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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산사는 대부분 개울을 끼고 위치한다. 경관이 수려하긴 한데, 통행은 불편해 교량을 설치한 경우가 많다. 전남 순천시 선암사는 그 중에서도 빼어난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다리를 입구에서 만날 수 있다. 무지개를 닮은 아치교인 승선교(昇仙橋·보물 제400호)다. 아치 사이로 2층 누각인 강선루가 보이는데, 이 전경이 계곡물에 고스란히 비춰져 신비로운 느낌마저 선사한다. 승선교 아래에는 용모양 장식이 걸려 있다. 좀더 자세히 보면 용의 입 주변에 동전 3개가 걸려 있다. 1713년 호암 스님이 공사를 마무리하고 남은 돈을 허투루 쓰지 않고, 훗날 수리비용에 사용하라며 남겼다 한다. 청렴결백한 스님의 뜻이 통한 걸까. 300여 년 간 다리는 튼튼하게 유지됐고, 동전은 고스란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강선루를 지나 조계산 자락으로 더 올라가면 일주문과 함께 본격적으로 사찰 경내로 들어선다. 일주문 뒤쪽 현판에는 ‘해천사(海川寺)’라는 글씨가 써 있다. 선암사는 1761~1824년 이 이름으로 불렸다. 9세기 창건 뒤 10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사찰 전체가 무너져 내릴 만큼 큰 화재 사고를 여러 차례 겪다 보니 바다와 강을 뜻하는 ‘해천’이란 이름으로 바꾼 것이다. 선암사 곳곳에 ‘수(水)’ ‘해(海)’와 같은 글자가 새겨진 전각이 있는 것도 같은 이유다. 덕분인지 19세기부터는 큰 불이 나지 않았고, 6·25전쟁과 10·19사건 등 현대사의 굴곡진 위기도 이겨내며 지금껏 전통 사찰의 원형을 유지해오고 있다. 선암사는 특히 조선 왕실의 사랑을 받은 사찰로도 유명하다. 정조는 한동안 왕자를 얻지 못해 애가 탄 적이 있다. 정조의 부탁으로 눌암대사가 선암사의 원통전 건물에서 100일 기도를 드렸는데 기적같이 순조가 태어났다고 한다. 순조는 즉위 이듬해인 1801년 원통전에 큰 복을 낳게 한 밭이란 뜻의 ‘대복전(大福田)’ 현판을 하사했다. 지금도 순조의 글씨가 남아있는 원통전은 사찰인데도 조선 왕실의 건축 양식인 정(丁)자형으로 지어져 있다. 선암사의 대웅전 현판에는 ‘김조순’이라는 글씨가 써 있다. 뛰어난 명필가라 하더라도 뒤편에 이름을 남긴다는 점에서 불손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순조의 장인으로 세도정치의 정점에 서 있던 김조순(1765~1832)은 일부러 이름을 내걸었다. 당시 억불정책으로 인해 각종 수탈과 핍박의 대상이었던 불교의 현실에서 선암사 역시 예외일 수 없었다. 최고 권력자의 이름을 통해 지방 관료들의 횡포로부터 보호하고자 했던 김조순의 배려였던 셈이다. 선암사 뒤편 산자락에는 약 3만3000㎡(1만여 평)에 이르는 야생 차 밭이 있다. 우리나라에서 볼 수 있는 가장 큰 규모의 재래 차 밭이다. 지금도 선암사 스님들이 차 잎을 직접 따 9번을 볶는 전통 방식으로 생산한다. 은은하면서도 구수한 맛으로, 떫은맛은 느껴지지 않는 우리나라 전통 차의 원형이라 할 수 있다. 한번 맛보면 쉬이 잊혀지질 않는다. 순천=유원모 기자onemore@donga.com}

고고학계가 북한 지역의 문화재에 대한 공동 조사와 보존 대책이 필요하다는 목소리를 냈다. 한국고고학회 산하 통일고고학특별위원회는 23일 ‘북한 문화유산 공동조사 방안’이라는 주제로 서울 종로구 국립고궁박물관에서 학술회의를 열고 남북한 전문가들이 함께 참여하는 ‘민족 문화유산 공동발굴조사단(가칭)’ 출범을 제안할 계획이다. 학계가 가장 우려하는 부분은 북한의 미비한 문화재 보호 관련 법률이다. 우리나라의 문화재보호법은 1999년 개정돼 3만 m² 이상의 건설공사를 할 경우 지표조사를 의무화하고 있다. 반면 북한의 ‘민족유산보호법’은 사전 조사에 대한 의무 규정이 없고 공사 중 발견되는 문화재에 한해서만 신고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심광주 토지주택박물관장은 2004년 개성공단 부지 조성에 앞서 진행한 발굴조사 경험을 적극 활용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심 관장은 “당시 빠른 시간 안에 부지 착공에 나서야 한다는 북한 측을 설득해 공단 예정 부지를 조사해 고려시대의 역원터 건물과 온돌 시설 등을 찾아내는 성과를 거뒀다”고 밝혔다. 고고학회는 정부의 발표 등을 토대로 앞으로 북한 지역에서 진행될 경원·경의·동해선 등 대규모 철도·도로의 사업 부지가 최소 64km²(약 1936만 평)에 이를 것으로 추산했다. 하지만 북한의 고고학 전문가는 사회과학원 고고학연구소 등에 소속된 170여 명에 불과해 개발 수요에 맞춰 문화재 발굴조사를 감당하기 힘든 게 현실이다. 최종택 고려대 문화유산융합학부 교수는 “남북한의 공동발굴조사단과 ‘남북고고학협회(가칭)’ 설립 등을 검토해야 할 시기”라고 밝혔다. 유원모 기자 onemore@donga.com}

제56회 소충·사선 문화제(위원장 양영두)가 다음 달 27일부터 30일까지 전북 임실군 관촌면 사선대 일대에서 열린다. 이번 문화제는 풍년맞이 무사고 기원 길놀이 공연으로 시작한다. 28일에는 사선루에서 사선녀(四仙女) 신위제가 펼쳐지고, 평양예술단 공연과 사선가요제 예선 및 본선이 열린다. 29일에는 사선녀 선발 전국대회 본선과 전라도 정도(定道) 1000년 기념공연이 열린다. 30일에는 제24회 전국 호남좌도농악 경연대회와 제27회 소충·사선문화상 시상식이 개최된다. 한편 제32회 사선녀 선발대회 참가 접수는 다음 달 5일까지 진행한다. 소충·사선 문화제는 구한말 의병활동을 했던 28인을 추모하며 세운 소충사에서 제례를 지내는 소충제와 3000여 년 전 하늘에서 사선녀가 내려왔다는 전설을 바탕으로 한 사선제가 합쳐진 축제다. 유원모 기자 onemore@donga.com}

