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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영복의 첫 책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 나왔을 때 무기수가 감옥에서 그런 맑은 생각을 끌어낼 수 있다는 데 놀랐다. 소주 ‘처음처럼’이 나왔을 때는 정겨운 글씨체가 신영복의 것이라는 데 대해 다시 놀랐다. 그의 ‘강의’나 ‘담론’을 읽으면서는 동양 고전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신선한 해석에 거듭 놀랐다. ▷신영복은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이 만든 철학자다. 그는 서울대 경제학과 재학 시절의 활동으로 1968년 통일혁명당 사건에 연루됐다. 중앙정보부의 수사는 가혹했을 것이다. 신영복이 실제보다 더 깊이 연루된 것처럼 기소됐을 수 있다. 무려 20년이나 가두는 바람에 그는 철학자가 됐다. 한학자 이구영과 감옥에서 한 방을 쓰면서 한학을, 감옥으로 교육 나온 서예가 조병호에게 글씨를 배웠고 깊은 사색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신영복은 한홍구와의 인터뷰에서 통혁당 주범 김질락이 혁명을 지지하느냐고 묻자 그렇다고 대답한 것으로 나온다. 신영복은 친노 정치인 한명숙의 남편 박성준의 ‘상부선’이었다. 통혁당 사건은 함께 연루된 안병직 전 서울대 교수가 실체를 증언하고 있다. 군사정권 시절의 많은 사상범이 민주화 이후 재심을 통해 무죄를 선고받았지만 신영복은 재심을 청구하지 않았다. 신영복은 통혁당 사건이 부풀려졌다고 주장하지만 그가 혁명을 꿈꾸었던 사실 자체를 구질구질하게 부정하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영화 ‘닥터 지바고’에는 볼셰비키에 적대적인 누군가가 “인간적으로는 볼셰비키를 좋아한다”고 말하는 대목이 나온다. 신영복이 싫어서 소주 ‘처음처럼’은 마시지도 않는다는 사람도 없진 않지만 대체로 신영복의 정신세계는 이념을 뛰어넘어 사랑받았다. 세상을 바꾸는 데 냉철한 머리보다는 따뜻한 가슴이, 따뜻한 가슴보다는 실천하는 발이 중요하다는 식의 잠언(箴言)은 현대인에게 매력적이었다. 다만 그는 저세상으로 떠날 때까지 그가 원한 세상을 정치경제학의 용어로 말한 적이 없다. 그것을 묻는 것이 환상을 깨는 것처럼 느껴져 아무도 묻지 않았다고 할 수도 있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한상진 서울대 명예교수는 중민(中民)론을 주장한다. 운동권의 민중론으로는 한국의 민주화를 설명하는 데 한계가 있어서 중산층과 민중을 결합한 중민이란 말을 만들었다고 한다. 한국의 민주화는 근대화의 실패로 인해 빈곤과 소외가 가중된 무산층(민중)이 이끈 것이 아니라 근대화의 성공으로 형성된 중산층이 개혁을 지향했기 때문에 이뤄졌다는 논리다. 근대화를 성공으로 본 것은 이승만 박정희 시대에 대한 긍정적 평가를 전제한다. ▷한 교수가 국민의당 창당준비위원장 자격으로 4·19 민주묘지를 참배한 자리에서 이승만을 국부(國父)로 언급했다가 억지에 가까운 논란에 휩싸였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건국 시점으로 보는 것은 뉴라이트 사관에 따른 것이 아니라 상식에 따른 자연스러운 인식이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이 건국이 아니라면 임시정부 수립은 더욱 건국이 아니다. 망명정부는 원래 있던 정부가 옮겨간 것이지만 임시정부는 정부가 생기기 전 단계를 말한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이 건국이 아니라면 대한민국은 건국되지도 않았다는 이상한 말밖에 되지 않는다. ▷국민의당은 한 교수의 발언이 논란이 되자 어제 김구 묘역도 참배하겠다고 밝혔다. 김구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김일성과 합류하거나 협력한 박헌영 김원봉 여운형과는 달랐다. 김구의 남북통일 의지는 고귀한 것이다. 다만 처음부터 김구 묘역 참배를 계획했으면 모르되 예정에 없던 참배를 부랴부랴 끼워 넣는 모습은 당당해 보이지 않는다. ▷안철수 의원이 한 강연에서 영화 ‘웰컴 투 동막골’에 대해 “국방군과 인민군이 힘을 합쳐 미군과 싸우는 내용을 보면서 시대정신을 읽었다”고 말하는 것을 듣고 질겁한 적이 있다. ‘해방전후사의 인식’류의 공부에 빠져들었을 때나 나올 수 있는 반응이다. 광복 이후 임시정부 요인 중 사망 혹은 질환자를 뺀 26명 가운데 북으로 간 김원봉 등 6명, 정부 수립에 참여하지 않은 김구 등 3명을 빼고 나머지는 대한민국 정부에 계승됐다는 사실 정도는 안 의원이 이미 알고 있으리라고 믿고 싶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미국 예일대에서 정치학과 경영학을 가르치는 폴 브래컨 교수는 ‘제2차 핵 시대’란 책에서 핵무기의 위력을 이렇게 설명한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주민 폭격으로 독일인과 일본인 각각 50만 명씩 사망했다. 4년간(1942∼1945년)의 전쟁을 가로축으로 놓고 이 사망자들을 표시해 보자. 이제 그림을 수직으로 세워 이 전쟁이 한나절 만에 치러질 수 있다고 상상해 보자. 하루에 100만 명이 사망하는 것이다.” kt(킬로톤·TNT 화약 1000t)급 핵무기를 사용했을 때의 위력이 이 정도다. 수소폭탄 같은 Mt(메가톤·TNT 화약 100만 t)급 핵무기를 사용했을 때의 위력은 상상하기도 어렵다. 북한이 수소폭탄 시험에 성공하지는 못했을 것이라고 보는 견해가 많다. 그러나 핵폭탄을 개량하는 실험이었다고 해도 그 끔찍함은 마찬가지다. 2004년 미국 환경기구 NRDC의 매슈 매킨지와 토머스 코크런 박사의 발표에 의하면 인구밀도가 높은 서울의 경우 1945년 히로시마에 투하된 15kt급 핵무기가 지상 500m에서 공중폭발하면 62만 명, 지상 100m면 84만 명, 지면에서 폭발하면 125만 명의 사상자가 발생한다. 핵무기는 사람을 죽이거나 건물을 파괴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서울은 방사능으로 오염돼 한동안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이 된다. 핵무기에 대해 아는 체하는 사람들이 흔히 보이는 반응이 핵무기는 실제 사용을 위한 것이 아니라 억지(deterrence)를 위한, 다분히 심리적인 것이라는 주장이다. 북한이 수소폭탄 시험을 했다고 해도 국민들이 좋게 말하면 동요하지 않고 나쁘게 말하면 무감각한 것은 그런 주장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다. 핵무기를 억지력으로 보는 관점은 미국과 소련이 세계를 주름잡던 냉전 시기에서 비롯됐다. 미국과 소련 단둘이 추던 탱고에 중국 영국 프랑스가 끼어들 때까지도 그런 안이한 관점은 어느 정도 타당했다. 하지만 이스라엘 인도 파키스탄에 이어 북한까지 핵무기를 보유한 시대에도 그런 안이한 관점이 타당한지는 의문이다. 핵무기에 관한 한 브래컨이 ‘제1차 핵 시대’라고 부른 때는 상대적으로 행복한 시기였다. 