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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0원까지는 참을 만한데 그 이상은 어휴….” 올 초 충남 모 편의점에서 일했던 이모 씨(25·여)는 ‘종이컵 아저씨’를 잊지 못한다. 소주와 안주거리를 잔뜩 집어온 이 아저씨는 물건값 3만 원 가운데 1만 원 넘는 돈을 동전으로 냈다. 100원과 500원 짜리 동전이 종이컵 두 개에 가득했다. 이 씨는 진땀을 흘리며 돈을 셌다. “빨리 빨리 좀 하라”고 아저씨가 재촉하자 울컥하기도 했다. 이 씨는 “현금을 내는 손님이 무슨 잘못이 있겠냐마는 귀찮은 건 어쩔 수가 없었다”고 말했다. 편의점이나 카페 등지에서 일하는 아르바이트생이나 직원에게 요즘 현금, 그것도 동전은 공포의 대상이다. 동전을 가져와 계산하는 손님은 ‘동전 빌런(악당을 뜻하는 영어)’이라고 불린다. 미국 슈퍼히어로 영화에 나오는 악당을 빗대 일하기 귀찮게 만드는 사람이라고 비꼬는 것이다. 이는 단순히 계산하기 어렵다는 것에서 더 나아가 현금 자체를 번거롭게 여기는 ‘현금 귀차니즘’ 증상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귀찮다’라는 말에 주의(主義)를 뜻하는 영어 접미사 ‘이즘(-ism)’을 붙여 만든 귀차니즘은 어떤 현상이 만연해 귀찮을 정도라는 뜻이다. 한국은행 통계에 따르면 우리나라 현금 결제 비율은 2014년 17.0%에서 2016년 13.6%로 계속 줄고 있다. ‘현금 없는 사회’로 빠르게 나아가는 한국사회 단면이 현금 귀차니즘인 셈이다. 몇 년 전만 해도 신용카드 수수료나 세금이 아까워 현금 지불을 권하는 소규모 상점이 많았다. 최근에는 거의 찾을 수 없다. 직장인 김모 씨(35)는 며칠 전 동네 카페에서 커피 한 잔을 시키고 현금을 내밀었다. 그러나 아르바이트생은 “카드 없느냐”며 한숨을 푹 쉬었다. 김 씨는 “작은 가게라 현금을 반길 것 같아 일부러 가져갔는데 당황스러웠다”고 말했다. 택시에서 기본요금이 나와 5000원짜리 지폐를 냈다가 “그냥 카드로 하시라”며 택시기사에게 핀잔을 들었다는 승객도 있다. 한 푼 두 푼 모은 동전을 슈퍼에 가져가면 “기특하다”고 칭찬 받던 시대는 지났다고 이들은 입을 모은다. 서울 종로구에서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하는 조모 씨(25)는 “동전을 내면 세는 데 시간도 많이 걸리고, 나중에 정산하다 틀릴 수도 있으니 아무래도 귀찮은 존재”라고 말했다. 미취학 아동들에게는 ‘돈=현금’이라는 공식도 잘 먹히질 않는다. 워킹맘 박모 씨(39)는 7세 딸에게 경제관념 공부를 시키겠다며 “돈이 뭐냐”고 물었다 깜짝 놀랐다. 딸이 팔을 들어 위에서 아래로 내려 그은 것이다. 식당에서 카드 결제하는 모습을 흉내 낸 것이다. 현금 귀차니즘이 업무 혁신을 불러오기도 한다. 커피전문점 스타벅스는 매장 평균 현금 결제율이 한 자릿수로 떨어지자 올 4월 ‘현금 거래 없는 매장’ 3곳을 지정해 시범 운영했다. 도입 50일 만에 3곳 현금 결제율은 0.2%까지 떨어졌다. 직원들이 정산하는 데 드는 시간도 하루 평균 50분씩 절약됐다. 시범 매장 점장인 이상엽 씨(30)는 “정산한 뒤 100원, 200원이 빌까 걱정하는 직원이 없어졌다”고 말했다. 스타벅스는 현금 없는 매장 확대를 검토할 예정이다. 이영애 인천대 소비자아동학과 교수는 “휴대전화 간편 결제 서비스 등이 늘면서 지갑 대신 머니클립을 쓰는 사람이 늘지 않았느냐. 현재 소비문화에서 현금 사용은 생소한 행동이 됐다는 것을 보여주는 현상”이라고 말했다.권기범 기자 kaki@donga.com박광일 기자 light1@donga.com}

그동안 경찰은 대부분의 형사사건을 수사하면서도 검사의 수사를 돕는 보조자로 간주되어 왔다. 정부가 21일 발표한 검경 수사권 조정 합의안은 경찰을 명실상부한 수사의 주체로 인정하고 있다. 경찰이 모든 사건에 대한 1차 수사를 맡고 혐의가 없다고 판단한 경우 수사를 자체 종결할 수 있도록 해 자율과 책임을 부여한 것이다. 경찰의 수사권 남용 등 부작용에 대비해 검찰의 사후 통제 장치도 함께 보강됐다. 이날 이낙연 국무총리는 정부 합의안을 발표하며 “검경이 수직적 관계에서 벗어나 상호 협력하며 견제하는 관계로 나아가야 한다”고 설명했다.○ 경찰, 수사 시작부터 끝까지 맡는다 지난해 12월 A 씨는 수년간 자신을 성폭행한 혐의로 60대 남성 B 씨를 검찰에 고소했다. 검찰은 서울의 한 경찰서에 사건을 내려보냈다. 경찰은 지휘에 따라 수사에 착수했다. 이 과정에서 수사기록을 검토한 검찰은 ‘불기소 의견’으로 송치하도록 지휘했다. 그러나 경찰은 혐의가 있다고 판단해 검찰 지휘에 불복하고 기소 의견으로 송치했다. 정부 합의안이 적용되면 이 같은 검경의 엇박자는 크게 줄어들 가능성이 높다. 검찰의 사건 접수는 가능하다. 하지만 경찰에 넘긴 뒤 지휘는 불가능하다. 1차적 수사권은 전적으로 경찰이 행사한다. 고소인과 피고소인 조사, 증거 확보 등 모든 수사를 경찰이 맡는다. 그 내용을 바탕으로 최종 결론까지 내린다. 검찰이 수사에 개입할 수 있다. 경찰이 B 씨에 대한 압수수색이나 구속영장을 신청했을 때, 수사 후 기소 의견으로 송치했을 때다. 검찰은 기소 여부를 판단하거나 영장 청구에 필요할 경우 경찰에 보완 수사를 요구할 수 있다. 이에 응하지 않으면 해당 경찰의 직무 배제와 징계를 요구할 수 있다. 물론 송치 후 기소 여부를 판단하기 위해 검찰은 2차 수사를 할 수 있다.경찰은 수사 결과 혐의가 없다고 판단되면 불기소 의견으로 사건을 종결할 수도 있다. 그때는 검찰에 사건자료 사본 등을 보내면 된다. 경찰의 결정이 위법하거나 부당하다고 판단되면 검찰은 재수사를 요청할 수 있다. ‘특수 사건’의 경우 검찰과 경찰 모두 1차 수사가 가능하다. 뇌물과 정치자금 직권남용 같은 부패 범죄, 사기 또는 횡령 같은 경제 범죄, 금융·증권 범죄와 선거 범죄 등이다. 양측이 동시에 수사에 착수한 경우 검찰이 우선권을 갖는다.○ 검경 간 ‘상호 견제’에 무게 정부 합의안대로면 경찰 권한이 강해지는 건 분명하다. 합의안에 여러 견제장치가 포함된 이유다. 경찰 수사에서 인권 침해나 권한 남용이 의심되면 검찰은 사건기록 송부와 시정 조치를 요구할 수 있다. 경찰 수사가 종결되면 반드시 사건 당사자에게 결과를 알려야 한다. 결과에 불복하면 경찰서장 등에게 이의 신청을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사망 사건 발생 시 경찰이 ‘사망자의 실수’를 이유로 수사를 종결했다면 유가족이 이의를 신청할 수 있다. 이 경우 사건은 즉각 검찰로 송치된다. 이번 합의안에 검찰의 영장청구권 독점에 대한 조정은 포함되지 않았다. 헌법 개정이 필요한 사안이기 때문이다. 다만 이를 견제할 수 있는 내용이 추가됐다. 경찰이 신청한 영장을 검찰이 정당한 이유 없이 청구하지 않으면 고등검찰청 산하 영장심의위원회(가칭)에 이의를 제기할 수 있게 한 것이다. 최근 경찰이 황창규 KT 회장에 대한 사전 구속영장을 신청했으나 검찰이 기각했는데 이 경우에도 경찰이 이의를 제기할 수 있다.‘스폰서·수사 무마 청탁’ 비리로 논란이 됐던 김형준 전 부장검사 수사 당시 검찰은 계좌 추적 영장 신청을 기각하면서 사건을 검찰로 송치할 것을 지시해 논란이 일었다. 이런 ‘제 식구 감싸기’ 논란을 막기 위해 정부 합의안에는 검사 또는 검찰 직원의 범죄 혐의로 경찰이 각종 영장을 신청할 경우 지체 없이 이를 법원에 청구하도록 하는 내용이 담겼다. 경찰을 일반경찰과 수사경찰로 분리한 것도 경찰 권한이 비대해지는 걸 막기 위한 것이다. 정부 합의안에 따르면 경찰청 산하 국가수사본부(가칭)가 사건 수사를 맡는다. 경찰청은 행정 업무에 대해서는 지휘를 할 수 있으나 수사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지휘를 할 수 없도록 했다. 수사권 조정과 함께 지방경찰이 생활안전과 교통 등을 맡는 자치경찰제도 단계적으로 추진된다. 내년 중 서울과 세종 제주에서 시범실시하고 문재인 대통령 임기 내 전국으로 확대할 계획이다.권기범 kaki@donga.com·김은지 기자}