“라오스에도 전통 도자기가 많이 출토되는데 보존처리 기술이 없어서 제대로 관리가 안 되는 게 현실이에요. 한국에서 배운 도자기 접합이나 색 맞춤 기술 등을 라오스에 돌아가서 널리 알리고, 적용해 볼 겁니다.” 20일 서울 강남구 한국문화재재단에서 만난 라오스 왓푸박물관의 큐레이터 찬티바 케오칸야 씨(34)는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이같이 말했다. 찬티바 씨는 라오스 정보문화관광부유산국 소속 고고학자 캄콘 핌봉사바스 씨(30)와 함께 2015년 한국으로 유학 왔다. 문화재청과 재단에서 진행한 ‘문화유산 ODA(공적해외원조)’ 인력양성 사업의 첫 번째 대상자로 선발된 것. 한국의 ‘1호 문화유산 ODA 유학생’인 이들은 3년 만에 한국전통문화대 문화유산전문대학원 문화재수리기술학과에서 석사과정을 수료했다. 논문도 통과해 학위 수여식은 내년 2월에 열린다. 라오스는 9∼15세기 인도차이나 반도에 위치한 크메르 제국의 각종 유적과 불교·힌두교 등 동남아 전통 문화재가 다수 남아 있어 프랑스, 인도 등과 함께 문화유산 관련 교류를 계속해 오고 있다. 다른 국가 대신 한국을 선택한 것은 2014년부터 한국문화재재단과 라오스 문화재 당국이 현지에서 공동 진행한 ‘홍낭시다 사원 복원’ 사업에서 보여준 한국의 ‘진심’ 때문이라고 입을 모았다. “단기연수만 가능한 프랑스나 외국어 과정밖에 없는 인도보다는 정규 대학원에서 제대로 공부할 수 있는 한국의 정책에서 진정성을 느꼈습니다. 저절로 배우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죠.”(캄콘 씨) 물론 유학 생활은 쉽지 않았다. 가장 큰 난관은 언어장벽. 유학 내내 수십 번 눈물을 훔쳐내기도 했다. 캄콘 씨는 “아무래도 진도를 따라가기 어려웠다. 하지만 교수님과 동료들이 진심으로 도와줘 석사 과정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며 “힘들 때마다 ‘태양의 후예’ ‘도깨비’ 등 한국 드라마를 보며 언어도 배우고 스트레스도 풀었다”고 웃으며 말했다. 이들은 그처럼 어려운 상황에도 뛰어난 연구 성과를 내놓기도 했다. 올해 3월 문화재보존과학학회의 춘계학술대회에서 찬티바 씨의 ‘라오스 사원의 라테라이트 제작기법 분석’ 논문은 우수상을 수상했다. 찬티바 씨는 “한국에선 쉽게 접할 수 없는 독특한 자재라는 점에서 한국에도 도움이 되는 연구로 평가받은 것 같다”고 겸손해했다. 이들은 다음 달 라오스로 돌아가 한국에서 배운 문화재 보존 기술을 적극 활용할 꿈에 부풀어 있다. 찬티바 씨는 “한국문화재재단 연구팀과 함께 홍낭시다 복원 현장에서 그간 배운 기술을 제대로 적용하고 싶다”며 “다른 이들에게도 체계적이고 수준 높은 한국 문화재 교육을 받을 기회가 더 많이 주어졌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유원모 기자 onemore@donga.com}

“숨이 턱턱 막히고, 머리까지 어질어질하더라고요. ‘더워서 못 견디겠다’며 중간에 빠져나간 사람들 때문에 무대 바로 앞에 빈자리가 생길 지경이었다니까요.” 지난달 30일 미국 래퍼 켄드릭 라마의 첫 내한 공연에 다녀온 대학생 우다인 씨(23·여)는 당시를 떠올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서울 최고기온이 37도까지 치솟았는데, 2만 명이 빼곡히 들어찬 스탠딩 객석에 폭염 대비 시설이 없었기 때문이다. 관객 수십 명이 결국 탈진 증세를 겪어 공연장을 빠져나갔다.○ 폭염이 바꿔놓은 여름 문화계 지형 기상관측 역사에도 남을 만큼 무더운 올해 여름. 야외로 나가길 주저할 정도로 폭염이 이어지자 여름 문화 축제나 행사들의 이모저모가 바뀌고 있다. 공연·축제업계에선 이제 여름 이벤트에서 ‘온열 질환’이 핵심 키워드로 떠올랐다. 10∼12일 열린 인천 펜타포트 락 페스티벌은 사흘 내내 살수차를 동원해 쉴 새 없이 객석에 물을 뿌렸다. 야외 행사장 곳곳에 대형 선풍기를 배치하고, 임시 컨테이너 박스에 에어컨을 설치한 ‘쿨 존’까지 운영했다. 펜타포트 관계자는 “앞으로 페스티벌 기간엔 ‘폭염’을 기본 전제로 천막 형태의 에어컨 존을 추가로 설치하는 등의 대비책을 마련하려 한다”고 밝혔다. 이렇다 보니 공연 자체도 ‘시원함’을 콘셉트로 해야 인기를 끌었다. 객석으로 쏟아지는 물을 맞으며 콘서트를 즐기는 ‘싸이 흠뻑쇼’는 3∼5일 공연을 앞두고 예매 시작 15분 만에 60만 명이 몰렸다. 도심 한복판에는 얼음과 눈도 등장했다. 11일 서울 종로구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한여름 밤의 눈조각 전시회’는 하루에 2만 명이 찾을 정도였다. 제작 환경도 폭염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현장에서 얼음주머니와 휴대용 선풍기 지급은 필수항목으로 자리 잡았다. 한 드라마 외주제작사 PD는 “탈진과 어지럼증을 호소하는 제작진을 위해 소금과 포도당도 구비해 뒀다”고 말했다. 지방 곳곳을 도는 KBS2 ‘1박2일’ 제작진은 3일부터 이틀간 예정돼 있던 야외 촬영을 취소했다. ○ ‘에어컨 빵빵’ 실내 행사의 역대급 인기 전국 박물관들은 ‘박캉스(박물관+바캉스)’를 즐기는 시민들로 폭발적인 관람객 증가를 기록했다. 박물관은 유물 보존을 위해 1년 내내 20∼24도의 온도를 유지하기에 더욱 시원하게 느껴졌다. 16일 서울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을 찾은 김은지 씨(35·여)는 “야외로 나가기 부담스러워 실내 전시를 찾았다”며 “아이들과 함께 온 부모들이 박물관에 부쩍 많이 늘었다”고 말했다. 국립해양박물관(부산 영도구)은 여름철 사상 최고의 관람객 동원을 기록했다. 7월 15일∼8월 15일 17만6880명이 찾아와 지난해에 비해 무려 28%나 증가했다. 관계자는 “시원한 바다가 떠오르는 이름 덕도 톡톡히 본 것 같다”고 자평했다. 영화관 역시 폭염이 도움이 됐다. 영화진흥위원회 통합전산망에 따르면 폭염이 절정에 이른 8월 1∼15일 영화관을 찾은 관객은 2049만 명으로, 지난해 같은 시기(1897만 명)에 비해 150만 명이 늘었다. 공연·전시계도 이번 폭염을 치르며 ‘인식의 전환’이 벌어졌다. 그간 야외로 떠나는 휴가철인 7, 8월엔 관객이 없어 대형 프로젝트는 피해 왔다. 하지만 치명적인 더위는 ‘실내’를 장점으로 바꿔놓았다. 하재근 대중문화평론가는 “앞으로 한반도도 여름엔 폭염의 일상화가 예상돼 문화계 역시 야외보다는 실내에서 시민들을 끌어들일 방안을 고심하고 있다”며 “업계에서도 ‘폭염 특수’를 겨냥한 문화 콘텐츠를 계속해서 선보일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지운 easy@donga.com·유원모 기자}

17일 견우와 직녀가 만난다는 칠월칠석(음력 7월 7일)을 맞아 70년 가까이 중단됐던 인천 강화군 볼음도의 ‘은행나무 제사’가 문화재청 등의 주최로 다시 열렸다. 이 은행나무(천연기념물 제304호)는 독특하게 분단의 아픔을 지닌 식물이다. 높이 24m, 둘레 9.8m인 이 나무는 원래 황해남도 연안군 호남리에서 한 은행나무(암나무)와 한 쌍의 부부를 이룬 수나무. 하지만 800여 년 전 홍수로 인해 뿌리째 뽑혀 홀로 볼음도로 떠내려 왔다. 당시 어민들은 이를 건져 섬에 심었고, 이후 두 지역에선 음력 정월 그믐에 맞춰 각각 제사를 지내는 독특한 전통문화를 이어 왔다. 하지만 분단 뒤 ‘부부 은행나무’ 제사는 명맥이 끊겨 버렸다. 연안군 호남중학교 뒷마당에 있다는 암나무는 북한 천연기념물 제165호로 지정돼 있다. 문화재청과 강화군, 한국문화재재단, 섬연구소가 주최한 이날 행사에서는 강령탈춤 마당놀이와 신은미 화가의 북한 암나무를 기리는 수묵화 그리기 등 다양한 공연이 펼쳐졌다. 김종진 문화재청장은 “부부 은행나무는 6·25전쟁 뒤 이산가족처럼 서로 떨어져 오랜 세월을 견뎌 왔다”며 “남북 협력을 통해 공동으로 제례를 지내는 방안을 추진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유원모 기자 onemore@donga.com}