핵무기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와 바르샤바조약기구의 동맹 규칙하에 철저히 관리됐다. 그러나 지금은 인도와 파키스탄의 이해관계가 다르고, 이스라엘의 이해관계가 다르고, 북한의 이해관계가 다르다. 이들에게 동일하게 적용될 관리규칙은 존재하지 않는다. 핵무기에 관한 한 ‘제2차 핵 시대’는 더 불안한 시기다.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 토머스 프리드먼은 2006년 북한의 1차 핵실험 이후 “1989년 11월 9일 베를린 장벽 붕괴는 탈냉전 시대의 시작을 알렸고, 2006년 10월 9일 북한 핵실험은 훨씬 문제가 많은 포스트 탈냉전 시대로의 돌입을 알리는 서막인지 모른다”고 썼다. 이 저널리스트의 감각으로는 북한의 핵 보유는 불안한 ‘제2차 핵 시대’ 내에서도 더 불안한 단계로 들어서는 것을 의미한다. 김정은의 ‘핵 탱고’는 상대방이 예측할 수 있는 스텝을 따르지 않고 혼자 추는 것이어서 더 위험하다. 갓 30세를 넘은 수령이 ‘유일체제’로 지배하는 북한에서 수령이 ‘너 죽고 나 죽자’는 심정으로 핵폭탄의 스위치를 누르려 할 때 비겁한 졸개들이 그를 제거할 용기가 있는지도 의문이다. 이런 국가의 핵무기는 단순한 억지력이 아니라 실제 사용될 수도 있다는 가정하에 다루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런 견해가 북한의 의도에 말려드는 것일 수도 있지만 어쩔 수 없다. 북한이 핵무기를 사용하는 순간 우리의 보복 여부와 상관없이 그것으로 한반도는 회복하기 어려울 정도로 황폐화한다. 북한의 핵무기 보유를 막지 못한다면 우리는 한반도의 안전을 위해 북한 요구에 끌려다니는 비겁한 굴종의 길을 택할 수밖에 없다. 북한은 중국이란 뒷문이 열려 있는 한 경제 제재로는 제어할 수 없다는 것이 오래전에 증명됐다. 박근혜 대통령의 중국 경사(傾斜) 외교도 전혀 소득이 없지는 않았는데 중국이란 뒷문은 쉽게 닫히지 않는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이런 상태로 미국이 경제 제재를 강화한다고 해도 효과는 기대하기 힘들다. 이제 경제 외교 군사의 구별 없이 할 수 있는 모든 조치를 취해 봐야 할 시점이다. 얼마나 시간이 남았는지 모르지만 지금 여기서 저지에 실패하면 미래는 없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1970년대 이상무의 야구만화 ‘독고탁’은 허영만의 ‘각시탈’과 함께 초등학교 시절 내 또래를 사로잡았던 만화다. 교과서 외의 책은 별로 읽어 본 적이 없는 우리가 뜻밖에도 출판물에서 발견한 재밋거리였다. 만홧가게에서 살다시피 하면서 많은 만화를 봤지만 두 만화가 유독 기억에 남는다. 더 좋아했던 쪽을 들자면 독고탁이다. 각시탈에서는 좋은 각시탈과 나쁜 일본 경찰이라는 대립이 자꾸 보다 보면 지루하게 느껴지는 데 비해 독고탁에서는 반항적이지만 다감한 독고탁과 성실하지만 냉정한 독고준의 갈등이 보다 다층적인 울림을 갖는다. ▷우리 만화사에도 간혹 불쑥 솟아오른 황금 시기가 있었던 것 같다. 독고탁과 각시탈 이후 그렇게 큰 관심을 끄는 만화를 보지 못했다. 그러다가 대학생 시절 이현세의 ‘공포의 외인구단’과 박봉성의 ‘신의 아들’이 나왔을 때 다시 한번 만화에 빠져들었다. 특히 공포의 외인구단은 처음 몇 권인가를 빌려 보다가 끝까지 보지 않고는 잠을 이룰 수 없어 밤늦게 셔터를 내린 만홧가게 문을 두드려 나머지를 모두 빌려 본 기억이 난다. ▷만화는 제9의 예술로도 불린다. 각 세대에는 그 세대마다의 만화가 있다. 요즘은 웹툰이 만화를 대신한다. 윤태호의 ‘미생’이나 최규석의 ‘송곳’ 같은 인기 웹툰은 TV 드라마로도 만들어졌다. 독고탁과 각시탈 이전에는 김용환의 ‘코주부’나 김성환의 ‘고바우 영감’ 같은 네 컷짜리 신문 만화가 인기를 끌었다고 한다. 여성들에게는 순정만화 ‘캔디’ ‘베르사이유의 장미’ ‘북해의 별’ 등에 대해 저마다의 기억이 있을 것이다. ▷독고탁은 내 또래에게 단순한 만화 이상이었다. 영국 소년은 로버트 스티븐슨의 ‘보물섬’, 프랑스 소년은 쥘 베른의 ‘15소년 표류기’, 미국 소년은 마크 트웨인의 ‘허클베리 핀의 모험’을 읽고 역경 속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스스로 이겨 나가는 의지를 배웠다. 우리에게는 그에 필적하는 소년 소설이 없었다. 독고탁의 분투가 그 공백을 일부 채웠다. 그제 작업실에서 작품을 그리다 세상을 떠난 작가에게 늦었지만 고마웠다는 말을 하고 싶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정명훈의 음악은 좋아하지만 정명훈은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프랑스 파리에 거주하며 활약하는 두 한국인 음악가 정명훈과 백건우의 인간적 정감이 자주 비교된다. 백건우가 100점이라면 정명훈은 글쎄, 독자들의 상상에 맡기겠다. 그럼에도 정명훈은 연주가 있을 때면 시간을 쪼개서라도 찾아가 듣고 싶은 지휘자라는 데는 이견이 없다. 정 씨가 박현정 전 서울시립교향악단 대표와 빚은 갈등에 대해 어제 ‘문명사회에서 용납하지 못할 박해를 당했다’며 서울시향 예술감독직을 사임했다. ▷하루 전날 서울시향 이사회는 정 씨와의 재계약을 보류했다. 정 씨의 부인 구순열 씨가 박 전 대표 음해를 직접 지시한 정황을 검경이 포착했다는 보도에 따른 것이다. 정 씨가 인심을 얻지 못한 데는 가족과 인척이 설친 탓도 있다. 구 씨는 정트리오의 멤버이자 정 씨의 누나인 첼리스트 정명화 씨의 시누이다. 구 씨가 겹사돈 관계에서 오는 남다른 영향력으로 매니저 일에 개입하는 데다 인척들이 부수적인 업무를 편의적으로 맡았다고 한다. ▷동아시아 출신의 세계적 마에스트로로는 일본의 오자와 세이지와 한국의 정명훈을 두 손가락에 꼽을 수 있다. 오자와의 음악은 유려하지만 디테일에 집착하는 반면 정 씨의 음악은 선이 굵고 구조가 강하다. 그럼에도 오자와가 세계적인 지휘자로 더 성공하지 않았나 싶다. 물론 오자와에게는 일본이라는 클래식 음악 강국의 후원이 있었다. 정 씨에 대한 한국의 후원은 그에 미치지 못한다. 오자와 같은 겸손한 인간적 매력도 정 씨에게선 잘 보이지 않는다. ▷정 씨가 박 전 대표에게 억울하게 걸려든 측면도 없지 않다. 본래 서울시향 갈등은 박 전 대표와 사무국 소속 직원 사이에서 비롯됐다. 그런데 박 전 대표가 교묘하게 대표와 예술감독의 불화로 갈등의 프레임을 바꿔 시향 직원들의 인권 문제로 시작된 일이 정 씨의 부적절한 처신의 문제로 쟁점이 바뀌었다. 정 씨가 서울시향을 떠나게 된 것은 정 씨에게도, 서울시향에도, 그를 좋아하는 음악 팬들에게도 불행한 일이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대학생들이 뽑은 올해의 신조어에 ‘금수저’가 꼽혔다. 소셜미디어의 유행어가 흔히 그렇듯이 금수저니 흙수저니 하는 말은 과장됐지만 그럼에도 우리 시대의 경제적 어려움을 최첨단에서 겪는 젊은이들의 예민한 인식을 담고 있다. 내가 대학을 졸업한 직후인 ‘응답하라 1988년’의 시대는 지금과 달랐다. 그때도 빈부 격차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젊은이들이 느끼는 격차라는 게 기껏해야 나이키(Nike)를 신느냐 짝퉁 나이스(Nice)를 신느냐 정도였다.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이전까지만 해도 취업은 상대적으로 쉬웠다. 