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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역사박물관장(최병구)은 29일 2023년 서울미래유산 기록 사업의 결과를 묶은 조사보고서 『서울의 인장포』를 발간했다고 밝혔다. 서울미래유산기록 사업은 2020년부터 근현대 시민들의 생활사를 주제별로 정리하는 작업이다. 이번에 발간된 『서울의 인장포』는 네 번째 작업이며 그 전에 발간된 보고서는 ▴낙원떡집 ▴서울의 대장간 ▴서울의 이용원이었다. 서울역사발물관에서 작성한 보도자료와 참고이미지를 바탕으로 하되, 동아일보 데이터베이스에 있는 사진을 추가해 근현대사의 한 단면을 ‘도장 가게’라는 키워드로 살펴보았다. ▶인장포는 말 그대로 인장을 제작하는 가게이다. 지금은 ‘컴퓨터 도장’이라고 불리는 기계 조각 인장이 등장했지만 그 전에는 사람이 직접 수작업으로 깍아서 도장을 만들었었는데 그 작업을 했던 가게에 대한 기록이다. ▶조선시대 한국의 인장은 크게 새보(璽寶), 관인(官印), 사인(私印)으로 구분된다. 개인이 사용하던 인장인 사인(私印)은 서화(書畫)의 낙관(落款)이나 서적의 장서인(藏書印) 정도에 그쳤다.인장이 보편적으로 사용된 것은 일제강점기 이후의 일이다. 조선총독부가 조선에서 일본인의 경제활동을 합법적으로 보호하고, 조선인들의 경제활동을 통제하기 위한 수단으로 1914년에 「인간증명규칙」을 반포하며 강제 도입됐다. 국가차원에서 인감 사용을 강제하면서 인감 도장을 만드는 가게도 성업하게 된 것이다. ▶ 1974년에는 「국가기술자격법」의 시행으로 인장공예기능사(1급· 급·기능사보)자격시험 제도가 도입됐다. 하지만 응시 수요 감소로 인해 2004년에 폐지됐다. 2000년대 들어 컴퓨터 인장 제작과 서명 거래가 일반화되고, 공인인증서 도입 등을 거치며 인장업은 줄곧 사양산업의 길을 걷고 있다. 한편, 2000년대 이후 인장은 문화상품으로서의 가치를 확장하고 있다. ‘탯줄 도장’이나 ‘수제 도장’이라 불리는 캘리그래피 디자인 한글 인장이 대표적이다.▶ 이번 서울역사박물관의 조사 결과, 서울에서 1950년대부터 활동해 온 오래된 인장포 5곳과 인장 명장들이 새삼 조명을 받았다. 박인당(博印堂), 거인당(巨印堂), 옥새당(玉璽堂),여원전인방(如原篆印房), 인예랑(印藝廊) 등 5곳이다. ▶보고서는 서울 인장포의 특성으로 첫째, 도시화 과정에서 손재주 있는 지방 사람이 서울에 정착하면서 택한 업종 중에 하나라고 밝히고 있다. 6.25 전쟁이 끝나고 생계 수단을 잃은 수많은 사람들이 일자리를 찾아 서울로 모였는데 이 중 손재주가 있는 사람이 ‘사장님’이 될 수 있는 가장 쉬운 업종이 인장업이었던 것이다. 책상만 있으면 창업할 수 있는 업종이기 때문이다. 이번에 조사한 서울의 인상포 5곳 모두 1950년대 이후 상경한 지망민이 운영한다는 공통점이 있는데 이들은 모두 어려서부터 한자를 공부했고 손재주를 무기로 서울에 가게를 차릴 수 있었다. “서울에서 인장포 하는 사람들은 5·16 이후에 다 지방에서 온 거예요. 그때부터 서울에 회사가 많이 생기고 일이 많았으니까요. 반도호텔 근방이 다 회사였어요. 옛날에는 관공서에서 문서를 처리하는 데 사용하는 인장이 300~400종에 달했어요. 그래서 기술을 가진 사람들이 좋았죠. 인장을 다 손으로 새길 때니까 인쇄 기술자보다 인장 기술자가 훨씬 벌이가 좋았어요.” 유태흥(남, 1941년생, 거인당) 인터뷰.▶서울 인장포의 두 번째 특성으로는 유사 업종과 공간을 공유한다는 점이다. 서울의 높은 임대료를 감당하며 내 점포를 마련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인장포는 다른 업종과 공간을 공유하는 방식을 적극적으로 활용해왔다. 인장 작업에는 넓은 공간이 필요하지 않기 때문에 가능했는 데 인장업에서는 이를 ‘겹살이’라 부른다. 특히 유사 업종인 인쇄소, 문구점 등의 한쪽 공간을 이용해 영업하는 경우가 많았다. 도심에 있는 대형 문구점이나 창신동과 인현동의 인쇄소에는 ‘인장부’가 있었다.“1964년에 을지로5가에 있는 인쇄 가게 문 앞에 책상 하나 빌려서 독립을 했어요.”박호영(남, 1938년생, 박인당) 인터뷰“가게에 책상 하나씩 빌려주고 자릿세를 받았어요. 우리 집에 많을 때는 조각사가한 5~6명 있었어요. 그래서 1970년대부터는 도장은 안 새기고 그냥 세 받으면서재료만 취급했죠.“ 박순옥(남, 1930년생, 영광인재사) 인터뷰▶서울 인장포의 세 번째 특징은 도시 발전에 따라 부침을 겪었다는 점이다. 서울은 196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30년 동안 압축성장을 했다. 1970년대 강남개발이 본격화하기 이전 서울의 주요 시설과 기업체는 사대문 안쪽 지역에 밀집했다.당연히 그 시기 서울의 인장포는 대표적인 상점가인 종로와 충무로 일대에 자리했다. 이후구로공단, 여의도 개발 등 굵직한 도시 개발을 쫓아 인장포도 이동해 영업을 이어갔다.“내가 인장 배우면서 처음 했던 곳은 다동 58번지였어요. 거기서 선생님하고 같이 일하다가 그 옆으로 옮기고, 또 옮기고 그랬죠. 또 구로공단 한일은행 바로 옆에 있다가 군대 갔다 와서 1977년에 대일사를 개업했어요. 거기서 2년 있다가 여의도 국민은행 본점이 있는 중앙빌딩으로 옮겼죠. 1980년에 여의도 처음 갔을 때만 해도 풀밭이었어요.” 조규호(남, 1957년생, 한국인장협회 회장) 인터뷰 1960년대 후반부터 서울에서는 현대식 고층 건물과 넓은 도로를 건설하고,주차장과 공원을 만들어 도심을 현대화·고도화하는 ‘도심재개발’ 사업이 전개됐다.이에 따라 도심의 저층 고밀 건물의 상가를 임차한 인장포들은 도심재개발과 함께잦은 이전을 하며 부침을 겪었다.“지금 영풍문고 짓기 전에 그 앞에 가게들이 쭉 있었어요. 그중 하나를 보증금 50만 원에 얻었어요. 공간은 한 평도 안 됐어요. 손님 하나 들어오면 꽉 차는 가게였어요. 그렇게 1년 반쯤 했는데 빌딩 짓는다고 가게를 비워달라고 하더라고요. 보증금 50만 원에 위로비 150만 원을 받아서 구몬빌딩에 480만 원짜리 가게를 얻었어요. 거기서 한 10년 했죠. 그런데 또 빌딩 짓는다고 비워달라는 거예요.” 박호영(남, 1938년생, 박인당) 인터뷰▶ 서울역사박물관 최병구 관장은 “인장은 우리나라와 일본, 대만 등 동아시아 일부 국가의 특수한 문화임에도 불구하고, 독창성과 예술성을 지닌 수조각(手彫刻) 인장의 전승 단절이 우려되는 상황이다. 이번 조사를 통해 인장 세공 기술과 도구를 현장 조사 방식으로 생생하게 기록해냈다는 점에서 앞으로 귀중한 자료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라고 전했다. 『 서 울 의 인 장 포 』 조 사 보 고 서 는 서 울 역 사 박 물 관 누 리 집(http://museum.seoul.go.kr)에서 열람할 수 있다. 구입은 서울책방(https://store.seoul.go.kr) 또는 서울역사박물관 내 기념품점에서 가능하다. (가격 14,000원, 문의 02-739-7033).변영욱 기자 cut@donga.com}

