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구

이진구 기자

동아일보 문화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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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부터 ‘이진구 기자의 대화’를 연재하고 있습니다. 딱딱하고 가식적인 형식보다 친구와 카페에서 수다 떠는 듯한 편안한 인터뷰를 지향하고 있습니다.

sys1201@donga.com

취재분야

2024-05-19~2024-0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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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진구 기자의 對話]“‘3가지 요리로 튀지 않게’가 IOC 주문이었죠”

    《 평창 겨울올림픽 개막 전날인 8일 저녁, 강원 평창 켄싱턴호텔에서 토마스 바흐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장이 주최한 만찬(IOC President‘s Dinner)이 열렸다. 이 만찬은 오랜 기간 올림픽을 준비하는 데 도움을 준 귀빈들과 IOC 위원들에게 감사를 표하고, 이제 본격적인 올림픽 기간에 들어가는 것을 축하하는 자리.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 자크 로게 전 IOC 위원장, 한정 중국 공산당 중앙정치국 상무위원 및 각국 대통령과 왕세자, 공주, 우리나라에서는 이낙연 국무총리와 전 리듬체조 선수 손연재, 그리고 대기업 총수 등 400여 명이 참석했다. 하지만 IOC가 호텔 측조차 음식 사진을 찍어 놓지 못하게 할 정도로 보안을 요구해 그다지 많이 알려지지는 않았다. 지구촌 최대 스포츠 축제를 기념해 정상급 귀빈들에게 제공된 만찬은 어땠을까? 맛은? 이 호텔 김규훈 총주방장(43)은 “4년에 두 번(여름, 겨울올림픽)밖에 없는 만찬이라 대단히 호화로울 것 같지만 (음식 구성을) 지극히 무난하게 해 달라는 것이 IOC 주문이었다”고 말했다. 》  ―IOC가 레시피를 6번이나 수정할 정도로 신경을 썼다고 하는데…. “스타터(starter·전채 요리)로 ‘훈제 송어와 연어’, 메인은 ‘대관령한우 스테이크’, 후식 등 3코스를 준비했죠. 식사 전 서서 담소를 나누는 시간에 먹을 카나페(canape·한입에 먹을 수 있게 만든 작은 요리)를 6종 준비했고요. 원래 스테이크 옆에 으깬 단호박 버무린 것을 준비했는데 만찬 이틀 전에 수정을 요구해 구운 통감자로 바꿨습니다. 송어 위에도 처음에는 새싹 같은 것을 올렸는데 허브를 추가해달라고 하더라고요.” ―단호박은 한국적인 느낌도 있어 괜찮을 듯한데 왜 바꿔달라고 하던가요. “외국분들에게는 아무래도 익숙하지 않아서 그런 것 같아요. 혹시라도 거부감을 느끼는 귀빈이 있으면 곤란하니까요. 그래서 전체적으로 너무 튀거나 호불호가 갈리는 음식은 지양하고 무난한 콘셉트로 메뉴를 짰습니다. 감자야 전 세계적으로 누구나 먹는 음식이니까…. 김치도 내지 않았거든요.” ―김치도 없었다고요? “아주 한국적이고 특별한 음식을 요구할 것 같지만 사실 IOC 요구는 ‘세계 각국에서 워낙 많은 사람이 모이다 보니 누구나 거부감 없이 무난하게 먹을 수 있게 해 달라’는 것이었어요. ‘그냥 평범하게 만들어 달라’는 것이죠. 사람마다 기호가 갈릴 수 있는 음식은 선호하지 않더라고요. 고기 굽기도 미디엄 레어로 거의 통일할 정도였죠. 그래서 만찬 전 6, 7일 열린 132차 IOC 총회 오찬도 뷔페로 저희가 준비했는데, 김치를 백김치만 올렸어요. 자극적인 것은 빼달라고 하더라고요. 만찬 메뉴도 아마 다른 요리사들이 봤다면 ‘이게 만찬에 나간 음식이야? 너무 뻔한 거 아냐?’라고 했을 거예요. (홍어를 냈으면 큰일 날 뻔했겠네요?) 하하하, 제 애가 아직 어려요.” ―만찬은 메뉴가 정해져 알 수 없었을 테고, 오찬 뷔페에서는 어떤 음식이 가장 인기가 많던가요. “음…, 저희가 그릇 나가는 걸 보는데 잡채를 그렇게 많이 드시더라고요. 잡채가 건강식이기도 하잖아요. 채소도 많고…, 그래서인 것 같기도 하고…. 무난하게 간장으로 맛을 낸 요리를 좋아하시는 경향이 있었어요. 갈비도 그렇고….” ―송어와 대관령한우를 선택한 이유가…. “송어가 제철인 데다 이 지역에서 최초로 양식에 성공해서 양식장이 이쪽에 있어요. 진부에서 송어 축제도 하고요. 연어 위에 송어를 올렸는데 둘 다 기름기가 많아 송어는 훈제로 만들었죠. 대관령한우도 이 지역 브랜드인 데다 우리 호텔도 평창에 있어서 지역에 뭔가 기여해야겠다는 생각도 했고…. (바로 옆 횡성 한우도 유명한데 혹시 두 한우의 맛 차이를 구별할 수 있나요?) 아∼, 제가 구별할 수 있다고 하면… 그건 너무 오버하는 것 같아요. 하하하. 수입육과 한우는 차이를 느끼지만, 같은 한우를 놓고 지역별로 구별하는 정도까지는 아직…. 맛이란 게 재료 차이도 있지만 다른 요소도 많이 작용하잖아요. 여자친구랑 먹으면 더 맛있을 테고…. (쇠도 맛있죠). 회식이면 뭘 먹어도 좀 그럴 테고….” (인터뷰가 끝난 뒤 당시 만찬에 나왔던 메뉴를 먹어볼 수 있었다. 대관령한우 스테이크는 안심 130∼140g과 볼살 60∼70g으로 이뤄졌다. 안심은 올리브유, 허브 등을 넣고 재운 후 저온 조리했고, 볼살은 육수에 넣고 끓인 뒤 오븐에 넣어 4시간 정도 졸였다고 한다. 김 총주방장은 “볼살은 원래 좀 질기지만 푹 끓이면 굉장히 부드러워진다. 그래서 스튜(stew)로 많이 먹는다”고 말했다. 맛은? 음식 전문가는 아니지만 먹어본 소감을 아주 솔직히 말한다면, 설명대로 너무도 무난한 맛. 그의 동의를 얻어 표현하자면 누구나 스테이크 하면 딱 떠오르는 그런 맛이었다.) ―맛은 그렇다 치고, 정상급 만찬이 3코스면 너무 간소한 것 같은데요. “국내 특1급 호텔 결혼식 식사가 더 잘 나오죠. 5코스, 7코스도 있으니까요. 2010년 서울에서 열린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 국빈 만찬 때 스태프로 일했는데 그때도 보면 식사가 아주 심플해요. 이런 귀빈들은 만찬 이후에도 계속 일정이 있으니까 식사 시간을 아주 길게 하기가 힘들어요. 그래서 코스를 많이 넣지 않고 처음부터 3코스로 준비해달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기교도 부리지 않았어요.” ―기교를 부리지 않았다는 게 무슨 뜻인가요. “똑같은 음식도 요리사에 따라 스테이크를 잘라 탑을 쌓는다든지, 고기 옆에 놓는 부재료에 모양을 내는 식으로 플레이팅(음식을 접시에 담을 때 모양을 내는 것)을 할 수 있어요. 그런데 하지 않았죠. 수백 명이 참석하는 이런 귀빈들의 대형 연회에서는 아무래도 긴장이 되기 때문에 서빙을 하다가 실수가 나올 수 있어요. 그때 음식 모양이 흐트러지면 안 되니까요. 그래서 음식에 모양을 내지 않고 최대한 심플하게 만든 거죠.” ―셰프도 장인인데, 고심 끝에 짠 레시피를 이래라저래라 하는 게 기분 나쁘지는 않던가요. “만약 제가 초청해 나만의 요리를 대접하는 자리라면 그랬겠지요. 하지만 이 만찬은 국제적인 행사이고, 바흐 위원장이 각국 귀빈들을 초청한 자리니까 전적으로 IOC가 원하는 맛에 맞춰줘야죠.” ―바흐 위원장 정도면 세계 각국의 진미는 다 먹어봤을 것 같은데 입맛이 까다롭지는 않던가요. “유심히 봤는데 그렇지는 않았어요. 단지 좀 딱딱한 빵을 좋아하더라고요. 우리는 별로 구별을 하지 않지만 외국인들은 식사 때마다 먹는 빵이 조금씩 달라요. 아침은 크루아상, 대니시, 버터롤 같은 부드러운 것을, 점심이나 저녁은 바게트 같은 좀 딱딱한 것을 먹어요. 총회 오찬에서 제공된 바게트가 있는데 ‘이것보다 좀 더 딱딱한 것이 있느냐’고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준비된 빵을 갖다드렸죠.” ―만찬 참석자 중에 무슬림과 채식주의자도 있었다고 하던데요. “각각 30명 정도였는데 이분들을 위한 메뉴는 따로 준비해달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무슬림을 위해서는 할랄 푸드를, 채식주의자들을 위해서는 비트루트(beetroot·빨간 무라고 불리는 채소)를 조려서 메인 요리로 제공했죠.” ―자기만의 음식이나 맛을 요구하는 사람은 없었나요. “특별히 개인적인 요구를 한 사람은 없었어요. 단지 외국인들 중에는 해산물 알레르기가 있는 분들이 있다고 해요. 특히 새우나 랍스터 같은 갑각류에…. IOC에서 그렇게 말하더라고요. 그래서 뷔페 오찬에서 아예 새우나 갑각류는 뺐어요. 여기 오대산 쪽이 나물이 유명하거든요. 산채 비빔밥도 좋고…. 그래서 처음 만찬 메뉴를 구상할 때 나물을 이용한 뭔가도 생각을 했는데 그쪽에서 안 맞을 것 같다고 하더라고요. (그들이 나물 맛을 알기는 할까요?) 잘 모르겠죠?” ―만찬이 끝날 때까지 가장 신경 쓰인 점은…. “맛은 당연히 좋아야 하는 것이고, 별다른 불만이 나오지 않도록 하는 거죠. 귀빈들이 갈 때 ‘생큐’ 한마디만 해주면 더할 나위 없고요. (쉽게 말해 접대받는 자리인데 불만을 제기하는 사람도 있나요?) 거의 없죠. 그런데 간혹 한두 명 ‘좀 짰다’ 이런 말을 하시는 분도 있어요. 다 만족시키는 게 맞기는 한데 입맛 차이가 또 있으니까…. 그런 경우마저 없으면 완벽한 거죠. (이번에는?) IOC에도 식음료 파트가 있어 평가하는데 거기 계신 분들이 ‘좋았다. 다 만족하고 갔다’고 하더라고요.” ―호텔로서는 굉장히 기념할 만한 행사인데 만찬 음식 사진이 없습니다.(호텔 측은 만찬 당일 제공된 메뉴 사진을 갖고 있지 않았다. 지면에 실린 사진은 인터뷰를 위해 재현한 것이다.) “거의 막판까지 메뉴 수정이 이뤄진 데다 IOC에서 행사 전까지 비공개를 원하더라고요. 보안도 세서 만찬이 열린 홀에는 저도 들어가지 못했어요. 비표를 받은 서빙 직원들만 들어갈 수 있었죠.” ―요새 TV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직종이 셰프인데 거의 못 봤습니다. “제가 뭐 벌써…, 방송국에서 전화 받은 적은 없어요. 하하하. 아직 더 배워야 할 나이이기도 하고요.” 이진구 기자 sys1201@donga.com}

    • 2018-0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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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함제도 신부 “北주민 의료-나라걱정 많으셨던 추기경님 그리워요”

    “음…, 뭐랄까…. 아주 많이 그리운 분이죠. 9주기라니 벌써 세월이 그렇게 지났네요.” 16일은 고 김수환 추기경이 선종(善終)한 지 9주기 되는 날. 7일 서울 광진구 중곡동 메리놀외방전교회에서 만난 함제도(제라드 E 해먼드·84·사진) 신부는 김 추기경을 그리며 이렇게 말했다. 메리놀외방전교회는 1911년 아시아 지역의 선교를 목적으로 만들어진 미국 최초의 가톨릭 외방전교회. 함 신부는 1960년 사제품을 받은 뒤 한국으로 건너와 지금까지 선교 및 북한 주민을 위한 의료 및 의약품 지원 사업 등을 펼치고 있다. 김 추기경과는 1968년 국내 한 강연에서 처음 만난 이후 약 40년간 오랜 인연을 이어왔다. ―오래전입니다만 처음 추기경을 만났을 때 느낌이 어떠셨는지요. “뭐랄까…, 아주 편안하고 푸근한 그런 느낌이었어요. 인상도 좋으시고…. 분명히 처음 뵈었는데 처음 본 것 같지 않은 느낌? 그때가 1968년인데 추기경 되시기 한 해 전이었죠. 서울대주교이실 때 한 강연에서 뵈었는데 그때는 그냥 인사만 드렸지요. 그게 시작이었죠.” (김 추기경은 1969년 4월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추기경에 서임됐다.) ―메리놀전교회와 함 신부님이 북한 주민을 위한 사업을 많이 하는데 추기경께서도 관심이 많았다고 들었습니다. “1989년인가 제가 메리놀전교회 한국지부장일 때였는데, 추기경님을 찾아뵙고 ‘얼마 있다가 북한에 갈 것 같다’고 말씀드렸죠. 추기경께서 북한 주민들에게 관심이 아주 많으셨어요. 당신께서도 굉장히 가고 싶어 하셨고, 제가 그 말씀을 드렸더니 ‘메리놀전교회가 할 일’이라고 하시면서 아주 기뻐하셨어요. 그 뒤로도 몇 번 뵐 때마다 북한 얘기를 했는데 1995년 진짜 북한에 가게 됐을 때 인사를 드리러 갔죠. 그랬더니 ‘진짜 가느냐?’면서 당신 방으로 들어갔다 나오시더니 ‘차비나 하라’고 하시면서 봉투를 주시는 거예요. 돌아와서 열어보고 깜짝 놀랐어요. 5000달러나 됐거든요. 1995년에 5000달러면 엄청나게 큰돈이에요.” ―평소에 그렇게 큰돈을 갖고 계시진 않았을 것 같은데 어떻게 된 일인가요. “추기경께서 평상시 그렇게 큰돈을 갖고 계실 리가 없잖아요. 그것도 달러로…. 여쭤 보지는 않았어요. 하지만 몇 년 전부터 저희 전교회와 제가 북한 주민을 위한 의료사업에 관심이 많아 사업을 추진하고 있었고, 그걸 아시니까 아마도 미리미리 조금씩 준비해두신 것 아닌가 싶어요. 실제로 북한에 갈 때가 오면 보태주시려고요. 마음 씀씀이가 그런 분이셨어요.” (천주교 서울대교구장은 평양교구장 서리를 겸임한다. 김 추기경은 1975년부터 겸임을 했고 정진석 추기경도 1998년부터 평양교구 교구장 서리를 맡고 있다. 이 때문에 김 추기경에게 평양은 자신의 사목 구역이기도 했다. 함 신부는 2007년부터 평양교구장 고문을 맡고 있다.) ―추기경께서 북한에 많이 가보고 싶어 하셨다는데요. “네, 맞아요. 정말 가보고 싶어 하셨어요. ‘나도 기회가 있으면 가고 싶다’는 말씀도 하시고. 실제로 방북 신청도 하신 걸로 알아요. 그런데 제가 알기로 북한이 돈을 요구해서…. 아마 10만 달러쯤 된 것 같아요. 그리고 북한에 이용당할 수 있다는 우려도 있었고요. 북한은 종교의 자유가 없잖아요? 그런데 추기경께서 가시면 북한 체제 선전에 이용당할 수 있다는 우려도 있었던 것으로 알아요. 결국 못 가셨는데 굉장히 아쉬워하셨어요. 그래서 오히려 저희들이 북한 의료지원 사업을 하는 것을 많이 지지하고 지원해주신 것 같아요. 제가 북한을 50번 넘게 다녀왔는데 늘 가기 전, 다녀온 후에 꼭 찾아뵙고 북한 상황과 지원 활동을 말씀드렸어요. 그때마다 그렇게 좋아하셨죠.” ―사무실에 추기경 사진이 많습니다. “제가 가져다 놓았어요. 늘 생각하고 기억하기 위해서…. 제일 사랑하는 분인데…. 물론 정진석, 염수정 추기경님 사진도 있지요. 김 추기경께서 늘 당신을 ‘바보’라고 하신 게 기억이 나요. 스스로를 가장 낮게 낮추신 거죠. 그리고 늘 ‘내가 잘못했다’고 하셨어요. 추기경께서는 늘 누구와도 함께하려고 하셨어요. 무척 바쁘실 텐데도 늘 찾아뵈면 ‘좀 더 있다 가라, 여기 앉아라’ 하시면서 얘기하려고 하셨고요. 그리고 ‘우리’ ‘함께’라는 말을 늘 기억하라고 하셨어요. 가장 아름다운 말이라고…. 우리 아버지, 우리나라, 우리 부모님, 우리 민족, 우리 신부님 등등….” ―추기경께서 군부독재 정권에 저항을 많이 하셨는데, 혹시 박정희 전두환 전 대통령을 비난하신 적은 없으신가요. “추기경께서는 사람을 미워하지 않으셨어요. 군사정권 시절에 민주화운동 하는 분들을 많이 돕고 군부정권에 쓴소리도 많이 했지만 사람이 미워서 그런 것은 아니었거든요. 그래서 박정희 전 대통령 장례식에도 가셔서 직접 이름을 불러주신 것이고요. 자비하신 마음으로 간 것이겠죠. 그게 추기경의 마음이에요.” ―추기경께서 서울대교구장으로 임명되셨을 당시만 해도 대단히 보수적이라 내부 반발도 있었다던데요. “서울 사람이 아니니까…. 그때는 아주 옛날이라 그런 생각들이 좀 있었던 것 같아요. 추기경께서 부임하셨을 때 참석해서 인사만 하고 다 나가 버렸으니까요. 그래서 추기경께서 오히려 젊은 사람들과 더 가깝게 지내신 것 같아요.” (김 추기경은 회고록에서 서울대교구장 부임 이후 10년에 대해 ‘가장 가슴 아팠던 것은 원로 신부님들이 교회 민주화운동을 이해해주지 않고 다른 목소리를 내신 것이다. 그분들 중에는 개인적으로 가까운 데다 때로는 형님 같은 신부님도 계셨다’고 회고한 바 있다.) ―추기경께서 많이 힘들어하신 것을 본 적이 있으신가요. “나라 걱정을 하시느라 많이 힘들어 하셨어요. (박정희 전두환 전 대통령 시절인가요?) 네. 입으로 말씀하시진 않았지만 손을 잡으면 느낄 수 있었어요. 추기경은 남의 이름을 입 밖에 내시면서 비난하고 그러는 분이 아니에요. 당연히 정치 얘기도 직접 하시진 않았어요. 하지만 느낄 수 있었어요. 민주화운동 하며 학생들 지켜주시면서…. 굉장히 염려를 많이 하셨어요.” ―우리는 ‘서로 사랑하라’는 추기경 말씀을 많이 잊고 사는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이제 시간이 많이 지났으니까…. 정말로 추기경님을 생각한다면 사람들이 다양한 곳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희생하고, 봉사하고, 서로 관심을 갖고 배려해야지요. 나만 생각하는 것은 추기경님의 정신이 절대 아니에요. 추기경께서는 평생 하나 됨을 위해 기도하셨어요. 남과 북, 가난한 자와 부자, 종교와 지역 등등 어떤 것이든 나뉘고 싸우는 것을 싫어하시고 일치해야 한다고 하셨어요.” ―신부님께서 처음 사제품을 받고 한국행을 결심하신 이유가 있으신지요. “제가 미국에서 1947년 메리놀 소신학교에 들어갔는데 그때 동창으로 장면 박사의 아들인 장익 주교가 같이 있었어요. 같은 고등학교에 같은 대학을 다녔지요. 그분에게 한국에 대해 많이 들었고 그게 인연이 된 것 같아요. 우리 메리놀회 회원 중에 한국에 온 분이 많은데 저도 부제품을 받을 때 한국에 가고 싶다고 지원했어요. 그래서 26세 때인 1960년 한국에 왔어요.” (김수환 추기경이 일제강점기 동성상업학교 소신학교 졸업반 때 일화다. 수신(修身) 과목 시험에서 ‘조선 반도의 청소년 학도에게 보내는 일본 천황의 칙유를 받은 황국신민으로서 그 소감을 쓰라’란 문제가 나왔을 때 김 추기경은 ‘나는 황국신민이 아님. 따라서 소감이 없음’이라고 적어 냈다고 한다. 이 때문에 교장에게 뺨을 맞았는데, 이 교장은 추후 김 추기경이 대구교구 장학생으로 일본 유학을 떠날 수 있게 추천해줬다. 이 교장이 바로 장면 박사였다고 한다. 김 추기경을 보호하기 위해 뺨을 때리는 모습을 연출했던 것이다. 장면 박사의 누이인 장정온 수녀도 메리놀회 수녀였다.) ―처음 한국에 오셨을 때 문화가 달라 적응하기 힘든 것은 없으셨나요. “크게 힘든 것은 없었지만 큰 실수를 한 적은 있죠. 충북 청주에 있을 때였는데 어느 시골집을 밤에 방문했는데 소변이 마려운 거예요. 그래서 밖에 나갔는데 큰 항아리가 여러 개 줄지어 있더라고요. 나중에야 그게 장독대고, 안에 있던 것이 된장이란 걸 알았지만 그때는 처음이라 ‘아, 한국 사람들은 사람 크기대로 용변기를 마련해 놓고 볼일을 보는구나’ 하고 생각했죠. 된장 냄새도 처음 맡아보는 거고, 그게 꼭 ‘큰 것’ 같잖아요? 하하하. 미국은 한 군데서 다 해결하는데 한국은 애 어른은 물론이고, 각자 신체 크기별로 용변기가 다르니 와∼ 엄청 위생적이고 문화적인 나라라고 생각했죠.” ―오랜 시간 한국에 계셨는데 정치 문제에는 개입하지 않는 이유가 있으신지요. “하하하. 아무래도 외국인이니까요. 사람들은 다 자기 생각이 있어요. 그래서 이래라저래라 하고 가르치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정치도 개인적인 생각은 있겠지만 신도들에게 말하면 안 돼요. (한국 교회에서는 누구 찍으라는 말도 공공연히 하는데요.) 다들 자기 생각이 있는데…. 좀 신도들을 무시하는 것 같아요. 그러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평창 겨울올림픽에 북한이 참가하는데, 감회가 새로우시겠습니다. “제가 북한 갈 때마다 세 가지 얘기를 합니다. 전쟁 없이 평화롭게 지내야 한다, 민족끼리 화해해야 한다, 서로 대화해야 한다는 것이죠. 전쟁이 나면 얼마나 많이 죽겠어요. 서울에만 1000만 명이 사는데…. 제가 여권이 두 개 있어요. 일반용하고 북한 가기 위해 따로 받는 것하고요. 갈 때마다 정부에 따로 신청해야 해요.” ―우리나라 정부에 신청하는 건가요. “아니요. 미국 정부에요. 이번 5월에 가는 것 때문에 신청은 했는데 아직 답이 안 오고 있어요. 전에는 이런 일이 없었어요. 신청하면 바로 나왔지요. (ㅋㅋㅋ 트럼프 대통령이 안 내주는 건가요?) 하하하하. 지금이야 하는 말이지만 나는 지난번 미국 대선 때는 투표 안 했어요. 원래 매번 부재자 투표를 했는데 지난 미국 대선은…, 에휴∼ 말을 말아야지….” ―미국 생각은 안 나시는지요. “나는 이제 미국에 친구도 없어요. 동생 둘이 있기는 하지만…. 내 친구는 여기 있어요. 미국에 가면 진짜 외롭죠. 묏자리도 이미 청주에 다 봐뒀어요. 하하하.”  ▼3월 金추기경 생가 경북 군위에 ‘사랑과 나눔 공원’ 개장▼11일 용인서 선종 9주기 추모미사고 김수환 추기경 선종 9주기를 맞아 이르면 다음 달에 추기경의 생가가 있는 경북 군위군 용대리 일대에 ‘김수환 추기경 사랑과 나눔 공원’이 개장한다. 약 3만2000m²의 부지에 들어서는 추기경 기념공원에는 추기경이 어린 시절 살던 옛집, 추모전시관, 추모정원, 십자가의 길, 평화의 숲, 잔디광장 등이 조성됐다. 또 생가에 딸린 우물과 옹기를 굽던 옹기굴도 복원됐다. 1922년 대구에서 태어난 김 추기경은 네 살 때 군위군으로 이사해 군위보통학교를 다니며 지금의 대구가톨릭대 전신인 성유스티노신학교에 입학할 때까지 약 8년간 이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군위군은 121억 원을 들여 2015년 5월 공원과 청소년수련원 공사를 시작했으며 당초 선종 9주기인 16일 개장을 목표로 했으나 다소 지연된 상태다. 한편 선종 9주기 추모미사는 11일 오후 2시 경기 천주교 용인공원묘원 내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 경당에서 진행된다. 올해 추모미사는 설 연휴와 겹쳐 11일로 앞당겨졌다. 미사는 김 추기경의 사랑과 나눔 정신을 잇기 위해 설립된 재단법인 ‘바보의 나눔’이 주최하며, 재단 이사장인 손희송 서울대교구 총대리 주교의 주례로 봉헌된다. 미사에는 누구나 참석할 수 있다. 이진구 기자 sys1201@donga.com}

