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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이 어렵게 얻은 외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는 신의 요구에 응답하며 산을 오른다. 아무것도 모르는 이삭은 아브라함을 따라가면서 묻는다. “장작과 불은 준비됐는데 제물로 바칠 어린 양은 어디에 있습니까?” 아브라함은 “그분이 준비하실 것”이라고 대답한다. 아브라함에 대한 창세기의 일화는 성경에서 가장 유명한 에피소드이면서도 결코 이해하기 쉽지 않다. 종교적·관념적 통찰을 통해서 생의 이면을 깊게 파고들어온 작가는 신작 연작소설집에서 창세기의 이 난제를 ‘이삭의 목소리’란 문학적 복원을 통해 풀어낸다. 가장 사랑하는 존재를 제물로 바칠 것을 요구하는 신과 거기에 순종하는 아버지 사이에서 가려져 있던 아들의 입을 빌려서다. “바치는 것이 사랑의 표현이라면 바치라고 요구하는 것은 더욱 큰 사랑의 표현이에요…바치라고 요구하면서 신은 이미 바치라는 요구를 받고 있는 것이 아니겠어요?” 모든 사건이 완료된 뒤 이삭이 회고하는 그 장면에서 작가가 제시하는 답은 사랑이다. ‘사랑하는 아들’(아브라함)의 ‘사랑하는 아들’(이삭)을 바치라고 하는 신은 결국 가장 사랑하는 자이고, 가장 먼저 사랑한 자다. 인간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서사가 반복과 확장의 기법으로 변주되면서 새로운 문학적 진실을 획득해 가는 과정은 뭉클하다. 아브라함과 이삭의 탄생 전후 일어난 다른 창세기 일화를 모티브로 삼은 단편들이 표제작을 중심으로 앞뒤로 놓여 있다. 아브라함의 조카이자 소돔성 멸망 가운데 살아남은 롯, 이삭의 이복형 이스마엘을 낳은 여종 하갈, 이삭의 아들 야곱의 도주와 꿈 등 창세기의 유명한 일화들이 신의 세계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으나 그 사랑 안에 붙들려 있는 인간들의 이야기로 다시 태어났다. 박선희 기자 teller@donga.com}

2020년 동리·목월문학상 수상자와 수상작으로 소설가 백시종 씨(76)의 ‘누란의 미녀’와 권달웅 시인(76)의 ‘꿈꾸는 물’이 선정됐다. 동리·목월문학상은 경북 경주 출신인 소설가 김동리(1913∼1995)와 시인 박목월(1916∼1978)을 기리기 위해 제정됐다. 경주시와 한국수력원자력이 후원하고 동리·목월기념사업회가 주관한다. 올해 23회째를 맞은 김동리문학상 수상자인 소설가 백시종 씨는 수상 소감으로 54년 전 김동리 선생에게 “무엇보다 근성이 있어 좋으니 더 열심히 써봐라”는 격려를 받은 일화를 먼저 언급했다. 백 작가는 “그 말에 힘입어 1967년 등단할 수 있었다”며 “소설이 노력만으로 되는 게 아니고 재능도 다가 아니란 사실을 깨닫는 데 반백 년이 걸렸다. (수상 덕분에) 근성을 강조한 선생의 말씀처럼 등수와 관계없이 생명이 붙어 있는 그날까지 꼭 완주하고 말리라는 각오가 생긴다”고 소감을 밝혔다. 수상작 ‘누란의 미녀’는 중국 정부와 대립하며 독립을 추구하고 있는 신장·위구르 지역의 인권 문제에 초점을 둔 작품이다. “국제적 관점과 시의성에서 유효하고 작품의 무대와 관련한 담화와 자료의 도입이 작가로서의 성실성을 입증한다. 소설 결말의 전언도 감동적”이라는 심사위원들의 평가를 받았다. 제13회 박목월문학상 수상자인 권달웅 시인은 대학 4년간 목월의 강의를 직접 들으면서 시를 배운 제자였다. 등단도 목월이 발행하던 ‘심상’에 ‘해바라기 환상’이 당선되며 이뤘고 이후 12권의 시집을 냈다. 그는 “우러르는 선생님의 이름으로 받게 된 문학상이라 더 각별하다”고 소감을 전했다. 수상작 ‘꿈꾸는 물’은 물에 관련된 서정적인 이미지와 일상의 사물에 대한 시인의 감각적 언어를 담아낸 시집이다. 그는 “과분한 수상 소식에 45년 전 문학청년 시절 박목월 선생께 받아 오래도록 간직해 온 편지를 다시 읽어 봤다. ‘문학은 꾸준한 성의와 노력으로 열어 가는 길’이라고 하신 편지의 그 말씀을 아직도 새기며 시를 쓴다”고 말했다. 권 시인은 “우울한 시대, 소외되고 상처받은 것들, 사라져가는 것들에 대한 그리움으로 시를 쓰겠다. 선생의 청명한 시 세계와 정신을 생각하면서 기교나 화려함보다 은은한 서정이 드러나는 달빛 같은 시를 쓰겠다”고 말했다. 동리문학상 심사위원은 김지연 김종회 이순원, 목월문학상 심사위원은 유안진 신규호 이하석이 맡았다. 상금은 각각 6000만 원. 시상식은 다음 달 10일 오후 6시 경주 더케이호텔에서 열린다. 박선희 기자 teller@donga.com}

직장인 A 씨는 한 달에 한 번 스스로를 위한 ‘작은 사치’를 누린다. 잘 포장돼 도착한 택배를 열면 매달 새로운 와인이 있다. 전문 업체에서 취향에 맞춰 골라주는 제품이다. 퇴근 후 느긋이 와인을 즐기면서 A 씨는 단순히 술이 아니라 낭만을 구독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구독 서비스 영역이 확장되면서 ‘술 구독’이 인기다. 지난해부터 다양한 스타트업들이 뛰어들었는데 올 들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으로 사회적 거리 두기가 잦아지면서 관심이 더 높아졌다. 외부 술자리가 힘들어지자 집에서 나만을 위한 작은 술자리를 갖는 문화가 더 이상 어색하지 않게 된 것이다. 주종은 우리나라 전통주부터 와인, 수제맥주 등 다양하다. 가격대도 다양하고 종류가 많아 특정한 테마나 독자의 취향에 맞춰 추천이 가능하다는 특징이 있다. 종류와 산지가 다양한 만큼 제품마다 스토리가 있고, 일반 소비자로서는 구하기 어려운 것까지 받을 수 있다. 특히 온라인 판매가 가능한 전통주 분야에서 술 구독이 활발해지는 추세다. 전통주는 다른 주종으로 구독 서비스를 신청하려면 거쳐야 하는 신분 확인 과정이 필요 없다. 그 덕분에 ‘술담화’ ‘술을 읽다’ ‘우리술한잔’ 같은 업체들이 생기고 있다. 이재욱 술담화 대표는 “한 카테고리 안에서 다양한 상품을 경험하는 것이 구독 서비스의 본질인데 2000종 넘게 유통되는 전통주는 이에 적합한 주종”이라며 “이름만 전통주일 뿐 사과로 만든 블렌디 약주, 오미자 와인, 전통 허브 진 등 제품이 다양해 구독 만족도가 높다”고 말했다. 지난해 1월 서비스를 시작한 이 업체는 올 들어 지난해보다 정기 구독자 수가 8배 이상 늘었다. 전통주 구독 서비스 업체들은 생산 방식과 지역 특색 및 역사 문화 환경 이야기, 잘 어울리는 안주 등을 담은 책자도 함께 제공한다. 미역부각, 황태쥐포 등 우리 농산물로 만든 안주나 요리 레시피도 곁들여진다. 전통주 소믈리에가 ‘매화’ ‘커피’ ‘가족’ 등 테마에 맞춰 정해준 술을 시중가보다 저렴하게 즐길 수 있다는 것도 장점이다. 보통 한 달 3만 원대에 2, 3병이 배송된다. ‘퍼플독’처럼 매달 인공지능(AI)이 개인 취향에 맞춰 선별한 와인을 보내주는 구독 서비스도 있고, 배상면주가의 ‘홈술닷컴’은 안주와 함께 막걸리를 보내준다. 누군가에게는 ‘컴플레인(민원)을 걸어야 할 제품’이 누군가에겐 ‘인생 술’이 되는 게 취향의 세계. 같은 술을 배송해도 반응은 천차만별이다. 그래도 연말에는 파티 분위기 나는 샴페인 계열이 잘 어울린다. 이 대표는 “오미자나 국내산 포도로 만든 스파클링 와인이나 막걸리라면 연말 어느 자리에서나 무난하다”고 추천했다. 박선희 기자 teller@donga.com}