25일 서울 영등포구 신길5동 주민센터에서 폐종이팩을 반납한 주민이 두루마리 화장지를 받아 가고 있다. 영등포구는 재활용 활성화를 위해 폐건전지 20개를 모아 오면 새 건전지 2개로, 우유팩 등을 헹궈서 건조해 가져오면 3kg당 두루마리 화장지 1개로 교환해주는 사업을 한다고 밝혔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100년 전 신문에 실린 사진을 통해 오늘을 생각해보는 [백년사진]입니다. 오늘은 두 장의 인물 사진을 준비했습니다. 우선 여성 두 명이 카메라를 향해 환하게 웃고 있는 사진입니다. 제목은 ‘사회봉사하는 두 여자’입니다.기사를 읽어보니 유아사망율이 높은 조선의 상황을 걱정해 미국 감리교가 파견한 미국인 여의사 ‘로선복’(왼쪽)씨와 조선인 산파 ‘한신광’씨가 무료 진료 봉사를 이어가고 있다는 스토리입니다.다음 사진을 보겠습니다. 콧수염의 백인 남성이 카메라를 응시하며 입을 굳게 다물고 있습니다. 제목을 보니 ‘영국 내각 조직의 대명을 수락한 노동당 수령 맥도날드씨’입니다. 영국 런던 발 기사인데, 로동당 총재 람제 맥도날드씨가 차기 영국 내각의 수장이 되었다는 뉴스입니다. ▶우선, 사진 속 모델들이 모두 정면을 바라보고 있지만 느낌이 완전히 다릅니다. 한 장은 봉사의 따뜻한 온도가 전달되는 반면, 남성의 사진은 지난주 한반도를 강타했던 한파만큼 서늘한 느낌을 줍니다. 당시 카메라 기술로도 충분히 웃는 모습을 촬영할 수 있었지만 차가운 표정으로 포즈를 취했었네요. 저 남성이 카메라를 보고 웃고 있었으면 어땠을까요? 좀 따뜻했을까요?▶100년이 지난 요즈음 출근하는 지하철역에는 4월에 치러지는 국회의원 선거에 나갈 예비후보들이 명함을 들고 시민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빠듯한 출근 시간이라 일단 명함을 건성으로 받은 후 지하철 플랫폼에서 열차를 기다리며 들여다보게 됩니다. 후보자들 시선의 방향이 어떤가요? 여러분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나요? 아니면 허공이나 먼 곳을 바라보고 있나요? ▶정면을 바라보는 사진은 강한 감정을 전달합니다. 웃음도 차가운 표정도 모두 정면일 경우 강하게 뇌리에 남습니다. 몇 년 전 시리아 폭격으로 상처를 입었던 어린아이가 앰블란스 의자에 앉아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정면을 보고 있는 사진이 지구인들의 마음을 아프게 했습니다. 아프리카 구호 단체의 포스터에 등장하는 어린아이들도 우리의 눈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나를 잊지 말아요”입니다. 국회의원에 나오려는 후보들은 거의 정면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신인일수록 더 그렇습니다. 감정을 건드리는 정면 샷은 때로는 보는 사람을 거북하게 하기도 합니다. 특히 광고에서 시선을 끌기 때문에 효과가 있다는 ‘3B’(Beauty, Baby, Beast – 미인, 아기, 애완동물)가 아닐 경우 보는 사람이 불편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신문에 실리는 인물 사진 중에서 정면을 바로 보는 사진은 할 얘기가 분명한 인터뷰 대상자이거나 본인이 만든 제품을 광고하거나 자랑거리가 있는 사람들 모습입니다. 정치인이나 권력자가 정면을 바라보는 것은, 처음 인사를 하러 세상에 나왔거나 아니면 권위를 강조하기 위한 장치라고 볼 수 있을 겁니다. 잘 생각해보시면 낯설고 나이 많은 남성이 우리를 바라본다면 때로는 위협을 느끼기도 할 겁니다. 그래서 다선 의원이나 인지도가 높은 인물들의 경우, 명함이나 포스터 속에서 이상향을 바라보듯이 시선 처리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때는 카메라 밖을 바라봅니다. ▶꼭 정면을 보는 사진을 명함이나 포스터에 사용해야 할 경우 혹은, 그리고 본인이 3B의 요소가 주는 매력과 멀다고 느낄 경우 어떻게 해야할까요? 최소한 2024년 대한민국에서는 웃어야 할 것 같습니다. 100년 전 영국 노동당 당수 같은 무표정한 표정은 선거 필패의 요소가 되기 십상이니까요. 아무래도 지금은 유권자 우세 시장 아니겠습니까?▶지금부터 말씀드리는 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노련한 정치인들은 신문에 실리는 사진이 찍힐 때도 시선 처리를 잘합니다. 얼굴은 정면이지만 묘하게 눈은 독자를 정면으로 바라보지 않습니다. 잘 보면, 카메라를 응시하는 시선이 아닙니다. 어쩌다 카메라를 본다고 하더라도 정면에 있는 사회자를 보거나 누군가와 소통하는 시선이지 카메라 기자들을 향해 포즈를 취하는 시선이 아닌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물론, 정면을 응시하는 사진은 보는 사람에게 ‘나는 숨기는 게 없다, 정직한 사람이다’라는 메시지를 준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1960년도 미국 대통령 토론회에서 케네디는 닉슨에 비해 카메라를 직접적으로 응시하는 시간이 훨씬 길었고 젊은 외모와 함께 시청자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줌으로써 승리했다는 고전적 증거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론과 실제는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시대도 다르고 문화 배경이 다르다면 더욱 그럴 수 있습니다. 지난주 한동훈 국민의힘 비대위원장과 김경율 비대위원 사진을 보면서 저는 어색함을 느꼈습니다. 당시 사진에 붙은 설명은 이랬습니다.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이 17일 오전 서울 마포구 케이터틀에서 열린 국민의힘 서울시당 신년인사회에서 김경율 비대위원과 함께 주먹을 쥐고 있다”. 팔을 든 채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두 명의 중년 남성들. 두 사람의 시선은 뭔가를 강하게 말하고 있을 때의 시선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늘을 향한 두 팔은 전당대회에서 당대표로 선출되었을 때처럼 승리의 순간에 어울립니다. 