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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 번역가로 활동한 지 14년째. 올 1월 출간한 ‘경험 수집가의 여행’(열린책들·2만5000원)으로, 옮긴 책이 100권을 꽉 채웠다. 22일 서울 청계천에서 만난 번역가 김명남 씨는 “세월이 흐르면서 결과물이 쌓인 것”이라고 했지만 매년 7, 8권씩 꾸준한 작업은 흔치 않다. 전문 용어가 난무하는 과학서라면 더 그렇다. “언론사와 온라인 서점을 거쳐 번역가로 일을 막 시작하던 시기에 과학 담론이 부상했어요. 과학서 시장도 폭발적으로 성장했죠. 화학 수학 물리학 의학 등 전 분야를 다룬다는 점이 제 작은 자부심입니다.(웃음)” 화학(KAIST)을 전공하고 환경 정책(서울대 환경대학원)을 공부했다. 과학 분야 1순위로 꼽히는 역자가 됐고, 그가 번역한 책만 골라 읽는 팬도 생겼다. 스타 번역가로 성장하는 사이 출판계 분위기도 크게 달라졌다. 과거엔 외서가 대부분이었지만 최근엔 김상욱(물리학자) 이정모(인지과학자) 등 인기 저자가 늘어나며 국내 책 출간이 더 활발하다. 김 씨가 추천하는 과학책은 뭐가 있을까. 봄에 어울리는 ‘식물산책’(글항아리·1만8000원)과 과학자의 태도를 엿볼 수 있는 ‘랩 걸’(알마·1만7500원), 그리고 자신이 번역한 ‘틀리지 않는 법’(열린책들·2만5000원)을 꼽았다. 그는 “과학서를 읽으면 세상을 이해하는 수단을 얻을 수 있다. 통계·수학 책을 읽으면 가짜뉴스를 꿰뚫게 되고, 식물학 책을 보면 길가의 들꽃이 더 반갑게 느껴진다”고 했다. 번역가는 진입장벽이 낮은 시장이라고들 한다. 인문학 전공 대학원생은 해외 서적을 읽는 것 자체가 공부인 데다 특별한 자격증도 없다. 일감이 들어오는 대로 번역하길 9년, 그는 “운 좋게도” 책을 고를 권한을 얻었다. 책을 고르는 기준은 ‘얼마나 새로운가’이다. 번역가의 최대 장점은 지적 노동이기 때문이다. 번역 방식도 천지개벽했다. “사전과 도서관에 의지하던 시절이 있었는데, 요즘은 인터넷 덕분에 작업 시간은 단축되고 품질은 개선됐죠. 한데 독자들의 눈도 높아져 오역을 쉽게 찾아낸답니다.” 최근 그는 인기 저자 리베카 솔닛의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창비·1만4000원) 등 4권과 미셸 오바마의 자서전 ‘비커밍’(웅진지식하우스·2만2000원) 등으로 외연을 넓히고 있다. 그가 꼽는 번역가의 1순위 자질은 ‘끈기’. 5∼7회 정독하다 보면 명문도 지루해지기 때문이다. “번역가도 자신이 옮긴 문장을 전부 기억해요. 70세까지 언어 가교 역할을 하고 싶습니다. 할머니라는 걸 독자가 알아채지 못하게 하려면 피나는 노력으로 감각을 유지해야겠죠?”이설 기자 snow@donga.com}

“모든 불확실성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빛을 향해 한 발을 내디뎌야만 하는 순간을 기도라고 부를 수 있다면, 아마 이 프로젝트는 백 년 동안의 긴 기도에 가까운 어떤 것이라고 나는 이 순간 느끼고 있다.” 노르웨이 미래도서관(Future Library) 프로젝트에 다섯 번째 작가로 선정된 소설가 한강(49·사진)이 26일 소감문을 발표했다. 100년 동안 해마다 작가 1명의 미발표 소설을 보관했다가 2114년에 동시에 출판하는 공공예술 프로젝트. 아시아 작가로는 한 작가가 처음 뽑혔다. 소감문에서 그는 “제의를 받은 직후, 나는 백 년 뒤의 세계를 상상했다. 내가 죽어 사라진 지 오래고, 아무리 수명을 길게 잡는다 해도 내 아이 역시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며, 내가 사랑하는 그 누구도, 지금 이 순간 지구상에서 함께 살아 숨 쉬는 그 어떤 인간도 더 이상 살아 있지 않은 세계를. 그것은 무섭도록 쓸쓸한 상상이었다”고 했다. 이어 “하지만 그 막막함을 가로질러 나는 계속 상상했다. 이 순간도 시간은 어김없이 흐르고 있으니, 필연적인 현실로서 당도하고 말 백 년 뒤의 세계를. … 그때 알았다. 이 프로젝트가 어떤 힘을 가지고 있는지를. 이 프로젝트를 위해 글을 쓰려면 시간을 사유해야 한다는 것을”이라고 덧붙였다. 한 작가는 다음 달 25일 노르웨이 오슬로를 방문해 100년 뒤 공개할 작품의 제목을 발표하고 원고를 전달한다. 원고는 오슬로도서관에 보관할 예정이다. 이설 기자 snow@donga.com}

“돈황과 실크로드는 저의 오랜 로망이었어요.” “이것 좀 보세요. 사막이 주는 감동은 대단한 것 같습니다.” 24일 서울 마포구 서교동 창비서교빌딩에서 열린 출간 기자간담회. 유홍준 명지대 석좌 교수(70)는 1시간 동안 준비해온 사진과 자료를 꺼내 보이며 열정적으로 이야기보따리를 풀었다. 간담회가 아니라 여행가의 모험담을 듣는 자리 같았다. ‘나의 문화유산…’ 시리즈는 누적 판매 부수 400만 부를 넘긴 초대형 베스트셀러다. 지금까지 국내 편 10권과 해외 편 4권(일본)이 나왔다. 중국 편은 7권에서 10권 사이를 목표로 한다. 이번에 펴낸 첫 2권은 돈황(敦煌)과 실크로드에서 출발했다. “출발지를 신중히 정하는 편인데, 이번엔 선택이 특히 어려웠습니다. 중국 5대 고도에서 시작하면 중화주의나 사대주의로 오해할 수 있고, 동북 3성을 쓰자니 애국주의 입장이 강조될 것 같았죠. 그러다가 동서양의 연결고리이자 여러 민족이 투쟁하며 문명을 쌓아올린 서쪽이 적당하겠다 싶었습니다.” 1권 부제는 ‘돈황과 하서주랑: 명사산 명불허전(鳴不虛傳)’이다. ‘사기’와 ‘삼국지’의 무대인 관중평원에서 시작해 하서주랑(河西走廊·황허 서쪽의 좁고 긴 평지)을 거쳐 돈황 명사산에 이르는 2000km를 답사했다. 실크로드 6000km 가운데 동쪽 3분의 1에 해당한다. 2권 ‘막고굴과 실크로드의 관문: 오아시스 도시의 숙명’은 막고굴과 그곳에서 발견된 돈황 문서에 얽힌 일화를 소개한다. 막고굴은 1.6km 길이의 절벽에 1000여 년 동안 승려 화가 석공들이 파놓은 크고 작은 석굴을 통칭한다. 외국인 도굴꾼과 이에 맞선 수호자들의 이야기도 담았다. “14시간 동안 버스로 타클라마칸 사막을 종주하고 나니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그 옛날 이 무지막지한 길을 뚫은 힘은, 무역로를 놓은 ‘돈’과 불경을 구하러 가는 ‘종교’ 두 가지였구나….” 유 교수는 중국 편을 쓰면서 한국문화유산의 우수성을 느꼈다고 한다. 그는 “중국과 우리의 문화유산 규모를 비교하며 열등감에 빠지기도 하는데 그럴 필요가 없다”며 “중국에 막고굴이 있다면 우리에겐 석굴암이 있다. 각자의 상황과 자연 속에서 그 나름의 문화유산이 형성된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중국과 인접한 지리적 위치에도 한국은 동아시아 문화권 속에서 상당한 지분을 지켜왔다. 한국은 당당한 문화 주주 국가”라고 덧붙였다. 일흔에 접어들었지만 몸과 마음은 어느 때보다 뜨겁다. 그는 “많이 걸어서 그런지 일흔이라고 자각해본 적은 없다. 52세 정도로 스스로 느낀다”며 “내년 봄 전에 투르판과 쿠차로 이어지는 3권을 출간할 것”이라고 했다. “시리즈가 장수하는 비결요? 사람들이 궁금해할 만한 역사와 문화 자연 미술을 재미있게 풀어낸 점 아닐까요. 이번 책은 특히 사진과 용어설명 하나하나 친절하게 썼습니다. 크기는 기존 책의 90%에 무게도 가벼워졌죠. 충실한 가이드북이 됐으면 합니다.” 이설 기자 snow@donga.com}

