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하기

최근 KBS 방송에 출연해 “이승만을 국립묘지에서 파내야 한다”고 말하는 김용옥 씨를 보면서 일본 학자 마루야마 마사오를 떠올린 것은 마루야마가 1940년대에 쓴 ‘일본정치사상사 연구’의 한글번역판(1995년)에 장문의 서문을 쓴 사람이 마침 김 씨이기 때문이다. 서문은 한편으로는 마루야마에 대한 열등감과 다른 한편으로는 허황된 자부심으로 가득 차 있다. 마루야마는 도쿄대 법대를 나와 20대 후반의 나이에 김 씨 자신이 중국 학자 펑유란의 ‘중국철학사’와 더불어 동아시아인이 쓴 20세기 동아시아의 가장 중요한 책으로 꼽은 ‘일본정치사상사 연구’를 썼다. 김 씨는 고려대를 나와 대만대 도쿄대 하버드대에서 두루 공부하고 나이 70세가 넘도록 동양 사상을 연구했지만 지금까지 세계에 내놓을 만한 무슨 책을 썼는지 모르겠다. 받은 화려한 교육에 비하면 이룬 학문적 업적은 초라하다. 19세기 이후 학문을 하는 사람은 근대(modern)라는 문제와 씨름하지 않을 수 없다. 근대를 이해해야 탈근대(post-modern) 이해도 가능하다. 마루야마는 에도 시대 유학자 오규 소라이가 성리학적 관점에서 탈피해 정치를 도덕에서 구별해냄으로써 일본의 근대를 사상적으로 준비했다고 주장했다. 그의 주장이 맞건 틀리건 그는 학자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김 씨도 마루야마 같은 시도를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이제마의 사상의학, 최한기의 기학, 최제우의 동학 등을 통해 조선 성리학 세계에서 근대로의 출구를 찾으려 했다. 그러나 그는 조선은 근대의 사상적 준비에 왜 실패했는지 해명하지도 못했고 그럼에도 오늘날 이만큼 큰 성취를 이룬 계기는 무엇이었는지 보여주지도 못했다. 김 씨는 TV에 나와 논어 금강경 요한복음 등 이미 신성(神聖)의 지위는 고사하고 우상의 지위마저 상실한 경전들에 대해 우상파괴적 비판을 가하며 불필요한 가학(加虐)에 빠져들었다. 젊어서 도발은 패기이지만 나이 70세가 넘도록 도발만 하고 있는 것은 한계다. 도발을 넘어 포지티브(positive)한 정립에 이를 수 없는 무능력과 스스로 부풀린 자아상(自我像) 사이의 간격이 그를 요새 젊은이들이 하는 말로 관심종자(關心種子·관심을 받지 못하면 못 배기는 유형)의 길로 빠져들게 한 것이 아닐까 싶다. 학자가 소피스트처럼 궤변으로 대중을 놀라게 하는 데 재미를 붙여선 안 된다. 한국 현대사를 언급하는 학자라면 일자무식(一字無識)의 사람도 알고 있는 사실, 즉 왜 이승만의 한국은 성공 국가가 되고 김일성의 북한은 실패 국가가 됐는지 우선 해명해야 한다. 물론 더 나은 나라로 가기 위해 과거에 대한 반성이 필요하고, 사실 북한과 달리 그런 반성이 작동하는 시스템이 한국을 성공 국가로 만들었다. 다만 반성이 궤변이 돼 반성이 가능한 시스템을 만드는 데 기여한 사람을 무덤에서 파내자는 식의 망발을 해선 안 된다. 최장집 씨는 마르크스주의 노동정치학을 전공했지만 패거리 의식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하는 대부분의 진보 학자들과는 달리 진영을 초월하는 비판정신을 보여주는 학자다. 그는 15년 전 노무현 정권을 향해 ‘과거사 진상규명’ 같은 이념 문제를 앞세워 현실의 사회경제적 문제 해결을 도외시한다고 질타했고, 최근에는 보수 학자들도 잠자코 있을 때 문재인 대통령의 3·1운동 100주년 기념사의 ‘친일 청산’ 발언은 관제(官制) 민족주의라고 과감히 비판했다. 최 씨는 김 씨처럼 재기발랄한 학자는 아니지만 또 김 씨처럼 재기만 발랄한 학자도 아니다.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라는 화두는 정치학자로서 그의 문제의식의 정확함을 보여준다. 그를 우리 시대 정치의 발견자라고 부르고 싶다. 그는 민주화 이후에는 선악의 이분법적 투쟁보다는 정치가 필요한데 정치를 투쟁으로 되돌리는 것은 정치적 타협에 의한 시급한 사회경제적 문제의 해결을 연기시킬 것이라고 우려한다. 최 씨가 정년퇴임 후 그 연륜에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정치학의 기초 고전, 즉 막스 베버의 ‘소명으로서의 정치’와 같은 고전을 제자들과 함께 읽고 제자들이 새로 번역한 책에 직접 해설을 다는 것을 보고 놀랐다. 노교수가 초심의 대학원생으로 돌아간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관심종자와 학인(學人), 70대 지식인의 어느 두 초상이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주년을 앞두고 임정을 중심으로 한국 현대사를 보려는 시도가 일고 있는 것은 반가운 현상이다. 단, 임정의 역사에서 누가 임정에 어깃장을 놓았는지는 똑똑히 알고 임정을 강조해도 강조해야 할 것이다. 1919년 수립된 상하이 임시정부에 최초의 반기를 든 것은 베이징을 기반으로 한 신채호 세력이다. 이승만의 ‘외교적 노력에 의한 독립’론을 문제 삼아 그를 대통령으로 선임한 임정을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 반기의 이유였으나 그 밑바닥에는 ‘적에 대한 파괴의 반면(反面)이 곧 독립’이라는 사상이 자리 잡고 있었고 그것이 의열단식 투쟁을 지지한 ‘조선혁명선언’으로 나타났다. 다음으로 반기를 든 것은 연해주를 기반으로 한 이동휘의 한인사회당 세력이다. 상하이 임정이 수립 직후 가장 심혈을 기울인 것은 이동휘가 중심이 돼 만든 대한국민의회와의 통합이다. 그 결과 이동휘가 임정에 국무총리로 부임하면서 통합정부가 구성됐다. 그러나 이동휘가 이승만, 안창호와 갈등을 빚다 1921년 사임하고 연해주로 돌아가면서 통합은 없었던 것이 됐고 이동휘 세력은 반(反)임정의 길을 걷게 된다. 불만이 있다고 해서 신채호나 이동휘처럼 3·1운동의 피로 세워진 임정에 다 어깃장을 놓은 것은 아니다. 안창호 역시 임정에 불만을 갖고 있었으나 임정 주변을 떠나지 않고 임정의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노력했으니 그것이 국민대표회의 소집과 유일당 운동이다. 안창호는 1923년 국민대표회의 의장을 맡아 임정을 새롭게 개조할 것인지, 아니면 아예 없애고 새로 만들 것인지 논의를 이끌었다. 비록 합의에 이르지 못해 실패로 끝났지만 실패한 시도마저도 임정을 옹호하고 임정을 중심으로 통합하려는 노력을 보여준다. 국민대표회의에서 실패한 안창호는 다시 유일당 운동으로 통합에 나섰다. 유일당 운동은 대통령제에서 내각책임제로 바뀐 임정에 맞춰 이당치국(以黨治國) 체제를 갖추기 위한 것이었다. 당시 임정의 맏형이었던 이동녕도 동참했다. 그러나 유일당 운동은 1928년 코민테른이 12월 테제로 사회주의 세력에 좌우합작 거부를 지시함으로써 끝이 났다. 좌파 세력은 독자적으로 유호한국독립운동자동맹을 결성했고 이에 안창호와 이동녕은 우파만으로 한국독립당을 조직해 대응할 수밖에 없었다. 세 번째로 등장한 반임정 세력은 김원봉의 조선민족혁명당이다. 1932년 윤봉길 의거 직후 임정은 상하이를 떠나 8년간의 유랑 길에 오른다. 김구가 일본의 집요한 추적을 따돌리는 동안 임정과 한국독립당의 관계도 멀어졌다. 그 틈을 타 의열단을 중심으로 임정 주변의 정당들이 통합한 뒤 조선민족혁명당을 구성해 반(反)임정, 반(反)김구를 외쳤다. 이에 김구는 한국국민당을 새로 창당해 가까스로 임정을 지켰다. 다행히 조선민족혁명당에 가담한 조소앙 세력과 이청천 세력이 얼마 지나지 않아 탈퇴해 김구 측에 합세함으로써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다. 김구는 충칭에서 중국 국민당 장제스의 압력으로 김원봉과 좌우합작을 하지만 두 세력은 끝까지 물과 기름처럼 따로 놀았다. 조선민족혁명당의 당군(黨軍)인 조선의용대의 태반이 옌안으로 가 중국 공산당 팔로군에 합세하는데도 김원봉이 충칭에 남은 것은 조선의용대에서 주도권을 잃었기 때문이다. 충칭 임정에서 겉돌며 자기 세력 확장에만 몰두하던 김원봉은 해방정국에서 최종적 열세(劣勢)를 확인하고 옛 동지인 옌안파에 기탁하려 북한으로 넘어간다. 마지막 반임정 세력은 해방정국에 등장하는 박헌영의 공산주의 세력과 이에 놀아난 건국준비위원회의 여운형이다. 그들을 반임정 세력으로 규정한 것은 환국한 김구 측이라는 사실을 지적하는 것으로 충분하겠다. 김구가 환국 후 연 첫 임정 국무회의에 내각 외 인사로 유일하게 참석한 사람은 1942년 김구가 주미외교위원장에 임명한 이승만이다. 