《올해 시력(詩曆) 48년이자 칠순을 맞은 정호승 시인이 이를 기념해 산문집 ‘외로워도 외롭지 않다’를 펴냈다. ‘국민 애송시’로 사랑받은 ‘수선화에게’를 비롯해 시대의 어둠을 밝힌 ‘서울의 예수’, 인간의 그늘을 들여다본 ‘내가 사랑하는 사람’ 등 대표작 60편을 쓰게 된 계기나 배경에 관한 일화를 해당 시와 함께 엮었다.》 10일 서울 정동 프란체스코교육회관에서 가진 기자간담회에서 정 시인은 “시는 시대로 묶고 그 시를 쓰게 된 이야기는 산문집으로 따로 내곤 했는데 어느 시점에 이르자 ‘시와 산문은 문학이란 이름 아래 하나의 영혼과 몸을 이룬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요즘 시가 너무 어렵고 독자와 동떨어졌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많은데 시를 쓴 계기를 한 상에 차리면 시를 이해하는 데 훨씬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고 말했다. 반세기 가까이 써온 시 중에서 시작(詩作) 뒤편에 풀어낼 서사가 있는 작품을 선정했다. 사랑하는 어머니를 보내드릴 때 겪었던 무력감, 잡지사 기자 시절 만난 탄광마을 광원에게 배웠던 평범한 일상의 소중함, 절친했던 동화작가 정채봉(1946∼2001)에 대한 그리움 등 일상의 사건과 성찰을 시로 빚어낸 과정이 진솔하게 기록돼 있다. 그는 “외로움이 우리 사회에서 여러 문제를 낳고 있지만 인간은 본질적으로 외로운 존재”라며 “그걸 이해할 때 외로움으로 인한 고통도 견뎌내는 힘이 생김을 이야기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시인은 가장 애착을 갖고 있는 시 두 편을 꼽았다. 먼저 ‘외로우니까 사람이다’라는 구절로 각인된 ‘수선화에게’다. 많이 사랑받은 만큼 애착이 특별하다. 40대 후반 “외로워 죽겠다”는 친구의 느닷없는 한탄에 지은 시다. 그는 “많은 독자가 이 시를 자신의 시로 생각하고 사랑한 것은 연약한 꽃대 위에 핀 영롱한 꽃빛이 모든 인간이 가진 외로움의 색채이기 때문일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평생을 기독교인으로 사셨던 어머니 묘비명을 ‘예수님을 사랑한 어머니’라고 썼는데 만약 나도 묘비명을 갖게 된다면 ‘외로우니까 사람이다’라는 말을 쓰면 어떨까 생각해봤다”고 했다. 시인이 스스로 가장 많은 위로를 받는 시는 ‘산산조각’이다. 네팔 룸비니에서 사온 작은 흙 부처상을 책상에 올려둔 뒤 ‘깨지면 어떡하나’ 염려하다 쓰게 된 시다. 시인은 “흙으로 만든 부처님이 산산조각 나면 어쩌나, 내 인생이 그렇게 부서지면 어쩌나 늘 걱정했는데 시적 상상 속 부처가 ‘산산조각 나면 산산조각을 얻는 것이다’고 알려주시더라”며 “오늘이 아니라 오지 않은 내일과 미래를 걱정하며 계속 살아가던 때 ‘산산조각 나면 산산조각으로 살면 된다’는 것은 삶의 큰 힘과 위안이 돼줬다”고 말했다. 시인은 “인생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에 긍정적 의미에서 정리할 것은 미리 정리해놓고 싶다”며 “남은 생애, 다른 이의 눈물을 닦아줄 수 있는 시를 최대한 많이 쓰고 싶다”고 말했다.박선희 기자 teller@donga.com}

《‘아무튼, 하루키’ 저자이자 번역가 이지수 씨(37)는 “무라카미 하루키 덕후에 명함도 못 내밀 것 같다”고 걱정부터 했다. 그는 “하루키 덕후라 하면 왠지 아침부터 파스타를 먹으며 야나체크 심포니에타를 들어야 할 것만 같은데 그렇지 못하다”고 했다. 하루키가 노벨 문학상을 받도록 신사에서 기도(?)하며 밤새운 적도 없고 LP판 같은 일명 ‘하루키 굿즈’를 모으지도 않는단다.》 하지만 그는 사춘기 시절부터 하루키의 명문장과 담백하고 쿨한 감성에 반해 일문과 진학을 결심한 자타 공인 ‘하루키 새싹’이었다. 원서로 하루키를 읽고 싶어 일문학을 공부했고 지금은 사노 요코, 고레에다 히로카즈 등의 글을 옮기는 번역가로 산다. 서재에 꽂힌 하루키 책만 80여 권. 원서 번역본 개정판을 모두 수집한다. 그의 ‘아무튼, 하루키’는 4쇄까지 찍으며 꾸준히 인기를 얻고 있다. 글을 쓰다 막히면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속 “완벽한 문장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아. 완벽한 절망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을 곱씹고 술 먹다 화장실 가선 “맥주의 좋은 점은 말이야, 전부 오줌으로 변해서 나와 버린다는 거지. 원 아웃 1루 더블 플레이, 아무것도 남지 않을 거야”를 읊조렸다는 그. 염려와 달리 하루키 덕후의 가장 큰 미덕을 갖춘 그에게 이 계절 즐기기 좋은 하루키 책(문장)을 추천받았다. ―‘꼭 읽어야 할 하루키 책’ 세 권은…. “‘국경의 남쪽, 태양의 서쪽.’ 스토리만 보면 불륜을 다룬 ‘막장’ 같지만 멈출 수 없는 흡인력이 있다. ‘상실의 시대’ 와타나베의 성숙한 남자 버전을 확인할 수 있는 책이다. 초기작 특유의 멜랑콜리한 분위기가 백미다. 일본 옴진리교 테러를 다룬 르포르타주 ‘언더그라운드’ ‘약속된 장소에서’도 추천작. 선악의 단순한 도식 대신 사건의 근본 원인이 된 사회 구조를 파헤쳤고 하루키를 좀 더 큰 작가로 성장시켰다. 패션 브랜드와 만년필 광고용으로 잡지에 게재한 짧은 글인 ‘밤의 원숭이’도 ‘이게 뭐지?’ 싶은 경쾌하고 재밌는 글이 가득하다.” ―‘이 책 알면 덕후로 인정한다’는 작품은? "아까 말한 ‘국경의 남쪽, 태양의 서쪽’. 살면서 이 책을 아는 사람을 딱 두 명밖에 못 만났다."(이때 공교롭게도 사진기자가 이 책을 소장했다고 ‘덕밍아웃’을 해서 아는 사람이 ‘세 명’으로 늘었다.) ―‘하루키의 이 책 이 구절’ 하는 게 있나. “‘어느 날 아침 눈을 뜨고 귀를 기울여 들어보니 어디선가 멀리서 북소리가 들려왔다. … 나는 왠지 긴 여행을 떠나야만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먼 북소리’) 해외여행이 불가능해진 이 시기, 유럽 체류 시절 하루키 글로 여행 기분을 낼 수 있다. ‘우리는 그때 뭔가를 강하게 믿었고, 뭔가를 강하게 믿을 수 있는 자기 자신을 가졌어. 그런 마음이 그냥 어딘가로 허망하게 사라져 버리지는 않아.’(‘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어린 시절 가진 믿음의 힘을 말하는 이 문장 역시 혼란스러운 요즘 곱씹어볼 만하다.” ―하루키표 힐링을 원하는 이들에게 추천할 만한 게 있다면…. “롤 캐비지. ‘이윽고 슬픈 외국어’ 225쪽에 나오는 요리인데 양배추에 고기 다진 것과 볶은 양파를 넣고 찐다. 하루키가 바를 운영할 때 항상 대량으로 만들었는데 그때 숙련돼 지금도 양파 썰 때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고 한다. 맥주와 곁들이며 찰스 톰프슨과 콜먼 호킨스의 ‘It‘s the Talk of the Town’을 함께 듣는다면 좋겠다. 하루키가 재즈카페에서 아르바이트 하던 시절 자주 듣던 매우 근사한 피아노 색소폰 연주곡이다.”박선희 기자 teller@donga.com}

올해 시력(詩曆) 48년이자 칠순을 맞은 정호승 시인이 이를 기념해 산문집 ‘외로워도 외롭지 않다’를 펴냈다. ‘국민 애송시’로 사랑받은 ‘수선화에게’를 비롯해 시대의 어둠을 밝힌 ‘서울의 예수’, 인간의 그늘을 들여다본 ‘내가 사랑하는 사람’ 등 대표작 60편을 쓰게 된 계기나 배경에 관한 일화를 해당 시와 함께 엮었다. 10일 서울 정동 프란체스코교육회관에서 가진 기자간담회에서 정 시인은 “시는 시대로 묶고 그 시를 쓰게 된 이야기는 산문집으로 따로 내곤 했는데 어느 시점에 이르자 ‘시와 산문은 문학이란 이름 아래 하나의 영혼과 몸을 이룬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요즘 시가 너무 어렵고 독자와 동떨어졌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많은데 시를 쓴 계기를 한 상에 차리면 시를 이해하는 데 훨씬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고 말했다. 반세기 가까이 써온 시 중에서 시작(詩作) 뒤편에 풀어낼 서사가 있는 작품을 선정했다. 사랑하는 어머니를 보내드릴 때 겪었던 무력감, 잡지사 기자 시절 만난 탄광마을 광원에게 배웠던 평범한 일상의 소중함, 절친했던 동화작가 정채봉(1946~2001)에 대한 그리움 등 일상의 사건과 성찰을 시로 빚어낸 과정이 진솔하게 기록돼 있다. 그는 “외로움이 우리 사회에서 여러 문제를 낳고 있지만 인간은 본질적으로 외로운 존재”라며 “그걸 이해할 때 외로움으로 인한 고통도 견뎌내는 힘이 생김을 이야기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시인은 가장 애착을 갖고 있는 시 두 편을 꼽았다. 먼저 ‘외로우니까 사람이다’는 구절로 각인된 ‘수선화에게’다. 많이 사랑받은 만큼 애착이 특별하다. 40대 후반 “외로워 죽겠다”는 친구의 느닷없는 한탄에 지은 시다. 그는 “많은 독자가 이 시를 자신의 시로 생각하고 사랑한 것은 연약한 꽃대 위에 핀 영롱한 꽃 빛이 모든 인간이 가진 외로움의 색채이기 때문일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평생을 기독교인으로 사셨던 어머니 묘비명에 ‘예수님을 사랑한 어머니’라고 썼는데 만약 나도 묘비명을 갖게 된다면 ‘외로우니까 사람이다’라는 말을 쓰면 어떨까 생각해봤다”고 했다. 시인이 스스로 가장 많은 위로를 받는 시는 ‘산산조각’이다. 네팔 룸비니에서 사온 작은 흙 부처상을 책상에 올려둔 뒤 ‘깨지면 어떡하나’ 염려하다 쓰게 된 시다. 시인은 “흙으로 만든 부처님이 산산조각 나면 어쩌나, 내 인생이 그렇게 부서지면 어쩌나 늘 걱정했는데 시적 상상 속 부처가 ‘산산조각 나면 산산조각을 얻는 것이다’고 알려주시더라”며 “오늘이 아니라 오지 않은 내일과 미래를 걱정하며 계속 살아가던 때 ‘산산조각 나면 산산조각으로 살면 된다’는 것은 삶의 큰 힘과 위안이 돼줬다”고 말했다. 시인은 “인생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에 긍정적 의미에서 정리할 것은 미리 정리해놓고 싶다”며 “남은 생애, 다른 이의 눈물을 닦아줄 수 있는 시를 최대한 많이 쓰고 싶다”고 말했다.박선희 기자 teller@donga.com}

