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승호

정승호 기자

동아일보 광주호남취재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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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정승호 기자입니다.

shjung@donga.com

취재분야

2026-03-05~2026-0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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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주/전남]“청소년-어르신에 무료 군내버스”

    “영암은 성장잠재력이 무한한 고장이지만 발전이 뒤처졌습니다. 선거 때 현장을 누비면서 주민들이 뭘 원하는지, 군정이 나아가야 할 방향이 어디인지 알게 됐습니다.” 전동평 전남 영암군수(53·새정치민주연합)는 초선 군수답지 않게 지역 현황을 꿰뚫고 있었다. 그는 인터뷰 내내 구체적인 수치와 사례를 들며 영암의 미래 청사진을 제시했다. 전 군수는 “비옥한 농토와 잘 갖춰진 산업기반, 뛰어난 관광자원이 있지만 이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해 지역발전이 더뎠다”며 “융합 행정으로 시너지 효과를 내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그는 두 차례 군수직에 도전했다가 공천 과정에서 고배를 마셨다. 1991년 31세에 전국 최연소 도의원이 된 뒤 2006년까지 내리 4선을 했다. 민주당 전남도당 대변인, 열린우리당 전남도당 사무처장 등을 역임하며 정치적 입지를 다졌지만 군수직과는 인연이 없었다. 사업가로 변신한 그는 2007년 대불산업단지에 선박블록을 만드는 알파중공업을 창업해 연간 200억 원의 매출을 올리는 중견기업으로 키워냈다. ―세 번의 도전 끝에 군수가 됐는데…. “영암군민의 뜨거운 성원에 감사드린다. 당선의 기쁨보다는 무거운 책임감을 느낀다. 변화와 혁신으로 희망찬 영암을 만들어 달라는 군민의 바람을 가슴 깊이 새기고 있다.” ―전임 군수가 추진했던 주요 사업은 어떻게 꾸려갈 것인가. “성과가 큰 사업은 더욱 발전시켜 나가는 게 옳다. 하지만 미흡한 분야는 다양한 각도에서 재검토하겠다. 관광시설 투자 등 비용 대비 효율이 떨어지는 사업은 구조조정을 통해 예산을 절감해야 한다.” ―‘명품 영암 관광시대’를 열겠다고 했는데…. “국립공원 월출산과 천년고찰인 도갑사, 왕인 박사와 도선국사 유적지가 있는 영암은 한마디로 ‘관광의 보고’다. 하지만 이를 연계하는 관광 상품이 없어 시너지 효과가 크지 않았다. 체류형 관광 상품과 체험 프로그램을 개발해 ‘영암의 관광 르네상스시대’를 열겠다.” ―침체된 지역경제를 어떻게 살릴 것인가. “영암은 현대삼호중공업과 대불국가산업단지를 보유해 기업하기 좋은 여건을 갖추고 있다. 일자리를 하나라도 만들 수 있는 사업이라면 아낌없이 예산을 쓰겠다. 이를 위해 일자리 창출 전담 대책기구를 신설해 다양한 시책을 내놓겠다. 영암읍과 독천권에 저가 임대아파트 단지를 조성하고 재래시장 활성화에도 힘을 쏟겠다.” ―‘복지 영암’ 구현을 위한 방안은…. “진정한 생활자치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복지가 뒷받침돼야 한다. 버스가 다니지 않는 마을에 ‘100원 택시’를 운행하고 20세 이하, 60세 이상 주민에게 군내버스를 무상으로 이용할 수 있도록 하겠다. 65세 이상 어르신에게 ‘효 수당’을 지급해 희망과 기쁨이 넘치는 ‘복지 영암’을 만들어 갈 것이다.” ―재원은 어떻게 확보할 것인가. “복지 분야 예산이 100억 원 정도 들 것으로 예상된다. 예산을 5% 절감하면 150억 원이 마련되는데 이 중 100억 원을 복지 분야에 쓸 계획이다. 경로당이나 마을회관 등을 새로 짓기보다는 리모델링을 통해 개선하면 소모성 예산을 줄일 수 있다.”정승호 기자 shjung@donga.com}

    • 2014-0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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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주/전남]‘인구 7만명’ 광주 광산구 수완동, “洞 안쪼개겠다” 주민투표로 결정

    광주 광산구 수완동은 2008년 12월 첫 입주가 시작돼 올 6월 말 현재 인구가 7만6187명으로, 국내에서 주민 수가 가장 많은 행정 동이다. 인근인 전남 화순군 전체 인구(7만여 명)보다 많다. ‘지방자치법’에 따르면 인구 7만 명이 넘은 동은 효율적인 행정 서비스를 위해 분동(分洞)이나 하나의 동 체계인 대동제(大洞制)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다. 수완동 주민들이 투표를 통해 동을 둘로 쪼개는 분동 대신 대동제를 선택했다. 주민들은 7일 은빛초등학교 강당에서 ‘수완동 대동제·분동 결정 관련 주민배심원제’를 가졌다. 배심원단 178명 중 152명(85%)이 대동제에 찬성했다. 대동제를 택한 동은 기존 5급(사무관)에서 격상한 4급 공무원(서기관)이 동장으로 임명된다. 이날 투표가 관심을 모은 것은 지역 현안을 형식적인 공청회를 거쳐 일방적으로 추진하던 기존 방식과 달리 주민이 직접민주주의로 지역의 미래를 결정했기 때문이다. 배심원으로 참여한 박병기 씨(47)는 “분동을 하면 경계 설정과 명칭 선정에 어려움과 혼란이 따를 수 있다는 우려가 투표에 반영된 것 같다”면서 “정보를 공개하고 민주적인 방식으로 주민 선택을 이끌어낸 광산구의 노력이 신선하다”고 평가했다. 광산구는 주민센터 이용에 어려움을 겪는 일부 주민을 위해 민원센터를 장덕도서관 인근에 건립하는 방안을 검토하기로 했다.정승호 기자 shjung@donga.com}

    • 2014-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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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주/전남]“슬로시티 청산도에서 슬로커피도 맛보세요”

    슬로시티에서 마시는 ‘슬로커피’의 맛은 어떨까. 아시아 최초 슬로시티인 전남 완도군 청산도에서 주민이 직접 만든 슬로커피를 맛볼 수 있게 됐다. 완도군은 청산도 관광 패턴이 체류형으로 바뀌면서 커피 수요가 늘자 슬로커피 제조 기술 보급에 나섰다. 군은 지난달부터 전문 바리스타를 초청해 청산도 ‘느린섬 여행학교’ 운영 종사자와 민박업주 등 25명을 대상으로 바리스타 교육을 하고 있다. 관광객들은 올해 말이나 내년 초부터 청산도 향토역사문화전시관 내 느림카페나 민박집에서 슬로커피를 맛볼 수 있다. 청산도는 2007년 12월 아시아 최초 슬로시티로 인증을 받았고 지난 한 해 37만 명의 관광객이 찾았다.정승호 기자 shjung@donga.com}

    • 2014-0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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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檢, 진도VTS 센터장 등 3명 영장

    광주지검 형사2부(부장 윤대진)는 8일 세월호 침몰사고와 관련해 폐쇄회로(CC)TV를 떼어내고 동영상 삭제를 지시한 전남 진도 해상교통관제센터(VTS) 센터장 김모 경감(45)과 근무를 소홀히 한 팀장 2명 등 간부 3명에 대해 공용물 손상, 직무유기 혐의 등으로 구속영장을 청구했다. 검찰은 세월호 희생자들의 구조·수색업체 선정 과정에서 불거진 해경과 언딘마린인더스트리(언딘)의 유착 의혹을 확인하기 위해 7일 경기 성남시 언딘 본사와 김윤상 대표 자택, 전남 목포 사무실 등 11곳을 압수수색했다.광주=정승호 기자 shjung@donga.com   이형주기자 peneye09@donga.com}

    • 2014-0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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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주/전남]“청정 바다자원으로 관광객 500만 유치”