뉘 집 자식은 좀 나은 회사에 취직하고 뉘 집 자식은 좀 못한 회사에 취직했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었다. 사촌이나 이웃이 잘돼서 배 아픈 건 있었지만 좌절할 정도는 아니었다. 꼭 재벌의 자녀여서 금수저가 아니다. 작은 문구 수입업체를 운영하는 한 지인에게서 들은 얘기다. 자식이 있는데 공부를 안 해 고민이라면서 시원찮은 대학에 가면 졸업이나 시킨 뒤 자기 회사에 나와 돕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주변에 이런 사람들이 여럿 보인다. 상위권 대학을 나와도 취직이 안 되는 세상에 수십 군데 취업원서를 내보다가 안 될 경우 비빌 언덕이 있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차이는 나이키와 나이스의 차이와는 비교가 안 된다. 한국은 광복 이후 세계적으로 봐도 유난히 평등한 사회로 출발했다. 조선시대 지배계급 양반은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거의 완벽하게 사라졌다. 70년의 긴 세월이 흐르면서 다시 계층이라고 부를 만한 것이 형성됐다. 개발독재 시대에 제 능력 이상으로 부를 축적한 소수의 재벌만이 아니라 우리의 평범한 이웃과 사촌 중에서도 부동산 혹은 주식 투자로 한몫 잡은 이들이 있다. 상대적으로 낮은 수위에서 벌어졌던 자산의 차이가 1995년 세계화 선언 무렵부터 증폭되기 시작했고 이후 칸막이는 점점 뛰어넘기 어려워졌다. 지금은 교육 기회가 평등하다고 말하기 어렵다. 영어 능력에는 외국 생활 경험이 결정적이고 기타 사교육에도 엄청난 비용이 들어간다. 로스쿨을 둘러싼 ‘현대판 음서제’ 논란은 교육의 기회뿐 아니라 취업의 기회마저 불평등해지는 게 아니냐는 우려를 반영한다. 윤후덕 신기남 의원의 사례를 로스쿨만의 문제로 보면 본질을 놓친다. 취업문이 좁아지자 부모가 자녀의 취업에까지 개입하는 더 일반적인 현상의 특수한 사례로 봐야 한다. 18세기 조선 영조 때 유수원이란 실학자가 있다. 그에 따르면 조선은 본래 천민이 아닌 한 누구나 벼슬아치가 될 수 있는 사회로 15세기 건국 초에는 시골구석에서도 명신(名臣)과 재상(宰相)이 많이 나왔으나 16세기 후반 벼슬아치의 세습성이 높아지기 시작해 17세기에 이르러 양반 중인 평민의 계층구조가 확립됐다. 한영우 전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는 2013년 ‘과거, 출세의 사다리’란 책에서 과거 합격자들의 명단인 방목(榜目)을 분석해 유수원의 지적을 통계적으로 증명했다. 유수원은 조선 사회의 세습성이 높아지기 시작한 전환점을 사림이 뿌리내린 명종∼선조 때로 봤다. 조선 건국으로부터 160년 정도가 흘렀을 때다. 그때는 퇴계와 율곡이 활약한 유교 문화의 전성기였다. 사림이 표방한 도덕정치의 이상(理想)은 높았으나 아이러니하게도 아무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그 속에서 불평등이 자라고 있었다. 조선 시대 향교는 농사철에는 방학을 하고 추수 뒤에 개학을 했다. 향교에 입학하면 관비(官費)로 배우므로 학비가 필요 없었다. 조선 초기 젊은이들은 공부만 열심히 하면 정승과 판서에 오를 수 있다는 꿈을 가졌다고 한 전 교수는 주장한다. 서원의 설립은 사림이 중심이 돼 유교 교육의 수준을 획기적으로 높인 개혁이었으나 거기서 공부하려면 쌀 수십 가마니를 갖다 줘야 했다. 한미한 집안에서 자란 젊은이들의 꿈이 사라지면서 조선은 패망으로 이끌려 갔다는 분석이 있다. 독일 학자 빌헬름 훔볼트는 “역사적 진실이란 마치 구름과 같아서 멀리 떨어져서 바라볼 때만 그 모양이 눈에 들어온다”고 말했다. 우리도 지금 광복 70년 만에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이런 전환기로 들어서고 있지는 않은지 좀 떨어져 바라볼 필요가 있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참신함에 대한 나의 정의는 처음엔 어색한데 왠지 좋아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신영복의 책 ‘더불어 숲’이 1998년 처음 나왔을 때 제목이 참신하다고 생각했다. 부사형 동사 ‘더불어’와 명사 ‘숲’을 병치시킨 것이 문법적으로 말은 안 되지만 그래서 더 절묘한 긴장감을 불러일으켰다. 안철수 탈당 이후의 새정치민주연합이 새 당명을 ‘더불어민주당’으로 정했다. ‘더불어 숲’의 모방 같은 느낌은 들지만 그런 이름을 당명에 쓴다는 건 역시 과감한 시도다. ▷손혜원 당 홍보위원장은 다른 후보 당명인 ‘민주소나무당’에 전율을 느꼈다고 했다. 홍보 전문가의 감각과 정치인의 감각이 달랐다. 내가 보기에는 둘 다 불필요하게 감상적인 이름이다. 그저 민주당이라고 하면 좋을 텐데 그 이름의 다른 정당이 이미 있어 할 수 없었나 보다. 다만 약칭 ‘더민주당’은 소셜미디어에서처럼 무조건 줄여 쓰는 방식도 문제지만 ‘더 민주적인 당’으로 이해되기보다는 ‘더(the) 민주당’ 같은 느낌을 줘 경박하다. 우리 집 근처에는 ‘더빠’도 있고 ‘더노래방’도 있다. ▷움베르토 에코는 책 제목을 ‘수도원의 살인’으로 달려다가 ‘장미의 이름’으로 바꿨다. 왜 그런 제목이 붙었는지 책을 읽어봐도 알쏭달쏭하다. 에코는 책 말미에 라틴어로 된 시구를 단서로 남겼다. ‘지난날의 장미는 그 이름뿐, 우리에게 남은 것은 그 덧없는 이름뿐.’ 역시 알쏭달쏭하지만 한국 제1야당이 남긴 덧없는 이름들이 떠오른다. 신민당-신한민주당-통일민주당-평화민주당-민주당-새정치국민회의-새천년민주당-민주통합당-민주당-새정치민주연합. ▷공자는 정명순행(正名順行), 이름을 바로 해야 만사가 잘된다고 했다. 쉽게 정명이라고 하지만 무슨 말인지는 깊이 생각해봐야 한다. 올해 미얀마에서 선거혁명을 일으킨 아웅산 수지 여사는 셰익스피어를 인용해 ‘장미는 무엇으로 불려도 여전히 향기로울 것’이라고 했다. 이 말을 뒤집어서 개명을 쇄신으로 여기는 이들에게 이런 경계의 말을 들려주고 싶다. ‘장미도 아닌데 장미라는 이름을 붙인다고 향기로운 것은 아니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미국의 권위 있는 영어사전 메리엄웹스터는 올해 대표 단어로 접미사인 ‘-ism(주의)’을 꼽았다. 올 한 해 메리엄웹스터 웹사이트의 이용자들이 가장 많이 찾은 단어가 사회주의(socialism), 인종주의(racism), 공산주의(communism), 자본주의(capitalism), 테러리즘(terrorism)이어서 그렇다는 것이다. 미국 공화당 대선 경선후보 도널드 트럼프가 무슬림 입국 금지를 제안한 후에는 파시즘(fascism)을 검색한 사람도 많았다고 한다. ▷일본 한자능력검정협회는 올해 일본에서 벌어진 일을 대표하는 한자로 ‘安(안)’을 선정했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 이름에 ‘安’이 들어 있고 아베 정권이 추진한 안보법(安保法)을 둘러싸고 국론이 양분됐으며 제2차 세계대전 종전 70주년을 맞아 나라의 평안(平安)을 기원하는 목소리도 높았다는 것이다. ‘안’이 추천된 여러 이유 중에는 일본군 위안부(慰安婦)가 자주 거론된 것도 들어가 우리로서는 씁쓸한 느낌이 든다. ▷한국에는 이런 걸 뽑는 단체가 없지만 올해 한국을 대표하는 단어를 꼽아보라면 ‘-포’ ‘헬-’을 꼽고 싶다. 