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댄 플래빈(1933∼1996)이란 예술가가 낯설다면, 26일 문을 연 서울 송파구 롯데뮤지엄의 ‘댄 플래빈, 위대한 빛’은 당혹스러운 기분이 들 전시다. 특히 전시관에서 처음 마주하는 작품 ‘1963년 5월 25일의 사선’은 달랑 45도쯤 기울어진 형광등 하나가 전부다. 털어놓자면 미리 공부를 하고 가도 좀 ‘거시기’하다. 하지만 우리는 눈치껏 안다. 참아야 한다. 앤디 워홀(1928∼1987)과 비견되는 작가라는데. 솔직히 워홀 작품도 옛날엔 동네 호프집에 내걸린 그림판으로 더 친숙했지 않은가. 모르니까 평가도 맘대로인 거다. 대신 하나씩 배우다 보면 그게 또 나름 즐거우리니. 실제로 ‘형광등의 작가’ 플래빈은 워홀과 공통점이 꽤 많다. 다섯 살 차의 미국 작가로 첫 전시도 1960년 전후쯤. 당시 현지 미술계 대세였던 추상회화에 대한 반작용으로 ‘팝아트’(워홀)와 ‘미니멀리즘’(플래빈)을 추구했다. 산업재료를 미술로 끌어들였고, 시리즈 연작을 즐겼다. 선구자들이 그렇듯 둘 다 초기엔 욕 많이 먹었다. 이번에 들어온 14점은 플래빈의 ‘욕받이’ 시절이라 할 초기작들(1963∼74년). ‘1963년…’은 바로 그가 처음으로 형광등을 이용한 작품이다. ‘콩스탕탱 브랑쿠시에게’란 부제가 달렸는데, 현대추상조각의 선구자로 불리는 루마니아 조각가 브랑쿠시의 ‘끝없는 기둥(Endless Column)’에서 모티브를 얻었다고 한다. 형광등도 어지러운데 시골 벌판에 배배 꼬여 30m 넘게 올라간 기둥이라니…. 하지만 의외로 플래빈 작품은 미주알고주알 따지지 않아도 딱히 불편하지 않다. 설렁설렁 따라 걸으며 각자 ‘필’대로 맛보면 된다. 원래 ‘빛’이라는 게 그렇지 않나. 공원에서 햇볕을 쬐려고 광합성과 비타민D까지 연구해야 하는 건 아니니까. 눈 부라리며 집중할 필요도 없다. 안구만 뻑뻑해질 뿐. 그저 작품에서 뻗어 나오는 빛을 즐기면 된다. 그런 뜻에서 이번 전시의 ‘앙꼬’로 꼽히는 ‘무제(Untitled)’는 무척 인상적이다. 제목도 없는데 주로 ‘장벽(Barrier)’이라 불리는 이 작품은 길이가 40m를 넘어 기억에 안 남을 수가 없다. 1.2m짜리 형광등이 60cm 간격으로 뻗어 있는데 울타리인지 책장인지 그물인지 묘하다. 작품을 소장한 미국 디아아트(Dia Art)파운데이션 관계자는 “현지 전시장에선 매우 남성적이고 거친 느낌을 주는 작품이었는데, 여기선 예쁘고 몽환적인 느낌을 주는 게 이채롭다”는 감상을 내놓았단다. 역시 빛이란 시공간을 타고 넘는 존재인가 보다. 아쉬운 건 전시 장소다. 찾아가기 너무 힘들다. 롯데월드타워 7층에 있는데 길이 복잡하기 이를 데 없다. 물론 잘만 당도하면 공간은 상당히 매력적이지만. 권윤경 롯데뮤지엄 아트디렉터는 “첫 시작인 만큼 플래빈에 이어 ‘사실주의 초상화의 선구자’ 알렉스 카츠의 전시를 준비하는 등 대형 기획을 선보일 예정”이라고 설명했다. 4월 8일까지. 02-1544-7744정양환 기자 ray@donga.com}

우연히 들른 거라면 괜히 왔단 후회가 생길지도 모르겠다. 기획전 ‘우리는 별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첫인상은 좀 휑하다. 바깥에 쇼핑몰 윈도처럼 전시된 작품부터 살짝 과학박람회 분위기. 안에 들어서도 금방 적응되진 않는다. 훅 밀려든 온기에 안경에 김이 서린 기분이랄까. 갈팡질팡. 그래도 커피 물 끓을 시간 정도만 찬찬히 걸음을 옮겨 보자. 전시를 마련한 큐레이터 3인(김민정 송고은 신지현)의 의도가 여기에 있을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기 시작한다. 뭔가 심심한데 뿌연, 딱 걸리진 않는데 궁금한. 우리가 쉽게 ‘우주’라 부르지만, 실은 쥐뿔도 아는 게 없는 광활한 무대. ‘우리는 별들로…’는 인류의 근원이자 사유의 출발점이 되어준 별나라를 비추고 있다. ‘두산 큐레이터 워크샵’이란 이름 아래 기획자들이 엄선한 작가는 모두 5명. 솔직히 그들의 작품에 모두 별이 담겨 있다곤 말 못하겠다. 하지만 분명히 별빛은 보인다. 예를 들어 강동주 작가의 유화 ‘155분 37초의 하늘’은 왠지 쓸쓸하지만 항상 그곳을 버티는 밤의 어둠이 존재한다. 보이든 안 보이든 거긴 별빛이 있으리니. 김윤철 양유연 전명은 작가 작품 역시 ‘스페이스 오디세이아’가 넘실거린다. 시간이 허락한다면 박민하 작가의 17분짜리 영상 ‘Cosmic Kaleidoscope(우주 만화경)’는 처음부터 끝까지 감상할 만하다. 좀 불편한 사운드가 귓등을 때리겠지만, 그게 또 요상하게 온몸을 휘감는다.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외계. 달에 사는 토끼의 진짜 이름은 뭘까. 감히 스포일러를 저지르면 답은 ‘없다’. 정진우 큐레이터는 “2007년 개관한 두산갤러리는 2011년부터 신진 큐레이터를 발굴하는 프로그램을 이어오고 있다”며 “몇몇 큐레이터에겐 미국에 있는 ‘두산갤러리 뉴욕’에서 기획전 기회도 제공하는 등 해외 활동을 지원한다”고 말했다. 모두 잘 되면 좋겠다. 다음 달 24일까지. 서울 종로구 두산갤러리. 02-708-5050정양환 기자 ray@donga.com}