    “청정 바다 자원으로 500만 관광객을 끌어들여 ‘부자 완도’ ‘관광 완도’를 만들겠습니다.” 신우철 전남 완도군수(61)는 7일 “미래성장동력인 수산업을 기반으로 신(新)해양시대를 열어가겠다”고 말했다. 완도에서는 4월 11일부터 한 달 동안 세계 최초로 해조류를 주제로 한 ‘2014 완도 국제해조류박람회’가 열렸다. 해조류의 무궁무진한 가치를 제시하고 소비 대중화와 해조류 산업 활성화 기반을 마련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신 군수는 “해조류박람회가 완도의 저력을 보여준 만큼 지역 발전의 새로운 전기로 삼겠다”고 밝혔다. 신 군수는 해양수산부, 농림수산식품부, 전남도에 두루 근무했다. 진도군 부군수와 전남도 해양수산과학원장 등을 역임했고 이학박사 학위를 가진 해양·수산 전문가다. 그는 “35년의 행정경험과 전문성, 인맥을 살려 내실 있는 군정을 꾸려가겠다”고 강조했다. ―초선 단체장에 대한 기대가 남다르다. “참신하고 새로운 시각으로 군정을 바라보고 실천 방안을 모색한다는 점에서 재선이나 3선 단체장과 차별화된다고 생각한다. 민선 5기 군정의 긍정적인 부분은 이어가고 부족한 부분은 채우면서 행정의 시너지를 높이겠다.” ―‘모두가 행복한 희망 완도’를 군정 목표로 내세웠는데…. “군민이 진정한 주인이고 군민 모두의 행복까지 살피는 군민 행복시대를 열어 간다는 의미다. 소통하는 화합 행정을 위해 ‘군민소통·화합위원회’를 만들 방침이다.” ―취임 첫해 가장 집중할 부분은…. “그동안 완도의 미래성장동력에 대해 많이 연구했다. 여러 복안도 가지고 있다. 그중에서 해조류 등 수산업을 중심으로 농축산업을 동반 성장시키는 ‘지역융합형 경제발전 전략’을 우선적으로 실천할 생각이다.” ―지역경제를 살리기 위한 방안은…. “3년제 한국수산대를 유치하고 경량합금용 선박 생산기술 연구센터를 설립해 완도읍 상권을 살리겠다. 해조류를 주력산업으로 키우기 위해 해조류박람회 시설 활용 방안도 강구 중이다. 해조류를 이용한 산모(産母) 치유타운 조성, 농수축산물 친환경 가공기업 육성도 지역경제에 큰 보탬이 될 것이다.” ―완도 하면 ‘청산도’가 떠오르는데…. “청산도는 완도군을 알리고 관광객을 유치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2007년 아시아 최초 슬로시티로 지정된 이후 매년 37만 명이 다녀간다. 청산도에 환경박물관을 건립해 섬의 가치와 매력을 지켜 나가겠다.” ―복지행정에 대한 복안은…. “65세 이상 고령인구 비율이 36%를 차지하고 다문화 가정이 300가구 정도 된다. 군민 모두가 따뜻한 복지 혜택을 누리도록 ‘행복복지 실현기금’을 조성할 계획이다. 빠듯한 예산을 탄력적으로 운용하고 군민장학회처럼 출향민 기금을 조성해 충당할 방침이다.” ―해양·수산 전문가로서 완도의 미래는…. “완도는 청정 환경이 자랑이다. 명사십리해수욕장의 음이온 양은 서울의 50∼60배나 된다. 섬과 섬 사이 조류가 빨라 오염원이 없고 바다 밑바닥이 맥반석과 초석으로 이뤄져 바다 정화 역할을 한다. 수산업 발전의 최적지인 데다 그 자체가 관광자원이다. ‘수산’과 ‘관광’이 완도의 미래이자 희망이다.”정승호 기자 shjung@donga.com}

    • 2014-0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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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주/전남]국립남도국악원 10년 맞이 특별공연

    전남 진도군 임회면 여귀산 자락에 자리한 국립남도국악원이 개원 10주년을 맞아 ‘절대! 박절대’를 8, 9일 대극장 진악당 무대에 올린다. ‘절대! 박절대’는 진도 출신 대금 명인 박종기 선생(1879∼1939)의 삶을 그린 작품. 박종기 선생은 진도에서 ‘박절대’라 불린다. 그의 신비한 재주와 지극한 효에 대한 칭찬의 의미가 담겨 있다. 그는 대금산조를 창시했을 뿐만 아니라 유성기 음반 최초로 대금산조 가락을 취입한 기록을 남겼다. 남도국악원은 시조반주, 창극반주, 삼현육각 등 다양한 장르의 연주활동을 한 선생의 예술혼을 가무악 총체극으로 꾸몄다. ‘절대!…’는 지역 작가인 박상률 원작을 이난영이 각색하고 전주대 박병도 교수가 총연출을 맡았다. 남도국악원 심상남 예술감독 등 단원 50명과 객원출연자 9명 등 모두 59명이 출연한다. 이번 공연은 무료로 관람할 수 있다. 앞서 남도국악원은 10년의 역사를 종합적으로 살펴보고 남도의 예술사를 통찰할 수 있는 ‘국립남도국악원 10년사’를 발간했다. 남도 국악을 담은 기념 음반과 남도국악원 10년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기념우표첩 100권도 제작했다. 윤이근 남도국악원장은 “남도음악 속에 남도 사람들의 삶과 영혼을 온전히 담아내는 작업과 함께 남도 민속예술의 세계화를 위해 노력하겠다”고 밝혔다.정승호 기자 shjung@donga.com}

    • 2014-0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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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주/전남/동서남북]“NO라고 말할 수 있어야 행정오류 줄일 수 있다”

    “‘아닌 것은 아니다’라고 말해야 정책 오류를 최소화할 수 있다.” 1일 취임한 이낙연 전남지사가 실국장 토론회에서 한 말이다. 그는 “공직은 협력과 팀워크가 중시되는 조직이다. 모든 정책 결정 과정에서 (지사 말이) 모두 옳다고만 할 게 아니라, 아닌 것은 아니라고 말해줘야 후회할 일을 막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No’라고 말할 수 있는 소신과 용기를 주문한 것이다. 그가 도청 간부들과 첫 대면 자리에서 이런 발언을 한 배경은 뭘까. 인수위원회가 한 달여 동안 활동을 마치고 내놓은 최종 보고서를 보면 그 의미를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인수위는 ‘혈세 먹는 하마’로 불리는 ‘포뮬러원(F1) 국제자동차경주대회’에 대해 ‘지속 개최’ ‘대회 중단’ ‘2016년 개최’ 등 3개 안 중 ‘대회 중단’에 무게를 뒀다. 2010년 F1을 유치한 전남도는 지난해까지 네 차례 대회를 치르면서 1910억 원의 누적 적자를 냈다. 한국개발연구원(KDI)이 2007년 F1 대회의 타당성을 분석한 결과 경주장 건설에 2998억 원이 들 것으로 예측했으나 실제는 4285억 원이 투입됐다. 개최권료 및 운영비도 2010년 이후 예측치가 2314억 원이었으나 실제는 3067억 원이 들어간 데 비해 수익은 예측치(2314억 원)에 훨씬 못 미치는 1165억 원에 불과했다. 대회를 치르지 않는다고 해도 걱정이 크다. 대회 중단에 따른 위약금과 소송비용을 합쳐 최소 4000만 달러에서 최대 1억 달러 이상을 지불해야 하는 최악의 상황을 맞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인수위는 사파리 아일랜드, 경정장, 남악신도시 스포츠 콤플렉스센터 건립 사업도 중단 또는 보류를 건의했다. 이 지사의 발언은 이 같은 대형 사업 유치와 운영 과정에서 공무원들이 과연 제 역할을 했는지에 대한 일침으로 해석할 수 있다. 서열을 중시하는 공직 문화에서 윗사람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No’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공무원은 많지 않다. 하지만 부당한 것은 부당하다고 말하고, 할 수 없는 일은 할 수 없다고 말하는 공무원이 필요한 게 요즘 전남도의 현실이다. 이 지사도 선언적 의미에 그치지 말고 소신 있는 공무원들의 말을 귀담아 들어야 한다. 이 지사의 좌우명이 ‘가까이 듣고 멀리 본다’는 ‘근청원견(近聽遠見)’ 아닌가. 격의 없는 건의와 활발한 토론이 전남 발전의 밑거름이 되길 기대한다. 정승호·사회부 shjung@donga.com}

    • 2014-0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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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토요판 커버스토리]내일 ‘5·18’ 34주년… 피해자와 가해자는 지금