“색깔은 어떻게 골랐나요?” “컬러 옷을 입은 건물에서 일하면 어떤 기분이 들죠?” 24일 오후 서울 종로구 광화문 동아미디어센터 건물 1층 로비. 외국인 6명이 대형 TV 화면에 눈을 고정시킨 채 질문을 쏟아냈다. 화면에는 프랑스 현대미술가 다니엘 뷔렌(81)의 ‘한국의 색’ 옷을 입은 동아미디어센터가 나오고 있었다. “노랑 보라 오렌지 등 8가지 색을 5층부터 20층까지 창문 안쪽에 부착했어요.” “요즘 직원들은 ‘너희 층은 무슨 색이냐’고 인사를 주고받습니다.” 김선미 동아일보 뉴센테니얼본부 크리에이티브랩팀장의 설명에 “대박” “정말 예뻐요”라며 다함께 웃음을 터뜨렸다. 이들은 러시아 음악전문채널 ‘MTV 러시아’에서 3∼6월 방영하는 ‘케이팝 엠티캠프(K-POP MTCamp)’의 최종 우승자들. 노래 춤 요리 디자인 등 한국 관련 경연을 통해 진정한 ‘한류 팬’을 뽑는 리얼리티 쇼다. 최초 지원자 3000여 명 가운데 예선을 거친 25명이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끝까지 살아남은 5명(1명은 멘토)이 포상 휴가 격으로 23∼29일 한국을 여행하고 있다. 방송팀 인솔자인 하르첸코 옐레나 한국관광공사 모스크바지사 매니저는 “역사 테마와 케이팝 테마로 일정을 짜던 중 뷔렌의 ‘한국의 색-인 시튀’ 작업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며 “직접 와 보니 역사 유적과 현대 미술이 조화를 이룬 분위기가 인상적”이라고 했다. 한국 여행 편은 현지에서 6월에 방영한다. 이들은 뷔렌의 작품 설명을 들은 뒤 도보로 2분 거리인 서울파이낸스센터 앞 작은 광장으로 이동했다. 이른바 ‘포토 존’에서 건물 전체를 담은 사진을 찍기 위해서다. 우승자들은 “서울의 중심에 이렇게 멋진 공공작품이 있다니 놀랍다”며 건물을 바라보다가 걸그룹 ‘에이핑크’의 춤을 추며 끼를 발산했다. 우승자들은 27일 부산을 거쳐 28일 광주에서 ‘2019 광주세계수영선수권대회 성공기원 SBS 슈퍼콘서트’를 관람한다. 이들을 포함해 한국관광공사가 모집한 한류 팬 1만 명이 콘서트 무대에 오르는 방탄소년단(BTS) 트와이스 등 케이팝 스타를 만난다. 관광공사 관계자는 “최근 한류가 제2의 전성기를 맞으면서 일본 호주 미국 폴란드 등 한국을 찾는 해외 방송사가 늘고 있다”며 ”광화문의 랜드마크로 자리 잡은 뷔렌의 작품을 담고 싶다는 문의가 활발하다”고 했다. 이설 기자 snow@donga.com}

《2017년 ‘보노보노처럼 살다니 다행이야’(놀)와 지난해 ‘곰돌이 푸, 행복한 일은 매일 있어’(알에이치코리아) 이후 캐릭터를 내세운 에세이가 서점가를 지배하고 있다. 앨리스, 인어공주, 은하철도 999, 둘리를 거쳐 라이언, 고길동, 리락쿠마까지 등장했다. 어떤 캐릭터가 성공 확률이 높을까. 전문가들에 따르면 △세대를 아우르면서 △20, 30대 여성의 감성과 추억을 자극하고 △자기 나름의 가치관을 갖춰야 한다. 승승장구하는 대표 캐릭터(푸, 보노보노)와 신흥 강자(스폰지밥, 고길동)의 매력을 각자의 목소리로 정리했다.》○ 푸 1923년 세상에 나와 무려 96세. 까마득한 후배들 사이에서 ‘롱런’하는 비결은 푸근한 인상과 성격! 대책 없이 발랄하기보단 차분하고 낙천적이라 현실적이라고들 하지. 한국에서 출간한 에세이들은 정직함, 낙천성, 삶에 대한 주인의식을 강조해 인기를 끌었어. 지난해 내 대표 책이 판매순위 1위에 올랐는데 20, 30대 여성(53%)뿐 아니라 40, 50대 남성(10%)도 많이 봤대. 디즈니 출신이라 몸값은 좀 비싸. 일반 캐릭터는 통상 인세 10% 내외인데, 우리는 로열티가 훨씬 높거든. 정확한 수치는 비밀이야.○ 보노보노 난 숲에 사는 호기심 폭발 해달이야. 소심한 데다 실수투성이지만 마음은 누구보다 따듯해. 일본에선 날 모르면 간첩이지. 30년간 4컷 만화 주인공으로 일본인 정서를 다독였지. 한국에서 최근 내 이야기를 담은 책이 쏟아지고 있다지? 무심히 삶을 건드리는 대사가 주특기인데, 그래서인지 최근 ‘보노보노 명언집’도 나왔더라고. “생물이 힘들지 않게 사는 방법 같은 건 절대 없어” “작으면 왜 얻어맞는 걸까? 작은 건 대단한데” 등등. 친구 너부리, 포로리와 투덕대는 모습도 인기 포인트야. 사람처럼 진지하게 대화하는 귀여운 동물을 보고 싶다면 내 책을 펼쳐 봐. 철학적이란 평가를 들은 만큼 내용도 괜찮다고.○ 고길동 내가 ‘악당’이 아니라 ‘짠내’ 캐릭터라 느꼈다면 중년이라고들 하지? 가뜩이나 가장으로 어깨가 무거운데 둘리 일당까지 거두려니 나름 힘들었다고. 이번 책은 과장으로 사는 애환과 가장의 책임감에 초점을 맞췄어. 중년 남성을 겨냥한 캐릭터 에세이는 내 책이 유일할 거야. 원작을 에세이로 바꾸는 작업은 쉽지 않아. 기존 서사 속에서 고길동의 매력을 포착해 독자의 마음을 두드려야 하거든. 문학적이고 쉬운 문장으로 잘 포장하는 게 관건이야.○ 스폰지밥 폭신폭신한 인공 스폰지는 해면동물인 나를 본떠서 만든 거야. 내 성격은 싱글벙글, 무한긍정, 마이웨이. 표정만 봐도 느껴지지? 남들 따윈 신경 쓰지 않는 ‘무뎃포’ 정신이. 귀엽고 서정적인 다른 캐릭터와는 좀 다른 구석이 있지. “생각을 멈추고 몸을 움직여라” “나답지 않은 선택을 하라” “꿈은 없어도 된다” “나 자신과의 싸움은 하지 마라” 훗날보다 오늘을 중시하는 게 내 모토야. 해양 생물이 주는 신선함에 어른 팬도 적지 않아. 원작 애니메이션 대사를 토대로 작가가 글을 다듬어 썼어. 이설 기자 snow@donga.com}

30대 다언은 ‘그 일’을 17년간 머릿속에서 무한반복 재생한다. 언니를 죽인 범인은 누구일까. 허점투성이 진술을 하고도 풀려난 한민우 같은데, 지금이라도 그를 찾아내 단죄할까. 상상 속 사건이 실감을 더할수록 의심과 자책은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언니의 유령에 붙들린 다언의 마음 밭은 폐허가 되어 간다. 데뷔 24년 차 소설가 권여선(54)이 신작 장편 ‘레몬’(창비·1만3000원·사진)으로 돌아왔다. 2016년 계간 ‘창작과 비평’에 실린 중편 ‘당신이 알지 못하나이다’를 개작한 작품. 애도되지 못한 죽음으로 고통받는 이들의 내면을 극한까지 파고든다. e메일로 만난 그는 “가까운 이의 죽음과 불행을 ‘나 때문’이라 생각하는 마음은 오만이다. 삶의 비정한 속성을 겸허히 받아들여야 슬픔을 극복할 수 있다”고 했다. 권 작가의 소설을 읽다 보면 삶의 어두운 순간을 반추하게 된다. 억울함과 부당함, 지질함 같은 감정이 해일처럼 밀려와 빵 터지며 ‘불편한 카타르시스’를 남긴다. ‘레몬’은 지적인 통찰이 넘치는 ‘권여선표’ 소설에 스릴러를 가미했다. “죽음을 다룬 미스터리 소설을 쓰고 싶은 마음과 깊은 상실을 겪은 이들의 아픔을 그리고픈 마음이 만나 탄생한 이야기예요. ‘내 탓’은 가공의 비극을 더할 뿐, 절대 해결책이 될 수 없다는 메시지를 건네고 싶었습니다.” 데뷔작인 장편 ‘푸르른 틈새’(1996년)부터 단편집 ‘처녀치마’(2004년) ‘분홍리본의 시절’(2007년) ‘안녕 주정뱅이’(2016년)까지. 그의 소설만 찾아 읽는 독자가 적지 않다. 수치와 염치 중간쯤의 감정을 귀신같이 포착해 “딱 내 이야기”라고 느끼게 만드는 게 그의 장기. 굵직한 문학상을 다수 수상하며 중견 작가로 우뚝 섰다. 그의 요즘 관심사는 인간을 순식간에 탐욕으로 몰아넣는 일확천금에의 욕망. 그는 “평범한 이들도 눈앞의 이득 앞에서 쉽게 자신을 속이곤 한다”며 “부동산 광풍과 비트코인 열풍 같은 세태를 작품에 담고 싶다”고 했다. 그의 계획은 “순간의 단상들을 엮어 계속 쓰는 것”이다. “작가로 살면서 나쁜 점은 글 쓸 때 미친 사람 비슷하게 되는데, 그걸 잘 달래면서 데려가야 한다는 점? 그 대신 글을 마치면 미친 사람 비슷하게 기뻐지기도 한답니다.”이설 기자 snow@donga.com}