댄 플래빈(1933~1996)이란 예술가가 낯설다면, 26일 문을 연 서울 송파구 롯데뮤지엄의 ‘댄 플래빈, 위대한 빛’은 당혹스런 기분이 들 전시다. 특히 전시관에서 처음 마주하는 작품 ‘1963년 5월 25일의 사선’은 달랑 45도쯤 기울어진 형광등 하나가 전부다. 털어놓자면 미리 공부를 하고 가도 좀 ‘거시기’하다. 하지만 우리는 눈치껏 안다. 참아야 한다. 앤디 워홀(1928~1987)과 비견되는 작가라는데. 솔직히 워홀 작품도 옛날엔 동네 호프집에 내걸린 그림판으로 더 친숙했지 않은가. 모르니까 평가도 맘대로 인거다. 대신 하나씩 배우다보면 그게 또 나름 즐거우리니. 실제로 ‘형광등의 작가’ 플래빈은 워홀과 공통점이 꽤 많다. 다섯 살 터울 미국 작가로 첫 전시도 1960년 전후쯤. 당시 현지 미술계 대세였던 추상회화에 대한 반작용으로 ‘팝아트’(워홀)와 ‘미니멀리즘’(플래빈)을 추구했다. 산업재료를 미술로 끌어들였고, 시리즈 연작을 즐겼다. 선구자들이 그렇듯 둘 다 초기엔 욕 많이 먹었다. 이번에 들어온 14점은 플래빈의 ‘욕 받이’ 시절이라 할 초기작들(1963~74년). ‘1963년…’은 바로 그가 처음으로 형광등을 이용한 작품이다. ‘콩스탕탱 브랑쿠시에게’란 부제가 달렸는데, 현대추상조각의 선구자로 불리는 루마니아 조각가 브랑쿠시의 ‘끝없는 기둥(Endless Column)’에서 모티브를 얻었다고 한다. 형광등도 어지러운데 시골벌판에 배배 꼬여 30m 넘게 올라간 기둥라니…. . 하지만 의외로 플래빈 작품은 미주알고주알 따지지 않아도 딱히 불편하지 않다. 설렁설렁 따라 걸으며 각자 ‘필’대로 맛보면 된다. 원래 ‘빛’이라는 게 그렇지 않나. 공원에서 햇볕을 쬐려고 광합성과 비타민D까지 연구해야 하는 건 아니니까. 눈 부라리며 집중할 필요도 없다. 안구만 뻑뻑해질 뿐. 그저 작품에서 뻗어 나오는 빛을 즐기면 된다. 그런 뜻에서 이번 전시의 ‘앙꼬’로 꼽히는 ‘무제(Untitled)’는 무척 인상적이다. 제목도 없는데 주로 ‘장벽(Barrier)’이라 불리는 이 작품은, 길이가 40m를 넘어 기억에 안 남을 수가 없다. 1.2m짜리 형광등이 60㎝ 간격으로 뻗어있는데 울타리인지 책장인지 그물인지 묘하다. 작품을 소장한 미국 디아아트(Dia Art)파운데이션 관계자는 “현지 전시장에선 매우 남성적이고 거친 느낌을 주는 작품이었는데, 여기선 예쁘고 몽환적인 느낌을 주는 게 이채롭다”는 감상을 내놓았단다. 역시 빛이란 시공간을 타고 넘는 존재인가보다. 아쉬운 건 전시장소다. 찾아가기 너무 힘들다. 롯데월드타워 7층에 있는데 길이 복잡하기 이를 데 없다. 물론 잘만 당도하면 공간은 상당히 매력적이지만. 권윤경 롯데뮤지엄 아트디렉터는 “첫 시작이니만큼 플래빈에 이어 ‘사실주의 초상화의 선구자’ 알렉스 카츠의 전시를 준비하는 등 대형기획을 선보일 예정”이라고 설명했다. 4월 8일까지. ※콘스탄틴 블랑쿠시=Constantin Brancusi정양환 기자 ray@donga.com}

우연히 들른 거라면 괜히 왔단 후회가 생길지도 모르겠다. 기획전 ‘우리는 별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첫인상은 좀 휑하다. 바깥에 쇼핑몰 윈도우처럼 전시된 작품부터 살짝 과학박람회 분위기. 안에 들어서도 금방 적응되진 않는다. 훅 밀려든 온기에 안경에 김이 서린 기분이랄까. 갈팡질팡. 그래도 커피 물 끓을 시간 정도만 찬찬히 걸음을 옮겨보자. 전시를 마련한 큐레이터 3인(김민정 송고은 신지현)의 의도가 여기에 있을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기 시작한다. 뭔가 심심한데 뿌연, 딱 걸리진 않는데 궁금한. 우리가 쉽게 ‘우주’라 부르지만, 실은 쥐뿔도 아는 게 없는 광활한 무대. ‘우리는 별들로…’는 인류의 근원이자 사유의 출발점이 되어준 별나라를 비추고 있다. ‘두산 큐레이터 워크샵’이란 이름 아래 기획자들이 엄선한 작가는 모두 5명. 솔직히 그들의 작품에 모두 별이 담겨 있다곤 말 못하겠다. 하지만 분명히 별빛은 보인다. 예를 들어, 강동주 작가의 유화 ‘155분 37초의 하늘’은 왠지 쓸쓸하지만 항상 그곳을 버티는 밤의 어둠이 존재한다. 보이든 안 보이든, 거긴 별빛이 있으리니. 김윤철 양유연 전명은 작가 작품 역시 ‘스페이스 오디세이아’가 넘실거린다. 시간이 허락한다면, 박민하 작가의 17분짜리 영상 ‘Cosmic Kaleidoscope(우주 만화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감상할 만하다. 좀 불편한 사운드가 귓등을 때리겠지만, 그게 또 요상하게 온몸을 휘감는다.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외계. 달에 사는 토끼의 진짜 이름은 뭘까. 감히 스포일러를 저지르면 답은 ‘없다.’ 정진우 큐레이터는 “2007년 개관한 두산갤러리는 2011년부터 신진 큐레이터를 발굴하는 프로그램을 이어어고 있다”며 “몇몇 큐레이터에겐 미국에 있는 ‘두산갤러리 뉴욕’에서 기획전 기회도 제공하는 등 해외활동을 지원한다”고 말했다. 모두 잘 되면 좋겠다. 다음달 24일까지. 서울 종로구 두산갤러리. 정양환 기자 ray@donga.com}