    • 2018-0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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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진구 기자의 對話]♬ 평창 겨울올림픽 대∼박! 나∼소∼

    Andante religioso 바람이 차다. 늘 하는 연습이지만 할 때마다 새로운 것은 왜일까. 처음 첼로를 잡은 것이 엊그제 같은데, 주마등처럼 지나간 시간들…. 어떻게 마무리를 해야 하나 하는 고민도 조금씩 든다. 활을 든다. 생각은 조금 있다가…. 반주처럼 밀려오는 파도 소리. 그 위를 청아하게 나는 한 대의 비올론첼로(violoncello). 마스네(Massnet)의 오페라 ‘타이스(Thais)’ 중 명상곡(Meditation)이다.―최근 2018평창겨울음악제 홍보를 위해 기자회견을 열었는데, 본의 아니게 평창대관령음악제 예술감독 사임이 더 뉴스가 됐습니다. “오∼ 그렇게 됐죠. 어쩌다가 그날 이번 겨울음악제를 끝으로 2010년부터 맡아온 대관령음악제 예술감독을 그만둔다는 얘길 처음 했는데…. 그게 더 뉴스가 됐나 봐요. 거의 대부분의 기사가 겨울음악제가 아니라 ‘정명화·정경화 평창음악제 예술감독 7년 만에 사임’으로 나가더라고요. 하하하.” ―평창겨울올림픽은 많이 아는데 평창겨울음악제는 잘 안 알려진 것 같습니다. “그럴 거예요. 평창대관령음악제는 잘 아시죠? 작년까지 14회가 열렸는데, 그 대관령음악제가 사실은 평창겨울올림픽 유치를 위해 시작된 것이었죠. 겨울음악제는 평창겨울올림픽을 문화올림픽으로 승화시키기 위해 시작한 것이고, 이번이 3회째입니다.” ―예술감독을 맡으면서 직접 연주도 하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요. “네, 발레 ‘쉴 사이 없는 사랑’과 ‘평창 흥부가’ 두 작품에 참여하는데, 둘 다 세계 초연이죠. ‘쉴 사이 없는 사랑’은 남녀 무용수가 오페라 ‘타이스’ 중 명상곡에 맞춰 사랑을 표현하는 작품인데, 피아니스트 김태형과 제가 명상곡을 연주했어요.” ―‘평창 흥부가’는 어떤 작품인지요. “판소리 다섯마당 중 하나인 ‘흥부가’ 중 가장 유명한 ‘박 타는 대목’을 재구성한 작품인데, 명창 안숙선 소리북 조용수 피아노 김태형과 제가 함께했죠. 흥부가 박 타서 대박이 나잖아요? 평창겨울올림픽도 대박 나라는 뜻도 있고, 또 놀부의 심술을 다 용서하고 마지막에는 형제가 우애를 되찾는 흥부 이야기가 남북 간 화합이 필요한 지금 우리 상황과 잘 맞기도 하고요.” (북한이 놀부인가요?) “넹? ㅋㅋㅋㅋㅋ.” (실제로 공연 중에 안숙선 명창이 “평창올림픽 대박 나소”라고 소리하는 대목이 있다.) ―첼로로 톱질을 표현하는 부분이 눈에 띄었습니다. “평창 흥부가는 ‘흥부가 제비 다리를 고쳐주고, 그 제비가 보답으로 박씨를 물어오는 장면’, ‘흥부가 박을 타는 장면’, ‘흥부가 보물을 얻어 기뻐하는 장면’, ‘놀부가 흥부에게 심술궂게 했던 것을 후회하는 장면’, ‘흥부와 놀부가 함께 어우러져 평창겨울올림의 성공을 기원하는 장면’ 등 다섯 장면으로 구성됐습니다. 그중에 활기찬 톱질을 첼로의 글리산도, 반복되는 스타카토, 다양한 음계 진행 등으로 표현했죠. 피아노와 북이 분위기를 조였다 풀었다 하는 것을 눈여겨보면서 감상하면 더 재미있을 거예요.” ―자매라도 서로 음악관이 똑같을 수는 없을 텐데 어려움은 없었는지요.(그와 동생인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가 이번 겨울음악제의 공동예술감독이다.) “음…, 우리는 하도 어릴 적부터 함께 음악을 해서 눈만 마주치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다 알 정도로 통하는 게 있어요. 차이야 당연히 있지요. 그게 개성이기도 하고. 하지만 음악 하는 사람들은 차이를 조율해 가면서 하모니를 이루는 것이 기본이에요. 그러다 보니 콰르텟 같은 앙상블에서는 서로 눈이 맞아 커플이나 부부가 많이 생기기도 해요. 하하하.” poco a poco appassionato 조금씩 현(絃)의 떨림이 강렬해진다. 한 치를 내려갈 때마다 짙어지는 감정. 연주는 정점을 향해 간다. ―1월 30일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열린 첫날 공연이 전석 매진일 정도로 성황을 이뤘습니다. “밤 8시에 시작했는데 거의 11시에 끝나더라고요. 후반부 시작할 때는 ‘이렇게 길어지면 언제 끝나나…’ 하고 걱정도 들었죠. 그래서 끝나고 손님들에게 ‘너무 길게 해서 미안합니다’라고 했더니 다들 ‘긴 줄도 몰랐어요’라고 하더라고요.” ―대관령음악제나, 이번 음악제나 나라에서 지원하지만 그래도 운영이 쉽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 “나라도 쓸 곳이 많기는 하겠지만 국고 지원이 많으면 좋겠지요. 그래서 기업 후원을 요청하러 많이 다녔어요. 저희가 맡기 전에는 국고와 강원도 지원금으로만 운영했는데, 저희가 맡은 후로 기업 후원도 받을 수 있게 만들었거든요. 그 대신 힘들었죠. (예술 하시는 분들은 보통 돈 모으러 다니는 것을 꺼리지 않나요?) 하하하. 안 좋아하죠. 전에는 기업 찾아다니면서 후원 요청 같은 것을 해본 적이 없어요. 그래도 이런 큰 음악제를 맡으면 해야 해요. 기업 쪽에서도 다들 도와주고는 싶어 하는데 여러 군데에서 요청이 오니까 다 해줄 수 없는 걸 가장 안타까워하더라고요.” ―특별히 첼로를 좋아하시는 이유가 있나요. “누구나 자기한테 맞는 악기가 있는 것 같아요. 첼로 하기 전에 바이올린도 배워 봤는데, 영 내 목소리 같지가 않더라고요. 전 악기는 자기 목소리를 표현하는 거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런데 동생(정경화)은 오히려 바이올린이 더 인간의 목소리에 가깝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바이올린에 빠진 것 같아요. 우스운 게 우리는 피아노 앞에만 가면 졸렸거든요. 그런데 명훈이는 건반 앞에서 하모니도 만들고 이리저리 쳐보면서 몇 시간이고 앉아 있더라고요.” ―우리 음악 교육이 아이들에게 ‘음악의 기쁨’을 느끼게 해주는 데 많이 미흡한 것 같습니다. “에구∼, 음악 분야만이 아니라 어느 분야든 시험이나 정답 맞히기 식인 게 제일 큰 문제죠. 뭐든지 외우라고…. 음악이 얼마나 기쁜 것인지, 시가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지를 느끼는 게 더 중요한데…. 한번은 대학 실기시험 보러 온 학생인데 현악기 지판에 음 표시하는 줄을 살짝 그어 놓은 게 보이더라고요. 귀로 찾아야 하는데 보고 찾으니…. 대학만 들어가면 된다고 생각하는 거니까…. 시험곡 몇 개만 집중적으로 하고…. 안타깝죠.” ―그래서인지 우리는 기계처럼 정교하게 연주하는 걸 잘한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왜 음악을 듣고, 음악에서 뭐가 중요한지를 잊고 있는 것이죠. 사람인 이상 연주자도 미스터치를 해요. 물론 프로 연주자가 되면 미스터치가 티 나지 않게 하는 기술이 생기기는 하지만 기술이 더 중요하다면 컴퓨터가 가장 잘하겠죠. 해외 유명 콩쿠르에서도 음악적 표현이나 느낌, 해석이 탁월하다면 미스터치가 좀 있다고 떨어뜨리지는 않아요. 그런 면에서 음악이야말로 인공지능(AI) 시대에도 살아남을 분야가 아닌가 생각하죠.” ―실제로 연주 중에 크게 실수한 적도 있으신지요. “줄리아드음악원 졸업 때 졸업연주회를 했는데…, 바흐의 푸가였어요. 똑같은 부분이 반복되는 부분이 있는데 조금 하다가 뒷부분을 아예 건너뛰어 버렸죠. 깜빡하고 빼먹은 거죠. 속으로 ‘잉?’ 하고 어쨌든 내려왔는데, 그 곡을 모르는 사람들은 몰랐겠지만 어찌나 당황스럽던지…. 하긴 바이올리니스트인 아이작 스턴은 협주 도중 힘차게 활을 그었다가 무대 뒤까지 활이 날아간 적도 있으니까. 재미있는 건 연주자들은 놀랐겠지만 청중은 그런 걸 너무 좋아해요. 잘 볼 수 있는 게 아니니까. 하하하.”calmato 피아노(p)-피아니시모(pp)-피아니시시모(ppp)…. 활을 멈춘다. 공간 속에서만 울리는 소리. 음악도, 삶도 모든 것에는 끝나는 때가 있는 법. 나의 음악은 언제가 마지막일까. ―첼로를 그만두려 한 적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로마에서 살 때였는데 아무리 해도 더 이상 느는 것 같지 않더라고요. 더 깊어지려고 여기저기 파보는데 올라가지 못하는 것처럼 느껴진 거죠. 그래서 악기 케이스를 닫고 안 열었는데…, 3일밖에 못 갔어요. 좀이 쑤셔서 못 견디겠더라고요. 하하하. 첼로 안 하면 할 수 있는 게 많을 줄 알았는데 아무것도 할 것도 없고…. 그런데 그 3일이 그렇게 길더라고요.” ―선생님에게 첼로는 어떤 의미인가요. “저는 내 마음을 소리로 표현하며 사는 게 제일 행복해요. 첼로는 그런 제 목소리죠. 지금 가지고 있는 첼로는 40년째 함께하고 있는데 이젠 아예 몸과 생각의 한 부분이 된 것 같아요.” ―앞으로 특별히 계획하신 일이 있는지요. “이젠 나이도 들고 해서…, 한번은 가족들에게 은퇴 얘기를 했어요. 제 나이대까지 연주하는 사람이, 특히 여자 연주자는 드물죠. 그랬더니 ‘무슨 소리냐’며 은퇴하더라도 그 전에 마지막으로 원산에서 정트리오 공연은 한 번 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하더라고요. 어머니 고향이 북한 원산인데 그곳에서 경화, 명훈이와 함께 공연을 하자는 것이죠. 이번 평창겨울음악제도 남북한 화합의 의미가 있으니까 할 수만 있다면 원산에서 정트리오 공연을 추진해 보고 싶은 마음이죠.”  이진구 기자 sys1201@donga.com}

    • 2018-0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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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진구 기자의 對話]Cám ơn ông, Park Hang Seo!!!

    《 베트남에서 그의 인기가 얼마나 대단한지를 실감하게 해주는 사실 겸 유머가 하나 있다. 베트남팀을 아시아축구연맹(AFC) U-23 챔피언십 결승전에 진출시킨 박항서 국가대표팀 감독(59)을 한국 언론이 ‘베트남의 히딩크’라고 비유한 데 대한 베트남 축구팬들의 반박이다. ‘히딩크가 누군지 잘 모르지만 영웅 박항서 감독님을 함부로 비교하지 마라!’ 하지만 정작 박 감독은 자신이 거스 히딩크 감독과 비교되는 것을 매우 부담스러워했다. 베트남이 AFC 주최 대회에서 결승에 진출한 것은 이번이 처음. 지난해 10월 부임한 박 감독은 이번 대회를 통해 베트남 축구를 한 단계 끌어올렸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오죽하면 베트남 축구 전문지 기사 제목이 ‘고마워요, 박항서!!!’일까. 》  ―아쉽게도 결승에서 우즈베키스탄에 졌습니다. “감기가 걸렸는데 잘 들리나요? 목소리가 안 나와요.(인터뷰는 28일 오전 중국의 모바일 메신저인 ‘위챗’으로 진행됐다) 119분은 잘 싸웠는데 마지막 1분 동안 체력이 떨어져서…, 많이 아쉽지요. 그래도 저희들이 악조건 속에서도 잘했다고 생각합니다. 아이들이 열심히 했죠.”(이날 결승전에서 베트남은 승부차기 돌입 직전인 연장 후반 14분에 결승골을 내줘 1―2로 분패했다) ―베트남은 축구로는 잘 알려지지 않았는데, 선수들이 어떤 장점이 있던가요. “아이들이 아주 성실해요. 민첩하고 빠르고, 또 지구력이 뛰어난 점은 장점이죠. 아무래도 한국 선수들과 비교하게 되는데… 체격이 작다는 게 단점이죠. 하지만 체격이 작은 것이지 체력이 부족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아예 식단을 바꿨죠.” ―식단을 바꿨다고요? “제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게 스태미나와 피지컬이었습니다. 선수들이 생각보다는 좋았지만, 한국 선수들과 굳이 비교하자면 조금 부족하다고는 느꼈지요. 무엇보다 후반 70분 이후 버티려면 영양이 중요해요. 그래서 피지컬 코치에게 한 달 치 식단을 짜라고 했습니다. 과거에는 그런 적이 없다고 하더군요. 예를 들어 늘 먹는 쌀국수에 튀긴 돼지고기만 먹는 거죠. 그래서 애피타이저로 연어 샐러드도 제공하고, 스테이크는 물론이고 외식도 자주 했습니다.”   ―식사와 관련해 요청하신 것이 또 있습니까. “처음에는 적어도 4성급 호텔에서 한 달 정도 머물며 지냈으면 했습니다. 외국 전지훈련도 가고요. 그런데 그러면 비용이 많이 드니까…. 아무래도 예산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죠. 그래서 요청한 것 전부는 안 되더라도 식사만큼은 호텔급으로 해달라고 베트남 축구협회에 요청했습니다. 외식도 원할 때 할 수 있게 해달라고 했고요. 다행히 축구협회에서 받아줬지요.” ―식습관은 문화인데 반발은 없었나요. “합숙을 하면서 식단을 공개했습니다. 이 음식에는 무슨 영양소가 있고, 왜 이것을 먹어야 하는지 선수들에게 설명을 했죠. 반발은 없었고…, 스테이크 이런 거랑, 못 먹어 봤던 것도 먹고 그러니까 좋아서 환장하죠. 대표팀 왔더니 밥 잘 먹는구나 하고…. 하하하. 후원사 중에 우유회사가 있는데 영양에 필요한 요소들을 매번 점검해 주고 우유도 제공해 줬죠. 전에는 그런 적이 없었다고 하더군요.” ―베트남에서도 인기 폭발인데, 결승전이 끝난 뒤 특별한 행사는 없었습니까. “선수들과 숙소인 호텔에서 맥주를 곁들여 간단히 식사를 했습니다. 주중 베트남대사와 베트남 교민들이 인사를 오셨고요. 선수들에게는 아직 어리니까 몇 가지 당부를 했죠. (어떤 당부를?) 오늘까지는 준우승에 도취돼서 기분이 좋을 수 있다. 또 이제 앞으로 스포트라이트가 쏟아지는 등 운동 외적인 변화가 많이 있을 텐데 그런 것들은 금방 지나가는 일이고 잘 관리하지 못하면 더 큰 영광의 주인공이 될 수 없다고 말해줬습니다.” ―23세 이하 선수들이라 아직 어릴 텐데 이해하던가요. “저도 2002년 한일 월드컵 때 4강까지 갔지만 사람들의 관심은 1년이 지나니 금방 사라지더군요. 아무것도 아닌 것이죠. 그런 경험을 내가 해봤으니까…. 그래서 선수들에게 겸손하자, 초심을 잃지 말자고 했습니다.”(그는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 히딩크 감독 밑에서 수석코치를 지냈다) ―휴대전화 금지령을 내렸다던데…. “식사할 때 식당에 휴대전화 갖고 가지 말라고 했습니다. 와서 보니 팀원들 간의 일체화가 좀 부족해 보였어요. 우리 같으면 훈련이 끝난 후엔 필드도 정리하고, 주장이 나와서 ‘잘해 보자’ 이러면서 함께 자성의 시간도 갖고 그러는데 여기는 그런 점이 좀 부족하더라고요. 훈련 끝나면 알아서 ‘바이 바이’ 하고 돌아가고…. 선수들에게 ‘우리는 축구뿐만 아니라 삶도 공유해야 해. 그래야 서로 친구가 되고, 동지애가 생겨 경기에서 에너지가 발휘된다’고 말해줬죠. 그러려면 식사할 때 서로 대화를 해야지 전화기만 보고 있으면 되겠느냐고요. 이런 걸 적은 종이를 나눠줬죠. 어기면 벌금도 내게 하고….”(베트남 선수들은 경기에 출전하지 못하고 벤치에 앉아 있을 경우 경기도 잘 안 보고 자기들끼리 떠드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쉽게 말해 한 팀이라는 소속감이 약했던 것. 박 감독은 이런 분위기를 ‘벤치에 앉아 있어도 경기에 뛰는 것과 마찬가지’라며 변화시켰고, 지금은 벤치 선수들도 감독처럼 한 몸이 돼 응원을 한다고 한다) ―잘 지켜지던가요. “생각보다 흔쾌히 따라 주더라고요. 애들이 참 착해요. 정작 제가 깜빡 잊고 식당에 휴대전화를 갖고 갔다가 벌금을 냈죠. 하하하. 그리고 버스로 이동 중에는 전화기는 갖고 있을 수 있지만 통화는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경기나 훈련을 앞두고는 집중해야 하는데 통화를 하다 보면 집중력이 떨어질 수 있으니까요.” ―인기를 실감하시는지요. “하하하. 잘 모르겠습니다. 뭐, 중국 올 때는 일반 비행기를 탔는데 돌아갈 때는 전세기로 바뀌었네요. 하노이 도착하면 총리와의 티타임이 있고, 훈장도 준다고 하더군요.”(쩐다이꽝 베트남 국가주석은 박 감독에게 3급 노동훈장을, 대표팀 전체에는 1급 노동훈장을 수여하기로 했다) ―워낙 성과가 좋아 부담도 클 것 같습니다. “베트남에서 축구는 국민의 90%가 사랑하는 스포츠고, 또 유일한 프로 종목입니다. 가끔은 종교 같다고도 하지요. 이번에 잘해서 다행이기는 하지만 그만큼 베트남 국민의 눈높이가 높아지지 않았겠습니까. 그런 부분도 고민이지요. 어찌 보면 그런 부담감을 갖는 것도 감독의 숙명이겠지요….” ―국내에서는 ‘베트남의 히딩크’라고 불리고 있습니다. “비교 대상이 아닌데…. 그분의 능력 경력과 비교된다는 게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해요.”(일부에서는 박 감독을 히딩크 감독과 비교해 ‘쌀딩크’라고 부르기도 한다. 베트남의 주 음식이 쌀국수라는 데서 착안한 것이다. 하지만 박 감독 주변에 따르면 그는 이마저도 히딩크 감독과 비교하는 것처럼 보여 매우 부담스러워한다고 한다) ―같은 외국인 감독이라는 점에서 히딩크 감독 밑에서 코치를 한 게 큰 도움이 됐을 것 같습니다. “100% 맞습니다. 히딩크 감독이 우리에게 외국인이듯이 저도 베트남 선수들에게는 외국인이니까요. 베트남과는 다른 생각과 문화를 어떻게 합리적으로 접목시킬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박 감독은 매 경기 시작 전 라커룸에서 의미 있는 의식을 한다고 한다. 한 명 한 명 껴안고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야, 넌 잘할 수 있어’라고 속삭여 주는 것이다. 선수는 물론 스태프까지 모두에게 말이다) ―베트남에서 어떻게 국가대표 감독직을 제안했는지요. “2020년 도쿄 올림픽 출전 등을 준비하는 베트남이 월드컵 등 국제대회에서 경험이 많고 성적이 좋은 사람을 찾고 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또 아무래도 문화적인 부분이 있으니 아시아권, 그중에서도 한국과 일본 출신 감독을 선호했던 것 같고요. 아무래도 감독이 갑자기 바뀌어서 동양인 정서를 이해하는 사람이 더 낫겠다고 본 것이겠죠. 평소 베트남이나 태국의 축구 소식에 관심이 있었고 그곳에서 한번 해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마침 에이전트를 통해 제안이 들어온 게 인연이 된 것이죠.”(박 감독의 계약 기간은 일단 2020년 초까지. 에이전트에 따르면 올해, 내년 성과가 좋을 경우 계약 기간을 연장해 도쿄 올림픽까지 염두에 둔 포석이라고 한다) ―평소 선수들에게 자주 하는 당부가 있는지요. “국가대표팀에서 받은 훈련을 소속팀에 돌아가서도 그대로 퍼뜨리라고 하죠. 여기 대표팀에서는 근육량, 심폐지구력, 근지구력 등 모든 것을 체크했습니다. 모든 것을 데이터화한 것이죠. 전에는 이렇게까지 한 적이 없다고 해요. 당연히 그런 데이터도 없고…. 베트남 축구협회에서도 놀라더군요. 그렇게 한 감독이 없었다고요. 대표팀에서 체크한 수치가 다시 돌아왔을 때 떨어지면 앞으로 선발 명단에서 떨어뜨릴 수도 있다고 했죠. 소속팀에 돌아가서도 대표팀 때처럼 한다면 자연스레 자기관리는 물론이고 베트남 축구 클럽들의 훈련 습관도 바꿀 수 있겠죠. 하나의 문화를 만들어 주길 바랍니다.” 이진구 기자 sys1201@donga.com}

