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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대통령 시절 대통령 생일 축하 행사는 서울운동장 같은 거대한 장소에서 열렸다. 남녀 고교생 수만 명이 참가한 매스게임이 열리고 여고생들이 생일 축하 노래를 불렀다. 이 대통령 본인이 원했든 측근들이 부추겼든 대통령이 한 정파의 지도자가 아니라 전 국민의 지도자로 표상돼 국민 전체가 생일을 축하하는 모양새가 이뤄졌다. 민주 정치에서는 오히려 전체주의적으로 비치는 그런 행태가 이승만 몰락의 원인(遠因)이 됐다고도 할 수 있다. ▷어제 서울 지하철 5호선 광화문역에서 문재인 대통령 생일 축하 광고를 봤다. 활짝 웃고 있는 문 대통령의 모습에 ‘1953년 1월 24일 대한민국에 달이 뜬 날, 66번째 생일을 축하합니다’ 등의 문구가 쓰인 패널이 에스컬레이터의 한쪽 면을 가득 채우고 있고 아이들의 목소리로 ‘Happy birthday to you’라는 곡이 흘러나왔다. 지하철 이용객 중에는 문 대통령 지지자도 있고 반대자도 있다. 반대자들은 불쾌감을 느낄 것이고 지지자라도 열렬 지지지가 아닌 이상 지나치다고 느낀 사람이 적지 않을 듯하다. ▷문 대통령 지지자들은 자발적인 광고인데 뭐가 문제냐고 항변한다. 서울교통공사는 지난해 성형광고를 전면 금지키로 했다. 지나친 성형광고가 판단력이 제대로 서지 않은 청소년에게 유해한 영향을 미칠 수 있어서다. 성형광고는 자발적이지만 바람직하지 않다. 집권 시절의 이명박 대통령이나 박근혜 대통령의 지지자들이 대통령 생일 축하 광고를 냈다면 어땠을까. 역지사지(易地思之)해서 생각해볼 능력이 떨어지거나 ‘내로남불’이다. ▷왕조 국가도 아닌데 국가 지도자의 생일을 지지자들의 사적 공간이 아니라 지지자와 반대자가 섞여 있는 공공장소에서 축하한다는 발상은 퇴행적이다. 대통령은 헌법상 국민의 대표자이긴 하지만 정치적으로는 한 정파의 지도자다. 이 긴장관계가 허물어진다면 건강한 민주 국가가 못 된다. 대통령 생일 광고 정도는 가벼운 퇴행일지 모른다. 그렇다고 해도 이런 퇴행이 문 대통령에게 별로 도움이 될 것 같진 않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아이들의 능력은 놀랍다. ‘영재발굴단’이란 TV 프로그램을 보면 언어의 영재들이 심심찮게 등장한다. 강원도 고성의 한 분교에 다니는 9세 아이는 누나가 영어 공부하는 모습을 그대로 따라 해 전국 영어 말하기 대회에서 1등을 휩쓸 정도의 영어실력을 자랑한다. 동화책 등으로 영어를 배운 지 9개월밖에 되지 않았지만 CNN 뉴스를 듣고 고3 영어듣기 평가까지 통과한 7세 아이도 있다. ▷미국에서도 2006년 이미 뉴욕타임스에 미국 중산층 사이에 5세 이하 어린이를 상대로 한 외국어 교육이 미술이나 음악 교육만큼 보편화됐다는 기사가 나왔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지난해 중국 방문 때 6세 외손녀 아라벨라 쿠슈너의 영상을 보여줬다. 아라벨라는 이 영상에서 중국 노래를 부르고 한시를 중국어로 읊어 중국인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다. 아라벨라의 엄마 이방카는 아라벨라에게 3세 때부터 중국어를 가르쳤다고 한다. ▷교육부가 유치원과 어린이집의 방과 후 영어 수업을 금지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교육부는 올해부터 초등학교 1, 2학년 영어수업이 전면 금지된 만큼 일관성 측면에서 이런 조치를 취하기로 했다고 한다. 몇 살부터 외국어를 가르치는 게 좋은지 잘라 말하기 어렵다. 모국어를 배우기 전에 외국어를 배우면 모국어 습득에 어려움이 있을 수 있다는 견해에 충분히 일리가 있다. 그러나 모국어 습득이 좀 늦더라도 외국어를 함께 배우는 이중 언어능력을 선호하는 학부모들의 심정도 이해할 만하다. ▷문제는 일률적 규제다. 국공립 초등학교의 영어 수업 금지는 그렇다 하더라도 사립 초등학교에까지 영어 수업 금지를 강제하더니 자율적이던 초등 이전 교육과정을 막대한 정부 돈이 들어가는 누리과정으로 만들어놓고는 방과 후 영어 수업까지 금지하려 한다. 살판 난 것은 영어학원들이고 힘들어지는 것은 추가로 비싼 학원비를 지출해야 하는 서민이다. 방과 후 수업은 본래 사교육을 흡수하려고 만든 것이다. 진보정권의 평등주의 교육이 오히려 사교육을 부추기는 기막힌 역설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더글러스 케네디의 베스트셀러 소설 중에 ‘빅 픽처’가 있다. 훌륭한 작품인지는 모르겠으나 한번 잡으면 놓기 어려운 책이다. 다 읽고 나도 제목이 왜 ‘빅 픽처’인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다. 다만 내용 중에 이런 대목이 있긴 하다. “글을 쓰는 사람은 어떤 장면의 세세한 부분들을 모은다. 그 세세한 것들이 한데 모이면 ‘큰 그림’이 완성된다.” 노무현 정부와 문재인 정부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노무현 정부는 말과 행동이 별로 다르지 않았다. 말은 종종 심각한 논쟁을 일으켰지만 논쟁을 회피하지 않고 뚫고 가려고 했다는 점에서 노 정부는 솔직했다. 그런 점에서 ‘반미면 어떠냐’고 말한 노무현은 최소한 음모가는 아니다. 문재인 정부는 말 따로 행동 따로다. 이 정부의 말은 관리된다. 말과 행동의 불일치 속에 언뜻언뜻 비치는 진실의 조각들을 모아야만 그들이 추구하는 큰 그림을 그릴 수 있다. 청와대는 문정인 대통령통일외교안보특보의 말이 나올 때마다 개인적 의견일 뿐이라고 거리를 뒀지만 결국 문 특보의 말대로 되고 있다. 문 특보는 한미 군사훈련과 북한 핵실험을 동시에 중단하는 중국의 쌍중단(雙中斷)과 유사한 북핵 해법을 제시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평창 겨울올림픽 기간에 한미 군사훈련 연기를 주장함으로써 쌍중단을 향한 정부의 본심을 드러냈다. 쌍중단은 실현 가능성이 없다. 김정은이 신년사에서 올림픽 대표단 파견 용의를 밝혔음에도 그렇다. 북한은 핵 프로그램 완성을 위해 시간이 좀 더 필요하다. 미국도 군사훈련을 연기할 수는 있을지언정 중지하기 어렵다. 쌍중단은 쌍궤병행(雙軌竝行)으로 가겠다는 신호로서만 의미가 있다. 미국의 선제공격이 어렵고 대북 제재에 구멍이 뚫려 있는 한 북한은 조만간 핵무기를 완성할 것이고 그때야 비로소 핵과 주한미군 철수의 맞교환이라는 쌍궤병행에 응할 것이다. 정부의 대북 제재 강화가 말뿐임은 절차를 다 따랐다 하더라도 바뀌었으리라고 보기 어려운 개성공단 폐쇄를 그 일부 절차를 트집 잡아 불법으로 몰아간 데서도 확인됐다. 문 대통령은 중국 방문에서 시진핑 주석에게 대북 원유공급 중단에 대해 당부조차도 하지 않았다. 정부의 ‘평화를 위한 복안’이란 대북 제재는 건성으로 하면서 북한이 협상에 응하는 때만을 기다리는 것이다. 문 대통령과 이낙연 총리 신년사에는 올해 대한민국 정부 수립 70주년에 대한 언급이 없다. 이 총리의 신년사는 뜬금없이 올해를 건너뛰어 내년 상하이 임시정부 100주년을 언급하고 있다. 문 대통령은 어제 국립서울현충원을 참배하고 방명록에 ‘건국 백년을 준비하겠다’고 썼다. 대한민국에는 정통성이 없고 북조선인민공화국에 정통성이 있다고 주장한 학자를 국가정보원 개혁발전위원장에 앉혀 국정원을 유명무실하게 만들더니 그것으로도 모자라 청와대 정책기획위원장에 앉힌 정부다. 이것이 문재인 정부의 코드다. 정부가 추구하는 것이 대한민국을 대한민국이 태어난 해방정국의 혼돈으로 되돌려 그 속에서 완전히 다른 국가정체성을 형성하려는 것은 아닌가. 그것의 외교적 귀결이 한미 동맹으로부터의 거리 두기와 친중(親中) 노선의 강화다. 하버드대 그레이엄 앨리슨 교수가 만든 신조어 ‘투키디데스 함정’이 기존 강국인 미국과 신흥 강국인 중국의 충돌을 설명하는 데 널리 인용된다. 그러나 미중 충돌에만 주목하는 건 강대국주의자의 시선이다. 우리로서는 그 충돌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발생하는지 봐야 한다. 투키디데스 전문가인 예일대 도널드 케이건 교수는 고대 그리스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기존 강국 스파르타의 동맹국이었던 메가라가 신흥 강국 아테네의 경제 압력에 굴복해 동맹을 갈아타려 했기 때문에 벌어진 전쟁이라고 지적했다. 섣부른 동맹의 교체 시도는 큰 위험이 따른다. 미국 잡지 ‘디플로맷’이 언급했다는 이 상황에서의 ‘저울질(balancing act)’은 조롱의 말이지 칭찬이 아니다. 한미 동맹의 균열은 미국의 북한 선제공격 가능성을 더 높일 수 있다. 새해에는 큰 그림을 그리지 않으면 안 된다. 정부는 목적지를 솔직히 밝히지 않는 운전자다. 상상력을 발휘해 진실의 조각을 맞추지 않은 승객은 ‘어, 어’ 하다 낯선 곳에 내리고 나서 후회할 수 있다. 