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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린, 영양 등 동물의 움직임을 그대로 재현한 퍼핏(꼭두각시 인형) 의상, 아프리카의 색깔과 동물의 특징을 살린 마스크. 상상력을 자극하는 퍼포먼스는 무대를 생명력이 꿈틀대는 초원으로 탈바꿈시켰다. 그 위에 감성 넘치는 음색으로 퍼져 오르는 ‘Can You Feel the Love Tonight’. 드디어 진짜 ‘사자 왕’을 마주하는 순간이었다. 30일 오전 서울 중구의 한 특급호텔에서 열린 뮤지컬 ‘라이온 킹’의 미리보기 행사는 짧지만 강렬했다. 인터내셔널 투어에 나선 배우들이 들려준 주요 곡들은 역시 ‘원곡’의 힘이 느껴졌다. 11월 대구에서 시작하는 첫 한국공연을 앞두고 선보인 이번 무대는 월트디즈니 인터내셔널 프로덕션의 펠리페 감바 총괄이사와 ‘라피키’ 역을 맡은 배우 은체파 피쳉 등 주요 관계자들이 대거 참여해 한국 무대에 대한 기대감을 드러냈다. 이번 내한공연은 현지 브로드웨이 공연을 그대로 들여온 만큼 오리지널한 무대 장치와 의상, 소품들이 중요한 관전 포인트로 꼽힌다. 피쳉은 “배우들이 입는 무거운 코르셋, 가면 등의 의상과 소품들은 이 극을 더 특별하고 아름답게 만들어준다”고 말했다. 아프리카를 무대로 한 뮤지컬인지라 배우들의 음색도 이국적이지만, 아프리카 브라질 쿠바의 다양한 전통악기가 들려주는 조화로운 색채도 흥을 돋운다. 특히 원근감을 활용한 누 떼의 협곡 질주 장면은 극의 하이라이트로 꼽을 만하다. ‘라이온 킹’은 설명이 필요 없는 뮤지컬의 블록버스터. 20여 개국 100개 이상 도시에서 공연하며 9000만 명 이상이 관람했다. 사실 국내에서도 2006년 샤롯데에서 무대에 올린 적이 있으나 일본의 한 제작사를 통해 들여온 한국어 버전 공연은 막대한 제작비를 쏟아붓고도 흥행에 실패했다. 당시 라이브 공연 대신 녹음 연주를 쓰는 등 원작을 제대로 재현하지 못했다는 평을 받았다. 뮤지컬계에선 “세계에서 ‘라이온 킹’이 흥행에 실패한 유일한 나라”라는 얘기가 나올 정도였다. 감바 이사는 “당시 일본 제작사가 한국 시장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고 완성도도 떨어졌다”며 실패 요인을 되짚었다. 감바 이사는 “100명 이상의 해외 인력이 함께 움직이며 오리지널 장비와 소품을 그대로 들여왔다. 하나의 도시가 이사를 오는 것과 같은 공을 들였다”며 “한국 뮤지컬 관객 수준이 매우 높아진 걸 알고 있다. 그들을 충분히 매료시킬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다짐했다.박선희 기자 teller@donga.com}

‘빅토르 위고는 패하지 않는다.’ 제작비 175억 원을 투입한 대형 창작뮤지컬 ‘웃는 남자’는 이 법칙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줬다. 세계적 명작 뮤지컬인 ‘레미제라블’ ‘노트르담 드 파리’ 역시 빅토르 위고의 원작을 바탕으로 했다. 선악의 대립, 사회의 부조리, 휴머니즘이 생생히 살아 숨쉬는 강력한 서사는 극의 뼈대를 탄탄히 잡아준다. 여기에 프랭크 와일드혼이 작곡한 넘버에 장대한 규모의 무대, 화려한 출연진까지 더해지며 이 작품은 매진 행렬 중이다. ‘레미제라블’ ‘오페라의 유령’ 등에 출연한 배우 양준모(38)가 이 작품을 하기로 한 결정적 계기 역시 위고였다. 그는 ‘웃는 남자’에서 약장수이자 유랑극단 두목인 조연 우르수스로 분했다. 인신매매단이 귀족의 구경거리로 삼기 위해 입을 찢고 버린 어린 주인공 그윈플렌을 혹한에서 구해주고 양아버지가 돼 주는 인물이다. 서울 용산구의 한 카페에서 24일 만난 그는 “위고의 작품에서는 ‘레미제라블’의 장발장, ‘노트르담 드 파리’의 콰지모도처럼 작가 자신을 대변하는 듯한 인물이 있는데 이 작품에선 우르수스가 그렇다”며 “한마디로 ‘신과 대화하고 싶어 하는 이’다”고 말했다. 2015년 일본 공연에서 ‘레미제라블’ 장발장 역에 발탁돼 호평을 받은 그는 이를 계기로 위고에게 푹 빠졌다. 작품을 제안받고 원작을 정독했다. “우르수스는 무뚝뚝하고 염세주의적이지만 잔정이 있어 한국 사람들이 공감하기 좋은 전형적 인물이라고 생각하기 쉬워요. 하지만 내면 깊이 들어가면 위고가 전하고 싶었던 많은 이야기가 감춰져 있습니다.” 그는 배역을 고를 때 역할의 비중보다는 자신이 얼마나 잘 표현할 수 있는지를 기준으로 삼는다. “우르수스는 입이 찢어진 채 광대로 자란 그윈플렌에게 세상의 비정함을 일러주며 ‘부자들의 천국은 가난한 자들의 지옥’이란 작품 주제를 직접적으로 전달해줍니다. 창작 초연은 인물의 큰 선을 직접 완성하고 이후 공연에서의 방향성을 제시해야 하기 때문에 책임감이 크지만 재미도 있어요.” 박효신(그윈플렌 역)과 공연을 가장 많이 해 이젠 얼굴만 봐도 서로 눈물이 날 정도로 작품에 몰입하고 있음을 느낀다. 성악가 출신 뮤지컬 배우인 그는 스스로를 ‘성악가수’가 아니라 ‘성악배우’라고 여길 만큼 배우로서의 정체성을 중시한다. 뮤지컬, 드라마, 영화 등 장르를 가리지 않고 해보고 싶다고 했다. 그중 최종 목표는 오페라다. 목표는 눈앞으로 다가왔다. 올해 11월 서울 예술의 전당에서 열리는 바그너 오페라 ‘니벨룽의 반지’ 시리즈로 15년 만에 성악가로 무대에 서기 때문이다. 그는 “뮤지컬을 하다가 다시 성악을 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어 6, 7년 전부터 계속 준비해 왔다”며 “분야를 자유롭게 넘나들면서 좋은 공연을 보여주는 배우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8월 26일까지 서울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서 공연한 후 9월 4일∼10월 28일 서울 블루스퀘어 인터파크홀에서 다시 열린다. 6만∼15만 원. 박선희 기자 teller@donga.com}