    • 2018-0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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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영상]베트남축구 신화 쓴 박항서 감독 “일반비행기 타고 왔는데, 갈 땐 전세기로…”

    베트남에서 그의 인기가 얼마나 대단한지를 실감하게 해주는 사실 겸 유머가 하나 있다. 베트남팀을 아시아축구연맹(AFC) U-23 챔피언십 결승전에 진출시킨 박항서 국가대표팀 감독(59)을 한국 언론이 ‘베트남의 히딩크’라고 비유한데 대한 베트남 축구팬들의 반박이다. ‘히딩크가 누군지 잘 모르지만 영웅 박항서 감독님을 함부로 비교하지마라!’ 하지만 정작 박 감독은 자신이 히딩크 감독과 비교되는 것을 매우 부담스러워했다. 베트남이 AFC 주최 대회에서 결승에 진출한 것이 이번이 처음. 지난해 10월 부임한 박 감독은 이번 대회를 통해 베트남 축구를 한 단계 끌어올렸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아쉽게도 결승에서 우즈베키스탄에 졌습니다. “감기가 걸렸는데 잘 들리나요? 목소리가 안 나와요.(인터뷰는 28일 오전 중국의 모바일 메신저인 ‘위챗’으로 진행됐다.) 119분은 잘 싸웠는데 마지막 1분 동안 체력이 떨어져서…, 많이 아쉽지요. 그래도 저희들이 악조건 속에서도 잘 했다고 생각합니다. 아이들이 열심히 했죠.”(이날 결승전에서 베트남은 승부차기 돌입 직전인 연장후반 14분에 결승골을 내줘 1대 2로 분패했다.) ―베트남은 축구로는 잘 알려지지 않았는데, 선수들이 어떤 장점이 있던가요. “아이들이 아주 성실해요. 민첩하고 빠르고, 또 지구력이 뛰어난 점은 장점이죠. 아무래도 한국 선수들과 비교하게 되는데… 체격이 작다는 게 단점이죠. 하지만 체격이 작은 것이지 체력이 부족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아예 식단을 바꿨죠.” ―식단을 바꿨다고요? “제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게 스테미너와 피지컬이었습니다. 선수들이 생각보다는 좋았지만, 한국 선수들과 굳이 비교하자면 조금 부족하다고는 느꼈지요. 무엇보다 후반 70분 이후 버티려면 영양이 중요해요. 그래서 피지컬 코치에게 한 달 치 식단을 짜라고 했습니다. 과거에는 그런 적이 없다고 하더군요. 예를 들어 늘 먹는 쌀국수에 튀긴 돼지고기만 먹는 거죠. 그래서 에피타이저로 연어 샐러드도 제공하고, 스테이크는 물론 외식도 자주했습니다.” ―식사와 관련해 요청하신 것이 또 있습니까. “처음에는 적어도 4성급 호텔에서 한 달 정도 머물면서 지냈으면 했습니다. 외국 전지훈련도 가고요. 그런데 그러면 비용이 많이 드니까…. 아무래도 예산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죠. 그래서 요청한 것 전부는 안 되더라도 식사만큼은 호텔 급으로 해달라고 베트남 축구협회에 요청했습니다. 외식도 원할 때 먹을 수 있게 해달라고 했고요. 다행히 축구협회에서 받아줬지요.” ―식습관은 문화인데 반발은 없었나요? “합숙을 하면서 식단을 공개했습니다. 이 음식에는 무슨 영양소가 있고, 왜 이것을 먹어야하는지 선수들에게 설명을 했죠. 반발은 없었고…, 스테이크 이런 거랑, 못 먹어봤던 것도 먹고 그러니까 좋아서 환장하죠. 대표팀 왔더니 밥 잘 먹는구나하고…. 하하하. 후원사 중에 우유회사가 있는데 영양에 필요한 요소들을 매번 점검해주고 우유도 제공해줬죠. 전에는 그런 적이 없었다고 하더군요.” ―휴대폰 금지령을 내렸다던데…. “식사할 때 식당에 휴대폰 갖고 가지 말라고 했습니다. 와서 보니 팀원들간의 일체화가 좀 부족해보였어요. 우리 같으면 훈련이 끝나면 필드도 정리하고, 주장이 나와서 ‘잘해보자’ 이러면서 함께 자성의 시간도 갖고 그러는데 여기는 그런 점이 좀 부족하더라고요. 훈련 끝나면 알아서 ‘바이 바이’하고 돌아가고…. 선수들에게 ‘우리는 축구뿐만 아니라 삶도 공유해야해. 그래야 서로 친구가 되고, 동지애가 생겨서 경기에서 에너지가 발휘 된다’고 말해줬죠. 그러려면 식사할 때 서로 대화를 해야지 전화기만 보고 있으면 되겠느냐고요. 이런 걸 적은 종이를 나눠줬죠. 어기면 벌금도 내게 하고….” (베트남 선수들은 경기에 출전하지 못하고 벤치에 앉아있을 경우 경기도 잘 안보고 자기들끼리 떠드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쉽게 말해 한 팀이라는 소속감이 약했던 것. 박 감독은 이런 분위기를 ‘벤치에 앉아있어도 경기에 뛰는 것과 마찬가지’라며 변화시켰고, 지금은 벤치 선수들도 감독처럼 한 몸이 돼 응원을 한다고 한다.) ―잘 지켜지던가요. “생각보다 흔쾌히 따라 주더라고요. 애들이 참 착해요. 정작 제가 깜빡 잊고 식당에 휴대폰을 갖고 갔다가 벌금을 냈죠. 하하하. 그리고 버스로 이동 중에는 전화기는 갖고 있을 수 있지만 통화는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경기나 훈련을 앞두고는 집중을 해야 하는데 통화를 하다보면 집중력이 틀어질 수 있으니까요.” ―베트남에서도 인기가 폭발인데, 결승전이 끝난 뒤 특별한 행사는 없었습니까? “선수들과 숙소인 호텔에서 맥주를 곁들여 간단히 식사를 했습니다. 주중 베트남 대사와 베트남 교민들이 인사를 오셨고요. 선수들에게는 아직 어리니까 몇 가지 당부를 했죠. (어떤 당부를?) 오늘까지는 준우승에 도취돼서 기분이 좋을 수 있다. 또 이제 앞으로 스포트라이트가 쏟아지는 등 운동 외적인 변화가 많이 있을 텐데 그런 것들은 금방 지나가는 일이고 잘 관리하지 못하면 더 큰 영광의 주인공이 될 수 없다고 말해줬습니다.” ―23세 이하 선수들이라 아직 어릴 텐데 이해하던가요? “저도 2002년 한일월드컵 때 4강까지 갔지만 사람들의 관심은 1년이 지나니 금방 사라지더군요. 아무 것도 아닌 것이죠. 그런 경험을 내가 해봤으니까…. 그래서 선수들에게 겸손하자, 초심을 잃지 말자고 했습니다.”(그는 2002년 한일월드컵에서 히딩크 감독 밑에서 수석코치를 지냈다.) ―인기를 실감하시는지요. “하하하. 잘 모르겠습니다. 뭐, 중국 올 때는 일반 비행기를 탔는데 돌아갈 때는 전세기로 바뀌었네요. 하노이 도착하면 수상과 티타임이 있고, 훈장도 준다고 하더군요.”(쩐 다이 꽝 베트남 국가주석은 박 감독에게 3급 노동훈장을, 대표팀 전체에는 1급 노동훈장을 수여하기로 했다.) ―워낙 성과가 좋아 부담도 클 것 같습니다. “베트남에서 축구는 국민의 90%가 사랑하는 스포츠고, 또 유일한 프로 종목입니다. 가끔은 종교 같다고도 하지요. 이번에 잘해서 다행이기는 하지만 그만큼 베트남 국민들의 눈높이가 높아지지 않았겠습니까. 그런 부분도 고민이지요. 어찌 보면 그런 부담감을 갖는 것도 감독의 숙명이겠지요….” ―국내에서는 ‘베트남의 히딩크’라고 불리고 있습니다. “비교 대상이 아닌데…. 그분의 능력·경력과 비교된다는 게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해요.”(일부에서는 박 감독을 히딩크 감독과 비교해 ‘쌀딩크’라고 부르기도 한다. 베트남의 주음식이 쌀국수라는 데서 착안한 것이다. 하지만 박 감독 주변에 따르면 그는 이마저도 히딩크 감독과 비교하는 것처럼 보여 매우 부담스러워한다고 한다.) ―같은 외국인 감독이라는 점에서 히딩크 감독 밑에서 코치를 한 것은 큰 도움이 됐을 것 같습니다. “100% 맞습니다. 히딩크 감독이 우리에게 외국인이듯이 저도 베트남 선수들에게는 외국인이니까요. 베트남과는 다른 생각과 문화를 어떻게 합리적으로 접목시킬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박 감독은 매 경기 시작 전 라커룸에서 의미 있는 의식을 한다고 한다. 한 명 한 명 껴안고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야, 넌 잘할 수 있어’라고 속삭여주는 것이다. 선수는 물론 스텝까지 모두에게 말이다.) ―베트남에서 어떻게 국가대표 감독직을 제안했는지요. “2020년 도쿄올림픽 출전 등을 준비하는 베트남이 월드컵 등 국제대회에서 경험이 많고 성적이 좋은 사람을 찾고 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또 아무래도 문화적인 부분이 있으니 아시아권, 그 중에서도 한국과 일본 출신 감독을 선호했던 것 같고요. 아무래도 감독이 갑자기 바뀌어서 동양인 정서를 이해하는 사람이 더 낫겠다고 본 것이겠죠. 평소 베트남이나 태국의 축구 소식에 관심이 있었고 그곳에서 한 번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마침 에이전트를 통해 제안이 들어온 게 인연이 된 것이죠.”(박 감독의 계약기간은 일단 2020년 초까지. 에이전트에 따르면 올해, 내년 성과가 좋을 경우 계약 기간을 연장해 도쿄 올림픽까지 염두에 둔 포석이라고 한다.) ―평소 선수들에게 자주 하는 당부가 있는지요. “국가대표팀에서 받은 훈련을 소속팀에 돌아서도 그대로 퍼트리라고 하죠. 여기 대표팀에서는 근육량, 심폐지구력, 근지구력 등 모든 것을 체크했습니다. 모든 것을 데이터화 한 것이죠. 전에는 이렇게까지 한 적이 없다고 해요. 당연히 그런 데이터도 없고…. 베트남 축구협회에서도 놀라더군요. 그렇게 한 감독이 없었다고요. 대표팀에서 체크한 수치가 다시 돌아왔을 때 떨어지면 앞으로 선발 명단에서 떨어트릴 수도 있다고 했죠. 소속팀에 돌아가서도 대표팀 때처럼 한다면 자연스레 자기관리는 물론 베트남 축구 클럽들의 훈련 습관도 바꿀 수 있겠죠. 하나의 문화를 만들어 주길 바란 것이죠.” 이진구 기자 sys1201@donga.com}

    • 2018-0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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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진구 기자의 對話]“오늘도 모르겠습니다, 시가 누구인지…”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못 본그 꽃 ―고은, ‘순간의 꽃’에서 누군가를 만날 때, 이름만으로 자신을 소개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아무리 재산이 많고, 지위가 높아도 회사 이름이나 직책을 붙이지 않으면 자신을 표현할 수 없는 사람들. “고은입니다.” 굳이 설명이 필요할까. 그 이름에 우리 현대사의 질곡이 고스란히 안겨 있는 사람. 어쩌면 그에게 시는 이런 질곡 중의 하나였는지도 모른다. 그런 그가 올해로 등단 60주년을 맞았다. 그가 올라가면서 보지 못한 것은 과연 무엇일까. 눈 내린 10일, 자작나무 숲 너머 그의 집을 찾았다. ―1958년 시 ‘폐결핵’으로 등단하신 지 올해로 60년이 됐습니다. “내가 어릴 적에는 유아 사망률이 매우 높았습니다. 그래서 아이가 백일이 되면 빚을 얻어서라도 마을 잔치를 했죠. 살 수 있다는 어떤 확신을 뜻한 것이지요. 거꾸로 60년을 살면 이제 충분히 살았다는 의미로 기념을 한 것이 되지요. 그냥 시인으로서 충분히 해왔다는 정도로만 생각합니다. 내 시인 생활 60년을 특별히 되새기는 것은 좀 불편합니다.” ―우리 현대시에서 시인 고은의 위치를 생각해보신 적이 있으신지요. “우리 현대시가 1908년 육당 최남선의 ‘해(海)에게서 소년에게’부터 시작해 100여 년이 지났는데, 나는 꼭 그 중간에 시작했기 때문에 앞 세대의 흔적과 유산을 이어서 넘겨 준다는 그런 의미를 스스로 갖기도 합니다. 특이하게도 육당, 공초(오상순) 등 앞 세대 시인들과 많은 친분이 있었고 그분들의 아픔도 느끼니까요. 그분들이 다 쓰지 못하고 남기고 간 세계를 내가 조금이라도 더 써야 하는 의무가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합니다. 그런데 내 세계는 좀 서사적이고 직관적입니다. 괜찮은가요?(첫 질문에만 그의 설명은 춘원 이광수에서 김소월, 이상, 이육사를 망라하며 30여 분간 이어졌다.)” ―60주년 기념으로 시집 대하 서사시 ‘심청’을 출간하신다고 하던데요.(그의 ‘심청’은 우리 고전 ‘심청전’을 모티브로 한 서사시로 긴 장편소설 분량이다.) “이탈리아 베네치아의 대학에 초청받아 한 학기 동안 특강을 한 적이 있는데, 그때 단테의 ‘신곡’을 다시 보면서 천국-지상-지옥으로 이뤄진 구성에 흥미를 느꼈지요. 그런데 우리 심청전도 자세히 보면 하늘-지상-용궁이란 유사한 구조를 갖고 있거든요. 물론 나의 심청은 그보다 훨씬 이전에 구상하고 쓰기 시작했지만요. 작년 여름에 원고를 넘겼는데, 어떻게 하다가 출간이 해를 넘기게 되었어요. 꼭 60주년을 자축하기 위해 쓴 것은 아닙니다.” ―원래 승려이셨는데 등단을 하게 된 계기가 무엇인지요. “수행 중에 시를 좀 썼는데, ‘폐결핵’이란 시를 화가 나병재라는 친구에게 보여준 적이 있어요. 그가 보더니 ‘이것도 시냐?’ 하더라고요. ‘안 좋으면 내버려라’ 하고 잊어버렸는데, 그가 갖고 있다가 그때 막 생긴 한국시인협회 기관지 ‘현대시’에 공모 광고가 난 걸 보고 거기에 보냈는데 뽑힌 거죠. 나는 산중에 있어 전혀 몰랐어요. 당시 비구승으로 서울에서 불교신문 초대 주필을 하면서 직접 신문을 만들었는데, 잘 만들 줄 모르니까 지면에 자투리 공간이 남을 때가 많았어요. 거기에 내가 쓴 시를 넣어 메우곤 했지요. 하루는 자주 찾아오던 교통부 국장이 그 시를 보고 ‘갈 데가 있소’라고 해 따라가니 미당 서정주의 집이었어요. 미당이 내 시를 보더니 ‘이거 단번에 추천해야겠구먼’ 하더니 세 편을 한꺼번에 현대문학에 추천했어요. 그렇게 해서 1958년 한 해에 두 번이나 등단하게 된 거예요. 내 힘이 아니라 주변의 인도 덕분이었죠.” ―젊을 때 기자생활도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1969년 내 인생에 직장이라고는 딱 한번, 몇 달 정도 동화통신이란 곳에 문화부장대우로 다닌 적이 있습니다. 문화부는 아니고 일종의 특집부의 성격인데 포천 양공주촌이나 오지 같은 데를 다니면서 기사를 썼죠. 그 회사 안에 외신기자 구락부(클럽)가 있었는데, 방에 온갖 양주가 즐비했어요. 하루는 그 술을 몰래 엄청 마시고는 다 때려 부쉈지요. 취중에 반감이 생겼나 봐요. 그랬더니 사장이 불러서 ‘고은 씨는 시인의 길을 가야겠네. 당분간 쉬게’ 했어요. 잘린 거지요. 그런데 지금도 사우회에서는 이따금 편지가 와요. 하하하.” ―선생님의 작품에서는 ‘사람’이 가장 많이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젊을 적에는 6·25전쟁과 학살의 극한 상황을 겪다 보니 인간의 의미를 부정했어요. 그런데 이제는 이 세상은 모두 관계로서 이뤄지고 존재한다고 봅니다. 만약 나 혼자 존재한다면 이름도 필요 없죠. 지금 이 자리도 이진구가 있으니 고은이 있는 거죠. 우리 둘이 지금 앉아 있는 것도 관계로서의 존재입니다.” ―다작(多作)으로도 유명하신데, 소재 부족을 느껴 보신 적은 없으신가요. “나보고 다작이라고 하는데 나는 그 말을 거부합니다. 끝없이 솟구쳐 나오는 샘물을 내가 어찌 막겠어요. 세계 각처에는 작품을 산더미처럼 쓴 작가가 많습니다. 중국의 이백은 술 한 말에 시 백 편이라고 두보가 노래했지요. 괴테, 빅토르 위고 등 모두 엄청난 양의 작품을 썼습니다. 중앙아시아에는 아직도 일주일도 넘게 읽어야 하는 구비서사시가 있습니다. 한번은 몽골에서 밤 10시부터 아침까지 구비서사시를 읽는 독회에 참석할 기회가 있었는데 새벽에 해가 뜨니까 그제야 ‘끝났다’며 말젖으로 만든 술을 마시더라고요. 멋진 긴 밤이었지요. 나에게도 그런 피가 있다고 생각해요. 아직 끝나지 않았어요. 내년부터 ‘운명’이라는 서사시를 쓸 계획이고, 그 뒤에도 써야 할 시들이 줄줄이 기다리고 있어요.” ―작품이 스웨덴 교과서에 실릴 정도로 세계 여러 나라 언어로 번역됐는데, 시가 번역이 참 어려운 분야 아닌지요. “지금 우리가 읽는 모든 외국 작품은 다 번역된 것입니다. 불경도, 성경도, 괴테의 작품도 그렇지요. 당장은 불충분할 수 있지만 시는 자기 스스로 어딘가로 나가고 싶어 하는 꿈을 갖고 있어요. 아이들이 크면 아빠 엄마의 품을 떠나 집 밖의 또 다른 세계로 나가고 싶어 하듯 말이지요. 내 시도 집에서 부모님의 사랑 속에서만 있지 않고, 바람 찬 세상 속으로 나가 노래하고 싶어 하겠죠. 그렇게 나가는 거죠.” ―진부한 질문이지만 매년 노벨상 후보로 언급되고 있습니다. “대답도 진부합니다. 정말 내가 그것에 대해 아는 게 없습니다. 단지 우리나라가 너무 노벨상에 집착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누구보다 힘든 젊은 시절을 보내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요즘 우리 젊은이들도 많이 아픈데 특별히 해주실 말이 있으신지요.(그는 젊을 적에 네 번 자살 시도를 한 바 있다) “그 시대에는 다 힘들게 살았는데 나만 유달리 고생했다고 하면 미안한 일입니다. 다만 전쟁을 겪으면서 내 또래 절반 가까이가 죽었는데 살아 남다 보니 일종의 죄의식이 있습니다. 또한 그들이 살지 못한 삶을 조금이나마 내가 대행한다는 사명도 있습니다. 하지만 내가 그렇게 살아왔다고 지금 젊은이들에게 ‘뭐가 힘드냐’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자신의 삶은 누가 지도하는 삶이 아니라는 걸 말해 줄 수 있을 뿐입니다.” ―저서 ‘만인보’에 국정 농단 사건의 폭로자 고영태 씨 가족사가 실린 것이 화제가 됐습니다.(만인보는 1986∼2010년까지 쓴 4000여 편의 시를 30권으로 엮은 그의 연작시로, ‘단상3353-고규석’ ‘단상 3355-이숙자’에 나오는 고 씨와 이 씨가 고영태 씨의 부모다.) “만인보의 후반 편에서는 광주학살을 많이 다루고 있는데 그중 하나일 것입니다. 그때 취재하면서 5·18민주화운동 때 남편을 잃은 여자가 리어카를 끌며 아이들을 힘들게 키웠는데, 그 아이들 중 하나가 아시아경기대회에서 펜싱 금메달을 땄다는 걸 알고 쓴 거지요. 나중에 만인보에 나오는 그 금메달리스트가 고영태라는 건 언론을 보고 알게 되었어요.” ―박근혜 정부에서 소위 블랙리스트에 올랐습니다. “이름만 달랐지, 어찌 그때뿐이겠습니까. 늘 감옥이고 이중 삼중 감시를 당했으니까요. 유신시대인 박정희 전 대통령 때 내 친구가 운영하던 민음사는 나 때문에 세무조사를 당했습니다. 전두환 전 대통령 때는 문인 주소록에서 나를 뺀 적도 있어요. 얘기하거나 드러나면 안 되는 기피 인물이었던 거죠. 오죽하면 승려 시절의 ‘일초(一超)’란 법명에 ‘표’ 씨를 붙여 ‘표일초’라고 해서 글을 발표하거나, 다른 호를 지어 글을 발표해야 했으니까요. 여권은 김영삼 정부 들어 사면 받으면서 처음 나왔고, 그전에는 초청을 받아도 출국을 못했습니다. 나한테 블랙리스트는 아주 익숙한 일입니다. 하하하.” ―앞으로의 계획이 있으신지요. “앞으로도 나는 이 나라 시의 길을 이제까지 간 것처럼 갈 것입니다. 나는 운명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전혀 새롭게 펼칩니다. 아시아의 숙명 이상의 우주적 율동으로서의 운행(運行) 말입니다. 나는 그런 운명 속에서 내 시의 긴 과정을 완성할 것입니다.” 이진구 기자 sys1201@donga.com}

    • 2018-0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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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文대통령, 최저임금 1만원 공약 포기해야”

