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영배

안영배 기자

동아일보 콘텐츠기획본부

구독 54

추천

안녕하세요. 안영배 기자입니다.

ojong@donga.com

취재분야

2025-11-16~2025-12-16
여행67%
문화 일반17%
사회일반10%
경제일반3%
미술3%
  • 어린 兒들이 독립운동한다고?… 2·8선언, 마침내 국내점화

    1919년 초, 일본제국주의의 심장부 도쿄에서 독립선언을 준비하는 유학생들은 예전의 ‘부잣집 도련님’들이 아니었다. 일본에서 여러 차례 유학생활을 한 춘원 이광수는 1910년대 중반의 유학생들은 세 부류가 있다고 했다. “첫째 세계 대세와 현대문명을 일부분은 이해하고 또 전부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사람, 둘째 세계와 현대문명을 모르고 관리로 출세할 것만을 생각하는 사람, 셋째 남이 유학하니 나도 유학한다고 하는 사람이었다.”(이광수, ‘동경잡신·東京雜信’) 잃어버린 국권 회복을 부르짖으며 비분강개하는 도쿄 유학생은 소수였다는 얘기다. 그런 기류가 1917년 제정러시아 붕괴, 1918년 초 미국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을 포함하는 평화원칙 14개조 주창 등을 계기로 확연히 달라졌다. 민족자결주의에 대한 도쿄 유학생들의 반응은 다양했다. 한국독립의 서광이 비친다는 긍정적인 시각도 있었으나 비판적 견해도 만만찮았다. 2·8독립선언 11인 중 한 명인 서춘은 윌슨의 민족자결주의가 한국의 독립을 전적으로 보장하지는 않는다고 판단했다. 그는 웅변회(1918년 11월 22일)에서 “만일 미국의 주의(主義)가 참으로 정의인도(正義人道), 자유평등(自由平等)한 것이라면 무슨 이유로 필리핀을 독립시키지 않느냐”고 비판했다. 그러면서 “개인 간에 있어서는 정의인도, 자유평등을 대등하게 주장할 수 있을지 모르나 국가로서 단체로서 실력이 없다면 하등 소득이 없는 말이다”고 역설했다.(강덕상, ‘현대사사료·조선2’) 다만 도쿄 유학생들은 민족자결주의를 독립운동의 호재 혹은 방편으로 삼는 데는 이견이 없었다. 그러나 젊은 혈기만 가지고서는 적국(敵國)의 한복판에서 거사의 성공을 보장할 수 없었다. ○ 국내에 파견된 유학생 밀사 도쿄 유학생들의 거사를 ‘반드시’ 성공시키기 위해 일본에 잠입한 요원 장덕수는 유학생 대표 중 한 명이자 동갑내기인 김도연에게 말했다. “이번 독립운동은 국내외가 다같이 호응해야 할 것이다. 상하이의 대한청년독립단(신한청년당)과 연결 관계를 가지고 해내(海內) 해외(海外)가 일치하게 거사함이 좋을 것이다.”(김도연, ‘나의 인생백서’) 장덕수는 비밀 독립운동기관 동제사의 청년 요원을 중심으로 설립한 신한청년당의 움직임을 설명하며, 도쿄 유학생들도 국내와 호흡을 함께하는 것이 좋다고 조언했다. 거사 자금도 국내에서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장덕수는 일본으로 잠입하기 전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하는 김규식의 여비를 조달하기 위해 국내 자금을 지원받은 바 있다. 부산에서 백산상회를 운영하고 있는 기업가 안희제를 찾아가 상하이의 동정을 알리고 2000원을 받았던 것.(이경남, ‘설산 장덕수’) 이와 별도로 동제사 요원이자 신한청년당원 선우혁(1882∼?) 역시 중앙학교 설립자 김성수로부터 1000여 원을 전달받아 파리강화회의 활동비로 쓸 수 있었다.(현상윤, ‘3·1운동 발발의 개략’) 당시 도쿄 유학생들의 한 달 치 생활비가 평균 20원인 점을 감안하면 모두 상당한 거금이었다. 유학생 대표들도 국내와 연결망을 구축했다. 와세다대생 송계백(2·8운동 후 체포돼 옥사)을 경성(서울)에 파견했다. 도쿄 유학생들의 독립선언 계획을 알려주어 국내의 독립운동을 촉구하는 한편으로 거사를 추진할 자금을 지원받기 위해서였다. 송계백은 1919년 1월 초중순경 비단 수건 위에 잔글씨로 쓴 독립선언서 초안을 사각모 안에 감추어 경성 북촌에 있는 중앙학교(중앙고등보통학교)로 찾아갔다. 보성학교 1년 선배이자 와세다대 선배인 현상윤(1950년 납북)이 중앙학교 교원으로 재직 중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중앙학교는 ‘불령선인(不逞鮮人·불량한 조선사람)’의 집결지였다. 배일(排日)사상을 가진 사람들만이 들락날락했다.(현상윤, ‘3·1운동 발발의 개략’) 또 학교를 창설한 김성수와 교장 송진우, 그리고 교사 현상윤은 거의 날마다 학교 숙직실에 모여 세계가 개조되는 기운을 맞아 국내에서도 독립운동을 일으켜야 한다는 의견을 교환했다.(인촌기념회, ‘인촌김성수전’) 중앙학교 외에도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와 파리강화회의라는 세계 정세를 이용해 거사를 도모해야 한다는 논의는 곳곳에서 일고 있었다. 3·1운동의 민족대표 48인 중 한 명인 김도태는 “독립을 꿈꾸는 한국인치고 이러한 세계 정세에 관심을 두지 않는 이는 없었다”(동아일보 기고, 1946년 3월 5일자)고 밝혔다. 그때 도쿄의 유학생 후배가 비밀리에 독립선언서 초안을 들고 현상윤을 찾아온 것이다. 현상윤은 이광수가 작성한 독립선언서를 보고는 깜짝 놀랐다. 즉시 선언서를 송진우와 최남선에게 보였다. 현상윤은 이어 은사인 최린(보성학교 교장)을 찾아가 독립선언서를 보여 주고, 그를 통해 당시 국내 최고 교세를 자랑하던 천도교 수장 손병희에게도 전달했다. 유학생들의 독립선언서를 받아본 손병희가 말했다. “어린 아(兒)들이 저렇게 운동을 한다 하니 우리로서 어찌 앉아서 보기만 할 수 있느냐.”(현상윤, ‘3·1운동 발발의 개략’) 손병희는 그 이튿날로 천도교 최고간부회의를 열어 토의를 하고 천도교의 궐기를 결정했다. 도쿄 유학생들의 독립선언의 불꽃이 본격적으로 국내에도 점화되는 순간이었다. 송계백은 국내 종교계가 단합해 거사를 치르기로 했다는 답을 듣고 기쁜 마음으로 도쿄로 귀환했다. 그의 손에는 도쿄 유학 선배인 정노식이 전답을 판 돈 3000원(현상윤 증언)을 비롯해 송진우 등이 마련해준 거사 자금도 쥐여져 있었다. 이 돈은 유학생들이 독립선언서 등을 제작, 인쇄, 배포하는 데 요긴하게 사용됐다.○ 2월 8일, 그날 2월 8일 오전 10시 유학생 대표들은 도쿄 시내에 위치한 각국 대사와 공사, 일본 각 대신, 귀족원과 중의원, 조선총독부, 그리고 국내외 신문잡지사 및 학교 앞으로 독립선언서와 결의문, 민족대회 소집 청원서를 우편으로 부쳤다. 음산하리만큼 흐린 날씨였다. 오후 2시 회합이 시작될 때부터는 기상이 변했다. 도쿄에서는 자주 볼 수 없던 눈이 펑펑 내렸다. 학우회의 결산 총회를 구실로 소집한 모임 역시 때맞추어 독립운동으로 변신하고 있었다. 어느 정도 낌새를 눈치 챘는지 일본 경시청에서 보낸 경찰 40여 명이 조선기독교청년회관 주위에서 서성거렸다. 강당 안에도 사복 경찰이 섞여 있다는 것쯤은 알려진 비밀이었다. 강당은 일찌감치 600여 명의 학생이 모여들어 앉을 자리가 없었다. 결행 시간이 되자 학우회 회장 백남규가 개회를 선언했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앞에 앉아 있던 최팔용이 “회장! 긴급 동의요” 하면서 단상으로 올라가서는 조선청년독립단 발족을 공개적으로 선언했다. 여기저기서 “좋소” 하면서 만장일치의 박수가 터져 나왔다. 최팔용은 재빨리 백관수에게 독립선언서를 낭독케 했다. “…일본이 만일 우리 민족의 정당한 요구에 불응할진대, 우리 민족은 일본에 대하여 영원히 혈전(血戰)을 선언하노라.” 선언서 구절을 읽는 백관수의 목소리가 떨렸다. 바로 이어 김도연에게 결의문을 읽게 했다. 결의문 한 구절마다 학생은 환성과 우레 같은 박수로 응답했다. 일부 학생들은 망국의 한이 북받쳐 대성통곡을 했다. 최팔용 등 유학생 대표들이 활판 인쇄된 조선독립선언서를 단상에 걸고 실행 방법을 발표했다. 이로써 확실히 독립선언서를 공식적으로 선포했다. 이어 유학생 대표들은 준비해둔 태극기를 챙기고 도쿄 번화가로 나가 시가행진에 들어가려 했다. ‘기습을 당한’ 형사들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단상에 나타나 해산을 명령했다. 학생들은 발을 구르며 소리를 질렀다. 강당 안 접이용 의자를 경찰에게 던지며 육박전을 벌였다. 그러나 역부족이었다. 사복 경찰들이 물밀 듯 들이닥쳐 학생들을 잡아 팔을 비틀어 질질 끌고 갔다. 상하이로 거사 진행을 알리기 위해 떠난 이광수를 제외한 10명의 서명 위원을 비롯해 30명가량이 체포됐다.(위 내용은 2월 8일 당시를 기술한 김도연, 최승만의 회고록 참고) 2·8독립선언서에 서명한 유학생들은 전원 체포됐다. 체포된 학생들은 일본 법정에서 재판을 받았다. 검찰은 이들을 내란죄로 기소하려고 했다. 그러나 이때 한국에서 3·1운동 봉기가 시작돼 여론에 밀린 일제 재판부는 출판법 위반 등의 금고형(7∼9개월)을 선고했다. 2·8선언으로 희생을 치른 유학생들에게 3·1운동이 국민적 지지로 호응을 한 것이다. 도쿄 유학생들이 용의주도하게 계획한 독립선언운동은 성공했다. 유학생들이 가장 우려했던 사전 발각은 없었다. 2개월에 걸쳐 준비한 거사가 탄로 나지 않은 것은 철저한 기밀 유지와 대다수 도쿄 유학생들의 뜨거운 독립의지 때문이었다. “당시 학비가 어려운 사람 중에는 돈 몇 푼에 팔려 스파이 노릇을 하고 지내는 사람도 많았다”(최승만, ‘나의 회고록’)고 했지만 거사 당일까지 누설되지 않았던 것이다. 도쿄 유학생들의 독립운동 시위는 아시아 최초이기도 했다. 윌슨의 민족자결주의가 동유럽, 아프리카, 동남아 등 피압박민족의 독립운동을 자극했으나, 아시아에서 제일 먼저 독립의 봉화를 일으킨 것은 바로 재일 한국 청년 학생들이었다.(박경식, ‘일본에서의 3·1독립운동’) 이들의 봉기는 국내는 물론 해외에까지 널리 알려졌다. ○ 2차 2·8독립선언의 현장 기자는 2·8독립선언의 또 다른 현장인 도쿄 히비야(日比谷) 공원을 찾았다. 일본 왕실의 상징인 왕궁과 제국의회 의사당, 유학생들을 감시하던 일본 경시청과 검찰청이 지척에 있는 곳이다. 이곳에서 1차 시위로 붙잡혀간 이들에 이어 2차 독립만세 시위가 벌어졌다. 사실 유학생 대표들은 2·8독립선언 후 모두 경찰에 끌려갈 것을 예상했다. 거사 하루 전날인 2월 7일, 2·8선언의 작전본부였던 백관수의 자취방(도쓰카초·戶塚町)에 유학생들이 모였다. 백관수가 말했다.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사람들은 내일 다 붙들려 갈 것이고 언제 다시 나오게 될는지 모르는 일이니, 여러분들은 우리의 뒤를 이어 일을 잘 해 달라.”(최승만, ‘나의 회고록’) 이렇게 해서 재궐기를 주도할 2차 활동자까지 선정됐다. 최원순, 정대호, 변희용, 강종섭, 최재우, 장인환, 최승만 등이 바로 그들. 이들은 2·8운동 사나흘 후 히비야 공원 광장에서 전유학생대회를 열었다. 100여 명의 유학생이 모인 가운데 이달(1907∼1942)을 후임 회장으로 선출한 뒤, 일본의 무단정치를 규탄하고 조선독립을 요구하는 연설을 했다. 2월 12일 이 자리에 다시 모여 2차로 조선독립을 선포하는 선전문(조선독립촉진문)을 발표하려 했으나, 사전에 발각되고 말았다. 이어 23일에도 대표들이 조선청년독립단 민족대회촉진부 취지서를 인쇄해 히비야 공원에서 배포하고 시위운동을 벌이려 했으나 도중에 붙잡혔다. 이처럼 유학생들은 일본 왕실과 일본 통치기관 앞에서 공개적으로 시위를 벌이고자 했다. 전 세계에 한국인들의 독립의지를 알리고자 체포를 각오한 시위였다. 그러나 히비야 공원 어디서도 독립만세운동을 했다는 흔적도 표시도 없었다. 그저 무관심 속에 묻혀져 가는 또 다른 독립운동의 현장이었다. 도쿄 유학생들은 도쿄에서의 시위가 어려워지고 조국에서 3·1운동이 발발하자 국내 운동에 참가하기 위해 대거 귀국했다. 이 기간 일본에서 귀국한 한국인 491명 가운데 유학생만 359명이었을 정도다.(‘朝鮮人槪況·在日本朝鮮人關係資料集成’) 도쿄=안영배 기자 ojong@donga.com}

    • 2018-03-10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99년전 ‘2·8독립선언’ 외쳤던 곳엔 기념푯말 하나 없어

    3·1운동 100주년을 기념하는 역사 추적 탐방은 일본 제국주의 심장부였던 일본 도쿄(東京)에서 시작됐다. 3·1운동 관련 독립운동가들의 후손들도 함께했다. 올 2월 8일 오전 도쿄 지요다(千代田)구의 재일본한국YMCA 회관. 머리가 허옇게 센 노령층부터 교복 차림의 앳된 학생층에 이르기까지 250여 명의 재일 한국인이 한자리에 모였다. 한국의 ‘손님’들도 바다를 건너 참석했다. 국내 3·1운동의 불꽃을 지핀 도쿄 2·8독립선언의 주역인 김도연(이하 존칭 생략)의 손자 김민희 씨, 한국인의 독립 선언과 의지를 세계만방에 알리기 위해 파리강화회의에 달려간 김규식의 손녀 김수옥 씨, 3·1운동과 함께 출범한 상하이 임시정부를 이끌던 김구의 손자 김휘 씨와 나창헌의 아들 나중화 씨(광복회 부회장), 일본군 수뇌부에 폭탄을 투척한 윤봉길의 손녀 윤주경 씨(전 독립기념관장), 대일 무력항쟁을 이끈 광복군 지대장 김학규의 아들 김일진 씨, 국내에서 독립운동을 적극 지원한 민족기업가 안희제의 손자 안경하 씨, 항일 민족 언론인 양기탁의 손자 양준영 씨 등이 바로 그들. 좌석에 나란히 앉아 있는 애국지사 집안의 경력은 마치 일제하 치열했던 독립운동사를 압축적으로 나열해 놓은 듯했다. 행사는 정확히 99년 전인 바로 이날, 한국인 유학생들이 적국(敵國)의 수도 한복판에서 일본 제국주의의 불법 점령을 거부하고 조선의 독립을 선언(2·8독립선언)한 것을 기념하는 자리였다. 기념식은 장엄하게 진행됐다. 애국가에 이어 아리랑이 울려 퍼졌다. 금세 애국지사 유족들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이국의 땅에서, 그것도 한국인으로서는 감정이 특별할 수밖에 없는 일본 땅에서 우리 국가와 아리랑을 듣는 감회는 남다른 듯했다. 상하이에서 독립운동을 한 부친 때문에 상하이가 출생지인 나중화 광복회 부회장은 “일제하 지난한 세월을 보냈던 어른이 생각났다”고 말했다. 김수옥 씨는 “나와 같은 독립운동가 후손들은 어떻게 살고 있는지 무척 궁금했는데, 이렇게 한자리에 모여 노래를 들으니 가슴이 벅찼다”고 말했다. 다른 유가족들도 서로 강한 유대감을 느끼는 듯했다. 기념식을 치른 재일본한국YMCA 회관 앞에는 태극기와 함께 ‘조선독립선언기념비(朝鮮獨立宣言記念碑, 1919 2·8)’라는 한문 글귀가 새겨진 비석이 놓여 있었다. 그러나 이곳은 당시 유학생들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자리가 아니다. 원래 터는 옛 주소로 ‘도쿄 간다(神田)구 니시오가와(西小川)정 2-5’의 조선기독교청년회관. 1923년 간토(關東) 대지진 때 불타버리는 바람에 현재의 자리로 이전한 것이다. 기자는 2·8독립선언 기념식을 참관한 후 도보로 원래 터를 찾아가 보기로 했다. YMCA회관 내 ‘2·8독립선언 기념자료실’의 다즈케 가즈히사(田附和久) 실장은 “옆으로는 정면에 센슈(專修)대가, 오른쪽에 강이 있었다”는 당시 증언과 관련 사진, 지도 등을 토대로 현재의 회관에서 서남쪽으로 700m 남짓 떨어진 지점 ‘니시간다(西神田) 3초메(三丁目) 3번지 골목’을 지목했다. 1907년 당시의 지번이 새겨진 고지도와 현대 지도를 들고 홀로 찾아갔다. 10분 거리밖에 안 되는 이곳을 찾기 위해 30분간 헤맸다. ‘다이요빌딩’, ‘니시간다YS빌딩’ 등 중소규모 빌딩들이 자리한 곳이었다. 다즈케 실장은 “그 일대가 조선기독교청년회관이 있었던 곳은 분명하다. 그러나 도로가 개설되는 등 지형이 워낙 변해 정확한 건물 위치를 콕 집어 찾아내기는 어려운 상태”라고 밝혔다. 99년 전 바로 이 일대에서 재일 유학생 600여 명이 “이천만 조선민족을 대표하여 정의와 자유의 승리를 득(得)한 세계 만국의 전(前)에 독립을 기성(期成·꼭 이루기를 기약)하기를 선언하노라” 하며 독립선언서를 선포했다. 그러고선 일본 형사들에게 흠씬 두들겨 맞으며 질질 끌려갔다. 지금은 그때의 장면을 상상하기가 어렵다. 245m²(약 74평) 규모의 서양식 2층 목조건물이었던 조선기독교청년회관은 온데간데없다. 불과 100년도 안 되는 사이, 역사의 현장은 완벽하게 현대식 건물로 탈바꿈해 버렸다. 대한민국 역사에 길이 기억될 이 현장을 기념하는 푯말 하나 없는 현실이 안타까웠다. 또다시 세월이 흐르면 한국인의 기억에서도 완전히 지워질지 모를 일이다.도쿄=안영배 기자 ojong@donga.com}

    • 2018-03-03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토요판 커버스토리]“日帝의 심장에 비수를 꽂아라”