죽음에 직면할 정도로 가난한 학창 시절을 보내야 했다. 일제강점기에 대학을 다닐 때는 학도병 징집을 피해 기적같이 살아남았고, 6·25전쟁 중 월남해 6남매를 포함한 10명의 가족을 돌봐야 했다. 행복과는 거리가 먼 인생처럼 보이지만 이 같은 삶을 산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98)는 “고맙습니다. 행복했습니다”라고 말한다. 올해 세는나이로 백수(白壽)를 맞은 저자가 행복의 본질에 관해 풀어놓은 에세이다. 100년 가까운 삶에서 행복을 먼저 느껴본 인생 선배가 후배들에게 행복을 예습시켜 준다. 저자는 흐려진 연못 속에서 홀로 깨끗해질 수 없듯이 우리나라가 행복 친화적인 사회로 변해야 한다고 말한다. ‘성공해야 행복을 쟁취할 수 있다’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행복한 삶이야말로 성공한 것’이라는 인식의 변화가 필요하다는 것. 이를 위해 독서와 사색, 정신적 휴식이 필요하다고 조언한다. ‘일하는 기쁨’ 역시 빼놓을 수 없다. 저자는 연세대 철학과에서 정년을 마친 뒤 수필가, 강연자 등으로 현재까지 왕성한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일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삶의 방관자에 불과하다며 행복과 일의 높은 상관관계에 주목한다. “돈을 목적으로 일하는 사람은 행복의 초보인 3분의 1쯤 된다. 돈보다는 일을 즐기고, 보람을 찾는 사람은 3분의 2쯤, 일의 가치가 무엇인가를 깨닫는 사람은 행복의 100을 찾게 된다.” 행복은 주어지거나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삶 속에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행복을 발견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사랑’이라고 말한다. “사랑이 있는 곳에는 언제나 행복이 함께했다는 사실을 체험했다. 사랑의 척도가 그대로 행복의 기준이 되곤 했다. 그래서 행복을 염원하는 사람에게 ‘나는 행복했습니다. 여러분도 사랑을 나누십시오’라는 인사를 드리면서 붓을 놓겠다.”유원모 기자 onemore@donga.com}

13일 찾은 충남 공주시 마곡사는 태화산 자락의 마곡천이 포근히 감싸고 있었다. 사찰 입구에서 볼 수 있는 해탈문(금강문)과 천왕문이 일렬로 서 있지 않고, 30도가량 꺾여 있었다. 굽어진 하천 지형에 순응하기 위한 겸손한 가람배치다. 극락교를 지나 산사 경내로 진입하면 왼편에 백범 김구(1876∼1949)가 머물렀던 ‘백범당’이 나온다. “냇가로 나가 삭발진언을 쏭알쏭알 하더니 내 상투가 모래 위로 툭 떨어졌다. 이미 결심은 하였지만 머리털과 같이 눈물이 뚝 떨어졌다.”(백범일지 중에서) 1898년 백범은 명성황후 시해에 가담한 일본인 장교를 죽인 혐의로 인천형무소에 투옥된다. 이내 탈옥에 성공한 백범은 일본의 감시를 피해 마곡사로 숨어들었다. 이곳에서 원종(圓宗)이라는 법명으로 1년간 지내며 재개를 도모했다. 광복 이후인 1946년, 백범이 임시정부 요원들과 함께 마곡사를 다시 찾아와 심은 향나무는 지금도 건강하게 자라고 있다. 마곡사 뒤편으로 200여 m를 걸어가면 백범이 머리를 깎은 장소인 ‘삭발바위’가 나타난다. 그의 발자취를 느낄 수 있도록 마곡천을 따라 ‘백범 명상길’이 조성돼 있다. 백범당 옆에는 사찰의 주법당인 대광보전과 대웅보전이 있다. 대광보전에는 건물 내외부 벽면 전체에 불화가 새겨져 있어 마치 미술관에 온 듯하다. 내부의 비로자나 불상 뒤편에는 3m가 넘는 거대한 수월백의관음보살도가 그려져 있다. 이처럼 독특한 아름다움을 간직한 배경에는 ‘우리나라 화승(畵僧) 배출의 산실’이라는 마곡사의 역사가 자리 잡고 있다. 경기 남양주시의 흥국사(경산화소), 금강산의 유점사(북방화소)와 함께 남방화소로 불리며 우리나라 3대 화소(畵所)사찰로 꼽힌다. 조선 후기의 보응, 문성 스님부터 근대 불교미술의 선구자 일섭 스님 등 당대 최고로 평가받는 화승들이 모두 마곡사 출신이다. 화승의 명맥은 최근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대한민국 최초의 불화장 중요무형문화재(제118호)인 석정 스님 역시 마곡사 화승으로 활동했다. 이날 동행한 정병삼 숙명여대 역사문화학과 교수는 “화승의 미술 교육은 매우 엄격하기로 유명하다”며 “밑그림을 따라 1000번, 옆에 놓고 그리기를 1000번, 보지 않고 1000번을 그리는 등 한 그림마다 3000번의 연습을 거칠 정도”라고 말했다. 이어 “산사 중에서도 문화예술의 향기가 가장 잘 남아 있는 곳이 마곡사”라고 설명했다. 마곡사는 남방화소의 명맥을 잇고, 전통 불교미술 보존을 위한 교육원 건립을 추진하고 있다. 그림뿐 아니라 빼어난 글씨도 함께 즐길 수 있다. 구한말부터 일제강점기까지 최고의 명필로 이름을 날린 해강 김규진(1868∼1933)이 마곡사 현판을 썼고, 대광보전이라는 글씨는 김홍도의 스승인 표암 강세황(1713∼1791)의 작품이다. 정조 때 문신이었던 송하 조윤형(1725∼1799)이 남긴 심검당 현판도 남아 있다. 대광보전 오른편의 고구려식 창고인 ‘고방’은 여전히 창고로 사용되고 있다. 나무의 원형을 살린 이색적인 사다리와 습기 제거를 위해 외부로 개방된 1층 구조 등 우리나라 전통의 생활유산을 생생히 느낄 수 있다. 공주=유원모 기자 onemore@donga.com}