    내년 1월 1일부터 역대 최대 인상액인 최저임금(시급 7530원)이 적용되는 가운데 어수봉 최저임금위원장(사진)이 “(실질적인 저소득층 지원을 위해) 문재인 정부가 (대선 공약인) 2020년까지 3년 내 시급 1만 원을 포기할 필요가 있다”는 견해를 밝혔다. 어 위원장은 20일 본보와의 인터뷰에서 “사회 격차를 줄이려는 노력은 당연히 필요하지만, 최저임금 제도만이 만병통치약은 아니며 다른 제도 보완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최저임금 대상자 중에도 상황이 각각 다르기 때문에 일률적인 최저임금 인상보다는 더 생계가 힘든 계층을 위한 핀포인트형 정부 지원이 필요하다는 것. 시급 1만 원을 달성하기 위해 내년도 최저임금처럼 계속해서 해마다 최저임금을 대폭 올릴 경우 만만치 않은 부작용도 생길 수 있다는 것이다. 어 위원장은 “저소득 계층 중 하루 8시간을 일해도 가계를 부양할 수 없는 사람들은 아무리 최저임금을 높여도 생계가 해결이 안 된다”며 “이런 계층에는 최저임금은 어느 정도 수준으로 유지해주고, 추가적인 정부 지원을 해주는 선택적 복지 제도를 설계하는 것이 보다 효과적”이라고 말했다.이진구 기자 sys1201@donga.com}

    • 2017-1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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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진구 기자의 對話]“최저임금 결정에 문 대통령 영향? 안 받으면 바보지”

    《 일주일 후(내년 1월 1일)면 역대 최고라는 최저임금(시급 7530원)이 시행된다. 올해 6470원에서 무려 1060원(16.4%)이 오른 것. 이 때문에 “망하는 중소·영세기업이 속출할 것” “기업의 경쟁력이 약화될 것”이라는 경영계의 반발이 심했다. 그리고 이 우려는 현재까지도 진행형이다. 과연 며칠 후면 쓰러지는 영세 자영업자가 속출할까. 이번 최저임금 인상은 우리 사회에 어떤 청사진을 가져올까. 어수봉 최저임금위원장은 “내년 1년간 대한민국의 수준이 어떤지 민낯을 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번 최저임금이 역대 최고라는 것은 인상률이 아닌 인상액(1060원) 기준이다. 인상률로는 1991년 18.8%, 2000년 9월∼2001년 8월 16.6%에 이어 세 번째다.) 》  ―민낯이라니? “최저임금 인상으로 인한 부담은 결국 국민 전체가 질 수밖에 없다. 내가 조금 더 내더라도 없는 사람들과 더불어 사는 공동체가 돼야 한다는 생각을 우리가 가질 수 있는지다.” ―최저임금 인상의 부담을 왜 국민이 지나? 사업주가 져야 하는 것 아닌가. “임금 상승으로 인한 부담이 전가되는 방식은 4가지다. 첫째는 근로자. 사업주가 임금 상승 부담을 해고나 근로시간 단축을 통해 상쇄하는 경우다. 두 번째는 사업주 자신이 경영효율화든 자기 몫을 줄이든 스스로 감내하는 것. 세 번째가 가장 많은데 가격에 전가하는 것이고, 네 번째는 정부가 세금으로 임금 상승분을 지원하는 것이다. 해고나 근로시간 단축을 통한 부담 전가는 어려운 사람들을 더 어렵게 만든다. 사업주 자신이 감내하는 것도 한계가 있다. 그래서 국민이 십시일반으로 돕는 세 번째, 네 번째가 가장 바람직하다.” ―둘 다 국민이 부담을 지는 것 아닌가. “그렇다. 임금 상승분이 가격에 전가되면 4000원이던 자장면이 4500원이 된다. 결국 물가가 오른다. 이 때문에 우리가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세금을 조금 더 내고, 오른 자장면 값을 기꺼이 낼 수 있는 의식을 가져야 한다. 만약 이런 공동체 의식을 갖지 못해 조세 저항이 심하거나, 인플레이션을 못 견딘다면 그 충격은 최저임금을 받는 사람들에게 직접 간다. 어느 길로 우리가 갈지 알 수 있다는 의미에서 ‘우리 사회의 민낯을 볼 수 있다’고 한 거다.” ―어떻게 될 것 같은가. 개인적으로는 예상이… “우울하지만 국민이 부담을 지는 형태로는 안 갈 것 같다. 그럼 결국 영세 자영업자와 그곳에 속한 근로자에게 충격이 다 갈 것이다. (왜 그렇게 생각하나?) 지금까지 안 그랬는데 갑자기 몇 달 만에 바뀔 수가 있겠는가. 영세 자영업자들은 문을 닫는 곳도 있겠지만 대체로는 영업시간과 종업원 고용 등에서 경영효율화를 모색할 것으로 보인다. 자동화도 방법이고…. 그래서 정부가 이 부분을 명확히 말해줘야 한다. 최저임금의 대폭 상승은 필요하지만 그러기 위해 국민 모두가 물가 인상을 견뎌야 하고, 세금을 조금 더 내야 한다고…. 그런데 시급 1만 원은 말하지만 함께 수반돼야 하는 ‘견딤’은 말하지 않는다.” ― ‘시급 만 원’의 근거가 뭔가. “2, 3년 전인 박근혜 정부 시절 최저임금이 가장 높게 오르면서 받는 쪽에서 자기 권리를 주장하기 시작했다. 알바천국이 ‘시급 1만 원은 받아야 하지 않느냐’고 주장한 게 그때쯤부터다. 왜 만 원인지에 대한 산출 근거는 없다. 그런데 정치권이 이걸 받으면서 정착됐다.” ―잠깐, 박근혜 정부에서 최저임금이 가장 많이 올랐다고? “실제 의미가 있는 것은 보통 근로자의 평균 임금 상승률과 최저임금 근로자의 임금상승률 간의 격차다. 이 격차가 있어야 최저임금 인상은 의미가 있다. 최저임금이 오른 만큼 일반 근로자의 임금이 오르면 결국 하나도 안 오른 것과 마찬가지다. 노태우∼박근혜 대통령까지 평균 최저임금 인상률은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 때가 높았지만 그때는 전체 근로자의 평균임금 상승률도 높았다. 반면에 박근혜 대통령 때는 일반 근로자 임금 상승률보다 매년 최저임금 인상률이 2∼3%포인트가 더 높았다.” ―왜 ‘뜻밖인데’라는 생각이 드는 걸까. “나도 그 통계를 보고 뜻밖이었다. 박근혜 정부에서 매년 최저임금을 7∼8% 올렸는데, 시중 임금인상은 4∼5%였다. 그만큼 더 준 것이다. 3, 4년 전부터 이 때문에 기업들이 압박을 받아온 것은 사실이다. 단지 보수정권이다 보니 경영계가 강하게 말하지 않은 것뿐이지…. 그러다가 이번에 왕창 올리니까 이제는 ‘악’ 소리가 나온 것이다.” ―경영계는 그렇게 힘들다지만 믿는 국민은 별로 없는 것 같다. “대기업은 엄살이다. 임금 상승 부담을 물건 값에 전가하거나 하청업체를 쥐어짤 수 있기 때문이다.” ―결정 과정에서 인상 효과에 대한 제대로 된 자료가 없어 막연한 찬반 논쟁만 되풀이됐다. 1988년부터 시작했는데 왜 효과를 분석한 자료가 없나. “처음 이 제도를 시작할 때는 필요한지 아닌지를 파악해야 하니까 어마어마한 조사를 했다. 하지만 이후에는 100원, 200원 정도로 얼마 안 되게 올리니까 큰 신경을 쓰지 못했다. 1000가구 정도 샘플 조사한 게 있기는 한데 표본이 적어 신뢰할 수는 없다. 통계마다 다르지만 최저임금 대상자가 300만 명 정도 되는 것 같은데, 그래서 이번에 제도개선연구 태스크포스(TF)를 발족했다.” ―내년 시급 7530원이 엄청나게 오른 것이라고 하는데, 실제 강남에서는 이미 시급 8000원 이상인 곳이 많다. “서울 서초구 교대 인근의 호프집에 갔는데 여기는 올해 법정 시급이 6470원인데 이미 8000원을 주고 있었다. 그 정도 안 주면 아르바이트생을 못 구하고, 또 다른 데 간다고…. 일도 잘하고 서비스도 잘하는 좋은 사람을 구하려면 그 정도 줘야 한다는 것이다. (주인이 부담은 없다고 하던가?) 이미 아는 거다. 그 정도는 줘야 한다는 걸…. 그걸 다 포함해 장사를 하는 것이고·…. 강남에서 한정식집 같은 고급 음식점은 이미 시간당 1만 원이었다.” ―그들도 이번 최저임금 인상의 영향을 받을 것 아닌가. “이번 인상액인 1060원 다는 아니더라도 600∼700원 정도 더 오르지 않을까 한다. 그러면 주인은 치킨 값을 올리든지, 영업시간을 줄이든지 방법을 찾을 것이다. 경영계와 언론에서는 영세 자영업자를 다 하늘만 쳐다보는 바보로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다. 이들은 수입·지출은 물론이고 어디가 낭비 요인인지 다 안다. 힘든 곳도 있겠지만 일단 불필요한 낭비를 줄이기 시작할 것이다. 호프집이 낮에 문을 열 필요는 없지 않을까? 배달만 하는 음식점, 배달은 안 하는 음식점으로 구분될 수도 있고…. 이게 구조조정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당선되지 않았다면 이런 대폭 인상이 가능했을까. “불가능했지. 당연하다. (잉?) 그 질문을 가장 많이 받았는데…. 정권의 정책방향에 영향을 받지 않았느냐고…. 안 받는 게 이상하고 바보인 것이다. 결정할 때 고려 사항들이 있다. 내년도 경제성장률, 물가, 생계비 등등. 이와 함께 중요한 게 정부 정책이다. 정부 정책이 내년에 어디로 가는지는 최저임금을 결정할 때 중요한 고려 사항이다.” ―개인적으로는 얼마만큼 올리고 싶었나. “개인적으로는 10% 이상이면 된다고 생각했다. 650∼700원 이상. 그런데 경영계가 7300원(12.8%)을 제시해 깜짝 놀랐다. 그래서 물었다, ‘너희들 왜 그러느냐’고. 경영계는 늘 최저임금 동결을 주장했으니까…. 역시 정부 정책이 영향을 준 것이지…. 그래서 그 정도면 됐다고 생각해 자유투표를 한 거다. 경영계 안이 통과돼도 문제없다고 생각했으니까.” ―자신들이 써낸 7300원에서 불과 230원 더 올랐는데 왜 지금까지 국회를 찾아가서 부담이라고 반발할까. “그러니까 신의가 없는 거지. 스스로 써내놓고…. 이미 12.8%를 제시해 놓고 그 차이만큼만 부담이 된다고 하면 모르겠는데 16.4%를 부담이라고 하니까….” ―최저임금 제도는 딜레마적 성격이 있다. 실제로 장사가 안 돼 최저임금도 못 준다면 낮은 임금이라도 받는 게 나은가, 아니면 폐업을 시키더라도 최저임금을 강제해야 하나. “공권력이 깊숙하게 들어갔을 때의 부작용을 말하는 건데…. 부작용에 대한 아무런 증거도 없이 ‘망한다’ ‘노사가 자율적으로 합의한 것을 왜 국가가 개입하느냐’고 하는 것은 제도를 이해하지 못하는 말이다. 최저임금은 얼마든지 노사 자율로 합의하지만 이 이하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또 최저임금은 싼값에 사람을 쓰는 레이버 덤핑(labor dumping)을 막는 제도다. 일자리의 절대수가 부족할 경우에는 이를 눈감아 줄 수밖에 없다. 하지만 우리나라가 정말 그런지는 따져 봐야 한다.” ―통계 수치가 없나. “최저임금도 받지 못하는 근로자 수가 지금 전체 근로자의 12% 내외라고 나오는데…. 통계가 너무 부풀려 있다고 생각한다. 선진국은 약 2∼4%라고 하는데 실제로 우리가 12%라면 우리나라는 선진국이 아니다. 이유는 여러 가지다. 잘 모르고 대답하는 경우도 많고, 일하는 시간을 집 나갈 때부터 들어올 때까지로 대답하기도 하고…. 일단 나는 12%는 사실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내년 최저임금이 우리 사회의 청사진을 보여준다고 했는데…. “우리는 대기업과 중소기업, 정규직과 비정규직 등 임금격차가 지나치게 벌어져 있다. 이걸 사회통합 차원에서 줄여야 하는데 여기에 최저임금이 과연 효과가 있느냐는 논쟁이 있다. 유럽에서는 최저임금이 높은 것을 당연시한다. 기술이 없어서 단순노동을 하더라도 일을 하는 한은 빈곤층이 돼서는 안 된다는 사회철학이 있다. 이게 모든 정부 정책의 기본 철학이고, 그래서 국민 각자가 돈을 더 내더라도 함께 가자고 한다. 그런데 우리는 경쟁력 논리에 매몰된 부분이 많다. 어디로 갈지는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이다.”  이진구 기자 sys1201@donga.com}

    • 2017-1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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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진구 기자의 對話]“朴 대통령이 직접 받는 전화라더니, 받기는…”

    《 박근혜 정부의 무리수가 노골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한 것은 2015년 7월 8일 당시 유승민 새누리당 원내대표의 축출부터일 것이다. ‘말 안 듣는 원내대표’를 제거한 청와대와 친박 실세들은 이후 야당과 합의가 안 되는 각종 법안의 직권상정을 당시 정의화 국회의장(69)에게 요구했다. 정 전 의장은 “그때 막지 못했다면 나라가 어찌 됐을지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고 말했다. 10일 출간된 그의 회고록(‘정의화의 아름다운 복수’)에는 20년 정치인생을 마감하는 한 정치인의 소회와 곪아가던 당시 청와대와 친박, 그들의 몰락하는 모습이 낙조(落照)처럼 담겼다. 》    사람들에게 화제가 되는 것이 의외로 작고 재미있는 것인 경우가 많다. 그가 화제가 됐던 일 중 하나가 박근혜 전 대통령과의 핫라인 사건이다. ―박 전 대통령과의 핫라인을 받았는데 연결이 안 됐다던데…. “국회의장 되고 청와대에 처음 인사차 갔을 때 박 대통령에게 ‘할 이야기가 있으면 할 수 있는 핫라인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하니 대통령이 ‘좋다’고 했다. 얼마 후 김기춘 당시 비서실장이 연락해 번호를 알려줬다. 박 대통령이 직접 받는 전화라고…. 그래서 했는데 안 되더라고.”―신호는 가는데 안 받은 건가. “신호는 가는데 아무도 안 받았다. 약간의 시차를 두고 두 번 했는데…, 그래서 좀 의아스러웠다. (추후에라도 전화가 안 오던가?) 그 부분도 의아스러운데, 보통 수행비서가 그 전화기를 갖고 있을 것 아닌가. 명색이 국회의장이 전화했는데 대통령에게 왔다고 말을 했을 테고…. 수행비서가 자기 마음대로 자를 수는 없을 테니까. 김기춘 비서실장이 나한테 분명히 ‘대통령이 쓰는 직통전화’라고 했거든. 오죽하면 내가 잘못 적었나 싶어 당시 조윤선 정무수석에게 이 번호 맞느냐고까지 물었다. 그랬더니 ‘맞습니다. 저도 그 번호 써요’라고 하더라. (잉? 속된 말로 그냥 씹은 건가?) 몰라. I don‘t know. 나중에 방송기자클럽 초청 토론회에서 그 질문을 받았는데 그때는 ‘핸드백 속에 있어서 못 받았겠죠’ 하며 넘어갔다. 미주알고주알 말할 수는 없었으니까.”  ―이후 박 전 대통령과 직접 소통은 어떻게 했나. “2015년 당시 새누리당 원내대표이던 유승민 의원 문제와 ‘임을 위한 행진곡’ 문제를 야기한 국가보훈처장 해임 요구, 남북 국회의장 회담 등을 건의하기 위해 당시 이병기 비서실장에게 대통령을 만나게 해달라고 했다. 그 뒤에 이 실장을 만났는데 ‘대통령이 왜 (정 의장의 전화를)받았느냐고 역정을 냈다’고 하더라. (무슨 말인가?) 왜 전화를 받아서 그런 얘기를 하느냐는 뜻이겠지. 이 실장이 되레 대통령에게 ‘아니 내가 비서실장인데 국회의장 전화를 어떻게 안 받을 수 있습니까’라고 항의를 했다고 하더라.” ―그래서 박 대통령을 만났나. “날짜를 달라고 했는데 안 줬다. 앞서 말한 세 가지를 얘기하려고 했는데…. 한 2주 정도 지나 공항 귀빈실에 앉아 있는데 전화가 하나 와서 받았더니 ‘정호성입니다(정호성 비서관)’라고 하더라. 대통령 전화라면서…. 오후 4시 15분경이었다. 10분 후에 비행기 타야 하는데. 전화로 다 얘기를 하기는 어렵고 해서 유승민 의원 얘기는 빼고, 보훈처 이야기만 했다. 남북 국회의장 회담 얘기도 했더니 ‘북이 악용할까 봐 걱정된다’고만 하더라. 그건 국정원이 늘 하는 소리지. (핫라인으로 받은 번호였나?) 그건 잘 기억이 안 난다. 지금은 번호를 다 지워서….” ※현재 그의 휴대전화에서 박 전 대통령과의 핫라인이라고 했던 번호는 지워진 상태다. 그는 “‘박 대통령 직통’이라고 저장한 것 같은데 왜 없어졌는지는 모르겠다”고 말했다. ―왜 만나는 날을 달라고 안 했나. “상대가 대통령이고 여성인데, 국회의장이라는 사람이 왜 안 만나주느냐고 하기는 어렵다. 상식적으로 국회의장이 독대신청을 했으면 당연히 날짜를 잡아주는 거지. 그러면 차분하게 이런저런 얘기도 할 수 있는 거고. 이병기 실장 말을 들으면 그게 싫다는 걸 알 수 있는 것 아닌가. 내 동선을 다 알 테니 거기에 맞춰 딱 10분 정도 얘기하려고 전화를 한 거지. 만나자고 한 데 대한 답이 그것이었던 것 같다.” 지난 2, 3년간 정치는 말 그대로 ‘○판’을 방불케 했다. 특히 청와대와 새누리당 안에서 벌어진 일련의 비상식적인 일들은 자신들의 몰락은 물론이고 국격의 추락까지 불렀다. 그 무리수의 시작점이 국회의장에 대한 직권상정 압박이었다. ―직권상정 때문에 청와대와 참 많은 갈등을 빚었다. “2015년 12월 15일, 당시 현기환 대통령정무수석이 나를 찾아왔다. 대통령이 보냈다면서…. 경제활성화법, 노동법 등을 직권상정해 주지 않으면 선거법도 안 된다는 것이다. 선거법이 통과되지 않으면 시간상 총선을 늦추거나 입법 공백 사태가 벌어질 상황이었다. 그대로 2016년 1월 1일이 되면 헌법재판소의 헌법불일치 결정에 따라 선거구가 사라지는 초유의 일이 벌어진다. 선거법이 통과돼야 구획정리도 하고 선거준비를 하는데…. 총선을 못 하는 한이 있어도 이건 통과시켜야 한다고 거의 협박성 발언을 했다. 태도까지… 내가 대선배인데도 강압적인 태도로…. 몸도 삐딱하게 틀면서…. 내가 기가 차서 ‘권력이 며칠 간다고…’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걸로 끝나던가. “직권상정 요건은 천재지변, 국가 비상상황, 여야 합의된 것 등 셋밖에는 없다. 그랬더니 직권상정 요건에 ‘재적의원 과반수 이상 요청’을 추가한 국회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기가 막힐 지경이었다. 한 친박 좌장 의원은 전화를 걸어 ‘직권상정 요건이 없어서 안 된다길래 요건을 만들어줬더니 그것도 안 된다고 하니 우리가 의장을 잘못 뽑았구먼’ 하며 전화를 탕하고 끊기도 했다. 소리를 들어보면 집어 던진 것 같았다. 기절초풍할 일이지….” ―퇴임 후 복당하지 않은 거의 유일한 국회의장이 아닌가 싶다. 정이 떨어져서인가. “정 때문이라기보다는…, 나도 내 조국 대한민국에 대한 비전이 있다. 그런데 그것을 위해서는 새누리당이 그래서는 안 됐다. 박근혜 대통령이 된 후 새누리당 안에서 벌어진 일을 보면 이것은 그동안 내가 사랑했던 신한국당, 한나라당이 아니라 개인 박근혜 사당이었다. 박근혜 개인 정당에는 도저히 들어갈 수가 없었다. 그때만 해도 정치를 계속할 생각이었지만, 특정인의 사당에서는 할 수 없었다. 그래서 복당을 안 했다.” ―임기 말 ‘제3지대’를 만들어 정치를 바꿔보려는 노력을 했는데…. “대한민국이 미래로 가기 위해서는 개헌이나 중대선거구제로의 개편 등 중차대한 일들이 이뤄져야 한다. 뜻있는 사람들이 모여 이런 일들을 해보자는 취지였는데 잘 안 됐다.” ―잘 안 된 이유가 무엇인가. “추진할 때는 정상적으로 2017년 12월에 대선이 치러진다는 계산으로 했다. 당시 김종인 의원, 정운찬 전 국무총리, 손학규 전 대표 등과 함께 추진했는데 중간에 대통령 탄핵이 벌어지고, 바른정당이 창당되고, 대선이 벌어지면서 정치판이 요동을 쳤다. 그러다 보니 자연 국민의 관심에서 멀어지고 동력도 잃었다. 그래서 올해 대선을 한 달 정도 남기고 미국으로 갔다. 뭐, 선언한 것은 아니지만 사실상 정계를 은퇴한 셈이다.” ―5선 의원, 20년 동안 정치하면서 겪은 가장 큰 위기가 무엇이었나. “공천 탈락이지. 하하하. 2012년 19대 총선에서 공천권을 쥔 친박들이 부산의 3선 이상 중진의원을 공천에서 배제시킬 것이라는 말이 돌았다. 한창 공천심사 기간인데, 공천위원 중 한 분이 내 지역구가 전략지역으로 결정됐다고 알려줬다. 공천에서 탈락됐다는 뜻이다. 무소속이라도 출마를 해야 하는지 고민했는데 어머니가 ‘야야, 고만하면 됐다’고 하시더라. 4선에, 국회의장 직무대행까지 했으니 더 욕심내지 말라는 뜻이었다. 그런데 엉뚱한 데서 일이 풀렸다.” ―엉뚱한 데서 풀렸다니…. “그때 내가 국회부의장이었는데, 당시 박희태 국회의장은 전당대회 돈 봉투 사건으로 사직 상태였다. 내가 만약 공천에 탈락해 무소속으로 나오면 당시 야당 부의장인 홍재형 의원에게 국회 의사봉이 넘어가게 된다. 이걸 국회사무처가 새누리당 공천심사위원회에 알려줬더니 4일 만에 번복돼 공천을 받았다.” ―현 정부의 적폐청산이 제대로 가고 있다고 보나. “나는 적폐가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잘못된 시스템, 규제, 관습 등이 문제지. 적폐청산은 좋은데 그로 인해 또 다른 적폐가 생기면 안 된다는 게 내 생각이다. 예를 들어 민주당은 새누리당이 여당일 때 대통령민정수석의 국회 출석을 요구했다. 그렇다면 집권했을 때 스스로 민정수석이 국회에 출석하면 한 가지 적폐가 청산되는 것 아니겠나. 지금 와서는 이명박, 박근혜 정부에서도 안 나왔다고 하면서 안 나오면 되레 적폐를 만드는 것 아닌가.” ―JP(김종필 전 국무총리)가 정치는 ‘허업(虛業·실속 없는 일)’이라고 했는데 끝내고 난 지금 소회가 어떤가. “내가 제일 싫어하는 게 국회가 청와대의 거수기, 통법부 노릇을 하는 것이다. 박근혜 정부 후반기에 각종 법안들을 직권상정하라고 압박이 오는데 만약 못 버텨서 통과시켰다면 지금 나라가 어찌 됐을까. 대의민주주의 국가인 대한민국을 지키기 위해 청와대 압력을 막으라고 정치인이 되고 국회의장까지 된 것 아닌가 하는 확신까지 들 정도였다. 새누리당에서 ‘국회의장 탄핵하자’는 말까지 나왔으니까…. 그 소명을 다했으니 퇴장하는 거지…. 허업이었던 것 같지는 않다.” 이진구 기자 sys1201@donga.com}