    《99년 전 3월, 한반도 전역에선 거대한 용암과도 같은 민족의 에너지가 분출됐다. 남쪽의 제주도에서 북쪽의 함경도에 이르기까지 1500여 차례에 걸쳐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는 3·1운동이 전개됐다. 3·1운동은 비단 국내에서만 그치지 않았다. 당시 인구 2000만 명 중 연인원 200여만 명이 참여한 거족적인 대일 항쟁이었다. 일본 자료를 집계한 바로는 사망자 7500여 명, 부상자 1만6000여 명, 검거자가 4만6900여 명에 달한다고 한다(추정). 기세(氣勢)에 놀란 일제는 무자비했다. 19세 소녀 윤형숙은 일본 경찰이 칼로 팔을 베자 다른 손으로 다시 태극기를 쥐고 흔들었다. 서대문형무소에 끌려간 유관순은 손톱과 발톱이 뽑히는 모진 고문을 당하면서도 끝까지 굴하지 않았다. 3·1운동은 한민족의 강한 정체성, 나아가 민주주의 의식을 국내외에 과시한 ‘한국적 굴기(倔起)’의 원형이라 할 수 있다. 중국 상하이에선 대한민국 임시정부 탄생이라는 소중한 열매가 맺혔다. 이듬해 창간한 동아일보 역시 3·1운동의 산고를 거쳐 탄생한 결과물이다. 동아일보 창간 주역인 인촌 김성수와 고하 송진우(동아일보 3대 사장)는 3·1운동을 기획하고 주도한 일원이기도 했다. 그간 3·1운동에 대한 적지 않은 책자와 논문이 발표됐다. 대부분 특정 사안에 대한 조망이나 특정 독립운동가에 대한 인물 연구, 3·1운동의 역사적 의의 등을 강조하는 데 치중해왔다. 그러다 보니 3·1운동 하면 ‘고종 황제 독살’ 소문이 계기가 됐다는 등 파편적으로 인식돼 온 것도 사실이다. 100주년을 코앞에 두고 있지만 3·1운동의 기획 단계에서 그 결말에 이르기까지 누가 언제 어디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 입체적으로 들여다보는 작업은 다소 미흡했다. 남북이 휴전선을 사이에 두고 으르렁대는 지금, 과연 우리는 한반도에서 진정한 독립을 누리고 있는가? 3·1운동은 우리에게 묻고 있다. 99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목마른 거대한 민족 에너지…. 3·1운동은 과거가 아닌 현재, 그리고 미래다. 동아일보가 새로 발굴된 자료와 현장 탐방 등을 통해 3·1운동에 등장하는 역사적 인물들을 생동감 있게 되살려내는 장기 연재 기획을 마련한 이유다.》 때는 1919년 1월 말, 중국에 기반을 둔 비밀 독립운동 조직 ‘동제사(同濟社)’의 밀명이 각 지역 요원들에게 떨어졌다. 상하이의 프랑스 조계(租界) 패륵로(貝勒路)에서 활동하던 20대 중반의 청년 요원에게도 지령서가 전달됐다. ‘각지에서 우리 동포는 독립을 선언하여 운동을 개시할 예정이다. 그런데 일본 관헌은 반드시 이 운동의 진상을 해외에 보도하는 것을 금할 것이 명백하므로, 귀하는 일본인처럼 복장을 하고 도쿄(東京)와 경성(서울)에 가서 운동의 상황을 상하이 중화신보(中華新報) 기자인 동지 조동우에게 기별하라. 도쿄에는 조용운을 파견해 두었으니 도쿄에 도착하면 와세다(早稻田)대 대기실(이곳에 마련된 우편함 이용) 앞으로 우편을 보내 그와 연락을 취해 상세하게 협의할 것. 그리고 도쿄에서의 운동은 2월 초순에, 경성에서의 운동은 3월 초순에 실행하기로 돼 있으니, 도쿄에서의 정황 통신을 끝내는 대로 곧 경성으로 가서 그곳 정황을 연락해 주기를 바람.’(조선총독부 경상북도경찰부 작성, ‘고등경찰요사’) 동제사의 수장 신규식(1880∼1922·‘고등경찰요사’에서는 상하이 거주 불령조선인(不逞朝鮮人)의 수령 ‘신견’으로 표기)이 동제사의 젊은 요원 중심으로 설립한 신한청년당의 장덕수(1894∼1947)에게 내린 지령이었다. 여비로 100달러도 동봉돼 있었다. 100달러는 당시 일용직 근로자들이 받는 세달치 급여 수준이다. 일본어를 일본인처럼 능숙하게 구사하는 장덕수는 일찌감치 ‘기무라 겐지(木村謙二)’라는 일본인 이름으로 위장해 활동하고 있던 요원이었다. 1월 27일 장덕수는 상하이 부두에서 일본의 국제 항구인 나가사키(長崎)로 가는 배에 올랐다. 나가사키를 경유해 도쿄에 도착한 날은 2월 3일경. 도쿄에서는 중국 유학생 유모(劉某)로 위장해 간다구의 한 여관에 여장을 풀었다. 3년 만에 다시 찾은 도쿄는 별로 변하지 않았다. 유학 시절 자주 찾아가 돈을 내고 책을 빌려 보았던 간다구(神田區)의 서점가도 그대로였다. 그는 1916년 7월 와세다대 정치경제학과를 2등으로 졸업한 후 곧바로 귀국했다가 상하이로 가 본격적으로 독립운동 전선에 뛰어들었던 것이다. 장덕수는 신주쿠에 있는 모교 와세다대를 찾았다. 그는 재학 시절 정치경제학과가 차세대 정치인을 양성하고자 의욕적으로 추진한 모의국회와 웅변대회에서 발군의 실력을 발휘했다. 탁월한 언변으로 ‘조선인 대웅변가’ ‘털보 웅변가’라는 유명세까지 치렀다. 장덕수는 수염이 많아 그를 좋아하는 학생들 사이에 ‘털보’라는 애칭으로도 불렸다. 그러나 감회도 잠시, 장덕수는 서둘렀다. 조용운을 만나기 위해 우편함을 통해 비밀 접선을 시도했다. 동제사 요원들은 비밀을 맹약하고, 간부 상호 간에는 암호를 사용해 왕래했다. 모두 기밀을 유지하기 위해서였다. 1912년에 결성된 비밀결사조직 동제사는 그 전체 조직이 구체적으로 드러난 적이 없다. 상하이에 있는 동제사 본부는 이사장(신규식)과 총재(박은식), 몇 명의 간사가 지휘했다. 그 아래로 사장과 간사를 둔 지사(분사)가 중국의 베이징(北京)·톈진(天津)·만주·노령 지역, 미국 등 구미 지역, 일본 등지에 설치돼 있던 정도로만 알려졌다. 동제사는 국외 각 지사를 이용해 국제 정세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고 이를 독립운동 진영에 전파하며 기반을 조성한 국제적 조직이었다.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발행되는 ‘신한민보’와 하와이의 ‘국민보’를 입수해 중국 안둥(安東)현을 통해 국내로 반입, 유포시키는 등 국내 독립운동에 활력을 불어넣기도 했다.(김희곤, ‘동제사의 결성과 활동’) 또 동제사는 교육기관인 박달학원을 통해 독립운동 인재들을 배출했다. 동제사와 박달학원에서 배출한 학생들은 10년간 100여 명에 이르렀다.(‘특고경찰관계자료집성·特高警察關係資料集成’·제12권) 독립운동에 헌신하고자 하는 학생들은 중국 군사학교에 입학해 정규 군사교육을 받기도 했다. 이렇게 동제사를 통해 문무를 겸비한 독립운동가들이 지속적으로 배출됐다. 전성기에는 동제사 회원 수가 300명에 달했다.(민필호, ‘예관 신규식선생 전기’) 장덕수 역시 1917년 상하이로 건너가 동제사 요원 여운형의 소개로 신규식을 만나 동제사 식구가 됐던 터다. 도쿄에서 암호를 사용해 만난 두 사람은 시바(芝)공원 내 으슥한 곳으로 이동해 밀담을 나눴다. 조용운이 장덕수에게 말했다. “내가 도쿄 유학생 측에게 권유한 결과 학생들이 드디어 오는 2월 8일에 독립선언을 할 것을 결정했소.”(‘고등경찰요사’) 조용운은 그간 도쿄 유학생들과의 접촉과 움직임을 상세히 장덕수에게 전달했다. 장덕수는 동제사 수장으로부터 받은 밀지의 내용처럼 일이 무탈히 진행되고 있음을 보고 적이 안심했다. ○ 고육계(苦肉計)로 일본 경찰을 속이다 두 사람은 도쿄 거사의 핵심 역할을 하는 유학생들을 만나기 위해 은밀히 움직였다. 투사적 면모가 물씬 나는 최팔용(1891∼1922)을 오랜만에 만난 장덕수는 기뻤다. 와세다대 동문인 장덕수와 최팔용은 여러모로 깊은 인연을 맺고 있었다. 장덕수는 재일 유학생의 대표 조직인 재동경조선유학생학우회(이하 학우회)의 기관지인 ‘학지광(學之光)’의 논객으로 민족운동에 앞장섰고, 1916년 초에는 도쿄에서 중국·대만, 베트남 유학생들과 함께 결성한 국제적 비밀결사조직인 신아동맹당(新亞同盟黨)의 주요 구성원으로도 활동했다. 정치경제학과 후배인 최팔용 역시 비슷한 길을 걷고 있었다. 최팔용은 조선에서도 인기를 끌고 있는 ‘학지광’의 편집부장을 맡고 있었고, 장덕수가 귀국한 뒤에는 신아동맹당에도 가입해 활동했다. 둘 다 성격도 화통했다. 장덕수는 믿음직한 동문 최팔용으로부터 그간의 활동 상황을 들었다. 최팔용이 전하는 경과는 이랬다. 1919년 1월 6일 오후 7시, 조선기독교청년회관(YMCA)에서 학우회 주최 웅변대회가 열렸다. 도쿄에 거주하는 600여 명의 한국인 유학생이 참여했다. 겉으로는 웅변대회였지만 실제는 독립운동을 모의하는 자리였다. 이 자리에서 유학생들의 독립운동을 주도적으로 추진해 나갈 대표(임시실행위원)들이 만장일치로 선출됐다. 최팔용(와세다대), 백관수(세이소쿠영어학교), 윤창석(아오야마학원), 서춘(도쿄고등사범학교), 김철수(게이오대), 김상덕(세이소쿠중학교), 이광수(와세다대), 송계백(와세다대), 이종근(도요대), 최근우(도쿄고등사범학교), 김도연(게이오대) 등 모두 11명이었다. 그렇게 도쿄 2·8독립선언의 씨가 뿌려졌다. 그런데 유학생들의 낌새를 수상히 여긴 일본 경찰의 감시와 미행이 강화됐다. 특히 11명의 대표는 경시청(警視廳)의 갑호(甲號) 요시찰 대상에 올라 꼼짝도 못 할 정도로 미행이 따라붙었다. 식민지 통치하에서, 그것도 적지인 일본의 심장부 한복판에서 학생 신분으로 일본 경찰의 감시를 피해 가면서 독립운동을 추진한다는 게 결코 용이한 게 아니었다.(김도연, ‘나의 인생백서’) 그해 1월 중순, YMCA 2루(樓) 북사실(北使室). 11명의 유학생 대표가 비밀리에 모였다. 이들은 일본 경찰의 눈을 돌리기 위해 고육계를 썼다. 대표자 내부에서 분열된 모습을 보여주기로 했다. 대표들 중 핵심이자 중진인 최팔용, 백관수, 김도연이 탈퇴 성명을 발표했다. 작전이 먹혀들어 갔다. 일본 경찰은 탈퇴하지 않은 나머지 대표들에게 감시망을 붙였다.(‘앞길·19호’, 1937년 7월 5일자) 최팔용, 백관수, 김도연 등은 ‘학우회’나 ‘유학생친목회’의 이름으로 독립선언을 하기에는 적합하지 않다는 데 뜻을 모으고 ‘조선청년독립단’을 조직하기로 결정했다. 대표들은 독립단의 이름으로 ‘독립선언서’와 ‘결의문’, ‘민족대회소집청원서’를 일본 국회, 각국 대사관과 공사관, 각 언론사 등에 보내기로 결의했다. 독립선언서 초안은 이광수가 썼다. 최팔용의 활약을 들은 장덕수는 와세다대 동문, 그리고 자신이 활동했던 조선학회와 신아동맹당 멤버들이 독립선언의 선봉으로 나섰다는 점에 고무됐다. 물론 이 일에는 동제사 요원 조용운의 배후 역할도 작용했다.○ 상하이에 나타난 윌슨 대통령의 특사 장덕수는 최팔용에게 상하이에서 벌어진 최근 소식을 전했다. 1914년에 발발한 제1차 세계대전이 4년 만인 1918년 11월 11일 미국, 영국, 프랑스 등 연합국의 승리로 끝나자 상하이는 축제 분위기였다. 거기다가 11월 말 미국 우드로 윌슨 대통령의 개인 특사인 찰스 크레인이 상하이를 방문해 승전 분위기는 절정에 이르렀다. 그는 중국상공회의소, 중국YMCA 등이 자신을 환영하기 위해 마련한 오찬 자리에서 중국인들에게 연설했다. “파리강화회의는 각국 모두 중대한 사명을 다하는 것으로 그 영향도 또한 큰 것이다. …피압박 민족에게 있어서는 그 해방을 도모하는 데 최적의 기회이기 때문에 중국에서도 대표를 파견해 피압박 상황을 말하고, 그 해방을 도모해야 한다.”(이 연설회에 참석한 여운형에 대한 경기도경찰부의 ‘피의자신문조서(제1회)’, ‘몽양여운형전집·1’) 말로만 듣던 민족자결주의를 미국 대통령 특사가 직접 밝히면서 약소민족 해방을 설파한 것이다. 그리고 승전국의 일원이면서도 일본에 예속된 상황인 중국에도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해 이를 주장하라고 조언하지 않는가. 상하이의 독립지사들은 이를 절호의 기회로 보았다. 이 모임에 참석해 감동을 받은 여운형은 중국 지인을 통해 크레인을 만났다. “이 기회에 우리는 일제의 압박과 지배에서 해방되어야 하겠다. 그러기 위해서는 강화회의에 우리도 대표를 파견해 우리 민족의 참상과 일본의 야만적 침략성을 폭로해야겠다. 당신의 원조를 요청한다.”(여운홍, ‘몽양 여운형’) 여운형의 요청에 ‘민족자결주의의 전도사’를 자처하는 크레인 역시 긍정적으로 답했다. 여운형의 발 빠른 행동에 맞춰 동제사의 젊은 요원들은 즉시 대표성을 갖추기 위해 신한청년당을 조직하고, 크레인을 통해 미국 윌슨 대통령과 파리강화회의에 보내는 독립청원서를 작성했다(두 곳에 최종 전달되지는 못했다). 그리고 김규식을 신한청년당의 대표 자격으로 파리에 파견키로 했던 것이다. 또 한국 대표인 김규식의 파리 활동에 힘을 실어주기 위해서는 국내외에서 대규모의 독립운동과 선전 활동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그중에서도 일본 제국주의의 심장부인 도쿄에서의 대대적인 독립운동은 가장 효과적이고 파급력이 큰 선전이 될 것이었다. 동제사 수장 신규식이 1차 조용운 파견에 이어 2차로 장덕수까지 파견한 이유이기도 했다. 장덕수로부터 “여운형과 함께 직접 독립청원서를 작성했다”는 말을 들은 최팔용은 감격했다. 파리에 한국 특사가 실제로 파견됐다는 소식에는 조국이 마치 독립이나 된 듯이 가슴이 팔딱팔딱 뛰었다. 장덕수는 또 일본 유학생만 단독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고 전했다. 국내를 비롯해 중국 만주 쪽에서도 거사가 도모되고 있다고 귀띔했다. 실제로 장덕수가 상하이에서 도쿄에 잠입하라는 밀지를 받을 무렵인 1919년 1월 21일, 중국 만주의 펑톈(奉天)에서 활동 중인 동제사 요원 정원택(1890∼1971)에게도 밀지가 전해졌다. 박달학원 출신인 정원택은 비밀서류임을 알아차리고 공원 으슥한 곳으로 가서 개봉했다. ‘방금 구주전란(歐洲戰亂·제1차 세계대전)이 종식되고 미 대통령 윌슨이 민족자결을 제창하며 파리에 평화회(파리강화회의)를 개최하니 약소민족이 궐기할 시기다. 상해에 주유(住留)하는 동지들이 미주의 동지와 국내 유지(有志)를 연락하여 독립운동을 적극 추진하며, 일면으로 파리에 특사를 발송 중이라.서간도(西間島·압록강 북쪽의 조선족자치주 지역)와 북간도(北間島·두만강 북쪽의 조선족자치주 지역)에 기밀(機密)을 연락지 못하였으니 군(정원택)이 길림(吉林)에 빨리 가 남파(南坡·박찬익)와 상의해 서·북간도에 동지를 연락하고, 각 방면으로 주선하여 대기 응변(應變)하기를 갈망하노니, 만일 길림에 가지 못할 경우이면 적당한 인사를 택해 대행케 하든지, 그도 못하는 때엔 이 서류를 소각하고 사정을 회시(回示)하라.’(정원택의 일기, ‘지산외유일지’) ‘선생님’으로 모시는 동제사 수장 신규식의 밀지를 읽은 펑톈의 청년 요원 역시 최팔용과 마찬가지로 가슴이 울렁거렸음을 느꼈다. 상하이로 망명해 유학하던 시절, 신규식의 지원을 받은 정원택은 그 은혜를 갚기 위해 독립운동에 헌신하던 중이었다. 정원택은 생계를 위해 하던 일을 모조리 정리한 후 길림으로 길을 재촉했다. 이처럼 동제사의 지령은 각 지역 요원들에게 시시각각 전해지고 있었다. 국내의 애국지사 월남 이상재와 의암 손병희에게도 밀서를 전하기 위해 요원 방효상과 곽경이 움직였다.(방효상과 곽경은 국내에 잠입했다가 일제 경찰에 발각돼 혹독한 고문을 받아 곽경은 옥사하고, 방효상은 폐인이 됐다) 이와 별도로 동제사 요원 선우혁은 평북 선천(宣川)의 목사 양전백, 정주의 이승훈, 평양의 길선주 등 기독교 지도자들을 비밀리에 만나 독립운동과 거사 자금 지원을 약속받기도 했다. 국내외 각지에서 모의가 진행되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 도쿄 유학생들도 동제사 요원이 도착하기 전부터 세계정세에 촉각을 예민하게 세우고 있었다. 무언가 해야 하지 않는가 하는 절박한 마음이 유학생들 사이에 형성돼 있었다. 최팔용은 1918년 12월 일본 고베(神戶)에서 발간하는 영자신문(The Japan Advertizer)의 기사(‘Korea, Agitate for Independence’)와 일본 매체에 간간이 소개되는 독립운동 소식을 보며 한껏 고무돼 있던 참이었다. 재미동포들이 한국의 독립운동에 대한 미국의 지원을 요청하는 청원서를 미국 정부에 제출했고, 이승만 등 대표단이 파리로 향한다거나 미주 동포들이 거액의 독립자금을 모금했다는 등의 뉴스를 접하고 있었다.(최승만, ‘나의 회고록’) 미국과 중국의 해외동포들이 활발한 독립운동을 일으키고 있는데 일본 유학생들만 더 이상 가만 앉아 있을 순 없었다. 최팔용은 해외 각지에서 동포들이 활발한 독립운동을 준비하고 있으며, 그중 일본 유학생들의 역할이 제일 클 것이라는 사실에 더 한층 결의를 다졌다. 상하이에서 밀파된 2명의 비밀요원과 도쿄 유학생들의 만남은 적국의 심장부에 비수를 꽂는 모의에 일단 성공했다. 이들은 2월 8일의 그날까지 모든 일정을 꼼꼼히 챙겼다. 도쿄는 전 세계에 우리나라의 독립을 선포하는 최전선 기지로 변신하고 있었던 것이다. (조용운의 정체는 2·8독립선언 운동사 가운데 최대 미스터리 중 하나다. 일제의 ‘고등경찰요사’에는 조용운을 동제사의 핵심 조직원인 조소앙으로 파악하고, 그가 도쿄에서 최팔용과 장덕수를 접선한 것으로 기술하고 있다. 반면 동제사 요원 정원택이 남긴 ‘지산외유일지(志山外遊日誌)’에는 조소앙이 1919년 1월 말에서 2월 초 사이에 중국 지린(吉林)에 체류하고 있었던 것으로 기록하고 있어, 조소앙의 도쿄 활동을 부정적으로 보기도 한다. 이화사학연구소 강영심 연구원은 조용운을 조소앙과 함께 상하이에서 독립운동을 한 친동생 조시원(조용원)으로 추정하는 시각도 있다고 했다) 안영배 기자 ojong@donga.com}

    • 2018-03-03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단독]윌슨에게 외친 독립청원서

    1919년 프랑스 파리강화회의에 처음으로 제출된 ‘프랑스어’ 한국독립청원서가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에 보존돼 있는 것으로 28일 확인됐다. ‘파리강화회의 미국대표단 문서철’이란 이름으로 보존돼 있는 독립청원서는 수신자를 미국 대통령인 ‘우드로 윌슨’으로 지정하고, 발신자를 ‘신정(Shinjhung), 김성(Kimshung)’으로 표기하고 있다. 신정(申檉)은 1910년대 한국 독립운동에서 가장 ‘비밀스러운’ 조직으로 꼽히는 동제사(同濟社)의 수장 신규식의 중국 이름이며, 김성(金成)은 동제사 요원 김규식의 다른 이름이다. 신규식과 김규식은 1919년 1월 25일 중국 상하이(上海)에서 각각 한국공화독립당 총재(President)와 사무총장(Secretary General) 자격으로 청원서를 작성했고, 김규식은 그해 3월 한국대표 자격으로 파리강화회의에 참석 중이던 미국 대표단 혼벡(S K Hornbeck)에게 직접 전달했다. 미국 대통령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으로 작성된 이 청원서는 일본의 음모로 부당하게 식민지가 된 한국 사정을 청취하고, 한국의 독립과 자유를 회복시켜 달라고 호소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제1차 세계대전 후 윌슨의 민족자결 주창과 전후처리 문제를 논의한 파리강화회의는 일본 도쿄의 2·8독립선언, 국내의 3·1운동 등을 자극하는 요인으로 작용했다는 게 학계의 정설이다. 이번에 발견된 독립청원서의 작성 주체와 내용은 한국 독립운동사를 새롭게 해석할 수 있는 사료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정병준 이화여대 사학과 교수는 “이번에 발견된 독립청원서는 김규식이 여운형 등에 의해 설립된 신한청년당의 대표로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했다는 그간의 통설과는 차이가 있다”며 “독립운동가 신규식과 김규식이 전혀 새로운 당을 내세우고, 두 사람 연명의 독립청원서를 제출했다는 것은 3·1독립운동사에서 이들의 활동을 새롭게 해석할 수 있는 근거가 될 수 있다”고 평가했다. 안영배 기자 ojong@donga.com}

    • 2018-03-01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베일속 신규식 행적 담겨… 독립운동사 새로 밝혀줄 사료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에 보관돼 있는 한국독립청원서는 4쪽 분량으로 원본은 프랑스어로 돼 있으며, 영어 번역본도 함께 보관돼 있다. 프랑스어 원본과 1919년 당시 작성된 걸로 보이는 영어 번역본은 직접 열람할 수는 없지만 마이크로필름을 통해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 제1차 세계대전 후 주요국 외교관들이 강화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파리에 총집결하는 만큼 프랑스어로 작성됐다는 점 외에 학계에선 작성 주체와 내용 면에서도 사료적 가치가 크다는 평가가 나온다. 나중에 임시정부 부주석을 지낸 우사(尤史) 김규식(1881∼1950)은 중국 상하이에서 급하게 조직된 신한청년당 대표 자격으로 파견된 것으로 알려져 왔다. 신한청년당 설립을 주도한 여운형이 외국어에 능통한 김규식을 대표로 선정했고, 1918년 11월 상하이에서 장덕수 등과 함께 독립청원서를 작성한 후 파리로 떠나는 김규식에게 전달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김규식은 여운형이 작성한 독립청원서를 확보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 발견된 독립청원서에서는 신한청년당 대신 한국독립공화당(The Korean Republican Independence Party)이라는 새 이름이 등장했다. 청원서의 내용 전개도 여운형의 독립청원서와 구조가 다르다. 3·1운동 발발 전후로 작성된 여러 종류의 독립청원서들은 대개 한민족의 위대한 역사, 일제의 부당한 합병, 한국 독립의 당위성을 호소하는 서술 구조를 갖고 있다. 반면 이번에 확인된 독립청원서는 파리강화회의에서 영국과 프랑스 등 승전국이 같은 연합국의 일원인 일본에 대해 우호적인 태도를 취할 것을 매우 경계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외국 열강은 일본이 한국에서 어떻게 통치하는지 알지 못한다. 가혹한 검열로 모든 뉴스가 외부 세계에 도달하지 못하고 있다. 이들(외국 열강)은 일본의 자애로운 보호하에서 아마도 한국이 여전히 자유롭다고 믿고 있다. … 열강들은 일본이 우리 정부를 몰락시킨 모든 조약들을 승인했기 때문에 불행한 한국인들을 위해 개입할 수 없다.” 그러니 미국이 주도하는 파리강화회의에서 ‘민족자결’ ‘영구적 세계평화’의 정신에 입각해 한국의 독립을 보장해 달라는 호소였다. 또 청원서에 총재(President)로 등장하는 신규식(1880∼1922)은 독립 운동가 중에서도 가장 베일에 싸인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카이저수염으로 유명한 신규식은 1905년 을사늑약 체결 당시 죽음으로 항거하려 극약을 마셔 자결을 시도했으나 가족들에게 발견됐고 그 일로 오른쪽 눈이 상했다. 그는 ‘애꾸눈으로 왜놈들을 흘겨본다’는 의미의 예관(睨觀)이라는 호를 사용했다. 1912년 독립운동을 위한 비밀결사 조직인 ‘동제사’를 설립해 실질적으로 지휘한 인물이다. 동제사는 해외 각지의 정보를 수집해 국내에 전달해 국내 독립운동에 활력을 불어넣는 등 정보기관의 역할도 수행했다. 따라서 이번에 발견된 독립청원서는 김규식과 더불어 신규식과 동제사의 활약상을 보여주는 직접적 단서라고 할 수도 있다. 3·1운동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인 오세창은 “3·1운동은 예관(신규식의 호)에 의해 점화됐다”고 말한 바 있다. 이화여대 정병준 교수는 최근 연구논문 ‘1919년, 파리로 가는 김규식’에서 김규식과 신규식 인맥이 매우 정교한 기획과 준비작업을 거쳐 시간 안배를 적절하게 하면서 조직적으로 독립운동을 펼친 게 확인된다고 기술했다. 지금까지 막연하게 알려진 것처럼 김규식이 단지 ‘영어를 잘한다는 이유로’ 신한청년당 대표로 선출돼 수동적으로 파리에 파견된 것이 아니라는 게 정 교수의 해석이다. 한편 청원서에 대한 당시 미국 측 반응은 소극적이었다. 미국 대표단은 1919년 3월 말 대책회의 결과 “미국은 일본의 한국 병합을 승인했으며, 현재 이 문제는 미국 대표단에 제출할 사안이 아니다”라고 답했다. 미국 측은 당시로서는 한국 대표를 만날 필요가 없으나 미래에 활용할 경우를 생각해 이 청원서를 보관했다.안영배 기자 ojong@donga.com}

    • 2018-03-01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안영배 전문기자의 풍수와 삶]북촌의 과부굴 명당, 터 주인도 가려 받아

    세종 15년인 1433년 7월 어느 날, 지관 최양선이 조선 조정을 발칵 뒤집어놓았다. “보현봉의 바른 줄기가 직접 승문원 터로 들어왔으니 바로 현무(玄武)가 머리를 숙인 땅으로서 나라에 이만한 명당이 없다”는 그의 발언 때문이었다. 보현봉의 곁줄기인 북악산 아래 자리 잡은 경복궁은 명당이 될 수 없고, 본줄기가 내려오는 승문원 자리(종로구 가회동·재동·계동 일대)가 으뜸 명당이므로 궁궐을 옮겨야 한다는 도발적 주장이었다. 최양선은 “승문원 자리로 궁궐을 옮기면 만대의 이익이 될 것”이라고까지 호언장담했다. 세종은 국가 공인 지관의 주장을 무시할 수 없었다. 조정 대신들에게 이 일을 논의하도록 했다. 당시 성리학을 숭상하던 유신(儒臣) 대다수는 최양선을 ‘망령된 자’로 몰아붙이면서, 세종에게 풍수설 같은 헛된 말에 현혹되지 말라고 간언했다. 세종은 대안으로 100여 간 규모의 별궁 건설을 제시했으나 대신들은 이마저 반대했다. 결국 세종은 외교문서를 관장하는 승문원(현대 계동사옥 인근 추정)까지 아예 다른 곳으로 옮기면서, 이 터를 그 누구도 쓰지 못하게 하는 쪽으로 결론지었다. 이후 승문원 터는 사람들로부터 ‘잊힌 땅’으로 방치돼 왔다. 그러다가 40여 년이 흐른 성종 때에 사람들 입방아에 다시 올랐다. 1477년 “임원준이 궁궐을 지을 땅에 자손의 집을 짓고 있으니 이는 반역과 같은 죄”라는 상소문이 성종에게 전달됐다. 임원준의 손자가 선왕(先王)인 예종의 고명딸 현숙공주와 혼례를 치른 후 ‘나라의 명당’인 승문원 터에 신혼집을 차린 것을 두고 왕기(王氣)를 노린 행위라는 투서였다. 사실이라면 구족 멸문을 불러올 사안이었다. 임원준은 급했다. 성종에게 그곳이 길지가 아님을 납득시켜야 했다. 임원준은 “이 땅이 일찍이 벼락을 맞은 바 있고, 또 시속(時俗)에 독녀혈(獨女穴)이기 때문에 이 땅에 사는 자가 일찍 과부 되는 사람이 많다고 합니다”고 변명했다. 나라의 대명당인 승문원 터가 졸지에 과부를 배출하는 ‘독녀혈’ 터로 둔갑했다. 한양에서 이 일대가 ‘과부굴(독녀혈)’로 불린 데는 역사적 배경이 있다. 성종의 할아버지인 세조는 조카인 단종의 왕위를 찬탈하는 과정에서 황보인 등 반대파를 재동에서 무참히 살육했다. 계유정란이라는 세조의 쿠데타로 처형당한 이들이 흘린 피 냄새가 너무 심해 땅에다 재를 뿌려야 할 정도였다. 그 아내들은 하루아침에 남편을 잃어버린 과부 신세가 됐다. 오늘날의 북촌 재동이 당시에 ‘잿골’ 또는 ‘회동(灰洞)’으로 불린 배경이자 이 일대가 과부들의 소굴인 과부굴이 된 사연이다. 독녀혈이라는 세언(世諺)까지 끌어대면서 승문원 자리인 북촌 일대가 명당이 아니라고 강변한 임원준은 풍수지리설에 매우 밝았던 인물이다. 실제로 승문원 자리가 흉지였다면 피붙이 손자가 신혼집을 차리도록 방치하지는 않았을 터다. 아무튼 성종은 자신도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외척을 보호하기 위해 임원준의 말을 ‘믿어주는’ 쪽으로 사태를 수습했다. 사실 승문원 자리는 최양선의 주장처럼 궁궐이 들어설 만한 강한 기운이 서려 있는 곳이다. 정도전이 한양 궁궐을 조성할 때 왕권을 견제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이 일대를 신하들의 삶 터로 배려했다는 풍설이 사실로 받아들여질 정도다. 필자는 권력 기운이 왕성한 천기혈(天氣穴)을 체험해보기 위해 북촌 일대를 자주 찾는다. 실제로 경복궁 근정전의 왕기 못지않은 혈이 군데군데 맺혀 있음을 알 수 있다. 1945년 광복 이후 이곳의 명당 기운 덕을 본 정치인으로는 윤보선 전 대통령과 이명박 전 대통령을 꼽을 수 있다. 1870년에 지어진 안국동의 윤보선 가옥과 17대 대선 1년 전인 2006년 가회동으로 이사한 이 전 대통령의 양택은 권력형 명당 기운이 강하다는 게 풍수계의 해석이다. 이 전 대통령이 살던 가회동 한옥은 ‘대권 명당’으로 소문이 난 후 현재 ‘취운정’이라는 고급 한옥호텔로 개조돼 운영되고 있다. 또 2015년에는 박원순 서울시장이 취운정과 직선거리로 불과 400m 떨어진 곳에 시장 공관을 마련해 대권과 관련한 행보가 아니냐는 구설에 오르기도 했다. 다만 이 일대에 있는 혈 터의 경우 그 기운이 강력한 만큼 아무나 쉽게 누릴 수 있는 곳은 아닌 듯하다. 이곳에 입주해 살다가 구설에 휘말려 터에서 ‘쫓겨난’ 대권 주자도 있고, 이곳으로 입주하려 했지만 터를 구하지 못해 포기한 대권 주자도 있다. 풍수의 눈으로는 두 경우 모두 터가 사람을 거부한 것으로 본다. 최양선도 승문원 터를 길지로 지목하면서도 “개인의 집이 주산의 혈 자리에 있으면 자손이 쇠잔해진다”는 경고도 잊지 않았다. 북촌 일대는 터와 사람의 궁합을 살펴볼 수 있는 흥미로운 땅인 것이다. 안영배 전문기자·풍수학 박사 ojong@donga.com}

