸 수 없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때 평양과기대에서 가르칠 기회가 났다. 난 실명을 사용했고 대학은 내가 작가임을 알 수 있었다. 비밀 준수 계약에 서명한 적도 없고 글을 쓰지 않기로 약속한 적도 없다. 평양과기대 교수들이 선교를 하는 것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지만 그들의 목표는 선교의 교두보를 확보하는 것이다.” ▷황석영은 1989년 한 달 남짓 북한을 다녀와 ‘사람이 살고 있었네’라는 황당한 방문기를 썼다. 북한이 보여주는 것만 둘러본 황석영의 글에 비해 수키 김의 책은 ‘잠입 저널리즘(undercover journalism)’의 사실 추구 정신이 빛난다. 그는 영리하게도 북한의 유일한 사립대인 평양과기대의 특수성을 이용할 줄 알았다. 다만 선교사 운운한 것은 할 말, 안 할 말 가리지 못한 것 같아 아쉬움이 남는다. ▷소련 작가 솔제니친이 1956년 ‘수용소 군도’를 써내면서 스탈린 체제에 침묵했던 서구의 지식인들을 부끄럽게 했다. 우리에게는 1990년대 이후 탈북자들의 생생한 증언이 ‘수용소 군도’ 같은 역할을 했다. 아직도 재미교포 신은미 씨처럼 북한을 몇 번 여행하고 와서는 북한은 활기찬 곳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 수키 김은 북한의 엘리트 계층 자녀에게조차 억압적 체제가 가져오는 무지와 불안을 예리하게 잡아냈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허니버터칩이 8월 처음 출시됐을 때는 두 개 사면 한 개 더 주는 ‘2+1’ 행사까지 했다는데 요즘은 허니버터칩 먹어봤다는 사람을 찾기 힘들다. 가게에 갔다가 허탕 치고 돌아왔다는 얘기만 한다. 다들 허니버터칩만 찾으니까 물량을 확보한 일부 가게들은 팔리지 않는 다른 과자를 묶어서 팔기도 하는 모양이다. 정재찬 공정거래위원장 후보자는 2일 “허니버터칩 같은 인기상품을 비인기상품과 같이 구입하도록 강제하는 것은 법이 금지하는 끼워 팔기가 될 수 있다”고 밝혔다. ▷과자의 유행 같은 것에 별로 민감하지 않은 나도 지난주부터 이곳저곳에서 허니버터칩 얘기를 듣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제조사인 해태가 일부러 생산량을 줄여 품귀 현상을 빚는 신종 상술이 아닌가 하고 의심했다. 해태가 공장을 풀가동하다가 기계가 멈춰 어쩔 수 없이 생산량이 줄었다는 얘기도 들렸다. 어제 해태는 해명을 내놓았다. “강원도 원주 문막의 공장에서 3교대 24시간 생산체제를 갖추고 라인을 풀가동하고 있으나 주문량을 따라잡지 못하고 있다.” ▷유행이란 게 구름과 같아서 어떻게 일어나고 흩어질지 정확히 알기 어렵다. 허니버터칩이 인기를 끈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지만 학생들 사이에 입소문이 나고 일부 인기 연예인들이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등에서 경쟁적으로 언급하면서 폭발적인 반응이 일어났다는 게 그럴듯해 보인다. 유튜브를 통한 입소문으로 세계적 히트를 친 싸이의 ‘강남스타일’ 정도는 아니더라도 SNS 시대에 입소문이 무섭다는 걸 보여준 또 하나의 사례다. ▷올해의 유행 상품에 허니버터칩이 추가될 수 있을까. 감자칩이 짠맛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으리오마는 허니버터칩은 감자칩은 짠맛이어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파괴했다. 출시 직후 허니버터칩을 먹어본 사람들 얘기를 들어보면 약간 달콤하고 고소한 감자칩이라고 한다. 과자 이름 그대로 감자칩에 꿀(허니)과 버터를 가미했다. 서양식 감자칩이 한국 사람 입맛에는 너무 짠 게 사실이다. 허니버터칩의 인기가 거품인지 어떤지는 아직 먹어보지 않은 사람이 많아 좀 더 지켜봐야겠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