    또다시 5월이다. 눈부시게 푸른 5월이다. 광주 북구 운정동 국립5·18민주묘지에 이르는 길도 연둣빛 초록으로 물들었다. 길섶의 이팝나무에 순백의 꽃이 보송보송 피었다. 흰 쌀밥을 나무에 흩뿌려 놓은 것 같은 모습은 34년 전 광주시민들이 함께 나눴던 주먹밥을 떠올리게 한다. 길쭉한 모양의 꽃잎은 자식과 남편을 잃고 지독한 ‘오월앓이’를 해온 어머니들의 눈물 자국 같다. 각시붓꽃, 노랑별꽃이 선들바람에 하늘거리고 층층나무와 아까시나무가 감싸고 있는 묘지는 5월 하늘만큼이나 슬프도록 시리다.   ▼ 5·18둥이 김소형씨 “날 보러 오셨던 아버지가 총탄에…” ▼80세 김현녀씨 “만삭의 내 딸에게 조준사격…내 손자는 어쩔 것이냔 말이오”70세 김진덕씨 “고교생이던 아들 시신도 못찾아… 묻은 곳이라도 좀 가르쳐 주시오”묘지번호 1-72. ‘아빠! 내가 태어난 지 3일 만에 돌아가셨지만 제 가슴속엔 언제나 아빠가 살아계셔요. 딸 소형.’ 1980년 5월 21일 계엄군의 총탄에 목숨을 잃은 김재평 씨(당시 29세)의 묘비에 새겨진 글귀다. 소형 씨는 아빠가 숨지기 3일 전인 5월 18일 태어난 ‘5·18둥이’다. 그에게 5·18은 세상에 태어난 기쁨보다 아버지를 잃은 슬픔이 더 큰 날이다. 해마다 그날이면 아버지를 한 번도 불러 보지 못한 설움에 지독한 ‘홍역’을 치른다.‘5·18둥이’의 슬픈 생일날 김재평 씨는 1980년 당시 전남 완도수협에서 일하던 평범한 회사원이었다. 5월 17일부터 난산 조짐을 보인 부인 고선희 씨(59)는 18일 급히 광주의 한 병원을 찾았고 그날 오전 소형 씨를 낳았다. 김 씨는 결혼 3년 만에 얻은 딸의 얼굴을 보기 위해 휴가를 내고 광주로 달려왔다. 21일 서구 화정동의 작은아버지 집에서 산후 몸조리를 하던 아내, 갓 태어난 딸을 만나 단란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하지만 기쁨은 잠시였다. 이날 오후부터 계엄군의 집단발포가 시작되면서 귀청이 찢어질 듯한 총소리가 들려왔다. 총소리에 놀란 갓난아이가 울음을 그치지 않자 아버지는 창문에 솜이불을 걸치려고 일어섰다. 그 순간 ‘쨍그랑’ 소리와 함께 총알이 김 씨를 관통했다. 피투성이가 돼 쓰러진 그는 손 한 번 쓰지 못하고 절명했다. 소형 씨가 아버지의 죽음을 어렴풋하게나마 알 게 된 건 초등학교에 입학한 무렵이었다. 5월이면 하얀 소복 차림으로 거리에 나서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외치던 엄마의 치맛자락을 잡고 다니면서부터다. 그 전에는 완도군 보길도에서 함께 살던 외할아버지로부터 “아빠가 좋은 일 하시다 돌아가셨다”는 말을 들은 게 전부였다. “엄마를 따라다니면서도 왜 우리 국군이 아빠에게 총을 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어요. 초등학교 4학년 때 망월동 묘지에서 신묘역(국립5·18민주묘지)으로 아버지의 유해를 옮길 때 비로소 알게 됐어요. 무고한 사람들이 왜 그렇게 많이 희생됐는지….” 소형 씨는 중학교 3학년 때 ‘5·18 전국학생 글쓰기 한마당’에서 아빠를 잃은 슬픔과 5·18에 대한 다짐 등을 담은 ‘오월의 시(詩)’로 대상을 받았다. 그리고 조선대 미대에 입학해 조소를 전공했다. 주위에선 “‘5·18’을 소재로 작품을 만들어 보라”는 권유가 있었지만 정중히 거절했다. ‘5·18’을 이용한다는 말을 듣기 싫었기 때문이다. “사진 속에서만 만나는 아빠가 그리울 때면 홀로 묘지를 찾아가 대화를 하곤 해요. 5월 18일은 저에게 슬픈 생일날이 돼 버렸죠. 가끔 ‘내가 태어나지 않았다면 아빠가 광주에 올라와 그런 일을 당하지도 않았을 텐데’라는 생각도 하고….” 소형 씨는 엄마와 단둘이 살면서 형편이 어려웠다. 아르바이트로 학비를 벌어야만 했다. 결국 대학 2학년을 마치고 휴학을 했다. 그는 요즘 옛 전남도청 인근에서 웨딩숍 플래너로 일하고 있다. 틈틈이 ‘광주 5·18’을 알리는 활동도 한다. 8년 전부터 5·18민주유공자유족회 ‘5월 청년부’에서 5·18 때 아버지를 잃은 자녀들과 매달 18일에 만나 토론회나 봉사를 하고 있다. “힘들고 지칠 때면 내가 쓴 비문을 하염없이 되뇌곤 해요. ‘아버지 조각상’을 아빠 묘비 옆에 세우고 싶은데, 언젠가는 그날이 오겠죠.”꽃잎처럼 스러진 ‘5월의 신부’ “타앙!” 순간 날카로운 총성이 거리를 흔들었다. 맨홀 뚜껑 위에 서 있던 그녀의 몸뚱이가 허수아비처럼 퍽 주저앉았다. “의사 좀 얼른 보내 주시오! 애기가 금방 나올라고 한단 말이라우. 사, 산모가 지금 총을 맞고 죽었는디, 여덟 달 된 애기가, 막 뛰어라우! 엄마 배 속에서, 천길 만길, 펄쩍펄쩍 뛰고 있단 말이라우….” 얼마나 지났을까. 이윽고 미화의 배가 조용해졌다. “누나! 누나아아!” “으아아아아! 미화야아아! 내 딸아. 내 새끼야아!” 소설가 임철우가 1997년 발표한 소설 ‘봄날’의 일부다. 소설 속의 ‘미화’는 1980년 5월 21일 세상을 떠난 ‘5월의 신부’ 최미애 씨(당시 23세)다. 만삭의 몸이던 그는 그날 오후 전남대 부근의 집을 나섰다. 고교 교사인 남편이 제자들이 걱정된다며 휴교령이 내려진 학교에 갔다가 점심 때가 넘도록 소식이 없어 마중을 나간 참이었다. 전남대 앞에서는 시위대와 계엄군 간에 치열한 공방이 벌어졌다. 시위대가 ‘짱돌’을 던지자 군인 하나가 한쪽 다리를 땅에 대고 ‘앉아쏴’ 자세를 취했다. 조준사격이었다. 잠시 후 총소리와 함께 최 씨는 힘없이 쓰러졌다. 하숙집을 운영하던 최 씨의 어머니 김현녀 씨(80)는 숨진 딸을 보는 순간 풀썩 주저앉았다. 딸의 주검은 참혹했다. 총탄이 머리를 관통해 온몸은 피투성이였다. 차갑게 식어가고 있는 어미의 몸속에서 태아는 거센 발길질을 하고 있었다. 김 씨는 ‘계엄군이 주검까지 뺏어간다’는 소문을 듣고 서둘러 딸을 리어카에 싣고 공동묘지에 가매장했다. 그런데 사태가 잦아든 6월 10일경 계엄사에서 ‘임신부가 죽었다는 소문을 확인하려면 검시를 해야 한다’며 주검을 다시 파오라고 명령했다. 거부하면 ‘유언비어 날포죄’로 집어넣겠다고 협박했다. 그렇게 18일 만에 다시 파헤쳐진 딸의 주검은 검시 후 망월동에 묻혔다. 두 번의 죽음을 당한 셈이었다. 김 씨는 1988년 국회 ‘광주청문회’에 나와 ‘피맺힌 한’을 토해냈다. “임신한 우리 딸이 총에 맞았는디 죽은 사람은 있고 왜 죽인 사람은 없는 것이오? 세상에 나와 보지도 못하고 죽은 내 손자는 어쩔 것이냔 말이오? 세상에 임신한 사람인 줄 뻔히 알면서도 총을 쏘는 그런 짐승 같은 놈들이 어디 있느냔 말이오? 뭔 죄가 있어서, 뭔 죄를 지었다고….” 김 씨는 그때 ‘광주의 진실’을 말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속이 후련했다고 털어놓았다. 내 딸이 왜 죽어야 했는지 이유를 알고 싶어 여기저기를 쫓아다닌 지 30여 년. 김 씨는 이젠 학살 책임자 처벌을 외칠 힘도 남아 있지 않다고 했다. “(음력으로) 이달 4일이 제사여서 묘지에 갔다 왔는데, 하얀 면사포를 쓴 영정 속의 딸이 어찌 그리 곱던지…. 이젠 눈물도 안 나와요. 평생 흘릴 눈물을 그때 다 흘려버렸으니….” 팔순의 노모는 가슴에 묻은 딸과 살고자 발버둥쳤던 어린 손자의 넋이 편히 잠들기만을 바랄 뿐이다.‘시체라도 찾았으면…’ 지난해 5월 18일 박근혜 대통령은 5·18민주화운동 33주년 기념식 참석에 앞서 행방불명자 묘역을 둘러봤다. ‘아직 유해를 찾지 못해 묘비만 있다’는 관리소장의 설명을 들은 박 대통령은 ‘임옥환의 령’이라고 새겨진 묘비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박 대통령은 묘비를 쓰다듬으면서 “그럼 다 돌아가셨겠네요”라고 혼잣말처럼 되뇌었다. 임 씨는 1980년 당시 조대부고 2학년이었다. 공수부대가 광주 외곽을 봉쇄하고 있던 5월 22일 절에서 공부하던 친구와 전남 화순을 거쳐 고향인 고흥으로 가기 위해 새벽에 조선대 뒷산을 넘었다. 대학생 2명도 함께 따라 나섰다. 매복하고 있던 공수부대원이 임 씨 일행을 발견하고 멈추라고 명령했다. 겁이 난 일행이 달아나자 공수부대원들이 무차별 사격을 했다. 대학생 2명은 도망갔고 친구는 붙잡혀 군홧발에 차이고 개머리판으로 두들겨 맞았다. 친구는 임 씨가 총에 맞아 쓰러지는 것을 봤지만 행방을 알 수 없었다. 임 씨 아버지 임준배 씨(80)는 5월 23일 아들의 소식이 끊겼다는 연락을 받고 광주로 올라왔다. 시신을 한데 모아 놓은 전남도청 앞 상무관으로 갔다. 시신들은 하나같이 처참한 모습이었다. 어머니 김진덕 씨(70)는 조선대 뒷산과 가까운 학동으로 갔다. 그곳에서 가마니에 덮여 있는 시체 11구를 보았다. 하지만 아들은 없었다. 나중에 동네사람에게 들으니 “공수부대원들이 시체를 몽땅 트럭에 싣고 가버렸다”고 했다. 김 씨는 아들이 아무도 모르게 어딘가에 묻혀 있을 것으로 확신했다. 5월 29일 ‘광주 봉쇄’가 풀리자 아버지 임 씨는 고흥에서 대형 버스를 빌려 동네사람들을 태우고 아들이 총에 맞았다는 조선대 뒷산으로 갔다. 괭이, 삽으로 흙무더기를 파 보았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열흘 뒤 조선대 인근에서 포장마차를 하는 아주머니로부터 청천병력 같은 말을 들었다. 한 공수부대원이 와서 “어제(22일) 학생 한 명을 죽였다. 내가 서라고 했는데 서지 않아 쏴 버렸다”고 자랑스럽게 말했다는 것이었다. 