인자한 아버지 역으로 사랑받아 온 원로 배우 송재호 씨가 7일 숙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83세. 평양 출신으로 동아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1959년 KBS 부산방송총국 성우로 데뷔했다. 1964년 영화 ‘학사주점’에 출연한 것을 시작으로 배우 활동을 시작했다. 1968년에는 KBS 특채 탤런트로 선발됐다. 1970년대에는 영화 주인공으로 이름을 날렸다. 영화 ‘영자의 전성시대’(1975년)에서 영자(염복순 분)를 사랑하는 남자 주인공 창수 역을 맡았고 그해 최고의 흥행작이 됐다. 또 ‘세 번은 짧게 세 번은 길게’(1981년)에서 장미희와 호흡을 맞춰 인기를 끌었다. 영화는 ‘그대를 사랑합니다’ ‘그때 그 사람’ ‘살인의 추억’ ‘해운대’ 등 120여 편에 출연했다. 브라운관 활동도 왕성했다. 1982년 백상예술대상에선 KBS 드라마 ‘새댁’으로 남자 최우수연기상을 수상했다. 특히 2004년 김수현 작가의 드라마 ‘부모님 전상서’에서는 인자하고 사려 깊은 아버지로 나와 ‘국민 아버지’의 이미지를 각인시켰다. ‘보통 사람들’ ‘열풍’ ‘싸인’ 등 다수 드라마에도 출연했다. 생전 인터뷰에서 “움직일 수만 있다면 연기하고 싶다”고 말한 대로 병세가 깊어지기 전까지 꾸준히 연기 활동을 해왔다. 지난해에도 영화 ‘자전차왕 엄복동’ ‘질투의 역사’ 등에 출연했다. 국제사격연맹 심판증을 가진 고인은 1986년 아시아경기 사격종목 국제심판, 1988년 서울 올림픽 사격종목 보조심판으로 활동했다. 야생생물에도 관심이 많아 야생생물관리협회장도 맡고 있었다. 별세 소식에 각계의 추모와 애도가 이어졌다. 이낙연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8일 페이스북에 “국민배우의 별세에 깊은 애도를 표한다. 인자한 아버지 역으로 친숙해지셨지만 젊은 시절 제임스 딘 같은 반항아 이미지를 기억하는 국민도 많다. 많이 그리울 것”이라고 전했다. 유족으로는 배우 활동을 하다가 현재는 목사인 장남 영춘 씨 등 4남 1녀가 있다. 빈소는 삼성서울병원, 발인은 10일 오전 8시 반. 02-3410-3151박선희 기자 teller@donga.com}

구순 고령에 기력이 쇠한 말기 암 환자이자 알츠하이머 인지저하증을 겪고 있는 어머니가 호스피스 병동에 머물면서 몇 마디 말을 던진다. “이 닦았나?” “또 왔나?” “저기 나무에 감이 달렸다” 같은 평범한 말이기도 하고, “늙으나 젊으나 전다지 물건 덩어리다” 같은 알쏭달쏭한 말이기도 하다. 향정신성 약물을 늘 투여 받으며 수시로 혼란상태에 빠지다 전후 맥락 없이 불쑥 나오는 어머니의 그 문장들. 서울대 국문과 교수로 고전문학 분야 석학인 저자는 호스피스 병동을 옮겨 다니다 숨을 거둔 어머니의 와병생활을 휴직까지 한 채 1년여 돌본다. 저자는 어머니가 때때로 던진 말이 의미 없는 게 아니라 그저 해독되지 못했을 뿐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이 책은 어머니가 남긴 선문답처럼 짧은 말과 그에 대한 저자의 특별하고 애틋한 해독을 담고 있다. 모자(母子)의 각별한 유대감이 평범하거나 엉뚱한 말의 속뜻을 발견하게 하고, 오랜 기억을 소환해서 그 맥락을 이해하게끔 한다. 아들의 글 속에는 어머니의 강인한 삶에 대한 존경과 사랑이 절절하다. 병실로 들어서는 아들에게 혼몽한 중에도 “공부하다 오나?”라고 묻는 어머니. 저자는 어머니의 삶이 자신의 공부와 분리되지 않는단 걸 깨닫는다. ‘선생님’인 셋째 아들은 어머니에게 늘 자랑스럽다. 저자는 어릴 적 간식 ‘박산’(뻥튀기)을 반기는 어머니를 보며 지난 시절을 그리워도 하고 “얼른 도망가라”는 외침에 독재 시절 경찰에 쫓기던 20대를 떠올리기도 한다. 병실에서도 “느그 아버지 밥 차리 줬나”며 아버지 걱정을 달고 있는 어머니에게서 원망, 미움도 무화시키는 늙은 사랑의 뭉클함을 느낀다. 기계적으로 약물만 투여하는 곳에서 상태가 급격히 나빠지다 의료진이 바뀌면서 상태가 눈에 띄게 호전되는 경험을 반복한다. 호스피스 병동에서 의료진의 태도가 환자의 삶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도 세밀히 반영돼 있다. 어머니는 돌아가시기 보름 전 “아들!”이라 외쳐 모두를 놀라게 한다. ‘사랑은 의식을 넘어 존재하는 것’임을 알려준 그의 마지막 말은 “어어어”. “엄마! 다음 세상에서 또 만나요!”라는 아들의 작별 인사에 대한 대답이었다.박선희 기자 teller@donga.com}

“조 군의 회고적 에스프리는 애초에 명소고적에서 날조한 것이 아닙니다…시에서 것과 쭉지를 고를 줄 아는 것도 天成(천성)의 기품이 아닐 수 없으니 시단에 하나 ‘新古典(신고전)’을 소개하며…쁘라보우!” 정지용 시인은 1940년 ‘문장’ 2월호 추천 시 ‘봉황수’ 선후기(選後記)를 쓰며 ‘시단의 신고전(新古典)’이란 평가에 감탄사 “쁘라보우!”까지 덧붙여 환호한다. 그가 극찬한 ‘조 군’은 바로 민족정신과 고전적 미의식을 우아하고 섬세한 언어 속에 구현해온 시인 조지훈(1920년 12월 3일∼1968년·사진). “얇은 사(紗) 하이얀 고깔은/고이 접어서 나빌레라”로 시작하는 ‘승무’로 널리 알려진 시인 조지훈이 올해 탄생 100주년을 맞았다. 그가 박두진, 박목월과 함께 낸 3인 시집 ‘청록집’은 한국 서정시의 정신적 좌표로 꼽힌다. 탄생 100주년을 맞아 조지훈의 생애와 학문 세계를 다시 들여다보고 재조명하려는 학계의 시도가 활발하다. 그가 1948년부터 교수로 재직하며 민족문화연구원 1대 소장을 지낸 고려대는 11월 둘째 주를 ‘조지훈 주간’으로 기리고 유품 및 도서 전시와 추모 강연, 논문집 출간 등 다양한 행사를 진행한다. 고려대 박물관은 ‘빛을 찾아가는 길, 나빌네라 지훈의 100년’ 전시회를 9일부터 내년 3월 20일까지 연다. 육필원고, 두루마기, 안경 등 유품과 교사 자료를 포함한 100여 점이 전시된다. 가장 눈여겨볼 만한 자료는 42장짜리 육필 원고뭉치 ‘芝薰詩초(지훈시초)’. 출간을 염두에 두고 퇴고를 위해 정서해 묶은 교정본 일종으로 추정되는데 대중에게 전시로 공개하는 것은 처음이다. 고려대 백주년기념관에서 13일 열리는 ‘조지훈 탄생 100주년 기념 인문학 축제’에서는 문학뿐 아니라 지성사, 민족문화, 역사학의 관점에서 조지훈의 문학 세계를 재조명한다. ‘한국문화사대계’(총 7권)를 기획했고 논저 ‘한국민족운동사’를 남긴 그는 ‘한국학’이라 불리는 연구가 없던 1960년대부터 이미 인문학 분야를 망라해 정리하는 시도를 선구적으로 해왔다. 조지훈이 문학사에서 차지하는 위상에 비해 관련 연구는 부족했다. 이에 그가 다양한 학문 분야에서 남긴 선구적 족적도 발표한다. 김건우 대전대 국어국문창작학과 교수가 지성사 관점에서 분석하고 조형열 동아대 사학과 교수가 역사학 분야를 심층 조명한다. 11일 오후 같은 장소에서는 그의 제자였던 홍일식, 김흥규, 최동호 고려대 명예교수가 추억하는 조지훈에 대한 추모좌담회와 기념강연, 조지훈 연구 출판기념식이 열린다. 내년 2월에는 경북 영양군과 고려대 문과대, 민족문화연구원에서 열린 관련 학술대회 발표문과 토론문을 수록한 ‘조지훈 탄생 100주년 기념 논문집’이 출판된다. 영양군은 조지훈의 고향으로 조지훈 생가와 지훈박물관이 있다. 내년에는 우크라이나 키예프 국립대의 세계시인 동상 공원에서 조지훈 동상 제막식도 열릴 예정이다. 박선희 기자 teller@donga.com}