30년 경력의 ‘새 덕후’가 새를 탐독하다가 아름다움, 진화, 페미니즘에 도달한 이야기다. ‘종의 기원’(1859년)에 가려 서자 취급을 받던 다윈의 ‘인간의 유래와 성선택’(1871년)을 복권하고자 하는 시도다. 남녀의 차이는 타고난 게 아니라는 사실을 생물학에 근거해 조목조목 입증한다. 표지만 봐서는 주인공이 새인지 사람인지 헷갈린다. 예일대 조류학과 교수인 저자가 밝힌 책의 목표는 “배우자 선택에 대한 다윈의 미학적 원개념을 되살리고 아름다움의 과학적 주제의 주류로 격상시키는 것”. 다윈으로 시작해 새, 생물, 인간의 진화와 성문화로 이어진다. 찰스 다윈(1809∼1882)의 ‘종의 기원’은 지금껏 천하무적이다. 반면 ‘인간의 유래와 성선택’을 아는 이는 드물다. ‘인간의…’에 담긴 ‘성(性)선택에 의한 미적 진화’(성선택)는 ‘자연선택에 의한 적응적 진화’(자연선택)에 가려 오랜 세월 평가절하됐다. 자연선택의 완전무결함에 집착한 다윈주의자들이 성선택을 배척한 탓이다. 저자는 성선택에 주목한다. 평소처럼 새와 ‘놀던’ 저자는 어느 날 ‘유레카’를 외친다. 일생의 작업들이 하나의 지표를 가리킨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새들은 특정 깃털 색깔 노래 과시행동에 대한 선호도를 바탕으로 자신의 배우자를 선택하며, 그 결과는 성적 장식물의 진화로 귀결된다.” 짝짓기의 관점에서 새의 아름다움이 진화했다는 발견은 성선택 이론과 일치한다. 무용하지만 화려한 수컷 공작새의 깃털, 비행을 방해하지만 미적으로 아름다운 곤봉날개마나킨 수컷의 날개, 생존에 도움이 안 되지만 아름다운 개똥지빠귀의 노래는 모두 성선택이 누적된 결과다. 성선택의 비범함은 동물의 감각·인지 능력과 성적 자율성을 인정했다는 점이다. “치장이 가장 화려한 종들은 암컷의 배우자 선택을 통해 성선택이 이루어지는 경우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빅토리아 시대 과학자들은 암컷의 성적 자율성을 옹호하는 주장을 비웃고 조롱했다. 하지만 이를 뒷받침하는 사례는 적지 않다. 수컷 오리와 암컷 오리는 오랜 기간 성 결정권을 놓고 투쟁해왔다. 그 결과 수컷 오리의 페니스는 지나치게 길어졌고, 암컷 오리의 질은 개미굴처럼 복잡해졌다. 바우어새의 구애용 구조물의 앞뒤가 뻥 뚫린 배경도 이와 비슷하다. 수컷 바우어는 암컷을 유혹하기 위해 화려한 집을 짓는데, 암컷 바우어는 수컷의 ‘데이트 폭력’에 대비해 탈출구가 없는 구조물에는 진입하지 않는다. 다채로운 새 이야기 끝에 만나는 건 인간의 성문화사다. 인간의 성 메커니즘은 동물과 큰 틀에서는 같지만 언어 물질 인종 종교의 영향을 받아 훨씬 복잡하다. “인간 남성이 여성과 달리 형태학적 장식을 보유하지 않은 건, 여성의 배우자 선택이 사회적 형질에 초점을 맞췄기 때문”이다. 지난한 투쟁에도 여성이 완전히 성적 자유성을 갖지 못한 이유는 이렇게 설명한다. “남성의 권력, 성적 지배, 가부장제라는 문화적 이데올로기가 (여성의 성적 결정권 확대에 맞서) 수정 생식 양육투자에 관한 남성의 지배를 재확립해왔다.” 대중 과학서지만 내용이 쉽진 않다. 애피타이저 격인 총천연색 새 그림을 감상한 뒤 프롤로그를 꼼꼼히 읽으면 전체 틀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새 이야기가 버겁다면 뒷부분의 인간 성문화사를 먼저 읽길 권한다. 이설 기자 snow@donga.com}

30년 경력의 ‘새 덕후’가 새를 탐독하다가 아름다움, 진화, 페미니즘에 도달한 이야기다. ‘종의 기원’(1859년)에 가려 서자 취급 받던 다윈의 ‘인간의 유래와 성선택’(1871년)을 복권하고자 하는 시도다. 남녀의 차이는 타고난 게 아니라는 사실을 생물학에 근거해 조목조목 입증한다. 표지만 봐서는 주인공이 새인지 사람인지 헷갈린다. 예일대 조류학과 교수인 저자가 밝힌 책의 목표는 “배우자 선택에 대한 다윈의 미학적 원개념을 되살리고 아름다움의 과학적 주제의 주류로 격상시키는 것”. 다윈으로 시작해 새, 생물, 인간의 진화와 성문화로 이어진다. 찰스 다윈(1809~1882)의 ‘종의 기원’은 지금껏 천하무적이다. 반면 ‘인간의 유래와 성선택’을 아는 이는 드물다. ‘인간의…’에 담긴 ‘성(性)선택에 의한 미적 진화’(성선택)는 ‘자연선택에 의한 적응적 진화’(자연선택)에 가려 오랜 세월 평가 절하됐다. 자연선택의 완전무결함에 집착한 다윈주의자들이 성선택을 배척한 탓이다. 저자는 성선택에 주목한다. 평소처럼 새와 ‘놀던’ 저자는 어느 날 ‘유레카’를 외친다. 일생의 작업들이 하나의 지표를 가리킨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새들은 특정 깃털 색깔 노래 과시행동에 대한 선호도를 바탕으로 자신의 배우자를 선택하며, 그 결과는 성적 장식물의 진화로 귀결된다.” 짝짓기의 관점에서 새의 아름다움이 진화했다는 발견은 성선택 이론과 일치한다. 무용하지만 화려한 수컷 공작새의 깃털, 비행을 방해하지만 미적으로 아름다운 곤봉날개마나킨 수컷의 날개, 생존에 도움이 안 되지만 아름다운 개똥지빠귀의 노래는 모두 성선택이 누적된 결과다. 성선택의 비범함은 동물의 감각·인지 능력과 성적 자율성을 인정했다는 점이다. “치장이 가장 화려한 종들은 암컷의 배우자 선택을 통해 성선택이 이루어지는 경우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빅토리아 시대 과학자들은 암컷의 성적 자율성을 옹호하는 주장을 비웃고 조롱했다. 하지만 암컷의 성적 자율성이 수컷의 미적 진화를 이끈 사례는 적지 않다. 수컷 오리와 암컷 오리는 오랜 기간 성 결정권을 놓고 투쟁해왔다. 그 결과 수컷 오리의 페니스는 지나치게 길어졌고, 암컷 오리의 질은 개미굴처럼 복잡해졌다. 바우어 새의 구애용 구조물의 앞뒤가 뻥 뚫린 배경도 이와 비슷하다. 수컷 바우어는 암컷을 유혹하기 위해 화려한 집을 짓는데, 암컷 바우어는 수컷의 ‘데이트 폭력’에 대비해 탈출구가 없는 구조물에는 진입하지 않는다. 다채로운 새 이야기 끝에 만나는 건 인간의 성문화사다. 인간의 성 매커니즘은 동물과 큰 틀에서는 같지만 언어 물질 인종 종교의 영향을 받아 훨씬 복잡하다. “인간 남성이 여성과 달리 형태학적 장식을 보유하지 않은 건, 여성의 배우자 선택이 사회적 형질에 초점을 맞췄기 때문”이다. 지난한 투쟁에도 여성이 완전히 성적 자유성을 갖지 못한 이유는 이렇게 설명한다. “남성의 권력, 성적 지배, 가부장제라는 문화적 이데올로기가 (여성의 성적 결정권 확대에 맞서) 수정 생식 양육투자에 관한 남성의 지배를 재확립해왔다.” 대중 과학서지만 내용이 쉽진 않다. 에피타이저 격인 총천연색 새 그림을 감상한 뒤 프롤로그를 꼼꼼히 읽으면 전체 틀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새 이야기가 버거우면 뒷부분의 인간 성문화사를 먼저 읽길 권한다. 이설 기자 snow@donga.com}