일반적인 행사 사진과는 거리가 있어 좀 더 로우키(low key)로 설정했으면 어땠을까 하고 생각했습니다. ▶오늘은 100년 전 신문에서 독자를 바라보던 세 사람의 시선을 주제로 지금의 정치 사진을 잠깐 살펴보았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신지요? 댓글로 의견을 확인하고 싶습니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전국적으로 동장군이 맹위를 떨치는 가운데 24일 오후 부산 동래구 복천동 고분군 산책로에 매화가 피어 있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요 며칠 한파 덕에 ‘눈고양이’가 장수하고 있네요. 오늘부터 추위가 누그러진다는데, 내일 또 볼 수 있을까요? ―서울 성동구 한양대 앞에서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22일 오전 서울 중구의 전통문화 복합공간인 ‘한국의 집’에서 KGC인삼공사 정관장 모델들이 ‘힘내라는 말 대신 정관장’ 행사를 알리기 위한 퍼포먼스를 펼치고 있다. 정관장은 28일까지 구매 금액대별로 ‘에브리타임 필름’ ‘청과세트’ ‘장수율지’ ‘한우세트’ 등을 제공하는 이벤트를 진행한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횡단보도 옆 전봇대에 주인 잃은 동전 지갑이 걸려 있습니다. 신호등이 여러 번 바뀌는데도 주인은 오질 않네요.―서울 성동구 성수동에서변영욱 기자 cut@donga.com}

▶100년 전 신문에 실린 사진을 통해 오늘을 생각해보는 [백년사진]입니다. 1924년 1월 20일자 동아일보 지면에 실린 사진을 소개합니다. 거북 모양의 받침돌 위에 비석이 크게 서 있고 그 뒤로 누각이 보입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풍경입니다. 서울 종로에 있는 탑골 공원입니다. ▶ 100년 전 서울에 눈이 내리자 사진기자가 탑골 공원에 가서 사진을 찍어 온 모양입니다. 관련된 기사는 별도로 없습니다. 가볍게 찍은 스케치 사진인가 봅니다. 설명은 아주 간결합니다.◇ 오랜만에 보는 설경- 어제 탑골공원에서▶100년 전이나 지금이나 사진기자들은 눈이 내리면 주변 풍경 좋은 곳을 찾아가 사진을 찍습니다. 어차피 그 시대를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펑펑 내리는 눈을 보았을 텐데 굳이 사진을 찍어 지면에 게재합니다. 혹시 못 본 독자들을 위한 배려일까요? 아니면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진 시간을 기록하고 누군가와 나누고 싶은 마음 때문일까요? 사진기자들이 눈 스케치를 가는 장소는 다양합니다. 첫눈이 내리는 날은 대체로 회사 근처에서 사진을 찍습니다. 아주 잠깐 내리다 말 가능성이 높으니까요. 강원도에 폭설이 내린다는 예보가 있으면 미리 자작나무 숲이나 대관령을 찾아가 기다립니다. 봄을 앞두고 눈이 내린다면 동백꽃이 피어 있는 곳을 찾아보기도 합니다.▶저도 얼마 전 눈이 내린 다음 날 서울 남산에 다녀왔습니다. 정작 눈이 내리는 시간에는 사진이 별로 아름답지 않습니다. 그래서 비교적 큰 눈이 서울에 내리더라도 풍경 사진은 눈이 완전히 그친 후에 제대로 찍을 수 있습니다. 남산 순환로와 서울 타워를 오르내리며 풍경을 카메라에 담았습니다. 왜 남산을 택했을까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서울의 상징 같은 곳이기 때문일 겁니다. 그리고 우거진 나무 숲 사이로 길이 나 있어 설경을 즐기는 시민들도 같이 사진에 담을 수 있습니다. 사람이 없는 풍경은 쓸쓸해 보이고 리얼리티도 떨어지기 때문에 인적이 있을 만한 곳을 선택합니다. 경복궁이나 덕수궁도 설경 스케치에 잘 어울리는데 그런 곳들 역시 고풍스런 건물들이 많기도 하고 관람객도 사진에 포함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평화롭고 고즈넉한 눈풍경에 어울리는 곳이 고궁이나 공원이라면, 폭설로 서울 시민들에게 불편이 초래된다면 강변북로 출근길이나 강남대로 퇴근길이 사진의 소재가 됩니다. 엉금엉금 눈을 뚫고 출퇴근해야 하는 하루가 그날의 뉴스 포인트이기 때문일 겁니다. 물론 사진의 촬영 장소는 유행이 있습니다. 지금은 당연하게 신문과 방송 카메라가 자주 비추는 곳이 예전에는 그다지 자주 다뤄지지 않던 장소일 수도 있고, 반대로 예전에는 자주 등장했던 장소가 지금은 뜸한 경우도 있습니다. 제가 사진기자를 처음 시작했던 1990년대 말. 추운 날씨에 출근하는 시민들의 표정을 스케치하기 위해서 사진기자들이 모였던 곳은 서울 지하철 1호선 대방역에서 여의도로 넘어가는 다리였습니다. 그 촬영 포인트가 지금은 서울 광화문 사거리로 바뀌었습니다. 특별히 이유가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다만, 여의교를 걸어서 출근하는 시민이 급격히 줄어 ‘그림이 안되는’ 풍경으로 바뀌었기 때문에 사진기자들이 새로운 로케이션을 찾았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 100년 전 탑골 공원 설경 사진은 여러분이 보시기에 너무나 평범한 사진일 겁니다. 제가 봐도 그렇습니다. 지금 기준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수준이지만 당시에는 뭔가 이유가 있었을 겁니다. 우선 시간적인 촉박함이 이유가 아닐까 싶습니다. 신문 편집을 총괄하는 부장이, 너무 답답하고 속 터지는 뉴스만 가득한 사회면에, 가슴이 시원한 사진이라도 한 장 넣자고 갑자기 결정했던 것은 아닐까요? 갑자기 취재 지시를 받은 사진기자가 마감시간에 임박해 촬영했던 것은 아닐까요? 두 번째 이유로 상상할 만한 점은, 지금이야 탑골 공원이 노인들의 휴식처 또는 노인 문제의 상징처럼 인식되지만 100년 전 신문을 만들던 사람들 입장에서는 특별한 장소였을 수도 있었을 겁니다. 탑골 공원은 고려시대에는 흥복사라는 절이, 조선왕조 때에는 세조가 건립한 원각사가 있던 곳을 1897년에 대한제국 최초의 근대공원으로 조성한 곳입니다. 많은 문화공연행사와 집회 장소로 활용되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서울의 중심, 근대화의 가능성 그런 느낌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게다가 사진이 찍히기 5년 남짓 전인 1919년 3월 1일. 