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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원 박종오 씨(28)는 지난해 여름 억울한 일을 겪었다. 병원 취업을 위해 직접 작성한 자기소개서가 ‘인공지능(AI) 작성물’로 판정돼 탈락한 것이다. 박 씨는 “서류를 위조하지만 않으면 붙는 전형인데 떨어져 이상하다고 생각했다”며 “나중에 보니 해당 자소서가 ‘AI 작성 판독 프로그램’에서 AI 생성으로 오인된 걸 알고 속상했지만 항의할 방법이 없었다”고 말했다.최근 입학·입사 지원자가 AI로 자기소개서 등 과제물을 작성하는 사례가 늘자 대학과 기업이 이를 걸러내기 위한 AI 판독기를 도입하고 있는데, 잘못된 판독 결과를 내는 경우도 적잖은 것으로 나타났다. 국내 주요 대학이 차례로 AI 판독 등 사용 가이드라인을 내놓고 있지만, 서울대 등 일부 국공립대는 여전히 관련 지침이 없는 실정이다.● 대통령 연설문도 “99% 확률 AI 작성”AI 판독기의 정확도는 제품마다 천차만별이다. 동아일보 취재팀이 챗GPT의 ‘제로GPT 디텍터’ 등 3개 판독 프로그램을 이용해 실험한 결과, 올해 6월 4일 이재명 대통령 취임사는 최대 99% 확률로 ‘AI 작성’ 판정을 받았다. 문법 오류가 없고 형식이 간결한 문장은 AI가 쓴 것으로 간주하는 특성 때문이다. 정제된 연설문일수록 AI로 오해받기 쉬운 구조다.생성형 AI가 도입되거나 보급되기 전의 말과 글도 예외가 아니었다. 1987년 10월 제정된 대한민국 헌법 전문의 경우 AI가 작성했을 확률이 최대 85%라고 나왔다. “감정적 언어가 전혀 없다”는 이유였다. 2020년 2월 봉준호 감독이 영화 ‘기생충’으로 아카데미 최우수작품상을 받고 밝힌 소감의 경우 AI가 작성했을 확률이 최대 91%로 평가됐다.이런 오류는 대부분의 판독기가 문장 구조와 어휘 반복률, 통계적 예측 가능성 등을 기준으로 분석하기 때문이다. 논문이나 과제, 연설문처럼 정제된 문체는 사람의 글이라도 기계가 쓴 글로 인식하기 쉽다.상황이 이러니 AI 작성물로 오인되는 걸 피하기 위해 고의로 글의 완성도를 떨어뜨리는 사례까지 생겨나고 있다. 홍모 씨(26)는 지난해 대학 졸업 과제를 영어로 작성하면서 일부러 문법을 틀렸다. 학교에서 쓰는 AI 판독기가 사람의 글도 AI의 것으로 잘못 판단한다는 얘길 들어서다. 그는 “AI 판정을 피하려고 ‘a, the’ 같은 관사를 틀리게 썼다”며 “다른 학생들도 억울한 일을 당하지 않으려고 일부러 완성도를 낮춘다”고 말했다.● “AI 채점 신뢰 못해”…서울대는 가이드라인도 없어AI 판독기의 신뢰성을 둘러싼 논란이 커지면서 일부 대학은 가이드라인을 마련하고 있다. 연세대는 올해 8월 강의계획서에 ‘생성형 AI 활용 정도를 교수가 정한다’는 조항을 넣고, 판독기 결과만으로 성적을 결정하지 않도록 권고했다. 고려대도 9월 ‘AI 활용 가이드라인’을 내 AI 판독기를 참고용으로만 사용하도록 했다.그러나 국·공립대 상당수는 여전히 무대응 상태다. 국회 교육위원회 소속 김준혁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각 기관으로부터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국공립대와 국립대병원 55곳 중 AI 연구 활용 가이드라인을 수립한 곳은 국립한밭대와 충남대, 한국체대 등 3곳뿐이었다. 서울대는 “AI 윤리 가이드라인 마련을 위한 태스크포스(TF)를 운영 중이다”라고 답했다.기업 상황도 비슷하다. 채용 플랫폼 인크루트가 7월 인사 담당자 153명을 설문한 결과 자기소개서에서 AI를 활용했는지 확인하는 기업은 27.5%에 달했지만, AI 판독을 검증하진 않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 중견기업 이사 이모 씨는 “AI의 판독 오류로 (탈락자에게) 소송이라도 걸리는 것 아닌지 조마조마하다”고 했다.전문가들은 AI 판독기에 의존한 평가를 경계해야 한다고 말한다. 최병호 고려대 AI연구소 교수는 “AI 판독 결과를 100% 신뢰할 수 없기 때문에 이를 근거로 채점하면 안 된다”며 “대학은 AI 가이드라인을 마련하는 한편, 토론이나 구술시험 등 비(非) AI 평가 방식을 확대해야 한다”고 조언했다.정서영 기자 cero@donga.com이수연 기자 lotus@donga.com김미리 인턴기자 서울대 사회학과 재학권혜인 인턴기자 중앙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부 졸업}

사기적 부정거래로 1900억 원의 부당이득을 챙긴 혐의를 받는 방시혁 하이브 의장(53)이 5일 경찰에 출석했다. 방 의장이 경찰 조사를 받는 건 9월 두 차례 공개 소환 이후 이번이 세 번째다.서울경찰청 금융범죄수사대는 이날 오전 10시 방 의장을 자본시장법 위반 피의자 신분으로 소환했다. 경찰은 “1차 조사 땐 질문지 분량이 많아 9월 15일, 22일 양일간 조사 받았고 이번에는 2차 조사”라고 설명했다.방 의장은 2019년 하이브 투자자에게 “향후 상장 계획이 없다”고 한 뒤 특정 사모펀드 쪽에 지분을 팔게 하고, 이후 실제 상장을 진행한 혐의를 받는다. 이 과정에서 사모펀드 측과 사전에 맺은 비공개 계약에 따라 상장 후 매각 차익의 30%를 받아 약 1900억 원의 부당 이득을 거둔 혐의도 받고 있다.자본시장법에 따르면 비상장주식을 포함한 금융투자상품과 관련해 거짓말로 재산상의 이익을 얻는 행위는 금지된다. 이를 어겨 50억 원 이상의 이익을 보면 무기 또는 5년 이상의 징역에 처한다.앞서 지난해 말 방 의장의 혐의에 대한 첩보를 입수한 경찰은 올해 6, 7월 한국거래소와 하이브 본사를 압수수색했다. 방 의장은 8월 11일 미국 출장을 마치고 귀국한 직후 출국이 금지됐다.하이브 측은 방 의장의 출석에 대해 “(경찰의) 추가 조사 요청에 따라 출석했다”며 “향후 조사에 성실하게 임할 계획”이라고 입장을 밝혔다.정서영 기자 cero@donga.com}

“이게 왜 끼어들기입니까? 차가 밀리는 와중에 점선에서 들어온 거예요.”4일 오전 8시경 서울 성동구 동부간선도로 성수 방향. 끼어들기 단속에 적발된 트럭 운전사가 “점선에서 차선을 바꿨는데 왜 위반이냐”며 경찰의 제지에 항의했다. 경찰이 “점선이라도 중간 끼어들기는 위반”이라고 단호하게 안내하자 운전자는 마지못해 범칙금 3만 원 고지서에 서명했다.서울경찰청은 이날 오전 서울 시내 주요 도로 4곳에서 출퇴근 시간대 차량 정체를 유발하는 법규 위반을 집중 단속했다. 이번 단속은 박정보 서울경찰청장이 취임 후 역점 사업으로 추진하는 ‘서울교통 리(Re)디자인’ 프로젝트의 일환이다. 시민이 체감하는 교통 불편의 원인을 현장에서 직접 진단하고 개선하겠다는 취지다.서울경찰청에 따르면 이날 단속에서는 총 252건의 위반 및 계도 조치가 이뤄졌다. 끼어들기(132건)가 가장 많았고, 꼬리물기 94건, 어린이보호구역 내 일시정지 위반 23건, 음주운전 3건 등이 뒤를 이었다.단속 지점 중 강변북로 성수대교 방면은 출퇴근 차량이 몰리며 끼어들기가 빈번한 상습 정체 구간이다. 이날 오전 8시부터 1시간 동안 진행된 단속에서 버스와 화물차 등 10대가 끼어들기 위반으로 적발됐다. 오전 8시 반경 종로구 경복궁 인근 동십자각 교차로에서도 꼬리물기 4건을 포함해 총 10건의 위반이 적발됐다.서울경찰청은 각 경찰서별 주요 구간을 중심으로 단속을 이어갈 방침이다. 우선 경찰서별 4곳씩 선정해 운영하고, 이후 시민 제안을 반영해 대상 지역을 조정할 예정이다.시민 의견 수렴도 병행한다. 서울경찰청은 10일부터 연말까지 두 달간 시민들로부터 교통환경과 교통문화 전반에 대한 개선 의견을 접수한다. 제안이 접수되면 제보자와 관계기관이 현장 합동 점검을 실시해 개선책을 마련하고, 공사나 예산이 필요한 과제는 중장기 계획으로 분류해 2026년 6월까지 단계적으로 추진할 계획이다.정서영 기자 cero@donga.com서지원 기자 wish@donga.com원종빈 인턴기자 서울대 종교학과 졸업}