청년들을 가리켜 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하는 ‘3포’, 여기에 인간관계와 주택 구입을 더한 ‘5포’를 넘어, 개인의 꿈과 희망까지 포기한다고 해서 ‘7포’ 세대라는 말까지 나왔다. 아예 포기하는 항목의 수를 개방해 놓은 ‘n포’란 말도 있다. 개인적인 포기를 넘어 우리나라를 더 이상 희망 없는 땅이라고 자조해서 부르는 ‘헬(hell)조선’이라는 신조어도 나왔다. ▷올 연말 개봉한 한 영화의 제목은 ‘열정같은소리하고있네’다. 누군가 ‘열정을 가지고 어쩌고저쩌고’ 하니까 상대방이 말을 끊으며 ‘열정 같은 소리 하고 있네’라고 쏘아붙인다. 힘든 일에 비해 형편없는 보수를 지칭하는 ‘열정페이’란 말이 이미 열정 같은 소리 하고 있는 것이다. ‘아프니까 청춘이다’는 책이 베스트셀러가 된 게 불과 4년 전인데 어느새 이런 식의 위로조차도 냉소적인 반응으로 돌아오는 시대로 바뀌었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일본에서 로스쿨 학생들도 고시학원에 다닌다는 흥미로운 얘기를 읽었다. 미국 ‘위스콘신 국제법 저널’에 사이토 다카히로라는 일본인 변호사가 기고한 ‘일본 법 교육의 비극: 일본의 미국식 로스쿨’이란 글에서다. 대한변협 김태환 변호사에 따르면 우리나라 로스쿨에도 학습 진도를 따라잡지 못해 서울 신림동 고시학원 강사들의 강의를 듣는 학생들이 적지 않다. ‘사법시험 체제’의 폐해로 지목돼 로스쿨이 없애고자 한 것이 법대의 일방적 수업 방식과 고시학원이다. 일본과 한국에서 로스쿨 학생이 고시학원에 가서, 그것도 교수도 아닌 학원 강사의 강의를 듣는 장면은 로스쿨 실패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이미지다. 사이토 변호사의 비판은 신랄하다. 일본 한국이 속한 대륙법계 국가와 미국은 법을 공부하는 방식이 다르다는 것이다. 주로 성문(成文) 법전 대신 판례가 있는 미국에서는 교수와의 소크라테스식 문답법으로 판례 연구를 통해 법적 추론 능력을 기르는 것이 중요하다. 대륙법계에서는 민법이면 민법전, 형법이면 형법전을 읽어 법조문을 체계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우선이다. 이것은 시간이 많이 걸리는 공부이고 그래서 시간을 아끼다 보니 토론보다는 일방적 강의가 선호된다. 그리고 솔직히 말하자면 시험에 합격한 적이 없는 교수들의 아카데믹한 강의보다는 변호사 출신 학원 강사의 맞춤형 강의가 더 시간을 절약해 준다는 것이다. 미국에서는 흩어져 있는 수많은 판례를 섭렵하는 것은 애초 불가능하기 때문에 법률가로서의 기본을 갖추는 데는 3년이면 충분하고 그 이후는 알아서 하는 것으로 본다. 대륙법계에서는 법률가로 활동하기 위해 반드시 읽어야 할 주요 법의 기본서가 있다. 로스쿨 3년은 이런 기본서를 읽고 이해하기에도 빠듯한 시간인데 실무교육까지 받아가면서 해야 한다. 여기에 학부 때 전공을 바탕으로 한 특기 개발까지 요구받는다. 실현 불가능한 목표다. 로스쿨은 실무교육 겸비를 표방했지만 실무교육을 시킬 능력도 갖추지 못했다. 판검사나 변호사 출신이 일부 충원되긴 했지만 실무 경험 없는 법대 교수들이 그대로 로스쿨 교수가 돼 교수진의 대다수를 점하고 있다. 로스쿨이 실무교육을 시킬 여유도 능력도 없다는 건 로스쿨 교수들이 가장 잘 안다. 로스쿨 교수들이 여론을 의식해 크게 떠들고 있지 않지만 사시가 폐지되고 나면 일본처럼 로스쿨 출신 합격자를 위한 1년짜리 사법연수 과정을 만들자는 주장이 나올 것이 뻔하다. 사법시험 체제의 결정적 폐해는 3%대의 낮은 합격률이다. 법대생만이 아니라 문과생 전체가 사시 공부에 매달려 대학이 황폐화하고 상당수가 사시 낭인이 돼 인재가 사장된다. 우리나라도 2001년부터 응시자격을 법학 35학점 이수자로 제한했다. 그것으로 모자랐다면 독일처럼 법대 출신에게만 응시자격을 주는 방식으로 갔어야 한다. 그것만으로도 이미 ‘개천에서 용 나기’를 어느 정도 제한하는 것이지만 입학 자체가 변호사 자격을 상당 정도 보장하기 때문에 들어가기가 바늘구멍 같은 로스쿨 체제보다는 훨씬 낫다. 우리나라는 1995년부터 로스쿨 도입을 망설이다 노무현 정권 말기인 2007년 사법제도개혁추진위원회에서 도입을 결정했다. 일본이 2004년 도입한 것이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쫓아간 계기가 됐다. 그러나 사이토 변호사에 따르면 일본의 사법개혁자문위원회도 미국식 로스쿨에 대해 잘 알지 못한 채 도입했고 일본 국민도 무지해 통제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더 몰랐지만 일본이 어련히 알아서 했겠나 싶어 따라하다가 낭패를 본 꼴이다. 일본은 2011년 구(舊)사법시험의 폐지와 동시에 예비시험을 도입해 투 트랙(two track)을 유지했다. 물론 예비시험은 해결책도 아니었을뿐더러 로스쿨의 위기를 심화시켰다. 그러나 그것은 로스쿨이라는 근원적 실패를 고치지 않고 보완하려다 발생한 부차적 실패일 뿐이다. 우리나라 로스쿨 측 주장은 ‘로스쿨은 도입됐고, 도입됐으니 살아야 하고, 따라서 사시 유예나 예비시험 도입은 안 된다”는 것이다. 일본 예비시험이 실패라고 하면서도 로스쿨의 실패는 정면으로 응시하지 않고 그 실패의 원인을 사시 존치에서 찾는다. 일본은 유턴을 고민하는데 우리는 실패의 열차에 올라타 직진(直進)만을 고집하는 꼴이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한겨레신문이 어제 1면에 ‘누가 헌법을 유린하는가’라는 통단 제목으로 민주노동조합총연맹의 5일 2차 집회를 불허한 경찰을 비판했다. 이 신문 기사대로 집회에 대한 허가는 인정되지 않는다(헌법 제21조). 그러나 헌법이 보장하는 자유도 법률로 제한할 수 있다(헌법 제37조). 경찰의 집회 불허는 ‘공공의 안녕질서에 직접적인 위협을 끼칠 것이 명백한 집회는 금지할 수 있다’는 집시법 제5조에 따른 것이다. 경찰 조치는 집회를 허가제로 하느냐 마느냐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 ▷미국 수정헌법 제1조는 평화롭게(peaceably) 집회할 수 있는 자유를 보장한다. 독일 헌법도 집회의 자유에 평화롭게(friedlich) 무장 없이(ohne Waffen)란 수식어를 달아놓았다. 프랑스 헌법에는 집회의 자유가 규정돼 있지 않고 영국은 성문헌법이 없다. 종합하면 집회의 자유는 본질적으로 평화로운 집회의 자유다. 우리나라 헌법에는 이 중요한 수식어가 빠져 있지만 ‘집회에 대한 허가는 인정되지 않는다’라고 할 때 그 집회는 평화로울 것을 전제한다. ▷민노총의 지난달 14일 1차 광화문 집회는 폭력으로 얼룩졌다. 그런 단체가 2차 집회를 주최할 경우 이보다 더 공공질서에 위협을 끼칠 것이 명백한 집회가 또 있을까. 어떤 나라 경찰도 폭력시위 전과가 있는 단체가 주최하는 또 다른 집회를 허락하지 않는다. 올해 폭력시위 집회의 90% 이상이 민노총이 주최한 집회다. 경찰은 민노총 집회에 너무 관대했다. 진즉 법대로 했어야 할 것을 뒤늦게 하니까 ‘헌법을 유린한다’는, 듣지 않아도 될 비난까지 듣는 것이다. ▷집회 참가자가 복면을 쓰든 안 쓰든 현행법상 자유다. 그러나 복면시위자가 폭력에 가담했을 경우 끝까지 추적해 엄단하는 것은 경찰의 자유다. 정확히 말하면 의무다. 물감을 뿌려서든 어떤 식으로든 반드시 색출해 엄벌해야 한다. 우리보다 훌륭한 민주적 전통을 가진 프랑스와 독일은 아예 법으로 복면시위를 금지한다. 