올해 3월 치킨집 주인 김모 씨(45)는 경찰 조사를 받았다. 한 이웃이 사기 혐의로 그를 고소한 것이다. 김 씨는 여러 차례 경찰서를 오간 끝에 무혐의 처분을 받았다. 얼마 뒤 검찰이 김 씨를 불렀다. 그는 경찰 때와 똑같은 조사를 다시 받았다. 검찰의 결론도 무혐의였다. 김 씨는 “근처 치킨집 주인이 우리 가게에 손님이 몰리는 것을 시샘해 억지 주장을 한 것”이라며 “경찰과 검찰에 연이어 불려 다니느라 장사도 제대로 못 했다”고 토로했다. 21일 정부가 발표한 검경 수사권 조정 합의안이 실시되면 김 씨처럼 경찰에서 무혐의 처분을 받은 뒤 다시 검찰 조사를 받을 일이 거의 없게 된다. 경찰이 모든 사건에 대한 1차적 수사권과 수사 종결권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경찰의 무혐의 처분에 대한 사건 관계자의 이의 제기 등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검찰은 추가 수사를 할 수 없게 된다. 지금은 김 씨처럼 고소를 당한 사람이 경찰 수사를 받을 때 검찰이 개입할 수 있다. 하지만 합의안이 실현되면 검찰 개입은 차단된다. 검찰의 경찰에 대한 수사지휘권이 폐지되기 때문이다. 박상기 법무부 장관과 김부겸 행정안전부 장관은 이날 정부서울청사에서 정부 합의안에 서명했다. 서명식에는 이낙연 국무총리와 조국 대통령민정수석비서관도 참석했다. 합의안에 따르면 경찰은 수사 개시와 진행을 독자적으로 판단하고 혐의가 없다고 판단될 때 자체적으로 끝낼 수 있다. 지금처럼 ‘불기소 의견’으로 검찰에 송치할 필요가 없어진다. 또 검찰은 경찰이 사건을 송치하기 전까지는 원칙적으로 지휘할 수 없다. 현재 경찰은 모든 사건 수사의 시작부터 끝까지 검사의 지휘를 받는다. 합의안이 큰 변경 없이 실시되면 사건 관계자가 경찰과 검찰에서 중복 조사를 받을 일이 거의 사라질 것으로 보인다. 사건 관계자가 경찰 결정에 불복하면 검찰이 조사할 수 있다. 검사나 검찰 수사관이 저지른 범죄사건 수사도 지금보다 쉬워질 것으로 보인다. 경찰이 관련 수사를 위해 영장을 신청하면 검사는 지체 없이 법원에 영장을 청구해야 한다. 다만 이번 합의안이 그대로 확정될지는 미지수다. 국회의 형사소송법 개정 절차를 거쳐야 한다. 국회 사법개혁특별위원회 활동 시한(30일 만료) 연장이 불투명하고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 설치에 대한 이견 등으로 여야 합의가 쉽지 않은 상황이다. 권기범 기자 kaki@donga.com}

필리핀인 가사도우미를 불법 고용한 혐의로 이명희 전 일우재단 이사장(69·사진)에 대해 청구된 구속영장이 20일 기각됐다. 이 전 이사장에 대한 구속영장 기각은 두 번째다. 앞서 이 전 이사장은 4일 상습폭행 혐의로 영장실질심사를 받았지만 “증거 인멸과 도망의 염려가 없다”는 사유로 기각된 바 있다. 서울중앙지법 허경호 영장전담부장판사는 “범죄 혐의 내용과 현재까지 수사 진행 경과에 비춰 구속 사유의 필요성과 상당성을 인정하기 어렵다”고 밝혔다. 이 전 이사장은 필리핀인 10명을 대한항공 연수생으로 가장해 일반연수생 비자(D-4)로 입국시킨 뒤 가사도우미로 불법 고용한 혐의 등을 받고 있다. 그는 필리핀인 가사도우미를 불법 고용한 사실은 인정하면서도 연수생 신분으로 허위 초청하라고 지시한 혐의는 부인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 전 이사장은 이날 오전 법정으로 향하면서 “불법 고용을 지시했느냐”는 취재진의 질문에 “성실히 임하겠다”고 짧게 답했다. 두 번째 영장실질심사에 대한 심경을 묻는 질문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법무부 산하 서울출입국·외국인청 이민특수조사대는 다음 주에 사건을 검찰에 송치할 방침이다. 이 전 이사장의 욕설이 담긴 새로운 영상도 추가로 공개됐다. 이 전 이사장의 운전사가 자택에서 촬영한 것으로 보이는 영상에는 실내복 차림의 이 전 이사장이 손가락질을 하는 모습과 함께 “오늘 지압 몇 시에 갈 수 있는지 제대로 확인해 이 ○○○야”, “왜 개인 전화를 놓고 ××이야 일할 때” 등 욕설이 담겨 있다. 이어 운전사의 비명이 들려 폭행도 이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 밖에 “잡아 죽여 버리겠다”거나 “왜 넥타이를 매고 ××이야” 등의 폭언도 들어 있다.허동준 hungry@donga.com·권기범 기자}

국회 후반기 원 구성 지연으로 민갑룡 신임 경찰청장 내정자(사진)가 국회 인사청문회를 거치지 않고 임명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15일 경찰위원회의 임명제청 동의를 거쳐 민 경찰청 차장을 신임 경찰청장에 내정했다. 이철성 경찰청장 임기는 이달 30일까지로 정부는 그 전에 임명동의안을 국회에 제출할 예정이다. 경찰 안팎에서는 민 내정자의 청문회 통과를 낙관하는 분위기다. 민 내정자는 15일 “조국 대통령민정수석비서관과의 친분이 청장 내정에 영향을 미친 게 아니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그는 “청문회를 통해 말씀드리겠다”고만 답했다. 그러나 국회 상황은 좀 다르다. 지난달 29일 정세균 국회의장 임기가 만료되면서 후반기 의장단과 18개 상임위원장이 모두 공석이다. 여야 간 원 구성 협상이 지지부진한 데다 일각에선 9월 정기국회까지 원구성이 미뤄질 가능성도 제기된다. 인사청문회법에 따르면 정부가 공직 후보자에 대한 임명동의안을 제출한 날로부터 20일 이내에 국회는 인사청문 절차를 마쳐야 한다. 만약 20일을 넘기면 해당 후보자는 국회 임명동의 절차와 무관하게 임명이 가능하다. 더불어민주당에선 인사청문회 일정 등을 감안해 국회 원 구성을 서둘러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박경미 원내대변인은 “경찰청장은 청문 요구가 오고 20일이 지나야 그냥 임명될 수 있다. (현 경찰청장의 임기 만료 전 임명을 위해) 원 구성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선거 참패 후폭풍에 빠져 있는 자유한국당은 원 구성에 신경을 쓸 여력이 없는 상황이다. 한국당 윤재옥 원내수석부대표는 “당에 불이 났는데 불부터 꺼야 한다”고 말했다. 김상운 sukim@donga.com·권기범·최고야 기자}