이곳 탑골 공원에서 한 남성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뒤, 5천명의 시민들과 학생들이 독립을 외쳤었다고 합니다. 3.1만세운동의 발상지인 것입니다. 단순한 설경이 아니라 시대와 역사의 정체성 아니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 서울에 갑자기 눈이 내린 17일 오후에 100년 전 저 사진 속 탑골 공원에 가봤습니다. 귀부 위의 비석과 누각이 그대로 보입니다. 신기했습니다. 다만 비석 주변에 누각이 하나 더 생겨 사진으로는 같은 모양은 아니었습니다. ▶문득, 한국 전쟁의 포화를 잘 견뎌내 준 문화재와 그 옆 아름드리나무들이 고맙게 느껴졌습니다. 다행히 탑골 공원은 하늘에서 쏟아졌던 전쟁의 포탄에서 벗어났었나 봅니다.탑골 공원이라는 이름이 그 때나 지금이나 똑같다는 것도 신기했습니다. 원래 파고다 공원을 1990년대에 탑골 공원으로 이름을 바꿨다는 상식과는 좀 다른 자료입니다.오늘은 100년 전 서울의 상징 중 한 곳이었던 탑골 공원의 설경 사진을 살펴보았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신지 댓글에서 확인하고 싶습니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17일 오후 서울 지역에 함박눈이 내리고 있는 가운데 종로구 탑골공원 인근에서 무료 급식을 받으려는 노인들이 줄을 서고 있다. 이날 경기 포천시와 강원 철원군, 화천군에는 대설주의보가 내려졌다. 기상청은 강원 영동 지역에 18일 오후부터 19일까지 최고 15cm 이상 눈이 내릴 것으로 예보했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15일 서울 영등포구 당산공원 공영주차장의 전기차 충전소 앞에서 영등포구 관계자가 이곳에 비치된 소화기를 들어 보였다. 영등포구는 전기차 충전시설 26곳에 소화기 48대를 배치해 신속하게 차량 화재에 대응하겠다고 밝혔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용의 해가 시작되었습니다. 100년 전 신문에 실린 사진을 통해 오늘의 사진을 생각해보는 [백년사진]입니다. 오늘은 1924년 1월 7일 자에 실린 사진을 골랐습니다. ▶ 사람 키의 3배쯤 되는 긴 사다리 네 개가 나란히 서 있습니다. 그 아래에서 유니폼을 입은 수십 명의 사람들이 지지대를 잡은 채 공중에 매달린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서커스 동작처럼 고난도의 몸동작이 시선을 끕니다. 서울에서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요? 어떤 모습을 촬영한 사진일까요? 사진과 조금 떨어진 지면에 관련 기사가 있었습니다. 옮겨봅니다. 京城消防出初式- 작일 아침 대한문 앞에서년년히 행하는 경성상비소방대(京城常備消防隊) 룡산소방대(龍山消防隊)의 출초식(出初式)은 어제 6일 오전 9시경에 시내 대한문 앞에서 거행하였다. 이미 만들어 놓은 조그마한 집에 불을 질렀는데 마침 불어오는 서북풍에 형세를 맞춰 염염히 타오르는 형세는 과연 큰 화재나 난 듯이 굉장하였으며 그와 동시에 소방대원들이 “뽐뿌”를 들이대고 진화하는 광경은 그야말로 참 굉장하였다. 대한문 넓은 마당에는 구경꾼이 산 같이 모여 매우 복잡을 이루었고, 기타 경기도 경찰부를 위시하여 시내 각 경찰서장과 관계 인사가 다수히 내참하였으며 9시 반에 출초식을 마친 후 경기도 마야경찰부장(馬野警察部長)과 경기도 좌등내무부장(佐藤內務部長)의 훈시가 있었더라. 동아일보 1924년 1월 7일자▶ 기사를 보니 새해를 맞아 소방대원들이 훈련을 하는 모습입니다. 덕수궁 대한문 앞은 그 때나 지금이나 시민들을 대상으로 한 행사들이 진행된 핫플레이스였군요. 출초식이라는 생소한 이름의 행사인데 처음 나선다는 뜻인가 봅니다. 동아일보 내부의 기사화상 검색망에 들어가 ‘출초식’이라는 키워드로 검색하니 1920~30년대에 관련 기사가 꽤 많이 있었습니다. 1940년이 마지막으로 검색되는 거로 봐선 그때까지만 쓰였던 용어 같습니다. 지금도 소방 관계자분들께서 이 용어를 쓰는지 궁금합니다. ▶가상의 주택을 만들고 거기에 불을 붙인 후 소방대원들이 평소 갈고 닦은 소방 실력을 고위 공직자들과 시민들 앞에서 시연하는 행사입니다. 사진 속 사다리는 지금의 사다리에 비하면 그리 높은 편은 아닙니다만 당시 대부분의 건물이 1층짜리였다는 걸 고려한다면 불을 끄는 데는 그나마 적절한 높이였을 겁니다. 받침대가 있는 사다리에 올라가 화재 현장을 향해 호스를 대는 소방수와 그 아래에서 물을 공급하는 펌프(뽐뿌)를 운용하는 소방수가 팀을 이루는 방식이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1920년대에는 목조 건물과 초가집 등이 화재사고의 대부분이고 시민들의 삶과 직접 연결된 것이었습니다. 당시 신문에는 겨울철마다 서울 시내 화재 사고 현장에 대한 보도가 꽤 많습니다. 목조 건물이다보니 한 채가 타면 그 옆으로 불이 삽시간에 번져서 피해가 컸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만큼 소방대원들에 대한 시민들의 기대가 컸을 겁니다. 새해 벽두에 시내 한가운데 가상의 화재 현장을 만들고 불을 끄는 훈련을 했던 이유일 겁니다. ▶요즘 이뤄지는 소방훈련을 잠깐 떠올려 봅니다. 사다리도 금속 재질에다 높이도 아주 높아졌습니다. ‘뽐뿌’의 성능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강력해졌구요. 무엇보다 달라진 것은 가상의 화재 현장 모습입니다. 2008년 남대문이 방화범에 의해 불탄 후 고궁 등 문화재에서 가상의 화재가 발생한 상황을 가정해 훈련을 하기도 하고, 일본 지진이 발생한 후에는 지진대피 훈련을 합니다. 게다가 롯데타워 등 초고층 빌딩이 곳곳에 들어서면서 시민들의 걱정이 생기자 요즘에는 고층 건물 화재 대피 훈련 등을 합니다. 그러고 보니 소방훈련도 시대에 맞게 연출되어 왔습니다. 그걸 찍은 사진도 시대별로 다른 모습으로 남아 있구요. 당연한 얘기지만 사진을 찍는 입장에서는 아주 흥미롭습니다. ▶사진의 구도 자체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하겠습니다. 지금도 사진기자들이 선호하는 구도입니다. 사선(射線)구도인데요, 일렬로 서 있는 사다리들이 겹쳐 보이도록 측면에서 촬영했습니다. 만약 나란히 서 있는 사다리들을 정면에서 보면서 사진을 촬영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사다리의 형태는 더 잘 보일 수 있겠지만 문제는 사진을 크게 써야지만 제대로 보이게 될겁니다. 측면에서 사진을 찍으면 좁은 지면에 많은 피사체와 내용을 포함시킬 수 있는 장점이 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인터넷으로 신문을 보는 것이 일반화되지 않았던 2000년대 이전까지 신문 사진에서 정말 선호되고 거의 정답처럼 인식되었던 구도가 사선 구도였습니다. 인터넷은 지면의 제약이 없다 보니 ‘평평한’ 사진도 새로운 시각을 독자에게 제공한다는 차원에서 많이 시도되고 있습니다. ▶오늘은 새해를 맞아 한 해의 화재 사고를 대비하던 100년 전 우리 사회의 모습을 살펴보았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신지 댓글에서 확인하고 싶습니다.변영욱 기자 cut@donga.com}