차창으로 낯선 풍경이 보이기 시작하는 지금이 차를 세울 때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통일부의 정책혁신위원회라는 조직이 어제 “지난해 2월 7일 북한의 장거리로켓 발사 직후 열린 국가안전보장회의(NSC)에서는 개성공단 전면 중단이 결정되지 않았다”며 “다음 날 오전 홍용표 당시 통일부 장관에게 박근혜 대통령의 철수 지시가 통보됐고, 이날 오후 김관진 당시 국가안보실장 주재로 세부계획을 마련한 뒤 10일 발표가 이뤄졌다”고 밝혔다. 또 “개성공단 철수를 결정한다면 헌법상 긴급처분이나 남북교류협력법에 따른 협력사업 취소 등의 적법한 절차를 밟아야 하는데 그러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박 전 대통령의 개성공단 가동 중단은 북한이 4차 핵실험과 장거리미사일 발사 시험을 한 달 간격으로 실시하는 긴박한 상황에서 내려진 정치적 결정이다. 대통령은 그런 고도의 정치적 결정에 대해서는 결과에 따라 정치적 책임을 지면 된다. 다 따랐다 하더라도 결정이 뒤바뀌었을 것이라고 기대하기 어려운 형식적 절차를 놓고 다 지켰느니 마느니 따지는 것이 무슨 큰 의미가 있는가. 더구나 개성공단 가동 중단은 남북 상황이 개선되면 재가동할 것을 전제로 한 임시적인 중단으로 영구적인 중단을 전제로 하는 협력사업 취소에 해당하지 않는다. 또 헌법 제78조가 규정한, 내우외환 등의 상황에서 최소한으로 필요한 재정·경제상의 처분도 아니고 교전 상태에서 국가를 보위하기 위한 긴급조치도 아니다. 따라서 지체 없이 국회에 보고해 승인을 얻어야 할 사안도 아니다. 그런 사안이었다면 당시 국회에서 야당인 더불어민주당이 가만있지 않았을 것이다. 개성공단 가동 중단 결정은 NSC를 거치지는 않았지만 NSC 상임위를 거친 뒤 발표됐다. NSC 상임위는 NSC의 위임으로 모든 사안을 결정할 수 있다. 게다가 NSC 의장은 대통령이고 그 구성원은 모두 대통령이 임명한 각료와 참모다. 이런 구조에서 대통령의 지시가 먼저인지, 그 지시가 구두인지 서면인지 따지는 것은 트집 잡기에 불과하다. 국무회의 심의만 하더라도 개성공단 철수로 입주업체 직원들이 볼모로 잡힐 수도 있는 상황에서 대통령이 준비를 끝내고 전격적인 조치를 취할 필요가 있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문재인 대통령은 개성공단 재개를 대선 공약으로 내걸었다. 상황이 바뀌어 개성공단 재개를 추진하더라도 굳이 전 정권의 조치를 불법적인 양 깎아내리면서 할 필요는 없다. 당시는 유엔 대북 제재와 충돌하는 개성공단의 유지가 어려워진 시기였고 지금도 다르지 않다. 민간위원들로 구성된 혁신위의 발표는 문 대통령 공약에 억지로 맞춘 느낌이 적지 않다. 각 부처가 들러리로 내세워 ‘손 안 대고 코 푸는’ 식의 이런 위원회야말로 법적 근거가 없는, 없애야 할 조직이다.}

크리스마스를 앞둔 요즘 오스트리아의 음악도시 잘츠부르크는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이 만들어진 지 200년이 되는 내년 행사 홍보로 벌써 바쁘다고 한다. 이 노래는 1818년 잘츠부르크에서 약 20km 떨어진 오베른도르프라는 작은 마을의 성(聖) 니콜라우스 성당에서 처음 불렸다. 성당 신부 요제프 모어가 크리스마스가 되면 느꼈던 감정을 담아 노랫말을 쓰고 성당 오르간 반주를 맡은 초등학교 음악선생 프란츠 그루버가 곡을 지었다. ▷예수는 예루살렘 근처의 베들레헴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예루살렘이 이스라엘의 수도임을 선언한 이후 팔레스타인을 중심으로 거센 반발이 일었다. 유엔총회는 21일 예루살렘 지위에 어떤 결정도 거부하는 결의안을 압도적 다수로 통과시켰다. 예루살렘은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 모두의 성지인 특이한 도시다. 종교의 성지가 종교 간 불화의 가장 큰 원인이라는 사실은 종교의 이상에 반하는 특이한 역설이다. ▷올해는 종교개혁 500주년이었다.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은 성(聖)의 개념을 없애버린 혁명이었다. 더 이상 성인(聖人)도 없고 성지(聖地)도 없다. 거꾸로 모두가 성인이고 모든 곳이 성지다. 만인이 제사장이고 신자들이 모이면 어디나 교회인 것이다. 이런 사상이 근대 계몽주의를 낳고 현대 민주주의를 낳았다. 특정한 장소를 성지로 구별하고 집착하는 것은 프로테스탄트적이지 않고 궁극적으로는 기독교적이지도 않다. 천국에서 루터에게 물어봐도 예루살렘을 무결정의 상태로 둔 유엔총회의 결의가 옳다고 할 것이다.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은 작은 마을의 작은 성당에 어울릴 법한 소박한 곡이다. 그루버가 손으로 직접 그린 악보를 보니 기타 반주에 ‘소프라노와 알토 이중창’으로 부르도록 돼 있다. 초연 때는 모어 신부가 기타를 치면서 소프라노 파트를, 그루버 선생이 알토 파트를 불렀다고 한다. 눈 덮인 마을에서 한밤에 울려 퍼진 그 노래는 얼마나 아름다웠을까. 그런 소박한 평화를 회복하는 것이 크리스마스의 정신이 됐으면 한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문재인 대통령이 그제 재외공관장 청와대 만찬에서 “전 세계는 촛불혁명을 일으킨 우리 국민을 존중하고 덕분에 저는 어느 자리에서나 대접받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중국 방문 중 홀대론을 의식한 발언으로 보인다. 대접받은 본인이 홀대가 아니라 환대를 받았다는데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냐마는 바로 본인 얘기이기 때문에 진실을 직시하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다. 문 대통령은 방중 기간에 ‘중국이 번영할 때 한국도 번영했다’는 말을 여러 차례 했다. 그러나 중국인도 한국인도 공감하기 어려운 말이다. 중국인은 수많은 주변국 중 하나일 뿐인 한국과의 역사를 잘 몰라서 그렇고, 한국인은 중국과의 역사를 너무 잘 알아서 그렇다. 한나라 전성기 때 중국은 고조선에 낙랑군 등 4군을 설치했다. 수나라 때 중국은 고구려에 세 차례나 침입했다가 패해 물러났다. 당나라 때 중국은 백제와 고구려를 차례로 멸망시킨 뒤 신라까지 지배하려다 나라가 기울기 시작해 물러났다. 중국이 번성할 때 한국은 힘들었다. 동서고금에 번성하는 큰 나라 옆에서 괴롭지 않은 작은 나라는 없지만 중국 외에 주변국이 의지할 다른 대국이 없던 중화권에서는 더 그랬다. 송나라는 도(道)의 주자, 문(文)의 구양수와 소동파를 배출했던 문화국이었으나 군사적으로는 거란과 여진의 침입에 시달렸다. 그때 중국과 한국은 평화로웠다. 문강무약(文强武弱)의 송나라가 문 대통령의 베이징대 연설 표현을 빌리자면 ‘중국이 주변국들과 어울려 그 존재가 빛났던’ 소프트파워의 중국이었다. 문 대통령의 연설은 이런 중화인민공화국이 돼달라는 바람을 담은 듯하나 시진핑 국가주석의 하드보일드 중국몽(中國夢)과는 거리가 멀다. 꿩처럼 타조도 천적이 다가오면 머리를 파묻는다는 사실은 미국 CNN 기자가 강경화 외교부 장관에게 한 인터뷰 질문에서 처음 알았다. 타조는 진실을 직시하지 못하는 사람을 가리킨다고 한다. 역지사지(易地思之)는 약자가 강자에게 하는 게 아니다. 니체가 잘 정리했다. 강자가 약자에게 하는 역지사지는 배려이고, 약자가 강자에게 하는 역지사지는 굴욕이다. 알아서 긴 굴욕을 배려라고 착각해서는 안 된다. 문 대통령은 베이징대에서 마오쩌둥의 장정(長征)에 참여한 김산과 중국인민해방군가를 작곡한 정율성을 치켜세우는 연설을 한 뒤 충칭임시정부 청사로 향했다. 이 지점에서 역사의 중국과 현실의 중국 사이에 해결하기 어려운 충돌이 발생한다. 정작 충칭의 임시정부를 도운 것은 중국 국민당의 장제스인데 중국 공산당의 마오쩌둥을 거론하며 중국과 한국은 근대사의 고난을 함께 극복한 동지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마오쩌둥은 우리에게는 고난을 함께 극복한 동지가 아니라 고난을 초래한 장본인이다. 문 대통령은 충칭임시정부 청사에서 임시정부 수립이 대한민국 건국이며 2019년은 대한민국 건국 100주년이라고 ‘선언’했다. 그러나 충칭임시정부의 김구만 하더라도 임시정부 수립을 건국으로 보지 않았다. 그가 1941년 삼균주의(三均主義)를 토대로 광복 후 건국의 청사진을 제시한 ‘대한민국건국강령’을 만들었다는 사실이 그것을 잘 보여준다. 이것이 상식적으로 쓰는 건국이란 말에 어울리는 자연스러운 건국관이다. 임시정부 수립을 건국처럼 오도되도록 한 대표적 인물은 이승만이다. 이승만은 1948년 정부 수립 때부터 상당 기간 정부 공문서에 ‘대한민국 30년’(1948년 의미)이라는 식으로 썼다. 이승만은 임시정부의 초대 대통령이자 대한민국 정부의 초대 대통령이었기 때문에 이렇게 해도 저렇게 해도 상관이 없었다. 그러나 생일을 임신 날짜에 맞추는 게 정상적일 수는 없다. 다만 문 대통령이 임시정부의 법통으로 건국을 보려 한 점은 높이 산다. 김구는 신산(辛酸)의 시절에도 임시정부를 공산주의자들의 통일전선 전략에서 지켜냈다. 