얼마 전 일본에서 손원평 작가의 소설 ‘서른의 반격’ 판권 계약을 진행한 은행나무 측은 “작가에게 전해 달라”는 일본 한 출판사 편집자의 편지를 받았다. 작가의 전작(前作) ‘아몬드’가 올해 일본서점대상을 받자 여러 출판사가 경쟁이 붙은 상황이었다. 한글로 쓴 그 편지에는 자신이 얼마나 손 작가 작품을 좋아하는지, 일본 독자에게 어떻게 소개하고 싶은지 등이 정성껏 담겨 있었다. 이진희 은행나무 이사는 “일본 문학이 국내에서 붐일 때 오쿠다 히데오나 히가시노 게이고 같은 작가를 잡으려고 우리도 이렇게 편지를 쓰며 공을 들였다”며 “격세지감을 느꼈다”고 말했다. 올해도 노벨 문학상의 계절은 우리와 별 상관 없이 지나간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최근 세계 속 ‘한국 문학의 판’은 눈에 띄게 들썩이고 있다. 미국 최고 권위 문학상인 전미도서상을 비롯해 세계 각국 문학상 후보에 연이어 오르내리고 있고, 인기 국내 작가를 잡기 위한 판권 경쟁도 전례 없이 불붙었다. 올 초부터 크고 작은 낭보가 날아들었다. 손 작가를 시작으로 김금숙 작가의 ‘풀’(미국 하비상 최우수 국제도서부문), 김영하 작가의 ‘살인자의 기억법’(독일 독립출판사 문학상), 김이듬 시인의 ‘히스테리아’(전미번역상, 루시엔 스티릭 번역상) 등이 해외 문학상을 받았다. 수상은 못 했어도 영미권의 주요 문학 및 번역상 후보에 한국 문학 작가가 다수 오른 것은 괄목할 만하다. 전미도서상 예심 후보에 ‘82년생 김지영’의 조남주를 비롯해 재일교포 작가 유미리와 재미교포 시인 최돈미 등 한국계 작가 세 명이 오른 건 이례적이다. 소설가 윤고은의 ‘밤의 여행자’는 최근 영국 더타임스와 가디언, 미 타임지 등 주요 언론에서 호평 받았다. 한류(K-culture)의 선전 속에 ‘K-LIT(케이릿·K-Literature)’ 역시 세계 무대를 향해 예열되고 있음을 방증하는 사례가 다방면에서 감지되고 있다.○ “해외서 통해”… 자생적 수출 비중 늘어 10여 년 전만 해도 한국 문학은 해외에서 관심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었다. KL매니지먼트 이구용 대표는 “2005년 에이전시를 처음 시작할 때만 해도 정부 지원이나 문화 교류 차원 이외의 한국 문학 수출은 없다시피 했다”며 “영미권에서는 한 해 한 건 계약도 힘들었고 경제적 성과를 내는 것이 쉽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러던 중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2008년), 황선미의 ‘마당을 나온 암탉’(2002년)이 각각 39개국, 29개국에 수출된 것은 한류 콘텐츠로서 한국 문학의 가능성을 확인한 시초였다. 2016년 한강의 ‘채식주의자’가 세계 3대 문학상으로 꼽히는 맨부커상을 받으며 한국 문학에 대한 인지도를 높였다. 이런 사례들은 좋은 작품을 발굴할 경우 사업성이 있음을 확인한 계기가 됐다. 과거 한국 문학은 주로 지원 정책의 하나로 해외에 일방적으로 소개됐다. 이 때문에 수출이 는 것처럼 보여도 제대로 된 작품 대접을 받지 못한다는 지적이 많았다. 최근 상황은 다르다.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 등에 따르면 한국 문학의 총 수출 건수는 2014년 119권에서 지난해 306권으로 3배 가까이로 늘었다. 양적으로도 대폭 성장했지만 한국문학번역원의 지원 사업을 통하지 않은 수출이 2014년 전체 30%(34권)에서 지난해 70%(210권)로 늘어났다는 점은 눈여겨볼 만하다. 특히 해외 출판사가 저작권 계약을 먼저 한 뒤에 지원 사업에 공모하는 비중도 늘고 있다. 이런 ‘선(先)계약, 후(後)지원’ 사례는 2014년 10여 종이었지만 올 9월 말 기준 109종으로 급증했다. 박소연 한국문학번역원 해외사업1팀장은 “한국 문학에 대한 관심이 커진 데다 양질의 번역 전문가도 늘면서 자발적으로 도서를 출판하려는 현지 수요가 증가했다”고 말했다. 기관 주도 공모에 뽑히면 번역, 해외 출판사 섭외, 출간까지 2∼3년이 소요되지만 해외 출판사가 자발적으로 계약하면 1년 안에 출간까지 가능해 작품을 시의성 있게 소개할 수 있다. 박 팀장은 “자체적으로 작품과 번역가 선정은 물론 출간과 문학 행사 등 마케팅까지 진행하기 때문에 현지 언론과 독자들의 주목도 역시 높을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불모지’ 일본서 발아하는 ‘케이릿’ 현지의 자발적 출간 수요가 늘자 아예 한국 문학 전문 출판사가 생기거나 판권 수입 경쟁이 벌어지는 등 새로운 현상도 나타난다. 지난해 설립된 프랑스의 마탱 칼므 출판사는 ‘K스릴러’로 불리는 한국 장르문학을 전문 출간한다. 초판만 5000부가량 찍는데, 팔린다는 확신이 있어야 가능한 수치다. 한국 소설 시리즈를 신설하기도 한다. 대만의 문학전문출판사 만유자문화는 ‘82년생 김지영’이 히트를 치자 다른 한국 작가에게도 눈을 돌려 ‘김영하 시리즈’ 등을 출간 중이다. 러시아 최대 출판그룹 AST는 2017년부터 자회사를 통해 ‘K시리즈’를 기획해 한강 정유정 작가 등의 책을 내고 있다. 한국 작가에 대한 반응이 좋아지면서 선인세는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이 뛰고 있다. 대개 200만∼300만 원이던 선인세는 최소 10배 이상으로 뛰었다. 중국 대만 일본 등 아시아권에서 특히 뜨겁다. 대니홍 에이전시의 홍대규 대표는 “실제로 경쟁이 당황스러울 정도로 심해졌다”라고 말한다. 일본에서의 한국 문학 붐은 주목할 만하다. 출판산업실태조사(2013∼2016년)에 따르면 국내 도서저작권 수출에서 아시아는 전체의 85%를 차지한다. 이 중 중국(48.9%) 태국(14%) 등과 달리 일본 수출 비중은 1.9%에 불과했다. 한국 책, 특히 한국 문학과 일본 문학의 수출입 격차가 극심해 ‘불모지’로 통했다. 하지만 최근 분위기는 사뭇 다르다. 최근 일본에서 관심을 받고 있는 여성 차별 문제를 선제적으로 다룬 한국 페미니즘 문학이 베스트셀러에 오르는 등 시장성이 구체적으로 확인됐다. 2018년 출간된 ‘82년생 김지영’은 15만 부 넘게 팔리며 6개월간 주요 서점 해외문학 판매 1위를 기록했다. 최은영 ‘쇼코의 미소’, 정유정 ‘7년의 밤’ ‘종의 기원’, 김애란 ‘바깥은 여름’ 등이 소개돼 주목받았다. 일본 출판계에서 “영미 소설보다 한국 소설 반응이 확실하다”는 인식도 생겼다. 한류의 후광 효과도 무시할 수 없다. 김수현 작가의 에세이 ‘나는 나로 살기로 했다’는 일본에서 24만 부가 팔리는 ‘빅 히트’를 쳤다. ‘BTS(방탄소년단)가 읽는 책’으로 알려지며 이슈 몰이를 했다. 김 작가의 신작 ‘애쓰지 않고 편안하게’는 일본에 선인세 2억 원에 계약됐다. 홍 대표는 “일본 출판사들은 소설을 검토할 때 어떤 셀럽(명사)이 읽고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홍보한 이력이 있는지 반드시 문의한다”며 “한국 문학 역시 K컬처 덕을 보는 셈”이라고 말했다. 중국에서는 한한령(韓限令)이 풀리며 수요가 폭발 중이다. 미중 무역갈등으로 세계 최대 출판 시장인 미국 저작권 수입이 주춤한 것이 한국에 반사 효과를 주고 있다.○ 정보망 체계화-번역자 집중 육성 필요 케이릿의 인지도가 높아졌다고 해서 한국 문학을 ‘한류’라 부를 수 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일본 등의 케이릿 붐이 지속될지도 확신하기 어렵다. 하지만 “과거와 확연한 차이가 있는 것은 분명하다”고 출판계는 진단한다. 민음사 저작권부 남유선 이사는 “지금까지는 해외 에이전트나 편집자에게 우리 작품을 한번 읽게 하는 데조차 너무 많은 시간이 걸렸다”며 “적어도 지금은 작품이 검토될 수 있는 기반이 만들어졌다. 매우 중요한 변화”라고 말했다. 한국 문학이 해외 메이저 출판사의 관심 영역으로 편입되면서 좋은 작품이란 판단이 들면 출간으로 이어진다. 김혜진 작가의 장편 ‘딸에 대하여’는 영국 내 세 출판사가 경합해 피카도르가 판권을 가져갔다. 프랑스에서는 갈리마르와 계약했다. 문학동네 창비 민음사 등 대형 단행본출판사들은 수출 관련 업무가 늘면서 저작권 부서를 독립적으로 운영하기 시작했다. 수출 에이전시도 늘었다. 이구용 대표는 “한국 문화 전반의 인지도 상승 등이 작용해 한국 문학도 결실의 발판, 붐의 초기 단계에 진입 중이다”라고 말했다. 문제는 앞으로다. 이런 흐름을 대세로 이어가기 위해서는 우수한 번역 전문가 양성뿐 아니라 체계적 정보 공유가 필요하다. 홍대규 대표는 “결국 여전히 진입이 쉽지 않은 영미 시장에 진출해야 세계로 뻗을 수 있다”며 “우수한 번역가에 대한 정보를 공유하고 체계적으로 번역을 지원한다면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박찬수 책문화콘텐츠연구소 대표는 문학 수출 현황을 공유할 통합전산망이 필요하다고 제안했다. 박 대표는 “한국 문학에 대한 현지 출판사나 에이전시의 관심은 높지만 막상 객관적 자료가 없어 판단을 내리기 어려워하는 경우가 많다”며 “어떤 작품이 어떤 언어권에 소개됐는지 알려주는 객관적 자료를 활용할 수 있다면 판권 계약에 도움이 되고 이를 바탕으로 영어, 일본어 등 일부 언어에 집중된 지원을 중동, 동남아 등지로 넓힐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박선희 문화부 기자 teller@donga.com}