장애인의 재활과 자립을 지원하는 비영리 공익법인 푸르메재단(이사장 강지원·상임대표 백경학)이 창립 20주년을 맞아 29일 기념식을 열었다. 서울 서대문구 연세대 백양누리 그랜드볼룸에서 ‘함께 이룬 기적, 함께 만들 미래’를 주제로 열린 기념식엔 우원식 국회의장과 김성수 푸르메재단 명예이사장, 김재호 동아일보·채널A 회장 등 약 270명이 참석했다. 푸르메재단은 2005년 창립 후 20년간 1124억 원을 모금해 815만449명의 장애인과 그 가족을 지원했다고 밝혔다. 이날 대통령 부인 김혜경 여사는 영상 축사에서 “모든 성과는 5만여 명의 기부자와 자원봉사자, 임직원이 있어서 가능했다”며 “앞으로도 푸르메재단이 장애인 의료복지 분야의 선도자로서 더 많은 분에게 희망과 기회를 제공하며 따뜻한 사회를 만드는 데 앞장서리라 확신한다”고 했다. 우 의장은 “아픈 곳을 치유하지 않는 사회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며 “아픔을 희망으로 바꿔 왔던 푸르메재단에 감사 인사를 표한다”고 전했다. 재단 측은 동아일보사가 2020년 창간 100주년을 맞아 5억 원을 장애 청년들이 일할 수 있는 ‘푸르메소셜팜’ 건립에 기부하고, 이번 창립 20주년에도 1억 원을 기부한 것에 사의를 표했다. 김 회장은 “개인은 여유와 마음이 있으면 기부를 할 수 있지만 재단은 항상 부족한 중에도 살림을 해왔다”라며 “재단이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갈 때마다 존경스러운 마음이 들었다”고 했다. 행사에선 기부자와 자원봉사자 등 12명에게 감사패도 수여했다. 어린이재활병원 건립을 위해 200억 원을 기부한 고(故) 김정주 넥슨 창업주, 뇌병변 등을 앓으면서도 가족과 함께 철인3종 경기에 나서 장애인을 도운 박은총 씨 등에게 감사패가 수여됐다. 푸르메소셜팜의 건립비를 모금하고 판로까지 지원한 SK하이닉스, 1970년대 청계천 빈민을 돕고 장애 어린이를 위해 나눔을 실천한 일본인 고 노무라 모토유키 씨 등도 받았다. 푸르메재단은 1998년 백 상임대표의 부인 황혜경 씨가 영국에서 교통사고를 당한 뒤 재활치료를 하며 느낀 문제의식에서 시작됐다. 재활치료를 받을 병실이 없어 몇 달을 기다리는 국내 현실을 고치고자 황 씨가 영국 보험회사로부터 받은 피해보상금 10억6000만 원을 주춧돌 삼아 창립했다. 이후 2016년 마포구 푸르메재단 넥슨어린이재활병원을 건립하는 등 장애인 재활과 자립을 위한 활동을 지속하고 있다. 푸르메재단은 장애인 자립사업에도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2022년에는 발달장애 청년을 아들로 둔 이상훈, 장춘순 부부가 기증한 4000평 부지에 푸르메소셜팜을 열었다.정서영 기자 cero@donga.com}

경찰이 1억 원대 금품수수 혐의를 받는 강호동 농협중앙회장의 출국을 금지했다. 29일 경찰 등에 따르면 서울경찰청 반부패수사대는 최근 강 회장에 대해 특정범죄가중처벌법상 뇌물 혐의를 적용해 출국금지 조치를 내렸다. 강 회장은 지난해 1월 농협중앙회장 선거를 앞두고 농협중앙회 계열사와 거래하는 용역업체 대표로부터 두 차례에 걸쳐 총 1억 원의 금품을 수수한 혐의를 받는다. 이 업체 대표는 현금을 전달하며 용역사업 계약과 관련한 편의를 부탁했다고 전해졌다. 경찰은 통신 기록 등을 확보해 자금이 실제로 강 회장 측에 전달됐는지, 돈이 회장 선거운동에 사용됐는지 등을 수사하고 있다. 이달 15일엔 서울 중구 농협중앙회 본사 11층에 있는 강 회장 집무실 등을 압수수색했다. 경찰은 조만간 강 회장을 불러 의혹 전반에 대해 조사할 계획이다. 그는 24일 국회 농림축산식품해양수산위원회 국정감사에 출석해 “이유를 막론하고 심려를 끼쳐 송구하다”면서도 의혹에 대해선 “수사 중이라 언급하기 어렵다. 조사에 성실히 임하겠다”고 했다. 농협중앙회장은 4년 단임제에 비상근직이지만, 전국 조합원을 대표하고 인사와 사업 전반에 영향을 미치는 자리다. 강 회장은 1987년 농협에 입사해 5선 조합장과 농협중앙회 이사 등을 지냈다. 지난해 1월 25일 제25대 농협중앙회장으로 선출돼 같은 해 3월 임기를 시작했다.정서영 기자 cero@donga.com}

경찰이 유승민 대한체육회장을 업무상 배임 등 혐의로 조사하고 있다. 28일 경찰 등에 따르면 유 회장은 대한탁구협회장 재직중이던 2021년 타인의 명의로 인센티브를 챙긴 혐의를 받고 있다. 당시 대한탁구협회는 후원금을 유치한 사람에게 후원액의 10%를 지급하는 인센티브 제도를 도입했는데, 지난해까지 후원금을 받은 10명 중 유 회장의 당시 소속사 대표의 동생이 포함돼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유 회장은 2019년 대한탁구협회장 보궐 선거에 출마해 선출된 이래 한 차례 재선출을 거쳐 지난해 12월까지 대한탁구협회장으로 재직했다.경찰은 유 회장이 소속사 대표의 동생 명의로 인센티브를 챙긴 것은 아닌지 확인하고 있다. 해당 명의로 수령한 인센티브는 총 2억 원에 달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경찰은 유 회장을 불러 직접 조사를 진행한다는 방침이다. 사건을 담당하는 서울청 금융범죄수사대 관계자는 “현재 수사중인 사항”이라고만 했다.유 회장 측은 “인센티브 수령 및 배분에 문제가 없다”며 “경찰 수사를 지켜보겠다”고 밝혔다. 앞서 유 회장은 27일 열린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회의 대한체육회 국정감사에서 해당 의혹에 대해 “(인센티브 수령자들이) 직접적으로 후원 기업을 연결해줬고 같이 뛰어줬다”고 설명했다.정서영 기자 cero@donga.com}

“창문에 병원 십자가 표시는 붙어 있는데, 일반 환자는 안 받아요. 콩팥 하나에 5000만 원, 안구도 그 정도랍니다.” 27일 캄보디아 프놈펜에서 사업 중인 한 교민은 “도심에 중국계 ‘이식 전문 병원’이 있다”며 이렇게 말했다. 그의 70대 지인은 이 병원에서 2년 전 5000만 원을 내고 콩팥 이식을 받았다고 한다. 국내에서 이식 순서가 돌아올 가망이 없자 현지 브로커를 통해 연락했고, 도착 이틀 만에 수술이 진행됐다. 그는 “지인은 이식받은 장기가 자연사한 시신에서 적출된 것이란 설명을 들었다고 했다. 하지만 현지에선 누구나 그 출처를 의심한다”고 덧붙였다.● 캄보디아, 국제 장기 밀매의 ‘신흥 허브’최근 한국인 대학생 박모 씨(22)가 캄보디아 내 ‘웬치(범죄단지)’에 감금됐다가 고문 끝에 숨지는 등 현지 납치 문제가 이슈로 떠오른 가운데, 국제 학술계가 캄보디아를 국제 장기 밀매 시장의 새로운 ‘브로커 허브 국가’로 주목하는 것으로 파악됐다. 현지에서 실종된 채 생사를 알 수 없는 한국인이 80명이 넘는 만큼, 강제 장기 적출 실태도 폭넓게 조사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올 4월 미국 조지메이슨대 연구진이 과학기술논문인용색인(SCIE)급 국제학술지에 게재한 논문에 따르면, 캄보디아에선 최근 11년(2012∼2022년)간 최소 10건의 장기 밀매 중개 사건이 드러나 인도와 파키스탄, 중국 등에 이어 7위를 차지했다. 전 세계 장기 밀매 보도 5만여 건을 인공지능(AI)으로 분석한 결과다. 캄보디아는 이전(2000∼2011년)엔 전혀 등장하지 않았지만 최근 들어 새롭게 떠올랐다. 연구진은 “기존 주요 국가들의 단속 강화로 밀매 거점이 이동했다”고 분석했다.캄보디아를 무대로 한 장기 매매는 여러 차례 적발됐다. 2023년 7월 인도네시아 경찰은 자국민 122명을 프놈펜으로 유인해 콩팥을 각 9000달러(약 1290만 원)에 밀매한 일당 12명을 체포했다. 피해자들은 ‘고수입 일자리’를 제안받고 현지로 끌려가 감금된 채 수술을 강요당했다. 같은 해 베트남 호찌민 법원도 캄보디아에서 장기 매매를 주선한 일당 8명에게 징역형을 선고했다. 국제 인권단체들은 “부패한 사법 구조와 느슨한 국경 관리가 밀매를 키웠다”고 지적한다. 인접국보다 국경 관리가 허술해 밀매 세력이 들어오기 쉽고, 불법 시술이 이뤄져도 단속 권한이 실질적으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중국의 의료 일대일로, 이식 밀매로 이어져” 의료계에선 고난도의 이식술을 자체적으로 갖추지 못한 캄보디아가 장기 매매의 허브가 될 수 있었던 배경에 중국의 경제 영토 확장 사업인 ‘일대일로(一帶一路)’가 있다고 분석한다. 김황호 한국장기이식윤리협회 이사는 “중국은 수년간 의료 일대일로를 통해 캄보디아 병원에 기술 제휴를 해왔다”고 설명했다. 장기 밀매의 거점으로 지목된 현지 병원 대다수는 2010년대부터 중국의 지원으로 건립돼 운영 중인 곳이다. 중국은 이 병원들에 의료진들을 파견하며 장기이식 역량이 없던 캄보디아에 기술을 전파했다. 장기 매매는 해외에서 이뤄져도 국내법에 따라 처벌 대상이 된다. 의학적 위험도 크다. 장원배 제주대병원 이식외과 교수는 “(불법 이식 장기는) 공여자의 건강 상황을 정확히 알 수 없어 이식 이후에도 공여자가 가진 질병이 옮겨올 수 있고, 각종 합병증이 발생할 수 있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한국 정부가 ‘웬치’ 단속을 이식 병원까지 확대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18년째 프놈펜에 거주 중인 한 교민은 “웬치에 납치된 한국인이 장기 매매에 이용됐다는 소문이 돌고 있다”고 말했다. 실제 한국 경찰은 20일 박 씨의 시신을 부검하면서 장기 적출 여부 등을 확인하기도 했다. 이윤호 동국대 경찰행정학과 명예교수는 “범죄조직이 납치 후 이른바 ‘용도 폐기’ 단계에서 장기를 적출했을 가능성도 있다”며 “한국인 납치가 잦은 만큼 드러나지 않은 범죄가 있을 수 있다”고 말했다.정서영 기자 cero@donga.com권구용 기자 9dragon@donga.com}