바닷가에 사는 소년은 바다를 보며 늘 돌아가신 할아버지를 생각한다. 생전 할아버지는 바다와 하늘이 만나는 곳이 있다고 이야기해줬다. 소년은 그곳이 과연 어떤 곳인지 궁금하다. 할아버지를 생각하며 직접 배를 만든 소년은 혼자 항해를 시작한다. 신비로운 바다 생물들과 망망대해를 지난 어느 시점, 할아버지 말처럼 정말 바다와 하늘이 만나는 지점에 온다. 하늘로 둥실둥실 떠오른 배. 소년은 배가 날아 오른 곳에 뜬 둥근 달이 할아버지의 얼굴임을 알아차린다. 소년이 꿈속에서 겪는 신비로운 탐험을 통해 추억, 사랑, 용기를 되새겨볼 수 있게 해준다. 박선희 기자 teller@donga.com}

태준은 우연히 과학실에서 털장갑을 발견한다. 손에 끼면 투명인간이 되는 신비한 힘을 지닌 장갑이다. 그 장갑은 신비한 힘을 가졌다는 ‘여우의 신’이었던 것이다. 태준은 그동안 자신을 괴롭혔던 친구들을 골려주는 데 장갑을 적극 활용한다. 하지만 이렇게 장갑을 끼고 나쁜 짓을 할수록 자신이 점점 여우로 변한다는 사실을 태준은 알지 못했다. 결국 여우가 된 태준은 신비한 숲에 떨어져 모험을 떠나면서 인간의 무분별한 탐욕으로 자연이 얼마나 파괴되고 고통받고 있는지를 깨닫게 된다. 판타지적인 이야기를 통해 공생의 소중함을 일깨워준다. 박선희 기자 teller@donga.com}

프랑스 대표 뮤지컬 ‘노트르담 드 파리’는 국내에서도 누적관객 100만 명을 넘긴 대형 히트작이다. 15세기 프랑스 사회상을 그려낸 빅토르 위고의 ‘노트르담의 꼽추’를 원작으로 극심한 빈부격차와 교회의 타락, 지배계급의 위선과 대비되는 종지기 콰지모도의 순수한 사랑을 그려낸다. 올해는 한국어버전 공연 ‘10주년’을 맞이해 다시 무대에 올랐다. ‘대성당의 시대’가 울려 퍼지며 웅장하게 문을 연 무대는 원작의 명성대로 현대무용과 애크러배틱 등 앙상블의 고난도 안무가 몰아치며 초반부터 시선을 사로잡는다. 예술성을 강조한 안무, 비장미 넘치는 무대와 상징적인 조명 등은 극 초반부터 웨스트엔드나 브로드웨이 스타일과는 구별되는 프랑스 뮤지컬만의 특색을 뚜렷이 내보인다. 대사나 배경설명 없이 노래로만 이뤄진 작품이라 줄거리를 미리 숙지하지 못한 관객들에게 1막 구성은 다소 산만하게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주요 서사와 캐릭터의 윤곽이 뚜렷해진 2막부터는 몰입도가 몇 배 높아진다. 집시 여인 에스메랄다는 성당 종지기인 꼽추 콰지모도, 주교 프롤로, 근위대장 페뷔스 세 남자의 사랑을 동시에 받는다. 하지만 진실한 사랑은 부모에게조차 버림받은 추한 외모의 꼽추 콰지모도뿐이다. 그녀를 욕망했던 프롤로나 페뷔스 모두 그들의 입지와 탐욕을 위해 그녀를 잔인하게 희생시켜 버린다. 에스메랄다가 희생된 뒤 콰지모도가 부르는 ‘춤을 춰요 에스메랄다’ 같은 넘버의 깊은 울림이 불의한 사회, 부패한 지배계층에 대한 분노와 맞물려 절정에 달하는 이유다. 대문호 작품이 가진 ‘서사의 힘’을 뼈대로 감동적인 넘버를 잘 조화시켰지만 예술적 상징성에 방점을 둔 무대와 조명, 전문 공연을 방불케 하는 안무의 비중 등은 호불호에 영향을 미칠 수 있을 것 같다. 무대구성이 단순한 편인 데다 노래로만 이야기가 전개돼 극적인 대립이나 감정 전달이 전적으로 배우의 역량에 달린 장면이 많다. 선호하는 배우인지에 따라 만족도가 차이 날 수 있다. 8월 5일까지 세종문화회관 대강당. 7만∼14만 원. ★★★ 박선희 기자 teller@donga.com}

