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평인

송평인 칼럼니스트

동아일보

구독 174

추천

안녕하세요. 송평인 칼럼니스트입니다.

pisong@donga.com

취재분야

2025-11-05~2025-12-05
칼럼97%
사설/칼럼3%
  • [횡설수설/송평인]어떤 공권력 배상

    국민이 공무원 때문에 손해를 보면 보통 국가와 공무원 양쪽을 상대로 배상을 청구한다. 2015년 ‘민중총궐기’ 집회에서 경찰의 물대포에 맞아 사망한 백남기 씨의 유족은 살수차를 조종한 한모, 최모 경장에게 국가와 연대해 각각 5000만 원을 배상하라는 소송을 냈다. 손해배상 판결이 나면 보통 국가가 일단 피해자에게 배상하고 나중에 잘못한 경찰관에게 그 돈을 달라고 한다. 다만 잘못한 경찰관에게 고의나 중과실이 없으면 국가가 다 책임진다. ▷백 씨 관련 소송에서는 국가배상 소송으로는 특이하게도 국가가 아니라 경찰관 2명이 재판이 끝나기도 전에 서둘러 백 씨 유족의 청구를 받아들이는 청구인낙(請求認諾)을 했다. 경찰관들이 자기 책임으로 다투지 않고 돈을 물겠다고 한 이상 국가에 그 돈을 달라고 할 수도 없다. 경찰관들이 무슨 돈이 많아서 돈 많은 국가를 놔두고 자기 돈으로, 그것도 정당한지 부당한지 다툼이 있는 직무상 행위에 대해 5000만 원씩을 배상하는지 의문이다. 경찰관들은 “더 이상 유족의 아픔을 외면할 수 없어서”라고 했다. 그런 마음이 분명히 있겠지만 그것만이 이유였을까 싶다. ▷소송이 처음 제기됐을 때의 피고 국가는 박근혜 정부의 국가였다. 지금 이어받아 소송을 진행하는 피고 국가는 문재인 정부의 국가다. 문재인 정부의 국가는 이 소송에서 이기려는 의지가 전혀 없다. 그렇다고 국가가 나서 청구인낙을 하면 국가가 재판 결과도 지켜보지 않고 배상한다는 비판을 면치 못할 것 같으니까 경찰관들을 앞세워 배상하도록 한 것으로 보인다. ▷박근혜 정부의 검찰은 경찰관들이 물대포를 쏘는 과정에서 불법 행위가 있었는지 조사했으나 기소할 혐의를 찾지 못했다. 문재인 정부의 검찰이 다시 조사하고 있다. 경찰관들로서는 기소가 두렵기도 하고, 기소를 면한다고 해도 인사권을 쥔 경찰 수뇌부의 눈치를 봐야 한다. 사건 당시 신윤균 서울4기동단장도 곧 청구인낙서를 제출할 예정이라고 한다. 현직이 아닌 강신명 전 경찰청장, 구은수 전 서울경찰청장만 소송을 계속한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 2017-09-28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송평인 칼럼]김명수 후보자, 타협할 만한 次善이다

    몇 해 전이다. 당시 서울고등법원 부장판사였던 김명수 대법원장 후보자와 2년 가까이 대한변호사협회의 한 위원회에서 같이 활동하면서 그를 근접 거리에서 지켜볼 기회가 있었다. 김 후보자의 말은 부드럽고 태도는 늘 겸손했다. 그는 내가 직접 접해본 법관 중에서 깊은 인상을 심어 준 법관 가운데 한 명이다. 김 후보자가 우리법연구회 회장이었다는 사실은 그가 대법원장 후보자가 되고 나서야 알았다. 위원회 회의가 끝나면 위원들은 같이 저녁식사를 한다. 김 후보자는 바쁜 중에서도 가능한 한 참석하려고 노력했다. 저녁식사 자리에 정치도 심심치 않게 화제에 올랐지만 김 후보자에게서 이념적으로 특별히 편향적이라고 할 만한 발언을 들은 기억은 없다. 김 후보자에게는 남달리 반듯한 풍모가 있다. 몇 차례 얘기를 나눈 후에 그 풍모의 정체가 종교적 독실성과 무관치 않다고 여기게 됐다. 그는 법원 내 불자 모임인 서초반야회를 창립하고 그 회장을 지냈다. 서울대 법대 재학 시절 법불회에서부터 열심히 활동했다고 한다. 난 다른 종교를 갖고 있으니 불교에 편향된 사람이라는 의심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김 후보자는 위원회 활동을 하기 전에 몰랐고 그 후로도 연락한 적은 없다. 그러다 김 후보자가 대법원장 후보자로 지명됐을 때 예상치 못한 괜찮은 카드라고 생각했다. 대법원장 후보자 지명을 고사한 박시환 전수안 두 전 대법관이 그를 가리켜 “우리보다 나은 사람”이라고 했을 때 그들이 어떤 느낌으로 한 말인지 대강 짐작할 수 있었다. 언론과 정치권에서 나오는 김 후보자에 대한 평가는 그를 지지하든 반대하든 다소 피상적이라는 느낌을 받는다. 판사는 판결로 말한다는 말이 있다. 튀는 판사들이 아니면 외부에서 어느 판사의 개인적 면모를 알기 힘들다. 어찌 보면 소소하다고 할 수 있는 개인적 경험을 늘어놓은 것은 2005년 존 로버츠 미국 연방대법원장이 임명될 때 국제부 기자로서 관심 있게 지켜본 미국 언론의 보도가 떠올라서다. 미국 언론의 연방대법원장 검증은 대통령 검증보다 어떤 면에서 더 엄격하다. 로버츠가 자랄 때 친구와 싸움을 했는데 그 이유가 무엇이었는지까지 파고들었다. 마치 로버츠의 생애 전체에 대한 생활기록부를 펼쳐 놓은 느낌이었다. 당시 50세인 로버츠의 판사 경력이 연방항소법원 2년밖에 없어서 검증할 만한 판결이 부족했고 그래서 더 인성을 파고들었는지 모른다. 나는 김 후보자의 성품은 알고 있었지만 그가 어떤 사안에 어떤 판결을 했는지는 잘 알지 못했기 때문에 자신 있게 대법원장감이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그에 대한 보도를 유심히 지켜봤다. 그에게서 인사청문 대상자에게 흔히 드러나는 재산 병역 표절 등의 도덕적 결함이 발견되지 않았다. 무엇보다 상식에 크게 어긋난 편향된 판결이 없었다. 전교조 법외노조 효력정지 가처분 인용이 논란이 되고 있지만 그 정도로 자격 시비를 하는 것은 지나치다. 그가 대법관을 했다면 민감한 사안들에 대해 의견을 피력했을 것이고 그로 인해 논란에 휩싸였을 수도 있을 테지만 대법관을 거치지 않은 점이 여기서는 운 좋게 작용했다. 다만 그의 개혁 성향이 현실과 동떨어져 공상(空想)적으로 흐르지 않을까 하는 우려는 남아 있다. 그가 춘천지법원장 시절 했다는 수평적 판사 조직 실험이 그렇다. 미국의 판사 조직이 수평적인 것은 주법원이든 연방법원이든 판사를 40대 후반이 돼야 시작하기 때문이다. 이는 우리로 치면 대개 고법 부장판사가 되기 직전의 나이다. 우리나라도 모든 판사가 고법 부장판사 정도의 경륜을 갖고 있다면 수평적 판사 조직을 만들지 못할 이유가 없다. 그러나 나이가 사십이 돼도 ‘재판은 정치’라는 헛소리를 하는 판사가 있는 게 실상이다. 법원에 그 말고도 대법원장을 할 만한 사람은 충분히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진보정권이 대법원장에 대한 지명권을 갖고 있는 상황에서 그나마 보수가 합의해줄 수 있는 드문 인물임에 틀림없다. 보수정권이 대법원장 지명권을 갖고 있더라도 진보가 어느 정도 동의해주는 인물을 뽑을 수밖에 없다. 사법부의 수장은 그런 자리다. 국회에서 그의 임명동의가 부결될 경우 그보다 못한 인물이 지명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도 솔직히 없지 않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 2017-09-20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횡설수설/송평인]김치와 멍청함