13일 찾은 충남 공주시 마곡사는 태화산 자락의 마곡천이 포근히 감싸고 있었다. 사찰 입구에서 볼 수 있는 해탈문(금강문)과 천왕문이 일렬로 서 있지 않고, 30도 가량 꺾여져 있었다. 굽어진 하천 지형에 순응하기 위한 겸손한 가람배치다. 극락교를 지나 산사 경내로 진입하면 왼편에 백범 김구(1876~1949)가 머물렀던 ‘백범당’이 나온다. “냇가로 나가 삭발진언을 쏭알쏭알 하더니 내 상투가 모래위로 툭 떨어졌다. 이미 결심은 하였지만 머리털과 같이 눈물이 뚝 떨어졌다.”(백범일지 중에서) 1898년 백범은 명성황후 시해에 가담한 일본인 장교를 죽인 혐의로 인천형무소에 투옥된다. 이내 탈옥에 성공한 백범은 일본의 감시를 피해 마곡사로 숨어들었다. 이곳에서 원종(圓宗)이라는 법명으로 1년간 지내며 재개를 도모했다. 광복 이후인 1946년, 백범이 임시정부 요원들과 함께 마곡사를 다시 찾아와 심은 향나무는 지금도 건강하게 자라고 있다. 마곡사 뒤편으로 200여m를 걸어가면 백범이 머리를 깎은 장소인 ‘삭발바위’가 나타난다. 그의 발자취를 느낄 수 있도록 마곡천을 따라 ‘백범 명상길’이 조성돼 있다. 백범당 옆에는 사찰의 주법당인 대광보전과 대웅보전이 있다. 대광보전에는 건물 내외부 벽면 전체에 불화가 새겨져 있어 마치 미술관에 온 듯하다. 내부의 비로자나 불상 뒤편에는 3m가 넘는 거대한 수월백의관음보살도가 그려져 있다. 이처럼 독특한 아름다움을 간직한 배경에는 ‘우리나라 화승(畵僧) 배출의 산실’이라는 마곡사의 역사가 자리 잡고 있다. 경기 남양주시의 흥국사(경산화소), 금강산의 유점사(북방화소)와 함께 남방화소로 불리며 우리나라 3대 화소(畵所)사찰로 꼽힌다. 조선 후기의 보응, 문성스님부터 근대 불교미술의 선구자 일섭스님 등 당대 최고로 평가받는 화승들이 모두 마곡사 출신이다. 화승의 명맥은 최근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대한민국 최초의 불화장 중요무형문화재(제118호)인 석정스님 역시 마곡사 화승으로 활동했다. 이날 동행한 정병삼 숙명여대 역사문화학과 교수는 “화승의 미술 교육은 매우 엄격하기로 유명하다”며 “밑그림을 따라 1000번, 옆에 놓고 그리기를 1000번, 보지 않고 1000번을 그리는 등 한 그림마다 3000번의 연습을 거칠 정도”라고 말했다. 이어 “산사 중에서도 문화예술의 향기가 가장 잘 남아있는 곳이 마곡사”라고 설명했다. 마곡사는 남방화소의 명맥을 잇고, 전통 불교미술 보존을 위한 교육원 건립을 추진하고 있다. 그림 뿐 아니라 빼어난 글씨도 함께 즐길 수 있다. 구한말부터 일제강점기까지 최고의 명필로 이름을 날린 해강 김규진(1868~1933)이 마곡사 현판을 썼고, 대광보전이라는 글씨는 김홍도의 스승인 표암 강세황(1713~1791)의 작품이다. 정조 때 문신이었던 송하 조윤형(1725~1799)이 남긴 심검당 현판도 남아있다. 대광보전 오른편의 고구려식 창고인 ‘고방’은 여전히 창고로 사용되고 있다. 나무의 원형을 살린 이색적인 사다리와 습기 제거를 위해 외부로 개방된 1층 구조 등 우리나라 전통의 생활유산을 생생히 느낄 수 있다. 공주=유원모 기자onemore@donga.com}

조선은 ‘지도의 나라’였다. 동아시아 최초의 세계지도로 평가받는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는 조선 왕조가 시작된 뒤 10년 만인 1402년에 만들어졌다. 1861년에는 고산자(古山子) 김정호가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를 만드는 등 500년간 각종 지도와 지리지 제작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전쟁에 대비하고 효율적인 통치를 하기 위한 실용적인 목적뿐 아니라 감상을 위한 용도로도 제작돼 뛰어난 미적 완성도를 가진 작품이 수두룩하다. 이와 같은 조선 지도의 역사를 한자리에서 즐길 수 있는 이색적인 전시회가 열린다. 국립중앙박물관 상설전시관 1층에서 14일부터 열리는 특별전 ‘지도예찬―조선지도 500년, 공간·시간·인간의 이야기’다. 이번 전시는 ‘동국대지도’(보물 제1582호), ‘대동여지도 목판’(보물 제1581호) 등 박물관 소장품은 물론이고 국내 20여 기관과 개인 소장 지도, 지리지 등 260여 점을 선보인다. 특히 1557년 제작한 ‘조선방역지도’(국보 제248호)와 1770년경 신경준이 영조에게 바친 원본으로 추정되는 ‘경상총여도’(보물 제1599호), 한국교회사연구소 소장 18세기 지리지 ‘여지도서(輿地圖書)’는 일반에 처음으로 공개한다. 특히 임진왜란 때 일본에 유출됐다가 1930년대 한국에 돌아온 조선방역지도는 가로세로 61×132cm 크기로, 전국 팔도의 각 군과 현을 다른 색상으로 칠해 가독성이 높다. 아파트 3층 높이에 이르는 대동여지도의 원본 전체를 감상할 수 있다. 10월 28일까지. 4000∼6000원. 유원모 기자 onemore@donga.com}

담백한 흰색 외벽은 소박한 한국인의 모습을 보는 듯하다. 하지만 내부로 들어가기 위해 세 번이나 꺾여 돌아가는 진입 계단을 거치면 긴장감이 점점 높아진다. 성당 내부는 신자 누구나 제단과 가깝게 느끼도록 타원형으로 설계돼 포근한 느낌을 준다. 이곳은 6일 문화재로 등록된 경북 칠곡군 왜관성당(등록문화재 제727호)이다. 경북 김천시 평화성당, 충북 제천시 의림동성당, 전북 전주시 복자성당까지. 소박하면서도 뛰어난 건축미를 자랑하는 이 성당들에는 공통점이 있다. 독일 출신 알빈 슈미트 신부(1904∼1978)가 설계했다는 것이다. 알빈 신부의 타계 40주기를 맞아 한국에서 그가 남긴 건축 유산에 대한 재조명이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다. 지난달 19일부터 독일 뮌스터슈바르자흐 수도원에서 ‘알빈 신부 특별전’이 3개월 일정으로 열리고 있고, 그의 작품 세계를 조명한 책 ‘교회건축가 알빈 슈미트’가 최근 독일어로 번역돼 출간됐다. 이 책을 쓴 김정신 단국대 명예교수는 “알빈 신부는 유럽의 모더니즘 건축 양식을 한국 성당에 도입했을 뿐 아니라 화려함을 배제하고 조화로움을 중시한 한국 성당 건축의 모범을 만들어낸 인물”이라고 설명했다. 알빈 신부가 우리나라와 인연을 맺은 것은 1937년 한국에 선교사로 부임하면서부터다. 일제강점기였던 당시 한국인이 많이 이주해 있던 만주 북간도의 옌지(延吉)교구에 파견됐다. 그러나 1945년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중국이 공산화되면서 1946년 투옥된다. 1949년 독일로 추방된 그는 교회건축가로 본격적으로 변신한다. 당시 독일 사회는 전후 복구 과정에서 3000여 개에 이르는 성당을 재건하면서 현대 종교건축 이론과 시공 기술이 폭발적으로 성장한 시기였다. 이후 알빈 신부는 1958년 김천 평화성당 설계를 시작으로 20년간 한국 성당 건축의 중흥을 이끈다. 1959년 설계한 경북 문경시 점촌동성당은 외부의 사각 기둥이 주상절리처럼 곧게 뻗어 있어 독특한 조형미를 지닌다. 내부 공간은 부채꼴 모양으로 만들어 공간 활용을 극대화함으로써 한국적 상황에 잘 맞는 성당 건축물로 평가받고 있다. 1978년까지 20년 동안 알빈 신부는 122개 성당(작은 예배실인 경당, 신부가 상주하지 않는 소규모 성당인 공소 포함)을 포함해 무려 185개 건축물을 설계했다. 김 명예교수는 “알빈 신부는 건물당 10∼15장의 도면을 남겼는데, 그의 도면에는 시공이 가능하도록 기록한 mm 단위의 치수와 성물 제작 방법을 설명하는 내용이 고스란히 담겼다”며 “알빈 신부와 협력했던 수사들에 따르면 그의 도면은 별도의 추가 지시 없이 공사가 가능할 정도였다고 한다”고 밝혔다. 알빈 신부의 성당들은 토목 공사를 최소화하고, 주변 대지와 조화를 이뤘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교회에서는 거룩함과 세속적인 것, 영원함과 무상함이 함께 만나기 때문에 다양한 요구에 대응할 수 있어야 한다”는 그의 철학을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는 것. 특히 건물 외관보다는 내부 공간을 강조했는데 제대와 신자들이 자리하는 회중석을 최대한 가깝게 해 누구나 미사에 능동적이고 편안하게 참여할 수 있도록 했다. 김 명예교수는 “50년이 넘은 성당들이지만 현재도 생활하는 데 전혀 불편함이 없을 정도로 아름다움과 기능적인 요소를 모두 담은 뛰어난 건축물이다”라고 말했다. 유원모 기자 onemore@donga.com}