뮤지컬 ‘프랑켄슈타인’은 한국 창작 뮤지컬의 대표적 성공 사례로 꼽힌다. 2014년 초연부터 호평을 받았고 일본으로 수출되는 등 완성도와 흥행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았다. 올해 세 번째 시즌을 맞아 작품의 완성도를 한층 높였다. 올해 공연에서는 초연 멤버 외에 새로 합류한 배우들이 캐릭터 구현의 폭을 넓히고 있다. ‘프랑켄슈타인’이 공연 중인 서울 용산구 블루스퀘어에서 ‘어벤저스 조합’이란 평을 받으며 열연 중인 배우 민우혁(35), 박혜나(36)를 19일 만났다. 이들은 생명 창조에 광적으로 집착하는 빅터 프랑켄슈타인과 세상에서 유일하게 그를 이해해주는 누나 엘렌 역으로 이번 공연에 처음 참여했다. 민우혁은 “워낙 많은 사랑을 받은 작품인 데다 초연 배우들이 탄탄히 소화해 부담이 컸지만 새 배우들이 또 다른 캐릭터를 만들어내고 있다는 격려에 큰 힘을 얻고 있다”고 말했다. 극 속에서 두 사람은 유일한 혈육이자 서로에게 가장 소중한 존재다. 두 배우는 실제 무대 안팎에서 서로 많이 의지한다고 했다. 박혜나는 “빅터 역을 한 몸으로 버텨내기 쉽지 않을 텐데도 우혁 씨는 힘든 티를 내지 않고 분위기를 상승시켜주는 유쾌한 배우”라며 “그의 우렁찬 첫 대사만 들어도 오늘은 또 어떤 무대가 될까 기대된다”고 말했다. 민우혁은 “혜나 씨야말로 무조건 의지해도 좋을 ‘아낌없이 주는’ 배우”라며 “이제는 눈만 봐도 울컥할 정도로 몰입이 된다”고 말했다. ‘프랑켄슈타인’은 배우들을 극한으로 몰아붙인다. 신의 영역에 도전한 인간의 광기와 상처를 그려내기 위해 깊은 감정몰입, 폭발적 성량을 모두 요한다. 두 배우 모두 “어떤 장면이 가장 힘들다고 꼽기 어려울 정도로 다 힘들다”며 웃었다. 그래서인지 배우들끼리 똘똘 뭉치며 서로 격려해주는 등 팀워크가 유독 돈독하단다. 1인 2역을 맡는 이들은 2막에서는 신분과 성격이 완전히 상반된 격투장 부부로 출연해 재미를 선사한다. 빅터의 신경질적인 모습을 완벽하게 구현하기 위해 다이어트까지 했던 민우혁은 촐싹대는 자크로, 동생을 지키기 위해 감정을 절제해 온 엘렌 역의 박혜나는 욕망이 들끓는 속물적인 에바로 변한다. 박혜나는 그악하고 거침없는 ‘완전히 새로운 에바’를 만들어내 무대를 압도했고, 민우혁은 ‘자크는 커튼콜 때 왜 없느냐’는 질문이 나올 정도로 감쪽같이 변신했다. “어렵지만 완전히 다른 캐릭터로 에너지를 뿜어내니 보완이 되는 것 같아요. 각각의 캐릭터를 더 자유롭게 만들어줘서 매번 새로운 무대에 서는 것 같은 즐거움을 느껴요.”(박혜나) “공연 내내 빅터의 고뇌를 지녀야 한다면 힘들었을 것 같아요. 연습할 때는 자크 때문에 길을 잃기도 했지만 지금은 자크일 때 제일 편하고 재미있어요.”(민우혁) 두 배우는 매 순간 새롭게 호흡을 맞춰간다. “단 한 번도 같은 공연이 없었던 것 같다”는 민우혁의 말에 박혜나는 “같아서도 안 된다”고 동의했다. 관객의 함성과 박수가 가장 큰 힘이 된다는 이들은 바람도 같았다. “저희는 계속 공연하지만 관객들에게는 첫 공연이잖아요. 끝까지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하는 게 숙제예요. 마지막까지 최고의 공연을 보여드리고 싶거든요.” 8월 26일까지. 서울 블루스퀘어 인터파크홀. 6만∼14만 원. 박선희 기자 teller@donga.com}

밤이 됐지만 아직은 잠들고 싶지 않은 아이. 주변 것들을 찬찬히 둘러본다. 창밖의 가로등, 자동차 불빛이 어둠 속에 잠겨 있다. 아침이 오려면 아직 한참 남았다. 길을 걷다 지나친 고양이와 살살 불어오는 바람. 그 모든 것들을 지나서 잠의 새가 천천히 날아온다. 아기 곰도 토끼 인형도 졸기 시작한다. 눈이 말똥말똥하던 아이도 조금씩 눈꺼풀이 무거워진다. 평화롭고 따뜻했던 하루를 추억하며 꿈 속 나라로 날아가는 아이. 몽환적인 색감의 그림과 나직한 말투로, 차분히 잠드는 걸 어려워하는 아이들을 상상의 세계로 이끌어준다. 박선희 기자 teller@donga.com}

세상에는 없지만 마음속에는 존재하는 아름답고 환상적인 상상의 세계를 지도 위에 담아냈다. 이곳에는 특이한 것들이 많다. 얼음 음악당, 풍선껌 화산에 나비로 가득 찬 도시도 있다. 바다 동물이 살고 있는 숲, 모든 것이 거꾸로 된 마을과 먹을 것으로 만들어진 달콤한 섬들도 나타난다. 이렇게 멋진 곳을 여행하다 물건을 잃어버려도 분실물 보관소 사막에 가면 모두 다 찾을 수 있다. 상상을 통해 만들어지는 지형은 무궁무진하다. 꿈과 상상력에는 경계가 없는 법. 꿈속 세계를 디테일하게 표현해 낸 그림이 재미를 더해준다. 박선희 기자 teller@donga.com}

