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하기

2004년 아테네 올림픽 탁구 남자 단식 금메달리스트인 유승민 삼성생명 코치(34)가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선수위원으로 선출됐다. 유 위원은 19일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 선수촌 내 프레스룸에서 열린 IOC 선수위원 투표 결과 후보자 23명 중 2위를 차지했다. 4명을 뽑는 이번 선거에서 유 위원은 펜싱 브리타 하이데만(독일), 수영 주르터 다니엘(헝가리), 육상 장대높이뛰기 옐레나 이신바예바(러시아)와 함께 IOC 선수위원으로 뽑혔다. 한국인 IOC 선수위원은 2008년 베이징 올림픽에서 선출돼 임기가 만료된 문대성 위원(태권도)에 이어 두 번째다. 이로써 2018년 평창 겨울올림픽을 앞두고 있는 한국 스포츠는 든든한 지원군을 얻게 됐다. IOC 선수위원은 임기가 8년이라는 것을 제외하곤 일반 IOC 위원과 동등한 자격과 권한을 갖는다. IOC 총회에서 결정하는 각종 사안에 투표권을 행사하고, 올림픽 개최지 선정 및 종목 결정에도 참여한다. 유 위원은 “대한민국의 스포츠 발전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며 “정말 열심히 해서 임기가 끝나는 8년 뒤엔 일반 IOC 위원에 도전해 보고 싶다”고 말했다. 리우데자네이루=이헌재 기자 uni@donga.com}

탁구 신동→올림픽 금메달리스트→국제올림픽위원회(IOC) 선수위원→? 19일 IOC 선수위원으로 선출된 유승민 삼성생명 코치(34)는 선수 출신 행정가로 엘리트의 길을 걷고 있다. 그는 끊임없는 노력과 진정성으로 지금의 성과를 이뤄내고 있다. ● 누구도 예상 못한 극적 역전승 유 위원이 한국을 대표해 IOC 선수위원 후보가 됐을 때 당선을 예상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 이번에 출마한 세계 각국의 후보(23명) 중에는 옐레나 이신바예바(러시아)와 일본의 육상 영웅 무로후시 고지, 유럽올림픽위원회 선수위원장인 탁구 선수 출신 장 미셸 세이브(벨기에), 미국프로농구(NBA) 선수 출신 루이스 스콜라(아르헨티나) 등이 있었다. 4차례 올림픽에 출전해 금, 은, 동메달을 한 개 씩 딴 유 위원이지만 이들에 비해선 인지도가 높지 않았다. 하지만 유 위원은 선거 운동 시작일인 지난 달 24일부터 선거가 끝난 17일까지 쉬지 않고 선수촌을 돌아다니며 선수들을 만났다. 오전 7시에 나가 밤 10시가 돼서야 숙소로 돌아왔고, 끼니도 제대로 챙기지 못하고 생면부지의 어린 선수들을 만나 지지를 호소했다. 유 위원은 “선수들이 가장 많이 오가는 버스 정류장 앞에서 매일 웃는 얼굴로 선수들을 만났다. 투표 날 한 아프리카 선수가 오더니 ‘하루도 쉬지 않고 밝게 웃어준 모습에 감동받아 네게 표를 던졌다’고 하더라. 그런 진심이 통한 것 같다”고 말했다. 대한체육회 관계자는 “선거 운동 내내 안쓰러운 정도로 열심히 했다. 그 보상을 받은 것 같다”고 말했다. ● 선수 시절부터 타고난 승부사 선수 시절부터 그는 독종이었다. 18살에 출전한 2000년 시드니 올림픽에서 1회전에 탈락한 뒤에는 “바다에 빠져 죽겠다”고 난리를 피우기도 했다. 강인한 승부근성을 앞세워 4년 뒤 열린 아테네 올림픽 탁구 남자 단식에서 중국의 벽을 넘어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당시 중국의 왕하오를 이긴 결승전은 한국 탁구 역사에 명승부로 남아있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과 2012년 런던 올림픽에서는 단체전 동메달과 은메달에 힘을 보탰다. 런던 올림픽이 끝난 뒤엔 약 2년 간 독일 프로팀에서 뛰다 2014년 인천 아시아경기부터 지도자로 변신했다. 유 위원은 “선수 유승민이 눈빛이 날카로운 사람이었다면 행정가 유승민은 따뜻한 눈빛으로 많은 선수를 대변하는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다”며 “모든 선수들로부터 박수 받는 선수위원이 되기 위해 정말로 열심히 할 것”이라고 했다. ● 멀어진 김연아, 가까워진 진종오 유 위원이 IOC 선수위원으로 선출됨에 따라 IOC 선수위원을 꿈꿨던 ‘피겨 여왕’ 김연아(26)가 선수위원이 될 수 있는 길은 사실상 막혔다. IOC 선수위원은 국가 당 한 명이 원칙이기 때문이다. 유 위원이 이번에 당선되지 않았다면 김연아는 2018 평창 겨울올림픽에서 IOC 선수위원에 도전할 계획이었다. 선수 시절 최고 스타였던 데다 세계적인 지명도와 인지도도 갖춰 무난히 당선이 예상됐다. 한국에서 열리는 올림픽이기 때문에 당선 가능성은 더 높았다. 평창 올림픽이 김연아에게는 사실상 마지막 기회다. IOC 선수위원 출마는 현재 올림픽 출전 선수나 직전 올림픽 출전 선수에게만 자격이 주어지는데 국가 당 한 명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리우 올림픽 사격 남자 권총 50m 금메달로 세계 사격 역사상 최초로 3연패를 달성한 진종오(37·kt)는 8년 뒤 IOC 선수위원에 도전장을 낼 수 있다. 현재 국제사격연맹(ISSF) 선수 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진종오는 2020년 도쿄 올림픽 출전을 공언했는데 2024년에는 유 위원의 임기가 끝나기 때문에 시기적으로도 딱 맞아 떨어진다. 리우데자네이루=이헌재 기자 uni@donga.com}