동아일보와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디지털인문학센터가 공동으로 8·15광복 이후 본보에 실린 기사 빅데이터를 분석한 결과 대한민국 70년 동안 우리 사회·문화의 변화상이 고스란히 나타났다. 이 센터가 개발한 ‘동아일보 코퍼스(말뭉치)’ 분석 시스템은 1946∼2014년 발간된 동아일보 기사 260만 건(약 4억100만 어절) 전체를 분석할 수 있다.○ 문화재에서 소비재 된 명품 ‘명품(名品) 브랜드’, ‘명품 가방’…. 신문지상에서 명품이란 단어가 등장한 건 1970, 80년대다. 당시까지만 해도 지금처럼 고급 럭셔리 제품이 아니라 박물관, 전시회, 청자 등 문화재와 관련된 단어들과 함께 쓰였다. “명품을 갖고 있는 수장자들은 특별한 일이 아니면 물건을 팔려고 내놓지 않아 일반 사람들은 박물관이나 미술관 아니면 구경조차 할 수가 없다.”(동아일보 1985년 3월 2일) “고려청자의 빼어난 명품들을 한자리에 모은 ‘고려청자 명품전’.”(1985년 10월 15일) 최종택 고려대 문화유산융합학부 교수는 “1980년대는 발굴조사가 전국적으로 펼쳐지면서 각종 국보·보물급 문화재가 출토돼 문화재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던 시기”라고 말했다. 명품이 백화점, 시계, 패션 등의 단어와 함께 쓰이기 시작한 건 1990년대 이후다. 2000년대에는 브랜드, 매장, 제품 등 ‘고급 소비재’를 지칭하는 말로 자리를 잡았다. 짝퉁 명품 밀수 단속 기사가 자주 등장하는가 하면 “샤넬 디오르 루이뷔통 프라다 페라가모 등 국내에서 ‘명품’으로 불리는 유명 해외 브랜드를 영어로 표현하면 럭셔리 혹은 프레스티지다”(2000년 1월 21일)처럼 명품의 정의를 소개하는 기사도 나왔다. ○ 혹한에서 폭염으로 요즘 냉방권이 기본권으로 등장할 만큼 더운 한국이지만 더위보다 추위가 큰 문제였던 시절도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1960년대 “새해에 접어들어 십육 일째 계속되는 강설과 십삼 년래의 혹한으로 대부분 교통망이 두절돼”(1963년 1월 17일) “폭풍설 몰고 혹한 엄습―전선엔 영하 29도”(1965년 1월 11일) 같은 기사들이 사회면 헤드라인을 장식했다. 1950년대 주요 키워드의 하나로 ‘동장군’이 꼽히기도 했다. 실제 1940∼1980년대까지는 기사에서 ‘혹한’이 사용된 빈도가 높다. 그러나 1990년대 이후 역전돼 ‘폭염’이 더 많아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폭염’은 기록적 무더위를 맞은 1977, 1994, 2012년 사용이 급증했다. “35년래의 폭염이 밀어닥친 7월의 마지막 주말, 전국은 온통 용광로처럼 들끓어 올랐다.”(1977년 8월 1일)○ ‘공매’→‘학과’→‘게임’ 인기 이동 ‘인기’와 함께 쓰인 단어는 시대에 따라 어떻게 변했을까. 예나 지금이나 ‘배우’ ‘가수’ ‘영화’ 등 대중문화의 주인공들이 상위를 차지했다. 하지만 1950년대에는 ‘비료 공매(公賣)에 최고 인기’(1958년 4월 30일) 기사처럼 ‘공매’도 한 문장에서 ‘인기’와 함께 자주 사용됐다. 1980년대 인기와 가장 관련된 단어는 ‘학과’였다. 1981년 대입 전형 방식이 본고사에서 학력고사로 바뀌며 선시험 후지원 방식이 도입됐기 때문이다. “지난 1월 대학 지원에서 치열한 눈치작전이 벌어졌고 끝내는 ‘일류대 인기학과 미달’이라는 기현상이 빚어지고 말았다”(1981년 5월 25일)는 보도는 당시 현실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설동훈 전북대 사회학과 교수는 “산업화가 진전되며 취업이 비교적 유리한 상경계열, 공학계열 학과를 선호하던 현상도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1990년대 이후부턴 정보기술(IT)의 발달과 함께 급격히 성장한 ‘게임’이 인기와 자주 쌍을 이뤘다.○ 여전히 입시 지옥 중인 대한민국 1950년대부터 2010년대까지 ‘지옥’은 내내 ‘입시’와 함께했다. 1960년대 ‘입시 지옥’은 대학 입시보다는 중학 입시 관련 단어와 함께 쓰인 경우가 많았다. 1970년대에는 대중교통 관련 ‘승차’가 지옥과 높은 빈도로 자주 쓰였다. 1980년대까지 ‘팀장’이라는 단어의 사용 빈도는 ‘0’에 가까웠다. 2000년대 급증한 ‘팀장’은 2010년대에는 ‘과장’을 추월했고, ‘부장’과의 간격도 좁혔다. 과장과 팀장이 2000년대 각각 어떤 업무 관련 단어와 함께 자주 언급됐는지 살펴보면 정책, 행정, 지원 등은 ‘과장’이 주로 맡았다. 전략, 투자, 마케팅, 홍보, 분석 등은 ‘팀장’이 맡았다. 스포츠에서 ‘씨름’은 1980년대 평균적으로 ‘골프’보다 기사에서 더 자주 언급됐지만 1988년을 기점으로 역전된다. 1995년 무렵부터 급증한 골프의 사용 빈도는 1998년 이후 박세리가 미국여자프로골프(LPGA)에서 잇달아 우승하며 정점을 찍었다.유원모 onemore@donga.com·조종엽 기자 ▼ 외환위기땐 ‘소주’, 2002 월드컵땐 ‘맥주’ ▼정말 맥주는 기쁨의 술, 소주는 슬픔의 술이었을까. 신문에 자주 실린 주류들을 비교하면 실제 관련성이 보인다. 대형 스포츠 이벤트가 있을 때 소비량이 는다는 속설처럼 올림픽, 월드컵 때 맥주는 신문에 가장 많이 언급됐다. 2002년이 최고치다. ‘서민의 술’ 소주는 외환위기를 겪던 1990년대 후반 언급이 급격하게 늘었다. 동아일보는 “국제통화기금(IMF) 체제 이후 소비 부문에서 가장 두드러진 현상은 단연 저가 품목의 선호 경향이다. 주류시장도 맥주 위스키 시장 우위에서 소주의 약진 형태로 변모하고 있다”(1999년 1월 25일)고 보도했다. 사실 맥주는 1950년대 이후 신문에 가장 많이 언급된 주류다. ‘가짜 맥주’를 만들던 일당이 경찰에 붙잡히거나 1970년대 ‘한독맥주’의 주식 위조사건 등 사회 문제와 관련됐기 때문이기도 하다. 막걸리는 1980∼2000년대에 별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다가 2010년 ‘막걸리 붐’을 타고 다른 주류를 압도하면서 반짝 최고치를 찍은 후 다음 해부터 다시 빈도가 줄어들었다. 외식은 어떨까. 불고기는 1960, 70년대 부동의 1위였다. 1980, 90년대 들어 불고기를 추월한 햄버거와 피자는 인스턴트 음식에 대한 경각심이 높아지면서 2010년대 빈도가 하락했다. ‘서민 음식’ 삼겹살은 1990년대가 돼서야 빈도가 늘기 시작했다. 전형주 장안대 식품영양학과 교수는 “무역 자유화로 외국산 식품들이 들어오면서 가격이 낮아졌고 고기 전문점도 이때 많이 생겨났다”고 분석했다. 유행은 돌고 도는 듯하다. ‘미니스커트’의 빈도는 가수 윤복희가 미니스커트를 입고 나타나 신드롬을 일으킨 1967, 1968년이 최고치였다. 이후 1992, 1997, 2003, 2007, 2012년 등 약 5년 주기로 언급이 많아지는 현상이 반복됐다. ‘나팔바지’도 1993년 언급이 늘어난 뒤 비슷한 주기로 등락을 되풀이했다.신규진 기자 newjin@donga.com}