소설가 김영하가 쓴 단편소설 중 ‘아이스크림’이란 작품이 있다. 무더운 여름, 한 부부가 평소 즐겨 먹던 아이스크림에서 휘발유 맛이 난다는 걸 알게 되며 벌어진 소동을 다룬 이야기다. 부부의 신고에 신속하게 집으로 찾아온 직원은 문제를 확인하겠다며 역한 기름 냄새가 풍기는 아이스크림을 직접 먹어보기 시작한다. 부부는 이상하지 않냐고 묻지만 그는 고개만 갸웃거린다. 그리고 안색이 어두워질 때까지 남은 아이스크림을 계속 먹어 치운다. 토하거나 쓰러져 버리는 건 아닌지 걱정될 만큼 꾸역꾸역. 2006년 이상문학상 우수작품상을 받았던 이 소설이 문득 떠오른 건 요즘 자주 회자되는 ‘을의 전쟁’ 이슈 때문이다. 최저임금 인상을 둘러싸고 노동자와 소상공인들 간의 갈등이 격화되고 있다. 입장은 서로 다르지만 생계가 달린 문제란 점에서 양쪽 모두 절박하다. 김영하의 소설도 ‘을의 대결’을 다룬다는 점에서 닮은 구석이 있다. 비좁은 아파트에서 여름을 나고 있는 불량상품의 피해자와 자기 몸을 바쳐서라도 문제를 은폐하려는 말단 직원의 대치는 희극적이면서도 서글프다. 밀란 쿤데라는 소설의 예술적 가치를 논한 에세이집 ‘커튼’에서 “‘진짜 세상’을 보지 못하게 막는 커튼을 열어젖히는 것”이 소설의 역할이라고 말했다. 표면적으로 드러나진 않지만, 약자들의 ‘웃픈’ 대치는 불량식품을 만든 기업, 말단 직원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조직과 팍팍한 경제 상황까지 환기시킨다.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너는/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최근 최저임금 문제를 다룬 국무회의에서도 문학작품이 인용됐다. 이낙연 국무총리가 “약자와 약자가 다툰다면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라며 안도현 시인의 시 ‘너에게 묻는다’를 직접 읊었다. 발언의 맥락을 보면 온몸을 태워 누군가를 따뜻하게 해준 ‘연탄재’는 노동자나 소상공인이고, 그것을 함부로 차버리는 ‘너’는 정부, 국회, 대기업이다. 헌신과 사랑의 숭고함을 노래한 시에 최저임금 문제를 대입시켜 새로운 해석을 내놓은 셈이다. 소설이나 시는 이렇게 각기 다른 해석과 상상의 여지를 남기면서도 표면적 갈등 뒤 숨은 문제들을 노출시킨다. 하지만 이면의 병폐를 볼 수 있도록 두꺼운 커튼을 열어젖히는 게 문학의 역할이라면, 그 문제를 실제 해결해 나가는 건 정부나 정치의 몫일 것이다. 시까지 인용하며 자진해서 언급했듯이, 이번 ‘을의 전쟁’을 초래한 장본인이자 해결의 주체 중의 하나가 정부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그럼에도 ‘커튼’만 열었다 닫았다 해서는 곤란하다. ‘가슴 아프다’는 문학적 감상도 좋지만, 지금은 현실의 갈등을 풀 실제적 해결 방안을 내놓는 게 더 시급해 보인다. 박선희 문화부 기자 teller@donga.com}

11일 오후 서울 송파구 잠실종합운동장 한쪽에선 오렌지 빛깔 컨테이너 건물 공사가 한창이었다. 아르헨티나에서 시작해 미국, 일본 등 34개국 58개 도시에서 총 600만 명 이상이 관람한 인기 공연 ‘푸에르자 부르타’의 서울 공연이 이뤄질 전용 공연장 공사였다. 15일 개막을 앞두고 굉음이 수시로 울리는 이곳에서 무대의 경계를 허문 이 이색 공연을 창작해낸 주역이자 연출가인 디키 제임스(53)를 만났다. ―세계 각 도시를 방문할 때마다 전용 공연장을 짓나. “항상은 아니지만 우리 쇼의 특성상 적합한 공연장을 찾기가 힘들어 직접 짓는 편이다. 공연장들은 대부분 한쪽은 무대, 한쪽은 객석인 천편일률적 설계를 갖고 있지 않나. 마치 영화를 보듯 앉아서 관람하는, ‘한 가지 공연’만 가능한 공연장은 연출자의 상상력과 자유를 제약한다.” 실제로 이 공연은 무대와 객석 구분이 없이 벽, 천장 등 모든 공간을 무대로 활용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배우들은 관객석 중간을 가로지르기도 하고, 하늘에서 물이 쏟아지는 수조 속에서 나타나는 등 기상천외하게 등장한다. 모든 객석이 스탠딩 좌석으로 관객들은 곳곳에서 등장하는 배우들과 함께 무대를 즐길 수 있다. ―기존 무대에 대한 통념을 깬 공연을 구상하게 된 계기는…. “‘살아있는’ 공연을 좋아한다. 카니발처럼 남녀노소 모두 야생의 에너지를 분출할 수 있는 축제의 정신을 살려 공연을 만들고 싶었다. 현대인들은 예술에 관해 공통적 경험을 할 기회가 별로 없다. 영화, 음악조차 휴대전화로 혼자 즐기지 않나. 관객들이 축제에 참여하듯 서로 연결되는 경험을 만끽하는 공연을 꿈꿨다.” ‘푸에르자 부르타’(푸에르사 브루타)는 스페인어로 ‘거친 날것의 힘’이란 뜻. 그는 “우리 공연은 생각이나 지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다”며 “언어로 이름 붙일 수 없는, 날것의 생생한 에너지를 전해주고 싶다”고 말했다. 실제 공연은 일체의 대사 없이 아프리카 토속 음악부터 테크노 등 다양한 음악과 현란한 퍼포먼스만으로 구성된다. ―미국 뉴욕 오프브로드웨이에서만 9년간 90만 명이 봤다. 세계적인 성공 비결은 뭔가. “모두를 위한 쇼이기 때문 아닐까. 아르헨티나에는 공연장 티켓은 엄두도 못 낼 만큼 가난한 이들이 많다. 셰익스피어는커녕 글을 읽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 공연을 처음 떠올렸을 때 부자든 가난하든, 지적이든 아니든 모두가 함께 즐기는 공연을 만들고 싶었다. 그러다 보니 ‘보편적인 언어’를 찾은 게 잘 맞아떨어진 것 같다.” ‘푸에르자 부르타’는 2013년에 이어 두 번째 한국 공연. 제임스 연출가는 “결국 이런 공연은 관객이 ‘온도’를 결정하는데 한국 관객은 몰입도가 높고 능동적이라 이번에도 기대가 크다”고 말했다. 이전 공연과 차이점으로는 “축제 분위기를 강화시키고 관객이 빠져들 수 있는 새로운 무대 장치를 추가해 이전 공연을 봤던 이들도 새로운 ‘리듬’을 느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음악도 라이브로 공연한다. ―구체적으로 한국 관객이 어떤 경험을 갖길 바라나. “우리 공연에서는 모든 사람의 눈이 ‘카메라’다. 그들이 움직이는 건 무빙 카메라가 움직이는 것과 같다. 모든 장면이 교차 편집되듯, 관객의 시선에 따라 새롭고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다. 누구나 일상과 싸울 힘이 필요하지 않나. 공연을 즐긴 뒤 그 무엇이라도 뚫고 나갈 수 있다는 의지와 기어코 하고 싶은 일을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 다시 세상에 나가 싸울 에너지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10월 7일까지 서울 잠실종합운동장 FB씨어터, 9만9000∼13만2000원. 박선희 기자 teller@donga.com}