부활절을 기리는 마음은 같지만 각국의 부활절 풍경은 각양각색이다. 21일 기독교의 가장 큰 축일인 부활절을 앞두고 세계 각국의 독특한 관련 풍습을 알아봤다. 달걀은 부활의 대표적 상징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무덤에서 부활하듯, 달걀 안에서 잠자던 병아리가 알을 깨고 나오기 때문이다. 부활절에 달걀을 나눠주는 풍습은 만국 공통이다. 이 풍습은 중세부터 시작된 것으로 알려졌다. 사순절 기간에 금식하던 수도자들이 부활절 아침에 달걀을 먹는 의식을 치렀다고 한다. 달걀 풍습은 세계로 전파되며 조금씩 변형됐다. 미국과 영국에서는 ‘달걀 굴리기’와 ‘달걀 찾기’를 한다. 다 함께 기준점에 선 뒤 경사로에서 달걀을 굴려 깨지지 않고 먼저 도착한 달걀이 이기는 경기다. 19세기 후반부터 시작된 행사로, 전통적으로 대통령 부인이 주최한다. 달걀 찾기는 화려하게 꾸민 달걀 가운데 진짜와 가짜 달걀을 찾는 놀이다. 가짜 달걀 안에는 초콜릿, 사탕, 젤리 등이 들어 있다. 영국에서는 또 큰 달걀 예술품을 장식하는 풍습도 있다. 부활절 기간에 시내 곳곳에는 커다란 부활절 조형물이 곳곳에 들어선다. 행인들이 조형물을 찾아낸다는 의미로 ‘더 빅 에그 헌트(The Big Egg Hunt)’라고 불린다. 호주는 ‘이스터 홀리데이(Easter Holiday)’라는 휴가를 갖고 달걀 대신 초콜릿을 먹는다. 폴란드에서는 예수, 건강, 성공, 풍년을 기리며 축복바구니에 붉은 달걀, 빵, 소금, 흰 소시지를 담는다. 이탈리아에서는 부활절에 특별한 빵을 먹는다. 토끼 모양이 새겨진 빵과 ‘콜롬바 파스콸레(Colomba pasquale·부활절 비둘기)’라고 불리는 케이크가 대표적이다. 일부 지역에서는 삶은 달걀로 속을 채운 빵과 양고기를 먹기도 한다. 스페인에서는 일주일 간 부활절 축제 ‘세마나 산타(Semana Santa)’가 열린다. 크리스마스와 더불어 가장 큰 행사다. 부활한 예수와 성모 마리아의 만남을 재현한다. 세비야와 그라나다의 축제가 특히 유명하다. 전통 요리로는 각종 육류를 넣고 구운 고기 파이인 오르나소(Hornazo)와 구운 달걀로 요리한 파스타인 로스케타(Rosqueta)가 있다. 스페인의 영향을 오래 받은 콜롬비아는 성주간을 국가공휴일로 지정했다. 성목요일 밤에 관련 복음을 재현해 꾸민다. 멕시코는 ‘모닥불 행사’를 열어 예수를 배반한 유다를 상징하는 종이인형을 태운다. 필리핀은 기도와 묵상으로 경건하게 축일을 보낸다. 부활한 예수가 성모 마리아와 만나는 예식인 ‘살루봉(Salubong)’이 가장 큰 행사다. 아이들은 천사 복장으로 찬송가를 부르고, 예식이 끝난 뒤에는 종이로 만든 유다 상을 불태운다. 신도들은 거리에서 “예수는 빈민을 위해 죽었다”는 말을 주고받으며 예수의 희생을 기린다. 십자가 죽음을 재연하는 행사도 열린다.이설 기자 snow@donga.com}

“‘아, 한 역사가 이렇게 불타는구나’ 싶어 마음이 아팠습니다. 오랜 세월 쌓인 기도들이 재로 변한 것 같았습니다.” 파리 노트르담 대성당이 화재로 불탄 다음 날인 17일. 김형영 시인(74)의 목소리는 깊게 잠겨 있었다. 그의 전화 수화기에서 통화연결음으로 슈베르트의 ‘아베 마리아’가 흘러나왔다. 문단에서 가톨릭 신자로 잘 알려진 그는 노트르담 대성당 화재에 대해 깊은 상실감을 표하면서도 희망을 잃지 않았다. “프랑스의 복원 능력은 세계 최고라고 하니, 다시 찬찬히 역사를 쌓아올려야겠지요. 한국도 문화재 대부분이 목조 건물이고, 산불도 자주 일어나기 때문에 문화재 보호를 더욱 강화해야 합니다.” 최근 펴낸 아홉 번째 시집 ‘화살시편’(문학과지성사·9000원)의 제목도 가톨릭의 ‘화살기도’에서 따왔다. 순간의 단상을 기도로 옮기듯, 찰나의 직관을 10줄 이내의 짧은 시로 써냈다. 그는 1979년 가톨릭 세례를 받았다. 이유 없이 찾아온 특발성혈소판감소증으로 고생하던 시기에 가족과 성당을 찾았다. 날카롭던 시도 온화해졌다. 이번 시집에는 신앙의 영성이 곳곳에 녹아 있다. 첫 시로 실린 ‘서시’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삼위일체론’에 실린 기도문과 관련된 전설에 나오는 바닷가 소년과의 대화를 참조해서 썼다. ‘바닷가 모래밭에/한 아이 구덩이를 파서/바다를 담고 있네./조개껍데기로 퍼 담고 있네.//“바닷물을 다 담으려고요.”/“그건 불가능하단다.” 일러주어도/아이는 계속해서 퍼 담고 있네.’(‘서시’) 이번 시집의 절반은 봄을 노래한다. 나무의 새순과 언 땅에 싹을 틔우는 대지에서 ‘자연은 매일 출산 중’이라는 구절을 떠올렸다. 그는 “봄도 자연도 하느님”이라며 “요즘 가톨릭을 거쳐 범신론자가 된 것 같다”고 했다. ‘노점상하고 흥정하는 저 사람/우리 동네/부잣집 마누라 아녀?’(화살시편 27―노점상) 가톨릭문인회장을 맡았던 김 시인은 고 김수환 추기경의 강론에서 ‘노점상’이라는 시의 힌트를 얻었다고 했다. “김 추기경의 강론은 시대의 핵심을 콕콕 찌릅니다. 종교와 예수를 들먹이지 않고 ‘어려운 이들을 돕겠다면서 노점상과 흥정하지 말라’고 하셨어요. 실천적인 삶의 태도가 단박에 와 닿았죠.” 그는 ‘시는 청춘의 장르’라는 속설을 믿지 않는다고 했다. 50년째 ‘고래동인’ 멤버인 윤후명 강은교 등과 술잔과 시심을 나눈다. 김 시인은 젊은 시는 번뜩이고 새롭지만 풋사과에 가깝다며 자만하지 않으면 갈수록 농익은 시를 쓸 수 있다고 했다. “시인도 때로 명예와 허영으로 움직이죠. 명시를 남기고 싶어 50년간 영혼을 파먹고 살았는데, 이제야 조금 집착을 내려놓게 됐습니다.” 그는 이번 시집이 ‘좋은 시’를 의식하지 않고 자유롭게 써낸 첫 시집이라고 말했다. “긴말 않고 짧은 시를 쓰겠다고 마음먹으니 아기의 옹알이 같은 언어를 고르고 솎게 되더군요. 성인들의 직관은 따라갈 수 없지만 가능한 한 속(俗)과 멀고 성(聖)에 가까운 시를 쓰고 싶습니다.” 이설 기자 snow@donga.com}