그 때문에 해방정국에서 임시정부를 배격한 것은 여운형의 건준, 박헌영의 공산당 등이었다. 대다수 국민은 임정이 건국에 큰 역할을 해주길 바랐다. 김구가 유엔 감시하의 총선거에 동의해 놓고도 막판에 거부한 것은 유감스러운 대목이지만 그의 통일의 소원은 우리의 소원이기도 하다. 완전한 건국의 그날까지 건국에 대한 불필요한 논란은 유보하는 것이 좋겠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영어와 한국어의 구조적 차이 중 하나는 be 동사의 유무다. be 동사는 ‘있다’는 뜻으로도 쓰이지만 주어와 형용사를 연결하는 기능이 중요하다. 영어는 문장구조 자체에서 형용사를 인식할 수 있다. ‘I am happy’와 ‘I walk’라는 문장에서 시제와 인칭에 따라 변하는 것은 be 동사든 일반 동사든 동사이다. 형용사 happy는 변하지 않는다. ▷한국어 ‘나는 행복하다’와 ‘나는 걷다’에서는 주어와 형용사, 주어와 동사가 모두 직접 연결된다. ‘행복하다’라는 형용사도, ‘걷다’라는 동사도 시제에 따라 어미가 변하기 때문에 문장구조 자체에서 형용사인지 동사인지 알 수 없다. 그래서 형용사는 사물의 상태를 나타내는 것, 동사는 사물의 동작이나 작동을 나타내는 것으로 내용적으로 구별하지만 언제나 타당한 것은 아니다. ▷국립국어원은 최근 표준국어대사전에서 ‘늙다’를 동사로 분류했다. ‘늙다’는 사물의 상태를 나타내는 말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늙다’는 ‘예쁘게 늙자’ ‘예쁘게 늙어라’와 같은 청유형과 명령형이 가능하다. 반면 형용사 ‘예쁘다’는 ‘예쁘자’ ‘예뻐라’로 변화시켜 사용할 수 없다. 그러고 보면 ‘늙다’를 동사로 분류하는 것이 타당해 보인다. 그럼에도 ‘늙다’는 동사이고 ‘젊다’는 형용사라는 건 해명이 쉽지 않은 비대칭성이다. ▷국립국어원은 ‘잘생기다/못생기다’ ‘잘나다/못나다’도 상태를 나타내는 말이지만 동사로 분류했다. 이 단어들은 ‘잘’ ‘못’이라는 부사와 ‘생기다’ ‘나다’라는 동사가 합쳐진 말로 일부 동사에서처럼 과거형으로 쓰고 현재로 읽는 특징이 있다. 가령 ‘그 녀석 잘생겼다’라고 하지 ‘그 녀석 잘생기다’라고 하지 않는다. 현재형으로 쓰고 현재로 읽는 형용사 ‘예쁘다’와 다르다. 그럼에도 ‘잘생기자’ ‘잘생겨라’ 같은 활용은 없어 완전한 동사라고 하기도 어색하다. 이들 단어를 형용사로 분류할지 동사로 분류할지는 오랜 논란거리다. be 동사가 없어 형용사와 동사를 선험적으로 구별하지 않는 언어이다 보니 그 틈새에서 이런 경계선상의 단어들이 생겨난다.송 평 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박원오 전 대한승마협회 전무는 최순실 씨 측근으로 정유라 씨 승마 지원을 끌어내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음에도 처벌 대상에서 제외됐다. 그가 특검 수사에 유리한 진술을 한 대신 처벌을 피한 플리바기닝(plea bargaining)으로 보는 시각이 있다. 우리 법은 피고인에게 혐의가 있으면 검찰이 무조건 기소하도록 하고 있다. 혐의가 있는데도 검찰 멋대로 기소하지 않으면 직무 유기에 해당한다. ▷전직 국가정보원장들이 특수활동비 유용으로 구속됐음에도 예산을 책임진 이헌수 전 국정원 기조실장은 구속을 면했다. 장시호 씨는 뜯어낸 기업 돈으로 한국동계스포츠영재센터 설립을 주도했다. 이런 장 씨에 대해 검찰은 구속을 면해주고 겨우 징역 1년 6개월을 구형했다. 그러자 법원은 구형보다 무려 1년이 많은 징역 2년 6개월을 선고하고 법정구속까지 했다. 법원의 중형 선고는 플리바기닝에 대한 경고로 볼 수 있다. ▷미국에서 형사사건의 90%가량이 재판 없이 피고인이 유죄 인정을 하는 대신 형량을 감면받는 플리바기닝으로 종결된다. 플리바기닝은 배심제의 사생아라는 말이 있다. 배심 재판이 시간이 많이 걸리는 데다 배심원이 이해하기 힘든 복잡한 형사사건이 많아지면서 플리바기닝이 대세를 이뤘다. 그러나 미국에서도 플리바기닝은 판사 앞에서 피고인의 의사가 자발적인지, 사실관계가 뒷받침되는지 확인한 후에 인정된다. 이 과정에서 법원에서 유죄로 인정할 범죄사실, 검찰이 불기소할 범죄사실이 밝혀진다. ▷정 씨의 이화여대 입시비리 사건으로 정작 구속되고 처벌된 것은 교수들뿐이다. 김종 전 문화체육관광부 차관은 핵심 역할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혐의로는 기소되지 않았다. 삼성 측은 최근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항소심 공판에서 김 전 차관이 삼성에 관해 한 진술의 신빙성을 문제 삼았다. 이런 의문이 제기되는 것은 플리바기닝이 검찰 밀실에서 이뤄져 사실관계가 뒷받침되는지 확인하는 절차가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아이가 있는 장 씨나 딸 결혼을 앞둔 이 전 실장에게 구속을 두고 거래가 있었다면 그것 역시 자발적인 협조라고 보기 어렵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고문현 한국헌법학회장(57)이 1일 취임하면서 “한국헌법학회의 독자적인 헌법 개정안을 마련하겠다”고 밝혔다. 헌법 개정안은 국회가 국회의원 36명으로 헌법개정특별위원회를 구성해 현재 새 헌법 조문화(條文化) 작업을 하고 있다. 학자와 시민단체 대표 등 50명으로 구성된 자문위원회의 도움을 받고 있는데 고 회장은 이 자문위 위원이기도 하다. 그러나 헌법개정특위와는 별도로 전문가 집단의 독자적인 헌법 개정안을 내놓겠다고 밝힌 것이다. 고 회장은 경북대 출신으로 서울대 법대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숭실대 법대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학자를 보좌관으로 아는 국회”―왜 헌법학회의 개헌안을 따로 내놓기로 했나. “학자가 하는 일은 병이 나면 진단을 해서 고치는 의사 역할과 비슷하다. 제왕적 대통령의 폐단이 드러났다. 헌법학자들이 올바른 처방을 내놓는 것은 1987년 이후 30년 만에 찾아온 역사적 책무이기도 하다.” ―학자들은 헌법개정특위 자문위를 통해 의견을 반영할 수도 있는데…. “헌법개정특위 의원들이 자문위로부터 한 수 배워 헌법을 만들겠다는 마음보다는 특위와 자문위의 관계를 의원과 보좌관의 관계처럼 받아들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정치권이 일방적으로 강해 정당의 정략에 따른 개헌안이 만들어질 수 있겠다는 우려도 든다.” ―19대 국회에서 김철수 서울대 명예교수 중심으로 국회의장 직속의 헌법자문위가 활동해 조문화 작업까지 마쳤다. 이번 국회에서는 과거 개헌 작업을 한 사람들이 대부분 배제되고, 학자들과 시민단체 대표들이 누가 중심이라고 할 것 없이 섞여서 활동하고 있다. 얼마나 효율적인가. “개헌에 헌법학자들의 의견만 반영돼야 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전문가적 논의의 어려움이 있는 건 사실이다. 가령 헌법 10조는 행복추구권을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일본을 제외하고 세계 어느 나라 헌법에도 행복추구권은 없다. 이 세상에 기본권 치고 행복 추구 아닌 게 없다. 행복추구권은 너무 불명확한 개념이어서 어느 정도 구체화되지 않으면 큰 의미가 없다. 행복추구권은 정통성이 부족한 전두환 전 대통령이 5공화국 헌법을 만들면서 국민의 환심을 사기 위해 집어넣은 것이다. 그러나 전문가가 아니어서 맥락을 모르는 사람들은 왜 그 좋은 말을 빼느냐고 한다.” ―연말까지 각 지방을 돌면서 국민대토론회가 열린다. 조문도 다 만들지 않고 국민대토론회를 여는 데 대한 비판도 있다. “전문적 의견을 바탕으로 국민에게 이해를 구해야지 처음부터 국민을 참여시킨다고 해서 국민이 만드는 개헌이 되는 건 아니다.” ―어떤 방식으로 언제쯤 의견을 낼 것인가. “2006년 헌법학회 이름으로 헌법 개정안을 만든 적이 있다. 이를 토대로 검토하면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을 것이다. 현재 헌법학회 고문단에는 헌법학회 전임 회장들과 김철수 교수 등 몇몇 공법학회장 출신이 포함돼 있다. 이분들이 최종 결정을 내릴 것이다. 합의가 안 되면 다수의견이라도 제시하고 정 안 되면 개헌 기준만이라도 제시할 것이다. 정세균 국회의장이 2월 말까지 개헌안을 마련해 3월에는 발의한다고 해서 바빠졌다. 그 전에 공개하겠다.” ―청와대는 국회가 개헌안에 합의하지 않으면 대통령이 개헌발의를 준비할 수밖에 없다고 하는데 감지되는 청와대쪽 움직임이 있나. “법제처를 중심으로 일부 위원을 위촉해 비공개로 준비하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몇몇 교수 이름이 나오고 있다. 