스타벅스코리아가 9일 오전 서울 종로타워에 있는 스타벅스 종로R점에서 청년 취업 활성화를 위한 커뮤니티 스토어 8호점을 열었다. 스타벅스 손정현 대표이사(가운데)가 참석해 청년 취업 활성화 활동을 위한 업무 협약식과 기금 전달식을 가졌다. 스타벅스는 커뮤니티 스토어 8호점에서 판매되는 상품 한 개당 300원씩 적립해 연간 1억 원의 청년 취업 활성화 기금을 조성할 계획이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산책로에 누가 신용카드를 떨어뜨렸나 봅니다. 습득한 사람이 잘 찾아가라고 전등 아래에 예쁘게 꽂아 놨네요. ―서울 종로구 청계천에서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까치 한 마리가 문 위에 앉아 행인들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기다리는 사람이라도 있는 걸까요. ―서울 종로구 사간동에서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소비·유통 환경이 급변하면서 비대면·디지털 기술 도입을 서두르는 소상공인이 늘어나고 있다. 중소벤처기업부(장관 이영)와 소상공인시장진흥공단(이사장 박성효)은 2020년부터 소상공인 사업장에 스마트기술 도입을 지원하고 점포 경영과 서비스를 혁신해 경쟁력을 높이는 데 집중하고 있다.스마트상점 기술보급사업은 소상공인에게 서빙로봇, 조리로봇, 테이블오더, 키오스크, 사이니지, 경영관리 프로그램 등 스마트기술 도입 비용을 지원하는 사업이다. 디지털 전환의 필요성은 절감하지만 많게는 1000만 원이 넘는 투자비용에 부담을 느끼는 소상공인에게는 반가운 지원제도다. 경영·서비스 혁신을 위해 핵심 스마트기술 1개 이상 도입을 지원(최대 500만 원)하는 △일반형과 협동로봇 1개 이상을 지원(최대 1500만 원)하는 △미래형, 기술패키지를 지원(최대 1250만 원)하는 △상생형, 오프라인 경험요소와 스마트 기기 도입을 지원(최대 2000만 원)하는 △경험형으로 나누어 지원한다. 중기부와 소진공은 스마트기술 이용률을 높이기 위해 ‘스마트기술 피칭대회’를 개최해 사업장에 접목 가능한 기술을 발굴하고, 소상공인 점포 맞춤형 일대일 기술선택 전문 컨설팅을 추진하여 스마트 기술에 대한 문턱을 낮췄다. 또 간이과세자, 1인 사업장, 장애인 등 영세한 취약계층의 자부담률을 기존 30%에서 20%로 완화하고, 사업 전용 제휴카드를 도입해 기존 일시 납부를 12개월 무이자 할부로 결제할 수 있도록 하여 소상공인의 비용 부담을 경감했다. 민간기업과 소상공인 간 상생으로 스마트상점을 구축한 것도 눈에 띄는 성과다. 지난 3일과 4일 고양시 킨텍스에서 개최된 ‘2023년 대한민국 소상공인대회’에서는 우수 소상공인 포상, 박람회, 기능경진대회 등의 행사와 함께 정책홍보관, 판매관, 체험존 등의 부스를 운영했다.‘스마트상점 모델숍’으로 운영한 체험관에서는 치킨로봇, 바리스타로봇 등 12종의 스마트 기술을 직접 체험해 볼 수 있었다. 스마트상점 솔루션 기업인 넥스트페이먼츠의 돈가스 로봇은 자동화된 요리 전 과정을 보여줬고 완성된 돈가스를 시식할 수 있어 행사 기간 동안 관람객의 큰 사랑을 받았다.스마트상점 기술 기업인 웹플래너의 푸드3D프린터는 약 1000가지 디자인이 내장된 초콜릿 제작 기술력을 선보여 부모와 함께 방문한 어린이들이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다양한 헤어스타일링을 체험해볼 수 있는 이색적인 거울도 볼 수 있었다. 두피 상태를 정밀 분석해 맞춤형 시술을 제안하고 미용 실습을 할 수 있는 기능도 더해져 1인 미용실을 운영하는 소상공인의 관심을 받았다.변영욱 기자 cut@donga.com}

부쩍 쌀쌀해진 날씨. 돌담 사이에 꿋꿋이 홀로 핀 노란 꽃이 유독 쓸쓸해 보입니다. ―서울 종로구 송현동에서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100년 전 신문에 실린 사진을 통해 오늘의 사진을 생각해보는 [백년사진]입니다. 매주 토요일에 인터넷에 올리기로 스스로 했던 약속을 오늘은 좀 늦게 지키게 됐습니다. 전국의 사진기자들이 모이는 사진기자체육대회에 아침부터 참석하느라 글을 제대로 마무리 하지 못해서라는 핑계를 대봅니다. 매년 가을 이맘때면 열리는 사진기자체육대회는 수십 년째 이어지고 있는데 올해는 조금 달라진 풍경이 눈에 확연하게 띄었습니다. 체육대회라고 하면 운동경기가 좀 들어가야 맛인데 종목이 많이 줄었습니다. 특히, 20년 전에는 이 행사의 메인 종목이었던 축구 토너먼트가 없어지니 운동장 가운데가 비어 있었습니다. 운동장 사이드에 있는 배구장과 족구장에서만 경기가 치러졌습니다. 축구 종목을 소화할 신문사의 사진부가 거의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사진기자들의 평균 연령이 높아지면서(신규 인원의 유입이 최근 십 여 년간 현저하게 줄고 있습니다)나타나게 된 변화입니다. 나이 든 사진기자만이 남는 것이 아니냐 하는 자조 섞인 탄식이 몇 년째 있었는데 올해에는 작년과는 다른 또 다른 현상도 한 가지 보였습니다. 2022년과 2023년에 사진기자를 시작한, 서울지역 사진기자들이 약 30명 가까이 있었습니다. 부스를 돌아다니며 동료 사진기자 선배들에게 인사를 건네는 모습이 이색적인 풍경이었습니다. 1988년 서울 올림픽 전후부터 신문사들이 증면을 하고 칼라지면을 만들면서 사진기자에 대한 수요가 급증했었는데 그 때 신문사에 입사했던 사진기자들이 작년과 올해 그리고 내년에 대규모로 정년퇴직하면서 나타난 현상일 겁니다. 아무튼 젊은 사진기자들이 체계적 선발 과정을 거쳐 현장으로 들어온 최근 상황은 고무적이라고 할 만합니다. 