    • 2017-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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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종환 前합참의장 “주한미군 있는 한 전쟁 절대 안나”

    “분명한 것은 주한미군이 주둔하는 한 전쟁은 절대 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북한 핵실험 후 온 국민의 관심사가 된 ‘안보’. 관련 뉴스가 홍수를 이루지만 일반 국민 입장에서 가장 관심 있는 것은 결국 ‘전쟁이 진짜 날까’ ‘싸우면 이길까’가 아닐까. 이에 대해 김종환 전 합동참모본부 의장(합참의장·71·사진)은 “주한미군과 싸운다는 것은 미국과 전쟁을 한다는 것”이라며 “북한이 그런 능력도 없고 결과가 뻔한 전쟁을 할 가능성은 없다”고 말했다. 그는 노무현 대통령 재임 중인 2003년 4월부터 2년간 합참의장(육군대장)을 지냈다. 김 전 의장은 “주한미군의 존재 의의는 전쟁을 이기는 것도 중요하지만 전쟁 자체를 막는 ‘전쟁 억지력’에 있다”며 “하지만 주한미군이 철수하면 북한으로서는 해볼 만하다고 여길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현 정부가 추진 중인 전시작전통제권(전작권) 조기 전환과 최근 합의를 보지 못한 ‘미래연합사령부’(가칭) 창설에 대해서도 우려를 표시했다. 미래연합사령부는 전작권 전환 이후 한미연합사령부를 대신하는 조직으로 미군 사령관, 한국군 부사령관인 연합사와는 달리 한국군이 사령관을 맡고 미군이 부사령관을 맡는다. “북한의 적화통일 전략이 1단계 한미연합사령부(연합사) 해체, 2단계 주한미군 철수, 3단계 무력 또는 이념에 의한 적화통일입니다. 1단계 목표가 연합사 해체인데 그걸 우리 스스로 해주고 있는 셈이죠. 연합사 해체는 주한미군이 철수할 빌미를 더 만들어주게 됩니다.” 그는 또 “미래연합사가 창설돼도 미군 무기 체계를 모르는 한국군 사령관이 어떻게 미군을 제대로 지휘할 수 있겠느냐”며 운영 능력에 의문을 표시했다. 죽음의 백조(B-1B), 스텔스기, 항공모함 등 미군이 무기를 지원해줘도 쓸 줄 모르기 때문에 무용지물이라는 것이다. 김 전 의장은 “문재인 대통령이 국군의 날 행사에서 ‘전작권을 가져야 북한이 우리를 더 두려워한다’고 했지만 수긍하기 힘들다”며 “지금은 한반도에서 전쟁이 나면 자동 개입이기 때문에 미군 증원군이 바로 오지만 전작권이 전환되고 연합사가 해체되면 미국 의회 승인을 받아야 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의회 승인을 받느라 와도 매우 늦고, 또 전작권이 전환됐기 때문에 와도 한국군의 지휘를 받아 싸워야 하는데 미군이 그런 전례가 없다는 것. 일부에서 주장하는 전술핵 도입은 “물리적인 면보다는 굳건한 한미동맹 과시, 국민의 불안감 해소 등의 차원에서 상징성이 있다”고 말했다. 김 전 의장은 “처음에는 나도 괌에서 쏘는 것이나 여기서 쏘는 것이나 차이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북한 핵 개발을 방관한 중국에 강력한 경고를 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또 국민들이 안보 걱정은 많지만 정작 실제로는 잘 모르기 때문에 심리적 안정감도 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 전 의장은 “전에 만난 한 미국 안보 관계자가 ‘정치’의 반대말은 ‘원칙’이라고 했다”며 “국민이 안보에 불안감을 많이 느끼는데 안보를 정치적으로 하지 않는 것이 순국선열들에 대한 예의”라고 당부했다.이진구 기자 sys1201@donga.com}

    • 2017-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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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진구 기자의 對話]“우리는 죽어야만 관심 받는 사람들…”

    《 늘 그때뿐이다. 그들이 비명에 스러질 때마다 세상은 “어떻게 이럴 수 있느냐”며 그들의 열악한 처우와 푸대접을 안타까워하고, 정치인들은 “고귀한 희생이 헛되지 않도록 하겠다”며 너도나도 법 개정을 약속하지만…. 시간이 지나 보면 크게 달라진 것은 별로 없다. 소방관을 지방직에서 국가직으로 전환하는 일명 ‘소방관 눈물 닦아주기법’(2016년 7월 발의)도, 현장에서 발생한 민·형사상 책임을 면제해주는 ‘소방기본법 개정안’(2016년 9월 발의)도 1년이 넘게 잠만 자고 있다. 이런 현실에 대해 이기환 전 소방방재청장(62·현 경일대 소방방재학과 교수·사진)은 “오죽하면 ‘우리는 죽을 때만 관심을 받는 사람들’이란 푸념까지 나오겠느냐”고 말했다. 》    ―수십 년간 소방관 인명 피해가 발생할 때마다 처우 개선 목소리가 높았지만 변화는 미미했다. 획기적인 처우 개선이 안 되는 이유가 무엇인가. “소방이 지방 사무고, 99%의 소방관이 지방직으로 지방자치단체 소속이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지자체가 재정이 열악하기 때문에 획기적인 처우 개선을 하는 데 한계가 있다. 국가 지원을 받기 위해 당정 협의를 하면 취지는 공감하면서도 기획재정부는 늘 ‘지방업무라 안 된다’고 했다. 지자체가 지원해야 한다는 것이지. 그래서 소방관들이 국가직 전환을 요구하는 것이다.” ―얼마나 열악한가. “불과 4, 5년 전만 해도 소방관들이 시장에서 파는 공장용 검은 고무장갑을 끼고 불을 껐다면 믿겠나? 방화 처리가 된 장갑이 아니다. 그냥 좀 두툼한 고무장갑이다. 내가 소방방재청장일 때 한 소방대원이 불을 끄다 장갑에 불이 붙어 손에 온통 화상을 입은 일이 있었다. 그때부터 조금씩 방화 처리가 된 장갑을 보급하기 시작했는데 아마 전국적으로 보급이 된 것은 1, 2년이 채 안 될 것이다.” ―나로호를 발사한 게 2009년인데 일부 지역에서는 1, 2년 전만 해도 고무장갑 끼고 불 껐다고? “믿기지 않을 거다. 2001년 소방관 6명이 순직한 서울 홍제동 화재사고 이전에는 방수복과 안전화, 안전모를 제외한 나머지는 사비로 사야 했다. 그나마 2명에 한 개씩이었다. 2교대 근무니까 아침에 퇴근하면서 인수인계하고 가는 거지. 내가 2002년 대구 북부소방서장일 때만 해도 공기호흡기가 없어서 마스크 끼고 지하실에서 불을 껐다. 그냥 일반 흰 마스크다. 지금은 개선됐지만 2002년까지 감기 걸리면 쓰는 마스크를 쓰고 지하실에서 불 껐다는 게 상상이 가나.” ―충분한 지원도 못 해주면서 지자체장들은 소방관의 국가직 전환을 왜 반대하나. “광역시도 공무원의 절반가량이 소방공무원이다. 그런데 공무원 수가 줄면 교부세가 준다. 교부세는 공무원 수에 비례해 주기 때문이다. 절반이나 줄면 엄청 타격이 크니까…. 또 지금은 시도지사가 지시하면 되는데, 국가직이 되면 대등한 관계에서 협의를 해야 하니까…. 지방화 추세에 국가직 전환은 시대에 역행하는 일이라고 하기도 하고….” ―현재는 국가직 1%(소방청)와 99% 지방직(시도 소방본부)으로 나뉘어 있는데 업무상 불편함은 없나. “큰 사고가 났을 때 유기적으로 움직이는 데 애로가 많다. 지금도 소방 업무는 국가 업무가 60%, 지방 업무다 40% 정도 된다. 서울에서 큰 사고가 나면 서울 소방관만 출동하는 게 아니라 경기 인천 등 다른 곳에서도 지원을 나간다. 예를 들어 소방청에서 지시가 온다고 바로 출동할 수 없다. 시도지사에게 보고하고 허락을 받아야 한다. 만약 시도지사가 안 된다고 하면 못 나간다. 그런 게 비일비재하다.” ―목숨을 걸고 일하는 직업인데 생명수당은 좀 되나. “소방관들은 ‘갑종 위험수당’(일명 생명수당)을 받는데 작년 1월에 1만 원 올라 6만 원이 됐다. (웬만한 회사 교통비도 안 되는데?) 그나마 많이 오른 것이다. 내가 일할 때는 2만 원이었다.” (소방관 위험수당은 2002년 3만 원, 2005년 4만 원, 2008년 5만 원이었다 8년 만인 지난해 6만 원이 됐다.) ―출동한 소방관, 구급대원들을 때리는 사람이 있다는데, 때리는 이유가 뭔가? “당사자가 술 먹고 때리는 경우도 있고, 가족 같으면 늦게 왔다고 때리기도 한다. 일단 구급차에 태우면 흔들려 떨어지지 않게 몸을 고정시키는데 그러면 또 ‘왜 묶느냐’며 때리기도 한다. 구급대원 중에는 여자 대원이 많은데 이들을 때리기도 하고…. (맞았는데 가만히 있나?) 가만히 있어야지 어쩌겠나. 뺨 한 대 맞는 정도는 보고 안 하는 경우도 수두룩하다.” (소방청 통계에 따르면 2012년부터 올 7월까지 전국의 소방관들이 당한 폭행·폭언은 870건이라고 한다. 하지만 참고 넘어간 경우를 포함하면 실제는 이보다 월등히 많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여전히 소방·구조 업무에 대한 인식이 낮은 것 같다. “일부 지역에서는 개나 고양이를 구하다 다치면 보상을 안 해준다. 사람을 구하려다 다친 게 아니라는 것이지. 그렇다고 신고가 들어왔는데 안 나갈 수도 없지 않나. 집값 떨어진다고 소방서 못 짓게 하는 사람들도 있고….” ―소방서가 집값을 떨어뜨린다고? “서울에 유일하게 금천구에 소방서가 없다. 그래서 소방서 건립을 추진했는데 시끄럽다고 주민들이 반대해 건립이 늦어지고 있다. (뭐가 시끄럽다는 건가?) 출동할 때 사이렌 울리니까…. 동네가 시끄럽다는 거지. 그래서 주택가에 있는 소방서들은 출동할 때는 사이렌 끄고, 큰 도로에 진입해서야 사이렌을 울리는 곳이 많다. (그게 말이 되나?) 말이 안 되지만 어쩌겠나…. 주민들을 무시할 수도 없고….” (서울소방재난본부에 따르면 일부 주민이 금천소방서 건립을 반대한 명목적인 이유는 ‘지역 발전 저해’다. 당초 예상보다 건립은 늦어졌지만 현재는 합의가 이뤄져가고 있는 상태로 내년 말쯤 착공을 목표로 하고 있다.) ―그러면 큰 도로에 진입하기 전까지는 일반 차량들이 모르기 때문에 안 비켜 줄 것 아닌가. 결과적으로 출동이 늦어지지 않나. “사이렌은 끄고, 경광등과 소방차에서 방송으로 비켜 달라고 한다. 큰 도로변은 땅값이 비싸 짓기 어렵고, 그래서 큰 도로에서 조금 더 들어가면 주택가이기 때문에 이런 문제는 늘 벌어진다.” ―현장에서 가장 답답하거나 억울한 게 뭔가. “정확히 모르면서 말하는 것이다. 화재 진압은 안전한 곳에서 할 수가 없다. 시간이 많이 걸리니까…. 샤워하는 게 아니지 않나. 항상 가장 위험한 곳, 곧 무너질 것 같은데, 그런 자리에서 물을 뿌리고 불을 꺼야 한다. 그런데 그러다 소방관이 다치거나 사망하면 정치권이나 위에서는 ‘왜 그런 위험한 곳에 들어갔느냐’며 질책한다. 그 자리에 서지 않으면 불을 끌 수가 없다. 주민들도 현장에서는 말을 조심해야 한다.” ―일반 주민들이 왜? “불이 나면 사람들이 많이 모인다. 그리고 잘 모르면서 너도나도 한마디씩 한다. 안에 누가 있다느니 하면서…. 그 말을 듣고 소방관들이 안 들어갈 수가 없다. 비록 나중에 아닌 것이 되더라도. 앞서 말한 서울 홍제동 참사가 그런 경우다. 아들이 있다는 말을 듣고 소방관 6명이 구조하러 들어갔다가 집이 무너져 모두 숨졌다. 실제 그 아들은 먼저 빠져나왔는데….” ―소방에 대한 인식이 낮은 데는 역대 청장들의 출신 문제도 있지 않을까? 대부분 행정안전부 고위 간부 출신이 많던데….(우리나라 소방조직은 1992년 시도자치소방에서 2004년 소방방재청, 2014년 국민안전처 내 중앙소방본부, 올해 소방청 체제로 변해왔다.) “소방방재청 이후 역대 청장 중에 현장에서 불을 꺼본 소방직 출신이 현 조종묵 청장과 나, 최성룡 전 청장 등 3명뿐이다. 나머지는 행안부 고위 간부 출신이다. 마인드가 아무래도 소방보다는 행안부 쪽일 수밖에 없지 않나. 지금은 소방청이 독립기관이라 청장 차장이 모두 소방직 출신이지만, 소방방재청 시절에는 정부조직법에 청장이 소방직이면 차장은 일반행정직, 청장이 일반행정직이면 차장은 소방직이 해야 한다고 명기돼 있었다.” ―일반행정직은 소방·방재 분야는 잘 모르지 않나. 국방부라면 장관이 군인 출신이면, 차관은 일반 공무원이 해야 한다는 식인가. “그렇다. 당시 소방방재청에는 소방직, 일반행정직, 기술직 등 세 부류가 있었다. 방재는 사실 토목이라 소방보다는 기술직 분야인데, 그래서 기술직을 배려한 것이라고는 했다. 그런데 정작 기술직으로 청장 된 것은 한 사람뿐이고 나머지는 일반행정직에서 했다. (상식적이지 않은 인사 같은데?) 상식적인 것은 아닌데, 우리가 안 된다고는 했지만 끝내 잘 안 된 것이지….” ―‘소방관 눈물 닦아주기법’과 ‘소방기본법 개정안’이 통과될 것이라고 보나. “쉽지 않을 거다. 특히 국가직 전환은 지자체장들 중 반대하는 사람이 많으니까…. 민·형사상 피해 면제도 발생한 모든 피해를 면제해 주는 게 아니라 ‘고의 또는 중대 과실이 없는 경우’에 한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실제 현장에서 적용하는 데 애로점이 있다. 그 긴박한 상황에서 동시에 자신에게 과실이 없다는 증거를 모아야 하지 않나. 나중에 자신이 물어주지 않으려면…. 당연히 통과돼야 하고 필요한 법이지만, 국회 논의 과정에서 이런 부분까지 섬세하게 조절됐으면 좋겠다. 결과적으로 나중에 보면 불필요한 행위였다고 해도 그 긴박한 재난 상황에서 일부러 부수고 피해를 주려는 소방관이 세상에 어디 있겠나.” 이진구 기자 sys1201@donga.com}

    • 2017-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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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진구 기자의 對話]“4강 대사, 비상시국엔 정무적 판단-협상력 더 필요”

    《 남의 눈에 티는 잘 보여도 제 눈의 들보는 안 보인다고, 남을 감시하는 기관이 정작 자신에게는 관대한 경우가 많다. 국회도 그렇다. 해마다 국정감사가 열리면 의원들은 피감기관을 매섭게 질타하지만, 정작 자신들과 자신들이 몸담고 있는 국회(사무처, 입법조사처, 예산정책처, 도서관)에 대해서는 모르는 척 넘어가는 경우가 많다. 3부 중 하나인 입법부는 사실상 감시의 사각지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셈이다. 아마 다음 달 12일부터 열리는 올해 국정감사도 비슷할 것이다. 이에 대해 우윤근 국회 사무총장은 “국회가 스스로에게 엄격하지 못했다는 점에 충분히 공감한다”며 “내부 감사, 인사 등 분야에서 국회를 변화시키기 위해 많이 노력했는데 중간에 떠나게 돼 아쉬움이 많다”고 소회를 말했다. (그는 5일 주러시아 대사에 내정됐다.) 》 ―러시아통으로 알려졌는데 특별한 인연이 있나. “주한 러시아 대사관 법률고문으로 7년 정도 활동했다. 그 인연으로 대사관에서 주선해 국립상트페테르부르크대 대학원에서 국제정치학 석사학위를 받았고, ‘한-러 대화’라는 양국 교류 모임에서 정치분과위원장도 맡고 있다. 2013년 11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서울 중구 을지로 롯데호텔 앞에서 러시아의 대문호 푸시킨 동상 제막식을 가졌는데 이 모임이 큰 역할을 했다.” ―비외교관 출신인 데다 외교안보 분야 경험이 적어 적절치 않다는 우려도 나온다. “전문적인 외교관이 갖는 장점도 있지만 반대로 그것이 한계가 될 수도 있다. 지금 같은 비상시국에는 오히려 정무적 판단과 협상력이 더 필요하지 않을까…. 양자가 조화를 이루도록 노력하겠다.” ―문재인 대통령은 러시아, 북한과 연계한 동북아 경제협력에 적극적이다. 하지만 지금은 강력한 대북제재가 필요한 상황인데 동북아 경제협력과는 상충되지 않나. “어려운 문제인 것은 사실이다. 정치는 정치대로 풀어 나가야겠지만, 경제협력은 또 다른 차원에서 서로에게 이익을 준다면 풀어 나갈 해법이 있지 않을까. 특히 6일 문 대통령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서 북방경제협력위원회를 통한 극동개발협력과 남-북-러 3각 협력의 기초를 다지겠다고 한 만큼 우선은 경제협력을 통한 상호 이익을 추구한다면 실마리를 풀어 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국회를 변화시키기 위해 여러 노력을 했고, 특히 올 초 국회가 청소노동자들을 정규직화한 것은 큰 화제가 됐다. 그런데 실제는 아직까지도 여전히 비정규직이라고 하는데 어떻게 된 것인가. “순차적으로 정규직으로 가는 과정인데 너무 성급히 단정해 보도된 것 같다. 종전에 국회 청소노동자들은 용역회사 소속이고, 국회가 이 용역회사와 계약을 하고 일을 시키는 간접 고용 방식이었다. 이들을 국회 정규직으로 전환하려면, 먼저 국회가 비정규직으로 직접 고용한 뒤 2년 이상 근무하면 정규직으로 전환하는 ‘비정규직법’을 적용해 전환시켜야 한다. 따라서 현재는 ‘국회가 직접 고용한 기간제(비정규직) 근로자’ 상태지만, 2년 후에는 정규직으로 모두 전환된다. 지금은 일종의 과도기이다.” ―바로 정규직으로 전환할 수는 없는 것인가. “그분들만 국회 정규직으로 채용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게 하려면 누구나 공모할 수 있는 공개 채용 방식으로 해야 한다. 하지만 이렇게 되면 일반 지원자와 경쟁을 해야 하기 때문에 이분들 중에 몇 분이나 합격할지 알 수가 없다. 연세가 많은 분도 있는데, 젊은 지원자가 오면 떨어질 가능성이 많지 않나. 그래서 국회가 직접 고용한 뒤 순차적으로 정규직화하는 방식으로 이분들과 지난해 말 합의했다. 항간에 ‘정규직 했다더니 도로 비정규직’이라고 말하는 것은 전환 절차를 이해하지 못하고 하는 말이다.” ―청소노동자 외에도 국회 안에 간접 고용 직종이 꽤 있다. 모두 직접 고용을 통해 정규직으로 전환할 계획인가. “시설, 기능직 분야에 아직도 350명 정도의 간접 고용이 있다. 올해 계약이 끝나는 사람들이 40명이 넘는다. 이분들도 청소노동자들처럼 같은 절차를 거쳐 정규직화할 계획이다.” ―반대는 없었나. “기획재정부의 반대가 너무 심했다. 공공기관이 간접 고용을 직접 고용으로 하면 추후에 파급이 너무 크다는 것이다. 그래서 막판에 정세균 국회의장이 이 문제가 선결되지 않으면 예산 심의 못 한다고 밀어붙여 간신히 설득시켰다. 아주 애먹었지….” ―사실 직접 고용보다 청소노동자들에게 절하는 사진이 더 큰 화제가 됐다. “그날 청소노동자 직접 고용 기념행사가 다 끝나고 나만 사측 대표로 남아 있었는데, 순간적으로 청소노동자분들이 연세도 많은데 안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분들은 매일 새벽같이 나와서 청소하는데 정작 국회는 정치하는 나 같은 사람들 때문에 욕을 먹고 있으니까…. 그래서 순간적으로 울컥해서 사과해야겠다는 생각에 한 것인데…. 그게 전부다. 그런데 그분들도 너무 당황해하더라….”  ―다음 달부터 국정감사다. 그런데 정작 국회(사무처, 입법조사처, 예산정책처, 도서관)에 대한 국감은 너무 형식적이다. 남을 감시하는 기관이 자신에게는 너무 관대한 것 아닌가.(국회사무처 등 입법부 전체에 대한 국감은 2015년 3시간 반, 2016년 3시간 등 해마다 통상 두세 시간으로 끝난다.) “충분히 공감한다. 국회사무처 등이 행정부처럼 몇천억 원짜리 사업을 하는 집행기관이 아니라 의원들의 의정 활동을 도와주는 기관인 데다, 의원들과 늘 함께 일하다 보니 국감에 대한 필요성을 크게 못 느낀 것 같다. 그래서 어쩌면 국감보다 내부 감사가 더 필요한데 총장이 된 후 보니 문제가 좀 있었다. 국회도 좀 더 세게 국감을 받아야 할 필요성이 있다.” ―어떤 문제가 있었나. “국회 공무원들은 몇백 대 1의 입법고시를 뚫고 들어온 우수한 인재들이다. 그런데 (국회라는 특성상) 지방도 거의 안 가고 이 안에서만 20∼30년을 함께 근무한다. 그러다 보니 서열 의식이 강하고 선후배 관계도 아주 돈독하다. 이런 점 때문에 내부 감사가 철저하지 못했다. 온정주의로 흐르기도 하고…. 그래서 앞으로는 감사관을 반드시 외부에서 데려오는 강도 높은 감사시스템 마련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징계 결정도 합의제로 하고….” ―합의제? “감사원처럼 감사위원을 두는 방식이다. 그래야 좀 더 공정하고 눈치 보지 않고 징계를 결정할 수 있을 것 같다. 이참에 감사 시스템 자체를 바꿔 보자는 것이다.”(최근 국회에서는 고위 간부의 폭행과 횡령, 성추행 등의 사건이 발생한 데다 가해자에 대한 처리도 미약해 지탄을 받았다.) ―국회 공무원이 모든 공무원 중 최고의 갑 아닌가. 행정부 공무원이 국회 공무원을 접대할 정도로…. “과거에는 입법부가, 의원도 마찬가지고 행정부에 대해 ‘갑질’하는 경우가 있었다. 국민들이 그렇게 생각하기도 했고…. 하지만 이제는 ‘청탁금지법’(일명 김영란법) 때문에 불가능하다. 김영란법 시행 직후인 작년 국감 때 보니까 그런 문화가 거의 사라졌다.” ―국회는 내부 감사는 느슨하고, 국감은 고작 두세 시간, 감사원 감사는 직무감찰은 받지 않고 회계감사만 받는다. 만약 개헌으로 내각제가 됐을 때도 이렇게 감사 사각지대가 되면 곤란하지 않나. “국회사무처 등도 세게 해야겠지만 관건은 모든 결정권을 갖고 있는 의원들이다. 의원들을 어떻게 감시할 것인가가 더 본질적인 문제다. 입법부의 99% 결정권은 의원들 손에 달려 있으니까…. 소위 말하는 특권도 없애야 할 테고…. 문제는 그보다 (개헌으로) 국회에 힘을 실어주는데 아직도 많은 국민들이 동의를 못 하고 있다는 점이다. 현실이…. 나도 개헌론자지만 국민들이 ‘여야가 이렇게 갈라져 싸우고 있는데 무슨 개헌이냐’고 하면 할 말이 없다. 지금은 괜히 얘기 꺼내서 뭇매만 맞고 있다.” ―국회와 정당은 별개인데, 우리 국회는 너무 정당의 지배를 많이 받고 있는 것 같다. “예속이라 보는 것은 너무 과하고…, 영향을 많이 받고 있기는 하다. 3년 전 내가 원내대표 때 도서관장을 처음으로 공모했는데… 요새 또 야당이 내놓으라고 논란 중이다. 예산정책처장과 입법조사처장은 공모제다. 다만 정책연구위원이라고 해서 정당에서 추천해 (국회가) 급여를 주는 자리가 꽤 있다. 나름대로 일을 하지만 국민이 보기에는 정당에 있었다고 나라에서 먹여 살리느냐 하는 비판이 있을 수 있다. 그래서 정세균 국회의장도 이들의 수를 더 이상 늘리지 말라고 결사반대하고 있다. 공무원에게 1, 2급은 평생을 바쳐도 올라가기 힘든 자리 아닌가.” (편집자 주: 각 당에는 정책연구위원이라는 자리가 있고, 이들 중 일부는 정당이 아닌 국회가 급여를 지급한다. 수는 각 정당의 규모에 따라 다르며 대체로 1, 2급이다.) ―의원 시절과 가장 다른 점이 무엇인가. “의원 할 때는 잘 몰랐는데 좀 창피하고 부끄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국민 뜻에 따랐다기보다는 당 입장을 충실히 반영한 게 더 많지 않았나 하는…. 당의 선거를 위해서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승리에 보탬이 되는 것만 하지 않았나 하는 게 후회가 되더라….” 이진구 기자 sys1201@donga.com}