그러나 국회가 개헌안을 준비하고 있는 시점에서 청와대가 공개적으로 뭘 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닌 것 같다.”5·18과 촛불은 전문 넣기 어렵다 ―국회가 특권을 없애기는커녕 보좌관을 1명 더 늘리고 짬짜미 예산으로 뒷거래하고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것을 보면서 이런 국회에 개헌을 맡기는 것은 국회 권한만 늘려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기는 것 아닌가 하는 우려가 든다. “국회가 개헌안을 마련하면 국회에 유리하게, 국회가 정해진 시한까지 합의를 못 해서 대통령이 개헌안을 마련하면 대통령에게 유리하게 개헌안이 마련될 우려가 있다. 그래서 우리 헌법학자들이 중립적인 개헌안을 제시해 보고자 한다. 국회가 얼마나 수용할지는 모르겠다. 최소한 국민이 국회의 개헌안을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을 제시해 보려고 한다.” ―문재인 대통령은 개헌과 관련해 ‘새 헌법 전문에 부마항쟁과 5·18광주민주화운동, 6월 민주항쟁, 촛불 항쟁의 정신을 새겨야 한다’는 공약을 내걸었다. 한국은 미국과 달리 헌법 전문의 효력도 인정하고 있다. 국회 특위에서 헌법 전문과 관련해 어떤 논의가 이뤄지고 있나. “6월 민주항쟁을 추가하자는 데는 어느 정도 공감대가 형성돼 있다. 5·18민주화운동을 넣는 데는 지역별 의견 편차가 너무 크다. 부마항쟁은 지역 간 균형을 맞추려고 5·18과 함께 내세운 듯한데 반응이 좀 그렇다. 촛불 시위에 대해서는 겨우 1년밖에 지나지 않은 상황이어서 더 많은 숙고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견해가 우세하다. 무엇보다 우리 헌법에는 법치주의라는 말이 빠져 있다. ‘법치주의에 터 잡아’라는 말을 넣자는 데 거의 합의가 이뤄졌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이 결국 법치를 하지 않은 데서 비롯되지 않았나.” ―통치구조에서 특히 논의가 분분하다던데…. “혼합정부제(이원정부제)와 대통령 4년 중임제가 대립하고 있다. 혼합정부제는 외치(外治)는 대통령에게, 내치(內治)는 국무총리에게 맡기자는 투톱 시스템(two top system)이다. 그러나 외치와 내치를 구별해 통치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고 대통령제나 의원내각제와 달리 이원정부제는 헌법적 개념도 아니라는 반박이 있다. 대통령 4년 중임제는 국무총리와 위원에 대한 의회 통제를 강화하고 국가정보원 검경 국세청 등 권력기관 수장에 대한 대통령의 인사권을 제한하는 대신 현행 5년 단임제를 4년 중임제로 바꿔 국정 안정을 추구하자는 것이다. 혼합정부제가 다수의견이고 대통령 4년 중임제가 소수의견이다. 어떤 정부 형태를 택하든 대통령 결선투표제 도입과 대통령의 특별사면권 제한에는 합의가 이뤄졌다.”더욱 강화된 경제민주화 조항 ―대통령의 권한을 줄이면 국회의 권한이 강화될 수밖에 없다. 국민은 제왕적 대통령의 권한을 줄여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줄어든 권한이 국회로 가는 것도 선뜻 내키지 않아 한다. “국회의 면책특권 불체포특권도 동시에 줄여야 한다. 개헌 결과 국회의원 수가 늘어난다면 그런 개헌에 국민이 공감하지 못할 것이다. 이번 예산안 처리에서도 국회의원 보좌관 수를 늘려 국회를 보는 여론이 좋지 않다. 인구 비례로 보면 우리나라 국회의원 수가 외국보다 많은 편이다. 300명 이내로 돼 있는 국회의원 수를 250명 이내로 줄이는 등 국회도 고통을 분담한다는 모습을 보여야 개헌의 진정성을 인정받을 수 있다.” ―상원을 만들자는 논의도 있던데…. “헌법재판소가 2014년 선거구 간 인구 편차를 2 대 1까지만 허용했다. 1995년까지만 해도 편차가 4 대 1까지 허용됐는데 2001년 3 대 1로 줄더니 2 대 1까지 줄어들었다. 그 결과 시골 지역 이익을 대변할 의원 수가 줄고 있어 상원의 형태로 시골의 대표성을 강화해 도시와 시골 간 균형을 맞출 필요가 제기됐다. 더 나아가 통일이 된다면 인구 비례인 하원에서 열세인 북한 지역의 이익을 균형 있게 대변할 수 있는 상원의 필요성이 있다. 상원 신설에 자문위는 대체로 찬성하지만 현 국회의원의 권한을 축소시키는 것이어서 특위가 반대한다.” ―경제 분야는 어떠한가. “시장경제보다 정부규제를 강화하는 안이 만들어지고 있다. 헌법 119조 2항의 중간 부분에 들어 있는 ‘경제의 민주화를 위하여’를 앞으로 끌어내고, ‘경제력의 남용을 방지하여’를 ‘경제력의 집중과 남용을 방지하여’로 확대하는 한편, ‘할 수 있다’라는 권고적인 동사를 ‘하여야 한다’는 강제적인 동사로 바꾸는 안이 다수의견으로 제시돼 있다. 여기에 더해 다수의견은 ‘국가는 시장의 지배와 경제력의 집중과 남용의 피해자들에게 징벌적, 집단적 사법구제수단을 보장한다’는 119조 3항을 신설하는 안까지 제시했다. 이에 대해 경제에 대한 규제는 선택적으로 할 수 있어야지 이를 의무로 규정할 경우 시장경제의 근간을 해치고 계획경제라는 의혹을 야기할 수 있다는 소수의견의 반발이 있다.” ―각계의 헌법 개정 주문이 밀려들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최근 연방제 수준의 지방분권 개헌을 강조했다. 국민의당은 국회 표결에서 여당에 협조해주는 대가로 국회의원 선거구제를 1, 2당에 유리한 소선거구제에서 3당에 유리한 중대선거구로제로 개편하는 뒷거래를 하고 있다. 농협 등 농민단체는 헌법에 국가의 농업지원을 의무화하는 농업 조항의 신설을 요구하고 있다. 세종시는 수도 조항을 신설해 행정수도까지 못 박아 달라고 한다. “지방분권에 대해서는 헌법 제1조에 집어넣자는 의견이 있다. 헌법 제1조 1항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2항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에 이어 3항을 신설해 지방분권을 넣자는 것이다. 이에 대해 헌법 제8장 지방자치편을 강화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반발이 있다. 선거구제 개편은 비례대표제 확대, 국회의원 증원 등이 선행돼야 한다. 너무 정략적으로 흐를 수 있어 이번 개헌에 포함시키면 개헌 자체를 물 건너가게 할 수 있다. 농민단체 측 요구대로 농업 조항을 따로 신설한다면 어업은 어업 조항, 중소기업은 중소기업 조항을 신설해 달라고 요구가 터져 나올 것이다. 수도 조항은 통일 후를 대비해야 하니까 미리 규정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 ―거대 문제를 방만하게 제시하기보다 그동안 노출된 구체적인 헌법적 문제를 먼저 풀어야 할 것 아닌가. 가령 박 전 대통령의 탄핵 과정에서 60일 만의 재선거라든가, 부통령이 없는 권한대행제의 한계가 드러났다. 최근에는 헌법재판소장의 임기 문제도 다시 제기됐다. “큰 틀이 정해지지 않아 그런 데까지는 손을 못 쓰고 있다.”제왕적 대통령제 해결이 중요 ―헌법을 전면적으로 뜯어고치는 게 가능할까. “일단은 개헌의 기회가 왔으니 헌법 전반을 검토하는 것이고 실제 가능한지는 다른 얘기다. 사안마다 의견이 분분하니 합의에 이르지 못하면 합의할 수 있는 선에서의 개헌으로 가지 않을까 싶고 결국은 원포인트(one point) 개헌이 될 수도 있다. 원포인트 개헌이 된다면 제왕적 대통령제의 폐단을 줄이는 개헌에 집중할 수밖에 없다.” ―원포인트 개헌이라고 말하지만 그 의미도 명확하지 않다. 조항 하나만 바꿔 대통령 5년 단임제를 4년 중임제로 고치는 식은 가능하지 않은 듯하다. “대통령 5년 단임제를 4년 중임제로 고친다면 달랑 그 조항 하나만 뜯어고치는 것은 의미가 없다. 대통령의 권한이 변하는 데에 맞춰 국회와 사법부의 권한도 대거 조정해야 한다. 그렇게 되면 어디까지 조정을 해야 하는지 또 복잡한 논의가 필요하다.” ―이번에는 제왕적 대통령제의 폐단을 없애는 데 집중하고 나머지 과제는 뒤로 돌리되 그 대신 헌법 개정의 경직성을 완화해서 앞으로 보다 자주 개정을 한다면 어떨까. “현재 국회의 헌법 개정 정족수인 재적인원 3분의 2를 충족시키는 것은 한 당이 반대하면 사실상 불가능하다. 이를 5분의 3으로 내리자는 의견도 나와 검토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헌법 개정하면 5공화국, 6공화국 식으로 공화국의 명칭을 바꾸는 전면적인 헌법 개정만 연상한다. 그렇다 보니 개헌을 너무 어렵게 여긴다. 프랑스나 독일처럼 비교적 잦은 헌법 개정을 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야 한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택스 프리(Tax Free)를 싫어하는 사람은 실적을 올려야 하는 세무서 직원을 빼고는 없다. 세무서 직원조차도 쇼핑객이 되면 택스 프리를 찾는다. 돈은 속성상 돈을 숨길 수 있는 곳이나 세금이 적은 곳을 찾아가기 마련이다. 카리브해의 케이맨 제도에는 법인세가 없다. 