    • 2018-01-31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안영배 전문기자의 풍수와 삶]‘天子의 나라’ 대한제국의 天文 명당

    서울에서 조선왕실의 마지막 ‘양택(집) 풍수’를 살펴볼 수 있는 곳이 딱 두 군데 있다. 정동의 덕수궁과 소공동의 환구단 터다. 덕수궁은 1897년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선포한 고종(조선 26대 왕)이 전각들을 새로 지어 법궁(法宮)으로 사용했던 궁궐이다. 또 덕수궁에서 동쪽으로 400여 m 거리의 환구단은 그해 10월 12일 황제로 등극한 고종이 천자(天子)의 자격으로 제천의식을 치른 제단이다. 이 두 곳은 100여 년 전 대한제국을 상징하는 대표적 공간이자 대한제국의 풍수 실력을 감상할 수 있는 명당 터다. 먼저 덕수궁은 조선의 여러 궁궐과 뚜렷한 차이점을 보인다. 경복궁을 비롯해 창덕궁, 창경궁 등은 모두 산 바로 아래에 조성돼 있다. 경복궁은 북악산 자락을 의지하고 있고, 창덕궁과 창경궁은 매봉 산자락에 기대어 있다. 반면에 덕수궁은 인왕산 줄기에서 내려온 야트막한 둔덕이 배경으로 있을 뿐, 의지할 만한 산이 보이지 않는다. 평지 위에 돌출적으로 세워진 조선 유일의 궁궐이다. 뒷산, 즉 주산(主山)이 없기 때문에 대한제국의 수명이 오래가지 못했다는 ‘오해’까지 받고 있다. 사실 덕수궁은 사신사(四神砂·좌청룡 우백호 남주작 북현무), 곧 전후좌우의 지형과 지세를 살피는 중국풍수론으로는 설명하기가 어렵다. 반면 땅의 형세 대신 하늘 기운이 직접 하강하는 천기하림(天氣下臨)의 우리식 터잡기 이론으로 보면 이해하기 쉽다. 중국 지안(集安)의 광개토태왕릉과 장군분(총) 등 고구려 왕릉들은 거의 대부분 천기하림의 터에 조성돼 있다. 고구려 사람들은 공중의 천기 에너지를 보다 직접적으로 받아들이기 위해 땅 밑이 아닌 지상의 높은 위치에 무덤방까지 조성해놓았다. 이는 고구려 고유의 천문풍수(天文風水) 관념이자 중국 동북지역을 무대로 한 ‘북방풍수’의 전통이기도 하다. 덕수궁에서는 이런 천문풍수를 직접 체험할 수 있다. 정전인 중화전과 석어당의 경우 정확히 천기하림의 터에 들어서 있다. 민감한 체질은 하늘기운이 하강함을 느낄 수 있을 정도다. 그뿐만 아니다. 고종 황제는 중화전을 중심으로 한쪽에는 석조전 등 양관(洋館)을, 다른 한쪽으로는 함녕전 등 전통 전각을 배치하는 등 구본신참(舊本新參)의 근대식 궁궐을 지었다. 터에서 ‘자주’와 ‘자존’이 강조된 대한제국의 풍수 배치를 읽을 수 있다. 그런데 대한제국의 진정한 풍수 실력은 환구단에서 확실하게 드러난다. 고종 황제는 천제를 치르는 신성한 터를 선정하기 위해 지관(오성근)을 동원했다. 지관은 여러 자리를 물색한 끝에 남별궁 터를 천거했다. 바로 지금의 환구단 터다. 고종은 화강암으로 쌓은 3층의 원형 제단에 황금색 원추형 지붕을 얹은 환구단을 지은 후, 하늘의 최고신인 황천상제(皇天上帝)와 땅의 최고신인 황지지(皇地祗)를 모시고 황제 즉위식을 치렀다. 이어 2년 후인 1899년에는 환구단에 모신 신패를 보관하는 황궁우(皇穹宇)를 건립해 동지마다 제사를 지내곤 했다. 현재 웨스틴조선호텔 북쪽에 자리 잡고 있는 팔각형의 3층 목조 건물이 바로 황궁우다. 환구단은 이처럼 천제를 지내는 제단과 황궁우가 쌍으로 이뤄진 구조였다. 아쉽게도 원형 제단은 사라져버렸다. 1910년 대한제국을 병탄한 일본은 1914년에 제단을 헐어버리고 그 대신 조선총독부 직영의 철도호텔(현 웨스틴조선호텔)을 지었다. 하늘에 제사 지내는 신성한 터를 숙박시설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대한제국이 ‘천자의 나라’가 아님을 드러낸 정치 선전이자 풍수 침략이었다. 비분강개한 대한제국 청년들이 호텔 공사장을 지키던 일본 헌병을 때려죽이는 일까지 생겼다. 환구단의 원래 모습은 사라졌지만 그 기운만큼은 지금도 생동하고 있다. 환구단 터에 들어선 호텔은 비즈니스와 거래가 잘 성사되는 명당으로 소문나 있다. 실제로 호텔 중심부의 제단 터는 천신과 지신을 모신 자리였던 만큼 땅 밑에서 솟아오르는 강력한 지기(地氣)가 중심 혈장(穴場)을 이루는 가운데 공중에서 천기가 하강해 주위를 부드럽게 감싸주고 있다. 황궁우는 그 반대다. 천기가 핵심 혈장을 이루면서 주위의 지기가 보듬는 형국이다. 이처럼 환구단은 마치 음양이 서로 맞물린 태극기 그림처럼 천기와 지기가 조화를 이룬 구조다. 이는 베이징의 제천의식 장소인 천단(天壇)에서는 느낄 수 없는 기운이다. 대한제국의 환구단은 중국의 천단보다 규모가 작지만, 그 기운만큼은 천단을 압도했다. 자랑스러운 우리 문화유산인 것이다. 내년은 고종 승하를 계기로 촉발한 3·1 대한독립선언 100주년이 된다. 풍수인이기 이전에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대한제국을 상징하는 환구단을 원형대로 복원하길 기대하는 게 과도한 바람일까. 안영배 전문기자·풍수학 박사 ojong@donga.com}

    • 2018-01-10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안영배 전문기자의 풍수와 삶]중국몽 원조의 태산 봉변과 마니산 참성단

    중국 중화주의 발상지인 산둥(山東)성의 태산(泰山)과 최초로 ‘중국몽(中國夢)’을 실현한 진시황제. 문재인 대통령이 15일 베이징대 연설에서 시진핑 국가주석이 이끄는 중국을 주변보다 높이 솟은 산봉우리로 비유한 것을 보면서 태산과 진시황이 떠올랐다. 문 대통령은 시진핑의 중국몽이 전 인류와 함께 꾸는 꿈이 되길 바라며 ‘작은 나라’인 한국도 동참하겠다고 밝혔다. ‘높은 산’을 자칭하는 중국에서 가장 ‘존귀한 산’으로 대접하는 곳이 바로 태산(1532m)이다. 백두산과 한라산보다 낮은 키이지만 중국인이 가장 많이 찾고 신성시한다. 중국 오악 중 으뜸인 ‘오악독존(五嶽獨尊)’이라는 이름으로 2000년 넘게 천하제일의 지위를 굳건히 누려오고 있다. 진시황을 비롯해 역대 72명의 중국 황제가 이 산에서 하늘신(天帝)에게 자신이 하늘의 아들(天子)임을 알리는 ‘신고식’을 치렀다. 하늘신의 적통으로 ‘인가’를 받아 세상을 다스린다는 중국몽의 근거지가 바로 태산인 것이다. 태산은 과연 그런 자격을 갖춘 곳일까. 필자는 태산을 몇 차례 답사한 바 있다. 10여 년 전 1600여 계단으로 유명한 십팔반(十八盤)을 힘겹게 올라 산마루의 옥황정을 처음 방문했을 때 감탄을 금치 못했다. 황제가 유일하게 머리를 숙인 옥황정으로는 공중에서 천기(天氣) 에너지가 강하게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옥황정은 중국인들에게 기도발이 잘 통하는 터로 유명했는데, 실제로 명당 기운이 작동하고 있었다. 그런데 강화도 마니산의 참성단에서 하늘 에너지에 흠뻑 취한 후 다시 찾은 태산은 싱거웠다. 마니산의 천기 파워에 한참 미치지 못했다. 마니산은 여러모로 태산과 비교된다. ‘고려사’와 ‘세종실록지리지’는 4000여 년 전인 고조선 시기에 단군이 하늘에 제사를 지낸 곳으로 마니산의 참성단을 소개하고 있다. 고려 원종이 1264년 참성단에 올라 제천의식을 치렀다거나, 고려 말의 재상 경복흥이 참성단에서 미래를 알려주는 신탁(神託)을 받았다는 기록도 있다. 조선 태종 때 문신 변계량은 “우리 동방은 단군이 시조인데, 대개 하늘에서 내려왔고 천자가 분봉(分封)한 나라가 아니다”고 하며 독자적인 천제의식을 지내왔다고 밝혔다. 참성단은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나다란 천원지방(天圓地方)의 독특한 형태를 띠고 있다. 풍수적으로는 천기가 곧장 내려와서 하늘과 교감할 수 있는 천하 대명당이다. 마니산의 기운은 우주 공간까지도 뻗쳤던 모양이다. 미국항공우주국(NASA)이 인공위성을 달에 착륙시켜 지구를 촬영했더니 지구 중심부에 점 하나가 있고 주변에 실오라기 같은 흔적이 있어 판독해본 결과, 점은 대한민국의 마니산이고 실오라기는 중국의 만리장성으로 밝혀졌다. 1974년 내한한 빌리 그레이엄 목사가 100만 명이 모인 자리에서 공개적으로 언급한 말이니 허언은 아닐 것이다. 태산은 물이 나지 않는 암벽지대이지만 참성단 정상에서는 불과 40년 전까지만 해도 천지 정화수(井華水)인 물이 솟아올랐다. 산 정상의 암벽에서 물이 치솟는 곳은 영험한 터로 보면 틀림없다. 우리 조상들은 천연의 정화수를 사용해 신성한 제천의식을 치렀던 것이다. 중국 역사가 사마천은 ‘사기’에서 이런 천제의식을 ‘봉선대전(封禪大典)’이라고 불렀다. 봉선의식은 황제라고 해서 아무나 쉽게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기원전 219년 진시황은 중국을 일통(一統)한 후 봉선을 위해 태산에 올랐다가 폭풍우를 만났다. 사마천은 “덕행을 갖추지 못한 황제에게는 봉선의식을 올릴 자격이 없음을 폭풍우로 알려준 것”이라고 하면서 “시황제가 봉선제를 거행한 뒤 12년 만에 진나라가 망했다”고 기록했다. 사실 ‘천자’라는 말도 중국 중원에서 기원한 게 아니다. 후한(後漢)의 대학자 채옹(133∼192)은 “천자라는 말은 동이(東夷)에서 시작되었다. 하늘을 아버지로, 땅을 어머니로 삼기 때문에 천자라고 한다(天子之號 始於東夷 父天母地 故曰天子)”고 밝혔다. 결국 천제나 천자의식은 동이 계열로 추정되는 우리가 원조였고 한족은 그 아류인 셈이다. 천자의 덕을 갖추지 못한 채 태산에서 천제를 강행한 진시황의 봉선 일화가 과거의 해프닝으로만 여겨지지 않는다. 중국몽을 꿈꾸는 현재의 중국 지도층은 과연 그만한 자격과 덕행을 갖추고 있을까. 더불어 한국의 지도층은 진정한 천자의 후손다운 자존감을 지키고 있는지 우려스럽다. 안영배 전문기자·풍수학 박사 ojong@donga.com}

    • 2017-12-20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420년이 흘렀건만, 위기 둔감-당쟁 어찌 그리 똑같은지”

    동아일보가 7월부터 22회에 걸쳐 연재한 ‘잊혀진 전쟁, 정유재란’ 시리즈는 이 전쟁이 과거 속에 묻힌 역사가 아닌, 현재의 우리에게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는 살아 있는 역사임을 보여줬다. 정유재란의 역사에서 교훈을 얻고, 미래를 대비하는 해법을 모색해보기 위해 5일 좌담회를 마련했다. 이 자리에는 김병연 임진·정유 역사재단 추진위원회 위원장(전 노르웨이 대사), 이대순 한일협력위원회 부회장(전 경원대·호남대 총장), 최영훈 논설위원이 참석했다. ―현재 한반도를 둘러싼 주변 정세가 심상치 않다. 정유재란의 경험을 통해 짚어 보아야 할 점은? 이대순: 현재의 한반도 정세와 16세기 당시의 조선 정세는 시대 배경이 다르고 시간적 차이도 크게 나지만, 한국인의 의식 구조는 400여 년 전이나 지금이나 크게 달라지지 않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임진·정유 7년 전쟁이 벌어지기 전 조선에는 위기의식이 별로 없었고, 국정을 이끄는 최고 통치자와 관료 집단의 리더십 또한 아주 취약했다. 관료들은 국가 전체의 이익이나 국민의 삶에 대한 관심보다는 소속 당파의 이익과 파쟁에만 몰두했다. 현재 상황도 비슷하다. 북한의 위협을 둘러싼 미·일·중·러의 각축전은 한반도가 내일을 예측하기 힘든 위기 상황에 처해 있음을 말해준다. 게다가 세계질서가 크게 재편되는 국제사회의 흐름에도 우리는 둔감하지 않은가 걱정된다. 국내 정치는 여야 할 것 없이 자기 세를 확장하는 데만 급급하고, 정부는 국민을 단합시켜 난국을 헤쳐 나갈 비전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정유재란 당시 국난을 극복한 동력은 정부보다는 일반 백성들의 호국 혹은 국토 수호 정신과 열정적인 헌신에 있었다는 점이 의미 있게 다가온다. 지금도 국민이 먼저 깨어서 위정자들의 각성을 촉구하고 나라를 이끌고 나갈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최영훈: 국가를 이끄는 위정자들의 현실 인식과 판단은 매우 중요한 문제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0년 전 율곡 이이는 “200년간 저축해온 나라에서 2년 먹을 양식조차 없으니 나라가 나라가 아니다”며 선조 임금에게 송곳 같은 질타를 하는 상소문을 올리고, 또 자주 국방력을 강화해야 한다는 말을 끊임없이 했다. 그러나 조선의 위정자들은 귀담아듣지 않았고 오히려 당파 논리에 집착했다. 임란 직전 일본 정세를 살피고 온 동인 계열 김성일은 일본이 쳐들어오지 않을 것이라고 하고, 서인인 황윤길은 쳐들어올 것이라는 정반대의 보고를 해 정세 판단에 혼란을 일으키기까지 했다. 현재도 북한 핵문제 등 사안을 놓고 우리 내부는 정반대되는 의견으로 나눠지는 등 갈등을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 이런 문제들을 극복하지 못하면 420년 전의 국난이 또 없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김병연: 율곡 뿐만 아니라 서애 유성룡도 정유재란이 끝난 후 그간의 전쟁 경험을 기록한 ‘징비록’을 남겼다. 그런데 서애가 지난날의 잘못과 비리를 경계하는 뜻에서 남긴 ‘징비록’이 전후 조선인보다는 일본인들에게 더 많이 읽혔다는 것은 심각하게 고민할 필요가 있다. 현재도 한일 간 외교 갈등이 불거질 때마다 우리가 일본 외교에 밀리곤 하는 것도 과거를 반성하고, 미래를 대비하는 ‘징비’의 정신이 부족했지 않았나 생각한다. 또 하나 ‘징비록’에서 짚어볼 것은 서애는 구원군으로서의 명군 횡포와 명나라의 심각한 내정 간섭을 깊이 우려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당시 조선은 외교적 협상권도, 군 지휘권도 명에 빼앗긴 상태였다. 심지어는 조선을 명의 속국으로 만들거나, 임금을 갈아 치우려는 움직임까지 있었다. 그럼에도 조선은 나라를 다시 일으켜 세우게 해준 ‘재조지은(再造之恩)의 나라’라고 명을 떠받든 결과 청나라의 침입을 받기까지 했다. 사실 명나라는 일본이 자국 영토를 침범해오지 못하도록 하는 전략적 차원에서 조선을 지원했다. 그러니까 ‘지원’이라는 이름으로 중국 본토를 지키기 위한 대리전쟁을 조선에서 치른 것이다. 일본은 명을 정벌하기 위해 조선의 길을 빌려달라는 정명가도(征明假道)의 명분으로 조선을 침략했다. 명을 치기 위한 대리전쟁의 터로 조선을 희생양으로 삼았다는 뜻이다. 이는 한반도가 그 지정학적 위치 때문에 대리전쟁의 터가 되기 쉽다는 것을 의미한다. 오늘의 한국 외교에서도 이를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정유재란이 ‘잊혀진 전쟁’이 된 이유는? 이: 임진·정유 7년 전쟁이 조선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적지 않은 데도 ‘치욕의 역사’라서 그랬는지 학계의 연구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일반인이 임진왜란이라는 말은 들어봤어도 정유재란이라는 말은 잘 알지 못하고, 더욱이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이 어떤 차이점이 있는지 구별하는 이는 매우 드물다. 전쟁을 직접 겪은 조선에서는 ‘왜구의 하찮은 난’으로 치부해 전쟁의 의미를 축소시켰고, 현대에 들어와서도 전문가들의 진지한 연구가 없었던 게 가장 큰 이유였다고 본다. 반면 일본은 어떠한가. 나는 오늘(5일) 일본에서 한일협력위원회 일로 나카소네 등 일본 정치인들을 만나고 공항에서 좌담장소로 바로 왔다. 일본 정치인들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의 성격을 분명히 구분하고 있었다. 임진왜란은 ‘분로쿠(文祿)의 역(役)’이라고 해서 명나라를 치기 위한 대외 전쟁으로, 정유재란은 ‘게이초(慶長)의 역’이라고 해서 조선 정벌 전쟁으로 구별하고 있었다. 대개의 일반 일본인들도 이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들은 또한 정유재란을 ‘도자기 전쟁’이라고 이름 붙이고서는 노골적으로 표현하지는 않지만 일본이 승리를 거둔 전쟁으로 여기고 있었다. 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 침략 전쟁을 벌이면서 자기에게 극렬히 저항했던 규슈 지역의 다이묘 및 사무라이들과 병사들을 대거 파병했다. 히데요시는 이들을 조선에서 소모시킴으로써 자신에게 위협이 될지도 모를 저항의 힘을 무너뜨리려는 의도도 갖고 있었다. 그런데 전쟁에 참여한 규슈 지역 다이묘들은 철수하면서 무수한 조선 도공들을 납치해갔는데 이들이 남긴 도자기가 오늘의 일본을 일으키는 ‘자본’이 됐다. 그런 점에서 규슈 지역 사람들은 조선에 대한 미안함과 고마움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동아일보의 ‘정유재란’ 연재물에서 되짚어봐야 할 점을 꼽는다면…. 김: 동아일보가 정유재란 420주년을 맞아 정유재란의 역사를 과감하게 양지로 드러내준 점에 대해 독자의 한 사람으로서 감사드린다. 연재물에서 지적했다시피 현재 정유재란을 잊혀진 전쟁이라고 부를 만큼 전적지가 무관심과 무분별한 훼손 속에 방치돼 있다. 국민의 의식 속에 정유재란의 의미가 희석돼 있기 때문에 아무런 제어 장치가 없이 전적지에 전혀 엉뚱한 기념물이 들어서 있는가 하면, 역사적 의미가 있는 곳을 영구적으로 파괴하는 행태가 공공연하게 벌어졌다. 대표적인 게 순천 해룡면의 왜교성(순천왜성)이다. 왜교성은 왜군 장수 고니시 유키나가가 호남을 지배하기 위해 세운 호남 유일의 왜성이자 독특한 건축구조물로 문화재적 가치 또한 큰 곳이다. 이곳은 다른 왜성처럼 왜군들의 성이라는 이유로 방치되고 훼손됐다. 또 왜교성 앞뒤로는 조명 연합군의 육군 지휘소인 검단산성과 수군 지휘소인 장도가 가시권내에 있다. 이곳 육지와 바다에서 조명 연합 육군과 수군이 왜군과 치열한 격전을 벌였다. 그런데 이순신과 진린의 수군 사령부가 있던 장도는 산업단지 조성을 위한 간척사업으로 어이없이 메워져버렸다. 정유재란 전적지 중 가장 크게 훼손된 곳이 장도로, 이제는 육지 속에 갇힌 섬이 됐다. 이곳의 중요성을 조금만 알고 있었더라도 무모한 사업은 진행되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이라도 충무공 이순신의 전적지인 장도라도 바다의 섬으로 되돌려 놓아야 한다(). 최: 임진·정유 7년 전쟁을 총괄해서 볼 때 전 국민적인 의병 운동을 재조명해 보는 기회가 됐다는 점도 곱씹어볼 수 있다. 임진왜란 당시 호남 출신 의병들이 경상도의 진주성을 구하기 위해 대거 출전했고, 저 멀리 행주산성까지도 달려가 왜군과 싸운 점은 매우 인상적이다. 정유재란 당시엔 이순신의 수군에 가담한 경상도 출신 백성들도 적지 않았다. 적어도 조선의 백성들은 국난을 당해서는 지역을 가리지 않고 온 국민이 합심해 극복했다. 이 점이 우리의 저력이고 나라를 지키는 힘이라고 본다. 김: 역사학계의 무관심과 현장을 방문하지 않고서는 알 수 없는 역사적 실체가 이번 시리즈를 통해 밝혀진 점은 주목할 만한 것이다. 대표적인 것으로 명량대첩 이후 이순신의 서해안 해상루트를 직접 탐사한 보도물이다(). 취재 기자가 배를 타고 당시의 판옥선 속력 등을 계산하면서 이순신 관련 섬들을 찾아다니고, 팔금도가 ‘난중일기’에서 이순신이 머물렀던 발음도였다는 점을 고증해낸 것은 중요한 성과라고 본다. 팔금도에는 이순신 관련 일화들이 꽤 많이 전해져 내려온다. 팔금도 사람들은 이순신이 아들 면의 피살소식을 듣고 코피를 한 됫박이나 흘려 사경을 헤맬 때 마을 주민들이 염소를 잡아 먹여 이순신을 살려냈다는 얘기를 대대로 전해 듣고 살아왔다. 지금 팔금도 사람들은 동아일보 보도를 통해 대단한 자긍심을 가지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이: 최근 동아일보 정유재란 연재물로 상당수 고교에서 고교생들이 토론회를 열고 자기들끼리 역사 논쟁을 하는 수업도 진행되고 있다. 그리고 전국 고등학생들을 대상으로 정유재란 독후감 대회가 열리고 있다. 미래를 짊어진 우리의 젊은 세대들이 올바른 역사관을 정립하는 데 동아일보가 역할을 한 점을 평가한다. ―정유재란을 통해 모색해보는 한중일의 미래와 과제는…. 김: 16세기 동아시아의 최대 규모 대전인 정유재란은 과거의 일과성 전쟁이 아니며, 망각된 전쟁이 돼서도 안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정유재란 전체를 상징하는 공간에서 한중일 3국 국민 모두에게 더 이상 전쟁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역사 교육과 함께 3국민 모두의 평화적 공존과 발전을 모색하는 장(場)마당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이런 전제 하에 임진·정유 역사재단 추진위원회는 우선적으로 정유재란 최대 격전지였던 장도 등 광양만에 죽은 3국 국민들을 애도하는 추모공원, 혹은 평화적 공존을 기원하는 평화공원 설립을 추진하고 있다. 최: 정부 차원과는 별도로 민간 차원에서 3국의 국민이 함께 모이는 장은 반드시 필요하다고 본다. 한국의 후세들에게는 한중일 3국의 평화 중재자 역할을 하는 책임감과 자존감을 부여하고, 일본과 중국의 젊은이들을 대상으로 평화적 공존만이 모두가 함께 잘사는 길임을 인식시키는 교육도 필요하다. 즉 동북아 평화를 기원하는 공원이자 역사 교육의 메카가 될 공간을 마련하는 일은 중요하다고 본다. 이: 정유재란에서 국난 극복의 동력을 찾아내야 한다. 나는 이를 이념에 앞서 자신과 후손들이 대를 이어가야 할 땅으로서의 국토 수호 의지로 해석하고 싶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은 독일의 히틀러에게 끝까지 저항해 자국을 지켜냈지만, 프랑스는 너무나 쉽게 독일군에게 점령됐다. 프랑스는 이념 갈등으로 국론이 분열돼 있었고,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많은 사람들의 희생으로 인한 전쟁 혐오증으로 막연한 평화무드에 젖어 있었다. 독일은 이 틈을 노려 기습적으로 프랑스를 손아귀에 넣을 수 있었다. 당시 프랑스에는 피를 흘려서라도 지키겠다는 국토수호 의지가 무력해진 상태였다고 할까. 김: 2018년 무술년은 정유재란이 끝난 해이자 조명연합수군의 통제사 이순신과 명 장군 등자룡이 사망한 해다. 수많은 조선군 장수와 군졸, 명군 및 왜군들이 광양만의 관음포 바다에서 죽었다. 420년이 되도록 한중일 그 누구도 이들의 넋을 달래는 위령제를 지내주지 않았다. 3국의 희생자 후손들을 모아 위령제를 지내주는 한편으로 3국 평화의 기원제가 되는 행사를 기획하고 있다. 이: 등자룡은 중국의 지도자 덩샤오핑(鄧小平)의 조상이면서 노구를 이끌고 전장에 나선 장군으로 중국에서도 추앙받고 있다. 몇 해 전 시진핑이 한국을 방문했을 때 진린과 등자룡을 언급하기도 했다. 사드 배치 문제 등으로 불편해진 한중 관계가 민간차원의 이런 행사를 통해 풀리는 계기도 될 수 있을 것이다. 진행 및 정리=안영배 전문기자 ojong@donga.com}

    • 2017-12-09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죽은 ‘원숭이’가 욕심 낸 조선 자기, 패전국 日 부활시켜