담백한 흰색 외벽은 소박한 한국인의 모습을 보는 듯 하다. 하지만 내부로 들어가기 위해 세 번이나 꺾여 돌아가는 진입계단을 거치면 긴장감이 점점 높아진다. 성당 내부는 신자 누구나 제단과 가깝게 느끼도록 타원형으로 설계돼 포근한 느낌을 준다. 이 곳은 6일 문화재로 등록된 경북 칠곡군 왜관성당(등록문화재 제727호)이다. 경북 김천시 평화성당, 충북 제천시 의림동성당, 전북 전주시 복자성당까지. 소박하면서도 뛰어난 건축미를 자랑하는 이들 성당에는 공통점이 있다. 독일 출신 알빈 슈미트 신부(1904~1978)가 설계했다는 것이다. 알빈 신부의 타계 40주년을 맞아 한국에서 그가 남긴 건축 유산에 대한 재조명이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다. 지난달 19일부터 독일 뮌스터슈바르작 수도원에서 ‘알빈 신부 특별전’이 3개월간 일정으로 열리고 있고, 그의 작품 세계를 조명한 책 ‘교회건축가 알빈 슈미트’가 최근 독일어로 번역돼 출간됐다. 이 책을 쓴 김정신 단국대 명예교수는 “알빈 신부는 유럽의 모더니즘 건축 양식을 한국 성당에 도입했을 뿐 아니라 화려함을 배제하고 조화로움을 중시한 한국 성당 건축의 모범을 만들어낸 인물”이라고 설명했다. 알빈 신부가 우리나라와 인연을 맺은 것은 1937년 한국선교사로 부임하면서부터다. 일제강점기였던 당시 한국인이 많이 이주해 있던 만주 북간도의 옌지(延吉)교구에 파견됐다. 그러나 1945년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중국이 공산화되면서 1946년 투옥된다. 1949년 독일로 추방된 그는 교회건축가로 본격적으로 변신한다. 당시 독일 사회는 전후 복구 과정에서 3000여 개에 이르는 성당을 재건하면서 현대 종교건축 이론과 시공 기술이 폭발적으로 성장한 시기였다. 이후 알빈 신부는 1958년 경북 김천시 평화성당 설계를 시작으로 20년간 한국 성당 건축의 중흥을 이끈다. 1959년 설계한 경북 문경시 점촌동성당은 외부의 사각기둥이 주상절리처럼 곧게 뻗어 있어 독특한 조형미를 지닌다. 내부 공간은 부채꼴 모양으로 만들어 공간 활용을 극대화함으로써 한국적 상황에 잘 맞는 성당 건축물로 평가받고 있다. 1978년까지 20년 동안 알빈 신부는 122개소의 성당(작은 예배실인 경당, 신부가 상주하지 않는 소규모 성당인 공소 포함)을 포함해 무려 185개소의 건축물을 설계했다. 김 명예교수는 “알빈 신부는 한 건물 당 10~15장의 도면을 남겼는데, 그의 도면에는 시공이 가능하도록 기록한 ㎜단위의 치수와 성물들의 제작방법을 설명하는 내용이 고스란히 담겼다”며 “알빈 신부와 협력했던 수사들에 따르면 그의 도면은 별도의 추가 지시 없이 공사가 가능할 정도였다고 한다”고 밝혔다. 알빈 신부의 성당들은 토목공사를 최소화하고, 주변 대지와 조화를 이뤘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교회에서는 거룩함과 세속적인 것, 영원함과 무상함이 함께 만나기 때문에 다양한 요구에 대응할 수 있어야 한다”는 그의 철학을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는 것. 특히 건물 외관보다는 내부공간을 강조했는데 제대와 신자들이 자리하는 회중석을 최대한 가깝게 해 누구나 미사에 능동적이고 편안하게 참여할 수 있도록 했다. 김 명예교수는 “50년이 넘는 성당들이지만 현재도 생활하는데 전혀 불편함이 없을 정도로 아름다움과 기능적인 요소를 모두 담은 뛰어난 건축물들이다”고 말했다. 유원모 기자 onemore@donga.com}

백범 김구(1876∼1949)가 서거하기 3개월 전 동료 독립운동가 후손에게 남긴 친필휘호 ‘광명정대(光明正大)’(사진)가 고국의 품으로 돌아왔다. 문화재청은 김구가 1949년 쓴 ‘광명정대’ 글씨를 독립운동가 김형진(1861∼1898)의 후손으로부터 기증받아 5일 국립고궁박물관으로 인도했다고 13일 밝혔다. 김형진은 1895년 김구와 함께 무력으로 일제를 격퇴할 것을 결의하고, 중국 선양(瀋陽)에 원조를 요청하기 위해 동행한 인물이다. 1896년에는 의병 활동에 가담하기도 했다. 그러나 1898년 동학의 접주(接主·동학 교단 조직인 접의 책임자)로 활동하다 체포돼 일제의 고문 끝에 생을 마감했다. 1990년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김구는 광복 후 김형진의 유족들을 자주 보살폈다. 서거하던 해인 1949년 3월 26일 안중근 의사 순국 39주년을 기념해 김형진의 손자 김용식에게 ‘광명정대’를 써서 선물했다. ‘광명정대’는 언행이 떳떳하고 정당하다는 의미다. 이후 1960년대에 김용식의 6촌 동생인 김태식 씨에게 전달됐고, 김 씨는 1973년 이를 가지고 미국 이민을 떠났다. 올해 4월 김 씨는 2021년 개관 예정인 ‘국립 대한민국 임시정부기념관’에 ‘광명정대’를 전달해 줄 것을 요청하며 주시애틀 대한민국총영사관을 통해 정부에 무상기증 의사를 밝혔다. 글씨에는 ‘광명정대’ 네 글자와 선물 받은 김용식의 이름, 작성 일자가 적혀 있다. 크기는 가로세로 40×110cm로, 백범의 인장 2점(金九之印, 白凡)이 찍혀 있다. 문화재청은 “‘광명정대’가 지금까지 알려진 바 없었던 백범의 휘호여서 그 희소가치가 클 뿐 아니라 필체에서도 백범의 기백이 잘 드러나 있다”고 설명했다. 문화재청은 기증자의 뜻에 따라 2021년 개관하는 ‘국립 대한민국 임시정부기념관’에서 ‘광명정대’를 관리하도록 할 계획이다.유원모 기자 onemore@donga.com}