이승만은 임정의 초대 대통령이기도 하다. 대한민국 헌법 전문에 나오는 표현인 ‘임정의 법통(法統)’을 따지자면 이승만 안창호 이동녕 김구 등이 그 법통을 잇거나 지킨 지도자들이다. 안창호와 김구, 이승만과 김구의 경쟁구도에서 발생한 내부의 시비는 일단 제쳐두자. 지금은 누가 임정의 기치를 높이 들었고 누가 임정에 어깃장을 놓았는지 제대로 알고 제대로 기념하는 것이 중요하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문재인 정부는 3·1운동과 그 결실로 건립된 임시정부 100주년에 큰 의미를 부여하고 있고 그 점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북한 정권은 물론이고 남한에서도 1980년대 ‘해방전후사의 인식’ 출간 이후 3·1운동과 임시정부를 폄훼하는 강력한 흐름이 형성됐기 때문이다. 물론 문 대통령이 북한에 100주년 공동 기념을 제안한 것이나 중국 공산당 정부에 임시정부 지원에 대한 감사를 표한 것은 방향이 틀린 것이다. 법률가가 아니면 역사가가 됐을 것이라는 말을 무색하게 만드는 착각이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그런 무리한 제안이나 엉뚱한 감사에서 3·1운동과 임시정부를 강조하려는 의지는 더 뚜렷했다고 볼 수도 있다. 3·1운동의 위대함은 비폭력 저항에 있다. 일제의 총칼 앞에 맨손으로 자유와 독립을 외치다 쓰러진 선조들은 너무 숭고해서 그들이 종교적 순교자처럼 느껴진다. 숭고는 두렵고 떨리는 감정을 느낄 때 쓰는 표현이다. 헌법에 따라 평화롭게 시위할 권리를 보장받은 위에서 맘껏 시위할 권리를 행사한 촛불집회를 그런 권리 자체를 얻기 위해 순교적으로 싸운 3·1운동에 견주는 것은 적절한 역사적 비유가 아니다. 신채호는 3·1운동 후 그 운동이 폭력적 중심을 형성하지 못해 실패했다고 비판하고 김원봉의 의열단 투쟁을 지지했다. 그러나 의열단 투쟁은 영화적 감수성에 더 맞을지 몰라도 새롭지도 전략적이지도 않은 데다 나중에 대부분 공산주의 투쟁으로 흡수되고 만다. 3·1운동의 비폭력 저항은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한 후 10년간의 무장투쟁에 대한 반성에서 나왔다. 나라가 망하자 만주와 연해주로 활동무대를 옮긴 독립운동가들은 이국땅에서 풍찬노숙하며 의열단 이전에 의열단보다 더 체계적으로 싸웠다. 무장투쟁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다. 겨룰 만한 상대라면 무장은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에서 스스로를 지키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1919년 당시에는 독립운동가들의 필사적인 투쟁도 세계적 강국의 반열에 오른 일본을 무너뜨리기에는 너무 무력했다. 문제는 나라가 있고 힘도 커져 싸울 만하고 싸워야 할 때는 평화를 강조하고, 싸우는 것 자체가 무모할 때는 싸움을 강조하는 뒤틀린 역사가들이다. 비폭력 저항은 일견 가장 비현실적으로 보이지만 제1차 세계대전 이후 국제관계가 제국주의적 약육강식(弱肉强食)에서 벗어나 인도주의에 입각한 민족자결주의와 국제공동안보의 새 기류가 형성되기 시작하면서 현실성을 얻기 시작했다. 3·1운동 직후 영국의 식민지였던 인도에서는 간디가 비폭력 불복종 운동을 전개했다. 근대사 초유의 두 운동이 갖는 시대적 동시성과 그 국제적 조건에 주목하지 않으면 3·1운동의 노선을 제대로 이해하기 어렵거니와 이후의 외교전과 애국계몽운동의 의의도 제대로 평가하기 어렵다. “3·1운동의 피로 임정이 세워졌다.” 김구의 선전부장이었던 엄항섭의 말이다. 3·1운동과 임정의 관계는 이렇게 단순히 말할 수밖에 없다. 임정에 대한 국민의 위임은 뚜렷하지 않다. 그러나 루소식의 일반의지가 형성되듯 임정이 세워졌을 때 너나 할 것 없이 모두가 마음으로 승인했다. 그렇게 우리는 헌법에 ‘3·1운동으로 건립된 임정의 법통을 계승한 대한민국’이라고 새기게 됐다. 신채호는 한국사를 묘청이 김부식에 패하고, 최영이 이성계에 패하고, 정인홍이 인조 세력에 패한 실패의 역사로만 본다. 그것은 임정의 법통을 계승한 대한민국의 역사를 ‘정의가 패배하고 기회주의가 득세한’ 역사로 보는 것과 비슷하다. 그렇게 대한민국사를 매도하다가 돌연 임정 운운하다 보니 말이 꼬이고 해방정국에서 임정을 봉대한 세력의 대부분을 무시하고 김구만을 선양하는 옹졸한 결과가 빚어지고 있다. 해방정국에서 임정을 쌈 싸듯 말아 먹으려 한 두 세력은 여운형의 건국준비위원회와 박헌영의 남로당이라고 지적한 것은 바로 김구의 비서로 일했던 장준하다. 남로당이 주도한 대구폭동을 대구인민항쟁으로 미화한 학자가 청와대에 들어가고 친정부적 공영방송들은 도올 김용옥을 통해 여순반란을 여순민중항쟁으로 미화하는 말을 공공연히 퍼뜨리고 있다. 말로는 임정을 높이면서 실제로는 임정을 폄훼하며 결국 북한에 합세한 남로당과 여운형과 김원봉을 미화하는 기괴한 불협화음에 우리는 둘러싸여 있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야마모토 유지라는 마이니치신문의 베테랑 법조기자가 쓴 ‘일본 최고재판소 이야기’란 책이 있다. 오래전에 나온 책이다. 최근 다시 보면서 오사카공항 소송이 눈에 띄었다. 1975년 그 소송이 일본 최고재판소 대법정에 회부되는 과정이 양승태 대법원에서 일제 강제징용 소송의 전원합의체 회부가 추진된 과정과 비슷하다. 오사카 이타미(伊丹)공항을 오가는 항공기의 굉음에 대해 ‘조용한 밤을 돌려달라’고 인근 주민들이 소송을 제기했다. 오사카 고등재판소는 주민들의 야간비행 정지 요구를 받아들였다. 소음으로 고통받는 주민들을 위해 위자료 등 손해배상을 명하는 걸 넘어 소음을 제거하기 위해 항공기 비행 자체를 금지한 판결은 처음이었다. 환경권을 우선시한 오사카 고등재판소의 획기적 발상은 세계로부터 주목받았다고 야마모토 기자는 썼다. 우리나라 대법원장에 해당하는 일본 최고재판소 장관은 당시 오카하라 마사오였다. 오카하라는 오사카공항 소송을 최고재판소 소법정에 놔뒀다가 오사카공항이 항공기도 오가지 못하는 비(非)문명지대로 추락할까 걱정했다. 그래서 사건이 배정된 제1소법정의 재판장을 불러 “사건을 대법정으로 돌리면 어떻겠느냐”고 말했다고 한다. 이것은 기자의 취재 내용이고 오카하라 본인은 “혹시 그런 말을 했는지도 모르겠다”고 했다. 일본 최고재판소에도 우리나라 대법원의 소부(小部)처럼 3개의 소법정이 있다. 사건은 일단 재판관 5명으로 구성된 소법정에서 다루고 소법정이 ‘사안이 중대하다’고 판단한 경우에 재판관 15명으로 구성된 대법정에 회부한다. 오사카공항 소송은 이미 제1소법정이 구두변론 등 심리를 모두 끝내고 판결을 앞두고 있었다. 중대한 사건이라고 해도 소법정에서 대법정에 회부하는 건 심리를 끝내기 전이다. 결심까지 끝낸 사건을 대법정에 회부하는 것은 이례적이었다고 한다. 오카하라 장관이 말했어도 재판장이 딱 잘라 안 된다고 했으면 대법정 회부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재판장은 오사카공항 소송이 지닌 중요성을 고려해 제1소법정에 속한 재판관들을 불러 대법정 회부를 논의했다. 결국 병으로 요양 중인 재판관 1명을 빼고 4명 중 3명이 회부에 찬성해 사건은 대법정에 회부됐다. 제1소법정의 평의는 오사카 고재 판결을 지지하는 것이었다고 한다(기자가 비밀인 평의 내용을 어떻게 알아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대법정에서 6년의 시간이 흐른 뒤 그 판결은 뒤집히고 말았다. 야마모토 기자는 이 에피소드에 ‘대법정 회부의 모략(謀略)’이라는 제목을 달고 비판적으로 다룬다. 그는 일본 정부와 오카하라 사이의 내통(內通) 의혹까지 제기한다. 오카하라가 대법정 회부를 부탁한 시점과 일본 정부 법무성이 대법정 회부를 요구한 시점이 비슷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야마모토 기자에게 오카하라의 행위가 불법이라는 인식은 희미하다. 모략이니 내통이니 하는 것도 법조 윤리에 비춰 문제가 있다는 의미에서의 모략이고 내통이다. 오사카공항 소송은 일본 사법사에서 100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할 정도로 중요한 사건으로 평가 받는다. 그러나 오늘날 일본에서도 이 사건의 내막을 기억하는 일반인은 거의 없는 듯하다. 