인구 5만여 명의 이 작은 섬나라는 법인이 실재하는지 서류상의 페이퍼컴퍼니인지는 관심이 없다. 법인 등록세와 매년 등록을 갱신하는 요금만 받고도 잘 먹고 살 수 있기 때문이다. ▷독일 일간 쥐트도이체차이퉁의 탐사 저널리스트인 바스티안 오베르마이어는 지난해 어느 날 신원 미상의 인물로부터 10만 건에 달하는 페이퍼컴퍼니 내부 자료를 건네받았다. 이것이 이른바 ‘파나마 페이퍼스’다. 러시아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 축구선수 리오넬 메시 등 조세회피처에 페이퍼컴퍼니를 세운 명단이 대량 유출돼 세계를 떠들썩하게 했다. 그중에는 한국인 190명도 포함돼 있었다. ▷유럽연합(EU)은 5일 한국을 조세회피처 17개국 중 하나로 지정했다. 한국을 빼고 모두 경제 규모가 작은 나라이거나 자치령인 섬지역이다. 어디 있는지도 알기 어려운 세인트루시아 같은 나라 수준으로 한국이 졸지에 전락한 기분이다. 한국이 포함된 건 외국인투자지역과 경제자유구역 등에 투자하는 외국 기업의 세금 감면 혜택과 관련해 투명성이 떨어지기 때문이라고 한다. EU는 제재 수위를 결정하지 않았지만 블랙리스트에 올랐다는 사실만으로도 어제 원-달러 환율이 오르는 등 타격을 받았다. ▷2009년 주요 20개국(G20) 회의에서 조세회피처 블랙리스트가 본격 거론됐다. 그 리스트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홈페이지에 게시돼 있으나 한국은 없다. 그러나 EU는 더 엄격한 조세회피처의 개념을 갖고 있다. 자유무역지대와 같은 곳도 일종의 조세회피처로 분류한다. 조세회피처에 대한 정의는 다양하지만 핵심은 투명성이다. 유리지갑 회사원들에게 한국이 조세회피처라니 말도 안 되는 것 같지만 복잡한 기업 세제를 개선하지 않으면 블랙리스트에서 벗어나 그레이리스트에 오르는 것도 쉽지 않을 듯하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얼마 전 법원 게시판에 ‘재판이 곧 정치’라고 쓴 오현석 인천지법 판사는 올해 40세다. 2011년 각각 ‘가카새끼’와 ‘가카의 빅엿’이란 말이 들어간 글을 자신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올린 당시 이정렬 부장판사와 서기호 판사는 42세와 41세였다. 옛날에 사십을 불혹(不惑)이라고 했다. 오늘날같이 복잡한 세상에서도 사십이 불혹인지 모르겠지만 사십은 판사로서는 그저 약관(弱冠)의 나이일 뿐이다. 미국 대사관이 각국에 배포하는 ‘미국의 사법제도(Outline of the U.S. Legal System)’란 자료를 보면 미국의 주 지방법원 판사는 대략 46세에, 연방 지방법원 판사는 49세에 된다. 항소법원의 경우 주 항소법원과 연방 항소법원에 판사들이 처음 발을 들여놓는 나이는 공히 53세 정도다. 세기의 재판이라고 불린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1심 재판의 배석판사가 둘 다 31세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법정드라마를 즐기는 미국인들이 알면 깜짝 놀랄 것이다. 일본만 해도 판사가 되기 전에 판사보로 10년을 보낸다. 그 후에 임용 요청이 받아들여져야 판사가 된다. 이렇게 하고도 10년마다 재임용 절차를 밟는다. 우리나라는 사실상 한번 판사는 영원한 판사다. 10년마다 재임용 심사가 있지만 탈락하는 경우는 드물다. 그러다 보니 지방법원 배석판사에서 단독판사나 고등법원 배석판사를 거쳐 지방법원 부장판사까지는 웬만한 판사는 다 한다. 걸러지는 유일한 절차가 고등법원 부장판사 승진 과정인데 이것마저 없애겠다고 한다. 고법 부장판사 승진을 없애기로 한다면 재임용 심사라도 강화해야 균형이 맞는다. 얼마 전 김동진 인천지법 부장판사가 자신의 SNS에서 서울중앙지법 형사수석부의 잇따른 구속적부심 석방 결정을 비판했다. 김 부장판사는 2012년 자신이 항소심 재판장을 맡았던 횡성 한우 사건의 유죄 판결을 뒤집은 대법원 판결을 비판해 서면경고를 받고, 2014년 원세훈 전 국가정보원장의 선거법 위반 혐의 1심 무죄 판결을 비판했다가 정직 2개월의 중징계를 받았다. 43세에 드러난 가벼운 처신이 45세에 징계를 받아도 변하지 않고 48세에 또 재발했다. 이런 판사를 재임용 심사로 잘라내지도 못하고, 고법 부장판사 승진에서 탈락시켜 제 발로 나가게 하지도 못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미국에서도 40대 중후반이면 판사를 시작할 나이지만 변호사로서 ‘세상사의 검증’을 거친 40대 중후반의 판사와 법원이라는 온실에서 커 40대 중후반에 이른 판사가 같을 수 없다. ‘소년·소녀 급제’해 약 10년간 배석판사를 하고 나오면 예전에는 서울시장 안 부러웠다는 막강한 권한을 가진 단독판사가 된다. 부장판사 밑에서 숨겨졌던 배석판사들의 독단이 잘 드러나는 때가 이 시기다. 이때 걸러내지 못하면 그 독단이 부장판사 때까지 이어진다. 독단에 빠진 판사들은 양심을 판사마다의 성향으로 착각하는 경향이 있다. ‘재판이 곧 정치’라는 오 판사가 그런 사례다. 그러나 양심은 어원상 함께(con) 아는 것(scientia)이다. 양심은 빈곤한 인문학적 지식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종교적·철학적 기원을 갖고 있다. 양심은 비유하자면 1000개의 강에 비친 달(月印千江)과 같다. 각자에게 있지만 모두가 공유하는 것이다. 판사라면 이 사건을 내가 보듯이 동료들도 볼까, 상급심 판사들이라면 어떻게 볼까 고민해야 한다. 그것이 ‘함께 아는 것(conscientia)’이다. ‘내가 아는 것’은 있을지언정 ‘함께 아는 것’ 따위는 없다고 여긴다면 법관을 그만두고 나가 개인 변호사 사무실을 차리든가 해야지 법원에 붙어 있을 이유가 없다. 법원이 이른바 ‘판사 블랙리스트’ 의혹으로 양심을 시험받고 있다. 법원 재조사위원회는 의혹의 당사자로 지목된 법원행정처 판사들의 컴퓨터 하드디스크를 복사해 가 언제든지 열어볼 준비를 해놓고 있다. 영장을 제시받지 않고 자신이 쓰는 컴퓨터를 열어줄 의무가 없다는 것은 법관만이 아니라 누구나 다 ‘함께 아는 것’이다. 그런데도 지금 재조사위가 이 양심에 어긋난 일을 하려 한다. 독단을 양심으로 착각한 몇몇 법관들이 재조사위를 좌우하는 사태를 침묵하는 많은 법관들이 우려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제1차 세계대전은 참호전이었다. 기관총 같은 직사화기의 발전으로 참호가 중요해졌다. 그리고 참호를 돌파하기 위해 기관총에도 끄떡없는 전차가 만들어졌다. 제2차 세계대전은 전차를 이용한 전격전이 중심이었다. 그리고 전차를 잡는 항공기인 공격기가 등장했다. 이어 공중 장악의 필요성이 대두하고 전투기가 등장했다. 6·25전쟁은 2차대전 말에 처음 실전 배치된 제트전투기가 전장의 주역이 된 최초의 전쟁이었다. ▷강력한 대공(對空) 미사일의 등장에 따라 전투기의 역할이 축소되는 듯했으나 이를 되살린 것이 적의 탐지를 피하는 스텔스 기능이다. 2006년 미군이 알래스카 상공에서 두 팀으로 나누어 벌인 2차례의 모의 공중전에서 241 대 2라는 격추 성적차가 나왔다. 조종사 기량에 별 차이도 없는데도 일방적 학살에 가까운 기록이 나온 것은 이긴 팀에만 속한 최신예 전투기 F-22 랩터 덕분이었다. 진 팀에 격추당한 2대도 F-22가 아니라 F-15였다. F-22가 최초의 스텔스기는 아니지만 비행 성능의 제약을 극복한 본격적인 스텔스기였기 때문이다. ▷주일미군 소속인 F-22 6대가 어제 한미 연합 공군 훈련차 광주비행장에 와 8일까지 머문다. 역시 주일미군 소속인 F-35A 6대와 F-35B 12대도 한국에 왔다. F-35 기종은 F-22가 너무 비싼 데다 수출로 인한 기술 유출이 우려돼 미군이 생산을 중단하고 대신 만들어 사용하고 있는 스텔스 전투기다. 한국은 미국과 맺은 F-35A 40대 도입 계약에 따라 내년에 1차분 6대를 들여온다. ▷러시아와 중국의 전투기 중에 아직 랩터의 상대가 되는 전투기가 없다. 실은 이것이 미군이 랩터의 생산을 일단 중단하고 F-35 기종 생산에 집중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다. 중국이 랩터를 상대하기 위해 올 3월 실전 배치한 것이 젠-20 전투기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강군몽(强軍夢)의 핵심전력이다. 하지만 스텔스 기능이 취약해 랩터의 상대로는 여전히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앞으로도 한동안은 랩터가 하늘의 왕자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이번엔 북한 김정은을 ‘병든 강아지(sick puppy)’라고 불렀다. 