    • 2017-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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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진구 기자의 對話]“나는 보수-진보 구애받지 않는 상식적 개혁주의자”

    《 6월 27일 정부는 신고리 5, 6호기 원전의 건설을 잠정 중단하고, 공론화를 거쳐 시민배심원단이 공사 여부를 결정하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이에 앞서 이날 오전 열린 국무회의에서는 이낙연 국무총리와 김영춘 해양수산부 장관만 이 문제와 관련해 의견을 내고, 주무 부처인 주형환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은 침묵했다. 이런 사실이 알려지면서 정부의 탈원전 정책에 대해 졸속 추진과 비전문가에게 의사 결정을 맡긴다는 비난, 누가 이 속도전을 총괄하는지 등에 대한 궁금증을 낳았다. 그들은 왜 공사 일시중단이라는 언뜻 이해하기 힘든 카드를 꺼냈을까. 》  ―문재인 대통령과 인연이 좀 있었나. “별 인연은 없는데… 과거 노무현 전 대통령에게 내가 많이 대들었다. 열린우리당 출범하고 1년 반 가까이 밤에 젊은 의원들과 청와대에 자주 갔는데, 항상 좋지 않게 끝났다. 언쟁이 벌어져서…. 주로 내가 ‘그건 아닌데요’ 하고 총대를 메는데 우리가 하는 얘기를 잘 안 받아들였다. 나중에는 당 비상대책위원들하고 직언하다 불편한 상황도 만들어지고…. 그때가 문재인 대통령이 비서실장일 때인데…, (그것도 인연이라면) 별로 안 좋은 기억으로 시작된 인연인 셈이다.” ―그 이후에도? “대통령과 부산에서도 둘이 만난 경우가 거의 없다. 대선 경선 때 그쪽에서 도와 달라 했는데 안 했다. 내가 김부겸(행정안전부 장관), 안희정(충남도지사)과 친한데, 그때 문재인 후보는 상종가고 이 사람들은 바닥이어서… 인간적인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실세라는 말이 나오는데…. “국무회의에서 원전 문제 얘기한 것 갖고 그러는가? 좀 튄다고 하더라. 딱 한 번 말했는데…. 그날 국무회의에서 (신고리 5, 6호기) 공론화위원회를 만들겠다는 말이 나와 생각한 걸 말했다.” ―주무 장관도 아닌데 왜 나섰나. “내가 국회에서도 탈(脫)원전 의원모임 대표였다. 공론화위원회를 만든다는데 생각해보니까 두 가지 문제가 있었다. 하나는 부산, 울산처럼 원전 30∼50km 안에 사는 사람들과 몇백 km 밖에 사는 사람들의 여론을 똑같은 비중으로 반영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것이다. 체감도가 다르다. 또 하나는 이런 사회적 논의가 공정하게 진행되려면 공사를 (일시)중단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걸 얘기했다.” ―중단한 상태에서 논의하는 게 공정하다고? “5월까지 공사에 1조 원이 넘게 들어갔기 때문에 중단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데, (일시중단을 안 하면) 공론화 기간 동안 더 많은 공사가 진행될 수밖에 없다. 그 후에는 중단하면 안 된다는 논리가 더 세질 테고…. 그건 불공정하다고 생각했다. 총리도 전에 영광 원전이 있는 전남 영광-함평이 지역구라 한두 마디 했고…. 그러고 지나갔다. 뭐 결정한 게 없는데….” ―국무위원이 회의에서 의견을 내는 것은 당연하지만 장관은 원전이 있는 부산 지역구 의원이다. 속된 말로 이해당사자인데 객관적이라고 말할 수 있나. “이런 문제를 그런 식으로 기계적 가치중립성을 추구하려고 하면 안 된다. 서울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 부산 사람들이 느끼는 공포감을 등가로 놓으면 안 되지 않을까 싶다. 이걸 지역구를 대변한다고 보는 건 안 맞는 것 같다.” ―신공항 놓고 부산, 대구 국회의원들이 서로 자기 동네가 타당하다고 싸운 것은 객관적이라고 볼 수 있나. “그 건은 이익추구 사안이라 그런 건데…. 원전은 이익을 추구하고 대변하는 게 아니다. 원전 사고가 나면 부산 울산 사람들은 다 죽거나 도망가야 한다. 서울 사람은 거의 피해가 없지만…. 그러니까 거부감이 덜한 것 같다.” ―궁극적으로 모든 원전을 없애야 한다는 것인가. “그렇다. 단, 지금 당장 모든 원전을 폐기해야 한다는 급진적인 것은 아니고…. 우리가 주장하는 것은 60년 탈원전이다. 울산 신고리 4호기가 올해 새로 가동된다.(인터뷰 이후 올해 말 가동 예정이던 신고리 4호기가 내년 9월로 연기됐다) 수명이 60년이다. 수명이 다 돼가는 원전은 하나씩 끄고, 새로 짓지 말고 60년 후 원전 제로를 만들자는 거다.” ―전기 수급은 어떻게 하나.  “몇 년에 하나씩 꺼 가면 2025년까지는 전기 수급에 차질이 없다고 전문가들도 전망하고 있고, 전기에너지 수급계획을 짜는 사람들은 늘 (계획을) 넉넉하게 잡는다. 계획은 좀 넉넉하게 잡는 것이 맞다. 또 하나는 경제성장률을 좀 높게 전제하고 수급 계획을 짠다. 전기가 남는 셈이다. 그리고 에너지 소비를 줄인다는 마인드가 그 사람들에게는 없다. 신재생 에너지에 의한 전기 생산에는 굉장히 소극적이고…. 새로 가동되는 것도 있으니 하나씩 꺼도 10년 정도는 큰 차질이 없고, 그 사이에 신재생 에너지에 대한 투자를 강화하면 60년 후에는 원전이 없어도 충분하다는 자신감에 이 계획을 짠 거다.” ―한국해양진흥공사 설립이 숙원 사업이라고 했는데…. “우리 조선이 무너지고 있는데, 우리 해운사들은 90%가 중국 등 외국에서 배를 만든다. 큰 배는 몇천억 원씩 하기 때문에 조선소가 은행이나 보험사의 지급보증(RG·refund guarantee)을 받지 못하면 선주(船主)가 발주를 안 한다. 조선소가 파산하면 돈을 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국내 금융권은 부도 우려 때문에 우리 조선사에 지급보증을 안 해준다. 반면에 중국은 지급보증도 잘해주고, 건조비도 우리보다 10∼20% 싸다. 그러니 누가 국내에서 배를 만들겠나. 공사를 만들면 신용이 있으니 금융 지원을 받기 쉽고, 여기서 선박 발주, 임대 운영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하겠다는 것이다. 화물 운송비만 받는 해운업이 아니라, 리스 선박금융업 등 해운과 관련한 총체적 사업을 하는…. 쉽게 말해 해운업을 지원하는 국영기업을 만들려고 한다.” ―국내에 없는 모델이라 시간이 걸릴 것 같은데, 내년 지방선거 전에 되나. “올해 안에 해양진흥공사법을 통과시키고, 내년 9월 중에는 출범시킬 생각이다. 부산시장? 지방선거는 생각하지 않고 있다.” ―인사청문회에서는 그렇게 말했는데, 다른 데서는 “장담할 수 없다”고 다시 애매하게 말했던데…. “사람 일에 100% 확신할 수 있는 게 어디 있을까. 1% 가능성이라도 있으면 ‘절대 안 한다’는 말은 쉽게 할 수 없다는 뜻이다. 99% 이상 안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역대 해수부 장관 중 상당수가 부산 출신이다. 부산 사람들은 왜 늘 해수부가 자신들 몫이라고 생각하나. 장관은 지역주의 타파를 위해 내려갔는데, 이것도 또 다른 의미의 지역주의 아닌가. “꼭 부산 사람만 해야 하는 건 아니다. 그런데 지역 문화가 조금 다르긴 하다. 바다와 관련해 항상 중앙정부에 문제를 제기하는 게 부산이다. 해수부를 없애면 왜 없앴느냐고 항의하고 부활시키고…. 부산 지역 신문에는 정치부 경제부 있듯이 해수부가 따로 있는 곳도 있다. 아예 부서가 있다. 그런 관심들이 자연스럽게 반영된 게 아닌가 싶다.” ―당을 많이 옮겼는데, 지향하는 정치가 뭔가. (그는 YS(김영삼) 비서로 시작해 민자당(신한국당 한나라당)-열린우리당-창조한국당을 거쳐 민주당에 돌아왔다.) “몸부림이라고나 할까…. 나는 내가 보수 진보에 구애받지 않는 상식적 개혁주의자라고 생각한다. 한나라당이 좋은 보수가 될 수 있다면 거기서 헌신해도 좋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도저히 불가능하다는 생각에 나와서 열린우리당 만들어 실험해 본 거고…. 열린우리당 문 닫을 땐 그 좌절 때문에 불출마 선언하고 당시(2007년) 대선에서 창조한국당 문국현 후보 지지 선언을 했다. 그가 될 거라 생각하진 않았다.” ―상식적인 정치를 말했는데, YS의 3당 합당은 상식적인가. 그건 견디지 않았나. “1990년 3당 합당 후에 YS가 직접 ‘이번이 마지막 싸움인데 한 번만 더 도와주면 안 되겠냐’고 부탁했다. 민자당 대선 후보가 돼야 했으니까…. 안 되면 정치를 떠나겠다고…. 난 YS가 민자당에서 대통령이 되겠다는 게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지분도 20%밖에 안 되고…. 안 된다고 생각했기에 내가 (YS의) 정치적 장례를 치러 드려야겠다고 생각했다. 다른 사람들이 시기할 정도로 굉장히 나를 총애해줬는데, 그 갚음은 해야겠다고 생각한 거다.” ―가이샤쿠(かいしゃく)를 말하는 건가. (가이샤쿠: 할복 시 고통을 줄여주기 위해 뒤에서 목을 쳐주는 일본 사무라이 문화.) “그렇다. 이용만 당하고 토사구팽 당할 거라 생각했으니까…. 그리고 몽골 기병대처럼 민자당 내 민정계를 다 격파했다. 김덕룡, 최형우 이런 분들과 같이…. YS를 대선 후보로 안 밀면 우리가 아는 패 다 깐다. 판 깨고, DJ(김대중) 돕는다면서…. 장례 치르러 갔다가 뜻밖에 대통령을 만든 셈이다. 하하하.” ―문 대통령이 잘하고 있다고 보나. “지금까진 괜찮은데…, 한꺼번에 너무 많은 미션을 던져서….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도, 신고리 원전 5, 6호기도 본인이 시점을 선택할 수 없는 문제가 됐다. 세금 문제도 세수와 재원 문제를 안 다루면 무책임한 일이 되니까 지금 안 던질 수는 없는데, 한꺼번에 많은 문제를 던지면 당연히 많은 반발이 생기기 마련이고…. 그만큼 힘겨운 행군을 해야 된다. 불가피한데 안쓰러운 부분이 있다.” 이진구 기자 sys1201@donga.com}

    • 2017-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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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진구 기자의 對話]“저도 경기고 쳤다가 떨어지긴 했지요”

    《 MB는 환경 파괴를 위해 4대강 사업을 했을까? DJ는 북한 핵 개발을 돕기 위해 햇볕정책을 한 것인가?내가 싫어하는 집단이 추진하면 그들에게는 단 한 치의 선한 의도도 있을 리 없다고 확신하는 사람들. 동전도 양면이 있건만, 우리의 ‘성전(聖戰)’ 정책에 반대하면 무조건 기득권으로 매도하는 사람들. 서로에게 상대는 ‘우리들의 아름다운 세상을 망치려는 악마’일 뿐이다. 그래서 저들도 나처럼 ‘지금보다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중’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여기 또 하나의 전선이 생겼다. ‘외국어고·자사고 폐지.’ 절충은 없다. 한쪽이 이기면, 다른 한쪽은 죽어야 한다. 더욱이 이 문제는 나보다 더 소중한 내 아이의 인생이 걸린 문제. 안 먹으면 그만인 미국산 쇠고기와는 차원이 다르다. 》  ―요새 많이 힘들겠다. “새 정부의 외고·자사고 폐지 공약이 막 이슈가 된 시점에 공교롭게 국제중, 외고, 자사고에 대한 재평가 결과를 발표하게 돼서…. 이번 재평가가 폐지의 시발점이 되길 바란 사람이 많았던 것 같다. 발표 전에는 폐지 반대 측 항의가 많았는데, 지정 취소된 학교가 없다 보니 후에는 폐지 찬성 측에서 많이 항의했다. 내가 폐지론자이다 보니 뭔가 기대한 것도 같고…. 권한이 있으니 모두 지정 취소할 수 있는데 여론의 눈치를 봤다고 오해하기도 하고….” ―지정 취소가 안 되는 것으로 평가 결과가 나왔을 때 무슨 생각이 들었나. “어느 정도 예상은 했다. 한두 곳은 지정 취소될지 모른다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자사고 취소 등 수평적 학교 다양화를 위한 내 노력이 일순간 비판받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 하지만 비판이 두려워 행정의 합리성을 무시하고 평가 결과를 왜곡할 수는 없었다.” ―왜 외고·자사고를 일반고로 전환하려는 건가. “외고·자사고는 고교 평준화의 문제점을 보완하기 위해 출범했다. 하지만 우수 학생들을 독과점하다 보니 결국 설립 목적보다 대학 진학에 유리한 학교가 됐다. 학생 선발 시기, 방법, 교육과정 운영 등에도 특혜적 요소가 있고…. 그 결과 고교 서열화가 유발되고, 일반고 황폐화가 가속화됐다. 여기에 들어가기 위해 초등학교 때부터 사교육을 받게 되고, 그래서 (부모의)소득격차가 다시 교육격차로 이어지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고….” ―외고·자사고가 만악의 근원인가. 이들만 없애면 그 문제가 해결되나. “어떻게 표현해야 하나…. 외고·자사고를 개별적으로 혐오하고 핍박하려는 게 아니다. 좀 더 나은 교육을 받으려고 외고·자사고를 선택한 학생, 학부모를 문제 삼는 것도 아니다. 이들 학교 역시 전체적인 우리 교육의 불합리성에서 비롯된 결과적 현상이다. 우리 고교체제가 어떻게 돼야 하는지에 대한 문제라는 것이다.” ―뭔 소리인가. “(폐지 반대 측은)수월성 교육에 대한 욕구가 많다고 말한다. 수월성 교육이란 서열과 관계없이 학생의 고유한 능력을 최대한 발현하게 해주는 것이다. 그런데 ‘수월성 교육’을 말하면서 실제는 ‘서열화 교육’을 하고 있다. 외고·자사고를 원하는 이유는 더 좋은 입시교육을 받아서 좋은 대학을 가고자 하는 것 아닌가. 이해는 한다. 그 욕구 자체를 부정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그것이 정상인 것은 아니다. 지금 외고·자사고가 가진 특권적 지위와 역할이 분명히 있고, 그것이 고교체제를 더욱 황폐화시키고 있기 때문에 원인 제거 차원에서라도 제도적 폐지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영재고, 과학고가 제외된 이유는 무엇인가. 고교 서열화라는 측면에서는 외고·자사고와 동일한 것 아닌가. “영재고, 과학고가 고교 서열화의 정점에서 사교육, 특히 선행학습형 사교육을 유발하는 등 개선 요소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다만, 영재고는 영재교육진흥법을 받고 있고, 과학고는 여러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이공계열 대학 진학률이 80%를 넘는 등 설립 목적에 어느 정도 부합하는 운영을 하고 있다는 국민들의 인식이 있다. 이 부분은 가까이는 과학고의 전형 방법 개선, 멀리는 학교 형태에 대한 고민(위탁교육기관 전환 제안 등)도 필요하다고 본다.” ―외고·자사고가 특권학교라고 하지만 그래도 돈으로 들어가는 학교는 아니다. 하지만 평준화 학군제가 된다면 이제는 집이 부자라 좋은 학군으로 이사 갈 수 있는 집만 혜택을 보는 것 아닌가. “특목고 및 자사고가 사교육에 바탕을 둔 소득과 사회적 격차의 반영임은 이미 주지의 사실이다. 외고·자사고가 돈으로 들어가는 학교는 아니지만, 일단 입학하면 일반고에 비해 3배가량의 학비가 들고, 부수적인 교육비까지 포함하면 5배 이상의 교육비를 부담하는 학교도 있다. 외고-자사고-일반고로 이어지는 수직적 서열 체계는 이들 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의 계층 배경과 밀접하게 결부되어 있다. 이 같은 배경 특성에 따른 분리교육이 계층 간 불평등을 심화시키는 한편 민주시민의식 및 미래역량 함양에도 커다란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다. 소득 격차가 교육 격차로 이어지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을 필요가 있다.” ―엄격한 감독을 통해 설립 목적대로 운영하게 하면 되지 않나. 꼭 폐지해야 하나. “성적과 부모 배경이 비슷한 아이들을 따로 모아 교육하는 ‘분리 교육 학교체제’는 사회통합에 역행하는 것이다. 미래에는 남을 이기기 위한 공부, 지식 위주 공부보다 배려·공감·협력 능력과 자기주도적 판단, 결정 능력이 더 중요하다. 이런 능력은 동질 집단보다 이질 집단에서 더 잘 배울 수 있다고 본다. 높은 학비로 장벽을 치고, 조기 선발을 통한 분리 교육으로는 새로운 미래를 준비할 수 없다.” ―일반고로의 전환이 되레 하향 평준화를 부르는 것 아닌가. “외고·자사고를 일반고로 전환시킨다고 모든 일반고가 갑자기 좋아질 것으로 보진 않는다. 하지만 이것이 일반고의 교육역량 회복을 위한 충분조건은 아니더라도 필요조건은 되지 않을까. 외고·자사고의 일반고 전환이 곧 일반고를 북돋는 과정이라 생각한다.” ―외고·자사고가 생기기 전에도 이미 고교 서열화는 존재했다. 강남 8학군이 그 반증 아닌가. 평준화 찬성자들은 왜 똑같지 않은 학교를 똑같다고 우기고, 가라고 하나. “고교 평준화 이후에도 학군 간, 학교 간 차이가 있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중학교에서의 극심한 입시 경쟁을 상당 부분 완화시켰고, 보통 교육과정인 고교 교육의 공공성과 기회 균등을 확보한 면도 있다. 다만, 아직까지도 존재하는 지역 간, 일반고 간 학력격차 등을 어떻게 해소할 수 있을지 고민인 것은 사실이다.” ―중앙고를 나왔는데, 명문고였나. “명문고였다. 후기 명문고…. 서울에는 전기에 경기, 경복, 서울고 등이 있고, 후기는 중앙고가 있었다. (경기, 경복 시험 봤나?) 저도 경기 보고 떨어졌다. 하하하. 우리 친구들이 거의 떨어져서 중앙고에 대거 갔지…. 솔직히 과거 명문고였던 곳들이 지금은 외고·자사고 방식을 통해 과거의 명성을 회복하려는 열망 같은 게 있다.” ―고교 평준화로 과거의 경기, 경복고는 없어졌지만 다시 외고·자사고가 그 뒤를 이었다. 지금 폐지해도 또 제2, 제3의 경기, 경복이 생기지 않을까. “그래서 교육개혁이 사회개혁과 함께 가야 하는데…. 지금 같은 동일한 사회경제적 조건이 유지된다면 이번에 폐지돼도 또 제2, 제3의 일류고 체제가 출현할 개연성은 있을 수 있다. 잘사는 사람과 못 사는 사람이란 결국 잘사는 학부모와 못 사는 학부모와 같은 말이다. 양자의 간극이 점점 커지는 상황에서 교육 투자를 하다 보니 엄청난 사교육 격차가 생기고, 이것으로 교육 경쟁의 승자가 결정되고 있다. 사회경제적 서열화를 완화하지 않는 한 이번에 (고교체제를) 해체적으로 개편해도 부활할 가능성은 있다.” ―정책의 목적만큼 중요한 게 추진 방식이다. 시도교육청 평가를 통해 지정을 취소하는 것이 말이 되나. 탈락을 정해 놓고 평가를 하라는 것 아닌가. “이미 발표했지만 5년 주기의 성과 평가를 통해 일반고로 전환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기본점수만으로도 탈락시키기가 어렵다. 또 시도교육청별로 다양한 결과가 나올 것이다. 그래서 교육부가 ‘평가를 통한 전환’을 넘어 좀 더 원숙한 다음 단계로 나아갔으면 좋겠다. 정부가 초중등교육법 시행령 개정을 통해 일괄 전환하는 것은 국무회의에서 의결만 하면 된다.” ―일각에서는 교육감이 공을 교육부로 떠넘긴다고도 말한다. “외고·자사고가 폐지되어야 한다는 점에서는 누구보다 강한 입장을 갖고 있다. 모양새가 정부에 공을 넘긴 것처럼 보이나 억울한 면이 있다. 오히려 구체적인 로드맵까지 제시하고 강력히 요구했는데…. 교육감에게 주어진 것은 ‘지정 취소권’이 아니라 ‘평가 의무’다. 기존의 평가 기준을 갑자기 변경해서 인위적으로 점수를 낮게 줘 탈락시키는 행위는 허용될 수 없다. 탈락시키기 위해 평가 기준을 자의적으로 만들고, 0점을 준다면 그것은 정상적인 평가도 아니고, 매우 부당한 짓이다. 교육감의 권한 남용이 아닌가.” ―너무 첨예한 문제다 보니 결정하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걸릴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정치문제로 비화할 수도 있고…. “그렇다. 교육개혁이 정치에 의해 규정되는 부분이 있다. 그래서 내년 재·보궐 선거나 지자체 선거 등으로 인해 교육개혁을 추진할 힘을 상실할 수 있다는 우려도 있다. 그래서 많은 교육단체가 빠른 개혁을 주문하는 것 같다.” ―속도에 치중하면 충분한 논의나 보완책을 마련할 시간이 적고, 그만큼 부작용이 많이 나오지 않겠나. “그 점은 솔직히 인정해야 할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자사고 폐지냐 유지냐의 차원을 넘어 특목고·외고·자사고·일반고의 ‘동시전형’과 함께 ‘선지원 후추첨제’를 진행할 것을 제안했다. 고교체제 개혁이 늦어지더라도 추첨제와 결합된 동시전형을 하면 외고·자사고에 일류 학생이 집중되는 것을 어느 정도 완화시킬 수 있다.” ―외고·자사고 폐지는 진보주의자들의 사상적 유희 아닌가. ‘저들만 타도하면 좋은 교육을 할 수 있다’는 식의 겉멋? “겉멋이라기보다는…, 조금 더 순수주의적이고, 원칙주의적인 개혁 경향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현실적인 복잡한 문제에 대응해 (그에 걸맞은) 복잡한 패키지를 개발하는 방식보다는 훨씬 더 순수하고 원칙적인 형태의 개혁을 하려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예를 들면 외고·자사고 폐지가 그런 점이 있는 거지.” 이진구 기자 sys1201@donga.com}