“창문에 병원 십자가 표시는 붙어 있는데, 일반 환자는 안 받아요. 콩팥 하나에 5000만 원, 안구도 그 정도랍니다.”27일 캄보디아 프놈펜에서 사업 중인 한 교민은 “도심에 중국계 ‘이식 전문 병원’이 있다”며 이렇게 말했다. 그의 70대 지인은 이 병원에서 2년 전 5000만 원을 내고 콩팥 이식을 받았다고 한다. 국내에서 이식 순서가 돌아올 가망이 없자 현지 브로커를 통해 연락했고, 도착 이틀 만에 수술이 진행됐다. 그는 “지인은 이식받은 장기가 자연사한 시신에서 적출된 것이란 설명을 들었다고 했다. 하지만 현지에선 누구나 그 출처를 의심한다”고 덧붙였다.● 캄보디아, 국제 장기 밀매의 ‘신흥 허브’최근 한국인 대학생 박모 씨(22)가 캄보디아 내 ‘웬치(범죄단지)’에 감금됐다가 고문 끝에 숨지는 등 현지 납치 문제가 이슈로 떠오른 가운데, 국제 학술계가 캄보디아를 국제 장기 밀매 시장의 새로운 ‘브로커 허브 국가’로 주목하는 것으로 파악됐다. 현지에서 실종된 채 생사를 알 수 없는 한국인이 80명이 넘는 만큼, 강제 장기 적출 실태도 폭넓게 조사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올 4월 미국 조지메이슨대 연구진이 과학기술논문인용색인(SCIE)급 국제학술지에 게재한 논문에 따르면, 캄보디아에선 최근 11년(2012~2022년)간 최소 10건의 장기 밀매 중개 사건이 드러나 인도와 파키스탄, 중국 등에 이어 7위를 차지했다. 전 세계 장기 밀매 보도 5만여 건을 인공지능(AI)으로 분석한 결과다. 캄보디아는 이전(2000~2011년)엔 전혀 등장하지 않았지만 최근 들어 새롭게 떠올랐다. 연구진은 “기존 주요 국가들의 단속 강화로 밀매 거점이 이동했다”고 분석했다.캄보디아를 무대로 한 장기 매매는 여러 차례 적발됐다. 2023년 7월 인도네시아 경찰은 자국민 122명을 프놈펜으로 유인해 콩팥을 각 9000달러(약 1290만 원)에 밀매한 일당 12명을 체포했다. 피해자들은 ‘고수입 일자리’를 제안받고 현지로 끌려가 감금된 채 수술을 강요당했다. 같은 해 베트남 호찌민 법원도 캄보디아에서 장기 매매를 주선한 일당 8명에게 징역형을 선고했다. 국제 인권단체들은 “부패한 사법 구조와 느슨한 국경 관리가 밀매를 키웠다”고 지적한다. 인접국보다 국경 관리가 허술해 밀매 세력이 들어오기 쉽고, 불법 시술이 이뤄져도 단속 권한이 실질적으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중국의 의료 일대일로, 이식 밀매로 이어져”의료계에선 고난도의 이식술을 자체적으로 갖추지 못한 캄보디아가 장기 매매의 허브가 될 수 있었던 배경에 중국의 경제 영토 확장 사업인 ‘일대일로(一帶一路)’가 있다고 분석한다. 김황호 한국장기이식윤리협회 이사는 “중국은 수년간 의료 일대일로를 통해 캄보디아 병원에 기술제휴를 해왔다”고 설명했다. 장기 밀매의 거점으로 지목된 현지 병원 대다수는 2010년대부터 중국의 지원으로 건립돼 운영 중인 곳이다. 중국은 이 병원들에 의료진들을 파견하며 장기이식 역량이 없던 캄보디아에 기술을 전파했다.장기 매매는 해외에서 이뤄져도 국내법에 따라 처벌 대상이 된다. 의학적 위험도 크다. 장원배 제주대병원 이식외과 교수는 “(불법 이식 장기는) 공여자의 건강 상황을 정확히 알 수 없어 이식 이후에도 공여자가 가진 질병이 옮겨올 수 있고, 각종 합병증이 발생할 수 있다”고 말했다.전문가들은 한국 정부가 ‘웬치’ 단속을 이식 병원까지 확대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18년째 프놈펜에 거주 중인 한 교민은 “웬치에 납치된 한국인이 장기 매매에 이용됐다는 소문이 돌고 있다”고 말했다. 실제 한국 경찰은 20일 박 씨의 시신을 부검하면서 장기적출 여부 등을 확인하기도 했다. 이윤호 동국대 경찰행정학과 명예교수는 “조직범죄가 납치 후 이른바 ‘용도 폐기’ 단계에서 장기를 적출했을 가능성도 있다”며 “한국인 납치가 잦은 만큼 드러나지 않은 범죄가 있을 수 있다”고 말했다. 정서영 기자 cero@donga.com권구용 기자 9dragon@donga.com}

오세훈 서울시장에 대한 ‘여론조사비 대납 의혹’을 제기한 정치 브로커 명태균 씨가 23일 국회 행정안전위원회의 서울시 국정감사 증인으로 출석해 오 시장과 마주했다. 두 사람이 공식석상에서 만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오 시장이 명 씨의 주장에 일절 대응하지 않아 직접적인 공방은 벌어지지 않았다. 다만 명 씨의 발언이 이어질 때마다 오 시장이 미소를 짓거나 웃음을 터뜨리는 장면이 포착됐다.● 明 “일곱 번 만나”… 오 시장은 ‘피식’ 오 시장은 이날 오후 3시경 국감장에 들어섰다. 먼저 입장한 명 씨는 변호인과 함께 여유로운 태도로 기자들과 대화를 나누고, 다른 증인인 헬스트레이너 양치승 씨에게 말을 건넸다. 오 시장은 명 씨 쪽에 시선을 주지 않은 채 착석했다. 명 씨는 “오 시장을 일곱 차례 만났다”고 주장하며 “내 휴대전화 ‘황금폰’을 포렌식했는데, 오 시장과 관련된 내용이 다 나온다”고 말했다. 황금폰은 명 씨가 대선 기간 사용했다고 주장하는 휴대전화로, 윤석열 전 대통령 부부 및 여권 인사들과의 통화·메시지 기록이 담겼다고 주장해 왔다. 더불어민주당 권칠승 의원이 “정말 일곱 번 만난 게 맞느냐”고 묻자, 오 시장은 “사실이 아니다”라고 선을 그었다. 이어 “허위 주장에 대해서는 특검 조사 과정에서 명확히 밝히겠다”며 명 씨를 “거짓말에 능한 사람”이라고 비판했다. 국감 내내 오 시장은 명 씨를 외면했지만, 명 씨의 발언이 이어지자 간간이 표정으로 반응했다. 명 씨가 “오 시장이 내 앞에서 (서울시장 선거에서 이기게 해달라며) 울었다”고 말하자 오 시장은 미소를 지었고, “(오 시장으로부터) 아파트를 받기로 했다”는 주장에는 웃음을 참는 모습을 보였다. 명 씨가 “김영선 전 의원이 오 시장에게 연애편지를 보냈다”고 발언하자 오 시장은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김 전 의원이) 무엇을 매일 보냈는지 말해 보라”는 명 씨의 말에 오 시장은 처음으로 고개를 돌려 명 씨를 바라봤다. 서울시 관계자는 “김 전 의원이 2021년 오 시장에게 보냈다는 문자는 검찰 포렌식 과정에서 밝혀졌는데, 오 시장이 명 씨를 만나주지 않자 여러 문학적 시구를 인용하여 오 시장에게 보낸, ‘명 씨를 꼭 만나 달라’는 호소성 문자였다”고 말했다. ● 다음 달 8일 특검서 明-吳 대질신문 오 시장과 명 씨는 다음 달 8일 김건희 특검에서 대질조사를 받을 예정이다. 명 씨는 국감 전 백브리핑에서 “누가 거짓말을 하는지 특검에서 밝혀질 것”이라고 말했다. 이번 대질은 오 시장의 요청으로 이뤄졌다. 특검은 당초 18, 19일 오 시장 단독 출석을 조율했으나 시 국감 일정과 겹치자, 오 시장 측이 “직접 대질을 원한다”고 밝혀 일정을 미뤘다. 오 시장 측은 “수사 초기부터 신속한 수사를 촉구해 왔고, 허위 주장에 대해 직접 진실을 밝히기 위해 대질조사가 필요하다”고 밝혔다. 오 시장은 명 씨와 함께 2021년 보궐선거 당시 여론조사비 대납 의혹에 연루돼 있다. 명 씨가 운영했던 여론조사업체 ‘미래한국연구소’에서 미공표 여론조사를 진행했고, 오 시장의 후원자로 알려진 김한정 씨가 약 3300만 원을 대신 냈다는 의혹이다. 오 시장 측은 “금전 거래나 대납 사실은 전혀 없다”며 부인하고 있다. 오 시장은 지난해 12월 명 씨를 사기와 업무방해 혐의로 고소했다. 검찰은 올해 3월 오 시장의 집무실과 공관을 압수수색했고, 5월에는 오 시장을 피의자 신분으로 조사했다. 오 시장 측은 “명 씨와는 두 차례 만난 뒤 관계를 끊었으며, 여론조사 결과도 전달받지 않았다”고 밝혔다. 국민의힘은 민주당이 명 씨를 증인으로 부른 것을 두고 “국감을 정치 공세의 수단으로 이용하고 있다”고 반발했다. 한편 오 시장은 이날 국감에서 정부의 ‘10·15 부동산 대책’에 대해 “단기적으로는 안정 효과가 있겠지만 중장기적으로는 공급 위축 등 부작용이 우려된다”고 말했다. 정서영 기자 cero@donga.com송유근 기자 big@donga.com이지운 기자 easy@donga.com}