그렇다면 복면시위가 헌법 유린일 수 있어도 복면시위 금지가 헌법 유린일 수는 없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누구든 종교에 의해 차별받아서도 안 되지만 우대받아서도 안 된다. 헌법은 차별이라는 부정적 방향만 언급한 듯이 보이지만 헌법학자들에 따르면 그것은 누구든 종교에 의해 우대받지 않아야 한다는 의미도 내포한다. 먼저 불교라 해서 기독교보다, 기독교라 해서 불교보다 우대받아서는 안 되고 나아가 종교집단이라고 해서 비(非)종교집단보다 우대받아서는 안 된다. 경찰이 법원이 발부한 구속영장을 갖고도 조계사에서 한상균 민노총 위원장을 끌어낼 수 없다면 조계사는 종교시설이라고 해서 다른 시설에 비해 특별한 대우를 받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법 앞의 평등이라는 민주 국가의 원칙은 무너진다. 우리나라 헌법은 어느 나라 헌법보다 세속적이다. 대한민국은 태국처럼 부처님의 가호로 세워진 것도, 미국처럼 하나님의 은혜로 세워진 것도 아니다. 우리나라 헌법에는 부처님이나 하나님에 대한 언급은 고사하고 ‘하늘이 부여한(천부·天賦) 인권’이란 개념도 없다. 인권도 그냥 인권일 뿐이다. 이 세속적인 공화국에서 종교가 종교라고 해서 우대받아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 서구의 민주화는 신분상의 특권만이 아니라 종교의 특권을 없애는 과정이었다. 우리나라에는 후자에 대한 이해가 불철저하다. 그래서 오늘날 정치인들이 권력을 남용하는 데는 예민하게 반응하면서도 종교적 특권에는 둔감한 것인지 모른다. 신기남 의원이 아들이 다닌 로스쿨을 찾아가 사실상의 압력을 행사하고 노영민 의원이 의원실에 카드기까지 설치해놓고 공기업에 시집을 강매하는 행동은 격렬히 비판하지만 종교적 특권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다. 우리나라만큼 온갖 사회문제에 전문성도 없는 종교인들이 개입해 이래라 저래라 하는 나라도 없다. 이번에도 조계종 화쟁(和諍)위원회가 중재를 자청하고 나서 ‘노동 관련법 개정을 위한 사회적 대화기구’를 제안했다. 이미 노사정 회의가 있는 데다 또 다른 회의가 필요하다면 세속의 현자들에게 맡길 일이지 종교인이 나설 일은 아니다. 4대강이라면 수자원 관리를 잘 아는 사람이 얘기해야지 풀 한 포기 꽃 한 송이 건드리는 것조차 창조 질서를 파괴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신부들이 얘기할 수 없는 것과 같다. 그리스가 과거 경찰의 대학 진입을 불허한 법을 가진 적이 있다. 그 결과 그리스 대학들이 극좌파들이 모여 화염병 제조 등 불법을 저지르는 온상이 되고 그것이 그리스가 망하는 데도 일조했다는 그리스 기자의 외지 투고를 본 기억이 있다. 민주 국가를 공간의 이미지로 표현한다면 평평한 세상(flat world)이다. 주권은 모든 공간에 똑같이 미쳐야 한다. 한 군데라도 미치지 못하는 곳이 있으면 불법이 그곳으로 몰리고 법질서는 흐트러진다. 유일한 예외가 외교공관에 대한 치외법권이다. 그것도 국가의 호혜에 따른 것이므로 양국 전체로 보면 평평한 것이다. 종교적 치외법권 같은 것은 있을 수 없다. 과거 독재 시절에 천주교 명동성당이 정권의 공권력 행사에 저항하는 보루 역할을 한 적이 있다. 민주화 이후 명동성당은 스스로의 힘으로 쌓아올린 특권을 스스로 내려놓았다. 최근 김영삼 전 대통령의 별세로 민주화를 이끈 김대중 김영삼 양김의 업적이 새로 조명받았다. 1987년 민주화는 불완전했다고 항변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5년 뒤 김영삼의 문민정부가 들어서고 다시 5년 뒤 김대중에 의해 여야 정권교체도 이뤄진 후 국회와 법원의 권력 교체까지 경험하면서 한국은 논란의 여지가 없는 민주주의 국가가 됐다. 이제 더 이상 종교적 치외법권을 주장해서는 안 된다. 조계사 일부 신도들조차 그런 특권을 스스로 내려놓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지 않은가. 2년 전 철도노조 불법파업 주도자들이 조계사로 숨어들었다. 박근혜 정권이 그때 그 일을 방치한 결과 유사한 사태가 재발했다. 첫 번째 사례와 두 번째 반복되는 사례는 그 무게가 다르다. 한 위원장이 5일로 예고된 민노총 집회 때까지 조계사에 머문다면 그 이후 자발적으로 체포되든 도망가든 조계사는 치외법권의 공간으로 굳어질 것이다. 박근혜 정권이 앞으로 며칠 사이에 이 굳어져 가는 선례를 중단시키지 않으면 단지 현 정권이 부담을 안고 가는 문제가 아니라 차기 정권들에까지 두고두고 부담을 주는 관행이 될 수 있다. 최소한 그런 무책임한 정권으로 남아서는 안 된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한국에서 집안 재산에서나 지식에서나 가장 귀족적인 좌파를 꼽는다면 백낙청 씨일 것이다. 백 씨의 부친 백붕제는 조선총독부 고위 관리를 지낸 사람으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에도 이름이 올라 있다. 백붕제의 형은 백병원 설립자인 백인제다. 박원순 서울시장이 새 시장 공관으로 삼으려다 논란 끝에 철회한 북촌 한옥이 백인제가 소유했던 가옥이다. ▷백낙청 씨의 명석함은 학생 때부터 유명했다. 경기고 3학년 때 미국 뉴욕 세계고등학생토론회에 한국 대표로 참가한 사실이 당시 언론에 보도됐다. 1959년 6월 12일자 동아일보에는 그가 미국 브라운대 영문학과를 수석으로 졸업하면서 전체 졸업생을 대표한 연설을 해 한국 학생의 우수함을 과시했다는 소식이 사회면 톱기사로 실렸다. 그는 하버드대 박사학위 과정 중 귀국해 서울대 영문학과 교수로 부임했다. ▷백 씨는 1966년 ‘창작과 비평(창비)’을 창간했다. 창비는 ‘문학과 지성’과 더불어 문예지의 두 축을 이뤘다. 그는 분단을 주제로 삼은 문학을 높이 평가했다. 그 배경 이론으로 한국 사회의 온갖 왜곡을 초래하는 원인은 분단이라는 ‘분단모순론’을 들고 나왔다. 남북이 팽팽한 체제 대결을 벌일 때만 해도 분단모순론은 일견 타당해 보였다. 하지만 공산주의가 붕괴하자 분단모순론은 길을 잃었다. 그는 새로 ‘이중극복론’을 들고 나왔다. 분단을 극복해 통일로 가야 하지만 통일은 동시에 자본주의 체제를 극복하는 이중의 극복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백 씨와 창비는 이명박 정권이 등장하자 1987년 민주화 이후의 진보적 흐름이 끊겼다고 보고 적극적인 현실 개입을 시작했다. 광우병에 대해 거짓을 늘어놓고 천안함 폭침은 북한 소행이 아니라고 우겼다. 백 씨의 2013년 체제는 ‘이중극복론’식 통일로 가기 위한 체제다. 그는 원탁회의를 통해 통합진보당의 의회 진출을 도왔다. 백 씨가 오늘 창비 편집인에서 은퇴한다. 50년 창비를 떠나는 것이다. 그의 문학평론은 훌륭했는지 모르지만 정치적 주장은 서구의 무책임한 극좌파나 다름없었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야구에는 ‘어게인 1982’라는 구호가 있다. 야구팬이라면 1982년 서울 잠실구장에서 열린 세계야구선수권대회의 한일 결승전을 잊지 못한다. 7회까지 0-2로 끌려가던 한국은 8회 김재박의 ‘개구리 스퀴즈번트’로 동점을 만든 뒤 한대화가 통쾌한 3점 홈런을 터뜨려 5-2로 역전했다. 