국립극장이 전통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2018∼2019 레퍼토리 시즌’ 라인업을 공개했다. 국립극장은 9월 5일부터 내년 6월 30일까지 신작 19개와 기존 레퍼토리 공연 6개 등 총 40개 작품을 선보인다. 주목받는 예술가들이 다수 참여한 실험을 통해 전통에 기반을 둔 현대 공연물을 만드는 기본에 충실하겠다는 방향성이 뚜렷하게 읽힌다. 가장 주목받는 공연은 ‘향연’ ‘묵향’ 등으로 한국무용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고 평가받는 패션 디자이너이자 무용 연출가인 정구호의 국립무용단 신작 ‘색동’이다. 정 연출가는 “전통무의 현대화 과정의 일환인 건 같지만 이전 작업보다 현대적 감각을 좀 더 강조했다”며 “한국무용의 대표 명인들과 함께 안무를 구성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국립무용단은 현대무용가 김설진과 함께하는 신작 ‘더 룸(The Room)’을 선보인다. 춤 경연 TV 프로그램 ‘댄싱9’ 시즌2 우승으로 주목받은 김 씨는 장르 경계를 뛰어넘는 활동으로 주목받는 안무가다. 이번 작품에서는 호텔이나 집 등 여러 사람이 머무는 공간을 배경으로 각기 다른 시간대에 살았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아낼 예정. 김 씨는 “일부러 ‘한국적’인 것을 찾으려 하기보다 개개인의 히스토리에 주목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한국적 색채가 묻어날 것이라고 본다”고 말했다. 국립창극단의 창극 현대화 작업도 계속된다. 김태형 연출은 페미니즘 SF ‘우주소리’ 공연으로 창극의 지평을 넓히는 실험을 한다. 대만 저명 연출가이자 경극 배우인 우싱궈(吳興國)가 연출하는 창극 ‘패왕별희’를 통해 한국 창극의 범위를 확장하는 실험도 한다. 국립국악관현악단은 시즌 개막작 ‘2018 마스터피스―황병기’를 시작으로 양방언과 함께하는 ‘인투 더 라이트(Into The Light)’, ‘다시 만난 아리랑―엇갈린 운명’ 등을 선보인다. 2019년 하반기 준공을 목표로 추진 중인 해오름극장의 리모델링과 지하주차장 공사로 인해 이번 시즌 공연은 서울 예술의전당, LG아트센터, 롯데콘서트홀 등 외부 공연장에서 주로 이뤄질 예정이다. ‘2018∼2019 레퍼토리 시즌’ 패키지 티켓은 17일부터 국립극장 홈페이지에서 판매한다.박선희 기자 teller@donga.com}

찬우는 친구에게 ‘막말 대장’이라 불린다. 상대방을 배려하지 않은 말, 맥락에 맞지 않는 말을 계속해서다. 하지만 잘못된 말하기 습관이 친구들에게 준 상처는 결국 찬우에게 되돌아오고 만다. 찬우 말에 기분 상한 친구들이 찬우 말을 무시하는 작전을 쓰기 시작한 것. 속상해진 찬우는 인공지능 스피커 ‘망고’에게 속마음을 털어놓는데, ‘망고’는 위로는커녕 오히려 막말을 쏟아낸다. 예전의 자신처럼. 찬우는 그제야 지난 행동을 되돌아보고 반성한다. 타인을 배려하는 마음과 의사소통의 중요성을 일깨워준다. 박선희 기자 teller@donga.com}