북한의 해킹 자금 등 전 세계 불법 자금 5조 원을 세탁한 혐의로 미국의 제재를 받은 캄보디아 금융그룹 ‘후이원’이 서울에도 발을 들인 정황이 포착됐다. 온라인 사기와 인신매매 조직의 ‘금융 허브’로 지목된 이 그룹은 현지 관계사를 통해 지금도 한국 자금을 가상화폐로 송금받는 서비스를 운영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21일 관세청 등에 따르면 서울 영등포구 대림동의 한 건물에는 지난해까지 후이원그룹과 연결된 것으로 보이는 ‘후이원 환전소’ 간판이 걸려 있었다. 간판과 로고는 후이원 본사와 같았고, 페이스북 페이지에는 “정식 금융업”이라는 문구와 함께 캄보디아 본사 전경 사진이 게시돼 있었다. 현재 한국어 홈페이지는 접속이 불가능하다. 이 환전소는 2018년부터 지난해 7월까지 영업하며 연간 약 2만 달러(약 2800만 원)의 환전 실적을 신고했다. 이는 후이원그룹이 북한 해커 조직 라자루스로부터 15만 달러(약 2억1000만 원) 이상의 가상화폐를 송금받은 시기와 겹친다. 대림동 후이원 환전소의 가상화폐 송금액은 당국 집계에 포함되지 않았다. 인근 한 식당 주인은 “그 환전소가 자금세탁에 쓰인다는 소문이 돌았다”고 전했다. 이곳이 후이원의 한국 지사로 확인될 경우 북한 해킹 자금을 세탁한 기업이 서울 한복판에서 버젓이 영업한 셈이 된다. 실제로 캄보디아 현지의 후이원 관계사는 한국과의 가상화폐 거래를 중개하고 있다. 20일 오후(현지 시간) 캄보디아 프놈펜 ‘판다은행’ 관계자는 “한국으로부터 송금받을 수 있나”라는 취재팀 질문에 “가상화폐 테더(USDT)로 송금할 수 있다”고 답했다. 이 은행은 후이원그룹 계열사와 같은 건물에 있으며, 미 재무부 제재 대상인 ‘후이원크립토’의 허얀밍 대표가 사내이사로 이름을 올린 바 있다. 사실상 후이원의 위성 조직이 한국과의 송금 통로 역할을 하는 셈이다. 후이원은 결제 시스템 ‘후이원페이’, 가상자산 거래소 ‘후이원크립토’ 등을 거느린 금융 복합체로, 미 재무부는 이들이 2021년부터 올해 초까지 약 40억 달러(약 5조6000억 원)의 불법 자금을 세탁했다고 발표했다. 이 중 3700만 달러(약 526억 원)는 라자루스 등 북한이 탈취한 가상화폐였다. 보이스피싱 등으로 범죄단지에서 뜯어낸 피해액이 후이원 조직을 통해 해외로 빠져나갈 가능성이 있는 만큼, 정부가 단속을 강화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박정보 서울경찰청장은 20일 후이원그룹과 함께 캄보디아 범죄단지의 배후로 의심받고 있는 프린스그룹에 대해 “국내 활동 의혹과 관련해 혐의를 파악하고 (필요하다면) 내사나 수사로 전환하겠다”고 밝혔다.전남혁 기자 forward@donga.com프놈펜=정서영 기자 cero@donga.com}

북한 해킹 자금 등 전 세계 불법자금 5조 원을 세탁한 혐의로 미국의 제재를 받은 캄보디아 금융그룹 ‘후이원’이 서울에도 발을 들인 정황이 포착됐다. 온라인 사기와 인신매매 조직의 ‘금융 허브’로 지목된 이 그룹은 현지 관계사를 통해 지금도 한국 자금을 가상화폐로 송금받는 서비스를 운영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21일 관세청 등에 따르면 서울 영등포구 대림동의 한 건물에는 지난해까지 후이원 그룹과 연결된 것으로 보이는 ‘후이원 환전소’ 간판이 걸려 있었다. 간판과 로고는 후이원 본사와 같았고, 페이스북 페이지에는 “정식 금융업”이라는 문구와 함께 캄보디아 본사 전경 사진이 게시돼 있었다. 현재 한국어 홈페이지는 접속이 불가능하다.이 환전소는 2018년부터 지난해 7월까지 영업하며 연간 약 2만 달러(약 2800만 원)의 환전 실적을 신고했다. 이는 후이원 그룹이 북한 해커 조직 라자루스로부터 15만 달러(약 2억1000만 원) 이상의 가상화폐를 송금받은 시기와 겹친다. 대림동 후이원 환전소의 가상화폐 송금액은 당국 집계에 포함되지 않았다. 인근 한 식당 주인은 “그 환전소가 자금세탁에 쓰인다는 소문이 돌았다”고 전했다. 이곳이 후이원의 한국 지사로 확인될 경우, 북한 해킹 자금을 세탁한 기업이 서울 한복판에서 버젓이 영업한 셈이 된다.실제로 캄보디아 현지의 후이원 관계사는 한국과의 가상화폐 거래를 중개하고 있다. 20일 오후(현지 시간) 캄보디아 프놈펜 ‘판다은행’ 관계자는 “한국으로부터 송금받을 수 있나”라는 취재팀 질문에 “가상화폐 테더(USDT)로 송금할 수 있다”고 답했다. 이 은행은 후이원 그룹 계열사와 같은 건물에 있으며, 미 재무부 제재 대상인 ‘후이원크립토’의 허얀밍 대표가 사내이사로 이름을 올린 바 있다. 사실상 후이원의 위성 조직이 한국과의 송금 통로 역할을 하는 셈이다.후이원은 결제 시스템 ‘후이원페이’, 가상자산 거래소 ‘후이원크립토’ 등을 거느린 금융 복합체로, 미 재무부는 이들이 2021년부터 올해 초까지 약 40억 달러(약 5조6000억 원)의 불법 자금을 세탁했다고 발표했다. 이 중 3700만 달러(약 526억 원)는 라자루스 등 북한이 탈취한 가상화폐였다.보이스피싱 등으로 범죄단지에서 뜯어낸 피해액이 후이원 조직을 통해 해외로 빠져나갈 가능성이 있는 만큼, 정부가 단속을 강화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박정보 서울경찰청장은 20일 후이원 그룹과 함께 캄보디아 범죄단지의 배후로 의심받고 있는 프린스 그룹에 대해 “국내 활동 의혹과 관련해 혐의를 파악하고 (필요하다면) 내사나 수사로 전환하겠다”고 밝혔다.전남혁 기자 forward@donga.com프놈펜=정서영 기자 cero@donga.com}

공항에 마중 나온 교민은 반듯했다. 국내 포털사이트에 검색도 되는 단역 배우 겸 모델이었다. “현지에서 일본어 통역을 구한다”는 제안에 30대 김민하(가명) 씨가 지난해 4월 캄보디아 프놈펜에 도착했을 때 얘기다. 그 교민은 웃으며 “쉬운 일이에요”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 약속은 함정이었다. 차로 4시간 걸려 도착한 곳은 시아누크빌의 바닷가 근처 아파트였다. 가족에게 ‘잘 도착했다’고 카카오톡 메시지를 보낸 직후, 낯선 남성 3명이 방에 들이닥쳤다. “폰 줘.” “왜요?” 저항하자 팔이 꺾였고 휴대전화와 여권을 순식간에 빼앗겼다. 그날 저녁부터 지옥이 시작됐다.● “목표 못 채웠네?” 쇠창살 안 ‘성인방송 노예’김 씨에게 주어진 ‘일’은 성인방송이었다. 카메라 앞에 앉혀 놓고 옷을 벗으라고 요구했다. 시청자에게 후원금을 구걸했다. 다음 날엔 실적표가 벽에 붙었다. 목표액에 못 미치면 욕설과 폭행이 돌아왔다. 옆방에선 드문드문 “살려주세요”라는 비명이 새어 나왔다. 김 씨는 하루 종일 불이 꺼지지 않는 방에서 카메라 불빛만 바라보며 버텼다. 김 씨는 한 달 뒤 극적으로 구조됐다. 가족이 받은 ‘도착 인증샷’ 한 장이 단서였다. 가족들이 김 씨를 찾아나섰고, 현지에서 20년째 거주 중인 교민이 사진 속 바다와 섬의 위치를 추적해 시아누크빌 일대를 한 달간 수색했다. 마침내 평소 알고 지내던 캄보디아 경찰과 함께 건물을 급습해 김 씨를 구했다. 하지만 구조돼 귀국한 후 들은 이야기는 더 끔찍했다. 그녀를 데려온 ‘교민’은 현지 범죄조직에 500만 원을 받고 김 씨를 팔아넘긴 것이었다. 19일 오후(현지 시간) 김 씨가 감금됐던 시아누크빌 건물 입구엔 아직도 경비원으로 추정되는 중국인들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이들은 휴대전화를 보는 척하며 눈을 치켜뜨고 주변을 유심히 관찰했다. 운전기사로 동행한 현지인은 “저들이 우리를 알아보는 거 같다. 차에서 절대 내리지 말라”며 “여전히 중국계 조직의 범죄단지로 활용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캄보디아에서 범죄에 연루된 한국 청년 대다수는 남성이지만, 김 씨처럼 여성도 적지 않다. 지난해 캄보디아의 로맨스 스캠(연애 빙자 사기) 조직에 납치됐다가 가까스로 탈출한 30대 남성 정민수(가명) 씨는 “조직원 150명 중 납치된 5명 정도가 여성이었다. (남성 조직원이) 대본을 써주면 통화는 여성 대역이 했다”고 말했다. 이달 7일에는 또 다른 30대 여성이 캄보디아와 베트남 접경 지역에서 숨진 채 발견되기도 했다.● 중국 공안은 현지에서 직접 단속시아누크빌 교민들은 “중국은 수년 전부터 캄보디아 경찰과 공조해 자국민 대상 범죄조직을 직접 단속해 왔지만 한국 정부는 여전히 느리다”고 입을 모았다. 중국은 2019년부터 캄보디아 정부와 협력해 현지 피의자를 적극적으로 송환하고 있다. 지난해 3월엔 캄보디아 경찰과 함께 시아누크빌의 리조트를 급습해 약 700명을 붙잡았고, 4월에는 130명을 송환했다. 캄보디아 헌병대 관계자는 “중국 공안이 시아누크빌을 직접 순찰·단속한 뒤 해변을 점령하던 중국계 범죄자들이 눈에 띄게 줄었다”고 전했다. 전문가들은 한국도 자국민 보호를 위한 상시 대응 체계를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곽대경 동국대 경찰사법대 교수는 “코리안데스크를 설치해 양국 경찰 간 실시간 소통을 보장해야 한다”고 했다. 20일 유재성 경찰청장 직무대행은 치어퍼우 캄보디아 경찰청 차장과 회담하고 양국 간 24시간 핫라인을 설치하기로 했지만 코리안데스크 신설에는 합의하지 못했다. 한편 우리 경찰은 프놈펜에서 범죄단지에 감금돼 고문당한 뒤 살해된 대학생 박모 씨(22)의 시신을 이날 현지 당국과 합동 부검한 결과, 장기 적출 등 시신 훼손은 없었다고 밝혔다. 경찰은 박 씨의 유해를 21일 국내로 송환할 계획이다.시아누크빌=권구용 기자 9dragon@donga.com시아누크빌=정서영 기자 cero@donga.com조승연 기자 cho@donga.com}