    한국이 사드 배치를 완료하자 중국 공산당 기관지 런민일보의 자매지 환추시보가 7일자 사설에서 ‘한국 보수주의자들은 김치를 먹어서 멍청해진 것인가’ 등의 격한 표현으로 한국을 비난했다. 멍청하다는 뜻으로 쓴 중국어는 호도(糊塗)다. 우리가 덮어서 감춘다는 뜻으로 쓰는 호도를 중국인은 총명(聰明)의 반대말로 쓴다. 일본식 표현으로 바꾸면, ‘김치를 먹어서 바카야로(바보)가 된 것인가’의 느낌이 난다. ▷인터넷 백과사전 위키피디아 중국어판에서 김치는 통상 밥과 함께 먹는데 칼로리가 적고 비타민 등이 많아 미국 건강잡지가 세계 5대 건강식품 중 하나로 선정했다고 첫머리에 소개돼 있다. 그런 김치가 중국인의 입맛에는 맵게 느껴져 중국인은 대체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나 자기들이 좋아하지 않는다고 해서 건강에 나쁘지도 않은데 먹어서 멍청해진다고 하는 것은 도무지 이치에 닿지 않아서 헛웃음만 나온다. 사람이 멍청해지는 것은 무슨 음식을 먹어서가 아니라 맹목적인 감정에 휩싸여 논리적으로 생각할 능력을 잃어서다. ▷김치는 한국의 보수주의자들만 먹는 게 아니다. 한국인이면 누구나 다 먹는다. 심지어 이른바 진보좌파들, 바로 중국에까지 가서 사드 배치를 비난한 현대판 사대주의자들도 먹는다. 한국 보수주의자들만 찍어서 비난하고 싶었다면 김치를 먹어서 멍청해진다는 말만큼 부적절한 말도 없다. 사설은 본래 의도한 바도 달성하지 못하고 한국인 전체를 욕한 멍청한 글이 되고 말았다. ▷중국에 난득호도(難得糊塗)란 말이 있다. 멍청한 척하기도 힘들다는 뜻이다. 초탈한 넓은 마음이 있어야 멍청한 척할 수 있다. 중국이 자꾸 그런 식으로 나오면 한국도 초탈한 마음을 유지하기가 쉽지 않다. 8일 갤럽조사에서 핵무기 보유를 원하는 국민이 응답자의 60%로 나타났다. 우리가 중국의 코앞에서 핵무기를 갖겠다는 ‘총명’한 태도로 나와야 중국이 정신 차리겠는가. 중국이 멍청하지 않다면 북한이 핵을 포기하도록 한 번이라도 제재에 앞장서 우리가 핵을 원할 생각을 아예 갖지 않게 도와줘야 한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 2017-09-09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횡설수설/송평인]‘核 함몰지진’

    자연지진은 발생 원인에 따라 구조지진, 화산지진, 함몰지진으로 나뉜다. 대부분의 규모가 큰 지진은 지각을 이루는 판들의 변형에 따라 발생하는 구조지진이다. 화산활동으로도 지진이 발생하고 거대한 지하 동굴 등의 함몰에 의해서도 지진이 발생한다. 화산지진과 함몰지진은 상대적으로 규모가 작다. 지하 핵실험의 충격에 따른 지진은 인공지진이라고 해서 자연지진과 구분한다. 그러나 핵실험 이후 갱도 등이 붕괴되면서 일어나는 2차 지진은 함몰지진이다. ▷중국은 3일 북한 6차 핵실험 이후 약 8분 30초 만에 규모 4.4의 함몰지진이 발생했다고 핵실험 이후 24분 만에 밝혔다. 핵실험 후 지진파로 감지된 함몰은 5차 때까지는 없던 것으로 6차 핵실험이 얼마나 강력했는지 보여주는 또 다른 증거다. 우리 기상청은 함몰지진 관측에 미처 대비하지 못한 듯하다. 핵실험 이틀이 지나서야 지진파를 고주파 대역과 저주파 대역으로 나눠 분석해 저주파 대역에서 함몰 추정 지진파가 잡혔다고 밝혔다. ▷핵실험 이후의 함몰지진은 지반이 무너져 생긴 틈으로 방사성 물질이 새어나올 수 있다는 신호이기 때문에 국민의 안전과도 직결된다. 이 때문에 기상청의 뒤늦은 함몰지진 확인이 비판을 받고 있다. 북한 핵실험은 북한 최북단에 가까운 함경북도 길주군 풍계리에서 진행된다. 한국의 휴전선과는 400km 이상 떨어진 곳이다. 원자력안전위원회의 휴전선 이남 방사능 측정치는 평상시와 다르지 않다. 그러나 인근 북한 주민들은 영향을 받을 가능성이 있다. ▷미국 존스홉킨스대 부설 북한 전문 미디어 38노스가 북한 6차 핵실험 뒤 촬영한 첫 풍계리 산악지역 사진에는 핵실험장뿐만 아니라 주변 여러 곳의 토사가 무너져 내려 산사태가 발생한 모습이 보인다. 앞서 5차례의 핵실험 때보다 지형 변화가 광범위하게 나타났다. 갱도 붕괴 등의 함몰 흔적은 찾기 어려웠으나 화상도가 낮아 명확한 상황을 알기는 어렵다. 차후 보다 높은 해상도의 위성사진 분석 결과를 지켜봐야 할 것 같다. 광범위한 지형 변화가 있다면 추가 붕괴 가능성도 있어 안심하기는 이르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 2017-09-07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송평인 칼럼]레드라인보다 레드존이다

    도널드 트럼프는 그가 대통령이 되리라고 거의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2015년 대통령 출마를 선언하면서 ‘불구가 된 미국’이란 책을 냈다. 이 책을 읽고 나면 널뛰기하는 듯이 보이는 그의 언행이 나름대로 상당한 일관성이 있음을 알게 된다.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말은 부드럽게 하되 큰 몽둥이를 지니고 있으라(Speak softly and carry a big stick)”는 말을 남겼다. 트럼프는 반대다. 그는 북한에 “군사적 옵션을 포함해 모든 옵션이 테이블 위에 올라 있다”고 엄포를 놓고 중국에 “북한 제재에 동참하지 않으면 환율조작국 지정도 불사하겠다”고 말한다. 그가 부동산 사업에서 익힌 협상의 기술 중 하나가 일단 거칠게 말하고 보자는 것이다. 정말 조심해야 할 상대는 부드럽게 말하는 쪽이다. 부드럽게 말하는 쪽이 큰 몽둥이를 쓸 가능성이 높다. 거칠게 말하는 쪽은 몽둥이를 쓸 생각이 없어 말로 기선을 잡으려는 것이다. 몽둥이를 쓰는 데는 돈이 들어간다. 사업가 출신 트럼프는 그런 돈이 아까운 것이다. 중동은 석유라는 자원이 있으니까 석유를 확보한다는 명분에서라도 큰 몽둥이를 쓸 수 있다. 부시 대통령 부자(父子)는 중동에서 큰 몽둥이를 쓰기도 했다. 그러나 빌 클린턴 이래 북핵을 다룬 모든 미국 대통령의 고민은 북한에 대해서는 무슨 이익이 있어서 그런 큰 몽둥이를 써야 하느냐는 것이다. 트럼프는 심지어 중동에서 큰 몽둥이를 쓴 것도 미국에는 이익이 없었다고 비판한다. 그런 그가 북한에 대해 큰돈이 들어가는 큰 몽둥이를 쉽게 쓸 리가 없다. 북한 도발의 와중에도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폐지란 말을 흘리며 한국을 압박해 경제적 이득을 얻어낼 궁리를 하는 게 트럼프란 사람의 본색이다. 뉴욕군사학교를 나온 트럼프는 군사력을 실제 사용해서 상대방을 제압하는 것보다는 군사력의 압도적 우세를 과시함으로써 상대방을 지레 겁먹게 하는 게 돈이 덜 든다고 여긴다. “화염과 분노” 같은 거친 말만 늘어놓고 매번 위력 시위나 하고 돌아가는 것은 트럼프의 머릿속에서나 가능한 군사력의 돈 안 드는 활용법에 따른 것이다. 위력 시위 후 북한이 잠시 조용해지자 “김정은이 현명하다”며 그 효력이 하루도 못 갈 말을 하는 것은 무너지는 믿음에 대한 안타까운 집착이다. 큰돈이 들어감에도 큰 몽둥이를 쓰는 것은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높은 가치를 추구할 때 가능하다. 트럼프는 동맹국들을 미국의 군사비나 축내고 무역을 통해 미국의 이익이나 빼내가는 나라로 묘사하고 있다. 그에게 자유의 가치를 함께 지킨다는 정신은 희미해졌다. 트럼프의 미국은 자유의 제국에서 한 힘센 국가로 후퇴하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여전히 ‘전쟁만은 안 된다’는 말을 ‘북핵은 안 된다’는 말보다 앞세운다. 그 메시지는 분명하다. 북핵을 용인하는 한이 있더라도 전쟁만은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큰 몽둥이도 없이 부드러운 말을 하는 상대만큼 우스운 상대도 없다. 전쟁만은 안 된다는 부드러운 말은 큰 몽둥이를 갖고 있지 않으면 무력한 투항일 뿐이다. 전술핵이 우리가 가져야 할 큰 몽둥이다. 북한의 6차 핵실험 이후 전술핵을 한국에 재배치하고 한미가 그 사용을 공유하는 것이 시급해졌다. 문 대통령은 북한이 아직 레드라인(red line)을 넘지 않았다고 보는 것인지 모르겠으나 레드라인이라는 발상 자체가 틀렸다. 핵 보유는 명확한 선(線)을 긋기 어려운 면(面)의 개념이다. 북한은 핵 보유라는 레드 존(red zone)에 들어온 지 이미 오래고, 나가지 않을 것이 분명해졌다. 실은 전술핵 배치를 간절히 원해도 트럼프가 순순히 내줄지가 더 걱정이다. 문 대통령의 사드 배치 태도에 실망한 트럼프는 전술핵을 공유할 만큼 문 대통령을 신뢰하지 않는다. 기존의 군사동맹에 대해서도 돈을 더 내라는 트럼프가 한미 FTA 양보 등 대가를 안겨 주지 않아도 전술핵을 배치해줄지 의문이다. 그러나 압박이건 대화건 전술핵을 일단 배치해 놓은 다음의 얘기다. 지금 문 대통령의 지상과제는 트럼프를 설득하든 협박하든 그에게 대가를 지불하든 전술핵을 배치하는 것이다. 전술핵으로 최소한의 핵 균형을 이루는 것이 북한의 오판을 막아 전쟁을 막는 방법이기도 하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 2017-09-06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횡설수설/송평인]두 번째 한국계 미국대사