지난달 29일 북한이 미국 전역을 타격할 수 있는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화성-15형을 시험 발사한 후다. ‘병든 강아지’는 병들어 자기 토사물을 먹는 강아지를 이른다. ‘미친 개(mad dog)’는 힘이라도 좋지, 병든 강아지는 비실비실하기까지 하니 받아들이기에 따라서는 더 경멸적일 수도 있다. ▷트럼프는 김정은을 향해 ‘미치광이(mad man)’라는 말을 여러 차례 사용했다. 그러다가 성에 안 찼는지 깔보는 식의 표현을 쓰기 시작했다. 그래서 나온 게 올해 9월 유엔 총회 기조연설에서의 ‘미사일 쏘아대는 꼬마(little rocket man)’다. 이번에 나온 ‘병든 강아지’와 같은 계열이다. 트럼프는 그러다가도 김정은이 다소 고분고분해지는 것 같으면 ‘꽤 영리한 녀석(pretty smart cookie)’이라는 식으로 다소 치켜세워 주기도 했다. ▷김정은은 트럼프의 ‘미사일 쏘아대는 꼬마’에 ‘망령든 노인(dotard)’이란 말로 반격했다. 김정은이 정확히 어떤 한국말을 사용했는지는 알 수 없고 북한의 대외선전매체인 조선중앙통신은 그 말을 ‘dotard’로 번역해 전했다. AP통신에 따르면 조선중앙통신은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당시 박 전 대통령을 지지하는 어버이연합 시위대를 지칭하기 위해서도 그 말을 썼다. ▷조지 W 부시 전 대통령이 ‘오지(outpost)’ 국가라고 부른 북한 덕분에 많은 미국인이 뜻밖에 ‘dotard’란 고색창연한 단어를 알게 됐다. 김일성대 영문학과 출신 탈북자로부터 북한의 영문학과는 몽골 해군과 비슷하다는 재밌는 비유를 들은 적이 있다. 몽골은 바다가 없어 해군은 실전 훈련을 할 수 없다. 북한 대학의 영문학과 학생들도 주로 책을 통해 영어를 배울 뿐 실제 쓰이는 영어를 배울 기회가 거의 없다. 그러다 보니 셰익스피어나 초서의 글에나 나오는 단어를 실생활에 쓰는 영어처럼 썼을 가능성이 있다. 트럼프의 ‘병든 강아지’에는 어떤 말로 반격할지 궁금하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영국 찰스 왕세자가 고(故) 다이애나 전빈(前嬪)과의 사이에 낳은 두 아들 중 미혼인 해리 왕손이 미국 여배우 메건 마클과 27일 약혼했다. 마클은 내년 5월의 신부가 된다. 마클은 이혼 경력이 있는 미국인이다. 1936년 에드워드 8세가 이혼 경력이 있는 미국인 심프슨 부인과의 결혼을 위해 왕위를 현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아버지인 조지 6세에게 넘긴 일과 비교하면 격세지감이 느껴진다. ▷물론 해리는 왕위 계승 서열이 형 윌리엄이 케이트 미들턴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 조지(4)와 샬럿(2)에도 미치지 못하는 5위여서 왕이 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 그래서 왕위 계승 서열 2위인 윌리엄이 미국인 이혼녀와 결혼하려 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궁금증이 남는다. 왕위 계승 서열 1위인 찰스 왕세자는 2005년 이혼녀인 커밀라 파커 볼스와 재혼했다. 볼스는 그 지위가 왕세자빈(princess)이 아니라 공작부인(duchess)이고 찰스가 왕이 된 후에도 왕비급(queen consort)으로 승격하지 못하고 왕세자빈급(princess consort)에 머문다. ▷다이애나만 해도 가난했지만 귀족 집안 출신이었다. 그 자유분방한 기질이 왕실의 엄격함에 맞지 않았을 뿐이다. 윌리엄은 2010년 영국 왕실 사상 최초로 평민 출신인 미들턴과 결혼했다고 해서 화제였다. 마클은 미국인이니까 귀족이니 평민이니 따질 수는 없다. 다만 마클은 외가 쪽으로 흑인 피가 섞여 있다. 이것도 처음이다. ▷마클은 지적이고 다재다능한 여배우다. 미국 노스웨스턴대에서 연극 외에 국제관계를 전공해 정치 진출의 꿈을 꾸기도 했다. 배우를 하면서도 라이프스타일 관련 블로그를 운영하고 인도주의적 활동에도 열심이다. 본인이 디자인한 드레스로 패션쇼를 열기도 했다. 마클이 TV 토크쇼에서 짧은 원피스를 입고 다리를 꼬고 앉아 자유분방하게 대화를 나누는 모습은 정숙한 세련미의 미들턴에게서는 찾기 힘들다. 스타일만이 아니라 인도주의 스포츠 문화 사업 후원에서 두 왕손 부인들이 펼칠 대결이 궁금해진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해산당한 통합진보당의 대리 복수극이라고나 할까. 문재인 대통령이 취임 후 직접 발표한 1호 인사는 통진당 해산 심판에서 유일한 반대 의견을 냈던 김이수 헌법재판관의 헌법재판소장 지명이었다. 소수 의견도 아닌 극소수 의견을 낸 재판관을 소장으로 지명하는 게 정상이냐는 의문이 들었지만 정당의 자유에 대한 기준은 각자 다를 수 있으니까 의견 차이로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이 정부가 검찰 ‘숙정(肅正)’을 단행할 때 정점식 전 대검 공안부장 등은 국정 농단과 직접 관련이 없는데도 법무부의 통진당 해산 심판 청구인 측에서 일했다는 이유로 숙청(肅淸)하는 것을 보고 이것이야말로 의견 차이를 인정하지 않고 인사 보복으로 앙갚음하는 것이라 여기지 않을 수 없었다. 문재인 정부는 국가정보원 개혁발전위원장으로 정해구 성공회대 교수를 앉혔다. 그가 ‘해방전후사의 인식 4’에 쓴 ‘해방 8년사의 총체적 인식’이란 글의 요점을 글에 나온 내용 그대로 인용해 보겠다. “일제라는 국가권력이 붕괴된 해방의 시점에서 요구되는 혁명의 내용은 반제반봉건민주주의혁명이라고 할 수 있다. … 소련군이 진주한 북한에서는 반제반봉건민주주의혁명은 소련군의 후원에 힘입어 순조롭게 진행됐고, 미군이 점령한 남한에서는 이러한 혁명이 미군정의 반혁명정책에 의해 결국 좌절됐다.” 해서는 안 될 일을 한 국정원의 잘못은 엄히 바로잡아야 하지만 대북 공작을 담당하는 국정원의 개혁을 왜 1945년 이후 한반도의 정통성을 북한 공산세력에 부여한 사람에게 맡겨야 하는지는 이해되지 않는다. 이석기의 내란 선동을 드러낸 비밀 회합의 충격적 내용은 국정원의 숙련된 수사가 없으면 포착하기 힘들었다. 앞으로 국정원에 이석기 수사 같은 고도의 대공 수사를 할 의지 자체가 남아있을지 의문이다. 이 정부의 국정원 개혁은 양동이의 물과 함께 아이를 버리는 우(愚)를 범하는 게 아니라 양동이의 물과 함께 아이를 버리는 수(手)를 쓰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통진당은 해산됐으나 통진당적 사고는 번성하고 있다. 경기동부연합에는 민주노동당 시절 정책위의장을 지낸 이용대라는 거물이 있었다. 이 전 의장은 2012년 통진당 비례대표 부정선거 사건이 터지기 전 몸이 아파 일선에서 물러났다. 그는 북한이 2006년 제1차 핵실험을 했을 때 북핵은 북한의 자위를 위한 무기이며 북한이 미국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킬 수 있을 때 한반도가 긴장 국면에서 평화 국면으로 전환할 수 있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당시 이런 주장은 민노당 내부에서조차 종북(從北) 논란을 촉발할 정도로 충격적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거의 유사한 주장을 문 대통령의 외교안보특보인 문정인 교수가 하고 있다. 사드 배치를 방해하다가 그 시도가 실패하자 이제는 사드 추가 배치가 없다는 ‘약속’인지 ‘입장 표명’인지를 한 문재인 정부에 중국은 친중(親中)의 진정성을 느끼는 것 같다. 국정원의 대공 수사 의지를 무력화하고 검찰의 공안라인을 숙정하고 통진당을 해산시킨 박근혜 정부의 국정원장 3명을 ‘일망타진’한 이 정부를 북한은 어떻게 봐줄까. 북한이 명확한 반응을 보이지 않는 것은 미국 본토에 이르는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을 완성하지 못했기 때문에 좀 더 시간이 필요하다고 여기기 때문인 듯하다. 문재인 정부가 법무부 장관과 검찰총장 체제를 완비하기 전에 청와대 임의로 임명한 두 사람은 대윤(大尹)-소윤(小尹)으로 불리며 적폐수사를 주도하는 윤석렬 서울중앙지검장과 윤대진 서울중앙지검 1차장검사다. 윤 차장검사의 누나가 성남시자원센터장을 지낸 윤숙자 씨이고 그 남편이 이용대 전 의장이다. 윤 차장검사의 부인은 최근 사법부의 ‘블랙리스트’ 조사위원이 된 최은주 서울가정법원 부장판사다. 문재인 정부는 통진당 정부도 아니고 주사파 정부도 아니다. 운동권 출신 정부에 가깝다. 그러나 사상이란 묘해서 한쪽 자장에 속하지 않으면 다른 쪽 자장에 속하게 된다. 주사파라는 강력한 자력의 가장 가까운 곳에 백낙청 씨의 ‘분단모순론’이나 민족해방(NL)적 현대사 인식이 위치하고 그 바깥으로 요점 정리도 안 되는 잡다한 운동권적 사고들이 자리 잡고 있다. 그렇게 그들은 ‘주적(朱赤)이 동색(同色)인 양’ 한 무더기로 가고 있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문재인 정부가 굳건한 한미 동맹의 토대에서 중국을 배려하는 정책을 새로운 ‘조선책략’인 듯 말하고 있다. 