경찰청 지능범죄수사대는 국회의원 등에게 불법 후원금을 제공한 혐의로 황창규 회장(65) 등 KT 전·현직 임원 4명에 대해 사전 구속영장을 신청하고 3명을 불구속 입건했다고 18일 밝혔다. 경찰에 따르면 황 회장 등은 2014년 5월부터 지난해 10월까지 이른바 ‘상품권깡’으로 마련한 현금 4억4190만 원을 19, 20대 국회의원과 후보자 99명의 후원계좌로 적게는 100만 원에서 많게는 1400만 원까지 보낸 혐의(정치자금법 위반 등)를 받고 있다. 경찰은 KT 전·현직 임원이 회사 자금으로 상품권을 구입한 뒤 상품권 업자에게 되파는 방식으로 약 11억5000만 원을 현금화한 것으로 보고 있다. 그중 접대비 등으로 쓴 약 7억 원을 제외한 나머지를 임원들 이름으로 정치인에게 ‘쪼개기’ 후원을 했다는 것이 경찰의 판단이다. 후원금을 제공한 의원은 주로 KT 업무와 관련 있는 국회 미래창조과학방송통신위원회(현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와 정무위원회 환경노동위원회 소속 의원으로 알려졌다. SK브로드밴드와 CJ헬로비전 합병 저지 등 KT 관련 현안을 둘러싸고 원활한 관계 유지가 목적이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KT 측은 “황 회장은 해당 내용을 보고받은 적이 없다. 사실 관계와 법리적 측면에 대해 성실히 소명하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경찰 관계자는 “후원금을 받은 의원실 관계자 등을 소환 조사하고 일부 의원실의 채용 청탁 혐의도 추가로 수사할 예정”이라고 말했다.권기범 기자 kaki@donga.com}
정부가 내주 초 검경 수사권 조정안을 발표할 것으로 알려지자 검찰에서는 ‘패싱’이라는 이야기가 또 나오고 있다. 검찰 내부에서는 수사권 조정안에 검사들의 추가 의견이 제대로 반영되지 않았다며 부글부글 끓고 있다는 것이다. 정부는 내주 초 검찰의 송치 전 수사 지휘권을 폐지하고 경찰에 수사 종결권을 부여하는 내용의 수사권 조정안을 발표할 예정이다. 서울의 한 부장검사는 “지난번 ‘검찰 패싱’ 논란 이후 내부 의견을 묻긴 했지만 형식적인 절차였던 것 같다”며 “국민 전체의 이익이 달린 사안을 성급히 결정한 느낌이다. 이제 국회의 판단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또 다른 부장검사는 “고소 사건의 경우 고소인이 항고하는 방법으로 부실 수사에 이의신청을 할 수 있다”며 “그러나 인지 사건은 법률가인 검사의 지휘를 받지 않으면 경찰이 실적을 위해 무분별하게 입건하고 무혐의 처분해 버리는 등 억울한 피해가 발생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또 정부가 검경 수사권 조정안 발표 시기를 검찰 정기인사 시기에 맞춰 검찰 내부 반발을 사전에 차단하려고 하는 것 아니냐는 말도 나오고 있다. 반면 경찰은 검경이 대등한 관계에서 상호 협력·견제하도록 한다는 수사권 조정의 취지를 살리려면 경찰이 1차 수사기관이고 검찰이 2차 수사기관이라는 대원칙이 유지돼야 한다는 입장이다. 이를 위해 경찰이 혐의가 없다고 판단하는 사건은 스스로 사건을 종결할 수 있어야 하고, 송치 전에는 검찰의 수사 지휘를 폐지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또 경찰 수사 단계에서 수사권 남용 우려가 있을 경우 검찰이 송치 명령을 할 수 있도록 하는 등의 보완 장치가 마련돼 있다고 경찰은 밝히고 있다. 경찰 관계자는 “검경 양 기관이 지난달 말 수사권 조정 잠정안에 대한 각자의 의견을 청와대에 제출했다”며 “국민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하는 방향으로 합리적인 조정안이 나올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앞서 조국 대통령민정수석비서관과 박상기 법무부 장관, 김부겸 행정안전부 장관 등이 2, 3월 검경 수사권 조정안을 논의하는 과정에서는 문무일 검찰총장이 배제된 사실이 알려지면서 ‘검찰 패싱’ 논란이 일었다. 이후 청와대는 검찰에 설문을 내려보내 검사의 수사 지휘를 폐지할 경우 보완수사권을 요구하는 문제 등에 대한 일선 검사들의 의견을 취합했다. 설문조사 결과는 경찰에 수사 종결권을 부여해서는 안 되며, 검찰의 수사 지휘를 유지해야 한다는 것으로 나왔다.허동준 hungry@donga.com·권기범 기자}
6·13지방선거를 이용한 ‘정치 도박’ 사이트가 등장했다. 선거 결과를 놓고 돈을 거는 건 불법이다. 경찰청 사이버안전국은 “당선이 예상되는 후보자에게 베팅하는 불법 도박사이트 두 곳을 파악해 관련 수사 경험이 많은 충북지방경찰청에 모니터링과 내사 착수를 지시했다”고 13일 밝혔다. 경찰에 따르면 이번에 확인된 불법 도박사이트에서는 약 일주일 전부터 베팅을 시작했다. 대상은 서울시장과 부산시장 등 주요 광역단체장 선거다. 선두권 후보 중 2명을 선정한 뒤 한 명에게 베팅하는 것이다. 해당 후보가 당선되면 정해진 배당률에 따라 배당금을 받는다. 배당률은 1.5배에서 많게는 2.3배에 달한다. 해당 사이트는 대부분 비공개 회원제로 운영된다. 이 과정에서 운영자가 돈을 지급하지 않거나 사이트를 폐쇄한 뒤 잠적하는 경우도 있다. 운영자가 배당률을 임의로 조작해 베팅한 돈을 가로챈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13일 사행산업통합감독위원회에 따르면 국내 불법 도박 규모는 약 83조 원(2015년 기준)에 달한다. 경찰 관계자는 “불법 도박사이트 운영자뿐 아니라 베팅에 참가한 사람도 처벌받을 수 있으므로 각별히 주의해야 한다”고 말했다.권기범 기자 kaki@donga.com}

12일 오후 1시 45분 서울 용산구 서울역 대합실. 북-미 정상회담을 생중계하는 TV에서 ‘정상회담 많은 진전. 합의문 곧 서명’이라는 자막이 나오자 화면을 지켜보던 시민 100여 명이 웅성댔다. 가방을 메고 지나던 중년 여행객은 TV 앞으로 다가와 풀썩 주저앉았다. 한 노인은 “결국 나오긴 나오는구나”라며 무릎을 탁 쳤다. 이후 40분이 지나도록 모습이 나오지 않던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나타나자 탄성이 낮게 흘렀다. TV를 배경으로 휴대전화 ‘셀카’를 찍는 사람도 있었다. 최모 씨(68·광주)는 “북-미와 남북의 만남이 계속되면 한반도에 진짜 평화가 오지 않겠느냐. 유라시아철도 타고 여행하는 게 꿈이었는데 죽기 전에 가능할 것만 같다”고 말했다. 이날 오전부터 서울역을 비롯한 유동인구가 많은 곳은 역사에 남을지 모르는 회담 장면을 보려는 사람들이 TV 앞으로 모였다. 카페나 도서관에서도 스마트폰 화면에 열중하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직장인 장모 씨(35)는 오전 10시부터 사무실 책상 구석에 스마트폰을 세워두고 생중계를 봤다. 장 씨는 “트럼프 대통령이 어떻게 악수할까 궁금해서 둘이 만나는 순간만은 생방송으로 보고 싶었다”며 “점잖게 악수하기에 ‘회담이 수월하겠구나’ 싶었다”고 말했다. 교실에서 TV로 지켜본 학교도 적지 않았다. 경기 지역 모 중학교 교사 김모 씨(37)는 공동성명을 학생들과 돌려봤다. 김 씨는 “단순히 회담만 지켜보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한반도 정세를 다 같이 생각하고 토론해 보자는 의미였다”고 말했다. 다만 오후 4시경 발표된 공동성명 내용에 대해 시민들의 반응은 엇갈렸다. ‘한반도의 지속적 안정적 평화체제 구축을 위해 노력한다’는 문구에 남북 긴장 완화가 가까워졌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다. 정모 씨(33)는 “친구들끼리 비무장지대(DMZ) 인근 땅을 사야 하는 것 아니냐고 농담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완전한 비핵화를 위해 노력할 것을 약속한다’는 조항에는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는 반응이 많았다. 자영업자 김모 씨(69)는 “북한 핵 폐기에 대한 구속력 있는 내용이 들어갈 줄 알았는데 아쉽다.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다는 속담이 생각났다”고 말했다. 서울역에서 TV 중계를 보던 서모 씨(58)는 “원론적 수준의 합의다. 오늘은 시작에 불과하고 앞으로가 중요할 것 같다”고 했다. 이날 오전 10시 4분 두 정상이 악수한 순간 실시간 시청률은 31.02%를 기록했다. 합의문에 서명하는 순간은 26.53%, 트럼프 대통령 기자회견은 25.78%였다. 이는 시청률 조사회사 ATAM이 수도권 700가구를 조사해 지상파 3사, 종편 4사, 보도채널 2사 시청률을 합친 것이다. 4월 27일 판문점 군사분계선에서 남북 정상이 만나 악수한 순간 실시간 시청률은 34.06%였다.권기범 kaki@donga.com·김정훈·이지운 기자}