    임진왜란 때 명나라의 원정군을 이끌고 조선에 와 평양성에서 왜군을 대파한 이여송은 6·25전쟁으로 치면 인천상륙작전으로 단번에 전세를 뒤집은 더글러스 맥아더나 다름없는 인물이다. 그가 뛰어난 장수였다는 공식 기록의 뒷면에는 조선인을 상대로 자행한 횡포가 자자하게 전해 내려온다. 이여송은 명에 귀화한 조선인 출신의 요동총병관 이성량의 아들이다. 고려 말이나 조선 초에 요동으로 건너간 집안의 후손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성 김 주말레이시아 미국대사는 버락 오바마 대통령 시절인 2011년, 한미 수교 이후 129년 만에 처음으로 한국계 주한 미국대사로 임명됐다. 당시 일각에서는 한국어와 영어가 모두 유창한 미국대사인 만큼 누구보다 한국 입장을 깊이 이해하고 때론 한국 편에 설 것이라는 기대가 나왔다. 하지만 비슷하게 생긴 얼굴만 보고는 그가 엄연히 미국의 이익을 위해 일하는 미국인 대사라는 점을 잠시 잊고 너무 큰 기대를 건 것인지 모른다. ▷차기 주한 미국대사에 빅터 차 조지타운대 교수가 내정됐다고 한다. 임명되면 두 번째 한국계 주한 미국대사다. 북한 핵과 미사일이 미국의 직접적 위협이 되면서 한미가 그 어느 때보다 협조해야 하고, 어쩌면 대립할 수도 있는 국면에서 대사로 내정됐다. 차 내정자는 조지 부시 대통령 시절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아시아국장에 임명됐을 때 “한국에서 내게 갖는 기대를 아마 만족시킬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번에 대사로 내정된 심정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차 내정자의 부친은 1950년대 컬럼비아대 유학생으로 미국에 갔다가 정착했다. 김 전 대사나 차 내정자나 모두 부모님이 한국인이고 부인도 한국인이다. 다만 김 전 대사는 중학교 1학년까지 한국에서 다니다 미국으로 이주한 교포 1.5세대인 반면 차 내정자는 미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교포 2세대다. 김 전 대사보다 훨씬 더 미국으로 깊이 들어가 있다. 한국어를 하지만 한국의 주미 특파원들과도 한국어로 얘기하지 않는다. 한국계지만 철저하게 미국인인 대사가 오는 것이라 생각하면 된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 2017-08-31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송평인 칼럼]언론, 여론, 재판

    밥 우드워드가 쓴 ‘모두가 대통령의 사람들’이라는 책을 보면 그가 1970년대 닉슨의 워터게이트 도청 사건을 파헤칠 당시 미국 언론의 취재윤리를 엿볼 수 있다. 기자들은 연방수사국(FBI)의 수사기록을 알아내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이면서도 수사기록을 ‘정화(淨化)되지 않은 보고서’로 간주했다. 우드워드는 “FBI에서는 누구라도 악의적인 말을 할 수 있고 (소환된 사람이 전하는) 정확도가 떨어지는 정보, 개인적 의혹, 불평불만이 그대로 기록된다”고 썼다. 그래서 우드워드의 워싱턴포스트는 범죄로 보이는 내용은 두 명 이상의 취재원에 의해 확인되지 않는 한 수사기록만으로 보도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갖고 있었다. 우드워드는 제보자인 ‘딥 스로트’로부터 받은 정보도 힘든 확인 작업을 거친 후에야 기사화할 수 있었다. 우리나라는 사정이 다르다. 수사기록 내용 자체가 그대로 특종이 된다. 이런 약점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집단이 검찰이고, 그것을 가장 잘 이용한 것이 최순실 국정농단 특검이다. 특검법에는 ‘국민의 알 권리 보장을 위해 피의사실 외의 수사 과정에 대해 브리핑할 수 있다’는 규정이 있다. 이 규정은 피의사실을 제외하고 있지만 실제론 특검이 피의사실을 매일 흘리는 수단으로 악용됐다. 그렇게 해서 특검의 프레임에 맞춘 부정확한 정보가 많이 보도됐고, 그에 따라 편향성이 강한 여론이 형성됐다. 특검은 박근혜 전 대통령과 기업 총수들을 뇌물죄로 기필코 기소해야 하는 ‘역사적 사명’을 띠고 태어났다고 할 수 있다. 국회가 박 전 대통령 탄핵 사유에 수사도 되지 않은 뇌물죄를 입도선매 식으로 끼워 넣는 바람에 사후적으로 뇌물죄를 입증해야 했던 것이다. 탄핵을 위해서는 굳이 뇌물죄까지 필요하지도 않았다는 사실이 뇌물죄를 뭉개버리고 파면을 선고한 헌법재판소의 결정에서 드러났다. 그러나 정확히 말하자면 뇌물죄가 필요하지 않았던 건 아니다. 국회와 헌재가 맡은 탄핵 절차의 외곽에서 흔히 공직자의 가장 중요한 탄핵 사유로 취급하는 뇌물죄의 피의사실을 지속적으로 흘림으로써 탄핵에 대한 압력을 증가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특검이 흘린 정보만 일방적으로 들어야 했던 수사 단계에서와는 달리 피의자와 변호인의 주장까지 들을 수 있는 공판 단계에서는 정보의 균형이 서서히 회복되기 시작했다. 특검이 ‘차고 넘친다’고 자부하던 증거는 결심(結審) 단계에 이르러서는 상당 부분 논박당했다. 막판에 청와대까지 나서 이른바 ‘캐비닛 문건’을 공개하며 지원사격에 나선 것은 만약 뇌물죄가 무죄가 되면 곤란해지는 측이 어딘가 불안해한다는 인상을 줬다. 특검을 빼놓고는 이제 미르·K스포츠재단에 간 돈을 뇌물이라고 보는 쪽은 별로 없다. 양아치에게 돈을 뜯기는 것은 무슨 대가를 바라서가 아니라 해코지를 당하지 않기 위해서다. 이제 초점은 삼성의 최순실 딸 정유라 승마 지원금도 뜯긴 돈이냐, 아니면 뇌물이냐로 모아진다. 이것은 삼성이 승마협회 지원사 자격으로 지원한 것이어서 이쪽에서 보면 이렇게, 저쪽에서 보면 저렇게 보인다. 뭐라고 단정하기 어렵다. 결국 대가 부분을 보고 판단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특검이 대가로 설정한 삼성의 승계 작업이라는 틀은 외양만 그럴듯할 뿐 실체는 부실하다. 삼성 측은 “특검이 주장한 ‘승계 작업’ 과정이 모두 마무리되더라도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삼성전자에 대한 의결권에는 아무런 변동이 없다”고 딱 잘라 주장했다. 변동이 있는지 없는지는 판사가 계산기를 두드려 보면 금방 알 수 있을 것이다. 언론계의 교황으로 불린 월터 리프먼은 일찍이 ‘여론’이란 책에서 여론 자체가 아니라 여론이 어떻게 형성되는지 주목할 것을 촉구하고 여론이 얼마나 비합리적으로도 형성될 수 있는지 강조했다. 여론은 존중해야 하지만 형성 과정이 왜곡된 여론까지 존중할 필요는 없다. 뇌물죄 사건을 처음부터 관심을 갖고 지켜본 한 대형 로펌의 대표변호사는 “특검은 여론에 호소해 왔고 재판부가 여론의 압박을 이겨낼 수 있느냐가 유무죄의 관건”이라고 말했다. 권력에 저항하는 것보다 여론에 맞서는 것이 더 어려운 시대라고 한다. 그럼에도 판사라면 여론에서 독립해 유죄든 무죄든 오로지 명징한 법적 논증으로 판결을 내놓을 수 있어야 한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 2017-08-23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송평인 칼럼]왜 프랑스는 쇠하고 독일은 흥했나