“선수 유승민이 눈빛이 날카로운 사람이었다면, 행정가 유승민은 따뜻한 눈빛으로 모든 선수를 포용하는 사람이 되겠다.” 19일 한국인으로는 두 번째로 국제올림픽위원회(IOC)의 선수위원에 당선된 유승민(34·삼성생명 코치)은 메인프레스센터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평창올림픽을 앞두고 있는 상황에서 IOC와 선수들 사이의 가교 역할을 하고 싶다. 대한민국의 스포츠 발전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유승민과의 일문일답. -IOC 선수위원에 당선된 소감은. “그 동안 응원해 주시고 관심 가져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하다. 지난 달 23일 브라질에 도착해서 24일부터 선거 운동 시작해 어제까지 굉장히 열심히 했다고 자부한다. 기쁘기도 하지만 책임감이 더 무겁다. 제가 할 수 있는 노력 다해서 대한민국 스포츠 발전에 이바지할 수 있도록 하겠다.” -무루호시 고지(일본), 로베트트 샤이트(브라질) 등 유력한 후보들을 제쳤다. “현장에 와 보니 선수들이 IOC 선수위원 선거에 대해 잘 모르더라. 일단 발로 뛰는 게 중요하겠다 생각해 하루도 빠짐없이 오전 7시에 나와 저녁 늦게까지 선수들을 찾아다니며 인사했다. 진심으로 웃고 힘을 실어줬다. 제가 항상 같은 자리에서 밝게 웃어줘서 저를 찍었다는 선수도 있었다. 그런 진심이 통했기에 기대 이상의 좋은 결과을 얻은 것 같다.” -한국 선수들 사이에서는 유승민 후보에 대한 얘기를 많이 하더라. “저를 뽑아준 선수건 아니건 제 인사를 25일간 지겹게 받아준 선수들에게 감사한다. 저도 선수 생활을 오래해서 올림픽 때 선수들이 얼마나 민감하고 방해받고 싶지 하지 않는지 잘 안다. 그래서 굉장히 조심스럽게 선거 운동을 했다. 사실 선거가 끝날 날까지 제가 왜 거기 서있는지 모르는 선수도 있었다. 마지막 날 투표 해달라고 하니까 ‘아, 네가 그래서 거기 있었구나’ 하는 친구도 있었다. 저를 지지해준 선수들에게 감사 인사를 전하고 싶다.” -당선을 기대하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기대를 안 해주셨기 때문에 부담 없었다. 저도 한국에서 올 때부터 어려울 거라는 전망 많이 들었다. 하지만 응원해주는 가족들과 친구들로부터 힘을 많이 얻었다. 어쨌거나 대한민국을 대표해 나왔는데 어설프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하루가 길고 외로웠지만 최선을 다했다.” -한국 스포츠에서는 큰 경사다. 앞으로 한국 스포츠 위해서 어떤 노력을 할 생각인가. “지금 저희가 평창 올림픽을 앞두고 있다. 저도 언론이나 접해 보면 IOC와의 가교 역할이 중요하다고 느낀다. 행정가로서 아직 업무를 해 보진 않았지만 최대한 빨리 업무 익혀서 도움 될 수 있도록 하겠다.” -선수들에게 어떤 부분을 어필했나. “이번에 선수들 만나면서 많은 질문을 받았다. 선수들의 가장 큰 이슈는 도핑 같은 큰 문제가 아니었다. 과연 선수위원회가 선수들 위해서 뭘 할 수 있느냐는 질문이었다. 선수들이 자기 커리어를 쌓기 위해 노력한다면 선수위원회는 그런 선수들을 도와야 한다. 선수들과 IOC가 더욱 가까워질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 -향후 일정은 어떻게 되나. “솔직히 집에 가장 먼저 가고 싶다(웃음). 21일에 IOC 총회를 마치고 나서 선수위원회 미팅을 갖는다. 이후 폐막식에 참석하게 된다. 원래 후보자 AD였는데 업그레이드 카드로 바꿔주더라. 식사 티켓도 없어 쿠폰으로 먹었는데 이제는 선수촌 식당에서 그냥 밥을 먹을 수 있게 됐다.” -외로운 싸움이었을 텐데 누가 도움이 많이 됐나. “선거 룰이 워낙 엄격했다. 식당이나 식당 앞 도로에서 선거 운동을 할 수도 없었다. IOC와 관련된 언론 인터뷰도 금지됐다. 후보자들끼리도 너무 힘든 거 아니냐며 탄식을 내질렀다. 하지만 함께 선거운동을 하면서 서로 의지하고 격려하고 정보를 공유했다.” -2004년 올림픽 금메달과 지금 선수위원 당선의 느낌이 어떻게 다른다. “2004년에는 팀하고 같이 나가서 팀과 응원 받으면서 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혼자 비행기 타고 와서 아무도 도와줄 수 없는 선거를 혼자서 치렀다. 하루가 너무 길었고 힘들었다. 그 때마다 강문수 총감독이 항상 해주신 말씀을 떠올렸다. ”한 번 더(One more)“였다. 남들보다 한 번 더, 일 분 더 하면 이룰 수 있다고 하셨다. 일찍 들어가고 싶을 때도 선수 한 명이 더 나타나면 다가가 말을 걸었다.” -처음 IOC 선수위원 도전을 생각을 어떻게 했나. “4년 전 런던 올림픽 출전 때 좀 힘들었다. 후배와 경쟁해 단체전 한 자리를 잡아야 했다. 그 때 버틸 수 있었던 이유가 4년 뒤 IOC 선수위원에 도전해 보고 싶어서였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 때 문대성 선수위원과 한 방을 썼다. 그 때 문 선배를 보고 꿈을 키웠다.” -임기가 끝나는 8년 뒤 어떤 선수위원으로 기억되고 싶나. “8년 뒤 정말 열심히 해서 정식 IOC멤버가 되는 꿈을 꾸고 있다. 아시아 사람으로 IOC 위원이 돼 스포츠 계에 기여하고 싶다. 선수들에게도 약속한 게 있다. 정말 너희를 우해서 열심히 해 보겠다는 것이다. 열심히 선수위원으로 활동해서 모든 선수들이 박수 쳐 줄수 있는 위원 되고 싶다.” -정말 진심이 통했던 거 같다. “선수 때는 시합이 끝나면 항상 후회라는 게 남았다. 하지만 어제 선거가 종료되는 순간 너무 기분이 좋았다. 너무 좋아서 진짜 후회가 안 남을 거 같았다. 떨어지면 억울할 거 같긴 했다. 너무 열심히 했기 때문이다. 모든 걸 다 걸고 선수들에게 저의 진심을 보여준 선거였다.”리우데자네이루=이헌재 기자uni@donga.com}

2004년 아테네 올림픽 남자 단식 금메달리스트 유승민(34·삼성생명 코치)이 한국인 두 번째로 국제올림픽위원회(IOC)의 선수위원에 당선됐다. 유승민은 19일 오전(이하 한국시간)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 선수촌 내 프레스룸에서 발표한 선수위원 투표에서 후보자 23명 중 2위를 차지해 IOC 선수위원으로 선출됐다. 유승민은 23명의 후보 중 펜싱 브리타 하이데만(독일)에 이어 두 번째로 호명됐다. 3위는 수영 다니엘 지우르타(헝가리), 4위는 육상 장대높이뛰기 옐레나 이신바예바(러시아)가 차지했다. 한국 선수로 IOC 선수위원에 당선된 것은 아테네 올림픽 태권도 금메달리스트 문대성이 2008 베이징 올림픽에서 선출된 이후 두 번째다. 투표는 이번 올림픽에 참가한 전체 선수들을 대상으로 지난달 24일부터 17일 자정까지 진행됐다. 2000년 시드니 올림픽부터 신설된 IOC 선수위원은 올림픽 참가 선수들이 직접 뽑는다. 여름 종목 8명, 겨울 종목 4명 등 총 12명의 선수위원이 활동할 수 있다. 여름 올림픽에서는 상위 4명까지, 겨울 올림픽에서는 2명까지 뽑는다. 임기는 8년이다. IOC 선수위원은 여름·겨울 올림픽 개최지 투표 등 IOC 위원과 똑같은 권리와 의무를 지닌다. 한국은 2002년 솔트레이크시티 겨울올림픽 때 쇼트트랙 선수 출신의 전이경, 2006년 토리노 겨울 올림픽 때 썰매의 강광배가 도전했으나 고배를 마셨다. 새로 IOC 위원으로 당선된 유승민은 사실상 한국의 유일한 IOC 위원 역할을 하게 됐다. 현대 한국에는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과 문대성 전 국회위원이 있지만 이 회장은 와병 중으로 활동을 하지 못하고 있다. 문 위원은 이번 올림픽을 앞두고 직무가 정지된 데다 리우 올림픽이 끝나면 임기도 끝난다. 어릴 적부터 ‘탁구 신동’으로 불렸던 ‘탁구 신동’으로 불렸던 유승민은 18세이던 2000년 시드니 올림픽 때 처음 올림픽 무대에 출전했다. 2002년 부산 아시아경기에서 중국을 꺾고 복식 금메달을 따냈고 2004년 아테네 올림픽에서 다시 한 번 만리장성을 넘어 단식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1988년 서울올림픽의 유남규 이후 16년 만의 쾌거였다. 2008년 베이징 대회에서는 단체전 동메달에 힘을 보탰고, 마지막 올림픽이었던 2012년 런던 올림픽에서는 단체전 은메달 획득에 기여했다. 런던올림픽 이후 국내 무대를 떠나 독일 프로팀에서 20개월 활약하다가 현역에서 은퇴했고 2014년 인천 아시아경기부터 지도자로 나섰다.리우데자네이루=이헌재 기자uni@donga.com}
“올림픽 골프를 TV로 볼 생각이 없다”며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에 불참한 로리 매킬로이(27·북아일랜드)는 112년 만에 올림픽 무대로 돌아온 남자 골프를 정말 안 봤을까. 리우 올림픽 남자 골프 우승자인 저스틴 로즈(36·영국)에 따르면 매킬로이는 자신이 뱉은 말을 뒤집고 TV 앞에 앉았다. 15일 끝난 리우 올림픽 남자 골프에서 우승한 로즈는 “금메달을 딴 뒤 많은 축하 메시지를 받았다. 매킬로이도 그 중 한 명이었다. 경기를 본 게 틀림없다. 매킬로이는 올림픽에 출전하지 않았지만 골프가 올림픽에서 성공하길 바란다는 뜻도 밝혔다”고 전했다. 리우 올림픽 개막 전만 해도 골프의 흥행을 걱정하는 목소리가 많았다. 세계랭킹 1~4위를 포함해 미국프로골프(PGA)에서 뛰는 톱 랭커 20여 명이 빠졌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막상 뚜껑이 열리자 최종 라운드 입장권이 매진될 정도의 대성공이었다. 최경주 한국 대표팀 감독은 “3만 명 정도가 들어온 것 같다”고 했다. 시청률도 대박이었다. 골프채널과 NBC에 따르면 최종 라운드는 미국에서만 880만 명이 시청했다. 올 시즌 PGA 투어에서 마스터스 최종 라운드를 제외하고는 최고 시청자 수로 4년 전 런던 올림픽에서 가장 많은 시청자(820만 명)를 모았던 남자 테니스 앤디 머리와 로저 페더러의 경기보다 많다. 18일 막을 올린 여자부는 세계의 톱 랭커들이 대거 출전해 더욱 관심을 모으고 있다. 1라운드를 치른 박인비는 “올림픽에서는 평소 스포츠, 특히 골프에 관심이 없던 국민들도 경기를 주목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박인비와 김세영은 이날 나란히 5언더파 66타를 치며 공동 2위에 자리했다. 선두는 6언더파 65타를 기록한 에리야 쭈타주깐(태국)이다. 세계랭킹 1위인 뉴질랜드 교포 리디아 고는 2언더파 69타로 공동 11위에 올랐다. 리우데자네이루=이헌재 기자 uni@donga.com}