영국 작가 켄 폴릿(70)은 여러모로 입지전적 인물이다. ‘대지의 기둥’(1989년), ‘거인들의 몰락’(2010년) 등 펴내는 소설마다 세계적 베스트셀러가 됐고 스릴러와 역사 분야에서 동시에 거장으로 우뚝 섰다. 최근 그의 소설 가운데 가장 긴 ‘끝없는 세상 1∼3’(문학동네·각 1만6500원)이 국내에서 출간됐다. 중세 시대를 다룬 대표작인 ‘대지의 기둥’ 후속작으로, 미국에서는 2007년 출간됐다. e메일 인터뷰에서 그는 “중세 시대 사람들은 폭력과 굶주림으로 고통받으면서도 놀랍도록 아름다운 건축물을 남겼다. 매력이 넘치는 시대”라고 했다. “한국 독자에게 유럽의 중세는 다소 낯설 겁니다. 하지만 고통 용기 희망은 국경과 상관없는 가치예요. 브라질 인도 중국에서도 제 작품이 두루 읽히는 이유겠지요.” 작품의 시대 배경은 14세기 초 영국의 가상 마을 킹스브리지. 기사와 건축가를 꿈꾸는 머딘과 랠프 형제, 부유한 양모 상인의 딸 캐리스, 가난한 행상의 딸 궨다가 암흑의 시대에 맞서 각자의 삶을 개척하는 이야기를 그렸다. 그는 모든 인물을 아끼지만 똑똑하고 용감한 캐리스를 특히 좋아한다고 했다. “캐리스는 제가 존중하는 가치를 모두 갖췄어요. 페미니즘은 10대 때부터 저의 주요 관심사입니다. 여성은 오래 인내하지만 일단 분노하면 굉장히 단호하죠. 여성을 비중 있게 다루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기자 출신인 그는 원래 스릴러 소설을 주로 썼다. ‘바늘구멍’(1978년)으로 이름을 알린 뒤 신들린 듯 ‘트리플’(1979년), ‘레베카의 열쇠’(1980년), ‘사자와 함께 눕다’(1986년) 등을 쏟아냈다. 1986년 그는 돌연 역사 소설로 눈을 돌린다. 중세 시대 건축물에 대한 애정이 역사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다. 그는 “스릴러도 좋지만 독자의 마음에 오래 남을 작품에 대한 열망이 생겼다. 그러다가 보편적 가치를 담은 역사 소설로 장르를 바꿨다”고 했다. 폴릿은 오랜 시간 시대 상황을 공부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거인들의 몰락’을 쓸 때는 역사책 18권을 읽었고, ‘끝없는 세상’을 쓰기 위해 발품을 팔며 영국 각지의 대성당을 취재했다. 그는 “찾는 내용 대부분이 책 속에 있다. 자료가 부족할 때는 지도 사진 영화를 참고하거나 현장 취재를 한다”고 했다. “오노레 드 발자크, 에밀 졸라, 찰스 디킨스, 제인 오스틴, 앤서니 트롤럽 같은 이야기꾼을 특히 좋아합니다. 독자들이 이야기 속에 풍덩 빠져 인물에 이입하도록 만드는 건 늘 어려운 숙제이자 즐거움입니다.”이설 기자 snow@donga.com}

1945년 8월 6일 일본 히로시마 하늘에 인공 구름이 걸렸다. 사망자 14만여 명 가운데 4만 명이 즉사했다. 해리 트루먼 미국 대통령은 라디오 연설에서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역사상 최대의 과학 개발이란 도박에 20억 달러를 썼고 결국 이겼습니다. … 추후 국방장관이 테네시주 오크리지를 비롯한 시설들에 대해 설명할 것입니다.” 방송을 듣고서야 오크리지의 클린턴공병사업소(CEW·Clinton Engineer Works) 사람들은 자신의 역할을 깨닫는다. 비밀 서약과 치밀한 감시…. 그제야 모든 게 이해가 된다. CEW는 원자폭탄 개발을 위한 시설이었다. ‘아토믹…’은 1940년대 오크리지에서 비밀리에 진행한 CEW를 고증한 논픽션이다. 프로듀서이자 작가인 저자가 당시 CEW 근로자 인터뷰를 바탕으로 핵 시대의 기원을 되살려냈다. 개인과 집단의 기억, 언론 보도를 다각도로 참고해 역사적 균형을 잡으려는 노력이 돋보인다. 오크리지 인근 주민들은 1940년대 초 큰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걸 직감하지만 누구도 진실을 알려주지 않는다. ‘취득 공고, 몰수 공고, 퇴거 요청’을 거쳐 조성된 특별구역에는 CEW라는 이름이 붙는다. 일꾼들이 모이고 식당과 도서관 등이 들어서면서 이곳은 미니 도시로 변모했다. 일급비밀 과제를 수행하는 군사특별구역이지만 민간인과 여성, 아이들도 함께 살았다. 이탈자도 적지 않았다. “좁은 공간, 고립된 위치, 비밀 유지에 대한 주의로 만성적 긴장에 시달렸기 때문”이다. 오크리지 여성 근로자와 핵 개발을 주도한 여성 과학자의 이야기가 교차로 진행된다. 아는 자와 모르는 자의 시선이 충돌하며 소설적 재미를 더한다. 계속 승진해도 남성 부하 직원보다 봉급이 적고, 핵심 역할을 하고도 역사에 이름을 올리지 못한 여성 과학자의 이야기를 충실하게 짚었다. CEW는 1964년 완전히 폐쇄됐다. 이설 기자 snow@donga.com}

#1. 폴란드 시인 비스와바 심보르스카가 쓴 ‘선택의 가능성’의 문장들은 ‘∼를 더 좋아한다’로 끝난다. 50대 주부 이모 씨도 시인을 따라 써 봤다. ‘나 자신을 바보로 만드는 농담을 더 좋아한다. 요리를 잘하는 나보다 유머를 잘하는 나를 더 좋아한다.’ 이 씨는 “가족이 좋아하는 것만 좇다가 내가 좋아하는 걸 쓰는 것만으로도 해방감을 느꼈다”고 했다. #2. “‘∼처럼 외롭다’로 한 줄 시를 써 보세요.” 30대 직장인 김모 씨는 강사의 지시에 따라 ‘도구처럼 외롭다’고 썼다. “아무리 좋은 도구라도 늘 누군가의 요구대로 움직여야 하니 외롭다고 생각해요.” 그의 설명에 교실 안 남녀노소들은 저마다 좋은 딸, 좋은 상사로 살아가는 고단함을 털어놓았다. 한국상담대학원대의 진은영(문학상담), 김경희 교수(철학상담)는 지난 5년간 다양한 문학의 치유력을 실험했다. 두 사람이 최근 펴낸 ‘문학, 내 마음의 무늬 읽기’(엑스북스·1만7000원)에는 그 과정과 결실이 고스란히 담겼다. 9일 서울 서초구 대학 사무실에서 만난 그들은 “낯선 방식의 글쓰기는 내가 모르는 나를 만나게 해준다. 이를 통해 가려진 마음의 무늬를 살피고 치유에 이를 수 있다’고 입을 모았다. 문학상담은 10여 년 전 국내에 도입됐다. 임상심리상담과 달리 ‘증상 진단-처방’의 수순을 따르지 않는다. 여럿이 모여 작품을 읽고 쓰면서 성숙한 인격에 이르는 과정을 추구한다. 병리적 증상이 아닌 일상의 고민을 다룬다는 점도 의학·심리상담과 다르다. “감정을 마주하는 데도 연습이 필요해요. 일상적 화법이 아닌 문학의 힘을 빌리면 감정으로의 접근이 수월해지죠. ‘시인의 문장 따라 하기’ ‘사전 형식으로 시 쓰기’ 등 다양한 방법을 씁니다. 소설보다 생각을 간결하게 표현할 수 있는 시의 활용도가 높습니다.”(김) “문학적 서사와 은유를 통해 상처를 드러내면서도 불안감을 최소화할 수 있습니다. 또 시적인 방식을 통하면 ‘의무적 청취’에서 자유로워집니다. 같은 주제를 오래 이야기해도 지루하지 않으니까요.”(진) 뜬구름 잡는 문학이 어떤 힘을 발휘하느냐는 의혹도 있다. 시인이기도 한 진 교수는 “문학의 힘은 섬세함에서 나온다”며 “흔히 ‘말할 수 없이 슬프다’고 하는데, 슬픔을 풍부한 언어로 표현하다 보면 그 정체가 명료해지면서 자신의 슬픔을 직시할 수 있다”고 했다. 문학상담은 특히 감정 표현에 소극적인 이들에게 적합한 방식이라고 한다. 반면 문학 전공자나 중년 남성들은 마음을 여는 데 훨씬 더 오래 걸린다. 전공자는 자연스러운 표현보다 탁월한 문장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고, 중년 남성은 감정이 깊이 억눌린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마음을 담은 시를 쓴 다음 가까운 이들과 나눠 보세요. 그리고 학교나 직장의 과제라며 동참을 유도하세요. 잠깐의 어색함을 참으면 이겨내면 삶이 훨씬 풍요로워질 겁니다.”(김) “나만의 단어 사전이 있다고 상상하면서 인생의 단어를 꼽은 뒤 의미를 적어 보세요. 중요한 가치와 그렇지 않은 것들이 새롭게 보일 겁니다.”(진)이설 기자 snow@donga.com}