    • 2017-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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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진구 기자의 對話]“전사자를 전사자라 못 부르고…”

    《<미 해군 군견 ‘딩고’(2003∼2017)를 기리며/‘…우리는 함께 어두운 밤을 지켰습니다…’>  이달 초 미국 플로리다주 잭슨빌에서 미 해군 폭발물 탐지견 ‘딩고’의 장례식이 열렸다. 딩고는 이라크, 아프리카 근무를 포함해 10여 년간 50여 회의 대통령 경호작전에 참여했으며 은퇴 후 자연사했다. 의장대가 도열한 장례식에서는 21발의 예포가 발사됐고, 곱게 접은 성조기가 딩고의 조련사에게 정중히 전달됐다(아래쪽 사진). 딩고의 유해는 죽은 군견들을 위한 기념비 아래 매장됐다. 》  2002년 6월 29일 서해 북방한계선(NLL)에서 북한 초계정이 우리 해군 고속정(참수리 357호)을 기습 공격했다. 이 공격으로 참수리호 정장 윤영하 소령(추서 후 계급) 등 6명이 전사하고 19명이 부상을 입었다. 참수리호는 예인 도중 침몰했다. 당시 서해교전으로 불리던 이 전투는 2008년 4월에야 제2연평해전으로 격상되고, NLL을 수호한 승전으로 기록됐다. 하지만 15년이 지난 지금까지 산화한 6명은 ‘전사자’가 아닌 ‘순직자’ 상태. 이들을 ‘순직자’가 아닌 ‘전사자’로 예우하자는 특별법(제2연평해전 전투수행자에 대한 명예선양 및 보상에 대한 특별법)이 19, 20대 국회에 연이어 발의됐지만 아무 관심도 못 받고 잠자고 있는 상태다. ―19, 20대 국회에서 연이어 특별법을 발의한 이유는…. “2015년 초 우연한 기회에 제2연평해전에서 산화한 장병들이 당시 13년이 지나도록 여전히 전사자가 아니라 순직자 상태라는 것을 알게 됐다. 그래서 왜 그런지 알아보다가 기가 막혔다. 2015년 6월 19대 국회에서 발의했는데 국회 임기 만료로 자동 폐기돼, 지난해 8월 20대 국회에서 다시 발의했다.” ―기가 막히다니? “제2연평해전이 발발한 2002년까지는 ‘전사’와 ‘순직’이 구별되지 않았다. 단순히 ‘공무, 공무 외 사망’으로만 구별해 순직으로 처리한 것이다. 하지만 제2연평해전을 계기로 전사와 순직을 같이 취급하는 것은 불합리하다는 지적이 일었고, 2004년 법이 개정돼 ‘전사’ 규정이 마련됐다. 그런데 정작 법 개정의 계기가 된 제2연평해전 전사자들에게는 소급 적용이 안 된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말로는 ‘전사자’라고 하지만 법적으로 윤영하 소령 등 사망한 6명은 아직도 전사자가 아닌 순직자다. 국가 보상도 순직에 준해 지급됐고….” ―순직과 전사의 차이가 큰가. “‘전사’ 규정이 마련되기 전에는 ‘본인 보수 월액의 36배’가 지급됐다. 하지만 규정 마련 이후 조금씩 올라 2015년 ‘공무원 전체의 소득월액의 평균액의 57배 상당액’으로 상향됐다. 하지만 돈보다 더 중요한 것은 명예다. 나라를 위해 빗발치는 총탄 속에서 싸우다 전사한 그들을 단순히 일하다 죽은 것으로 취급해서는 안 된다.” ―특별법의 내용은…. “현재 전사자에게 적용되는 규정을 제2연평해전 전사자들에게도 소급 적용해 주자는 것이다. 여기에 이들의 명예선양 및 보상을 위해 위원회를 설치하고, 전사·사상자에 대한 추모행사 개최, 위령탑 건립 등 명예선양사업도 할 수 있게 했다. 당시 부상을 입은 장병에 대해서는 1인당 최대 5000만 원 범위에서 장해등급에 따른 보상금을 지급하는 내용도 담았다. 법적 지위는 물론이고 대우도 진짜 전사자로 예우하자는 것이다.” ―19대 국회에서 통과가 안 된 이유는 무엇인가. “국방부에서 특별법의 취지는 공감하지만 형평성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고 했다. 제2연평해전 전사자들에게 소급 적용을 해줄 경우 6·25전쟁 이후 북한 도발로 전사·사상자가 발생한 모든 사안에 대해서도 유가족들이 특별법을 요구할 우려가 있다는 것이다. 사안별로 모두 추가 소급입법을 요구할 경우 재원 마련 문제도 있다고 하고….” ―형평성이 이유라면 결국 하지 말자는 것 아닌가. “6·25전쟁 이후 사상자가 발생한 모든 사안을 일괄적으로 소급 적용하는 법을 만들기는 힘들다. 제2연평해전처럼 개별 사안별로 접근할 수밖에 없다. 일부 다른 사건의 유가족들이 특별법을 요구할 수 있겠지만 말처럼 휴전 후 모든 사건에 대해 특별법 제정 요청이 쇄도할 가능성은 별로 없다고 본다. 한꺼번에 동시에 발생하지도 않을 테고…. 기본적으로는 옛날에는 가난하고 배고팠던 시절이라 어쩔 수 없었다고 해도 이제는 그렇지 않으니까, 전부 다 해줄 순 없어도 하나하나 해 나가야 하는 것 아닌가 싶다.” ―비용이 많이 드나. “휴전 이후 북한 도발로 인한 사망자가 224명, 부상 244명, 납치된 사람이 25명이라고 한다. 사망자만 따지면 현재 전사자 보상금이 1인당 2억7000만 원 정도라 600억 원 정도가 드는 셈이다. 개별 사업비로는 적은 돈이 아니지만 나라를 위해 전사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장기적으론 해줘야 하는 것 아닌가 싶다. 물론 부상자와 다른 사업비까지 포함하면 이보다 더 들겠지만 점차 소급 적용을 해나가야 한다고 본다.” ―제2연평해전 특별법에는 비용이 얼마나 드나. “지난해 국회 예산정책처가 추산했는데 전사자와 부상자 보상비가 16억3000만 원 정도, 위원회 설치와 명예선양사업에 향후 5년간(2018∼2022년) 3억4000만 원 정도 등 19억7000만 원 정도가 드는 것으로 나타났다. 다소의 변동은 있겠지만 크게 바뀌진 않을 것 같다. 국가를 위해 싸우다 희생된 장병들에게 지급되는 규모로는 결코 많다고 할 수 없다. 국가의 품위를 지키기 위한 최소 비용이다.” ―더 무리해도 의원들의 성화에 통과되는 법, 예산도 수두룩하다. 특히 특별법을 낼 당시 소속 당이던 새누리당(현 자유한국당)은 집권 여당이었고, 툭하면 안보제일 정당이라면서 왜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나. “(여야 모두) 관심들이 없다.” ―너무 솔직하게 답하니 질문한 사람이 되레 민망하다. “그거야 너무 뻔하니까…. 여야 어느 한쪽에서 반대도 하고, 싸우기도 해야 쟁점이 되고 주목을 받아서 결론이 나는데 서로 반대할 이유가 없으니까 아이러니하게 내버려진 거지. 여기에 국방부가 형평성 문제 등 이러저러해서 어렵다고 하니 일견 그런 것 같기도 하고…. 그러다 보니 ‘그럽시다’ 하며 치운 것이고…. 관련자도 많고, 이쪽저쪽에서 시끌벅적해야 뭐가 되더라도 되는데…. 핫이슈가 안 되다 보니…, 최순실 사태, 대통령 탄핵 등 정치 상황도 엄청난 일들이 계속 벌어졌고…. 우리가 천안함 폭침에 쏟은 관심과 민주당이 세월호에 쏟은 관심 정도를 보였다면 이 법안이 표류하진 않았을 텐데….” ―유가족들은 가만히 있었나. 집단 의사를 표시할 수도 있었을 텐데…. “군인 가족들이니까…. 군인 가족들은 일반 민간인 유가족처럼 행동하지 못한다. 조심스러운 것이지. 다른 사건의 유가족처럼 끝까지 갈 데까지 가보자는 등, 단식투쟁을 한다는 등, 집회를 한다는 등 그런 행동은 못 한다. 설사 한다 해도 가족이 몇십 명인데 지속적으로 하기도 힘들고….” ―특별법 통과도 중요하지만 같은 전투가 정부에 따라 다르게 취급받는 것은 문제 아닌가. “제2연평해전은 김대중, 노무현 정부 때까지는 그냥 서해교전으로 불렸다. 당시 해군은 내부적으로는 승전이라고 했지만 대외적으론 이를 말하지 못했다. 2008년 이명박 정부 때에야 제2연평해전으로 격상되고, 떳떳하게 대내외적으로 승전으로 평가한 것이다. 이때부터 추모식도 해군 2함대 사령부에서 국가보훈처로 옮겨 정부 기념행사로 승격됐고, 2012년 10주년 행사에 군 통수권자가 처음으로 참석했다. 누가 집권하든 나라를 위한 희생이 다르게 대접받아서는 안 된다. 그런 면에서 당시 해전의 시작과 끝, 제기된 의혹, 정부 대처 등 모든 것의 진상을 기록한 백서가 만들어져야 한다. 당시 국방부 차원의 간단한 보고서는 있지만 아직까지 이런 종합적인 백서는 없다고 한다.” ―우리 사회는 나라를 위해 희생한 분들에 대한 예우가 박한 것 같다. “우리가 그게 많이 약하다. 미국을 보면 그런 게 차이가 나지. 베테랑에 대한 존경…. 나라를 지킨 분들에 대한 존경과 그들을 기리는 것은 남아 있는 사람들의 몫이다. 그래야 누구든지 아낌없이 조국을 위해 자신을 던질 수 있고…. 29일이 제2연평해전 15주기다. 이 특별법을 계기로 안보는 물론이고 여야가 협치로 나아갈 수 있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  이진구 기자 sys1201@donga.com}

    • 2017-0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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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진구 기자의 對話]조훈현 “하수인 나도 수가 보이는데… 고수들이 왜… ”

    정치라는 바둑판. 첫 수를 둔 지 1년이 지났다. 아직은 초반전. 하지만 쓰나미처럼 밀려온 내우외환에 알파고 앞의 인간처럼 속수무책이었다. 손 따라 두면 진다는데…. 국수 조·훈·현. 그가 지난해 4월 총선에서 당시 새누리당(현 자유한국당) 비례대표로 정치에 뛰어들었을 때 많은 사람이 의아해했다. 한 분야에서 일가(一家)를 이룬 사람에게 정치는 너무나 새로운 분야였고, 당시 새누리당은 막장공천으로 온 국민의 지탄을 받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이후 정치판은 세상이 뒤집어지는 격변의 시간이었다. 바둑은 수읽기의 싸움. 수읽기의 최정상이 본 정치라는 바둑판은 어떤 세계였을까.  ● 정치인이 된 지 1년이 됐다.○ 누가 그러더라. 한 10년 사이에 겪을 일이 1년 안에 벌어졌다고. 나도 모르게 여당 됐다, 야당 됐다 정신이 없더라. 밖에서 대충 살다 들어왔는데 너무 다른 세계였다. 그 와중에 엄청난 일들이 계속 터지고…. ● 뭐가 그렇게 다르던가.○ 교문위가 가장 뜨거웠거든(그는 국회 교육문화체육관광위원회 위원이다). 최순실 사태 때 K스포츠재단, 이화여대 부정 입학 등이 다 교문위 사안이지. 국정 교과서도 그렇고. 그래서 (여야가) 서로 대놓고 ×× 욕하고, 고함지르고, 죽기 살기로 싸우는데…, 어이구, 옆에서 보는데 한바탕 할 것 같더라고. 그런데 끝나자마자 방송사 카메라 불 꺼지니까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악수하고 같이 저녁 먹으러 가더라고? “어이, 오늘 술 한잔하자”면서…. 난 둘이 싸울 때 ‘이거 정말 큰일 났구나’ 하고 생각했지. 우리 같으면 며칠 동안 아예 말도 안 하잖아? 그럴 거면 처음부터 좋게 말하든지…. 어느 쪽이 진짜 마음인지…. 그런데 이게 이 세계의 ‘정석’인 것 같아. 사회의 정석은 아니고.● 정치에 입문할 때 주위에서 뭐라 안 했나.○ 엄청 들었어. 이미지 버린다고, 왜 흙탕물에 들어가냐고…. 근데 (국회의원) 되기 전에는 그러다가 막상 되니까 아무 소리 안 나오더라고…. 200가지가 달라진다는데 뭐가 달라졌는지는 잘 모르겠고, 잘못 알려진 것도 많은 것 같아. 금배지 달아도 일반 사람들은 아무도 안 알아주던데….● 원래 보수인가. ○ 굳이 말하면 보수 속에 진보라고 할까. 사람은 변하지 않으면 끝이야. 하지만 상황에 맞게 변해야지. 좋은 것은 지키면서. 예를 들면 부모나 스승을 대하는 게 우리 때와는 너무나 달라졌다고 할까. 선생님이 제자를 때리고, 제자가 선생님을 신고하고…. 솔직히 나는 교육자가 노동조합을 만드는 게 맞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 물론 돈을 받고 일하니까 노동자일 수 있는데, 교육이 과연 그렇게만 볼 성질의 것인지…. 자신은 굶더라도 애들 밥 사주고 그러는 게 스승이라고 생각하는데, 일부겠지만 지금은 ‘땡’ 하면 퇴근하는데 더 관심이 있는 것 같고…. 폭력은 안 되지만 사랑의 회초리는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걸 폭력인지 아닌지 따지고 신고하니까 일이 커지지. 지킬 것은 지켜가면서 변하자는 거지. 이렇게 사면초가인 바둑이 있었을까. 대마에서 미생마로…. 곤마(困馬) 주제에 늘 다니던 길로만 가려고 한다. 이대로 가면 죽는다. 필생의 수는 무엇일까.● 사람들은 한국당이 가장 안 변하는 곳이라 생각한다. ○ 너무 과거 습관에 파묻혀서…. 그게 통하던 시절도 있었지만, 내가 생각해도 지금은 그런 건 안 통하는 시대다. 전에 집권여당에 과반 의석의 ‘대마’여서 ‘대마불사’를 생각 하나본데 지금은 ‘미생마’인데….● ‘임을 위한 행진곡’ 논쟁은 좀 유치하지 않나.○ 나도 제창과 합창의 차이를 국회 와서 처음 알았다(합창은 합창단이 주가 되어 부르며, 참석자들이 따라 부르는 것은 자유의사다. 제창은 참석자 모두가 따라 부르는 것을 말한다. 하지만 이는 용어적인 차이일 뿐 실제로는 자유의사에 따라 부르거나 안 부르면 된다). 구태여 그것을 따질 필요가 뭐가 있나 싶기도 하고. 합창이면 어떻고 제창이면 어떻고…. 부르고 싶은 사람은 부르면 되고 아니면 안 부르면 되지. 국민이 살아가는데 이게 무슨 상관인지. 그냥 서로 감정싸움이지. 그렇게까지 크게 싸울 일은 아니지.  ● 한국당이 어떻게 변해야 한다고 생각하나.○ 나는 아직 정치를 잘 모르지만 지금 이대로 가는 것은 아닌 것 같다. 느낌이 그래. 그대로 있으면 죽는 거지. 바둑도 좋을 때는 집도 많고 세도 두텁고 싸움도 잘되지만, 안 될 때는 집도 없고 곤마만 많고 갈수록 태산이다. 지금 우리 당이 그렇다. 그래서 엄청난 승부수를 둬야지. 보통 승부수로는 안 되고, 상상도 못할 엄청난 강수로 가야지. 어떤 강수인지는 내가 둘 수도 없고 둘 처지도 아니지만…. (강수는 반발과 저항도 그만큼 셀 수밖에 없지 않나?) 결국 사람의 문제니까, 상대가 있으니까 강수가 쉬운 건 아니지. 하지만 이렇게 “네, 네”로 끝날 문제는 아니다.● ‘인명진 비상대책위원회’의 수술이 충분했다고 보나.○ 미흡했지. (한국당 지도부는 뼈를 깎았다고 하는데?) 그건 자체 분석이고…. (뭐가 가장 큰 문제였나?) 너무…, 내가 생각하기에는 일부분(사람들)이 너무 세…. 누군가 좀 균형을 잡고 이끌어나갈 사람이 필요한데, 그런 인물이 없는 것 같다. 너무 안에서만 싸워. 작년부터 그랬지만 지금은 정권이 바뀌었는데도 안에서부터 무너지고 있는 거야. 여태까지 그러고 있고. 크고 작은 걸 떠나서…. (예상하지 못했나?) 진짜 이렇게 될지는 몰랐지…. 이럴 줄 알았으면…. 수읽기를 잘못한 건데, 하하하. 적은 밖에 있는데 왜 안에다 서로 총질을 해? 작년부터 계속 악수만 두는 거야. 그러니 이길 수가 있나. 지금도 정신을 못 차린 것 같고. 모두 화해하고 하나로 뭉쳐야 하는데, 말은 그렇게 하지만 뭐 하나 결정하려고 하면 사분오열이야. 이해관계 때문에…. 그럴 때 리더가 중심이 돼 이 길로 가야 한다고 해야 하는데…. 지금은 그런 중심을 잡아줄 구심점이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강수가 필요하다는 거지. 봉위수기(逢危須棄·위기에 처한 돌을 모두 살리기보다 일부를 버리고 만회를 꾀한다). 모든 돌을 살릴 수는 없다. 사석이라 판단하면 아프더라도 버려야 한다. 육참골단(肉斬骨斷·내 살을 내주고 상대의 뼈를 끊는다). 나는 그럴 용기가 있는가…. 무엇이 사석인가.● 아직도 당 지지층에는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한 향수와 지지가 있다. 박 전 대통령은 사석인가, 아니면 살려야 할 돌인가.○ 어려운 문제인데…. 바둑으로 치면 끌고는 가야 하지만 내세울 수는 없는 상황이 아닐까. 지난해 총선, 이번 대선에서 나타난 민심을 제대로 읽는다면…. 새 인물, 새 변화가 필요하겠지.● 핵심 친박은 어떻게 해야 하나.○ 정치를 내가 잘 모르지만, 자신들의 희생이 좀 따라야 할 것 같다. 그런데 지금은 그게 안 보인다. 자신이 손해를 보더라도 뭔가 정해지면 좀 해줘야 하는데…. 모두의 입맛에 맞는 방법이 지금 있겠나. (자신이 친박 아닌가?) 친박은 친박이지. 처음에는 대부분 친박 아니었나. 내 스스로 친박이 된 것은 아니고, 원유철 전 원내대표 때문에 묶여서… 친원인가? 하하하(그를 비례대표로 끌어들인 사람이 원 전 원내대표다). 그래서 친박으로 분류되는 것 같다. (정치가 적성에 맞나?) 나는 안 맞지. 나는 아니야. 재미있다는 생각은 안 들어. 여기서 일가를 이루기도 힘들고. 아직도 정치인이나 국회의원보다는 국수로 불리고 싶은 거지. 그게 듣기가 좋지. 그래도 의원인 동안은 내 역할은 다하고 싶다.● 선거 승리를 위해 정치에 문외한인 유명인을 영입하는 것이 바람직할까.○ 솔직히 작년에 알파고 아니었으면 영입 제안이 들어오지 않았을 거야. 작년이 2002년 월드컵이었으면 아마 허정무 전 축구국가대표 감독이 됐겠지(허 전 감독은 지난해 총선에서 새누리당 비례대표로 신청했다). 현실적으로는 정당도 선거를 해야 하니까 영입 경쟁을 할 수밖에 없고, 또 어려서부터 정치를 배운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은 결국 어떤 분야에 있다가 들어오는 것이니까…. 세상이 빠르게 변하니까 더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이 의회에 진출하는 게 바람직하지 않을까.● 처음 발의한 법안이 역시 바둑진흥법 제정안이다.○ 바둑 진흥을 위한 기본 계획 수립, 바둑 지도자와 바둑 단체를 위한 지원 방안 등을 담은 것인데…. 우리의 전통문화이자 세계적인 위상을 떨쳤던 바둑의 발전을 위해 발의했다. 지난해 8월에 대표 발의했는데, 통과되는 데 쉽지 않다. 밖에서 볼 때는 올리면 에스컬레이터처럼 쭉 올라가서 땅땅 때리면 통과되는 줄 알았는데, 탄핵에 대선에 큰일이 많이 벌어지다 보니 자꾸 늦어지더라. 18대 국회부터 추진된 것인데…(발의된 법안이 해당 국회 임기 내에 통과되지 않으면 자동 폐기된다). 이번 임시국회에서는 꼭 통과됐으면 좋겠다.● 정치인 조훈현은 몇 수 앞까지 보이나.○ 이제 겨우 초보인데…. 바둑으로 치면 죽고 사는 것과 간단한 정석을 아는 정도? 하수지. (정작 정치 고수들은 엄청난 강수가 필요하다면서도 그럴 의지는 없는 것 같다.) 하수도 그 수가 보이는데…. 이 (정치)고수들은 왜 그 얘길 안 하는 건지. 물론 자기 입장이 있어서 그렇겠지만….● 문재인 대통령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바둑 10훈에 ‘조이구승자 필다패(躁而求勝者 必多敗)’란 말이 있다. 조급하게 이기려고 욕심을 부리면 오히려 패하는 경우가 많다는 뜻이다. 급하게 하지 말고 속도를 지키면서 했으면 한다. (프로기사 시절 별명이 행마가 빠르다고 해서 ‘제비’ 아니었나.) 빨랐지. 빨랐다. 그래서 창호(이창호 9단)한테 잡혔다. 이진구 기자 sys1201@donga.com}