31일부터 열리는 안지예 작가의 개인전 ‘Reflect ; The other’는 살짝 착시현상이 들 수도 있다. 건물로 들어섰는데 건물 바깥 풍경이 펼쳐진다고나 할까. 첫 개인전을 가지는 안 작가의 작품은 일관성을 지녔다. 직장인이 한숨 돌리며 내다봤던 창문의 경치, 아니면 도심에서 하늘을 보려다 건물 외벽만 눈에 가득 찬 순간과 닮았다. 실제로 요즘 현대인이 살아가는 도시의 최신 빌딩은 통유리로 둘러싸여 있지 않나. 거기에 일그러지고 부유하듯 비치는 표상들을 작가는 세심하게 잡아냈다. 물론 빌딩에 비치는 건 대부분 또 다른 ‘무생물’ 빌딩이다. 그런데 작가는 흥미롭게도 ‘Big man’ ‘Friends’ ‘Mr. Hide’ 등 대부분 작품에 인간을 일컫는 제목을 달았다. 이 작품들의 주인공은 캔버스에 담긴 무언가가 아니라 어쩌면 그걸 바라보고 있는 관객들일지도. 김정윤 큐레이터는 “작품 속 건물은 작가에게 있어 인간관계에서 경험한 타자의 모습을 은유적으로 대변해줄 수 있는 매개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Reflect…’ 전은 서울 종로구 갤러리도스가 올해 상반기 마련한 릴레이전시 ‘실상과 허상’ 가운데 하나. 안 작가를 포함해 젠박 김성중 이수원 김기섭 서윤아 등 6명의 작가가 선정됐다. 정양환 기자 ray@donga.com}

지령 3만 호를 맞은 동아일보는 ‘문화주의를 제창한다’는 사시에 어울리는 다양한 예술 전시를 개최해 큰 관심을 받았다. 1970, 72년엔 동아일보와 동아방송이 주최하는 ‘동아 국제 판화 비엔날레’가 당시 경복궁에 있던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려 화제를 모았다. 미국 독일 브라질 등 세계 30개국 작품이 모였는데, 그 시절 ‘비적성공산국가’였던 체코 루마니아의 작품도 국내에 소개했다. 이 밖에도 1970, 80년대 척박한 상황에서도 ‘동아미술제’ ‘오스트리아 전시회’ 등을 꾸준히 개최했다. 창간 70주년을 맞았던 1990년엔 세계 인상파 화가의 작품들을 대거 선보인 ‘인상파―현대미술 걸작’ 전시를 선보였다. 클로드 모네와 오귀스트 르누아르, 에드가르 드가 등 지금 들어도 가슴이 뛰는 거장들의 작품들로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2003년 덕수궁에서 열렸던 ‘위대한 회화의 시대―렘브란트와 17세기 네덜란드 회화’전과 2010년 ‘앤디 워홀의 위대한 세계’(서울시립미술관)도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네덜란드 회화 전은 ‘깃털 달린 모자를 쓴 남자’ 등 렘브란트 판 레인의 걸작을 3점이나 전시해 개막 3일 만에 1만6000여 명이 몰리는 신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앤디 워홀전 역시 박찬욱 영화감독과 빈 소년합창단 등 유명인사들까지 찾으며 35만 명이나 관람했다. 최근 열린 동아일보 주관 전시도 여전히 사랑을 받고 있다. 2016∼17년 국립중앙박물관과 울산박물관에서 열린 ‘이집트 보물’전은 무려 46만 명이 전시장을 찾았다. 핀란드를 대표하는 캐릭터 무민을 다룬 지난해 ‘무민 원화’전과 2014년 일본 현대 미술의 거장 구사마 야요이를 소개한 ‘구사마 야요이―A Dream that I dreamed’전도 관람객이 줄을 이었다. 정양환 기자 ray@donga.com}
“헐, ‘에쵸티’도 돌아와?” 웬일일까. 새해 복 많이 받으래도 듬성듬성 답하던 ‘까똑 방’이 난리가 났다. 누군가가 한 방송에서 H.O.T 재결합 공연을 추진한단 소식을 올리자, 순식간에 온갖 반응이 쏟아졌다. 하긴 1996년 데뷔했던 ‘아이돌의 시조’. 40대라도 관심 가질 만하지. 하지만 예상은 또 빗나갔다. “와, 걔들 2001년에 해체했어? 우리 딸이 2002년생인데. 그때 와이프랑 경주에 놀러갔다가….” “1996년이면 내가 군대 제대해서 복학했지. 첫날에 술 마시고 뻗어가지고….” 그럼 그렇지. 그들에게 중요한 건 ‘에쵸티의 귀환’이 아니었다. 그들과 함께 잠깐 몰려온, 어린 시절 향수에 흠뻑 젖은 거였다. 그땐 그랬지, 그땐 참 좋았지. 추억은 방울방울 얽히고설키더니 결국 1980년대쯤 가서야 마무리됐다. 그리고 ‘까똑’은 다시 침묵. 그래도 고맙다, 에쵸티. 아마 그들 가운데 몇 명은 잠시나마 신났으리라. 진짜 당신들의 복귀 무대를 마주하면 ‘치맥’도 찾게 되리니. “쇼는 계속돼야 한다.”(퀸의 ‘The show must go on’) 삶이 그리 이어지는 것처럼.정양환 기자 ray@donga.com}

“그는 앙리 마티스(1869∼1954)의 후계자다.”(프랑스 미술평론가 질 바스티아넬리) 프랑스 미술계에서 ‘현대의 야수파’ 작가로 불리는 피에르마리 브리송(63)의 국내 첫 개인전 ‘지중해’가 열렸다. 브리송은 1972년 17세에 오를레앙에 있는 샤를페기센터에서 첫 전시회를 가질 정도로 일찍이 두각을 나타낸 화가. 40여 년 동안 지중해와 인물, 바다, 영웅과 인간이란 주제에 천착해 왔다. 접거나 오리거나 물감을 칠한 종이들로 캔버스를 채우는 방식으로 예술세계를 표현하길 즐긴다. 대담한 원색을 강조해 강렬한 개성을 표출했던 마티스가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이유다. 이번 전시에는 ‘지중해’와 ‘붉은 아칸서스’ ‘아르카디아 댄스’ 등 모두 13점을 선보인다. 올리브나무와 함께 지중해 혹은 고대 그리스를 상징하는 아칸서스 나뭇잎은 작가가 가장 사랑하는 소재 가운데 하나. 아르카디아 역시 고대 펠로폰네소스 지역에 있었다는 ‘이상향’을 뜻한다. 최근 국내 개인전을 맞아 내한했던 브리송은 “작가가 작업을 하면서 느꼈던 지중해의 평화와 시적인 느낌을 관람객들도 맛보길 바란다”고 전했다. 실제로 이번에 선보이는 작품들의 첫인상은 남부 유럽을 여행하다가 어느 민박집에서 마주칠 법한 ‘고풍스러운 벽지’가 떠오른다. 코발트블루와 같은 밝은 톤의 색감과 세월을 짐작할 수 없을 듯한 거친 질감은 시공간을 초월한 몽롱함과 아늑함을 동시에 선사한다. 평론가 바스티아넬리는 “브리송의 작품은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에 대한 영원한 찬사”라며 “특히 코린트 양식의 기둥과 궁전을 장식하는 아칸서스 나뭇잎은 지중해 특유의 후각적인 분위기와 예술에 대한 사랑이 담겨 있다”고 호평했다. 원래 다음 달 8일까지 예정됐던 전시는 관객들이 몰리며 28일까지 연장됐다. 서울 강남구 도산대로 올리비아박갤러리. 02-517-3572 정양환 기자 ray@donga.com}