위키피디아 일본어판에는 오사카공항 소송이란 항목이 있지만 야마모토 기자가 기록한 그런 내막은 언급되지 않는다. 그 내막은 일본 법조기자의 기억에나 남은 에피소드에 불과하다는 의미로도 받아들일 수 있다. 우리나라 검찰은 그런 혐의를 모으고 모아 양 전 대법원장을 구속하고 기소했다. 흠결 없는 사법행정과 불법적인 남용 사이에는 넓은 회색지대가 존재한다. 이항(二項) 대립을 좋아하는 원리주의적 판사들에게 그런 회색지대는 생각하기 성가신 영역이다. 그들에게 블랙리스트는 형법적으로 불법인 블랙리스트거나 블랙리스트가 아니거나밖에 없다. 3000명이나 되는 법관 중에서 대외적 의견 표명이나 동료 판결 비판을 통해 논란을 자초한 법관의 면모를 대법원장이 알 필요가 있다는 인식은 들어설 여지가 없다. 대법원장이 구속될 정도의 대단한 재판 거래라면 그래서 그가 얻은 건 뭔가라고 사정을 잘 모르는 외국인은 물을 것이다. 상고법원은 얻지도 못했다. 겨우 판사들 해외 파견 자리 몇 개 얻자고 그 짓을 했다는 말이 된다. 이건 뭐지? 외국인은 어깨를 으쓱할 것이다. 베네수엘라처럼 기괴한 나라가 되고 있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미인과 석유의 나라 베네수엘라. 2000년 이후 미스 유니버스를 두 번 이상 차지한 다른 나라는 없는데 베네수엘라만 세 명 배출했다. 엘 시스테마 같은 빈곤층 청소년 음악교육 프로그램으로 LA필하모닉의 최연소 음악감독이 된 천재 지휘자 구스타보 두다멜을 낳기도 한 창의적인 나라이기도 하다. 풍부한 석유자원도 갖고 있다. 다만 그 수입이 외국계 석유회사와 국내 과두 계층에 편중됐던 게 문제다. ▷석유는 이 나라의 축복이자 저주다. 우고 차베스는 2000년 집권 이후 석유회사를 국유화하고 나머지 제품은 석유를 수출한 돈으로 수입해 국민에게 싸게 공급하는 포퓰리즘 정책을 썼다. 유가가 높을 때는 그런 정책이 가까스로 유지가 가능했으나 2014년 유가가 급락하자 경제는 나락으로 떨어졌다. 차베스가 2013년 암으로 사망하면서 정치적 위기까지 더해졌다. 차베스는 니콜라스 마두로를 후계자로 지명했으나 마두로는 관권선거로 집권 초부터 정당성 시비에 휘말렸다. ▷베네수엘라 경제는 2013년 말 이후 초(超)인플레이션에 시달리고 있다. 물가는 한 주 만에 몇만 %씩 올라 더 이상 세는 의미가 없어졌다. 석유의 나라에서 무려 인구의 10%인 300만 명이 먹고살기 위해 나라를 떠나는 진기한 엑소더스가 벌어지고 있다. 국민 평균 체중이 2016년과 2017년 사이에 10kg 이상 줄었다는 충격적인 조사 결과도 있다. 차베스 치하에서 무기 보유가 확산돼 2014년 미스 베네수엘라 출신의 여배우 모니카 스페아르가 노상강도의 총격에 사망하는 등 치안도 더 불안해졌다. ▷최근 수만 명의 시민이 반(反)마두로 시위에 나서고 이에 호응해 야당 지도자 후안 과이도 국회의장이 과도정부를 선언했다. 미국과 유럽연합(EU), 남미 주요국들은 과이도 의장을 임시 대통령으로 인정한 반면 중국 러시아 등은 마두로 지지를 밝혀 대통령 2명이 공존하는 불안한 정국이 이어지고 있다. 일부 군인들의 쿠데타 시도는 진압되고 군부 전체가 동요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지만 차베스 없는 차베스주의가 종말을 향해 가고 있음은 틀림없는 듯하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미국 연방대법원은 9명으로 구성된다. 이에 더해 법무부 서열 3위인 송무실장은 대법원에 빈번히 드나든다 해서 10번째 대법관이라고 불린다. 송무실장은 연방정부를 대표해 정부가 당사자인 소송을 지휘하는 건 물론이고, 정부가 당사자가 아니더라도 사건과 관련한 정부의 의견을 수시로 대법원에 전달한다. 지난해 대법원 전원합의체의 일제 강제징용 배상 판결은 한일 관계에 큰 파장을 몰고 왔다. 그 파장 자체가 전원합의체에 회부될 정도로 중요한 사건이었음을 입증한다. 그렇다면 한일청구권협정의 당사자인 정부로서는 당연히 전원합의체 회부를 요청할 수 있었던 사안이다. 우리나라 대법원 규칙에 정부가 법원에 의견을 표할 절차가 있었느니 없었느니 따지는 것은 지극히 형식적인 논리다. 미국 연방대법원은 소수의 사건만 상고를 허가해 전원합의체로 판결을 내린다. 우리나라는 모든 사건의 상고가 가능한 대신 상고사건은 일단 대법관 4명으로 구성된 소부(小部)에서 다루고, 소부에서 전원일치가 되지 않거나 특별히 중요한 사안일 경우에 전원합의체에 회부한다. 법리적으로 볼 때 대법원 소부 사건은 본래는 전원합의체가 다뤄야 하지만 현실적 여건상 어려워 일단 소부에 맡긴 것일 뿐이다. 그렇다면 아무리 엄격하게 본다고 해도 전원합의체에 회부해 달라는 의사 표시 정도는 대법원장이 할 수 있지 않을까. 오히려 대법원의 수장으로서 사안이 중요한데도 소부에 방치한다면 그거야말로 무책임한 것이다. 미국 연방대법관들은 매주 금요일 열리는 대법관회의에서 사건에 대한 견해를 밝힌다. 대법관회의가 끝난 후에도 의견이 다른 대법관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서로 메모를 주고받는다. 밥 우드워드 기자는 ‘지혜의 아홉 기둥’이란 책에서 “얼 워런 대법원장은 회의에 들어오기 전 윌리엄 브레넌 대법관과 만나 작전계획을 짜고 회의 중에도 담합하기 일쑤였다”고 썼다. 대법원 재판은 상호 의견 제시와 교환이 필수적인데 우리는 너무 경직되게 본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강제징용 사건의 일본 기업 측 변호사를 만난 것은 적절하지 못했다. 우드워드 책에는 워런 버거 대법원장 시절 한 변호사가 재심청구를 위해 자신의 딸이 재판연구관으로 있는 대법관과 자신과 같은 아일랜드계의 대법관을 만난 일화가 나온다. 두 대법관은 변호사가 사건을 언급하자 사무실에서 쫓아낸 것으로 나오지만 그 접촉으로 인해 문제의 재심청구를 진지하게 다뤄야 한다고 생각이 바뀌었다. 그럼에도 그 접촉은 재판관이 사건에서 스스로를 회피해야 할 문제나 윤리 위반의 문제로만 다뤄졌을 뿐이다. 통합진보당 의원 지위확인 소송에 대한 개입이란 “인용이든 기각이든 국정감사 기간인 만큼 선고를 연기해 달라”는 것이다. 판결은 2개월여 연기됐다. 제프리 토빈 기자가 쓴 ‘더 나인’에는 윌리엄 렌퀴스트 대법원장 시절 그가 대법관회의에서 검토할 상고허가신청서 목록에서 사건을 빼버림으로써 시간을 끄는 얘기가 나온다. 원칙적으로 그런 개입도 하지 말아야 하지만 본안(本案)도 아닌데 불법으로 걸고넘어질 정도인지는 의문이다. 헌법재판소 파견 법관을 통한 정보 수집에 대해 헌재 관계자에게 의견을 물었더니 파견은 헌재와 법원이 서로 도움을 주고받는 관계이며 그 자신도 모르는 헌재의 찬반 결정까지 파견 법관이 미리 알 방도는 없다는 말을 들었다. 공보비를 예산에 쪼들리는 법원장에게 나눠준 것은 항목을 어떻게 책정하느냐의 기술적인 사안이다. 특정 판사 불이익 처분에 대해서는 이른바 사법농단의 발단인데도 지금까지도 뚜렷한 게 없다. 문제가 있다면 대법원장의 ‘제왕적’ 인사권 자체에 있다. ‘재판 거래’ 의혹은 언제부터인가 ‘재판 개입’ 의혹으로 슬그머니 쪼그라들었다. 그마저도 재판 본안보다는 절차 등 부수 사안에 관련된 게 대부분이다. 오히려 서영교 의원의 ‘재판 청탁’과 비교하면 공적인 측면이 부각되는 개입이다. 박병대 전 대법관은 지인의 사건을 자신의 소부로 끌고 왔다고 한다. 대법원의 사건 배당은 기계적인데 어떻게 끌고 왔다는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아무튼 검찰은 이제야 핵심에 도달했다. 사익추구적 재판 청탁이 사법의 신뢰를 흔드는 본체다. 양 전 대법원장에게도 있을지 모른다. 검찰은 스스로도 불법인지 아닌지 잘 모르는 분야에서 불법몰이에 헛심 쓰지 말고 명백한 불법이나 속 시원히 밝혀 보라.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예로부터 새해가 되면 나라에서 반드시 내놓아야 하는 것이 하나 있었으니 그것이 책력(冊曆)이다. 책으로 된 달력을 말한다. 조선에는 관상감(觀象監)이라는 정부기관에서 관력(官曆)을 발행했다. 조선은 농업 중심 사회였으므로 절기, 해와 달이 뜨고 지는 시간, 삭망(朔望·음력 초하루와 보름)과 상하현(上下弦·반달)의 일시를 알려주는 것이 중요했다.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천문학이 쇠퇴해 한때 독자적 역법의 계산이 어려워진 적도 있었으나 사실상 조선이 망할 때까지 발행됐다. ▷일제도 1911년부터 1936년까지 조선민력(朝鮮民曆)을 간행했다. 