공항에 마중 나온 교민은 반듯했다. 국내 포털사이트에 검색도 되는 단역 배우 겸 모델이었다. “현지에서 일본어 통역을 구한다”는 제안에 30대 김민하(가명) 씨가 지난해 4월 캄보디아 프놈펜에 도착했을 때 얘기다. 그 교민은 웃으며 “쉬운 일이예요”라고 말했다.그러나 그 약속은 함정이었다. 차로 4시간 걸려 도착한 곳은 시아누크빌의 바닷가 근처 아파트였다. 가족에게 ‘잘 도착했다’고 카카오톡 메시지를 보낸 직후, 낯선 남성 3명이 방에 들이닥쳤다. “폰 줘.” “왜요?” 저항하자 팔이 꺾였고 휴대전화와 여권을 순식간에 빼앗겼다. 그날 저녁부터 지옥이 시작됐다.● “목표 못 채웠네?” 쇠창살 안 ‘성인방송 노예’김 씨에게 주어진 ‘일’은 성인방송이었다. 카메라 앞에 앉혀놓고 옷을 벗으라고 요구했다. 시청자에게 후원금을 구걸했다. 다음 날엔 실적표가 벽에 붙었다. 목표액에 못 미치면 욕설과 폭행이 돌아왔다. 옆방에선 드문드문 “살려주세요”라는 비명이 새어나왔다. 김 씨는 하루 종일 불이 꺼지지 않는 방에서 카메라 불빛만 바라보며 버텼다.김 씨는 한 달 뒤 극적으로 구조됐다. 가족이 받은 ‘도착 인증샷’ 한 장이 단서였다. 가족들이 김 씨를 찾아나섰고, 현지에서 20년째 거주 중인 교민이 사진 속 바다와 섬의 위치를 추적해 시아누크빌 일대를 한 달간 수색했다. 마침내 평소 알고 지내던 캄보디아 경찰과 함께 건물을 급습해 김 씨를 구했다. 하지만 구조돼 귀국한 후 들은 이야기는 더 끔찍했다. 그녀를 데려온 ‘교민’은 현지 범죄조직에 500만 원을 받고 김 씨를 팔아넘긴 것이었다.19일 오후(현지 시간) 김 씨가 감금됐었던 시아누크빌 건물 입구엔 아직도 경비원으로 추정되는 중국인들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이들은 휴대전화를 보는 척하며 눈을 치켜뜨고 주변을 유심히 관찰했다. 운전기사로 동행한 현지인은 “저들이 우리를 알아보는거 같다. 차에서 절대 내리지 말라”며 “여전히 중국계 조직의 범죄단지로 활용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캄보디아에서 범죄에 연루된 한국 청년 대다수는 남성이지만, 김 씨처럼 여성도 적지 않다. 지난해 캄보디아의 로맨스 스캠(연애 빙자 사기) 조직에 납치됐다가 가까스로 탈출한 30대 남성 정민수(가명) 씨는 “조직원 150명 중 납치된 5명 정도가 여성이었다. (남성 조직원이) 대본을 써주면 통화는 여성 대역이 했다”고 말했다. 이달 7일에는 또 다른 30대 여성이 캄보디아와 베트남 접경 지역에서 숨진 채 발견되기도 했다.● 중국 공안은 현지에서 직접 단속시아누크빌 교민들은 “중국은 수년 전부터 캄보디아 경찰과 공조해 자국민 대상 범죄조직을 직접 단속해왔지만, 한국 정부는 여전히 느리다”고 입을 모았다. 중국은 2019년부터 캄보디아 정부와 협력해 현지 피의자를 적극적으로 송환하고 있다. 지난해 3월엔 캄보디아 경찰과 함께 시아누크빌의 리조트를 급습해 약 700명을 붙잡았고, 4월에는 130명을 송환했다. 캄보디아 헌병대 관계자는 “중국 공안이 시아누크빌을 직접 순찰·단속한 뒤 해변을 점령하던 중국계 범죄자들이 눈에 띄게 줄었다”고 전했다.전문가들은 한국도 자국민 보호를 위한 상시 대응 체계를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곽대경 동국대 경찰사법대학 교수는 “코리안데스크를 설치해 양국 경찰 간 실시간 소통을 보장해야 한다”고 했다. 이건수 백석대 경찰행정학과 교수는 “외교부·경찰에 실종 전담 센터를 세워야 한다”고 말했다. 20일 유재성 경찰청장 직무대행은 찌어 뻐우 캄보디아 경찰청 차장과 회담하고 양국간 24시간 핫라인을 설치하기로 했지만, 코리안데스크 신설에는 합의하지 못했다.한편 우리 경찰은 프놈펜에서 범죄단지에 감금·고문당한 뒤 살해된 대학생 박모 씨(22)의 시신을 이날 현지 당국과 합동 부검한 결과, 장기 적출 등 시신 훼손은 없었다고 밝혔다. 경찰은 박 씨의 유해를 21일 국내로 송환할 계획이다.시아누크빌=권구용 기자 9dragon@donga.com시아누크빌=정서영 기자 cero@donga.com조승연 기자 cho@donga.com}

18일 오후 캄보디아 수도 프놈펜에서 남동쪽으로 약 160km 떨어진 남부 국경도시 바베트. 베트남 국경 검문소 인근 식료품점 앞에 지프 1대와 승합차 2대가 잇따라 멈춰 섰다. 트렁크에는 PC 모니터와 데스크톱 본체 10여 대가 실려 있었고, 차량 안에는 현지인과 다른 피부색의 여성들이 짙은 화장을 한 채 앉아 있었다. 인근 주민은 “이 지역은 정전이 잦아 컴퓨터를 쓸 일이 거의 없다”며 “저런 사람들은 대부분 로맨스 스캠 같은 온라인 범죄에 동원되는 중국계 조직원”이라고 귀띔했다. 프놈펜, 시아누크빌 일대에 몰려 있던 온라인 사기 조직원들이 최근 단속을 피해 바베트 등 캄보디아 국경 지대로 대규모 ‘야반도주’를 벌이고 있는 것으로 파악됐다. 일부는 국경을 넘어 베트남, 미얀마, 라오스까지 활동 무대를 넓히는 정황도 포착됐다. 한국 정부가 캄보디아 당국과 합동 단속을 강화하고 있지만, 핵심 조직이 인접국으로 거점을 옮기면서 검거와 피해자 구조가 한층 어려워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이날 기자가 찾은 바베트는 프놈펜이나 시아누크빌 등지에서 도주한 조직원들이 모여드는 곳으로 통했다. 국경을 넘으면 베트남 최대 도시 호찌민까지 약 62km에 불과해 차로 1시간 남짓이면 이동할 수 있다. 한 바베트 주민은 “바베트로 온 이들 중 상당수는 대형 웬치(범죄단지)에 있던 중국계 조직원들”이라며 “베트남으로 밀입국하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범죄조직, 국경마다 비밀 도주로 팠다”… 中 SNS선 ‘돈다발 구인’[캄보디아 범죄 사태] 캄보디아 범죄 현장베트남 접경으로 야반도주캄보디아 접경지역 ‘웬치’ 수십곳… 태국-라오스 등 인접국 도주 목적“거점 옮겨가며 범죄 재개 가능성”… 韓-캄보디아 합동 단속 난항 우려“국경지대에서 검문검색을 피할 수 있는 속칭 ‘개구멍’이라 불리는 비공식 통로가 여러 곳 있습니다.”캄보디아 남부 국경도시 바베트에서 만난 한 현지 주민은 “한 번 국경을 넘으면 정부 당국의 추적이 쉽지 않아 캄보디아를 빠져나가는 것”이라며 이렇게 말했다. 18일 오후 4시 바베트 도심은 개발도 채 되지 않아 황폐한 분위기였다. 그럼에도 곳곳에는 중국어 간판과 허름한 카지노가 한 건물 건너 하나씩 늘어서 있었다.국경 지역으로 가까워질수록 분위기가 삼엄했다. 검문소 주변 도로에는 국경을 오가는 차량 행렬이 길게 늘어서 있었고, 차량 검색 탓에 편도 1차로는 꽉 막혀 있었다. 검색대 앞에 선 10명 중 3명가량은 현지인과 피부색이 달랐고, PC와 모니터 등 장비를 여럿 가지고 있는 사람도 많았다. 현지 주민들은 이들 중 상당수가 조직범죄에 대한 단속을 피해 인접국으로 근거지를 옮기려는 범죄조직원이라고 했다.● 베트남 라오스 등 인접국으로 ‘야반도주’앞서 프놈펜과 시아누크빌 일대 ‘웬치(범죄단지)’에선 한밤중에 조직원들이 짐가방을 들고 건물 밖으로 나와 검은 비닐로 포장한 PC 등을 길가에 늘어놓은 채 차량을 기다리고 있는 모습이 곳곳에서 목격됐다. 이들은 40인승 버스에 줄지어 올라타거나 오토바이에 짐을 싣고 서둘러 떠나갔다. 현지 경찰은 범죄조직원들이 베트남이나 라오스 등으로 도주하기 위해 캄보디아 국경지대로 이동한 것으로 보고 있다.국제앰네스티에 따르면 프놈펜과 시아누크빌 외에도 크레이툼, 오스마크, 보코산 등 캄보디아 전역의 국경지대에는 이미 수십 곳의 웬치가 형성돼 있다. 이들 지역은 태국·베트남·라오스 등 인접국과 도로로 연결돼 차량 등으로 이동하기 쉽다는 공통점이 있다.19일 라오스의 한 교민은 “비엔티안의 산지앙 지역(중국계 거주 밀집 지역)에 캄보디아 범죄단지와 유사한 형태의 건물이 하나둘 들어서고 있다”며 “캄보디아에서 철수한 조직이 이곳으로 이동한 것으로 보인다”고 전했다. 올해 5월에는 미얀마에서도 한국인 납치 사건이 발생했다. 주미얀마 한국대사관은 한국인 남성 장모 씨(36)가 태국 국경 인근 미야와디의 범죄단지에 감금돼 있다는 신고를 접수했다고 밝혔다. 미야와디는 중국계 온라인 사기조직의 주요 거점으로 알려진 지역이다.범죄조직의 활동 무대가 캄보디아 국경 밖으로 확산되면서 한국-캄보디아 정부의 합동 단속도 사실상 ‘허탕’에 그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김진아 외교부 2차관은 “캄보디아 정부의 협력 의지를 확인했다”며 공조를 강화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이미 주요 범죄조직들이 국경을 넘어 도주한 상황에서 실질적 단속 효과를 거두기 어려운 상황이다. 캄보디아 내 남은 웬치들도 대부분 국경과 인접해 있다. 추가 단속에 나서더라도 조직원들이 라오스나 베트남 등으로 재이동할 가능성이 크다.이에 더불어민주당 전현희 수석최고위원은 19일 기자간담회에서 “필요하다면 군사적 조치 또한 배제해선 안 된다”며 “우리 국민의 희생이 계속된다면 정부는 캄보디아에 대한 공적개발원조(ODA) 중단도 적극 검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中 소셜미디어선 ‘온라인 유인글’ 여전현지에서는 “단속을 피해 거점을 옮길지라도 언제든 다시 사람을 모집해 범죄 활동을 재개할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실제 이번 사태가 불거진 이후에도 중국 내 인터넷에서는 여전히 ‘캄보디아 취업’을 미끼로 한 유인 게시물이 쏟아지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본보 취재를 종합하면 중국 주요 소셜미디어 플랫폼인 샤오훙수(小紅書)에는 돈다발, 고급 식당, 5성급 호텔을 배경으로 “캄보디아에서 돈을 벌고 있다”, “궁금하면 물어보라”는 글이 하루에도 수십 건씩 올라오고 있었다. 한국 내에서 유통된 유인글이 ‘급구’, ‘고수익 알바’ 등 단순 모집 문구에 그쳤던 것과 달리 중국 게시물은 실제 현금 다발이나 고급 차량, 요트, 식사 장면 등을 함께 게시하며 ‘성공한 삶’을 연출하고 있다.바베트=권구용 기자 9dragon@donga.com바베트=정서영 기자 cero@donga.com서지원 기자 wish@donga.com}