그해 6월 30일 임 씨는 학교에서 제적됐다. “반에서 1등, 2등을 다퉜는데…. 열심히 공부해 서울대에 가겠다는 놈이 돌아오지 않으니 내가 눈을 감을 수 있것소.” 아버지는 “아들이 살았는지 죽었는지 몰라 아직도 대문을 열고 놓고 자는 실종자 가족의 심정을 누가 알아주겠느냐”라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어머니는 1990년 아들의 넋이라도 달래기 위해 같은 나이에 숨진 한 처자와 영혼결혼식을 올려줬다. 이승의 엄마가 해줄 수 있는 게 그것밖에 없었다고 했다. “생때같은 아들을 보내고 썩어 문드러진 어미 심정을 조금이라도 헤아린다면 묻은 곳이라도 좀 가르쳐 주시오. 제발 부탁이오.” 어머니의 절규가 5월 하늘에 비수처럼 꽂혔다.  ▼ 군종신부 당시 보고서엔… “잔악한 계엄군이 비극 불러” ▼발포 거부했던 이제원 중령 “신군부 핵심이 강경진압 명령… 명령에 따른 우리에게도 책임”계엄군 출신 사진작가 이상일씨“시민들 모습 찍어 ‘불순분자’ 보고… 제대 후 ‘망월동’ 시리즈로 속죄”이들 ‘피해자’의 한편에 ‘가해자’가 있다. 1980년 5월 신군부의 ‘화려한 휴가’ 작전명에 따라 투입된 계엄군은 총칼로 광주를 유린했다. 당시 계엄사 상황일지와 전투교육사령부(전교사) 전투상보 등에 따르면 광주진압작전에 투입된 군 총 병력은 8만2000여 명에 이른다. 이들 가운데는 차마 시민에게 총을 겨누지 못한 영관급 장교도 있었고 속죄하는 심정으로 ‘광주의 5월’을 10년 넘게 사진으로 남긴 계엄군 출신 사진작가도 있다. 그들에게 ‘광주 5·18’은 어떤 기억으로 남아 있을까.발포 거부했던 특전사 장교 “수많은 사람의 눈에서 눈물을 흘리게 했고 가슴을 아프게 했다. 귀중한 생명을 앗아버렸고 평생 불구자로 만들었으며….” 당시 11공수특전여단 ○○대대 ○지역대장이었던 최모 씨(당시 대위)는 1988년 육군본부에 ‘5·18의 회고’라는 자필 문서를 제출했다. 동아일보가 16일 단독 입수한 이 문서에 따르면 최 씨는 “많은 세월이 흐른 지금도 가슴이 아프다. 죄스러운 마음속에 긴 그림자를 간직하고 있다”고 ‘고해성사’를 했다. 그가 지휘했던 부대는 1980년 5월 21일 전남도청 앞 집단 발포 현장에 있었다. 최 씨는 시위대와 일촉즉발의 대치 상황에서 발포에 반대한 한 대대장의 행동을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전남도청 앞에 공수부대원이 몰려 있을 때 대대장끼리 수차례 회의를 했다. 회의 내용은 ‘이대로 있다가는 부하들 다 죽이겠다. 약간의 희생자가 생기더라도 사격을 좀 해 물리치자.’ 그러나 당시 62대대장 이제원 중령만은 ‘무슨 소리를 하느냐. 당치도 않은 말을 한다’며 벌컥 화를 냈다. 지휘봉을 내동댕이쳤다. 우린 좁은 소견에 ‘참 답답한 대대장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만약에 (그가) ‘좋소’라고 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이 중령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날 전남도청 앞에서는 공수부대의 집단 발포로 39명이 숨졌다. 최 씨가 ‘양심적인 군인’이라고 증언한 이 중령은 1995년 서울지검의 ‘12·12 및 5·18사건’ 특별수사본부 조사에서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고 ‘광주사태’의 주된 책임이 신군부 핵심세력에게 있다고 진술했다. 당시 진술 조서에 따르면 이 중령은 “광주사태의 책임은 나를 비롯해 그 당시 광주사태 진압에 참여했던 모든 군인에게 있다. 당시 나를 비롯한 대부분의 군인들은 하등의 정치적 의도 없이 상관의 명령에 따라 진압 임무를 어쩔 수 없이 수행했다는 점에서 광주사태의 피해자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광주에 공수부대를 투입해 강경 일변도의 진압작전을 벌인 배경에 대해 이 중령은 “12·12사건 이후 군권을 장악해 실세로 부각한 전두환, 노태우, 황영시, 정호용 등 신군부 핵심세력들이 자신들의 정권찬탈 기도에 결정적인 장애요인이 될 수 있었던 광주사태를 우리와 같은 공수여단 등 계엄군을 이용해 신속히 평정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권력을 좇는 이들의 욕심이 광주의 비극을 불렀다는 것을 당당하게 밝힌 것이다. 광주 진실 알린 군종신부들 계엄군이 광주를 장악한 직후 육군본부는 비밀리에 군종신부들을 광주에 보내 천주교 성직자와 신자들을 상대로 진상 파악에 나선 것으로 밝혀졌다. 이들은 현장 조사 후 계엄군의 무자비한 진압이 광주시민의 저항을 불러일으켰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제출했다. 본보가 단독 입수한 ‘광주사태 확인 방문 결과’ 문건에 따르면 육군본부는 광주가 진압된 9일 후인 6월 5일 군수참모부 운영처장(준장·육본 기독장교단 회장)과 1군 군종참모(대령), 군수사 군종장교(중령), 수방사 군종참모(소령) 등 군종신부 3명을 광주에 파견했다. 이들은 일주일 동안 천주교 성직자와 신자들을 상대로 증언을 들었다. 증언자 중에는 윤공희 대주교(89)도 있었다. 군종신부들은 ‘지탄 받고 있는 잔악행위’로 △공중전화를 하고 있는 임신부 두부관통치사 △화물차에 탑승 중인 채소 장수 일가족 3명 총격 △여대생을 브래지어 팬티만 입힌 채 엎드리게 하고 이를 제지하는 노인 구타 행위 등을 들었다. ‘광주사태’의 교훈도 6가지로 정리해 보고했다. 5월 17일 이전의 데모와 5월 18일(전국 계엄 선포) 데모 성격의 차이를 인식시키는 사전 경고 절차 없이 강압적으로 진압했으며 데모 진압 작전 시 여자, 노인에 대한 강압제지 가해행위로 역효과가 났다고 지적했다. 또 초기부터 특수부대의 투입을 지양하고 경찰, 예비군, 향토사단을 단계적으로 활용하며 최종 경고 후 특수부대를 투입했어야 한다는 내용도 있었다. 시설방어 군인에게만 총기, 탄약, 대검을 휴대하게 하고 기타 데모 진압군에게는 진압봉만 휴대하게 했어야 한다는 점도 지적했다. 진실을 말할 수 없었던 시절 그나마 종교인의 양심이 그날의 한 조각 진실을 알린 것이다. 사진으로 속죄하는 계엄군 출신 작가 1980년 5월 19일 스물다섯 살이었던 이상일 씨(59)는 계엄군 정보사령부 소속으로 광주에 투입됐다. ‘불순분자 색출’이 그의 임무였다. 사복 차림으로 사진 채증을 하고 시민들의 상황을 보고했다. 경남 산청 출신으로 중·고등학교를 검정고시로 마친 그는 제대 후 뒤늦게 대학에 들어가 사진을 전공했다. 5월의 기억은 그를 끊임없이 괴롭혔다. 다시 광주에 가야 한다고 생각한 게 1985년. “대구에서 막차를 타고 광주에 도착해 어두워질 때를 기다려 슬금슬금 망월동으로 기어들어갔죠. 그때 제 손에는 카메라가 들려 있었습니다.” 그는 두려웠다. 누군가가 자신을 기억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당시 망월동 묘역에는 가로등도 없었다. 제단에 담배 한 개비를 올려놓으면 달빛에 반사된 영정 사진들이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가장 눈에 밟힌 건 ‘5월의 신부’ 최미애 씨의 영정 사진이었다. ‘저 많은 사람은 왜 여기에 누워 있는 걸까. 나는 그때 무슨 짓을 한 걸까.’ 그는 카메라에 모든 영정 사진을 담기 시작했다. 찍은 필름을 암실에서 인화할 때 그 사람들 얼굴이 서서히 드러날 때면 견딜 수가 없었다. 자책감이 밀려왔다. ‘그래 광주를 알리자. 역사적 소명 같은 거창한 게 아니라 내가 해야 할 몫이라 생각하자.’ 그렇게 2000년까지 해마다 5월이면 망월동 옛 묘역과 5·18민주묘지를 찾아 사진을 찍었다. ‘망월동’ 연작 사진으로 2011년 일본의 저명한 사진상(賞)인 ‘이나노부오상’을 받았다. 지난해 5월 처음으로 부산에서 11명의 사진작가와 함께 ‘5월 항쟁 33주년 기념전시회-그날의 훌라송’을 열었다. 그는 5·18에 대한 역사왜곡을 보면서 여전히 광주는 ‘섬’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전시가 대한민국 역사에서 광주가 어떤 곳인지를 한 번이라도 생각하는 계기가 되길 바랐다. 이 씨는 부산에서 고은사진미술관을 운영하고 있다. 그는 아직도 광주에 대한 ‘원죄’를 안고 있다고 했다. “명령에 따라 움직이더라도 인간은 해야 할 일이 있고 하지 말아야 할 일이 있습니다. 하지 말아야 할 일을 거부하지 못한 데 따른 것이 원죄인 거죠.” 그는 지금껏 수만 컷의 ‘5월 사진’을 찍었지만 흑백 사진뿐이다. 컬러 사진은 없다. ‘광주’를 화려함으로 포장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계엄군 출신 사진작가에게 광주는 여전히 무겁고 어두운 도시였다. 올 5월은 여느 해보다 쓸쓸하다. 세월호 참사 애도 분위기 속에 17일 전야제가 취소됐다. 국가보훈처의 ‘임을 위한 행진곡’ 5·18 기념곡 지정 거부로 올 기념식도 지난해처럼 반쪽 행사로 치러질 것으로 보인다. 숭고한 ‘민주화의 꽃’으로 피어난 지 34년. ‘자유’와 ‘평화’, 그리고 ‘인권’의 5·18정신이 민들레 홀씨처럼 뿌려지는 5월 하늘을 언제나 볼 수 있을까.광주=정승호 기자 shjung@donga.com}