이명희 전 일우재단 이사장(69)이 외국인 가사도우미를 불법 고용한 혐의(출입국관리법 위반)로 11일 출입국 당국에 소환돼 조사를 받았다. 이 전 이사장이 포토라인에 선 것은 이번이 네 번째다. 이 전 이사장의 큰딸인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44)은 지난달 24일 같은 혐의로 이곳에서 먼저 조사를 받았다. 법무부 산하 서울출입국·외국인청 이민특수조사대는 이날 이 전 이사장을 상대로 필리핀인들을 대한항공 연수생으로 가장입국시켜 가사도우미로 고용했는지 조사했다. 이날 오전 9시 55분경 서울 양천구 서울출입국·외국인청에 도착한 이 전 이사장은 ‘대한항공에 직함이 따로 없는데 가사도우미 고용을 비서실에 직접 지시했느냐’는 취재진의 질문에 “안 했다”고 부인했다. 또 ‘가사도우미들에게 출국을 지시하거나 입막음을 시도한 적 있느냐’는 질문에는 “없다”고 답했다. 출입국 당국은 앞서 공개된 4통의 대한항공 내부 e메일 등을 근거로 이 전 이사장이 필리핀인 가사도우미를 물색하고 고용한 모든 과정에 주도적으로 개입한 것으로 보고 있다. e메일에는 ‘사모님 지시’로 가사도우미를 의미하는 ‘연수생’의 입국과 비자 발급, 출국 등을 준비하라는 내용들이 나온다. 한편 상속세 탈루 의혹으로 검찰 수사를 받고 있는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69)은 이번에는 업무상 배임 혐의로 경찰 수사를 받게 됐다. 경찰은 서울 종로구 평창동 조 회장의 자택을 경비하는 업체에 지급해야 할 비용을 대한항공 계열사가 대납하도록 했다는 의혹에 대해 정식으로 수사에 들어갔다. 서울지방경찰청 지능범죄수사대는 지난주 조 회장과 대한항공 계열사 정석기업의 대표인 원모 씨를 형사입건했다고 이날 밝혔다. 지난달 18일부터 내사를 벌여온 경찰은 해당 경비업체 소속 전·현직 직원과 업체 임원 등 14명을 조사하고 관련 서류를 확보한 것으로 전해졌다. 경찰은 먼저 원 씨를 불러 조사한 뒤 조 회장을 소환 조사할 방침이다.허동준 hungry@donga.com·권기범 기자}
여성가족부 현직 과장(서기관)이 7일 서울 주한 미국대사관 정문으로 돌진하다 현행범으로 체포됐다. 서울 종로경찰서에 따르면 7일 오후 7시 22분 여성가족부 윤모 과장(47)이 자신의 그랜저 차량을 몰고 서울 종로구 세종대로를 북쪽 방향으로 주행하다 갑자기 방향을 우측으로 틀어 주한 미국대사관 정문으로 돌진했다. 이 사고로 철제로 된 대사관 정문이 뒤로 밀렸고, 경비 병력의 피해는 없었으나 차량에 타고 있던 일행 1명이 가볍게 다쳐 병원으로 옮겨졌다. 경찰은 윤 씨를 현장에서 특수재물손괴 혐의로 체포해 정확한 동기를 조사 중이다. 이날 윤 씨는 반차를 낸 상태였다. 경찰 확인 결과 윤 씨는 사건 당시 음주운전을 하지는 않았다. 윤 씨는 과거 불안증세 등으로 정신과 치료를 받은 전력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 때문에 윤 씨가 정신질환 재발로 범행을 저질렀을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윤 씨는 사고를 며칠 앞두고 페이스북에 내용을 이해하기 힘든 글을 여러 개 올렸다. 6일 오후에는 “길을 잃었다. 제가 요즘 통 잠을 못 잤다”고 썼다. 7일 오전 2시 55분에는 횡설수설하는 내용의 글을 올리며 “일요일에 미국 사람 만나겠다고 약속했다”고 적었다. 사고 네 시간을 앞두고는 “저 전향했습니다. 저 이제 자본주의자입니다”라는 글을 남겼다. 경찰은 윤 씨가 현장에서 “북한과 얽힌 사연이 있어 미국으로 망명을 떠나고 싶어 대사관을 들이받았다”고 말했다는 전언에 대해서도 사실 여부를 조사할 방침이다. 권기범기자 kaki@donga.com}
지난달 28일 서울 성북구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112 신고가 접수됐다. 이날 오전 9시 50분경 누군가가 영상원 건물 3층 여자화장실에서 ‘몰래카메라(몰카)’를 찍으려 했다는 것이다. 피해자에 따르면 화장실 문 아래 틈으로 카메라 렌즈가 들어왔고 소리를 지르자 사라졌다. 학교 폐쇄회로(CC)TV에는 모자와 마스크를 쓴 남성의 모습이 찍혀 있었다. 사건을 맡은 서울 종암경찰서는 가장 먼저 학교 밖 이동 경로에 설치된 CCTV를 확인했다. 용의자는 학교에서 빠져나와 근처 지하철 6호선 돌곶이역까지 걸어갔다. 이상한 행동은 그때부터 시작됐다. 그는 지하철을 타는 대신 근처 골목길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사거리 옆 골목길로 향했다가 한참 뒤 나타나 고가도로 아래로 들어갔다. 반대로 나와 다른 골목으로 들어가더니 20분가량 자취를 감췄다가 되돌아 나왔다. 그러고는 또 다른 골목으로 들어갔다. 거기가 마지막이었다. 해당 골목에서 이어진 길은 5개. 하지만 모든 CCTV에서 용의자의 모습은 나오지 않았다. 경찰은 이곳에 용의자의 집이 있다고 판단해 한동안 잠복까지 했지만 발견하지 못했다. 마치 하늘로 사라진 것 같았다. 경찰은 CCTV를 하나하나 다시 살펴봤다. 그때 남성의 자취가 사라진 골목에서 나온 승용차 한 대에 주목했다. 차량이 들어온 시간을 살펴보니 몰카 사건 직전이었다. 경찰은 차량 번호판을 통해 남성의 주거지를 파악했다. 인천 송도였다. 그러나 다른 사람이 살고 있었다. 경찰은 다시 이동 경로에 있는 CCTV를 일일이 확인했다. 차량은 학교에서 약 7km 떨어진 서울 노원구의 한 아파트로 들어갔다. 마침내 차량에서 ‘그놈’이 내리는 모습을 확인했다. 집으로 들어설 때까지 용의자는 모자와 마스크를 쓰고 있었다. 경찰은 잠복 끝에 4일 오후 3시경 A 씨(31)를 붙잡았다. A 씨의 스마트폰에선 피해자 사진이 나오지 않았다. 경찰은 “도피 방법을 볼 때 치밀하게 계획한 것 같다. 여죄를 파악하기 위해 휴대전화에 대한 디지털 포렌식을 진행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최근 성범죄 사건 편파 수사 논란이 불거진 가운데 종암서는 A 씨 검거에 여성청소년수사팀 3개 팀 중 2개 팀, 10여 명을 투입했다. 이동 경로를 추적하기 위해 CCTV 100여 대를 확인했다. 한편 9일 서울 종로구 혜화역 일대에서 ‘불법촬영 편파수사 규탄 2차 시위’가 열린다. 전국에서 참가자가 올 것으로 예상돼 지난달 19일 1만 명이 모인 첫 번째 시위보다 규모가 커질 것으로 보인다.권기범 kaki@donga.com·최지선 기자}