지난주 서울 종로구 서촌의 가드닝숍 ‘노가든’ 앞에는 새벽부터 긴 줄이 생겼다. 최근 ‘핫한’ 화분인 ‘두갸르송’ 토분(土盆)이 입고되는 날이었다. 최근 한두 달에 한 번씩 꼭 벌어지는 진풍경이다. 구매 수량을 모델당 1개로 제한해도 당일 완판. 기다리고도 허탕 치는 이들이 적지 않아 ‘두갸르송 대란’이라 불린다. 두갸르송 토분은 온라인에서도 1, 2분 안에 품절된다. 남은 물량을 파는 오프라인 매장으로 사람들이 몰리는 이유다. 노은아 노가든 대표는 “원래 마니아층이 있었지만 코로나19 이후 불어닥친 가드닝(gardening·정원 가꾸기) 열풍으로 더 인기”라며 “‘레어템’ ‘핸드메이드’(수제)라고 SNS에서 입소문이 나 경쟁이 심해졌다”고 말했다. 사용했던 제품도 중고 사이트에서 새것과 같은 시세나 웃돈을 얹어 거래된다. 코로나19 시대 재택근무 증가 등으로 가드닝 인구가 부쩍 늘면서 가드닝의 완성이자 ‘식물의 옷’인 화분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실내 환경과 인테리어에서 차지하는 식물의 비중이 급증하면서 화분 역시 대충 고를 수 없는 중요한 소품이 된 것. 이른바 ‘베란다 가드너’에게 가장 인기 있는 화분은 테라코타(terracotta) 토분이다. 점토를 섭씨 600∼1000도에서 구워내 오렌지 빛이 돈다. 유약을 바르지 않아 소박하고 세월에 따라 빈티지한 멋이 더하는 화분이다. 통기성과 내구성이 우수한 데다 어느 식물에나 두루두루 잘 어울린다. 지중해나 유럽의 정원에서는 야외에 놓고 투박한 느낌을 즐긴다. 덴마크 베르(베르그) 화분 등이 이런 감성을 잘 보여준다. 테라코타 토분의 일종인 두갸르송이 ‘대란’을 부른 것은 국내 베란다 가드너들의 감성을 충족시키는 세련된 디자인에 색감을 더해서다. 박정진 두갸르송 대표가 사업을 시작하던 2011년만 해도 국내에는 제대로 된 토분이 드물었다. 프랑스에서 회화를 공부한 박 대표는 “귀국 후 좋아하는 화초를 기를 만한 예쁜 화분이 없어 직접 만든 것이 사업이 됐다”고 말했다. 그때만 해도 다들 ‘도자기 만들다 생긴 불량품을 화분으로 쓰면 되는 거 아니냐’ ‘화분이 비쌀 이유가 뭐냐’고들 했다. 전공자 사이에선 화분 제작이 도자기에 비해 수준 낮은 작업이라 보는 풍토도 있었다. 하지만 몇 년 만에 전세가 역전됐다. 그는 “한국은 뭐든 빠르고 최고를 선호하는 문화가 강하다”며 “화분도 일단 한번 관심이 생기자 해외 수준을 빠르게 따라잡고 있다”고 말했다. 30, 40대 가드닝족(族)이 ‘감성 토분’에 열광하면서 두갸르송뿐 아니라 카네즈센, 제네스포터리, 스프라우트 같은 도예가들이 직접 만드는 토분도 큰 인기다. 디자인이나 소재에 따라 가격대는 다양하지만 대개 지름 10cm 안팎의 작은 화분은 2만∼5만 원, 30cm 안팎의 대형은 10만 원대다. 가격이 문제가 아니라 수작업이어서 공급량 자체가 많지 않다. 가드너들이 선호하는 것은 공장에서 대량 생산한 제품이 아니라 공방에서 일일이 사람 손을 거쳐 만든 것이다. 같은 모델이라도 똑같은 화분이 하나도 없어 ‘한정판’의 특별함을 준다. 일부 유약분도 토분과는 또 다른 매력으로 수집욕을 자극한다. 토분이 인기라고 해서 반드시 수제 화분을 고집할 필요는 없다. 상대적으로 값이 나가는 데다 무거워 손목에 무리도 많이 온다. 베란다 가드너라면 저렴하고 가벼운 플라스틱 화분을 섞어 쓰는 것이 필수다. 노은아 대표는 “데로마 토분과 엘호 플라스틱 화분이 가성비가 좋다”며 추천했다. 무엇보다 식물의 특성에 맞게 소재나 크기를 골라야 하는 것은 기본 중의 기본. 고온다습한 환경을 좋아하는 식물이라면 통기성이 뛰어난 토분보다는 유약분이나 도자기 화분을 고르는 것이 좋다.박선희 기자 teller@donga.com}

요즘 인테리어 고수들이 공개하는 ‘랜선 집들이’에서 빠지지 않는 핫템이 하나 있다. 실링팬(ceiling fan)이 그 주인공이다. 천장에 달린 일종의 대형 선풍기로, 무더운 동남아시아 휴양지 혹은 층고가 높은 유럽, 미국 주택에 멋스럽게 설치돼 있다. 이 이국적인 아이템이 요즘 대한민국의 일반 아파트 거실 안으로 빠르게 파고들고 있다. ‘온라인 집들이’ 트렌드를 반영해 SBS가 올해 추석 방송한 파일럿 프로그램 ‘홈스타워즈’에서 인테리어 고수들의 집 여러 곳을 소개했다. 자연 친화형, 프렌치형, 레트로형 등 취향에 따라 제각각으로 꾸몄지만 공통적으로 눈에 띈 아이템은 실링팬이었다. 실링팬을 설치하는 가장 기본적인 이유는 공기 순환을 위해서다. 층고가 높은 집의 경우 에어컨 등 냉난방 장치를 틀어도 효과가 현저히 떨어질 수밖에 없다. 공기 순환이 제대로 되지 않아 환기도 어렵다. 이때 대형 팬으로 구성된 실링팬은 톡톡히 제 역할을 한다. 동남아처럼 무더운 지역에서는 에어컨이 없을 때도 요긴하게 쓰인다. 국내에서 실링팬이 인기를 끄는 건 환기가 용이해 쾌적하고 냉난방비 절약에 도움이 된다는 실용적 이유뿐만 아니라 이국적인 인테리어 효과 덕이 크다. 소재, 디자인에 따라 다양한 실내 분위기를 연출하기에 제격이기 때문이다. 특히 요즘은 거실의 환한 메인등을 떼고 매립등이나 간접조명으로 은은한 분위기를 살리는 것이 트렌드다. 메인등이 빠진 썰렁한 거실 천장을 실링팬이 빠르게 점령하고 있다. 실링팬은 국내에서 생산되는 제품은 물론이고 수입품을 파는 곳도 거의 없어 해외 사이트에서 직접구매를 해야 했지만 요즘은 해외 제품이 공식 수입돼 다양한 제품을 선택할 수 있다. LG전자는 올해 8월경 신제품으로 ‘실링팬’을 처음 내놓았다. 이 시장의 성장 속도가 심상치 않다는 걸 보여주는 셈이다. 가격대는 브랜드, 크기, 성능에 따라 다양하지만 수입품인 루씨에어, 에어라트론 같은 인기 제품은 보통 40만∼60만 원대다. 메인조명을 뗀 자리에 실링팬을 설치하기 때문에 조도가 충분치 않을 경우 중앙 부분이 조명으로 된 제품을 선택하면 된다. 설치할 때는 무엇보다 안전에 유념해야 한다. 국내 주택은 층고가 보통 2300∼2400mm 정도이기 때문에 위험하지 않도록 층고에 알맞은 제품을 고르는 것이 중요하다. 천장에 비교적 가깝게 붙어 있고 팬 크기가 길지 않은 화이트, 우드톤의 현대적인 디자인이 요즘 인기다.박선희 기자 teller@donga.com}