    • 2017-0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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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참전용사 장례용 태극기 “직접 받아가라”는 보훈처

    “와서 받든지 아니면 착불(택배)로 받으라니요….” 최근 아버지를 여읜 김홍석 씨(53)는 국가보훈처 경기동부보훈지청에 영구(靈柩)용 태극기를 신청했다. 그의 부친은 병사로 6·25전쟁에 참전한 참전유공자. ‘참전유공자 예우 및 단체 설립에 관한 법률’에 따라 △월 22만 원의 참전 명예수당(65세 이상) △보훈병원 진료 시 본인부담진료비 60% 감면 △사망 시 장제보조비(20만 원)와 영구용 태극기 증정 △국립호국원 안장 등의 혜택을 받는다. 국립호국원에 안장할 경우 장제보조비는 지원되지 않는다. 김 씨는 “아버지가 늘 6·25전쟁에서 나라를 지킨 것을 자랑스러워하셨다”며 “태극기를 함께 묻어드리면 마지막 가시는 길에 기뻐하실 것 같아 발인 전에 전화로 신청했다”고 말했다. 김 씨 자신도 의무복무 중이던 1985년 훈련 중 부상을 당한 7급 상이유공자다. 하지만 김 씨는 황당한 대답을 들어야 했다. 배달 비용은 지원되지 않으니 직접 와서 받든지, 아니면 착불 택배로 받으라는 것. 김 씨는 “총탄이 빗발치던 전쟁에서 나라를 위해 싸운 분에게 택배비조차 지원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어처구니가 없었다”고 말했다. 그는 분통이 터졌지만 돌아가신 아버지를 생각해 택배비 3만 원을 내고 태극기를 받았다. 묘를 국립호국원 대신 선산에 썼기 때문에 장제보조비 20만 원을 받을 수 있었지만, 김 씨는 신청하지 않았다. 김 씨는 “(태극기를) 받고 싶으면 받고, 싫으면 말고 식으로 말하는데 내가 꼭 구걸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국가보훈처는 “택배비(서울 2만 원, 지방 3만∼5만 원)는 예산 반영이 안 돼 착불 택배로 보내주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보훈병원의 진료비 감면 혜택도 제도만 있을 뿐 거의 이용하기 힘들다고 말했다. 김 씨는 “보훈병원이 전국에 서울 부산 대전 대구 광주 등 5곳뿐”이라며 “거리도 먼 데다 대기 시간도 길고, 아버지가 운전면허도 없어 누가 모시고 가지 않는 한 다니기가 힘들었다”고 말했다. 그는 “작은 질병 때문에 보훈병원까지 가기는 힘드니 먼저 동네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추후 나라에서 정산해 주면 되는 것 아니냐”며 “동네 카페, 편의점에서도 되는 방식이 왜 보훈 분야에서는 안 되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김 씨는 “태극기 배달비가 예산에 없다는 것은 직접 받으러 오는 것을 전제로 지원책을 만들었다는 것 아니냐”며 “나라를 위해 헌신한 분들께 ‘받을 테면 받고 싫으면 말라’는 식의 무성의한 지원책은 더 이상 없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이진구 기자 sys1201@donga.com}

    • 2017-0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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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진구 기자의 對話]“충성심을 인사의 보이지 않는 척도로 삼지 않았으면… ”

    《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역대 정부가 대부분 밟는 전철이 있다. ‘인사 검증 실패.’ 국무총리만 해도 장상 장대환(이상 김대중 정부) 김태호(이명박 정부) 김용준 안대희 문창극 후보자(이상 박근혜 정부)가 자진사퇴 또는 국회 인사청문회를 넘지 못하고 낙마했다. 특히 세월호 참사 책임으로 사의를 표명했던 정홍원 총리는 안·문 두 후보자의 연이은 낙마로 본의 아니게 유임돼 장수 총리가 되는 행운(?)을 누렸다. 왜 이런 일이, 그것도 자주 벌어지는 것일까. 최고의 권력기관이자, 모든 정보가 모이는 청와대가 뭐가 부족해 부실 인사검증을 하게 되는 것일까. 문재인 정부에서는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있을까. 이명박 정부에서 대통령실장을 지낸 임태희 현 한국정책재단 이사장은 “문재인 대통령이 내각 인선을 논공행상으로 하지 않고, 적임자를 찾을 때까지 차관 대행으로 갈 수도 있다는 심정으로 찾는다면 성공한 정부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인사 검증은 어떻게 이뤄지나. “청와대 민정수석실에 인사검증팀이 있다. 여기에 검찰 경찰 국세청 행정자치부 등 각 부처에서 파견 나온 직원들이 있는데, 납세 전과 위장전입 논문표절 경력 같은 정량적 자료들은 이들을 통해 해당 부처에서 받는다. 여기에 경찰은 거주지 주민 평가, 국가정보원은 주변 인물과 근무처 평판 등을 종합해 올린다. 이 자료와 후보자가 작성하는 200여 개 항목의 검증리스트, 본인 소명, 대통령실장(지금은 비서실장) 주재의 예비청문회 등을 거친다. 내가 실장일 때는 그렇게 했다.” ―주로 문제가 되는 부분은 무엇인가. “각 기관에서 올라온 자료와 판단을 종합해 최종적으로 해당 인물에 대한 판단을 적는 난이 있는데 여기에 주관이 개입될 소지가 크다. 사람을 판단하는 데 매우 중요한 부분인데, 펜을 잡는 쪽(검증 최종책임자, 주로 민정수석비서관)의 생각이 거의 결정적으로 반영된다. 검증 대상자가 어떻게 해서든 작성하는 쪽을 접촉해 좋게 쓰게 만들기도 한다. 어차피 주관적 판단 부분이니 다른 사람 생각과 달라도 딱히 뭐라 하기 어렵다. 인사권자가 직접 아는 사람이 아니면 사실과 다른지 알 수도 없다.” 일하는 자리와 배려 자리 구별해야 ―펜을 잡은 사람이 장난을 칠 수도 있다는 말인가. “예를 들어 업무 능력은 있는데 대인 관계가 미흡한 사람이 있다고 치자. 시키고 싶다면 ‘소신 있게 일하는 스타일이다 보니 대인관계가 다소 미흡함. 하지만 업무 능력은 탁월함’ 이렇게 적는다. 반대라면 ‘업무 능력에 비해 대인관계에서 많은 적이 있음’ 이렇게 쓰고. ‘보통’ ‘탁월’ ‘미흡’ 이런 판단이 누가 증명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봐주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눈치껏 소위 ‘마사지’해서 적기도 하고….” ―대통령이 시키고 싶어 하는데 막을 수 있나. “2010년 연평도 포격 사태가 발생한 직후 국방부 장관을 임명하는데 이미 거의 유력한 후보가 있었다. 이미 언론에도 유력하다고 기사가 났다. 그런데 당시 국면이 연평도 포격 직후라 새 국방부 장관 임명이 북한에 강력한 메시지를 줘야 했다. 북한이 우리 군 인맥을 다 알기 때문에 어떤 사람을 쓰느냐에 따라 ‘아, 계속 집적대면 정말 한판 붙을 수 있겠구나’ 하는 메시지를 줄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유력 후보는 그런 이미지가 약했다. 그래서 부랴부랴 찾은 사람이 김관진 국가안보실장인데, 전후 사정을 설명했더니 대통령이 받아줬다.” ―선거의 논공행상으로 자리를 주는 한 제대로 된 검증은 어려운 것 아닌가. “그래서 나는 대통령 되는 사람이 진짜 큰 결심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진짜 일을 해야 하는 자리에는 일할 역량이 있는 사람을 쓰고, 선거 도와준 거 봐줘야 할 사람들은, 이런 말은 좀 그렇지만 외부에 그런 자리가 많으니 그런 쪽으로 돌리고…. 일을 해야 하는 자리에 역량이 안 되는 사람을 논공행상으로 임명하면 정말 나라를 망치는 것이다. 대통령은 보낼 수 있는 자리가 많다. 결국 대통령의 의지 문제다. 그래야 자신도 평가를 받고.” ―위장전입이나 논문 표절은 청문회 단골 사안인데 왜 안 걸러지나. “왜 안 하겠나. 200여 개의 검증리스트를 작성하다 보면 위장전입은 당연히 나온다. 문제는 내용인데 대체로 투기는 곤란하지만 자녀 학교 문제 등 나머지는 좀 이해하는 것 아니냐는 정서가 있다. 실제로 아마 위장전입만으로 낙마한 사람은 없을 거다. 논문 표절도 검증 항목에는 있는데 이게 사실 본인들도 기억을 잘 못 하는 경우가 많다. 이런 것까지 엄격하게 거르면 사실 사람을 구하기가 정말 어렵다.” ―법조인의 경우 로펌 근무 때 고액 수입이 늘 문제가 되는데…. “로펌에서 검사장이나 대법관 출신을 데려가면 보통 월 1억 원을 준다고 하더라. 그게 통상적인 금액인 거지. 전관예우인 것은 맞는데 인사청문회에서 지적은 되지만 위법도 아니고 크게 문제가 될 것이라는 생각은 안 했다. 감사원장에서 낙마한 정동기 전 민정수석은 수입도 논란이 됐지만 대통령의 측근을 중립적이어야 할 감사원장에 지명했다는 점이 더 쟁점이 된 것 같다. 그래서 당시에 내부적으로 특정 대형 로펌 출신은 쓰지 말자고까지 했고 실제로 그랬다.”불나방처럼 달려들어 ―여기저기서 줄 대고 많이 들어오나. “많지. 자천타천으로 엄청나다. 공직에 집착하는 사람들은 무섭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접근한다. 불을 보고 달려드는 불나방처럼…. 언론에 이름 좀 올려 달라고 흘리는 것은 약과다. 시키고 싶은 쪽에서 슬쩍 흘리는 경우도 있고…. 공식 라인이든, 비공식 라인이든 추천 과정이라고 보면 들어오는 것 자체는 별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검증 대상에도 못 들어가는 소위 ‘깜’이 안 되는 사람이 밀고 들어오는 경우다. 이런 경우에는 진짜 대통령비서실장 외에는 풀 사람이 없다. 비서실장이 애기해야 한다.” ―정말 작은 것 하나도 문제가 없는 사람은 없었나. “김관진 국가안보실장은 정말 아무것도 없었다. 검증 항목에 걸리는 게 단 한 건도 없었다. 거의 완벽했다. 그래서 MB가 더 좋아했다. 당시 국방부 장관 후보로 김병관 전 한미연합사령부 부사령관도 함께 올라왔는데 군 제대 후 방위산업체 고문인가로 있었다. 방위산업체에 있던 사람을 국방부 장관에 쓰는 것은 곤란하다는 의견이 많아 안 썼는데 결국 박근혜 정부에서 국방부 장관에 지명됐지만 낙마하더라.”  ―시스템 인사가 뭔가. “딱히 정해진 개념이라기보다는 자기진술서, 관계기관 검증자료, 민정수석실의 검증자료, 이에 대한 본인 해명, 이 자료들과 함께 제대로 일할 능력이 되는지 비서실장 등 수석들이 당사자를 불러 예비청문회를 한다. 이 과정을 말하는 것 같다.” ―원래 그 정도는 당연히 하는 것 아닌가. 이전에는 그렇게 안 했나. “안 했다. 대통령이 시키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냥 시킨 것이지. 박근혜 정부가 그렇게 하다가 문제가 생긴 것 아닌가. 문제가 생기면 비서실에 해결하라고 지시하고, 해결이 안 돼 국회에서 계속 문제가 생겨도 그냥 임명하고…. 전에도 검증리스트가 있긴 했겠지만 200개로 늘린 것은 내가 재임할 때였다. 예비청문회도. 김태호 총리 후보자가 낙마한 뒤 국회에 가서 인사검증을 시스템으로 보완하겠다고 말했다. 역대 인사청문회에 나온 모든 항목을 나열해 보니 약 200개가 됐다. 그게 현재의 검증리스트다.”여당에 필요한 사람은 야당에도 필요 ―능력 검증은 거의 없는 것 같다. “능력이나 실력 검증은 정말 어렵다. 교수는 연구 실적이나 학교 평판을 듣고, 공무원이나 군인은 그 사람이 거쳐 온 보직을 보면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다. 공무원과 군대에는 책임감과 능력이 동시에 요구되는 자리가 있다. 그 자리를 몇 년간 했다고 하면 대개 능력 평가가 된다. 물론 사람에 따라서는 실력이 있는데 보직관리가 안 된 사람도 있기는 하다. 그런 사람까지 발굴해서 쓸 수 있다면 정말 훌륭한 인사를 한 것이다. 쉽지는 않은 일이지만….” ―외국에 비해 총리나 장관 임기가 너무 짧은 것도 문제가 아닌가. “예전에는 12월이면 무조건 바꾸는 것으로 안 적도 있었다. 사람을 아껴야 하는데…. 연말 연초라고 개각하고, 사고 책임지고 물러나고, 청문 과정에서 낙마하고, 주요 인물은 경력관리도 시켜줘야 하고…. 인사 요인이 이렇게 많은데 어디서 그 많은 사람을 다 찾겠나. 여기에 같은 당인데도 전 정부 사람이어서 안 되고, 상대 정당 사람은 더더욱 안 되고…. 그러다 보니 깜이 안 되는 사람까지 써야 하는 일이 벌어지는 것이고. 또 하나 명심해야 할 것은 여당에 필요한 사람은 야당에도 필요한 사람이라는 점이다. 같이 상생을 해야지. 상대 정권에 발탁돼서 일하면 배신자라고 해서도 안 되고…. 나라가 중요하지 소속이 뭐가 중요한가.” ―인선과 관련해 새 정부에 당부하고 싶은 말은…. “인사를 정국 운영 카드로 쓰지 말았으면 한다. 꼬인 정국을 풀기 위해 인사 카드를 쓰지만 부담만 가중시키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충성심을 인사의 보이지 않는 척도로 삼지 않았으면 좋겠다. 공직자의 충성은 국가와 국민을 향해야지 대통령이나 권력 실세를 향해서는 안 된다. 아마 지금 한창 자신이 적임자라고 자천타천으로 물밀 듯이 추천이 들어올 텐데 진짜 국민에게 충성하는 공직자는 자신이 적임자라고 떠들지 않는다. 야당도 새 정부의 성공을 위해 큰 눈으로 봐줬으면 한다. 완벽한 인간은 없기 때문에 누구든 이런저런 말이 나올 수밖에 없다. 검증과 트집은 다른 것이다. 정부를 흔들면 정치적으로는 이득일지 모르지만 결국 피해는 국민이 보기 때문이다.” 이진구 기자 sys1201@donga.com}

    • 2017-0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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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카드뉴스]일부 헬스클럽의 ‘꼼수 백태’, 사연 들어보니…

    #.1일부 헬스클럽의 꼼수 백태#.2터무니 없이 비싼 한 달 회원권한 달 = 10만 원근데,1년 = 36만 원"1년 회원권이 정말 싸네??"헬스장 마다 차이가 있긴 하지만헬스장의 1달 회원권은 1년짜리 보다 가격이 훨씬비싸게 판매됩니다.이는 처음부터 장기 회원권을 끊게 하기 위한헬스장의 마케팅 전략인 것이죠.#.3또한 헬스장의 회원권 가격은 그야말로 천차만별입니다.같은 헬스장 체인점인데도 위치한 동네에 따라연 회원권 가격이 30만 원부터 50만 원까지 다르죠.헬스장의 할인 이벤트도 만들기 나름입니다.졸업·입학, 새 단장, 여름 준비, 추석맞이 등 사실할인이 없는 달이 거의 없죠.그래서 소비자가 흥정하기에 따라 회원권 가격은 10~20만 원이 차이가 날 수도 있습니다.#.4PT(Personal Training·개인 레슨)의 늪으로…PT 1회 = 11만원PT 60회 = 300만원??헬스장에서는 PT가 곧 알짜수입이 됩니다.처음 등록 시 '3회 무료 PT 제공' 등의 상품들도대부분 미끼라고 볼 수 있죠.이후에는 한 번에 많은 회를 끊을수록 할인 폭이커진다는 설명을 덧붙입니다. 발을 들인 소비자에게 추가 등록을 권유하는 것이죠.#.5기본급 + 인센티브 + 트레이닝비= 트레이너 월수입트레이너들에게 PT는 주 수입원 입니다.B헬스센터의 트레이너들은 150회 이상의 PT를끊을 경우 인센티브를 받고, PT 1회당 트레이닝비를 받습니다. 일부 피트니스클럽에서는 매달 목표액을 정하고 못 채우면 연대 책임을 지우기도 하죠.#.6늪에 빠지면 방치되는 소비자들…?"재등록을 계속하는 우수 회원들을 먼저 배정하면일주일, 열흘씩 PT시간을 못 잡는 경우도 허다하다"- 서울 시내 헬스장에서 근무하는 이모 씨(34)소비자 입장에서 비싼 돈을 내며 PT를 받는 가장 큰 이유는 제대로 운동을 하기 위해서입니다.하지만 트레이너들은 신규 PT 회원을 늘리는데여념이 없어 어느 순간 물리적으로 기존 회원을교육할 시간이 부족해질 때가 자주 온다고 합니다.#.7그래서 꾸준히 트레이닝을 받지 못하고방치되는 소비자들이 생길 수 밖에 없는 것인데요.만약 PT수업 일정이 너무 드문드문 잡히거나직전 수업에서 어떤 운동을 했는지, 당신이 기구를몇 kg까지 들었는지 트레이너가 꿰고 있지 않다면해당 트레이너는 새 회원 모집에만정신이 팔려있다는 얘기가 될 것입니다.#.8자격증 없는 트레이너도 있다."자격증이 없지만 아무도 확인하지 않기 때문에센터에서 그냥 그렇게 하라고 했다"- 강남의 D헬스장 트레이너 양모 씨(32)트레이너 중엔 자격증이 없는 경우도 많습니다.운동 전문가가 아닌 일반 회원들은 트레이너가제대로 가르치고 있는지 잘 모르기 때문에잘 들통나지도 않죠. 그래서 몸이 비틀어지거나골반이 틀어진 사람의 경우 PT를 받고 오히려몸을 더 망치는 일도 많습니다.#.9꼼수 쓰는 트레이너PT 재등록을 위해 막바지에 일부러 약간살이 찌도록 만드는 트레이너도 있다고 합니다."식단에 탄수화물과 고기를 좀 늘리고, PT를 한두 번 건너뛰면 2kg 정도는 금방 늘릴 수 있다.특히 젊은 여성일수록 몸 관리에 신경을 많이 쓰기때문에 효과적인 방법"- 강남의 D헬스장 트레이너 양모 씨(32)#.10지금까지 일부 얌체 헬스클럽의꼼수 백태를 설명해 드렸습니다.(물론, 정직하게 영업을 하는 헬스클럽도 많습니다.)몰라서, 또는 우유부단해서이용당하는 사람이 돼서는 안되겠죠.원본: 이진구 기자기획·제작: 김재형 기자·이고은 인턴}

    • 2016-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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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난번 무슨 운동하셨죠?” 물어보는 트레이너 당장 바꿔라

     큰마음 먹고 PT를 끊은 당신. 실력도 없고, 불성실한 트레이너를 만난다면 돈도 버리고 몸도 망칠 수 있다. 어떤 트레이너가 좋은 트레이너일까? 무엇보다 수업이 불규칙하게 잡히거나, 한참 만에 다음 수업이 잡힌다면 당장 교체해 달라고 요구해야 한다.  혼자서 기존에 관리하는 회원이 많아 수업을 잡기가 힘들어 생기는 일이기 때문이다. 만약 10일 이상 수업이 지연되면 운동 효과는 거의 없다고 봐야 한다. 수업이 가능한 시간을 묻는 사람이 트레이너가 아닌 당신이라면 다시 생각해 봐야 한다. 당신은 가르쳐 달라고 부탁한 ‘을’이 아니다. 비용을 지불한 이상 당신은 운동 효과가 사라지기 전에, 일정 주기로 수업을 받을 권리가 당연히 있다. 그럴 수 없다면 왜 돈을 주고 배워야 할까. PT를 오래 하다 보면 아예 당신이 먼저 시간을 제안하기 전에는 연락이 오지 않는 트레이너도 있다. 물론 당신이 계속해서 PT를 재등록하는 우수 고객이라면 이런 일은 생기지 않는다. 하지만 더 이상 재등록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보인 뒤에는 나머지 PT는 신경 안 쓰는 트레이너도 많다.  직전 수업에서 어떤 운동을 했는지, 당신이 기구를 몇 kg까지 들었는지 트레이너가 모른다면 당장 교체를 요구해야 한다. 당신의 운동 과정에 대해 전혀 기록도 하지 않고, 관심도 없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당신의 몸에 대해 아무런 프로그램도 없이 그저 오늘은 스쾃, 내일은 달리기 식으로 그때그때 다르게 가르친다면 가르치는 법을 모르는 것이다. 대개 이런 부류의 트레이너들의 특징이 수업 시작 때 “지난번에 뭐 했죠?”라고 묻는 것이다. 쉬운 일은 아니지만 담당 트레이너가 스포츠마사지 등 자격증이 있다면 진짜인지 보여 달라고 하는 것도 방법이다. 없는데도 허위로 있다고 하는 경우도 상당수이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하게도 트레이너 중에는 아직 젊은데도 살찌고 배 나온 사람들도 있다. 배 나왔다고 못 가르칠 것은 없겠지만, 굳이 자기 관리도 못 하는 트레이너에게 배워야 할 까닭은 없지 않을까?이진구 기자 sys1201@donga.com}

    • 2016-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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