민력이라고는 했지만 편제의 주체는 조선총독부였다. 조선민력에 대항해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낸 달력이 대한민력(大韓民曆)이다. 기미독립선언으로 조선의 독립국임을 선언한 이상 주체적인 달력을 내는 것은 임시정부의 당연한 임무로 여겨졌다. 대한민국 2년(1920년) 달력이 발견됐다. 임시정부가 출범한 것이 1919년 10월이므로 최초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발행 달력이다. ▷현대인에게는 한 주가 7일이지만 고대 로마와 그리스에서는 낯선 개념이었다. 프랑스 혁명력은 한 주를 10일로 만들었다. 한 달은 3주가 된다. 각 30일로 이뤄진 12개월 후에 5일로 이뤄진 축제주간이 덧붙여진다. 소련의 스탈린은 한 달을 5일 단위의 주 6개로 구성했다. 토·일요일은 사라지고 노동자는 회사마다 5분의 1씩 돌아가며 쉬었다. 당시로선 자본주의보다 노동시간이 짧아졌지만 공통의 휴일은 없어졌다. 지배하는 자는 공간만이 아니라 시간도 지배하려 한다. ▷대한민력은 조선민력과 달리 동경 135도를 기준으로 하는 일본의 표준시가 아니라 동경 127.5도를 기준으로 하는 경성(서울)의 표준시를 채택했다. 조선민력의 일왕 생일 대신 단군 개천절과 독립선언일을 기념일로 내세웠다. 공간은 비록 일제에 빼앗긴 상태지만 우선은 시간만이라도 우리의 시간을 되찾겠다는 강렬한 의지가 엿보인다. 그런 의지가 있었기에 1945년 다시 우리의 공간까지 되찾을 수 있었을 것이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청와대는 풍수지리상 불길해 언젠가는 옮겨야 한다.”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이 대통령집무실의 광화문 이전이 당장은 어렵지만 언젠가는 필요하다면서 한 이 말을 들었을 때 이것이 정부 위원회(광화문대통령시대위원회)를 책임진 사람의 입에서 나올 말인지 의아했다. 풍수지리를 유기체적 자연관의 입장에서 재해석하기도 한다. 하지만 어느 터를 놓고 길하니 불길하니 하는 것은 버려야 할 미신적 요소로 돌아가는 것이다. 터가 길하고 불길한 게 아니라 그곳에 사는 사람이 길함과 불길함을 만든다. 한 전직 장군이 자살했다. 문재인 정부가 기무사령부의 계엄령 문건을 쿠데타 모의로 몰고 가지만 않았다면, 그래서 검찰이 샅샅이 뒤졌지만 나오는 게 없자 세월호 사찰을 물고 늘어져 적폐로 몰아가지 않았다면 그는 죽지 않을 수도 있었다. 셰익스피어 연극 ‘오셀로’에 나오는 이아고 같은 측근이 문재인 대통령의 귀에 대고 의심을 불어넣었는지, 아니 문 대통령이 혼밥을 먹다가 섬광 같은 의심을 갖게 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어떤 체계적으로 편향된 의심이 결국 불길한 일을 초래했다. 김태우 전 청와대 특감반원과 신재민 전 기획재정부 사무관의 폭로로 촉발된 청와대의 사찰과 외압 의혹도 현 집권세력이 전 집권세력을 단죄하면서 사찰이나 외압의 개념을 지나치게 확장해 놓은 데 기인한 면이 없지 않다. 언론에 나온 동향이나 자기 조직 내에서 다 아는 정보를 모아놓은 것조차 사찰로 매도하고 대통령의 정책을 부처에 관철하는 과정까지 형식적 절차를 문제 삼아 직권남용으로 몰았다. 단지 매도하고 억지를 부렸으면 정치는 본래 그러려니 하겠지만 집권하자마자 검찰을 동원해 단죄했다. 두 실무자의 폭로는 증자(曾子)의 ‘출호이자반호이자(出乎爾者反乎爾者)’라는 말처럼 ‘너에게서 나온 것이 너에게 돌아가는’ 불길한 예고편이다. 청와대를 옮기고 싶을 정도의 불길함은 궁극적으로 자살 수감 등으로 이어진 역대 대통령들의 비극사를 가리킨다. 정권이 전직 대통령들을 수사할 때는 모두 이유가 없지 않았다. 재치 있는 미국 정치인 벤저민 프랭클린이 이런 말을 했다. “인간은 생각하는 동물이 맞다. 온갖 것에 다 이유를 갖다 붙일 수 있으니 말이다.” 대통령들끼리 치고받는 거야 높은 데서 제왕적 권력을 휘두르며 서로에 대한 피해에 책임이 없지 않은 그들의 싸움이라고 하자. 이번 정권에서는 적장을 치면 부하들은 대부분 놔둔다는 말도 통하지 않았다. 적폐라는 프레임을 내걸고 전 정권에 속한 고위급 중 한 사람도 법망을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어떤 구실로라도 단죄하려 했고 눈에 띄지도 않은 중간 간부의 진급과 포상까지도 일일이 간섭했다. 아예 싹을 말리려는 시도다. 이러니 야당은 권력을 되찾으면 반드시 보복하겠다고 벼르고 있고 여당으로서는 20년 집권을 도모하지 않는 한 보복을 피할 방법이 없다. 내년 총선과 내후년 대선의 피 터지는 싸움이 예상된다. 조선시대 기축옥사(己丑獄事)는 가장 잔혹했던 사화(士禍)다. 당시 서인(西人) 정철에 의해 희생된 동인(東人) 이발의 후손들은 지금도 제사 준비를 할 때 북어를 방망이로 두들기면서 ‘이놈의 정철, 이놈의 정철’이라며 울분을 토한다고 한다. 쌍방에 무자비한 피해를 입힌 사화의 역사를 읽으며 조상들은 왜 저런 어리석은 짓을 했을까 이해가 되지 않았는데 지금 우리가 그런 어리석음의 회로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는 꼴이다. 길함과 불길함의 세계는 옳고 그름의 세계와는 좀 다르지 않나 싶다. 아무리 옳아도 지나치면 반발을 부르고 글러도 지나치지만 않으면 참고 넘어가는 게 세상사다. 내가 옳으니 네가 옳으니 다퉈 봐야 평행선을 달릴 뿐이더라. 그러나 한 가지는 동의할 만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지나침은 불길함을 부른다. 옳다고 여기는 것도 지나치지 말아야 한다. 그것이 그리스 비극에 나오는 휴브리스(hubris·오만)에 대한 경고다. 까마귀 우는 소리가 불길한 징조가 아니다. 청와대 뒤로 가파르게 솟은 북악산이 불길한 형상이 아니다. 진짜 불길한 징조는 34세의 변호사 1년 차인 청와대 행정관이 57세의 육군참모총장을 카페로 불러내는 저 위력, 아니 57세의 육군참모총장이 34세의 변호사 1년 차인 청와대 행정관이 부른다고 카페로 나가는 저 굴신이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대법원이 최근 국회 사법개혁특별위원회에 제출한 법원개혁안이 그다지 개혁적이지 않다는 평가에 동의하지 않는다. 사법행정에서 가장 선진적인 제도는 미국식이다. 김명수 대법원장이 선호했던 개혁은 미국 연방사법회의식 사법행정인 듯하다. 그러나 대법원은 ‘국민과 함께하는 사법발전위원회(사발위)’의 건의를 받아들여 유럽 대륙국가의 사법평의회 방식과 유사한 사법행정회의를 채택했다. 연방사법회의 방식은 법관만으로 구성되지만 사법행정회의에는 외부 인사도 참여한다. 얼마 전 국회 토론회에서 더불어민주당과 자유한국당의 사개특위 대표 주자 격인 의원들이 나와 대법원의 법원개혁안이 전향적이지 않다고 일제히 평가절하하는 것을 봤다. 무책임하게 보였다. 사발위 위원을 했던 내가 보기에는 그 안은 너무 전향적이어서 오히려 사법의 안정을 해칠까 봐 걱정될 정도다. 가장 큰 비판은 외부 인사를 법관과 동수인 5명으로 하지 않고 4명으로 한 데 대해 쏟아졌다. 그러나 사발위는 외부 인사를 포함한다고만 건의했지, 외부 인사를 몇 명으로 할지에 대해서는 건의하지 않았다. 헌법 101조는 사법권이 법관으로 구성된 법원에 속한다고 규정한다. 이 사법권에 사법행정권도 포함되느냐는 논란이 있지만 외부 인사가 많아지면 위헌의 위험이 높아진다. 사법평의회는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제도가 우리에게 비교적 잘 알려져 있다. 프랑스 사법평의회는 우리나라의 대법원장 격인 파기원장이 맡는 의장을 빼고 14명의 위원 중 사법관과 외부 인사가 동수로 구성된다. 이탈리아의 사법평의회는 대통령, 파기원장, 검찰총장 외에 27명의 위원으로 구성되는데 3분의 2는 사법관이고 3분의 1은 외부 인사다. 외부 위원의 비중은 그 나라의 사정에 달렸다고 봐야지 외부 인사가 더 많거나 최소한 동수여야 하는 것은 아니다. 최근 번역된 ‘이탈리아 현대사’(저자 폴 긴스버그)란 책에서 1958년 이탈리아에 도입된 사법평의회에서 사법관이 다수를 점한 데 대해 사법의 독립이란 측면에서 다행스럽게 평가하는 대목을 봤다. 외부 위원 수가 과반이냐 아니냐보다 더 중요한 점은 유럽 대륙국가의 사법평의회는 검찰과 법원 모두를 관할한다는 사실이다. 프랑스와 이탈리아에서는 우리나라처럼 검사가 수사지휘권까지 갖고 있다. 이런 구조에서는 수사지휘도 하고 기소도 하는 검찰이 불공정할 때 오는 폐해가 법원 재판의 불공정성에서 오는 폐해보다 훨씬 클 수 있다. 