시인들 사이에서도 “시에 미쳤다”는 평가를 듣는 김언 시인(46)이 첫 시론집 ‘시는 이별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다’(난다·1만5000원)를 펴냈다. 지난 10여 년간 틈틈이 써낸 시론을 묶었다. 김 시인은 “미쳐 있는 건 맞지만 그런 시인이 꽤 된다”며 웃었다. 거대하고 풍성한 시의 바다에서 의미 있는 구절을 뽑아 8일 서울 종로구 청계천변에서 나눈 이야기를 그의 목소리로 정리했다. ○ ‘시에 대한 기록이자 한 시절에 대한 기록’ 시론은 시에 대한 생각을 담은 글이다. 모든 시인이 시론을 쓸 수 있는 건 아니다. 출간 시집이 꽤 쌓이고 시에 대한 생각이 정리돼야 써낼 수 있는 글 같다. 흥이 붙으면 시처럼 춤추듯 글이 나오는데 그렇지 않으면 문장이 뻑뻑해진다.○ ‘시는 한 마리 작고 보잘것없는 짐승의 면면’ 시는 잘난 힘이 아닌 못난 힘으로 쓰인다. 결핍과 상처로 가득한 밑바닥을 뚫고 내려가 보잘것없는 짐승에 불과한 자신을 직시해야 한다. 한데 그 작업이 쉽지 않다. 못난 힘으로 인해 생이 흔들리는 이들이 예술가 또는 범죄자가 되는 것 같다.○ ‘황지우’ 공대에 진학했는데 문학병에 들었다. 그런 내게 국문과 친구가 황지우 시인의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1983년)를 추천했다. 교과서 속 시와 다른 자유로운 작품 세계에 해방감을 느꼈다. ‘시를 써도 된다’는 허락증을 받은 기분이었다.○ ‘난해시는 비평가가 맨 마지막에 꺼내드는 레드카드여야’ 언어는 소통과 배제의 논리로 작동한다. 해석이 비교적 원활한 시라고 해도 소통 만능에 부합할 순 없다. 이런 측면에서 난해시라는 명명은 신중해야 한다고 본다. 특정 시집에 ‘접근금지’ 명령을 내리는 격인데, 내가 그 시에 불통하는 것일 수도 있으니까. 2010년 이후로 박준 황인찬 유희경 이제니 시인 등 편안한 소통을 지향하는 시가 널리 퍼지고 있다. 뭐든 지나치면 절정을 맞고 쇠락하는 것 같다.○ ‘‘시는 청춘의 장르’라는 저주’ 한국에서는 유독 시가 ‘청춘의 장르’로 고정돼 있다. 기형도 백석을 포함해 현재 활동 중인 대다수 시인의 대표작은 첫 시집이다. 운동 신경처럼 시적 원천도 갈수록 고갈되는 측면이 있다. 하지만 만년작의 잠재력도 풍부하다. 폴란드 시인 비스와바 심보르스카는 73세에 노벨상을 받은 후 시집 3권을 더 펴냈다. 우리도 만년작의 신화를 개척해야 한다.이설 기자 snow@donga.com}

《‘다라’ 제도를 통일한 황제는 성대한 축하연을 연다. 포로로 잡혀온 500여 명의 무희를 앞세워 승리의 팡파르를 울리려는 찰나. 하늘에서 연처럼 생긴 자객이 활강해 황제에게 불덩이를 던져댄다. 첫 장면부터 이국적 정취가 물씬한데 읽다 보니 강한 기시감이 든다. 항우와 유방의 기나긴 대립을 그린 중국 역사소설 ‘초한지’와 겹친다. 휴고·네뷸러·세계환상문학상을 동시에 받은 미국 공상과학소설(SF)계 샛별 켄 리우(43)의 첫 장편이 국내에 출간됐다. ‘민들레 왕조 연대기 3부작’의 1부 격인 ‘제왕의 위엄 상·하’(황금가지·각 1만5800원)다. 단편집 ‘종이 동물원’(황금가지·1만5800원)에 이은 두 번째 국내 출간이다.》 6일 본보와의 e메일 인터뷰에서 그는 “어릴 적 초한지 영웅들로 이야기를 지어 친구들과 역할 놀이를 했다. 미국에 건너온 뒤 사전을 뒤져가며 사마천의 사기를 읽고 그의 인간적인 역사 기록 방식에 깊이 매료됐다. 이후 ‘역사의 기록’과 관련한 작업을 과제로 삼고 있다”고 했다. 초반에 소설은 초한지의 서사를 거의 그대로 따른다. 후세의 영웅 쿠니와 마타의 성장담, 다라 제도의 패권을 둘러싼 경쟁이 뼈대를 이룬다. ‘지록위마’와 만리장성 쌓기 일화(해저터널로 변주)도 등장한다. 그는 “첫 장편에서 건국 신화의 개념을 깊이 들여다보고 싶었다”고 했다. “이야기로 사마천을 뛰어넘을 수 없겠지요. 설정의 변주보다는 다라 제국 건국 신화가 어떻게 재구성됐는지를 중심으로 읽으면 흥미진진할 겁니다.” 작품의 배경은 모호하다. 대나무 비단 같은 예스러운 소재와 최첨단 기술이 결합해 미래와 과거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시공간을 빚어낸다. 과학기술이 발달한 가상의 과거를 다룬 ‘실크펑크(Silkpunk) 장르다. 치밀한 세계관 설정을 위해 방대한 작업이 동반됐다. 고고학과 기계공학 논문을 뒤져 한(漢)대의 방직기, 한국의 거북선, 폴리네시안의 발화(發火) 기술을 파고들었다. “경제학자 W 브라이언 아서의 ‘언어로서의 기술’ 개념에서 ‘실크펑크’를 떠올렸어요. 소설 속 기술 언어의 어휘는 대나무 산호 같은 동아시아 문화권 재료로, 문법은 ‘생체모방 기술’을 따르죠. 제가 만든 세계를 잘 이해하기 위해 모형을 만들어 실험하다가 감전되기도 했습니다.” 소설은 때로 SF의 외피를 입은 현실 은유로 읽힌다. 전쟁의 책임을 묻는 신에게 황제가 “더 많은 피가 흐르지 않도록 흘린 피였다”고 항변하거나, 분서갱유에 빗대 “세상은 아직 너무나 불완전했고, 위대한 인간이 당대에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는 것은 필연”이라 설명하는 대목이 대표적이다. 작가는 “권력, 정의, 공정은 까마득히 오래된 문제다. 판타지는 현실에 기반한다. 사회를 비판하려 의도한 건 아니지만, 소설과 현실을 연관 짓는 건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했다. 작가는 중국에서 태어나 열두 살에 미국에 건너갔다. 하버드대에서 영문학을 전공하고 로스쿨을 졸업한 뒤 마이크로소프트 프로그래머, 로펌 변호사를 거쳤다. 지금은 낮에는 기술 전문 법률 컨설턴트로 일하고 밤에는 소설을 쓴다. 그는 ‘중국계 미국인’ 작가라는 꼬리표를 다르게 받아들인다. “많은 이들이 그런 종류의 꼬리표에 분열과 갈등이 내포됐을 거라 여기는데, 저는 오히려 즐거워요. 다양한 전통을 섞어 나만의 문화 공간을 빚어낼 수 있으니까요. 가상의 놀이 공간을 창조하고 싶다는 충동이 저를 글쓰기로 이끕니다. 한국 독자들도 다라 제도에서 즐거움을 만끽하시길 바랍니다.”이설 기자 snow@donga.com}
‘다라’ 제도를 통일한 황제는 성대한 축하연을 연다. 포로로 잡혀온 500여 명의 무희를 앞세워 승리의 팡파레를 울리려는 찰나. 하늘에서 연처럼 생긴 자객이 활강해 황제에게 불덩이를 던져댄다. 첫 장면부터 이국적 정취가 물씬한데 읽다보니 강한 기시감이 든다. 항우와 유방의 기나긴 대립을 그린 중국 역사소설 ‘초한지’와 겹친다. 휴고·네뷸러·세계환상문학상을 동시에 받은 미국 공상과학(SF)계 샛별 켄 리우(43)의 첫 장편이 국내에 출간됐다. ‘민들레 왕조 연대기 3부작’의 1부 격인 ‘제왕의 위엄 상·하’(황금가지·각 1만5800원)다. 단편집 ‘종이 동물원’(황금가지·1만5800원)에 이은 두 번째 국내 출간이다. 6일 본보와의 e메일 인터뷰에서 그는 “어릴 적 초한지 영웅들로 이야기를 지어 친구들과 역할놀이를 했다. 12살에 미국에 건너온 뒤 사전을 뒤져가며 사마천의 사기를 읽고 그의 인간적인 역사 기록 방식에 깊이 매료됐다. 이후 ‘역사의 기록’과 관련한 작업을 과제로 삼고 있다”고 했다. 초반에 소설은 초한지의 서사를 거의 그대로 따른다. 후세의 영웅 쿠니와 마타의 성장담, 다라 제도의 패권을 둘러싼 경쟁이 뼈대를 이룬다. ‘지록위마’와 만리장성 쌓기 일화(해저터널로 변주)도 등장한다. 그는 “첫 장편에서 건국 신화의 개념을 깊이 들여다보고 싶었다”고 했다. “이야기로 사마천을 뛰어넘을 수 없겠지요. 설정의 변주보다는 다라 제국 건국 신화가 어떻게 재구성됐는지를 중심으로 읽으면 흥미진진할 겁니다.” 작품의 배경은 모호하다. 대나무 비단 같은 예스러운 소재와 최첨단 기술이 결합해 미래와 과거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시공간을 빚어낸다. 과학기술이 발달한 가상의 과거를 다룬 ‘실크펑크(Silkpunk) 장르다. 치밀한 세계관 설정을 위해 방대한 작업이 동반됐다. 고고학과 기계공학 논문을 뒤져 한(漢)대의 방직기, 한국의 거북선, 폴리네시안의 발화(發火) 기술을 파고들었다. “경제학자 W. 브라이언 아서의 ’언어로서의 기술‘ 개념에서 ’실크펑크‘를 떠올렸어요. 소설 속 기술 언어의 어휘는 대나무 산호 같은 동아시아 문화권 재료로, 문법은 ’생체모방 기술‘을 따르죠. 제가 만든 세계를 잘 이해하기 위해 모형을 만들어 실험하다가 감전되기도 했습니다.” 소설은 때로 SF의 외피를 입은 현실 은유로 읽힌다. 전쟁의 책임을 묻는 신에게 황제가 “더 많은 피가 흐르지 않도록 흘린 피였다”고 항변하거나, 분서갱유에 빗대 “세상은 아직 너무나 불완전했고, 위대한 인간이 당대에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는 것은 필연”이라 설명하는 대목이 대표적이다. 작가는 “권력, 정의, 공정은 까마득히 오래된 문제다. 판타지는 현실에 기반한다. 사회를 비판하려 의도한 건 아니지만, 소설과 현실을 연관짓는 건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했다. 작가는 중국에서 태어나 12살에 미국에 건너갔다. 하버드대에서 영문학을 전공하고 로스쿨을 졸업한 뒤 마이크로소프트 프로그래머, 로펌 변호사를 거쳤다. 지금은 낮에는 기술 전문 법률 컨설턴트로 일하고 밤에는 소설을 쓴다. 그는 ’중국계 미국인‘이라는 꼬리표를 좋아하지 않는다. “많은 이들이 그런 종류의 꼬리표에 분열과 갈등이 내포됐을 거라 여기는데, 저는 오히려 즐거워요. 다양한 전통을 섞어 나만의 문화공간을 빚어낼 수 있으니까요. 가상의 놀이 공간을 창조하고 싶다는 충동이 저를 글쓰기로 이끕니다. 한국 독자들도 다라 제도에서 즐거움을 만끽하시길 바랍니다.” 이설기자 snow@donga.com}