14∼16세기 한반도에서 꽃피었던 ‘분청사기(粉靑沙器)’의 전통을 계승하며 현대적으로 재조명한 전시 ‘이제 모두 얼음이네’가 관객을 기다린다. 가나문화재단은 “한국 분청사기의 대가로 꼽히는 ‘급월당(汲月堂)’ 윤광조 작가(72)와 후배 작가들이 참여하는 전시가 서울 종로구 인사아트센터에서 열리고 있다”고 전했다. 분청사기는 시기적으로 고려청자와 조선백자 사이에 크게 성행했던 도자. 청자나 백자가 지닌 정갈하고 단아한 아름다움과 달리, 독특한 조형미로 투박하면서도 대담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멋을 지녔다. 이 때문에 청자 백자보다 현대적인 감각에 더 잘 맞는다는 의견도 적지 않다. 윤 작가는 최순우 전 국립박물관장(1916∼1984)이 생전에 “물속에 잠긴 달을 길어 올릴 만한 기량을 가진 작가”라며 급월당이란 호를 지어준 것으로 유명하다. 얽매이지도 과장스럽지도 않은 그의 작품 세계는 서구권에서도 각광을 받아왔다. 이번 전시엔 급월당은 물론 변승훈과 김상기 김문호 이형석 등 그의 문하라 할 수 있는 작가들이 함께 참여해 작품 90여 점을 선보인다. 재단은 “다섯 작가의 동인전은 분청사기의 전통 양식과 현대 미적 가치를 새롭게 인식하는 기회가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31일까지. 02-736-1020정양환 기자 ray@donga.com}

‘예술 공항(Art Port).’ 18일 개장하는 인천국제공항 제2여객터미널은 최고의 문화공간을 꿈꾸며 ‘아트포트 프로젝트’에 약 46억 원을 투입했다. 지니 서, 율리우스 포프 등 국내외 유명작가 18명의 작품이 승객들을 맞이한다. 가장 눈길을 끄는 건 역시 ‘프랑스 미술계의 스타’ 그자비에 베양(55·사진)의 ‘그레이트 모빌’이다. 3층 출국장에 설치된 높이 18.5m의 작품은 모른 척 지나치기도 힘들다. 11일 개장 기념 기자회견에 맞춰 내한한 베양은 “인천공항과 같은 국제적 공간에서 수많은 사람이 내 작품과 조우하는 건 작가에게도 큰 의미를 지닌다”고 말했다. ―‘그레이트 모빌’에 가장 주력한 점은…. “겸손과 균형이다. 대형 프로젝트지만 여긴 미술관이 아니다. 시각적으로 눈에 띄어도 소박해야 한다고 봤다. 큰 모빌이지만 자연스러운 움직임을 전달하려 했다. 승객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되 압도하길 바라진 않는다.” ―작품이 지닌 뜻은 뭔가. “모빌은 물리적 법칙을 따라 움직인다. 본질은 같아도 계속 움직이며 끊임없이 변화한다. 마치 자연 풍경이나 낮과 밤처럼. 공항에 오는 승객과도 닮았다. 동일한 인물이지만 다른 상황과 환경으로 이동하지 않나.” ―설치 장소가 공항이란 점을 많이 의식한 것 같다. “맞다. 공항은 사람들이 24시간 움직이는 곳이다. 21세기를 상징하는 형이상학적 공간이랄까. 내 작품에서도 시간과 이동은 매우 중요한 요소다. 가볍게는, 내 작품이 승객들이 거대한 공항에서 위치를 파악할 수 있게 도와주면 좋겠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

1917년 그가 한 거라곤 별게 없었다. 뉴욕 한 상점에서 산 소변기에 ‘R. Mutt’란 서명을 남겼을 뿐. 하지만 후대는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현대미술 작품”(2004년 영국예술협회)으로 꼽았다. 그 마르셀 뒤샹(1887∼1968)의 ‘샘’을 올해 국내에서 만난다. 국립현대미술관(관장 바르토메우 마리)이 10일 서울 종로구 서울관에서 ‘2018 전시 라인업’을 공개했다. ‘완성도, 전문성, 그리고 역사적 깊이’를 올해의 목표로 삼은 미술관은 뒤샹을 비롯해 김중업, 이성자, 윤형근, 아크람 자타리 등 다양한 국내외 거장의 향취에 흠뻑 젖을 기회를 제공한다.○ 서울관-미래를 내다보는 상상 미국 필라델피아미술관과 공동 주최하는 ‘마르셀 뒤샹’전은 올해 12월 마지막 전시로 예정돼 있다. ‘샘’과 함께 ‘레디메이드’ ‘계단을 내려오는 누드 NO.2’ 등 관련 작품 약 110점을 선보인다. 뒤샹 전으로는 국내 역대 최대 규모. 이보다 앞서 5월엔 레바논 출신 세계적 사진작가 ‘아크람 자타리(52)’ 개인전이 관객을 찾아간다. 스페인 바르셀로나현대미술관 공동 주최. 마리 관장은 “특히 1997년 ‘아랍이미지재단’의 공동 설립자인 자타리는 재단이 축적한 예술가들의 아카이브를 바탕으로 한 작업도 공개할 계획”이라고 설명했다. 11월에는 2014년 세상을 떠난 독일 영화감독이자 미디어 아티스트 ‘하룬 파로키’ 전도 예정돼 있다. 한여름 8월엔 한국 단색화를 대표하는 화가 ‘윤형근’(1928∼2007) 전이 열린다. 사후 미공개 작품을 포함한 작품 60여 점이 소개된다. 유족들이 처음 공개하는 다양한 사료를 통해 장인인 김환기(1913∼1974)와의 관계도 조명한다. 연극 무용 등과 연계해 장르의 경계를 허무는 ‘2018 국립현대미술관 다원예술’과 1960년대 미국 뉴욕 예술가들과 벨 전화연구소가 설립한 비영리 예술단체 ‘이에이티(E.A.T.)’를 조명하는 ‘E.A.T.: 예술과 과학기술의 실험’ 등도 눈여겨볼 만하다.○ 과천관-한국 미술을 관통하는 내러티브 과천관은 올해 국내 거장을 소개하는 자리가 많다. 먼저 3월엔 올해 탄생 100주년을 맞은 이성자(1918∼2009) 회고전이 마련된다. ‘이성자: 지구 반대편으로 가는 길’은 추상예술의 대가로 꼽히는 그의 작품 세계를 총망라한다. 마리 관장은 “한국의 대표적 개념·설치미술가 박이소(1957∼2004)를 조명하는 ‘박이소: 기록과 기억’(7월)과 국내 1세대 현대건축가 김중업(1922∼1988)을 회고하는 전시 ‘김중업’(8월)도 놓치면 아쉽다”고 추천했다. 미술관 소장품으로 구성하는 특별전도 2차례 열린다. 국내 작가의 뉴미디어 소장품을 전시하는 ‘소장품 특별전: 동시적 순간’(2월)과 지난해 ‘균열Ⅰ’에 이어 김환기 유영국 백남준의 작품을 보여줄 ‘소장품 특별전: 균열Ⅱ’(9월)가 관객을 기다린다. 한편 덕수궁관에서는 ‘내가 사랑한 미술관, 근대의 걸작’(5월)과 ‘제국의 황혼, 근대의 여명: 근대전환기 궁중회화’(11월)가 예정돼 있다. 마리 관장은 이날 간담회에서 “국립현대미술관은 2016년 관람객 221만 명에서 지난해 284만 명으로 크게 늘어나는 성과를 이뤘다”며 “미술관 운영에서 3년은 짧은 시간이다. 진화하고 발전하는 과정에 있는 만큼 재임하고 싶다”고 말했다. 2015년에 취임한 마리 관장은 올해가 임기 마지막 해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