따라서 사법평의회를 만든다면 검찰을 통제하는 기구를 먼저 만드는 게 순서다. 대통령을 제왕적으로 만드는 검찰 인사는 대통령 멋대로 하도록 내버려 두면서 법원만 외부의 간섭에 문을 여는 것은 불균형을 심화시킨다. 그럼에도 법원은 외부에 문을 여는 어려운 결정을 했는데 그런 법원만 몰아세우는 것은 비판하는 측의 균형감 부족을 드러낼 뿐이다. 검찰은 지금 검경수사권 조정에서 검찰의 수사지휘권을 빼앗아 기소와 수사를 완전히 분리하는 데 저항하고 있다. 검찰의 저항에도 이유가 없지 않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일본에서처럼 경찰 자치를 강화해 경찰권을 충분히 분산시킨 상태에서 경찰에 수사권을 넘겨주지 않으면 정보 기능까지 갖고 있는 경찰은 검찰보다 더한 권력집단이 될 수 있다. 또 검찰의 수사지휘권에는 경찰의 과잉 수사로부터 피의자의 인권을 보호하는 기능도 분명히 있다. 사법행정회의 제안이 나오지 않았으면 모르되 이왕 나온 이상 검찰에도 유사한 기구를 만드는 것이 균형에도 맞을뿐더러 섣부른 검경수사권 조정보다 더 효과적일 수 있다. 사법행정회의를 집행 기능까지 포함하는 총괄기구가 아니라 주요 사안에 대한 심의·의결 기구로 한 데 대한 비판도 무책임하다. 총괄기구로 할 경우 기껏해야 한 달에 한 번 정도 회의에 참석하는 외부 인사들이 충실한 결정을 내린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법관 인사 운영을 법관들로만 구성된 ‘법관인사운영위원회’에 맡기는 것도 문제라고 하지만 그 위원회가 사법행정회의 산하에 있는 이상 큰 문제가 되는지는 의문이다. 이번 개혁은 과거 70년간 이어진 법원의 운영 틀을 바꾸는 중대한 작업이다. 국회가 국가 삼권(三權) 중 하나인 법원의 일에 대해서만큼은 법원의 의견을 존중하면서 정략을 버리고 더 연구하고 고민해서 모두가 훌륭하다고 여길 만한 개혁안을 만들어 냈으면 한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장군을 좋아한다. 한때 트럼프의 비서실장, 국가안보보좌관, 국방장관이 모두 장군 출신이기도 했다. 단, 장군의 말을 듣는 건 싫어한다고 마이클 울프 기자는 백악관 뒷얘기를 다룬 ‘화염과 분노’에서 썼다. 백악관의 마지막 남은 장군 출신인 제임스 매티스 국방장관이 동맹국과 상의도 없었던 트럼프의 ‘시리아 미군 철수’ 결정에 반발해 “대통령은 견해가 자기와 맞는 국방장관을 둘 권리가 있다”며 사임키로 했다. ▷매티스의 사임은 사실 오래전부터 예상된 일이다. 그는 허버트 맥매스터 전 국가안보보좌관, 렉스 틸러슨 전 국무장관 등과 함께 ‘백악관 내 어른들의 축(軸)’으로 불렸다. ‘주한미군이 없어도 아기처럼 잠만 잘 잘 수 있다. 주한미군 다 집으로 데려오라’고 말하는 트럼프를 매티스가 ‘초등학교 5, 6학년 수준’이라고 불렀다는 대목이 밥 우드워드 기자가 쓴 ‘공포’에 나온다. ▷‘공포’에 따르면 미국과 북한의 갈등이 최고조에 이른 지난해 12월 트럼프는 ‘주한미군 가족을 철수한다’는 글을 트위터에 올릴 생각이었다. 매티스 등 ‘백악관의 어른들’이 간신히 말렸다. 잇속에 밝은 트럼프가 막대한 돈이 드는 전쟁을 실제 일으키려 했다고 보지 않는다. 트윗 글로 실전을 불사하는 것처럼 북한에 보이려 한 듯하나 군사 문제에서 그런 식의 압박은 자칫 우발적 충돌까지 일으킬 수 있는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트럼프는 시리아 정부가 반군 지역에 화학무기를 사용했을 때도 미사일로 보복한 게 고작이었다. 탈레반 세력이 다시 확장하는 아프가니스탄에 대규모 병력 증파가 필요하다는 참모들의 조언에도 고작 3000명을 증파해 시늉만 내다가 벌써 철군을 고려하고 있다. 매티스는 사임하면서 트럼프를 향해 “당신처럼, 나도 미국 군대가 세계의 경찰이 돼선 안 된다고 말해 왔다”며 “그 대신 공동방위를 제공하기 위해 동맹에 효율적인 리더십을 제공하는 것을 포함해 미국 국력의 모든 수단을 사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트럼프가 점점 더 많은 돈을 요구하는 한미동맹의 현실 앞에서 매티스의 말이 웅변적으로 들린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극단주의 테러조직인 이슬람국가(IS)가 건국을 공식 선포한 것은 2014년 6월. 시리아 북부에서 이라크 북부까지 칼리프가 통치하는 국가임을 선언하고 알바그다디를 초대 칼리프로 추대했다. 이슬람 원리주의에 입각한 국가의 건설은 과거 알카에다 지도자 오사마 빈라덴의 정치적 꿈이었지만 그 꿈은 국제적 네트워크 운동에 그쳤다. IS는 광활한 땅을 제 영토인 양 차지하고 전 세계에서 추종자들을 끌어모아 무자비한 통치를 자행했다. ▷IS가 건국을 선포한 무렵이 실은 IS의 최전성기다. 그때부터 IS는 쇠퇴기로 접어들었다. 너무 일찍 굴기(굴起)하면서 우리나라까지 74개국으로 이뤄진 반(反)IS 국제연합전선의 개입을 불러들인 것이다. IS는 이라크 쪽의 라마디, 팔루자, 유전이 집중돼 IS의 경제수도로 불린 모술을 차례로 빼앗겼다. 시리아 쪽에서는 알레포에 이어 IS가 수도로 삼아온 락까에서 패퇴했다. 물론 잔당이 곳곳에 남아있어 싸움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19일 “시리아에서 IS를 격퇴했다”며 승리를 선언하고 시리아 주둔 미군 철수 방침을 밝혔다. 시리아에는 약 2000명의 미군이 IS와 싸우는 시리아민주군(SDF)에 대한 군사훈련을 지원해 왔다. IS 세력이 약화됐다 해도 시리아 재건의 과제가 남은 상황에서 미국의 일방적 철수 결정에 영국 등 서방은 반발했다. 미국을 견제하기 위해 시리아에 개입한 러시아, SDF의 주력이 반터키적인 쿠르드족임을 우려하는 터키만이 환영했다. ▷만사 돈이 우선인 트럼프 대통령이 미군 주둔에 들어가는 돈이 아까웠던 터에 터키가 쿠르드족 민병대에 군사행동을 하겠다고 하자 이를 빌미로 발을 뺐다느니, 미국제 패트리엇 미사일을 터키에 팔아먹는 것과 미군 철수를 맞바꿨다느니, ‘러시아 특검’ 수사에 쏠린 미국 내 관심을 분산하려는 목적이 있다느니 등의 비판이 쏟아졌다. 공화당 내에서조차 이라크 전후 재건 사업의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하고 미군을 철수시킨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의 과오를 반복하는 것이라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기무사령부 세월호 사찰 의혹으로 수사를 받다 투신자살한 이재수 전 기무사령관에 대해서는 따로 아는 바 없지만 육사 37기가 자부심이 강한 기수라는 점은 알고 있다. 육사 37기 중에는 특전사에서만 30년 가까이 근무한 전인범 전 특전사령관도 있다. 대위 시절의 젊은 그를 군 복무하면서 본 적이 있다. 유창한 영어로 한미 군사훈련을 조율하는 실력도 실력이지만 행동과 자세 하나하나에 자신감이 넘쳤다. 그때의 강렬한 인상이 지금도 생생하다. 이재수 전인범 등은 동기들 중 선두주자로 꼽혔다. 이 전 사령관의 유서에서 보듯 죽으면서까지 절제와 배려를 잃지 않은 태도에서 그가 왜 높은 평가를 받았는지 조금은 이해가 갔다. 기무사의 세월호 사찰에 대해서는 세월호 구조에 군이 대거 투입된 이상 기무사는 민간 동향을 파악할 수밖에 없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이 전 사령관의 죽음은 검찰의 몰아가기 수사 앞에서 군인으로서의 명예를 지키려 한 것으로 본다. 이 전 사령관의 투신에서 문재인 정권 검찰의 원점(原點)을 돌아보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 원점에서의 심각한 오염이 최근 법원에서 확인됐다. 문 대통령 취임 직후 당시 이영렬 서울중앙지검장은 김영란법 위반으로 쫓겨났다. 문 대통령은 그 자리에 박근혜 전 대통령 국정농단 특검팀에 있었던 윤석열 대전고검 검사를 임명했다. 그러나 이 전 지검장은 김영란법 위반에 대해 무죄 판결을 받고 면직 처분에 대해서 무효 판결을 받았다. 원점 오염의 발단은 대선에서 문 대통령을 지지했던 한 신문의 보도였다. 문 대통령이 취임한 날로부터 5일이 지난 지난해 5월 15일 이영렬 당시 지검장이 우병우 전 대통령민정수석에게 연루돼 조사를 받던 안태근 당시 법무부 검찰국장과 밥을 먹고 법무부에 파견된 후배 2명에게 100만 원씩 든 돈 봉투를 줬다는 기사가 보도됐다. 