    이순신이 전사한 노량해전을 끝으로 정유재란은 발발 22개월여 만에 종결됐다. 노량해협에서 대패한 왜군은 부산본영으로 집결해 대마도를 거쳐 일본으로 돌아갔다. 이로써 임진년인 1592년 왜군의 침략으로 시작돼 7년간 조선 땅을 유린한 임진·정유 전쟁은 마무리됐다. 하지만 전쟁의 후유증은 컸다. 한·중·일 3국 모두에 거대한 후폭풍이 들이닥쳤다. 조선을 침략한 ‘섬나라 사루’(원숭이·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별명)는 결국 무모한 재롱을 부린 대가로 권력 기반마저 송두리째 잃고 말았다. 1598년 8월 히데요시는 죽기 전 원로그룹인 고다이로(五大老)에게 애원하다시피 유언을 남겼다. “거듭거듭 히데요리(히데요시의 아들)를 부탁합니다. 당신들 다섯 사람만 믿습니다.”(일본 모리가문 문서 3) 그러나 다섯 명의 야심가 중 가장 선두에 있던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히데요시 이후의 최고 권력자가 되고자 했다. 결국 히데요시 권력의 중추를 이루던 세력은 이에야스를 지지하는 동군(東軍)과 히데요리의 계승을 지지하는 서군(西軍)으로 분열됐다. 조선 침략의 선봉장 가토 기요마사는 히데요시의 혈족이면서도 동군에 가담했고, 호남지역 침공의 주역인 고니시 유키나가는 서군에 서서 대립했다. 순천 왜교성 전투에서 고니시와 함께 농성전을 벌였던 마쓰우라 시게노부, 아리마 하리노부 등 4명의 다이묘는 전우의 회유를 물리치고 동군 편에 섰다.(일본 ‘大村記’) 양측의 대립은 1600년 동군 승리로 끝났고, 고니시가 참수된 것을 비롯해 서군은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히데요시의 처자도 모두 죽어 가문은 멸문하고 말았다. 히데요시를 배신해 동군에 가담한 가토 가문도 이에야스의 눈 밖에 나 몰락의 길을 걸었다. 이로써 1603년 새로운 권력인 에도(江戶·도쿄) 정권이 출현했다. 조선에 구원군을 보냈던 명나라도 전후 정세가 편치 않았다. 명의 황제 만력제(萬曆帝·재위 1572∼1620년)는 은화 780만 냥 이상의 군비와 수백만 섬에 달하는 군량을 조선에 보냈다. 만력제 재위 시절 잇따른 2개의 변란에 더해 조선 전쟁으로 국고는 비었다. 만력제 자신은 황태자 책봉 문제로 대신들과 대립하면서 정사를 돌보지 않았다. 결국 그의 사후 명은 이자성의 농민반란을 겪으면서 멸망의 길로 들어서 북방 만주족인 청나라로 대체됐다. 전쟁 피해 당사국인 조선은 전란으로 150만결의 토지가 50만결로 줄어들 정도로 국토가 황폐해졌다. 전쟁으로 죽은 조선 백성들의 숫자는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고, 왜군에게 잡혀간 9만여 명의 포로 중 공식적으로 조선에 송환된 이는 7300여 명밖에 되지 않았다. 조선 조정은 심각한 반성을 할 겨를도 없이 전후 복구책에 급급했다. 국가 재정을 확보하기 위한 조세 정책과 5군영의 군제 개혁이 이뤄졌을 뿐, 부강한 국가를 만들려는 정책 전환도, 당쟁에 대한 반성도 없었다. 왜군과 전투를 벌이는 와중에도 서로 반목했던 당쟁은 전후에도 여전히 뿌리가 뽑히지 않았다. 정쟁으로 선조의 뒤를 이은 광해군이 폐위되고 인조가 왕위에 올랐다. 결국 조선은 정유재란이 끝난 뒤 38년 만에 다시 청의 침략을 받아 인조가 청 태종 앞에 무릎을 꿇는 병자호란(1636년)을 맞았다.조선 지원한 明, 만주족에 정권 뺏겨 중국에서 명나라가 망하고 청나라가 들어서던 명청 교체기는 일본에 엄청난 기회로 작용했다. 중국 도자기를 사려는 유럽의 돈(銀貨)이 일본으로 향했다. 유럽의 도자기 수입상들은 명청 교체기의 혼란과 청의 폐쇄적 정책으로 중국 도자기 구입이 어려워지자 일본 시장으로 눈을 돌렸다. 일본은 정유재란 후 도자기 강국으로 새로 태어나고 있었다. 기껏 토기류의 도기 제작 수준에 머물러 있던 일본은 당대 최첨단 기술인 세라믹(자기) 제조법을 익혀 중국 도자기의 대체 시장으로 부상했다. 조선 사기장(도공)들이 구워낸 도자기 덕분이었다. 일본은 도자기를 팔아 아시아의 경제대국으로 다시 부상했다. 조선 사기장들을 대거 납치해온 히데요시의 ‘공로’가 제일 컸다. 히데요시는 일찌감치 다도(茶道) 및 다도기(茶陶器)가 당대 최고급 문화이자 고가의 보물이라는 점을 간파하고 있었다. 히데요시는 전국(戰國)시대 최고권력자이자 다인(茶人)이었던 오다 노부나가의 ‘다완 정치’를 그대로 따라 했다. 고가의 다완을 재테크 수단으로 적극 수집하는 한편, 오사카성과 히젠나고야성에 황금다실(黃金茶室)을 차려 놓고 다회(茶會)를 열어 다이묘들에게 다완을 하사하는 식으로 충성을 확인하는 정치를 펼쳤다. 히데요시는 오다 노부나가의 은덕을 기리는 편지에서 “다도는 정치의 도”라는 말까지 남겼다.(熊倉功夫, ‘資料による茶の湯の歷史·上’) 히데요시 주변의 다이묘와 무사들 사이에서 조선 차 사발인 이도다완(고려다완)을 헌상하는 것은 권력자의 환심을 사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 됐다. 이도다완은 일본의 다성(茶聖)으로 추앙받는 센 리큐(千利休·1522∼1591년)가 천하제일로 꼽은 다완이다. 고급 이도다완은 일본성 한 채 값에 비유될 정도로 고가의 보물이었다. 그러니 히데요시가 침략 전쟁을 벌이면서 조선 땅에서 이도다완을 찾느라 혈안이 됐을 텐데, 그 어디에도 이도다완을 획득했다는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찻잔 아래쪽 문양인 매화피(梅花皮)가 특징인 이도다완은 조선에서 특정 시기, 특정 지역에서만 만들어졌다가 사라진 귀한 다완이었다. 조선 어디서나 손쉽게 구할 수 있는 막사발이 아니었던 것이다. 히데요시는 그 대안으로 일본에서 직접 만들기 위해 조선 사기장 납치를 지시했다. 왜장인 히라도(平戶)의 영주 마쓰라 시게노부에게 보낸 슈인조(朱印狀·붉은 도장이 찍힌 명령서)와 ‘히라도 도자기 연혁 일람’의 1598년 기록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시게노부는) 한국에서 7년의 전쟁을 끝내고 웅천(熊川)의 도사(陶師) 거관(巨關) 등 100여 명의 한국인과 같이 돌아왔다. (중략) 그보다 먼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나고야 대본영에 있을 때 시게노부 공에게 명하여 도사를 데려오게 하였다. 시게노부 공은 특히 웅천의 도사 종차관(從次貫)을 나고야 진중에 보냈다. 도요토미는 그곳에 가마를 차려서 다기를 만들게 하였다.”(‘平戶窯沿革一覽’) 당시 전 세계에서 중국과 조선만 보유하고 있던 최첨단 도자기 제작 기술이 히데요시의 이도다완 집착으로 일본에 전해진 것이다. ‘황금 알 낳는 거위’된 조선 사기장 기자는 정유재란기에 일본으로 납치된 조선 도공의 자취를 찾기 위해 일본 도자기의 본향 규슈를 최근 두 차례 방문했다. 먼저 규슈 서북부 사가(佐賀)현의 아리타(有田)를 찾았다. 사가 번주(藩主)인 왜장 나베시마 나오시게가 150여 명의 조선 도공을 붙잡아와 도자기를 만들게 한 곳 중 하나다. 한적한 산간 지역인 아리타 마을은 곳곳에 우뚝 솟아 있는 가마의 굴뚝과 가마에 사용하는 내화 벽돌로 만든 돌담길이 인상적이었다. 아리타의 상징인 도잔(陶山)신사는 일본의 도조(陶祖)로 추앙받고 있는 조선 도공 이삼평(?∼1655년)의 혼을 모신 장소다. 1658년 세워진 신사는 360년의 연륜이 배어 고색창연했다. 이삼평이 이곳에 자리 잡은 데는 이유가 있었다. 나베시마에게 붙잡혀온 이삼평은 도자기를 만드는 데 쓰이는 바탕흙인 태토(胎土)를 구하지 못해 수년간 찾아 헤매다 마침내 1616년 아리타 동부 이즈미야마(泉山)에서 고령토(백토)가 함유된 양질의 자석광을 발견했다. 그는 조선 도공 18명을 데리고 와 이곳에서 ‘덴구다니요(天狗谷窯)’를 열어 일본 최초로 백자를 생산해냈다. 이후 아리타 지역은 일본의 대표적인 도자기 생산지가 됐다. 아리타의 도자기는 나가사키항 데지마의 외국인 거주지에 머물던 유럽인들의 눈에 띄어 70년 동안 약 700만 점이 유럽 등 세계 각지로 팔려나갔고, 일본 자기가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된 결정적 계기가 됐다. 지금도 유럽의 많은 궁전에는 당시 사들인 아리타 도자기가 소장돼 있다. 아리타 사람들은 이삼평을 ‘대은인(大恩人)’이라고 표현한다. 이삼평 덕분에 아리타 사람들이 지금도 도자기를 만들고 있고, 아리타 도자기로 일본이 경제강국으로 성장했으니 그렇게 말할 만도 했다. 주민들은 1916년 도잔신사 뒷산에 ‘도조 이삼평비’라고 새겨진 거대한 돌기둥을 세웠고, 매년 5월 4일 그를 기리는 도조제를 지내고 있다. 이삼평(일본명 가네가에 산페이)의 14대손(56)이 기자에게 건넨 명함에는 이름이 ‘14대 이삼평’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초대 이삼평이 만든 가마는 4대에 이르러 맥이 끊겼고, 5대 이후부터는 남의 가마에서 도자기 지도 교육을 하거나 다른 업에 종사했다. 그러다 그의 부친인 13대가 1971년 ‘이삼평’이라는 이름을 단 가마를 차려 200년 만에 다시 맥을 이었으며, 14대인 그는 부친 밑에서 도자기 제작 수련을 하다가 2005년에 습명(襲名·선대의 이름을 계승)했다고 한다. 14대 이삼평은 “중간에 맥이 끊겨서 일본에서도 ‘이삼평 가마’를 알아보는 사람이 적은 편이다. 그러나 주변에서 ‘이삼평 가마’가 잘돼야 한다고 응원을 많이 해주고 있고 한국에서도 일부러 찾아와 용기를 얻고 있다”고 말했다. 기자는 이어 아리타에서 16km 정도 떨어진 이마리(伊万里) 근교의 오카와치야마 마을을 찾았다. 나베시마 가문이 고급 도자기를 만드는 기술이 외부로 새나가지 않도록 험준한 바위산 속에 가마를 만든 마을인데, ‘신비의 도자기 마을’로 유명한 곳이다. 그러나 한국인에게는 ‘도공무연탑(陶工無緣塔)’과 ‘고려인의 비’로 더 유명하다. 도공무연탑은 주민들이 마을 곳곳에 버려진 사기장들의 무덤에서 880개의 비석을 모아 쌓은 탑이다. 그밖에도 규슈에는 여러 지역에서 활동한 조선 사기장들의 흔적이 남아 있다. 규슈 남쪽 가고시마 현 미야마(美山)에는 전북 남원에서 끌려온 심당길과 박평의 등 조선 사기장의 후예들이 지금도 살고 있다. 사쓰마번주였던 왜장 시마즈 요시히로에게 붙잡혀온 이 지역의 사기장들은 사쓰마야키(薩摩燒)라는 도자기 유파를 열었다. 특히 심당길은 조선식 오름가마를 고집했고, 박평의와 함께 ‘불만 일본 것이고 나머지는 조선의 솜씨’라는 뜻의 ‘히바카리(火計り) 다완’을 만들어냈다. 이 마을 사람들은 메이지시대까지도 한복을 입었고, 한국말을 하였으며, 조선의 서당식 교육을 했다. 뿌리를 잃지 않기 위해 음력 8월 15일이면 옥산궁(玉山宮)이라는 단군 사당에 모여 고국을 향해 제를 지냈다. 이곳의 도예가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심당길의 12대 후손인 심수관(沈壽官)이 1873년 조선식 가마에서 구워낸 도자기(大花甁)를 오스트리아 만국박람회에 출품하면서부터다. 그 후손들은 심수관이라는 이름을 습명해 현재 15대까지 이어지고 있다. 현업에서 은퇴한 14대 심수관(91)은 기자와 만나 “나의 삶은 대를 이어 오면서 벌인 역사와의 고된 싸움”이라고 회고했다. 그들은 왜 ‘도자기 전쟁’이라 부르나? 정유재란 당시 일본은 조선 사기장만 납치해 간 건 아니었다. 히데요시는 당시 파견 부대에 전투 병력 외에 따로 특수 임무를 띤 6개 부를 두어 운영했다. 도서·공예·포로·금속·보물·축부의 6개 약탈 전담부가 그것이다. 도서부는 조선의 전적(典籍)을, 공예부는 각종 공예품과 공장(工匠)을, 포로부는 조선의 젊은 남녀를, 금속부는 병기 및 금속예술품을, 보물부는 금은보화와 진기품을, 축부는 가축 포획을 전담했다.(국사편찬위원회, ‘韓國史·12’) 이로 인해 수많은 한국의 보물급 문화재, 서적과 금속활자 등이 넘어가 일본의 문화를 살찌웠다. 결국 임진·정유 7년 왜란은 조선과 명은 전쟁에서 이겼으나 피해만 컸고, 침략자 일본은 전쟁에서는 졌으나 챙긴 게 적지 않았다. 특히 일본은 도자기 제조 기술을 획득해 다시 나라를 부강케 함으로써 최대의 성과를 거두었다. 일본 측이 이 전쟁을 ‘도자기 전쟁’이라고 하는 데는 결과적으로 그들에게 유익한 전쟁이었음을 주장하려는 의도가 숨어 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야욕으로 시작돼 이순신이라는 영웅의 희생으로 마무리된 정유재란은 동북아 최대의 국제전으로, 한중일 3국 모두의 역사 물줄기를 바꿔놓았다. 하지만 그로부터 7주갑(1甲은 6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전쟁의 최대 피해자였던 조선 백성들의 처참한 삶과 전쟁의 구체적인 갈피들은 잡초에 덮여 있는 남부 지방의 왜성들처럼 사실상 역사에서 잊혀져 왔다. 이제는 망각에서 깨어나야 할 때다.규슈=안영배 전문기자 ojong@donga.com}

    • 2017-12-02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안영배 전문기자의 풍수와 삶]관왕묘의 財神 관우가 유커를 부른다면

    ‘삼국지’에서 촉나라 장수로 등장하는 역사 속 인물인 관우(關羽·?∼220년)는 죽어서 무신(武神)이자 재신(財神)으로 변신했다. 지금은 성제군(聖帝君)급 반열에 올라 중국인들이 가장 숭배하는 신령스러운 신이 됐다. 중국에는 문신(文神)인 공자사당(孔廟)보다 관우사당(關王廟, 關帝廟)이 압도적으로 많이 세워져 있다. 관우 신의 인기몰이는 중국 국내에만 머물지 않는다. 대만, 홍콩을 비롯해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싱가포르 등지의 화교들에게도 ‘상인의 수호신’으로서 숭배 대상이 되고 있다. 중국인과 전 세계 화교들이 운영하는 건물이나 상점 한쪽에서는 붉은 대춧빛 얼굴의 관우 신을 모신 영정이나 신패를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원래 무신인 관우가 재신이 된 이유도 흥미롭다. 상거래에서 필요한 신용과 의리, 불굴의 개척 정신이 관우의 이미지와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관우와 동향인 산시(山西) 출신 진상(晉商)들의 마케팅 전략이 개입돼 있다. 명청(明淸) 시기에 중국 대륙을 누비던 진상들은 주요 활동지에 유럽의 길드 조합과 유사한 회관(會館)을 세운 후 관우 신상을 모시고 축제와 상거래를 여는 등 분위기를 띄웠다. 돈 잘 버는 상인들이 특별히 받드는 신이니 사람들도 선뜻 받아들였다. 우리나라도 관우 신과 인연이 깊다. 16세기 말 정유재란 때 조선에 출병한 명군은 군신(軍神)인 관우를 ‘모시고’ 왔다. 관우 신에게 무운(武運)을 비는 관왕묘(關王廟)를 조성한 것이다. 당시 명나라 장군들은 서울 2곳(동관왕묘, 남관왕묘)과 지방 4곳(강진, 안동, 성주, 남원)에 관왕묘를 지었다. 이후 관우 신앙은 조선 사회에 급속도로 퍼져 나갔다. 한국의 관왕묘는 관우 하면 일단 제의용 향부터 찾는 유커(遊客·중국인 관광객)들에게 훌륭한 관광자원이 될 수 있다. 중국인들이 좋아할 만한 역사 스토리가 담겨 있는 데다, 한국의 독특한 명당 풍수 문화가 덤으로 얹혀 있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곳이 서울 동대문 밖 숭인동의 동관왕묘(동묘)와 전남 완도군의 고금도 충무사(관왕묘)다. 서울의 동관왕묘는 정유재란 직후인 1599년 명나라 황제 만력제가 친필 현판과 함께 건축자금을 지원하고, 조선 백성들이 3년간 피땀을 흘려 1601년에 완성한 한중 합작품이다. 조선의 일을 자기 일처럼 대해 ‘조선천자’라는 별명까지 들었던 만력제에게는 꿈에 관우가 나타나 조선을 도우라는 계시를 받았다는 전설도 따라다닌다. 중국 황제가 관심을 보인 만큼 동관왕묘 터를 잡는 데 신중을 기했다. 조선의 지관 박상의와 중국의 풍수사 섭정국이 나섰다. 박상의는 한양도성의 풍수적 약점을 보완하는 비보책(裨補策)까지 고려해 현재의 터를 지목했다. 천기(天氣) 기운이 왕성해 관우 신의 위격에 어울리는 만큼 섭정국도 동의했다. 이렇게 동관왕묘는 조선과 명의 입장을 함께 고려한 사당이자 기도발도 잘 듣는 명소로 자리 잡았다. 고금도의 관왕묘 스토리 또한 흥미롭다. 이곳은 정유재란 당시인 1598년 중국의 수군 총사령관 진린이 고금도 군영에 머물면서 직접 지은 사당이다. 이순신과 함께 노량해전을 치른 진린은 철군하면서 마을사람들에게 관왕묘 제사를 이어 달라고 부탁했다. 그 약속은 300년 넘게 지켜졌다. 이 터 역시 풍수사의 작품이다. 진린의 처남이자 뛰어난 풍수 실력자인 두사충이 개입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진린 휘하에서 비장(작전참모장)으로 활동한 두사충이 관왕묘 조성에 참여했다는 문헌 근거는 발견되지 않았지만 그가 이시발 등 조선 대신들에게 잡아준 묏자리들과 관왕묘의 지기(地氣) 기운을 비교해보면 같은 사람의 솜씨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지금의 관왕묘에서는 예전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 관우를 중심으로 진린, 등자룡 등의 위패가 놓여 있던 관왕묘는 일제강점기 때 크게 훼손됐다가 광복 이후 재건하면서 이순신을 모신 충무사로 바뀌었다. 현재 완도군은 충무사 바로 맞은편 지점에 관왕묘 복원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올해 말까지 설계 작업을 마치는 대로 본격적인 착공에 들어간다고 한다. 그러나 필자는 원래 터에 복원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본다. 사당 같은 제의 시설은 역사적 의미와 함께 기운이 서린 곳에 지어야 사람들이 즐겨 찾는 명소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마침 서울의 동관왕묘도 대대적인 유적 정비사업을 마친 후 내년 하반기에 재단장한 모습으로 일반에게 공개한다고 한다. 서울과 지방에서 동시에 진행되는 관왕묘 복원 및 재건 사업이 귀환하는 유커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명소로 재탄생하길 기대한다. 안영배 전문기자·풍수학 박사 ojong@donga.com}

    • 2017-11-29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노량 출정식’ 고하던 날… 하늘에서 큰 별이 떨어졌다