‘고향 제주에서 히말라야까지.’ 한국사진학회장인 양종훈 상명대 교수가 제주 제주시 김만덕기념관에서 ‘포토옴니버스’전을 개최한다. 늘 발로 뛰며 세상을 누비는 ‘행동하는 사진가’인 양 교수는 이번 전시 역시 에이즈로 고통받는 아프리카부터 폭압에 신음하는 동티모르 등 쉽게 접하기 힘든 세계의 현장 곳곳을 카메라에 담아 왔다. 특히 2016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된 ‘제주 해녀’는 동향의 애정이 듬뿍 묻어난다. 척박한 작업 환경에도 묵묵히 삶을 꾸려온 강인한 여성의 질감이 잘 살아 있다. 소설가인 박범신 명지대 교수는 “그의 사진 세계는 밝고 천진하고 역동적이면서도 고통 너머의 희망을 보여 준다”고 평했다. 양 교수는 2007년 동아일보가 주최한 동아미술제에서 시각장애인과 함께한 ‘마음으로 보는 세상’이 전시기획부문에 당선됐을 정도로 세상의 그늘진 곳을 조명하는 데 줄곧 힘써 왔다. 양 교수는 “개선할 수 있는 문제를 함께 고민하는 건 다큐멘터리 사진가의 의무이자 특권”이라며 “병들고 약하고 소외된 이들이 자신에게 손짓한다는 믿음을 언제나 간직하고 있다”고 말했다. 다음 달 25일까지. 064-759-6090정양환 기자 ray@donga.com}

“전진과 창작을 위해서 기성관념이나 생활 주변의 여러 가지 현실을 부정하는 일이 있더라도 우리들의 의식 속에 깃들어 있는 자국과 그림자는 결코 지울 수 없을 것이다. … 전통이란 말 속에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다는 뜻도 포함돼 있다.” 우성 김종영(又誠 金鍾瑛·1915∼1982)이 1980년 국립현대미술관 도록에 썼던 ‘자서(自書)’의 일부분이다. 이런 글은 다소 의외다. ‘현대 추상조각의 선구자’로 불리는 그가 전통을 중시 여겼다니. 서울 서초구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에서 열리는 전시 ‘김종영, 붓으로 조각하다’는 이런 궁금증에 대한 실마리를 낙낙하게 제공하는 자리다. 경남 창원에서 태어난 우성은 ‘영남 사림의 영수’ 김일손(1464∼1498)의 7대손이다. 동요 ‘고향의 봄’에 나오는 “울긋불긋 꽃 대궐”이 그의 생가를 일컫는다고 한다. 명문가답게 여섯 살 때부터 시(詩)·서(書)·화(畵)를 자연스레 접하고 배웠다. 1932년 동아일보 주최 ‘제3회 전조선남녀학생작품전람회’에서 서예작품으로 장원을 차지하기도 했다. 이번 전시를 공동 주최한 김종영미술관의 박춘호 학예실장은 “당시 겨우 17세인 학생이 중국 당나라 서예가 안진경(709∼785)의 서체를 구현하자 심사위원들이 현장에서 다시 써보라고 했을 정도”라고 전했다. 그런 우성인지라 ‘전통과 현대의 일치’는 자연스레 그의 예술을 관통하는 핵심 키워드가 됐다. 20세기 초 국내 미술계는 서양 문물에 경도돼 한국과 동양미술을 격하하는 분위기가 컸다. 하지만 양쪽 모두 체득한 우성은 치우치지 않는 균형감을 지닐 수 있었다. 이를 바탕으로 조각에서도 서구 풍조를 객관적으로 수용하려 했다. 이번 전시는 우성의 예술세계가 글씨에서 그림, 그리고 조각으로 어떻게 이어지는지 엿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우성이 고교 때 수학여행을 갔다는 금강산을 담은 우리의 대표적 전통미술작품으로 겸재 정선(謙齋 鄭敾)의 ‘만폭동도(萬瀑洞圖)’가 있다. 실제로 이에 지대한 영향을 받은 우성의 글씨와 수채화를 먼저 감상하자. 그런 뒤 이를 추상적으로 표현한 드로잉을 거쳐 조각작품 ‘74-5’나 ‘75-4’ 등을 마주하면 한 예술가의 시간여행에 동행한 쾌감이 몰려온다. 특히 추사 김정희(1786∼1856)를 유독 존경했다는 우성의 작품들을 살펴보는 즐거움도 녹록지 않다. 이번 전시에선 우성이 1967년 썼다는 글씨 ‘판천지지미 석만물지리(判天地之美 析萬物之理)’도 만날 수 있다. 장자(莊子)의 ‘천하’편에 나오는 “하늘과 땅의 아름다움을 판단하고, 세상 만물의 이치를 분석한다”는 글귀다. 우성의 예술관을 적확하게 짚어준다. 박 학예실장은 “김종영 선생은 초기엔 작품에 ‘각인(刻人)’ ‘각도인(刻道人)’으로 서명을 남기다가 후기엔 ‘불각도인(不刻道人)’으로 바꿨다”며 “인공적인 아름다움을 배제하고 끝없이 예술의 정수(精髓)를 추구했던 그의 작품세계는 이런 동양적 가치관과 깊은 연을 맺고 있다”고 설명했다. 다음 달 4일까지. 02-580-1300정양환 기자 ray@donga.com}