어제 한미 정상회담 직후 기자회견에서 미중 간 균형외교에 대한 질문이 있었고, 문 대통령은 균형은 미중 사이의 균형을 의미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러면 무엇의 균형인지에 대해 중국 러시아 동남아 등을 포함해 외교의 지평을 넓히는 것이라고 답했다. 이런 답은 중국에 대한 포커스를 흐리는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반미(反美)면 어떠냐’고 대놓고 말했지만 이 정부는 겉으로 말하는 것 다르고 속으로 생각하는 것 다를 정도로는 언사(言辭)를 관리하고 있다. 문재인 정부는 집권 후 억지스러운 이유를 달아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를 방해하다가 북한 6차 핵실험 직후 돌연 사드 배치를 허용해 일관성을 저버리더니 다시 또 돌연 사드 추가 배치는 없다는 ‘약속’인지 ‘입장 표명’인지를 중국에 했다. 하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아시아 순방을 코앞에 두고 나온 소식치고는 의외여서 혹시 미국의 양해하에 트럼프와 시진핑의 북핵 협상 가능성을 높이기 위한 것인가 애써 긍정적 추측도 해봤지만 그렇지 않다는 사실이 미국 허버트 맥매스터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의 ‘주권 포기’ 운운하는 비판적 논평으로 곧 드러났다. 트럼프 대통령은 오늘 그의 아시아 순방에서 가장 중요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의 정상회담을 갖는다. 트럼프 대통령은 어제도 빌 클린턴 이래 역대 미국 대통령들이 25년간 시간만 허비했다고 비판했지만 그 역시 중국이 실효적인 대북 제재에 나서도록 할 뾰족한 수가 없다. 트럼프 대통령이 대북 제재에 대한 중국의 협력을 얻어내기 위해 쓸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카드는 중국에 직접적인 경제 제재를 가하는 것이다. 하지만 우방들을 압박해 한 푼이라도 더 이익을 취하려는 장사꾼 대통령이 우방으로부터 얻게 될 이익의 총합보다 더 큰 이익을 중국과의 경제 마찰로 단번에 날려버릴 거라고 보기 어렵다. 트럼프 대통령은 어제도 “한국이 수십억 달러어치의 첨단 무기를 구입하기로 했다”는 사실을 힘주어 강조했다. 그 첨단 무기에는 가성비(가격 대비 성능) 높은 전술핵 대신 핵추진잠수함과 정찰자산 등이 포함된다. 협상으로 중국의 실효적인 대북 제재 동참을 얻어내지 못한다면 두 가지 옵션이 남는다. 하나는 군사적 옵션이다. 군사적 옵션은 트럼프 대통령의 메뉴에 있다 하더라도 경제적 손실도 감수하지 못하는 대통령이 군사적 희생을 감수하리라고 기대하기 힘들다. 트럼프 대통령은 “북한에 많은 힘을 보여줬다. 실제로 사용되는 일은 없길 바란다”고 말했다. 북한을 향한 전례 없는 무력시위는 뒤집어 보면 실제 군사력을 사용하는 상황까지는 가고 싶지 않다는 뜻이 담겨 있다. 다른 하나는 헨리 키신저 전 국무장관이 트럼프 대통령에게 제안했다는, 북핵 포기와 주한미군 철수의 맞교환이라는 카드다. 어제 트럼프에 앞서 중국을 방문한 맥매스터 보좌관은 키신저의 제안과 사실상 같은 중국의 쌍중단(雙中斷)으로는 북핵을 풀 수 없다며 “제재가 최선책”이라고 말했다. 키신저의 제안이 당장 받아들여질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 임기 중 북핵이 미국 본토를 위협하는 상황이 올 수 있고 그로서는 어떻게든 성과를 내야 한다는 압박감에 몰릴 수 있다. 게다가 그는 중국을 태평양과 인도양 방면에서 미국 하와이-일본-인도-호주를 잇는 다이아몬드 모양의 동맹으로 봉쇄하자는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구상에 공감하고 있다. 그런 미국에, 일본 앞에서 대놓고 동맹은 없다고 말하고 미국과의 알력을 감수하면서까지 중국에 대한 배려를 강화하는 한국은 점점 더 불편한 존재가 되고 있다. 한국과는 아니지만 미국과는 동맹인 나라들로부터 한국을 통한 중국으로의 정보 유출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나올 수도 있다. 동맹은 연애와 비슷하다. 가까워지지 않으면 멀어지는 법이다. 연인들이 저렇게까지 하나 싶을 정도로 서로에게 반복해서 사랑을 확인하는 말을 하듯이 동맹국들도 끊임없이 유대의 돈독함을 확인하지 않으면 멀어진다. 다만 환대도 지나친 것은 국가의 자존감에 상처를 줄 수 있고 마지못해 하는 것으로서는 진정성을 전달하기 어렵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그리스 신화의 위대함에는 프로메테우스와 불에 관한 얘기도 일조했다. 제우스는 프로메테우스가 신들이 갖고 놀던 불을 훔쳐 인간에게 가져다준 데 분노해 프로메테우스를 산꼭대기 바위에 묶어 두고 독수리에게 간을 뜯기는 고통을 겪게 했다. 불은 신적인 것이며 신적인 것 덕분에 인간은 동물의 세계에서 벗어났다는 인식을 읽을 수 있다. ▷고대 그리스 올림픽에서는 경기장에 불을 피워 놓았는데 프로메테우스가 자신을 희생하면서 인간에게 선물한 불에 대한 감사를 표현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한다. 성화는 1896년 그리스 아테네에서 부활된 올림픽에서는 재현되지 않다가 1928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올림픽에 처음 등장한 후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리스에서 채화된 성화가 평창 겨울올림픽을 위해 어제 한국에 도착했다. 그리스 현지에서는 축구스타 박지성 선수가 봉송했고 국내 봉송의 첫 주자는 피겨스케이팅의 기대주 유영 선수였다. ▷성화 봉송은 개막식에 등장하는 마지막 주자가 가장 관심을 끈다. 권투선수 무하마드 알리가 1996년 미국 애틀랜타 올림픽에서 마지막 주자를 맡는 등 그 자리는 국민적 영웅인 스포츠 스타가 맡는 게 관행이다. 평창 올림픽에서는 피겨스케이팅 금메달리스트인 김연아 선수가 유력한 후보다. 다만 김 선수는 평창 올림픽 홍보대사로 온갖 관련 행사에 등장하고 있어 마지막 주자까지 맡는다면 너무 혼자 북 치고 장구 치는 느낌을 줄 수 있다. ▷2014년 브라질 리우 올림픽에서 마지막 주자로 축구선수 펠레가 유력했지만 마라톤 선수 반데를레이 지 리마가 뽑혔다. 그는 2004년 아테네 올림픽 마라톤 경기에서 결승점을 5km 앞두고 선두로 달리다 정신이상자에게 밀려 넘어졌으나 다시 일어나 완주해 동메달을 획득하고도 기뻐했다. 1988년 서울 올림픽에서 마지막 주자로 손기정 옹이 예상됐으나 그에 이은 진짜 마지막 주자는 라면 끓여 먹고 육상을 해 아시아경기대회 금메달 3관왕이 된 임춘애 선수였다. 서프라이즈 효과를 내며 스포츠 정신을 일깨우는 주자를 등장시킬 수 있다면 성화 봉송의 묘미는 더 클 것이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헌법재판소장 임기 규정은 우리나라만 없는 게 아니다. 독일 연방헌법재판소장도 임기 규정이 없다. 우리나라 헌법재판소는 독일 연방헌법재판소를 본떠 만들었다. 두 나라 다 재판관의 임기 규정만 있을 뿐이다. 독일 연방헌법재판관의 임기는 12년이다. 독일 연방헌법재판소장은 지금까지 9명이 나왔는데 어떤 소장은 재판관 임기를 꼬박 채운 12년을 했고 어떤 소장은 4년도 채 하지 못했다. 우리나라도 독일도 헌재소장은 재판관과 동시에 소장으로 임명되면 재판관 임기를 다 채우고, 재판관을 하다가 소장으로 임명되면 잔여 임기만 채우는 자리다. 대법원장의 임기는 6년으로 정해져 있는데 왜 헌재소장은 고정된 임기가 없을까. 헌법은 대법원장은 대법관과 급이 다른 자리로 본다. 대법원장은 대법관 제청권이 있다. 대법원장은 그 자신이 제청권을 통해 인사에 영향을 미치니 대법관과 동급일 수 없다. 헌재소장은 그렇지 않다. 헌재소장은 기본적으로 헌법재판관과 동급이며, 소장이 된 뒤에도 동료들 중 1인자일 뿐이다. 그래서 헌법은 헌재소장은 헌법재판관 중에서 임명하도록 하면서 대법원장에게는 이런 제한을 두지 않는다. 청와대가 내심 원하는 대로 소장 임기를 6년으로 하면 위헌이 될 소지가 있다. 헌법재판관은 임기가 6년이고 연임할 수 있다. 연임의 경우 6년 임기가 끝난 뒤 연임시킬 수 있지만 중도에 그만두게 하고 연임시키는 방식을 취할 수 없다. 그것이 가능하다면 대통령은 자신이 임명한 모든 헌법재판관을 중도에 사직하게 하고 연임시킴으로써 최대한 임기를 늘리려 할 것이다. 그렇게 하면 6년 임기제는 유명무실해진다. 헌재소장 임기를 따로 6년으로 정할 때도 비슷한 상황이 발생한다. 대통령은 전임 소장이 퇴임할 때 자신이 지명한 헌법재판관 중 한 명을 소장으로 임명해 그 재판관의 임기를 최대한 늘리려 할 것이다. 2006년 노무현 전 대통령이 당시 전효숙 재판관을 중도 사직하게 하고 새로 재판관과 동시에 소장으로 임명하려 했을 때 한 일이다. 당시 정치권은 대통령이 자신이 지명한 재판관의 임기를 늘리려 한 시도로 보고 반발했다. 정종섭의 ‘헌법학 원론’은 이것을 위헌적인 시도라고 적고 있다. 