“국경지대에서 검문검색을 피할 수 있는 속칭 ‘개구멍’이라 불리는 비공식 통로가 여러 곳 있습니다.”캄보디아 남부 국경도시 바베트에서 만난 한 현지 주민은 “한 번 국경을 넘으면 정부 당국의 추적이 쉽지 않아 캄보디아를 빠져나가는 것”이라며 이렇게 말했다. 18일 오후 4시 바베트 도심은 개발도 채 되지 않아 황폐한 분위기였다. 그럼에도 곳곳에는 중국어 간판과 허름한 카지노가 한 건물 건너 하나씩 늘어서 있었다. 국경 지역으로 가까워질수록 분위기가 삼엄했다. 검문소 주변 도로에는 국경을 오가는 차량 행렬이 길게 늘어서 있었고, 차량 검색 탓에 편도 1차로는 꽉 막혀있었다. 검색대 앞에 선 10명 중 3명가량은 현지인과 피부색이 달랐고, PC와 모니터 등 장비를 여럿 가지고 있는 사람도 많았다. 현지 주민들은 이들 중 상당수가 조직범죄에 대한 단속을 피해 인접국으로 근거지를 옮기려는 범죄조직원이라고 했다. ● 베트남 라오스 등 인접국으로 ‘야반도주’앞서 프놈펜과 시아누크빌 일대 ‘웬치(범죄단지)’에선 한밤 중에 조직원들이 짐가방을 들고 건물 밖으로 나와 검은 비닐로 포장한 PC 등을 길가에 늘어놓은 채 차량을 기다리고 있는 모습이 곳곳에서 목격됐다. 이들은 40인승 버스에 줄지어 올라타거나 오토바이에 짐을 싣고 서둘러 떠나갔다. 현지 경찰은 범죄조직원들이 베트남이나 라오스 등으로 도주하기 위해 캄보디아 국경지대로 이동한 것으로 보고 있다. 국제앰네스티에 따르면 프놈펜과 시아누크빌 외에도 쯔레이톰, 오스마크, 보코산 등 캄보디아 전역의 국경지대에는 이미 수십 곳의 웬치가 형성돼 있다. 이들 지역은 태국·베트남·라오스 등 인접국과 도로로 연결돼 차량 등으로 이동하기 쉽다는 공통점이 있다.19일 라오스의 한 교민은 “비엔티안의 산지앙 지역(중국계 거주 밀집 지역)에 캄보디아 범죄단지와 유사한 형태의 건물들이 하나둘 들어서고 있다”며 “캄보디아에서 철수한 조직이 이곳으로 이동한 것으로 보인다”고 전했다. 올해 5월에는 미얀마에서도 한국인 납치 사건이 발생했다. 주미얀마 한국대사관은 한국인 남성 장모 씨(36)가 태국 국경 인근 미야와디의 범죄단지에 감금돼 있다는 신고를 접수했다고 밝혔다. 미야와디는 중국계 온라인 사기조직의 주요 거점으로 알려진 지역이다. 범죄조직의 활동 무대가 캄보디아 국경 밖으로 확산하면서 한국-캄보디아 정부의 합동 단속도 사실상 ‘허탕’에 그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김진아 외교부 2차관은 “캄보디아 정부의 협력 의지를 확인했다”며 공조를 강화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이미 주요 범죄조직들이 국경을 넘어 도주한 상황에서 실질적 단속 효과를 거두기 어려운 상황이다. 캄보디아 내 남은 웬치들도 대부분 국경과 인접해 있다. 추가 단속에 나서더라도 조직원들이 라오스나 베트남 등으로 재이동할 가능성이 크다. 이에 더불어민주당 전현희 수석최고위원은 19일 기자간담회에서 “필요하다면 군사적 조치 또한 배제해선 안 된다”며 “우리 국민의 희생이 계속된다면 정부는 캄보디아에 대한 공적개발원조(ODA) 중단도 적극 검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 中 소셜미디어선 ‘온라인 유인글’ 여전 현지에서는 “단속을 피해 거점을 옮길지라도 언제든 다시 사람을 모집해 범죄 활동을 재개할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실제 이번 사태가 불거진 이후에도 중국 내 인터넷에서는 여전히 ‘캄보디아 취업’을 미끼로 한 유인 게시물이 쏟아지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본보 취재를 종합하면 중국 주요 소셜미디어 플랫폼인 샤오홍슈(小红书)에는 돈다발, 고급 식당, 5성급 호텔을 배경으로 “캄보디아에서 돈을 벌고 있다”, “궁금하면 물어보라”는 글이 하루에도 수십 건씩 올라오고 있었다. 한국 내에서 유통된 유인글이 ‘급구’, ‘고수익 알바’ 등 단순 모집 문구에 그쳤던 것과 달리, 중국 게시물은 실제 현금 다발이나 고급 차량·요트·식사 장면 등을 함께 게시하며 ‘성공한 삶’을 연출하고 있다.바베트=권구용 기자 9dragon@donga.com바베트=정서영 기자 cero@donga.com서지원 기자 wish@donga.com허동준 기자 hungry@donga.com}

“캄보디아에는 수많은 ‘옥냐’(상류층)들이 범죄조직의 ‘뒷배’를 보고 있습니다.”17일(현지 시간) 캄보디아 수도 프놈펜 외곽 종합관광단지 인근. 한 현지인은 낮게 목소리를 깔았다. 시야 끝에 보이는 유흥시설과 호텔, 아파트 단지는 캄보디아 재벌이자 집권 캄보디아인민당 리용팟 상원의원(67)이 소유한 리조트 기업 ‘리용팟 그룹’의 땅이다. 부지 한가운데 자리한 10층 건물은 높은 담장과 쇠창살로 둘러싸여 있었다. 건물 외벽 3층 높이까지 빽빽이 설치된 쇠창살은 외부인은 물론이고 내부인조차 드나들 수 없게 막고 있었다. 현지인은 이 건물을 가리키며 “온라인 사기가 벌어진 ‘웬치’(범죄단지)”라고 말했다.● “경찰도 못 건드리는 ‘유령도시’”프놈펜 시내에서 약 15km 떨어진 이 부지는 총면적 1만 ha(헥타르) 규모로, 국립경기장과 워터파크, 골프장 등이 들어선 관광단지로 조성됐다. 그러나 단지로 이어지는 왕복 6차로 도로에는 차도 사람도 거의 보이지 않았다. 한 현지인은 “여긴 땅은 넓지만 유령도시(ghost city)”라고 말했다.차로 2분가량 더 들어가자 낮게는 3층, 높게는 9층 규모의 건물 여러 동이 나타났다. 일부는 공사 중이었지만 평일인데도 작업은 중단된 상태였다. 현지에 18년째 거주 중인 한 교민은 “옥냐들이 비싼 값에 웬치로 빌려주고, 안에는 병원이나 상점 같은 걸 넣는다”고 설명했다.부지 안쪽으로 더 들어가자 실내체육관과 숙소 예정 부지가 나왔다. 교민은 “15층짜리 숙소 건물은 최근까지 온라인 사기 조직이 활동하던 곳”이라며 “지금은 시끄러워 비어 있지만, 옥냐들의 힘을 거역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잠잠해지면 언제든 다시 범죄 소굴이 될 수 있다”고 했다.인근 놀이공원 ‘가든 시티 워터파크’도 상황이 비슷했다. 리용팟 의원이 소유한 이곳은 홈페이지에서 ‘모든 연령대를 위한 장소’라고 홍보했지만 미국 재무부는 이곳을 인신매매와 온라인 사기의 거점으로 지목하고 제재한 상태다. 다른 교민은 “요즘 교민 사회 전체가 입조심하는 분위기”라며 “권력층을 건드린 기사라도 나가면 누가 썼는지 찾아내 해코지할 수도 있다고들 한다”고 말했다.● 美 “캄보디아 고위층, 인신매매 공모”캄보디아 내에서 잇따르는 한국인 납치·감금 사건의 배경으로 현지 범죄조직과 집권당 권력층의 유착이 지목된다. 올 2월 리 의원이 소유한 북서부 국경지대 오스마크 리조트에선 외국인 약 60명이 집단 탈출하는 일이 벌어졌다. 미국 재무부는 “이들은 취업 사기 피해자로, 도착 후 휴대전화와 여권을 압수당하고 사기 행위를 강요당했다”며 “구타와 전기 충격 등 학대를 당하고 몸값 등을 강요받았다”고 밝혔다. 캄보디아 10대 재력가로 꼽히는 콕안 상원의원(71) 역시 태국 경찰이 국제 온라인 사기 조직의 배후로 지목했다. 17일 오후 5시경(현지 시간) 프놈펜에서 차로 약 2시간 떨어진 콕안 의원 소유의 크라운 카지노 인근 웬치 입구는 중국인들이 지키고 있었다. 음식 배달 오토바이가 도착하면 경비 인력이 이를 받아 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북부 도시 포이펫의 크라운 카지노 등을 거점으로 태국인을 유인해 강제노동과 대포통장 개설을 시킨 혐의를 받고 있다.미국 국무부는 “인신매매에 대한 공무원의 공모가 만연하고 고질적이다. 고위층이 재계와 밀접한 관계를 맺으며 사기 행각을 벌인다”고 분석했다. 현지 교민들은 “정치 거물들과 얽힌 사건은 경찰도 쉽게 건드리지 못한다”고 했다.프놈펜=권구용 기자 9dragon@donga.com프놈펜=정서영 기자 cero@donga.com}