    1598년 11월 18일 삼경(三更·밤 11시∼새벽 1시), 이순신은 광양만 바다의 대장선에서 조용히 무릎을 꿇고 앉아 하늘에 빌었다. “오늘 진실로 죽기로 결심했사오니 하늘은 반드시 왜적을 섬멸시켜 주시기를 원하나이다.”(‘연려실기술’) 이순신은 평소 “나는 적이 물러가는 그날에 죽는다면 아무런 유감도 없다”고 말했다.(유형의 ‘行狀’) 바로 그날이 다가왔음을 이순신은 직감했다. 사실이 그랬다. 그해 두 달(9∼10월)에 걸친 왜교성(순천왜성) 전투 후 일본으로 도망치려는 왜군을 섬멸하는 것이 이순신에게 남은 마지막 복수의 기회였다. 조명(朝明) 연합군은 철군 명령을 받은 조선 주둔 왜군들을 응징하기 위해 사로병진(四路竝進·네 개 방면에서 동시 진군) 전략을 펼쳤으나 동로군(東路軍)과 중로군(中路軍)은 모두 실패했다. 마지막 남은 서로군(西路軍·총사령관 유정)과 수로군(水路軍·총사령관 진린)의 왜교성(고니시 유키나가 군) 합동 공략마저 지리멸렬한 상태였다. 이순신 수군의 연전연승에도 불구하고 육지의 명군은 왜군과 철수를 전제로 한 강화협상을 진행했다. 유정은 고니시의 뇌물을 받고 퇴로를 열어주고자 했으나, 바다의 이순신만은 절대로 그럴 수 없다며 해상길을 봉쇄해버렸다. 이에 사천왜성, 남해왜성, 고성왜성 등의 왜군들이 합세해 300여 척의 군선을 거느리고 노량해협에 출현했다.(‘선조실록’) 이순신은 왜교성에 고립된 고니시를 구원하려는 왜군과의 결전을 앞두고 하늘에 출정식을 고한 것이다. 그렇게 이순신이 축원을 마치자마자 문득 큰 별이 바닷속으로 떨어졌다. 이를 본 사람들이 모두 놀라면서 이상하게 여겼다.(‘이충무공신도비명’)조선의 운명을 바꾼 혈투 이순신의 결연한 의지에 감복한 진린은 조명(朝明)수군 합동으로 출전했다. 밤 10시경 이순신과 명군 부장 등자룡이 좌우 선봉을 서고, 진린은 그 뒤를 따랐다. 맞은편으로는 노량해협을 가득 메운 왜선들의 불빛이 긴 뱀처럼 줄지어 서 있었다. 왜군 함대에서 먼저 조총이 불을 뿜었다. 선봉의 조선 군사들이 총에 쓰러지면서 전투는 시작됐다.(‘은봉전서’) “한번 바라 소리가 울리니 포와 북 소리가 겸하여 진동했다. 조선군과 명군이 좌우에서 엄습하니 화살과 돌이 섞여 떨어지고, 불붙은 섶이 마구 날아다녀 허다한 왜선을 태반이나 불태웠다. 적병은 목숨을 걸고 혈전하였으나 형세를 지탱할 수 없어 바로 물러가 관음포로 들어가니 날이 이미 밝았다.”(‘난중잡록’) 조명 연합함대는 처음부터 북서풍을 이용한 신화(薪火)와 화전(火箭)으로 화공(火攻)을 펴면서 격렬한 전투를 벌였다. 광양만의 밤바다는 거센 북서풍을 타고 날아다니는 불꽃으로 벌겋게 물들었다. 경상우수사 이순신(李純信)이 적선 10여 척을 불태우고, 명 장수 계금이 직접 왜군 7명을 참살하는 등 조명연합군이 왜군을 궁지로 몰았다. 이순신과 진린은 등선백병전(登船白兵戰)이 오가는 위급한 상황에서 서로를 구원했다. 진린의 배가 세 겹으로 포위되고 왜군이 배에 올라 칼을 휘두를 때 이순신이 왜군 대장선을 집중 공격함으로써 왜군의 포위를 풀어 진린을 구출했다. 이 와중에 67세의 노구를 이끌고 참전한 등자룡 장군은 배를 빼앗기고 왜군에게 살해됐다. 왜군은 등자룡의 목을 베어 수급까지 챙겨갔다. 한편 이순신의 배가 적을 쫓아 적 함열 깊이 돌진하면서 왜선에게 포위되자 진린의 배가 급히 달려와 대포와 활로 왜선을 물리치기도 했다.(‘이충무공전서’ 부록5 紀實 上) 동이 트기 전, 큰 피해를 입은 왜군 함대는 퇴로를 찾던 중 관음포 내항으로 이동했다. 남해섬을 돌아나가는 외해(外海)로 오인해 들어갔다가 만에 갇힌 상황이 돼버렸다. 독 안에 가둬놓고 섬멸하려는 쪽과 생사를 걸고 빠져나가려는 쪽의 전투는 혈전으로 이어졌다. “이순신이 친히 북채를 잡고 먼저 추격하며 죽이는데, 적의 포병이 배꼬리에 엎드렸다가 이순신을 향해 일제히 쏘았다. 이순신이 총알에 맞고 인사불성이 되었다. 급히 장좌(將佐)에게 명해 방패로 신체를 지탱하게 하고, 그들로 하여금 비밀로 하여 발상(發喪)하지 못하게 했다. 이때 그 아들 이회가 배에 있다가 아버지의 분부에 따라 북을 울리며 기를 휘둘렀다.”(‘난중잡록’) 이순신은 휘하 군관 송희립이 이마에 총탄을 맞아 쓰러졌다는 보고를 받고 크게 놀라 일어서다가 자신도 겨드랑이 밑에 총탄을 맞았던 것이다.(‘은봉전서’) 이순신은 “전투가 한창 급하니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는 유명한 유언을 남기고 운명했다. 죽음 앞에서도 오로지 싸움의 결말을 걱정하는 이순신의 유명을 받은 장자 회와 조카 완 등은 독전기를 휘두르고 북을 울리며 전투를 끝까지 수행했다. 이순신이 죽음으로 바꾼 전투의 결과는 찬란했다. 11월 19일 정오경, 왜군은 참패했다. 명군의 보고에 의하면 왜군 전선 100여 척을 포획하고 200여 척을 불살랐으며, 500여 급을 참수했고, 180여 명을 생포했다. 물에 빠져 죽은 자는 아직 떠오르지 않아 그 수를 알 수 없었다.(‘선조실록’) 사천왜성에서 대승을 거두었던 시마즈 요시히로는 자신이 타고 있던 어립선(御立船)이 파손돼 겨우 다른 왜선에 구출됐다.(‘정한록’) 탈출에 성공한 왜선은 겨우 50여 척에 불과했다. 관음포 앞바다는 왜군의 시체, 부서진 배의 나무판자, 무기나 의복 등이 온통 수면을 뒤덮었고 바닷물은 붉었다.(‘선조실록’) 전투가 마무리되자 “통제공은 어서 나오시오”하며 진린이 소리쳤다. 승리의 기쁨을 함께 나누려던 진린은 그러나 이순신의 전사 소식을 듣고 배 위에서 세 번이나 넘어지고 뒹굴며 큰 소리로 통곡했다.(‘이충무공신도비명’) 이순신의 주검 앞에서 조선군과 명군의 뱃전에서 흘러나오는 통곡 소리는 바다를 진동시켰다. 곧 이순신의 전사 소식은 육지로 퍼져나갔다. 남도의 백성들은 먼 길을 내달려 쫓아와 골목을 메우고 통곡하였고, 시장을 보던 사람들은 술자리를 파하였다. 이순신의 상여가 돌아오자 남도의 선비들은 글을 지어 제사를 지냈으며, 노인과 어린이들도 길을 막고 곡하기를 그치지 않았다.(‘연려실기술’) 이순신의 전공을 깎아내리기에 급급했던 선조도 “해상에서의 승리는 왜적의 간담을 서늘케 하기에 충분하였으니 이는 조금 위안도 되고 분도 풀린다”고 좋아했다. 기자는 이순신이 순국한 남해군 관음포의 첨망대에 올랐다. 노량해전의 바다가 한눈에 들어왔다. 인근의 순천시, 광양시, 여수시가 빙 둘러싸고 있는 광양만 해역이다. 왜교성은 서쪽 바닷길로 불과 20여 km 떨어져 있다. 노량해전은 왜교성 전투와 바로 이어지는 싸움이었다. 왜교성 앞바다에서 시작해 노량해협의 전투로 마무리되는 ‘광양만 해전’이 두 달여에 걸쳐 벌어졌던 것이다. 그런 시각으로 볼 때, 노량의 승리는 정유재란을 조선이 이긴 전쟁으로 결말짓게 해 준 전투였다. 일본이 정유재란에서 ‘유일하게’ 패배를 인정한 전투 또한 바로 노량의 전투다. 이순신이 죽음 앞에서도 전쟁 결과에 무섭게 집착한 것도 이 전쟁을 승리로 마무리 짓겠다는 책무감 때문이었을 것이다.관왕묘, 韓中을 잇는 420년 인연 노량해협에서 전사한 이순신의 시신은 관음포구 이락사에 잠시 안치됐다가 며칠 후 고금도 월송대로 모셔졌다. 이순신의 시신이 안치된 월송대 터는 아직도 풀이 자라지 않는다는 주민들의 말을 듣고 보니 마치 이순신의 한이 어려 있는 듯했다. 월송대 아래쪽에는 이순신 영정을 모신 고금도충무사(사적 114호)가 있다. 사당 왼쪽의 관왕묘 비가 눈길을 끌었다. 조선수군과 합류하러 고금도로 온 명의 도독 진린과 유격 계금이 이 자리에 관왕묘(關王廟)를 건립했는데, 뒷날 이 자리에 충무사를 지으면서 관왕묘 묘비(廟碑)만 남겨둔 것이다. 사실 지금의 충무사는 정유재란 시절 명 수군이 주둔하던 군영이었고, 이순신의 수군은 그 건너편 덕동마을에 진을 치고 있었다. 관왕묘는 중국인들이 군신(軍神)으로 추앙하는 관우를 받들어 왜군들과 싸우는 명군들의 사기를 북돋우기 위해 조성한 사당이다. 명군 장수들과 병사들은 출전 전 관우의 영험을 받아 승리하기를 기원했다. 정유재란이 끝난 후 관왕묘는 가운데 군신 관왕을 모신 정전을 중심으로 동무(東廡)에는 진린과 등자룡을, 서무(西廡)에는 이순신을 배향해 국가 차원에서 제사를 지냈다. 관왕묘는 일제강점기 때 항왜(降倭) 유적이라는 이유로 파손됐다가 광복 후인 1959년 충무사라는 이름으로 재탄생했다. 새로 충무사로 재건하면서 정전에 이순신 초상, 동무에는 노량해전에서 전사한 이영남 장군을 배치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 완도군에서는 고금도 관왕묘 복원사업을 진행 중이다. 관왕묘는 조선의 이순신과 명의 진린이 무장(武將)으로서 생사를 초월한 인연을 맺었던 곳임을 추념하는 의미가 있다. 한중 간 문화 교류의 장소가 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2014년 방한 당시 서울대 특강에서 “명나라 등자룡 장군과 이순신 장군이 노량해전에서 함께 전사했고, 명나라 장군 진린의 후손(광둥 진씨)은 오늘까지도 한국에서 살고 있다”면서 정유재란 당시의 한중 역사를 거론해 주목을 끌었다.정유재란은 이순신의 전쟁 2년간에 걸친 정유재란은 1598년 11월 말까지 조선 주둔 왜군이 전원 일본으로 철수함으로써 끝이 났다. 왜교성의 고니시는 노량해전이 한창인 틈을 타 묘도 서쪽 수로를 통과해 멀리 남해섬 남쪽을 돌아 부산으로 도주했다. 왜군이 떠난 빈 성들을 점령한 명군들은 자신들의 힘으로 승리했다고 떠벌렸다. 그러나 이순신을 뺀 정유재란의 승리는 성립되지 않는다. 이순신을 바로 옆에서 지켜본 진린은 선조에게 “이순신은 경천위지(經天緯地)의 재주가 있고, 보천욕일(補天浴日·찢어진 하늘을 꿰매고 흐린 태양을 목욕시킴)의 공로가 있는 사람입니다”하고 격찬했다. 또 그 사실을 명나라 신종 황제에게도 보고해 이순신에게 도독(都督)의 인수(印綬)를 내리게 했다.(‘이충무공신도비명’) 이순신을 적으로 만난 일본조차도 임진·정유 7년전쟁을 ‘이순신의 전쟁’이라고 평가할 정도다. “일본 수군의 장수들은 이순신이 살아 있을 때 기를 펴지 못했다. 그는 실로 조선의 영웅일 뿐만 아니라 동양 3국을 통틀어 최고의 영웅이었다.”(도쿠토미 소호, ‘近世日本國民史’) 올 4월 서울에서 열린 국제학술세미나 ‘세계 속의 이순신’에서 이언 바우어스 노르웨이 국방연구소 교수는 영국 군사학자 밸러드의 저서 등을 인용해 “영국인들은 넬슨의 업적을 다른 인물과 비교하는 것을 꺼리지만, 해전에서 패한 적이 없고 적의 흉탄에 맞아 전사한 이순신은 넬슨과 비교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 세미나에 참석한 이노우에 야스시 일본 방위대 교수는 “1904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의 도고 헤이하치로 제독은 자신의 승리가 ‘넬슨한테는 비교될 수 있어도 이순신한테는 비교될 수 없다’고 말했다”라며 이순신을 넬슨보다 한 수 위로 쳤다. 전 세계적으로 격찬 받는 성웅 이순신은 419년 전 노량의 겨울바다에서 세상을 떠났지만 조선을 완전히 떠나지는 않았던 듯하다. 젊은 시절부터 이순신을 보필했던 승려 옥형(玉泂)은 80여 세의 노구에도 불구하고 충민사에 머물면서 이순신을 위한 제사를 지내왔는데, “해상에 만일 경보(警報)가 있으면 통제공께서 반드시 먼저 꿈에 나타나 기미를 보인다”고 말했다.(이수광의 ‘승평지·상’)남해도·고금도=안영배 전문기자 ojong@donga.com}

    • 2017-11-25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왜교성을 점령하라” 韓中日 육군-수군 장군들의 대혈투

    정유재란 발발 이듬해인 1598년 9월 하순, 16세기 동아시아 최대 규모의 수륙병진(水陸竝進) 전투가 호남 남부 연안에서 시작됐다. 조명(朝明) 연합 육군과 수군이 7년 전쟁(임진왜란+정유재란) 발발 이후 최초로 육지와 바다에서 펼친 협공 작전이자, 전쟁의 종지부를 찍기 위한 최후의 국제전이었다. 공격 대상은 전남 순천의 왜교성(순천왜성). 왜군의 호남 최대 거점지인 이 성은 가토 기요마사와 함께 조선침략 선봉을 다투던 고니시 유키나가의 근거지였다. 고니시는 1597년 9월 순천에 도착한 이후 근 1년간 왜교성에만 머물며 호남을 사실상 통치하는 정책을 펼치고 있었다. 전라도 연해 지역의 조선인들에게 민패를 발급하고 세금을 거두는 등 전라좌도의 왕 노릇을 했다. 왜교성에는 ‘왜병이 수만 명이라고 하지만 포로가 된 우리나라 사람이 반이 넘는다’(‘연려실기술’)고 할 정도로 조선인들도 많이 살고 있었다. 1만5000명의 왜군과 500척의 전선이 배치된 왜교성은 천혜의 요새였다. 성은 산줄기가 길게 바다로 뻗어 나와 마치 호랑이가 엎드려 있는 듯한 지형에 세워져 있었다. 주위 3면이 바다에 접해 있고, 나머지 1면만 육지로 이어졌다. 육로는 바닷물을 끌어들여 깊이 파놓은 해자에다 땅마저 질퍽질퍽해 외부에서 진입하기가 어려웠다. 돌로 된 내성(內城)의 성곽은 다섯 겹으로 쌓여 있었고, 그 바깥으로 한 겹의 외성(外城)이 호위하고 있으며, 또 외성 주변엔 목책이 이중삼중으로 설치돼 있었다.(‘선조실록’·‘예교진병일록’) 왜교성 함락을 위해 조선과 명나라의 최고 장군들이 총출동했다. 명의 서로군(西路軍) 제독 유정과 조선군 도원수 권율이 이끄는 연합육군 3만6000명, 명의 수군 도독 진린과 통제사 이순신이 이끄는 연합수군 1만5000명이 투입됐다. 이덕형, 김수 등 조선의 대신들도 사후사(伺候使), 접반사(接伴使) 자격으로 전투를 참관했다.明 장군의 시샘으로 독안의 쥐를 놓치다 9월 20일 먼저 이순신의 조선 수군이 명 수군과 함께 일찌감치 고금도 통제영을 출발해(9월 15일) 왜교성 앞바다에 도착했다. 이순신의 응징 대상인 고니시는 반간계와 역정보로 조선을 분탕질했던 장본인. 이순신의 투옥과 칠천량에서의 조선 수군 전멸이라는 치욕도 고니시의 간계에 조선 조정이 넘어간 성격이 컸다. 이순신이 재건한 조선수군의 사기는 그 어느 때보다 높았다. 수십 척의 판옥선 함대에 배치된 현자총통과 지자총통이 일제히 불을 뿜었다. 포탄이 왜교성의 해상 경계초소이자 병참기지인 장도(獐島)를 불바다로 만들었다. 조선수군은 장도로 상륙해 군량 300여 섬과 우마(牛馬) 등을 빼앗고, 조선인 포로 300명도 구출했다. 왜교성에서 바다로 불과 2.5km 떨어진 거리의 장도가 연합군의 수중에 떨어짐으로써 고니시군이 배를 이용해 바다로 탈출할 수 있는 퇴로는 끊기다시피 했다. 수군은 인근의 삼일포, 묘도 등 왜군의 소굴까지 모조리 초토화시켰다.(진경문의 ‘예교진병일록’) 육군도 성과를 다소 거뒀다. 명군 총사령관 유정은 이날 강화회담을 미끼로 고니시를 꾀어내 생포하려다가 실패했다. 하지만 달아나는 왜군을 추격해 육박전을 벌인 끝에 수급 98급을 획득하고 왜교성을 완전 포위했다. 왜군은 연합군의 기세에 놀라 성안에 웅크린 채 농성전에 들어갔다. 이순신은 일기에 “수군과 육군이 모두 협공하니 왜적의 기세가 크게 꺾이고 두려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난중일기’)고 기록했다. 왜교성에서 서쪽으로 3km 떨어진 검단산성에 지휘소를 차린 유정은 운제거(雲梯車), 비루(飛樓), 포차(砲車) 등 공성(攻城) 무기를 준비했다. 그 사이 해상에서는 총포와 함성 소리가 연일 바다를 진동시켰다. 선봉에 나선 조선수군은 왜교성의 전투를 살피러온 남해왜성(고니시의 사위인 소 요시토시 주둔)의 왜군 정탐선을 추격해 달아난 배를 접수하는 등 전과를 올렸다. 마침내 10월 2일 조명 연합 육군과 수군이 동시에 총공격을 하기로 했다. 치열한 싸움이 전개되고 쌍방간 적지 않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그런데 육군 총사령관인 유정은 전투를 독전하지 않고, 철수 명령도 내리지 않는 등 어정쩡한 태도를 보였다. 마치 전의를 상실한 채 상황을 방관하는 듯했다. 전투는 이튿날인 10월 3일에도 이어졌다. 연합군은 밀서를 교환해 만조기의 야밤을 이용해 바다와 육지에서 왜교성을 다시 동시 기습하기로 했다. 왜교성은 광양만 대해와 바로 접한 곳으로 만조 때는 바닷물이 성 앞으로 수심 3m까지 올라와 큰 배도 들어올 수 있고, 간조 때가 되면 성에서 100m 이상 바닷물이 빠져서 걸어다닐 수 있을 정도로 조수간만의 차가 심한 지역이었다. 밀물 때를 이용해 왜교성 앞까지 바짝 진격한 연합수군이 편전 등을 쏘면서 급습하니 놀란 왜군들은 큰 피해를 보았다. 조선수군이 대총(大銃)으로 고니시가 있는 천수각까지 맞히자 왜군들이 당황해 모두 서쪽에서 동쪽으로 달아났다. 이때 포로로 잡혀있던 조선인 여인이 성 위에 올라와 “지금 왜적이 모두 도망갔으니 명군은 속히 돌진해 오시오” 하고 소리쳤다. 성의 서쪽이 비었으므로 육지의 육군이 일시에 공격하면 성을 함락시킬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예교진병일록’) 그러나 이때도 유정은 이상한 태도를 취했다. 보다 못해 조선 호조판서 김수가 유정을 찾아가 문을 열고 싸우자고 하소연했지만, 유정은 큰 북을 치며 소리만 낼 뿐 군대를 움직이지 않았다. 유정은 오히려 화까지 냈다. 유정의 넋이 나간 듯한 대응으로 결국 연합수군마저 적잖은 피해를 보았다. 명의 함대인 사선(沙船) 19척과 호선(호船) 20척이 조수가 빠지는 것을 놓쳐 그만 갯벌에 얹혀버렸고, 많은 군사가 죽거나 붙잡혔다.(‘난중일기’) 이틀 연속 유정의 태도는 참으로 이해할 수 없었다. 전투를 지켜본 우의정 이덕형은 휘하 장수와 군졸로부터도 업신여김을 받은 유정의 행동을 진린에 대한 시기와 견제로 해석했다. “제독(유정)이 수군(진린)과 사이가 좋지 않은 것은 당초부터 공(功)을 서로 다투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지만 끝내 일처리가 잘못되고 말았으니 더욱 통곡을 금할 수 없다.”(‘선조실록’) 게다가 명군 내부의 지역감정도 작용했다. 유정의 사천성 군사들과 진린의 절강성 군사들은 반목과 질시가 심했다. 10월 3일 전투에서 수군을 잃은 진린은 분노했다. 이튿날인 4일 진린은 이순신과 함께 해상에서 왜교성을 공격했으나, 왜군도 필사적으로 대포로 응전해 할 수 없이 철수했다. 진린은 유정의 막사를 찾아가 수자기(帥字旗)를 찢으면서 전투 회피 책임을 상부에 보고하겠다고 격노했다. 얼굴이 흙빛이 된 유정은 눈물을 흘리면서 변명으로 일관할 뿐이었다.(‘연려실기술’) 5일에도 이덕형과 권율이 싸우기를 눈물로 호소했으나 유정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중로군(中路軍)이 참전한 사천왜성에서마저 연합군이 패전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유정은 겁을 먹고 10월 7일 밤 철수해버렸다. 이순신은 “유정이 후퇴하여 달아나려고 한다”는 권율의 편지를 받고는 분노와 통탄을 금치 못했다.(‘난중일기’) 이순신과 진린은 육지의 명군이 퇴각하는 10월 7일에도, 또 그 다음 날인 8일에도 수군 단독으로 왜교성을 계속 공격했다. 그러나 육군의 공격을 더 이상 받지 않는 상태에서 고니시 군의 저항은 격렬했다. 결국 수군은 10월 9일 왜교성 앞바다에서 물러나 고흥 나로도에서 진을 쳤다. 보고를 받은 선조도 “호남의 일은 유 제독에게 배신당한 것 같다”(‘선조실록’)고 불쾌한 심정을 밝혔다. 고니시의 뇌물 공세, 이순신의 격노 그러나 왜교성 전투의 불씨가 완전히 꺼진 것은 아니었다. 남원에 있던 명군 감찰 왕사기가 유정의 회군을 듣고 화를 냈다. 유정은 어쩔 수 없이 11월 1일 재진군했다. 조명 연합수군도 11일 왜교성 앞바다로 재진격했다. 묘도와 장도를 지키려는 왜선 20여 척을 차례로 격파한 연합수군은 다시 바다를 장악했다. 육지의 유정은 이번에도 좀체 왜교성을 공격할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책략에 능한 고니시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고니시는 왜교성 전투 직후 일본 본토에서 온 관리들로부터 관백(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사망 사실을 공식 통보받고 조선 철수 명령을 받은 터였다. 조선침략을 지시한 히데요시의 사망(1598년 8월 18일)으로 전쟁을 치를 이유가 없어졌지만, 고니시는 무작정 철수를 거부했다. “철수에는 화평이 성립되어야 하며, 화평 없이 철수한다면 적에게 반격을 당하여 고전이 예상된다. 지금은 일본 측의 전황이 유리하므로 적군이 새롭게 군사행동을 취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이럴 때야말로 화평을 성사시켜야 한다.…일본의 명예를 위해서도 여러 성은 남겨두어야 한다.”(고니시 유키나가의 1598년 10월 10일 書狀, 일본 오사카성 천수각 소장) 고니시는 유정의 육군을 경험해본 결과 전황이 자신에게 유리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협상을 하는 한편으로, 기회를 보아 인근의 왜군과 연대해 조명 연합군을 초토화시키려는 게 그의 속내였다. 고니시는 천금(千金)을 제시하면서 밀정을 모집해 인근 사천왜성과 남해왜성으로 왜교성의 상황을 알리게 한 후, 횃불 연락망을 구축했다. 한편으로 고니시는 순천에 도착한 유정에게 사람을 보내 뇌물 공세를 폈다. 유정은 고니시의 화평과 휴전 제의에 선뜻 동의했다. 고니시는 유정에게 왜교성과 전공의 증표인 수급(首級) 및 각종 도구류를 넘겨주겠다고 약속했다. 이에 유정은 명군 30여 명을 약속 보증용 인질로 고니시에게 보냈다. 고니시는 진린도 따로 회유했다. 진린은 뱃길 퇴로를 터달라는 요청을 처음에는 거절했지만 수차례에 걸친 뇌물 공세에 넘어가 이순신에게도 고니시의 퇴로를 열어주라고 했다. 그러나 이순신은 단호히 거절했다. 조선 수군의 전공을 진린의 공으로 기꺼이 돌려줬던 이순신이지만 왜군을 도와주려는 진린의 행동은 용납할 수 없었다. “대장이란 화친을 말해서는 안 되는 법이고, 원수인 왜적을 놓아 보낼 수는 없다.”(‘통제사이충무공신도비명’) 이순신의 단호한 말에 진린은 매우 부끄러워했다. 같은 무장(武將)으로서 이순신에게 깊은 감명을 받았다. 느슨해졌던 조명 연합 수군은 다시 단단히 조여졌고 해상 봉쇄는 해제되지 않았다. 왜교성 마을에 출몰한 왜귀(倭鬼) 기자는 15일 왜교성(순천시 해룡면 신성리)에 올라 419년 전 이맘때 치러진 왜교성 전투 상황을 눈에 그려봤다. 왜교성 천수각에서 동남방에 자리한 장도는 육지의 작은 동산처럼 보였다. 왜교성과 장도 사이의 바닷물은 메워져 대규모 산업단지로 변했고, 이순신의 전투 지휘소였던 장도는 토석채취장으로 제공돼 섬의 절반이 파헤쳐졌다. 왜교성 아래로 바닷물이 들어오는 수로 정도가 이 지역이 3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곳이었음을 짐작케 할 뿐이었다. 왜교성에서 북쪽으로 1km 거리에는 충무사라는 사당이 있다. 기자는 이 마을(신성리) 출신의 김병연 전 대사(임진정유역사재단 추진위원회 위원장)에게서 조상 대대로 이 마을에 전해져 내려온 기이한 이야기를 전해 듣고 충무사를 찾았다. 정유재란이 끝난 지 거의 100년 뒤 이곳에 이주해온 주민들은 밤마다 말발굽 소리와 병사들의 함성이 들리고, 심지어 왜교성 전투에서 죽은 왜귀(倭鬼)들이 출몰하는 바람에 몹시 불안에 떨었다고 한다. 견디다 못한 주민들이 이순신 장군의 위패와 영정을 모신 사당을 1697년 짓고 제사를 지냈더니 왜귀들의 출현과 소리가 없어졌다는 것이다. 이러한 전설을 간직한 충무사는 1944년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들에 의해 불태워졌다. 광복 후 지역 유지들이 십시일반으로 성금을 모아 1947년 현 위치에 새로 건립했다. 충무사 관리사무실 뒤쪽 마당에는 ‘소서행장지성지(小西行長之城址)’라고 새긴 비석도 있다. 높이가 1m 남짓한 이 비석은 일제강점기 때 조선군 사령관이던 하야시 센주로(林銑十郞·제33대 일본 총리)가 고니시의 왜교성 주둔을 기념해 천수각에 세웠던 것이다. 광복 후 마을 주민들이 이 비석을 부러뜨렸는데 해룡면사무소가 역사보존 차원에서 보관해오다가 지금의 자리로 옮겨온 것이다. 왜교성 앞바다를 지키던 이순신은 수군에 대한 유정의 질시와 비협조로 고니시와의 못다 끝낸 싸움을 하기 위해 20여 km 떨어진 관음포 해역으로 마지막 여정을 떠난다. 왜교성 함락이 순리대로 이뤄졌다면 불과 며칠 후 관음포에서의 노량해전(11월 19일)은 불필요했을 테고, 이순신의 전사(戰死)도 없었을 텐데라는 안타까움을 떨칠 수가 없었다. 순천=안영배 전문기자 ojong@donga.com}

    • 2017-11-18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1년만에 확 바뀐 조선수군, 절이도 해전서 왜군에 본때