다만, 사진기자의 충원이 서울의 신문사와 인터넷 매체에 집중되고 지역의 경우 다운 사이징이 심해지고 있는 것도 같이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 신문사 사진부에 전설처럼 내려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망원렌즈가 없던 시절 스포츠 경기를 어떻게 찍었느냐는 질문에 옛날 선배 중에 한분이 야구 경기를 예로 들며, 심판 옆에 붙어서 도루를 하는 사진을 찍었다는 얘기를 했습니다지금이야 취재진들이 망원렌즈를 갖고 선수들과 최소 10미터 멀리는 100미터 이상 떨어진 곳에서 찍는지도 모르게 찍지만 예전에는 완전히 붙어서 찍었던 것입니다.서설이 길었습니다. 오늘 여러분과 공유하고 싶은 100년 전 사진은 높이뛰기 장면입니다.여기 전설 속에나 나올 법한 앵글의 사진이 한 장 있습니다. 높이 뛰기 하는 선수의 모습을 바로 옆에서 촬영한 사진입니다. 1923년 10월 29일자 동아일보 지면에 실린 사진입니다.▶그런데 묘한 느낌이 듭니다. 바로 현장감이죠. 눈앞에서 보고 있다는 느낌이 전달됩니다. 아마 지금 고해상도 카메라로 저 앵글의 사진을 찍는다면 바를 넘는 선수의 긴장되고 애쓰는 모습이 고스란히 담겼을 겁니다. 사진을 보는 사람은 무의식적으로, 사진이 어떤 조건에서 촬영된 사진인지 이해합니다. 바로 옆에서 작은 렌즈로 찍은 사진인지 멀리서 망원렌즈로 찍은 사진인지를 말입니다. 짧은 렌즈로 찍은 사진은 현장감을 주고 친밀감을 줍니다. 망원렌즈로 찍은 사진은 친밀하지는 않지만 객관적인 시선이거나 훔쳐보기라는 느낌을 줍니다. ▶현장감을 주기 위해 모든 카메라 기자들은 피사체 옆에서 사진을 찍고 싶어할겁니다. 하지만, 매체가 많아진 요즘 그렇게 하다가는 아마 뉴스 인물들이 카메라에 얼굴을 다칠 수도 있고 스포츠 선수들은 경기에 집중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사진기자들은 현장에서 서 있을 수 있는 위치가 지정되고, 피사체에 대한 근접 촬영은 불허되거나 아니면 극소수의 인원에게만 허용됩니다. 가령 스포츠 경기의 경우, ‘오피셜 포토그래퍼’가 근접 찰영을 하게 됩니다. ▶정치 현장, 특히 대통령의 행사 취재에서도 ‘오피셜’은 근접 촬영의 ‘특권(?)’을 갖습니다. 얼마 전 박근혜 대통령과 윤석열 대통령이 박정희 대통령 추모식에서 만났습니다. 그런데 신문에 실린 사진들의 출처를 보면 거의 대부분이 대통령실 제공이었습니다. 사진기자가 찍은 사진이라면 홍길동 기자 또는 대통령실사진기자단이라고 표시되어 있었을 겁니다. 일종의 제공사진이 신문들 1면에 실린 것입니다. 가까이서 찍은 사진은 액션이 강해서 사진이 강렬한 느낌을 줍니다. 대통령 전속이 가까이서 찍는 사진과 출입기자들이 멀리서 망원렌즈로 촬영하는 사진의 느낌은 다를 때가 많습니다. ▶아무래도 전속에 비해 사진기자들은 피사체인 대통령을 해석하려고 합니다.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거나, 피사체가 좋아하는 앵글보다는 뉴스에 적합하고 독자들의 시선을 끌만한 순간을 포착하려고 합니다. 아무도 해석하지 않고 피사체의 마음에만 들면 되는 사진은 보도사진이라고 하기 어렵습니다. 권위주의 국가에서는 최고 지도자의 주변에 사진가를 최소화해서 배치합니다. 사진은 군더더기 없이 정갈하고 표정은 적절하게 포착됩니다만 사진의 소스가 하나인 현장에서 나오는 사진은 뭔가 부족해보입니다. 세련되지 않고 시대에 맞지 않은 느낌 같은 거 말입니다. 변화가 없기 때문이고 틀에 박혀 있기 때문입니다. 결혼식 사진을 생각해보시죠.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결혼의식에 관련된 당사자와 사랑하는 사람들을 제외하곤 감동을 주지 않습니다. 가족끼리는 공유하지만 남들은 관심주지 않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사진만 나올 수 있게 통제하는 것으로는 좋은 사진이 나오기 어렵다는 점입니다. ▶오늘은 사진기자와 피사체의 거리에 대한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신지요?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100년 전 신문에 실린 사진을 통해 오늘의 사진을 생각해보는 [백년사진]입니다. 이번 주 선택한 사진은 1923년 10월 26일자 동아일보 지면에 실린 사진입니다. 멋진 단독 주택 앞에 누군가 구두 한 켤레를 들고 있는 사진입니다. 카메라로부터 떨어진 거리가 같은데 포커스가 둘 다 정확하게 맞아있다는 점에서 실제 찍은 사진이 아닌 합성 사진 또는 그래픽 이미지로 판단됩니다. 내용을 한번 읽어보겠습니다.폭락 또 폭락되는 독일 마르크의 시세독일 돈은 연일 자꾸 떨어져서 25일에 포착된 백림전보에는 영국 돈 한 파운드에 (일본 돈 약 십원) 대하여 독일 돈 사천억 마크의 시세를 보였다고 한다. 속담에 호왈백만이라더니 독일 마크야 말로 백만쯤은 당초에 돈값에도 가지 못하는 참혹한 형편이다. 이 사진은 전쟁 전의 물가와 전쟁 후 ‘마크’ 시세가 폭락된 후의 물가를 비교한 그림이니 즉 지금 구쓰 한켜레 사는 돈을 가지면 전쟁 전에 이런 양옥 한 채를 살 수 있었다는 말이다. 그러나 이러한 비교도 이제는 벌써 옛 이야기가 되었다. 지금은 구두 한 켤레 값을 가지면 전쟁 전 에는 그러한 양옥을 두서너채나 사고도 남았을 것이다.▶ 1920년대 독일 마르크화의 가치가 폭락한 것을 표현한 사진임을 알 수 있습니다. 1919년 제 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독일은 복구 비용 마련을 위해 돈을 무한대로 인쇄해 뿌리는 통화 공급 정책을 폈습니다. 이로 인해 독일은 엄청난 인플레이션을 경험했는데 특이 1923년의 하이퍼인플레이션은 가장 심각한 사례로 역사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위 사진은 경제 역사책에 나오는 100년 전 상황을 한국 신문에서 어떤 방식으로 표현했는지를 보여주는 사진입니다. 영국 1파운드와 독일 4천억 마르크화가 교환될 정도로 독일 마르크의 가치가 폭락했고, 그 사실을 표현하기 위해 사진이 이용된 것입니다. 전쟁 전 물가가 정상일 때 집 한 채를 살 수 있던 돈이 전쟁 후 구두 한 켤레 밖에 살 수 없게 되었다는 설명을 사진이 하고 있습니다. 지금의 화려한 그래픽 이미지들에 비하면 보잘 것 없다고 할 수도 있지만, 당시로서는 꽤나 특별한 ‘시각물’이 아니었을까요?▶신문사에서 일하는 사진기자와 편집자, 그래픽 디자이너 등은 독자들에게 뉴스와 정보를 빠르고 정확하면서도 효율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시도하고 고민합니다. 뉴스 중에서 제일 시각적으로 표현하기 어려운 분야가 금융이 아닐까 싶습니다. 기름값이 오르고, 아파트 전세거래 금액이 내리고, 증시가 폭등하고, 기준 금리가 동결되는 등 돈과 관련된 뉴스는 매일 신문의 주요 지면에 자리 잡습니다. 우리의 삶은 좌지우지 하는 뉴스이기 때문입니다. 