17일 오후 2시경(현지 시간) 캄보디아 시엠레아프의 번화가 ‘펍 스트리트’ 인근 도보 20분 거리에 있는 한 건물은 다른 건물과 다른 분위기를 내뿜고 있었다. 인근 건물과는 달리 문을 걸어 잠가두고, 내부에도 불을 다 꺼뒀다. 창살 앞으로 다가가 보니 어디서 나오는지 모르는 깜빡이는 불빛만 건물이 기능하고 있다고 알렸다. 취재진과 동행한 현지인은 “온라인 범죄가 이뤄지는 ‘웬치’(범죄단지)다. 관광지라 눈에 띄지 않을 뿐이다”라고 말했다.앙코르와트 인근에 있는 시엠레아프는 유적지는 물론이고 여행자 거리가 있어 세계적인 관광지로 꼽힌다. 한국인들 역시 지난해 한 해에만 약 14만 명이 방문했다. 관광 도시답게 프놈펜이나 시아누크빌 등과 달리 범죄와 무관하다는 인식이 강하다.하지만 현지 주민들의 전언 등에 따르면 캄보디아 전역에 있는 웬치는 이곳 시엠레아프에도 존재한다. 수도 프놈펜에서 차량으로 약 5시간 거리에 있음에도 범죄의 손길이 뻗친 것. 시엠레아프 내 웬치는 관광지라는 지역적 특성에 숨어 은밀하게 운영되고 있다고 한다. 현지인조차 이곳에 웬치가 있다는 사실을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한 현지 공무원은 “잘 보이지만 않을 뿐 웬치는 존재한다”며 “도심 속에 숨어들어 범죄를 저지르고 있다”고 말했다.실제로 현지 매체에 따르면 캄보디아 경찰은 7월 시엠레아프의 한 빌라에서 온라인 사기에 연루된 네팔인 13명을 붙잡았다. 이들의 거점은 대규모 범죄단지가 아닌 평범한 빌라였다. 범죄조직들이 일상으로 숨어들어 찾아내기 쉽지 않은 ‘아파트형 웬치’ 형태로 이미 변모한 셈이다.이곳에서 운영되는 웬치는 주로 온라인 도박 등에 집중된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감금, 폭행 등의 폭력은 벌어지지 않는다는 설명이다. 한 교민은 “(시엠레아프는) 관광지라 전 세계 사람들이 몰리고 이목도 집중되기 때문에 폭행 등이 발생하진 않는다”고 말했다. 또 다른 교민도 “시엠레아프에서 고문 등 범죄가 벌어진 적은 없다”고 했다.하지만 캄보디아 곳곳에서 범죄단지가 발견되고 있어 시엠레아프 역시 사전에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앙코르와트 유적을 보기 위해 모여드는 관광객도 범죄 위험에 노출될 수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도 있다. 한 현지 관계자는 “문제를 일으키지 않더라도 범죄단지인 건 변함이 없다”며 “더 큰 문제로 비화하기 전 조처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시엠레아프=정서영 기자 cero@donga.com천종현 기자 punch@donga.com}

숨진 대학생 박모 씨(22)의 시신이 안치된 프놈펜 턱틀라 사원에서 차로 20분가량 떨어진 센속구의 한 아파트. 16일 오후 5시(현지 시간)경 취재팀이 찾은 이곳은 겉보기엔 평범한 주거지였다. 주민들의 이야기 소리가 들리고 건물 앞 도로엔 차들이 지나다녔다. 하지만 위층엔 투자 사기 리딩방이, 1층엔 감금 인력을 감시하는 경비 천막이 불을 밝히고 있었다. 소규모 ‘아파트형 웬치(범죄단지)’다. 인신매매의 상징이던 시아누크빌의 대규모 웬치가 단속으로 문을 닫자 범죄조직이 도심 속 빌라나 오피스텔 여러 층을 빌려 은신하고 있는 것이다.● 아파트로 숨어든 범죄조직취재팀과 동행한 15년 차 교민 A 씨(63)는 100m 간격으로 붙어 있는 건물들을 가리키며 “여기도 저기도 모두 웬치”라고 말했다. 실제로 취재팀이 웬치의 사진을 촬영하려고 하자, 천막에 있던 중국인들이 제지하려 다가서기도 했다.이 일대는 한인타운을 비롯해 왕립 캄보디아대, 중앙은행이 몰린 중상층 거주 지역이다. 하지만 이런 도심 곳곳에도 범죄조직의 마수가 뻗쳐 있었다. 인근에 거주하는 한 현지인은 “교민들도 신고가 들어오기 전까지 이곳이 웬치인 줄 몰랐다”고 했다. 실제 일부 아파트형 웬치는 도심에 녹아들기 위해 위장 수법을 쓰고 있었다. 외부에 빨래 등을 널어 두거나 한자 ‘복(福)’ 등 중국어가 적힌 문구를 붙여둬 평범한 가정처럼 보이려는 것. A 씨는 “외국인과 여행객이 많이 다니기에 지나치기 쉽지만, 자세히 보면 (아파트형 웬치는) 사람이 드나들지 않고 대문이 항상 잠겨 있다”고 말했다. 대규모 웬치가 최근 국제 제재와 단속 강화로 운신하기 어려워지자 조직들은 도시 곳곳으로 흩어지는 ‘분산형 생존 전략’을 택한 것으로 분석된다. A 씨는 “(대규모 웬치와 달리) 이건 외관상 아무도 모른다”고 했다.● 단속 조여들자 대규모 웬치는 ‘텅텅’실제로 캄보디아 주요 대규모 웬치에서는 탈출 행렬이 이어지고 있었다. 취재팀이 이날 찾은 대규모 웬치 중 하나인 논케우 ‘태자단지’는 이미 범죄자들이 떠나 텅 빈 상태였다. 프놈펜에서 차로 약 1시간 30분 거리인 이곳은 3000명 넘게 수용할 수 있는 면적에 병원과 주점, 미용실, 급식시설 등을 갖춘 대규모 시설이었지만 이날은 인적이 전혀 없었다. 야심한 밤을 틈타 짐을 챙겨 다른 지역으로 이동한 것으로 추정된다. 도피 직전 급한 상황을 보여주듯 철제 2층 침대에는 미처 챙기지 못한 옷들이 걸려 있었다. 한 교민은 “이렇게 큰 웬치인데 현지 경찰이 정보를 흘리지 않고서야 다 이주한 게 말이 되느냐”고 말했다.과거 삼합회 계열 중국 범죄조직이 이들 대형 웬치를 운영했다. 유엔마약범죄사무소(UNODC)에 따르면, 중국 정부의 단속 강화로 이들 조직은 캄보디아로 본거지를 옮겼다. ‘14K’와 ‘선이온(新義安)’ 등의 조직이 온라인 사기나 감금 범죄를 주도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현지 경찰 협력관 증원 추진경찰은 해외 수사 공조 역량을 대폭 보강하기로 했다. 특히 인터폴 공조 전담 인력을 현행의 2배 넘게 확대하고, 인터폴 적색수배·수배 확장 등 국제 공조 요청 건의 처리 속도와 빈도를 높이기로 했다.경찰청은 시도경찰청 국제범죄수사계 소속 인터폴 공조 담당 직원을 기존 22명에서 47명으로 늘리는 방안을 행정안전부에 제출했다. 또 캄보디아 현지 파견 인력을 기존 3명에서 8명으로 증원하고, 시아누크빌 등지에 ‘코리안 데스크’를 2명 설치할 예정이다.문제는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대규모 단지를 주도하던 조직이 아파트형 웬치 등으로 뿔뿔이 흩어지면서 검거와 구조가 어려워질 것으로 우려된다는 점이다. 위성 사진이나 위성위치확인시스템(GPS) 추적으로는 식별하기 어려워 수사·구조가 까다롭기 때문이다. 한 교민은 “우리 정부가 뒤늦게 합동대응팀을 급파했지만, 피해자 구출은 더 어려워질 수도 있다”고 말했다.프놈펜=정서영 기자 cero@donga.com논케우=권구용 기자 9dragon@donga.com이수연 기자 lotus@donga.com}