지난주 서울 종로구 서촌의 가드닝숍 ‘노가든’ 앞에는 새벽부터 긴 줄이 생겼다. 최근 ‘핫한’ 화분인 ‘듀갸르송’ 토분(土盆)이 입고되는 날이었다. 최근 한두 달에 한 번씩 꼭 벌어지는 진풍경이다. 구매 수량을 모델 당 1개로 제한해도 당일 완판. 기다리고도 허탕 치는 이들이 적지 않아 ‘듀갸르송 대란’이라 불린다. 듀가르송 토분은 온라인에서도 1~2분 안에 품절된다. 남은 물량을 파는 오프라인 매장으로 사람들이 몰리는 이유다. 노은아 노가든 대표는 “원래 마니아층이 있었지만 코로나19 이후 불어닥친 가드닝(gardening·정원 가꾸기) 열풍으로 더 인기”라며 “‘레어템’ ‘핸드메이드(수제)’라고 SNS에서 입소문이 나 경쟁이 심해졌다”고 말했다. 사용했던 제품도 중고사이트에서 새것과 같은 시세나 웃돈을 얹어 거래된다. 코로나19 시대 재택근무 증가 등으로 가드닝 인구가 부쩍 늘면서 가드닝의 완성이자 ‘식물의 옷’인 화분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실내 환경과 인테리어에서 차지하는 식물의 비중이 급증하면서 화분 역시 대충 고를 수 없는 중요한 소품이 된 것. 이른바 ‘베란다 가드너’에게 가장 인기 있는 화분은 테라코타(terracotta) 토분이다. 점토를 섭씨 600~1000도에서 구워내 오렌지 빛이 돈다. 유약을 바르지 않아 소박하고 세월에 따라 빈티지한 멋이 더하는 화분이다. 통기성과 내구성이 우수한 데다 어느 식물에나 두루두루 잘 어울린다. 지중해나 유럽의 정원에서는 야외에 놓고 투박한 느낌을 즐긴다. 덴마크 베르그 화분 등이 이런 감성을 잘 보여준다. 테라코타 토분의 일종인 듀가르송이 ‘대란’을 부른 것은 국내 베란다 가드너들의 감성을 충족시키는 세련된 디자인에 색감을 더해서다. 박정진 듀가르송 대표가 사업을 시작하던 2011년만 해도 국내에는 제대로 된 토분이 드물었다. 프랑스에서 회화를 공부한 박 대표는 “귀국 후 좋아하는 화초를 기를만한 예쁜 화분이 없어 직접 만든 것이 사업이 됐다”고 말했다. 그때만 해도 다들 ‘도자기 만들다 생긴 불량품을 화분으로 쓰면 되는 거 아니냐’ ‘화분이 비쌀 이유가 뭐냐’고들 했다. 전공자 사이에선 화분 제작이 도자기에 비해 수준 낮은 작업이라 보는 풍토도 있었다. 하지만 몇 년 만에 전세가 역전됐다. 그는 “한국은 뭐든 빠르고 최고를 선호하는 문화가 강하다”며 “화분도 일단 한번 관심이 생기자 해외 수준을 빠르게 따라잡고 있다”고 말했다. 30, 40대 가드닝족(族)이 ‘감성 토분’에 열광하면서 듀갸르송뿐 아니라 카네즈센, 제네스포터리, 스프라우트 같은 도예가들이 직접 만드는 토분도 큰 인기다. 디자인이나 소재에 따라 가격대는 다양하지만 대게 지름 10cm 안팎의 작은 화분은 2만~5만 원, 30cm 안팎의 대형은 10만 원대다. 가격이 문제가 아니라, 수작업이어서 공급량 자체가 많지 않다.가드너들이 선호하는 것은 공장에서 대량생산한 제품이 아니라 공방에서 일일이 사람 손을 거쳐 만든 것이다. 같은 모델이라도 똑같은 화분이 하나도 없어 ‘한정판’의 특별함을 준다. 일부 유약분도 토분과는 또 다른 매력으로 수집욕을 자극한다. 토분이 인기라고 해서 반드시 수제 화분을 고집할 필요는 없다. 상대적으로 값이 나가는데다 무거워 손목에 무리도 많이 온다. 베란다 가드너라면 저렴하고 가벼운 플라스틱 화분을 섞어 쓰는 것이 필수다. 노은아 대표는 “데로마 토분과 엘호 플라스틱 화분이 가성비가 좋다”며 추천했다. 무엇보다 식물의 특성에 맞게 소재나 크기를 골라야하는 것은 기본 중의 기본. 고온다습한 환경을 좋아하는 식물이라면 통기성이 뛰어난 토분보다는 유약분이나 도자기 화분을 고르는 것이 좋다.박선희 기자 teller@donga.com}

《작가의 존재는 작품으로 증명된다. 올해만 해도 장편소설 ‘기억’과 희곡 ‘심판’까지 두 권의 책을 베스트셀러 목록에 올려놓은 이 작가가 물리적 거리와 달리 한국 독자에게 유독 가깝고 친근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그 때문일 것이다. 프랑스 작가 베르나르 베르베르(59)는 독창적인 발상과 지적 탐구가 융합된 흡인력 높은 작품을 선보여온 한국인의 ‘최애작가’ 중 한 명이다. 전 세계에서 팔린 그의 책 2300만 부 중 절반이 국내에서 팔렸다. 작가 역시 “(한국인은) 세계에서 가장 지적인 독자”라고 추켜세웠다. 1993년 데뷔작 ‘개미’ 이후 30년 가까이 한국 독자 특유의 왕성한 호기심과 두터운 팬심을 충족시킬 수 있었던 건 자기관리의 ‘끝판왕’이라 할 만큼 철저한 글쓰기 습관 덕분이다. 출판사 관계자는 거의 매년 한두 권의 신간을 내면서도 “출간을 기다리는 다른 초고가 항상 준비돼 있다”고 귀띔한다. 장르도 자유롭게 넘나든다. 천국의 법정에서 벌어진 판결을 유쾌하게 그려낸 ‘심판’(프랑스에서는 2015년 출간)은 “신선하고 흥미롭다”는 평 속에 국내에서 7만 부가 팔렸다. 여러 장르의 글을 독특한 발상과 예측 불허 전개라는 ‘베르베르 전용’ 거푸집에서 쉼 없이 주조해내는 그의 ‘비법’을 e메일 인터뷰로 들어봤다.》―데뷔 이후 한 해 평균 1.5권의 책을 썼다. 철저한 글쓰기 습관은 어떤 방식인지 구체적으로 소개해 달라. “16세 때부터 매일 오전 8시∼낮 12시 반에 10페이지를 썼다. 이런 리듬으로 매년 두 권을 써서 한 권은 출간하고 나머지는 컴퓨터에 저장해둔다. 물론 오전 8시부터 글이 술술 써지진 않는다. 카페에 앉아 전날 작업한 내용을 다시 읽고 뼈대를 정교하게 만들 궁리를 하다 보면 오전 11시쯤 글쓰기 자체에 완전히 몰입하게 된다. 예열이 끝난 기계 엔진처럼 말이다. 모든 분야가 그렇지만 특히 예술 창작자들은 엄격한 자기관리가 필요하다. 영감이 오기만 기다리거나 여유 있게 집중할 시간을 찾으려다 보면 방만해지기 쉽다.” ―지속적인 글쓰기를 위해 가장 필요한 건 무엇인가. “마라톤에 임하는 자세다. 일단 일정한 페이스에 도달하면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 절대 멈추지 말아야 한다.” 매일 규칙적인 시간대에 이뤄져온 ‘글쓰기 리듬’을 40년 넘게 유지하는 그에게 글은 단순히 노동이 아니다. 글쓰기는 “매일 같은 시간 이뤄지는 즐거운 만남” 같은 것이며 “하루의 약속이자 삶의 지표”다. 베르베르는 “글을 쓰지 않고 지나가는 하루는 막막함과 허전함뿐일 것이며 그런 날이 며칠 이어지면 우울함이 밀려올 것 같다”며 “아마 나는 책을 내줄 출판사나 읽어 줄 독자가 없는 무인도에 혼자 살더라도 글쓰기를 멈추지 않을 것 같다”고 말했다. ―스케일과 분량이 방대한 작품이 많다. 아이디어와 구상을 어떻게 발전시켜 나가나. “보통 단편을 쓰고 장편으로 확장시킨다. 10페이지 내외 단편을 매일 초저녁에 하나씩 쓴 적도 있다. 거칠게라도 아이디어를 던져놓고 천천히 발전시킨다. 단편이 장편을 위한 디딤돌이 되는 셈이다. 장편을 쓰다 도저히 그 안에 다 담을 수 없다 싶으면 연작을 시도한다. ‘개미’ ‘신’ ‘제3인류’ 3부작이 그렇게 만들어졌다. 소설은 살아 움직이는 생명체 같아서 자신이 원하는 길이와 크기를 일러준다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기억’은 최면을 통한 신비주의적인 전생 탐험을, ‘심판’은 천국에서의 일을 다룬다. 특히 최근작에서 죽음이나 전생, 사후세계 등에 대한 관심이 많이 엿보이는데…. “인간이라면 ‘우리는 어디서 왔고 누구이며 어디로 가는가’라는 질문, 즉 영성(靈性)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책을 통해 독자들을 그 질문에 동참시키고 싶었다. 나는 과학이라는 중간 단계를 거쳐 영성으로 향하는 길에 들어서게 됐다. 전직 과학기자인 내가 소설가로서 하는 작업은 진실이나 확신의 영역이 아니라 세계를 이해하려는 소망의 일환이다.” 과학잡지에서 7년간 기자로 일한 그는 기술, 미래 등에 대한 공상과학(SF)적 상상력으로 ‘뇌’ ‘나무’ 등을 썼다. 하지만 이후 관심사가 영혼, 영성 같은 신비주의 영역으로 확장됐다. 최근엔 최면에 심취하기도 했다. 그는 “삶에 대한 나의 새로운 시각과 관점을 독자들과 나누고 싶어서 더 열심히 쓴다”고 했다. ―희곡은 소설 쓸 때와는 어떻게 다른가. “어떤 면에서 희곡은 창작자에게 소설보다 더 큰 재미를 준다. 공이 왔다 갔다 하는 탁구를 연상시키는 등장인물 간의 대화를 쓸 때 소설 속 대화와는 다른 차원의 쾌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제한된 공간에서 제한된 인물들로 이야기를 풀어 나가야 하다 보니 창의성을 시험받게 되는데, 좋은 훈련 기회가 되는 것 같다. 내게 희곡 집필은 소설 사이에 부담 없이 즐기는 휴식 같은 시간이기도 하다. 길이가 비교적 짧은 것도 빼놓을 수 없는 매력이고.” ―태어나기 전, 우리가 부모부터 자신의 재능 같은 모든 환경을 골랐다는 ‘심판’의 설정이 흥미롭다. 사람들이 자신의 삶과 환경을 더 긍정하기를 원하나. “세상이 불공정하고 자신에게 주어진 삶이 부당하다며 불평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태도는 불교의 세계관과 맞닿아 있다. 주어진 삶의 조건을 수용하는 순간 남에 대한 질투와 자기 폄훼는 설 자리를 잃는다. 그때야 비로소 우리는 자기 삶의 주인이 될 수 있다. 체념하라는 뜻이 아니다. 자신의 장점과 단점을 파악해 앞으로 나아갈 길을 모색하라는 것이다. 포커에 비유하자면 나쁜 패를 쥐고도 얼마든지 게임에서 이길 수 있고, 좋은 패를 쥐고도 언제든 질 수도 있다. 게임의 방식이 결과를 결정하기 때문이다.” ―작품 속 유머가 가독성을 높인다. 소설 ‘죽음’에서 “좋은 책은 결국 한마디의 멋진 농담 같은 거 아니겠나”라고도 했다. 유머는 얼마나 중요한가. “프랑스어에서 영성(spiritualit´e)이라는 단어는 유머러스함을 표현할 때도, 기도와 명상, 종교와 관련된 표현에도 쓰인다. 유머는 정신의 놀이이자 구도의 한 방식으로도 볼 수 있지 않을까. 죽음이나 환생 같은 소재를 다룰 때 자칫 경직되고 진지하게만 접근하기 쉽다. 하지만 유머의 존재는 겸허한 태도와 거리 두기를 가능하게 한다.” ―소설의 소재를 찾을 때 무엇을 중요하게 생각하나. “다른 작가들이 아직 다루지 않았고 나 역시 지금까지 시도하지 않았던 소재를 찾아내는 것을 가장 고민한다. 새롭고 참신한 소재와 아이디어를 발굴하기 위해 늘 긴장한다. 며칠 후 프랑스에서 출간되는 ‘고양이’ 3부작의 마지막 편은 인류의 종말과 다른 종으로의 지식 전수를 다룬다. 요즘은 ‘기억’의 후속편도 구상 중이다. 퇴행최면이란 소재를 통해 독창적 역사소설을 선보일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작가로서의 궁극적인 목표가 있나. “내 작품이 아직은 알 수 없는 모종의 복잡하고 원대한 계획의 일부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부지런히 산을 오르고 있으나 정작 그 산이 어떻게 생겼는지는 모르는 상태라고 할까. 산 정상에 도달하고 나야 비로소 그 모든 것의 의미를 깨닫게 되지 않을까 싶다.” ―“지상은 무지하고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는 곳”이란 대사가 시의성이 있다. 삶의 속성도 그렇지만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대유행으로 더욱 이해하지 못하는 시절을 보내는 중이다. “프랑스에서 올봄 발표한 단편에서 ‘3주 만에 끝난다고 했던 상황이 3년 동안 지속됐다’라고 썼다. 그 말이 진실이 돼갈 줄은 꿈에도 몰랐다. 비록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지만 페스트가 창궐했을 땐 이보다 더한 고통도 있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현재 상황은 우리에게 기존의 관습을 포기하고 새로운 삶의 방식을 채택할 것을 요구한다. 새로운 질서에 적응하는 것은 물론 쉽지 않다. 하지만 다람쥐 쳇바퀴 돌듯, 늘 똑같이 반복되는 하루하루야말로 우리 인간에게 최악이 아닐까. 누군가는 코로나로 인해 가족끼리 보내는 시간이 많아졌고, 누군가는 노동 방식의 급격한 변화를 겪고 있다. 당장은 이런 변화가 불편하게 느껴지기도 하고, 안타깝게도 사망자도 많이 발생하지만 지금의 위기가 긍정적인 효과 또한 발휘했다는 사실을 알게 될 날이 분명히 올 것이다. 삶의 순환을 위해서는 늘 같은 자리에 머물러 있을 수는 없다. 위기는 순환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이런 시기 한국 독자를 위한 조언을 건넨다면…. “자신의 삶의 의미를 깊이 고민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프랑스에서는 명상을 하는 사람이 전보다 많이 늘어났다. 요리나 그림에 관심을 갖거나 새롭게 취미로 삼을 만한 것을 찾는 사람도 부쩍 많아졌다. 부정적인 상황을 긍정적으로 바꾸기 위해 각자가 자기 자리에서 뭔가 변화를 모색해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베르나르 베르베르△ 1961년 프랑스 툴루즈 출생 △ 1979년 툴루즈 제1대학 법학 전공 △ 1983년 7년간 시사주간지 ‘르 누벨 옵세르바퇴르’ 과학 기자△ 1991년 120회 개작 끝에 ‘개미’로 데뷔△ 1993년 ‘개미’ 한국어판 출간. 베스트셀러 작가로 자리 매김 박선희 기자 teller@donga.com}