    • 2014-0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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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팔 걷은 진도

    전남 진도군 군내면에 사는 김연단 씨(54·여)는 요즘 고구마 굽는 일로 하루를 시작한다. 오전 6시에 일어나 전날 구호물품 보관소에서 가져온 고구마를 오븐에 구워 팽목항으로 가져간다. 제대로 끼니를 챙기지 못하는 세월호 희생자 가족들에게 고구마는 요긴한 간식거리다. 생업을 제쳐두고 팽목항으로 달려간 지 벌써 열여드레째. 김 씨는 “꼬박 12시간을 팽목항에서 보내고 돌아올 때면 몸은 파김치가 되지만 마음은 여전히 팽목항에 남아 있다”고 했다. 더 마음 써주지 못해서, 더 챙겨주지 못한 아쉬움이 큰 탓이다. 김 씨는 ‘빵을 맹그는 아짐’이란 민간 봉사단체 회장을 맡고 있다. 회원 35명은 세월호 침몰 사고 이후 격일제로 팽목항을 찾아 실종자 가족들을 살뜰히 챙기고 있다. 김 씨는 “부스에서 컵라면을 먹고 있는데 가족 한 분이 오셔서 ‘저희한테 좋은 것을 주면서 밥도 못 챙겨 드시느냐’며 오히려 위로의 말을 건넬 때 가슴이 먹먹했다”고 말했다. 진도는 지금 온통 노란 물결이다. 가로수와 전봇대, 지붕마다 걸려 있는 리본도, 실내체육관에서, 팽목항에서 소매를 걷어붙이고 나선 주민들이 걸친 조끼도 노란색이다. 세월호 참사로 진도는 또 다른 피해자다. 하지만 주민들은 내 아픔인양 생업도 포기한 채 봉사에 나서고 있다. 진도낚시어선연합회는 사고 직후부터 줄곧 자비를 들여 수색작업을 돕고 있다. 매일 오전 8시경 5, 6척의 배에 나눠 타고 나가 해가 지기 직전에야 돌아온다. 세월호에서 빠져나온 유실물을 건지고 흘러나온 기름을 닦아 없애는 것도 이들의 몫이다. 작업을 위해 배를 띄우면 하루 평균 20만∼30만 원의 기름값이 들지만 자체적으로 해결해 왔다. 황남식 총무(52)는 “누가 시켜서 이 일을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며 “모두가 같은 부모 마음 아니겠느냐”고 담담히 말했다. 진도군 수산지원과 공무원들은 요즘 섬으로 출근하고 있다. 서망항에 모여 진도수협 직원들과 함께 어업지도선을 타고 사고 해역에서 가까운 동거차도, 서거차도, 죽도로 간다. 기름이 해안가로 밀려들면서 검게 변한 갯돌을 헝겊으로 닦아내는 일이 이들의 하루 일과다. 김영복 진도군 수산지원과 주무관(44)은 “미역발이 기름으로 못 쓰게 됐지만 어민 누구 하나 푸념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며 “어민들이 세월호 참사 아픔을 자신의 일처럼 여기는 것 같다”고 전했다. 6일 현재 진도군 관내 410개 단체에서 7102명이 봉사활동에 참여한 것으로 집계됐다. 진도군 전체 군민은 3만2945명. 주민 5명 가운데 1명꼴로 ‘자원봉사’라는 ‘사랑나눔’으로 절망의 땅에 희망의 꽃을 피우고 있는 셈이다.진도=정승호 기자 shjung@donga.com}

    • 2014-0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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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월호, 화물 더 실으려 평형수 29%만 채워

    세월호가 화물을 더 싣기 위해 배 균형을 유지해주는 평형수(平衡水·밸러스트워터)를 적정량의 4분의 1가량만 채운 채 운항한 것으로 드러났다. 5일 검경합동수사본부에 따르면 화물적재 및 평형수 관리를 담당하는 1등 항해사 강모 씨(42·구속)로부터 “지난달 15일 세월호 출항 전에 밸러스트워터 탱크 6개 중 3개에만 평형수 580t을 채워 넣었다”는 진술을 확보했다. 평형수가 적정량보다 적으면 배의 복원력이 크게 떨어져 쉽게 전복된다. 세월호는 지난해 1월 선박을 개조하면서 한국선급에서 선박 검사(복원성 검사)를 받았다. 한국선급은 당시 선실의 무게가 늘기 때문에 화물을 덜 싣고, 평형수를 더 채워 넣으라는 조건을 달아 검사를 통과시켰다. 구체적으로 ‘화물량은 구조변경 전 2437t에서 987t으로 줄이고 평형수는 1023t에서 2030t으로 1007t을 늘려야 복원성이 유지된다’는 조건이었다. 사고 당시 세월호는 화물량을 한국선급이 제시한 조건보다 훨씬 많은 3608t(자동차 180대 포함)을 실은 것으로 조사됐다. 합수부는 강 씨가 화물을 더 많이 싣기 위해 적정 평형수(2030t)의 4분의 1가량인 580t만 채워 넣은 것으로 보고 있다. 강 씨는 또 “선미 쪽에 화물이 많이 실리는 바람에 만재흘수선(화물선에 화물을 실을 수 있는 한계를 표시한 선)이 수면 아래로 내려갔다고 판단돼 선수 쪽에 평형수 80t을 채워 넣었다”고 진술했다. 배 아래쪽에 표시된 만재흘수선은 선박이 과적을 할 경우 물 아래로 잠겨 출항이 금지된다. 합수부 관계자는 “강 씨가 선수 쪽에 평형수를 채워 넣어 선수를 낮추고 선미를 띄운 뒤 만재흘수선이 수면 위로 나오도록 해 해운조합으로부터 운항허가를 받은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목포=정승호 shjung@donga.com / 이형주 기자}

    • 2014-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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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월호 선원 15명중 8명이 입사 6개월도 안돼