“연고 없는 한국 청년의 시신이 두 달에 한 구꼴로 실려 옵니다.”16일 오후 4시경(현지 시간) 캄보디아 수도 프놈펜 도심의 턱틀라 사원 관계자는 “최근 몇 년 새 한국인 시신이 눈에 띄게 늘었다”며 이렇게 말했다. 그중 한 명이 8월 보코산 지역의 ‘웬치’(범죄단지)에 감금돼 고문 끝에 숨진 대학생 박모 씨(22)다. 박 씨의 시신은 두 달 넘게 이 사원의 냉동고에 안치돼 있었고, 출입문 앞은 현지 경찰이 지키고 있었다.턱틀라 사원은 공공 장례식장 겸 화장 시설로, 캄보디아에서 숨진 외국인 중 무연고자나 변사자가 이곳으로 옮겨진다. 이날도 사원 화장장 굴뚝에선 시커먼 연기가 끊임없이 올라와, 경내에서 뛰어노는 현지 아이들의 평화로운 모습과 대조됐다. 사원 관계자는 “일본인 등은 주로 수명을 다해서 오는 반면에 한국인 시신은 젊은이가 많다”고 했다. 이 사원은 캄보디아에서 납치, 감금, 살인 등 강력 범죄로 유명을 달리한 한국 청년들의 종착지인 셈이다.국립과학수사연구원은 캄보디아 경찰과 박 씨의 시신을 공동 부검하기 위해 법의관 등을 파견한다. 경찰 관계자는 “장기의 훼손, 적출 여부도 확인할 것”이며 “장기 매매 피해가 있을 수 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훈 마넷 캄보디아 총리는 이날 박 씨 시신의 송환에 동의하며 “심심한 유감과 안타까움을 표한다”고 밝혔다. 단속 강화에 아파트-빌라 숨어든 범죄조직 ‘웬치’… 적발 더 어려워[캄보디아 범죄 사태]캄보디아 프놈펜 범죄현장 르포외부에 빨래 등 가정처럼 위장… 대규모 웬치 ‘태자단지’는 텅텅“경찰이 정보 흘리지않곤 불가능”… 韓 경찰 파견인력 3명→8명 증원숨진 대학생 박모 씨(22)의 시신이 안치된 프놈펜 턱틀라 사원에서 차로 20분가량 떨어진 센속구의 한 아파트. 16일 오후 5시(현지 시간)경 취재팀이 찾은 이곳은 겉보기엔 평범한 주거지였다. 주민들의 이야기 소리가 들리고 건물 앞 도로엔 차들이 지나다녔다. 하지만 위층엔 투자 사기 리딩방이, 1층엔 감금 인력을 감시하는 경비 천막이 불을 밝히고 있었다. 소규모 ‘아파트형 웬치(범죄단지)’다. 인신매매의 상징이던 시아누크빌의 대규모 웬치가 단속으로 문을 닫자 범죄조직이 도심 속 빌라나 오피스텔 여러 층을 빌려 은신하고 있는 것이다.● 아파트로 숨어든 범죄조직취재팀과 동행한 15년 차 교민 A 씨(63)는 100m 간격으로 붙어 있는 건물들을 가리키며 “여기도 저기도 모두 웬치”라고 말했다. 실제로 취재팀이 웬치의 사진을 촬영하려고 하자, 천막에 있던 중국인들이 제지하려 다가서기도 했다.이 일대는 한인타운을 비롯해 왕립 캄보디아대, 중앙은행이 몰린 중상층 거주 지역이다. 하지만 이런 도심 곳곳에도 범죄조직의 마수가 뻗쳐 있었다. 인근에 거주하는 한 현지인은 “교민들도 신고가 들어오기 전까지 이곳이 웬치인 줄 몰랐다”고 했다. 실제 일부 아파트형 웬치는 도심에 녹아들기 위해 위장 수법을 쓰고 있었다. 외부에 빨래 등을 널어 두거나 한자 ‘복(福)’ 등 중국어가 적힌 문구를 붙여둬 평범한 가정처럼 보이려는 것. A 씨는 “외국인과 여행객이 많이 다니기에 지나치기 쉽지만, 자세히 보면 (아파트형 웬치는) 사람이 드나들지 않고 대문이 항상 잠겨 있다”고 말했다. 대규모 웬치가 최근 국제 제재와 단속 강화로 운신하기 어려워지자 조직들은 도시 곳곳으로 흩어지는 ‘분산형 생존 전략’을 택한 것으로 분석된다. A 씨는 “(대규모 웬치와 달리) 이건 외관상 아무도 모른다”고 했다.● 단속 조여들자 대규모 웬치는 ‘텅텅’실제로 캄보디아 주요 대규모 웬치에서는 탈출 행렬이 이어지고 있었다. 취재팀이 이날 찾은 대규모 웬치 중 하나인 논케우 ‘태자단지’는 이미 범죄자들이 떠나 텅 빈 상태였다. 프놈펜에서 차로 약 1시간 30분 거리인 이곳은 3000명 넘게 수용할 수 있는 면적에 병원과 주점, 미용실, 급식시설 등을 갖춘 대규모 시설이었지만 이날은 인적이 전혀 없었다. 야심한 밤을 틈타 짐을 챙겨 다른 지역으로 이동한 것으로 추정된다. 도피 직전 급한 상황을 보여주듯 철제 2층 침대에는 미처 챙기지 못한 옷들이 걸려 있었다. 한 교민은 “이렇게 큰 웬치인데 현지 경찰이 정보를 흘리지 않고서야 다 이주한 게 말이 되느냐”고 말했다.과거 삼합회 계열 중국 범죄조직이 이들 대형 웬치를 운영했다. 유엔마약범죄사무소(UNODC)에 따르면, 중국 정부의 단속 강화로 이들 조직은 캄보디아로 본거지를 옮겼다. ‘14K’와 ‘선이온(新義安)’ 등의 조직이 온라인 사기나 감금 범죄를 주도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현지 경찰 협력관 증원 추진경찰은 해외 수사 공조 역량을 대폭 보강하기로 했다. 특히 인터폴 공조 전담 인력을 현행의 2배 넘게 확대하고, 인터폴 적색수배·수배 확장 등 국제 공조 요청 건의 처리 속도와 빈도를 높이기로 했다.경찰청은 시도경찰청 국제범죄수사계 소속 인터폴 공조 담당 직원을 기존 22명에서 47명으로 늘리는 방안을 행정안전부에 제출했다. 또 캄보디아 현지 파견 인력을 기존 3명에서 8명으로 증원하고, 시아누크빌 등지에 ‘코리안 데스크’를 2명 설치할 예정이다.문제는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대규모 단지를 주도하던 조직이 아파트형 웬치 등으로 뿔뿔이 흩어지면서 검거와 구조가 어려워질 것으로 우려된다는 점이다. 위성 사진이나 위성위치확인시스템(GPS) 추적으로는 식별하기 어려워 수사·구조가 까다롭기 때문이다. 한 교민은 “우리 정부가 뒤늦게 합동대응팀을 급파했지만, 피해자 구출은 더 어려워질 수도 있다”고 말했다.프놈펜=권구용 기자 9dragon@donga.com프놈펜=정서영 기자 cero@donga.com이수연 기자 lotus@donga.com}

숨진 대학생 박모 씨(22)의 시신이 안치된 프놈펜 떡뜰라 사원에서 차로 20분가량 떨어진 센속구의 한 아파트. 16일 오후 5시경(현지시간) 취재팀이 찾은 이곳은 겉보기엔 평범한 주거지였다. 주민들의 이야기 소리가 들리고 건물 앞 도로엔 차들이 지나다녔다. 하지만 위층엔 투자사기 리딩방이, 1층엔 감금 인력을 감시하는 경비 천막이 불을 밝히고 있었다. 소규모 ‘아파트형 웬치(범죄단지)’다. 인신매매의 상징이던 시아누크빌의 대규모 웬치가 단속으로 문을 닫자 범죄조직이 도심 속 빌라나 오피스텔 여러 층을 빌려 은신하고 있는 것이다. ● 아파트로 숨어든 범죄조직취재팀과 동행한 15년차 교민 A 씨(63)는 100m 간격으로 붙어있는 건물들을 가리키며 “여기도, 저기도 모두 웬치”라고 말했다. 실제로 취재팀이 웬치의 사진을 촬영하려고 하자, 천막에 있던 중국인들이 제지하려 다가서기도 했다. 이 일대는 한인타운을 비롯해 왕립 캄보디아대학교, 중앙은행이 몰린 중상층 거주 지역이다. 하지만 이런 도심 곳곳에도 범죄조직의 마수가 뻗쳐 있었다. 인근에 거주하는 한 현지인은 “교민들도 신고가 들어오기 전까지 이곳이 웬치인 줄 몰랐다”고 했다. 실제 일부 아파트형 웬치는 도심에 녹아들기 위해 위장 수법을 쓰고 있었다. 외부에 빨래 등을 널어두거나 한자 ‘복(福)’ 등 중국어가 적힌 문구를 붙여둬 평범한 가정처럼 보이려는 것. A 씨는 “외국인과 여행객이 많이 다니기에 지나치기 쉽지만, 자세히 보면 (아파트형 웬치는) 사람이 드나들지 않고 대문이 항상 잠겨있다”고 말했다.대규모 웬치가 최근 국제 제재와 단속 강화로 운신하기 어려워지자 조직들은 도시 곳곳으로 흩어지는 ‘분산형 생존전략’을 택한 것으로 분석된다. A 씨는 “(대규모 웬치와 달리) 이건 외관상 아무도 모른다”고 했다.● 단속 조여들자 대규모 웬치는 ‘텅텅’실제로 캄보디아 주요 대규모 웬치에서는 탈출 행렬이 이어지고 있었다. 취재팀이 이날 찾은 대규모 웬치 중 하나인 논케우 ‘태자단지’는 이미 범죄자들이 떠나 텅 빈 상태였다. 프놈펜에서 차로 약 1시간 30분 거리인 이곳엔 3000명 넘게 수용할 수 있는 면적에 병원과 주점, 미용실, 급식시설 등을 갖춘 대규모 시설이었지만 이날은 인적이 전혀 없었다. 야심한 밤을 틈타 짐을 챙겨 다른 지역으로 이동한 것으로 추정된다. 도피 직전 급한 상황을 보여주듯 철제 2층 침대에는 미처 챙기지 못한 옷들이 걸려있었다. 한 교민은 “이렇게 큰 웬치인데 현지 경찰이 정보를 흘리지 않고서야 다 이주한 게 말이 되나”고 말했다.과거 삼합회 계열 중국 범죄조직이 이들 대형 웬치를 운영했다. 유엔마약범죄사무소(UNODC)에 따르면, 중국 정부의 단속 강화로 이들 조직은 캄보디아로 본거지를 옮겼다. ‘14K’와 ‘선이온(新義安)’ 등의 조직이 온라인 사기나 감금 범죄를 주도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현지 경찰 협력관 증원 추진경찰은 해외 수사 공조 역량을 대폭 보강하기로 했다. 특히 인터폴 공조 전담 인력을 현행의 2배 넘게 확대하고, 인터폴 적색수배·수배 확장 등 국제 공조 요청 건의 처리 속도와 빈도를 높이기로 했다.경찰청은 시도경찰청 국제범죄수사계 소속 인터폴 공조 담당 직원을 기존 22명에서 47명으로 늘리는 방안을 행정안전부에 제출했다. 또 캄보디아 현지 파견 인력을 기존 3명에서 8명으로 증원하고, 시아누크빌 등지에 ‘코리안 데스크’를 2명 설치할 예정이다.문제는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대규모 단지를 주도하던 조직이 아파트형 웬치 등으로 뿔뿔이 흩어지면서 검거와 구조가 어려워질 것으로 우려된다는 점이다. 위성 사진이나 위성위치확인시스템(GPS) 추적으로는 식별하기 어려워 수사·구조가 까다롭기 때문이다. 한 교민은 “우리 정부가 뒤늦게 합동대응팀을 급파했지만, 피해자 구출은 더 어려워질 수도 있다”고 말했다.프놈펜=정서영 기자 cero@donga.com논케우=권구용 기자 9dragon@donga.com이수연 기자 lotus@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