“박경리문학상을 받게 됐다는 소식에 40여 년 전 낸 첫 소설집 ‘황혼의 집’이 떠올랐습니다. 독학으로 문학을 공부한 시골 출신 신인 작가의 첫 책을 보고 먼저 다가와 괄목상대해주신 분이 바로 선생이었습니다. 생명의 가치와 존엄을 강조한 선생님의 지론이 그대로 제 문학의 밑거름으로 작용했습니다.” 제10회 박경리문학상을 수상한 소설가 윤흥길 씨는 24일 강원 원주시 토지문화관에서 열린 시상식에서 박경리 선생과의 오랜 인연을 먼저 회상했다. 그는 “곤궁하고 고적한 처지였던 내게 매번 ‘살인(殺人)하는 문학이 아니라 활인(活人)의 문학을 해야 한다’ ‘흙을 만지고 생명을 다루는 생활을 해야 한다’며 따뜻한 격려와 귀중한 가르침을 주셨다”며 “오늘의 이 자리를 미리 마련하신 선생님께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올해 시상식은 코로나19로 인해 30여 명의 관계자가 참석한 가운데 인터넷 생중계로 진행됐다. 토지문화재단(이사장 김세희)과 박경리문학상위원회, 강원도, 원주시, 동아일보가 공동 주최하는 박경리문학상은 박경리 선생(1926∼2008)을 기리기 위해 2011년 제정된 세계문학상이다. 1회 수상자인 최인훈 작가 이후 류드밀라 울리츠카야(러시아), 베른하르트 슐링크(독일), 아모스 오즈(이스라엘), 이스마일 카다레 작가(알바니아) 등이 수상했으며 윤 작가는 한국 작가로는 두 번째 수상자가 됐다. 윤 작가는 한국 문학 고전의 반열에 오른 ‘장마’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 ‘에미’와 최근작인 대하소설 ‘문신’ 등에서 분단과 산업화 시대 등 한국 현대사를 배경으로 시대의 모순과 소외 문제를 치열하게 다뤄왔다. 그는 “사회와 인간은 물과 물고기 관계 같아서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조화로운 관계를 유지할 때 비로소 살맛 나는 세상이 가능하다”며 “날로 오염되는 사회에 똥침을 가하고 신음하는 인간을 마음으로 부축해주는 일을 작가의 역할로 알고 생애의 끝자락까지 창작에 매달리겠다”고 말했다. 김우창 박경리문학상 심사위원장은 김승옥 심사위원이 대독한 심사평에서 “윤흥길 작품이 근대화 이전 전통사회의 모순과 갈등을 그대로 노출하면서도 그 밑바닥의 감정적, 근본적 유대를 통한 화해의 가능성을 보여 줬다”고 평가했다. 이날 시상식에는 김광수 원주부시장, 정창영 박경리문학상위원회 위원장, 김세희 토지문화재단 이사장, 이상만 마로니에북스 대표, 김사인 한국문학번역원장, 김순덕 동아일보 전무 등이 참석했다. 원주=박선희 기자 teller@donga.com}

“박경리문학상을 받게 됐다는 소식에 40여 년 전 낸 첫 소설집 ‘황혼의 집’이 떠올랐습니다. 독학으로 문학을 공부한 시골 출신 신인 작가의 첫 책을 보고 먼저 다가와 괄목상대해주신 분이 바로 선생이었습니다. 생명의 가치와 존엄을 강조한 선생님의 지론이 그대로 제 문학의 밑거름으로 작용했습니다.” 제10회 박경리문학상을 수상한 소설가 윤흥길 씨는 24일 강원 원주시 토지문화관에서 열린 시상식에서 박경리 선생과의 오랜 인연을 먼저 회상했다. 그는 “곤궁하고 고적한 처지였던 내게 매번 ‘살인하는 문학이 아니라 활인의 문학을 해야한다’ ‘흙을 만지고 생명을 다루는 생활을 해야 한다’며 따뜻한 격려와 귀중한 가르침을 주셨다”며 “오늘의 이 자리를 미리 마련하신 선생님께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올해 시상식은 코로나19로 인해 30여 명의 관계자가 참석한 가운데 인터넷 생중계로 진행됐다. 토지문화재단(이사장 김세희)과 박경리문학상위원회, 강원도, 원주시, 동아일보가 공동 주최하는 박경리문학상은 박경리 선생(1926~2008)을 기리기 위해 2011년 제정된 세계문학상이다. 1회 수상자인 최인훈 작가 이후 류드밀라 울리츠카야(러시아), 베른하르트 슐링크(독일), 아모스 오즈(이스라엘), 이스마일 카다레(알바니아) 작가 등이 수상했으며 윤 작가는 한국 작가로서는 두 번째로 올해의 수상자가 됐다. 윤 작가는 한국 문학 고전의 반열에 오른 ‘장마’ ‘아홉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 ‘에미’와 최근작인 대하소설 ‘문신’ 등에서 분단과 산업화 시대 등 한국 현대사를 배경으로 시대의 모순과 소외 문제를 치열하게 다뤄왔다. 그는 “사회와 인간은 물과 물고기 관계 같아서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조화로운 관계를 유지할 때 비로소 살 맛 나는 세상이 가능하다”며 “날로 오염되는 사회에 똥침을 가하고 신음하는 인간을 마음으로 부축해주는 일을 작가의 역할로 알고 생애의 끝자락까지 창작에 매달리겠다”고 말했다. 김우창 박경리문학상 심사위원은 김승옥 심사위원이 대독한 심사평에서 “윤흥길 작가는 6.25 전쟁의 비극과 이념 대립, 산업화 과정을 통해 왜곡된 역사 현실과 삶의 부조리를 극복하려는 인간의 노력을 그려냈다”며 “근대화 이전 전통사회의 모순과 갈등을 그대로 노출하면서도 그 밑바닥의 감정적, 근본적 유대를 통한 화해의 가능성을 보여 줬다”고 평가했다. 최문순 강원도지사는 “박경리 선생은 한민족 역사와 인간 삶의 근원을 탐구한 명실상부 대한민국 대표 작가”라며 “쟁쟁한 후보를 제치고 영예를 거머쥐신 윤흥길 작가께 축하 인사를 전한다”고 축사를 전했다. 이날 시상식에는 김광수 원주부시장, 정창영 박경리문학상위원회 위원장, 김세희 토지문화재단 이사장, 이상만 마로니에북스 대표, 김사인 한국문학번역원장, 김순덕 동아일보 전무 등이 참석했다.원주=박선희 기자 teller@donga.com}