정치와 사회, 문화, 국제뉴스 등의 분야는 표현의 방식이 구체적으로 떠오르지만 경제 중에서 돈과 관련된 뉴스는 사진으로 잘 표현되지 않습니다. 매일 비슷한 모양의 주유소 가격표 사진과, 부동산 중개업소 호가판, 외환 딜링룸 표정 등이 반복되어 지면에 실리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식상한 사진을 피하기 위해 노력하지만, 인류 전체를 통틀어 금융을 매일매일 새로운 방식으로 표현하는 사진가는 아마 없을 것입니다. 미국의 증권거래소 사진도 자세히 보면, 매번 비슷한 딜러의 분주한 모습이 실립니다. 현장이 없고, 그나마 기자들이 접근할 수 있는 공간이 몇 군데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한국 신문에서 경제 뉴스가 주목을 받고, 지면을 크게 할애 받기 시작한 것은 IMF 이후입니다. 종합 일간지의 경우 그 때부터 아예 경제 섹션을 발행해오고 있습니다. 처음 경제 섹션이 만들어진 직후, 신문사에서는 지면에 실을 사진이 없어 아주 곤혹이었습니다. 경제 관료들의 회의 모습과 발표 모습이라도 실었지만 중년의 남성 공무원 사진은 금방 식상하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주식 거래를 하기 위해 명동의 객장을 찾은 투자자들의 모습을 찍기도 했지만, 초상권의 문제가 대두되면서 찍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나마 지금의 금융 현장은, 몇몇 은행과 증권거래소 등에서 지수판과 그래프를 크게 화면에 띄우는 형식으로 만들어 놓아 사진기자들이 ‘뉴스를 시각화’하는데 크게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물가 동향이나 신제품을 출시하는 업체의 홍보 담당자들이 아이디어를 짜내어 사진 연출을 하고 있어 지면이 단조롭지는 않습니다. 다만, 이른바 유통사진이 저널리즘이냐는 질문은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실제로 한국 신문에 실리는 모델과 제품이 함께 등장하는 사진이 보도사진의 교재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유형의 사진이고 다른 나라에서는 지면에 등장하지 않는 형식이기도 합니다. 텍스트만 있는 지면을 독자에게 보일 수는 없고, 경제라는 현상이 시각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제한적이라 불가피하게 발전된 사진 형태인 것이죠. ▶오늘은 100년 전 누군가 아이디어를 내, 독일의 하이퍼인플레이션을 표현한 사진을 보면서 지금의 금융과 경제 관련 사진에 대해 한번 생각해보았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신가요? 댓글에서 여러분의 시선을 느껴보고 싶습니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100년 전 신문에 실린 사진을 통해 오늘의 사진을 생각해보는 [백년사진]입니다. 이번 주 제가 고른 사진은 1923년 10월 21일자 신문에 실린 사진입니다. 젊은 바이올리니스트가 연주를 하고 있고 그 옆에서 피아노 반주자가 혼신의 힘으로 연주를 하고 있습니다. 100년 전 서울에서 바이올린 연주회가 열렸던 모양입니다. 사진 설명을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 공연장을 찾은 청중을 감동시킨 바이올린 연주를 ‘묘기’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폭포처럼 펼쳐지는 바이올린 선율에 관중들이 극도로 감동해 청중과 연주가가 몰아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식으로 현장 모습을 전하고 있습니다. ▶ 이 사진을 보면서 드는 의문이 한 가지 있습니다. 저 상황은 실제 공연 모습까 아니면 연습 시간에 양해를 구해 찍은 사진일까 하는 점입니다. 돈을 내고 들어온 신사숙녀들이 무대 아래에서 공연에 집중하고 있는 시간에 사진기자가 무대 위에 올라가 카메라를 들고 촬영하는 게 가능했을까 궁금해졌습니다. ▶저 사진은 망원렌즈로 촬영한 게 아니니 사진가가 피사체 바로 옆에서 촬영해야 했을텐데 그러면 카메라의 셔터 소리가 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제가 지금 사용하고 있는 카메라에는 ‘사일런스’ 기능이 있어서 소리가 아주 작게 나도록 설정할 수 있지만 그래도 셔터막이 열렸다 내리는 소리는 침묵 속에서는 크게 들립니다. 백 년 전 카메라는 지금보다 더 묵직한 셔터 소리가 났으니 아마 실제 공연 중에 촬영했다면 그 자체가 하나의 구경거리가 되었을 겁니다.지금도 예술의전당이나 연극무대의 공연을 촬영하기 위해서는 리허설 장면을 촬영하거나 방음시설이 된 조정실 유리창 너머로 찍습니다. ▶최근에 출시되고 있는 전문가용 미러리스 카메라에는 드디어 완벽한 ‘사일런스’ 기능이 있습니다. 바로 옆에서 수십 장의 사진을 찍어도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습니다. 미러리스 카메라는 셔터막이 없이 전자신호로만 사진을 찍기 때문에 가능하게 된 기술 발전입니다. 지금의 미러리스 카메라와 망원렌즈가 있다면 사진 속 저 장면은 멀리서 자연스럽게 포착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무소음의 미러리스 카메라는 사진기자들의 일에 큰 변화를 일으키고 있습니다. 사진기자들은 과거에는 접근할 수 없던 현장으로 갈 수 있게 되었고 과거에는 촬영할 수 없던 순간을 촬영할 수도 있게 되고 있습니다. 이론적으로는 소리에 민감한 선수들이 벌이는 바둑 대회나 골프 티샷 순간을 마음껏 촬영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무소음의 미러리스 카메라가 대중화되면 혹시 ‘몰래 카메라’가 일상화되지 않을까 걱정하시는 분들도 있으실지 모르겠습니다. 몰래 카메라는 전문가용 미러리스 카메라 출시와 상관없이 시작되어 지금도 진행되고 있습니다. 게다가 사진기자들이 갖고 다니는 카메라는 크기가 커서 눈에 확실하게 띄기 때문에 몰래 카메라로 사용하기에는 한계가 많습니다. ▶오늘은 100년 전 바이올리니스트 공연 사진을 보면서, 이제 셔터 소리 때문에 못 가는 현장은 사라지고 있는 상황을 살펴보았습니다. 여러분은 100년 사진에서 뭐가 보이시나요? 댓글에서 여러분의 시선을 느껴보고 싶습니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100년 전 신문에 실린 사진을 통해 오늘의 사진을 생각해보는 [백년사진]입니다. 