13시간. 대기업에서 시설관리 업무를 하는 전모 씨(34)가 평균 출퇴근 카드를 찍는 간격, 즉 근무시간이다. 오전 7시에 출근해 오후 8시에 일을 마무리하는 날이 많다. 그런데 전 씨의 출퇴근 기록에는 대부분 ‘9시간 근무’라고 적혀 있다. 전 씨는 24시간 돌아가는 공장을 2교대로 지킨다. 이른 아침부터 협력업체 직원들과 점검 작업을 벌이다 보면 법으로 보장받은 점심시간 1시간은 50분으로 줄어들기 다반사다. 점심 및 저녁시간 1시간을 빼더라도 하루 11시간 일하는 셈이다. 그러나 전 씨는 하루 2시간은 ‘커피 타임’ ‘사내 복지시설 이용’같이 적당히 입력한다. 이런 시간은 근로시간에 반영되지 않지만 실제로는 쉰 적이 거의 없다. 그 시간에는 사무실에서 잔업을 했다. 전 씨는 “일이 많다 보니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직원 대부분이 이렇게 편법을 쓰고 있다. 주 근로시간이 52시간을 초과하면 인사팀에서 바로 담당 부장님에게 e메일을 보내니 스스로 알아서 ‘챙기자’는 뜻 아니겠느냐”며 허탈하게 웃었다.○ 금연자가 ‘흡연 시간’ 입력하기도 근로자 300명 이상 사업장 및 공공기관의 주 52시간 근무제 시행이 한 달도 남지 않았다. 다음 달 1일부터 개정 근로기준법에 따른 주 52시간제를 어기다 적발되면 사업주는 2년 이하의 징역 또는 2000만 원 이하의 벌금형에 처해진다. 삼성전자, LG, SK 같은 주요 대기업과 일부 중견기업은 지난해 말에서 올 초 새로운 근태(勤怠)입력 시스템을 개발해 도입했다. 주 52시간제의 본격적인 시행을 앞두고 준비를 철저히 하자는 취지다. 근로시간과 비(非)근로시간을 따로 입력하면 일주일의 총 근로시간을 자동 계산해 52시간을 넘을 수 없도록 했다. 그러나 비근로시간 입력제가 실제로는 ‘왜곡’ 적용되는 경우가 생겨 직장인들이 골머리를 앓고 있다. 근무를 했지만 눈치껏 휴식시간으로 입력해야 하는 일이 적지 않다. 수도권에 있는 모 대기업 작업장에서 일하는 김모 씨(36). 담배를 손에 쥐어본 적도 없는 김 씨지만 몇 달 전 졸지에 흡연자가 됐다. 그는 하루 평균 8시간 30분을 일한다. 그러나 상사는 “웬만하면 8시간 근무로 맞추라”고 눈총을 줬다. 그날부터 김 씨는 하루 30분씩을 ‘흡연’으로 입력해 휴식시간으로 바꿔 놓고 있다. 박모 씨(38)는 주 52시간 근무제가 도입되면 오후 6시 퇴근이 가능해지고, 그러면 ‘저녁이 있는 삶’을 살 수 있을 것으로 봤다. 그러나 이 꿈은 이내 접어야 했다. 오후 3시만 되면 상사나 선임들이 ‘커피 한잔 하자’며 박 씨를 불러냈다. 주식서부터 온갖 잡담을 하고 돌아오면 한 시간이 훌쩍 지나간다. 박 씨는 “‘쉬엄쉬엄 하자’며 자리에서 일으키는 상사의 말에 매몰차게 ‘싫다’고 할 직원이 얼마나 되겠느냐. 매일 울며 겨자 먹기로 한 시간씩 휴식시간을 입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어디까지 근무고, 어디까지 휴식인가 비근로시간 입력제를 도입하겠다고 공포한 업체에서는 근무시간과 휴식시간의 기준이 애매해 혼란을 부르고 있다. 유통업체에 다니는 정모 씨(39)는 사무직이지만 외부 사람과 협업할 일이 잦다. 정 씨는 평일에는 점심시간에 주로 이들을 만난다. 약속 장소가 멀면 오전 11시에 사무실을 떠나 오후 2시에 돌아오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주말에는 업무상 골프 약속도 종종 있다. 최근 회사는 휴식시간을 입력하도록 하겠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정작 근무와 휴식의 경계가 어디인지는 명확하게 밝히지 않았다. 정 씨는 “회사는 10분 단위로 근무와 휴식 여부를 조사해 근로시간에 반영하겠다는 원칙적인 입장만 내놓고 있다”며 한숨을 쉬었다. 직장인 익명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블라인드가 지난달 발표한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직장인 1만2208명 중 73.1%는 주 52시간 근무제에 찬성한다고 답했다. 반대는 17.6%에 불과했다. 그러나 ‘당신의 회사는 주 52시간 근무제 도입이 가능한가’라는 질문에는 응답자 1만699명 가운데 37.9%만 “가능하다”고 답했다. “불가능하다”거나 “시간이 필요하다”는 응답이 58.3%였다. 전문가들은 주 52시간 근무제가 빠르게 자리 잡지 못하면 직원들은 사실상 급여가 삭감된 것으로 여겨 박탈감만 높아질 수 있다고 지적한다. 박지순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회사가 법을 지키는 모양새만 취하고 ‘알아서 하라’는 식으로 대처하면 말단 사원은 ‘내 소득만 줄게 생겼다’는 불만을 가질 수밖에 없다. 경영진이 나서서 법 준수 의지를 중간관리자를 통해 전달해야 한다”고 말했다.권기범 기자 kaki@donga.com}

경찰이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의 부인인 이명희 일우재단 이사장(69·사진)에 대해 31일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특수폭행과 상습폭행, 상해, 특수상해, 모욕, 업무방해, 특정범죄가중처벌법상 운전자 폭행 등 모두 7개 혐의가 적용됐다. 검찰은 이날 오후 늦게 법원에 영장을 청구했다. 서울지방경찰청 광역수사대는 이날 “이 이사장은 우월한 지위를 이용해 특별한 죄의식 없이 사회적 약자인 피해자들에게 상습적으로 폭행과 모욕·상해를 가했다. 사안이 중대함에도 범행에 대한 기억이 나지 않는다면서 혐의를 부인하는 등 증거인멸 우려가 있다고 판단했다”며 신청 이유를 밝혔다. 경찰에 따르면 이 이사장은 2011년 8월부터 올해 3월까지 자택 경비원과 그룹 계열사 직원 등을 24차례에 걸쳐 폭행하거나 다치게 한 혐의를 받고 있다. 2016년 “출입문 관리를 제대로 하지 않는다”며 경비원에게 정원용 가위를 던지는 등 수시로 폭력을 휘두른 의혹도 받고 있다. 또 2014년 인천 하얏트호텔 공사 현장에서 조경 설계업자를 폭행하고 자재를 발로 차는 등 공사 진행을 방해한 혐의도 있다. 자신의 차량 운전사에게 지속적으로 갑질을 한 혐의도 포함됐다. “차량에 물건을 싣지 않았다”며 운전사의 다리를 걷어차 전치 2주의 부상을 입히거나 운행 중인 운전사를 때리기도 했다. 경찰은 지금까지 피해자 11명을 확인했다. 참고인 170여 명을 조사하고 5월 28, 30일 이 이사장을 잇달아 불러 강도 높은 조사를 벌였다. 이 이사장은 경찰에서 대부분의 혐의에 대해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진술한 것으로 알려졌다. ‘물벼락 갑질’ 의혹이 제기된 둘째 딸 조현민 전 대한항공 전무(35)의 경우 경찰이 구속영장을 신청했지만 피해자가 처벌을 원치 않는 등의 이유로 검찰은 불구속 수사를 지휘했다. 그러나 이 이사장은 피해자 대부분이 처벌을 원하고 증거인멸 가능성이 크다는 이유로 검찰도 구속영장을 청구했기 때문에 법원의 발부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분위기다. 이날 서울남부지검 형사6부(부장검사 김종오)는 서울 강서구 대한항공 본사 재무본부 등 사무실을 압수수색했다. 조 회장 등은 한진그룹 창업주인 고 조중훈 전 회장의 해외 비자금 상속을 신고하지 않아 500억 원에 달하는 세금을 내지 않은 혐의를 받고 있다. 검찰은 또 조 회장 일가가 그룹 계열사의 건물 관리 업무를 다른 계열사에 몰아주고, 면세품 납품 과정에서 ‘통행세’ 명목으로 비용을 받아 대한항공에 손해를 끼치는 등 200억 원대의 횡령 및 배임 혐의도 수사하고 있다.권기범 kaki@donga.com·김자현 기자}