중일전쟁이 한창이던 1938년, 학업 중에 징병 통보를 받은 스무 살의 무라카미 지아키. 절차상 착오였지만 무를 수도 없는 게 문서가 모든 것을 말하는 관료조직이다. 이 징집은 전쟁 중 중국인 척살에 참여한 트라우마를 남기며 이후 삶을 뒤바꿔 놓는다. 이 책은 무라카미 하루키가 그의 아버지에 대해 풀어놓은 사적인 경험담 혹은 회고록이다. 하루키는 어린 시절 아버지와 얽힌 몇 가지 추억으로 담담하게 이야기를 풀어간다. 첫 기억은 아버지와 함께 고양이를 버리러 해변에 다녀온 일이다. 고양이를 버린 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집으로 돌아오지만 버려진 고양이는 그들보다 먼저 집에 도착해 있다. 그때 깜짝 놀라면서도 내심 안도하는 아버지의 표정을 하루키는 기억한다. 대체로 성실하고 명민했으며 온화했던 아버지. 그는 1917년 도쿄 절집 6형제 중 둘째로 태어나 전쟁을 거친 뒤 중고교 국어교사로 평생을 살다 2008년 세상을 떠났다. 얼핏 평범해 보이지만, 사실 하루키가 아버지의 진짜 삶과 그로부터 뻗어 나온 자신의 삶을 완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전쟁의 기억’을 넘어서지 않을 수 없다. 하루키는 아버지가 난징대학살을 일으킨 부대 소속일 수 있다는 불안감에 오랫동안 이 진실을 제대로 들여다보지 못한다. 하지만 일흔이 돼 마치 ‘핏줄을 더듬는’ 심정으로 아버지의 과거를 다시 들여다보면서 전쟁이 한 사람에게 미친 고통과 폐해를 마주하게 된다. 하루키 자신의 뿌리에 대한 복기인 동시에 전쟁의 참상과 트라우마에 대한 진솔한 증언이다. 박선희 기자 teller@donga.com}

“박경리 선생이 당부한 ‘활인(活人)의 문학’은 ‘우는 자와 함께 울라’는 성경의 가르침과도 일맥상통합니다. 생명이 얼마나 위대하고 소중한지를 삶 속에서 직접 실천하셨던 선생의 말씀을 받들어 사람을 살리는 문학을 해나가고 싶습니다.” 올해 제10회 박경리문학상 수상자인 소설가 윤흥길 씨(78)가 22일 오전 강원 원주시 토지문화관 대회의실에서 화상으로 기자간담회를 가졌다. 박경리문학상은 ‘토지’의 작가 박경리 선생(1926∼2008)의 문학정신을 기리기 위해 제정된 국내 최초의 세계문학상이다. 생전 박경리 선생과 인연이 깊었던 윤 작가에게 이 상은 더 각별한 의미가 있다. 1971년 ‘황혼의 집’으로 등단했을 때 ‘익명의 선배’가 큰 칭찬을 했다는 말을 전해 들었다. 나중에야 그 주인공이 박경리 선생인 걸 알게 됐다. 이후 자주 조언과 격려를 받았다. 윤 작가는 분단의 아픔을 다룬 ‘장마’, 산업화 시대의 병폐를 다룬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 등 한국문학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긴 대표작들을 발표해 왔다. 하지만 그는 “아직 대표작은 없다”고 말했다. “작가들이 하는 가장 건방진 말이 ‘내 대표작은 아직 쓰이지 않았다’는 말이라고 하죠. 나도 건방져 보고 싶습니다. 아마 ‘문신’이 완성되면 그게 되겠지요.” ‘문신’은 한국 현대사의 굴곡을 다룬 5권짜리 대하소설이다. ‘큰 소설을 써라’라는 박경리 선생의 당부에 자극받은 작품이다. 현재 3권까지 출간됐다. 그는 “한때 ‘큰 소설’은 분량이 많고 긴 거라고 이해하기도 했지만 실은 인간과 일생에 대해서 얼마나 진지하게 성찰하고 치열하게 작품으로 다루는가를 뜻함을 알게 됐다”고 말했다. 작가는 ‘올빼미형’ 집필을 고집해 왔다. 요즘은 심혈관 질환으로 작업에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습관은 여전하다. 그는 “낮은 수많은 인류가 쪼개 쓰기 때문에 일인당 몫이 굉장히 작다면 밤은 소수가 사용하기 때문에 자기 몫이 커진다는 자부심이 있다”고 했다. 윤 작가는 “토지문화관을 한동안 오지 못했는데 오랜만에 선생의 흔적과 혼이 담긴 주변을 보니 너무나 그립고 죄송스럽다”며 “내년에 ‘문신’이 완간되면 경남 통영 묘소로 뵈러 가고 싶다”며 눈시울을 붉혔다.박선희 기자 teller@donga.com}

좋아하는 소품이나 옷으로 접하던 디자인 브랜드의 철학을 책이란 물성을 통해서 만나면 어떨까. 최근 인기 있는 유명 디자인 브랜드들이 책이나 잡지 등 서적을 통해 고객과 만나는 경우가 늘고 있다. 브랜드의 철학을 드러내면서 소비자와 친근한 형태로 접점을 늘리기 위한 시도다. 심플하고 절제된 디자인으로 마니아층을 거느린 라이프스타일 브랜드 무인양품은 최근 단행본 ‘무인양품의 생각과 말’을 펴냈다. 옷, 신발, 침구에서부터 식기 등 전 분야의 물건을 판매하고 있지만 단순히 잡화점을 넘어서서 모노톤과 간소함 등 ‘마이너스의 미학’을 구현해내는 과정을 브랜드 출발부터 아이디어 개발, 근무 방식에 이르기까지 상세히 담아냈다. “심플함은 목적이나 스타일이 아니라 풍부한 범용성을 지닌 제품의 궁극이다” “처음부터 ‘좋은 생활자’가 있다고 믿고 그들이 선택할 것 같은 방향의 상품을 만들고자 했다” 등 이 브랜드가 내세우는 ‘무(無)’의 정체성에 대한 이해와 몰입도를 높여준다. 루이비통은 최근 특정 도시와 지역, 국가를 패션 사진작가가 사진으로 담아낸 책 ‘패션 아이 컬렉션’ 그리스·우크라이나 편을 출간했다. 루이비통은 2016년 이후 특정 도시를 사진작가의 시선으로 담아내는 컬렉션을 지속적으로 출간하고 있다. 루이비통이 자체 출판사에서 여행과 관련된 다양한 예술 서적을 내는 이유는 브랜드의 풍부한 전통을 소개하기 위해서다. 루이비통 측은 “브랜드 출발 당시 단골 고객 중 많은 유명 작가가 있었고 이들은 책 보관용 트렁크, 타자기 케이스 등을 주문하곤 했다”고 설명했다. 온·오프라인 매장에서 판매되는 이런 책을 따로 수집하는 이들도 있다. 유니클로는 지난해부터 라이프웨어 매거진을 1년에 두 차례 발행 중이다. 최근에는 코로나19로 인한 어려움을 극복하자는 취지인 ‘우리의 내일(Our Tomorrow)’이란 주제로 3호를 냈다. 포스트 코로나 시대 라이프웨어에 대한 담론을 음악가 사카모토 류이치, 사진작가 라이언 맥긴리, 패션디자이너 질 샌더와의 인터뷰로 풀었고 일러스트 아티스트인 제이슨 폴런의 삶과 작품에 대해서도 조명했다. 유니클로 측은 “다양한 이슈를 다뤄 온라인 패션 커뮤니티에서는 책이 나오기 전부터 구할 수 있느냐는 문의가 많다”고 말했다. 박선희 기자 teller@donga.com}

이런 하루, 이런 오늘. 반복되는 매일의 평범함 속에서 느껴지는 무료함, 고단함, 때로는 깊은 낙담. 유병록 시인의 두 번째 시집에는 오래 저민 차분하고 단단한 슬픔이 엿보인다. “다 그만두고 싶지만” “보잘 것 없는 욕망의 힘으로”(‘다행이다 비극이다’) 노동의 고단함을 버틴다. “꼭 제가 아니어도 할 수 있는 일”을 매일 하는 처지. 하지만 때로 “회사니까/슬픔을 나누는 일은 어색하니까/구원을 찾거나 함부로 조언을 주고받는 곳은 아니니까”(‘회사에 가야지’) 무언가로부터 도망치듯 출근길을 재촉하기도 한다. 사람들 사이에 섞이고 일로 분주할 땐 슬프지 않은 척할 수 있기 때문이다. 슬픔은 “회사에서는 손인 척” “술자리에서는 입인 척” “거리에서는 평범한 발인 척” 걷기도 한다(‘슬픔은 이제’). “양말에 난 구멍”(‘슬픔은’) 같아서 들키고 싶지 않다. 시인이 억누르는 슬픔, 일상적 습관에 기대 겨우 견디는 무력감은 상처받고, 낙담한 채 삶의 무게를 짊어진 우리 모두의 모습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가 몇 년 전 어린 아들을 잃었다는 사실을 알고 다시 읽어 보면, 담담하고 담백한 절제 아래 도사린 슬픔의 깊이가 더 깊고 날카롭게 마음을 엔다. ‘그 숲에서/어린 바람이 무릎걸음으로 기어 다닐 텐데//돌멩이를 가지고 한참을 놀다가/꽃잎을 만져보다가/개울에 슬쩍 손을 넣었다가/발을 담그기도 할 텐데 … 얼마나 컸는지 키를 재보고 싶을 텐데//너에게 꽃과 나무의 이름을 알려주고 싶을 텐데//한번 꼭 안아보고 싶을 텐데 … 너무 멀고 먼/오늘도 근처까지만 갔다가 돌아오는/널 두고 온/거기”(‘너무 멀다’)박선희 기자 teller@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