    정유재란 발발 이듬해인 1598년 여름, 남해 바다는 폭염과 함께 전쟁 열기가 다시 뜨겁게 달아올랐다. 7월 18일 왜군 군선 100여 척이 전남 고흥의 녹도(鹿島·녹동)로 침범해 왔다. 10개월여 전 명량해전에서 참패한 이후 남해안 곳곳에 축조한 왜성들에 칩거하며 민간인 약탈과 산발적인 도발로 시간을 끌어오던 왜군이 다시 대규모 침공에 나선 것이다. 녹도는 이순신의 수군 통제영이 설치된 고금도(완도군)와는 불과 30km 남짓 떨어진 지점. 이순신을 견제하려는 왜군의 의도적인 행동임이 분명했다. 통제사 이순신과 명군 도독 진린은 즉시 휘하 전선을 이끌고 녹도에서 10여 km 떨어진 금당도(고흥군 금일면)로 나아갔다. 임진·정유 7년 전쟁 중 처음으로 이뤄진 조명(朝明) 연합수군 작전이었다. 척후선으로 보이는 왜선 2척이 금당도의 연합함대를 보더니 급히 도주했다. 이순신은 밤이 깊어지자 녹도만호 송여종에게 전선 8척을 주어 절이도(고흥군 금산면 거금도) 북서단 해역으로 나아가 매복하라고 지시한 후 금당도에서 밤을 새웠다. 절이도는 왜군에게 침범당한 녹도와 조명 연합수군이 머물고 있는 금당도 사이에 있는 섬이다. 한밤중 바람결에 삐걱삐걱 하는 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이튿날인 7월 19일 동틀 무렵 왜선 100여 척이 절이도 해상에 나타났다. 이순신은 직접 전투에 나섰다. 진린에게는 높은 데 올라가 전투를 지켜보게 하고, 자신은 판옥선을 거느리고 적진을 뚫고 나아갔다. “한 번 바라 소리가 나자 고함치는 소리가 하늘을 덮었다. 화살과 돌이 섞여 떨어지고 화포가 함께 발사됐다. 적선 50여 척을 잇달아 불태우고, 왜군 100여 명의 머리를 베었다. 적이 본진으로 도망쳐 돌아갔다. 진린이 크게 기뻐하며 ‘가히 왕의 병한(屛翰·임금을 호위하는 울타리)이라 이를 만하다. 옛 명장이라도 어찌 이보다 더하겠는가’하고 칭찬했다”(‘난중잡록’) 왜군의 시체가 절이도 바다에 가득해 조선수군이 다 챙기기 어려울 정도였다. ‘선조실록’의 이순신 장계와 ‘선조수정실록’의 기록에 의하면 조선 수군은 왜선 50여 척을 불태우고 왜군 수급 71급을 챙겼다. 왜선을 격파한 전과로 평가하자면 한산도해전(59척 분멸)보다는 작지만 명량해전(31척 분멸)보다는 큰 대승이었다. 이처럼 ‘절이도 해전’은 조명 연합수군이 참여한 첫 전투이자 완승을 거둔 전투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절이도 해전은 한중 양국의 역사에서 잘 드러나지 않은 채 ‘잊혀진 전투’로 남아 있다. 이순신의 자립 경영술 절이도 해전은 이순신에게 남다른 의미가 있었다. 조선수군 재건 과업이 완벽하게 성공했음을 보여주는 첫 성과였다. 1598년 7월의 조선수군은 정확히 1년 전인 1597년 7월 칠천량해전의 조선수군과는 달라도 한참 달랐다. 1년 전 수군 총사령관 원균은 거제도 칠천량 바다에서 150여 척의 판옥선과 1만3000여 명의 조선 수군을 잃어버렸다. 당시 조선 수군은 오합지졸이라고 할 정도로 어이없는 패배를 했다. 이후 이순신은 칠천량에서 살아남은 12척의 판옥선만으로 명량해전을 비롯해 치열한 전투를 치렀고, 왜군과 쫓고 쫓기는 숨바꼭질을 벌이면서 수군 재건에 절치부심했다. 그 결과 조선 수군은 단 1년 만에 판옥선 60∼70척, 병력 7300여 명의 강군으로 성장했다. 이는 이순신의 지도력 덕분이었다. 목포 고하도와 완도 고금도의 수군 진영에서 발휘한 그의 리더십과 경영술은 후세의 경영전략가들도 모범 사례로 꼽을 정도다. 명량해전 승전 직후 서해로 이동했던 이순신은 다시 남하해 108일간(1597년 10월 29일∼1598년 2월 16일) 목포 고하도에서 겨울을 보냈다. 당시 보화도로 불렸던 고하도는 서북쪽이 병풍처럼 높이 솟아 있어서 겨울 북서풍을 막아주고 배를 감추기에 적합한 지형이었다.(‘난중일기’) 이순신은 이곳에서 수군 기지를 건설하는 대역사를 시작했다. 새벽 일찍 일어나 밤늦게까지 새 통제영 건설과 전선(戰船) 건조 작업을 감독했다. 이순신의 현실적 경영능력은 이 기간에 빛을 발했다. 당시 군량미 확보 및 전선 건조, 군수물자 확보 등을 위한 전비(戰費)가 무엇보다도 절실했다. 조선 조정으로부터는 아무것도 지원받을 수 없었던 상황이었다. 이순신은 이의온 등 참모들과 궁리한 끝에 ‘해로통행첩’을 발행하기로 했다. 3도(전라·경상·충청) 연안을 통행하는 모든 배는 통행첩이 없을 경우 간첩선으로 간주해 이동을 금지하되, 통행첩을 소지한 배는 통행과 안전을 보장해준다는 조치였다. “이순신은 배의 크기에 따라 쌀을 받고 통행첩을 발급해 주었다. 큰 배는 3섬, 중간 배는 2섬, 작은 배는 1섬을 받았다. 당시 피란선들은 모두 재물과 양식을 싣고 다녔기 때문에 그 정도 쌀을 바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오히려 안전하게 다닐 수 있음을 기쁘게 생각했다. 이순신은 불과 10여 일만에 1만여 섬의 군량을 확보할 수 있었다.”(유성룡의 ‘징비록’) 당시 이순신의 수군을 졸졸 따라다니며 안전을 보장받고 있던 수백 척 규모의 피란선들은 기꺼이 이순신을 도왔다. 이순신은 또 당시 비싼 값에 거래되던 소금 장사에 뛰어들었다. 이순신은 고하도에 오기 전 잠시 머물던 신안의 안편도(팔금도)에서 염전을 개발해 군량미에 보태 썼다. 이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서해의 13개 섬에서 염전을 개발하고 감독관을 파견하는 등 소금 사업을 직접 관리했다. 이순신은 이렇게 확보한 돈으로 당시 1000여 명에 달한 군사들의 식량을 마련하고, 40척의 전선을 새로 확보할 수 있었다. 이순신이 고하도에 주둔한 108일간 조선 수군의 군세는 날로 커져갔다. 해가 바뀌어 봄으로 접어든 1598년 2월 17일, 이순신은 완도의 고금도로 통제영을 옮겼다. 고금도는 여건이 한산도보다 더 좋았다. 농지도 넉넉하고 농사를 지을 수 있는 주민도 1500여 호나 되어 둔전(屯田)이 가능했다. 이순신이 둔전을 실시한다는 소문이 나자 많은 피란민이 속속 고하도로 모여들었다. 이로써 식량을 자체 조달하는 체제를 갖추었다. 조정 대신 이덕형은 선조에게 올리는 장계에서 이렇게 전했다. “신이 본도(전라도)에 들어가 해안가 백성들의 말을 들어보니, 모두가 그(이순신)를 칭찬하며 한없이 아끼고 추대했습니다. 또 듣건대 그가 금년 4월에 고금도로 들어갔는데 모든 조치를 매우 잘해, 겨우 3, 4개월이 지났는데도 민가와 군량의 수효가 지난해 한산도에 있을 때보다 더 많았다고 합니다.”(‘선조실록’) 당시 고금도는 7년 전쟁으로 온 국토가 황폐화된 상황에서 예외적인 ‘낙원’으로 변해 있었다. 먼 곳에 있던 사람들까지 고금도로 찾아와 집을 지어 살거나 막사를 만들어 장사를 했다. 이들을 수용하기에는 섬이 모자랄 지경이었다.(‘징비록’) 또 고금도의 웅장한 군영은 한산도에 있을 때보다 몇 배나 더했다.(이충무공전서의 ‘선묘중흥지’) 명군의 戰功 가로채기 이순신이 고금도에 통제영을 차린 데는 숨은 뜻도 있었다. 수로로 120여 km 떨어진 순천 왜교성의 왜군을 겨냥한 조치였다. 당시 호남 지역의 왜군은 순천 왜교성의 지휘자인 고니시 유키나가를 중심으로 낙안, 순천 방면에 집결해 있었다. 이순신은 고금도에서 지긋지긋한 전쟁을 완전히 끝내기로 결심했다. 바로 그런 즈음에 명나라 수군까지 합세했다. 진린은 1598년 7월 16일 수군 5000명을 이끌고 고금도에 도착했다. 그 이틀 후, 때마침 왜군 쪽에서 먼저 도발해와 절이도 해전을 치렀던 것이다. 그러나 사실 절이도 해전에서 명군은 별 역할을 하지 못했다. 이순신은 선조에게 이렇게 보고했다. “명의 군대는 멀리서 적선을 바라보고는 먼바다로 피해 들어가 하나도 (왜군의 수급을) 포획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우리 군사들이 참획한 수를 보고는 진도독(진린)이 뱃전에 서서 발을 동동 구르면서 그 관하(管下)를 꾸짖어 물리쳤습니다. 신 등에게도 공갈 협박을 가하여 못하는 짓이 없었습니다. 신 등이 마지못해 40여 급을 나눠 보내줬습니다. 계유격(명군 유격장 계금)도 가정(家丁)을 보내 수급을 구하기에 신이 5급을 보냈습니다.”(‘선조실록’) 진린은 조선 수군의 군공(軍功)을 자신의 전과로 가로챘다. 또 이를 위해 이순신에게 거짓 장계까지 꾸미도록 강요했다. 이순신은 진린이 원하는 대로 조선 수군이 26급을 벤 것처럼 가짜 장계를 작성해 보고했다. 상벌에 관한 한 엄격한 원칙주의자인 이순신이었지만 명군과 연합전선을 유지하기 위해서 자신의 원칙을 양보해야했던 것이다. 그런데 명군 감찰을 맡은 참정(參政) 왕사기가 남쪽에 내려와 군공 가로채기 소문을 들었다. 그는 조선 조정에 이순신이 작성한 진짜 장계를 보내라고 요구했다. 조선 조정은 고민에 빠졌다. 이순신이 나중에 따로 사실대로 기록한 장계를 보내면, 진린은 명의 황제를 속인 큰 죄를 지어 무사하지 못하게 된다. 이는 조명 연합수군 전력에도 큰 차질을 빚는 결과로 나타날 수밖에 없었다. 할 수 없이 조선 조정은 가짜 장계를 진짜라고 하며 보내 유야무야 처리했다.(‘선조실록’) 바로 이런 배경 때문에 조선 측은 절이도 해전을 드러내놓고 자랑하지 못했다. 사료마다 절이도 해전 날짜가 일치하지 않고 해전 성과도 차이가 나는 것은 이런 사정과 무관치 않다. ‘당나라 군대’의 행패와 약탈 명 장군 휘하 병사들의 행패도 극심했다. 영의정 유성룡은 진린 부하들의 행패를 직접 목격했다. “진린의 군사가 고을 수령을 함부로 때리고 욕하며, 찰방(察訪·사신 접대 등을 담당하는 지방관) 이상규의 목을 새끼줄로 매어 끌고 다니며 피투성이를 만드는 모습을 본 나는 통역관에게 그를 풀어주도록 했다. 그러나 그들은 내 말도 듣지 않았다. 나는 여러 대신들에게 ‘안타깝게도 이순신이 패할 것 같소이다. 진린은 장수의 권한도 인정해주지 않을 것이고, 군사들 또한 제 마음대로 다룰 것이니 어찌 이기기를 바라겠소’하고 말했다.”(‘징비록’) 명군은 전쟁기간 내내 천자국에서 제후국을 구원하러 왔다는 우월감으로 조선군을 깔보고 함부로 대해왔다. 명군 장수들은 조선의 임금도 면전에서 무시하는 행동을 서슴지 않았다. 그러니 조선의 신하들을 마치 하인 부리듯 대했다. 명군이 조선군보다 전투를 잘한 것도 아니었다. 흔히 공격을 제대로 해보지도 못하고 패배만 하는 군대, 군기가 빠져 군령을 어기고 제멋대로 행동하는 병사들을 ‘당나라 군대’라고 하는데 정유재란 때의 명나라 군대가 그랬다. 당시 일본은 조선을 거쳐 중국 명나라로 쳐들어가는 행위를 ‘가라이리(唐入り·당으로)’라고 했고, 명군을 당군(唐軍)이라고도 불렀다. 임진왜란 때부터 왜군의 패악을 목격해온 유성룡은 “왜적은 얼레빗 같고, 명나라 군사는 참빗 같다”는 말을 남겼다.(‘징비록’) 백성들의 재물을 약탈하는 데 있어서 왜군이 얼레빗처럼 훑어갔다면, 명군은 날이 촘촘한 참빗처럼 훑어가버려 남아나는 게 없다는 조선 사람들의 한탄이었다. 명군 접반사 이덕형은 1597년 겨울 울산성 전투를 치른 후 곧바로 난병(亂兵)으로 돌변한 명군들의 행태에 분노를 느꼈다. “마초(馬草)를 벤다고 핑계대고는 여항(閭巷)으로 흩어져 나가서 민간의 재산을 약탈하고 부녀를 겁간하고 있으므로 원근이 모두 풍문만 들어도 도망쳐 숨기 바쁩니다. 사방 30∼40리 안에는 인가(人家)가 모두 비어 있어 보기에 매우 놀랍고 참혹한 상황입니다.”(‘선조실록’) 명군들의 재산 약탈과 살인, 여성 겁탈 등은 침략군인 왜군들의 행태와 별반 다를 바 없었다. 명군은 전쟁 기간 내내 조선을 도와주는 구원군이면서도 점령군이라는 이중적인 행태를 띠었던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선조조차 꺼릴 정도로 성격이 포악하기로 유명한 진린이 절이도 해전 후 이순신에게만큼은 한 수 접어주었다는 점이다. 아무튼 명군의 태도는 이순신이 정유재란을 끝내는 마지막 전투에서 엄청난 변수로 작용하게 된다. 거금도(고흥군)=안영배 전문기자 ojong@donga.com}

    • 2017-11-11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안영배 전문기자의 풍수와 삶]부귀쌍전의 땅 용산, 72년 만의 부활

    “왜인들이 숭례문에서 한강에 이르는 구역에 멋대로 점(點)을 쳐서 군용지라는 푯말을 세우고 경계를 정하여 우리나라 사람이 침범하지 못하게 하였다. 이때부터 그들이 하고자 하는 바가 있으면 번번이 군용지라는 명목으로 땅을 빼앗아 갔다.” 구한말의 애국지사 황현이 ‘매천야록’에 남긴 글이다. 러일전쟁에서 이긴 일제가 1906년 용산에 2개 사단 규모의 조선주둔군 사령부를 설치해 무단으로 사용하던 시기의 일이다. 일제는 패망할 때까지 이 기지를 운영했고 1945년 광복이 된 후 그 자리에 미군이 주둔했다. 그 이전에도 용산은 외국군과 인연이 깊었다. 13세기 고려를 침입한 원나라 군대는 용산을 병참기지로 활용했다. 16세기 임진왜란 때는 왜군과 명군이, 19세기 임오군란(1882년) 때는 청나라 군대가 주둔지로 이용했다. 용산은 북으로는 남산을 머리에 두고 남으로는 한강을 바로 앞에 둔 전형적인 배산임수(背山臨水)의 명당 터다. 군인들도 이 점을 주목했다. 용산에 본거지를 틀면 남산의 보호막 아래 안전을 도모하면서도 언제든지 수도 서울을 손아귀에 쥘 수 있었다. 또 한강이 가까워 수륙(水陸) 양면으로 물자 보급과 병력 이동로를 확보할 수 있었다. 용산은 경제적으로도 이용 가치가 큰 땅이었다. 조선시대 때 용산은 인근 마포와 함께 물류와 교통의 중심지로 주목받았다. 조운선을 통해 전국 각지에서 올라오는 세곡과 진상품을 보관하는 풍저창(豊儲倉), 군량미를 보관하는 군자감의 강창(江倉·원효로3가), 빈민 구휼을 위한 진휼청 별고(別庫·원효로4가) 등이 용산에 설치돼 운영됐다. 이로 보면 용산은 권력과 돈을 모두 갖춘 부귀쌍전(富貴雙全)의 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용산이 마침내 조국의 품으로 온전히 돌아오게 됐다. 주한미군이 주둔한 지 정확히 72년 만의 일이다. 대개 세상사든 땅 기운이든 한 갑자(60년)가 지나고 다시 12년이 지나면 개혁 혹은 혁신 같은 새로운 주기가 시작되기 마련이다. 일정한 주기에 따라 왕성한 기운과 침잠하는 기운이 반복된다는 지기쇠왕설(地氣衰旺說)도 이와 같은 논리다. 용산이 새 주기에 들어섰다는 신호도 나오고 있다. 정부가 추진하는 서울역사문화벨트 조성사업이 그것이다. 올해 말 반환이 완료되는 용산 미군기지를 뉴욕의 센트럴파크 같은 공원으로 탈바꿈시키고, 북악산 자락 경복궁에서 용산과 한강에 이르기까지 역사·문화·자연이 어우러지는 벨트를 조성한다는 계획이다. 필자의 풍수적 판단으로는 이 계획의 성공은 남산과 용산을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달려 있다. 서울(한양)의 풍수를 개괄하면 북악산은 주산(主山)이고, 그 맞은편짝인 남산이 안산(案山)이다. 북악산이 권력을 상징한다면 남산은 부를 상징한다. 인왕산과 무악산에서 이어지는 산줄기가 불끈 솟아오른 남산은 사방으로 부의 기운을 흘려보내는 형국이다. 남산 북쪽 중구 명동 일대는 남산의 재물 기운을 제대로 누리고 있다. 남산 남쪽 용산 지역은 남산의 한 줄기와 서해(외국)로 이어지는 한강의 기운이 만나면서 부를 창출하는 특징이 있다. 실제 용산은 한강을 통해 외국 문물을 끌어들이는 기운이 무척 강하다. 다른 이(異人)들의 탯줄(胎)이 있는 곳이라고 해서 ‘이태원(異胎院)’으로도 불리는 동네까지 끼고 있을 정도다. 이런 땅 기운을 잘 활용하면 용산은 세계적 물류와 유통의 중심축으로 우뚝 설 수 있다. 앞으로 용산의 땅 기운을 활용하는 데 있어 이 일대에 흐르던 만초천(蔓草川)이 중요한 변수가 될 것으로 본다. 원래 용산은 서울(한양도성)에서 청계천 다음으로 큰 만초천이 흐르고 있었다. 경복궁이 있는 인왕산 기슭에서 발원한 만초천은 서대문 사거리, 청파로, 원효로를 거쳐 한강으로 합류했다. 길이 약 7.7km의 물줄기를 따라 도로가 발달하면서 숭례문에서 용산까지 이어지는 거대한 민간시장도 형성됐다. 남산에서 이태원을 경유해 만초천 본류로 합수되는 지류도 존재했다. 현재도 용산 미군기지에는 길이 300m 남짓한 만초천이 흐르고 있다. 이처럼 만초천은 남산과 한강을 직접 이어주는 혈맥(血脈)이었다. 풍수에서 물길은 재물과 풍요를 보장하는 핵심 요인이다. 물은 재물이 새나가는 것을 막아주는 한편 풍요의 기운을 증폭시키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용산을 복원 및 개발할 때 1967년 복개된 만초천 또한 함께 복원하면 그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을 것이다. 청계천 복원으로 인근 상권이 살아나고 서울 도심이 활력을 되찾은 전례도 있지 않은가. 안영배 전문기자·풍수학 박사 ojong@donga.com}

    • 2017-11-08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악귀 가토 용서치 않으리라” 1만여 조선군, 왜성 고사 작전

    1597년 겨울 ‘호랑이 사냥’이 시작됐다. 임진·정유 7년전쟁 중 가장 잔인한 학살 행위로 조선인들에게 악귀(惡鬼)라고 각인된 ‘호랑이 가토(왜군 선봉장 가토 기요마사)’를 제거하는 작전이었다. 가토는 임진왜란 중 함경도에서 조선 호랑이 사냥을 즐겼고, 잡은 호랑이 가죽과 고기를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상납하는 등 악명을 떨쳐 ‘호랑이 가토’로 불렸다. 호랑이 사냥꾼은 조명(朝明) 연합군. 명군 3만6000여 명과 명군의 각 부대에 분산 배치된 조선군 1만여 명이 몰이사냥에 나섰다. 명의 경리(經理) 양호와 제독 마귀, 조선의 도원수 권율 등이 몰이사냥의 도포수(都砲手)를 맡았다. 양호는 조명 연합군을 좌군과 우군, 중군의 3개 군으로 편성한 후 각 군문(軍門)에 전령을 띄웠다. “마땅히 먼저 청정(淸正·가토)을 공격하여 적의 오른팔을 끊어야 할 것이다.”(이긍익의 ‘연려실기술’) 양호는 이번 공격의 목적이 경상도 울산성(울산왜성 혹은 도산성으로도 불림)에 주둔하고 있는 ‘적의 오른팔’ 가토를 제거하는 데 있음을 분명히 했다. 여러 왜장 중 사납고 포악하기로 유명해 명군 장수들조차 맞서기를 꺼리던 가토를 우선 지목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용맹스러운 가토와 그 휘하 군사의 붕괴는 왜군 전체의 전의(戰意)까지 확실하게 꺾어버리는 효과가 있다는 점을 계산한 것이다. 울산성의 전략적 가치도 컸다. 울산성이 무너지면 직선거리로 50여 km에 있는 부산포의 왜군 본진까지 곧장 위협받게 된다. 조명 연합군이 울산에 이어 부산까지 장악할 경우, 조선에 주둔하고 있는 왜군 전체가 오도 가도 못하는 신세가 돼 자체 괴멸될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인다. 부산은 왜군이 일본 본토를 오가는 전략 거점지이자 거의 유일한 퇴로이기 때문이다.성동격서와 양몰이 작전 양호는 먼저 가토를 고립시키는 작전을 펼쳤다. 좌군과 우군을 안동과 경주를 거쳐 울산으로 진격케 하는 동시에, 중군을 경상남도 의령 방면으로 보내 왜군이 다니는 주요 길목을 막도록 했다. 울산성을 공격할 때 다른 지역의 왜성에서 파견하는 지원군을 차단하기 위한 조치였다. 양호는 성동격서(聲東擊西) 작전도 펼쳤다. 3군에서 기마병 1500명을 따로 차출해 천안ㆍ전주를 거쳐 호남 남쪽의 남원 방면으로 진군케 했다. 이들은 일부러 깃발을 크게 날리고 요란스럽게 북을 울려 남단의 순천 등지를 공격하러 가는 척했다. 이는 전라도 순천 왜교성에 주둔하고 있는 ‘적의 왼팔’ 고니시 유키나가를 견제함과 동시에 왜군의 시선을 분산시키려는 목적이었다. 작전은 먹혀들어갔다. 그해 12월 22일 조명 연합군은 왜군이 어디를 공격당할지 몰라 혼란스러워 하는 사이에 울산성을 고립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어 23일에는 울산성 외곽을 지키는 왜군을 급습했다. 조선의 학자 이긍익은 당시 상황을 사서(史書)에 자세히 묘사했다. “(명군의) 삼협장(三協將)이 함께 진군했다. 좌군은 (울산)반구정의 적굴을 포위하고, 중군은 (울산)병영 길에서 곧장 적진을 꿰뚫고, 우군은 태화강의 적진을 포위하였다. 양호는 몸소 갑옷을 입고 투구를 쓰고 싸움을 독려하였다. 모든 군사가 북을 치고 떠들면서 분발하여 공격하니 포성이 천지에 울렸다. 불화살 수백 개를 서로 호응하여 한꺼번에 쏘니 바람은 빠르고 불은 뜨거워 어지럽게 적의 막사를 태워서 검은 연기가 공중에 가득하였다. 승리의 기세를 타서 반구정·태화강의 두 적굴을 함락시키니 남은 적들은 겨우 살아서 도산(울산성)으로 도망갔다.”(‘연려실기술’) 전투의 서전에서 조명 연합군은 무려 1000급에 달하는 왜군의 수급(首級)을 챙기는 전과를 올렸다. 조명 연합군은 왜군을 계속 강하게 압박했다. 울산성 외곽의 나머지 왜군들까지 양몰이하듯 울산성 안으로 몰아넣었다. 도망쳐온 왜군들은 서로 먼저 안전한 곳을 확보하려고 동료들끼리 자리다툼까지 벌였다.(게이넨의 ‘朝鮮日日記’) 울산성은 혼란의 도가니가 됐다. 당시 울산성에서 남쪽으로 20km 떨어진 서생포왜성에 나가 있던 가토는 급보를 듣고 그날 밤 배를 이용해 부랴부랴 울산성으로 돌아왔다. 12월 24일 본격적으로 공성전이 전개됐다. 조명 연합군은 울산성을 겹겹이 포위한 후 불화살과 대포 등으로 성을 공격했다. 불에 타 숨지는 왜병들이 속출했다. 흙과 목책으로 만든 최외곽 성벽인 소가마에(惣構)는 속속 무너졌다. 그러나 왜군의 저항도 만만치 않았다. 무엇보다도 울산성 내부가 너무 견고했다. 외성(外城)인 소가마에와는 달리 내성(內城)은 모두 돌로 축조돼 있었다. 내성 성벽은 험준한 지형지세를 적절히 활용한 덕에 조명 연합군이 성벽을 타고 넘기가 쉽지 않았다. ‘축성의 귀재’ 가토가 직접 설계하고 감독한 울산성은 난공불락의 요새였다. 게다가 왜군들이 성벽 위에 방옥(성루)을 설치한 뒤 구멍을 이용해 조총을 마구 쏘아대는 통에 연합군의 피해가 적잖았다. 임진년(1592년) 전쟁 발발 이후 처음으로 왜성 공성전을 벌인 조명 연합군은 조선 및 중국과 너무 다른 왜성 구조에 당황했다. 하늘을 원망해야 하나? 치열한 공방전이 계속되는 가운데, 12월 25일 오후부터 기상이 변하기 시작했다. 겨울비가 억수같이 쏟아져 내렸다. 그해 겨울은 너무 추웠다. 거기에 비마저 내리자 성밖에서 노숙해야 하는 병사들은 추위와 배고픔에 지쳐갔다. 왜군 쪽 상황도 심각하긴 마찬가지였다. 왜성의 왜군들이 불에 탄 쌀을 주워 먹고, 옷과 종이를 펴서 비에 적신 뒤 짜서 마시는 자가 많다는 내부 정보가 흘러나왔다. 울산성은 공사를 완전히 마무리하기 전에 조명 연합군이 들이닥친 바람에 왜군이 식량을 비축할 겨를이 없었다. 식수 사정은 더 최악이었다. 왜성 축성을 하면서 파놓은 성 외곽의 우물들을 조명 연합군이 봉쇄해버렸다. 사실상 성내는 식수 공급이 중단됐다. 성에 머물던 종군승 게이넨은 “이 성안에서 곤혹스러운 것은 세 가지뿐이다. 추위, 배고픔, 갈증이 그것이다”고 일기에 적었다.(‘朝鮮日日記’) 게이넨이 울산성에서 극락왕생을 준비할 정도로 성안은 죽음의 공포가 감돌았다. 왜병들은 얼마 못 버텨 성이 함락될 것이라는 두려움으로 몸을 떨었다. 일본 측 기록인 ‘조선정벌기(朝鮮征伐記)’가 묘사한 당시 상황은 처참했다. “적이 10일 동안 밤낮으로 포위하고 군사를 나누어 퇴로를 차단하자 성안에 식량과 물이 떨어졌다. 병사들은 모두 종이와 벽의 흙을 긁어서 먹었으며, 소와 말을 잡아서 먹었다. 밤에 성밖으로 몰래 나가서 연못의 물을 마셨다. 연못에는 죽은 시체가 많아서 물이 더러웠지만 그냥 마셨다.” 당시 가토는 조총병에게만 하루에 생쌀 한 홉만 제공하고, 다른 병사들을 방치할 정도로 식량이 바닥났다. 그러나 왜군의 유일한 버팀목이던 조총병의 조총 탄약마저 거의 동났다. 울산성은 함락되기 일보 직전이었다. 가토는 성이 함락되면 항복 대신 할복자살을 결심했다. 절체절명에 빠진 가토는 금과 은 등 각종 보배를 성밖으로 던져주면서 명군의 공격을 늦추거나, 양호에게 항복하겠다는 뜻의 강화회담 진행을 핑계로 시간 벌기를 했다.(‘연려실기술’) 가토는 서생포왜성에서 울산성으로 들어오기 전 부산성의 왜군 본진에 구원군을 보내달라고 요청해둔 상태였다. 해가 바뀌어 1598년 1월 1일, 울산성의 왜군에게 기적 같은 일이 찾아왔다. 조명 연합군의 배후를 돌아온 모리 히데모토의 구원군과 가토 간 연락이 닿았다. 이튿날인 2일에는 서생포왜성을 비롯해 각 왜성에서 출발한 약 6만 명의 일본 구원군이 수륙(水陸) 양쪽을 통해 울산 인근에 도착했다. 날씨도 왜군 편이었다. 비가 계속되는 가운데 북풍이 세차게 불어 피할 곳이 마땅찮은 조명 연합군들은 몸이 얼어붙어 부들부들 떨고 있었고, 군마(軍馬)도 굶주림과 추위로 폐사가 속출했다. 조명 연합군의 사기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3일에는 왜군 구원군이 조명 연합군을 배후에서 야습하는 일도 발생했다. 결국 명군 지휘관 양호는 권율, 이덕형 등 조선 지휘관들을 불러 말했다. “성이 험해서 함락시키기 어렵고 구원병의 세력은 크니 포위를 풀었다가 후일의 일을 다시 도모하지 않을 수 없다.”(‘연려실기술’) 마침내 1월 4일 밤 양호는 진영을 경주 방면으로 철수했다. 전투 개시 때 위풍당당하던 명군은 퇴각 때는 오합지졸이 돼버렸다. 중구난방으로 도망치는 명군을 쫓아가 왜군들이 도륙을 했다. 12일간의 치열한 전투로 아군과 적군 모두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1만8000명의 왜군 중 전투 임무를 수행할 수 있는 인원이 수백 명에 불과했을 정도로 왜군 전사자와 부상자가 발생했다.(일본 측 기록물인 ‘朝鮮物語’에는 전사자 2800명이라고 기록) 명군의 경우 1400명이 전사했고, 3000여 명이 부상을 입었다.(‘연려실기술’) 일본 측 기록은 조명연합군이 1만여 명 넘게 전사했다고 적고 있다.(일본 아사노 가문 ‘淺野家文書’·‘朝鮮物語’) 전사자 수는 정확하지 않으나 조명연합군 중 조선군의 피해가 명군보다 더 컸음은 분명하다. 경상좌도 절도사 성윤문 등은 “(조선) 병사들이 건초와 방패를 메고 성 아래로 진격해 적진을 불태우는 화공(火攻)에서 거의 다 전사했다”(‘선조실록’)고 보고했다. 양호가 연합군에 대한 지휘권을 이용해 가장 위험한 돌격 선봉대에 조선군을 배치한 결과였다.울산성의 교훈 기자는 실패로 끝난 ‘호랑이 사냥’ 전투의 현장인 울산성(울산 중구 학성공원)을 지난주 찾았다. 흔적만 남은 성벽과 기단들을 근거로 당시의 왜성을 추정해보았다. 울산성은 동남방으로 흐르는 태화강을 옆으로 끼고 있는 높이 50m의 학성산을 성으로 꾸민 형태였다. 산 정상에서는 태화강과 울산 시내 대부분이 훤히 내려다보였다. 가토는 울산읍성과 병영성을 허문 돌을 옮겨와 울산성을 쌓으면서 약 1만6000명의 조선인과 일본인들을 동원했다. 왜성은 조선 성과는 모양과 구조가 달랐다. 조선 성이 대부분 한 겹의 성벽으로만 이뤄진 반면, 울산성은 내성을 세 겹(혼마루, 니노마루, 산노마루)으로 둘렀고 외곽으로 외성인 소가마에를 만들어 놓은 형태였다. 공원으로 꾸며진 산 정상부의 혼마루(제1성)에 그 핵심인 천수각 터가 보이지 않았다. 울산성을 마무리 짓기 전에 조명 연합군이 공격해와 미처 지을 겨를이 없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산 아래로는 그 높이와 지형에 맞추어 니노마루(제2성·해발 35m), 산노마루(제3성·해발 25m)가 지어졌다. 불과 40여 일만에 완성됐지만 전체 둘레 1300m, 높이 10∼15m에 이르는 성벽은 성 밑에서 쏘아 올리는 대포 공격에도 끄떡없었을 것이다. 약점이 없는 건 아니었다. 평지에서 홀로 돌출한 산에 성을 지은 만큼 주변이 차단될 경우, 식량과 무기 등이 떨어지게 되면 고립무원이 된다. 가토는 울산성에서 이런 약점을 처절하게 경험한 뒤 일본에 돌아가 120개의 우물과 고구마줄기로 엮은 다다미 등 비상식량을 갖춘 구마모토성을 지었다. 그런데 명군 지휘관들은 일반 성을 상대하듯 왜성을 너무 쉽게 보았고 자만심에 빠져 다른 전략은 받아들이지도 믿지도 않았다. 무턱대고 돌진하다가 조총에 맞아 많은 병사가 전사했다. 울산성은 1598년 9월 2차 전투 때도 무너지지 않았다. 그때도 조명 연합군은 희생만 낸 채 성벽을 넘지 못했다. 숱한 조선군과 명군의 희생에도 끝내 함락시키지 못한 울산성은 히데요시의 사망으로 가토가 일본으로 퇴각하면서 성을 불태우는 것으로 스스로 운명을 다했다. 울산성 전투의 성과라면 이후 전체 왜군의 전투의지가 현저히 꺾였다는 점이다. 울산=안영배 전문기자 ojong@donga.com}