영민하고 예민한 10대 소녀 엘리자베스는 옆집 문을 노크한다. 이웃 사람과 교류하라는 학교 숙제를 위해서다. 이웃집에는 80대 노인 대니얼 글럭이 살고 있다. 동네 사람들은 그를 ‘늙은 호모’라 부르며 수군거린다. 한 번으로 끝내려 한 만남은 일생의 인연으로 이어진다. 한창때 당대 예술인들과 어울리던 지식인이었던 글럭은 엘리자베스의 성 ‘디맨드’가 프랑스 어원을 따라 ‘세상의’라는 뜻을 지녔으며, 예기치 않게 여왕이 될 운명이라고 알려준다. “평생의 친구. 우리는 때로 평생을 기다려서 평생의 친구를 만나게 된단다.” 서로를 알아본 두 사람은 친구가 된다. 조숙한 소녀와 진지한 노인이 주고받는 대화는 영화 ‘비포 선라이즈’(1995년) 시리즈 못잖은 재미를 준다. “호텔에 가 놓고 돌볼 책임이 있는 아이에게는 다른 일을 하고 있었던 척해 본 경험 있으세요?” “질문에 도덕적 판단이 내포돼 있는지 알아야겠는데?” 거대담론부터 시시껄렁한 소재까지 죽이 척척 맞는다. 20년 뒤 소녀는 미술사를 전공한 대학 강사가 되고, 100세를 넘긴 대니얼은 요양원에서 잠들어 꿈을 꾸며 지낸다. 지금과 달리 제법 흥미진진하던 대니얼의 시대는 그의 꿈속에서 환상적으로 되살아나고, 엘리자베스가 발 디딘 2016년 영국은 브렉시트와 난민 문제 등으로 뒤숭숭하다 . “민주주의가 마치 누군가가 깨부숴 무기로 쓰겠다고 위협할 수 있는 유리병쯤 되는 것 같다.” “온 나라에서 돈, 돈, 돈, 돈이 넘쳤다. 온 나라에서 돈, 돈, 돈, 돈이 씨가 말랐다.” 매혹적인 우정 사이로 시대의 아이러니를 무겁지 않게 짚어낸다. “내가 사랑에 빠진 건 사람이 아니었어. 우리를 사랑하고 우리를 조금 아는 이들이 우리를 제대로 보았기를 바라야 해”처럼 아껴 읽고 싶은 잠언들도 빼곡하다.이설 기자 snow@donga.com}

이번 여행의 핵심은 ‘직관’(직접관람)이다. 백제를 대표하는 미소, 천하의 명당, 한국의 대표 사찰…. 한 번쯤 눈으로 만나야 할 명소들이 일정표에 빼곡하다. 서울 남부터미널에서 두 시간을 달려 도착한 충남 서산 운산정류소. 택시로 10분을 더 달려 마애여래삼존상(磨崖如來三尊像) 입구에 닿았다. 저 멀리 크게 팔을 흔들어 환대하는 스님들이 보인다. 내포문화사업단 공동대표 정범 스님과 미황사 주지 금강 스님이다. 합장을 나눈 뒤 짧은 계단을 오르자 목탁 소리가 산세를 울렸다. 가까이 가야산이 병풍을 둘러 아래위로 초록빛이 펼쳐진다. 유배지에 불시착한 듯 비현실적인 풍경 사이로 ‘백제의 미소’가 슬쩍 모습을 드러낸다. 온화함과 엄숙함, 푸근함과 날카로움을 동시에 품은 얼굴이다. “바위가 우산처럼 드리워져 비는 들이치지 않고 수분을 천천히 머금었어요. 자연의 과학 덕분에 1000 년 넘게 원형이 그대로 보존됐죠.” 문화해설사의 설명이다. 삼존상은 아침엔 햇살이 드리워 은은하고, 정오엔 음영이 두드러져 입체적이며, 저녁엔 그늘이 져 근엄하다. 각기 다른 시간에 여러 차례 다녀간 방문객이 불상이 훼손된 줄 알고 관리자에게 호통을 쳤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다시 계단을 내려와 서산 보원사지(普願寺址)로 발걸음을 돌린다. 4대강 사업으로 깔린 눈부시게 하얀 인공바위가 눈에 거슬린다. ‘가든’이란 이름이 붙은 숙박업소 겸 식당과 논밭을 지나 20분쯤 걷자 탁 트인 벌판과 맞닥뜨린다. 10만2886m²(약 3만1100평)에 이르는 보원사지다. 절터 귀퉁이에 흙빛을 머금은 석돌 수백 개가 가지런히 누워 있다. 한때 위풍당당하게 사찰을 지탱했을 유적들이다. 정확한 창건 연대는 밝혀지지 않았으나 통일신라·고려시대에 꽤 번성했던 절로 짐작된다. 대웅전의 철조여래좌상은 현수막에 박제된 신세로 손님을 맞고 있다. 현재 좌상은 서울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돼 있다. 덤불이 성성한 이곳은 한때 사람과 물자가 빈번히 드나들었다. 바다에서 이어진 강줄기는 가야산 곳곳을 파고들었고, 10여 개 마을이 군락을 이뤄 내포지구를 형성했다. “백제, 통일신라, 고려시대에 보부상들이 다니던 길입니다. 중국에서 내륙으로 가려면 이곳 내포를 거쳐야 했죠.” 정범 스님의 설명이다. 절터 입구의 당간지주에서 오르막을 따라 걷다 보면 숲으로 통하는 오솔길이 나온다. 길은 평탄하지만 산세는 보물급이다. 덕분에 절경을 감상하면서 난도가 낮은 트레킹을 할 수 있다. 발 아래로 계곡과 실개천이 드문드문 흐른다. 30여 분 이어진 길 끝자락에 천주교 성지가 있다. 과거 천주교 사제들이 바닷길을 따라 이곳에 다수 정착했고, 박해 때마다 지역 신자들이 큰 희생을 치렀다고 한다. 불교와 천주교 양측에 의미가 깊은 장소인 셈이다. 야트막한 오르막 내리막이 반복되는 언덕 중간쯤에서 만난 고즈넉한 정자. 주먹밥으로 요기를 한 뒤 다시 채비에 나선다. 그늘을 치고 앉을 공간이 중간중간 선물처럼 등장해 간단한 먹을거리를 챙겨 가면 좋다. 다음 행선지는 예산 가야사지(伽倻寺址). 영화 ‘명당’에서 하늘이 내린 명당으로 묘사된 그곳이다. 1시간 정도 느긋하게 걷다 보니 남다른 지기의 풍경이 모습을 드러낸다. 적당한 높이의 산으로 둘러싸인 반듯한 평지. 그 한가운데에 거북이 등딱지처럼 솟은 잘생긴 언덕이 자리한다. 그 위로 흥선대원군의 부친인 남연군 묘(南延君 墓)가 자리하고 있다. “최근까지 묏자리를 몰래 파는 사람이 많아요.” 지나가는 어르신이 한마디 던진다. ‘불법 묘지 금지’라는 현수막이 괜히 붙은 게 아니었다. 언덕을 바라보는 벤치에 오래 앉아 볕을 쪼이러 다시 오리라, 한참 다짐하고선 발걸음을 돌린다. 어느덧 땅거미가 깔려 어둑하고 쌀쌀하다. 수덕사(修德寺)는 백제 위덕왕 재위(554∼598년) 시 창건된 것으로 추정된다. 별미라는 뻥튀기 과자를 한 봉지 사들고 입구에 들어서자 수덕여관이 손을 맞는다. 고 이응노 화백과 얽힌 사적지로, 충남도 기념물 103호다. 이 화백과 화가 나혜석, 일엽 스님 등 시대를 앞서간 예인의 사연이 깃든 곳이다. 수덕사는 천천히 돌아보면 1시간도 부족하다. 다양한 조형물이 많아 지루할 틈이 없다. 웅장한 사찰 구석구석을 둘러 대웅전을 만났다. 화려하게 새 옷을 덧입은 다른 건물들과 달리 소담하고 예스러운 모습이 고스란히 남았다. 하얗게 머리가 센 노인처럼 나무속이 훤히 들여다보인다. “오랜 세월 수많은 마음이 모아둔 간절한 기도가 산이 되고 나무로 꽃으로 피었네요.” 누군가가 가만히 말했다. 그림 같은 수덕사를 뒤로하고 찬찬히 터미널로 발걸음을 돌린다. 직관 한 번으로는 부족한 여정이다.▼여행 정보▼추천 코스 오전 8시 서울 출발∼오전 10시 충남 서산 도착. 서산 마애여래삼존상∼보원사지∼가야사지(남연군 묘)∼수덕사를 거쳐 저녁에 서울로 돌아오는 일정. 가는 법 △지하철 3호선 남부터미널에서 서산태안행 버스를 타고 운산정류소에서 하차. 1시간 20분 소요. 7600원. 운산정류소에서 용현계곡행 시내버스로 보원사지 하차. 20분 소요. 1200원. 택시로는 10∼15분 소요. 8000원.주변 맛집 △용현집: 민물고기 미꾸라지 등을 갈아 넣어 만든 어죽이 일품이다. 운산면 용현리 5-3 △길따라 인연따라: 운치 있고 인심 넉넉한 찻집. 금∼일요일에만 문을 연다. 천년고수 보이차 1인분 2만 원. 덕산면 상가2길 9-15 여행 팁 △관리사무소에 미리 신청하면 마애여래 삼존상에 대한 해설을 들을 수 있다.감성+ △책: ‘길 없는 길’(최인호). 수덕사를 배경으로 경허와 만공 스님의 생애를 다룬 소설(동아일보 문화부 추천). △영화: ‘명당’(감독 박희곤). 흥선대원군이 아버지인 남연군의 묘를 가야사지의 명당으로 이장한 역사적 사실에 상상력을 덧입혔다(동아일보 문화부 추천). 서산=이설 기자 snow@donga.com사진 이훈구 기자 ufo@donga.com}