세계 미술계에 한류 붐을 일으켰던 ‘단색화’는 앞으로 어디로 나아갈까. 서울 종로구 ‘리안갤러리 서울’에서 5일 시작된 전시 ‘한국의 후기 단색화’는 어쩌면 이런 질문에 대한 대답이 될 수도 있겠다. 단색화 열풍의 바통을 이어받을 차세대 주자들의 작품을 한자리에서 만날 기회이기 때문이다. 실은 이번 참여 작가들에게 차세대란 수식어는 꽤나 어색할지도 모르겠다. 김근태 김이수 김춘수 김택상 남춘모 법관 이배 이진우 장승택 전영희 천광엽 등 11명은 짧아도 10년 이상, 길게는 1970년대부터 꾸준히 단색화 작업을 해온 미술가들. 기획을 맡은 윤진섭 전 국제미술평론가협회 부회장은 “김환기(1913∼1974) 이우환(82) 등 전기 단색화 작가들의 제자 세대로 1970, 80년대 한국 미술 현장에서 모더니즘 미술을 직접 체험했던 작가들을 일컫는다”고 설명했다. ‘한국의 후기 단색화’전을 윤 전 부회장이 기획했다는 점도 눈여겨봐야 한다. 그는 한국 단색화를 2000년 광주비엔날레 특별전 영문판 도록에서 ‘코리안 모노크롬(Korean Monochrome)’이 아니라 ‘Dansaekhwa’로 처음 명명한 평론가다. 2012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려 화제를 모았던 ‘한국의 단색화’ 전도 선보였다. 윤 전 부회장은 “후기 단색화 작가들은 최근의 퇴조를 만회할 만한 경쟁력을 충분히 갖췄다는 게 미술계의 지배적 견해”라고 설명했다. 이번 전시에서 만나는 작품 21점은 모두 인상 깊다. 하나로 묶어 단정 짓긴 어렵지만, 독자적인 재료와 실험을 통해 작품을 ‘의식의 표현 수단’으로 삼는 성향을 보인다. 천연 재료인 숯과 먹 등을 즐겨 쓰는 이배 작가는 특출한 동양적 감각으로 국내외의 주목을 받고 있다. 김택상 작가는 물에 최소한의 안료만 섞어 표현하는 ‘침전기법’을 통해 오묘한 자연주의를 추구한다. 서울 전시는 다음 달 24일까지. 3월 8일부터는 대구 중구 리안갤러리에서 순회 전시를 가질 예정이다. 02-730-2243정양환 기자 ray@donga.com}

늦은 밤 TV를 틀면 가끔 기시감이 찾아온다. 별건 아니다. 채널이 많아 같은 영화나 예능 프로그램을 수십 번씩 마주해서다. 보통은 리모컨을 누른다. 그런데 꾸역꾸역 보게 되는 작품이 있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할리우드 첩보스릴러 ‘본 시리즈’는 꼭 넋을 놓는다. 희한한 건, 볼 때마다 새로운 장면을 목도한다. 몹쓸 기억력. 며칠 전 1편 ‘본 아이덴티티’가 그랬다. 과거를 잊어버린 제이슨 본(맷 데이먼). 어렵사리 자기 집을 찾아내 벨을 눌렀다. 빈집인 건 당연지사. 옆에 있던 마리(프랑카 포텐테)가 이런 농을 던진다. “You are not here(당신은 여기 없네요).” 깜짝 놀랐다. 실은 똑같은 말을 해줬던 스님이 있었다. 일명 ‘저잣거리 스님’으로 불리는 법현 스님이다. 지난해 선원을 찾았을 때, 환하게 웃으며 이처럼 알쏭달쏭한 말을 던졌다. 솔직히 형이상학에 약하지만, 당시 말씀은 귀에 쏙 들어왔다. “기껏 찾아왔더니, 없다 그러니까 이상하죠? 사람이 그런 존재입니다. 육신이 왔다고 함께 있는 게 아니죠. 이렇게 인연을 맺었지만, 아직 서로 잘 모르잖아요. 본질은 자신을 둘러싼 다양한 조각들이 모여서 이뤄집니다. 그걸 조금씩 알아가며 존재의 가치도 올라가죠. 전 지금 ‘당신은 누구입니까’ ‘당신은 어디에 있습니까’라고 물은 겁니다.” 어디에 머무르는지로 깨닫는 존재의 가치라…. 그런 뜻이라면, 법현 스님만큼 독특한 존재감을 지닌 인물도 흔하지 않다. 스님이 2005년 연 대한불교태고종 열린선원은 서울 은평구 역촌중앙시장에 있다. 50년도 넘은 재래시장은 딱 봐도 세월의 ‘짠내’가 시큼하다. 요즘 서울에선 희귀한 지물포나 방앗간에 묻혀 찾기도 힘들다. 심지어 바로 옆에 교회도 있다. “처음엔 만류도 컸죠. 세상에서 제일 시끌벅적한 곳에서 불도를 닦을 수 있겠느냐고요. 하지만 종교가 뭡니까. 사부대중에게 법을 전해야지요. 그렇다면 시장은 최고의 포교 터죠. 교회와도 사이가 무척 좋습니다. 해마다 12월엔 ‘성탄절 축하’ 현수막도 내거는 걸요. 껄껄.” 물론 자기 자리를 아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특히 청년들은 대다수가 앞길을 고민한다. 법현 스님도 엇비슷했다. 대학 때부터 출가를 고민했지만 가족이 걸렸다. 찢어지게 가난했던 살림. 장남은 모른 척할 수 없었다. “도저히 부모님을 저버릴 순 없었습니다. 그런데 태고종은 결혼도 봉양도 가능하거든요. 요즘 교수들을 만나면 ‘학생들 자존감이 떨어져 있어 걱정’이란 얘길 합디다. 그럴 땐 짐짓 꾸짖습니다. ‘당신부터 정신 차리시오. 선생이 긍지를 지녀야 제자도 힘을 받지’라고. 방법은 찾으면 나옵니다. 그럴 맘의 자세가 되어 있는가가 문제예요.” 삶은 참 까다롭다. 지금 서 있는 인생도 가끔 뒤통수를 친다. 열심히 하루를 살아가도 우리는 여기에 없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럴 땐 방법이 없다. 주위를 둘러보는 수밖에. ‘살다 보면 이런저런 일들이 있을 것이다./이런 때도 저런 때도 그저 따땃이 해라./더구나 추운 때는 따슨 것이 제일이여./찬바람 맞고 다니다가도/바람벽에 볕 들먼 좋지 않드냐?’(법현 스님의 책 ‘그래도, 가끔’에서) 그래, 결국 옷깃을 여미는 건 마음먹기에 달렸다. 우리가 어디에 서 있건 간에. 둘러보면 분명 손잡아 줄 이가 있다. 그렇게 한발씩 내디뎌야 한다. 또 한 해가 시작됐다.정양환 문화부 차장 ray@donga.com}