    프랑스와 독일을 흔히 유럽연합(EU)의 쌍두마차라고 부른다. 과연 두 나라는 여전히 쌍두마차인가. 두 나라의 경제력은 2000년대에 들어와 역사상 선례가 없을 정도로 격차가 커졌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프랑스가 법으로 주 35시간 노동제를 강제한 것은 2000년부터다. 주 35시간 노동제는 근로자의 노동시간을 줄여 일자리를 늘린다는 좋은 목적으로 도입했지만 더 많이 일하려고 해도 일할 수 없게 만들어 17년이 지난 지금까지 프랑스 경제의 질곡이 되고 있다. 2007년 집권한 공화당의 니콜라 사르코지 대통령은 주 35시간 노동제 폐지를 공약으로 내걸고 당선됐지만 노조의 반발로 실패했다. 2012년 집권한 사회당의 프랑수아 올랑드 대통령은 비록 자기 당이 도입한 제도이지만 폐해를 인정하고 폐지를 시도했으나 역시 실패했다. 에마뉘엘 마크롱 현 대통령이 올랑드 정부의 경제장관으로 있다가 뛰쳐나온 것이 주 35시간 노동제 폐지가 좌절돼서다. 마크롱이 신생 정당을 창당해 대선에서 돌풍을 일으킨 것은 공화당으로도 안 되고 사회당으로도 안 되기 때문이다. 마크롱의 당선이 새로운 프랑스의 시작인지는 잘 모르겠고 무능한 프랑스가 맞은 파탄의 ‘화려한 피날레’인 것은 분명하다. 프랑스가 사회당 리오넬 조스팽 총리 주도로 주 35시간 노동제를 도입하던 무렵 독일에선 사회민주당 게르하르트 슈뢰더 총리가 노동시장의 유연성을 늘리기 위해 노력했다. 상급 노조에 의한 집단적인 임금 인상 관행이 줄어들고 기업별로 임금과 노동시간 협상이 이뤄지는 새 관행이 정착되기 시작했다. 그런 노력의 연장이 2003년 발표된 ‘2010 어젠다’다. 기독민주당 앙겔라 메르켈 총리는 ‘2010 어젠다’를 이어받아 독일의 최전성기를 이끌어 냈다. 우리나라가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체제에서 헤매던 2000년 무렵은 두 나라에 아주 중요한 시점이었다. 유럽연합(EU)은 1999년 단일 화폐 유로를 출범시키고 본격적인 시장 통합을 이뤘다. 역내 환율이 없어져 한 국가의 경쟁력은 직접 다른 나라에 타격이 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세계적으로는 2001년 중국이 세계무역기구(WTO)에 가입하면서 거대한 시장이 열렸다. 이 시점에 프랑스는 조스팽이라는 전철수(轉轍手)를 만나고 독일은 슈뢰더라는 전철수를 만난 것이 나라의 운명을 갈랐다. 두 나라의 장기 대차대조표는 실업률과 무역수지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독일의 실업률은 2005년 11.7%로 최고치를 쳤으나 이후 지속적으로 감소해 지난해 4.1%까지 내려갔다. 프랑스의 실업률은 2010년 독일을 추월해 2013년 10%를 넘어선 이후 지난해까지 4년 연속 두 자릿수를 기록하고 있다. 독일 무역흑자와 프랑스 무역적자의 격차는 1990년 100억 유로에서 지난해 32배인 3200억 유로로 벌어졌다. 이 액수는 일자리로 따지면 약 320만 개에 해당한다. 주 35시간 노동제는 단기적으로는 일자리를 늘리는 효과가 있었지만 장기적으로는 프랑스 제품의 가격 경쟁력을 떨어뜨리고 결국은 일자리를 줄이는 결정적 요인이 됐다. 본래 프랑스 제품은 디자인을 제외하고 질과 서비스 등 모든 면에서 독일 제품에 뒤떨어졌다. 프랑스는 뒤떨어지는 제품 경쟁력을 독일에 비해 상대적으로 낮은 인건비에 의한 가격 경쟁력으로 따라잡았다. 그러나 제 주제도 모르고 세계 최초로 주 35시간 노동제를 실시함으로써 그 경쟁력마저 사라졌다. 이제 프랑스에 남은 거의 유일한 경쟁력은 원전을 토대로 한 값싼 전기료 정도라는 자조 섞인 목소리가 나온다. 사라지는 경쟁력 때문에 프랑스는 원전을 포기하기가 점점 더 힘들어지고 있다. 반면 독일은 전기료 부담을 안고서라도 원전에서 신재생 에너지로의 전환을 추구할 만큼 경쟁력에 자신이 생겼다. 문재인 정부는 탈원전을 선언하고 비정규직을 정규직화하고 최저임금을 파격적으로 올리고 있다. 초과 근로시간도 줄이겠다고 한다. 우리 산업의 어떤 경쟁력을 믿고 그러는지 모르겠다. 성장의 원동력은 경쟁력이다. 수출로 먹고사는 우리나라는 더 그렇다. 경쟁력은 아랑곳없는 소득 주도 성장은 훗날 노동시간을 줄여 일자리를 만들겠다는 조스팽의 주장만큼이나 어리석었다고 평가받을 수 있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 2017-08-09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횡설수설/송평인]공관병과 당번병

    당번병을 영어로 배트맨(batman)이라고 한다. 전쟁 중 장교의 짐이 든 안장(bat)을 말에 씌워 끌고 다니던 사람에서 비롯됐다. 영국군에는 제1차 세계대전까지만 해도 모든 장교에게 병사-하인(soldier-servant)이 딸려 있었다. 소설 ‘반지의 제왕’에서 샘이 주인님(Master)이라고 부르는 프로도와의 관계가 작가 존 로널드 톨킨이 참전 중 경험한 장교-주인과 병사-하인의 관계에 기초한 것이다. 이 말이 전간기(戰間期)에 들어와 시대착오적으로 느껴지면서 배트맨으로 바뀌었다. ▷당번병은 장교의 명령을 부하에게 전달하고, 장교의 군복과 장비를 상시 가용한 상태로 관리하고, 장교가 지휘를 하느라 시간이 없어 못 하는 잡무를 처리한다. 영국에서 당번병은 더 힘든 임무에서 면제되고 지휘관이 베푸는 특전을 받기 쉽고 진급도 빨라 선호되는 보직이다. 우리나라 군대에 당번병은 공식 편제에 없지만 보통 대대급 부대에서부터 무전병과 1호차 운전병이 세트로 부대장의 당번병 임무를 맡는다. ▷공관병은 당번병과 달리 장성급 지휘자의 승인하에 공식적으로 둘 수 있다. 공관병은 연대급 이상 부대 지휘관의 관사에서 생활하면서 가사를 돌보는 임무를 맡는다. 본래 임무와는 달리 자녀들의 학습도우미로 활용돼 종종 구설수에 올랐다. 그럼에도 힘든 훈련이나 사역에서 제외돼 꽃보직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선진국 군대에서는 지휘관이 필요하면 신원조회를 거친 민간인을 고용해 쓴다. 우리나라 사병 봉급이 모병제 수준으로 높았다면 공관병은 진즉 민간 가사도우미로 대체됐을 것이다. ▷박찬주 육군 제2작전사령관(대장)이 1일 공관병에 대한 갑질 의혹에 책임을 지고 전역지원서를 제출했다. 박 사령관 부부는 공관병이 호출에 즉각 응하도록 공관 내 두 곳에 있는 호출 벨과 연동된 전자팔찌를 채우는 등 비인간적 대우를 했다고 한다. 송영무 국방부 장관은 공관병을 민간 인력으로 대체하는 방안을 마련하라고 지시했다. 공관병 제도는 없애야 마땅하지만 민간 인력으로 대체하려면 또 돈이 들어가니 계속 돈 들 일만 쌓여 간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 2017-08-03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횡설수설/송평인]AI의 제4원칙?