그제 일본 도쿄돔에서 열린 ‘프리미어12’ 준결승 한일전의 감동도 결코 그때 못지않다. 한국은 8회까지 0-3으로 뒤지다가 9회초 4-3의 극적인 역전승을 거뒀다. ▷야구 세계랭킹 상위 12개국 국가 대항전 프리미어12는 2020년 도쿄 올림픽을 앞둔 일본이 야구의 올림픽 종목 부활을 위해 발 벗고 나서 올해 처음 열렸다. 개막전에서 한국을 0-5로 이긴 일본은 준결승전이 열리기도 전 이미 결승에 진출한 듯 들떠 있었다. 그러나 다른 누구도 아닌 올해 일본 저팬시리즈에서 한국인 최초로 MVP를 차지한 이대호가 역전 2타점 적시타를 터뜨리자 도쿄돔은 찬물을 끼얹은 듯 침묵에 휩싸였다. ▷한국팀은 역대 최악의 상황에서 출범했다. 단기전에서 절대적으로 중요한 투수진은 도박 스캔들이 겹쳐 최약체였다. 이 대회에서 우승해도 선수들은 병역 혜택도 못 받는다. 주최국 일본은 준결승 날짜를 갑자기 하루 앞당기고 일본인 선심까지 배정했다. 그러나 김인식 감독은 일본의 이런 꼼수를 선수들이 승부욕을 불태우는 계기로 반전시켰다. 무엇보다 “사람이 던지는 건데 왜 못 치겠어, 한번 해봐”라는 말로 침묵의 한국 타선을 끝까지 믿고 격려했다. ▷한국의 한 누리꾼이 “야구를 왜 인생이라고 하는 줄 알겠다. 이 경기는 끝까지 포기하지 말라는 교훈을 준 스포츠 이상의 드라마다. 힘든 일 겪는 분들 경기 보고 모두 희망을 가지시길 바란다”는 글을 올렸다. 난 그제 9회초 경기가 막 시작된 뒤 친구들과 함께 한 호프집에 들어섰다. 호프집은 순식간에 열광의 부산 사직구장처럼 달아올랐다. 청년들 사이에서 ‘헬조선’(지옥의 한국)의 자조가 나오던 우울한 분위기를 모처럼 날려 버리는 순간이었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벨기에 브뤼셀 기차역은 유럽에서 절도범이 가장 많은 곳 중 하나다. 2011년 브뤼셀에서 프랑스 파리행 열차를 탔다가 선반에 올려놓은 손가방을 잃어버렸다. 파리에 도착해서야 분실 사실을 알았다. 누군가 기차가 출발하기 전 자기 물건을 올려놓는 척하면서 갖고 내린 것이다. 손가방에 둔 휴대전화도 함께 잃어버렸다. 휴대전화에는 잠금 코드를 걸어놓지 않았다. 귀국해서 통화 기록을 조회해보니 알제리로 전화한 기록이 많이 나와 있었다. 절도범은 알제리계였던 것으로 보인다. 브뤼셀은 유럽에서 이슬람계 인구 비율이 가장 높은 도시다. 유럽연합(EU) 본부가 있는 이 도시가 2030년경이면 이슬람계 인구의 비율이 유럽 최초로 절반을 넘는 도시가 된다고 한다. 브뤼셀 인근에서도 이슬람계가 가장 많은 도시가 몰렌베이크다. 몰렌베이크가 파리 테러범들의 근거지였던 것으로 드러났다. 파리 교외의 생드니에 비춰 보면 그곳이 어떤 곳일지 대략 짐작이 간다. 2009년 파리 특파원 시절 생드니에 갔다가 이슬람계 청년들로부터 공격을 받은 적이 있다. 생드니도 이슬람계가 많고 우범지대로 악명 높다. 내 카메라가 우연히 불량스러워 보이는 청년들을 향했는데 날이 저물어 플래시가 자동으로 터졌다. 그쪽에서 나를 쳐다보는 낌새가 이상했다. 뭔가 잘못됐다고 생각하고 서둘러 빠져나가기 위해 발걸음을 재촉했다. 30초쯤 걸어가는데 등 뒤에서 누군가 내 손의 카메라를 확 잡아채는 게 느껴졌다. 카메라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꽉 잡았다. 그러자 이번에는 등 뒤에서 내 발을 걸어 쓰러뜨리고 내 눈에 휴대용 스프레이 최루가스를 뿌렸다. 안경을 끼고 있어 그나마 다행이었지만 그래도 한동안 눈을 제대로 뜰 수가 없었다. 공포감이 밀려왔다. 주변에 있던 남자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는 바로 앞이 중국인 상점이니 들어가 도움을 청하라고 말했다. 나를 중국인으로 여긴 모양이었다. 상점으로 들어가 중국인 주인에게 사정을 해서 경찰을 불러 달라고 했다. 주인은 한참을 망설이다 전화기를 들었다. 그러자 불량배들이 상점으로 들이닥쳐 주인에게 전화기를 내려놓지 않으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협박했고 주인은 포기하고 전화기를 내려놓았다. 불량배들도 고객들 눈치가 보여서인지 나를 끌어내지는 못했다. 내가 나올 때까지 밖에서 기다리는 눈치였다. 도움은 예기치 않은 곳으로부터 왔다. 그 상점은 여성용품을 파는 곳이었다. 학생으로 보이는 젊은 이슬람계 여성 2명이 내게 다가와 제안하기를 자신들이 나를 에워싸고 매장을 나가 택시를 태워주겠다는 것이다. 나는 차라리 경찰을 불러 달라고 부탁했지만 그들은 “이 구역은 경찰도 잘 들어오지 못하는 곳”이라며 달랬다. 서너 명의 다른 여성들도 도와주겠다고 동참했다. 그들 말이 맞았다. 불량배들은 이 여성들을 어떻게 해볼 수 없었던지 나는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 일이 있은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파리에서 한 살인자가 피해자를 제압하는 과정에서 휴대용 스프레이 최루가스를 사용했다는 기사를 봤다. 그런 물건은 범죄자의 세계 속에 있지 않으면 구하기 힘든 것이다. 프랑스나 벨기에는 총기 휴대가 금지된 나라다. 그러나 테러범들은 칼라시니코프 소총을 난사했다. 경찰도 함부로 접근하기 어려운 치안 부재의 게토가 얼마나 위험한지를 보여준다. 나는 이슬람 테러가 발생할 때마다 나를 도와줬던 고마운 젊은 이슬람계 여성들을 떠올린다. 그들도 파리 테러와 같이 무고한 사람들을 희생시킨 테러에 분노할 것이다. 이슬람국가(IS)의 잔혹한 행태는 인간 심성에 거슬리는 것으로 이슬람 신자라도 구역질 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그들은 자신이 속한 사회에서 소수의 폭력주의자들이 휘두르는 전횡에도 신물을 느낀다. 이 싸움을 서구 문명과 이슬람 문명의 충돌로 보면 해결책을 찾기 힘들다. 이것은 문명과, 어느 문명에나 남아 있는 야만과의 충돌이다. 서구 문명에서도 지난 세기 공산주의와 파시즘의 야만이 출현해 수많은 목숨을 앗아갔다. 이슬람 문명 역시 그 저류에서 돌출하는 야만을 극복하고 발전하는 과정에 있다. 이슬람 문명이 야만을 이기는 데 어떤 도움을 줄 수 있는지 우리도 서구인들과 함께 궁리해야 한다. 우리에게도 이슬람 테러가 언제까지나 남의 일로 남아 있을 것 같지 않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프랑스 68혁명 세대를 대표하는 앙드레 글뤽스만만큼 지적 용기를 가진 철학자도 드물다. 그는 미국이 사담 후세인을 축출하기 위해 벌인 1991년과 2003년의 이라크전쟁을 지지했고 1999년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의 세르비아 사태 개입에도 찬성했다. 그는 친미주의자나 친나토주의자로 오해받을까 봐 해야 할 말을 못 하는 지성인은 아니었다. 독재에 희생당하는 이들의 인권을 위해서라면 그런 정도의 오해는 기꺼이 감수할 준비가 돼 있었다. ▷글뤽스만은 1956년 프랑스공산당(PCF)의 당원이었으나 소련의 헝가리 부다페스트 침공을 비판했다는 이유로 쫓겨났다. 이후 좌파그룹 ‘악시옹’에 들어가 마오주의자로 68혁명에 깊숙이 개입했다. 그러나 그는 1974년 솔제니친의 ‘수용소 군도’를 읽고 지적 전환을 감행한다. 베르나르 앙리 레비와 함께 반(反)전체주의적 철학인 신(新)철학의 양대 기수가 돼 스탈린 공산주의를 ‘인간의 얼굴을 한 야만’이라고 비판했다. 