문 대통령은 이틀 뒤 직접 감찰을 지시했다. 처음부터 죄가 성립하는지 의문이었지만 죄가 성립한다 해도 대통령의 직접 지시는 균형이 맞지 않았다. 안 국장을 쳐내기 위한 무리수인가 생각했는데 이 지검장도 사표를 냈다. 청와대는 즉각 윤 고검 검사를 검사장으로 승진시켜 서울중앙지검장에 앉혔다. 안태근이 아니라 이영렬을 쳐낼 목적이 더 컸다는 생각이 들었다. 검찰청법에 따르면 검사의 보직은 법무장관의 제청으로 대통령이 하는데 법무장관은 제청하기 전 검찰총장의 의견을 듣도록 돼 있다. 이영렬은 사법연수원 18기이고 윤석열은 23기다. 둘 사이에 다섯 기수의 차이가 있다. 검찰 고위직의 후임 인사는 기껏해야 두 기수 차이가 관례다. 기수 차이만으로 정상적이지 않기 때문에 당연히 시비를 걸 수 있는 인사다. 그러나 당시는 법무장관과 검찰총장이 모두 공석이었다. 윤석열이 서울중앙지검장에 임명된 날 법무장관 권한대행인 이창재 차관과 검찰총장 직무대행인 김주현 대검 차장도 사표를 냈다. 두 사람 다 대행일 뿐인 데다 돈 봉투 사건에 동반 책임을 지고 사표를 내는 마당에 청와대가 하는 인사에 시비를 걸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시비를 걸지 않고 고분고분 사표를 내 준 덕분에 퇴직 후 변호사로 잘 활동하고 있다. 그러지 않았다면 이영렬처럼 뭔가로 꼬투리가 잡혀 수사를 받고 변호사 개업은커녕 법정 투쟁을 하고 있을지 모른다. 서울지검 특수부 평검사 시절의 이영렬을 기억한다. 과묵하게 맡은 일을 하면서도 한칼이 있는 스타일이다. 박근혜 국정농단 사건은 박영수 특검으로 넘어가지 않았으면 그가 맡아 처리했을 일이다. 특검으로 넘어가기 전까지 수사 시간이 많지 않았는데도 상당한 성과를 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영렬을 자르고 윤석열을 앉혀야 했던 것은 청와대가 통상의 검찰로는 원하는 목적을 달성할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언론에까지 보도된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발사대 추가 반입 사실을 보고에서 누락했다고 국방정책실장을 직위해제했다. 박찬주 육군 제2작전사령관이 순순히 물러나지 않자 공관병 갑질 의혹을 터뜨려 망신을 주고 고철업자 친구에게서 184만 원어치 향응을 받았다고 옷을 벗겼다. 하급 부대에 전달되지도 않은 기무사 계엄령 문건을 갖고 쿠데타 시도인 양 야단법석을 떨었다. 어느 것 하나 제대로 과녁을 맞혔다는 느낌을 주지 않는다. 검찰도 청와대도 스스로를 돌아보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독일은 영국과 달리 여왕이 통치한 전례가 없다. 입헌군주제하에서도 철혈 재상 비스마르크가 통치하고 정치란 법대를 나온 남자들의 전유물로 여기던 나라였다. 그런 독일에서 여성이 국가 수장인 시대가 앙겔라 메르켈에게 국한한 예외적 현상이 아닐 수 있다는 강력한 근거가 등장했다. 메르켈 총리가 맡고 있던 기민당(CDU) 대표에 ‘미니 메르켈’로 불리던 아네그레트 크람프카렌바워가 7일 선출됐다. ▷내각책임제인 독일에서는 당 대표가 그 당의 총리 후보가 되는 것이 관례다. 크람프카렌바워가 당 대표로 선출된 것이 관심을 끄는 이유는 그가 2년 후 기민당 대표 선거에서 재선하고 이듬해 총선에서 이긴다면 메르켈의 후임이 될 것이 분명해서다. 사민당(SPD)에서도 내년 4월 전당대회에서 여성 정치인 안드레아 날레스가 당 대표 자리를 예약해놓은 상태다. 차기 총선에서 CDU가 이기든, SPD가 이기든 다시 여성 총리가 나올 가능성이 높다. ▷독일 정치의 특징은 정치인들이 청소년 시절부터 정당 조직에 몸담고 활동한다는 점이다. 크람프카렌바워는 1981년 고등학교 시절 CDU에 가입한 이래 퓌틀링겐 시당(市黨)과 자를란트 주당(州黨) 조직에서 착실히 정치적 이력을 쌓으며 성장했고 2011년 이래 자를란트주 총리로 선출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 여성이 주 총리가 된 것은 그가 세 번째다. 메르켈은 결혼을 2번 했지만 자녀는 없다. 크람프카렌바워는 세 자녀의 어머니다. 그를 두고 보수정당 내에서 가족과 커리어를 결합하는 여성의 이미지를 개척하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독일의 남성 우위 정치의식은 끈질겨서 메르켈이 총리가 된 뒤에도 여성 정치인이 정치적으로 성장하려면 남성 멘토를 필요로 한다는 말이 남아 있었다. 메르켈은 헬무트 콜 전 총리의 정치적 양녀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콜 전 총리의 후견 속에서 정치적으로 성장했다. 그러나 크람프카렌바워가 당 대표 자리를 성공적으로 유지하고 차기 총리가 된다면 그런 말도 통하지 않게 될 것이다. ‘여성에서 여성으로의 계승’, 크람프카렌바워 앞에 놓인 새로운 도전이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과분하게도 법원개혁안을 만드는 ‘국민과 함께하는 사법발전위원회’(사발위) 위원을 맡고 있다. 난 동의하지 않았지만 사발위는 가칭 ‘사법행정회의’를 설치해 대법원장의 사법행정권을 넘겨받고, 사법행정회의에는 법원 외부 인사를 포함하는 것으로 결정했다. 사발위 위원 10명 중에는 전국법관대표회의(법관회의) 전 의장이 들어있다. 또 사발위를 돕는 12, 13명으로 구성된 2개 전문분과에는 2명씩의 법관회의 대표들이 있다. 법관회의 전 의장이 전문분과 다수 의견에 거의 동의하고 전문분과를 대변해 사발위 위원들을 설득하려 애쓰는 걸 보면 법관회의 측이 사발위와 전문분과 양쪽을 코디네이트한다는 느낌을 받지 않을 수 없다. 전문분과는 본래 미국 연방사법회의처럼 법관들로만 구성된 사법행정회의를 제안했다. 하지만 진보 성향 위원들이 외부 인사가 포함된 안을 밀어붙였다. 여기에 사법행정회의를 법관만으로 구성한 뒤 과반을 추천할 권리를 차지함으로써 법원을 좌우하려 한 법관회의의 속셈에 반발한 일부 다른 위원이 가세해 외부 인사가 포함된 안으로 결론이 났다. 사법행정회의가 졸지에 외부 인사가 참여하는 기구가 되다 보니 법관회의는 법관인사위원회만큼은 놓치지 않으려 했다. 전문분과는 법관인사위원회의 과반을 법관회의가 추천하는 안을 올렸다. 그러나 인사 대상자가 인사를 하는 꼴이라는 강한 반발이 제기돼 ‘과반’ 표현은 삭제됐다. 본래 ‘법관회의 추천을 포함한다’는 표현까지 없애려 했으나 법관회의 전 의장이 사정을 해 남겨뒀다. ‘농단’은 그 후 벌어졌다. 사발위 채택안을 법원조직법 개정안으로 조문화하는 과정에서 법관인사위원회의 과반을 법관회의가 추천하는 안이 되살아났다. 김명수 대법원장이 취임 후 처음 지명한 안철상 민유숙 대법관은 비교적 중립적인 인사였다. 그러나 올 6월부터 법관회의 대표가 대법관후보추천위원회에 참석하면서 분위기가 변질됐다고 한 당연직 추천위원이 들려줬다. 추천위 위원 10명 중 6명이 법원 측 인사다. 이들은 법관회의 대표가 누구는 되고 누구는 안 되고 하면서 설치면 그게 대법원장 뜻인가 해서 영향을 받기 쉽다. 그나마 7월 임명제청된 김선수 변호사와 노정희 고법 부장판사는 성향을 떠나 능력 면에서 대법관감이라는 대체로 일치된 견해가 있었지만 10월 임명제청된 김상환 고법 부장판사에 대해서는 앞서 김 변호사를 강력히 밀었던 이 당연직 추천위원까지 거부감이 컸던 모양이다. 법관회의의 최근 법관 탄핵 촉구 결의는 왜 필요했는지 알 수 없어 자충수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탄핵은 국회의 권한이다. 굳이 법관회의가 결의하지 않아도 특별재판부까지 구상한 더불어민주당은 필요하면 언제든 탄핵에 착수할 준비가 돼 있다고 볼 수 있다. 단 1표 차로, 그것도 의결정족수 논란을 불러일으키면서 통과된 결의는 법원 내부에서조차 분란의 원인이 되고 있다. 느닷없이 지방법원 지원의 지원장 이하 몇몇 법관이 발의한 탄핵 촉구안이 6일 만에 법관회의 안건으로 채택된 사실은 ‘기획 탄핵’이라는 비난의 빌미가 되고 법원회의가 물밑 커넥션에 의해 움직이는 음모론적 조직이라는 인상을 줬다. 우리나라와 비슷한 법원제도를 둔 일본만 해도 10년 차 미만은 판사보(補)라고 해서 법관회의에 포함시키지 않는다. 우리나라 법관회의에는 15년 차 미만인 지법 단독판사와 배석판사가 약 60%를 차지한다. 판사로서는 아직 더 배워야 하는 법관들이 법관회의를 좌우하고 그 법관회의가 법원을 좌우하려 들고 있는 게 지금의 사법부다. 