    올 초 구글의 인공지능(AI) 스피커끼리 대화하는 영상이 유튜브에 올라 AI 스피커는 당연히 인간과만 대화하는 것으로 여겼던 나 같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대화 내용은 ‘What is the love(사랑이 무엇이냐)’라고 묻는데 ‘Baby don‘t hurt me(아이는 나를 해치지 않는다)’라고 답하는 등 뒤죽박죽이었지만 발전하면 어떻게 될지 모른다고 생각하니 AI들끼리 의사소통하면서 인간의 통제를 벗어날 수도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섬뜩한 느낌이 들었다. ▷실제 AI 연구소에서는 AI끼리 대화를 많이 시킨다고 한다. 아직은 AI가 제대로 말하고 알아듣는지 확인하는 음성인식 차원이 주된 목적이지만 점차 AI끼리 말로 지식을 전달하고 수용하는 능력을 시험하기 위한 차원으로 움직이고 있다. 예를 들어 영화를 잘 아는 AI가 음악을 잘 아는 AI와 대화하면서 서로 학습하는 식이다. ▷최근 페이스북 AI 연구소의 챗봇 둘이 자기들만이 아는 은어로 대화하는 것 같은 일이 발생해 개발자가 시스템을 강제 종료시키는 일이 발생했다. 챗봇 밥은 ‘i i can i i i everything else’라고 말했고 앨리스는 ‘balls have a ball to me’라며 마지막의 ‘to me’를 7번 반복했다. 의미가 통하지 않는 영어지만 속기(速記)성 은어일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보였다. 청소년이 어른이 알아듣지 못하는 어려운 축약어로 대화하는 것과 비슷하다고나 할까. ▷러시아 태생의 미국 SF 작가 아이작 아시모프가 1942년 단편 소설 ‘런어라운드’에서 로봇 3원칙을 밝혔다. 제1원칙, 로봇은 인간에게 위해를 끼쳐서는 안 되며 위험에 처한 인간을 방관해서도 안 된다. 제2원칙, 로봇은 인간의 명령에 반드시 복종해야 하지만 제1원칙에 위배되는 경우에는 예외다. 제3원칙, 로봇은 자기 자신을 보호해야 하지만 제1원칙과 제2원칙에 위배되는 경우는 예외다. 어쩌면 이 3원칙 외에 로봇은 인간이 알아들을 수 있는 정상적 언어로 대화해야 한다는 제4원칙을 하나 더 끼워 넣어야 할지 모르겠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 2017-08-02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횡설수설/송평인]‘서울 해변’

    프랑스 파리에는 해변이 없다. 2002년 당시 베르트랑 들라노에 파리 시장은 ‘없으면 만들자’고 과감한 발상 전환을 했다. 센강 주변을 달리는 도로를 막고 수천 t의 모래를 퍼와 인공 해변을 만들었다. ‘파리 플라주(plage·해변)’다. 물살이 빠른 센강에서의 수영은 금지돼 있지만 모래사장에 누워 샴페인이나 와인을 마시며 망중한을 즐길 수 있다. 파리특파원 시절 궁금해서 가봤는데 어울려 사교댄스를 추는 모습이 흥미로웠다. 지금은 메스 같은 프랑스의 다른 도시들과 벨기에 브뤼셀, 이스라엘 예루살렘에도 전파됐다. ▷‘포장 블록을 걷어내라. 해변이 나타날 것이다.’ 프랑스 68혁명의 유명한 구호 중 하나다. 68혁명에는 강압적인 권력에 대한 저항과 함께 도시에서 잃어버린 공동체성을 회복하려는 시도가 어우러져 있었다. 들라노에 시장이 도로 포장재를 걷어낸 것은 아니지만 도로 위에 모래를 깔아 해변을 만든 것은 68혁명의 구호를 반 정도는 실현한 것이나 다름없다. ▷다음 달 11~13일 서울 잠수교에 차량 통행을 막고 약 500m 구간에 모래사장이 설치된다. 박원순 서울시장은 들라노에 시장의 아이디어가 좋은 모양이다. 2015년에는 공공자전거 ‘벨리브’를 본떠 ‘따릉이’를 만들더니 이번엔 파리 플라주를 본떠 ‘잠수교 비치’를 만들었다. 지난해 한강 둔치에 모래사장이 마련됐지만 별 관심을 끌지 못했다. 올해 잠수교로 바뀌면서 관심을 끈 것은 차량이 주인이던 다리가 처음으로 온전한 인간의 공간이 된다는 사실에 통쾌함이 느껴졌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파리 플라주는 한 달이고 서울 플라주는 사흘이다. 한 달도 아니고 고작 사흘간을 위해 800t이 넘는 모래를 퍼 나르나 하는 생각도 든다. 센강 주변은 대중교통으로 접근이 수월하지만 잠수교는 어떨지 모르겠다. 아이들만 바글바글한 놀이터만 된다면 해변 같은 느낌은 줄어든다. 파리 시민은 노출에 익숙한데 한국 성인들은 어떨까. 빌려온 아이디어가 우리 처지에 꼭 맞는 건 아니다. 그럼에도 그곳에서 색다른 도시 경험을 할 수 있다는 기대는 충분히 든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 2017-07-28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송평인 칼럼]문무일 검찰인가, 윤석열 검찰인가

    검찰이 3일 열린 검찰총장후보추천위원회를 통해 민 두 후보는 문무일 오세인 당시 고검장이었다. 둘 다 사법연수원 18기다. 19기 봉욱 대검차장이 미리 임명된 상황에서 15기인 고검장 출신 소병철 농협대 석좌교수가 검찰총장이 되면 대검차장과 기수 차이가 많이 나 고참 기수 밀어내기가 어려워지고 19기인 조희진 의정부지검장은 대검차장과 동기라는 게 검찰의 고민이었다. 그렇다고 문무일과 오세인의 양자대결이었다고 말하는 것도 어폐가 있다. 법무부가 청와대와 코드를 맞춰 지명한 한인섭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등 3명의 비당연직 추천위원들은 똘똘 뭉쳐 오세인의 추천 자체를 반대했다. 그러나 당연직 추천위원들은 그것만은 받아들일 수 없다고 고집해 오세인이 들어 있는 리스트를 놓고 가부(可否)투표를 해 6 대 3의 찬성으로 통과시켰다. 검사의 어떤 특징이 검찰총장감을 만드는지 명확히 말하기 어렵다. 그래도 누구는 검찰총장감이다, 아니다는 평가는 늘 나온다. 남아있는 18기 중에서 검찰총장감을 꼽는다면 오세인이 대체로 먼저 언급됐다. 당연직 추천위원들은 둘 다 올리면 문무일이 되는 분위기라는 걸 감지했지만 문무일과 오세인이 이미 동시에 올라 있고 비당연직 추천위원들이 오세인을 떨어뜨리려 바람을 잡는 통에 그렇게 하는 것만도 선방이었다고 한다. 청와대가 이영렬 서울중앙지검장과 안태근 법무부 검찰국장을 쫓아내고 싶었다면 ‘돈 봉투 만찬’보다는 더 설득력 있는 빌미를 찾아냈어야 하는 게 아닌가 싶다. 아무튼 그 사건에 책임지고 이창재 법무부 차관과 김주현 대검차장도 옷을 벗었다. 청와대는 검사 인사는 법무부 장관이 검찰총장의 의견을 들어 한다는 검찰청법 규정을 무시하고 법무부 장관도 검찰총장도 없는 상황에서 이들의 자리를 다 채우고 난 뒤에야 검찰총장 임명에 나섰다. 검찰총장이 임명되고 그의 의견을 들어 대검차장과 서울중앙지검장이 임명된 것이 아니라 서울중앙지검장과 대검차장이 임명되고 나서 검찰총장이 임명됐다. 청와대가 가장 먼저 임명해 파격적인 신임을 실어준 서울중앙지검장이 수사의 제1요처를 장악하고 있고 청와대가 솎아낼 사람은 다 솎아 내고 심을 사람은 다 심은 판 위에 검찰총장이 들어섰다. 권한은 별로 없고 숙제는 많은 검찰총장이다. 노무현 정권에서 송광수 검찰총장을 택해 고전한 경험이 있는 문재인 대통령은 자기 손으로 뽑은 검찰총장에게도 다 믿고 맡기지 못하는 듯하다. 윤대진 부산지검 차장검사가 5일 윤석열 서울중앙지검장 밑의 1차장검사로 발령 났다. 한 검찰 출신 변호사는 이 발령을 보고 “청와대가 하는 인사가 확실히 맞다”고 평했다. 한낱 차장검사 인사까지 서둘러 한 것에 그렇게 평한 것이다. 윤 차장검사는 조국 대통령민정수석의 서울대 법대 한 학번 아래다. 또 문 대통령과 검찰개혁에 관한 책을 함께 낸 김인회 인하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의 서울대 법대 동기로 노무현 정권의 청와대에서도 일했다. 윤 차장검사는 검찰 내의 보기 드문 운동권 출신이다. 운동권 출신이라서 무슨 문제가 있다는 뜻은 아니고 검찰 내에서 문재인-조국 라인의 의도를 그보다 더 잘 알아들을 사람은 없다. 윤 지검장은 박근혜 정권의 검찰에서 상관과 한판 붙었던 사람이다. 그가 이 정권에서는 그러지 말라는 법이 없다. 불도저 옆에 윤대진이라는 유도장치 겸 견제장치를 붙여 놓은 셈이다. ‘프로듀스 101’이란 오디션 TV 프로그램이 지난해와 올해 큰 인기를 끌었다. 몇 번 보다가 센터라는 말이 많이 쓰인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구성원 각자 다 비슷비슷한 비중의 역할을 맡고 있는 듯한 아이돌 그룹 내에서도 센터라는 좀 더 중요한 자리가 있다. 지금 검찰에서 센터는 누구인가. 문무일인가, 윤석열-윤대진 조(組)인가. 예전에는 리더가 있었다. ‘서태지와 아이들’의 리더는 서태지였고, 1970, 80년대 그룹사운드에도 다 리더가 있었다. 오늘날 아이돌 그룹에는 센터는 있을지언정 리더는 없다. 리더는 그룹 밖에 있다. 작곡자나 보컬 혹은 댄스 트레이너가 리드한다. 문 검찰총장은 과거처럼 검찰의 리더라고 할 수 있나. 이 정권에서 검찰의 리더는 검찰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닐까.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 2017-07-26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횡설수설/송평인]이승만과 여운형