국민연금이 대한항공을 상대로 주주권을 적극적으로 행사하겠다고 선언했다. 경영진 일가족의 일탈 행위에 대한 경고이자 7월 도입 예정인 ‘스튜어드십 코드’의 시범시행 성격으로 풀이된다. 박능후 보건복지부 장관은 30일 서울 중구 더플라자호텔에서 열린 국민연금기금운용위원회 회의에서 대한항공 사태와 관련해 “한진그룹 오너 일가의 밀수, 관세 포탈, 재산 국외 도피, 탈세 등에 대한 보도로 국민의 우려가 가라앉지 않고 있다”며 “국민의 소중한 자산을 지키고 국민연금의 장기 수익성 제고를 위해 국민연금이 현재 사용할 수 있는 주주권 행사를 제안한다”고 말했다. 복지부 장관은 기금운용위 위원장을 맡고 있다. 기금운용위는 박 장관의 제안에 따라 대한항공을 상대로 △우려 표명 △대책을 강구하는 ‘공개서한’ 발송 △경영진 면담 등 세 가지 방식으로 주주권을 행사하겠다고 밝혔다. 국민연금이 이런 방식으로 주주권을 행사하는 것은 처음이다. 지금까지는 주주 권한으로 의결권 찬반, 기업 배당 확대 등의 제한적 조치를 시행해 왔다. 복지부 최경일 연금재정과장은 “국민연금이 특정 기업에 공개서한을 발송하는 것도 처음”이라고 말했다. 국민연금은 대한항공의 2대 주주로 전체 지분의 12.45%를 보유하고 있다. 국민연금은 대한항공 오너 일가의 갑질 논란으로 약 688억 원의 손실을 입은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번 조치는 국민연금 수익성 하락에 적극 대처하는 한편 대한항공 경영진에 해결 방안을 내놓으라고 압박하는 성격이 짙다. 나아가 7월 도입 예정인 ‘스튜어드십 코드’의 시범시행이란 평가가 나온다. ‘스튜어드십 코드’란 기관투자가가 주인의 재산을 관리하는 집사, 즉 스튜어드처럼 기업의 의사 결정에 적극 참여하고 그 결과를 보고하도록 하는 의결권 행사 지침이다. 스튜어드십 코드 도입은 문재인 대통령의 대선 공약 중 하나다. 스튜어드십 코드가 도입되면 국민연금이 지분을 보유한 기업의 지배구조 감시에 본격적으로 나설 것으로 전망된다. 하지만 재계에선 국민연금이 스튜어드십 코드 도입을 통해 주주의결권을 강화하면 정부가 기업들의 경영에 과도하게 개입하는 결과를 낳을 것이라고 우려한다. 기금운영본부가 아닌 장관이 개별 기업 문제를 직접 언급한 것이 적절하냐는 비판도 나온다. 한편 경찰은 한진그룹 계열사 직원과 운전기사 등에게 수차례 폭언과 폭행을 한 혐의를 받고 있는 이명희 일우재단 이사장(69)을 30일 다시 불러 조사했다. 이 이사장은 28일 처음 경찰에 나와 약 15시간에 걸쳐 조사를 받고 귀가했다. 경찰은 첫 조사 때 이 이사장으로부터 받은 진술을 토대로 29일 보강수사를 진행한 것으로 전해졌다.김윤종 zozo@donga.com·권기범 기자}

“누가 와서 선생님 예금을 인출하려고 했어요!” 지난해 12월 갑자기 걸려온 전화에 70대 남성 A 씨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걸 느꼈다. 전화 건 사람은 자신을 ‘○○은행 지점장’으로 소개했다. 그는 “대리인이라는 사람이 와서 돈을 빼내려다 들키자 도주했다. 곧바로 경찰에 신고했다”며 생생하게 상황을 설명했다. 잠시 후 경찰 수사관의 전화가 걸려왔다. 수사관은 “용의자가 또 범행을 시도할 수 있다”며 경고했다. 그러면서 ‘예금 보호’를 위해 계좌번호를 불러달라고 했다. 이 과정에서 A 씨의 통장에 있던 2700만 원이 몽땅 빠져나갔다. 더 이상 중국 옌벤(延邊) 사투리를 쓰는 보이스피싱 사기범은 없다. 요즘은 기관 뿐 아니라 10년 전 정보까지 언급하며 ‘디테일’을 살리고 있다. 경찰과 금융감독원은 ‘보이스피싱 지킴이’ 웹사이트(phishing-keeper.fss.or.kr)를 통해 확보한 정부기관 사칭, 대출 빙자형 범행 수법 분석 결과를 23일 공개했다. 이들은 협박과 회유를 번갈아가며 구사한다. “최근 압수한 물품에서 경기 △△시에서 발급된 당신 명의의 ○○은행 XX은행 통장이 나왔다”며 구체적인 상황을 제시한다. “한국자산관리공사 정부정책자금 대출인데 서민금융통합지원센터로 접수하면 된다”처럼 어려운 단어를 섞어 쓰며 상대방을 혼란하게 만든다. 의심을 걷어내기 위한 방법도 교묘해졌다. “주민등록번호나 계좌번호 및 비밀번호를 요구하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범행 대상을 안심시킨 뒤 행동대원을 만나 돈을 건네도록 하거나 직접 송금을 유도하는 것이 대표적이다. 대출 빙자형 범죄의 경우 “원래대로라면 승인이 어려운데 내가 조건부 승인으로 바꿨다”는 식으로 신뢰감 형성을 시도하기도 한다. 이후 “기존 대출금을 갚아야 하니 수백만 원을 미리 입금해달라”며 특정 계좌번호로 입금을 유도해 돈을 빼앗는다. 경찰 관계자는 “보이스피싱이 의심되면 일단 전화를 끊고, 해당 기관에 사실 관계를 확인해야 한다. 만약 피해를 입었다면 즉시 112에 신고하고 입금 은행에 지급 정지를 신청해야 한다”고 말했다. ●갈수록 진화하는 ‘보이스피싱’ 특징 (자료: 경찰청, 금융감독원)▽‘디테일’ 살린다“10년 전 ○○은행에서 근무한 김XX 씨 아세요?”“서민금융통합지원센터인데 정부정책자금 필요하시죠?”▽‘특별대우’ 강조한다“대출 어려운데 내가 노력해 조건부 승인 받았다”“정상진행 힘들지만 편법으로 도와 드릴게요”▽‘안전’ 앞세운다“임시 아이핀으로 안전하게 본인 확인한다”“개인정보는 절대 요구하지 않는다”권기범 기자 kaki@donga.com}
경찰이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에 대한 경비 인력을 내년까지 철수시킨다. 다른 전직 대통령 및 대통령 부인 등에 대한 경호는 관련법에 따라 계속하기로 했다. 이철성 경찰청장은 21일 서울 서대문구 경찰청에서 기자들과 만나 “국민 여론 등에 따라 두 전 대통령 경비 인력을 올해 20% 줄이고 내년까지 전부 철수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현재 경찰은 두 전 대통령의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사저에 각각 경호 인력 5명과 경비 인력 80명을 배치하고 있다. 경호 인력은 전직 대통령과 배우자 등을 경호하고 경비 인력은 사저 앞 집회나 시위 관리 등을 맡는다. 경호 인력은 지난해까지 10명씩이었지만 올 초 5명으로 줄었다. 계획대로라면 내후년에는 경비 인력은 없고 경호 인력만 남는다. 경찰이 두 전 대통령에게 제공하는 경호와 경비는 ‘대통령 등의 경호에 관한 법률(대통령경호법)’과 ‘전직 대통령 예우에 관한 법률(전직대통령예우법)’에 근거한다. 대통령경호법에 따르면 본인이 반대하지 않으면 전직 대통령과 배우자는 퇴임 후 10년간 대통령경호처가 경호한다. 이후 한 번 5년을 추가할 수 있다. 다만 전직대통령예우법은 전직 대통령이 탄핵당해 퇴임했거나 금고 이상의 형이 확정되면 모든 예우를 받을 수 없도록 했다. 내란 등의 혐의로 1997년 각각 무기징역형과 징역 17년형이 확정된 전, 노 전 대통령은 이에 해당된다. 하지만 경찰은 개정 전 대통령경호법에 따라 대통령 퇴임 7년 후부터인 1995년과 1998년부터 두 전 대통령에 대한 경호와 경비를 맡고 있다. 전직대통령예우법 6조 ④의 ‘1. 필요한 기간의 경호 및 경비 예우를 할 수 있다’에 근거해서다. 최근 반발 여론이 생겼다. 군인권센터와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민가협)는 17일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내란범인 두 대통령에 대한 경찰 경호와 경비를 중단하라”는 글을 올렸다. 이 청원에는 이날 현재 약 1만3000명이 동의했다. 전직대통령예우법의 해당 조항을 삭제하는 개정안은 더불어민주당 송영길 의원 등이 2016년 12월 발의해 현재 국회 계류 중이다. 경찰이 경비 인력 철수 시점을 내년으로 한 것은 이 법의 개정 추이를 보겠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이 청장은 이날 “법률을 개정해 (경호와 경비 중단 여부를 결정)하는 게 맞는다고 본다”고 말했다. 행정안전부 측은 “전직대통령예우법 개정을 논의하지 않았다”고 했다.권기범 기자 kaki@donga.com}