국내에 현존하는 태극기 가운데 가장 오래된 ‘데니 태극기’(등록문화재 제382호)가 제73주년 광복절을 맞아 특별 공개된다. 국립중앙박물관은 조선 26대 왕 고종이 자신의 외교고문을 지낸 미국인 오언 데니(1838∼1900·사진)에게 1890년 선물한 것으로 알려진 ‘데니 태극기’를 13일부터 19일까지 상설전시실 1층 대한제국실에서 선보인다고 10일 밝혔다. 데니는 청나라의 이홍장(1823∼1901)의 추천을 받아 1886년 고종의 외교고문으로 임명됐다. 당시 청은 위안스카이(袁世凱)를 조선 주재 총리로 보내면서 노골적으로 내정에 간섭했고, 고종의 폐위까지 획책하기도 했다. 위태로운 조선을 지켜본 데니는 청의 의도와 달리 고종의 자주외교 정책을 적극 지지하며 조선을 위해 외교적 역량을 발휘했다. 데니는 1887년 고종이 수교를 맺은 각국에 외교사절을 파견하도록 도운 것을 비롯해 1888년에는 주한 러시아공사 베베르와 함께 러시아가 조선 정부와 한로수호통상조약을 맺도록 적극 주선하며 한국 측 대표의 한 사람으로 조약 문서에 서명까지 했다. 청나라에 미운털이 박힌 그는 1890년 외교고문직을 박탈당하게 됐다. 이에 고종이 자신의 마음을 담아 내린 선물이 이번에 특별 공개하는 태극기다. 크기는 가로세로 263×180cm로, 흰색 광목 두 폭을 이어 만들었다. 태극은 붉은색과 푸른색 천을 오려 바느질했고, 사괘는 지금과 유사한 모양이다. 데니의 후손이 보관하던 태극기는 1981년 한국에 돌아와 국립중앙박물관 소장품이 됐고, 2008년 광복절을 앞두고 문화재로 등록됐다. 미국으로 돌아간 데니는 조선에서의 체험을 기록한 ‘청한론(淸韓論)’을 저술했다. 이 책은 근대 국제법 이론을 근거로 조선이 청에 속한다는 속방론을 부정하고, 청이 조선에 저지른 횡포를 신랄하게 기술해 근대사 연구에 귀중한 사료로 평가받고 있다. 한편 이번 특별 공개에서는 미국인 목사 윌리엄 아서 노블(1866∼1945)이 소장한 태극기와 1900년 프랑스 파리 만국박람회에 마련된 대한제국 전시관 모습을 소개한 일간지도 함께 전시한다. 유원모 기자 onemore@donga.com}

일제가 저지른 태평양전쟁은 당시 식민 지배를 받고 있던 우리나라뿐 아니라 일본의 청년들에게도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이 책은 명분 없는 전쟁에 강제로 동원돼 허망한 죽음을 눈앞에 둔 청년들이 직접 쓴 유고를 모았다. 한 학도병은 “정부여, 일본이 지금 수행하는 전쟁은 승산이 있어서 하는 것인가. 언제나 막연한 승리를 위해 무리에 가까운 조건을 붙이고 있는 건 아닌가”라며 전쟁의 허무함을 꼬집는다. 다른 청년은 “혼이 되어 부모님에게 효양을 다하겠다고 다짐합니다. 부모님, 누님, 동생들이여, 부디 울지 말아주세요”라며 가족을 향한 사랑을 고백한다. 당대 일본 청년들이 느낀 공포와 체념, 전쟁과 군부에 대한 증오, 가족과 연인에 대한 절절한 사랑이 담겨 있다. 1949년 일본 현지에서 처음 출간됐을 당시 200만 권 넘게 팔렸고, 바다의 신을 뜻하는 ‘와다쓰미’란 단어는 전몰학생이란 의미로 통용되면서 일본의 반전·평화 운동에 큰 영향을 미쳤다. 유원모 기자 onemore@donga.com}

사찰에 들어서면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목탑인 팔상전(국보 제55호)이 반긴다. 전남 화순군 쌍봉사 3층 목탑이 1988년 화재로 소실되면서 유일하게 현존하는 우리나라 전통 목탑이다. 이날 동행한 정병삼 숙명여대 역사문화학과 교수는 “우리나라 전통 탑은 화강암이 풍부한 특성 때문에 대부분 석탑이라는 점에서 팔상전은 매우 희귀한 문화유산이다”라고 설명했다. 5층인 팔상전 추녀 끝에는 물고기 모양의 풍경(종)이 달려 있다. 바람에 맞춰 화음을 내는 풍경소리가 그윽하다. 팔상전 내부에는 잉태부터 출가, 해탈 등 석가모니의 생애 중요 장면을 8개 그림으로 묘사한 팔상도가 있다. 팔상전에서 서쪽으로 걸음을 옮기면 높이 33m의 금동미륵대불을 만날 수 있다. 금빛의 화려한 모습이지만 굴곡진 역사가 담겨 있다. 애초 금동미륵불상이 신라부터 조선 후기까지 자리를 지키고 있었지만 흥선대원군이 경복궁 중건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이 불상을 징발하면서 사라졌다. 이후 1950년대 시멘트로 불상을 만들었고, 1990년대 다시 청동불로 세운 것을 2002년 순금으로 덧씌우면서 현재의 모습이 됐다. 법주사에는 금동미륵대불처럼 웅장한 규모의 조형·건축물이 많다. 사찰로 들어서기 위해 거쳐야 하는 사천왕문은 국내에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한다. 대웅보전(보물 제915호)은 높이가 20m에 이른다. 이런 모습은 임진왜란의 상처에서 비롯됐다. 원래 법주사는 조선 중기까지 왕실의 지원 등을 받아 60여 동의 건물을 갖출 정도로 번성했다. 그러나 임진왜란으로 대부분 건물이 사라지는 등 황폐해졌다. 전쟁이 끝난 후 당시 조선 불교를 이끌던 벽암 각성 스님(1575∼1660)의 주도하에 법주사는 전후 사찰 중건의 시범 사례가 됐다. 그 덕분에 각종 지원과 우수 인력이 집중적으로 투입돼 현재 국보 3점을 비롯해 보물 12점 등 각종 문화유산이 가득한 산사로 거듭날 수 있었다. 아름다운 공예 작품도 가득하다. 대웅보전 앞에 자리한 쌍사자석등(국보 제5호)은 사자 두 마리가 마주 서서 뒷발로 석등을 떠받치고 있는 등 독특한 조형미를 자랑한다. 법주사 서편의 마애여래의좌상(보물 제216호)을 빼놓으면 아쉽다. 암벽에 조각돼 있는 불상으로, 두툼한 입술과 반듯한 어깨 등 정갈한 형태로 부처가 연꽃에 앉아 있는 모습을 형상화했다. 이 좌상 옆에는 법주사 창건 설화의 주인공인 의신조사가 불경을 실어오는 모습 등을 그려 넣은 조그마한 암각화가 새겨져 있다. 속리산 기슭에 위치한 법주사 일대는 1970년대까지 인기 있는 신혼 여행지 중 하나였다. 지금도 법주사 초입에는 수십 년 전통을 가진 식당들이 가득하다. 이달부터는 법주사와 대청호반에 있는 옛 대통령 별장인 청남대를 함께 방문하면 입장료 할인을 받을 수 있다. 대청호반에서부터 법주사까지 이어지는 약 50km의 드라이브 코스도 아름답다.보은=유원모 기자 onemore@donga.com}