헌재소장 임기가 재판관의 잔여 임기라는 사실은 복잡하게 따질 것도 없이 헌법 조문에 충실하기만 하면 명확하다. 헌재소장은 재판관 중에서 임명하고 소장 임기는 따로 없으니 소장 임기는 재판관 임기가 끝날 때 끝나는 것이다. 박한철 전 소장은 몸소 선례를 남기기도 했다. 선례까지 무시하고 명확히 해달라고 요구하는 측이 억지를 부리고 있다. 굳이 명확히 한다면 잔여 임기라고 하는 수밖에 없다. 청와대에는 변호사 출신 대통령이 있고 법학자 출신 민정수석이 있고 판사 사표를 내고 간 법무비서관이 있다. 그런데도 이런 아마추어적인 문제 제기가 나왔다는 데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더 기가 막힌 것은 김이수 재판관을 소장 후보자로 내세울 때는 소장 임기를 특별히 문제 삼지 않다가 소장 임명이 뜻대로 되지 않자 소장 임기를 들고 나온 이율배반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유남석 광주고법원장을 한 자리 빈 헌법재판관 후보자로 지명하면서, 재판관 9명을 다 채우고 나서야 소장을 임명하겠다고 고집하고 있다. 유 법원장이 재판관이 되고 다시 소장 후보자로 지명된다면 국회는 같은 사람을 상대로 별 시간 차이도 없이 한 번은 재판관으로, 한 번은 소장으로 인사청문을 반복해야 한다. 이것은 국력 낭비다. 그래서 전직 대통령들은 재판관 후보자를 동시에 소장 후보자로 내는 방식을 썼다. 전효숙 건과 비교하면 이런 방식이 얼마나 나이스한지 금방 알 수 있다. 독일에서도 2명의 소장이 재판관 임명과 동시에 임명된 사례가 있다. ‘헌재소장은 재판관 중에서 임명한다’는 조문에 대한 범생이 같은 해석에는 실은 범생이 같지 않은 꼼수가 들어 있다. 헌법재판관은 국회 동의가 필요 없이 임명할 수 있지만 소장은 국회 동의 없이 임명할 수 없다. 문 대통령은 유 법원장을 재판관 겸 소장 후보자로 내세워 국회 임명 동의를 구했다가는 재판관 자리마저도 확보할 수 없을 것 같으니까 일단 국회 동의가 필요 없는 재판관으로 임명해 놓고 보자는 속셈이다. 이런 것이야말로 대통령으로서는 당당하지 못한 태도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미국 작가 돈 윈즐로의 ‘개의 힘’은 멕시코를 중심으로 미국 남부와 콜롬비아에 이르기까지 마약조직의 검은 거래를 파헤친 흥미로운 책이다. 제목은 ‘내 생명을 칼에서 건지시며 내 유일한 것을 개의 힘에서 구하소서’라는 성경 시편 구절에서 따왔다. 영화 ‘블레이드 러너 2049’의 감독 드니 빌뇌브의 전작 ‘시카리오’(살인청부업자)도 모티브는 ‘개의 힘’과 비슷하다. 마약 밀반입과 그를 둘러싼 청부살인을 소재로 미국과 멕시코 국경의 황량하고 살벌한 이미지를 실감나게 보여준다. ▷바로 그 국경에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공약으로 설치를 약속한 장벽의 시제품이 18일 선보였다. 캘리포니아주 샌디에이고 남쪽 국경에 콘크리트와 철근 재질로 세워진 시제품 8개의 높이는 5.5∼9.1m에 이른다. 이만한 크기의 시제품이 장장 3000km에 이르는 국경지대에 세워진다면 그야말로 현대판 ‘만리장성’이 될 것이다. ▷장벽은 본래 외침을 막으려고 만들었다. 고대 로마의 하드리아누스 장벽은 ‘야만족’의 침입을 막기 위해 만들었고, 고대 중국의 만리장성은 ‘오랑캐’의 침입을 막기 위해 만들었다. 야만족이냐 아니냐, 오랑캐냐 아니냐의 기준이 그 장벽의 어느 쪽에 사느냐에 따라 결정됐다. 트럼프는 멕시코를 통한 미국으로의 밀입국이 경제적으로는 가히 외침이라고 할 만한 수준에 이르렀다고 본 것 같다. 실은 게르만족의 이동이나 흉노족의 남하도 군사적인 외침이면서 동시에 경제적인 이주였다.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을 채택했던 미국과 멕시코 두 나라가 NAFTA를 폐기하고 장벽을 세우겠다니 격세지감(隔世之感)이다. 그러나 눈을 돌려 보면 세계에서 가장 강고한 장벽은 한반도를 남북으로 가르는 철책과 지뢰 지대다. 이곳은 독일 베를린장벽이 붕괴된 이후 남아 있는 유일한 철의 장막이다. 11월 트럼프 방한 시 휴전선을 방문한다느니 마느니 말이 많다. 있는 장벽도 허물지 못하면서 마음의 장벽을 더 높이 쌓고 있는 게 우리 현실이다. 얼마나 먼 길을 더 헤매야 사람들은 장벽을 허물 수 있을까.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북한이 남한에 핵을 쏘면 문재인 대통령은 북한을 핵으로 때릴 것인가. 답은 간단하다. 가진 핵이 없으니 때릴 수 없다. 조지 버나드 쇼의 희곡 ‘무기와 인간’에는 초콜릿 군인(chocolate soldier)이 나온다. 그의 총에는 탄창이 없고 초콜릿이 들어 있다. 우리의 초콜릿 군통수권자의 무기고에는 있어야 할 핵이 없다. 문 대통령은 북한을 핵으로 때릴 능력이 없지만 미국이 핵으로 때리려 하면 어떻게 나올까. 쉽게 답할 수 없다. 다만 아직 능력이 안 되는데도 전시작전권을 환수하려는 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한반도에서 한국의 의사와 상관없이 일어날 수 있는 핵전쟁을 막아보겠다는 의지로 읽힌다. 그리고 막지 못하더라도 반대했다는 흔적은 남기고 싶은 것이다. 문 대통령은 북한으로부터 핵 공격을 받을 경우 재래식 무기로는 보복을 할 것인가. 한반도에서 전쟁은 안 된다고 말했지만 그것만은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우리 무기로 안 된다면 미국이 가진 첨단 재래식 무기로라도 대응할 것이다. 그것도 하지 않겠다면 군통수권자도 뭐도 아니다. 이 지점에 이르면 문 대통령이 가진 생각의 모순이 드러난다. 그는 핵 공격에 재래식 무기로 대응이 가능하다는 환상을 갖고 있는 듯하다. 미국에서 첨단 무기 수입 운운하는 것이 그런 뜻이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그것은 소총으로 기관총과 대결하고, 기관총으로 탱크와 대결하고, 탱크로 전투기와 대결하겠다는 것만큼 어리석은 생각이라고 하겠다. 미국의 북한 전문매체 ‘38노스’의 시뮬레이션에 따르면 북한이 서울을 향해 250kt 위력의 핵 도발을 감행할 경우 단 한 발로 약 78만 명의 사망자와 277만 명의 부상자가 발생한다. 북한 6차 핵실험의 위력을 TNT 폭약 108∼250kt으로 추정하고 북한이 향후 최대치인 250kt까지 끌어올릴 수 있다는 가정하에 진행된 시뮬레이션이다. 반면 러시아가 시리아에서 시험 삼아 몰래 사용해봤다는 ‘모든 폭탄의 아버지(FOAB)’는 미국이 4월 아프가니스탄에 투하한 ‘모든 폭탄의 어머니(MOAB)’보다 더 위력적이라는데도 TNT 폭약 44t의 위력을 갖고 있을 뿐이다. 핵무기와는 대결이 되지 않는다. 핵무기는 히로시마 나가사키 투하 때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절대 무기다. 문 대통령이 한반도를 핵 전장으로 만든 대통령이 되기는 싫고, 핵을 재래식 무기로 대응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는 걸 자신도 느끼고는 있으니까 매달리는 것이 김정은 참수작전이다. 영리한 토끼는 은신처로 세 개의 굴을 판다. 김정은이 참수작전에 당할 만큼 어리석었다면 지금과 같은 위기를 몰고 오지도 못했다. 현실은 북한이 핵을 쏜다면 우리도 핵을 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세계도 역사도 비웃을 한민족의 비극이 되겠지만 유감스럽게도 이런 비극을 감수할 각오가 없으면 김정은의 핵 사용을 막을 수 없다. 진보 보수정권을 막론하고 대통령들의 어리석음으로 북한의 핵 보유를 막지는 못했지만 핵 사용만은 기필코 막아야 한다. 김정은의 핵 사용을 막는 길은 ‘핵을 핵으로 억지하는’ 수밖에 없다. 다른 묘수가 있는 것처럼 굴지 말고 제발 정석대로나 했으면 한다. 김형오 전 국회의장은 지난달 한국핵정책학회에 나와 “핵은 보수와 진보의 논리가 아니다. 생존의 문제다. 핵을 스스로 만들든지, 핵을 가진 것과 같은 조건이나 위치를 만들든지, 상대가 핵을 못 갖게 하고 못 쓰게 해야 한다”고 했다. 문 대통령은 셋 중 어느 것 하나에도 확신을 주지 못하고 있다. 그러고 보니 문정인 대통령특보를 잊고 있었다. 그가 다른 생존 방법을 하나 제시하긴 했다. 웬만하면 가능한 한 김정은이 해달라는 대로 해주는 것이다. 그것도 살아가는 방법이기는 하다. 다만 주인으로서 살아가는 방법이 아니라 노예로서 살아가는 방법이라는 점이 다를 뿐이다. 핵을 머리에 이고도 노예가 아니라 주인으로 살아가려면 각별한 각오가 필요하다. 북한을 핵을 가진 강성대국이 아니라 핵만 가진 빈털터리로 만들어 버리겠다는 그런 각오 말이다. 총에 탄창 대신 초콜릿을 넣고 다니는 초콜릿 군인은 평화주의자다. 국제정치학자인 한스 모겐소는 이렇게 말했다. “평화를 만드는 것은 평화적 태도가 아니라 군사적 힘의 균형이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