김연경(28)은 의연했다. 터져 나오려는 눈물을 꾹 참았다. 누구보다 간절히 승리를 원했던 그는 동료들부터 먼저 챙겼다. 그리고 승자인 네덜란드 선수들에게 축하의 악수를 건넸다. 16일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 마라카낭지뉴 경기장에서 열린 리우 올림픽 여자 배구 네덜란드와의 8강전. 김연경은 이날 양 팀을 통틀어 가장 많은 27득점을 올리며 고군분투했지만 한국의 1-3 패배를 막지 못했다. 그렇게 메달을 목에 걸겠다는 그의 꿈은 40년 만의 여자 배구 올림픽 메달 꿈과 함께 사라졌다. 김연경이 없었다면 코트는 울음바다가 됐을 것이다. 하지만 김연경이 중심을 잡은 한국 선수들은 다 같이 의연함을 잃지 않았다. ● 팬들 인증샷까지 응해준 뒤 라커룸서 펑펑“죄송하다”, “미안하다”. 리우 올림픽에 출전한 한국 선수들에게서 자주 들었던 이 말을 김연경은 이날 경기가 끝난 뒤 딱 한 번만 했다. 믹스트존(공동취재구역)에서 취재진에게 팬들의 기대에 보답하지 못했다고 말할 때뿐이었다. 그는 “이번에 진짜 많은 관심을 받아서 좋은 결과로 보답했어야 했는데 거기에 못 미쳐서 죄송하게 생각한다. 보내주신 응원에 감사드린다. 한국 여자 배구에 더 많은 관심과 성원을 부탁드린다”고 말했다. 미안함보다는 고마움과 아쉬움을 이야기한 김연경은 틀에 박힌 답변보다는 자기 생각을 솔직히 표현했다. 이번 대회 자신이 맡았던 주장 역할에 대해 “솔직히 힘들었다”고 했다. “한 경기를 잘하면 갓연경(신+김연경)이 되고 한 경기를 못하면 한순간에 기량이 떨어지는 선수가 되는 등 경기 때마다 많은 이야기들이 나와서 힘들었다”며 그간의 마음고생을 털어 놓기도 했다. 후배 선수들에 대해서는 “안정적인 면이 떨어졌다. 국내 프로리그에선 통하지만 대표팀에서는 안 통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며 냉정하게 평가했다. 한국 여자 배구의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서도 자신의 의견을 떳떳이 밝혔다. 그는 “결국 해외에서 뛴 경험을 토대로 큰 대회에 나와야 잘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며 “많은 선수들이 기회가 되면 (해외로) 나갔으면 한다”고 말했다. 믹스트존을 빠져나가다 네덜란드 선수단을 발견한 김연경은 안면이 있는 네덜란드 코치의 어깨를 먼저 툭 친 뒤 오른손 엄지손가락을 세우며 다시 한번 축하 인사를 전했다. 자원봉사자와 경기 스태프들의 사진 촬영 요청에도 친절히 응했다. 패배의 안타까움 속에서도 김연경은 올림픽 자체를 만끽하는 월드 스타의 ‘품격’을 드러냈다. 김연경의 리더십은 대회 내내 코트 안팎에서도 빛났다. 세계 최고의 공격수인 그는 소속 구단(터키 페네르바흐체)의 경기 일정이 끝나자마자 귀국해 대표팀에 합류했다. 연일 강행군이 이어지는 가운데서도 그는 “어차피 해야 할 건데 뭐”라는 말로 피곤한 기색을 감췄다. 때로 투덜거리는 동료들에게는 “여기서 안 아픈 선수가 어디 있냐”며 분위기를 다잡곤 했다. 끝까지 의연했던 그가 뜨거운 눈물을 쏟아낸 것은 라커룸에 들어가서였다. 김연경은 “평소에는 잘 울지 않는다. 그런데 올림픽만 오면 울게 된다. 정말 앞으로는 더 좋아질 것이다”라고 했다. 자신의 두 번째 올림픽을 끝낸 김연경은 그렇게 한국 여자 배구의 다음 도전을 기약했다.리우데자네이루=이헌재 uni@donga.com·강홍구 기자}

“새로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건 아이들에게 수영을 가르치는 것이다.”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을 마지막으로 은퇴를 선언한 ‘수영 황제’ 마이클 펠프스(31·미국). 왕좌에서 스스로 내려온 그의 꿈은 소박했다. 수영장에서 그는 항상 최고였다.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기량으로 올림픽 역사상 가장 많은 23개의 금메달을 땄다. 리우 올림픽에서도 남자 계영 400m와 800m, 접영 200m, 개인혼영 200m, 혼계영 400m 등 5종목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공식적으로 은퇴 의사를 밝힌 이튿날인 16일(현지 시간).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 이파네마 해변의 오메가 하우스에서 만난 펠프스는 ‘보통 사람’으로 돌아와 있었다. 회색 반팔 셔츠에 흰색 바지를 입고 나타난 그는 친절했다. 올림픽을 치른 데다 연이은 인터뷰로 다소 피곤한 얼굴이었지만 시종 옅은 미소를 보이며 질문에 답했다. ▼ “3개월 된 아들 기저귀 갈아주는게 기쁨” ▼오랜 친구와 편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듯했다. 동아일보와 스포츠동아, 채널A 등과 함께한 이날 인터뷰에서 펠프스는 “수영장을 떠나는 건 슬픈 일이지만 그동안 내가 원했던 모든 것을 이뤘다. 너무 행복했기에 지금이 끝내기에 가장 적절한 때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는 “은퇴가 끝은 아니다. 새로운 시작”이라고 했다. 그의 새로운 인생에서 두 가지 중요한 키워드는 가족과 수영을 가르치는 일이다. 펠프스는 “많은 아이들이 익사 사고로 세상을 떠난다. 미국뿐 아니라 전 세계 아이들이 안전하게 수영할 수 있도록 힘을 보태고 싶다”며 남은 인생을 아이들을 가르치며 보낼 것이라고 밝혔다. 펠프스는 지난해 2월 미스 캘리포니아 출신의 니콜 존슨과 약혼했다고 발표했다. 그리고 올림픽 직전인 올해 5월 아들 부머를 얻었다. 펠프스는 “4주 동안 떨어져 있다 어제 모처럼 봤는데 많이 자라 있었다. 부머의 기저귀를 갈아 줬는데 내게 미소를 지었다. 앞으로 그렇게 작은 것 하나도 놓치고 싶지 않다”고 했다. 그는 또 그동안 올림픽에서 딴 28개의 메달(금메달 23개, 은메달 3개, 동메달 2개)로 무엇을 할 거냐는 질문에 “아들에게 보여줄 것”이라고 답했다. 4년 후 도쿄 올림픽에서의 그는 과연 어떤 모습일까. 펠프스는 이 질문에 웃음을 띠며 “아마 도쿄에 가겠지만 수영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해설가로 가지 않을까 싶다”고 말했다. 펠프스는 올림픽이 그의 인생에 어떤 의미였는지에 대해서도 감회를 말했다. “(첫 올림픽이었던) 시드니 올림픽이 어제처럼 생생하게 기억난다”고 말한 그는 “다른 선수들과 경쟁해 금메달을 따고 싶었다. 5개의 다른 도시에서 열린 5번의 올림픽에 나갔다. 완벽한 커리어였다. 그게 내가 (런던 올림픽 은퇴 후) 다시 올림픽에 돌아온 이유이고, 지금 다시 떠나려는 이유다.” 그렇게 그는 자신의 우상인 ‘농구 황제’ 마이클 조던의 등번호와 똑같은 23개의 금메달을 딸 수 있었다.리우데자네이루=이헌재 uni@donga.com·강홍구 기자}