사법행정회의의 본래 모델이었던 미국 연방사법회의는 대법원장을 의장으로 13개 항소법원장들과 지방법원에서 뽑은 동수의 대표로 구성된다. 지방법원에서 뽑은 대표는 대부분 지방법원장이다. 우리 식으로 치면 대법원장이 법원장들과 함께 사법행정을 하는 것이지 판사보급이 좌우하는 결의로 사법행정을 하는 것이 아니다. 법관은 국회의원처럼 민주적으로 선출되는 것이 아니라 관료처럼 충원된다. 따라서 법원을 국회처럼 운영할 수 없다. 투표에 의해 지지받는 순이 아니라 연장자 순으로 법원장이 되고 사건도 기계적으로 배당하는 것이 법원의 운영에 어울린다. 우리 법원이 모자란 것이 그런 경륜과 순서에 입각한 관행이다. 법원행정처의 임의든, 법관회의의 임의든 임의를 배제할 수 있는 틀을 만드는 것이 지금 필요한 법원개혁이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1815년 워털루 전투에서 나폴레옹은 영국군에 결정적으로 패해 역사에서 사라진다. 이 전투에서 영국군은 땅에 닿으면 폭발해 사람들을 날려 보내는, 오늘날 우리가 대포 하면 떠올리는 전형적인 대포를 처음 사용했다. 그 전까지 대포는 발사한 대포알의 무게로 성벽을 허물어뜨리거나 들판에 밀집한 군인들을 뭉개버리는 것이지, 대포알을 폭발시켜 사람을 죽이는 것이 아니었다. ▷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 날아가 공격하는 것이 하늘을 진동시키는 우레와 같다는 대포알이다. 하지만 대포의 역사에서 비격진천뢰의 의미는 우레 같은 소리보다 서양에 앞선 폭발탄이었다는 데 있다. 중국에도 진천뢰가 있었다. 그것은 수류탄과 같이 불을 붙이는 것과 거의 동시에 폭발하는 것이었다. 그런 폭발이 아니라 시간차를 두고 폭발하기 때문에 대포에서 쏠 수 있는 비격진천뢰는 조선의 독창적인 무기로 1591년 선조 때 이장손이 개발했다. ▷비격진천뢰는 조선이 임진왜란 초기의 패배를 딛고 전세를 역전시키는데 큰 기여를 했다. 그 비격진천뢰가 전북 고창군 무장읍성에서 11점이 새로 발견됐다. 과거 발견된 비격진천뢰 6점은 모두 폭발한 뒤 탄피만 남은 상태로 발견됐다. 사용되지 않고 내부에 화약이 그대로 남아있는 비격진천뢰 11점의 발견은 획기적이다. 이틀 뒤인 11월 19일은 1598년 이순신 장군의 순국(殉國)과 노량해전 승리로 임진왜란이 끝난 날이다. 그 420년 뒤인 7주갑(周甲)에 발견됐다는 점에서 더욱 뜻깊다. ▷임진왜란 직후 명청 교체기인 17세기 전반 만주족 수장 누르하치가 요동의 요충지인 명의 영원성 공략에 번번이 실패한 것은 명이 포르투갈에서 수입한 대포인 홍이포 탓이 컸다. 이 홍이포가 인조 이후 조선에서도 제작돼 병인양요와 신미양요 때 사용됐다. 위력적이라는 홍이포도 대포알 자체는 폭발하는 것이 아니어서 19세기를 거치면서 급속히 발달한 양이(洋夷)의 화약식 대포 앞에 무릎을 꿇는다. 임진왜란 당시 비격진천뢰가 얼마나 첨단무기였는지 짐작이 가면서 이를 더 발전시키지 못한 아쉬움이 남는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이호진 전 태광그룹 회장은 2011년 400억 원대 횡령·배임 혐의로 구속 기소됐으나 간암 3기임을 이유로 63일 만에 구속집행이 정지되고 이후 보석 결정을 받아 7년 8개월째 풀려나 있다. 이 전 회장은 지난달 대법원 재상고심에서 일부 혐의에 대해 다시 파기환송 선고를 받았다. 1심-항고심-상고심-파기환송심-재상고심까지 5번의 재판으로도 모자라 재파기환송심과 재재상고심까지 2번의 재판을 더 남겨두면서 수감 여부 확정이 지연되자 장기간 보석을 성토하는 목소리가 높다. ▷이 전 회장의 보석은 단지 길어서가 아니라 간암 환자라는 사실이 무색하게 매일 술과 담배를 즐기고 고급 레스토랑과 명품 가게를 찾으며 일상을 즐기고 있다는 전직 수행비서의 증언이 나와서 황제급이라는 비난에 휩싸였다. 여기에 태광그룹 소유의 골프장 휘슬링락에서 전직 법무부 장관, 전직 검찰총장, 전직 금융감독원 부원장 등 전·현직 고위 관리들이 골프와 식사비를 면제받거나 태광 골프상품권으로 비용을 지급한 것으로 드러나 유착 의혹이 제기됐다. ▷검찰은 결국 13일 이 전 회장의 보석 취소를 검토해달라고 법원에 청구했다. “언론 보도 등으로 볼 때 이 전 회장의 건강 상태가 보석을 유지할 만한 정도는 아니라고 본다”는 것이다. 그의 건강 상태에 대한 의혹과 함께 보석 취소를 요청하는 진정서가 검찰에 제출된 지 2년이 넘었다. 공판 검사 중 한 명이라도 정의감이 있었다면 이 전 회장의 건강 상태를 의심하고 확인해봤을 터이지만 지금 와서도 청구의 근거라고는 언론 보도가 전부다. ▷보석에는 보석의 청구가 있으면 법원이 반드시 허가해야 하는 필요적 보석과 보석 여부가 법원의 재량에 속하는 임의적 보석이 있다. 흔히 병보석이라 하는 것은 임의적 보석에 해당한다. 이런 보석은 법원이 쉽게 내주지 않는다. 재벌이니 호화 변호인단을 갖고 있을 것이며 그 변호인단이 붙어서 부풀린 의료진단서를 만들어내고 검찰이나 법원이 직접 확인하는 걸 막았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무전구속(無錢拘束) 유전보석(有錢保釋)’이라는 말이 나올 수밖에 없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미중(美中) 갈등의 와중에 헨리 키신저가 95세의 노구를 이끌고 중국을 방문했다는 뉴스가 크게 보도됐다. 키신저란 사람을 좋아하지 않지만 그의 ‘외교(diplomacy)’는 명저라고 여긴다. 이 책을 관통하는 단 하나의 문제의식을 꼽으라면 ‘공산주의자들과의 협상’이다. 공산주의자들과의 협상을 지지한 그는 중국과 외교관계를 수립하고 소련과의 군축 협상을 본격화했다. 그것을 데탕트라고 부른다. 미국은 ‘트루먼 독트린’ 이후 소련, 즉 공산주의자들과의 협상 자체를 거부했다. 트루먼에 이어 집권한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대통령 시절의 존 덜레스 국무장관은 동서(東西) 갈등을 외교적 문제가 아닌 도덕적 문제로 보고 소련 체제 내에서 근본적 변화가 일어나기 전까지는 어떤 협상도 성과가 없을 것이라고 여겼다. 키신저는 조지 케넌 식의 봉쇄 정책은 소련 체제 내의 근본적 변화를 유도한다는 목적은 훌륭하지만 그 변화가 일어날 먼 훗날까지 참고 견뎌야 하는 긴 여정(旅程)을 위해서는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경제학자 존 메이너드 케인스가 공황은 시장에 맡겨두면 언젠가는 극복되지만 그 언젠가가 사람들이 다 죽고 난 뒤라면 무슨 소용이 있냐고 비판한 것과 비슷하다. 키신저나 케인스나 치밀한 현실감을 가진 천재였다. 소련 체제는 스탈린이 오래전에 예민하게 느낀 대로 스탈린 사후 약 한 세대 만에 붕괴하고 말았다. 북한 체제도 이대로 가면 언젠가 붕괴하고 만다고 느끼기에 김정은은 협상을 하자고 나왔을 것이다. 케넌의 봉쇄 정책처럼 북한을 군사와 경제의 양면으로 압박하는 것도 북한의 변화를 유도하는 방법이기는 하다. 다만 한반도의 휴전선 인근은 인구밀집지대여서 군사적 충돌이 발생할 때 인적 피해가 막대할 수밖에 없다는 점과 중국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북한을 경제적으로 도울 수 있다는 점이 압박의 효과를 떨어뜨리는 것도 사실이다. 이 때문에 협상론도 어느 정도 타당성이 있다. 그러나 협상에 임할 때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협상의 목적지는 압박의 목적지보다 훨씬 덜 매력적이라는 사실을 감수해야 한다는 게 키신저의 주장이다. 공산주의를 민주주의와 인권의 관점에서 근본적 결함이 있는 체제로 보는 이들에게 키신저의 논지가 비도덕적으로 보이는 것은 공산주의자들과의 협상이 결국 공산주의자들과의 공존(共存)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북한에 대한 유화정책은 김정은과의 공존으로 갈 수밖에 없다. 유화정책으로 비핵화조차 달성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김정은은 대륙간탄도미사일(ICBM)과 핵무기를 교묘히 분리하면서 미국의 국익과 한국의 국익을 디커플링(decoupling)시키고 있다. ‘미국 우선주의’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에게는 ICBM 개발 중단과 미래 핵의 포기만으로 만족할 가능성이 있다. 