그에게는 좌파 지식인 사이에 만연한, 자기 패거리에서 낙인찍히는 데 대한 두려움 따위는 애초 없었다. ▷글뤽스만은 반스탈린주의를 거쳐 반공산주의자가 됐지만 우파로 돌아섰다기보다는 좌우를 넘어섰다. 그는 1979년 좌파의 사르트르, 우파의 레몽 아롱이 만나는 엘리제궁 모임을 주선해 함께 베트남 보트피플을 위한 대의(大義)에 참여하도록 하는 데 기여했다. 그는 알카에다의 9·11테러를 새로운 니힐리즘으로 규정하고 “세상에 신이 없다면 인간이 할 수 없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도스토옙스키적 질문을 던졌다. 이후 그는 이슬람에 대해 할 말을 하는 몇 안 되는 서구 지식인이 됐다. ▷글뤽스만은 한 손에 신문을 들고 세상에 일어나는 사건에 진솔한 응답을 한 철학자였다. 그는 지성인을 “도성 밖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우리에게 말해주는 카산드라”라고 정의했다. 그리스 신화의 여신 카산드라는 비록 사람들에게 인기가 없더라도 할 말을 하는 예언자였다. 우리 시대의 카산드라가 10일 세상을 떠났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요즘 한정판 마케팅 열풍이 뜨겁다. 며칠 전 서울시청 옆 맥도날드 매장 앞을 지나다 보니 긴 줄이 늘어서 있었다. 맥도날드 상표가 붙은 헬로키티 인형 한정판을 사려는 줄이었다. 그날 밤 귀가해 TV 뉴스를 보니 서울 명동의 패스트패션 의류 매장 H&M 앞이 노숙까지 하면서 물건을 사려는 사람들로 붐볐다. 명품 브랜드 ‘발맹’과 합작해 만든 한정판 의류를 구입하려고 모두 난리였다. ▷‘박근혜 시계’도 한정판이라면 한정판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대통령 시계는 판매용으로 제작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시계를 손에 넣은 사람들이 인터넷 중고경매 사이트에 내다 팔기도 해 가격이 형성된다. ‘박근혜 시계’는 구하기가 어려워 매물이 나오면 박 대통령이 현직인데도 상대적으로 높은 가격에 팔린다. 박 대통령은 자신의 이름 석 자가 들어가는 물건이 함부로 나돌아 다니는 것을 싫어해 시계 증정을 제한한다고 한다. 전임 대통령들이 지지자들에게 대통령 시계를 마구 뿌려댄 것과 대조적이다. ▷대통령 조화(弔花)가 국가에 별 기여한 것도 없는 망자(亡者)의 빈소에 놓이는 것을 박 대통령은 더 질색한다고 한다. 그래서 전임 대통령들에 비해 조화도 훨씬 적게 보낸다. 이 때문에 서운해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고, 조화까지 대통령이 체크하느냐는 시각도 없지 않다. 박 대통령이 유승민 새누리당 의원의 부친 유수호 전 의원 빈소에 대통령 조화를 보내지 않았다고 해서 말이 많다. 이것이 한정판 정책 때문인지, 국회법 개정을 둘러싸고 충돌했던 유 의원이 아직도 괘씸해서인지는 알 수 없다. ▷한정판 마케팅은 브랜드에 대한 아우라(신비한 분위기)와 그에 상응하는 충성도를 만들어낸다. 그러나 한정판 마케팅도 지나치면 부작용을 낳는다. 박 대통령은 저녁에 사람 만나는 것도 한정판이고, 장관 대면보고도 한정판이다. 유 의원 부친상의 경우 상주 측이 ‘조화를 받지 않는다’고 해서 안 보냈다고 청와대는 해명한다. 하지만 참모들 중 누구도 조화를 보내는 게 좋겠다고 아우라가 강한 박 대통령에게 감히 말할 용기가 없었던 것은 아닐까.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박근혜 정부가 기어이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를 확정 고시했다. 출발한 버스 뒤에 대고 소리치는 격이긴 하지만 국정화는 박 대통령의 3번째 결정적 실수가 될 것이다. 그는 이미 두 가지 결정적 실수를 저질렀다. 하나는 2009년 이명박 당시 대통령의 세종시 수정안을 막은 것이고 다른 하나는 2012년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장으로서 국회선진화법을 막지 못한 것이다. 1년 뒤에나 나올 국정 교과서를 보지도 않고 결정적 실수라니 지나치다고 반발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국회선진화법은 통과 전부터 다수의 지배라는 원칙을 훼손한다는 점이 지적됐고 실제 그렇게 됐다. 청와대와 국회는 서울, 행정부처는 세종시에 존재함으로써 초래되는 공무의 비효율성도 충분히 예상된 것이다. 박 대통령은 민주주의 사회에서 역사인식을 둘러싼 싸움의 성격 자체를 이해하지 못한다. 이 싸움은 고지를 점령함으로써 단숨에 끝나는 전격전이 아니라 진지를 하나씩 점령해야 비로소 이기는 진지전의 성격을 갖고 있다. 국사학계의 좌파는 우파가 무관심한 사이 현대사의 거점을 하나씩 점령했다. 현대사 분야의 교수직이 신설되는 족족 그 자리를 차지했고 그들로부터 배운 학생들이 교사가 됐다. 그렇게 현대사 교육 환경은 좌편향됐다. 그러나 국정화는 전격전의 방식으로 달랑 고지만을 점령하는 것이다. 국정 교과서는 아무리 올바른 교과서가 된다 하더라도 주변의 수많은 적대적 진지를 우호적 진지로 돌려놓지 못하는 한 동떨어진 무력한 고지로 남을 수밖에 없다. 설득으로 빼앗긴 진지는 설득으로 되찾아와야 한다. 나는 박정희에서 전두환에 이르는 ‘긴 유신체제’의 국정 교과서로 한국사를 배웠다. 대학에서 ‘해방전후사의 인식’을 읽으면서 여운형의 이름을 처음 알았을 정도로 내 현대사 지식은 공백에 가까웠다.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의 기원’을 읽을 때는 6·25 남침을 북침처럼 바꿔놓은 논리가 억지인 줄 느꼈지만 반박하기 어려웠다. 벌써 10년 전에 나온 책이 됐지만 정병준의 ‘우남 이승만 연구’도 쉽게 극복이 안 된다. 한홍구의 ‘대한민국사’나 김기협의 ‘해방일기’를 읽으면서 고약한 저자들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내 지식의 부족도 함께 느꼈다. 역사인식을 둘러싼 싸움은 논리를 무기로 싸우는 싸움이다. 좌파 사가들이 끊임없이 대한민국 건국을 폄훼하는 논리를 만들어내는 동안 우파 사가들은 수적으로 열세였을 뿐만 아니라 제대로 된 방어 논리도 개발하지 못했다. 사실 우파 사가가 써낸 읽을 만한 현대사 책 하나 없는 실정이다. 그 결과가 학교 교실과 교과서를 좌파에게 내준 꼴로 나타났다. 박 대통령이 국정화로 이런 상황을 일거에 뒤집을 수 있다고 여긴다면 착각이다. 박 대통령은 국정화 이전에 이미 한국사를 수능 필수과목으로 만드는 실수를 저질렀다. 누가 박 대통령의 귀에 대고 속삭였는지 짐작되는 역사학자가 있다. 나는 고등학생 자녀를 둔 학부모로서 내 자녀가 배우면 배울수록 대한민국이 부끄러워지는 교과서로 한국사를 배우기를 원하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 내 두 딸은 국정화를 해서라도 뜯어고치지 않으면 안 될 나쁜 교과서로 수능을 준비하고 있다. 무슨 일 처리를 이렇게 하나. 황우여 교육부 장관이 검정제로는 교과서 왜곡을 바로잡지 못한다고 한 것은 제 할 일 못해 놓고도 부끄러운 줄 모르는 뻔뻔한 말이다. 교과서 집필진이 수정을 거부해 소송을 내면 수년이 걸려서라도 바로잡으면 된다. 말을 안 들으면 검정에서 탈락시키면 된다. 솔직히 말하자면 교육부는 편수(編修)기관으로서의 권위도 능력도 없다. 