둥근 달이 뜬 어느 날 밤, 동물원을 도망친 용감한 아기 곰. 자유를 꿈꾸며 무작정 달린다. 담장을 넘고, 개울을 건너고, 운동장을 가로지르고, 장마당으로도 달려간다. 마을을 떠나 산비탈을 오르고 철길, 고속도로가 계속 이어진다. 온통 낯선 길뿐. 배도 고프고 험난한 길에 지치기도 한다. 하지만 아기 곰은 용기를 내 한 발씩 내딛는다. 철창으로 가득한 동물원 대신, 원래 아기 곰이 있어야 할 그리운 그곳, 정글을 향해서. 아기 곰은 마침내 그곳에 도착할 수 있을까. 귀여운 곰의 탈출기를 통해 자유와 행복에 대해 질문한다. 박선희 기자 teller@donga.com}

‘부자연스러운 시작의 자연스러운 결말.’ 영국 소설가 제인 오스틴(1775∼1817)은 로맨스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비가 내리는 어느 여름날. 갑자기 우산 안으로 뛰어 들어온 한 여인. 그녀를 보자마자 운명을 직감한 한 남자의 지고지순한 사랑도 이렇게 표현할 수 있지 않을까. 죽음도 갈라놓지 못한 운명적이면서도 비극적인 사랑을 그려낸 창작뮤지컬 ‘번지점프를 하다’는 2001년 개봉한 동명 영화를 바탕으로 만든 작품이다. 2012년 초연 때부터 웰메이드 창작뮤지컬로 호평을 받았고 재연(2013년)을 거친 뒤 5년 만에 세 번째 시즌으로 돌아왔다. 극의 전개는 원작 영화의 흐름과 거의 비슷하다. 인우는 대학 시절 우연히 만난 태희와 사랑에 빠지지만 그녀는 교통사고로 목숨을 잃고 만다. 첫사랑의 아픔을 가슴에 묻은 인우. 17년 뒤 국어교사로 평범한 삶을 살아가다 제자 현빈이 태희의 환생임을 알고 혼란에 빠진다. 기존 스토리텔링은 그대로 유지했지만 이번 공연은 변화한 시대에 맞춰서 성차별이나 소수집단 비하로 읽힐 위험이 있는 대본과 가사 일부를 수정했다. 그래선지 갈등이 최고조로 치달으며 나오는 격한 대사들도 운명적 사랑을 가로막는 현실적 제약에 대한 고뇌로 자연스럽게 이해할 수 있다. 과거와 현재를 수시로 오가는 설정을 위해 무대의 깊이와 조명을 다양하게 활용한 점이 매력적이다. 특히 태희의 교통사고 장면은 특별한 장치 없이 객석 전체를 비추는 강렬한 붉은 조명만으로 관객의 감정이입을 배가시켰다. 덕분에 그 장면 직후 자신이 태희의 환생임을 깨닫게 되는 현빈의 감정선 역시 잘 살아난다. 17년 만에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방식으로 재회한 두 사람이 손을 맞잡는 장면은 섬세한 감정선을 따라 잔잔히 흘러가던 극의 정점을 이룬다. 물론 이미 잘 알려진 이야기를 충실하게 따라가는 구성과 여백을 넉넉히 둔 무대는 때때로 단조로운 느낌을 주기도 한다. 그런 아쉬움은 감미롭고 강렬한 넘버들이 채워준다. 2012년 한국뮤지컬 대상 음악상과 2013년 더뮤지컬어워즈 작곡·작사상을 수상했던 서정적인 노래는 명불허전이다. 안정적인 연기를 보여주는 배우들이 흠 잡을 데 없이 소화해내는 탄탄하고 아름다운 노래가 아련한 첫사랑의 감성을 되살린다. 다 아는 이야기인데도 울컥하고, 다 아는 감정인데도 또 흔들리며 시큰해진다. 첫사랑이야말로 모두에게 그런 존재 아닐까. 종일 습한 비가 내리는 이 여름에 무척 잘 어울린다. 8월 26일까지.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M씨어터. 6만6000∼8만8000원. ★★★(★ 5개 만점)박선희 기자 teller@donga.com}

국내 초연작을 선보이는 ‘베스트 앤 퍼스트’(Best&First) 시리즈가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주최로 9월 4일부터 10월 7일까지 서울 종로구 아르코·대학로예술극장에서 열린다. 연극 4작품과 무용 4작품 등 모두 8작품으로 구성했다. 연극 부문은 미국, 영국 등 해외 무대에서 검증받은 작품을 국내 유명 연출가들이 무대에 올린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유명 극작가 애설 퓨가드의 ‘돼지우리’는 전쟁 중 전사한 것으로 알려져 훈장까지 받았지만 실제로는 탈영해 돼지우리에 숨어 사는 군인의 이야기를 그린 작품이다. 손진책 연출가가 맡았다. 지구와 송신이 끊긴 명왕성 탐사대원들의 이야기를 담은 ‘X’는 최용훈 씨가 연출한다. 영국에서 각광받는 젊은 작가 앨리스터 맥다월이 희곡을 썼다. 독일에서 활동하는 극작가 롤란트 시멜페니크의 ‘아라비안 나이트’는 무더운 여름날 10층짜리 아파트에 단수가 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촘촘한 대사로 짜내려간 작품이다. 전인철 연출가가 무대에 올린다. 미국의 젊은 극작가 루커스 네이스의 ‘크리스천스’는 10년 만에 대형 교회를 일군 목사가 ‘지옥’에 대해 파격적으로 설교하는 내용을 그렸다. 민새롬 씨가 연출한다. 국내 대표 안무가 4명의 신작도 만날 수 있다. 제임스 전은 ‘포스트 2000 발레 정전’을 선보인다. ‘도시의 불빛’ ‘바람처럼’ 등 기존 작품도 함께 공연한다. 박호빈은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의 여정을 담은 ‘마크툽’을 무대에 올린다. 파리, 벨기에 현대무용단 출신인 예효승은 신체에 내재된 감각을 춤으로 일깨우는 ‘오피움’을, 이재영은 ‘구조의 구조’를 각각 선보인다. 가격 미정. 박선희 기자 teller@donga.com}