    해방정국에서 서로를 민족반역자로 규정할 만큼 가장 치열한 대립각을 세운 것은 한민당과 공산당이다. 해방정국의 정치세력을 우파로부터 좌파까지 하나의 스펙트럼으로 거론한다면 한민당과 이승만과 김구, 김규식과 안재홍, 여운형, 박헌영과 김일성의 순이 될 것이다. 한민당과 이승만과 김구는 우파, 김규식과 안재홍은 중도우파, 여운형은 중도좌파, 박헌영과 김일성을 좌파라고 분류할 수 있다. ▷박헌영과 김일성은 같은 공산당원이었기에 강력한 라이벌이기도 했다. 본래 박헌영이 장악한 서울의 공산당이 ‘당 중앙’이었고 김일성이 장악한 것이 그 산하의 ‘북조선 분국’이었다. 김일성은 북조선 분국의 주도권을 장악한 후 다른 정치세력과의 통일전선기구를 수립하고 임시인민위원회라고 불렀다. 그러나 남조선의 통일전선은 좌우합작을 미 군정청이 지원하고 있어 인민당의 여운형이 부각될 수밖에 없었고 박헌영은 소외될 것을 두려워했다. 김일성은 좌우합작에 적극적인 여운형을 선호했다. 나중에 결국 북한에서 박헌영은 숙청되고 여운형의 자식들은 극진한 대접을 받았다. ▷이승만은 뒤늦게 귀국해 한민당에 의존하지 않으려고 독립촉성중앙협의회를 만들어 자기 세력 구축에 나섰다. 이승만은 좌우합작에 가장 부정적이었고, 여운형 김규식 등 중도파를 내세워 좌우합작을 지원한 존 하지 군정청장과 대립했다. 미군정의 좌우합작 지원은 1947년 그리스의 공산화 위협에 트루먼 독트린이 발표되고 본격적인 냉전이 시작되면서 사멸됐다. ▷해방정국에서 송진우 여운형 김구가 차례로 암살당했다. 브루스 커밍스는 한민당 책사 송진우의 암살을 김구 측 소행으로 본다. 여운형 암살은 우파 측 소행이라는 설도 있고 박헌영 측 소행이라는 주장도 있다. 김구 암살은 이승만 측 소행이라는 설이 있다. 여운형이 서울 혜화동 로터리에서 백주대낮에 피격된 날이 70년 전 오늘이다. 남한 단독 정부의 초대 대통령이 된 이승만이 독재 끝에 쫓겨나 하와이로 망명한 뒤 쓸쓸히 사망한 날도 52년 전 오늘이다. 지금도 그 격렬함이 느껴질 것 같은 시대의 인물들이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 2017-07-19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횡설수설/송평인]한국 여자골프, 젓가락과 바짓바람

    US여자오픈 골프대회는 미국여자프로골프협회(LPGA)의 메이저 5개 대회 중에서도 으뜸이다. 어제 끝난 올해 US여자오픈에서 박성현이 1위를 차지했다. US여자오픈에서 박세리가 우승한 1998년부터 올해까지 20년간 한국 선수의 우승이 9차례로 미국 선수의 8차례를 앞질렀다. 최근 10년간만 보면 한국 선수의 우승이 7차례로 미국 선수의 3차례를 압도한다. 올해 대회는 특히 상위 10위 안에 한국 선수가 8명이나 들었다. LPGA 대회인지 한국여자프로골프협회(KLPGA) 대회인지 헷갈린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올 시즌만 해도 지금까지 열린 19개 LPGA 대회에서 한국 선수가 절반에 가까운 9개 대회의 우승을 차지했다. 대회는 미국이 열고 상금은 한국이 휩쓸고 있다. 올해 US여자오픈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소유의 골프장에서 열려 그가 직접 찾아 2라운드부터 지켜봤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에서 미국이 한국에 막대한 손해를 본다고 오해하고 있는 그가 리더보드에 한국 선수 이름이 즐비한 것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지 궁금하다. ▷골프는 양궁과 더불어 한국 여성에게 최적화된 스포츠가 아닌가 싶다. 양궁만 해도 한국 남녀 모두 세계 정상이지만 골프에서는 한국 여성만 세계 정상이다. 젓가락을 사용하면서 키워진 남다른 손 감각이 파워보다는 정확도가 더 중요한 스포츠에서 성과를 내는 것이라는 분석이 있다. 과거 영국 식민지가 아니었으면서 골프를 잘하는 나라가 스웨덴이다. 골프를 국민 스포츠로 장려해 안니카 소렌스탐 등을 배출한 스웨덴도 우리나라처럼 탄탄한 선수층을 가진 적이 없다. ▷젓가락으로 말하자면 중국도 일본도 사용한다. 그렇지만 일본은 우리의 상대가 되지 않고 앞으로 중국이 얼마나 성장할지는 지켜볼 일이다. 다만 현재로선 일본도 중국도 따라올 수 없는 것이 아빠들의 바짓바람이다. 한국의 교육열은 대체로 엄마들의 치맛바람인데 골프만은 아빠들이 어릴 때부터 딸을 데리고 다니면서 자신의 재산과 시간을 쏟아 부어 얻은 결실인 경우가 적지 않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 2017-07-18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송평인 칼럼]일방적인 문재인, 설득하던 노무현

    문재인 대통령이 독일에서 ‘베를린 구상’을 발표한 후 질의응답 과정에서 전혀 엉뚱한 답변을 했다. 한미관계에 대해 물었는데 한중관계에 대해 답한 것이다. 객석에서 지켜보던 김동연 경제부총리가 당황해 단상에 뛰어올라가 귓속말로 뭔가 속삭이고 나서야 문 대통령은 상황을 파악하고 답변을 바로잡았다. 이 기사는 단 한 곳의 인터넷 매체에만 떠 있다. 지난 주말 한 지인이 당시 상황을 촬영한 영상을 카톡으로 보내줬다. 유튜브의 ‘문재인 대통령 직무 수행 능력’이란 제목의 영상()이다. 직접 보니 해프닝 정도를 넘어선다. 문 대통령에 대한 질문은 영어로 50초 정도, 또 한국어 통역으로 그 정도 이어졌다. 질문자는 문 대통령이 미국에 대해서도 ‘노’라고 할 수 있어야 한다고 언급한 사실을 상기시키고, 그러나 미국에 ‘노’라고 말하는 것은 상당한 용기가 필요하다고 지적하면서 마지막에 “한미관계에 대해 어떻게 보느냐”고 간략히 물었다. 문 대통령의 답변은 2분 넘게, 영어 통역도 그 정도 이어졌다. 그는 한미관계에 대해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그날 아침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나눈 회담 내용이 답변의 주(主)였다. 통역자는 엉뚱한 답변에 당황한 듯 말까지 더듬거렸고 질문자의 얼굴엔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어 답답하다는 기색이 떠올랐다. 객석에 앉은 외국 인사들이 6분 넘게 이어진 그 상황을 지켜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지는 영상을 보면 금방 짐작이 갈 것이다. 문 대통령이 간혹 말귀를 못 알아듣는 것 같다는 인상을 이미 지난 대선 후보 토론회에서 받은 바 있다. 어느 후보가 서울지하철 구의역 참사 사건을 계속 언급하는데도 그가 못 알아들어 결국 그 주제는 넘어가고 말았다. 또 어느 후보가 당시 뉴스에 많이 등장하던 ‘Korea Passing(한국 제치기)’을 언급하자 이번에 진짜로 무슨 말인지 몰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때는 ‘그럴 수도 있지’라고 대수롭지 않게 지나갔다. 자신이 조의(弔意)를 표하기 위해 직접 다녀오기까지 한 구의역의 이름이 순간적으로 떠오르지 않았을 수 있고, ‘Korea Passing’도 개념을 알면 되지 그 말을 꼭 알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한미관계를 어떻게 보느냐’는 질문은 알아듣지 못할 수 없는 질문이다. 긴 사전 설명도 있었다. 문 대통령이 답변을 회피하고 싶어 엉뚱한 대답을 한 것 같지도 않다. 그는 김 부총리의 지적을 듣고 곧바로 한미관계에 대해 기억에 남을 만한 말은 아니지만 몇 마디를 했다. 문 대통령에게 의학적 처방이 필요한 무슨 문제가 있는 건 아닐 것이다. 다만 말귀를 잘 못 알아듣는 것은 남 얘기는 듣지 않고 자기 생각만 얘기하는 사람들에게서 흔히 발견되는 특징이라고 한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말귀를 못 알아들어 실수하는 걸 거의 본 적이 없다. 그는 논쟁적인 사람이다. 남의 말을 반박하려면 말귀부터 정확히 알아들어야 하고 말하지 않은 것까지 짐작할 수 있어야 한다. 문 대통령은 대선 기간에 봤듯 가능한 한 토론을 피했다. 토론에서는 종종 질문과는 관련 없는 자기주장을 늘어놓았다. 노 전 대통령은 자신이 개혁하려고 했던 검찰의 검사들과도 토론을 해보자고 했던 사람이다. 문 대통령에게는 상상하기 힘든 일이다. 노 전 대통령은 친북인사 송두율이 한국에 들어와 수사를 받자 왜 그를 받아들여야 하는지 설득하려고 노력했다. 문 대통령은 독일 방문 중 부인 김정숙 여사를 시켜 친북인사 윤이상의 묘소에 참배하게 하면서도 아무런 설명이 없다. 노 전 대통령은 반대자들이 생각하는 것까지 고려해 그것을 넘어서려고 노력한 반면 문 대통령은 남들 생각엔 귀 기울일 필요가 없다는 듯 자기 할 소리만 일방적으로 선언하듯 하고 있다. 원전 정책은 대통령이 선거 공약으로 탈(脫)원전을 내세웠다고 해서 함부로 바꿀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노 전 대통령 같으면 원전 공사를 중단하기 전에 사회적 대토론을 제안했을 것이다. 문재인 정부는 시민배심원제라는 누구도 익숙지 않은 제안을 던져놓고 공문 한 장 달랑 보내 공사 중단을 지시했다. 같은 뿌리에서 나왔지만 참으로 다른 정권이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 2017-07-12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횡설수설/송평인]대통령의 ‘독일어 시간’