일제강점기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감옥인 서대문형무소에는 유관순과 안창호 등 독립운동가 약 9만 명이 수감돼 고초를 겪었다. 일제는 이들의 수형 기간이 끝나더라도 ‘요시찰 인물’로 분류하며 끝까지 감시의 끈을 놓지 않았다. 문화재청은 이처럼 일제가 항일 독립운동가들을 감시하려 작성했던 ‘일제 주요감시대상 인물카드’를 문화재로 등록 예고한다고 7일 밝혔다. 이 카드에는 안창호 유관순 윤봉길 이봉창 한용운 등 조선총독부 감시 대상이던 4858명의 사진과 개인정보가 담겨 있다. 카드에서 죄명이 확인되는 4630명 가운데 87.7%인 4062명이 치안유지법, 보안법, 출판법 등을 위반한 이른바 ‘사상범’이었다. 1910년대부터 1940년대까지 당시 경성을 관할하던 경기도경찰부 등 일제 경찰과 서대문형무소 등에서 작성한 것으로 추정된다. 가로세로 15×10cm 크기로 당시 경찰관서에서 휴대용으로 열람할 수 있도록 만든 것으로 학계에선 보고 있다. 광복 뒤엔 내무부 치안본부에서 관리해오다 1980년대부터 국사편찬위원회에서 보관해왔다. 이 카드를 검토한 박찬승 한양대 사학과 교수는 “사진의 보존 원판 번호를 볼 때 카드로 작성된 인물은 7만5000명 이상일 것으로 보인다”며 “한국독립운동사 연구와 독립운동 유공자 포상심사 등에서 매우 중요하게 활용할 수 있는 원천 자료”라고 설명했다. 카드에는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독립운동가들의 얼굴 사진이 다수 부착돼 있다. 안창호는 1932년 윤봉길 의사의 훙커우공원 의거 뒤 일제 경찰에 붙잡혀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 시절의 사진이 있다. 1920년대 촬영한 말끔한 신사의 모습이 아니라 피골이 상접한 얼굴로, 심한 고문을 당한 독립투사의 현실이 그대로 묻어난다. 항일 독립운동단체 의열단의 초기 활동 모습도 확인할 수 있다. 단원이던 정이소의 인물카드에는 김원봉을 포함한 의열단의 단체 사진이 수록돼 있다. 1920년 3월 중국 상하이의 프랑스 조계지역(치외법권지역)에서 촬영한 것으로 추정되며, 초기 의열단의 유일한 사진으로 전해진다. 당시 항일 보도로 일제의 탄압에 시달린 동아일보 기자와 경영진도 대거 등장한다. 주필과 사장 등을 역임한 송진우(1890∼1945)와 편집국장을 지낸 홍명희(1888∼1968)를 비롯해 1919년 3·1운동 당시 기독교 대표이자 동아일보 제4대 사장을 지낸 남강 이승훈(1864∼1930), 중국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 동아일보 통신원을 지낸 여운형(1886∼1947) 등 10여 명에 이른다. 카드에는 15세 학생부터 72세 노인까지 다양한 연령대의 인물들이 수록돼 있다. 직업 역시 학생, 언론인, 마차꾼, 농부 등으로 전 국민이 일제의 감시에 놓여 있었다. 박경목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장은 “인물카드에 등장하는 직업만 70여 개로, 독립운동이 일부 계층에 국한되지 않고 범국민적인 차원에서 이뤄졌다는 점을 증명한다”고 말했다. 문화재청은 30일간의 등록 예고 기간 중 의견을 수렴하고, 문화재위원회 심의를 거쳐 문화재로 최종 등록할 예정이다. 유원모 기자 onemore@donga.com}

1323년 6월 도자기 2만 점과 동전 약 28t 등을 실은 무역선이 중국 경원(慶元·현재 저장성 닝보)에서 일본 하카타(博多·후쿠오카)로 떠났다. 하지만 항로를 벗어난 배는 전남 신안군 앞바다에 침몰했다. 1975년 8월, 한 어부의 그물에 청자 꽃병이 걸려 올라오면서 난파선은 652년 만에 잠에서 깨어났다. 우리나라 수중고고학의 출발을 알린 ‘신안선’이다.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최근 신안선에서 발견한 ‘흑유자(黑釉瓷)’ 180점을 선보이는 이색적인 전시회를 열었다. 흑유자는 차(茶) 문화가 성행한 중국 송나라 때 유행했다. 서양에서 거품을 얹은 카푸치노가 유행한 것처럼, 당시 동아시아에서도 거품을 일으킨 차가 인기를 끌었다. 이에 하얀색 거품 색깔이 돋보이는 검은색 찻잔을 애용했다. 흑유자는 황실이나 귀족이 주로 이용해 공예 수준이 높은 게 특징. 이번 전시에는 섭씨 1300도 고온에서 철 무늬가 흘러내리며 만들어진 토끼털 무늬 장식 흑유자와 불교 선종(禪宗) 사상을 형상화한 치자 꽃무늬 도자기 등을 공개한다. 김영미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사는 “신안선 흑유자를 통해 거품을 내어 차를 마시는 점다(點茶) 방식에서 찻잎을 끓이거나 우리는 포다(泡茶)로 변해가는 동아시아 차 문화의 변천사도 알 수 있다”고 설명했다. 유원모 기자 onemore@donga.com}

흔히 사전이라고 하면 책상이나 책장, 혹은 컴퓨터 안에 처음부터 존재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사전 역시 누군가가 연구해 직접 쓴 책이다. 그중에서도 세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사전으로 평가받는 ‘옥스퍼드 영어 사전(OED)’. 이 사전을 37년간 만들어온 저자가 탄생과 생존, 소멸까지 사전 속 단어의 역사를 풀어낸다. ‘역사 사전’이라 불리는 옥스퍼드 사전은 단순한 단어의 의미를 넘어 역사적인 발달 순서와 상세한 용법을 담기로 유명하다. 1884년 1권을 시작으로 1928년 12권을 출간하며 초판을 완간한 뒤 지속적인 개정·증보 작업을 이어왔다. 현재는 2만1728쪽, 60만여 어휘를 담고 있다. 저자는 1976년 옥스퍼드대 출판사 사전부에 입사해 20여 년을 편집장으로 재직하며 사전의 3판 발행과 온라인판 출간을 이끌었다. ‘단어 탐정’은 탐정처럼 단어를 수집해가는 사전 편집자의 흥미로운 세계가 그려진다. 슈퍼마켓에서 이국적인 제품을 마주쳤을 때 시민들은 시험 삼아 구입해볼 것이다. 그러나 저자는 슈퍼 관리자에게 식품의 목록을 요청하고, 각 제품의 역사와 유통 경로를 파악한다. 할루미(halloumi·키프로스의 양젖 치즈)와 세미프레도(semifreddo·반쯤 얼린 아이스크림) 등을 사전에 등재한 배경이다. 단어의 탄생을 추적하는 모습은 한 편의 흥미로운 역사서를 보는 듯하다. 대형 버스를 뜻하는 영단어 ‘juggernaut’는 17세기 인도로 건너간 영국인의 이색적인 경험에서 유래했다. 당시 인도 벵골만 근처에선 힌두교 신인 ‘비슈누’ 동상을 거대한 수레에 태워 옮기는 축제가 유행했다. 4층 건물 높이의 압도적인 동상 규모에 놀란 영국인들이 비슈누의 힌두어 이름인 ‘Jagannath’에서 따와 도로를 지나는 대형 수레를 juggernaut라고 부른 것이다. 옥스퍼드 사전에 따르면 형용사 ‘inviting’은 ‘초대하는’이라는 뜻과 함께 ‘유혹적’ ‘매력적’이라는 의미도 있다고 한다. 이 책은 사전적 정의처럼 영어 단어 역사의 매력적인 현장으로 독자를 초대한다. 유원모 기자 onemore@donga.com}