“왜 이렇게 공부를 많이 하냐고요? 산중에서 할 일이 뭐가 있겠습니까. 시간이 남아돌아요, 하하.” 지난해 12월 29일 전화 통화한 자현 스님(47)은 참 유쾌했다. 이미 고려대 철학과와 성균관대 동양철학과, 동국대 미술사학과·역사교육과 박사인 그는 주위에서 ‘사(四)박사’로 불린다. 그뿐인가. 현재 동국대 미술학과는 수료, 국어교육과는 박사 과정을 밟고 있다. 조만간 ‘육(六)박사’가 된다는 말이다. 그런 그가 2015년 공부 노하우를 담은 책 ‘스님의 공부법’에 이어 지난해 말 ‘스님의 논문법’(불광출판사)까지 내놓은 건 자연스러워 보인다. “에이, 그렇지도 않아요. 실은 전 머리 되게 나쁩니다. 초등학교 때 ‘가’도 많았고, 돌아서면 까먹을 정도로 기억력도 떨어져요. 그래서 더 이런 책을 쓸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타고난 능력을 지닌 사람에게야 노하우가 왜 필요하겠어요. 둔재지만 공부에서 성과를 내고 싶은 사람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 싶었습니다.” 그렇다면 공부도 잘하고 논문도 잘 쓰는 필살기란 뭘까. 스님은 ‘초식’보다 ‘정수’를 깨치는 게 중요하다고 짚었다. 예를 들어, 대학원생이 졸업논문을 써야 한다고 하자. 그럼 일단 자신이 몸담은 조직의 시스템을 파악하는 게 우선이다. 전공과 학과가 요구하는 것이 뭔지, 관련 학회에선 어떤 논문들이 주목받는지를 알아야 한다. 전체적 흐름을 짚지 않고서 혼자만의 세계에 빠져선 좋은 결과물을 내놓기 힘들다. “공부도 마찬가지죠. 예를 들면, 대학수학능력시험도 당대의 유행이라는 게 있습니다. 그걸 잘 모르면 낭패 보기 십상이죠. 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건 ‘목적의식’입니다. 이 공부를 통해서 뭘 얻고 싶은 건지 스스로에게 물어봐야 해요. 그냥 공무원시험 합격이 목표여선 안 됩니다. 그럼 어찌어찌 공무원이 되더라도 행복하질 않아요. 자기 인생에서 이 공부가 왜 필요한지를 깨달아야 학습에 재미가 생깁니다. 그래야 공부도 ‘취미’가 되는 거예요.” 스님이 보기엔 요즘 채널A 예능 ‘나만 믿고 따라와, 도시어부’를 통해 다시 열풍이 불고 있는 낚시는 공부와 무척 닮았다. 스님은 “즐기는 사람은 고기를 낚는 것과 상관없이 밤새 앉아 있어도 행복할 수 있지만, 취미가 없는 이는 30분도 고통스럽다”며 “기왕 공부를 할 거면 자신이 가장 즐길 수 있는 방식을 찾는 게 제일 중요하다”고 조언했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
새해면 올해의 목표나 소망을 품는다. 물론 ‘누구나’는 아니다. 하루하루 버티기 힘겹거나 절망만 가득한 이도 있을 테니까. 그래도 1월 1일. 저무는 해보다 솟아오르는 태양을 떠올리는 게 인지상정이다. 때론 새로운 시작이 또 다른 상실을 맞닥뜨리는 순간이 될지도 모른다. 2008년 영화 ‘걸어도 걸어도’를 연출한 일본 감독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동명 소설에서 그런 쓰라림이 찾아온 시간을 묘사했다. 해마다 현관에 새해맞이 꽃꽂이를 해놓던 어머니. 화사해서 보기 좋아도, 다들 무덤덤하게 그러려니 하며 지나쳐 왔다. 어느 연말, 갑작스레 어머니가 쓰러졌다. 가족은 그 꽃을 보는 마음이 휑해질 수밖에 없다. “정초가 시작돼 현관 앞을 꾸몄던 꽃들이 시들어도, 이때만큼은 좀처럼 버릴 수가 없었다. 그것이 결국 어머니의 마지막 꽃꽂이가 되리라는 것을 우리는 어렴풋이 느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런 수고를 고맙게 생각하게 된 것은 훨씬 나중의 일이다.” 12월이나 1월이나 바람은 차다. 때늦은 후회도 언제든 밀려온다. 2018년 신년 계획도 좋지만, 일상의 작은 온기야말로 올해는 잘 챙기시길.정양환 기자 ray@donga.com}

종교계 지도자들이 2018년을 맞아 신년사를 발표했다. 대한불교조계종의 설정 총무원장은 ‘실천하는 삶’을 강조했다. 설정 스님은 “천사불여일행(千思不如一行)이라고 깊이 생각하고 다짐하더라도 한 번 실천하는 것보다 못하다”며 “사회를 병들게 하는 물질 만능과 이기심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말했다. 아울러 “간절한 한마음으로 실천하면 지금의 어려움을 능히 이겨낼 수 있다”고 덕담했다. 천주교 서울대교구장인 염수정 추기경은 “끊임없이 발전과 성숙을 위해 낡은 것을 버리고 새로운 것을 창조해 나가야 한다”며 “우리에게 필요한 덕은 어제와 다른 오늘을 위해 희망을 갖고 노력하는 것”이라고 전했다. 한국기독교총연합회 대표회장인 엄기호 목사는 올해의 메시지로 ‘자유와 회복’을 선택했다. 엄 목사는 “지난해가 정치적 혼란과 혼동의 정국이었다면 이제는 대립과 갈등을 극복하고 새로운 소망의 미래를 열어나가야 할 시점”이라고 밝혔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