    • 2017-10-28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토요기획]왜군, 영호남 일부 1년 넘게 실질 통치… 이순신과 대치

    ‘하나-조선 군현(郡縣)에서 지금 이후로는 사민(士民)과 백성 된 자는 각기 향읍(鄕邑)으로 돌아가 오로지 농사에 힘써라. 하나-조선의 상관(上官·관리)들을 곳곳에서 찾아내 잡아 죽여라. 그 처자와 따르는 무리(從類)들도 주살토록 하며, 상관의 집은 불을 질러 태워 없애라. 하나-군현 안에서 사민과 백성이 상관들의 숨어 있는 곳을 고해바치는 경우 포상을 한다. 하나-지금부터 죽을죄를 면한 군현의 인민들이 돌아와서 살지 않고 산곡(山谷)으로 가는 경우엔 모두 집을 불태우고 참살하라. 하나-이 방문(榜文)을 어긴 왜졸(倭卒·일본 병사)을 주살할 것이며, 흉악한 짓이 발생하면 건건이 행장(行長·고니시 유키나가)에게 서면으로 보고하라.’(日本 시마즈 요시히로 가문, ‘島津家文書’) 이순신이 서남해안의 섬을 돌며 조선 수군 재건에 부심하던 무렵인 1597년 9월, 강진·해남·곤양·창원 등 전라도와 경상도 남해 내륙에는 이 같은 방문이 일제히 내걸렸다. 그해 7월 칠천량 해전 승전의 기세를 몰아 전라 내륙 전역과 경상도 남해 연안을 장악한 고니시 유키나가, 시마즈 요시히로, 우키타 히데이에 등 10여 명의 왜군 장수들이 연명으로 발표한 포고령(全羅道海南定榜文寫)이었다. 그간 일본 육군은 정유년 9월 초 경기도 직산 일대에서 명군의 반격으로 북상을 멈춘 이후 전라도와 경상도로 남하하면서 코 베기 등 학살과 노예사냥, 재물 약탈 등을 자행했다. 그해 9월 중순에 이르러서는 전라도 내륙을 완전 초토화했다. 호남은 바둑판처럼 포진한 왜군이 50여 둔(屯)에 달했을 정도였다.(‘난중잡록’) 전라도를 완전 점령하라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령을 완수한 왜군은 점령지 통치 행위에 들어갔다. 조선 각지에서 산발적으로 진행되는 조선 의병과 조명(朝明) 연합군의 반격에 맞서 호남 내륙과 남해 연안 지역에 집중해 확실하게 이곳을 통제하려는 왜군의 전략이었다. 왜군의 점령지역 통치행위는 이때부터 이듬해 11월 노량해전에서 이순신에게 패해 왜군이 조선 땅에서 완전히 쫓겨날 때까지 이어진다.당근과 채찍의 선무 공작 왜군은 정유재란 초기에 자행한 방화, 약탈, 살육, 납치 등 폭력적 수단으로는 침략 전쟁을 장기적으로 성공시킬 수 없다고 판단했다. 조선인들을 회유해 자신들과 동화시키는 쪽으로 정책을 바꾸었다. 조선인의 분열을 조장하는 ‘당근과 채찍질’ 수법을 동원했다. 왜군은 우선 자신들을 적대시하는 조선인을 색출해 처단했다. 조선 관리들과 지역사회의 지도급 인사들이 그 대상이었다. 이들의 관군 참여와 의병 활동을 원천적으로 봉쇄하기 위해 그 은신처를 신고케 하고, 적발된 이들은 가족은 물론 가택까지 없애 버렸다. 대신 상관들을 신고하거나 직접 잡은 조선 백성에게는 일본의 백성(御百姓)으로 동등하게 대우하고 영지를 포상으로 내렸다. 또 왜군에게 복속하는 조선 백성들에게는 민패를 발급했다. 이들을 권농(勸農)이라고 했다(조선에서는 순왜(順倭)라고 불렀다). 왜군은 권농들을 앞잡이로 내세워 각처에 숨어 있는 백성들을 회유해 데려오도록 했다. 산으로 도망간 조선인들을 유인하기 위해 쌀을 나누어 주기도 했다. 왜군의 회유책은 어느 정도 먹혀 들어갔다. 당장의 끼니 해결과 목숨 부지를 다행으로 여겨 투항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민패를 내주며 백성을 달래고 쌀을 주니 곤궁한 인민이 다투어 들어갔다.”(‘난중잡록’) 그렇게 회유된 조선 백성들은 왜군과 한 마을을 이뤄 살았다. 구례에서는 왜군 수십 명이 흰 깃발을 세우고 앉아 있는 가운데, 조선인 남녀 200여 명이 장막 속에서 면화와 벼를 수확해 200여 칸이나 쌓아 놓은 것이 명군에게 발견되기도 했다.(‘선조실록’) 왜군으로부터 민패를 받은 권농들은 가을철에 거둔 벼와 곡식 중 쌀 3말을 왜군에게 세금으로 바쳤다.(‘난중잡록’) 왜군 지휘부는 조선 농민으로부터의 연공수납(年貢收納)은 5분의 1 혹은 4분의 1 수준으로 제한했다. 자신들이 조선 정부보다 더 자비로운 권력 행세를 한 것이다. 왜군에게 저항하지 않고 세금을 꼬박꼬박 바치는 권농들은 재산권 보호와 안전을 보장받았다. 왜군은 권농들이 주로 다니는 대로에는 왜병의 난동과 행패를 감시할 헌병 같은 병력을 배치하기도 했다. 왜군의 점령 행위가 갈수록 공교화하자, 자발적으로 왜군을 찾아가는 지방 사족(士族)도 늘어났다. “순천에 사는 사족 박사유는 처음부터 왜적에게 붙어 자기 딸을 행장(行長·고니시 유키나가)에게 시집보냈는데, 행장이 하는 일은 모두 사유가 지휘한 데에서 말미암은 것이었다. 사유는 훗날 스스로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을 알고, 아들 박정경과 왜물(倭物)을 바리로 싣고서 남원에 나와 명나라 장수 오도사(吳都司)에게 수레째 바치고 여러 가지로 아첨을 하였다. 또 다른 아들인 박여경은 그 누이동생을 따라 아직도 행장이 거처하는 왜교성에 있으면서 우리나라의 허실(虛實)을 관망하고 한편으로 중국 장수에게 붙어 의지하고 있으므로 함부로 처치하기가 낭패스럽다.”(‘선조실록’) 전라도 동복의 생원(生員) 김우추는 관할 지역 왜장에게 아부하는 글까지 보냈다. “누구나 부리면 백성이요, 누구나 섬기면 임금이니 (귀국의) 한 호(戶)로 편입돼 성인(聖人)의 백성이 되기를 바란다”(‘난중잡록’)고 했다. 이처럼 일부 지역 사족은 조선 건국 이후 200여 년간 기득권층으로서 누려온 특권에 대한 책임을 전혀 지려 하지 않았고, 오히려 기득권을 연장하기 위해 왜군에게 붙어 부역했다. 조선 정부의 무책임한 태도도 이런 부역 행위를 부추기는 결과를 낳았다. 임진왜란 때 영남이 왜군의 소굴이 되자, 영남에서 부담해야 할 공부(貢賦)를 호남에서 전적으로 도맡아 해결했다. 호남의 재원이 조선을 먹여 살릴 정도로 호남은 막대한 세 부담을 졌다. 그런데 정유재란이 발발해 호남이 정작 왜군에게 점령당하자, 호남은 내팽개쳐졌다. 왜군 점령 하에 있다가 조명(朝明)연합군이 수복한 지역에선 세 감면이 전혀 이뤄지지 않았다. 호남 백성들은 “우리들은 임진년 무렵에 죽을힘을 다해 관가에 제공했는데, 정유년 이후로 관가에서는 옛 노고를 생각해주지 않고 독징(督徵)만 더욱 엄격하게 하고 있다”(이항복의 ‘백사집’)고 불만을 토로했다. 호남의 사족들 역시 당쟁과 차별 대우로 사기가 꺾여 벼슬길로 나아가는 것을 천상(天上)의 허황된 일처럼 여길 정도로 좌절했다.노동력 착취로 급조한 왜성에 웅거하며 양민착취 일부 사족은 부역의 길로 나갔지만 대다수 양민들은 당근이 아닌 채찍질만을 받았다. 왜군은 한반도에 주둔할 성을 지으면서 가혹한 노동 착취를 일삼았다. 고니시는 1597년 9월 1일부터 순천의 왜교(倭橋)에 주둔한 뒤 장기적인 호남 지배를 염두에 두고 왜교성을 쌓기 시작했다. 고니시는 순천 일대는 물론 광양 등 사방에 군사를 보내 각지의 읍성을 장악하고, 왜교성을 축성할 노역자들을 징발했다. 승려들도 붙잡혀와 노역에 동원됐다. 1597년 9월에 시작한 왜교성 축조가 불과 3개월 만인 12월 초에 완성됐을 정도로 혹독한 노동력 착취가 이어졌다. 순천 왜교성과 비슷한 시기에 이뤄진 울산의 왜성 축성 과정을 목도한 왜군 종군승 게이넨은 이렇게 기록했다. “(조선 양민들은)새벽 안개를 헤치고 산에 올라가 하루 종일 큰 나무를 베고 밤하늘의 별이 총총할 때에야 겨우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밤을 새워 돌을 쌓아 성을 축조하는 것은 백성은 어떻게 되든 안중에 없고 오로지 탐욕 때문이다. 조금이라도 괴롭고 싫은 표정의 눈초리를 하는 것만으로도 죄업이라고 몰아붙여 심하게 질책하고, 목울 쇠사슬로 묶어 두들겨 패고, 달군 쇠로 몸을 지져댔다. 보기에 곤혹스러울 정도다.”(‘朝鮮日日記’ 1597년 11월 11∼16일) 당시 저잣거리엔 노역의 혹사를 못 이겨 도망치다가 왜군에게 붙잡힌 조선인의 목이 내걸리곤 했다. 조선인의 피땀으로 전라도와 경상도에는 모두 8개의 왜성이 신축됐다. 1597년 말까지 왜교성·남해성·사천성·고성성·거제성·창원성·양산성·울산성이 지리적으로 점선처럼 연결돼 지어졌고, 상호 협력 체제를 구축했다. 도체찰사 신분으로 현지를 정탐한 이항복은 “동쪽의 울산 도산에서 서쪽의 전라도 순천 왜교에 이르기까지 병영이 줄지어 섰는데 무려 900여 리나 됐다”며 “왜군이 오래 머무르면서 장기전을 준비하고 있다”고 기록했다(‘月沙集’) 이 중 유일하게 호남지역에 축성된 왜교성은 고니시 군의 주력 대군이 주둔했다. 호남 지배의 거점이었던 것이다. 이들 성은 왜군이 장기간 지배 통치하려는 점령군의 성격을 강하게 드러내는 상징물이다. 이순신과 왜군의 호남 통치권 싸움 1597년의 겨울이 깊어가면서 전황은 왜군에게 불리해졌다. 9월 16일 이순신의 명량해전 승전 이후 조명 연합군의 남하로 왜군들은 점차 장악 지역을 잃어갔다. 세 불리를 느낀 왜군은 왜성을 근거로 웅거하면서 다시 강압적인 수탈과 방화를 일상화했다. 전황이 바뀌면서 마을에서 권농으로 있던 조선 농민들 가운데는 산으로 숨어 들어가 게릴라가 되는 경우가 속출했다.(‘島津義弘書狀’) 어쩔 수 없이 왜군에게 면종복배(面從腹背)하던 조선인들이 여기저기서 들고 일어난 것이다. 고니시가 지배하던 순천 지역에서 이런 움직임이 활발했다. 순천의 훈련원 첨정(僉正) 박이량은 왜군 진영에서 처자가 피살된 후 ‘복수 의병군’을 일으켜 주암에 주둔한 왜군들을 상대로 싸워 전과를 올렸다. 보인(保人) 백비호는 자진해 전라병사 군관이 돼 매번 전투의 선봉에 서서 적병을 참살하고, 적의 군량창고를 급습해 불태우는 등 전공을 세워 명나라 장수들까지 그에 대한 포상을 조선 정부에 요청할 정도였다.(‘선조실록’) 평범한 여인까지도 나섰다. “왜적이 (순천의) 용두와 해촌 사이에 주둔해 있으면서 농사를 권하고 마을에서 세금을 거두어가곤 했다. 왜적 한 명이 강씨 여인 집에 찾아와 세금을 더 내라고 협박했다. 강씨는 왜놈이 남의 나라에 쳐들어와 협박하면서 세금을 거두는 것에 분기가 일어나 이내 곧 그를 죽일 것을 결심했다. 그리하여 먼저 (왜군에게) 술을 권해 먹인 뒤 식사를 준비하겠다고 해놓고서 부엌에 들어가 식칼을 갈아두었다가 왜적이 술에 취해 떨어지는 것을 기다렸다가 칼로 찔러 죽였다.”(조범현의 ‘강남악부’) 시골 가정집 여인이 혼자 힘으로 왜병을 죽이려는 적개심을 가질 정도로 왜군의 횡포가 심했다. 순천 등 바닷가 해안 마을이 특히 그랬다. 정유년 겨울을 신안 안편도와 목포 고하도 등 섬 지역의 수군 진영에서 보내던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은 명량해전 이후 왜군의 보복 행위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고 이를 가슴 아파했다. “해남의 향리 송원봉과 신용 등이 적진으로 들어가 왜놈을 꼬드겨 그곳의 선비들을 많이 죽였다”(‘난중일기’ 1597년 10월 13일)는 보고를 받고서는 분함을 이기지 못했다. 이에 이순신은 수군 휘하 장졸들을 육지로 보내 부역 행위자들을 처단토록 했다. 수군 병사들은 해남에 들어가 왜적 머리 13급과 투항한 송원봉 등의 머리를 베어오기도 했다. 이외에도 왜군에게 붙었던 윤해와 김언경, 사족의 처녀를 강간한 김애남 등은 직접 목을 베어 효시토록 했다. 이순신은 호남의 의병들과도 긴밀히 관계했다. 이순신은 삼도수군통제사로 복직한 이후 승병(僧兵)을 이끈 송광사 의승장 혜희, 흥양 의병장 신군안, 강진 의병장 염걸 등에게 의병장 직첩을 수여하는 등 의병활동을 관리했다. 해남의 의병이 왜군 머리 1급과 환도 한 자루를 가지고 와 이순신에게 바치면서 승전 소식을 전하기도 했다. 임의로 활동해 군율을 어긴 의병장에게는 벌도 내렸다. 영암의 향병장(鄕兵將)이 왜적을 토벌한 연유를 보고하지 않아 곤장 50대를 쳤다.(‘난중일기’) 이순신은 왜군의 호남내륙 점령 정책을 약화시키기 위해 왜군에 적극적으로 가담한 순왜(順倭)들, 조선 백성들을 상대로 강간과 약탈을 벌인 범법자들을 색출해 죄를 묻는 등 호남의 치안력 확보에 심혈을 기울였다. 호남 통치권을 두고서 바다의 이순신과 육지의 왜군이 이듬해 말까지 약 1년간 치열한 대민(對民) 압박전을 벌인 것이다.순천·목포=안영배 전문기자 ojong@donga.com}

    • 2017-10-21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안영배 전문기자의 풍수와 삶]중국發 살기와 금강산 건봉사

    휴전선을 눈앞에 둔 우리나라 최북단의 전통사찰 건봉사(乾鳳寺·강원도 고성군 거진읍). 남한에서는 유일하게 금강산 본줄기에 위치한 사찰이다. 풍수적 입지에서도 특별한 곳이다. 중국 북방에서 몰아쳐오는 대륙의 살기(殺氣)와 그에 편승한 북한의 폭력 기운이 원산을 거쳐 금강산을 타고 남한으로 내려오는 길목에 위치해 있기 때문이다. 건봉사는 역사적으로 북방의 살기를 감당해내느라 병란(兵亂)과 화마(火魔)라는 대가를 여러 차례 치렀다. 중국 청나라가 아편전쟁과 태평천국의 난으로 몸살을 앓던 19세기 중반, 그 살기는 조선으로도 뻗쳤다. 이를 터의 기운으로 막아내던 건봉사는 1878년 건물 3000여 칸이 전소되는 산불로 희생을 치렀다. 1950년대 중국군이 개입한 6·25전쟁 시기에는 전쟁의 살기를 버텨내다가 결국 사찰이 완전히 폐허가 되다시피 했다. 지금의 건봉사 전각은 그 이후에 중건한 것이다. 사실 대륙의 살기와 관련한 건봉사의 독특한 입지는 오래전부터 주목을 받아왔다. 1500여 년 전인 신라 법흥왕 때 아도화상이 원각사라는 이름으로 창건(520년)한 이래, 이 절은 신라 말 한국 풍수의 개조(開祖)로 추앙받는 도선국사에 의해 서봉사(西鳳寺)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 고려 말인 1358년 나옹 스님이 중건하면서는 건봉사로 개칭했다. 모두 기운을 읽고 조절하는 데 뛰어난 능력을 갖춘 도승(道僧)들이 사찰의 역사에 개입한 것이다. 건봉사 서쪽에 봉황 모양의 바위가 있어 서봉사라는 이름이 붙었다는 얘기가 있지만 건봉사 주변에서 봉황형 바위는 발견된 바 없다. 오히려 한반도 서북쪽(주역 8괘로는 건·乾 방위)의 살기를 막는 봉황(鳳凰)의 터여서 ‘건봉’이라는 이름을 가졌다는 해석이 정설로 받아들여진다. 봉황은 전쟁이나 살기를 막아주는 전설의 영물로, 태평성대와 성인의 출현을 상징한다. 실제로 건봉사 터는 역사의 비극과는 달리 매우 부드럽고 유려한 산세에다, 지기 또한 세상을 보듬는 듯한 따뜻한 기운이 감도는 명당지다. 형세파 풍수에서 말하는 봉황포란(鳳凰抱卵)형이라고나 할까. 터로 나라의 명운을 살펴보는 행위는 풍수의 망기술(望氣術)에 해당한다. 원래 망기술은 하늘의 별·해와 달·구름·바람 등 천문 현상에서 기운의 조짐을 살펴 인간사의 길흉을 판별하는 기법인데 이에 능한 이들은 터에서 발산하는 기운까지도 구체적으로 감별하거나 구별해낸다. 이를테면 터에서 나타나는 기운의 색이 밝고 환하면 그 주인이 잘 풀려 나가고, 어둡고 칙칙하면 패퇴하게 되고, 밝고 붉은색을 띠면 거부가 되고, 검은색이면 재난과 화를 부르고, 자줏빛이면 대귀(大貴)하게 된다는 식이다. 겸애주의로 유명한 ‘묵자’는 “망기술로 대장기(大將氣)와 소장기(小將氣) 등 여러 종류의 기를 판별할 수 있는 사람은 성공과 실패, 길과 흉을 능히 알 수 있다”고 썼다. 정유재란기인 1598년 노량해전을 앞두고 명나라 장군 진린이 “동방의 장군별(將星)이 시들해져서 화액이 공(이순신)에게 머잖아 미칠 것”이라며 이순신에게 각별히 주의를 당부한 것도 이런 망기술에 의한 것이다. 진린은 천문과 풍수에 두루 밝았던 두사충을 참모격인 비장(裨將)으로 두고 있었다. 이순신도 두사충에게 시를 지어 보낼 정도로 그를 존중했다. 임진, 정유 양 왜란을 직접 겪은 선조도 중국의 이런 망기술이 부러웠던 모양이다. “무릇 지리술이란 반드시 위로는 천문(天文)을 통하고 겸하여 망기(望氣)에도 능한 다음에라야 지맥(地脈)의 묘리를 터득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나라 사람 중에 이에 능한 자가 있겠는가.” 망기술을 잘 활용하면 개인사뿐 아니라 나라의 국운을 살펴 재액을 예방하거나 대비할 수 있음이 여러 고전에서 나타난다. 춘추시대 노나라의 재신(梓愼)은 천문 현상을 감지하는 망기술로 “송나라에 난이 일어나 나라가 거의 망했다가 3년 뒤에 해소되며, 채나라에서는 대상(大喪)이 있을 것”이라고 해 적중했다.(‘춘추좌씨전’) 아무튼 건봉사는 그 입지적 조건 때문에 조선에서도 왕실의 원당(願堂)으로 귀한 대접을 받아왔다. 임진왜란 때는 사명대사가 승병(僧兵)을 일으킨 호국의 본거지였고, 일제강점기에는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인 만해 한용운의 활동 근거지로 명성을 떨쳐왔다. 그 건봉사의 옛 사지(寺址)에서 최근 봉황 형상의 밝은 기운을 ‘망기’했다는 소식이 들린다. 환자의 안색을 살펴 병을 진단하는 망색술(望色術)의 전문가(중의사)가 추석 명절에 건봉사에 들렀다가 감지했다는 거다. 중국과 북한의 살기가 중중한 이때, 그가 망기한 대로 평화의 봉황 기운이 흘러나와 우리 국운에 도움이 되길 진정으로 기다려본다.  안영배 전문기자 풍수학 박사 ojong@donga.com}

    • 2017-10-18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기획]“호남 길목 지키자” 석주관에 올라 왜적 막아선 구례의병들