예멘 난민 문제, 양심적 병역 거부 논란, 혜화역 시위…. 지금 우리 사회 전반에 난민 혐오, 종교 혐오, 성 혐오 등 ‘혐오와 혐오의 대결’이 넘쳐난다. 한때 문학작품이나 신문기사에나 주로 등장하던 ‘혐오(嫌惡)’라는 한자어는 ‘극혐(극도로 혐오한다)’이란 말로 확대돼 미취학아동도 쓰는 일상어가 됐다. 혐오라는 말 외엔 묘사될 수 없는, 미움 가득한 사회가 돼버린 걸까, 아니면 혐오를 위한 혐오가 만연한 ‘혐오 남용 사회’인 걸까.○ 혐오, 문학적 용어에서 일상어로 혐오의 시대별 용법을 살피기 위해 1920년부터 현재까지 98년간 동아일보에 실린 기사 데이터베이스를 통해 ‘혐오’란 표현을 분석했다. 1960년대 이전, 혐오는 대개 연재소설, 문학작품을 다룬 기사, 이념 갈등을 다룬 외신에 등장했다. 일상어와 거리가 먼 어려운 말이었다. 1970년대에는 ‘타인에게 불안감 및 혐오감을 주는 행위’ 등 경범죄와 연관되거나 베트남전 등 전쟁 문제에 주로 쓰였다. 1980년대 컬러 TV 상용화와 올림픽 개최를 거치며 ‘혐오’는 방송심의, 외설적 콘텐츠, 식품과 자주 연결됐다. 1990년대 도시화와 환경문제 대두로 ‘혐오 시설’ ‘혐오 환경’ 같은 말이 자주 쓰였다. 홈비디오 보급으로 공포물, 성인물에 대한 리뷰에도 자주 등장했다. 2000년대까지 비슷한 양상을 이어간 혐오의 용법은 2010년대, 최근에 이를수록 세대, 동성애, 난민부터 길고양이와 무슬림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면서도 빈번하게 쓰임새가 확대되고 있었다. 이러한 혐오 대중화의 배경은 뭘까. 전문가들은 여성 혐오 이슈의 대두, 인터넷 커뮤니티의 성장에서 찾는다. 채세진 꿈꾼문고 대표는 “2010년 우에노 지즈코의 ‘여성 혐오를 혐오한다’가 출간돼 화제를 일으켰다. 당시 영어 단어 ‘misogyny’가 ‘여성 혐오’로 옮겨지며 페미니즘의 밖까지 혐오란 단어가 널리 쓰이기 시작했다”고 했다.○ 혐오 열광 사회, “이면의 사회적 스펙트럼 묻혀선 안돼” 인터넷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일부는 혐오가 충돌하는 장이 됐다. ‘극혐’이란 단어도 취향을 드러내는 말로 쓰일 정도가 됐다. 신광영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는 “혐오 감정을 갖고 있되 공개하기 부끄러워했던 이들조차 혐오를 노출하고 공유하면서 ‘혐오의 연대’가 강화되고 있다”고 분석했다. 근래 젊은층에서 인기가 높은 힙합에서는 래퍼 블랙넛과 나플라의 가사가 여성혐오적 구절을 포함해 논란이 됐다. 흑인음악 미디어 ‘리드머’의 강일권 편집장은 “직설적 표현과 혐오는 엄연히 다르다”며 “해외에서는 혐오 표현에 대한 자성 움직임이 근래 두드러진다”고 말했다. 그는 “특히 유명 래퍼들을 모델로 기용한 대기업에서 광고 보이콧 움직임이 뚜렷한데, 반면 우리나라에서는 페미니스트임을 드러내는 이들에게 이런 보이콧이 행사되는 것이 아이러니”라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공포증, 차별, 거부감 등 우리 사회에 산재한 다양한 부정적 스펙트럼이 모두 혐오란 표현 하나에 깔때기처럼 수렴하는 현상이 문제라고 지적했다. 김헌식 문화평론가는 “혐오의 주된 심리적 기저는 두려움과 불안”이라면서 “낮은 취업률과 비정규직, 양극화 문제 등 사회경제적 요인을 먼저 들여다봐야 할 시점”이라고 말했다. 신광영 교수는 “혐오 과잉은 소모적 논쟁으로 비화돼 갈등과 불신 등 불필요한 사회적 비용을 초래한다. 초중고교 때부터 사회적 이슈를 정확히 이해하고 분석적 사고를 기르는 교육과정을 두는 등 일종의 시민교육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임희윤 imi@donga.com·박선희 기자}