정구대회를 앞두고 경기장을 정리하는 모습입니다. 롤러를 가지고 사람들이 일일이 바닥을 다지는 모습이 인상적입니다. 1923년 10월 14일에 열린 ‘제 3회 전 조선 정구대회’ 소식입니다. 오전 8시부터 휘문운동장에서 열렸는데 조선체육회 주최, 동아일보사 후원행사였다고 합니다. 한국에서 정구대회가 100년이 넘었다는게 신기합니다. 동아일보 정구대회는 지금은 경상북도 문경에서 매년 봄에 개최하고 있습니다. 경기장은 평소에도 드문드문 활용되는데다 관리 담당자가 있어서 경기에 임박해 준비할 필요는 없을 겁니다. 그렇다고 경기 전에 준비를 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신문에 쓸 만큼 특별한 ‘뉴스’도 아닌 장면입니다. 이제는 사라진 스포츠 관련 사진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 100년 전 스포츠 사진을 보며 지금은 사라진 스포츠사진은 뭐가 있을까, 새롭게 생겨난 사진은 뭐가 있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얼마 전 아시안게임이 끝났죠? 생각보다 관심이 높고 인기가 있어서 놀랐습니다. 유쾌하면서도 감동적인 많은 경기와 시상식 장면 중에서 저는 탁구 신유빈 선수가 금메달을 확정지은 후 손에 든 태극기를 바로 잡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카메라에 건곤감리가 바로 잡히도록 신경쓰는 모습 말입니다. 그리고 기쁜 감정을 카메라를 향해 드러내는 것도 인상적이었습니다. 카메라를 향해 손 하트도 적극적으로 만들고, 동료와의 적극적인 포옹도 주도합니다. 이미 카메라를 대할 준비가 되어 있는 세대라는 생각이 듭니다. 경기 중간중간에 멋진 사진이 나오는 것도 젊은 세대답게 자기를 표현할 준비가 항상 되어있기 때문입니다. 포토제닉이라는 표현으로는 부족한, ‘카메라 세대’가 한국을 대표하는 시대입니다. ▶2002년 한일월드컵 때가 생각납니다. 그 당시 한국 선수들은 안정환의 반지 세리머니와 단체로 손을 잡고 경기장을 달리며 슬라이딩을 하는 ‘아이콘’을 만들어냈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 한국 기자들 전체를 당황하게 했던 외국 선수의 세리머니가 있었습니다. 영국의 베컴 선수가 골을 넣은 후 골대 뒤쪽 카메라기자들이 모여 있는 지역으로 달려오는 ‘무릎 세리머니’를 했습니다. 한국 사진기들은 눈앞으로 다가온 스타의 모습에 당황하고 말았습니다. 망원렌즈를 끼고 ‘킬러’들의 포효를 포착할 준비를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국회에서 국회의원들이 멱살잡이할 때 사용하는 작은 렌즈(와이드 렌즈)에나 잡힐 만한 장면이었습니다. 베컴은 카메라 기자들 앞에 와서 포즈를 취했지만 우리는 그 장면을 찍지 못했습니다. 우리 옆에 있던 영국 통신사인 게티이미지 기자의 손에 짧은 렌즈가 끼어 있는 것을 보고 놀랐습니다. 사진기자를 향해 뛰어 온 스포츠 스타, 그리고 그와의 거리가 가까울 것을 미리 예상한 사진기자의 합작으로 한국 기자들은 ‘물을 먹은’ 사건이었습니다.▶어쩌면 당연하게 받아들일 세리머니에 대해 제가 의미를 부여하는 이유는 개인적인 경험으로 보면 국대들의 감정 표현이 불과 20여 년 만에 엄청나게 변했다는 점 때문입니다. 옛날 스포츠 선수들도 골을 성공시키거나 메달을 따면 격정적인 포효를 했습니다. 그러나 감정을 드러내는 대상이 팀의 감독이나 현장에 응원하러 온 가족 친구들을 향한 경우가 많았다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시상대에 올라가서도 감개무량한 표정으로 태극기를 향해 애국가를 따라 부르는 장면과 메달을 들고 손을 흔드는 정도였습니다. 뭔가 새로운 것을 원하는 사진기자들과 독자들에게는 부족한 사진일 때가 종종 있었습니다. 감정이 드러나지 않을 때 메달리스트들에게 사진기자들이 연출상황을 부탁합니다.국민적 관심이 집중된 경기에서 메달을 딴 선수들에게 사진기자들이 많이 연출시켰던 포즈가 ‘금메달을 입에 물어 보시라’는 주문이었습니다. “금메달 이맛이네”라는 제목을 염두에 둔 사진이 목표였을 겁니다. 그런데 10여 년 전부터 현장에서 금메달 맛보는 세리머니를 부탁하면, 식상해 하는 젊은 선수들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탑 클래스의 선수들은 그런 연출을 오히려 부담스러워 합니다. 대신 젊은 세대 선수들은 카메라 앞으로 찾아와 윙크를 하고 하트를 만들고, 때로는 렌즈에 사인을 하는 등 ‘그림을 만들어 주곤’ 경기장을 떠났습니다. 자연스러운 개성 표현이 가능한 세대에게 사진기자들의 연출 요구는 필요 없어지고 있습니다. 이번 항저우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 깨무는 사진이 거의 사라진 것을 저는 이런 변화의 흐름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제가 못 본 경기 중에 금메달 깨무는 세리머니가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 현장을 시대에 뒤떨어졌다고 보실 필요는 없습니다. 운동에 집중하느라 특별한 세미머니를 준비하지 않은 선수들도 얼마든지 훌륭한 분들이시니까요. ▶ 자원이 없던 시절이라 신문 지면도 아주 적었습니다. 경기는 많고 지면은 적고 그러다보니 단체사진이나 전체 경기장 모습을 지면에 실을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당연히 지금의 눈으로 보면 사진이 임팩트도 없고 시선도 잘 못 끕니다. 집단적인 사진에만 익숙했는데 이제는 미니멀한 선수 개개인의 모습을 촬영해야 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지금은 뉴스를 전달하는 입장에서 보면 자원이 많은 시대입니다. 지면도 많아졌고 인터넷을 통해서는 무한대의 사진을 찍어 전달할 수 있는 시대가 된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초등학교 앨범에 ‘모듬 별’ ‘개인 별’ 사진이 있는 시대입니다. 제가 어릴 때와는 다르네요. ▶승리하면 기쁨을 만끽하며 개성을 충분히 드러내고, 패배해도 웃는 우리 젊은 선수들. 사진기자들의 고민이 시작되어야 하는 걸까요? 어쩌면 행복한 고민일 수도 있겠습니다. 오늘은 백 년 전 신문에 실린 스포츠대회 사진을 보며 스포츠 사진의 변화를 한번 생각해보았습니다. 가을 주말 잘 보내시길 바랍니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