    침몰한 세월호의 선박직 승무원 15명 가운데 8명이 입사 6개월 미만이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인건비 절감을 위한 저임금의 계약직 채용 때문에 이들은 세월호에 대한 소속감이 부족했고, 결국 승객 구조를 외면하고 먼저 탈출한 원인 중 하나로 꼽힌다. 29일 검경합동수사본부에 따르면 기관원과 조기수를 관리 감독하는 조기장 전영준 씨(56)는 입사한 당일인 15일 처음으로 세월호를 탔다. 15일은 사고 하루 전날로 세월호가 제주를 향해 인천에서 출발한 날이다. 전 씨는 구속되기 전 본보 기자와 만나 “입사하자마자 계약서도 쓰지 않고 탔다. 제주에 도착해서 계약서를 쓸 예정이었다”고 말했다. 또 1등 항해사 신정훈 씨(34)는 이달에 입사해 사고 당시 세월호 운항을 처음 한 것으로 알려졌다. 2등 항해사 김영호 씨(47)는 1월부터 세월호에 탑승했다. 선원 15명 중 선장 이준석 씨(69)를 포함해 기관장 박기호 씨(48), 조기장 전 씨 등 4명은 대리근무를 한 것으로 추정된다. 선장 이 씨 등은 사고 직후인 16일 오전 9시 1분부터 37분 사이에 일곱 차례에 걸쳐 선사인 청해진해운과 통화를 한 것으로 확인됐다. 승객안내 담당 승무원 강모 씨(33)가 오전 9시 1분 가장 먼저 청해진해운과 통화를 했지만 30초 만에 끊어졌다. 강 씨는 세월호 침몰 당시 승객들을 구조하다 마지막으로 탈출해 저체온증으로 생명을 잃을 뻔했다. 이어 선장 이 씨와 1등 항해사 강원식 씨(42)가 배를 빠져나오기 전인 오전 9시 3분부터 37분까지 여섯 차례에 걸쳐 청해진해운과 통화했다. 이 씨는 청해진해운이 걸어온 전화를 35초간 통화했다. 강 씨는 3분간 통화했다. 두 사람의 정확한 통화 내용은 확인되지 않고 있다. 합수부는 이 씨와 강 씨가 매뉴얼대로 사고 사실을 알리는 통화였는지 등을 조사 중이다. 승무원들이 청해진해운의 지시로 배를 버리고 탈출을 감행했다는 의혹에 대해서도 조사할 방침이다. 한편 세월호 방송시설은 3층 안내데스크와 5층 함교 등 2곳에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3층 안내데스크 방송시설은 침수로 작동이 되지 않았고 5층 함교 시설은 작동됐으나 선원들이 도주해 대피명령이 내려지지 않은 것으로 분석된다.목포=이형주 peneye09@donga.com·정승호 기자}

    • 2014-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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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간 많았는데… 아무도 선실로 구조하러 안갔다

    시시각각 침몰하는 세월호 안에서 승객들이 ‘움직이지 말고 대기하라’는 안내방송만 믿고 기다리는 사이 선원들은 가장 먼저 도착한 해경 경비정에 올라탔다. 배가 50도 정도 기운 상태였지만 선원과 해경 누구 하나 적극적으로 배 안에 들어가 대피 방송이나 승객 구조에 나서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세월호 침몰 당시 해경의 최초 구조 상황이 담긴 9분 45초짜리 동영상이 28일 뒤늦게 공개됐다. 동영상은 사고 현장에 처음 도착한 목포해양경찰서 소속 경비정 123정(100t급) 직원이 휴대전화 카메라로 16일 오전 9시 28분 58초부터 11시 17분 59초까지 주요 장면을 부분적으로 찍은 것이다. 동영상에는 선원들의 ‘나 홀로 탈출’ 과정과 침몰 상황, 승객 구조 등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123정이 목포해경 상황실로부터 출동 명령을 받고 사고 현장에 도착한 것은 오전 9시 반경. 당시 세월호는 이미 왼쪽으로 50도가량 기울어진 상태였다. 9시 39분 해경 고무보트가 세월호 좌현으로 접근하자 3층 난간에 있던 기관부 선원 4명이 옮겨 탔다. 처음으로 배로 달려온 구조보트에 승객은 한 명도 없었다. 7분 후 4층 조타실 옆에 밀착한 123정에는 팬티 차림의 선장 이준석 씨(69·구속)와 항해사, 조타수 등 선원 8명이 차례로 올라탔다. 이들 중 일부는 선원복이 아닌 사복을 입고 있었다. 이들이 구조될 당시 조타실 바로 옆에는 구명벌 46개가 있었지만 이를 작동시키려는 선원은 아무도 없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배가 크게 기운 상태는 아니었다. 갑판으로 나오거나 바다에 뛰어든 승객도 없었다. 시간적인 여유가 있는 상황이었지만 해경에 승객들이 구명조끼를 입고 대기하고 있는 선실로 가자고 한 선원은 없었다. 선장 이 씨가 “배가 급격히 기울었고 승객들이 빠져나오면 조류와 차가운 바닷물 때문에 위험할 것 같아 탈출 명령을 내리지 못했다”는 진술은 거짓으로 드러났다. 선원들은 여유롭게 구조됐지만 여객선이 60∼70도로 기울면서 곧 아비규환의 상황에 빠져들었다. 바다로 뛰어내린 승객은 수십 명에 불과했고 대부분은 ‘선내에서 움직이지 말고 대기하라’는 안내방송만 믿고 기다리다 탈출 기회를 놓치고 배와 함께 차디찬 바다에 갇혀버렸다. 목포해경 123정은 16일 오전 8시 58분경 출동명령을 받은 뒤 오전 9시 반경 사고 현장에 가장 먼저 도착해 고무보트 등을 통해 구조작업을 폈다. 해경은 당초 수사자료로 활용하기 위한 채증인 만큼 첫 구조 동영상을 공개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해경이 선체에 진입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고 승객에게도 탈출을 독려하지 않았다는 비판이 계속 일자 해명 차원에서 공개를 결정한 것으로 보인다.목포=정승호 기자 shjung@donga.com}

    • 2014-0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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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단독]“유병언, 비자금 조성 직접 지시”

    유병언 전 세모그룹 회장(73)이 계열사 내부거래를 통한 비자금 조성과 회삿돈 빼돌리기 등 자신의 일가를 위한 불법·편법 경영을 직접 지시했다는 진술을 검찰이 확보한 것으로 27일 알려졌다. 검찰은 “회사 지분이 한 주도 없고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다”는 유 전 회장 측 해명이 사실과 다르다고 보고 있다. 인천지검 특별수사팀(팀장 김회종 2차장)은 26일 청해진해운, 다판다 등 유 전 회장 장남과 차남이 지분을 갖고 지배하고 있는 계열사의 회계·감사 업무를 맡아온 회계사무실 등 6곳을 압수수색했다. 특히 검찰은 유 전 회장 관련 업무를 담당했던 S회계사무소의 회계사 3, 4명을 소환 조사해 “유 전 회장이 직접 회사 고위 관계자를 시켜 회계사무실로 자금 조성에 대한 지시를 했다”는 진술을 받아냈다. 이 사무실의 회계사 김모 씨(51)는 2008년까지 청해진해운의 모회사 천해지의 감사를 지내기도 했다. 한편 검경합동수사본부는 27일 목포해경에 대한 압수수색 영장을 발부받는 등 초동대처과정에 문제가 없었는지 전면 수사에 나섰다. 앞서 26일에는 진도연안 해상교통관제센터(VTS)와 제주 VTS를 압수수색해 세월호와의 교신 내용 등을 확보했다.인천=장관석 jks@donga.com / 목포=정승호 기자}

    • 2014-0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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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빨리 와주세요” 119 구조요청, 22건 더 있었다

    세월호 침몰 당시 안산 단원고 2학년 학생 고(故) 최덕하 군(17)의 최초 신고전화 외에도 31분 동안 119에 총 22건의 구조요청 전화가 더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기울어지는 배 안에서 승객들은 “빨리 와주세요. 살려주세요”라고 애타게 외쳤다. 25일 전남도소방본부에 따르면 최 군은 16일 오전 8시 52분 32초에 119에 최초로 신고전화를 했다. 119에는 최 군이 통화하는 동안에도 승객들로부터 3건의 신고전화가 걸려왔다. 오전 8시 55분 55초에 다른 회선으로 걸려온 전화는 다급한 목소리로 “살려주세요. 배가 기울었어요”라고 말했다. 접수요원이 “지금 해경에서 갈 거예요”라고 말했지만 신고자는 안심이 안 된 듯 “살려주세요. 점점 더 기울어요. 빨리 와주세요. 살려주세요”라고 애원했다. 이후에도 오전 9시 23분 56초까지 9건의 통화가 이어졌다. 오전 9시 7분 2초에 전화를 건 승객은 “배가 45도 정도 기울었다. 고등학교 10개 반이 타고 있으니까 승객 수가 500명쯤 될 것”이라고 알렸다. 이날 신고자 중 한 차례 전화를 한 사람은 5명, 2차례 신고자는 2명, 4차례 신고자는 1명, 무려 5차례나 구조 요청 전화를 한 승객이 2명이었다. 최 군 전화를 포함해 총 23건의 신고 전화 중 13건은 통화가 이뤄졌으나 3건은 응답 없이 끊겼다. 7건은 회선 9개가 모두 통화 중이어서 자동응답시스템(ARS)으로 전환됐다.목포=정승호 기자 shjung@donga.com}