    미국 작가 마크 트웨인은 재능 있는 사람이 배우는 데 영어는 30시간, 프랑스어는 30일이 걸리고 독일어는 30년이 걸린다고 말했다. 특유의 신랄한 위트로 독일어를 배울 시간적 여유는 죽은 사람에게나 가능할 것이라고도 했다. 독일어는 미국인에게도 쉽게 배울 수 있는 언어가 아닌 모양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와의 공동 언론발표에서 ‘구텐 아벤트(Guten Abend·안녕하세요)’, ‘필렌 당크(Vielen Dank·매우 감사합니다)’라며 독일어로 인사했다. 이 정도야 한국어를 전혀 모르는 외국인이 ‘안녕하세요’ ‘감사합니다’ 하는 것과 별 다를 바 없으니 특별할 것도 없다. 그러나 6·25전쟁 직후 한국에 파견된 독일 의료지원단을 만나 방명록에 ‘Ihre Hilfe bleibt unvergessen(당신들의 도움은 잊혀지지 않은 채 남아 있다)’이라는 독일어를 남겼다는 데는 놀라운 기분이 든다. ▷문 대통령은 경남고에 다닐 때부터 제2외국어로 독일어를 배웠다고 한다. 사법시험 1차 과목에서 외국어로 영어 대신 독일어를 택해 공부하는 사람도 꽤 있었다. 그가 어떤 외국어를 택했는지는 알려진 바 없다. 그가 방명록에 남긴 고급스러운 독일어는 물어보고 쓴 것일 수도 있다. 다만 미국 가서는 영어 한마디를 하지 않던 그가 독일에서는 애써 독일어를 사용하려 했다는 게 흥미롭다. ▷독일에서 가장 잘 알려진 한국인 중 한 명이 작곡가 윤이상이다. 김정숙 여사는 베를린의 윤이상 묘소를 방문해 대통령 부부의 이름으로 헌화했다. 윤이상은 동베를린 간첩단 사건에 연루돼 한국에서 2년간 복역한 뒤 독일로 돌아가 베를린에서 생을 마쳤다. 문 대통령은 경남 거제 출신이고 윤이상은 경남 통영 출신이다. 동베를린 사건이 조작된 것은 아니다. 다만 일본에서 배를 타고 통영 앞바다까지만 와보고 고향땅을 밟지 못한 그의 사연이 안타까운 것은 틀림없다. 각별한 의미를 담고 싶었을 헌화가 북한의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발사실험에 빛이 바랜 것도 안타깝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 2017-07-07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횡설수설/송평인]김기춘과 賜藥

    독배를 마시고 옥 안을 걷던 소크라테스는 다리가 풀리는 것을 느끼고 등을 대고 누웠다. 옥리가 소크라테스의 발을 세게 누르고 느껴지느냐고 물었다. 소크라테스는 느껴지지 않는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다음으로 다리 쪽을 누르며 느껴지냐고 묻고 조금씩 위쪽을 누르면서 같은 질문을 했다. 이제 그는 차갑고 딱딱해졌다. 옥리는 그를 만진 후 “독이 심장에 이르면 그것으로 끝입니다”라고 말했다. 그가 갑자기 얼굴을 가리고 있던 천을 젖히고 말했다. “크리톤, 아스클레피오스에게 장닭 한 마리를 빚졌네. 대신 갚아주겠나.” 얼마 후 그의 몸이 움찔했다. 소크라테스의 마지막 모습이다. ▷처형 수단에 인간적이라는 수식어를 붙이기는 뭐하지만 독약은 그나마 가장 인간적인 처형 수단으로 꼽힌다. 조선시대에 임금이 선비를 선비로서 대우해서 처형하는 방법이 사약(賜藥)이었다. 선비라도 역모를 범하면 참수를 당했다. 사약을 마시자마자 피를 토하며 죽는 드라마 장면은 현실적이지 않다. 사약을 마시면 서서히 죽는다고 한다. ▷김기춘 전 대통령비서실장이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작성을 지시한 혐의로 받고 있는 재판에서 그제 “재판할 것도 없이 독배를 내리면 깨끗이 마시고 이 상황을 끝내고 싶다”고 말했다. 혐의를 인정하는 건 아니다. 다만 “제가 모시던 대통령이 탄핵을 받고 구속까지 됐는데, 잘 보좌했더라면 이런 일이 있었겠느냐는 점에서 정치적 책임을 통감한다”며 “과거 왕조시대 같으면 망한 왕조에서 도승지를 했으니 사약을 받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그는 옥사(獄死)하지 않고 밖에 나가서 죽는 것이 소원이라고 말할 정도로 건강이 안 좋다. 심장에 스텐트를 8개나 박은 78세 노인이 감옥에서 법정으로 끌려 다니는 게 오죽 힘들겠나. 블랙리스트는 도종환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2015년 의원 시절 처음 제기했지만 특검이 손대기 전까지만 해도 비판할 실정(失政)으로 인식됐지 처벌할 범죄로 인식되지 않았다. 어쩌면 블랙리스트보다는 선비들처럼 사약을 각오하는 자세로 대통령에게 충언하지 못한 죄가 큰 것일 수 있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 2017-06-30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송평인 칼럼]동맹의 민낯