김현우는 스승에게 울면서 “죄송하다”고 했다. 안한봉 감독은 그런 김현우를 끌어안고 “내가 더 미안하다. 힘이 없는 감독이라…”라고 했다.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에선 아무 일 없이 넘어가나 했다. 하지만 한국은 또 오심의 희생양이 됐다. 그동안 한국이 올림픽에서 당한 오심들을 돌이켜 보면 피가 끓을 지경이다. 2002년 솔트레이크시티 겨울 올림픽 쇼트트랙에선 김동성이 가장 먼저 결승선을 통과하고도 실격 판정을 받았다. 2004년 아테네 올림픽에선 체조 양태영이 심판의 점수 처리 실수로 금메달을 놓쳤다. 국제체조연맹(FIG)까지 오심을 인정했지만 금메달은 돌아오지 않았다. 4년 전 런던 올림픽에선 펜싱 신아람의 ‘1초 사건’과 유도 조준호의 ‘청기백기 사건’이 터졌다. 2014년 소치 올림픽에서 피겨 김연아가 은메달로 밀린 것도 여전히 논란거리다. 하지만 한국은 한 번도 오심을 바로잡지 못했다. 제 목소리를 낸 적도 거의 없다. “다른 선수에게 피해가 갈까 봐” “제소해도 판정이 번복되지 않기 때문에”가 이유였다. 리우 올림픽을 앞두고 한국 선수단은 제프리 존스 국제변호사를 법률 담당 임원으로 선임하는 등 오심에 대한 준비를 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이전과 다르지 않아 보인다. 혹시 있을 피해를 우려해 세계레슬링연맹에 제소조차 하지 않았다. 오심을 뒤집는 게 현실적으로 어려운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본질적인 문제는 국제 스포츠계에서의 한국 위상이다. 대회 때마다 10개 안팎의 금메달을 따고 메달 순위에서 10위권 안에 들지만 세계무대에서 한국은 여전히 ‘스포츠 약소국’이다. 현재 한국의 스포츠 외교는 올 스톱 상태다. 두 명의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 중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은 와병 중이고, 임기 만료를 눈앞에 둔 문대성 위원은 논문 표절 여파로 직무정지 중이다. 더 큰 문제는 앞으로도 국제 스포츠계에서 한국을 대변할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국력에 걸맞은 위상을 가지려면 IOC는 물론 각 종목 경기 단체에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선 장기적인 안목으로 꾸준히 씨앗을 뿌려야 한다. 스포츠 강대국인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는 그렇게 하지만 우리는 그렇지 않다. 막상 일이 벌어지면 우리끼리 울고불고 분노를 표출할 뿐이다. 정작 상대방은 전혀 신경도 쓰지 않는다. 안한봉 감독은 “선수들에게 매일 열심히 하라고 하는데 이런 일을 당하면 아무것도 해 줄 수가 없다. 한국 지도자인 게 부끄럽다”고 자학했다. 우리는 언제까지 이렇게 참고만 살아야 하는 것일까.―리우데자네이루에서 이헌재 스포츠 기자 uni@donga.com}
김현우는 스승에게 울면서 “죄송하다”고 했다. 안한봉 감독은 그런 김현우를 끌어안고 “내가 더 미안하다. 힘이 없는 감독이라…”고 했다.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에선 아무 일 없이 넘어가나 했다. 하지만 한국은 또 오심의 희생양이 됐다. 그 동안 한국이 올림픽에서 당한 오심들을 돌이켜 보면 피가 끓을 지경이다. 2002년 솔트레이크시티 겨울 올림픽 쇼트트랙에선 김동성이 가장 먼저 결승선을 통과하고도 실격 판정을 받았다. 2004년 아테네 올림픽에선 체조 양태영이 심판의 점수 처리 실수로 금메달을 놓쳤다. 국제체조연맹(FIG)까지 오심을 인정했지만 금메달은 돌아오지 않았다. 4년 전 런던 올림픽에선 펜싱 신아람의 ‘1초 사건’과 유도 조준호의 ‘청기백기 사건’이 터졌다. 2014년 소치 올림픽에서 피겨 김연아가 은메달로 밀린 것도 여전히 논란거리다. 하지만 한국은 한 번도 오심을 바로잡지 못했다. 제 목소리를 낸 적도 거의 없다. “다른 선수에게 피해가 갈 까봐” “제소해도 판정 번복되지 않기 때문에”가 이유였다. 리우 올림픽을 앞두고 한국 선수단은 제프리 존스 국제변호사를 법률 담당 임원으로 선임하는 등 나름 오심에 대한 준비를 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이전과 다르지 않아 보인다. 혹시 있을 피해를 우려해 세계레슬링연맹에 제소조차 하지 않았다. 오심을 뒤집는 게 현실적으로 어려운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본질적인 문제는 국제 스포츠계에서의 한국 위상이다. 대회 때마다 10개 안팎의 금메달을 따고 메달 순위에서 10위권 안에 들지만 세계무대에서 한국은 여전히 ‘스포츠 약소국’이다. 현재 한국의 스포츠 외교는 올 스톱 상태다. 두 명의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 중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은 와병 중이고, 임기만료를 눈앞에 둔 문대성 위원은 논문 표절 여파로 직무정지 중이다. 더 큰 문제는 앞으로도 국제 스포츠계에서 한국을 대변할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국력에 걸맞은 위상을 가지려면 IOC는 물론 각 종목 경기 단체에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선 장기적인 안목으로 꾸준히 씨앗을 뿌려야 한다. 스포츠 강대국인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는 그렇게 하지만 우리는 그렇지 않다. 막상 일이 벌어지면 우리끼리 울고불고 분노를 표출할 뿐이다. 정작 상대방은 전혀 신경도 쓰지 않는다. 안한봉 감독은 “선수들에게 매일 열심히 하라도 하는데 이런 일을 당하면 아무 것도 해 줄 수가 없다. 한국 지도자인게 부끄럽다”고 자학했다. 우리는 언제까지 이렇게 참고만 살아야 하는 것일까. -리우데자네이루에서리우데자네이루=이헌재 기자uni@donga.com}

“정말 아름다운 밤이에요.” 7일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 남자 양궁 단체전에서 금메달을 딴 직후 구본찬(23·현대제철)이 남긴 소감은 한국 선수단 사이에 유행어가 됐다. 13일 개인전까지 석권해 2관왕에 오른 다음 날 선수촌 광장에서 만난 구본찬은 “아직도 아름다운 밤이에요. 난 아직도 밤”이라고 너스레를 떨었다. 옆에서 지켜보던 장혜진(29·LH)은 “저게 본찬이 매력이에요. 솔직하고 웃기고. 한마디로 분위기 반전남이에요. 본찬이가 없었다면 지금처럼 밝고 화기애애한 양궁 선수단은 없었을 거예요”라고 말했다. ‘쾌활 청년’ 구본찬과 ‘명랑 숙녀’ 장혜진. 이번 대회에서 나란히 2관왕에 오르며 한국의 사상 첫 양궁 전 종목 석권을 이끈 둘은 인터뷰 내내 무한 긍정의 에너지를 쏟아냈다. “태어나서 포털 사이트 실시간 검색어 1위란 걸 처음 해 봤어요. 언제 또 이런 거 해 보겠나 싶어 화면 캡처도 해 놨죠. 그런데 누나 검색어는 ‘장혜진 미모’인데 저는 그냥 ‘구본찬’이더라고요.”(구본찬) “안 그래도 이번에 ‘예쁘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어서 (기)보배한테 4년 전 얼짱 궁사로 주목받고 어떻게 했느냐고 물어봤어요. 보배가 ‘이 순간을 즐기라’고 하더라고요. 저도 즐기려고요.”(장혜진) 남녀 3명씩 6명으로 구성된 대표팀이 리우에서 사상 최고의 성적을 올린 데 대해 둘은 “우리는 하나였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 어느 때보다 친했고, 팀워크가 좋았단다. “올해 최종 대표 선발전이 끝난 날 회식을 했어요. 1차가 끝난 뒤 감독님한테 우리끼리만 단합대회 한번 하겠다고 했어요. 6명이 단체로 맥주 한잔 더 마시고, 노래방까지 가서 거나하게 놀았죠. 대표팀 생긴 뒤 처음 있는 일이었대요.”(구본찬) “다 같이 즐겁게 먹고 마시고 놀았어요. 다 같이 기분 좋게 취했고, 어떻게 왔는지조차 모르게 숙소로 왔어요. 그때부터 팀워크가 좋았나 봐요.”(장혜진) “아직 뒤풀이를 제대로 못했잖아요. 한국 가면 선생님들 빼고 우리끼리만 따로 1차 마시고, 2차 노래방에 가야죠.”(구본찬) 둘에 대한 주변의 평가는 한결같다. 장혜진은 너무 착하고, 여리고, 눈물 많다는 말을 듣는다. 구본찬은 덜렁대고 촐랑거리는 듯 보여도 다른 사람을 위해 기꺼이 자기를 망가뜨리는 성격이다. ‘착한 사람은 운동 못 한다’는 운동계의 속설이 있다. 이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넌 너무 착해서 안 된다. 독기를 품어라. 그런 얘기 정말 많이 들었어요. 그럴 때마다 ‘어떻게 해야 독해지는 거지’라는 고민을 하곤 했어요. 그런데 리우 올림픽 대표에 선발되면서 확 달라졌어요. 목표가 생기니까 절로 독기와 간절함이 생기는 거예요. 한 발이라도 더 쏘려고 노력하는 친구 (기)보배를 보면서 동기 부여가 많이 됐어요.”(장혜진) “그냥 하루하루 즐겁게 살자고 생각할 뿐이에요. 제 마음 내키는 대로 즐겁게 재미있게. 그러다 보니 저도 모르게 이 자리까지 오게 됐네요.”(구본찬) 나란히 2관왕에 오른 둘은 대한양궁협회와 대한체육회 등으로부터 적지 않은 포상금을 받게 된다. 그 돈을 어디에 쓸지는 이미 정해 놓았다. “엄마의 평생소원이 내 집에서 한번 살아보는 거였어요. 올해 실업팀에 입단하면서 받은 계약금으로 (경북) 경주 시내에 집을 한 채 샀어요. 돈이 모자라 대출을 받았죠. 포상금으로 빚을 다 갚으면 진짜 우리 집이 되는 거겠죠.”(구본찬) “저도 비슷해요. 저희 네 자매를 키우느라 아빠가 정말 고생 많이 하셨어요. ‘꽃밭’에서 살아서 좋으셨을 수도 있지만 아버지 본인 인생을 못 사셨어요. 열심히 해서 작은 집 한 채 마련하는 게 올림픽 오기 전부터의 목표이자 꿈이었어요.”(장혜진) 당장 한국에 돌아가면 가장 먹고 싶은 것도 엄마아빠표 요리다. “아빠가 해 주시는 돼지고기 듬뿍 들어간 김치찌개를 먹고 싶어요. 조미료는 전혀 안 쓰는데 어떻게 그런 맛을 내는지 모르겠어요.”(장혜진) “쇠고깃국, 된장찌개, 동태전, 계란말이…. 한국에 있을 때도 훈련하느라 집에는 한 달에 한 번 갈까 말까였어요. 제가 집에 가는 날마다 명절 때처럼 엄마가 음식을 잔뜩 하세요.”(구본찬) 마지막으로 서로에 대한 평가를 부탁했다. “본찬이는 정말 꾸밈없이 솔직하고 긍정적이고 낙천적이에요. 이런 심성을 가졌기 때문에 이번 올림픽에서 하늘이 큰 선물을 주신 게 아닐까요.”(장혜진) “누나는 나이에 안 맞는 동안(童顔) 미모에 성격도 밝고 다른 사람을 먼저 배려해요. 설탕 같은 달콤함도 있는 여자예요. 이제 한국 가면 좋은 사람 만나겠죠?”(구본찬) 리우데자네이루=이헌재 기자 uni@donga.com}