한겨레신문 기자가 마약 투약 혐의로 입건돼 경찰 조사를 받고 있다. 16일 서울지방경찰청 광역수사대에 따르면 경찰은 3월 중순 서울 성동구에서 필로폰을 투약한 혐의(마약류 관리에 관한 법률 위반)로 한겨레신문 기자 허모 씨(38)를 불구속 입건해 조사하고 있다. 경찰은 제보를 받고 출동한 현장에서 허 씨의 혐의를 포착하고 이달 초 임의동행 형식으로 조사했다. 당시 간이검사에서 음성이 나왔지만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의 정밀감정 결과 양성 반응이 나왔다. 경찰은 국과수 감정 결과를 바탕으로 허 씨를 소환해 공범 여부와 투약 횟수 등을 확인할 예정이다. 한겨레신문은 이날 “구성원이 불미스러운 일에 연루된 사실에 부끄러움을 넘어 참담한 마음을 금할 수 없다”는 내용의 사과문을 발표하고 허 씨를 해고할 방침이라고 밝혔다.권기범 기자 kaki@donga.com}

“그게 참 종이 한 장 차이 같아요.” 초등학교 3학년 딸을 둔 조모 씨(43)는 요즘 고민이 늘었다. 몇 년 전만 해도 ‘아빠 껌딱지’였던 딸이 올해 들어 부쩍 숨기는 게 늘었다. 예전에는 학교 친구들과 나눈 이야기를 시시콜콜 털어놨지만 더 이상 그러지 않는다. 자기 스마트폰을 아빠가 만지면 민감한 반응을 보인다. 조 씨는 “부모로서 관여할 수 있는 선이 어디까지인지 항상 고민이다”라고 말했다. ‘스라밸(Study and Life Balance·공부와 삶의 균형)’을 지키려면 우리 아이들에게 일정부분의 ‘사생활’ 보장이 필요하다. 자신이 주도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을 말한다. 그러나 부모들은 아이가 혹시나 ‘나쁜 일’을 하고 있지 않은지 항상 신경이 쓰인다. 아이들이 원하는 사생활의 기준은 무엇일까. 부모의 생각은 어떻게 다를까. 본보 취재팀은 13, 14일 초록우산어린이재단의 도움을 받아 초등학교 5, 6학년 자녀를 둔 부모 3명, 그리고 초등학생 4명과 각각 ‘부모님방’ ‘아이들방’이라는 단체대화방(단톡방)을 만들어 속내를 들어봤다.○ “창피해요” 사생활 경계에 단호한 아이들 “쪽팔리잖아요!” “저작권(?)이 있잖아요!” 오영아(가명·12) 양과 안보연(가명·11) 양이 거의 동시에 메시지를 보냈다. “방에 있는 서랍이나 일기장, 노트를 부모님이 살펴보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4명 중 3명이 10초도 되지 않아 “안 돼요”라고 답했다. “부모님이 허락 없이 방에 들어오는 건 괜찮다”고 답변하던 아이들은 자신의 개인적인 이야기를 적은 내용을 엿보는 것을 더 싫어했다. 아이들에게 사적인 영역을 구분 짓는 중요한 기준은 ‘창피함’이다. 한상민(가명·11) 군은 “엄마가 밖에서 있었던 내 개인적인 일을 어딘가에서 듣고 와서 나한테 물어볼 때 짜증이 난다”고 말했다. 다른 아이들도 “맞아요” “저도 그건 좀…”이라며 공감을 표현했다. 아이들은 개인적으로 창피했던 사건으로 ‘학교에서 삐쳐서 뛰쳐나갔던 이야기’ ‘집에서 울었던 이야기’ 등을 꼽았다. 부모는 대부분 별것 아니라고 생각해 꺼낸 이야기이지만 민감한 시기의 아이들에게는 상처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친구 관계도 자신만의 고유한 영역으로 보장받고 싶다는 게 아이들의 생각이었다. “부모님의 의견도 참고는 하겠지만 판단은 스스로 하고 싶다”는 것. 기자는 ‘메신저로 욕설을 일삼는 나쁜 친구가 있다면 어떻게 할 것이냐’는 질문을 던졌다. 부모들은 “문제가 있는 친구라면 나서서 말려야 한다” “아이에게 전후 사정을 물어본 뒤 문제가 있다면 끼어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아이들은 “부모님의 의견은 존중하지만 결정은 우리가 한다”고 입을 모았다. 그렇다고 아이들이 모든 사생활 보장을 원하는 건 아니었다. 사생활 침해 논란을 빚는 ‘위치추적 애플리케이션(앱)’에 대해 아이들은 “아무 상관이 없다”고 일제히 답했다. “우리 안전을 위해 설치하는 것이라면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권주희(가명·11) 양은 “어차피 추적해봐야 맨날 학원에 있을 거라 상관이 없다”고 말했다.○ 사생활 기준 애매모호한 부모들 “저는 일기장은 가끔 본 적이 있네요.” “초반에는 카카오톡 검열을 좀 했었죠.” 부모들은 담담했다. 아이들은 “절대 안 된다”고 했던 분야도 “필요하다면 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초등학교 6학년 자녀를 둔 학부모 ‘달새’(온라인 닉네임·42·여)는 “아이들의 솔직한 일상을 살펴보려고 일기장을 열어보곤 했다. 문제가 없다는 걸 확인하니 그래도 안심은 되더라”고 털어놨다. 아이들은 달랐다. 오 양은 “초등학교 6학년 정도면 대부분 제대로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부모의 서툴고 과도한 개입이 자칫 아이에게 상처가 될 수 있는 만큼 신중해야 한다는 의견이다. 서울 강남에 사는 김선원(가명·12) 군은 요즘 스마트폰만 들면 ‘기숙사 있는 중학교’를 검색하곤 한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부터 부모님이 공부를 열심히 하는지 확인한다며 수시로 방을 뒤졌기 때문이다. 쓰레기통까지 확인할 정도로 간섭이 심해지자 김 군은 부모가 무서워졌다. 그리고 부모에게서 멀어져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조윤영 초록우산어린이재단 복지사업본부장은 “부모가 사사건건 개입하기보다 일정 부분 아이의 영역을 보장해줘야 아이들이 그 안에서 스스로 규칙을 만들고 자신의 삶을 주도적으로 관리할 수 있다”고 말했다.김자현 zion37@donga.com·권기범 기자}