    • 2014-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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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의 눈/정승호]“집에 가면 애들 안아줘” 아들 잃은 동창의 당부

    그를 만나러 가는 길은 멀게 느껴졌다. 전남 목포에서 진도까지는 40여 km. 승용차로 빨리 가면 40분 정도 걸리지만 길은 천리 길 같았고 마음은 천근만근 무거웠다. 고교 동창들에게서 친구 아들이 실종됐다는 소식을 들은 것은 22일. 처음 전화를 걸었을 때 동창생은 기자를 기억하지 못했다. 워낙 경황이 없었던 데다 졸업한 후 20년 넘게 만나지 못한 탓도 있었을 것이다. 다음 날 실종자 가족이 모여 있는 진도실내체육관으로 그를 찾아갔다. 하지만 그는 없었다. 팽목항에 있는 실종자가족대책본부로부터 ‘시신을 찾았다’는 연락을 받고 아내와 함께 짐을 챙겨 떠난 터였다. 그는 문자메시지로 시신으로 돌아온 아들이 ‘134번’이라고 알려왔다. 팽목항에 도착했지만 한동안 그에게 연락을 할 수 없었다. 초점 없는 눈빛으로 하염없이 바다를 바라보는 어머니, 사망자 현황 게시판 앞에서 행여 자녀 이름이 오를까 숨죽인 채 지켜보는 아버지…. 내 자식만은 여전히 살아 있을 수 있다는 희망 하나로 지금까지 버텨 온 이들 앞에서 친구를 찾을 용기가 나지 않았다. 발걸음을 돌리려는데 친구에게서 연락이 왔다. 그는 항구에서 200m 정도 떨어진 ‘신원확인소’(임시 안치소)에 있었다. “아이들을 봤는데 그 얼굴이 그 얼굴 같고… 아들 얼굴도 못 알아보는 내가 아빠 자격이 있는지 모르겠다.” 친구는 고개를 떨군 채 말을 이어갔다. “아내는 (아들이) 맞다고 빨리 (안산으로) 올라가자고 하는데 혹시 시신이 바뀔지 몰라 DNA 검사 결과를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나도) 이 징한 바다를 보고 싶지 않지만 통보가 늦어지니 어쩌겠느냐”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면서 “아이들이 대한민국을 믿고 여행을 가다가 죽었잖아. 그럼 누구 하나 뺨 맞을 각오를 하고 나서야 하는 것 아니야. 이게 대한민국이냐고…”라며 울부짖었다. 무거운 침묵 끝에 친구가 말을 건넸다. “너는 애들이 어떻게 되니.” “중학생과 초등학생 딸 둘이 있다”고 하자 그는 “집에 가면 꼭 안아 줘라. (아들한테) 그러지 못한 나는 가슴이 미어진다”고 했다. 친구의 얼굴에는 아버지로서 자식을 지키지 못한 죄스러움이 짙게 드리워 있었다. 자식을 잃은 그 친구만이 짊어져야 할 아픔일까. 책임은 꽃다운 나이의 아이들을 사지로 내몬 무능한 대한민국 어른들에게 있는데 말이다. 대형사고가 나면 재발 방지책을 만든다고 부산을 떨다가도 금세 사고 수습 매뉴얼을 서랍 속에 처박아 놓는 나라. 천금같은 시간이 흘러가고 있지만 차디찬 바닷속 아이들을 어찌해주지 못하고 우왕좌왕 시간만 보내는 나라. 도대체 이 큰 죄를 어찌할 것인지 답답할 뿐이다.진도=정승호 기자 shjung@donga.com}

    • 2014-0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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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수, 내 마음속 그곳]쉬운 단어도 잘 못쓰던 소년, 존 선생님 만나 서울대 입학

    “안녕하세요! 후배님들. 2014년 GS칼텍스 도서학교 원어민 영어교실 개강식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지난달 24일 전남 여수시 남면 여남중학교. 여수항에서 배로 1시간 정도 걸리는 금오도에 자리한 여남중학교에 화상메시지가 도착했다. 메시지를 보낸 이는 서울대 인문학부 1학년인 진성일 씨(20). 금오도 출신으로 여남고에 다니던 지난해 ‘도전 골든벨’을 울렸던 주인공이다. 그는 메시지를 통해 “중학교 1학년 때 ‘Apple’이라는 단어도 쓸 줄 몰랐지만 원어민 영어 선생님의 수업 덕분에 지금은 영어로 진행되는 대학 수업을 수강하고 있다”며 “원어민 영어교실에 참여해 존 매클린톡 선생님과 함께 공부한 덕택”이라고 말했다. 그는 “혹시 자신의 영어 실력이 좋지 않다는 생각으로 겁을 먹고 있는 후배님들이 있다면 과감하게 존 선생님에게 다가가길 바란다”며 “영어는 공부하는 게 아니라, 친해지는 것”이라며 6년간 경험한 영어 실력 향상의 노하우도 전했다. GS칼텍스는 8년째 여수 섬마을 학교에 ‘원어민 영어교사’를 보내 학생들의 영어실력 향상에 힘을 쏟고 있다. 원어민 영어교실은 도시지역보다 상대적으로 교육 여건이 취약한 여수 섬지역 학생들의 영어회화 능력을 키우기 위해 2007년부터 시작한 GS칼텍스의 대표적인 지역 사회공헌 프로그램. 지난해까지 남면, 화정면 등 도서지역 1940명의 초·중·고교생이 강의를 들었다. 원어민 강사는 남아프리카공화국 출신 존 매클린톡 씨(42). 키가 197cm로 학생들에게 ‘키다리 아저씨’로 통하는 존 씨는 섬과 섬을 옮겨 다녀야 하는 힘든 여건에도 사명감과 봉사정신으로 7년째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다. 금오도에 살고 있는 존 씨는 “섬에서 만나는 모든 학생들이 특별한 존재로 느껴진다”며 “아이들의 영어실력이 향상되는 것을 볼 때 가장 기쁘다”고 말했다. 그는 내년 2월까지 월∼금요일에 5개 섬(島)을 순회하며 13개 학교 193명의 초·중·고교생을 대상으로 영어수업을 진행한다. 최선영 여남중 영어교사는 “섬이라는 특성상 아이들이 교육적인 측면에서 소외될 수밖에 없다”며 “8년째 이어지고 있는 GS칼텍스 도서학교 원어민 영어교실 덕분에 우리 아이들이 외국인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을 떨칠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정승호 기자 shjung@donga.com}

    • 2014-0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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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수, 내 마음속 그곳]타임머신을 탄 듯… 또다른 나를 발견하는 특별한 여행

    여수는 유인도 49개와 무인도 316개가 별처럼 흩어져 있다. 별 같은 섬 365개 가운데 여수시 삼산면 거문도와 백도에 먼저 눈길이 간다. 여수항에서 남쪽으로 114km 떨어진 거문도는 뱃길로 2시간이 걸린다. 거문도는 1885년 영국 해군이 러시아의 조선 진출을 견제하기 위해 불법 점령했다. 당시 영국 해군은 거문도 발견자인 해밀턴의 이름을 따 해밀턴항으로 불렀다. 아이러니하게 거문도는 국내에서 최초로 테니스·당구가 보급된 곳이다. 현재 거문도에는 해밀턴 테니스장이 있다. 거문도에는 또 1905년에 세워진 등대나 영국 해군 수병들의 묘지가 있다. 서도마을 언덕에는 인어해양공원이 조성돼 있다. 거문도에는 인어가 어민들은 보호한다는 전설이 있다. 인어해양공원에는 돌담장, 자연석을 깐 1.5km 길이의 산책로가 이색적이다. 동백나무 천지인 거문도 본섬은 고도 동도 서도로 이뤄졌다. 내년에 섬 3개가 모두 다리로 연결된다. 거문도 주변 섬 가운데 가장 풍광이 아름다운 곳은 백도다. 거문도에서도 뱃길로 20분 정도 거리에 있는 백도는 국가명승지 제7호다. 백도는 돌섬 39개로 이뤄져 있다. 허민 여수시 삼산면장은 “거문도는 평생 가봐야 할 국내 관광지 3위에 꼽혔다”고 말했다. 여수시 화정면 사도는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의 여행을 떠날 수 있는 섬이다. 평평한 바위 위에 공룡의 발자국들이 새겨져 있다. 사도(沙島)라는 명칭은 ‘바다 한가운데 모래로 쌓은 섬 같다’는 의미다. 7개 섬으로 이뤄진 사도는 음력 2월이 되면 섬을 따라 바닷물이 ㄷ자 형태로 갈라지는 장관을 연출한다. 사도 인근 하화도(下花島)는 동백꽃, 진달래꽃 등이 만발해 꽃 섬으로 불린다. 하화도 서쪽에 자리한 장구도를 잇는 길이 340m의 출렁다리가 올해 완공될 예정이다. 정현자 여수시 문화관광해설가는 “일상에 지친 직장인들도 하화도 등 섬에서 시간이 멈춘 듯한 편안함을 느낄 수 있다”고 말했다. 정승호 기자 shjung@donga.com}