이럴 때가 제일 난감하다. 아마도 이 책은 출판사 입장에선 ‘가장 적절한 시기’에 출간했으리라. 14일 스타워즈 8편에 해당하는 ‘스타워즈: 라스트 제다이’가 국내 개봉했으니 세간의 주목은 떼어 놓은 당상. 어라, 그런데 28일 기준 관객 수가 100만 명도 되질 않는다고? 아, 이것 참. 띠지에 둘러놓은 ‘워싱턴포스트 No.1 베스트셀러’란 문구가 왠지 휑하다. 저자도 얘기했다. “인류는 크게 세 부류로 나뉠 수 있다. 스타워즈를 사랑하는 사람, 스타워즈를 좋아하는 사람, 스타워즈를 사랑하지도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이라고. 최신작 관객 수가 스타워즈에 대한 애정을 측정하는 절대적 기준이야 되지 않겠지만. 이 책을 집어 들 독자들이 누구일지는 뻔해 보인다. 그래도 하나는 분명하게 얘기할 수 있다. ‘스타워즈’엔 별 신경 안 썼거나 갈수록 실망했던 이라 할지라도 다시 한 번 ‘관심’을 갖게 될 거라고. 어쩌면 “그래, 그래도 스타워즈잖아”라며 영화관을 찾을지도 모르겠다. 또 낙담할지언정. 그만큼 이 책은 스타워즈가 어떤 매력을 지닌 영화인지, 왜 한국을 포함한 일부 국가를 제외하고 세계가 열광하는지를 훑었다. 뜨겁고 깊은 애정을 갖고. 흥미로운 건 스타워즈 ‘덕후’인 저자가 세계적으로 유명한 법학자란 점이다. 미국 하버드대 로스쿨 로버트 웜슬리 대학 교수인 그는 2009∼2012년 버락 오바마 행정부에서 규제정보국 책임자를 맡았던 인물이다. 국내에선 2009년 베스트셀러가 됐던 ‘넛지’의 공저자로도 이름을 떨쳤다. ‘팔꿈치로 슬쩍 찌르다’라는 뜻을 가진 ‘넛지(nudge)’는 ‘타인의 선택을 유도하는 부드러운 개입’을 지칭하는 경제학 용어다. 거창하게 말하면 ‘자유주의적 개입주의’의 바탕이 되는 개념이란다. 이런 저자 소개만 들으면 책이 무겁지 않을까 걱정할 수 있겠다. 뭐, 솔직히 말하면 뒷부분엔 그런 대목도 없지 않다. 스타워즈 얘기라고 꼬셔놓고 결국엔 자신의 법철학을 설파하는 ‘선생님’ 본색을 드러내곤 한다. 하지만 전체적으로는 그렇게 책장 넘기는 속도가 느려지지 않는다. 너무 찬사 일색이라 살짝 배알이 꼴릴 때도 있지만, 가벼운 맘으로 영화 속 장면들을 떠올리며 흐뭇하게 읽을 만하다. 안타깝지만 이런 흐름은 양날의 검인 측면도 분명 존재한다. 어중간하게 문지방에 올라서 있는 모양새라고나 할까. 확 문을 젖히고 들어가지 않아 깊이 있는 깨달음을 건질 기회가 적다. 게다가 너무 여러 주제를 이것저것 다룬다. ‘겉핥기’로 여겨질 정도로. 물론 이건 전략적 선택일 가능성이 높다. 영화 ‘스타워즈’를 돌이켜보라. 근사하긴 하나 걸작 예술작품은 아니지 않나. 다소 다양한 해석이 나오긴 해도, 스타워즈는 대사도 줄거리도 알기 쉽고 어렵지 않아 더 애정이 간다. 그럼 그걸 두고 엄청난 의미를 부여하는 건 배보다 배꼽이 더 큰 어리석은 짓이다. 그런 뜻에서 책 ‘스타워즈로…’는 과하지 않고 딱 적당하다. 이미 포스가 함께하는데 뭘 더 바라겠나. 원제 ‘The World according to Star Wars’(2016년).정양환 기자 ray@donga.com}

1970, 80년대 연극의 메카이자 창작극의 산실이던 세실극장이 경영난으로 내년 1월 8일 개관 42년 만에 문을 닫는다. 건축가 김중업의 작품 중 하나인 세실극장은 1976년 320석 규모로 개관해 이듬해부터 연극협회가 연극인회관으로 사용하며 1∼5회 대한민국 연극제를 개최한 유서 깊은 곳이다. 2013년 서울 미래유산으로 지정됐다. 김민섭 세실극장 극장장은 28일 “극장을 운영하며 월세 1300만 원을 포함해 매달 2400만 원의 운영비가 들었다”며 “1년에 10여 편씩 365일 공연을 올려도 매달 1000만 원의 적자를 메우기 어려웠고, 결국 내년 1월 7일 신체 연극 ‘안네 프랑크’ 공연을 끝으로 문을 닫기로 했다”고 밝혔다. 세실극장 측이 경영난으로 폐관 위기에 처하자 서울연극협회와 아시테지 한국본부가 나섰다. 지난달 서울연극협회 방지영 부회장과 아시테지 한국본부 김숙희 이사장이 세실극장 건물주인 대한성공회 측을 찾아 극장 운영을 이어가겠다는 뜻을 밝혔다. 하지만 월세 금액을 놓고 성공회 측과 팽팽한 줄다리기를 벌이다 27일 성공회 측으로부터 ‘세실극장 공간을 성공회 사무실로 활용하겠다’는 통보를 받았다. 방 부회장은 “세실극장이 한국 연극사에서 지닌 의미와 상징성을 고려해 서울연극협회와 아시테지 한국본부가 세실극장 공동 운영에 나서기로 뜻을 모았다”며 “서울연극협회와 아시테지 한국본부는 성공회 측에 월 1300만 원인 월세를 1000만 원으로 조정해 달라고 요구했고, 성공회는 운영위원회를 연 뒤 이를 수용하기 어렵다는 뜻을 전해왔다”고 전했다. 이와 관련해 대한성공회 측은 “성공회 역시 세실극장의 역사나 의미를 가치 있게 여기고 있다”며 “성공회가 세실극장을 폐관하려는 게 아니다. 현재 임대차 계약을 맺고 공연장을 운영하는 분이 경영이 어려워 더 이상 계약을 연장하지 못하겠다고 통보해왔다”고 밝혔다. 세실극장의 경영난은 과거에도 있었다. 1981년부터 1997년까지 제작그룹 마당이 인수해 한국 창착극의 산실로 자리 잡았던 세실극장은 외환위기가 닥친 1998년 1년간 휴관 결정을 내리기도 했다. 건물주인 성공회 측이 사무실로 개축하려던 것을 우여곡절 끝에 1999년 4월 연출가 하상길과 극단 로뎀이 인수해 운영했다. 당시 국내 최초로 네이밍 스폰서십을 도입해 제일화재해상보험의 후원을 받아 극장 이름이 제일화재 세실극장으로 바뀌었고 2010년 한화손해보험이 제일화재를 인수해 한화손보 세실극장이 됐다. 2012년 4월 기업 후원마저도 끊기며 다시 세실극장으로 명칭을 바꿔 홀로서기에 나섰지만, 결국 경영난을 이겨내지 못하고 폐관하게 됐다. 유서 깊은 연극 공연장의 폐관은 최근 몇 년 새 두드러진다. 특히 2015년은 연극인들에게 ‘상실의 시대’로 통한다. 2015년 국내 최초의 민간 소극장인 ‘삼일로창고극장’이 경영난을 이유로 폐관했다. 이후 서울시가 삼일로창고극장이 세 들어 있던 건물을 임차해 재개관을 추진하고 있다. 현재 내년 재개관을 목표로 리모델링 공사가 한창이다. 2015년 4월 28년간 대학로를 지켜온 ‘대학로극장’이 폐관한 데 이어 ‘품바’로 유명한 상상아트홀(1990년 개관)과 김동수 플레이하우스(2000년)도 폐관됐다. 김정은 kimje@donga.com·정양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