“그게 참 종이 한 장 차이 같아요.” 초등학교 3학년 딸을 둔 조모 씨(43)는 요즘 고민이 늘었다. 몇 년 전만해도 ‘아빠 껌딱지’였던 딸이 올해 들어 부쩍 숨기는 게 늘었다. 예전에는 학교 친구들과 나눈 이야기를 시시콜콜 털어놨지만 더 이상 그러지 않는다. 자기 스마트폰을 아빠가 만지면 민감한 반응을 보인다. 조 씨는 “부모로서 관여할 수 있는 선이 어디까지인지 항상 고민이다”라고 말했다. ‘스라밸(Study and Life Balance·공부와 삶의 균형)’을 지키려면 우리 아이들에게 일정부분 ‘사생활’ 보장이 필요하다. 자신이 주도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을 말한다. 그러나 부모들은 아이가 혹시나 ‘나쁜 일’을 하고 있지 않은지 항상 신경이 쓰인다. 아이들이 원하는 사생활의 기준은 무엇일까. 부모의 생각은 어떻게 다를까. 본보 취재팀은 13, 14일 초록우산어린이재단의 도움을 받아 초등학교 5, 6학년 자녀를 둔 부모 3명 그리고 초등학생 4명과 각각 ‘부모님방’ ‘아이들방’이라는 단체대화방(단톡방)을 만들어 속내를 들어봤다.● “창피해요” 사생활 경계에 단호한 아이들 “쪽팔리잖아요!”, “저작권(?)이 있잖아요!” 오영아(가명·12) 양과 안보연(가명·11) 양이 거의 동시에 메시지를 보냈다. “방에 있는 서랍이나 일기장, 노트를 부모님이 살펴보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4명 중 3명이 10초도 되지 않아 “안 돼요”라고 답했다. “부모님이 허락 없이 방에 들어오는 건 괜찮다”고 답변하던 아이들은 자신의 개인적인 이야기를 적은 내용을 엿보는 것을 더 싫어했다. 아이들에게 사적인 영역을 구분 짓는 중요한 기준은 ‘창피함’이다. 한상민(가명·11) 양은 “엄마가 밖에서 있었던 내 개인적인 일을 어딘가에서 듣고 와서 나한테 물어볼 때 짜증이 난다”고 말했다. 다른 아이들도 “맞아요” “저도 그건 좀…”이라며 공감을 표현했다. 아이들은 개인적으로 창피했던 사건으로 ‘학교에서 삐쳐서 뛰쳐나갔던 이야기’ ‘집에서 울었던 이야기’ 등을 꼽았다. 부모는 대부분 별 것 아니라고 생각해 꺼낸 이야기이지만 민감한 시기의 아이들에게는 상처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친구 관계도 자신만의 고유한 영역으로 보장받고 싶다는 게 아이들의 생각이었다. “부모님의 이견도 참고는 하겠지만 판단은 스스로 하고 싶다”는 것. 기자는 ‘메신저로 욕설을 일삼는 나쁜 친구가 있다면 어떻게 할 것이냐’는 질문을 던졌다. 부모들은 “문제가 있는 친구라면 나서서 말려야 한다” “아이에게 전후 사정을 물어본 뒤 문제가 있다면 끼어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아이들은 “부모님의 의견은 존중하지만 결정은 우리가 한다”고 입을 모았다. 그렇다고 아이들이 모든 사생활 보장을 원하는 건 아니었다. 사생활 침해 논란을 빚는 ‘위치추적 앱’에 대해 아이들은 “아무 상관이 없다”고 일제히 답했다. “우리 안전을 위해 설치하는 것이라면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권주희(가명·11) 양은 “어차피 추적해봐야 맨날 학원에 있을 거라 상관이 없다”고 말했다.● 사생활 기준 애매모호한 부모들 “저는 일기장은 가끔 본 적이 있네요”, “초반에는 카카오톡 검열을 좀 했었죠.” 부모들은 담담했다. 아이들은 “절대 안된다”고 했던 분야도 “필요하다면 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초등학교 6학년 자녀를 둔 학부모 ‘달새’(온라인 닉네임·42·여)는 “아이들의 솔직한 일상을 살펴보려고 일기장을 열어보곤 했다. 문제가 없다는 걸 확인하니 그래도 안심은 되더라”고 털어놨다. 아이들은 달랐다. 오 양은 “초등학교 6학년 정도면 대부분 제대로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부모의 서툴고 과도한 개입이 자칫 아이에게 상처가 될 수 있는 만큼 신중해야 한다는 의견이다. 서울 강남에 사는 김선원(가명·12) 군은 요즘 스마트폰만 들면 ‘기숙사 있는 중학교’를 검색하곤 한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부터 부모님이 공부를 열심히 하는지 확인한다며 수시로 방을 뒤졌기 때문이다. 쓰레기통까지 확인할 정도로 간섭이 심해지자 김 군은 부모가 무서워졌다. 그리고 부모에게서 멀어져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조윤영 초록우산어린이재단 복지사업본부장은 “부모가 사사건건 개입하기보다 일정 부분 아이의 영역을 보장해줘야 아이들이 그 안에서 스스로 규칙을 만들고 자신의 삶을 주도적으로 관리할 수 있다”고 말했다. ▼ ‘스라밸’ 없는 아이가 성인이 됐을 때 문제점과 대안 ▼“정말 말 잘 듣는 아이였는데….” 20세 아들을 둔 A 씨(48)는 최근 서울의 상담센터를 찾아 울먹였다. A 씨는 이른바 ‘헬리콥터맘’이다. 그는 아들이 대학에 입학할 때까지 학원 ‘뺑뺑이’를 돌리며 스케줄을 관리했다. 혹여나 나쁜 길로 빠질까 주기적으로 휴대전화도 검사했다. 아들은 군말 없이 잘 따랐다. 소위 ‘SKY대학’에 진학했다. 주변 사람들은 만날 때마다 A 씨를 부러워하며 “아들 잘 키웠다”고 말했다. 하지만 올해 초부터 아들이 A 씨를 피하기 시작했다. 눈을 마주치지도 않았다. 새벽 늦게 들어와 아침 일찍 다시 나갔다. 외박도 잦아졌다. “왜 그러느냐”고 묻자 “짜증 난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A 씨는 아들 친구에게 도움을 요청했다가 충격적인 말을 들었다. A 씨 아들이 매일 혼자 학교생활을 하고 친구들 사이에서 ‘아싸(아웃사이더)’로 불린다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이 같은 부적응과 부모 기피 같은 현상의 배경을 ‘스라밸(Study and Life Balance·공부와 삶의 균형)’ 파괴에서 찾는다. 대표적인 후유증이라는 것이다. A 씨의 상담사는 “공부시간과 사생활을 통제한 부모에게 자녀가 뒤늦게 불만을 갖고 단절을 선언한 것으로 보인다. 어찌 보면 당연한 현상이다”라고 했다. 한세영 이화여대 아동학과 교수는 “부모가 설계한 삶에 수년간 종속되면서 아이들의 불만이 축적된다. 극단적으로 표출되는 위험성을 항시 지닐 수밖에 없다”고 했다. 부모의 통제가 익숙한 아이들은 성인이 됐을 때 대인관계 유지에 어려움을 겪는다. 지금껏 누려보지 못했던 자유가 갑자기 주어졌기 때문이다. 이향숙 한국아동청소년상담센터 소장은 “아이들의 사회성 문제로 상담을 요청하는 부모들이 많다. 자폐에 가까울 정도로 타인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아이들도 있다”고 했다. 정익중 이화여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통제에 익숙한) 아이들은 대학 혹은 직장에서 자율적으로 의사결정을 하지 못할 수 있다. 아이를 완전히 통제하려다가 자칫 아이 인생 전체를 망칠 수 있다는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렇다면 부모는 어떻게 해야 할까. 전문가들은 “자기시간을 주체적으로 쓸 수 있는 권리를 인정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또 통제가 불가피할 경우 고압적 태도보다 아이도 납득할 수 있게 충분한 대화와 설득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김명순 연세대 아동가족학과 교수는 “부모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인내다. 아이의 자기결정권을 인정하고 수년간 시간을 갖고 사회화를 지켜봐야 한다. 이 과정에서 아이는 내적, 외적으로 성장할 수 있다”고 말했다.신규진기자 newjin@donga.com김자현기자 zion37@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