남자 사격 김종현(31·창원시청)이 한국 선수단에 깜짝 은메달을 안겼다. 김종현은 12일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 슈핑센터에서 열린 리우 올림픽 남자 50m 소총 복사 결선에서 208.2점으로 은메달을 목에 걸었다. 런던 올림픽 50m 소총 3자세 결선에서 막판 극적인 은메달을 따냈던 김종현은 두 대회 연속 은메달을 수확하며 한국 남자 소총의 간판으로 우뚝 섰다. 김종현은 이날 본선을 3위(628.1점)로 통과하며 산뜻하게 출발했다. 2015년 회장기에서 세운 자신의 최고 기록(627.0점)을 1.1점 경신했다. 처음 세 발을 쏘는 첫 번째 시리즈에서 31.8점을 쏘며 선두로 치고나간 김종현은 막판까지 줄곧 3위권을 유지하며 기회를 노렸다. 8번째 시리즈가 끝난 뒤 187.3점으로 키릴 그리고리안(러시아)과 동률을 이룬 김종현은 슛오프에서 10.9점 만점을 쏘며 은메달을 확정지었다. 금메달은 209.5점을 기록한 하인리히 융하에넬(독일)에게 돌아갔다. 김종현의 어머니 심은숙 씨(58)에 따르면 김종현은 중학교 때 취미로 사격을 시작했다. 심 씨는 “처음에 아들은 소총과 권총을 모두 하고 싶어 했다. 가정형편이 좋지 못했기 때문에 둘 다 시키지 못하고 소총만 시켰다”고 말했다. 어린 시절 얌전한 성격이었던 김종현은 정식 사격 선수 생활을 하면서부터 과감한 성격이 됐다고 한다. 김종현은 리우 올림픽이 끝난 뒤인 10월 29일 결혼식을 올린다. 예비 신부는 2010년 광저우 아시아경기 여자 50m 소총복사 단체전에서 금메달을 딴 권나라(29·청주시청)다. 앞서 김종현은 “리우 올림픽에서 반드시 금메달을 딴 뒤에 멋지게 정식 프러포즈를 하고 싶다”라고 각오를 다졌었다. 부전공인 50m 소총 복사에서 메달 획득에 성공한 김종현은 14일 주종목인 50m 소총 3자세에서 또 한 번의 메달 사냥에 도전한다.리우데자네이루=이헌재 uni@donga.com·정윤철 기자}

사대(射臺)에 선 진종오(37·kt·사진)의 표정은 진지하다 못해 무서워 보인다. 표적을 응시하는 눈과 흔들림 없는 손은 마네킹처럼 미동도 없다. 6.6점을 쏘고도 분위기를 바꿔 올림픽 신기록을 쏘는 선수가 진종오다. 그를 수식할 때 빠지지 않는 말이 ‘강철 멘털(정신력)’이다. 하지만 사상 처음으로 올림픽 3연패를 달성한 다음 날인 12일 만난 진종오는 “저도 그냥 똑같은 사람이에요. 하고 싶은 거 많고, 느끼는 것 많은 평범한 사람”이라고 말했다. 인터뷰 내내 그는 자신의 ‘반전 매력’을 드러냈다. 진종오는 11일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 남자 권총 50m에서 금메달을 딴 직후 “후배들에게 미안한 이야기지만 아직 은퇴할 마음이 없다. 주위에서 언제 은퇴하느냐고 물어보시는데 그건 나에게 너무 가혹한 이야기”라고 말했다. 어떤 사람이 감히 진종오에게 은퇴 이야기를 꺼냈을까. 직접 물어보니 “내 기사에 달린 악플을 본 것”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진종오는 “악플을 봐도 가능한 한 신경 쓰지 않으려 한다. 그런데 아무래도 신경이 많이 쓰인다”고 했다. 7일 공기권총 10m에서 5위를 한 뒤 50m 권총에 출전할 때까지 그는 전혀 인터넷 검색을 하지 않았다. 금메달을 딴 다음에는 “인터넷을 안 본 게 도움이 많이 됐던 것 같다. 다른 선수들에게도 이 방법을 추천한다”고 말했다. 소총이 아니라 권총 선수가 된 사연에도 반전이 있다. 진종오는 “중학교 3학년 때 아는 분 소개로 사격장에 가서 처음 잡은 게 소총이었다. 그런데 표적판에 맞지를 않더라. 코치님이 ‘그럼 권총을 쏴 보라’고 해서 권총을 잡았다. 그런데 묘하게 그때부터 맞았다”고 했다. 만약 처음부터 소총이 잘 맞았다면 그는 아마 소총 선수가 되었을 것이다. 신체적인 반전도 있다. 연습을 많이 하는 진종오의 손은 우락부락할 것 같지만 악수를 하면서 잡아 본 진종오의 손은 여자 손처럼 부드러웠다. 그는 “사격은 아무래도 손의 감각이 중요하다. 그래서 손을 소중하게 관리한다. 씻은 뒤엔 로션을 꼭 바르고, 추울 때는 반드시 장갑을 낀다”고 했다. 무거운 물건을 들 때도 왼손을 사용한다. 진종오는 올림픽에 나서는 부담감과 태극마크의 무게에 대해서도 솔직한 심경을 드러냈다. 그는 “금메달을 앞둔 마지막 총을 쏠 때 심장이 터질 것 같은 기분이었다”고 했다. 그는 또 “태극마크를 다는 것은 항상 자랑스럽지만 너무 힘들 때도 많다. 가끔씩은 보통 사람들처럼 평범하게 사는 꿈을 꾸기도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금메달을 딴 직후 그는 곧바로 2020년 도쿄 올림픽 출전 의사를 밝혔다. 왜 멀고 험한 길을 다시 가려는 것일까. 그는 후배들을 이유로 꼽았다. 진종오는 “그만두려고 할 즈음엔 항상 뛰어난 후배가 나타난다. 2004년 아테네 올림픽이 끝난 뒤 고등학생이던 이대명이 떠올랐다. ‘아, 내가 고등부한테 지면 안 되겠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런 식으로 승부욕을 자극하는 후배들이 끊임없이 나타난다”고 했다. 리우데자네이루=이헌재 기자 uni@donga.com}