최근 갈수록 심해지는 우리 사회의 혐오 표현은 단순히 ‘듣기 싫은 말’ 수준을 넘어 실질적인 위협과 사회 불안을 야기시키고 있다. 올해 초 ‘말이 칼이 될 때’(어크로스)라는 책을 펴낸 홍성수 숙명여대 법대 교수(43·사진)는 ‘된장녀’ ‘맘충’ 등 일상적으로 쓰게 된 단어들이 모두 혐오 표현이라고 지적한다. ‘동남아 출신들은 게으르다’ ‘조선족들은 칼을 갖고 다니다 휘두른다’ 등 특정 소수자집단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를 표현하는 말들이나 여성에 대해 “조신해야 한다” “나서지 마라” 등 한계를 지우는 유형도 차별을 낳는 혐오 표현이다. ―혐오 현상이 갈수록 심해지는 이유는 무엇인가. “현대사회 문제들은 복잡한 양상을 띠고 있다. 혐오는 그것을 단순화해준다. 문제의 진짜 원인보다는 희생양을 찾는 게 쉽고 편하니 습관적으로 그렇게 한다. 다원적 구성을 가진 한 집단에 특정한 한 가지 이미지를 씌우고 차별, 배제의 수순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특히 인터넷 매체를 통해 이런 단순화 담론들이 빠르고 쉽게 확산된다.” ―혐오 표현에 대한 적절한 제어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는데…. “충분한 정보가 제공되지 않아서 오해를 하다 보니 혐오가 증폭되는 경향이 있다. 자신의 혐오가 마치 근거가 있는 것처럼 여기는 경우가 대단히 많다. 혐오를 근절하거나 완전히 없앤다는 목표보다는 최소한 공적인 매체를 통해서는 충분히 걸러진 이야기가 나오도록 하는 게 중요하다. 언론, 정치 지도자, 사회 유력인사나 연구자들이 사안에 대해 충분하고 다양한 정보와 시각을 제공하며 중심을 잡아 주는 역할이 필요하다. 물론 극단적 혐오나 선동에 대해선 규제도 필요하다.” ―여혐, 남혐, 중국동포에 대한 혐오에서 최근에는 난민 문제까지 혐오의 대상이 다양해졌다. 가장 심각한 사례는 무엇인가. “아무래도 난민 문제가 최근에는 가장 극단적 분위기로 흐르고 있다. 난민 문제는 무척 복잡하고 역사적 문제도 예민해 전문가들도 어려워한다. 어떤 문제보다 신중한 접근이 필요한 이슈를 단순히 난민을 혐오하는 방식으로 해결하려고 나오는 것이 문제다.” ―사회 전반에 혐오가 만연하게 될 경우 부작용은…. “윤리적으로 옳고 그름을 떠나 실리적 면에서 문제해결에 도움이 안 된다.” 박선희 기자 teller@donga.com}

어릴 때부터 도마뱀을 좋아한 소녀 조앤. 뱀, 거북이, 악어의 매력에 빠지면서 파충류를 돌보며 살고 싶다고 생각한다. 어른이 된 조앤은 런던 자연사박물관에서 일하기 시작했고, 파충류박물관의 첫 여성 학예연구사가 된다. 1900년대 파충류를 연구한 여성 과학자 조앤 프록터의 이야기를 그림책에 담았다. 상상력과 용기로 세상을 바꾼 여성들을 소개하는 시리즈 가운데 하나. 한계에 맞서 변화를 이끌어낸 여성의 이야기를 아이들 눈높이에 맞게 풀어냈다. 박선희 기자 teller@donga.com}

눈을 감고 꿈나라로 가면, 새로운 세계가 시작된다. 아이는 선장이 돼 미지의 세계로 나간다. 비가 내리기도 하고, 보물을 찾아 낯선 곳을 돌고 또 돌기도 하고. 때론 괴물을 만나기도 한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 없다. 빗방울 소리는 즐겁고, 직접 부른 자장가에 괴물은 아기처럼 쌔근쌔근 잠든다. 그리고 아이들은 멋진 항해 끝에 나만의 보물을 찾아낸다. 더 놀고 싶어 하며 잠들기 싫어하거나 깜깜한 밤을 무서워하는 아이들에게 들려주기 좋은 이야기. 박선희 기자 teller@donga.com}

육아에 지친 엄마들을 위로하는 책이 다양하게 출간되며 인기를 끌고 있다. 기존 육아서들이 육아 관련 경험담이나 노하우를 담았다면 최근에는 엄마들의 정체성 고민이나 제도, 환경 등 육아를 둘러싼 여성들의 문제의식을 한층 심화시킨 책들이 주를 이룬다. 특히 모성을 강요하고 여성에게 과도한 책임을 부여하는 사회에 대한 반발과 문제의식이 두드러진다. ‘오늘도 엄마인 내가 낯설지만’(강안 지음·들녘·1만3800원)은 아이 둘을 키우며 박사과정을 밟은 저자가 아이들을 제대로 양육하지 못하고 있다는 불안감에 시달리는 엄마들을 위로하기 위해 펴낸 책이다. 저자는 남들이 뭐라고 하건 ‘나는 나’라는 자신감을 갖고 자신의 방식대로 아이들을 기르라고 조언한다. ‘엄마는 이제 미안하지 않아’(다부사 에이코 지음·위즈덤하우스·1만3800원) 역시 남성 중심 사회에서 강요되는 모성에 대해 비판한다. ‘엄마라면 이래야 돼’라는 착한 엄마 콤플렉스에 반기를 들고 이 시대 엄마로 사는 삶에 대한 고충을 솔직하게 털어놓는다. 육아로 인한 스트레스와 고민을 독서, 글쓰기 등 다양한 방식으로 극복하는 방법을 알려주는 책도 있다. ‘나는 엄마다’(심소영 지음·길벗·1만5000원)는 글쓰기를 통해 육아에 대한 자신만의 철학을 다져나감으로써 남들 말에 휘둘리는 육아에서 벗어나는 길을 제시한다. 정아은 소설가가 쓴 ‘엄마의 독서’(한겨레출판사·1만4000원)는 육아 과정에서 도움을 받은 책들에 대한 감상문이다. 분야를 넘나드는 독서를 바탕으로, 완벽한 엄마 역할을 강요하고 일을 하든 포기하든 죄책감을 느끼게 만드는 사회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담아냈다. 육아 책이 엄마들의 생생한 고민과 비판을 담고 문제 제기를 하는 방향으로 진화한 것은 페미니즘 열풍과도 연관이 깊다. 손민규 예스24 인문사회MD는 “남성과 똑같은 교육을 받고 커리어를 쌓다 출산 이후 경력이 끊기게 된 여성들의 고민을 반영한 현상”이라며 “육아에서의 불평등 등 사회구조적 문제에 집중한 육아서들이 트렌드가 되고 있다”고 말했다. 박선희 기자 teller@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