    경남 하동에서 섬진강을 따라 북상하면 전남 구례가 나온다. 그 접경을 지나면 바로 지리산과 섬진강이 어우러진 전략 요충지가 있다. 섬진강을 가운데 끼고 북으로는 지리산의 험준한 산세가 강변까지 뻗쳐 있고, 남으로는 백운산의 한 봉우리가 치솟아 역시 강변에 접해있다. 양쪽에 큰 산이 대치한 사이 길목이 나 있는 이곳은 누가 봐도 자연이 만든 천혜의 요새 지형이다. 그곳이 바로 석주관이다. 지금 행정구역으로는 구례군 토지면 송정리. 고려 말 이후 틈만 나면 노략질을 일삼던 왜적을 막던 관문이었던 이곳 석주관은 정유재란 때도 치열한 혈투가 벌어진 현장이었다. 1597년 2월 조선 재침을 명령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임진왜란(1592년 발발) 때와 달리 호남과 경상 등 조선 남부지역을 집중적으로 노렸다. 특히 임진란 때 화를 면한 조선의 군수병참기지인 전라도 공략에 골몰했다. 왜군의 전라도 침공로는 세 방향이 가능했다. 첫째는 해로를 따라 순천에 상륙해 북으로 공격하거나, 경상도 서부연안에 상륙한 뒤 섬진강을 거슬러 구례 남원을 거쳐 전주로 향하는 길이다. 둘째, 진주와 함양을 경유해 팔량치를 넘고 운봉 남원을 거쳐 전주로 가는 길이다. 셋째, 경상우도의 거창 안의를 거쳐 육십령을 넘어 진안 전주로 통하는 길이 있다. 정유재란 때 왜군은 세 길을 모두 이용했지만 주 공격로는 첫 번째 길이었다. 좌군 대장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秀家) 휘하 왜군이 경상도 고성 사천 쪽에 상륙한 뒤 하동으로 진출해 광양 두치진으로 건너온 수군과 합세해 섬진강 하류로부터 구례를 향해 진격했다. 왜군이 석주관에 들이닥친 것은 8월 초였다. 칠천량해전에서 원균의 조선 수군을 대파한지 20여일 지난 시점이었다. 석주관 성을 지키던 현감 이원춘이 분투했지만 중과부적이었다. 8월 6일 남원으로 퇴각했다. 왜군은 전라도로 통하는 길목 요새를 허문 여세를 몰아 남원성과 전주성까지 점령했다. 당시 가장 영세한 고을 중 하나였던 구례현 일대는 초토화됐다. 왜군은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양민을 학살하고 코를 베어갔다. 살아남은 이는 새끼줄로 묶어 끌고 갔다. 임진란 때 들불처럼 일어났던 의병운동이 다시 불붙기 시작한 게 이때부터다. 백의종군하던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로 복귀해 수군을 재건하려고 동분서주하던 시기와 맞물린다. 구례의병을 이끈 사람은 왕득인이었다. 그는 1556년 구례현 남전리에서 개성 왕씨가 참봉 왕언기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어떻게 의병을 모아 조직했는지 자세한 과정은 기록이 전해지지 않는다. 남원 의병장 조경남이 남긴 ‘산서전진실기(山西戰陣實記)’에 따르면 구례의병장 왕득인이 그해 9월 22일 의병 50여 명을 이끌고 숙성치를 넘어와 남원의 조경남 의병진을 방문했다(산서전진실기·정유년 9월 22일) 남원의병과 합동 작전을 논의하고 석주관으로 돌아온 왕득인의 구례의병은 9월 하순부터 10월 초까지 왜군을 상대로 사투를 벌인다. 당시는 왜군이 전라좌도 일원과 구례 지역을 이미 완전히 점령한 상황이었다. 구례의병은 수십 배의 병력과 우세한 화력을 앞세운 왜군에 맞서 매복과 기습작전을 반복하며 버텼다. 화살이 떨어지면 바윗돌을 굴러 떨어뜨렸다. 그러나 결국 구례의병은 왕득인을 비롯해 그의 애마까지 모두 전사했다. 석주관 골짜기는 그들이 흘린 구국의 선혈로 물들었다. 그러나 구례의병의 석주관 항쟁이 세상에 알려진 것은 그로부터 200여 년이 지난 정조 때인 1798년이 되어서였다. 그해 화엄사 법당 중수 때 문서 두 건이 발견됐다. 격문인 ‘기서화엄사상승(奇書華嚴寺尙僧)’과 화엄사 스님의 ‘정유란일기’. 격문은 석주관 혈투를 앞둔 구례의병의 절박한 상황을, 일기는 화엄사 스님들이 의병 전투에 참가해 모두 전사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두 문건 발굴을 계기로 의로운 의병·승병 희생을 현창해야 한다는 공론이 일었다. 지역 유림에서 조정에 이 같은 뜻을 알렸다. 의병, 주로 소규모 단위… 이순신 수군 적극 지원 정유재란기의 의병 운동은 임진왜란 때와 비교해 몇 가지 특징을 보인다. 규모면에서 임진왜란 때는 곽재우, 고경명, 김천일 등 의병장들이 적게는 수백 명에서 많게는 수천 명 단위로 조직적으로 움직이면서 의병장들끼리 연합작전을 펼치기도 했다. 그러나 정유재란기는 의병 운동이 소규모 단위로 흩어져서 벌어졌다. 이는 선조가 임진왜란이 소강상태에 접어들었을 때 김덕령 등 의병장들을 역모 혐의로 처형 혹은 제거해 의병운동을 위축시킨 영향이 컸다. 또 임진왜란 시기 의병 운동이 거의 대부분 육군 위주로 전개된 반면 정유재란 때는 이순신의 수군과 연대한 의병들의 수륙 연합 작전이 활발히 벌어졌다. 이순신은 삼도수군통제사이면서 전라좌수사의 자격으로 승려의 의병 활동을 지원했고, 호남 연해안의 지역민들은 자발적으로 수군과 연대해 게릴라전을 펼쳤다. 이들은 치고 빠지는 식의 유격 전술로 당시 왜군들을 당황케 했다. 능욕당하느니… 자결 택한 의병장 집안 딸들 석주관 혈투가 의병들의 패배로 막을 내린 즈음, 왜군의 분탕질로 영남과 호남의 백성들은 재물과 식량을 빼앗기고 부녀자는 능욕까지 당했다. 임진왜란 때 3부자가 순절(殉節)한 의병장인 충렬공 제봉 고경명의 차녀도 이 시기에 왜적에게 희생당했다. 전남 영광의 선비 노상룡에게 시집간 고경명의 차녀는 남편이 왜적에게 당한 뒤 장검에 몸을 던져 자결했다. 임진란 초(1592년)부터 광해군 원년(1609년)까지 18년간의 전란 체험과 전쟁 양상 등을 기록한 일기인 고대일록(孤臺日錄)은 ‘흉적이 구례와 남원에 들어와서 사방으로 나다니며 불을 지르고 겁탈했다. 이들이 무인지경으로 들어온 것과 같으니 통탄할 일이다’(정유년 8월 11일)라고 적고 있다. 고대일록의 저자인 정경운 역시 의병장이었다. 함양의 선비인 정경운은 의병장 정인홍 문하에서 학문을 배웠으며, 임진란 때 함양에서 의병을 일으켜 의병장 김면 휘하에서 군량보급과 군기조달에 주력해 경상도 지역 왜군을 격퇴하는 데 공을 세웠다. 정경운의 장녀도 이 시기에 함양으로 쳐들어온 왜병을 피해 피신했다 발각돼 능욕 직전 단도로 자진했다. 구례의 2차 의병 운동… 계곡이 ‘피내(血川)’로 바뀌어 구례의병들이 산화한 지 한 달여 지난 1597년 11월 초. 구례 읍내 젊은 선비들을 주축으로 2차 의병이 일어났다. 왕득인의 아들 왕의성은 ‘석주관 복수의병’을 자임했다. 이정익 한호성 양응록 고정철 오종 등 5인의 의사(義士)들도 수백 명을 의병 대열에 모았다. 각자의 가노(家奴)들을 동원한 다음 지리산에 피란 중인 지역민들을 모았다. 1차 때보다 훨씬 많은 병력으로 구성된 2차 구례의병이 출범했다. 2차 구례의병은 11월 8일 연곡에서 조경남이 이끄는 남원의병과 합동 작전으로 왜군 60여 명을 무찔렀다. 연곡에서 의병에게 일격을 당한 왜군은 보복 공격에 나섰고 11월 중순에서 하순 사이 2차 석주관 혈투가 벌어진다.(화엄사 ‘정유란일기’) 2차 석주관 전투를 앞두고 구례의병은 사기가 드높았다. 화엄사에서 의승병(義僧兵) 153명과 군량미 103섬을 지원받은 것이다. 군세를 보강한 구례의병은 석주관의 지세를 이용해 게릴라전을 펼쳤다. 2차 의병 주력인 ‘5의사의병’을 좌우군으로 통합 편성해 석주관 성 아래 협곡을 사이에 두고 좌우에 배치해 왜적의 빈틈을 치는 기습 협공을 노렸다. 왕의성이 이끄는 의병부대는 산 정상에 진을 쳤다. 왜병을 계곡으로 유인한 뒤 석주관 성과 그 맞은편 숲 속에 잠복한 5의사군이 먼저 작전을 전개했다. 화엄사 의승병들과 합세해 좌우에서 적을 기습했다. 산 위에 진을 친 왕의성 의병대는 계곡 아래 적에게 거석을 굴려 내리는 석탄(石彈)공격을 퍼부었다. 2차 구례의병은 전투 초기에는 대승을 거두는 듯했다. 그러나 끝없이 밀려오는 적은 압도적인 화력을 앞세워 공세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의병들은 피 흘리며 분투했으나 역부족이었다. 계곡 좌우에 있던 5의사군과 의승군 전열이 적의 공세에 무너지기 시작했다. 계곡 주변은 의병과 왜병의 시신으로 뒤덮였다. 2차 의병 가운데 5의사군과 화엄사 의승병 중 생존자는 거의 없다시피 했다. 420년 전 석주관 성 전투가 벌어졌던 계곡을 지금도 ‘피내(血川)’로 부른다. 그나마 산 위에 진을 친 왕의성의 의병부대는 전멸을 면할 수 있었다. 2차 석주관 혈투가 벌어진 시기는 동짓달 추위가 맹위를 떨칠 때였다. 당시 전라좌도 거의 전역을 왜군이 점령해 외부 구원군이 끊겨버린 절망적 상황이었다. 하지만 의병들은 이에 굴하지 않고 처절하게 싸우다 거의 모두 순절했다. 호남 방어 대책 중요성 그토록 강조했건만… 구례 석주관의 지리적 특성과 방어 전략상 중요성을 조선 조정도 알고 있었다. 정유재란발발 한 해 전인 1596년 비변사는 선조에게 계문을 올렸다. ‘전라도와 경상도의 접경지역 요해처로 남원이 가장 중요한데, 순천과 남원 사이에 석주진이 있으니 바로 진주로 통하는 곳입니다. 구례는 가장 먼저 적을 맞게 되는 곳이며 또 성첩도 견고하니 만약 인재를 얻어 이곳을 잘 지킨다면 적군이 서쪽(전라도)을 침범하는 기세를 막아낼 수 있을 겁니다.’(선조실록 권45, 재위 29년 정월 22일) 선조는 ‘그대로 즉시 시행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병조, 전라병사, 비변사 등 어느 기관도 특별한 대응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전라도는 임진란에 이어 정유재란 때도 전쟁 수행을 위해 필수적인 군수보급 기지였다. 전쟁 전 조선 재정 수입의 거의 절반을 전라도가, 7개 도가 나머지 절반을 부담할 정도였다. 이순신이 ‘호남이 없으면, 나라가 없다(若無湖南 是無國家)’고 말한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조선 조정은 정유재란 전부터 전주 남원 순천 나주 등 전라도 주요 네 고을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다짐했었다. 하지만 조정이 남원성을 지키기 위해 사전에 취한 조치라고는 문무를 겸비한 전(前) 남도병사 임현을 배치한 게 다였다. 위나 아래나 명나라 군사에게 의존하고, 병력이나 무기에서 (왜적에 비해) 열세인 지역의병의 활약을 기대할 뿐이었다. 당시 전주·남원 일원에는 명 주력군대가 이미 와있었다. 명나라 장수 양원이 그해 6월부터 3000여 군사를 지휘해 남원성에 주둔하고 있었다. 그러나 명군은 석주관에서 벌어진 의병들의 사투를 방관했다. 지형이 험준해 기병을 동원할 수 없다는 이유였다. 7주갑(周甲·420년·1주갑은 60년) 전, 나라를 위해 희생한 의승병 153명의 요람이던 화엄사에는 8도 의승병 총대장이던 서산대사에게 선조가 하사한 가사(袈裟)를 비롯한 유적들이 많이 남아있다. 구례의병들을 이끌며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7의사’의 희생을 추념하는 부도와 비석은 세월의 더께로 빛이 바랬다. 이들의 헌신과 충의(忠義)를 지금 우리 후손들이 제대로 받들고 기리고 있는지 안타까운 마음이다. 구례=최영훈 논설위원 tao4@donga.com/안영배 전문기자}

    • 2017-10-08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꿈에 神人이 나타나, 왜군 무찌를 전략 알려주었다”

    “꿈이 예사롭지 않으니 임진년 대첩(한산도해전)할 때와 대략 같았다. 무슨 징조인지는 알 수 없었다.”(‘난중일기’ 1597년 9월 13일) “꿈에 어떤 신인(神人)이 가르쳐 주기를 ‘이렇게 하면 크게 이기고, 이렇게 하면 지게 된다’고 하였다.”(‘난중일기’ 1597년 9월 15일) 1597년 9월 16일의 명량대첩을 앞두고 이순신은 며칠 간격으로 꿈을 꾸었다. 그 스스로도 ‘이상한 징조’라고 해석했다. 이순신은 앞서 임진년 한산대첩을 벌일 때(1592년 7월 8일)도 꿈을 꾼 후 적선 60여 척을 대파하는 대승을 거두었다. ‘난중일기’는 이 시기의 기록이 빠져 있어(1592년 6월 11일∼1592년 8월 23일) 구체적으로 어떠한 꿈이었는지 확인할 길은 없다. 이순신은 사천해전(1592년 5월 29일) 때는 ‘백발노인’이 등장하는 꿈을 꾸었다. “공(이순신)은 ‘백발노인(白頭翁)이 발로 차면서 일어나라! 일어나! 적이 왔다’는 꿈을 꾼 뒤, 곧바로 장수를 거느리고 노량 해상에 이르니 적이 과연 와 있었다.”(이분의 ‘충무공행록’) 이순신은 전쟁 와중에 계시적 꿈을 자주 꾸었다. 그가 꿈을 꾸고 나면 현실에서 유사하게 일이 전개됐다. 이순신은 원균이 칠천량 해전에서 패전(1597년 7월 16일)하기 열흘 전, 원균의 몰락을 미리 꿈으로 감지했다. “오늘은 칠석이다. 꿈에 원공(원균)과 함께 모였는데 내가 원공의 윗자리에 앉아 밥을 내올 때 원균이 즐거운 기색을 보이는 것 같았다.”(‘난중일기’ 1597년 7월 7일) 당시는 이순신이 아무 직책 없이 백의종군할 때고, 원균은 삼도수군통제사로 조선수군을 지휘할 때였다. 그런데 이순신이 원균보다 윗자리에 앉아 있는 꿈은 곧 상황이 뒤바뀔 것이며, 경쟁과 갈등 관계가 종료됨을 암시하는 것이었다. 실제로 이순신은 이 꿈을 꾼 뒤, 더 이상 원균에 대한 원망을 늘어놓지 않았다. 가자! 울돌목으로 이순신은 9월 14일, 진도 벽파진에서 왜선 55척이 어란포(해남군 송지면) 앞바다에 들어왔다는 보고를 받고 결전이 임박했음을 알았다. 그리고 그날 밤 신인이 이기는 비법을 전수해주는 꿈을 꾼 것이다. 사람이 지극히 한마음을 가지면 꿈 등 잠재의식이나 무의식 속에서 해답을 찾아내듯, 이순신은 반드시 승리할 것이라고 마음을 다잡았다. 전투를 지휘하는 장수가 스스로 이길 수 있다는 신념과 확신이 섰을 때 부하들을 다독여 승리를 이끌어낼 수 있다는 걸 누구보다도 잘 아는 이순신이었다. 그가 문서에 수결(手決)할 때 이름 대신 ‘일심(一心)’이란 글자를 쓴 것도 이런 마음가짐 때문일 것이다. 이순신은 바로 전라우수영(해남군 문내면)으로 진을 옮기고 결전을 대비했다. 이윽고 9월 16일 이른 아침 별망군(別望軍)이 보고했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적선들이 명량(울돌목)을 거쳐 곧장 진을 치고 있는 곳(전라우수영)으로 향해 오고 있습니다.”(‘난중일기’) 이순신은 결전을 치를 장소로 울돌목을 선택했다. 해남과 진도 사이의 길이 2km 남짓한 해협인 울돌목은 바닷길이 병목처럼 급격히 좁아진다. 폭이 가장 좁은 곳이 300m에 불과해 한국 수역에서 조류가 가장 빠른 곳이다. 이순신은 그동안 남해안 일대를 돌아다니면서 명량해협을 자세히 관찰해왔다. 밀물 때는 남해의 바닷물이 한꺼번에 서해로 빠져나가는데, 시속 약 20km(평균 유속 10노트)의 물살이 해협의 암초에 부딪쳐 소용돌이치면서 천지를 울리는 굉음을 냈다. 바다가 우는 것 같다고 해서 울 명(鳴)자를 붙여 ‘울돌목(물이 울면서 돌아가는 목)’ 또는 ‘명량(鳴梁)해협’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울돌목은 건곤일척의 승부처였다. 왜군이 이곳을 장악하면 바로 서해바다를 접수해 곧장 북으로 내달려 경강(京江·한강)까지 진격할 수 있다. 또 서해를 통한 호남의 병참기지까지 확보함으로써 전라도를 완전히 장악함은 물론이고 내륙 각지의 일본 좌군과 우군들에게 식량과 무기 등을 원활히 보급할 수 있다. 반면 이곳을 조선수군이 지키면 왜군은 후방 보급로가 차단돼 더 이상 북상하기가 어렵다. 후방 교두보가 불안해지면 왜군은 육지전에서 수세(守勢)로 전환할 수밖에 없다. 이순신은 여러 장수들을 불러 출전을 명령한 뒤 상선(上船·대장선)에 올라 명량해협으로 나갔다. 이순신의 수군은 판옥선 13척과 초탐선(정탐선) 32척이 전부였다. 반면 왜군은 주력 전함인 세키부네 130여 척이 전면으로 나선 가운데 그 뒤로는 대형 전선인 아타케부네(安宅船) 70여 척을 포함해 200여 척이 대기하고 있었다. 왜군 2만 명이 명량해협을 가득 메운 어마어마한 수였다. 칠천량 해전에서 공을 세워 히데요시로부터 포상을 받은 도도 다카도라가 수군 총대장을 맡고 있었다. 일본에서 ‘해적왕’으로 유명한 구루시마 미치후사(조선에서는 ‘마다시’라고 불렀음)는 임진왜란 당시 조선수군에게 목숨을 잃은 형의 원수를 갚기 위해 이순신을 죽이겠다며 선봉을 자처했다. 조선의 판옥선 지휘관들은 압도적인 규모의 왜선들을 보자 겁부터 집어먹었다. 이순신은 이런 상황을 예상해 출전 전 여러 장수들에게 엄중하게 다짐을 받아두었던 터였다. “병법에 이르기를 ‘반드시 죽고자 하면 살고, 반드시 살고자 하면 죽는다(必死則生, 必生則死)’고 하였다. 또 ‘한 명의 장부가 길목을 지키면 천 명도 두렵게 할 수 있다’고 했는데 이는 우리를 두고 한 말이다. 너희 장수들이 조금이라도 명령을 어기면 즉시 군율을 적용해 조금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난중일기’) 그러나 왜선들이 조류가 자신들에게 유리해진 틈을 타 쏜살같이 진격해오자, 이순신이 탄 상선을 제외한 나머지 12척은 바라만 보고서 더 나아가려 하지 않았다. 이순신의 배만 홀로 거센 조류를 맞으면서 적선 가운데로 돌진했다. 판옥선의 막강 화포인 지자(地字)와 현자(玄字) 총통 등을 이리저리 발사했다. 뱃전의 군관들은 화살을 비바람같이 쏘아댔다. 적선들은 화포와 화살을 피해 물러났다 다가왔다를 반복했고 결국 이순신의 상선은 적선에게 겹겹이 포위되고 말았다. 군사들은 겁에 질려 얼굴빛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이순신이 타일렀다. “적이 비록 천 척이라도 감히 우리 배를 곧바로 공격하지 못할 것이니 조금도 동요하지 말고 힘을 다해 적을 쏘라.”(‘난중일기’) 이순신은 뿔피리를 불어 통제사의 명을 받드는 중군 판옥선을 향해 영하기(令下旗)와 초요기(招搖旗)를 세웠다. 그러자 군령을 받은 중군장 김응함의 배가 점차 이순신의 상선 가까이 다가왔고, 거제현령 안위의 판옥선도 왔다. 이순신은 뱃전에 서서 먼저 도착한 안위를 불렀다. “안위야! 네가 억지 부리다 감히 군법에 죽고 싶으냐? 물러나 도망간들 어디 가서 살 것 같으냐?”(‘난중일기’) 실제로 그랬다. 통제사의 군령을 따르지 않은 장수들은 전투 후 책임을 물어 살아남지 못했다. 그러자 안위와 김응함은 황급히 적선으로 치고 들어갔다. 적장의 배와 다른 두 척의 세키부네가 안위의 배에 개미처럼 달라붙었다. 구루시마 미치후사와 그 휘하의 해적 출신 수군들이었다. 이들은 배에 올라타서 싸우는 등선백병전(登船白兵戰)에는 이골이 난 싸움꾼들이었다. 조선 민간인도 해전에 동참 안위의 군사들은 배에 올라타려는 왜병들을 향해 몽둥이, 긴 창, 수마석(둥그스름한 돌) 등으로 죽을힘을 다해 싸웠다. 배에 왜병들이 올라타면 가을바람에 낙엽 뒹굴듯이 나자빠지던 예전의 조선수군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이순신이 출전 전 13척의 판옥선을 모두 구선(龜船·거북선) 모양으로 요새화해 왜군의 등선백병전을 차단하는 조치가 먹혀든 덕분이기도 했다. 전투가 치열하게 전개되자 의병전술(疑兵戰術)의 하나로 후방에 포진해 있던 향선(피란선) 100여 척 가운데 장흥 출신의 마하수 등 민간인들도 직접 전투에 뛰어들었다. 4명의 아들까지 이끌고 적진에 뛰어든 마하수는 적의 총탄에 전사했다. 다른 이들은 적을 피하라는 수군 지휘부의 명령에도 인근 지역을 떠나지 않고 군량과 군복, 화살과 활 등을 조달하는 일을 했다. 특히 전북 고창 출신의 유학자 오익창은 조선수군과 왜군과의 싸움이 벌어지려 하자 여러 섬으로 몸을 피하려던 지역 사대부들까지 설득해 함께 조선수군을 지원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오익창은 치열하게 전투가 벌어지는 판옥선과 피란선단 사이를 왕래하면서 밥과 동과(冬瓜) 등을 전달했다. 동과는 전투 중 수군의 갈증을 해소하는 데 긴요한 역할을 했다. 또 피란선에서 제공한 솜이불을 모아 물에 적신 다음 수군의 배에 걸어두게 함으로써 적의 철환으로부터 조선군을 보호토록 했다.(‘沙湖集’·‘湖南節義錄’) 바다가 바라보이는 육지 쪽에서는 조선수군을 응원하는 백성들의 함성이 넘쳐났다. 이처럼 민간인들이 위장전술과 지원활동을 아끼지 않았고, 이순신과 조선수군에게는 큰 힘과 위로가 되었다. 마침내 안위의 배에 달라붙었던 적선 3척이 섬멸됐다. 조선군의 집중 사격으로 적장 구루시마 미치후사는 바다에 떨어져 죽었다. 이순신은 적장을 건져내 그 머리를 베어 상선의 깃대에 매달도록 했다. 이 광경을 본 나머지 판옥선들도 전투에 뛰어들었다. 이순신의 함대를 에워쌌던 적선들이 차례로 격파됐다. 이때 왜군 총대장 도도 다카도라 역시 팔 두 군데를 부상당했다. 왜선들은 더 이상 저항하지 못하고 물러섰다. 새벽 묘시(오전 5∼7시)부터 시작한 전투는 신시(오후 3∼5시)에 끝났다. 모두 30여 척의 왜선을 격파하고 4000명의 왜군을 사살한 대승이었다. 판옥선은 단 한 척도 잃지 않았다. “실로 천행(天幸)이로다.” 명량해협의 전투가 끝나자 이순신이 내뱉은 말이었다. 이순신은 여기서 전투를 멈추었다. 바람이 다시 아군에 불리한 역풍으로 불고, 왜선이 전열을 가다듬어 다시 쳐들어올 경우 수적으로 열세인 수군이 위험해진다는 점을 들어 더 이상의 공격을 멈춘 것이다.이순신에게 차가운 선조 이순신의 리더십 아래 민관군이 합심해 이룬 명량해전의 대승은 정유재란의 흐름을 완전히 뒤집는 전환점이었다. 그해 2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재침을 명령한 이래 왜군이 일방적으로 조선 땅을 유린하던 상황에서 거둔 첫 승전이었다. 칠천량 해전에서 전멸한 수군을 단 2개월 만에 재건해 거둔 세계 전사(戰史)에 남을 대승이었다. 이 승리는 전투 의지를 잃고 내빼기 바빴던 육지의 조선군들에게도 다시 싸울 용기를 주었다. 각지의 의병들도 왜군들과 본격적으로 맞서기 시작했다. 호남에서는 이순신 수군과 연대한 의병들이 본격적인 게릴라전을 펼쳤다. 남의 동네 불구경하듯 멈칫거리던 명나라 군대도 더 이상 나 몰라라 하지 않았다. 일방적으로 기울던 전세가 이순신 덕분에 역전된 것이다. 조선군에 대해 인색한 평가를 내리던 명나라 장군도 이순신이 왜적을 많이 포획했다며 공적을 높이 샀다. 사실 중국은 서해를 통한 왜군의 중국 본토 공격을 차단해준 이순신에게 고맙다고 머리를 숙여야 할 판이었다. 그러나 정작 선조의 반응은 차가웠다. 자신의 수군철폐령을 거부한 것이 괘씸해서인지, 선조는 이순신이 명량대첩 승전을 보고하는 장계를 올렸을 때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보다 못한 명나라 경리 양호가 개인적으로 이순신에게 은자(銀子)와 비단을 상으로 주자, 선조는 양호에게 이렇게 말했다. “통제사 이순신이 사소한 왜적을 잡은 것은 바로 그의 직분에 마땅한 일이며 큰 공이 있는 것도 아닌데, 대인이 은단(銀段)으로 상 주고 표창하여 가상히 여기시니 과인은 마음이 불안합니다.”(‘선조실록’) 선조는 명량대첩이 끝난 지 두 달이 지난 후에야 이순신에게 겨우 은자 20냥을 주었다. 가토 기요마사의 도해(渡海) 정보를 흘린 이중첩자 요시라에게는 정3품 당상관 벼슬에다 은자 80냥을 통 크게 준 선조였다. 진도·해남=안영배 전문기자 ojong@donga.com ※ 14화는 10월 8일 자(일요일)에 게재됩니다.}

    • 2017-09-30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