한국 나이로 서른에 처음 밟은 올림픽 무대. 기다림이 길었던 만큼 기쁨은 더욱 컸다. ‘짱콩’ 장혜진(29·LH)이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 양궁 2관왕에 등극했다. 장혜진은 12일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의 삼보드로모무 경기장에서 열린 리우 올림픽 양궁 여자 개인전 결승에서 독일의 리사 운루를 6-2(27-26, 26-28, 27-26, 29-27)로 꺾고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지난 8일 한국의 단체전 금메달 획득에 이어 개인전까지 2관왕 등극이다. 4년 전 런던 올림픽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4위에 머물러 아쉽게 올림픽 출전권을 놓친 장혜진은 4년간 기다림 끝에 처음 나선 올림픽에서 2관왕에 오르며 새로운 ‘양궁 여제’의 탄생을 알렸다 . 장혜진은 이번 올림픽에 출전하기 위해서도 힘든 과정을 거쳐야 했다. 9살이나 어린 강채영(20·경희대)과 피 말리는 접전 끝에 대표 선발전 마지막 날이 되어서야 올림픽 진출을 확정했다. 불과 1점 차로 얻은 3위 자리였다. 어렵사리 기회를 얻은 장혜진은 단체전에 이어 개인전에서도 제 기량을 맘껏 발휘했다. 1세트에서 세 발을 모두 9점에 쏘면서 27-26으로 승리한 장혜진은 2세트에서는 마지막 화살을 10점에 쏜 운루에게 밀려 동점을 허용했다. 하지만 3세트 첫 발에서 10점을 쏘면서 기선을 잡았고 그 세트를 27-26으로 따냈다. 장혜진은 4세트에서 연달아 두 발을 10점에 쏜 데 이어 마지막 화살까지 9점에 쏘면서 금메달을 확정지었다. 앞서 열린 동메달 결정전에서는 기보배가 알렌한드라 발렌시아(멕시코)를 6-4(26-25 28-29 26-25 21-27 30-25)로 물리치고 동메달을 목에 걸었다. 2012년 런던올림픽에서 단체전과 개인전 금메달을 휩쓴 기보배는 올림픽 양궁 사상 최초로 개인전 2연패를 노렸지만 준결승에서 장혜진에게 지는 바람에 동메달 결정전으로 밀렸다. 남녀 단체전에 이어 여자 개인전까지 휩쓴 한국 양궁 대표팀은 13일 열리는 남자 개인전에서 사상 첫 전 종목 석권에 도전한다.리우데자네이루=이헌재 기자uni@donga.com}

11일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 남자 권총 50m에서 우승하며 올림픽 사격 역사상 처음으로 3연패의 위업을 달성한 진종오(37·kt). 그의 지론 중 하나는 사격은 ‘한 방’이라는 것이다. 그는 “사격은 한 방씩 쏘는 종목이다. 한 방 한 방이 모두 소중하지만 승부는 결정적인 한 방에서 갈린다”고 말했다. 올림픽에 네 차례 출전하면서 메달 6개(금메달 4개, 은메달 2개)를 딴 진종오인 만큼 결정적인 ‘한 방’도 많았다. 그런데 시기별로 ‘한 방’이 갖는 의미는 달랐다. ○ 신의 ‘한 방’ 6.6점. 어처구니없는 점수였다. 스스로도 고개를 가로저었다. 서바이벌 방식으로 치른 첫 올림픽이기에 더 치명적이었다. 11일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 남자 권총 50m 결선 9번째 발에서 나온 6.6점. 진종오는 “국가대표를 달고 국제 대회에서 처음 쏴 본 점수”라고 했다. 하지만 진종오는 그 순간부터 오뚝이처럼 벌떡 일어섰다. 한때 7위까지 처졌지만 경기가 끝난 뒤엔 가장 높은 자리에 올라 있었다. 경기 후 그는 “6.6점을 쏜 그 격발은 내 정신을 깨워준 인생의 한 발이었던 것 같다. 솔직히 속으로 욕도 하고 많이 자책했는데 전화위복이 됐다. 후회 없는 올림픽을 하고 싶어서 이를 악물고 집중했다”고 말했다. 결정적인 실수가 오히려 약이 됐다는 게 그의 설명이었다. 조준이 표적지 7시 방향으로 틀어져 있던 문제를 바로잡은 것도 실수가 가져다준 효과였다.○ 최고 인간의 ‘한 방’ 진종오의 ‘한 방’이 인간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정점을 찍었던 것은 10m 공기권총과 50m 권총 등 2관왕에 올랐던 2012년 런던 올림픽이다. 특히 10m 공기권총 마지막 발은 역사에 남을 만한 ‘한 방’이었다. 본선 1위(588점)로 결선에 오른 그는 결선 초반 5발까지 연속 10점대를 쏘며 순항했다. 그런데 6발째에 9.3점을 쏘더니 9발째까지 4발 연속 9점대를 쐈다. 마지막 10번째 발을 앞두고는 2위 루카 테스코니(이탈리아)에 1.3점 차로 쫓겼다. 그런데 조용히 숨을 고른 진종오는 마지막 10발째에서 만점(10.9점)에 가까운 10.8점을 쏜 뒤 두 주먹을 치켜들었다. 남자 50m 권총은 더욱 극적이었다. 본선 5위로 결선에 오른 그는 1위 최영래에게 7점이나 뒤져 있었다. 10발을 쏘는 결선에서 7점 차를 뒤집기는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 그런데 거짓말처럼 점수 차를 줄여나가더니 마지막 한 발을 앞두고는 1.6점 차까지 따라붙었다. 먼저 격발한 최영래의 점수는 8.1점. 중압감을 이기지 못해 나온 실수였다. 오랜 시간 조준을 한 진종오는 10.2점을 쏴 승부를 뒤집었다. ○ 인간의 ‘한 방’ 반대로 리우 올림픽 전까지 ‘한 방’이 아쉬웠던 대회는 2004년 아테네 올림픽이었다. 남자 권총 50m를 1위로 통과한 진종오는 결선에서도 1위를 달리고 있었다. 하지만 7번째 격발에서 6.9점을 쏘는 어이없는 실수를 저질렀다. 허탈하게 역전을 허용한 그는 은메달에 만족해야 했다. 진종오는 4년 뒤인 2008년 베이징 대회 남자 권총 50m에서 첫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하지만 그때도 인간적인 실수가 있었다. 진종오는 결선 9발째까지 2위 탄쭝량(중국)에게 1.9점 차로 앞서 무난히 금메달을 딸 것 같았다. 하지만 너무 긴장한 나머지 마지막 한 발에서 8.2점을 쏘고 말았다. 역전을 당할 위기였지만 탄쭝량도 9.2점에 그쳐 금메달을 차지할 수 있었다. ▼ 은퇴 생각없어”… 4년뒤 4연패 조준 ▼선수로서 모든 걸 다 이룬 진종오지만 그의 총구는 이미 4년 후 도쿄 올림픽에서의 ‘한 방’을 조준하고 있다. 진종오는 “후배들에게 미안한 얘기지만 당분간 은퇴할 생각은 없다”고 말했다. 그는 “저도 사람이고 욕심이 있다. 운동선수가 욕심이 없으면 승부의 세계에서 이길 수 없다. 정정당당히 선발전 치러서 국가대표가 되고 올림픽 나가는 거다. 도쿄 올림픽까지는 최선을 다해 도전해 보고 싶다”고 했다. 더 큰 목표는 선수 생활을 마감한 뒤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선수위원에 도전하는 것이다. 결정적인 ‘한 방’을 쏠 때마다 진종오는 대박을 터뜨린다. kt에서 전무급 이상의 대우인 3억 원대의 연봉을 받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그는 소속사로부터 거액의 포상을 받는다. kt의 금메달 포상금은 1억 원으로 책정돼 있지만 3연패라는 상징성을 감안할 때 증액될 수 있다. 문화체육관광부(6000만 원), 대한사격연맹(5000만 원) 등의 보너스도 기다리고 있다. 국민체육진흥공단에 따르면 진종오는 베이징 올림픽이 끝난 2008년 9월부터 매달 100만 원의 경기력향상연금을 받고 있다. 국민체육진흥공단이 제공하는 월정금 상한선을 넘긴 진종오는 일시금으로 6650만 원도 받게 된다. 리우데자네이루=이헌재 uni@donga.com / 김종석 기자}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에서 북한 올림픽 대표선수단을 응원하던 최룡해 북한 노동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사진)이 예정된 일정을 하루 앞당겨 귀국길에 올랐다. 현지 관계자들에 따르면 최 부위원장은 10일 오후 10시 반경 리우데자네이루 갈레앙 공항에 나타나 귀빈실에서 약 3시간을 기다린 뒤 11일 오전 1시 반경 출국했다. 4일 리우에 도착한 최 부위원장은 당초 11일까지 브라질 현지에 머물다 12일 출국할 것으로 알려졌었다. 최 부위원장의 이른 출국에는 북한 대표팀의 성적 부진과 한국 언론의 취재 경쟁에 대한 부담이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이 금메달 5개 이상을 주문했지만 10일까지 북한 선수단은 은메달 2개, 동메달 2개를 따는 데 그쳤다. 최 부위원장은 북한의 ‘역도 영웅’ 엄윤철이 은메달을 따자 북한 역도 감독을 질책하기도 했다. 북한은 4년 전 런던 올림픽에서는 역도에서 3개, 유도에서 1개 등 4개의 금메달을 딴 바 있다.리우데자네이루=이헌재 기자 uni@donga.com}