《“이번 소설에서는 아무도 죽지 않아요.” 자신의 아이를 살해한 학생에게 복수하는 교사(‘고백’), 고급 주택가를 배경으로 벌어진 가족 살인(‘야행관람차’)…. 일본 소설가 미나토 가나에(湊かなえ·46)의 책을 읽다 보면 괜히 죄지은 기분이 든다. 주인공이 드러내는 질투 분노 원망 같은 어두운 감정에 붙들린 기억이 떠올라서다. 그래서일까. 그의 별명은 ‘이야마스(부정적 감정을 유발한다는 뜻)의 여왕’이다.》 하지만 2일 서울 종로구에서 만난 작가는 지난달 31일 국내에 번역·출간한 ‘여자들의 등산일기’(비채·사진)는 “여타 작품과는 결이 다르다”고 소개했다. 실제로도 이야마스와 거리가 멀다. 살인이나 복수, 속죄 대신 치유와 성장, 연대를 내세웠다. 그는 “부엌 구석이나 좁다란 복도에서 스릴러를 쓰다 보면 빛이 절실한 순간이 온다”며 “그럴 때마다 산에 오르는데, 2012년쯤 딸과 등산하면서 이 소설의 뼈대를 구상했다”고 설명했다. “당시 TV 뉴스에서 산에 오르는 젊은 여성을 뜻하는 ‘마운틴 걸’이 많아졌다고 하더군요. 한데 막상 산에 오르니 여성은 별로 없었어요. 하지만 10년 만에 마주한 산에 제 가슴은 여전히 쿵쾅댔고, 어린 딸의 발걸음은 생각보다 힘찼죠. 이런 단상들이 ‘산을 배경으로 한 여성의 성장담’으로 이어졌습니다.” 책에는 8편의 이야기가 담겼다. 뒤틀린 인간관계와 미래에 대한 불안, 사랑으로 인한 고통. 주인공들은 묵묵히 산을 오르며 외면했던 문제와 찬찬히 마주한다. 어린 딸과 로프로 몸을 묶고 산을 내려오는 장면은 작가의 경험담이다. 그는 “여성을 어리고 약하게 지칭한 ‘마운틴 걸’이라는 표현을 좋아하지 않는다. 산은 남성 이미지가 강한데, 그들이 만든 틀과 용어에 자신을 가둘 필요가 없다”고 했다. 마침 이날은 조남주 작가의 ‘82년생 김지영’ 일본어판이 인쇄 부수 13만 부를 돌파했다는 소식이 들렸다. “일본에서 큰 화제를 몰고 온 작품이죠. 아쉽게도 아직 읽지는 못했습니다. 일본도 인터넷을 중심으로 개인이 느낀 문제들을 공유하고 연대하는 움직임이 생겼지만, 아직 하나의 큰 흐름으로 이어지진 못했죠. 책이라는 도구로 마음을 잇는 한국의 문화가 정말 멋지다고 생각합니다.” ‘여자들의…’에는 일본의 명산 8곳이 배경으로 등장한다. 묘코산, 히우치산, 리시리산, 긴토키산 등이다. 모두 작가가 직접 다녀왔다. 그는 비교적 늦은 나이인 서른 살에 데뷔했다. 2008년 내놓은 데뷔작 ‘고백’(2009년 국내 출간)은 일본 열도를 뒤흔들 만큼 돌풍을 일으켰다. 허를 찌르는 서사와 인간관계의 균열을 집요하게 파고드는 심리 스릴러가 전매특허. 그는 “작품을 쓸 때 내면의 나쁜 것들을 확장해 불러낸다”며 “자신의 어두운 면을 인정하고 직시해야 그것을 다스릴 수 있다”고 했다. “인간의 심연을 세밀하게 묘파한 미우라 아야코(三浦綾子)의 ‘빙점’이 인생 책이에요. 애거사 크리스티의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는 미스터리의 문을 열어준 작품이죠. 대다수가 모른 척하는 민감한 사회 문제를 들여다보고 싶습니다.”이설 기자 snow@donga.com}

1986년 출간된 ‘이탈리아 르네상스 미술가전’(3권·탐구당)이 30여 년 만에 전권 복간됐다. 한길사는 서울 서대문구의 한 복합문화공간에서 1일 기자간담회를 열고 “번역을 수정·보완하고 해설과 도판을 더해 ‘르네상스 미술가 평전’(6권·세트 27만 원)을 새로 펴냈다”며 “작가의 해설까지 덧붙여 완역한 것은 세계적으로 처음”이라고 했다. 프랑스어판은 작가의 해설을 담았지만 완간되지는 않았다. 이 책은 이탈리아 미술가·건축가로 활동한 조르조 바사리(1511∼1574)가 1200∼1500년에 활동한 화가 건축가 조각가의 생애와 작업을 망라했다. 조반니 치마부에, 조토 디 본도네, 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켈란젤로 등 당대를 대표하는 예술가들의 작품세계를 깊이 파고든 노작이다. 1550년 초판을 냈고 18년 뒤 개정 증보판이 나왔다. 해설을 맡은 고종희 한양여대 산업디자인과 교수는 “바사리는 화가이자 건축가로도 유능했지만 이 평전으로 미술 비평사에 한 획을 그었다”며 “바사리 덕분에 서양미술사에서 르네상스 시대가 유독 풍부하게 다뤄지고 있다”고 했다. 그는 또 “바사리는 이탈리아 곳곳의 예술품을 눈으로 확인하고 당대의 정치·경제사를 참조해 평전을 완성했다”며 “미술사뿐 아니라 정치·경제·인문서로서도 가치가 높다”고 설명했다. 매너리즘, 드로잉, 르네상스 같은 용어도 이 책에서 처음 언급됐다. 미술 애호가였던 이근배 전 조선대 의대 교수(1914∼2007)는 미국 하버드대 도서관에서 이 책을 발견해 18년간 번역에 매달렸다. 김언호 한길사 대표는 “저본이 된 미국판 평전도 당시 절판된 탓에 사서에게 개인적으로 복사본을 얻어 힘들게 번역한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이설 기자 snow@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