교과서 집필진은 교육부의 머리 위에서 논다. 교육부 집필기준이 집필을 유도하기는커녕 집필을 따라가지도 못한다. 그런 주제에 아무 생각 없이 덜컥 한국사를 수능 필수화해 놓고 보니 교과서를 고치는 게 발등의 불이 된 것이 국정화의 진짜 원인이다. 진지전은 시간이 오래 걸리는 싸움이다. 역사인식은 문제가 있다고 해서 나라가 당장 어떻게 되는 것은 아니다. 사안에 따라 잘못을 바로잡는 다른 방법이 있다. 시간을 두고 점진적이지만 집요하게 다뤄야 할 사안을, 시급하게 다루지 않으면 안 될 상황을 자초해 놓고 시급하게 취급한 것이 국정화에 이른 잘못된 길이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국회의원 출신 강용석 변호사와 루머에 휘말렸던 유명 블로거 ‘도도맘’이 자신의 실명(김미나)과 얼굴을 공개했다. 그는 여성지와의 인터뷰에서 “(강용석은) 남자로는 외모부터가 내 스타일이 아니다”라는 말로 불륜설을 부인했다. 그는 지난해 홍콩의 호텔 수영장에서 자신이 찍은 강 씨 사진이 공개되자 “조작됐다”고 거짓말한 적이 있다. 이번에는 “각자 다른 이유로 홍콩에 갔다가 우연히 만나게 됐다”고 말했다. ‘우연’이라는 해명보다 연예인 뺨치는 외모에 더 관심이 가는 것은 당연하다. ▷그도 자신의 말을 사람들이 쉽게 믿어줄 거라고 여기고 인터뷰를 했을 것 같지는 않다. 김 씨는 “사람들은 내가 숨어 있다고 생각하고, 숨어 있다는 표현 자체가 불륜을 인정하는 것 같아 ‘아니다’라는 말을 꼭 하고 싶었다”고 했다. 중요한 것은 ‘아니다’라는 부인(否認)의 말이나 그것이 받아들여질 것이라는 기대가 아니라 더 이상 숨어 있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럼으로써 두 사람 사이에 불륜이 있었고 그래서 여자는 숨어 있는 것이라고 여기던 사람들의 인식에 균열을 가하는 것이다. ▷진실은 흔히 고체처럼 생각하기 쉽지만 오히려 액체에 가깝다. 많은 진실이 사람들이 공유하는 인식일 뿐이다. 김 씨가 침묵하고 숨어 있으면 불륜은 진실로 굳어져 간다. 김 씨의 전략은 이런 고체화 과정에 개입해 그것을 다시 액체 상태로 돌려놓는 것이다. 사람들이 자기 말을 믿어주든 안 믿어주든 ‘보지 않고서야 불륜이 있었는지 없었는지 어떻게 알겠느냐’라는 유동적 상황으로 만들어 놓으면 그것으로 성공한 셈이다. ▷불륜은 내밀한 것이어서 그것이 범죄로 규정되고 국가가 개입해 증거를 찾아주지 않는다면 불륜으로 확정하기 어렵다. 간통죄가 더 이상 처벌 대상이 아닌 사회에서 많은 불륜은 심증(心證)은 있으나 물증(物證)이 없는, 다시 말해 불륜인지 아닌지 확정할 수 없는 상태로 남게 된다. 남편과 이혼소송 중인 김 씨의 자기 공개는 당당한 것도 뻔뻔한 것도 아니고, 간통죄 폐지 이후의 상황을 주도면밀하게 계산한 것이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1996년 국정으로는 마지막 발행된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를 펼쳐보니 집필진 9명의 이름이 똑똑히 기재돼 있다. 1974년 최초의 국정 국사 교과서가 발행된 이후 국정이라고 해서 집필진을 밝히지 않는 경우는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 김정배 국사편찬위원장이 23일 국회 동북아역사왜곡특위에서 “교과서 집필진이 거부하면 명단 공개를 할 수 없다”고 말해 논란이 되고 있다. ▷국사 교과서 국정화가 바람직한 해법은 아니지만 정부가 밀어붙이려는 의지가 강하다. 그러나 집필진을 알 수 없는 국정 교과서만은 절대 안 된다. 국정 교과서도 집필진이 양심에 따라 쓰는 것이다. 집필진 공개는 국정화에 대한 최소한의 견제장치다. 유신 시절 국정 국사 교과서에는 유신을 찬양하는 내용이 들어갔다. 당시 근현대사를 집필한 윤병석 인하대 명예교수는 그런 내용을 쓴 적이 없다고 한다. 그것을 쓴 것은 익명 뒤에 숨은 국가다. 국정화를 우려하는 것은 바로 이런 가능성 때문이다. ▷김 위원장의 발언이 고육지책(苦肉之策)임을 모르지 않는다. 국정화 발표 직후 일부 대학과 학회를 중심으로 역사학 교수들의 집필 거부 선언이 잇따랐다. 집필을 부탁받지도 않았는데 집필 거부라니 우습다. 집필을 거부한 학자 중에 지금까지 교과서 집필에 참여해 본 사람은 하나도 없다고 한다. 국정 교과서 집필에 참여하면 따돌리겠다는 위협 분위기를 조성하려는 의도가 엿보인다. 누구보다 개인의 의사를 존중해야 할 교수들이 해선 안 될 유치한 행동이다. ▷국정화로 간다면 실제 집필진 명단이 공개되지 않는 일은 없으리라고 본다. 그러나 그런 발상이 나왔다는 그 자체가 일정 부분 패배를 인정하는 셈이다. 자기 이름을 걸고 당당하게 쓸 수 없는 역사라면 아예 쓰지를 말라고 말해주고 싶다. 지식인 사회만 놓고 보면 국정화에 반대하는 의견이 압도적으로 높다. 찬반이 비등했던 일반인의 반대도 찬성보다 많아졌다. 박근혜 대통령은 27일 국회 시정연설에서 국정화를 최종적으로 못 박기 전에 다시 한 번 국정화 여부를 깊이 고민해 보기 바란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우리나라에 특징적인 몬순 기후는 해마다 장마와 태풍이 한 번쯤은 와줘야 하는데 올여름 장마와 태풍이 한반도를 비켜가는 바람에 충청권에 가뭄이 심하다. 강수량으로는 40년 만의 최저다. 체감 정도로는 노인들도 태어나서 처음 겪는다고 할 만큼 심각하다. 예산의 예당저수지는 바닥을 드러내고 보령댐도 내년 3월이면 완전히 마를 것이라고 한다. 다만 4대강 사업으로 보(洑)를 만든 금강에는 물이 찰랑거리고 있다. ▷안희정 충남도지사는 2010년 처음 도지사 선거에 출마하면서부터 4대강 사업을 중단하고 그 돈을 교육과 복지에 쓰자고 주장했던 사람이다. 친노가 이명박 전 대통령의 상징과도 같은 4대강 사업에 반대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 그런 그가 결국 가뭄 끝에 금강 4대강 보의 물을 활용하기로 했다. 안 지사는 중앙정부에 금강 백제보에서 보령댐 간 25km 관로 건설을 요구한 데 이어 다시 금강 공주보에서 예당저수지 간 30km 관로 건설을 요구했다. 진실은 궁해서야 드러나는 법이다. ▷저수지 바닥을 파고 또 파도 물이 나오지 않아 기우제밖에 지낼 수 없는 상황보다는 가뭄에도 어딘가 쓸 물이 남아 있는 상황이 백배 천배 희망적이다. 4대강 사업 비판론자들은 ‘끌어다 쓰지도 못할 물 있으면 뭐하느냐’고 비아냥거렸지만 막상 관로를 통해 끌어다 쓸 궁리를 하니 그런 비아냥거림이 무색해졌다. 다만 몇 달 내로 수십 km에 이르는 긴 관로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하니 왜 지천과 지류 정비 작업은 빨리 하지 못했나 하는 아쉬움이 든다. ▷4대강 사업에도 벌써 어떤 기시감이 든다. 1970년대 경부고속도로, 포항종합제철 건설 때도 강력한 반대가 있었으나 후일 성공적인 사업으로 평가됐다. 사람이 살다 보면 앞에 닥칠 일을 못 내다보고 후회할 선택을 하는 경우가 왕왕 있다. 그래서 어리석은 인간이다. 그러나 고지식하게 끝까지 반대해 자가당착(自家撞着)에 빠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실제에 맞닥뜨려서 과거의 판단 잘못을 인정하는 사람도 있다. 안 지사가 후자라야 더 큰 자리를 바라볼 수 있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