    • 2014-0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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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수, 내 마음속 그곳]따뜻하고 아름다운 여수, 편안한 노년 예약

    전남 여수의 날씨는 쾌적하다. 연간 100일 이상 화창한 날씨를 보인다. 또 연평균 기온은 14.3도, 평균 일조시간은 2372시간으로 따뜻하다. 광주지방기상청 여수기상대 관계자는 “여수는 지난해 12월부터 올 2월까지 3개월 동안 2.2cm가량 단 한차례 쌓였을 뿐이다”고 말했다. 시민들은 눈이 쌓이는 것은 2, 3년에 한번 꼴에 불과해 도심이 은빛으로 변하면 축제 분위기가 된다. 남해안 정중앙에 위치한 여수는 일교차가 적다. 30년 평균 기온은 8월 25.8도, 12월 2.4도다.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쾌적한 전형적인 해양성 기후다. 또 평균 풍속은 초속 14.3m으로 선선한 바람이 분다. 이 같은 기후 특성으로 여수는 노인이나 어린이들 살기 좋은 관광휴양 도시 기후라고 평가받고 있다. 기후 특성 못지않게 바다와 산, 강, 논경지가 어우러져 주거환경에도 적합하다. 바다를 낀 농어업 복합지역이라 낚시, 등산, 텃밭 가꾸기를 하기 좋다. 해풍을 맞고 자란 돌산 갓과 서대회, 하모회 등 건강한 먹을거리도 있다. 돌산읍에 전원주택을 짓고 사는 신상도 씨(61)는 여수기후 매력에 흠뻑 빠졌다. 신 씨는 군인으로 20년간 복무했고 10여 년을 서울에서 살았다. 신 씨는 “여수는 기후, 경치 등 환경적인 축복을 받은 곳”이라며 “싱싱한 농수산물을 싸게 구입할 수 있어 생활비가 서울의 절반밖에 들지 않는다”고 말했다. 여수는 2005∼2006년 세계적인 컨설팅사인 미국 머서 휴먼 리서치 컨설팅(MHRC)이 발표한 삶의 질 평가에서 ‘사람 살기 좋은 도시’로 뽑힌 세계 217개 도시 가운데 2번이나 109위에 선정됐다. 여수는 2012여수세계박람회를 개최하면서 도시 접근성이 향상됐다. 고속철도(KTX)로 서울 용산에서 여수까지 3시간이면 도착한다. 또 전북 전주∼전남 광양 간 고속도로가 개통돼 서울에서 4시간이면 도달할 수 있다. 여수의 매력을 일찍 발견한 것은 대기업 최고경영자(CEO)들이다. 삼성전자 이건희 회장은 여수시 소라면 궁항마을 앞 해변에 별장을 지으려 한다. 별장에서는 여수와 고흥 사이 바다인 가막만의 장관을 볼 수 있다. 일상해양산업은 여수시 화양면에 상당한 땅을 확보했다. 이 밖에 다른 대기업 최고경영자들도 여수에 별장을 지으려 하고 있다. 장수시대와 베이비붐 세대 취향을 고려해 전원 휴양단지 필요성이 커지고 있다. 도농복합 도시의 장점과 수려한 자연경관, 온후한 기온 등 자연여건이 바탕이 된 쾌적한 은퇴자 도시가 제격이다. 여수시는 2018년까지 은퇴도시 조성을 하려는 포부를 갖고 있다. 여수시는 장성·웅천지구, 돌산읍 평사지구, 소라면 복산지구, 율촌면 봉전지구, 화양면 장수지구에 은퇴자 도시(마을)를 조성하려 하고 있다. 마을별로 면적은 2만∼330만 m²에 20∼1500채로 꾸며진다. 여수시 화양면은 지난달 전남도로부터 은퇴도시 관리 후보지로 선정됐다. 여수의 은퇴자 도시 장래는 밝다. 여수시가 지난해 8월 여수 출신 출향인 900명을 대상으로 은퇴자 도시 입촌 의향을 물었을 때 68명이 입촌 의사를 밝혔다. 또 지난해 12월부터 2개월 동안 여수국가 산업단지 내 기업 13곳의 근로자 1만 명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해 은퇴자 도시 입촌 의향자 2349명을 확보했다. 조태용 여수시 건설교통국장은 “여수는 인근 지역과 비교해 여름에는 2∼3도 기온이 낮고 겨울에는 2∼3도 높다. 청정해역에서 발생한 음이온으로 공기가 좋아 은퇴자 도시에 최적지”라고 말했다.이형주 기자 peneye09@donga.com}

    • 2014-0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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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학생 “살려주세요” 첫 신고에… 海警 ‘경도-위도’만 물어

    세월호에 탑승한 안산 단원고 남학생이 소방본부에 침몰 사실을 처음 신고했으나 해경이 우왕좌왕하면서 출동시간이 지연된 것으로 밝혀졌다. 또 해경이 세월호 구조작전에 나선 것은 제주해상교통관제시스템(VTS)의 출동 요청이 아닌 전남119의 신고에 따른 것이었다. 22일 공개된 전남소방본부 119 상황실과 목포해경의 신고 녹취록에 따르면 사고 당일 해경은 급박한 침몰 상황을 신고한 고등학생에게 알기 어려운 세월호의 위도와 경도를 묻는 등 이해하기 힘든 대처를 한 것으로 드러났다. 세월호 침몰사고 최초 신고자는 단원고 2학년 6반 남학생으로 밝혀졌다. 이 학생은 사고 발생 일주일째인 현재까지 생존 여부가 확인되지 않고 있다. 이 학생은 16일 오전 8시 52분 32초에 자신의 휴대전화로 전남소방본부 119 상황실에 전화를 걸어 “살려 달라. 배가 침몰하는 것 같다”며 침몰 사실을 알렸다. 세월호가 제주VTS에 조난 신고를 한 것보다 3분 앞선 시각이다. 이 학생은 119 상황실에 “제주도에 가고 있었는데 여기 지금 배가 침몰하는 것 같아요”라고 밝혔다. 침몰 선박의 선명도 ‘세월호’라고 전했다. 119 상황실은 8시 54분 7초에 ‘휴대전화 위치를 파악해 보니 기지국 위치가 진도 조도 서거차도리로 나온다’며 신고자 전화번호를 해경에 알려줬다. 이어 8시 54분 38초에 신고자, 119 상황실, 해경이 3자 통화를 시작했다. 하지만 해경은 또다시 위치 파악에 나섰다. 해경은 신고자가 고등학생이라는 것도 파악하지 못한 채 “위치, 경·위도를 말해 주세요”라고 물었다. 해경은 계속 배 위치를 묻고 “GPS 경·위도가 안 나오느냐”고 물었다. 계속되는 해경의 황당한 질문에 학생은 몹시 당황하는 듯했다. 해경은 최초 통화로부터 1분이 지난 뒤인 8시 55분 38초에야 배 이름이 뭐냐고 물었다. 가장 먼저 파악했어야 할 선박 이름보다 신고한 학생이 알지도 못하는 경·위도를 파악하는 데 시간을 보낸 것이다. 그때서야 학생으로부터 세월호가 침몰하고 있다는 얘기를 듣고 최초 신고 시간에서 4분 이상 지난 8시 56분 57초에 경비정을 출동시켰다. 이에 대해 해경 관계자는 “신고자가 처음에 선원인 것으로 착각했다”고 해명했다. 목포=정승호 기자shjung@donga.com}

    • 2014-0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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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해경이 구조활동 방해” 거짓 인터뷰 20대女 영장

    전남지방경찰청은 21일 진도 여객선 침몰 사고 관련 TV 인터뷰를 통해 허위사실을 유포한 홍모 씨(26·여)를 체포해 조사하고 있다. 경찰은 홍 씨에 대해 22일 출판물에 의한 명예훼손 혐의로 구속영장을 신청하기로 했다. 경찰에 따르면 홍 씨는 민간 잠수사를 자처하며 18일 오전 구조 현장인 진도군 팽목항에서 가진 종합편성TV MBN과의 인터뷰에서 “해경이 민간 잠수사 구조활동을 막고 있으며 대충 시간만 때우고 가라고 하고 있다”며 “민간 잠수사들이 수색작업을 못하게 해서 굉장히 격분하고 있다”고 말했다. 홍 씨의 인터뷰가 방송되자 해경은 “홍 씨 발언은 사실이 아니다”라며 반박했고 경찰은 홍 씨에 대한 체포영장을 발부받아 검거에 나섰다. 홍 씨는 거주지인 경북 구미 등 친척집을 오가며 경찰의 추적을 피하다 20일 오후 자진 출석했다. 조사 결과 홍 씨는 잠수사 자격이 없는 것으로 확인됐다. 홍 씨는 경찰에서 “인터넷에서 떠도는 소문에 흥분해 확인되지 않은 사실을 잘못 전했다”고 진술했다. 목포=정승호 기자 shjung@donga.com}

    • 2014-0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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