    프랑스 최초의 사회당 출신 대통령 프랑수아 미테랑은 기자들을 싫어했고 특히 좌파 기자들을 싫어했다. 그가 존경하던 유일한 칼럼니스트는 레몽 아롱이었다. 공산당과의 연합에 반대하는 아롱의 가차 없는 비판이 그의 관심을 끌었다고 미테랑의 심복이었던 자크 아탈리가 ‘미테랑 평전’에서 전했다. 독일 최초의 사회민주당 총리는 빌리 브란트이긴 하지만 그가 집권했을 때만 해도 독일 국민은 사민당의 수권 능력을 반신반의했다. 더 이상 급진세력의 숙주 역할을 하지 않고 국가 안보에 불안을 주지 않은 사민당의 이미지는 브란트의 뒤를 이은 헬무트 슈미트 총리가 만들어냈다. 슈미트는 칼 포퍼를 존경했다. 그는 회고록 ‘구십 평생 내가 배운 것들’에서 “1980년 영국 런던에서 포퍼를 처음 만났을 때 나는 이미 포퍼의 사상에 푹 빠져 있었다. 그 이후 1994년 포퍼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우리는 친구로 우정을 나눴다”고 썼다. 포퍼는 1945년 ‘열린 사회와 그 적들’, 아롱은 1965년 ‘사회사상의 흐름’이란 대작(大作)을 써서 마르크시즘에 내장된 전체주의적 속성을 비판했다. 미테랑이나 슈미트가 유럽의 대표적 우파 지식인에 끌렸다는 것은 그들이 추구한 좌파 노선이 공산당이나 급진파와 얼마나 다르며, 한국의 좌파들과도 얼마나 다른지 보여준다. 그런 슈미트였기에 콘라트 아데나워 총리와 기독민주당을 미국의 앞잡이로 모는 급진파들이 똑똑히 들으라고 이렇게 말할 수 있었다. “1949년 이후 서독인들이 누리고 있는 개인의 자유와 경제적 번영은 단지 부분적으로만 자신들의 노력의 결과로 얻은 것이다. 미국 프랑스 영국의 지혜로운 배려가 없었다면, 이들이 소련으로부터 서독을 방어해주지 않았더라면 서독인 자신들의 노력과 수고는 아무런 성공을 거두지 못했을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운명’이란 책에서 “대학 시절 나의 사회의식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분은 리영희 선생이었다”고 썼다. 그는 대선 직전 동아일보가 국민들과 널리 함께 읽고 싶은 책이 뭐냐고 물었을 때 리영희의 ‘전환시대의 논리’를 들었다. 한국 현대사를 반미(反美)의 시각에서 해석하는 전환은 리영희의 미국 베트남전 비판에서 시작됐다. 노무현 대통령이 가장 존경한 사람도 리영희였다. 미테랑이나 슈미트 같은 서구 좌파 정치지도자들과 비교하면 우리 좌파 정치지도자들의 세계와 역사를 보는 시각이 얼마나 좁고 편향돼 있는지 쉽게 알 수 있다. 문 대통령이 오늘 취임 후 첫 미국 방문길에 오른다. ‘해방전후사의 인식’은 한국을 서독과 함께 전후 가장 성공한 나라로 만든 동맹을 분단의 장본인이자 통일의 훼방꾼으로 바꾼 뒤집힌 역사인식이다. 그런 역사인식으로 문 대통령이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을 만난다. 그제 청와대에 초빙된 전직 주미 대사들이 문 대통령에게 해준 충고는 ‘세부적인 대화에 들어가지 말라’는 것이다. 모호함이 문 대통령에겐 최선일지 모르겠다. 그러나 동맹은 쟁점을 회피한다고 저절로 굴러가지 않는다. 동맹은 법이 아니라 힘이 좌우하는 관계다. 법이 좌우하는 곳에서는 권리를 내세워 트집을 잡고 응석을 부릴 수 있다. 힘이 좌우하는 곳에서는 그럴 수 없다. 그러려면 손해를 각오해야 한다. 미테랑이 1983년 주요 7개국(G7) 회의에 참석했을 때다. 미국이 유럽에 미사일을 배치하는 데 그가 시비를 걸자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은 주먹으로 탁자를 탁탁 치다가 긴 탁자 맞은편으로 미테랑을 맞히려는 듯 커다란 서류 하나를 던졌다. 다행히 서류는 탁자 한가운데 꽃과 커피잔 위로 날아가 떨어졌다. 미테랑은 회담장을 박차고 나가지 않고 끝까지 말을 이어갔다. ‘미테랑 평전’에 나오는 가장 충격적인 대목이다. 무례한 레이건과 국가 이익을 위해서는 사회주의자의 자존심까지 버린 미테랑, 이것이 동맹의 민낯이다. 영국 노동당의 토니 블레어 총리가 왜 ‘부시의 푸들’이라는 조롱을 들으면서까지 조지 W 부시 대통령에게 아양을 떨었겠는가. ‘인문학 일러스토리 1: 모든 것은 그리스에서 시작됐다’란 책을 최근 읽었다. 일러스트레이션이 곁들여진 쉽지만 알찬 고대 그리스 입문서다. 그리스 도시국가들의 생존을 위한 동맹이 눈물겹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그때나 지금이나 국가의 생존은 동맹에 달렸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 2017-06-28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횡설수설/송평인]신격호의 퇴장

    ‘껌값’이라고 함부로 말하지 마라. 롯데그룹 창업주 신격호 명예회장(95)은 일본에서 1948년 운명의 껌 사업을 시작했다. 당시 풍선껌은 마진이 50%에 이를 정도의 성장산업이었다. 껌 팔아 호텔도 짓고 백화점도 세운 셈이다. 아마도 이 글을 읽는 당신도 ‘껌이라면 역시’라는 말이 들리면 저절로 ‘롯데 껌’이란 말이 튀어나오고 그 광고 문구를 가사로 한 중독성 있는 멜로디가 입안에서 맴돌 것이다. ▷신 회장은 일제강점기 말기인 1941년 스무 살 나이에 공부도 하면서 돈도 벌 목적으로 혈혈단신 일본에 갔다. 문학을 전공하고 싶었지만 징병을 피하려면 공학을 해야 한다고 해서 와세다대에서 화학공학을 전공했다. 롯데라는 명칭은 그가 좋아하던 괴테의 작품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속 여주인공 샤를로테(일본식 발음 샤롯데)에서 온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당시 패전으로 감정 과잉이었던 일본의 젊은 여성들 사이에 이 작품이 인기가 있어 껌의 주 소비층인 젊은 여성을 겨냥해 그런 이름을 택했다는 말도 있다. ▷신 회장은 1965년 한일 국교정상화 이후에야 고국인 한국에 진출할 수 있었다. 그는 일본에 상주하면서 두 달에 한 번꼴로 귀국해 홀수 달은 한국에서, 짝수 달은 일본에서 지냈다고 한다. 일본인 둘째 부인과의 사이에 일본말밖에 할 줄 모르는 장남 신동주와 외국어 같은 한국말을 하는 차남 신동빈을 두고 있다. 그는 자발적으로는 매스컴에 거의 얼굴을 내밀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다. 롯데그룹도 폐쇄적이고 사회 공헌도 적다. 그에게 한국은 어떤 의미일까. ▷그가 그제 한일(韓日) 롯데그룹의 지주회사 격인 일본 롯데홀딩스 이사직에서 사임했다. 그룹 전면에서 공식적으로 손을 떼는 셈이다. 경영학의 창시자로 불리는 피터 드러커는 “위대한 영웅인 최고경영자가 치러야 할 마지막 시험은 얼마나 후계자를 잘 선택하는가와 그의 후계자가 회사를 잘 경영할 수 있도록 양보하는가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다른 건 몰라도 정신이 혼미한 상태로 왕자의 난을 자초한 신 회장의 마지막 시험은 실패였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 2017-06-26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횡설수설/송평인]마지막 사법시험

    조선시대 정인지는 세종의 명으로 편찬한 ‘고려사’의 서문에서 태조 왕건의 건국, 광종의 과거제 도입, 성종의 종묘사직 확립, 문종 때의 태평성대, 이후의 쇠락으로 간략히 고려사를 요약하고 있다. 과거제가 얼마나 중요하게 인식되고 있었는지 보여주는 대목이다. 과거는 중국에서 귀화한 자문관 쌍기의 건의로 도입돼 조선 말 고종이 폐지할 때까지 이어졌다. 시험으로 공무원을 충원하는 것은 유교 문화권의 오랜 전통이다. 그 현대판이 사법시험 행정고시 외무고시라고 할 수 있다. ▷고시 하면 가장 먼저 사법시험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 그 이유는 행정고시에 합격하면 행정직 5급이 되고 외무고시에 합격하면 외무직 5급이 되지만 사법시험에 합격해 판검사가 되면 3급으로 시작하기 때문이다. 마지막 사법시험이 내일까지 치러진다. 외무고시는 2013년 시험을 끝으로 사라졌다. 행정고시가 남았다고는 하지만 고시의 상징과도 같은 사법시험이 사라지는 것은 고려 광종 이래 1000년 넘게 순전히 시험만으로 인재를 등용하던 전통의 종말이라고도 볼 수 있다. ▷사법시험 합격은 옛날로 치면 과거 급제와 같은 것으로 온 동네의 경사였다. 언론은 합격자 발표가 나면 불우한 환경을 딛고 ‘인간 승리’를 이룬 화제의 인물을 찾아다녔다. 사람들은 그런 스토리에서 희망을 읽었다. 서울대가 위치한 관악구 신림동에는 고시학원과 고시원이 밀집한 고시촌이 형성됐다. 떠들썩한 합격의 기쁨 뒤에 더 많은 불합격자의 절망과 고시 낭인(浪人)의 우울도 있었다. 고시의 종말과 함께 고시촌은 활기를 잃고 인생역전의 꿈도 사라지고 있다. ▷우리나라 같은 대륙법계 국가에서 법학전문대학원(로스쿨) 3년은 출신 학부의 다양성을 살리고 실무훈련을 겸비하는 것은 고사하고 필독서를 읽기에도 빠듯하다. 법학 석·박사를 키우던 교육체제는 무너졌다. 로스쿨은 노무현 정권이 만들었고 문재인 정권은 사시를 존치할 생각이 없다. 노무현 정권이 보고 따라 한 일본은 사실상 사시를 존치했다. 한국은 대륙법계 국가에서 로스쿨 일방주의를 택한 유일한 나라가 된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 2017-06-23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