“나라에서 스폰서를 해주니 계약금과 보너스가 엄청나겠다.” 최경주(46·사진)가 2010년 태극기 모자를 쓰고 필드에 나타났을 때 미국프로골프(PGA)투어 동료 선수들이 던진 우스갯소리다. 최경주는 당시 메인 스폰서가 없었다. 메인 스폰서가 있는 프로 골퍼들은 모자 정면에 스폰서 로고를 달고 뛴다. 최경주는 메인 스폰서 로고가 있어야 할 자리에 태극기를 붙이고 뛰었다. 그해 마스터스에서도 태극기 모자를 쓰고 ‘골프황제’ 타이거 우즈와 동반 플레이를 했다. 이듬해부터 최경주는 SK텔레콤을 메인 스폰서로 얻었다. SK가 새겨진 모자를 쓰고 필드에 나갔더니 동료들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South Korea가 올해도 후원을 하나 보네.” 10일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 골프 코스에서 만난 최경주 골프 남자 국가대표 감독(SK텔레콤)은 ‘KOREA’가 새겨진 모자를 쓰고 있었다. 112년 만에 올림픽 종목으로 돌아온 골프에서 한국 남자 대표팀을 이끌고 있는 그는 “6년 전에는 내가 직접 태극기 모자를 만들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국가대표로서 쓰는 ‘KOREA’ 모자라서 그런지 느껴지는 무게감이 대단하다”고 말했다. 평소에도 유독 나라 사랑, 태극기 사랑을 실천해 온 그는 투어 경기 때 태극기를 신발과 골프백에 새겨 넣고 다니곤 했다. 올해 초 골프 국가대표 감독으로 선임된 뒤엔 한국이 좋은 성적을 얻을 수 있도록 모든 힘을 쏟겠다고 다짐했다. 그래서 선수들이 도착하기 며칠 전부터 일찌감치 브라질로 건너왔다. 혼자서 미리 코스를 점검하고, 날씨와 바람 등에 대한 조사도 했다. 전날에 이어 이날도 남자 대표 선수들인 안병훈(25·CJ), 왕정훈(21·한국체대)을 데리고 연습 라운딩을 하면서 자신이 갖고 있던 노하우를 전수했다. 현역으로 왕성하게 활동하는 최 감독이기에 두 선수는 언제든지 경쟁자가 될 수 있다. 하지만 그는 “지금 우리 남자 골프가 어떤 상황인가. 여자 골프에 비해 대회 수도 현저히 적고 인정도 못 받는다. 올림픽은 남자 골프를 변화시킬 좋은 계기다. 병훈이나 정훈이 같은 좋은 선수가 올림픽같이 큰 무대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는 게 꼭 필요하다”고 했다. PGA투어에서 잔뼈가 굵은 그의 존재감은 올림픽 골프코스에서도 여실히 드러났다. 오가다 만난 다른 나라 선수들이나 캐디들이 그를 알아보고 먼저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최 감독은 “전날 조 편성이 발표된 뒤 안병훈을 1조에서 같이 경기를 하게 된 아지우송 다 시우바(브라질)에게 인사시켰다. 시우바에게 ‘네가 형이니까 잘 봐 줘’라고 하니까 ‘알았다, 걱정 말라’고 하더라”며 웃었다. 그는 “외국 골프 선수들 중에 은근히 상대를 무시하고 괴롭히는 비열한 선수들이 있다. 경험이 많지 않은 우리 선수들이 그런 선수들과 동반 플레이를 하면 제 실력을 발휘하기 어렵다. 하지만 내가 뒤에서 쳐다보고 있으면 그렇게 나쁘게 할 수 있겠는가”라고 말했다. 전남 완도 출신인 최 감독은 선수들을 위해 고향 특산품인 전복을 브라질까지 공수해 왔다. 그는 “투어를 뛸 때 효과를 봤다. 힘도 나고 속도 편하다. 선수들도 오늘 3개씩 먹고 더 달라고 하더라. 무엇보다 여기서 구하기 힘든 고향의 맛을 봐서 좋아하는 것 같더라”고 말했다. 남자 골프는 11일 오후 7시 반 역사적인 티오프를 한다.리우데자네이루=이헌재 기자 uni@donga.com}

아버지는 아들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았다.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혼자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로 가는 비행기에 몸을 실은 것도 그 때문이었다. 일본 교토에서 30시간이 넘게 걸린 긴 여정이었지만 시상대에 오를 아들의 모습을 떠올리며 피곤한 줄도 몰랐다.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 유도 남자 73kg급 경기가 열린 9일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의 올림픽파크 카리오카 경기장2. 관중석 한쪽에 자리를 잡은 안태범 씨(52)는 태극마크를 가슴에 달고 경기장에 들어서는 아들 안창림(22·수원시청)을 지켜보며 가슴 한편에 뜨거움을 느꼈다. 해외 언론들까지 금메달 후보로 꼽았던 아들의 출발은 나쁘지 않았다. ▼ “日귀화는 지는 것”이라 했던 안창림… 4년뒤 도쿄올림픽서 금빛 꿈 재도전 ▼ 1회전 부전승에 이어 32강전을 완벽한 한판승으로 마쳤다. ‘올림픽 금메달’이라는 부자의 꿈이 조금씩 다가오는 듯했다. 16강전에서 아들이 만난 상대는 디르크 판 티헐트(32·벨기에). 이전에 두 번 만나 모두 이긴 선수였다. 하지만 아들은 2분 47초 만에 절반을 내주며 충격의 패배를 당했다. 경기가 끝난 뒤 매트 위에 무릎을 꿇고 있는 아들의 모습에 안 씨는 서둘러 경기장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그 길로 일본으로 돌아갔다. 미안해할 아들의 얼굴을 차마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올림픽 무대에 서기 위해 아들이 얼마나 많은 땀을 흘렸는지 잘 알기에 안 씨의 마음은 더 아팠다. 아들은 고교 때부터 교토를 떠나 기숙사 생활을 했다. 집에는 1년에 2, 3차례 들르는 게 전부였다. 접골원을 운영하는 안 씨는 아들이 집에 오면 정성껏 마사지를 해 줬다. 아들은 트레이너나 물리치료사보다 아버지에게 몸을 맡기는 게 좋았다. 초등학교 때 유도를 시작한 아들이 일본의 유도 명문 쓰쿠바대에 입학했을 때 안 씨는 이렇게 말했다. “귀화를 하는 게 어떻겠니. 그러면 더 큰 선수가 될 수 있을 텐데….” 강원도 출신으로 도쿄로 유학을 온 할아버지의 후손인 아들이 ‘재일동포’라는 꼬리표 때문에 국제대회에 나가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워 한 말이었다. 정작 안 씨는 갖은 차별과 수모를 겪으면서도 평생을 한국 국적으로 살았다. 아들이 귀화를 하면 동포 사회에서 얼굴을 들고 다니기 어렵다는 것을 알았지만 아들은 좀 더 편한 길을 택하길 바랐다. 하지만 아들의 생각은 달랐다. 아들은 자신보다 못한 선수들이 일본 대표로 뛰는 걸 지켜볼 때 화도 났지만 자신의 꿈을 위해 부모님을 실망시켜 드리고 싶지 않았다. 안 씨가 귀화 얘기를 꺼냈을 때 ‘귀화하면 지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아들은 한국에 가기로 마음을 굳혔다. 2013년 전일본학생선수권대회에서 우승한 직후 쓰쿠바대 감독은 물론이고 일본 대표팀 감독까지 귀화를 권했지만 아들은 태극마크를 선택했다. 이날 경기장을 빠져나오다 우연히 재일본대한체육회 최상영 회장 일행과 마주친 안 씨는 “미안하게 됐습니다”라고만 말했다. 허탈하긴 최 회장 일행도 마찬가지였다. 재일동포 2세로 1969년 한국 수영 국가대표를 지내기도 했던 최 회장은 안창림의 한국행에 힘을 실어 줬었다. 최 회장은 매년 전국체육대회에 100명이 넘는 재일동포 선수단을 이끌고 한국을 찾고 있다. 안창림도 고등학교 시절부터 재일동포 선수단의 일원으로 전국체육대회에 참가했다. 최 회장은 “재일동포가 3, 4세대로 이어지면서 민족관과 국가관이 많이 흐려지고 있다. 안창림은 젊은 재일동포들에게 꿈과 희망이 될 수 있는 선수다. 오늘이 끝이 아니다. 4년 뒤에는 일본 도쿄에서 올림픽이 열린다. 일본의 한복판에서 오랜 꿈을 실현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도울 것”이라고 말했다. 안창림은 40년 만에 재일동포로서 올림픽 메달에 도전했다. 비록 이번엔 실패했지만 그의 꿈은 4년 뒤로 미뤄졌을 뿐이다. 리우데자네이루=이헌재 uni@donga.com / 이승건 기자}