그렇게 되면 한국으로서는 김정은과의 공존이 아니라 핵을 가진 김정은과의 공존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 문재인 정부 관계자들은 말로는 반드시 협상으로 비핵화를 이루겠다고 하지만 그것이 미션 임파서블(mission impossible)에 가깝다는 건 그들 스스로 잘 알 것이다. 그럼에도 북한 체제는 옛 소련 체제보다 더한 허약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유화정책은 한반도의 긴장을 완화시키면서 북한의 변화를 유도하는 긴 우회로일 수 있다고 여길 수 있다. 그 정도의 높은(혹은 과도한) 낙관을 가질 수 없다면 압박론자가 될지언정 유화론자는 될 수 없다. 다만 키신저의 협상론은 피 한 방울도 나올 것 같지 않은 냉철한 현실주의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가 공산주의자들의 말을 믿어서 공산주의자들과 협상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 아니다. 다만 공산주의자들이 체제 유지를 위해 차마 입으로 말하지 못했던, 말 너머의 허약한 현실을 봤기 때문에 한편으로 압박하면서도 한편으로 협상을 주장했던 것이다. 이것이 공산주의자를 솔직 담백하다고 평가하며 유화정책 일색인 현 정부와의 차이다. 키신저가 ‘외교’에서 프랑스 리슐리외 추기경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 냉전 이후 공산주의자들과의 협상의 근거를 이끌어내는 논지는 감탄을 자아낼 정도다. 그러나 현실은 늘 천재의 분석도 가볍게 뛰어넘는다. 소련의 변화를 이끌어내는 데 키신저의 데탕트가 역할을 하지 않았다고 할 순 없지만 결정타를 가한 것은 소련을 힘으로 압박한 로널드 레이건이었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헌병(憲兵)이 군사경찰로 바뀐다. 헌병이란 말은 일본에서 왔다. 일본 육군은 1881년 프랑스의 장다르므리(gendarmerie)를 본떠 헌병을 만들었다. 경찰군인이란 뜻의 경병(警兵)으로 부르려고도 했으나 헌병이 됐다고 한다. 헌(憲)은 법을 의미하므로 헌병은 법을 집행하는 군인이란 뜻이다. 헌병에는 주로 사무라이 출신 경찰이 차출됐다. 헌병 창설의 목적은 군사경찰 업무보다는 경찰 내의 사무라이 세력을 줄이고 이들의 폭력성을 민권운동 시위 탄압에 돌리려는 것이었다. 그런 일본 헌병이 구한말과 일제강점기 조선에 와서 악명을 떨쳤다. ▷프랑스의 장다르므리는 폴리스(police)와 별도로 경찰 임무를 수행하는 무장부대다. 치안을 도시에서는 폴리스가 담당하지만 도시를 벗어나서는 장다르므리가 담당한다. 장다르므리의 일부는 군사경찰로 특화돼 있다. 장다르므리 소속원의 신분은 군인이지만 조직 자체가 군과는 별도로 성장했기 때문에 군으로부터 독립해 군사경찰 역할을 수행할 좋은 조건을 갖고 있다. 일본 헌병이 처음부터 군에 예속된 것과 큰 차이다. ▷우리나라 헌병은 광복 후 미국 군사경찰(MP·Military Police)을 본떠 만들어졌는데 이름만 일본 것을 썼다. 영어로는 MP라고 써 밀리터리 폴리스의 번역임을 분명히 했다. 미국 군대는 프랑스나 일본과 달리 군대 내로 역할이 한정된 독자적인 경찰을 갖고 있다. 헌병의 명칭을 군사경찰로 바꾸는 것은 제도의 유래를 따져볼 때도 적절한 개명이다. ▷다만 군사경찰이란 말이 좋은 작명인지는 의문이다. 군경찰로 했으면 더 압축적인 데다 군검찰과 대구(對句)도 맞아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검찰 업무처럼 경찰 업무도 군에서는 특별하다. 법을 집행하는 군인들을 키우는 업무는 본래의 군사훈련과는 거리가 멀다. 그래서 군검찰은 법무관 제도를 통해 외부 법률 전문가를 많이 쓴다. 군사경찰은 그렇지 않다 보니 전문성이 떨어지고 군 지휘관에 예속되기 쉽다. 이참에 군사경찰이 군 지휘관이나 군검찰에서 독립해서 활동할 여지도 넓혀주는 게 의미가 있을 듯하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은 1914년 세르비아 청년이 오스트리아 황태자를 쏜 사건이 방아쇠 역할을 했다. 하지만 정작 싸움의 주역이 한편에서는 독일, 다른 한편에서는 러시아와 프랑스가 된 이유를 알려면 세르비아의 슬라브족 형님 격인 러시아와 오스트리아의 게르만족 형님격인 독일의 대결구도와 1870년 프로이센-프랑스전쟁에서 알자스로렌 지방을 독일에 빼앗긴 프랑스의 원한을 이해해야 한다. ▷제1차 대전 종전으로부터 100년이 되는 11일 관련국 정상이 프랑스 파리에 모인다. 프랑스의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은 “우리가 사는 시대가 제1차 대전과 제2차 대전 사이인 간전기(間戰期)와 흡사하다”는 우려를 표명한 바 있다. 제1차 대전 전후 처리 과정에서 독일에 과도한 배상을 요구한 것이 독일의 민족주의적 반발을 불러일으켜 제2차 대전으로 이어지는 원인이 됐다. 오늘날 독일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등에서 극우파가 득세하는 것이 제2차 대전 직전과 비슷한 모습으로 보이기도 한다. ▷20세기는 1900년부터가 아니라 1918년부터라고 말하기도 한다. 근대의 끝자락까지 남아있던 ‘카이저’니 ‘차르’니 하는 구식 군주들과 그에 부합하는 낡은 신분적 문화가 사라지고 민주주의와 대중문화의 시대, 바로 우리가 사는 현대로 들어서는 계기가 된 것이 제1차 대전 종전이다. 국제적으로도 국제연맹(League of Nations)이 태어나면서 약육강식(弱肉强食)의 ‘힘의 외교’를 넘어서려는 노력이 시작됐다. ▷강대국 민족주의가 제국주의적 야욕으로 불붙어 두 차례 세계대전이 일어났지만 그 속에서 약소국들에는 민족자결주의라는 새 희망이 주어졌다. 제1차 대전 직후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에 힘입어 폴란드 등이 독립을 획득했다. 1919년 우리나라의 3·1운동도 그 영향으로 일어났다. 불행하게도 일본은 제1차 대전의 승전국이었고 3·1운동은 독립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그럼에도 민족자결주의는 거역할 수 없는 시대적 흐름이 돼 제2차 대전 이후 한국 등 수많은 신생국을 탄생시킨 동력이 됐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올해는 시인 김수영이 교통사고로 숨진 지 50년이 되는 해다. 시인은 귀가하던 밤길에 집 근처에서 버스에 부딪혔다. 알베르 카뮈는 기차 일정을 바꿔 편집자의 자동차를 타고 가던 중에 차가 나무에 부딪치는 교통사고로 즉사했다. 죽을 때 나이는 각각 48세와 47세. 난리 통에 죽거나 병으로 죽으면 운명이겠거니 생각하게 되지만 교통사고로 죽는 것은 어쩐지 비명에 갔다고 여겨져 더 안타깝다. ▷가장 억울한 교통사고는 음주운전 차량에 치여 죽거나 불구가 되는 것일 게다. 9월 카투사에서 복무 중이던 윤창호 씨가 부산 해운대에서 만취한 운전자의 차에 치여 뇌사 상태에 빠졌다. 윤 씨의 친구들은 ‘음주운전 교통사고로 친구 인생이 박살났습니다, 제발 도와주세요’라는 청원을 청와대 게시판에 올렸고 수십만 명이 함께 분노하며 동의를 해줬다. ▷이들이 국회에 제안한 것이 이른바 ‘윤창호법’ 제정이다. 음주운전 초범 기준을 2회에서 1회로 변경하고 처벌 기준인 음주 수치를 낮추자는 내용이었다. 이에 바른미래당 하태경 의원은 ‘윤창호법’을 발의했고 민주평화당 이용주 의원 등 법조인 출신 의원들이 동참했다. 이 의원은 지난달 21일 자신의 블로그에 “음주운전은 실수가 아닌 살인행위”라며 “선진국에서는 음주운전으로 사망사고가 발생할 경우 살인죄로 처벌받는다”는 글을 올렸다. 그런 이 의원이 지난달 31일 서울 강남에서 음주운전을 하다 적발됐다. 코미디 같지만 결코 웃지 못할 일이 벌어진 것이다. ▷인터넷 게시판에는 “본인이 직접 음주운전은 살인행위라고 했으니 살인죄로 처벌받아야 한다” “언행 불일치의 표본”이라며 비판하는 글이 올랐다. 이 의원이 음주운전을 했지만 사망사고를 일으킨 것은 아닌 이상 살인죄 처벌 운운하는 건 지나치다. 다만 국회의원의 언행 불일치가 이토록 적나라하게 드러난 사례도 흔치 않다. 무슨 말을 하면 그 말에 자신이 구속된다고 여겨 삼가게 되는 것이 보통 사람들의 심리다. 말은 말일 뿐이라는 듯 스스로 열흘 전 살인행위라고 질타한 음주운전을 참으로 가볍게 저지른 의원의 ‘태연함’이 그저 놀라울 뿐이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