올림픽이 열리고 있는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까지 가려면 비행 시간만 꼬박 24시간이 걸린다. 경유까지 한두 차례 하면 이동에 30시간을 훌쩍 넘기기 십상이다. 그만큼 선수들이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하기가 쉽지 않다. 대한양궁협회는 그래서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에 출전하는 선수단 전원(지도자 5명, 선수 6명)을 비행기의 비즈니스 클래스에 태우기로 했다. 하지만 지난달 27일 한국 선수단 본진을 태우고 리우로 떠나는 전세기에는 양궁 선수단 전원이 이용할 만큼의 비즈니스 좌석이 남아 있지 않았다. 양궁 선수단은 결국 하루 뒤인 28일 다른 비행기의 비즈니스석을 이용해 리우로 떠났다. 올림픽에 출전하는 대표 선수들에게 이코노미석 비행기 삯만 지원해 주는 대한체육회의 규정에 따라 양궁 선수들이 이용한 비즈니스석과 이코노미석의 차액은 양궁협회가 부담했다. 리우에 도착해서도 양궁 선수단은 VIP 대접을 받고 있다. 삼보드로무 양궁 경기장은 선수촌에서 버스로 1시간 거리에 있다. 다른 나라 선수들이 휴식을 위해 선수촌으로 갈 때 한국 양궁 선수단은 경기장 근처에 마련된 대형 캠핑카로 간다. 대한양궁협회의 지원사인 현대자동차그룹 직원들이 일찌감치 임차한 주차장에 세워 놓은 캠핑카 안에는 침실과 휴식 공간은 물론이고 물리치료실까지 있다. 양궁협회는 또 경기장 주변에 선수들만을 위한 간이 한국 식당도 차렸다. 상파울루에 있는 한식당에서 데려온 요리사들이 이곳에서 선수들을 위한 음식을 만든다. 식당은 경기장에서 걸어서 5분 거리이지만 불안한 치안을 우려해 선수들은 사설 경호원들이 지키는 방탄차를 타고 식당으로 이동한다. 대한양궁협회장을 맡고 있는 정의선 현대차 부회장도 리우에서 직접 선수들을 챙기고 있다. 7일과 8일 단체전에서 금메달을 딴 남녀 선수들은 곧바로 정 부회장에게 다가가 포옹을 했다. 친밀도가 형성돼 있기에 나올 수 있는 광경이었다. 그동안 현대차그룹은 선수들이 올림픽이나 아시아경기에서 좋은 성적을 올릴 때마다 화끈한 선물로 화답했다. 자사가 만드는 차량을 선수단 모두에게 한 대씩 준 적도 있다. 4년 전 런던 올림픽에서 금메달 3개, 동메달 1개를 땄을 때는 16억 원의 포상금을 선수단에 전달했다. 이미 남녀 단체전 금메달을 따낸 한국 선수단은 남은 남녀 개인전에서 사상 첫 전 종목 석권을 노린다. 대표팀이 한국 양궁에 새 역사를 쓰는 날 과연 어떤 선물이 이들을 기다리고 있을지 궁금하다.리우데자네이루=이헌재 기자 uni@donga.com}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만큼 허탈한 패배였다. 남자 유도 66kg급 세계랭킹 1위 안바울(22·남양주시청)이 2016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 결승전에 한판패를 당하며 은메달에 만족해야 했다. 안바울은 8일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파크 카리오리카 아레나2에서 열린 파비오 바실레(이탈리아·세계랭킹 26위)결승전에서 뜻밖의 한판패를 당했다. 전날 여자 48kg급 정보경(안산시청)에 이어 이번 대회에서 두 번째 나온 유도 은메달이다. 안바울은 준결승전에서 ‘천적’ 일본의 에비누마 마사시(26)를 연장 접전 끝에 꺾었다. 누구나 금메달을 의심하지 않았던 바실레와의 결승전에서 안바울을 초반부터 적극적인 공격을 펼쳤지만 경기 시작 1분24초에 바실레에게 기습적으로 바깥다리에 걸려 한판패를 당했다. 안바울은 비록 금메달은 아니지만 생애 첫 출전한 올림픽에서 값진 은메달을 수확했다.리우데자네이루=이헌재 기자uni@donga.com}

한국과 피지의 올림픽 남자축구 경기가 열린 5일 브라질 사우바도르의 폰치 노바 경기장. 장대비가 내리는 가운데 경기 시작 1시간 전부터 붉은색 옷을 입거나 ‘케이팝(K-pop)’이라는 문구가 새겨진 반팔 티를 입은 브라질 사람들이 모여 들었다. 이들은 경기 시작을 알리는 주심의 휘슬이 울리자 서툰 한국어 발음으로 “대한민국”을 외치며 즐거워했다. 태극전사들을 응원하기 위해 축구장을 찾은 브라질 한류 팬들이었다. 통상 한국 축구 방문경기에는 현지 교민을 중심으로 응원전이 펼쳐진다. 그러나 올림픽 축구대표팀의 조별리그 1, 2차전이 열리는 사우바도르에는 한국 교민이 20여 명에 불과해 응원단을 구성하기조차 어렵다. 이 때문에 재브라질 대한체육회는 케이팝에 매료된 브라질 한류 팬 50명을 초청했다. 한병돈 재브라질 대한체육회장(55)은 “동남아시아처럼 브라질에서도 케이팝의 열기가 뜨겁다. 한국 노래 공연이 있을 때 적게는 2000명, 많게는 1만 명 정도의 브라질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인다”고 말했다. 브라질 한류 팬들에게 인기가 많은 한국 가수는 아이돌그룹 방탄소년단과 싸이 등이다. 방탄소년단 팬이라는 아나 디에드리히 씨(23·여)는 “내가 좋아하는 가수의 나라에서 온 선수들이 경기를 하는 만큼 월드컵 결승에 오른 브라질을 보러 온 것처럼 신나게 응원했다”고 말했다. 브라질 한류 팬들은 응원을 위해 상파울루에서 사우바도르로 건너온 교민 100명과 함께 태극기를 흔들면서 경기를 지켜봤다. 일부 한류 팬은 경기장에 싸이의 ‘강남스타일’이 울려 퍼지자 흥겹게 춤을 췄다. 한 회장은 “브라질 사람들은 비가 오는 날에 외출하는 것을 정말 싫어한다. 그러나 한류 팬들은 자국 경기가 아닌데도 빗속을 뚫고 경기장을 찾아오는 열정을 보여줬다”고 말했다. 한류 팬들은 한국의 조별리그 전 경기를 찾아 열띤 응원전을 펼칠 계획이다. 브라질의 한류 열풍은 리우데자네이루에서도 느껴졌다. 양궁장의 한 자원봉사자는 “걸그룹 에프엑스(f(x))의 팬이다. 에프엑스 노래 가사를 따라 부르다 한국말도 좀 하게 됐다”고 말했다. 올림픽 빌리지에서 출입증 검사를 담당하는 한 자원봉사자는 기자를 10분 이상 붙잡고 “걸그룹 씨스타에 대한 새로운 소식이 들리면 가장 먼저 알려 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한류 열풍 덕분에 브라질 내에서 한국어를 배우려는 열기도 뜨거워졌다고 한다. 한 회장은 “브라질에서 한국어능력시험을 보는 사람이 연간 1만 명에 달한다”며 “최근에는 브라질에 진출한 국내 대기업에 취직하기 위해 한국어를 공부하려는 사람도 늘고 있다”고 말했다. 사우바도르=정윤철 trigger@donga.com / 이헌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